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서."한성우는 물병을 따서 물을 한 모금 마셨다."드디어 연락됐어. 열 시 반쯤이면 도착할 거야."주강운은 멈칫하더니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잘됐네."한성우는 장례식장을 들여다보며 물었다."형수님은?""시신 메이크업하는 거 보고 있어."한성우는 소름이 돋아 나지막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간도 크네."장례 복원 메이크업 전문가는 유현진의 요구대로 하현주의 몸을 깨끗하게 닦고 메이크업을 했다.그들의 솜씨는 대단했다. 유현진은 하현주의 젊었을 때 모습을 보는 것만 같았다.머리카락도 검고 얼굴에도 살이 붙어있다. 웃음기가 없는 얼굴은 엄숙해 보였다.하현주는 조용히 누워있다. 마치 깊은 잠에 든 것처럼 말이다.장례 지도사는 하현주에게 신발을 신겨 줄 것이냐고 물었다.한주시에는 가족이 사망했을 때 직접 신발을 신겨주면 청명에 망자가 집에 돌아온다는 속설이 있다.유현진은 거절했다.그녀는 담담하게 말했다."망자에게 영혼이 있다면, 난 엄마가 영원히 집에 돌아가지 않길 바라요."그곳은 심지어 집이라고 부를 수도 없었다.9시가 되기도 전에 장례식장에 사람들이 하나둘 들어오기 시작했다.한성우와 주강운의 덕분으로 모든 게 순리롭게 진행되었다.한씨 가문과 주씨 가문의 사람이 현장에서 향을 피우고 길을 안내하니 하현주의 추도회는 아주 품격 있어 보였다.유현진은 검은 옷을 입고 머리를 묶어 올렸으며 하얀 머리핀을 꽂았다.그녀는 화장기 없는 순수한 얼굴로 조문객들에게 고개를 숙이며 인사했다.장례식장 밖에서 박해서가 차를 세우고 내렸다. 그리고 다급히 뒷좌석의 차 문을 열었다. 차에서 검은색 옷을 입은 여자아이가 내렸다.165센티 좌우의 키에 하얀 피부, 마른 몸매에 작은 얼굴, 큰 눈과 정갈한 오관."오빠, 장례식장이 너무 작아."송가람은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송민준은 반대편에서 내려 송가람의 이마를 콩하고 쥐어박았다."이따 현진 씨 앞에서 함부로 말하면 안 돼. 널 구해준 은인이야."송가람은 이마를 어루만지며 나지막하게
유씨 가문 스캔들은 이미 온 한주시를 떠들썩하게 만들었지만 오늘은 하현주의 장례식이라 사람들은 이에 대해 말하지 않았다. 아무래도 사망한 사람이 위주인 자리니 말썽을 부릴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하지만 송민준은 하나도 신경 쓰지 않았다.장례식장에 들어오자마자 유상수가 유현진에게 뭐라고 하니 기분이 언짢았다.송민준이 알아본 데 의하면 하현주는 성격이 강한 것 이외에는 아주 대단한 인물이다. 그런데 어떻게 이런 양심 없는 남자와 결혼했는지 도무지 이해되지 않았다.유상수의 등은 순식간에 굳어졌다. 그는 화가 난 듯한 표정으로 몸을 돌려 눈앞의 이 낯선 남자를 바라보며 미간을 찌푸렸다."내 딸과 얘기하는데 당신이 뭔데 참견이요?"송민준이 입을 열려는 순간, 유현진이 먼저 말했다."유상수 씨. 오늘 우리 엄마 장례예요. 마지막 길 배웅하러 왔으면 그 입 다물고 애도나 해요. 하지만 말썽을 일으키러 왔다면 당장 나가주세요!"유상수는 표정이 일그러지더니 어금니를 깨물며 말했다."너 지금 뭐라고 했어? 난 네 아빠야!"유현진은 한심하다는 듯 입꼬리를 올리고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아빠라는 호칭 더럽히지 마세요. 당신과 여기서 싸우기 싫어요. 그런데 우리 엄마 장례식에서 말썽을 부린다면 난 당신의 그 아들딸을 죽기보다 괴롭게 만들 거예요. 믿기 싫으면 한 번 해보시던가요."유현진은 잠시 멈칫하다가 유상수의 귓가에 조용히 말했다."서강 초등학교 맞죠?"유현진의 쌀쌀한 눈빛에 유상수는 저도 몰래 소름이 돋으면서 섬뜩했다.유현진은 유상수에게 아들이 있다는 사실과 다니는 학교까지 다 알고 있었다.유상수는 유현아가 당했던 모습이 떠올라 식은땀이 났다. 그는 놀라움과 두려움이 가득 찬 눈빛으로 유현진을 노려보았지만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빨리 자리를 피하고 싶었던 유상수는 한쪽으로 가서 잠자코 서 있었다.송민준과 송가람은 영정 사진 앞에 꽃을 두고 허리를 굽혀 인사한 뒤 유현진에게 다가갔다."현진 씨, 힘내요."유현진은 머리를 살짝 끄덕였다."고
송민희의 말에 기분이 조금은 풀린 정인월은 이내 쌀쌀한 눈빛으로 신미정을 쏘아보고는 송민희의 부축을 받으며 들어갔다.강민서도 신미정을 탓했다.비록 유현진의 카드를 막아버려서 하현주가 사망한 것은 아니지만 하필 이때 손을 썼으니 하현주의 사망에는 신미정의 책임도 있다.그렇다고 강민서가 하현주의 죽음을 애도하는 것은 아니다. 그저 강한서가 돌아왔을 때 자기한테까지 불똥이 튈까 봐 두려운 것뿐이다."민서야, 네 엄마 부축해."강단해가 옆에서 담담히 입을 열었다.강민서는 대충 대답하고 마지못해 신미정에게 다가가 부축했다."엄마, 우리도 들어가요."강씨 가문 사람들의 등장에 모두 길을 비켜주었다.정인월은 입술을 오므리고 무거운 표정으로 걸어들어왔다.그녀의 발걸음은 평소보다 무거웠다. 송민희는 주강운에게서 국화꽃을 받아 정인월에게 넘겨주었다.애도를 끝낸 뒤, 정인월은 유현진에게 다가갔다.며칠 사이에 바싹 마른 유현진의 모습에 정인월은 마음이 아팠다.정인월은 유현진의 손을 잡으며 나지막한 소리로 말했다."얘야, 힘들겠구나. 내가 늦었어."유현진은 코끝이 찡해지더니 눈물이 쏟아질 뻔했다.그녀는 애써 눈물을 참으로 갈라진 목소리로 말했다."할머니, 저 괜찮아요.""괜찮을 리가 있겠어?"정인월은 자애로운 손길로 그녀의 얼굴을 쓰다듬으며 나지막하게 말했다."두려워하지 마. 이제 강씨 가문이 네 친정이야. 이 할미가 지켜줄 테니 아무도 널 건드리지 못해."유현진은 머리를 푹 숙이며 말했다."고마워요, 할머니."정인월은 비록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지만 워낙 장소가 비좁다 보니 현장에 있는 사람들은 두 사람의 대화를 똑똑히 들었다.유상수는 몹시 후회됐다. 백혜주의 말을 듣고 유현진과 얼굴을 붉히는 게 아니었다.정인월은 모두가 들으라고 하는 말이 분명했다.강씨 가문이 유현진 뒤에 있으니 유현진과의 관계만 유지해도 유씨 집안은 큰 덕을 보게 될 것이다.'여자들은 역시 머리만 길었지 생각은 짧아! 내가 그 말을 듣는 게 아니었어.'신미정의
한성우는 다급히 큰 소리로 말했다."잠시만요, 가족이 왔으니 인사 먼저 드리고 화장할게요!"장례지도사들은 동작을 멈췄다.유현진은 머리를 들었다.강한서가 정장 차림에 굳은 얼굴로 빈소에 들어왔다.두 사람의 눈이 마주쳤다. 하지만 유현진의 담담한 눈빛은 마치 낯선 사람을 바라보는 듯했다.강한서는 저도 몰래 두려움이 생겼다.한성우는 다급히 달려와 강한서의 팔에 상주 완장을 써줬다.정인월은 강한서의 얼떨떨한 표정에 입을 열었다."한서야, 어서 네 장모님 마지막 길 배웅해 드려."신미정은 강한서에게 꽃 한 송이를 넘겨주며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인사드려."강한서는 정신을 차린 뒤 꽃을 받아 들고 허리를 세 번 굽힌 뒤 관에 꽃을 넣었다.그 모습에 정인월은 미간을 찌푸렸지만 결국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인사를 올린 강한서는 유현진과 대화를 나누고 싶었지만 유현진은 보는 척도 하지 않고 장례지도사에게 말했다."진행하시죠."강한서는 입술을 오므렸다.못 박는 소리는 유난히 크게 들려왔다. 그 소리를 끝으로 하현주는 이 세상과 영원히 작별했다.화장 시간이 꽤 길어지자 한성우는 멀지 않은 곳에 미리 식당을 예약해 조문객들에게 식사를 대접했다.더 좋은 식당을 예약할 수도 있었지만 장례가 워낙 급하게 진행되다 보니 주어진 시간 안에서 최선을 다하는 수밖에 없었다.조문객들은 하나둘 자리를 떠났다. 정인월은 장시간 서 있기 힘들어 유현진과 몇 마디 대화를 나누고 차에 타면서 강한서에게 눈총을 쏘았다.강한서는 유현진에게 다가가 겨우 입을 열었다."비행기가 연착됐어."유현진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고 머리를 돌려 차미주에게 말했다."미주야, 화장실 갈래?"차미주는 가고 싶지 않았지만 두 사람의 표정을 보더니 이내 그러자고 했다.한성우는 미간을 찌푸렸다."가긴 어디가? 금방 다녀온 거 아니야? 요실금이야?"'이 강도 같은 여자는 눈치도 없이 두 사람 사랑싸움에 끼어들어!'차미주는 어금니를 꽉 깨물며 한성우를 노려보았다."요실금은 너겠지!
한성우는 멈칫했다."호흡기 때문에 돌아가셨을 수도 있어."강한서는 안색이 어두워지며 물었다."누군지 알아?""모르지. 근데 강운이 말로는 돈 때문에 그러는 건 아니래. 왜냐면 우리가 신고한다니까 바로 도망갔었거든. 병원 CCTV에 아마 얼굴 찍혔을 거야. 알아보면 누구 짓인지 바로 나오겠지."한성우는 멈칫하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맞다. 근데 너 어디로 사라진 거야. 연락도 안 되고 대체 뭐했어? 민 실장은? 같이 안 왔어?""친구한테 볼일이 있었어."강한서는 담담하게 대답했다."뭔 볼일. 그게 네가 사라질 일이야?"강한서가 말했다."그 친구 신분이 특별해서."특별한 신분이라는 말에 한성우는 입을 다물었다.'특수 요원이나 국회 사람이나 그렇겠지. 이런 건 안 물어보는 게 상책이야.'"어떻게 특별해?"문득 주강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우리가 모르는 친구도 있었어?"강한서는 입술을 오므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한성우는 주강운을 놀려주었다."너 해외에 있는 동안 우리한테도 새 친구가 생겼어. 왜, 질투해?"주강운은 미소를 짓더니 고개를 돌려 강한서에게 말했다."현진 씨 요즘 컨디션 안 좋아. 현진 씨 어머니 돌아가신 날, 현진 씨 기절했었어. 네가 좀 신경 써."강한서는 두 주먹을 꽉 쥐었다. 그는 저도 몰래 가슴이 아팠다.오후 한 시, 드디어 화장이 끝났다.한 시 반쯤 발인이 시작되었다.유현진은 하현주의 유골함을 품에 안았다.한성우의 잔소리 덕분에 강한서도 드디어 머리를 굴렸다.강한서는 적극 유골함을 받아서 들며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내가 할게."유현진은 굳이 강한서와 다투지 않고 유골함을 넘겨준 뒤 하현주의 영정 사진을 안았다.두 사람은 같은 차에 탔지만 가는 내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강한서는 몇 번이고 목구멍까지 올라온 말을 삼켰다. 사실 그도 무슨 말을 했으면 좋을지 몰랐다.하지만 유현진은 강한서와 말을 섞고 싶지 않았다.강한서는 차라리 유현진이 화라도 냈으면 싶었다.조용한 차 안에서,
그 순간, 강한서는 자기가 잘못들은 줄 알았다.강한서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이 그 말에 경악했다.유상수의 사생아 사건에 하현주까지 사망했으니 유씨 집안에 더는 유현진의 자리는 없다. 강씨 가문에서 그녀를 내치지 않았는데 유현진이 먼저 이혼을 얘기하니 사람들은 그녀가 미쳤다고 생각했다.짧은 침묵이 깨지고, 강한서는 굳은 표정으로 말했다."이런 얘기할 때가 아니야."유상수도 다급히 다가와 유현진을 야단쳤다."현진아, 너 그게 무슨 미친 소리야?"유현진은 유상수를 보는 척도 하지 않고 강한서에게 계속 말했다."나한테는 제일 좋은 시기야. 당신이 출장 다녀오면 이혼하기로 한 거 잊었어? 돌아왔으니 약속 지켜야지. 지금 출발하면 시간도 충분하니 내일 다시 만나는 일은 없어."강한서는 표정이 차가워졌다.하현주의 장례식에서, 수많은 사람이 보고 있는 앞에서, 유현진은 그에게 가차 없이 이혼을 요구했다.유현진의 행동에 강한서는 마음이 차갑게 식어버렸다.그는 어금니를 깨물며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돌아가서 얘기해!""돌아가서 얘기하기 싫어."유현진은 마음을 굳힌 듯했다."걱정하지 마. 위자료 필요 없어. 아무것도 필요 없으니 이혼만 해주면 내가 맨몸으로 왔던 것처럼 맨몸으로 나갈 거야."한성우는 당황스러운 상황에 다급히 그들을 말렸다."형수님, 마음에도 없는 얘기 하지 마세요. 어머니 장례식에서 이러지 말고 집에 가서 한서 마음껏 혼내요."한성우는 차미주에게 빨리 두 사람을 말리라는 눈빛을 보냈다.차미주는 눈을 뒤집었다.'말리긴 개뿔! 필요할 땐 어디 사라졌다가 인제 와서 사위 노릇이야. 꼴사나워 죽겠어.어머님도 돌아가셨으니 현진이도 더는 미련 없어. 그까짓 돈이 문제겠어?저 인간 어머니가 현진이 카드 정지시킨 일만 생각하면 당장이라도 동사무소 옮겨와서 두 사람 이혼시키고 싶어! 더는 현진이 힘들지 않게!'차미주가 입을 내밀고 아무 말도 하지 않으니 한성우는 머리가 터질 것 같았다.'베프라면서 왜 이럴 때는 나서지 않는 거야!'
신미정은 유현진을 힐끗 보더니 입꼬리를 올리며 강한서의 뒤를 따랐다.유상수는 화가 나서 폭발할 것 같았다. 그는 신미정이 떠나는 모습을 보고 서둘러 쫓아갔다.강씨 가문 사람들이 자리를 떠나니 다른 사람들도 흩어지기 시작했다.그들은 대부분 강씨 가문의 체면을 생각해서 이 자리에 오게 되었다. 그런데 유현진이 강한서에게 이혼을 요구하니 그들도 더는 이 자리에 있을 필요가 없어졌다.사람들이 거의 다 흩어졌을 때쯤, 송민준이 유현진에게 다가가 말했다."현진 씨…"유현진은 송민준의 말을 끊었다."혹시 강한서 편을 들 거라면 더는 얘기하지 마세요."송민준은 멈칫하더니 이내 미소를 지으며 부드러운 말투로 말했다."앞으로 어쩔 생각인지 궁금해서요."유현진은 머리를 숙이며 대답했다."아직은 아무 생각도 없어요."갑자기 한꺼번에 많은 일이 발생하니 그녀는 마음이 복잡했다."브랜드 뉴와의 계약은 어때요?"송민준은 따뜻한 목소리와 온화한 표정으로 말했다."섬블은 강한서의 지분이 있지만 브랜드 뉴에는 강한서의 지분이 없어요."송민준은 뜻은 명확했다. 강한서와 이혼할 거라면 더는 엮이는 일 없이 브랜드 뉴와 계약하는 것이 가장 좋은 선택이라는 얘기다.강한서의 와이프라는 점만 제외하면, 유현진은 송민준이 왜 자기를 유독 좋게 생각하는지 알 수 없었다.영화계에서 남아도는 것이 바로 연기파 배우다.'신인인 데다가 대표작도 아직 방송을 타지 않았는데 송 대표님은 왜 나한테 판돈을 걸려고 하는 걸까?'유현진은 입술을 오므리며 말했다."송 대표님. 제가 정말 가치를 만들수 있다고 생각하시는 거예요?"송민준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아니라면 그날 호텔에서 현진 씨가 오디션장에 뛰어들었을 때, 차 감독에게 현진 씨를 킵해라고 하지 않았을 거예요."유현진은 멈칫했다.문득 그날 오디션장에서 차이현이 문을 닫는 순간, 잠시 보였던 정장 바지를 입은 남자가 생각났다.'그게 송 대표님이었어?그러니까 전에도 날 본 적이 있었던 거야?'"현진 씨, 난 내 안목을
차미주는 유현진이 괜찮을 줄 알았다. 하지만 차미주가 밤중에 물 마시러 일어났을 때, 거실에서 유현진의 울먹이는 소리가 들려왔다.유현진은 그렇게 강하지 못했다. 그저 약한 모습을 다른 사람에게 꼭꼭 숨긴 것뿐이다.하현주가 저세상에 갔으니, 유현진에게는 투정을 부릴 수 있는 따뜻한 품도 없어졌다.차미주는 문 앞에 기대앉아 유현진의 울음소리를 들으며 슬픔에 젖었다.그녀는 엄마에게 메시지를 보냈다."엄마, 나 이젠 엄마 화나게 안 할게. 그러니까 내 옆에서 오래오래 살아야 해."몇 초도 지나지 않아 답장이 왔다."미친년!"…...역시나 이런 건 그녀의 엄마에게 안 통한다.같은 시각, 강한서는 집에 들어왔다. 황씨 아주머니는 강한서의 물건을 정리하느라 분주했다.강한서는 넥타이를 당기며 현관을 바라보았다. 유현진의 물건은 그대로 있었다. 그 사이 집에 돌아오지 않은 듯하다.강한서는 미간을 찌푸렸다."요 며칠 집에 안 들어왔어요?""네. 대표님 출장 가시고 얼마 안 돼 사모님 어머니한테 상황이 생겨 병원에 가셔서 그사이 몇 번 갈아입을 옷만 가져다드렸어요. 아, 맞다. 대표님 어머니가 두고 가신 약도 한 번 가져갔었어요.""약이요?""한약 있잖아요. 어르신이 계실 때, 민서 아가씨가 한약 가져왔다가 어르신과 다툼이 생겼잖아요. 그때 남은 한약 몇 개 있었는데 사모님이 부탁하셔서 가져다드렸어요."강한서는 외투를 벗으며 물었다."약은 왜요?""그건 저도 잘 몰라요. 그때 안색이 아주 어두워 보였어요."강한서는 미간을 찌푸렸다."요즘 다른 일은 없었어요?"황씨 아주머니는 고개를 저었다.강한서도 더는 묻지 않았다.위층으로 올라가려고 할 때 황씨 아주머니가 갑자기 그를 불렀다."대표님, 사모님 오늘 집에 들어와요? 문 열어둘까요?"강한서는 손가락을 움츠리더니 한참 뒤에야 입을 열었다."그러세요."강한서는 안방 문을 열었다. 안방에는 유현진의 숨결이 남아 있었다.그는 창문을 열려던 손을 멈추고 커튼을 치더니 이내 침대에 누웠다.
한현진이 거울을 보며 옷을 정리했다. “이름이 뭐야?”“문채영.”“꽃부리 영?”강한서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 영리할 영.”“특이한 이름이네.”한현진이 멈칫했다. “너 전에 오빠가 맞선을 싫어한다고 하더니 그 여자를 못 잊어서 그런 거였어?”강한서가 말했다. “그런 것 같아.”“그럼 두 사람은 왜 안 만났던 건데?”강한서가 말했다. “자세한 건 네 오빠만 알 거야. 내가 알고 있는 건 고등학교 시절 누나 이모가 누나 아버지를 횡령, 뇌물수수 그리고 사생활이 문란한 문제를 신고했고 그로 인해 많은 사람이 연루되어 누나 아버지는 형량을 꽤 많이 받았어. 누나 어머니도 그 충격을 견디지 못하시고 실성하신 분처럼 구셨어. 그렇게 문씨 가문은 나락으로 떨어진 거야. 그때 누나는 아직 대학도 졸업하지 못했었어.”“우리 수능이 끝나자 누나는 어머니를 모시고 해외로 갔어. 그리고 2년이 지난 후 결혼했지. 남편은 부자인 교포였어. 귀국해서 결혼식을 올린 거라 민준이도 일부러 M국에서 돌아왔어. 결혼식이 끝나고 누나는 남편과 함께 해외로 갔어. 그 후로 우리는 연락이 뜸해졌고. 그리고 2년 전, 누나가 이혼하고 나서야 다시 연락하기 시작한 거야.”한현진이 물었다. “넌 그 여자와 오빠를 이어주고 싶은 거야?”강한서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누나는 민준이를 만나고 싶어 해. 난 그저 중간에서 다리를 놓아주는 것뿐이야. 두 사람이 어떤 사이로 발전할지는 두 사람 일이지.”강한서가 멈칫하더니 말을 이었다. “어렸을 때 그 감정이 지금은 얼마나 남아있을지 모르지. 누나가 이혼 후 2년이 흘렀어. 만약 나라면 그리고 아직도 그 사람을 사랑한다면 바로 전남편에게 꽃이라도 사 들고 찾아가 이혼을 축하해줄 거야. 그리고 바로 누나를 찾아갔겠지. 하지만 네 오빠는 그저 가만히 있었어. 이혼한 걸 몰랐을 리가 없어.”한현진이 의미심장하게 말했다. “만약 너였다면 넌 출국하기도 전에 잡혔을 거야. 그리고 오빠는 너처럼 멍청하지 않아. 그렇게 창피한 일은
문자를 확인한 강한서는 몸을 일으키며 답장을 했다.[고마워요, 누나도 잘 지내죠?][응, 잘 지내지. 나 내일 귀국하는데 시간 되면 밥이나 먹자.][그래요.][네 와이프 송씨 집안에서 잃어버린 딸이라던데, 너랑 민준이는 형님 동생 하면서 지내는 거야? 어떻게 지낼만해?]송민준의 상황을 묻기 위해 연락했다는 걸 알아챈 강한서가 바로 답장을 보내주었다.[괜찮긴 한데 너무 동생 바보라서 나 별로 안 좋아해요. 누나도 송민준 못 본 지 오래됐죠? 내일 같이 나갈게요.][그래, 안 바쁘면 민준이 여자친구도 같이 불러.]강한서는 문채영이 떠보기 위해 하는 말인 걸 알았지만 모른 척 대꾸했다.[송민준 여자친구 없어요, 솔로에요.]그 말에 적잖이 놀란 건지 글자뿐인 문자에서도 문채영의 놀라움이 전해져왔다.[진짜?][누나도 송민준 성격 알잖아요. 얼마나 사람 짜증 나게 하는데, 그렇게 쓸데없는 말 많이 하는 사람이 여자친구를 사귈 리가 없잖아요.]그 말에 눈물을 흘리면서도 입은 웃고 있는 이모티콘을 보내온 문채영은 곧바로 한마디 더 보탰다.[너도 와이프 데려와, 선물 준비했으니까.][네.]이튿날 아침, 강한서는 머리를 말리고 있는 한현진 곁으로 다가가 어젯밤 문채영과 했던 말을 전했다.“내가 아는 사람이야?”그 말에 강한서가 고개를 젓자 한현진은 또 물었다.“남자야 여자야?”“여자.”그 말에 한현진이 잠시 멈칫하자 강한서가 한마디 더 보탰다.“네 새언니가 될뻔한 여자야.”“우리 오빠 첫사랑?”깜짝 놀라며 묻는 한현진에 강한서는 웃으며 대답했다.“그렇다고 할 수도 있는데 실제로 만난 건 아니고 그냥 송민준이 혼자 좋아했어. 그때 같이 다니던 애들은 다 알고 있었지. 그런데...”갑자기 말을 멈추는 강한서에 한현진은 다급히 그를 재촉했다.“왜 갑자기 여기서 말을 끊어, 그런데 뭐?”강한서는 그런 한현진의 볼을 귀엽다는 듯 쓰다듬으며 입꼬리를 올렸다.“나처럼 원하는 여자를 쟁취하진 못한 거지. 그런 쪽으론 영 능력이 없어.”“우
신미정은 결혼을 재촉했지만 할머니는 결혼은 평생을 같이할 사람을 찾는 거라고 마음에 들고 잘 맞는 사람과 해야 한다면서 그렇게 서두르지 않고 있었다.그래서 자신에게 어울리는 결혼 상대를 물색하던 중 한현진의 강한서의 눈에 들게 된 것이다.교통사고까지 다 해서 고작 네 번 본 사이었고 말 한번 섞어본 적도 없어 그다지 좋아하는 건 아니었지만 보면 볼수록 한현진이 마음에 들었다.강한서도 마침 모르는 사람과 결혼해서 서로를 알아가는 게 시간 낭비 같았는데 한현진도 저런 늙은이한테 시집가는 건 원하지 않을 것 같았다.그리고 그날 교통사고도 실수이기는 하지만 한현진의 엄마가 간민혜를 차로 쳐서 죽인 건 맞기에 주강운이 갑자기 한현진한테 무슨 짓을 하기라도 할까 봐 신경 쓰이는 것도 있었다.어쨌든 주강운한테 고모가 간민혜를 만나려고 해서 그녀를 데리고 가다가 사고가 났다고 해명한 건 자신이었기에 강한서는 이 일에 대한 책임을 다하기 위해 한현진을 데리고 있고 싶었다.그렇게 자신을 설득한 강한서는 이틀 뒤 바로 한현진에 연락해 그녀와 맞선자리를 가졌다.맞선자리에서 한현진은 강한서를 알아본 듯했지만 별다른 말은 하지 않았기에 강한서도 굳이 그 일을 꺼내진 않았다.한현진은 이 맞선자리가 유상수가 꾸며낸 자리인 줄로만 알고 혹시라도 실수할까 싶어 말을 최대한 아끼고 있었지만 사실 유상수는 꿈만 꿀 뿐이지 그럴 능력이 못 되는 사람이었다.선 자리를 끝내고 본가로 돌아간 강한서는 바로 한현진의 자료를 건네주며 결혼 의사를 밝혔지만 유씨 집안을 조사해본 할머니는 바로 반대부터 했다.유씨 집안의 지위보다 아내가 아픈데도 들여다보지 않고 비서랑만 붙어있는 유상수의 사람 됨됨이가 별로라서 그의 딸도 비슷할 거라 생각해 거절한 걸 알아챈 강한서는 평소에는 그렇게 말을 아꼈으면서 이번에는 웬일로 한현진을 감싸기 시작했다.그녀가 친구를 도와 나서던 일과 그녀의 지금 상황까지 다 말한 강한서는 한현진이 아니면 결혼은 하지 않겠다고 단호히 말한 뒤 집을 나섰다.그 말에 답답해
침대에서는 늘 신사다웠던 강한서였기에 한현진은 하면서도 아픈 적은 정말 손에 꼽을 정도였다.그래서 당연히 실망은 하지 않았지만 그저 간간이 색다른 그의 모습을 바랐던 적은 있었다.사실 별로 감출 것도 없는 일이지만 갑자기 물어오는 강한서에 부끄러워진 한현진은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쓰며 말했다.“잠이나 자!”그에 웃음을 흘리던 강한서는 한현진을 이불과 함께 끌어와 제 품에 안더니 낮은 목소리로 놀리기 시작했다.“얘기마저 하고 자. 앞으로 어떻게 널 만족시켜야 하는지는 알려줘야지.”“현진아, 현진아. 좀 더 자세하게 얘기해보라니까?”진짜 머리가 어떻게 된 건가.어떻게 하면 만족할지를 자세하게 말하라니, 한현진이 미치지 않고서야 그런 짓을 할 리가 없었다.강한서는 그렇게 한현진을 한참 놀리다가 자리에 제대로 누우며 천천히 다시 입을 열었다.“나 오늘 내가 부계정으로 올렸던 피드들 다시 봤는데 진짜 너무 유치하더라, 전에는 내가 그 정도인 줄은 몰랐는데.”“너 원래 유치하잖아, 닉네임만 봐도 알리지 않아?”코웃음을 치며 말하는 한현진에 강한서가 웃어 보였다.“그 이름 내가 지은 거 아니야.”사실 그 계정은 일상을 공유하기 위해 만든 게 아니라 사업에 필요해서 만든 거였다.그때 한성 그룹에서 개발 중인 신제품에 대해 말이 좀 많았었는데 영향력이 좀 있는 사람들까지 그간의 데이터들을 언급하며 한성에는 그 정도 기술이 없다고, 전부 허위 홍보일 뿐이라는 소문을 퍼뜨리고 있어서 그걸 반격하기 위해 만들어진 계정이었다.그 신제품이 진짠지 가짠지 누구보다 잘 아는 강한서는 화가 나서 자신의 본 계정으로 반박문을 내려고 했지만 본 계정으로 낸 입장문이라면 큰 효과가 없을 거라던 한성우의 말에 설득당해 ‘다이아몬드 수저의 일상’이라는 계정이 생기게 된 것이었다.한성우의 말대로 부계정을 사용해 자신의 생각을 밝히니 사람들이 좀 더 쉽게 받아들였고 덕분에 팔로워도 점점 더 많아지고 있었다.자신의 화려한 배경이 사라지니 허구한 날 걸고넘어지던 사람들도
한현진은 목소리를 가다듬으며 딱딱하게 물었다.“말해 빨리, 나 잘 거니까.”“네가 싫다고 해도 내가 강제로 몰아붙이는 거 좋아한다고 했잖아. 그런데 하다가 네가 진짜로 하기 싫어질 수도 있는 건데 그걸 내가 구별할 수 있을까? 네가 진짜 싫은 건지 아니면 그냥 하는 말인지 잘 몰라서 실수하면 어떡해?”“잘 나가다가 내가 갑자기 왜 화를 내겠어?”“지금도 갑자기 화내잖아, 아까는 막 나 유혹하더니. 아무 예고도 없이 화내는 게 한두 번이야?”그 말을 들은 한현진은 돌아누워 강한서와 눈을 맞추며 따지기 시작했다.“그러니까 네 말은 내가 이유도 없이 자꾸 화만 낸다 그거야?”“아니, 그런 게 아니라 네가 진짜 하기 싫은 건데 내가 그걸 못 알아보고 계속하다가 너 다치게 할까 봐 그러지.”“진짜 싫으면 내가 너 물 거니까 그딴 걱정 할 필요 없어.”그 말에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던 강한서는 언제 풀었는지는 모르지만 이미 자유로워진 손으로 한현진의 손목을 잡으며 그녀의 입술에 입을 맞췄다.한현진이 그걸 왜 혼자 풀어냈냐고 따지기도 전에 혀를 입속으로 밀어 넣으며 치열을 고르게 훑고 지나가는 강한서에 한현진의 몸은 빠르게 나른해졌다.강한서가 입을 뗐을 때 한현진의 얼굴과 입술은 이미 빨개져 있었고 그녀는 가만히 누운 채 숨만 내뱉으며 아무런 힘도 쓰지 못하고 있었다.한현진 위에 올라타 있었던 강한서는 얼굴에 옅은 미소를 띤 채 그녀를 바라보더니 득의양양하게 말했다.“안 깨물었네.”한현진이 그 말의 뜻의 완전히 깨닫기도 전에 강한서는 또다시 입을 맞춰왔다.시간을 얼추 계산해보니 3달은 넘은 것 같아 사실상 관계를 한다고 해도 문제 될 건 없었기에 한현진은 쥐고 있던 강한서의 머리채를 놓아주고 몸에 힘을 뺐다.그렇게 키스를 이어나가던 강한서는 한참 만에 한현진을 놓아주더니 그대로 이불을 덮어주고는 그녀의 이마에 입을 맞추며 말했다.“자자 이제.”그 말에 어이가 없다는 듯 천장만 바라보던 한현진은 문득 인터넷에서 봤던 피드가 하나 떠올랐다.
강한서는 영문은 몰랐지만 그래도 한현진에게 벨트를 건네주었다.“뒤돌아서 손 등 뒤로 보내.”강한서는 한현진이 뭘 할지 알았지만 그래도 고분고분하게 뒤로 돌고는 손을 등 뒤로 교차시켰다.오래전에 배웠던 로프 묶는 방법을 오늘에서야 쓰게 되니 기뻤는지 한현진은 잔뜩 흥분한 채로 강한서의 손목을 묶었다.“이제 뒤 돌아도 돼.”한현진의 말에 따라 뒤로 돈 강한서는 손이 묶인 채로 그녀 앞에 꿇어앉았다.방금 샤워를 하고 나와 젖은 머리카락을 대충 뒤로 넘겨두었는데 강한서가 고개를 숙이니 머리카락도 앞으로 툭 하고 떨어져나와 그의 반쪽 얼굴을 가려버렸다.얼굴 앞에 드리운 머리칼 사이로 보이는 검은 눈동자에 한현진의 심장은 다시금 두근대기 시작했다.이제 보니 여자들이 정장을 입은 남자가 꿇어앉아 있는데 환장하는 이유가 있는 것 같았다.“맘에 들어?”낮은 목소리로 누구 하나 홀리려고 작정한 듯이 말하는 강한서에 한현진은 귀를 붉힌 채 말했다.“응, 맘에 들어.”“강운 그룹 사모님이 이런 취향인 줄은 몰랐는데, 진작에 나 이렇게 묶어 놓고 싶었겠네?”웃음을 흘리며 말하는 강한서에 한현진은 헛기침을 하며 떨리는 심장을 진정시키고는 입을 열었다.“그건 아니고. 난 네가 날 이렇게 대해주길 더 원했어.”오랜 시간 동안 부부로 살아온 좋은 점이라 하면 아마도 서로에게 더 뻔뻔해질 수 있는 게 아닐까 싶다.그래서 이런 낯간지러운 말을 해도 부끄러움이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강한서는 가만히 꿇어앉아 제 아내가 하는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나는 내가 싫다고 해도 네가 억지로 하는 걸 더 좋아해. 그리고 다 한 다음에 침대에 꿇어앉아서 나한테 용서를 비는 게 보고 싶었어. 내 취향은 그런 거라서.”한현진의 말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었던 강한서는 한참 만에 입을 열었다.“그럼 전에 우리가 싸울 때 내가 화나서 입 맞췄을 때는 왜 나 때린 거야? 그날도 내가 억지로 너 몰아세우고 하려고 했었잖아, 좋아한다면서 그때는 왜 나 죽이겠다고 그런 건데?”“진짜
송가람은 생각했다. ‘오빠는 그날 히비스커스 호텔에서 있었던 일 때문에 아직 나를 어떻게 마주하면 좋을지 모르겠는 거야. 게다가 내가 오빠 외숙모 때문에 다치기까지 했으니 분명 엄청난 죄책감에 시달리고 있을 거야. 그러니 이렇게 간단한 문자에도 오래 고민하는 거겠지.’강한서가 대화창을 보며 물었다. “뭐라고 답장한 거야?”한현진이 불퉁한 말투로 말했다. “이래도 안 돼, 저래도 안 되라고 하니까 어쩌겠어. 어떻게 답장하면 좋을지 모르겠으니까 모르겠다고 했지.”한현진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송가람에게서 답장이 왔다. [한서 오빠, 사실 그날 호텔에서 있었던 일은 저희 엄마가 너무 하셨어요. 오빠가 그렇게 대답한 것도 어쩔 수 없어서 그랬다는 거 알아요. 저 오빠 원망 안 해요.]눈을 마주친 강한서와 한현진 두 사람 모두 할 말을 잃었다. 이쪽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 상대방이 알아서 넘어왔다. 두 사람이 이렇게 열띤 토론을 펼칠 이유가 전혀 없었다. 한현진이 문자를 보냈다. [몸은 어때. 삼촌 일은, 내가 미안해.]송가람은 다시 한 번 그동안 강한서가 연락하지 않은 이유를 확신할 수 있었다. 그녀가 얼른 답장을 보냈다. [전 괜찮아요, 오빠. 네가 멋대로 결정했다고 오빠가 널 미워하지만 않는다면요.]한현진: [치료 잘 받아.]송가람이 얌전함을 표현하는 이모티콘을 전송했다. [오빠, 생일 파티할 거예요?]한현진: [아니. 그럴 기분이 아니라서.]그 말에 송가람의 얼굴엔 실망한 기색이 역력했다. 그녀느 사실 강한서가 조금 보고 싶었다. 고백 멘트를 작성하던 송가람은 서해금의 충고를 떠올리고 문자를 삭제했다. ‘조금만 더 기다려. 한현진을 회사에서 쫓아낼 때까지만.’송가람이 여전히 문자를 작성하고 있던 그 시점에 상대방에게서 문자가 도착했다. [현진 씨에게 들으니까 요즘 회사에서 대회 준비가 한창이라던데. 요즘 바빠?]송가람: [네. 조향 대회가 있어서요. 지금 한창 참가자 신청을 받고 있어요.]한현진: [네가 대회에서 좋은
한현진이 귀를 쫑긋 세웠다.“누구야?”강한서가 휴대폰을 한현진에게 건넸다. “내 불륜녀.”그 말 한 마디에 수화기 너머의 한성우는 머리가 어지러웠다. “네 뭐라고?”강한서를 힐끔 쳐다본 한현진은 강한서의 손에서 휴대폰을 건네받았다. 강한서는 한현진이 보내는 칭찬의 눈빛을 알아보고는 순간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한성우는 호기심에 겨워 잔뜩 흥분한 채 난리를 부리고 있었다. “두 사람 대체 뭐하는 거야? 네 불륜녀를 감히 조강지처 앞에서 이렇게 당당하게 밝힌다고?”두 사람은 한성우를 전혀 신경도 쓰지 않았다. 한현진은 사랑의 라이벌을 한 번 떠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송가람의 질문에 대답하지는 않고 오히려 반문했다. [가람아, 다친 건 어때? 아직도 아파?]강한서의 눈빛이 파르르 떨렸다. “이건 너무 하잖아. 내가 언제 이렇게 오글거리는 말을 한다고 그래?”한현진이 생각해도 이건 너무 강한서 답지 않은 문자였다. 그녀는 [아직도 아파?]라는 문자를 삭제했다. 하지만 강한서는 여전히 마음에 내키지 않았다. “이렇게 자상하게 얘기하지마. 지난 번에 홍혜림 씨를 만났을 때도 다신 연락하지 않겠다고 얘기했어. 하지만 네가 이렇게 답장을 보내면 나중에 만났을 때 내가 더는 선을 긋지 않을 거라고 생각해서 들이대면 나더러 어떡하라고.”강한서의 말에 한현진은 [다친 건 어때?]라는 글을 지우고 문자를 다시 작성했다. [계획 없어. 좋은 제안이라도 있어?]강한서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생일에 뭐할까 고민한 건 가까운 사이에서만 가능한 거야. 네가 이렇게 물어보면 걔가 뭐라고 생각하겠어?”한현진이 눈썹을 씰룩였다. “조용히 해. 애초부터 네 불륜녀에게는 내가 답장할 거라고 얘기했잖아. 네가 뭔데 나서?”강한서가 말했다. “내가 답장은 네가 하라고 얘기한 건 맞지만 이렇게 하는 건 아니지. 현실 반영은 해야 하잖아.”한성우는 궁금해 미칠 지경이었다. “형수님, 불륜녀라뇨. 강한서에게 언제부터 불륜녀가 있었어요. 남자예요, 여
여러 루트를 통해 송가람은 드디어 시계 관련 소식을 전해들을 수 있었다. 지금은 재고가 없어 7일을 기다려야 했다. 하지만 오늘 마침 빈해시의 한 고객이 시계를 반품했고 송가람이 동의한다면 먼저 그 시계를 가질 수 있다고 했다. 빈해시는 한주와 그리 멀지 않았다. 오늘 저녁이면 시계를 받을 수 있었다. 전화를 받은 매니저가 말했다. “고객님은 오늘 두 번째로 이 시계에 관해 물어보신 분이세요. 점장님 친구 분이라고 하셔서 먼저 연락드렸어요. 만약 구매 의향이 있으시다면 지금 바로 보내드릴게요.”송가람이 물었다. “저 말고 또 누가 물어본 거죠?”“죄송해요, 고객님. 그건 고객님 개인 정보라 말씀 드릴 수가 없어요.”굳이 묻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한현진이 분명했다. 송가람은 괜히 어깨가 으쓱해졌다. 결국은 자신이 한현진보다 먼저 시계를 구해내고야 말았다. 송가람이 태연한 말투로 말했다. “지금 준비해줘요. 물건은 바로 저에게 보내주시고요.”“알겠어요. 돈을 입금해주시면 저희가 영수증과 함께 시계를 포장해 최대한 빨리 보내드릴게요.”송가람은 자신이 가진 절반 이상의 돈을 신미정에게 사기 당했다. 이 시계까지 사고 나면 송가람은 거의 전 재산을 탕진하는 것과 다름이 없었다. 하지만 이렇게라도 한현진에게 골탕을 먹이는 것은 물론 강한서의 마음도 살 수 있다고 생각하니 송가람은 큰마음을 먹고 계좌 이체를 할 수밖에 없었다. 송가람이 입금을 하자마자 한성우에게 한 통의 전화가 걸려왔다. “세상에, 대박. 팔렸어요. 형수님, 저희 회사에서 영업을 하시는 게 어때요? 한 달 매출의 절반을 원하신대도 괜찮아요.”한현진이 말했다.“꿈 깨요. 이렇게 쉽게 속는 바보가 그렇게 많을 줄 알아요?”그 시계는 신우의 사촌 동생의 것이었다. 사긴 했지만 하고 다닌 적은 없었고 집에 한 달 째 고이 모셔두고 있다가 갑자기 실증이 나 환불한 것이다. 이런 명품 시계는 애초부터 재고가 많지 않았다. 하지만 구매한 지 한 달이 되어서야 환불을 하려니 쉽지 않