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드를 긁자 설비에서 알람이 울렸다. "이 카드도 동결됐어요."안색이 바뀐 유현진은 입술을 깨물면서 다른 카드를 건넸다. "이것도 동결됐네요."세 번째, 네 번째......마지막 카드까지 모두 동결 상태라는 소식을 전해듣자 유현진의 안색은 완전히 어두워졌다. 그녀의 명의로 된 카드 모두 동결됐다. 강한서가 한 짓일까?아니다. 강한서가 그런 거라면 자신의 서브 카드만 동결하지, 자신의 카드를 동결할 리 없다. 그럼 누가 한 짓인가? 누가 타인의 명의로 된 카드까지 동결할 능력이 된단 말인가?머릿속으로 가능한 대상을 훑어본 그는 속으로 신미정을 지목했다."얼른 결제해요."뒤에서 줄을 서 있던 환자 가족들이 다시 한번 재촉했다. 유현진은 사과를 하고, 물건을 챙겨 자리를 냈다. 그녀는 급히 몇몇 은행에 전화로 문의했다. 그런데 하나같이 얼버무리면서 그저 누군가가 관련 자료를 제출하여 재산을 동결했고, 구체적으로 누군지는 알려줄 수 없다고 했다. 알려줄 수 없다는 걸 보니 신미정일 가능성이 가장 컸다. 그는 주먹을 꾹 쥐더니 신미정의 번호를 눌렀다. 상대방은 바로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신미정의 차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유현진은 화를 억누르고 낮은 소리로 신미정을 불렀다. "어머님, 저예요."신미정이 아무런 감정 없이 물었다. "무슨 일이야?"유현진이 입술을 깨물면서 말했다. "저 방금 전에 병원비를 결제하려는데, 수납에서 제 카드가 동결됐다고 하더라고요.""그래."신미정은 담담하게 한마디 뱉더니 바로 인정했다."내가 그런 거야."유현진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왜 그러신 거예요?"신미정은 가볍게 웃더니 답했다. "한서가 출장갔다 돌아오면 어차피 너희 둘 이혼할 거잖아. 한서가 없는 틈을 타서 네가 재산 이전이라도 하면 어떡해. 내가 경각심을 가졌으니 망정이지 가만히 뒀다가는 큰일 날 뻔했잖아. 한서가 출장간지 얼마 됐다고 벌써부터 너의 엄마한테로 돈을 돌리려고 해? 너 우리 집안이 자선가라도 되는 줄
순간 유현진은 얼굴이 백지장이 되었다. 휴대폰을 들고 있던 손과 목소리는 떨고 있었지만 애써 차분하게 말했다."제가 금방 올라갈 테니 우선 의사 선생님을 불러줘요."하현주는 혈압이 갑자기 빠르게 내려가고, 심박수도 느려졌으며, 동공도 약간 확산 증상을 보였다. 엄청 안 좋은 조짐이었다. 의사는 검사하고 나서 약을 주입하기 시작했다. 하현주의 팔 혈관은 아주 뚜렷했다. 혈관벽이 한데 붙어서 간호사가 침을 몇 번이나 찔렀지만 들어가지 않았다. 하현주의 팔에 남은 침 자국들을 보자 유현진은 마음이 아파왔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하현주는 수술실로 들어갔다. 수간호사가 와서 유현진에게 사인을 요구했다. 펜을 쥔 유현진은 손을 부들부들 떨면서 사인하는 데 한참이나 걸렸다. 수간호사는 사인을 마친 동의서를 건네받으면서 말했다."얼른 가서 병원비를 결제하세요. 1층에서 또 전화가 왔어요. 이러면 우리만 곤란해져요.""알겠어요. 우리 엄마 부탁해요."유현진의 목소리는 잠겨 있었다. 유현진은 대기실을 나오자마자 차미주에게 전화를 했다. 차미주는 어젯밤에 촬영팀을 따라다니느라 밤을 샜고, 아침 일곱 시가 되어서야 집에 들어왔다. 유현진의 전화를 받을 때에는 아직도 잠에서 깨어나지 않은 상태였다. 그가 흐리멍덩한 정신으로 전화를 받자 유현진의 울먹이는 소리가 들려왔다."미주야, 너한테 지금 돈이 얼마나 있어? 나한테 육천 정도 빌려줄 수 있어?"차미주는 갑자기 이해가 안됐다. 유현진한테 육천이 없을 리가 없는데, 갑자기 왜 자신한테 돈을 빌리려고 하는지. 게다가 목소리도 이상했다. "무슨 일인데? 너 돈을 빌려서 뭐할려고?"차미주는 묻고 나서 이내 설명을 덧붙였다. "다른 뜻은 없고, 그저 물어보는 거야. 나 얼마 전에 저작권료를 받은 거 있는데 정기예금을 해놔서, 지금 이천 정도 끌어 모을 수 있어, 대체 무슨 일이야?""울 엄마가 지금 위독하셔. 그런데 카드를 사용할 수 없어......"유현진은 갑자기 울음을 터뜨렸다. 유현진이 통곡하는 목
차미주는 엄마가 언제 이렇게 배포가 컸냐는 감탄을 할 틈도 없이 돈을 가지고 서둘러 병원으로 직행했다. 유현진은 차미주의 전화를 받고 병원 입구에서 기다렸다. 차미주는 차에서 내리자마자 유현진의 가냘픈 체구가 시야에 들어왔다. 두 눈은 출혈됐고, 입술에도 핏기가 없었다. 평소에 에너지 충만하던 모습은 거의 사라지고 창백해서 투명해 보이기까지 했다. 인사말을 건넬 틈도 없이 차미주는 유현진의 팔을 잡고 가면서 말했다. "돈을 가져왔으니 우선 가서 병원비를 결제해."돈을 계좌에 입금하고 나서 유현진은 차미주를 데리고 윗층으로 올라갔다. 가는 내내 유현진은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전화 속에서 대성통곡을 하면서 모든 나약함을 다 쏟아내어 껍데기만 남아있는 것 같았다. 대기실.차미주는 유현진에게 물을 건네면서 물었다. "어머님 들어가신 지 얼마나 됐어?"유현진은 물을 건네받으면서 잠긴 목소리로 답했다. "사오십 분 됐을 거야.""어머님 괜찮을 거야."차미주는 주위를 한번 둘러보더니 물었다. "강한서는?"유현진의 눈빛이 더 어두워졌다. "출장 갔어."차미주는 화가 치밀었다."출장은 뭔 놈의 출장! 매번 필요한 순간에는 항상 없더라.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자식!"유현진은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차미주는 그제야 방금 전 유현진과의 대화 내용이 떠올랐다."너 전화에서 카드를 사용하지 못한다고 했잖아. 어떻게 된 거야?"유현진은 입술을 살짝 깨물더니 한참 지나서 답했다. "한서 씨 어머니가 나한테 있는 모든 카드를 동결 신청해서 은행 카드로 결제가 안돼.""왜? 정신이 어떻게 된 거 아냐? 뭔 자격으로 그걸 동결해?""나랑 한서 씨가 이혼할 거라는 걸 알고 내가 재산 이전이라도 할까 봐 미리 손 쓴 거지."차미주는 어이가 없어서 한참 동안이나 아무 말도 못했다. "일부러 그런 거 아냐? 하필이면 너희 집에 일이 생길 때 이러는 걸 보면. 게다가 강한서가 없는 틈을 타서. 혹시 강한서가 이혼 못할까 봐 그러는 거 아냐?"유현진은
몇 분 후, 유현진이 돌아왔다. 차미주는 간호사가 무슨 말을 했는지 감히 묻지 못했다. 그저 어머님이 위독한 상황을 잘 넘기기를 바랄 뿐이었다. 지금 이 시기에 어머님까지 뭔 일이라도 있으면 유현진은 무너질 것이다.사실 어머님이 깨어날 가능성이 거의 없다는 것은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었다. 하지만 사람은 자신의 집념에서 쉽게 벗어나지 못하는 법이다. 하루라도 숨을 쉬는 한 희망이 있다고 믿고 싶을 것이다. 부모님이 계시면 돌아갈 곳이 있지만, 부모님이 돌아가시면 영원히 돌아가는 길에 머물 뿐, 돌아갈 곳이 없게 되는 게 사람의 인생이다. 그 누구도 딸로서 어머니에 대한 유현진의 집념을 비난할 수 없었다. 주강운은 차미주가 전화를 끊어서 십 분 정도 지나서 도착했다. 그는 황급히 대기실로 달려왔다. 그 순간 만큼 차미주는 눈앞의 이 남자가 강한서보다는 훨씬 믿음직스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이 있다고 하니 바로 달려오는 남자!"현진 씨, 어머님 어때요?"주강운은 숨이 찬 목소리였다. 아마 차에서 내리자마자 달려서 온 모양이었다. 유현진은 눈앞의 주강운이 나타난 걸 보고 멍하니 서 있었다. 그러자 차미주가 설명했다. "너 방금 전에 사인하러 갔을 때, 벤틀리, 그러니까 강운 씨가 너에게 전화 와서 할 말이 있다고 해서, 내가 어머님이 지금 수술 중이라고 했지. 그러자 이렇게 오셨어."유현진은 안색이 조금 나아졌다. 그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아직 수술 중이에요. 상태는 몰라요."하현주는 폐에 감염 증상이 생겨, 방금 전에 간호사가 유현진더라 사인하라고 한 것은 바로 수술 동의서였다. 최소침습술이긴 하나 하현주에게는 엄청 위험한 수술이었다. 간호사는 사인하기 전, 유현진에게 사전 설명을 했다. 하현주같은 경우에는 수술을 할 필요가 없었다. 수술을 해서 살아난다 하더라도 남은 시간이 얼마되지 않기에 돈도 사람도 남기지 못할 수 있었다. 하지만 유현진은 포기하겠다는 말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는 하현주가 자신의 눈앞에서 숨을 멎는
주강운은 머뭇거리다가 입을 열었다. "들어가 봐요."유현진은 주먹을 꽉 쥐고 낮은 소리로 답했다. "저 괜찮아요."그러고는 수술실 방향으로 걸어갔다. 하현주는 얼굴에 산소 마스크를 착용한 채 조용히 수술대 위에 누워있었다. 마스크에는 호흡으로 인한 콧김이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옆에 놓인 기기 모니터에 표시된 수치도 최저치를 찍고 있었다. 하현주는 마르다 못해 수술대에 녹아든 것만 같았다. 이 모든 정황은 하나를 설명했다. 수술대 위에 누워있는 이 생명이 곧 생을 마감할 것이라는 것을.유현진은 하현주의 손을 잡았다. 하현주는 펜으로 기록하는 습관이 있어 중지에 굳은살이 박혔다. 그는 건강했을 때 마른 체형이 아니었다. 손가락도 약간 통통했는데, 지금은 뼈만 남아 있었다. 손등에도 침 자국과 볼록 튀어나온 혈관 밖에 안 보였다. 유현진의 기억 속의 모습과 전혀 매칭되지 않았다. 교통사고가 있고 나서 지금까지 6년 8개월 동안, 하현주의 새카맣던 머리는 어느새 새하얀 머리로 바뀌었다. 외모에 유난히 신경을 썼던 하현주는 깨어나서 이러한 자신의 모습을 보기 싫었던 모양이었다. 유현진은 허리를 굽혀 하현주의 머리를 정리해 주었다. 이 광경을 옆에서 지켜보던 차미주는 울먹이면서 유현진에게 말했다. "현진아, 어머님 보내드려."유현진은 순간 손이 떨렸다. "응."그는 짧게 답하고는 직접 하현주의 산소 마스크를 벗겼다. 기기 모니터의 숫자가 천천히 0으로 바뀌었다. 그러자 기기음이 길게 울렸다. 간호사가 앞으로 다가오면서 말했다. "고인의 명복을 빌어요."그러면서 흰천을 천친히 올려 하현주의 머리까지 덮었다. 그러고 나서 병원 영안실에 자리가 부족하여 유현진더러 최대한 빨리 절차를 밟아 시신을 이전하라고 하고는 시신을 끌고 나갔다. 유현진은 통곡은 커녕 눈물도 흘리지 않았다. 그는 의료진을 향해 감사를 표하고, 간병인에게 급여를 지급하고는 하현주의 병실에 가서 물건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유현진은 지나치게 차분했다. 하현주는
유현진이 땅바닥에 쓰러졌다. 당황한 차미주는 떨리는 목소리로 불렀다. "현진아! 현진아! 일어나 봐. 날 놀래지 말고."이때 주강운도 안색이 변하더니 급하게 다가와 허리를 굽혀 유현진의 상반신을 손으로 받쳐주었다. 유현진은 얼굴이 백지장처럼 창백했고, 눈밑이 시퍼렇게 되었으며, 입술에는 핏기 하나 없었다. 주강운은 유현진의 인중을 누르면서 옆에 있는 차미주에게 말했다. "가서 의사 선생님 불러요.""맞아. 의사 선생님."차미주는 비로소 정신 차리고 자리에서 일어나 병실 밖으로 달려가면서 불렀다. "의사 선생님! 의사 선생님! 사람 살려요!"주강운은 눈썹을 한껏 찌푸린 채 유현진의 인중을 한참이나 눌렀지만 반응이 없자, 사람을 안고 일어섰다. 차미주의 안내 하에 간호사들이 이내 침대를 밀고 왔다. 주강운은 유현진을 침대 위에 눕히고, 차미주와 함께 의료진들의 뒤를 따라갔다. 차미주는 급한 나머지 제자리에서 발을 동동 굴렀다. 십 분 후, 의사가 안에서 나왔다. 의사는 유현진이 최근 며칠 잘 쉬지 못한 데다가 신경도 고도로 예민한 상태였고, 빈혈 증상도 있어서 갑자기 닥쳐온 타격으로 쓰러졌다고 했다. 그리고 나이가 이렇게 어린데 이유 없이 쓰러지는 것도 문제가 있다는 걸 설명하니, 전반적으로 검사하기를 제안했다. 같은 시각 A시.수술실 등이 꺼지자 강한서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의료진이 침대를 끌고 나왔다. 아직 전신 마취에서 깨어나지 못한 송민영이었다. 강한서는 송민영을 바로 지나서 뒤에서 나오는 침대로 걸어갔다. 깊이 잠든 은서는 새하얀 얼굴에, 손에는 강한서의 차에서 가진 사탕을 꼭 쥐고 있었다. 의사의 말에 의하면 은서가 수수실로 들어갈 때 까지도 현진 이모를 만나기로 했다고 중얼거리다가 마취를 해서 의식은 잃었지만, 손에 넣은 사탕을 어떻게 해도 놓지 않았다고 했다. 강한서는 은서의 손을 풀어서 사탕을 꺼냈다. 그 사탕은 유현진, 그리고 주강운과 함께 식사했을 때, 유현진이 차에서 그에게 건넨 박
병실에 들어온 뒤, 강한서는 은서를 침대에 눕히더니 갑자기 민경하에게 말했다."모레 이후의 티켓으로 끊어요."민경하는 경악했다."대표님, 적어도 3일은 지나야 해요.""나 혼자 갈게요. 민 실장은 은서가 위험한 고비를 넘기면 여기에 사람 붙이고 다시 오는 거로 해요."요 며칠 동안 그는 잠을 설쳤다. 마음을 한주시에 두고 온 듯 그는 왠지 불안했다.강한서는 빨리 돌아가고 싶었다.------------한주시.전신 검사를 해야 한다는 말에 차미주는 분주히 절차를 밟느라 바빴다. 다행히 주강운의 도움으로 혈액 검사를 제외한 기타 검사는 모두 순리롭게 진행되었다. 유현진은 일반 병실로 옮겨진 뒤에도 정신을 차리지 못했지만 안색은 많이 좋아졌다.모든 것이 마무리되었을 때는 이미 깊은 밤이었다.아무래도 유현진은 유부녀다 보니 주강운이 밤늦게까지 있기에는 뭔가 적절하지 않았다. 차미주는 웃으며 말했다."주 변호사님. 먼저 들어가세요. 제가 있을게요."주강운도 같은 생각인지라 먼저 집에 돌아가기로 했다. 그는 차미주에게 만약 유현진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긴다면 바로 연락을 달라고 말한 뒤 병원을 나섰다.차미주는 유현진의 병상 옆에서 새벽 세 시까지 지키다가 소르르 잠이 들었다.다음 날 아침, 간호사가 와서 혈액을 채취했다.유현진은 오전 9시가 넘어서 깨어났다.그녀는 천천히 머리를 돌려 주위를 보았다. 차미주의 외투가 보였다. 아마 씻으러 갔거나 아침을 사러 갔을 것이다.유현진은 몸을 일으켜 앉아 한참 멍때리더니 화장실로 향했다.바로 이때, 간호사는 검사 결과가 나왔는데 문제가 있는 것 같다면서 의사한테 가보라고 했다.유현진은 바로 의사에게 찾아갔다.50대 좌우의 여의사는 말투가 아주 부드러웠다.의사는 결과지를 뒤적이더니 물었다."결혼하셨어요?"유현진은 머리를 끄덕였다."아이는 낳으셨고요?"유현진은 머리를 저었다.의사는 미간을 찌푸리고 한참을 얘기하지 않다가 힘겹게 입을 열었다."혹시 전에 복부 충격으로 자궁을 다친 적 있어요
의사는 그녀를 위로해 주었다."스트레스받지 마시고요. 비록 징후가 보이긴 하지만 제때 발견해 약 드시면서 몸조리 잘하면 충분히 아이 가질 수 있으세요. 전에 조기 난소 부전 환자가 있었는데 지금은 아이 낳고 잘살고 있더라고요. 아직 나이도 어리니 충분히 가능해요."유현진은 의사의 말이 들리지 않았다. 그녀의 머릿속에는 온통 불임이라는 단어만 떠올랐다.의사는 처방을 써주더니 또 물었다."정말 장기간 복용한 약은 없어요? 혈액검사에서도 약물 성분이 검출된 것으로 보여요."유현진은 고개를 가로저으려다가 문뜩 오랫동안 마셔온 한약이 떠올랐다.그녀는 삽시에 표정이 변했다."저 임신에 도움 되는 한약을 먹은 적 있어요. 하지만 최근 보름 넘게 안 먹었는데 혹시 그거랑 관련이 있을까요?""글쎄요, 혹시 가지고 계세요? 성분 한 번 봐 드릴게요."의사는 처방에 이름을 사인했다."아무래도 드시는 약이랑 관련이 있는 것 같아요. 약이라면 독성이 있기 마련이니까요. 아픈 곳도 없는데 장기간 복용했으니 오히려 역효과를 일으킬 수도 있어요."유현진은 마음이 쿵 하고 내려앉았다.뭔가 안 좋은 생각이 들었다.신미정은 분명 그녀를 싫어하면서도 왜 임신을 재촉했을까?신미정은 정인월이 장손을 중히 여길 거라면서 둘째네 집보다 먼저 아이를 가지라 했다.만약 그 말이 사실이라면 왜 강현우는 아직도 결혼하지 않았는가?과연 신미정은 그녀의 임신을 진심으로 바랐을까?의사 사무실에서 나온 유현진은 바로 황씨 아주머니에게 전화를 걸어 강민서가 가져온 한약을 병원으로 가져오라고 했다.비록 많이 터졌지만 멀쩡한 것도 몇 개 있었다. 당시 황씨 아주머니는 아무래도 신미정이 보낸 거라 버리지 않고 냉장고에 넣어두었다.20분 만에 황씨 아주머니는 한약을 들고 병원에 도착했다.유현진은 병원 로비에서 황씨 아주머니를 기다려 한약을 받은 후 주치의에게 찾아갔다.주치의는 한의사 두 분을 불러 한약의 성분을 확인했다.병실에 돌아온 차미주는 유현진이 보이지 않자 바로 전화를 걸었다.
남자는 들고 있던 담배를 다 태울 때까지 아무 말이 없었다. 서해금이 또 말을 이었다. “당신이 뿌리를 제대로 뽑지 못해 이렇게 큰 후환을 남기지만 않았다면 우리 가람이 처지도 지금처럼 어렵진 않았을 거야.”서해금이 말한 후환은 당연히 한현진을 가리키는 것이었다. 한현진 말이 나오자 남자의 얼굴이 저도 모르게 어두워졌다.그 여자 아이가 죽지 않았다는 일은 그 역시도 송씨 가문에서 한현진을 데려오기 얼마 전에야 알게 되었다.당시 그 여자가 품에 안아 보여주던 여자 아이는 애초부터 송씨 가문의 딸이 아니었다. 그 여자는 다른 곳에서 죽은 아이를 안아와 한아람의 딸이라고 그를 속였던 것이다.친딸이 태어나는 모습도 두 눈으로 직접 보지 못한 그는 곧 자신의 친딸에게 인생을 빼앗길 아이를 마주했다. 그 이루 말할 수 없는 죄책감에 그는 심지어 아이를 똑바로 쳐다볼 수도 없었다. 그는 그저 아이의 죽음을 확인하기만 하면 목적을 달성했다고 생각했다. 포섭당한 사람 중 누군가가 마음이 약해졌다는 사실도 모른 채 말이다. 한현진이 죽지 않았으니 송씨 가문이나 한씨 가문에서는 기필코 당시 분만실에서 있었던 일을 밝히려고 할 것이 분명했다. 다행히 서해금은 일처리를 함에 있어서 화근을 남기지 않는 스타일이었다. 당시 그 일에 연루되어 있는 사람들은 이미 전부 죽거나 도망간 상태였기에 아무리 쥐 잡듯이 뒤져도 그 해의 진실은 알아내 수 없을 것이었다. “내가 뭐 도와줄까?”남자가 나지막이 물었다. “아니.”서해금이 담담한 말투로 말했다. “한현진은 그렇게 멍청하지 않아. 쓸데없는 짓해서 괜한 의심 사지 마. 걔는 걔 엄마랑 똑같아. 의리가 치명적인 약점이거든. 잠깐만 조용히 지내.”잠시 멈칫하던 서해금이 말을 이었다. “앞으로 내 지시 없이 함부로 회사에 나타나지 마. 회사는 여기저기 보는 눈이 많아. 조그만 실수라도 있었다간 우리 가족 전부 끝장이라고.”우리 가족이라는 두 단어에 남자는 그만 멍해졌다. 그의 눈빛이 미래에 대한 희망으로 반짝였다. 그가
시선을 거둔 서해금이 물었다. “아래층은 불 켜졌어요?”누군가 대답했다. “네. 우리 층만 정전인 것 같아요.”머리 위의 CCTV를 확인한 서해금이 태연하게 말했다. “사람 불러서 확인해 보라고 해요. 다른 분들은 모두 자리도 돌아가요.”말하며 서해금이 송가람에게 시선을 돌렸다. “너도 돌아가. 내가 보내 준 자료는 꼭 봐. 검사할 거야.”송가람이 입술을 삐죽이며 작게 애교 부렸다. “알겠어, 엄마.”모든 사람이 자리로 돌아가자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서해금이 입을 꾹 다물고 비상계단으로 향했다. 비상계단엔 창문이 없었다. 복도에선 은은하게 담배 냄새를 맡을 수 있었다. 선세등이 켜지지 않아 유난히 어두웠다. 비상계단 복도로 들어선 서해금은 계단 위에 서서 벽에 기대어 담배를 쥐고 있는 남자를 볼 수 있었다. 그녀는 손을 들어 비상계단의 문을 닫으며 목소리를 낮춘 채 호통 쳤다. “여긴 회사야. 여기서 이런 짓을 하다니, 미친 거야?”“내가 정전 안 시켜서 CCTV에 찍혔으면 네가 이 상황을 해명할 수는 있고?”낮고 허스키한 목소리의 상대방의 말투엔 비웃음이 가득했다. 서해금이 굳은 얼굴로 말했다. “당신이 당신 마음대로 여기 들어올 땐, 내 의견을 묻긴 했어?”남자가 쉰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난 그저 우리 딸이 보고 싶었을 뿐이야.”화가 치민 서해금은 목소리를 잔뜩 낮추었음에도 분노를 완전히 억제할 수는 없었다. “내가 동영상 보내줬잖아. 사진도 보내줬잖아. 지금 당신이 어떤 신분인지, 당신이 몰라서 이래?”“사진이나 동영상은 직접 내 눈으로 보는 것과는 비교도 안 되잖아. 목소리를 듣고 싶고, 얼굴 한 번 보고 싶다는 게 너무 한 거야?”“이게 너무한게 아니면 뭐야? 지금 당신이 어떤 모습인지, 어떤 신분인지 몰라?”스산하게 비추는 불빛에 남자의 표정이 잘 보이지는 않았지만 서해금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그가 움찔 떠는 것은 분명히 알 수 있었다. “서해금. 네가 원하던 걸 전부 이루니까 이제 난 필요 없다 이거야?
송가람의 목소리가 비통함에 잠기기 시작했다. “엄마, 설마 아빠 아직도 나한테 화 난 거야?”송가람이 이윤하에게 맞아 입원했을 당시 송병천은 매일 같이 병원에 왔었다. 하지만 송가람을 마주한 송병천은 어린 시절 한없이 다정다감하던 모습은 사라지고 어색함과 냉담함만이 더해졌다. 신미정에게 속은 건 결국 송가람이 아직도 강한서를 잊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송병천이 그런 송가람의 마음을 눈치 채고 이미 한 번의 주의를 주었음에도 똑같은 실수를 반복했으니 송병천은 그녀에게 철저히 실망했을 것이다. 강한서를 좋아하는 것이 잘못이라고 송가람은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오히려 그녀는 모든 잘못은 한현진이 저지른 것이라고 생각했다. 어차피 이미 20여년이 지난 일인데, 왜 그대로 흘려버리지 않은 걸까? 왜 굳이 돌아와 그녀의 아빠와 오빠를 빼앗으려 하는 걸까?한현진이 없던 송가람의 네 식구는 행복하기 그지없는 가족이었다. 하지만 한현진이라는 존재가 나타남으로 인해 부모님은 전처럼 서로를 사랑하지 않았고 오빠의 마음은 완전히 친동생에게 기울었다. 아빠는 더 이상 전처럼 그녀를 사랑하지 않았고 심지어 엄마는 그저 지분과 재산 생각으로 가득 차 전보다 더 계산적으로 굴었다. 그 혈연관계는 마치 날카로운 칼날처럼 한현진이 등장한 후 그녀의 가족을 갈라놓았다. 송가람은 반항이라도 하듯 강한서를 좋아하면서도 송병천과 송민준이 전처럼 예뻐해 주길 발랐다. 서해금이 시선을 올려 송가람을 바라보았다. “네가 한현진에게서 강한서를 빼앗으려고 결정했을 때부터 그 정도 각오는 했어야지. 네 아빠가 마음을 대해 널 20여년 간 키워주고 진심으로 예뻐한 건 사실이지만 한현진은 친딸이야. 게다가 간절히 바랐었지만 결국 잃어버렸던 아이야. 그런 애가 유씨 가문에서 그런 치욕을 당하며 살아왔어. 네 아빠가 조금만 조사하면 한현진이 어떤 고생을 하며 살아왔는지 금방 알 수 있어. 그럼 네 아빠가 모든 걸 걸고 한현진에게 보상해주려고 하지 않겠어?”“피로연에서 그저 조금 떠봤을 뿐인데 네 아
서해금 사무실. “내가 널 어쩌면 좋겠니. 얼마나 많은 사람이 널 지켜보고 있는데 고작 은서하가 한현진 옷 선물을 받았다는 이유로 보너스를 삭감해?”밖에선 꾹 참고 있던 서해금은 사무실에 도착하자 더는 화를 감추지 못했다. 송가람은 개의치 않으며 말했다. “엄마. 은서하는 재무팀 직원이야. 감히 내 앞에서 한현진의 선물을 받았어. 그건 엄마에게 창피를 주는 것과 다를 거 없잖아. 만약 내가 그렇게 하지 않았다면 다른 직원들도 은서하와 똑같이 했을 거야. 난 그저 엄마 대신 주의를 준 것뿐이야.”“주의?”서해금이 퉁명스럽게 말했다. “고작 옷 한 벌로 주의? 너 이 정도밖에 안 되는 애야? 은서하가 한현진 옷 선물을 받았을 때, 왜 그 이유는 알아보려고 하지 않았어? 은서하는 가족 병원비 때문에 충분히 힘들게 살고 있어. 만약 이런 타이밍에 네가 은서하를 도와줬다면 걔가 그 은혜를 평생 기억했을 뿐만 아니라 다른 직원들에게도 네가 얼마나 아량이 넓은 사람인지 알게 되었을 거야.”“하지만 네가 한 짓을 봐! 보너스를 삭감으로 은서하 상황만 더 안 좋게 했어. 구내식당에서 밥을 먹는 것도 네 곁에 있던 멍청이에게 비난을 받아야 했어. 그런 식으로 은서하를 조롱하면 네가 뭐라도 돼 보일 것 같아? 멍청한 것! 네가 그럴수록 사람들은 네가 속이 좁다고 생각할 뿐이야. 고작 그런 일로 복수나 하는 아량이라고는 없는 인간이라고 생각하겠지. 누가 그런 사람 밑에서 일하고 싶을 것 같아?”멍해졌던 송가람은 잠시 당황했지만 여전히 고집스레 말했다. “그땐... 그땐 그런 건 생각도 안 했어. 그렇게 멍청하게 한 번도 인사팀에 묻지 않을 줄은 몰랐지. 그리고 내가 걔 집안 사정을 어떻게 알아...”변명을 늘어놓던 송가람은 조금 전 한현진이 대신 나서줬음에도 끝내 한현진 편에 서지 않던 은서하를 떠올리고는 곧바로 자신 있게 말했다. “엄마, 조금 전 한현진이 도와주는데도 가만히 있는 거 봤잖아. 엄마는 어떻게 은서하가 배은망덕한 머리 검은 짐승이 아닐 거라 확
“그리고 두 번째 이유는 부업으로 회사 청소를 하시면서 실수가 있으셨고 그걸 바로 저에게 보고하기는커녕 오히려 다른 사람에게 덜미를 잡혔어요. 만약 오늘 세은이가 오일 제조에 실패했다면 기사님이 얼마나 큰 책임을 떠안아야 했는지 알고는 계세요?”“마지막 이유는, 제 사무실 앞에 꿇어앉아 용서를 구하지는 않았어야 하셨어요. 무릎을 꿇는 이유가 사과든 반성이든, 아니면 또 다른 목적이 있어서든 그건 제가 싫어하는 방식이거든요. 인간으로서의 존엄도, 자존심도 전부 내려놓는 행위이니까요. 부모님과 은인 앞이 아닌 이상, 함부로 무릎을 꿇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해요. 하지만 저희는 고용관계잖아요. 게다가 기사님은 저보다 한참 연장자이시기도 하고요. 그러니까 기사님이 무릎을 꿇고 사죄를 바라는 행동을 전 용서를 강요하는 것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어요.”주혁은 차마 그 어떤 말도 할 수 없었다. 그의 얼굴도 조금씩 하얗게 질려갔다. 한현진의 논리정연한 말에 주혁은 반박할 수조차 없었다. 그는 한참만에야 창백해진 얼굴로 겨우 죄송하다는 한 마디를 내뱉었다. 입술을 짓이기며 말이 없던 한현진은 잠시 후에야 다시 입을 열었다. “선택해요. 월급은 제가 최대한 인사팀과 협의해 볼게요.”한참을 잠자코 있던 주혁이 나지막이 물었다. “대표님, 제가 다시 대표님 운전기사로 돌아올 수 있을까요?”한현진은 이번엔 곧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그녀는 잠시 뜸을 들이다 말했다. “그건 나중에 다시 얘기해요.”한 번 무너진 신뢰를 다시 쌓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한현진은 진심으로 주혁의 처지를 안타까워했다. 물론 그가 부업을 하려는 이유도 충분히 이해했다. 하지만 그녀는 틈만 나면 사고를 치는 사람을 곁에 두고 싶지 않았다. 언젠가 다시 등에 칼을 꽂을지도 몰랐다. 한현진에게는 다른 사람을 동정할 여유가 없었다. 면접을 봤던 그날 주혁이 구해준 은혜는 다른 방식으로 보답할 생각이었다. 무릎을 꿇는 것으로 문제가 해결되지는 않았다. 한현진은 그런 이유로 더 참아줄 생각이 없었다
꿇어앉은 주혁은 어깨를 잔뜩 움츠렸다. 가뜩이나 앙상한 몸이 유난히 허약해 보였다. 문이 열리는 소리에 고개를 든 그의 눈이 반짝이며 생기가 감돌았다. 무릎을 꿇은 채 한현진 앞으로 다가간 주혁이 쉰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대표님, 벌해 주세요.”한현진이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조금 굳은 표정을 한 그녀는 곧바로 주혁을 일으키는 대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기사님, 일어나세요.”주혁은 꿈쩍도 하지 않은 채 고개를 숙였다. 어깨가 미세하게 떨려왔고 목소리도 조금 갈라졌다. “대표님, 제가 이렇게 큰 사고를 쳤는데도 절 감싸주시고 정말 대표님을 볼 낯이 없어요. 벌해 주세요. 어떤 벌이든 받을게요.”두 눈을 꼭 감은 한현진이 목소리를 높였다. “일어나라고 말씀 드렸어요. 다른 사람들 웃음거리나 되라고 제 사무실 앞에 무릎 꿇고 계신 거예요?”주혁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전 그게 아니라...”“그게 아니면 일어나요!”한현진은 연장자인 주혁에게 말 할 때도 늘 예의를 다했었다. 심지어 조금 전 오일 저장실에서도 최대한 그를 감싸주려 했었다. 그랬기에 주혁은 이렇게까지 화를 내는 한현진의 모습은 본 적이 없었다. 손가락을 문지르던 주혁은 문득 자신이 없어졌다. 주위를 둘러보던 한현진이 태연하게 말했다. “다들 안 바빠요?”화를 내지 않았음에도 충분히 박력 있는 목소리였다. 그 카리스마는 전혀 서해금 못지않았다. 구경하던 사람들이 한현진의 말에 곧 흩어졌다. 주혁을 쳐다보던 한현진이 차가운 태도로 말했다. “들어와요.”깊은 숨을 들이쉰 주혁이 입술을 꾹 오므리며 한현진의 뒤를 따랐다. 조용히 사무실 책상으로 걸어간 한현진이 의자에 앉았다. 주혁은 그 순간 미세하게 나온 한현진의 아랫배를 보고는 당황했다. 다시 제대로 확인하고 싶었지만 한현진이 의자를 책상 쪽으로 끈 덕에 책상에 시야가 막혔다. 시선을 올린 한현진이 맞은편 의자를 가리켰다. “앉으세요.”주혁이 긴장하며 말했다. “괜찮아요. 서 있으면 돼요.”그러자 한현
돈 얘기에 한현진이 잔뜩 신난 말투로 말했다. “그 돈은 내기에서 이겨서 받은 거야. 그 중 2천만 원 정도는 송가람이 베팅한 거야. 송가람 돈을 땄으니 기분이 좋을 수밖에 없잖아. 딴 돈을 혼자 가질 수는 없으니까 너에게 절반 줄게.”“감사합니다, 사모님.”강한서가 씩 미소 짓더니 거래 기록을 캡처해 저장하고는 돈을 다시 한현진에게 송금했다. “네가 일단 관리해줘. 나중에 필요하면 너에게 다시 얘기할게.”“그럼 내가 다 써버릴 거야.”강한서가 입꼬리를 예쁘게 올렸다. “그럼 너로 배상해줘.”한현진이 멈칫했다. “강한서. 그런 오글거리는 말은 하지 마.”“...”옆에서 운전하고 있던 민경하가 그 말에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강한서가 고개를 돌려 민경하를 째려보았다. 한현진이 말했다. “거 봐. 민 실장님도 그 말은 느끼하다고 생각하잖아.”민경하가 곧바로 해명하듯 말했다. “아뇨. 전 대표님께서 저런 말씀하시는 거 보기 좋다고 생각해요. 대표님이 하신 말씀은 전부 진심이세요.”한현진이 말했다. “알아요. 절 보면서 말하는 건 괜찮아요. 얼굴을 보면 진심이라는 걸 알 수 있거든요. 하지만 얼굴을 못 보는 상황에 저런 말을 들으면 신고하고 싶은 충동이 생긴다니까요. 괜히 희롱 당한 것 같은 기분이 들거든요.”민경하는 이번엔 그만 폭소를 터뜨렸다. 강한서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재밌어요? 민 실장이 이렇게 잘 웃는 사람인 줄은 몰랐네요. 지금부터 웃으면서 운전해요.”“민 실장님 괴롭히지 마.”한현진이 당당하게 말했다. ‘사모님 라인을 탄 보람이 있네. 역시 사모님은 본인 사람은 끔찍하게 아낀다니까.’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 민경하의 귓가로 한현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좀 이따 민 실장님이 데이트하러 가서 강민서에게 이르면 네 동생은 돌아와 너한테 복수할 거야.”입가에 걸렸던 미소가 그대로 굳어버렸다. ‘아무래도 줄을 잘못 선 것 같아.’강민서가 의심 가득한 눈초리로 민경하를 쳐다보며 한현진에게 물었다. “넌
놀란 은서하가 어쩔 줄 몰라 하며 말했다.“성 비서님, 전 괜찮아...”“받아요!”성월이 차가운 말투로 같은 말을 반복했다. “받아요. 이건 서 대표님 마음이에요. 대표님의 호의를 거절하지 말아요.”은서하의 눈초리가 파르르 진동했다. 떨리는 손으로 돈다발을 받은 은서하가 허리를 숙였다. “대표님께 감사하다고 인사 전해주세요.”성월이 멸시가 담긴 눈빛으로 은서하를 쳐다보았지만 그건 아주 잠깐이었다. 성월이 말했다. “한 대표님이 서하 씨를 대신해 나서신 건 서하 씨를 중요하게 생각한다는 거예요. 고마운 건 고맙다고 인사 드려요. 한 대표님 실망하게 하지 말고.”‘내가 한 대표님과 사이가 멀어지는 건 원치 않는 거네...’고개를 푹 숙인 은서하가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당시 돈이 급한 저에게 일자리를 주신 건 서 대표님이셨어요. 성 비서님, 벼랑 앞에 서 있는 저에게 손 내밀어 주신 은혜는 그 어떤 도움과도 비교할 수 없어요. 절대 잊지 않을 거예요.”성월은 의외라는 듯 은서하를 쳐다보더니 곧이어 말했다. “알면 됐어요. 돈 받아요. 들키지 말고.”재킷을 벗은 은서하는 돈다발을 옷 속에 넣었다. 그 모습을 만족스럽게 쳐다보던 성월은 은서하의 어깨를 툭툭 치더니 자리를 벗어났다. 잔뜩 긴장되어 있던 은서하의 표정이 그제야 조금 편안해졌다. 아무리 한현진이 지지해 준다고 해도 서해금에게 밉보일 수는 없었다. 아직 이곳에 남아 있어야 했다. 아직 알아내지 못한 일이 있었다...한현진이 사무실에 도착하자마자 뒤이어 따라온 주혁이 노크했다.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오른 상태였기에 한현진은 주혁을 들이지 않았다. 지금 이 상황에 주혁이 들어온다면 좋은 말이 나올 리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주혁은 한현진보다 20살이나 더 많은 연장자였다. 한참 어른인 그를 도무지 혼낼 수가 없었다. ‘돈이 부족해 회사 청소 일을 하고 싶다고 왜 얘기를 하지 않는 거야. 만약 오늘 이 일이 아니었다면 대체 언제까지 숨기려던 거냐고.’한현진이 주혁을 고용한 건
“넘버 S 오일이 저장되어 있던 곳은 잠겨 있었어요. 잠금장치가 있었으니 기사님은 오일을 건드릴 수 없었어야 해요. 하지만 기사님이 오일을 꺼낼 수 있었다는 건 그 당시엔 잠겨있지 않았다는 거잖아요. 게다가 기사님은 저장실의 규정에 관해선 전혀 모르고 계세요. 책임자가 아무것도 알려주지 않은 상황에 업무 중 실수로 오일을 깨뜨린 건 고의라고 볼 수 없어요. 그러니 이 일에 관한 책임을 논한다면 두 사람이 똑같이 감당해야 해요.”“하지만 주세은 씨가 넘버 S 오일의 제조에 성공했고 이 일은 사실상 저희 회사에 엄청난 손해를 입히진 않았어요. 오히려 전화위복이 된 셈이라고 할 수 있죠. 그러니 퇴사 처리는 너무 심한 처벌인 것 같아요. 그리고 만약 오늘 내린 이 징계를 전례로 따른다면 업무 중 실수를 저질렀을 때 해고 당하는 것이 두려워 일부러 숨겨 더 큰 문제를 초래하는 상황을 피면할 수 있을 거예요. 처벌이라는 건 실수를 줄이기 위한 목적이 아닌 수단이잖아요.”서해금이 한현진의 말에 대답하기도 전에 송가람이 냉소 지으며 말했다. “그렇게 예쁘게 포장하건 기사님을 감싸주려고 그러는 거죠?”한현진이 쿨하게 인정했다. “내 사람은 당연히 내가 감싸야죠. 송 팀장님도 홍혜림 씨에게 실수를 하셨지만 그저 감봉을 조금 당한게 전부였잖아요.”그 말은 송가람뿐만 아니라 서해금을 저격하는 것이기도 했다. 주혁이 해고를 당할 땐 당하더라도 한현진은 부하 직원을 지키려는 태도를 보여야 했다. 줄곧 말이 없던 서해금이 잠시 후 입을 열었다. “3개월 감봉, 보너스 삭감. 이 정도면 되겠니?”조금 더 말다툼을 해야 할 것이라는 한현진의 예상과는 달리 서해금은 빠른 결정을 내렸다. 서해금을 힐끗 훑어보던 한현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대표님 말씀대로 하죠.”송가람이 불퉁하게 말했다. “이 처벌은 너무 가볍잖아요. 이런 큰 실수를 저지르고도 고작 이정도 처벌로 넘어간다면 앞으로 다른 직원들이 뭘 보고 배우겠어요?”한현진이 송가람에게 시선을 돌리며 말했다. “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