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강운은 머뭇거리다가 입을 열었다. "들어가 봐요."유현진은 주먹을 꽉 쥐고 낮은 소리로 답했다. "저 괜찮아요."그러고는 수술실 방향으로 걸어갔다. 하현주는 얼굴에 산소 마스크를 착용한 채 조용히 수술대 위에 누워있었다. 마스크에는 호흡으로 인한 콧김이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옆에 놓인 기기 모니터에 표시된 수치도 최저치를 찍고 있었다. 하현주는 마르다 못해 수술대에 녹아든 것만 같았다. 이 모든 정황은 하나를 설명했다. 수술대 위에 누워있는 이 생명이 곧 생을 마감할 것이라는 것을.유현진은 하현주의 손을 잡았다. 하현주는 펜으로 기록하는 습관이 있어 중지에 굳은살이 박혔다. 그는 건강했을 때 마른 체형이 아니었다. 손가락도 약간 통통했는데, 지금은 뼈만 남아 있었다. 손등에도 침 자국과 볼록 튀어나온 혈관 밖에 안 보였다. 유현진의 기억 속의 모습과 전혀 매칭되지 않았다. 교통사고가 있고 나서 지금까지 6년 8개월 동안, 하현주의 새카맣던 머리는 어느새 새하얀 머리로 바뀌었다. 외모에 유난히 신경을 썼던 하현주는 깨어나서 이러한 자신의 모습을 보기 싫었던 모양이었다. 유현진은 허리를 굽혀 하현주의 머리를 정리해 주었다. 이 광경을 옆에서 지켜보던 차미주는 울먹이면서 유현진에게 말했다. "현진아, 어머님 보내드려."유현진은 순간 손이 떨렸다. "응."그는 짧게 답하고는 직접 하현주의 산소 마스크를 벗겼다. 기기 모니터의 숫자가 천천히 0으로 바뀌었다. 그러자 기기음이 길게 울렸다. 간호사가 앞으로 다가오면서 말했다. "고인의 명복을 빌어요."그러면서 흰천을 천친히 올려 하현주의 머리까지 덮었다. 그러고 나서 병원 영안실에 자리가 부족하여 유현진더러 최대한 빨리 절차를 밟아 시신을 이전하라고 하고는 시신을 끌고 나갔다. 유현진은 통곡은 커녕 눈물도 흘리지 않았다. 그는 의료진을 향해 감사를 표하고, 간병인에게 급여를 지급하고는 하현주의 병실에 가서 물건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유현진은 지나치게 차분했다. 하현주는
유현진이 땅바닥에 쓰러졌다. 당황한 차미주는 떨리는 목소리로 불렀다. "현진아! 현진아! 일어나 봐. 날 놀래지 말고."이때 주강운도 안색이 변하더니 급하게 다가와 허리를 굽혀 유현진의 상반신을 손으로 받쳐주었다. 유현진은 얼굴이 백지장처럼 창백했고, 눈밑이 시퍼렇게 되었으며, 입술에는 핏기 하나 없었다. 주강운은 유현진의 인중을 누르면서 옆에 있는 차미주에게 말했다. "가서 의사 선생님 불러요.""맞아. 의사 선생님."차미주는 비로소 정신 차리고 자리에서 일어나 병실 밖으로 달려가면서 불렀다. "의사 선생님! 의사 선생님! 사람 살려요!"주강운은 눈썹을 한껏 찌푸린 채 유현진의 인중을 한참이나 눌렀지만 반응이 없자, 사람을 안고 일어섰다. 차미주의 안내 하에 간호사들이 이내 침대를 밀고 왔다. 주강운은 유현진을 침대 위에 눕히고, 차미주와 함께 의료진들의 뒤를 따라갔다. 차미주는 급한 나머지 제자리에서 발을 동동 굴렀다. 십 분 후, 의사가 안에서 나왔다. 의사는 유현진이 최근 며칠 잘 쉬지 못한 데다가 신경도 고도로 예민한 상태였고, 빈혈 증상도 있어서 갑자기 닥쳐온 타격으로 쓰러졌다고 했다. 그리고 나이가 이렇게 어린데 이유 없이 쓰러지는 것도 문제가 있다는 걸 설명하니, 전반적으로 검사하기를 제안했다. 같은 시각 A시.수술실 등이 꺼지자 강한서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의료진이 침대를 끌고 나왔다. 아직 전신 마취에서 깨어나지 못한 송민영이었다. 강한서는 송민영을 바로 지나서 뒤에서 나오는 침대로 걸어갔다. 깊이 잠든 은서는 새하얀 얼굴에, 손에는 강한서의 차에서 가진 사탕을 꼭 쥐고 있었다. 의사의 말에 의하면 은서가 수수실로 들어갈 때 까지도 현진 이모를 만나기로 했다고 중얼거리다가 마취를 해서 의식은 잃었지만, 손에 넣은 사탕을 어떻게 해도 놓지 않았다고 했다. 강한서는 은서의 손을 풀어서 사탕을 꺼냈다. 그 사탕은 유현진, 그리고 주강운과 함께 식사했을 때, 유현진이 차에서 그에게 건넨 박
병실에 들어온 뒤, 강한서는 은서를 침대에 눕히더니 갑자기 민경하에게 말했다."모레 이후의 티켓으로 끊어요."민경하는 경악했다."대표님, 적어도 3일은 지나야 해요.""나 혼자 갈게요. 민 실장은 은서가 위험한 고비를 넘기면 여기에 사람 붙이고 다시 오는 거로 해요."요 며칠 동안 그는 잠을 설쳤다. 마음을 한주시에 두고 온 듯 그는 왠지 불안했다.강한서는 빨리 돌아가고 싶었다.------------한주시.전신 검사를 해야 한다는 말에 차미주는 분주히 절차를 밟느라 바빴다. 다행히 주강운의 도움으로 혈액 검사를 제외한 기타 검사는 모두 순리롭게 진행되었다. 유현진은 일반 병실로 옮겨진 뒤에도 정신을 차리지 못했지만 안색은 많이 좋아졌다.모든 것이 마무리되었을 때는 이미 깊은 밤이었다.아무래도 유현진은 유부녀다 보니 주강운이 밤늦게까지 있기에는 뭔가 적절하지 않았다. 차미주는 웃으며 말했다."주 변호사님. 먼저 들어가세요. 제가 있을게요."주강운도 같은 생각인지라 먼저 집에 돌아가기로 했다. 그는 차미주에게 만약 유현진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긴다면 바로 연락을 달라고 말한 뒤 병원을 나섰다.차미주는 유현진의 병상 옆에서 새벽 세 시까지 지키다가 소르르 잠이 들었다.다음 날 아침, 간호사가 와서 혈액을 채취했다.유현진은 오전 9시가 넘어서 깨어났다.그녀는 천천히 머리를 돌려 주위를 보았다. 차미주의 외투가 보였다. 아마 씻으러 갔거나 아침을 사러 갔을 것이다.유현진은 몸을 일으켜 앉아 한참 멍때리더니 화장실로 향했다.바로 이때, 간호사는 검사 결과가 나왔는데 문제가 있는 것 같다면서 의사한테 가보라고 했다.유현진은 바로 의사에게 찾아갔다.50대 좌우의 여의사는 말투가 아주 부드러웠다.의사는 결과지를 뒤적이더니 물었다."결혼하셨어요?"유현진은 머리를 끄덕였다."아이는 낳으셨고요?"유현진은 머리를 저었다.의사는 미간을 찌푸리고 한참을 얘기하지 않다가 힘겹게 입을 열었다."혹시 전에 복부 충격으로 자궁을 다친 적 있어요
의사는 그녀를 위로해 주었다."스트레스받지 마시고요. 비록 징후가 보이긴 하지만 제때 발견해 약 드시면서 몸조리 잘하면 충분히 아이 가질 수 있으세요. 전에 조기 난소 부전 환자가 있었는데 지금은 아이 낳고 잘살고 있더라고요. 아직 나이도 어리니 충분히 가능해요."유현진은 의사의 말이 들리지 않았다. 그녀의 머릿속에는 온통 불임이라는 단어만 떠올랐다.의사는 처방을 써주더니 또 물었다."정말 장기간 복용한 약은 없어요? 혈액검사에서도 약물 성분이 검출된 것으로 보여요."유현진은 고개를 가로저으려다가 문뜩 오랫동안 마셔온 한약이 떠올랐다.그녀는 삽시에 표정이 변했다."저 임신에 도움 되는 한약을 먹은 적 있어요. 하지만 최근 보름 넘게 안 먹었는데 혹시 그거랑 관련이 있을까요?""글쎄요, 혹시 가지고 계세요? 성분 한 번 봐 드릴게요."의사는 처방에 이름을 사인했다."아무래도 드시는 약이랑 관련이 있는 것 같아요. 약이라면 독성이 있기 마련이니까요. 아픈 곳도 없는데 장기간 복용했으니 오히려 역효과를 일으킬 수도 있어요."유현진은 마음이 쿵 하고 내려앉았다.뭔가 안 좋은 생각이 들었다.신미정은 분명 그녀를 싫어하면서도 왜 임신을 재촉했을까?신미정은 정인월이 장손을 중히 여길 거라면서 둘째네 집보다 먼저 아이를 가지라 했다.만약 그 말이 사실이라면 왜 강현우는 아직도 결혼하지 않았는가?과연 신미정은 그녀의 임신을 진심으로 바랐을까?의사 사무실에서 나온 유현진은 바로 황씨 아주머니에게 전화를 걸어 강민서가 가져온 한약을 병원으로 가져오라고 했다.비록 많이 터졌지만 멀쩡한 것도 몇 개 있었다. 당시 황씨 아주머니는 아무래도 신미정이 보낸 거라 버리지 않고 냉장고에 넣어두었다.20분 만에 황씨 아주머니는 한약을 들고 병원에 도착했다.유현진은 병원 로비에서 황씨 아주머니를 기다려 한약을 받은 후 주치의에게 찾아갔다.주치의는 한의사 두 분을 불러 한약의 성분을 확인했다.병실에 돌아온 차미주는 유현진이 보이지 않자 바로 전화를 걸었다.
유현진은 강현우가 그냥 던지는 말인 줄 알았다. 하지만 인제 와서 생각해 보니 강현우는 모든 걸 알고 있었다.'강현우가 알고 있다면, 강한서는?'그녀는 강한서와의 잠자리를 떠올렸다.강한서는 한 번도 콘돔을 쓴 적이 없다. 배란기를 피하긴 했지만 안전기에도 무조건 임신이 안 된다고 장담할 수 없다.'임신 가능성이 있다는 걸 강한서도 알고 있을 텐데 왜 안 될 거라고 확신한 거지?설마…... 강한서도 알고 있었던 거야?알면서도 묵인한 거야?워낙 아이를 원하지 않은 것도 사실이잖아?'유현진은 저도 몰래 손이 떨렸다. 그녀는 거대한 덫에 걸린 것 같았다. 모든 사람이 그녀를 덫으로 밀었으며 심지어 같은 이불을 덮고 잠잤던 사람도 그녀의 등 뒤에 칼을 겨누었다.의사들은 유현진의 표정 변화를 눈치채지 못하고 계속 말했다."몇 가지 한약재는 혈기를 보충하는데 아주 좋아요. 그러니까 환자분이 보기에는 아주 건강하죠. 기절한 데는 과로도 있지만 약을 중단한 원인도 있어요. 갑자기 중단했으니 약이 작용을 잃으면서 신체의 약한 곳이 드러난 거죠."한의사는 한숨을 내쉬었다."더는 이 한약 드시면 안 돼요."유현진은 손바닥을 꼬집으면서 떨리는 마음을 진정시키려고 애썼다."선생님, 그럼 저 치료하면 괜찮아질까요?""조기 난소 부전은 완치가 어려워요. 다행인 건 빨리 발견했다는 거죠. 환자분이 협조만 잘해주시면 지속적인 악화는 막을 수 있어요.""그럼...... 임신은요?"유현진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한의사는 잠시 침묵하더니 입을 열었다."악화부터 막고 다른 건 천천히 생각해 보는 거로 하죠."의사의 말에 유현진은 또 한 번 마음이 내려앉았다.----------신미정의 집.강민서의 상처는 이제야 거의 다 나았다. 그녀가 아래층에 내려가 물을 마실 때, 마침 신미정과 유현진의 대화를 듣고 깜짝 놀랐다.신미정이 통화를 종료한 뒤, 강민서는 그제야 입을 열어 물었다."엄마, 그러다가 오빠가 우리 원망하지 않을까요?"신미정은 차갑게 말했다."
주강운은 아침 일찍 업무를 처리하고 병원으로 향했다.주강운에게서 하현주의 사망 소식을 전해 들은 한성우도 함께 왔다.한성우는 강한서에게 연락을 시도했고 강씨 가문에도 부고를 보냈다.'며칠 전까지 멀쩡하던 사람이 갑자기 돌아가셨네.'한성우는 세상일이 덧없다고 한탄했다. 병원에 도착했을 때, 유현진은 보이지 않고 그날 밤 여자 강도를 먼저 보았다.한성우는 멈칫했다."너-""그 입 닥쳐!"차미주는 한성우를 쏘아보더니 머리를 돌려 주강운에게 말했다."주 변호사님, 왜 이렇게 일찍 오셨어요?"한성우는 그녀의 빠른 태세 변화에 할 말을 잃었다.주강운은 머리를 끄덕이며 말했다."일 다 끝났으니까 혹시 도와줄 게 있을까 해서 일찍 왔어요. 현진 씨는요?""의사 선생님 당직실에요. 검사 결과가 나왔는데 현진이한테 할 얘기가 있는 듯싶어요." 차미주는 휴대폰으로 시간을 확인하며 말했다. "들어간 지 한참 지났는데 왜 아직도 안 나오는지 모르겠어요. 내가 가서 한 번 볼게요."바로 그때, 당직실 문이 열리고 유현진이 걸어 나왔다. 유현진은 온몸이 힘없이 축 늘어져 있어 왠지 우울해 보였다.차미주는 다급히 유현진에게 다가갔다."현진아, 어때? 의사 선생님이 뭐라셔?"유현진은 차미주의 목소리에 정신을 차렸다. 그녀는 애써 표정을 조절하며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괜찮아. 요즘 너무 무리했나 봐. 내분비 실조니까 푹 쉬면 좋아진다고 하셨어."차미주는 안도의 숨을 내쉬며 그녀를 품에 안았다."그러면 됐어. 나 어제 얼마나 놀랐다고."차미주의 등을 토닥이던 그녀는 멀리 서 있는 한성우와 주강운을 발견했다."한 대표님, 주 변호사님. 내일 우리 엄마 장례식에 두 분 혹시 시간 되시면 와주세요. 우리 엄마는 친구가 적어서요. 마지막 길 함께 배웅해 주세요."한성우는 멈칫하더니 미간을 찌푸렸다."형수님, 내일은 너무 빠른 거 같은데요. 한서도 아직 안 돌아왔는데 너무 조급한 거 같아요."유현진은 입꼬리를 올리며 한성우를 향해 말했다."강한서가 돌
유현진은 강한서와 싸웠어도 그들에게는 예의를 지켰다. 아까 같은 모습은 처음이었다.한성우는 안 좋은 예감이 들었다.주강운이 말했다."아무리 그래도 어떻게 이 상황에 사라져. 만약 현진 씨가 이미 결정한 일이라면 우리가 아무리 한서 대신해서 좋은 말 해도 오히려 역효과야."한성우는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맞아. 이 자식 빨리 와야 할 텐데. 그렇지 않으면 아무도 못 도와줘."--------발인 전날 밤, 유상수는 그제야 하현주의 사망 소식을 전해 들었다.그것도 동기들이 단체톡방에서 물어서 알게 되었다.유상수와 하현주는 대학 동기라 겹치는 친구들이 많았다.유현진은 인스타그램에 부고 소식을 올렸으며 몇 사람의 공유로 하현주의 동기들도 보게 되었다."상수야, 현주 소식은 왜 전하지 않았어. 이렇게 큰일을 다른 동기한테서 전해 들었잖아. 너 이러면 우리 서운하다."여자 동기들은 하현주 편을 들었다."오히려 잘 갔네. 멀쩡한 정신으로 어떻게 참겠어.""아무리 그래도 부부 사인데 너무 다급한 거 아니야? 왜 이렇게 급하게 장례를 치르는 거야. 게다가 그렇게 작은 장례식장에서. 역시 새 사람을 들이니 옛사람은 훌훌 털어버리는거지."유상수의 사생아 사건이 인터넷을 떠들썩하게 만들었으니 동기들도 자연히 다 알게 되었다.비록 두 사람의 공동한 동기지만 하현주는 워낙 성격이 좋아 인간관계도 좋고 인정이 있고 의리도 있다 보니 동기들과 더 관계가 좋았다. 설사 가정에서는 완벽한 와이프, 완벽한 엄마가 아닐지라도 말이다.동기들이 어려움이 생겨 도움을 청하면 하현주는 능력 범위 내에서 최선을 다해 그들을 도왔다.예를 들면 누군가의 보험 실적을 위해, 혹은 누군가의 아버지의 병원 비용 등…... 쇼핑몰에서의 그녀의 수단은 많은 사람의 원망을 샀지만 반면 그녀는 많은 동기에게 도움도 주었다.그녀의 사망 소식에 동기들은 진심으로 애도를 표했으며 유상수에 대한 불만과 조롱도 함께 표현했다.학생 시절, 많은 남자 동기가 그녀를 짝사랑했다. 과에서 유명한 얼짱
백혜주는 유상수를 힐끗 쳐다보았다.누가 뭐라 해도 하현주는 유상수의 아내이고 서로를 사랑해서 결혼했다. 아무리 불쾌한 일이 많았더라도 한때 두 사람이 서로에 대한 마음은 진심이었다.그런데 유상수의 입에서 이런 말이 나오다니.가야 할까?사람의 입에서 나올 수 있는 말인가?백혜주는 정서를 가다듬고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가야죠. 유현진은 여전히 오빠 딸이에요. 현진이 엄마 돌아갔으니 강씨 가문에서도 올 거고 한주시에 수많은 재벌가도 올 거예요. 만약 오빠가 나타나지 않는다면 다들 뒤에서 뭐라 하겠어요."유상수는 걱정 가득한 말투로 말했다."그 사달을 피워놓고, 만약 그 자리에서 다투기라도 하면 뒷감당이 어려울 거야.""그런 일은 없을 거예요."백혜주가 담담하게 말했다."유현진은 자기 엄마를 위해서라도 절대 그럴 아이가 아니에요."유상수는 입술을 오므렸다.백혜주는 유상수의 표정만 보아도 마음을 꿰뚫어 볼 수 있었다.유상수는 사생아 사건이 터졌으니 모두에게 손가락질당하는 게 두려운 것이다.하지만 유상수는 반드시 가야 한다. 아니면 두 모녀는 영원히 빛을 볼 수 없다."오빠, 걱정하지 말아요. 나도 같이 갈게요. 밖에서 기다릴 테니까 무슨 일 생기면 내가 해결해요."유상수는 문득 뭔가 생각났다.백혜주의 말에 예전의 하현주가 떠오른 것이다.매번 회사에 위기가 닥쳐 애를 태울 때마다 하현주는 늘 옆에서 그를 위로했다. 괜찮으니까, 기껏해야 파산이니까, 한 번 성공했으니 다시 해도 꼭 성공할 거니까, 하늘이 무너져도 그녀가 있으니까…..."오빠, 빨리 자요. 내일 일찍 가서 마지막 길 배웅해요."유상수는 저도 몰래 목이 메어와 나지막한 목소리로 알겠다고 했다.---------아침 8시 비행기. 강한서는 6시 30분에 공항으로 출발했다. 그는 공항에 도착한 뒤 대기 중에 참지 못하고 휴대폰을 켰다.휴대폰을 켜자마자 수십 개의 카톡이 들어왔다.하지만 유현진에게서 온 카톡은 하나도 없었다. 강한서는 허탈했다.휴대폰을 끄려고 할 때
식사 자리가 마무리된 후 홍혜림을 배웅하러 나온 서해금의 뒤를 오성빈이 따라나서며 나지막이 물었다. “서 대표님이 말씀하신대로 했으니 약속하신 건...”“걱정마세요.”서해금이 시선을 거두며 옅은 미소를 지었다. “일만 잘 마무리 되면 약속드린 건 꼭 지켜드리죠.”“그럼 최대한 빨리 해결하도록 할게요. 질질 끌어봐야 좋을게 없으니까요.”“부탁드려요.”고개를 끄덕인 서해금이 성월에게 눈짓을 보냈다. 그러자 서해금의 뜻을 바로 알아들은 성월이 곧바로 오성빈을 배웅했다. 사실 학교에서는 진윤의 부정행위에 관해 아무런 결론도 내린 것이 없었다. 여론은 여전히 뜨겁기만 했다. 하지만 그런 때일수록 여론에 흔들리지 말아야 했다. 만약 조사 결과에 조금이라도 문제가 생긴다면 그 여론은 오히려 학교에 독이 될 수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오성빈은 학교 임원의 압박에도 불구하고 며칠 동안이나 홍혜림의 연락을 무시했다. 물론 그 역시도 최대한 빨리 이 일을 마무리하고 싶었다. 진윤이 부정행위를 저질렀다는 증거는 전혀 찾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오성빈이 모든 증거 수집을 마치고 드디어 진윤의 누명을 벗겨주는 쇼를 하려던 그때, 경찰이 갑자기 학교로 찾아왔다. 진수 그룹에서 진윤의 시험 부정행위 문제로 경찰에 신고를 한 탓이었다. 교장의 연락을 받은 오성빈은 그만 멍해졌다. 제일 먼저 서해금이 떠올랐지만 그녀가 약속했던 일을 떠올린 그는 곧 주먹을 꽉 움켜쥐고 서해금에게 연락하고 싶은 충동을 꾹 참으며 홍혜림의 연락처를 눌렀다. 홍혜림이 전화를 받자마자 오성빈이 물었다. “사모님, 어제 분명 진윤 학생 일은 잘 처리해 드리겠다고 말씀 드렸잖아요. 왜 신고를 하신 거예요?”홍혜림이 놀란 말투로 말했다. “신고라뇨? 전 신고한 적 없어요.”“사모님이 신고하신 게 아니라고요?”의아한 듯 묻는 오성 빈에게 홍혜림이 대답했다. “전 신고한 적 없어요. 교수님께서 이미 윤이가 부정행위를 하지 않았다는 증거를 찾으셨다면서 조치를 취하시겠다고 말씀하셨잖아요. 그래서 계속
장준의 아버지는 요직을 맡고 있었고 장씨 가문엔 그의 아버지를 제외하고도 수많은 정치인들이 있었다. 그랬기에 가족 중 단 한명이라도 꼬리를 밟힌다면 그의 가문은 수습 불가능한 상황으로 치닫기도 했다. 장준이 저질렀던 인간 같지도 않은 일들이 하나하나 밝혀지기 시작했다. 폭행, 음주 운전, 도박, 성폭행...피해자들이 하나둘 인터넷에 장준의 진짜 모습을 폭로했다. 수많은 피해자의 목소리를 누를 수 없었던 장씨 가문의 스캔들이 결국 전부 드러나고 말았다. 홍혜림 역시 그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그녀는 곧 회사 계정으로 진윤은 그날 운전을 하지 않았다는 입장을 발표와 함께 그와 관련된 증거들과 범죄경력증명서를 전부 공개 했다. [그러니까 진윤은 또 다른 도련님의 기사를 막기 위해 총알받이가 됐다는 거네?][어쩐지 뭔가 이상하더라니.][그렇게 심각한 교통사고에 진윤 한 사람만 공개 처형하는 것이 이상하다고 생각했어요. 역시 여론을 부추기는 사람이 있었다는 거네요.][발 빼려고 하지 마. 장준이 주범이었다고 하더라도 진윤이 그 경기와 아무런 관련도 없는 건 아니잖아. 끼리끼리는 과학이라고 했는데 그놈이 그놈 아니겠어? 서화 대학에서도 진윤의 재시험 부정행위를 인정 했잖아.][학교엔 이미 소문을 파다해요. 이번 일과는 관련이 없다고 해도 언젠가는 비슷한 사고를 쳤을 거예요. 장준이나 진윤이나 크게 다를 거 없잖아요.][저기요. 두 사람을 싸잡아 욕 하지는 마요. 한 명은 범죄자고 다른 한 명은 그저 인성에 문제가 있는 것뿐이에요. 그게 어떻게 같아요? 얼른 진상 규명이나 하시죠. 피해자에게 피해 보상은 해야 하잖아요.]...휴대폰을 한 쪽으로 던져버린 서해금이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장준이었어? 어쩐지...”성월이 그녀에게 차를 건네며 나지막이 물었다. “대표님, 진윤 씨 일은 이미 어느 정도 해결이 된 것 같아요. 그럼 저희 계획은 어떻게 해요?”“아직 끝나지 않았어요.”서해금이 찻잔을 들어 올리며 덤덤하게 말했다. “홍혜림은 누구보다
장씨 가문 아들이라는 이유로 여론이 들끓는 것을 염려한 탓인지 기사는 간단한 몇 마디 말로 상황을 간결하게 보도했다. 하지만 한현진은 감추려고 할수록 일은 점점 더 커질 것이라 생각했다. 드디어 주강운이 손을 쓴 모양이었다.고개를 들어 강한서를 바라보는 한현진의 눈이 별처럼 반짝였다.“여보, 장준이 잡힌 것 같아.”강한서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누가 그래?”한현진은 의미심장한 표정을 지으며 강한서에게 한성우가 보낸 기사를 보여주었다. “시간, 교통사고, 장 모 씨, 약물. 이 단어들만 봐도 누군지 뻔하잖아.”강한서가 놀랍다는 듯 말했다. “장 모 씨가 정말 장준이야? 어떻게 잡힌 거지? 누가 신고라도 한 건가.”“나쁜 짓을 그렇게 많이 했으니 벌을 받는 거지. 피해가 한두 명이면 집안 세력으로 어떻게든 막을 수 있겠지만 그 수많은 피해자를 전부 막을 수는 없잖아?”강한서가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기사에 다른 얘기는 없어?”“없어. 그냥 언급만 한 수준이야. 하지만 이 기사를 시작으로 진실을 밝혀 나가려는 사람은 분명 있을 거야. 그건 우리가 상관할 일이 아니지.”한현진이 나지막이 말했다. “장준과 관련된 기사가 퍼져 나가기 시작하면 사모님께 이 기회를 빌려 진윤 씨에 관련한 입장 발표를 하시라고 말씀 드려.”강한서가 고개를 끄덕였다. “내일 아침 연락드릴게.”강한서는 이상할 정도 순순히 대답했다. 예전이라면 어떻게 된 일이냐며 꼬치꼬치 캐 물었을 것이 분명했다. 지금처럼 쉽게 넘어갈 리가 없었다.자신을 빤히 바라보는 한현진의 시선에 강한서가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가 다정한 목소리로 한현진에게 물었다.“왜?”하지만 한현진은 곧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아무것도 아니야. 산책 가자.”강한서가 고개를 끄덕였다. “옷 가지고 올게.”강한서의 뒷모습을 지긋이 바라보던 한현진이 휴대폰을 들어 한성우에게 문자를 보냈다. [오늘 강한서가 좀 이상해요. 평소엔 꼬치꼬치 따지더니 오늘은 기사를 보여줘도 아무것도
멈칫한 강한서가 입술을 짓이겼다. “누가 어딜 들어갔다고?”강한서의 목소리에 수화기 너머의 사람은 순간 조용해졌다. 그러더니 곧 어색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한서야, 야근 안 했어? 오늘은 일찍 퇴근했네.”강한서는 화제를 돌리는 한성우의 말에 전혀 동요하지 않은 채 다시 물었다. “방금 누가 어딜 들어갔다고?”“방금 내가 뭐라고 했어?”한성우가 모른 척 대답했다. “갑자기 네가 튀어나오는 탓에 다 잊어버렸잖아.”강한서가 말했다. “강운이가 장준을 처넣었다며.”한성우: ...후회 막심한 얼굴로 자신의 입을 툭 친 한성우가 웃으며 대답했다. “어, 맞아. 바로 그거야. 나도 방금 어디서 그 소식을 듣고 형수님과 수다나 떨려고 전화한 거야. 너도 알잖아. 형수님과 내가 뒷담화 할 땐 죽이 척척 맞는 거.”“그래?”강한서가 담담한 말투로 말을 이었다. “난 두 사람이 나한테 뭔가 숨기는 게 있는 줄 알았지.”“그럴 리가 있겠어?” 한성우가 당당하게 말했다. “우리가 널 속일 수는 있고? 두 사람 요즘 진윤 씨 일 때문에 걱정이 많잖아. 그래서 나도 신경 좀 썼지. 봐, 소식을 듣고는 바로 알려 주려고 전화했잖아.”“그래.”강한서의 대답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던 한성우의 귓가로 곧 다시 강한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현진이가 강운이한테 뭐라고 했는데?”한성우: ...한성우가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 “뭐? 형수님이 강운이와 연락했어?”잠시 침묵하던 강한서가 다시 입을 열었다. “너한테 전해달라고 한 말이 뭐냐고.”의심이 아닌 확신에 찬 말투에 한성우는 머리가 찌릿, 할 정도로 소름이 돋았다. ‘조금만 참았다가 나중에 전화할 것이지, 난 왜 하필 지금 한 거야?’어차피 한강서가 전부 눈치 챈 마당에 더는 숨길 필요가 없어진 한성우는 결국 모든 것을 털어놓았다. “형수님이 너한테 숨겼다고 뭐라고 하지 마. 형수님이 강운이에게 연락한 게 아냐. 나한테 눈치를 주라고 부탁하셨어. 강운이네는 줄곧 장씨 가문과 사이가 안 좋았잖아
“실망이라니. 엄마는 단 한 번도 널 창피하게 여긴 적 없어. 넌 엄마가 배 아파 낳은 내 자식이야. 내가 널 몰라? 엄마는 그냥 네가 이번 일 때문에 힘들어 할까봐 그래. 엄마는 네가 행복했으면 좋겠어.”“요즘 네가 말도 없고 조용하기만 해서 우리가 얼마나 걱정했는지 알아?”진윤의 등을 어루만지며 홍혜림이 나지막이 말했다. “이런 일은 아무것도 아니야. 인생 살면서 이런 일 안 겪는 사람은 없어. 이겨내면 돼.”고개를 끄덕인 진윤이 홍혜림을 꽉 끌어안았다. ...아름드리.“그러니까 아주머니가 뒤에서 여론몰이에 동조했다는 거야?”한현진이 자몽을 까며 강한서에게 말하자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너무 절묘한 타이밍에 나타나서 알아봤더니 오성빈 교수라는 사람, 성 비서님의 먼 친척이시더라고. 그러니까 그분이 나서서 얘기만 해주면 잘 해결될 가능성이 높아.”잠시 생각하던 한현진이 말했다. “그래서 일부러 홍혜림 씨가 신세를 질 수밖에 없게 만드시겠다? 홍혜림 씨를 다시 뺏어가려는 거야?”“그럴 수도 있지만 그게 전부는 아닌 것 같아.”한현진이 눈을 반짝이며 강한서 곁으로 다가갔다. 꿍꿍이 가득한 얼굴로 한현진이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그럼 우리는 그걸 지켜보면 되겠네. 본인 계획대로 흘러가고 있다고 착각하게 만든 다음대체 뭘 하려는 생각인지 지켜보자고.”강한서가 어쩐지 음흉한 미소를 지으며 한현진을 쳐다보았다. 그 표정에 어리둥절해진 한현진이 물었다. “왜 그렇게 웃어? 뭐야, 그 음흉한 웃음은.”강한서가 나지막이 대답했다. “근묵자흑이라는 단어가 너무 맞는 말인 것 같아서.”한현진: ?“설명 똑바로 해. 누가 그 묵인데?”강한서는 씩 웃으며 한현진의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한현진이 깐 자몽을 가져가 한 입 베어 문 강한서의 표정이 곧 강한 신맛에 잔뜩 일그러졌다. 자몽을 겨우 삼킨 강한서가 인상을 찌푸린 채 믿을 수 없다는 듯 말했다. “넌 이걸 대체 어떻게 아무렇지 않게 먹을 수 있는 거야.”한현진이 눈을 깜빡였다.
[그래도 학교 측에서 끝까지 부정행위라고 주장하면서 재수강하라고 하면 어떡해요?]강한서가 웃으며 말했다. [넌 언제든 법적 대응을 할 수 있다는 걸 잊지 마. 내가 대신 신고해줘?]진윤은 그제야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듯 번뜩 정신이 들었다. 인터넷에 도배된 악플로 잔뜩 지친 진윤은 자신의 결백을 주장하는 일에만 몰두해 있었다. 그는 심지어 학교 측에 새로운 시험 문제를 내도록 제안한 후 라이브 방송을 통해 부정행위가 없었음을 증명할까 생각하기도 했다. 하지만 강한서의 한마디는 진윤의 모든 고민을 한 방에 해결했다. 스스로의 결백을 증명하는 건 결국 그 사람들이 파놓은 함정에 뛰어 드는 것 과 다를 바가 없었다. 사람들은 애초부터 그가 부정행위를 했을 거라 확신하고 있었다. 그러니 진윤이 라이브 방송으로 결백을 증명한다고 한다고 해도 사람들은 또 미리 답을 알고 있으면서 카메라 앞에서 쇼를 하는 것이라며 의심하게 뻔했다. 부정행위의 증명해야 할 사람은 진윤이 아니라 그를 의심한 사람들이었다. 진윤이 순간 눈을 반짝였다. [얼른 엄마를 말려야겠어요. 교수님에게 부탁할 필요가 없잖아요. 전 당당하니까 얼마든지 조사하라고 해요.][잠깐만.]강한서가 진윤을 불렀다. [잠깐만 기다려 봐.][왜요?]입술을 깨물던 강한서가 중얼거렸다. [고작 학생인 네가 시험에서 부정행위를 했다는 이유만으로 여론이 이 정도로 들끓는게 처음부터 이상했어. 이제야 의문이 조금 풀리는 것 같네.][그게 뭔데요. 얼른 얘기 해줘요.]성격 급한 진윤은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하는 강한서 때문에 괜히 마음만 조급해졌다. 강한서가 말했다. [넌 지금 아무것도 하지 마. 어머님께도 오 교수님이라는 분 만나보라고 해. 뭐라고 하는지 얘기나 들어 보고 다시 대책을 세워야해.]진윤이 조금 전처럼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형님, 어차피 이렇게 된 거 그 인간들의 계략을 역이용하시려는 거예요?]강한서가 쯧, 혀를 차며 말했다. [매형이라고 불러]진윤: ...홍혜림과
법적 장모님이라는 여섯 글자에 멍한 표정을 짓던 강한서가 물었다. [서해금 대표 말하는 거야?][네. 그 분, 현진 누나 새엄마잖아요. 그럼 형님에겐 법적 장모님 아녜요?]강한서: ...‘맞긴 하네.’[난 오성빈 교수님과는 전혀 모르는 사이야.]멈칫하던 강한서가 물었다. [그건 왜 묻는데?]강한서의 말에 기분이 축 처진 진윤이 한참만에야 대답했다. [학교에서 제 재시험 성적을 취소하더니 재수강하래요.]강한서가 미간을 찌푸렸다. [그게 무슨 말이야? 학교에서는 네가 부정행위를 했다고 판단한 거야?][명백하게 얘기한 건 아닌데 사실은 그런 셈이죠. 하지만 다른 처분은 없이 그냥 재수강만 하래요. 친한 친구에게 들은 건데 학교에 신고 전화가 빗발쳤었데요. 홈페이지에도 전부 부정행위 진상 규명을 바라는 댓글로 도배됐다고 하더라고요.][아마도 학교의 이미지 회복을 위한 판단이었던 것 같아요. 저에게 적당한 책임을 전가할 수도 있고 대중들에게는 그들이 원하던 조치를 취했다고 보여줄 수 있으니까요.]강한서는 여전히 이해되지 않는다는 듯 물었다. [그럼 교수님에게는 무슨 일로 연락을 하려는 거야?][조교님께서 이번 일은 오 교수님 담당이라고 하셔서요. 비록 재수강으로 결론이 났다고 하지만 아직 완전히 결정된 건 아니니까요. 그래서 엄마는 오해를 풀기 위해 오 교수님을 한 번 만나 얘기를 나누고 싶어 하세요.][아는 분께 부탁해 오 교수님과의 자리를 만들어보려고 했지만 결국은 연락이 닿지 않았어요. 하지만 마침 형님 법적 장모님께서 제 병문안을 오셨다가 그 얘기를 들으시더니 오 교수님과 아는 사이라고 하더라고요.][꽤 가까운 사이인 것 같아 엄마는 만약 가능하다면 그분께 다리를 놔달라고 부탁할 생각이세요.]진윤이 한숨을 내쉬었다. [워낙 지적인 얼굴을 하고 계서서 좋은 사람처럼 보이지는 않던데요. 딸인 현진 누나에게도 가식적으로 대하는 것 같던데 전 그런 사람이 진심으로 저희를 도와줄 리가 없잖아요.][방금 형님과 얘기를 하면서 혹시 형님도
홍혜림이 서해금에게 얘기를 꺼내려던 그때, 진윤이 그녀의 말을 잘랐다. “잠깐 실례할게요.”홍혜림이 곧바로 하려던 말을 삼키고 몸을 일으켰다. “엄마가 부축해줄게.”“네.”진윤이 대답했다. 진윤을 부축하며 병실을 나서는 홍혜림을 쳐다보던 서해금이 고개를 돌려 성월에게 물었다. “아무 문제없이 잘 해결했죠?”성월이 고개를 끄덕였다. “대표님께서 지시하신 대로 했어요.”멈칫하던 성월이 나지막이 물었다. “대표님, 정말 사모님께서 저희에게 부탁하러 오실까요?”서해금이 덤덤하게 말했다. “평소라면 부탁하지 않을 수도 있겠죠. 하지만 궁지에 몰린 상황이라면 분명 부탁할 수밖에 없을 거예요. 홍혜림은 지금 아들의 누명을 벗기기 위해 안달이 나 있는 상황이에요. 그러니 저를 통해 이 일을 해결할 수 있다는 걸 알게 된다면...”“아무리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는다고 해도 결국 머리를 숙일 수밖에 없어요.”“조향 대회의 마지막 경기는 OM향 협회의 투표로 승패가 결정돼요. 홍혜림은 OM향 협회의 오래된 회원이에요. 게다가 이번 조향 대회 열 명의 심사위원 중 한 명으로 선정되기도 했고요.”“홍혜림은 누구보다 의리를 중요하게 생각해요. 제가 큰 도움을 준다면 어떻게든 그 빚을 갚으려고 할 거예요. 전 준비가 안 된 싸움은 시작하지 않아요.”피식 웃음을 흘린 서해금의 눈빛이 멸시로 가득했다. “전 조금의 실수도 용납할 수 없어요.”성월은 이토록 치밀한 서해금에 탄복하지 않을 수 없었다. 오성빈의 친척과 친분이 있다는 얘기를 꺼내는 서해금의 모습에 성월은 그녀가 단지 빼앗긴 고객을 다시 찾아가기 위해 던지는 미끼일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서해금이 바라는 것은 자신에게 마음에 빚을 진 홍혜림이 조향대회에서 관건적인 한 표를 행사하는 것이었다. 서해금이 이렇게까지 서포트 해주고 있으니 송가람은 조금만 노력해도 좋은 성적을 거둘 수 있었다. 순간 뭔가를 떠올린 성월이 목소리를 잔뜩 낮추며 물었다. “대표님, 인터넷에서 진윤 씨에 관한 여론이 들끓고
“하지만 지금 이 상황에 가면 걔들은 거짓말을 들킨 네가 양심에 찔려서 해외로 도피하는 거라고 생각할 거야.”진윤이 눈시울을 붉히며 말했다. “걔들이 뭐라고 생각하든 저랑 무슨 상관이에요. 어차피 출국하면 아무것도 듣지도 보지도 못할 텐데.”“그럼 너 평생 해외에만 있을 거야? 안 돌아올래?”입술을 달싹인 진윤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당연히 그럴 수는 없었다. 부모님도, 집도, 가족도 전부 한주에 있으니 지금 당장 해외에 나간다고 해도 결국 돌아와야만 했다. 홍혜림이 의미심장한 말투로 입을 열었다. “윤아, 사람의 명성이라는 게 한 번 나빠지면 다시 좋아진다는 건 어려운 일이야. 해외로 도망쳐 이번 일을 지나보낸다고 해도 졸업하면 결국 여기 동기들과 다시 마주해야 한 텐데, 걔들이 널 보고도 옛날 얘기를 꺼내지 않을 것 같아?”“다들 널 안 좋게 보고 있는 지금, 네가 끝까지 네 결백을 증명해야 나중에 걔들이 다시 이 얘기를 꺼내도 억울하지는 않을 거야. 알겠어?”“결백을 뭐로 증명해요? CCTV도 없고 아무것도 없잖아요. 전 당당하다는 걸 아무도 증언해줄 사람이 없어요. 절 믿는 사람도 없다고요.”진윤이 잠김 목소리로 물었다. “엄마, 저 어떡해요?”홍혜림은 미어지는 가슴을 붙잡고 아들의 얼굴을 어루만지며 나지막한 목소리로 위로를 건넸다. “아무도 널 안 믿어도 엄마는 널 믿어. 네 아빠, 형 그리고 네 형수님도 널 믿어. 그러니까 아들, 괜찮아. 엄마가 있는 한 아무도 우리 아들 못 건드려. 엄마가 꼭 네가 정정당당하게 학교로 돌아갈 수 있게 할게.”홍혜림이 말에 진윤이 대답하려던 그때, 누군가 병실 문을 두드렸다. 진윤이 고개를 돌려 얼굴을 닦으며 감정을 추슬렀다. 홍혜림 역시 심호흡을 하고는 몸을 일으켰다. 문을 열자 보이는 의외의 인물에 홍혜림의 눈이 동그래졌다. 서해금이었다.서해금은 성월과 함께 진윤의 병실로 찾아왔다. 두 사람은 손에 선물을 잔뜩 들고 서 있었다. 병실 문이 열리자 서해금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