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 대표님."멀지 않을 곳에서 애교가 섞인 여자의 부드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유현진은 차가운 눈빛으로 고개를 들었다. 그러자 화려한 핑크색 원피스를 입은 송민영이 시선에 들어왔다.송민영은 만면에 화사한 웃음을 지으면서 걸어오더니 인사를 건넸다. "송 대표님도 있었네요."그러고는 시선이 유현진을 훑더니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 "현진 씨, 잘 지내셨어요?"강한서는 눈썹을 찌푸렸다. 송민영은 여기에 왜 온 거야?유현진은 담담한 표정을 짓고 있었지만, 손은 두 주먹을 꽉 쥐고 있었다.유현진은 송민영이 악센트를 어디에 뒀는지 알아들었다. 유현진의 처지에 깨고소해하는 그의 마음이 곧이곧대로 말투에서 전달되었다.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유현진은 강한서와 이혼한 것도 모자라 일전 한 푼도 못 받고 쫓겨났다. 유현진에게서 여러 차례 수모를 받아온 송민영은 이 소식이 기쁘지 않을 수가 없었다."얼마 전에 현진 씨의 어머님이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들었어요. 당시 출장으로 타지에 있어서 장례식에도 참석하지 못해 못내 미안했는데, 오늘 현진 씨 상태를 보니까 어머님을 여읜 슬픔에서는 벗어났나 보네요. 역시 시간은 약이에요."유현진은 눈빛이 어두워졌다.엄마가 돌아간 지 한 주밖에 안 되는데, 엄마를 여읜 슬픔에서 벗어났다니, 이건 분명 상처난 가슴에 비수를 꽂는 말이었다."민영 씨, 미안할 거 없어요. 우리 엄마를 북교 묘원에 모셨으니, 가서 몇 시간 정도 절하면서 민영 씨의 마음을 전하면 돼요. 말로만 하지 말고 행동에 옮겨야죠. 우리 엄마가 민영 씨의 정성에 감동되어 나중에 민영 씨의 꿈에 나타나 직접 고마움을 전할 수도 있잖아요."송민영은 입술을 바르르 떨었다.어떻게 저렇게 멀쩡한 표정을 짓고 저렇게 음산한 말을 아무렇지 않게 할 수 있지?이혼했는데도 독설은 여전하네!이혼까지 했으니 이젠 강한서의 눈치마저 볼 필요 없으니까 완전한 자유를 얻었다는 건가?송민영은 애써 웃으면서 답했다."현진 씨, 농담도 잘하시네요."그러면서 화제를 송민준에게로 돌
유현진......강한서는 순간 너무 놀라 멍해졌다. 위기감이 쓰나미처럼 밀려왔다.송민영도 놀라서 되물었다. "누구 부모님께 소개시키는 거예요?""물론 저의 부모님이죠."송민준은 활짝 웃으면서 말을 이어갔다. "만난 지 꽤 오래 됐는데, 부모님께 소개시켜 드려야 부모님도 걱정을 덜하실 것 같아서요. 아니면 제가 아직 싱글인 줄 알고 계속해서 저한테 여자친구를 소개시켜 주려고 해서요."강한서......유현진도 옆에서 놀란 표정으로 송민준을 쳐다보고 있었다.송민준의 대답은 유현진의 체면을 세워준 건 사실이지만, 어딘가가 수상하고 불편한 느낌이 들었다.송민영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으면서 물었다. "송 대표님, 현진 씨와의 관계가 부모님께 인사드릴 정도까지 발전한 거예요?"송민준은 송민영을 흘끔 쳐다보더니 되물었다. "이게 그렇게 놀랄 일인가요?""조금요,"송민영은 두 주먹을 꽉 쥐더니 낮은 소리로 말했다. "현진 씨가 이혼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송 대표님과 함께 부모님께 인사 드리는 걸 보니, 빠르다는 생각이 드네요.""그런 부분이 없지 않아 있는데, 맞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드는 순간 한 순간도 기다리기 싫더라고요. 기존에는 기회가 없다고 생각했었는데, 강 대표님이 보석을 알아보지 못하니 저한테 기회가 온 거 아니겠어요?"송민준은 피식하더니 말을 이었다. "우리 두 사람이 나중에 잘 되면 다 강 대표님 덕이에요. 그때 가면 제가 푸짐한 선물 보내 드려야지요."유현진은 옆에서 무표정으로 송민준의 헛소리를 듣고 있었다.송민준은 엄청 진지하게 거짓말을 하고 있었다. 특히 '나중에 우리 두 사람이 잘 되면'이라는 말을 할 때 일부러 유현진과 한번 눈을 마주쳤다. 마치 사랑에 빠진 남자처럼 말이다.강한서의 얼굴은 형용할 수 없을 만큼 어두워졌다. 그는 독기 가득한 눈으로 이를 바득바득 갈면서 유현진에게 물었다. "송민준이 한 말 진짜야?"유현진은 강한서의 눈빛에서 당황함과 슬픔을 보았다.그런데 그녀는 이내 그런 생각을 저
말하고는 바로 몸을 돌려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송민영은 씁슬했다. 골수 이식이 끝났으니 송민영은 더 이상 강한서에게 이용 가치가 없었다. 그렇다고 강한서는 몇 년 동안 알고 지내왔던 정을 싹둑 잘라버렸다.송민영은 어렵게 오늘의 성과를 얻었다. 그런데 유현진은 강한서와 이혼을 하더라도 송민준과 같은 저력이 넘치는 남자를 바로 찾았다. 대체 자신이 유현진보다 못한 게 뭐야?송민영은 한껏 어두워진 표정으로 폰을 들고 전화번호를 눌렀다.전화가 통하자 그는 목소리를 낮추어 말했다. "송민영이에요."상대방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송민영은 계속하여 낮은 소리로 말했다. "시키는 대로 말했더니 강한서가 거부했어요. 저 무조건 도와주셔야 돼요."......엘리베이터에 오르고 나서야 유현진은 입을 열었다. "송 대표님, 방금 전에는 고마웠어요."송민준은 웃으면서 말했다. "현진 씨만을 위해서 그런 건 아니에요. 한서가 저한테 난제를 던져줬으니 저도 응당 되돌려주는 게 예의죠.""네?""한서가 저랑 현진 씨가 남녀 관계로 발전할까 봐 제가 선을 보게 하려고 우리 아빠에게 재벌집 아가씨들의 사진을 엄청 많이 보냈어요."유현진??"저를 먼저 건드렸으니 마땅히 돌려줘야죠."송민준은 미소를 지으면서 말을 이어갔다. "방금 전 한서 얼굴을 못 보셨어요? 화나서 울기 직전이던데."유현진......"그런 거 아닐 거예요."강한서가 눈물을 흘려? 강아지에게 눈물이 있더라도 강한서에게는 눈물이 없을 것이다.게다가 자신과 이제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전 와이프를 위해서 운다는 건 있을 수가 없었다.두 사람은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종업원의 안내 하에 이내 룸에 도착했다.룸에 가까워질 수록 유현진은 긴장해졌다. 송민준이 문을 여는 순간, 저도 모르게 두 손을 꼭 쥐었다."아빠, 아줌마 현진 씨 왔어요."말하고는 바로 옆으로 가서 섰다. 유현진은 눈을 내리깔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인사를 건넸다. "회장님, 사모님, 안녕하세요."송병천은 유현진을 보고 깜짝
유현진은 갑자기 눈꺼풀이 뛰었다.송병천은 강한서를 반갑게 맞았다. "한서야, 여기는 어떻게 왔어?"손에 양주 두 병을 든 강한서는 낮은 소리로 말했다. "민준이에게서 아저씨가 여기서 식사하신다는 걸 들었어요. 그래서 술을 가져다 드리려고 왔어요."송민준도 눈꺼풀이 뛰었다. 저 자식은 핑곗거리를 잘 찾아!송병천은 술을 엄청 좋아하는 건 아니지만 양주를 즐겨 마셨다.몇 해 동안 외국 생활을 하면서 아내가 술을 못마시도록 단속했기에 오랫동안 술을 입에 대지 못했다. 그런데 오늘 마침 강한서가 그가 가장 즐겨 마시는 술을 들고 왔으니, 기쁘지 않을 수가 없었다.송병천이 스스로 술을 주문하려고 하면 서해금이 말렸을 텐데, 강한서가 들고 온 거라 서해금도 딱히 뭐라 하지 못할 것이다.송병천은 강한서를 보면서, 특히 강한서가 들고온 두 병의 술을 보면서 입꼬리가 귀에 걸렸다. "그냥 오면 될 일이지, 뭘 또 술까지 들고 왔어."그러면서 송민준에게 일렀다. "민준아, 뭐해. 얼른 가서 받지 않고."송민준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강한서에게로 다가가더니 술 두 병을 받아쥐고는 강한서를 담담하게 쳐다보면서 물었다. "강 대표님, 여덟 시에 약속이 있다고 하지 않았어요? 얼른 가 보세요."그 말인 즉, 술을 받았으니 얼른 꺼져라는 뜻이었다.송병천은 아들의 숨은 뜻을 알아채지 못했다."한서야, 약속이 있었어? 너랑 한 잔 마시려고 했는데."강한서는 안색 하나 바꾸지 않고 말했다. "약속이 있었는데, 상대방이 갑자기 일이 생겨 오지 못한다고 연락왔어요. 지금 와서 메뉴를 취소할 수도 없고, 조금 있다가 그 메뉴들을 이 룸으로 보내달라고 할게요."송병천이 말했다. "우리도 많이 주문하긴 했는데. 어차피 네가 약속한 사람이 오지 않을 테니 우리랑 같이 먹자."강한서는 대뜸 답했다. "그럼 실례할게요."유현진......송민준은 눈가가 바르를 떨렸다.강한서의 낯짝이 이렇게 두꺼울 줄은 몰랐다. 저 놈 얼굴에 철판 깔았어?그저 인사치례로 한
그 말에 송병천도 더는 말을 잇지 않았다.송병천은 송민준과 강한서가 서로 사이좋게 지내는 모습이 좋았다. 송민준은 잔머리를 잘 굴리기에 상상력이 풍부하지만 강한서는 그에 비해 차분하고 실속이 있었다.그리하여 송병천은 송민준이 강한서에게 더 많이 배우고 두 사람의 사이도 친해질 수 있기를 바랐다.유현진은 조용히 의자를 송가람 옆으로 옮겼다.송병천은 기분이 좋아져 강한서에게 유현진을 소개하더니 또 유현진이 송가람을 구해준 일을 연기까지 해가며 아주 생동하게 설명했다.서해금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한서가 더 잘 알아요. 현진 씨와 부부인데 그것도 모르겠어요?"서해금의 말에 사람들은 표정이 각기 달랐다.젊은 세대 사람들은 두 사람이 이혼했다는 사실을 이리저리 소문을 통해 들어 다 알고 있었다. 유현진이 그날 올렸던 공개 구혼 게시물은 이미 쫙 퍼진 상태이니 말이다.하지만 어르신들은 잘 알지 못했다. 마치 송병천과 서해금처럼 말이다.송병천은 심지어 두 사람이 부부 사이라는 것을 알지 못했다. 그런데 이혼이라니…만약 알았다면 강한서와 그리 즐겁게 대화를 나누지 못했을 것이다.유현진은 입술을 오므렸다.두 사람은 강한서와 유현진의 이혼 사실을 몰랐다. 그런데 만약 유현진이 그 상황에서 이혼 얘기를 꺼냈다면 송씨 가문 두 어르신은 분명 난처했을 것이다. 아무래도 그들이 강한서를 가지 말라고 남겨두었으니 말이다.그래서 유현진은 아무 말도 꺼내지 않았다.유현진이 아무 말도 하지 않으니 송씨 남매도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또 강한서는 워낙 울며 겨자 먹기로 한 이혼이라 차라리 누구도 이 일을 입 밖에 내지 말길 바랐다.서해금의 말이 끝나고 강한서가 입을 열었다."나는 어떤 상황에도 유현진이 자기를 먼저 보호할 수 있길 바라요."비록 유현진이 흘려들을지라도 강한서는 자기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똑똑히 알고 있다. 그 말은 강한서가 지금 이 순간, 제일하고 싶은 말이기도 하다.유현진이 12층 외벽을 타고 여자 화장실로부터 남자 화장실로 이동했다는
송병천의 안색은 순식간에 어두워졌다.송병천은 이 사건의 뒤에 강민서가 있을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다.강한서의 시선은 유현진을 향했다.유현진은 아무렇지 않게 강한서의 시선을 무시했다.그녀는 강한서가 강민서를 대신해 해석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역시나 강한서가 이내 입을 열었다."아저씨, 확실히 민서 때문에 발생한 일이에요. 반드시 직접 찾아와 사과드리도록 할게요."유현진은 어리둥절했다.분명 강민서를 대신해 핑계를 댈 줄 알았는데 반대로 인정해 버렸다.‘작전인가?'강한서가 이렇게까지 말하니 송병천은 아무리 기분이 언짢아도 사람들 앞에서 뭐라 하기 어려웠다.그저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민서 그 아이 정말 교양이 없군. 아무리 가람이와 상관없다고 해도 어떻게 화났다고 현진 씨를 화장실에 가둘 수 있어? 가정 교육 제대로 못 받은 아이도 아니고."강한서는 입술을 오므리더니 한참 뒤에야 입을 열었다."제가 따끔하게 혼낼게요."굳어져 가는 분위기에 서해금이 이내 따뜻한 어조로 말했다."그만 하세요. 어렵게 한자리에 모였으니 즐거운 얘기만 나누자고요."유현진은 조금 놀랍다는 표정으로 서해금을 바라보았다.송가람은 그녀에게 엄마라고 부르지만 송민준은 아줌마라고 불렀다. 호칭으로 보았을 때, 송가람은 아마도 서해금의 친딸일 것으로 추정된다.송씨 가문의 두 남자는 송가람을 공주처럼 모시는데 오히려 친모가 더 쿨했다.송병천은 서해금의 말을 잘 듣는 것 같았다."교양 없이."서해금의 말이 떨어지기 바쁘게 송병천은 혼자서 한마디 더 하고는 더는 이 일에 대해 말하지 않았다.유현진은 작전이 먹히지 않자 다소 실망했다.'하도 교양 있는 사람들이라 말이지, 나 같았으면 내 딸을 누가 그렇게 만들었다면 아마 죽이려고 달려들었을 거야.'그녀는 술잔을 들고 송가람에게 말했다."가람 씨 몸도 안 좋으니 차로 대신하셔도 좋아요. 제가 한 잔 올릴게요."유현진은 술잔의 술을 단숨에 들이켰다."현진 씨 정말 털털하네요."송민준이 미소를 지으며 유현진의
하지만 이미 내뱉은 말이라 강한서도 거절하기 창피했다.그는 하는 수 없이 술잔을 들고 침을 꼴깍 삼키며 머리를 들고 말했다."그럼 제가 먼저 마실게요."말을 끝낸 강한서는 머리를 뒤로 젖히며 양주를 한꺼번에 들이켰다.그 컵은 최소 300밀리리터 용량으로 송민준은 컵에 양주가 넘쳐날 만큼 찰랑찰랑하게 부었다.강한서는 와인을 마셔도 취하는 사람이다. 그녀는 강한서가 양주를 마시는 것을 본 적 없다. 하지만 와인도 못 마시는 사람이 어떻게 양주를 마실까.다들 즐기려고 술을 마시지만 강한서에게 술은 순전히 고문이다.한 잔의 술이 들어가고, 강한서는 이내 물을 반 컵이나 마셨다.유현진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바보도 아니고, 못 마시겠으면 수단 좀 쓰지. 넘기지 말고 물컵에 따로 뱉어버리던가. 바로 치워버리면 아무도 모를걸.어쩜 사람이 저렇게 고정해.'지금까지 강한서가 자라 온 환경으로 보았을 때, 아무도 그에게 술을 감히 권하지 못했다. 그래서 강한서는 술을 피하는 방법을 잘 모르고 있다.하지만 유현진은 다르다. 그녀는 술독이다.대학교 시절에 혼자서도 여러 남학생을 쓰러 눕혔다. 주량이 좋은 것도 있지만 수도 많았다.절반 마시고 절반을 흘리는 수법, 물을 마시는 척하며 술을 뱉는 수법, 입가를 닦는 척 흡수력이 강한 손수건에 술을 뱉는 수법 등등…...술을 피하는 방법은 많고도 많았다. 사실 술을 마시고 취하지 않는 사람이 어디 있을까, 취하지 않는 이유는 바로 덜 마셨기 때문이다.그녀는 강한서처럼 성실하게 마시는 사람은 처음 보았다.심지어 주량이 좋은 송민준도 반 잔만 마시고 강한서가 원샷하는 모습을 지켜보다가 이내 또 한 잔을 채워주었다."몇 년 만에 만났는데, 주량이 좋아졌네. 자, 한 잔 더 해."간만에 술친구가 생긴 송병천은 이내 자기 술잔에 한 잔 더 따르려고 했다.하지만 술병이 잔에 닿기도 전에 서해금이 말했다."여보, 음식을 차려놓고 술만 마시는 게 어디 있어요? 현진 씨 식사 대접하는 자리지 세 사람이 술 마시는
강한서의 말투에서 유현진은 강한서가 취했음을 알 수 있었다.이게 바로 강한서의 무서운 구석이다. 술을 마신 강한서는 잠만 자지 않으면 누구도 그가 취했다는 것을 모른다.송병천은 그것도 모르고 깜짝 놀란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그래?"유현진은 화를 억누르며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이 사람 말 듣지 마세요."강한서는 미간을 찌푸렸다."당신이 그랬잖아."유현진은 어이가 없었다.그녀는 입술을 오므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기로 결심했다.강한서가 취했을 때는 대꾸를 하면 안 된다. 그러다가 무슨 말이 나올지도 모르기 때문에 제일 좋은 방법은 바로 대답하지 않는 것이다.유현진이 아무 말도 하지 않으니 강한서도 입을 다물었다.그러더니 그녀의 접시에 까지 않은 새우를 산처럼 쌓아 올렸다.다들 손대지 않은 새우 한 접시를 강한서는 모두 유현진의 그릇에 쌓아 올렸다.…...그녀는 멍하니 그 장면을 바라보는 송씨 가문 네 식구를 번갈아 보았다.'강한서 때문에 창피해 죽겠네.'보다 못한 송병천이 마른기침을 하며 말했다."한서 아내 사랑이 아주 대단하네."강한서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나 맨날 이 사람 화나게 만들어요."송병천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부부가 살다 보면 싸우기 마련이지. 요즘 어느 젊은 부부가 안 싸우고 살아. 싸우면서 더 정이 드는 거야. 민준이 봐봐. 싸울 사람도 없잖아. 한서 너랑 동갑인데 아직 여자친구도 없어."송민준은 어이가 없었다.'갑자기 왜 나한테 불똥이 튀는 거야?'송병천의 말에 강한서는 아주 공감했다."쟤는 여자친구도 없는 데다가 남의 와이프한테 눈독 들여요."술을 마시던 송민준은 하마터면 술을 뿜을 뻔했다.송병천은 흠칫했다."뭘 눈독들여?""내 와이프한테- 웁-"강한서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유현진은 강한서의 입을 막아버렸다."아저씨, 아줌마. 오늘은 이만 돌아갈게요. 한서가 취해서 먼저 데려다줘야 할 것 같아요."'미친놈, 술만 마시면 개소리야! 내가 조금만 늦었어도 무슨 폭탄을 터뜨렸
은서하는 송가람이 어떤 사람인지 잘 알고 있었다. 이렇게 한현진과 가깝게 지내다 또다시 송가람에게 당할까 두렵지는 않은 걸까?한현진은 도무지 이 어린아이가 무슨 생각을 하는 것인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이시연은 그런 은서하의 모습에 환하게 웃으며 반갑게 은서하와 인사를 나누었다. “서하 씨, 외할머니도 아직 퇴원하지 않으셨을 텐데 오늘은 어떻게 회사에서 점심을 먹는 거예요?”은서하가 대답하기도 전에 이미 누군가 비꼬며 말했다. “진작 회사에서 먹어야 했어요. 도시락도 매일 구정물 같은 것만 싸 오던데 식욕이 있겠어요? 서하 씨. 구내식당은 직원 할인도 있잖아요. 매달 6만 원만 내면 돼요. 그 정도 돈도 없는 건 아니겠죠. 그 도시락, 서하 씨는 괜찮을지 몰라도 전 이제 못 봐주겠어요.”그 말에 은서하의 얼굴이 순간 빨갛게 달아올랐다. 그녀는 젓가락을 꽉 움켜쥐고 부끄러워 어쩔 줄 몰랐다. 이시연이 미간을 찌푸렸다. “안규리 씨, 무슨 말을 그렇게 해요? 구내식당을 이용하든 도시락을 싸든 그건 다른 사람 마음이에요. 6만 원으로 구내식당을 이용하는 게 뭐 그리 고상한 일 같아요?”안규리라고 불린 사람은 송가람 옆에 앉아 있었다. 한현진도 전에 본 적 있는 재무팀 직원이었다. 안규리가 눈썹을 씰룩였다. “구내식당을 이용하는 게 고상하다는 얘기는 전 한 적 없어요. 하지만 매일 죽 같은 도시락을 싸 와 식당에서 데워 먹는 모습은 사실 저희 식욕을 떨어뜨리거든요. 다들 안 그래도 일하느라 힘든데 밥 먹을 때도 이렇게 입맛이 떨어져서야 저희더러 어떻게 살라는 거죠?”주현도 안규리의 말을 거들었다. “서하 씨도 돈이 없어 보이지는 않던데요. 전에 한 대표님이 옷 선물을 하셨을 때도 제일 비싼 옷을 가져갔잖아요. 딱 봐도 그런 걸 처음 본 사람은 아니잖아요. 보자마자 제일 좋은 거로 가져갔는데.”“200만 원이 넘는 옷을 입는 사람이 식비 6만 원을 아낀다고요?”“그게 어떻게 같아요? 몇백만 원짜리 옷은 볼 수도 있고 만질 수도 있잖아요
한현진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집을 나선 한현진은 강한서에게 황씨 아주머니의 월급 인상에 관해 상의했다. 강한서와 강민서가 집을 나선 지 얼마 되지 않아 주혁이 한현진을 데리러 도착했다. 별장을 벗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한현진은 순간 길가에서 누군가의 움직임을 포착했다. 어쩐지 눈에 익은 인영이었다. 한현진이 탄 차가 그 사람과 가까워져서야 한현진은 그 사람이 은서하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한현진은 다급히 주혁에게 차를 세우라고 말하고는 차창을 내려 은서하를 불렀다. “서하 씨!”고개를 돌린 은서하는 놀란 기색이 역력했다. “대표님이 여긴 어떻게...?”“저 이 근처에 살아요.”한현진이 물었다. “그러는 서하 씨는 여긴 어쩐 일이에요?”이 근처엔 별장을 제외하면 길가에 오가는 차가 전부였다. 사람의 그림자조차 흔하지 않은 길이었다. 은서하가 말했다. “집이 이 근처라서요.”한현진이 놀라며 말했다. “이 근처에 사신다고요?”은서하가 꿋꿋이 거짓말을 이어갔다. “네. 오늘 늦잠을 잤더니 택시가 안 잡혀서요.”한현진은 아무 말 없이 은서하를 살펴보더니 몇 초 후에야 입을 열었다. “일단 타요. 타서 얘기해요.”은서하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감사의 인사를 전하고는 종종 달려와 한현진 반대편의 문을 열고 차에 탔다. 은서하는 그제야 차에는 한현진과 운전기사뿐만 아니라 평범한 외모의 젊은 청년도 함께인 것을 발견했다. 한현진이 소개하며 말했다. “여긴 원율 씨. 제 개인 비서예요.”은서하가 원율에게 인사를 건네고는 안전벨트를 했다. 그녀는 자신의 가방을 꼭 끌어안고 공손한 자세로 한현진 옆에 앉아 있었다. 차가 출발하자 한현진이 질문을 이어갔다. “여긴 회사와 거리도 있는데 평소 출퇴근 시간이 꽤 걸리지 않아요?”은서하가 어색하게 대답했다. “외할머니 치료 때문에 집을 팔았어요. 하지만 회사 근처엔 월세가 높아서 어쩔 수 없이 먼 곳으로 옮겼어요. 평소엔 버스를 타고 다녔는데 어젯밤엔... 일이 조
한현진이 거울을 보며 옷을 정리했다. “이름이 뭐야?”“문채영.”“꽃부리 영?”강한서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 영리할 영.”“특이한 이름이네.”한현진이 멈칫했다. “너 전에 오빠가 맞선을 싫어한다고 하더니 그 여자를 못 잊어서 그런 거였어?”강한서가 말했다. “그런 것 같아.”“그럼 두 사람은 왜 안 만났던 건데?”강한서가 말했다. “자세한 건 네 오빠만 알 거야. 내가 알고 있는 건 고등학교 시절 누나 이모가 누나 아버지를 횡령, 뇌물수수 그리고 사생활이 문란한 문제를 신고했고 그로 인해 많은 사람이 연루되어 누나 아버지는 형량을 꽤 많이 받았어. 누나 어머니도 그 충격을 견디지 못하시고 실성하신 분처럼 구셨어. 그렇게 문씨 가문은 나락으로 떨어진 거야. 그때 누나는 아직 대학도 졸업하지 못했었어.”“우리 수능이 끝나자 누나는 어머니를 모시고 해외로 갔어. 그리고 2년이 지난 후 결혼했지. 남편은 부자인 교포였어. 귀국해서 결혼식을 올린 거라 민준이도 일부러 M국에서 돌아왔어. 결혼식이 끝나고 누나는 남편과 함께 해외로 갔어. 그 후로 우리는 연락이 뜸해졌고. 그리고 2년 전, 누나가 이혼하고 나서야 다시 연락하기 시작한 거야.”한현진이 물었다. “넌 그 여자와 오빠를 이어주고 싶은 거야?”강한서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누나는 민준이를 만나고 싶어 해. 난 그저 중간에서 다리를 놓아주는 것뿐이야. 두 사람이 어떤 사이로 발전할지는 두 사람 일이지.”강한서가 멈칫하더니 말을 이었다. “어렸을 때 그 감정이 지금은 얼마나 남아있을지 모르지. 누나가 이혼 후 2년이 흘렀어. 만약 나라면 그리고 아직도 그 사람을 사랑한다면 바로 전남편에게 꽃이라도 사 들고 찾아가 이혼을 축하해줄 거야. 그리고 바로 누나를 찾아갔겠지. 하지만 네 오빠는 그저 가만히 있었어. 이혼한 걸 몰랐을 리가 없어.”한현진이 의미심장하게 말했다. “만약 너였다면 넌 출국하기도 전에 잡혔을 거야. 그리고 오빠는 너처럼 멍청하지 않아. 그렇게 창피한 일은
문자를 확인한 강한서는 몸을 일으키며 답장을 했다.[고마워요, 누나도 잘 지내죠?][응, 잘 지내지. 나 내일 귀국하는데 시간 되면 밥이나 먹자.][그래요.][네 와이프 송씨 집안에서 잃어버린 딸이라던데, 너랑 민준이는 형님 동생 하면서 지내는 거야? 어떻게 지낼만해?]송민준의 상황을 묻기 위해 연락했다는 걸 알아챈 강한서가 바로 답장을 보내주었다.[괜찮긴 한데 너무 동생 바보라서 나 별로 안 좋아해요. 누나도 송민준 못 본 지 오래됐죠? 내일 같이 나갈게요.][그래, 안 바쁘면 민준이 여자친구도 같이 불러.]강한서는 문채영이 떠보기 위해 하는 말인 걸 알았지만 모른 척 대꾸했다.[송민준 여자친구 없어요, 솔로에요.]그 말에 적잖이 놀란 건지 글자뿐인 문자에서도 문채영의 놀라움이 전해져왔다.[진짜?][누나도 송민준 성격 알잖아요. 얼마나 사람 짜증 나게 하는데, 그렇게 쓸데없는 말 많이 하는 사람이 여자친구를 사귈 리가 없잖아요.]그 말에 눈물을 흘리면서도 입은 웃고 있는 이모티콘을 보내온 문채영은 곧바로 한마디 더 보탰다.[너도 와이프 데려와, 선물 준비했으니까.][네.]이튿날 아침, 강한서는 머리를 말리고 있는 한현진 곁으로 다가가 어젯밤 문채영과 했던 말을 전했다.“내가 아는 사람이야?”그 말에 강한서가 고개를 젓자 한현진은 또 물었다.“남자야 여자야?”“여자.”그 말에 한현진이 잠시 멈칫하자 강한서가 한마디 더 보탰다.“네 새언니가 될뻔한 여자야.”“우리 오빠 첫사랑?”깜짝 놀라며 묻는 한현진에 강한서는 웃으며 대답했다.“그렇다고 할 수도 있는데 실제로 만난 건 아니고 그냥 송민준이 혼자 좋아했어. 그때 같이 다니던 애들은 다 알고 있었지. 그런데...”갑자기 말을 멈추는 강한서에 한현진은 다급히 그를 재촉했다.“왜 갑자기 여기서 말을 끊어, 그런데 뭐?”강한서는 그런 한현진의 볼을 귀엽다는 듯 쓰다듬으며 입꼬리를 올렸다.“나처럼 원하는 여자를 쟁취하진 못한 거지. 그런 쪽으론 영 능력이 없어.”“우
신미정은 결혼을 재촉했지만 할머니는 결혼은 평생을 같이할 사람을 찾는 거라고 마음에 들고 잘 맞는 사람과 해야 한다면서 그렇게 서두르지 않고 있었다.그래서 자신에게 어울리는 결혼 상대를 물색하던 중 한현진의 강한서의 눈에 들게 된 것이다.교통사고까지 다 해서 고작 네 번 본 사이었고 말 한번 섞어본 적도 없어 그다지 좋아하는 건 아니었지만 보면 볼수록 한현진이 마음에 들었다.강한서도 마침 모르는 사람과 결혼해서 서로를 알아가는 게 시간 낭비 같았는데 한현진도 저런 늙은이한테 시집가는 건 원하지 않을 것 같았다.그리고 그날 교통사고도 실수이기는 하지만 한현진의 엄마가 간민혜를 차로 쳐서 죽인 건 맞기에 주강운이 갑자기 한현진한테 무슨 짓을 하기라도 할까 봐 신경 쓰이는 것도 있었다.어쨌든 주강운한테 고모가 간민혜를 만나려고 해서 그녀를 데리고 가다가 사고가 났다고 해명한 건 자신이었기에 강한서는 이 일에 대한 책임을 다하기 위해 한현진을 데리고 있고 싶었다.그렇게 자신을 설득한 강한서는 이틀 뒤 바로 한현진에 연락해 그녀와 맞선자리를 가졌다.맞선자리에서 한현진은 강한서를 알아본 듯했지만 별다른 말은 하지 않았기에 강한서도 굳이 그 일을 꺼내진 않았다.한현진은 이 맞선자리가 유상수가 꾸며낸 자리인 줄로만 알고 혹시라도 실수할까 싶어 말을 최대한 아끼고 있었지만 사실 유상수는 꿈만 꿀 뿐이지 그럴 능력이 못 되는 사람이었다.선 자리를 끝내고 본가로 돌아간 강한서는 바로 한현진의 자료를 건네주며 결혼 의사를 밝혔지만 유씨 집안을 조사해본 할머니는 바로 반대부터 했다.유씨 집안의 지위보다 아내가 아픈데도 들여다보지 않고 비서랑만 붙어있는 유상수의 사람 됨됨이가 별로라서 그의 딸도 비슷할 거라 생각해 거절한 걸 알아챈 강한서는 평소에는 그렇게 말을 아꼈으면서 이번에는 웬일로 한현진을 감싸기 시작했다.그녀가 친구를 도와 나서던 일과 그녀의 지금 상황까지 다 말한 강한서는 한현진이 아니면 결혼은 하지 않겠다고 단호히 말한 뒤 집을 나섰다.그 말에 답답해
침대에서는 늘 신사다웠던 강한서였기에 한현진은 하면서도 아픈 적은 정말 손에 꼽을 정도였다.그래서 당연히 실망은 하지 않았지만 그저 간간이 색다른 그의 모습을 바랐던 적은 있었다.사실 별로 감출 것도 없는 일이지만 갑자기 물어오는 강한서에 부끄러워진 한현진은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쓰며 말했다.“잠이나 자!”그에 웃음을 흘리던 강한서는 한현진을 이불과 함께 끌어와 제 품에 안더니 낮은 목소리로 놀리기 시작했다.“얘기마저 하고 자. 앞으로 어떻게 널 만족시켜야 하는지는 알려줘야지.”“현진아, 현진아. 좀 더 자세하게 얘기해보라니까?”진짜 머리가 어떻게 된 건가.어떻게 하면 만족할지를 자세하게 말하라니, 한현진이 미치지 않고서야 그런 짓을 할 리가 없었다.강한서는 그렇게 한현진을 한참 놀리다가 자리에 제대로 누우며 천천히 다시 입을 열었다.“나 오늘 내가 부계정으로 올렸던 피드들 다시 봤는데 진짜 너무 유치하더라, 전에는 내가 그 정도인 줄은 몰랐는데.”“너 원래 유치하잖아, 닉네임만 봐도 알리지 않아?”코웃음을 치며 말하는 한현진에 강한서가 웃어 보였다.“그 이름 내가 지은 거 아니야.”사실 그 계정은 일상을 공유하기 위해 만든 게 아니라 사업에 필요해서 만든 거였다.그때 한성 그룹에서 개발 중인 신제품에 대해 말이 좀 많았었는데 영향력이 좀 있는 사람들까지 그간의 데이터들을 언급하며 한성에는 그 정도 기술이 없다고, 전부 허위 홍보일 뿐이라는 소문을 퍼뜨리고 있어서 그걸 반격하기 위해 만들어진 계정이었다.그 신제품이 진짠지 가짠지 누구보다 잘 아는 강한서는 화가 나서 자신의 본 계정으로 반박문을 내려고 했지만 본 계정으로 낸 입장문이라면 큰 효과가 없을 거라던 한성우의 말에 설득당해 ‘다이아몬드 수저의 일상’이라는 계정이 생기게 된 것이었다.한성우의 말대로 부계정을 사용해 자신의 생각을 밝히니 사람들이 좀 더 쉽게 받아들였고 덕분에 팔로워도 점점 더 많아지고 있었다.자신의 화려한 배경이 사라지니 허구한 날 걸고넘어지던 사람들도
한현진은 목소리를 가다듬으며 딱딱하게 물었다.“말해 빨리, 나 잘 거니까.”“네가 싫다고 해도 내가 강제로 몰아붙이는 거 좋아한다고 했잖아. 그런데 하다가 네가 진짜로 하기 싫어질 수도 있는 건데 그걸 내가 구별할 수 있을까? 네가 진짜 싫은 건지 아니면 그냥 하는 말인지 잘 몰라서 실수하면 어떡해?”“잘 나가다가 내가 갑자기 왜 화를 내겠어?”“지금도 갑자기 화내잖아, 아까는 막 나 유혹하더니. 아무 예고도 없이 화내는 게 한두 번이야?”그 말을 들은 한현진은 돌아누워 강한서와 눈을 맞추며 따지기 시작했다.“그러니까 네 말은 내가 이유도 없이 자꾸 화만 낸다 그거야?”“아니, 그런 게 아니라 네가 진짜 하기 싫은 건데 내가 그걸 못 알아보고 계속하다가 너 다치게 할까 봐 그러지.”“진짜 싫으면 내가 너 물 거니까 그딴 걱정 할 필요 없어.”그 말에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던 강한서는 언제 풀었는지는 모르지만 이미 자유로워진 손으로 한현진의 손목을 잡으며 그녀의 입술에 입을 맞췄다.한현진이 그걸 왜 혼자 풀어냈냐고 따지기도 전에 혀를 입속으로 밀어 넣으며 치열을 고르게 훑고 지나가는 강한서에 한현진의 몸은 빠르게 나른해졌다.강한서가 입을 뗐을 때 한현진의 얼굴과 입술은 이미 빨개져 있었고 그녀는 가만히 누운 채 숨만 내뱉으며 아무런 힘도 쓰지 못하고 있었다.한현진 위에 올라타 있었던 강한서는 얼굴에 옅은 미소를 띤 채 그녀를 바라보더니 득의양양하게 말했다.“안 깨물었네.”한현진이 그 말의 뜻의 완전히 깨닫기도 전에 강한서는 또다시 입을 맞춰왔다.시간을 얼추 계산해보니 3달은 넘은 것 같아 사실상 관계를 한다고 해도 문제 될 건 없었기에 한현진은 쥐고 있던 강한서의 머리채를 놓아주고 몸에 힘을 뺐다.그렇게 키스를 이어나가던 강한서는 한참 만에 한현진을 놓아주더니 그대로 이불을 덮어주고는 그녀의 이마에 입을 맞추며 말했다.“자자 이제.”그 말에 어이가 없다는 듯 천장만 바라보던 한현진은 문득 인터넷에서 봤던 피드가 하나 떠올랐다.
강한서는 영문은 몰랐지만 그래도 한현진에게 벨트를 건네주었다.“뒤돌아서 손 등 뒤로 보내.”강한서는 한현진이 뭘 할지 알았지만 그래도 고분고분하게 뒤로 돌고는 손을 등 뒤로 교차시켰다.오래전에 배웠던 로프 묶는 방법을 오늘에서야 쓰게 되니 기뻤는지 한현진은 잔뜩 흥분한 채로 강한서의 손목을 묶었다.“이제 뒤 돌아도 돼.”한현진의 말에 따라 뒤로 돈 강한서는 손이 묶인 채로 그녀 앞에 꿇어앉았다.방금 샤워를 하고 나와 젖은 머리카락을 대충 뒤로 넘겨두었는데 강한서가 고개를 숙이니 머리카락도 앞으로 툭 하고 떨어져나와 그의 반쪽 얼굴을 가려버렸다.얼굴 앞에 드리운 머리칼 사이로 보이는 검은 눈동자에 한현진의 심장은 다시금 두근대기 시작했다.이제 보니 여자들이 정장을 입은 남자가 꿇어앉아 있는데 환장하는 이유가 있는 것 같았다.“맘에 들어?”낮은 목소리로 누구 하나 홀리려고 작정한 듯이 말하는 강한서에 한현진은 귀를 붉힌 채 말했다.“응, 맘에 들어.”“강운 그룹 사모님이 이런 취향인 줄은 몰랐는데, 진작에 나 이렇게 묶어 놓고 싶었겠네?”웃음을 흘리며 말하는 강한서에 한현진은 헛기침을 하며 떨리는 심장을 진정시키고는 입을 열었다.“그건 아니고. 난 네가 날 이렇게 대해주길 더 원했어.”오랜 시간 동안 부부로 살아온 좋은 점이라 하면 아마도 서로에게 더 뻔뻔해질 수 있는 게 아닐까 싶다.그래서 이런 낯간지러운 말을 해도 부끄러움이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강한서는 가만히 꿇어앉아 제 아내가 하는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나는 내가 싫다고 해도 네가 억지로 하는 걸 더 좋아해. 그리고 다 한 다음에 침대에 꿇어앉아서 나한테 용서를 비는 게 보고 싶었어. 내 취향은 그런 거라서.”한현진의 말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었던 강한서는 한참 만에 입을 열었다.“그럼 전에 우리가 싸울 때 내가 화나서 입 맞췄을 때는 왜 나 때린 거야? 그날도 내가 억지로 너 몰아세우고 하려고 했었잖아, 좋아한다면서 그때는 왜 나 죽이겠다고 그런 건데?”“진짜
송가람은 생각했다. ‘오빠는 그날 히비스커스 호텔에서 있었던 일 때문에 아직 나를 어떻게 마주하면 좋을지 모르겠는 거야. 게다가 내가 오빠 외숙모 때문에 다치기까지 했으니 분명 엄청난 죄책감에 시달리고 있을 거야. 그러니 이렇게 간단한 문자에도 오래 고민하는 거겠지.’강한서가 대화창을 보며 물었다. “뭐라고 답장한 거야?”한현진이 불퉁한 말투로 말했다. “이래도 안 돼, 저래도 안 되라고 하니까 어쩌겠어. 어떻게 답장하면 좋을지 모르겠으니까 모르겠다고 했지.”한현진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송가람에게서 답장이 왔다. [한서 오빠, 사실 그날 호텔에서 있었던 일은 저희 엄마가 너무 하셨어요. 오빠가 그렇게 대답한 것도 어쩔 수 없어서 그랬다는 거 알아요. 저 오빠 원망 안 해요.]눈을 마주친 강한서와 한현진 두 사람 모두 할 말을 잃었다. 이쪽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 상대방이 알아서 넘어왔다. 두 사람이 이렇게 열띤 토론을 펼칠 이유가 전혀 없었다. 한현진이 문자를 보냈다. [몸은 어때. 삼촌 일은, 내가 미안해.]송가람은 다시 한 번 그동안 강한서가 연락하지 않은 이유를 확신할 수 있었다. 그녀가 얼른 답장을 보냈다. [전 괜찮아요, 오빠. 네가 멋대로 결정했다고 오빠가 널 미워하지만 않는다면요.]한현진: [치료 잘 받아.]송가람이 얌전함을 표현하는 이모티콘을 전송했다. [오빠, 생일 파티할 거예요?]한현진: [아니. 그럴 기분이 아니라서.]그 말에 송가람의 얼굴엔 실망한 기색이 역력했다. 그녀느 사실 강한서가 조금 보고 싶었다. 고백 멘트를 작성하던 송가람은 서해금의 충고를 떠올리고 문자를 삭제했다. ‘조금만 더 기다려. 한현진을 회사에서 쫓아낼 때까지만.’송가람이 여전히 문자를 작성하고 있던 그 시점에 상대방에게서 문자가 도착했다. [현진 씨에게 들으니까 요즘 회사에서 대회 준비가 한창이라던데. 요즘 바빠?]송가람: [네. 조향 대회가 있어서요. 지금 한창 참가자 신청을 받고 있어요.]한현진: [네가 대회에서 좋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