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모의 편애가 이 지경까지 무섭다니."정말 강한서의 잘못이라고 생각하신다면 유현아 데리고 우리 집으로 와서 다 같이 확인해 보죠. 대체 누가 거짓말을 하는지 따져보자고요."유상수는 목이 멨다.유상수는 얼굴이 시커멓게 변해버린 유현아를 바라보며 의구심이 들었다.유상수는 깊은숨을 들이쉬며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내가 알아볼게.""잠깐만요."유현진은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아빠, 구암동 고아원 후원금은 언제 이체하실 거예요?"유상수는 멈칫하더니 입술을 오므리며 말했다."회사 매출이 떨어져서 더는 후원 못 할 것 같아. 시청에 연락 넣었으니 시청에서 도와줄 거야." 유현진은 표정이 굳어졌다."아빠, 후원금은 엄마 카드에서 나가는 거예요. 회사 매출이 아무리 떨어졌다고 한들 월 2천만 원이 많아요? 차라리 변호사 고용해서 엄마 지분 나한테 넘겨요. 후원금 내가 직접 처리할 테니."유현진의 말에 유상수는 표정이 일그러지며 말했다."네 엄마 매달 병원비만 몇천만 원이라 일 년이면 몇억이 들어가. 넌 우리 집안이 강씨 가문처럼 재산이 많은 줄 알아? 네 엄마 병원비만 해도 어마어마한데 무슨 돈으로 후원까지 해?"유현진은 쌀쌀하게 웃었다. 유상수는 교묘하게 지분 얘기를 피해 갔다. 만약 정말 하현주의 돈으로 병원비조차 지불하기 힘들다면 유상수는 본인이 먼저 애물단지를 유현진에게 넘겼을 것이다. 계속 가지고 있는 이유는 단 하나, 이익이 있기 때문이다.하현주는 유상수의 죄증을 낱낱이 찾아 내 겨우 유상수를 재산포기 각서에 사인하게 했다. 그러니 유현진은 하현주의 심혈을 꼭 지켜 내 유현아한테 빼앗기지 않겠다고 다짐했다.'안 넘긴다 이거지. 그래, 내가 직접 찾아올 거야!"유현진이 답이 없자 유상수가 말했다."현진아, 네 엄마 건강이 우선 아니겠어? 우리가 지금 남 걱정할 때가 아니잖아. 나라에서 알아서 하겠지 국민이 걱정할 일이 아니야. 너 그 시설에 남다른 감정이 있다는 거 나도 알고 있지만 일단 우리가 살고 봐야지."'시설에 후원하면
강한서는 그녀의 고분고분한 태도에 이내 마음이 녹아내렸다.만약 유현진이 평소와 같은 말투로 말했다면 강한서는 아마 잠시 고민했었겠지만 이런 고분고분한 모습을 보니 전혀 거절할 마음이 생기지 않았다.강한서는 이내 승낙하자 유현진은 위층으로 올라가 외출 준비를 했다.30분쯤 지나니 인내심이 바닥난 강한서가 도우미를 시켜 유현진을 재촉하려고 하던 그때, 유현진이 마침 내려왔다.유현진은 웨이브를 주어 더 윤기 나는 헤어를 연출했고 검은색 브이넥 롱드레스를 입어 몸매를 더 부각했다.그녀는 머리를 살짝 들고 계단을 밟으며 내려왔다. 그녀의 정교한 외모는 굳이 주얼리를 하지 않아도 빛나고 있었다.하이힐을 신은 그녀는 강한서에게 다가가 팔짱을 끼며 미소를 지었다."가자."유현진의 패션은 과하지 않았지만 그녀의 얼굴은 워낙 귀티가 흐르다 보니 누더기를 입고 걸어가도 사람들의 시선을 끌었다.그녀의 아름다움은 마치 그녀의 성격처럼 강렬했다.부부가 팔짱을 끼고 나오는 모습을 목격한 민경하는 눈앞의 광경을 믿을 수가 없었다.'대표님 이제야 철든 거야?'민경하는 더는 생각할 틈도 없이 이내 차 문을 열었다.두 사람이 차에 오르고 나서야 민경하가 물었다."사모님 먼저 모셔다드릴게요. 어디 가세요?"유현진이 대답했다."강 대표와 함께 태주 대학교로 가요."민경하는 문뜩 유현진도 태주 대학교를 졸업했다는 것이 생각났다.유현진은 비주얼이 사기인 데다가 통통 튀는 성격이라 사람들은 그녀와 태주 대학교가 연관 있을 거라고 전혀 생각지 못한다.태주 대학교의 진입 장벽은 아주 높다. 평소 모의고사에서 지역 10등 안에 들지 못한다면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아무리 특기생이라고 해도 성적에 대한 요구가 까다롭다.민경하는 유현진의 대학입시 점수가 상당히 높다고 기억한다.그녀는 전공과목 점수를 제외하고도 한주시에서 태주 대학교를 제외한 모든 대학교를 마음대로 선택할 수 있었다.전공과목 점수를 합치면 2등을 월등히 초과했다.그녀는 본인의 전공에서 아주 뛰어난 존재이다
'왜 저렇게 심취해서 보는 거야?어딜 보고 있기에?'강한서는 궁금한 마음에 가까이 가서 보았다가 할 말을 잃고 말았다.펼쳐진 책 속에는 휴대폰이 놓여 있었으며 유현진은 한창 라방을 보고 있었다.상대는 금방 운동을 끝냈는지 옷이 흠뻑 젖어 있었고 얼굴은 땀으로 범벅이 되었다.무슨 얘기를 했는지 시청자들은 열띤 호응을 했으며 유현진도 빠른 속도로 '좋아요'를 눌러댔다.이내 남자는 웃통을 벗어버렸다.강한서는 어이가 없었다.독서를 통해 정서 조절을 하는 줄 알았는데 이런 거나 보고 있었다니.강한서는 굳은 표정으로 책을 들어버렸다. 지지대가 사라지자 휴대폰은 그대로 유현진의 무릎 위로 떨어졌다.그제야 유현진은 정신을 차리고 이어폰을 빼며 물었다."끝났어?"강한서는 아무 말 없이 그녀의 휴대폰을 들어 팔로우를 취소하고 차단 했다.…..."강한서, 이건 너무하잖아. 내가 뭐 보는 것까지 다 참견해야 해?"강한서는 그녀를 힐끗 쳐다보며 말했다."가치가 없는 건 적당히 봐. 당신 이러다가 바보 된다.""그게 왜 가치가 없어? 그럼 당신은 어떤 가치 있는 인플루언서를 팔로우했는데? 공유해 봐."말을 끝낸 유현진은 강한서의 휴대폰을 낚아채 강한서의 얼굴 앞에 대고 흔들어 안면인식 잠금을 풀었다. 그러고 틱톡을 켰다.강한서는 그녀를 막지 않았다. 그저 그녀의 움직임을 지켜보며 담담하게 말했다."최소한 당신 거보다 가치 있을걸.""안 믿어."유현진은 강한서의 팔로우를 확인했다. 강한서의 팔로우는 오직 한 사람, 바로 유현진이다.흠칫하는 유현진에게 강한서가 담담하게 말했다."최소한 내 팔로우 상대는 단순한 바보지. 당신처럼 껍데기만 화려한 인간이 아니라."…...유현진은 잠시 설렐 뻔했는데 강한서의 찬물 끼얹는 한마디에 설렘이 와장창 깨지고 말았다."어때."강한서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물었다."당신이 팔로우한 사람보다 낫지?"유현진은 어금니를 깨물고 휴대폰을 던져주었다.괘씸한 마음에 말대꾸하려던 그때, 누군가 노크했다.강한서는 이
이런 자기 자랑이 대다수인 홍보 강연 원고는 전혀 강한서의 취향이 아니다.유현아는 프로젝트 홍보보다 본인 자랑에 더 신경 썼다.그녀는 인기도 많았고 자기의 장점도 잘 이용했다. 두 번의 홍보 강연으로 유현아는 몇십만이나 되는 팔로우를 얻었으며 긍정적인 기사와 실검이 수두룩하게 생겼다.사실 이것은 좋은 현상이 아니다. 마치 유현아와 회사를 세트로 만드는 듯한 행동이라 나중에 다들 유현아라는 이름만 들어도 한성 그룹을 떠올리게 된다. 그러다 보면 유현아의 이미지는 점차 회사의 이미지와 겹친다.만약 유현아가 늘 지금처럼 완벽한 이미지를 유지할 수 있다면 회사도 손해 볼 것 없다.하지만 신이 아닌 사람이다 보니 늘 완벽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사건 사고라도 생겨서 이미지가 몰락하면 한성을 노리던 사람들이 이때다 싶어 득달같이 달려들 것이다.강한서는 입술을 오므리고 펜을 들어 그녀의 이야기로 감성팔이 하는 부분을 지워버리고 주제와 연관된 내용만 보류했다.그리고 다시 유현아에게 건네주었다."이렇게 해."원고를 확인한 유현아는 얼굴색이 변했다."대표님, 너무 많이 삭제하신 거 아니에요?"강한서는 아무 말 없이 머리를 들어 그녀를 보았다.유현아가 해석했다."지난 두 차례 강연에서 이것과 비슷하게 했는데 효과가 아주 좋았어요. 강현우 부대표님도 아주 만족스러워하셨고요. 특별히 저한테 더 추가하라고 하셔서 추가한 건데 이걸 지우시면 시간이 많이 남아요."강한서가 쌀쌀맞게 말했다."답은 정해져 있었으면서 나한테 왜 물어?"유현아는 목이 메어왔다.사실 그녀는 강한서가 어젯밤 일을 기억하는지 궁금했기도 하고 두 차례 홍보 강연으로 효과가 좋았으니 강한서에게 인정받으려고 일부러 왔다.그런데 강한서가 이렇게 혹평할 거라는 것은 상상도 못 했다.게다가 유현진도 자리에 있고 강한서도 아무렇지 않은 거로 보아 어젯밤 일은 기억하지 못하는 듯싶다."할 얘기 남았어?"강한서가 차갑게 말했다.유현아는 정신을 차리고 말했다."아니, 아니요."강한서는 그녀
프로젝트에 대한 중시도 있지만 강한서라는 엘리트 졸업생에 대한 환영이기도 하다.한성 그룹에서는 매년 다수의 엘리트를 채용했는데 그중 대다수가 태주 대학교의 졸업생이다. 취업은 물론 유학을 지원해 주는 방식으로 인재 유출 방지에 힘썼다. 이는 태주 대학교의 평판에 아주 큰 영향을 준다.오후 한 시쯤, 강한서와 유현진을 태운 차는 태주 대학교로 향했다.20분쯤이 지나 그들은 현장에 도착했다."우수 졸업생 강한서의 방문을 환영합니다. '스카이' 프로젝트 성공 기원."학교 앞에는 현수막이 걸려 있었다.학교 앞 관상용 식물은 허리 굽혀 인사하는 곰처럼 다듬어졌다.교문이 열리자 양측에서 재학생들이 휴대폰으로 지나가는 차량을 촬영했다.강한서는 비록 졸업한 지도 몇 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태주 대학교를 대표하는 인물이다. 매년 개학식에 선생님들은 꼭 강한서를 소비했기에 아직도 많은 학생이 강한서를 우상처럼 생각했다.유현진도 워낙 그 중의 한 사람이었다.문뜩 그녀는 재학 중이던 시절 캠퍼스 사이트에서 보았던 게시물이 떠올랐다."학생 때 우상처럼 여기던 사람과 결혼한다면."그때 유현진은 이렇게 댓글을 달았다. 만약 그 사람과 결혼한다면 난 10년을 채식주의자로 살수도 있어.그런데 지금은.유현진은 옆에 앉은 강한서를 힐끗 보며 생각했다.'그냥 그래, 역시 가지고 나면 재미를 잃는단 말이야.'그녀는 자기도 모르게 강한서를 상대로 질투가 생겼다.같은 학교를 졸업했건만 강한서는 아직도 레전드로 불린다. 하지만 정작 유현진은 그렇다 할 성과가 없다 보니 창피한 마음에 멘토와 연락조차 주고받지 않았다. 심지어 그녀는 자기가 학교에 누가 될까 봐 태주 대학교를 나왔다는 말조차 하기 어려웠다.그녀는 오랫동안 잃어버렸던 승부욕을 되찾기 위해 이곳을 찾았다.그녀는 은근히 다짐했다. 다음에 학교로 돌아올 땐 기필코 강한서보다 더 떠들썩하게 올 것이라고 말이다.태주 대학교는 차량이 출입하는 것을 금지한다. 하여 그들은 학교 문을 들어서 주차장에 주차했다.오늘 한성
강한서는 돌려말하는걸 선호하진 않았지만 그는 자신의 선생님앞에선 엄청난 존경심을 드러냈다.강한서는 이에 정 교장한테 물음을 던졌다."누군가요?"정 교장은 웃으며 말했다."조금 이따가 들어가면 다 알게 될걸세."대화를 나누다 보니 금새 휴식실앞까지 도착했다, 비서가 문을 열자 유현진은 휴식실의 소파에서 다리를 꼬고 앉아있는 주강운을 발견했다. 회색 양복에 금속테 안경을 쓰고 있는 그는 고개를 숙이고 손 안의 서류를 보고있었다."강운씨, 누구 만나러 왔어요?"주강운은 소리가 나는쪽을 바라본후 안경을 벗은후 부드러운 눈매를 드러냈다."한서 만나러 왔어요."유현진은 의외의 대답에 머리속에 한줄기 생각이 스쳤다. 이전에 자신이 주강운에게 재판을 맡겼을때 그가 자신이 T 대학교 법학계를 나왔었다고 알려줬던 일이 생각났다.하지만 오늘과 같은 자리에 나타난건 조금 의외였다.이에 정 교장은 자리에 있는 사람들을 위해 해석을 했다, 주강운은 초청강사로 오전에 법학계에서 두시간짜리 강의를 했었다, 게다가 법학원의 원장이 직접 전화 초청했던 것이였다.정 교장과 법학원의 원장은 서로 친구사이였었기에 주강운에 대해 아주 잘 알고 있었다. 게다가 주강운과 강한서의 사이도 잘 알고 있었기에 강의가 끝난후 불러서 밥 한끼 식사를 같이 하려고 했다.주강운은 열렬한 초대에 거절을 못하고 남아있었다.윗 사람들이 많은 자리에선 공적인 이야기가 많기 때문에 유현진은 말을 끼어들수 없었다.주강운은 의외로 입담이 좋아서 강한서의 과묵한 성격에 비하면 이런 자리에선 더욱 더 빛나는듯 했다.결국 문과 출신이고 법학계라 주위 사람들과의 관계유지면에서 다른 사람들보다 한수위 였다.대화가 무르익고 정 교장은 문뜩 강한서한테 질문을 던졌다."한서야, 네 와이프는 지금 어떤 일을 하고있니?"유현진은 조금의 수치를 느꼈다.전업주부는 별로 창피한 일은 아니였지만 모교의 교장앞에서 전업주부라 하는건 뭔가 입이 잘 떨어지지 않았다.유현아는 옆에서 강 건너 불구경하듯이 말문을 열었다.
그녀가 떠난후 스태프는 다시 한번 설비를 검사했다.몇분이 지나고 누군가가 갑자기 방송실의 문을 두드렸다.이에 스태프는"들어오세요.""안녕하세요."청아한 여자 목소리가 들려왔다.스태프는 고개를 돌렸다.상대방은 상냥하게"바깥의 스크린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것 같아요, 한 번 나와서 봐주실수 있나요?""스크린이 이상하다고요?"스태프는 말하면서 바깥으로 걸어갔다."저도 잘 모르겠네요, 한 번 가보셔야 할 것 같아요."두사람의 목소리가 점점 작아졌다.방송실의 문은 제대로 닫힌 상태가 아니였고 모니터가 번뜩이는걸 발견했다.스태프가 밖에 나와서 보니 스크린의 문제가 아니라 아예 전기가 들어오지 않은 상태였다.그는 재빨리 동료한테 조작실에 들어가서 어떻게 된 상황인지 알아봐달라고 했다, 동료가 들어간뒤 뒤이어 모니터에 전원이 들어오지 않았다는 목소리가 들려왔다.스태프는 그제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동시에 의문이 들었다, 그는 분명히 한성그룹의 사람이 와서 자료를 복사해갈때 스크린 전원을 직접 켰었다. 하지만 왜서 또 꺼졌는지 알 수가 없었다.유현진은 화장실에서 나오자마자 우연으로 화장실에 온 유현아를 마주쳤다.유현진은 그녀를 무시하고 지나쳐 가려고 했다.그녀가 지나갈때 유현아는 그녀를 불러켜세웠다."유현진, 당신 모교에서 내가 강의하는걸 보고있자니 기분이 어때?"유현진은 발걸음을 멈춘후 그녀를 흘겨봤다."너도 이런식으로밖에 T대학교에 올 일이 없지 않아? 시험 쳐서 올려면 10수해도 되나마나 할것 같은데?"이에 유현아는 심소흡을 한뒤"나는 붙지 못한다고 쳐도 너는 어떤데? 다른 사람 우리안에서 사육당하는것밖에 더돼? 돈 좀 있다고 뭐라도 된것 같지?"이 말은 안하윤이 그 전에 자신에게 했던 말이랑 똑같았다. 유현아는 점점 더 자신을 감추려고도 하지 않았다.유현진은 마음속으로 의문이 들었다, 유현아는 예전에는 항상 어두운곳에서만 수작을 부렸었는데 어제 강한서한테 작업건거도 그렇고 오늘 지금 그녀랑 정면으로 부딪히는것도 그녀의
그녀가 눈앞에 다가왔을때 강한서는 손을 뻗어 그녀의 썬글라스를 벗겼다.이에 그녀는 눈썹을 찌푸리며 불만을 드러냈다."썬글라스는 왜 벗겨?""썬글라스 끼고 올라가면 누가 당신 강연에 관심이나 있겠어?"유현진은 이에 새침해서 퉁명스럽게 대답했다."당신이 날 단속하는건 가능해도 나에 대한 다른 사람들의 생각까지 단속할수 있을까?""풉- -"옆에 있던 민경하는 웃음을 참지 못하고 터뜨렸다, 민경하는 역시 연기를 배운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이젠 코미디까지 섭렵하다니.강한서는 민경하를 힐끔 쳐다보고는 기침을 지었다, 그리곤 평소의 표정으로 돌아왔다.그는 썬글라스를 접어서 주머니에 넣었다."얌전하게 있어, 이상한 소리 하지 말고.""알았어."유현진은 드물게도 어째선지 이번엔 반기를 들지 않았다.오후 세시, 정식으로 토론회를 시작했다.정 교장이 제일 처음 한성 그룹과의 이번 콜라보레이션을 간단하게 설명했다, 그후 한성그룹에서 파견된 인원들이 차례대로 설명을 하기 시작했다, 현장의 분위기는 아주 빨리 달아올랐다.강현우와 강한서는 각각 이번 콜라보레이션에 대해서 간단한 축사를 했다. 그리고는 마이크를 유현아에게 넘겼다.그녀는 마이크 높이를 낮춘뒤 상냥한 목소리로 답했다."이 자리를 빛내주신 여러분에게 감사를 드립니다, 저는 이번에 한성그룹에서 준비하는 프로젝트 '스카이 프로젝트' 에 대해 설명하려고 나왔습니다. 저는 유현아라고 하고 올해 스물두살이고 현 한성그룹 운영부에서 근무하고 있습니다. 저랑 비슷한 나이이신 분이 있나요, 손 들어보시겠어요......"유현아의 목소리는 아주 달콤했고 말하는 속도가 빠르지도 늦지도 않았으며 말투에 특유의 억양이나 습관이 없었기에 친구와 대화하는 느낌이 났다, 이러한 서로 참가하는 형식의 강연은 사람들의 집중을 끌기에 충분했다.유현진은 앞에 놓여져있는 물컵을 가볍게 톡톡 쳤다, 시간을 재는듯 했고 다른 한편으로는 따분함을 드러내는듯 했다."네? 제가 대단하다고요? 당치도 않은 말씀이예요."유현아는 미소를 지으
신미정은 결혼을 재촉했지만 할머니는 결혼은 평생을 같이할 사람을 찾는 거라고 마음에 들고 잘 맞는 사람과 해야 한다면서 그렇게 서두르지 않고 있었다.그래서 자신에게 어울리는 결혼 상대를 물색하던 중 한현진의 강한서의 눈에 들게 된 것이다.교통사고까지 다 해서 고작 네 번 본 사이었고 말 한번 섞어본 적도 없어 그다지 좋아하는 건 아니었지만 보면 볼수록 한현진이 마음에 들었다.강한서도 마침 모르는 사람과 결혼해서 서로를 알아가는 게 시간 낭비 같았는데 한현진도 저런 늙은이한테 시집가는 건 원하지 않을 것 같았다.그리고 그날 교통사고도 실수이기는 하지만 한현진의 엄마가 간민혜를 차로 쳐서 죽인 건 맞기에 주강운이 갑자기 한현진한테 무슨 짓을 하기라도 할까 봐 신경 쓰이는 것도 있었다.어쨌든 주강운한테 고모가 간민혜를 만나려고 해서 그녀를 데리고 가다가 사고가 났다고 해명한 건 자신이었기에 강한서는 이 일에 대한 책임을 다하기 위해 한현진을 데리고 있고 싶었다.그렇게 자신을 설득한 강한서는 이틀 뒤 바로 한현진에 연락해 그녀와 맞선자리를 가졌다.맞선자리에서 한현진은 강한서를 알아본 듯했지만 별다른 말은 하지 않았기에 강한서도 굳이 그 일을 꺼내진 않았다.한현진은 이 맞선자리가 유상수가 꾸며낸 자리인 줄로만 알고 혹시라도 실수할까 싶어 말을 최대한 아끼고 있었지만 사실 유상수는 꿈만 꿀 뿐이지 그럴 능력이 못 되는 사람이었다.선 자리를 끝내고 본가로 돌아간 강한서는 바로 한현진의 자료를 건네주며 결혼 의사를 밝혔지만 유씨 집안을 조사해본 할머니는 바로 반대부터 했다.유씨 집안의 지위보다 아내가 아픈데도 들여다보지 않고 비서랑만 붙어있는 유상수의 사람 됨됨이가 별로라서 그의 딸도 비슷할 거라 생각해 거절한 걸 알아챈 강한서는 평소에는 그렇게 말을 아꼈으면서 이번에는 웬일로 한현진을 감싸기 시작했다.그녀가 친구를 도와 나서던 일과 그녀의 지금 상황까지 다 말한 강한서는 한현진이 아니면 결혼은 하지 않겠다고 단호히 말한 뒤 집을 나섰다.그 말에 답답해
침대에서는 늘 신사다웠던 강한서였기에 한현진은 하면서도 아픈 적은 정말 손에 꼽을 정도였다.그래서 당연히 실망은 하지 않았지만 그저 간간이 색다른 그의 모습을 바랐던 적은 있었다.사실 별로 감출 것도 없는 일이지만 갑자기 물어오는 강한서에 부끄러워진 한현진은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쓰며 말했다.“잠이나 자!”그에 웃음을 흘리던 강한서는 한현진을 이불과 함께 끌어와 제 품에 안더니 낮은 목소리로 놀리기 시작했다.“얘기마저 하고 자. 앞으로 어떻게 널 만족시켜야 하는지는 알려줘야지.”“현진아, 현진아. 좀 더 자세하게 얘기해보라니까?”진짜 머리가 어떻게 된 건가.어떻게 하면 만족할지를 자세하게 말하라니, 한현진이 미치지 않고서야 그런 짓을 할 리가 없었다.강한서는 그렇게 한현진을 한참 놀리다가 자리에 제대로 누우며 천천히 다시 입을 열었다.“나 오늘 내가 부계정으로 올렸던 피드들 다시 봤는데 진짜 너무 유치하더라, 전에는 내가 그 정도인 줄은 몰랐는데.”“너 원래 유치하잖아, 닉네임만 봐도 알리지 않아?”코웃음을 치며 말하는 한현진에 강한서가 웃어 보였다.“그 이름 내가 지은 거 아니야.”사실 그 계정은 일상을 공유하기 위해 만든 게 아니라 사업에 필요해서 만든 거였다.그때 한성 그룹에서 개발 중인 신제품에 대해 말이 좀 많았었는데 영향력이 좀 있는 사람들까지 그간의 데이터들을 언급하며 한성에는 그 정도 기술이 없다고, 전부 허위 홍보일 뿐이라는 소문을 퍼뜨리고 있어서 그걸 반격하기 위해 만들어진 계정이었다.그 신제품이 진짠지 가짠지 누구보다 잘 아는 강한서는 화가 나서 자신의 본 계정으로 반박문을 내려고 했지만 본 계정으로 낸 입장문이라면 큰 효과가 없을 거라던 한성우의 말에 설득당해 ‘다이아몬드 수저의 일상’이라는 계정이 생기게 된 것이었다.한성우의 말대로 부계정을 사용해 자신의 생각을 밝히니 사람들이 좀 더 쉽게 받아들였고 덕분에 팔로워도 점점 더 많아지고 있었다.자신의 화려한 배경이 사라지니 허구한 날 걸고넘어지던 사람들도
한현진은 목소리를 가다듬으며 딱딱하게 물었다.“말해 빨리, 나 잘 거니까.”“네가 싫다고 해도 내가 강제로 몰아붙이는 거 좋아한다고 했잖아. 그런데 하다가 네가 진짜로 하기 싫어질 수도 있는 건데 그걸 내가 구별할 수 있을까? 네가 진짜 싫은 건지 아니면 그냥 하는 말인지 잘 몰라서 실수하면 어떡해?”“잘 나가다가 내가 갑자기 왜 화를 내겠어?”“지금도 갑자기 화내잖아, 아까는 막 나 유혹하더니. 아무 예고도 없이 화내는 게 한두 번이야?”그 말을 들은 한현진은 돌아누워 강한서와 눈을 맞추며 따지기 시작했다.“그러니까 네 말은 내가 이유도 없이 자꾸 화만 낸다 그거야?”“아니, 그런 게 아니라 네가 진짜 하기 싫은 건데 내가 그걸 못 알아보고 계속하다가 너 다치게 할까 봐 그러지.”“진짜 싫으면 내가 너 물 거니까 그딴 걱정 할 필요 없어.”그 말에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던 강한서는 언제 풀었는지는 모르지만 이미 자유로워진 손으로 한현진의 손목을 잡으며 그녀의 입술에 입을 맞췄다.한현진이 그걸 왜 혼자 풀어냈냐고 따지기도 전에 혀를 입속으로 밀어 넣으며 치열을 고르게 훑고 지나가는 강한서에 한현진의 몸은 빠르게 나른해졌다.강한서가 입을 뗐을 때 한현진의 얼굴과 입술은 이미 빨개져 있었고 그녀는 가만히 누운 채 숨만 내뱉으며 아무런 힘도 쓰지 못하고 있었다.한현진 위에 올라타 있었던 강한서는 얼굴에 옅은 미소를 띤 채 그녀를 바라보더니 득의양양하게 말했다.“안 깨물었네.”한현진이 그 말의 뜻의 완전히 깨닫기도 전에 강한서는 또다시 입을 맞춰왔다.시간을 얼추 계산해보니 3달은 넘은 것 같아 사실상 관계를 한다고 해도 문제 될 건 없었기에 한현진은 쥐고 있던 강한서의 머리채를 놓아주고 몸에 힘을 뺐다.그렇게 키스를 이어나가던 강한서는 한참 만에 한현진을 놓아주더니 그대로 이불을 덮어주고는 그녀의 이마에 입을 맞추며 말했다.“자자 이제.”그 말에 어이가 없다는 듯 천장만 바라보던 한현진은 문득 인터넷에서 봤던 피드가 하나 떠올랐다.
강한서는 영문은 몰랐지만 그래도 한현진에게 벨트를 건네주었다.“뒤돌아서 손 등 뒤로 보내.”강한서는 한현진이 뭘 할지 알았지만 그래도 고분고분하게 뒤로 돌고는 손을 등 뒤로 교차시켰다.오래전에 배웠던 로프 묶는 방법을 오늘에서야 쓰게 되니 기뻤는지 한현진은 잔뜩 흥분한 채로 강한서의 손목을 묶었다.“이제 뒤 돌아도 돼.”한현진의 말에 따라 뒤로 돈 강한서는 손이 묶인 채로 그녀 앞에 꿇어앉았다.방금 샤워를 하고 나와 젖은 머리카락을 대충 뒤로 넘겨두었는데 강한서가 고개를 숙이니 머리카락도 앞으로 툭 하고 떨어져나와 그의 반쪽 얼굴을 가려버렸다.얼굴 앞에 드리운 머리칼 사이로 보이는 검은 눈동자에 한현진의 심장은 다시금 두근대기 시작했다.이제 보니 여자들이 정장을 입은 남자가 꿇어앉아 있는데 환장하는 이유가 있는 것 같았다.“맘에 들어?”낮은 목소리로 누구 하나 홀리려고 작정한 듯이 말하는 강한서에 한현진은 귀를 붉힌 채 말했다.“응, 맘에 들어.”“강운 그룹 사모님이 이런 취향인 줄은 몰랐는데, 진작에 나 이렇게 묶어 놓고 싶었겠네?”웃음을 흘리며 말하는 강한서에 한현진은 헛기침을 하며 떨리는 심장을 진정시키고는 입을 열었다.“그건 아니고. 난 네가 날 이렇게 대해주길 더 원했어.”오랜 시간 동안 부부로 살아온 좋은 점이라 하면 아마도 서로에게 더 뻔뻔해질 수 있는 게 아닐까 싶다.그래서 이런 낯간지러운 말을 해도 부끄러움이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강한서는 가만히 꿇어앉아 제 아내가 하는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나는 내가 싫다고 해도 네가 억지로 하는 걸 더 좋아해. 그리고 다 한 다음에 침대에 꿇어앉아서 나한테 용서를 비는 게 보고 싶었어. 내 취향은 그런 거라서.”한현진의 말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었던 강한서는 한참 만에 입을 열었다.“그럼 전에 우리가 싸울 때 내가 화나서 입 맞췄을 때는 왜 나 때린 거야? 그날도 내가 억지로 너 몰아세우고 하려고 했었잖아, 좋아한다면서 그때는 왜 나 죽이겠다고 그런 건데?”“진짜
송가람은 생각했다. ‘오빠는 그날 히비스커스 호텔에서 있었던 일 때문에 아직 나를 어떻게 마주하면 좋을지 모르겠는 거야. 게다가 내가 오빠 외숙모 때문에 다치기까지 했으니 분명 엄청난 죄책감에 시달리고 있을 거야. 그러니 이렇게 간단한 문자에도 오래 고민하는 거겠지.’강한서가 대화창을 보며 물었다. “뭐라고 답장한 거야?”한현진이 불퉁한 말투로 말했다. “이래도 안 돼, 저래도 안 되라고 하니까 어쩌겠어. 어떻게 답장하면 좋을지 모르겠으니까 모르겠다고 했지.”한현진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송가람에게서 답장이 왔다. [한서 오빠, 사실 그날 호텔에서 있었던 일은 저희 엄마가 너무 하셨어요. 오빠가 그렇게 대답한 것도 어쩔 수 없어서 그랬다는 거 알아요. 저 오빠 원망 안 해요.]눈을 마주친 강한서와 한현진 두 사람 모두 할 말을 잃었다. 이쪽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 상대방이 알아서 넘어왔다. 두 사람이 이렇게 열띤 토론을 펼칠 이유가 전혀 없었다. 한현진이 문자를 보냈다. [몸은 어때. 삼촌 일은, 내가 미안해.]송가람은 다시 한 번 그동안 강한서가 연락하지 않은 이유를 확신할 수 있었다. 그녀가 얼른 답장을 보냈다. [전 괜찮아요, 오빠. 네가 멋대로 결정했다고 오빠가 널 미워하지만 않는다면요.]한현진: [치료 잘 받아.]송가람이 얌전함을 표현하는 이모티콘을 전송했다. [오빠, 생일 파티할 거예요?]한현진: [아니. 그럴 기분이 아니라서.]그 말에 송가람의 얼굴엔 실망한 기색이 역력했다. 그녀느 사실 강한서가 조금 보고 싶었다. 고백 멘트를 작성하던 송가람은 서해금의 충고를 떠올리고 문자를 삭제했다. ‘조금만 더 기다려. 한현진을 회사에서 쫓아낼 때까지만.’송가람이 여전히 문자를 작성하고 있던 그 시점에 상대방에게서 문자가 도착했다. [현진 씨에게 들으니까 요즘 회사에서 대회 준비가 한창이라던데. 요즘 바빠?]송가람: [네. 조향 대회가 있어서요. 지금 한창 참가자 신청을 받고 있어요.]한현진: [네가 대회에서 좋은
한현진이 귀를 쫑긋 세웠다.“누구야?”강한서가 휴대폰을 한현진에게 건넸다. “내 불륜녀.”그 말 한 마디에 수화기 너머의 한성우는 머리가 어지러웠다. “네 뭐라고?”강한서를 힐끔 쳐다본 한현진은 강한서의 손에서 휴대폰을 건네받았다. 강한서는 한현진이 보내는 칭찬의 눈빛을 알아보고는 순간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한성우는 호기심에 겨워 잔뜩 흥분한 채 난리를 부리고 있었다. “두 사람 대체 뭐하는 거야? 네 불륜녀를 감히 조강지처 앞에서 이렇게 당당하게 밝힌다고?”두 사람은 한성우를 전혀 신경도 쓰지 않았다. 한현진은 사랑의 라이벌을 한 번 떠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송가람의 질문에 대답하지는 않고 오히려 반문했다. [가람아, 다친 건 어때? 아직도 아파?]강한서의 눈빛이 파르르 떨렸다. “이건 너무 하잖아. 내가 언제 이렇게 오글거리는 말을 한다고 그래?”한현진이 생각해도 이건 너무 강한서 답지 않은 문자였다. 그녀는 [아직도 아파?]라는 문자를 삭제했다. 하지만 강한서는 여전히 마음에 내키지 않았다. “이렇게 자상하게 얘기하지마. 지난 번에 홍혜림 씨를 만났을 때도 다신 연락하지 않겠다고 얘기했어. 하지만 네가 이렇게 답장을 보내면 나중에 만났을 때 내가 더는 선을 긋지 않을 거라고 생각해서 들이대면 나더러 어떡하라고.”강한서의 말에 한현진은 [다친 건 어때?]라는 글을 지우고 문자를 다시 작성했다. [계획 없어. 좋은 제안이라도 있어?]강한서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생일에 뭐할까 고민한 건 가까운 사이에서만 가능한 거야. 네가 이렇게 물어보면 걔가 뭐라고 생각하겠어?”한현진이 눈썹을 씰룩였다. “조용히 해. 애초부터 네 불륜녀에게는 내가 답장할 거라고 얘기했잖아. 네가 뭔데 나서?”강한서가 말했다. “내가 답장은 네가 하라고 얘기한 건 맞지만 이렇게 하는 건 아니지. 현실 반영은 해야 하잖아.”한성우는 궁금해 미칠 지경이었다. “형수님, 불륜녀라뇨. 강한서에게 언제부터 불륜녀가 있었어요. 남자예요, 여
여러 루트를 통해 송가람은 드디어 시계 관련 소식을 전해들을 수 있었다. 지금은 재고가 없어 7일을 기다려야 했다. 하지만 오늘 마침 빈해시의 한 고객이 시계를 반품했고 송가람이 동의한다면 먼저 그 시계를 가질 수 있다고 했다. 빈해시는 한주와 그리 멀지 않았다. 오늘 저녁이면 시계를 받을 수 있었다. 전화를 받은 매니저가 말했다. “고객님은 오늘 두 번째로 이 시계에 관해 물어보신 분이세요. 점장님 친구 분이라고 하셔서 먼저 연락드렸어요. 만약 구매 의향이 있으시다면 지금 바로 보내드릴게요.”송가람이 물었다. “저 말고 또 누가 물어본 거죠?”“죄송해요, 고객님. 그건 고객님 개인 정보라 말씀 드릴 수가 없어요.”굳이 묻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한현진이 분명했다. 송가람은 괜히 어깨가 으쓱해졌다. 결국은 자신이 한현진보다 먼저 시계를 구해내고야 말았다. 송가람이 태연한 말투로 말했다. “지금 준비해줘요. 물건은 바로 저에게 보내주시고요.”“알겠어요. 돈을 입금해주시면 저희가 영수증과 함께 시계를 포장해 최대한 빨리 보내드릴게요.”송가람은 자신이 가진 절반 이상의 돈을 신미정에게 사기 당했다. 이 시계까지 사고 나면 송가람은 거의 전 재산을 탕진하는 것과 다름이 없었다. 하지만 이렇게라도 한현진에게 골탕을 먹이는 것은 물론 강한서의 마음도 살 수 있다고 생각하니 송가람은 큰마음을 먹고 계좌 이체를 할 수밖에 없었다. 송가람이 입금을 하자마자 한성우에게 한 통의 전화가 걸려왔다. “세상에, 대박. 팔렸어요. 형수님, 저희 회사에서 영업을 하시는 게 어때요? 한 달 매출의 절반을 원하신대도 괜찮아요.”한현진이 말했다.“꿈 깨요. 이렇게 쉽게 속는 바보가 그렇게 많을 줄 알아요?”그 시계는 신우의 사촌 동생의 것이었다. 사긴 했지만 하고 다닌 적은 없었고 집에 한 달 째 고이 모셔두고 있다가 갑자기 실증이 나 환불한 것이다. 이런 명품 시계는 애초부터 재고가 많지 않았다. 하지만 구매한 지 한 달이 되어서야 환불을 하려니 쉽지 않
송가람은 조금 멍해졌다. 서해금은 얼마 전까지만 해도 강한서와의 만남을 강력하게 반대했다. 그 때문에 모녀가 몇 번을 싸웠는지 기억도 나지 않을 정도였다. 그런 서해금이 갑자기 뜻을 굽히니 송가람은 심지어 자신이 잘못 들은 것은 아닌지 의아하기까지 했다. 그녀는 한참만에야 정신을 차리고 환한 얼굴로 말했다. “엄마, 정말 반대 안 할 거야?”서해금이 어이가 없다는 듯 말했다. “내가 아무리 반대해도 무슨 소용 있어? 내가 반대한다고 네가 내 말을 들은 적이나 있어? 넌 엄마를 원수 취급하려고 했잖아.”“엄마, 정말 날 속이려고 하는 말 아니지?”송가람이 몇 번이고 서해금의 마음을 확인했다. 서해금이 한숨을 내쉬었다. “세상에 자식 이기는 부모가 어디 있어? 지금 네 꼴을 봐봐. 강한서를 위해 얼마나 비참한 모습을 하고도 돌아서려 하지 않는지. 이런 널 보고 내가 뭘 어떡할 수 있겠어?”송가람이 와락 서해금을 끌어안았다. 날아갈 듯이 기쁜 마음이 도무지 감춰지지 않았다. “엄마, 전엔 다 내가 잘못했어. 난 그냥 한서 오빠가 너무 좋아서 그랬어. 엄마, 걱정하지 마. 내가 한서 오빠를 좋아하는 걸 반대하지만 않으면 앞으로 뭐든 엄마가 하라는 대로 할게.”서해금이 가볍게 송가람의 등을 쓸었다. 그녀의 눈빛이 밝게 빛났다. “벌써 좋아하지 마. 내가 말한 조건 잊지 마. 엄마는 깔린느에 반 평생을 쏟아부었어. 깔린느는 엄마가 너에게 남겨주는 거야. 그러니까 네가 깔린느를 지킬 능력이 있다는 걸 보여줘. 네에게 그런 능력이 있어야 앞으로 네 결혼 생활이 어떻든, 깔린느가 네 손에 있는 이상 아무도 널 함부로 대할 수 없어.”“알겠어, 엄마. 엄마가 날 위해서 그러는 거 알아. 엄마를 실망시키지 않을게.”전엔 아무리 말해도 들은 척도 하지 않더니 강한서를 미끼로 사용하니 이제야 조금 말귀를 알아듣는 것 같았다. 서해금이 답답한 마음을 꾹 누르며 나지막이 말했다.“세은이가 회사에 입사할 때, 한현진이 어떤 약속을 했었는지 기억해?”송가람은
스쳐지나면 바로 잊어버릴 만큼 그저 평범하기 그지없는 얼굴이었다. 하지만 그 평범한 미모에 파묻힌 두 눈은 은서하의 등골을 서늘하게 했다.저도 모르게 뒤로 한걸음 물러선 은서하는 실수로 바닥에 놓인 화분을 건드렸다. 꽃병이 흔들리는 소리에 은서하가 번뜩 정신을 차렸다. 한현진 역시 그 소리를 듣고 무의식적으로 은서하를 쳐다보았다. 은서가 얼른 고개를 숙이고 말했다. “죄송해요, 대표님.”은서하의 목소리가 작게 떨렸다. 하지만 그리 티가 나는 떨림은 아니라 한현진도 알아차리지 못했다. “괜찮아요.”한현진이 사인을 마친 서류철을 은서하에게 건넸다. “결재 다 했어요. 가봐요.”한현진이 건넨 서류철을 받아 꼭 끌어안은 은서하가 가볍게 허리를 숙여 한현진에게 인사를 하고는 몸을 돌려 사무실을 나섰다. 은서하는 사무실 문을 닫으며 다시 한 번 주혁을 쳐다보았다. 그 시선을 느낀 듯, 상대방 역시 사무실 문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은서하는 얼른 시선을 피하며 문을 닫았다. 서류철을 끌어안은 은서하의 머릿속은 백짓장이 되었다. 그녀는 멍한 눈으로 서류철을 쥔 손에 꽉 힘을 실었다. 결재 서류에 크고 작은 구겨진 자국이 났다. 흐리멍덩한 정신으로 걷던 은서하는 누군가와 부딪혔다. 품 안의 서류가 툭 날리며 바닥 여기저기에 엉망으로 흩어졌다. 은서하가 부딪힌 건 그녀와 친분이 있는 사람이었다. 꽤 가까운 사이였던 그 사람은 허리를 숙여 은서하를 도와 서류를 주으며 핀잔을 줬다. “넌 키가 작아서 내 얼굴에 부딪히지 않아서 다행이야. 아니면 내가 얼마 전에 고친 코가 너 때문에 부러질 뻔 했잖아.”은서하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물었다. “코를 고쳐? 너 성형했어?”“기억력이 너무 형편없는 거 아냐? 성형한지 이제 6개월도 지났어. 이번엔 다시 손 좀 본 거야.”상대방은 말하며 은서하의 이마를 톡 쳤다. “너도 얼른 그 복코 수술 좀 해. 네 얼굴은 코 때문에 다 망쳤어. 날 수술해준 의사 선생님이 기술이 꽤 좋아. 할 생각 있으면 얘기해. 소개해줄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