“이런 우연이 있네요. 901호에 두 분이 살고 계실 줄은 몰랐는데.”한성우가 음식 냄새를 맡더니 눈을 반짝였다. “형수님께서 직접 하셨어요?”유현진이 말했다. “제가 아니라, 미주가 한 거예요.”유현진은 의아했다. ‘성우 씨와 왜 여기로 이사를 온 거지?’며칠 전 아파트 관리소에서 입주자 정보를 확인할 때, 유현진은 그제야 그들이 살고 있는 집의 집주인이 송민준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녀는 매니저 이준에게 떠보듯 물었었다. 이준은 회사에서 연예인에게 마련해준 집은 현재까지는 전부 송민준의 명의로 되어있다고 말했다. 회사가 설립된 지 얼마 되지 않은 상황이라 그렇게 하는 것이 제일 편리하다고 했다. 그리고 이준은 또 그녀의 위아래 층은 모두 회사 소유라고 했고 때가 되면 다른 연예인들에게 배정되거나 인플루언서에게 임대를 주어 월세라도 벌 계획이라고 했다. 이준의 말을 들은 유현진은 더 이상 묻지 않았다. 요 며칠 동안 902호에 사람들이 드나들면서 요란스럽게 구는 바람에, 유현진은 회사에서 신인에게 집을 배정해 주어 이사 중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생각지도 못하게 이사를 온 사람은 한성우였다. 이런 우연은, 너무도 우연히 일어나 오히려 억지스러웠다. 한성우는 이 모든 음식을 차미주가 만들었다는 말에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홈그라운드를 격투장에서 주방으로 바꾼 거야?”차미주가 콧방귀를 뀌었다. “난 뭐든 다 잘하는 사람이야. 대본을 쓰는 것도 사람을 박살 내는 것도 전부 내 전공이지.”한성우가 웃음을 참지 못했다. 당당한 표정을 짓는 차미주를 보는 한성우의 마음이 간질간질해졌다. 마치 길가에서 털이 복실복실한 반려동물을 보면 저도 모르고 장난을 치고 싶어지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어떻게 박살 내는데?”차미주가 손날을 들어 올려 한성우의 어깨를 찍었다. “이렇게.”한성우: ...“여기서 더 할 일 없으면 빨리 가.”차미주가 사람을 내쫓기 시작했다. 식탁 위의 반찬 향이 솔솔 올라오자 한성우가 배고픔에
유현진은 머리가 아파져 왔다.그를 쫓아내기엔 하현주가 입원을 하게 되었을 때 한성우는 그녀를 많이 도와주었기에 그녀는 싫은 소리를 할 수 없었다.그를 안 쫓아내기엔 한성우와 사이가 그다지 좋지 않은 차미주가 마음에 걸렸기에 그녀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었다.한성우는 온 주방을 다 뒤져보았지만, 수저를 발견하지 못하였다.그는 다시 식탁으로 걸어오더니 믿기지 않는다는 얼굴로 물었다.“설마 그릇도 네 개뿐이에요?”유현진이 답했다.“저희가 이사 온 지 얼마 안 됐거든요. 그래서 아직 물건들을 채워 넣지 못했어요.”집에는 두 사람의 국그릇과 밥그릇만 있었고 다른 여분의 그릇은 없었다.차미주가 웃으면서 말했다.“집에 나랑 현진이만 같이 살고 있는데 굳이 그릇을 많이 사둬서 뭐 해?”차미주는 잠시 생각하더니 이내 눈웃음을 지으면서 말했다.“넌 그냥 손으로 집어 먹어. 넌 어차피 뻔뻔하니까 피부도 두꺼울 거 아냐. 어차피 넌 데이지 않을 거야.”한성우의 입꼬리가 미묘하게 떨려왔다.“난 딱히 상관없어. 그런데 말이야, 만약 내가 손으로 집어 먹으면 네가 먹을 수나 있고?”차미주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됐어, 내가 그냥 사람 시켜서 그릇을 배달해 오라고 할게.”그는 휴대전화를 꺼내 들더니 이내 누군가에게 연락했다.“그릇과 수저 세트 지금 당장 가져다줘. 난 지금 클라우드 아파트 7동 901호에 있어. 밥이 식기 전에 얼른 가져와. 나 배고프니까.”그는 자신이 할 말만 하고 전화를 끊어버렸다. 그리고 그는 미소를 지으며 두 사람에게 말했다.“절 기다리지 말고 먼저 드세요.”유현진과 차미주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저 개자식이 올 줄 알았다면 음식에 미리 설사약이라도 타둘걸!”한성우의 말에 유현진은 젓가락을 차마 들 수가 없었다.주인은 식사를 하고 손님은 옆에 모시고 지켜보게 하는 도리가 어디 있겠는가.그녀는 몸을 일으키면서 말했다.“그럼 제가 과일이라도 깎아 드릴게요.”한성우는 전혀 눈치를 보지 않고 말했다.“형수님,
강한서는 멍한 표정을 지었다.이것은 그가 두 번째로 그녀가 맡은 역할에 놀라움을 느끼고 있는 것이었다.그가 첫 번째로 놀라움을 느낀 것은 바로 “법역”이라는 작품 속에서 그녀가 맡은 시체에 집착하는 사이코 역할이었다.유현진이 카메라를 응시하고 있었을 땐 그녀에게서 후광이 보였다.아무리 그녀의 얼굴이 익숙하다 하지만 그녀가 카메라를 보며 연기를 할 땐 그에게 그녀가 바로 사이코라는 느낌을 주었다.다른 사람 눈엔 그녀는 마치 먼지 속에 가려진 야명주 같아 먼지만 제거하면 밝게 빛이 나는 사람이기도 했다.하지만 강한서의 눈엔 그녀는 먼지 속에 가려진 적이 없었고 다만 그 빛은 그에게 가려져 혼자만 봤던 것이었다.그러나 어두우면 어두울수록 야명주의 빛은 더욱 밝게 빛나기에 그녀는 애초에 사람들의 선망의 눈빛을 받아야 할 사람이었다.그는 애초에 그 빛을 가릴 수가 없었다.과일을 깎아 접시에 담아 나오던 유현진은 주방에 있는 사람들을 보더니 이내 눈썹을 꿈틀거렸다.강한서와 한성우, 그리고 차미주는 이미 식탁에 앉아있었다.아무런 표정이 없는 강한서, 그리고 서로 눈빛을 주고받으며 신경전을 벌이고 있는 한성우와 차미주에 주방의 분위기는 아주 이상하게 흘러가고 있었다.유현진이 나오자마자 그 이상한 분위기는 깨져버렸다.한성우가 눈치를 살피더니 이내 유현진의 손에 든 접시를 받아들면서 말했다.“아이고 형수님, 수고하셨어요. 얼른 앉으세요. 밥이 다 식겠네요.”“형수님, 한서도 오늘 저와 같이 이사를 도와주겠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오는 김에 제가 수저도 가지고 오라고 했죠. 온 하루 바쁘게 일만 해서 밥도 제대로 못 먹었다기에 제가 같이 먹자고 했는데, 괜찮죠?”“당연히 괜찮죠. 모르는 사이도 아니잖아요. 그렇죠, 강 대표님?”유현진은 미소를 지으며 말하긴 했지만, 속으로는 욕을 하고 있었다.그녀는 역시 한성우를 만만하게 봐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한성우는 강한서의 옆에 찰싹 붙어있는 연애 고수였고 그녀와 강한서의 사이를 이어주려고 했다.
두 사람은 심지어 전통 쑥떡과 쑥인절미 파로 나뉘어 논쟁을 벌이고 있었다.한성우는 남부 지방 사람이었기에 전통 쑥떡을 선호하고 있었고 차미주는 북부 지방의 사람이었기에 당연히 고소한 쑥인절미를 더 선호하고 있었다.그들의 논쟁은 차미주의 말에 의해 일이 커져 버렸다.“내가 내일 당장 너에게 쑥인절미 만들어 줄 테니까 누구의 말이 맞는지 한번 해 봐!”한성우가 입꼬리를 올리더니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그래, 어디 한번 해보자고, 누구의 말이 맞는지!”차미주는 잔뜩 비장한 얼굴로 답했다.“너 딱 기다려!”그리고 그녀는 이내 주방으로 들어가 쑥과 인절미 가루를 준비해 두었다. 그녀는 쑥인절미로 한성우를 굴복시킬 생각이었다.유현진은 한성우의 흥미로워 보이는 표정에 차미주가 마치 그가 파놓은 함정에 빠진 것 같았다.그들은 식탁 위에 있던 음식들을 깨끗하게 비웠다.사실 강한서는 별로 먹지도 못했다. 그녀도 강한서가 있으니 음식을 많이 먹지 않았고 차미주도 음식을 별로 먹지 않았다. 오직 대식가였던 한성우만이 음식을 잔뜩 먹었다.그는 말다툼하면서 오리백숙 절반을 혼자서 다 먹어버렸다.배불리 먹은 그가 먼저 그릇을 치우면서 말했다.“제가 할게요.”유현진이 그런 그에게 말했다.한성우도 사양하지 않고 거실로 가서 차를 홀짝였다.강한서는 겉옷을 벗더니 이내 소매를 걷고 그녀를 도와 설거지를 하기 시작했다.그런 그의 행동에 유현진은 손을 거두었고 그의 소매를 잡아당기며 담담한 표정으로 말했다.“깨끗하게 씻어.”그녀는 그 말을 남기고 방으로 들어갔다.강한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가득 쌓인 그릇을 보니 머리가 지끈거리는 것 같았다.강한서는 어릴 때부터 곱게 자라 설거지를 해본 경험이 없었고 설거지 하나에 그의 와이셔츠와 바지, 그리고 땅엔 물이 가득 튀어 있었다.그는 주방에서 나왔다. 거실에선 한성우와 차미주가 휴대폰을 들고 같이 게임을 하고 있었다.“뭐냐? 벌써 노망났냐? 뭔 속도가 이렇게나 느려 터졌어!”차미주가 한성우에게 욕설을 날
유현진의 눈가가 떨려왔다.“그럼 난 제일 먼저 너부터 때려죽일 거야!”강한서는 피식 웃어 보이더니 이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네 명의로 돌린 그 집은 여기보다 더 커. 사람들을 시켜 청소해 두라고 할 테니까 거기 가서 살아.”유현진은 그를 밀쳐내며 말했다.“나를 스폰해 주려고? 전에 송민영을 스폰해 줬던 것처럼?”강한서는 미간을 찌푸렸다.“내가 언제 송민영을 스폰해 줬다고 그래?”유현진은 화가 나기 시작했다.“언론사에서 낸 기사를 아직도 모르는 사람 있어? 송민영의 스폰서가 당신이었잖아.”강한서는 눈썹을 꿈틀거리더니 이내 그 기사를 떠올린 듯하였다.그는 여전히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만약 내가 일거리 찾아준 것도 스폰에 속한다면 내가 그 사람의 스폰서가 맞는 거겠지. 하지만 난 절대 돈까지 쥐여주면서 스폰하지 않아. 난 그녀에게 일거리 말고는 아무것도 해주지 않았어.”유현진은 실소를 터뜨렸다.“그럼, 송민영이 도대체 어떻게 당신 아이를 임신한 건데? 무성 생식 기술이야?”강한서는 일그러진 표정으로 말했다.“내 아이를 임신했다고?”유현진은 자신의 인스타그램을 열어 송민영의 3개월 전 게시물을 보여주었다.그 게시물은 임신 진단서가 찍힌 사진이었다.“송민영 씨가 이 사진을 게시했을 땐 이미 임신 6주였어. 6주 전에 당신은 그녀와 그녀의 별정에서 사진 찍혔지. 비록 그 사진은 너무 흐릿해서 사람을 알아보기는 힘들었지만 난 당신이 먼지가 된다 해도 알아볼 수 있었어!”강한서는 미간을 찌푸리면서 그 사진을 빤히 쳐다보았다. 한참을 쳐다보던 그는 이내 자신의 인스타그램을 열고 송민영의 게시물을 뒤졌다.그러나 그가 그 게시물을 찾으려고 했을 땐 송민영의 게시물이 보이지 않았다.유현진도 그 점을 발견했다.그녀는 심지어 강한서가 송민영의 계정 알림을 꺼버렸다는 것도 발견했다.그녀는 헛웃음을 지으며 말했다.“하, 지금 나에게만 게시물을 공개한 거야?”강한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유현진도 순간 침묵하였다.곧이어 두 사람은
유현진은 살짝 집안을 치우더니 현관으로 달려가 문을 열어 주었다.송민준은 물건들을 바리바리 들고 있었고 그녀가 문을 열어 주자마자 다정한 눈빛으로 말했다.“식사는 하셨어요?”유현진이 답했다.“네, 방금 먹었거든요.”그녀의 시선은 그의 손으로 향했고 뜸을 들이며 말했다.“민준 오빠, 이게 다 ...”송민준은 머뭇거리며 말했다.“이틀 후면 단오잖아요. 그래서 회사에서 준비한 직원 명절 선물 세트에요. 원래는 현진 씨한테 직접 가져가라고 할 생각이었지만 제가 이따가 친구랑 술 약속이 있거든요. 그래서 약속 장소 가는 길에 그냥 가져다주려고 한 거예요.”“이렇게나 많아요?”그녀는 계약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아직 회사를 위해 일전 한 푼도 벌어다 주지 못했고 먼저 회사가 주는 직원 복지부터 받게 되었다.“제가 들게요.”유현진은 손을 뻗어 물건들을 받으려고 했다.송민준은 그런 그녀의 손길을 쓱 피하면서 말했다.“조금 많이 무거워요. 그냥 문이나 열어 주세요. 제가 안까지 들어다 드릴게요.”회사의 보스가 직접 그녀에게 물건을 전해주러 왔으니 유현진은 당연히 어찌할 바를 몰랐다.그녀는 자리를 슬쩍 비키며 말했다.“민준 오빠, 앞으로도 이런 일이 있으면 그냥 저를 불러주시면 돼요. 이렇게 직접 찾아올 필요 없어요.”순간 송민준은 생각했다.‘이런 수고는 아무것도 아닌데, 내가 원해서 오는 건데.’송민준은 그녀의 말에 대답했다.“그래요, 다음엔 현진 씨에게 연락하죠.”그가 집 안으로 들어오자마자 한성우와 차미주가 거실의 소파에 앉아 게임하고 있는 모습을 발견했다.순간 그는 멈칫하더니 이내 경계심이 가득한 눈빛으로 주위를 훑어보았다.강한서를 발견하지 못했지만, 테이블 위에 놓여 있는 커다란 꽃다발은 아주 뜬금없어 보였다.“한 대표가 여긴 어쩐 일이야?”한성우는 전에 자신이 눈여겨보고 있던 연예인을 빼앗아 간 송민준에게 심드렁한 어투로 답했다.“송 대표도 참 직원을 아끼네. 직접 선물 배달까지 해주는 거야? 왜? 밑에 쓸만한 직원은 없
송여우?송민준은 유현진의 안색을 살피더니 입술을 깨물며 말했다.“회사 직원이 계약한 거예요. 저도 몰랐어요.”차미주는 필터를 거치지 않은 말을 그대로 내뱉었다.“송 대표님의 회사도 참 저 개자식의 회사처럼 보는 안목이 없으시네요. 외모도 별로, 연기도 별로, 심지어 업무 능력마저 하나도 없는 송민영과 도대체 왜 계약을 한 거예요?”“도둑아, 송민영은 내가 키워낸 톱스타야. 지금도 송민영은 연예계 또래들 사이에서 톱스타라고. 너 톱스타가 뭔지는 알아? 송민영은 서 있기만 해도 돈을 벌어준다는 거야. 게다가 송민영은 자본가들이 톱스타 자리에 앉힌 게 아니라 사람들이 송민영을 톱스타로 만든 거라고.”“만약 사람들이 송민영 같은 타입을 선호하지 않았다면 내가 아무리 돈을 쏟아부어도 톱스타로 만들 수 없어. 우리 회사 매출도 송민영의 인기에 좌지우지해. 송민영이 불법적인 행동을 하지 않는 한 누가 돈을 찍어내는 인쇄기를 마다할 리 있겠냐?”차미주는 이를 갈며 말했다.“그냥 너희 자본가들의 취향이 변한 거야. 너희들의 취향으로 사람들에게 가스라이팅을 하는 거잖아. 그래 놓고 뭐? 대중들의 선택?”한성우는 반박하려 했지만, 그녀의 말도 맞는 말이라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차미주의 관점은 대중들 각도에서 한 말이었고, 특히 지나친 유행을 싫어하는 관점에서 한 말이었다. 반대로 그의 관점은 자본가의 각도에서 나온 관점이었기에 그는 더는 차미주와 논쟁을 벌일 의미가 없다고 생각했다.그래서 그는 다시 화제를 돌려 그의 주요 목적인 유현진과 송민준의 사이를 “이간질”하려 했다. “형수님, 바이브 엔터의 문은 언제나 형수님을 향해 활짝 열고 있겠습니다.”순간 송민준의 눈가가 떨려왔고 그는 얼른 한성우의 입을 막아버리고 싶었다.유현진은 미간을 살짝 찌푸리더니 이내 다시 표정을 갈무리하였다.한성우의 말이 맞았다. 자본가들은 돈을 벌어야 했고 아무리 송민영이 사악한 사람이라고 해도 그녀는 현재 돈을 제일 잘 버는 스타 중의 한 명이었다.원래 그녀는 강한서와
그녀는 긴장감에 아랫입술을 잘근잘근 씹기 시작했다.한성우와 차미주의 표정엔 변화가 없었고 마치 아무 소리도 못 들은 것처럼 행동하고 있었다.“화장실에 사람 있었어요?”송민준이 물었다.“아... 그게 사실은 배관 수리 기사님이에요.”유현진이 태연한 표정으로 대충 둘러댔다.“화장실 배관에 문제가 생겼더라고요.”‘금방 이사한 집의 배관에 문제가 생겼다고?’송민준은 다시 시선을 돌려 한참 그들을 살펴보더니 입을 열었다.“그럼 전 이만, 먼저 가볼게요.”그는 말하면서 휴대폰을 꺼내 누군가에게 연락했다.순간 주방 쪽에서 휴대폰이 울리는 소리가 들려왔다.송민준은 주방 식탁 위에 놓인 휴대폰을 보았다.유현진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화장실에 있던 강한서도 휴대폰이 울리는 소리를 들었는지 문을 열고 나왔다. 그의 셔츠는 반쯤 풀려있었고 온몸이 젖은 상태로 뒷머리를 만지면서 나왔다.분명 옷을 입고 있었지만 마치 방금 막 샤워를 한 듯한 모습으로 태연하게 걸어 나왔다.그는 덤덤한 표정으로 송민준에게 말을 걸었다.“송 대표, 웬일이야? 송 대표도 밥 먹으러 왔어?”유현진의 눈동자가 심하게 떨리고 있었다.셔츠를 반쯤 풀어 헤친 강한서의 모습을 본 한성우는 얼른 차미주의 두 눈을 손으로 가렸다.“그렇게 보는 건 실례야.”순간 욱한 감정이 올라왔던 차미주는 팔꿈치로 그의 복부를 찔렀다.송민준은 입술을 꽉 깨물었고 그는 웃는 듯 마는 듯한 표정으로 말했다.“강운 그룹이 부도라도 났냐? 강 대표는 이젠 배관 수리도 하나 봐?”강한서는 담담한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설마, 우리 회사는 아직도 잘 나가. 난 그냥 이웃을 도와주러 온 것뿐이어야. 이웃이랑 사이좋게 지내야지, 안 그래?”송민준의 눈썹이 꿈틀거렸다.“이웃이라고?”이때 한성우가 손을 들면서 말했다.“여기 있잖아. 내가 바로 902호 이웃이야.”송민준은 강한서와 한성우를 번갈아 보더니 이내 뭔가 깨달은 듯하였다.저 두 사람이 멍청한 박해서를 속인 것이었다.그가 집에 관한 정보를
한현진은 말하며 송가람을 쳐다보았다. “전 주주의 신분으로 깔린느에서 일하고 있어요. 언니도 세은이와 마찬가지로 모두 임원인 누군가의 연줄로 입사하게 된 거고요. 언니가 이런 방식으로 저와 세은이를 제약하려고 한다면 당연히 똑같은 방식으로 언니와 서 대표님을 대해야 하는 것 아닌가?”송가람은 논리정연하면서도 은근히 비꼬는 한현진의 말투에 화가 치밀어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하지만 한현진의 그 한마디는 자리에 있던 모든 사람의 마음에 묵직한 한 방이 되었다. 낄린느의 창시자에 대해 이미 오랜 시간 동안 아무도 언급하지 않았다. 한아람이 세상을 뜬 후 입사한 직원이 알고 있는 회사의 대표는 서해금이 전부였다. 깔린느의 공식 홈페이지의 소개에도 서해금을 깔린느의 창시자인 듯 추앙하고 있었다. 예전의 파트너에 대해서는 그저 몇 마디의 간략한 설명이 전부였다. 경력 2, 30년 이상의 고참 직원을 제외하면 모두 깔린느가 모든 위기를 헤치고 지금 이 자리에까지 오른 것은 전부 서해금의 공로로 알고 있었다. 설사 한현진이 회사의 대표로 취임했어도 다들 서해금이 옛정을 생각해 파트너였던 사람의 딸을 챙겨주는 것이라고 여겼다. 성월이든 송가람이든 한현진의 얘기만 나오면 은연중에 그런 뜻을 내비쳤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언급되지조차 않던 창시자인 한아람은 애초부터 깔린느의 최대 주주였고 심지어 그녀는 90%에 가까운 지분을 보유하고 있었다. 그렇게 많은 돈을 깔린느의 창업에 투자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10%밖에 되지 않는 서해금의 투자금이 부족했을 리가 없었다. 그러니 사실 서해금은 그저 적은 투자금을 들여 깔린느와 파트너쉽을 맺고 다른 사람이 심은 나무 아래에서 시원한 바람을 만끽했다는 얘기였다. 자수성가, 커리어우먼, 비즈니스 천재, 조향 천재라는 타이틀은 그저...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난 한아람 덕에 누린 이득이었던 것이다. 그 사실과 더불어 “주세은이 문제를 일으키면 한현진이 모든 책임을 진다”던 송가람의 말을 곱씹어 본 직원들의 눈빛이 조금은 의미심
한현진의 말에 성월은 말을 잇지 못했다. 입술을 파르르 떨던 성월은 한현진의 말에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조차 갈피를 잡지 못했다. 서해금이 무겁게 가라앉은 눈빛으로 한현진을 쳐다보았다. “현진아, CCTV를 확인할 자신 있어? 만약 정말 세은이가 한 짓이면 넌 이 일을 어떻게 처리할 생각이니?”“경찰에 신고해야죠.”한현진이 똑바로 서해금을 직시했다. “만약 정말 세은이가 깨뜨린 거라면 비싼 물건이니 경찰에게 맡겨 처리하도록 해야겠죠.”서해금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송가람은 가만히 있지 못하고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현진 씨, 세은이의 입사를 강력 추진한 건 현진 씨였어요. 그래서 엄마도 동의했던 거고요. 하지만 지금 현진 씨는 이렇게 큰 문제를 생기자 모든 책임을 세은이에게 뒤집어씌우고 있어요. 정말 현진 씨에게는 전혀 책임이 없는 건가요?”한현진이 잠시 침묵했다. “가람 언니, 그런 얘기는 저희끼리 있을 때 해도 되잖아요. 왜 굳이 이곳에서 그 얘기를 꺼내는 거예요?”한현진이 겁을 먹었다고 생각한 송가람이 일부러 더 그녀를 밀어붙였다. “넘버 S 오일이 깨졌으니 회사 전체의 이익과도 관련되어 있어요. 저희도 직원에게 제대로 된 사건의 진위를 알려야 해요. 그러니 굳이 저희끼리 조용히 이야기할 필요가 없죠.”한현진이 시선을 올렸다. “여기서 얘기해도 문제 될 건 없어요. 언니가 계속 제게 책임을 지라고 하는 건 제가 세은이를 입사시켰기 때문인 거잖아요. 세은이가 잘못을 저질렀다면 저도 당연히 그에 상응한 책임을 져야겠죠. 그럼 제가 물을게요. 언니의 업무 실수로 인해 저희는 하마터면 홍혜림 씨라는 고객을 잃을 뻔했어요. 그럼 왜 당시 언니를 회사로 불러들인 서 대표님은 아무런 책임도 지지 않으신 거예요? 실수를 저지른 사람은 심지어 멀쩡히 회사에 다니고 있잖아요. 언니도 서 대표님 추천으로 입사하신 거잖아요. 왜 그 일에 관해선 한 글자도 언급하지 않는 거예요?”부끄러움에 송가람은 버럭 화를 냈다. “저와 세은이는 달라요. 깔린느는
역시나 성월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현장엔 수군거리는 소리로 가득했다. “한 대표님이 호언장담해서 데려온 사람이라니, 이게 무슨 말이야?”“소문이긴 한데. 나도 그냥 들은 거야. 주세은 씨 경력으론 우리 회사에 입사할 수 없대. 하지만 한 대표님이 세은 씨 아버지에게 받은 은혜를 갚기 위해 취직을 시켜주려고 했지만 서 대표님이 반대하셔서 한 대표님이 만약 주세은 씨가 문제를 일으키면 한 대표님이 책임지고 물러나시기로 약속하셨다고 했어.”“세상에. 하지만 이번 일은 작은 일은 아니잖아.”“우리가 입사할 땐 면접만 4차까지 있었어. 면접도 없이 입사하기에 대단한 실력자인가보다 했는데, 이렇게 큰 사고를 치다니.”“입사한 지도 시간이 꽤 흘렀는데 아직 실력을 보지 못했어.”“넘버 S 오일은 이것 하나밖에 없잖아. 이렇게 큰 사고를 쳤는데 한 대표님이 어떻게 지켜주겠어.”“지키긴 뭘 지켜. 한 대표님 본인도 책임을 면치 못할 텐데. 자신이 꽂은 사람이 이렇게 큰 사고를 쳤는데 책임을 회피할 수 있겠어?”...한현진을 힐끔 쳐다본 송가람의 입꼬리가 씩 올라갔다. 음모를 달성한 비열한 인간의 표정이었다. 한현진은 그런 송가람 따위는 신경도 쓰고 싶지 않았다. 그녀는 성월을 직시하며 말했다.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지 잘 모르겠네요. 제대로 가르치고 싶으셨다면 직접 데리고 다니며 하나하나 알려주어야 하는 거 아닌가요? 왜 익숙하지도 않은 곳에서 물건을 가져오라고 세은 씨 혼자 보내신 거죠?”성월이 변명을 늘어놓았다. “그땐 다들 구내식당에서 밥을 먹고 있었어요. 일손이 부족한 데다 저도 자리를 비울 수 없어서 어쩔 수 없이 세은 씨를 보낸 거예요. 저장실은 제가 세은 씨와 함께 간 적이 있었어요. 세은 씨도 저장실 구조에 대해 잘 알고 있어요.”한현진이 물었다. “다들 식사 중이었다는 건 그리 급한 업무도 아니었단 얘기겠네요. 왜 하필 사람 없는 점심시간에 세은 씨를 불러서 오일을 가져오게 한 거예요?”한현진의 질문에 말문이 막힌 성월이 결국
구내식당이 워낙 조용했던 터라 가까이 있는 사람은 통화 내용을 전부 들을 수 있었다. 비록 한현진은 넘버 S 오일이 뭔지 몰랐지만 깔린느에서 오랫동안 일한 직원이라면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넘버 S 오일은 혼합 오일이었다. [인 드림] 같은 고급 향수의 제조에 사용되는 주요 원료 중 하나였다. 넘버 S 오일의 재고는 100mL 밖에 없었다. 서해금이 우연히 제조해 낸 오일이라 각 오일의 성분과 비례가 기록되어 있지 않았고 그렇게 넘버 S 오일은 한정판이 되어버렸다. 이 오일은 줄곧 소중하게 보관되어 있었고 특별한 신분의 사람이 고급 향수를 제작할 때만 사용되었다. 넘버 S 오일은 깔린느 전체에 단 한 병뿐이었다. 그것이 깨진다면 넘버 S 오일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그러니 성월의 말을 들은 사람들은 숨을 들이켰다. 서해금의 얼굴은 잔뜩 일그러져 있었다. 그녀는 몸을 돌려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따라가려는 한현진을 은서하가 불러 세웠다. “대표님, 제 일은 됐어요. 조금만 더 참으면 지날 수 있을 거예요. 대표님이 이렇게까지 하지 않아...”한현진이 은서하를 쳐다보며 말했다. “지나가지 않을 거예요. 서하 씨가 참으면 참을수록 그 사람들은 점점 더 서하 씨를 만만하다고 여기고 더 심하게 굴 거예요. 서하 씨가 만만한 사람이 아니라는 걸 그 사람들도 알아야 해요. 그래야 앞으로 서하 씨를 괴롭히려고 할 땐 한 번쯤은 고민해 볼 거예요.”은서하가 멍해졌다. 한현진은 은서하의 대답도 듣지 않은 채 자리를 벗어났다. 주세은은 덜렁대는 성격의 아이가 아니었다. 게다가 그렇게 귀중한 원료는 보통 일반 직원들이 쉽게 접근할 수 있는 곳에 보관하지 않았다. 그러니 주세은이 그 오일을 깨뜨렸을 리가 없었다. 한현진이 다급하게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현장에 도착했을 땐 이미 많은 사람들이 오일 보관실에 모여있었다. 주세은은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있었다. 그녀를 에워싼 사람들은 하나 같이 범인을 심문하듯 주세은을 쳐다보고 있었다. 주세은은 하얗게 질린 얼굴
한현진이 입꼬리를 씩 올리며 송가람에게로 걸어가 그녀의 귓가에 다가갔다. “제 사무실에 있던 금전수 기억해요?”움찔하는 송가람의 동공이 순간 흔들렸다. 한현진이 눈을 가늘게 뜬 채 천천히 입을 열었다. “언니가 하는 건 저도 할 수 있어요. 스스로 승인하실래요, 아니면 다들 들을 수 있게 제가 가서 가져올까요?”송가람의 얼굴엔 놀란 기색이 역력했다. 그녀는 한현진이 그 도청 장치를 발견했을 것이라고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심지어 한현진은 자신이 그랬던 것처럼 송가람의 사무실에도 도청 장치를 달았다. 송가람과 주현은 사무실에서는 거리낌 없이 모든 얘기를 했었다. 게다가 한현진이 대체 어디서 어떤 얘기를 들은 것인지도 알 길이 없었다. 그런 생각에 송가람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꼭 움켜쥔 주먹에 더욱 힘이 들어갔다. 송가람의 경계심이 완전히 무너질 때쯤 멀리서 서해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현진아, 가람아. 무슨 얘길 하고 있는 거니?”하마터면 자신이 한 일을 승인할 뻔한 송가람은 서해금의 목소리가 들리자 입가까지 흘러나왔던 말을 다시 삼켜버렸다. 그녀는 구세주를 만나기라도 한 듯 서해금을 불렀다. “엄마!”한현진이 쯧 혀를 찼다. ‘타이밍 한번 좋게 찾아왔네.’한현진은 몸을 돌려 예의 바른 미소를 지으며 다정한 목소리로 서해금에게 인사를 건넸다. “아주머니, 안녕하세요.”한현진 앞으로 다가온 서해금이 몸을 곧게 세우고 주위를 둘러보더니 미소 지으며 물었다. “밥도 안 먹고 두 사람 여기서 무슨 얘길 하고 있었던 거야?”한현진이 말했다. “별거 아니에요. 다만 가람 언니가 별다른 이유 없이 직원의 보너스를 삭감해서 어떻게 된 일인지 물어보고 있었어요.”한현진의 말에 반박하려던 송가람은 휴대폰을 꺼내려는 한현진의 모습에 입을 다물었다. 만약 송가람이 자신의 구역에서 한현진에게 약점을 잡힌 것을 서해금이 알게 된다면 또 그녀를 한바탕 꾸짖을지도 몰랐다. “그래?”서해금이 송가람을 힐끔 쳐다보았다. “현진이 말이 사실이야?”송
누군가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그리고 곧 비웃음 소리가 하나둘 터져 나왔다. 안규리의 얼굴이 부끄러움에 빨갛게 달아올랐다. 송가람이 미간을 찌푸렸다. “현진—”한현진이 송가람의 말을 잘랐다. “송 팀장님, 여긴 회사예요. 호칭 주의하시죠.”말문이 막힌 송가람은 이를 악물고 화를 꾹 참으며 낮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한 대표님, 다들 그저 장난 좀 한 건데 말씀이 좀 지나치신 것 같네요.”“제 말이 좀 지나쳤나요?”한현진이 차가운 눈으로 송가람을 쳐다보았다. “규리 씨가 힘든 처지에 있는 사람을 놀릴 때는 왜 규리 씨 말이 심하다고 하지 않은 거죠? 이해 능력이 형편없어서 규리 씨 말의 의미를 알아듣지 못하는 거예요?”송가람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서하 씨 형편이 어려우면 회사에 복지 신청해도 된다고 제가 얘기했잖아요.”한현진이 흥 코웃음을 쳤다. “보아하니 송 팀장님은 이해력이 안 좋을 뿐만 아니라 기억력도 안 좋으신 것 같네요. 서하 씨가 2개월간 감봉 당한 건 송 팀장님 작품 아니었나요? 이제 와서 좋은 사람인 척하겠다는 건가요?”표정이 굳어진 송가람이 이를 악물었다. “서하 씨 보너스가 삭감된 건 인사팀에서 결정한 일이에요. 그게 저와 무슨 상관이죠? 헛소리하지 말아요.”한현진이 차가운 말투로 대답했다. “전 서하 씨가 보너스를 삭감당했다고 얘기한 적 없는데요. 조향팀의 일개 팀장에 불과한 송 팀장님이 어떻게 재무팀 직원의 월급 삭감 정황까지 빠삭하게 알고 있는 거예요? 인사팀 부장이 꿈에서 알려주기라도 했어요?”송가람은 그제야 자신이 한현진에게 말꼬투리를 잡혔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순간 화가 치민 송가람이 말했다. “대충 제 추측으로 얘기한 것 뿐이에요. 감봉은 보너스를 삭감하는 것이 일반적이니까요.”“하지만 보너스를 전부 삭감당했다는 건 저도 들은 적 없는 얘기예요.”한현진이 태연하게 말했다. “회사에도 징계에 관한 규정이 명확하게 있어요. 설사 서하 씨가 진행한 업무가 전부 규정을 위반했다고 하더라도
은서하는 송가람이 어떤 사람인지 잘 알고 있었다. 이렇게 한현진과 가깝게 지내다 또다시 송가람에게 당할까 두렵지는 않은 걸까?한현진은 도무지 이 어린아이가 무슨 생각을 하는 것인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이시연은 그런 은서하의 모습에 환하게 웃으며 반갑게 은서하와 인사를 나누었다. “서하 씨, 외할머니도 아직 퇴원하지 않으셨을 텐데 오늘은 어떻게 회사에서 점심을 먹는 거예요?”은서하가 대답하기도 전에 이미 누군가 비꼬며 말했다. “진작 회사에서 먹어야 했어요. 도시락도 매일 구정물 같은 것만 싸 오던데 식욕이 있겠어요? 서하 씨. 구내식당은 직원 할인도 있잖아요. 매달 6만 원만 내면 돼요. 그 정도 돈도 없는 건 아니겠죠. 그 도시락, 서하 씨는 괜찮을지 몰라도 전 이제 못 봐주겠어요.”그 말에 은서하의 얼굴이 순간 빨갛게 달아올랐다. 그녀는 젓가락을 꽉 움켜쥐고 부끄러워 어쩔 줄 몰랐다. 이시연이 미간을 찌푸렸다. “안규리 씨, 무슨 말을 그렇게 해요? 구내식당을 이용하든 도시락을 싸든 그건 다른 사람 마음이에요. 6만 원으로 구내식당을 이용하는 게 뭐 그리 고상한 일 같아요?”안규리라고 불린 사람은 송가람 옆에 앉아 있었다. 한현진도 전에 본 적 있는 재무팀 직원이었다. 안규리가 눈썹을 씰룩였다. “구내식당을 이용하는 게 고상하다는 얘기는 전 한 적 없어요. 하지만 매일 죽 같은 도시락을 싸 와 식당에서 데워 먹는 모습은 사실 저희 식욕을 떨어뜨리거든요. 다들 안 그래도 일하느라 힘든데 밥 먹을 때도 이렇게 입맛이 떨어져서야 저희더러 어떻게 살라는 거죠?”주현도 안규리의 말을 거들었다. “서하 씨도 돈이 없어 보이지는 않던데요. 전에 한 대표님이 옷 선물을 하셨을 때도 제일 비싼 옷을 가져갔잖아요. 딱 봐도 그런 걸 처음 본 사람은 아니잖아요. 보자마자 제일 좋은 거로 가져갔는데.”“200만 원이 넘는 옷을 입는 사람이 식비 6만 원을 아낀다고요?”“그게 어떻게 같아요? 몇백만 원짜리 옷은 볼 수도 있고 만질 수도 있잖아요
한현진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집을 나선 한현진은 강한서에게 황씨 아주머니의 월급 인상에 관해 상의했다. 강한서와 강민서가 집을 나선 지 얼마 되지 않아 주혁이 한현진을 데리러 도착했다. 별장을 벗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한현진은 순간 길가에서 누군가의 움직임을 포착했다. 어쩐지 눈에 익은 인영이었다. 한현진이 탄 차가 그 사람과 가까워져서야 한현진은 그 사람이 은서하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한현진은 다급히 주혁에게 차를 세우라고 말하고는 차창을 내려 은서하를 불렀다. “서하 씨!”고개를 돌린 은서하는 놀란 기색이 역력했다. “대표님이 여긴 어떻게...?”“저 이 근처에 살아요.”한현진이 물었다. “그러는 서하 씨는 여긴 어쩐 일이에요?”이 근처엔 별장을 제외하면 길가에 오가는 차가 전부였다. 사람의 그림자조차 흔하지 않은 길이었다. 은서하가 말했다. “집이 이 근처라서요.”한현진이 놀라며 말했다. “이 근처에 사신다고요?”은서하가 꿋꿋이 거짓말을 이어갔다. “네. 오늘 늦잠을 잤더니 택시가 안 잡혀서요.”한현진은 아무 말 없이 은서하를 살펴보더니 몇 초 후에야 입을 열었다. “일단 타요. 타서 얘기해요.”은서하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감사의 인사를 전하고는 종종 달려와 한현진 반대편의 문을 열고 차에 탔다. 은서하는 그제야 차에는 한현진과 운전기사뿐만 아니라 평범한 외모의 젊은 청년도 함께인 것을 발견했다. 한현진이 소개하며 말했다. “여긴 원율 씨. 제 개인 비서예요.”은서하가 원율에게 인사를 건네고는 안전벨트를 했다. 그녀는 자신의 가방을 꼭 끌어안고 공손한 자세로 한현진 옆에 앉아 있었다. 차가 출발하자 한현진이 질문을 이어갔다. “여긴 회사와 거리도 있는데 평소 출퇴근 시간이 꽤 걸리지 않아요?”은서하가 어색하게 대답했다. “외할머니 치료 때문에 집을 팔았어요. 하지만 회사 근처엔 월세가 높아서 어쩔 수 없이 먼 곳으로 옮겼어요. 평소엔 버스를 타고 다녔는데 어젯밤엔... 일이 조
한현진이 거울을 보며 옷을 정리했다. “이름이 뭐야?”“문채영.”“꽃부리 영?”강한서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 영리할 영.”“특이한 이름이네.”한현진이 멈칫했다. “너 전에 오빠가 맞선을 싫어한다고 하더니 그 여자를 못 잊어서 그런 거였어?”강한서가 말했다. “그런 것 같아.”“그럼 두 사람은 왜 안 만났던 건데?”강한서가 말했다. “자세한 건 네 오빠만 알 거야. 내가 알고 있는 건 고등학교 시절 누나 이모가 누나 아버지를 횡령, 뇌물수수 그리고 사생활이 문란한 문제를 신고했고 그로 인해 많은 사람이 연루되어 누나 아버지는 형량을 꽤 많이 받았어. 누나 어머니도 그 충격을 견디지 못하시고 실성하신 분처럼 구셨어. 그렇게 문씨 가문은 나락으로 떨어진 거야. 그때 누나는 아직 대학도 졸업하지 못했었어.”“우리 수능이 끝나자 누나는 어머니를 모시고 해외로 갔어. 그리고 2년이 지난 후 결혼했지. 남편은 부자인 교포였어. 귀국해서 결혼식을 올린 거라 민준이도 일부러 M국에서 돌아왔어. 결혼식이 끝나고 누나는 남편과 함께 해외로 갔어. 그 후로 우리는 연락이 뜸해졌고. 그리고 2년 전, 누나가 이혼하고 나서야 다시 연락하기 시작한 거야.”한현진이 물었다. “넌 그 여자와 오빠를 이어주고 싶은 거야?”강한서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누나는 민준이를 만나고 싶어 해. 난 그저 중간에서 다리를 놓아주는 것뿐이야. 두 사람이 어떤 사이로 발전할지는 두 사람 일이지.”강한서가 멈칫하더니 말을 이었다. “어렸을 때 그 감정이 지금은 얼마나 남아있을지 모르지. 누나가 이혼 후 2년이 흘렀어. 만약 나라면 그리고 아직도 그 사람을 사랑한다면 바로 전남편에게 꽃이라도 사 들고 찾아가 이혼을 축하해줄 거야. 그리고 바로 누나를 찾아갔겠지. 하지만 네 오빠는 그저 가만히 있었어. 이혼한 걸 몰랐을 리가 없어.”한현진이 의미심장하게 말했다. “만약 너였다면 넌 출국하기도 전에 잡혔을 거야. 그리고 오빠는 너처럼 멍청하지 않아. 그렇게 창피한 일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