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강운은 입술을 깨물더니 말했다."너 민서가 날 어떻게 생각하는지 알잖아. 민서가 오해하는 것도 싫고, 두 가족이 이에 대해 기대를 품는 것도 원치 않아."강한서는 오히려 담담한 태도를 보였다."네가 그렇게 생각하면 하루 빨리 여친을 찾아서 민서가 일찌감치 포기하도록 하면 되잖아."주강운이 웃으면서 말했다."그게 내가 생각한다고 바로 실현되는 거 아니잖아. 여유를 가지고 기다려야지. 적합한 사람 있으면 나 소개시켜줘. 내가 그렇게 요구가 높은 것도 아니고. 외모야 봐줄 만하면 되고, 성격은 현진 씨 정도면 돼."강한서......상대방이 농담인지 진심인지 분간하기 어려웠던 강한서는 주강운의 눈을 응시했다. 강한서에 비해 유현진은 엄청 단순하게 생각했다. 심지어 내심 흥분되었던 그는 고개를 돌려 강한서를 향해 말했다."봐봐. 나 같은 유형 소개팅 시장에서는 은근 인기가 많다니까."한성우도 유사한 얘기를 한 적 있고, 심지어 주강운도 이렇게 말하니 유현진의 어깨에 힘이 들어갈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강한서가 유현진을 흘끔 쳐다보더니 한마디 뱉었다."그래 얼굴만 예쁘고 머리가 텅 비었으니 인기가 많겠지."유현진......망할 인간! 그 놈의 입에서는 좋은 말이 나올 때가 없지!주강운이 방금 전에 한 말은 농담인 것 같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농담 분위기를 거두고 부드럽게 말했다."가자. 성우한테 가봐야지."차미주가 뒤따라 왔을 때, 조 선생님은 한성우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그는 의사가운이 아닌 정장 차림이었다. 미소를 지으면서 친구와 담소를 나누는 장면을 포착하자 차미주의 눈은 자연스레 주변 사람들을 필터링해 버렸다. 시야에 남은 건 오직 조 선생님 뿐이었다.차미주는 잠깐 옷차림을 정리하고 보폭을 줄여 앞으로 다가가 애교를 섞은 목소리로 불렀다."조 선생님?"조준은 멈칫하다가 고개를 돌려 차미주에게 시선을 돌렸다.그의 시선은 차미주를 아래로부터 훑기 시작하여, 희고 가느다란 다리를 지나 조금씩 위로 이동하면서 엉덩이,
한성우는 다시 한번 차미주를 밀어냈다.하지만 온 몸에 탄탄한 근육들로 뒤덮인 차미주는 낙지마냥 한성우에게 착 달라붙어서는 떨어지지 않았다. 한성우가 아무리 애를 써도 밀어낼 수가 없었다.강한서라면 일말의 여지도 없이 바로 밀쳤을 텐데, 한성우는 강한서와 달랐다. 그는 어느 부잣집 따님인데, 자신이 기억하지 못했을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있는 힘껏 밀칠 수가 없었다.한성우는 차미주의 어깨를 톡톡 두드리면서 미소 지은 얼굴로 말했다."얼굴을 보여줘야 변했는지 안 변했는지 알지."내 얼굴을 보겠다고? 그러면 다 들통날 거잖아.차미주는 얼굴을 아예 한성우의 가슴에 묻으면서 말했다."성우 오빠, 농담하지 마요. 저 쑥스러움을 많이 탄단 말이에요."한성우......이거 누가 특별히 준비한 프로그램 같은 거 아니겠지?키가 이렇게 작은데, 뭔 힘이 이렇게 세?두 사람의 '친밀한' 스킨십을 보자, 조준은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다."미주 씨, 한 대표님과 어릴 때부터 아는 사이었어요?""어릴 때 잠깐 알고 지내던 사이었어요."한성우......이렇게 끌다가 한성우가 뭔가 떠오르면 끝장이라는 생각이 들자 차미주는 바로 핑계를 대고 자리를 떴다."성우 오빠, 생일 축하해요. 친구들이랑 놀고 있어요. 저는 화장실 다녀올게요."말이 끝나기 바쁘게 한성우가 반응하기도 전에 그는 인파 속으로 사라졌다.한성우는 차미주의 얼굴을 끝내 보지 못했다. 그저 조준과 얘기를 나눌 때 빛이 반짝였던 큰 눈만 뇌리에 박혔다.조준이 물었다."한 대표님, 미주 씨 어느 집 따님이죠?"한성우가 어찌 알겠는가?그저 한마디 얼버무렸다."먼 친척이요."조준이 웃었다."재밌는 친구네요."차미주는 멀리 가고 나서야 고개를 돌려 상황을 살폈다. 조 선생님의 기색이 평소와 다름없자 비로소 시름을 놓았다.엄청 위험했다! 그나마 반응이 빨라 위험한 상황은 모면했지만!그는 고개를 숙여 자신의 손을 내려다 보자, 방금 전에 한성우를 안았던 장면이 떠올라 저도 모르게 불쾌한 표정을
이때 차미주에게서 문자가 왔다."강한서랑 조 선생님이 아는 사이야?"유현진이 답장을 했다."그런 것 같어.""너 강한서한테 조 선생님에 대해서 잘 알아보라고 해. 만약 나랑 조 선생님이 잘되면 나중에 너랑 강한서를 주례로 모실게."차미주가 부탁하지 않더라도 유현진은 알아볼 계획이었다. 어느 집안 출신인지 알아보기 전에 우선 사람 됨됨이를 알아야 하니까.사람들이 인사말을 서로 주고받은 후 유현진은 낮은 소리로 강한서에게 물었다."당신, 조 선생님과 잘 아는 사이야?"강한서가 유현진을 흘끔 쳐다보더니 답했다."아니!"그러자 유현진이 미간을 찌푸렸다."잘 아는 사이도 아닌데 당신한테 말을 걸어?"강한서가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나한테 말을 거는 사람이 그렇게 많은데 내가 일일이 다 잘 알아야 돼?"유현진은 할말을 잃었다.강한서는 일부러 말해주기 싫어서가 아니라 정말로 잘 아는 사이가 아니었다. 가끔 한성우가 사람들을 초대하는 자리에서 만난 적이 있을 뿐, 그의 배경에 대해서 아는 게 없었다.하지만 유현진은 강한서가 일부러 말해주는 않는 줄 알고 순간 화가 났다.이러한 자리에서 강한서는 항상 인기가 폭발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여기저기서 사람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유현진은 옆에서 딱히 할말도 없었고, 머릿속은 온통 조 선생님에 관해 알아볼 생각으로 꽉 차 있었다.이때 그는 주강운이 조 선생님과 얘기를 나누는 모습을 포착했다.두 사람의 모습을 보아서는 친한 사이인 것 같았다. 유현진은 바로 술잔을 들고 다가갔다."강운 씨, 이거 드셔 보실래요?"주강운이 고개를 돌려 유현진을 발견하자 눈빛이 더없이 부드러워졌다. 그는 유현진이 건네는 디저트를 받아쥐고는 부드럽게 말했다."고마워요."유현진은 이 기회에 조준에게 인사를 했다."조 선생님, 안녕하세요."조준도 예의를 다해 인사를 했다."현진 씨, 안녕하세요."주강운이 옆에서 물었다."두 사람 아는 사이에요?""아는 사이라고 할 수는 없고, 얼마 전에 친구가 건강검진하는데
그는 숨을 죽이고 일일이 대조해 보았다.그의 예상대로 9743 숫자 네 개 모두 그 위에 있었다.그럼 하현주가 설정한 비번이 은영 선생님의 행사 횟수?찐팬으로서 충분히 할 수 있는 행위였다.그럼 나머지 두 자리는?6과 5는 뭘 의미하지?9743이 은형 선생님과 연관이 있다면, 6과 5도 분명 은영 선생님과 관련 있을 텐데.유현진은 잠깐 고민하다가 검색창에 은영 선생님을 입력해보니, 은영 선생님의 생일이 바로 6월 5일이었다.비번이 이거라고?유현진은 갑자기 심장이 튀어나올 것만 같았다.그가 수상한 표정을 지으면서 선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자, 주강운이 앞으로 다가가 물었다."무슨 일 있어요?"유현진은 비로소 정신을 차리고 휴대폰 화면을 끄고 말했다."강운 씨, 조금 있다가 그이한테 제가 급한 일이 있어서 먼저 갔다고 전해줘요. 그리고 집 갈 때 미주를 집에다 바래다주라고 해요."유현진의 심각한 표정을 보자 주강운은 낮은 소리로 물었다."무슨 일이 있어요?""아뇨."유현진은 애써 웃으면서 말했다."오늘 저녁에 비가 있다고 하네요. 제가 키우는 화분들이 비를 맞으면 안돼서 비막이를 해줘야 해요. 도우미 아주머니가 온 지 얼마 안돼서 서툴다보니 제가 직접 가봐야 해요.""알겠어요. 제가 조금 있다가 한서에게 전할게요.""고마워요."그러고 나서 유현진은 빠른 걸음으로 떠나갔다.주강운은 그의 뒷모습을 보면서 방금 전의 대화를 다시 떠올려 보더니 저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렸다.택시를 잡아 아름드리 펜션에 도착하자마자 유현진은 금고 앞으로 직행하여 659743을 입력했다.틀렸다.그는 입술을 깨물면서 다시 974365를 입력했다.그러자 금고에서 "띠띠" 소리가 나더니 치륜들이 서로 맞물리는 소리가 들렸고, 뒤이어 "쾅당"소리가 울리면서 금고 문이 튕기면서 열렸다.그 안에스는 엄청 두꺼운 자료가 놓여 있었다.그가 손을 내밀어서 꺼내보자 첫 번째 자료가 바로 이혼협의서였다.그는 두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놀라운 마음을 애써 다독이면
유상수는 얼굴에 유현진이 몇 번 보지 못한 환한 웃음을 짓고 있었다.이 사진은 유독 구김이 심했다. 세 사람의 웃음이 심지어 구김 속에서 흉해 보이기까지 했다. 유현진은 이 사진을 봤을 때 하현주의 심정이 어땠는지 체감할 수 있었다.유현진은 갑자기 등골이 오싹했다. 유상수가 유현아에 대한 태도를 다시 떠올려 보니 뭔가 불길한 생각이 들었다. 그의 불길함을 증명이라도 하듯 맨 마지막에 친자확인서가 있었다.그의 예상대로 유현아와 유상수는 친자관계였다.확인서에는 유현아가 유상수의 친딸일 가능성이 99.996%라고 적혀 있었다.유현진은 갑자기 피가 거꾸로 솟는 것만 같았다.진실에 한번 놀랐고, 유상수의 잔혹함에 다시 한번 경악했다.그는 자신의 친딸을 양녀 신분으로 집에 끌어들여 자신의 아내가 십여 년을 키우게 하였다. 어느 만큼 잔인한 사람이었으면 이렇게 할 수 있는가?그는 하현주가 이 일을 발견했을 때 얼마나 큰 충격을 받았을지 상상이 안갔다.하현주는 유현진에게 이 일에 대해서 언급한 적이 없었다.하현주의 우울증과 정서 기복 때문에 힘들었던 유현진는 엄마가 이토록 충격적인 일로 큰 고통을 겪었으리라고 상상한 적이 없었다.그 생각만 하면 마음이 아파서 찢어질 것만 같았다.어쩌면 하현주가 말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말했는데 자신이 유의하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었다.유현진은 대학입시 당시 하현주가 자신에게 만약 자신이 유상수와 이혼하면 누구랑 살겠냐고 몇 번 물어봤던 생각이 떠올랐다.하지만 유현진은 당시 하현주의 말을 마음에 두지 않았다. 그 전에도 하현주는 유상수와 자주 싸웠고, 싸우고 나서는 항상 그 물음을 했기 때문이다.사실 하현주는 유상수와 이혼하고 싶지 않았다. 유현진에게서 답을 얻고자 했던 것이 아니라 이혼하지 않을 핑계를 찾고자 했을 뿐이다.그래서 유현진은 매번 아버지와 함께 살고 싶다고 대답했고, 그렇게 대답하면 엄마가 아빠와 이혼할 수가 없었기에그 답을 들으면 엄마는 늘 웃음을 지으면서 유현진을 품에 안아주었다.그런데 그러던
유현진이 현장에 도착하자 강한서가 보이지 않았다.한성우도 보이지 않았고, 현장은 케익이 군데군데 떨어져서 엄청 지저분했다. 게다가 여전히 시끄러웠고, 많은 사람들이 이미 취한 상태였다. 무대 위에서는 초청가수가 여전히 혼신을 다해 노래를 하고 있었고, 명암이 바뀌는 조명 때문에 정신이 없었다.한바퀴 돌아본 유현진은 구석진 곳에서 소파에 앉아있는 주강운을 발견했다.그의 머리카락에도 크림이 묻어있었다. 그는 팔뚝으로 테이블을 짚어 몸을 지탱하면서 눈을 감은 상태로 태양혈을 꾹꾹 누르고 있었다.유현진이 가까이 다가가서 두 번이나 불러서야 정신을 차린 주강운은고개를 들어 유현진을 보자 표정이 부드러워졌다."왔어요."유현진은 고개를 끄덕이면서 물었다."한서 씨는요?""한서가 좀 많이 취해서 제가 방금 전에 룸에 눕혔어요. 제가 룸까지 안내해 드릴게요.""네, 그럼 부탁할게요."주강운은 손바닥으로 테이블을 짚으면서 일어서더니 휘청거렸다. 유현진은 바로 그의 팔을 잡고는 부축하면서 물었다."강운 씨 괜찮아요?"주강운의 얼굴은 창백하다 못해 투명했다. 입술에도 핏기가 전혀 없었다. 상태가 아주 안좋아 보였다. 그는 손을 절레절레하면서 답했다."오늘 술은 좀 과하게 마신 것 같아요. 두통이 심하네요."그러자 유현진은 주강운이 수술 후 두통 후유증이 남았다는 사실이 떠올라 그를 부축하여 자리에 앉혔다."우선 여기에 앉아요. 약을 가져왔어요? 술을 마셨으니 약은 최대한 안먹는 게 좋겠네요. 제가 물을 가져다 드릴게요."주강운이 말을 하기도 전에 유현진은 이미 몸을 돌려 물 가지러 갔다.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따뜻한 물을 들고 왔다.주강운은 물 반 컵을 몇 분에 걸쳐 마셨다. 그는 동작 하나하나가 점잖았다.따뜻한 물을 마시자 혈색이 조금 돌아온 주강운을 발견하자 유현진이 말했다."여전히 힘드시면, 조금 있다가 우리가 돌아갈 때, 제가 병원에 모셔다 드릴게요. 의사 선생님 보셔야 할 것 같은데.""자주 있었던 일이라 괜찮아요. 시간이 좀 지나
하현주가 교통사고가 난 당시 유현진은 대학생이었던 터라 하현주의 재산은 유상수가 전부 관리했다.유현진은 하현주의 병원비를 자신을 부담할 수 있도록 그의 명의 하에 있는 지분을 자신의 명의로 바꿀 생각도 해봤다. 하지만 그때마다 유상수는 자신이 아직 생전인데 벌써부터 재산을 분할할 궁리를 한다고 버럭 화를 냈다. 하현주가 교통사고를 당하고 나서 유씨 가족 사업은 유상수의 수중에 들어갔기에 유상수가 동의하지 않는 한 유현진은 그의 수중에서 종이 한 장 가져가지 못할 것이다.강한서와 결혼 후 유상수는 권리를 유현진에게 주지 않을 이유가 더해졌다.출가외인이라고 하면서 만약 유현진이 유씨 가족 일에 너무 많이 관여하면 강씨 집안에서 욕할 거라고 하였다.강씨 집안의 태도가 어떤지는 몰라도 유상수가 원하지 않는 것만은 분명했다.자기 딸을 시집 보내면서 몇십 억 값어치의 예물을 받았으면서 1억도 안되는 차를 사준 사람이 지분을 스스로 내놓을 리가 없었다.외도, 사생아와 같은 사건은 이 바닥에서 비일비재하다. 따라서 이 일을 폭로하는 걸로 유상수를 위협하더라도 그는 두려워하지 않을 것이다.하현주가 남긴 증거들을 이용하여 유상수가 스스로 하현주의 지분을 내놓토록 할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유현진은 순간 갈피를 못잡았다.머릿속에 온통 그 생각뿐이었던 터라 엘리베이터가 도착한 줄도 몰랐다.주강운은 유현진을 데리고 긴 복도를 거쳐 룸 입구에 도착해서방키를 찍었다. 그러자 유현진이 문을 밀고 들어갔다.하지만 들어가 몇 발자국 움직이지 않았는데, 널브러진 여자 힐을 발견했다.뒤이어 방 안에서는 여인의 속삭임이 들려왔다. 심장이 순간 움츠러진 유현진은 저도 모르게 두 주먹을 쥐었다. 수상함을 인지한 주강운도 안색이 바뀌었다.그 누가 이 광경을 보더라도 안에서 어떤 일이 발생했는지 가늠할 수 있기에 주강운은 유현진에게 말했다."제가 들어가 볼게요."유현진은 형용할 수 없는 표정을 짓고 있었고, 입술을 깨물면서 답했다."아니요. 제가 들어가 볼게요."말
유현진은 뺨 때리기 경험이 아주 풍부했다.유현아를 대상으로 하룻밤 내내 연습을 했으니까.그래서 그가 날린 뺨에 맞은 유현아는 귀에서 웡웡 소리까지 들렸다."저 사람이 취했다고 너도 취했어?"유현진은 냉혹한 표정으로 더없이 차갑게 말했다."너 그러한 분수도 모르는 애였어?""감히 나를 때려?"유현아는 맞은 볼을 한 손으로 잡고는 다른 한 손으로 유현진의 뺨을 때리려고 했다. 그런데 그때 유현진의 옆에 서있던 주강운이 그의 손목을 잡았다.이 기회에 유현진은 뺨을 한번 더 날렸다."내가 못 때릴 이유가 없지. 언니로서 분수도 모르고 설치는 동생을 교육하는데 큰 문제라도 있어? 분명 이 사람이 취한 걸 알면서도 이러고 있어? 넌 염치같은 건 없니?"말을 마치고 나서 유현진은 다시 한번 뺨을 날렸다. 힘이 어찌나 들어갔는지 유현아의 얼굴에 손가락 자국이 뚜렷하게 남았다.유현아는 맞은 볼이 얼얼하고 머리가 멍해졌다. 어릴 때부터 유상수의 편애로 유현진은 유현아를 털끝 하나 못 건드렸다. 유현진은 오늘 미친 게 분명하다.그는 뺨을 되돌려주고 싶었지만 주강운의 손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그래서 화난 어투로 소리쳤다."당장 이 손을 놔요!"이에 주강운은 담담하고 예의바르게 말했다."현아 씨, 말로 하셔야죠. 손을 대는 건 너무 체면 구기는 일이잖아요."유현아는 화가 치밀어서 입술이 바르르 떨렸다.손을 대면 체면이 구겨져? 그럼 유현진을 말려야지, 나를 잡고 있어 유현진더러 때리게 하는 건 뭐냐고!내가 때리면 체면이 구겨지고, 그럼 유현진은 사람을 함부로 때려도 된다는 거야?이런 식으로 싸움을 말리는 게 어딨어?유현진은 유현아의 뺨을 다섯 번이나 때렸다. 유현진의 손바닥이 저려올 즈음 주강운이 말렸다."우선 한서를 가서 봐요."유현진은 두 주먹을 꽉 쥐고는 더이상 뺨을 날리지 않았다.그는 차가운 시선으로 유현아를 한번 노려보고는 허리를 숙여 바닥에 널브러진 벨트와 넥타이를 주웠다.유현아는 얼굴이 벌겋게 부어올랐다. 주강운이 손목을
말을 하며 차미주를 화장실로 데려가 손에 세정제를 좀 묻히고 힘껏 팔에 끼워넣었다. 차미주는 손목을 돌리며 이 팔찌가 지금 입고 있는 옷과 너무 잘 어울린다는 걸 느꼈다. 그녀는 이전에 옥이 별로라고 말한 게 너무 과했던 것 같다고 생각했다. ‘이 팔찌, 진짜 너무 아름다워. 말 그대로 예술이잖아.’ 그녀가 팔찌를 감탄하며 들여다보다가 갑자기 한 가지 의문이 떠올랐다. “강한서가 내 손목 둘레를 재었다고 하는데, 이 팔찌는...?” 한현진이 눈을 살짝 좁히며 웃었다. “이건 너를 위한 신혼 선물이야. 아직 결혼은 안 했지만 미리 즐겨봐. 나한테 며칠 더 두면 내가 못 참고 껴버릴까 봐 그래.” 차미주는 그 말을 듣고 팔찌를 빼려고 했다. “너 미쳤어? 이거 얼마나 비싼데. 너 결혼할 때 내가 500만 원밖에 안 줬는데 이건 너무 과하지 않냐고.” 처음 끼울 땐 힘들었는데 이제 빼려니 더 어려웠다.한현진이 차미주를 막았다. “미주야, 그건 다르지. 그렇게 비교하면 안 돼. 내가 결혼할 때 너는 한 달 월급이 300만 원도 안 됐잖아. 그런데도 500만 원을 선물로 줬고 그 마음이 그 선물보다 훨씬 더 값지고 중요한 거야. 지금은 내가 능력이 생겨서 너 결혼할 때 더 좋은 선물을 줄 수 있게 된 거고 그건 내 마음이야. 가치가 높고 낮고로 그 마음의 소중함이 달라지지 않아.” 한현진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이 팔찌는 강한서가 고른 건 맞지만 처음 봤을 때부터 이상하게 너도 이걸 좋아할 거라는 느낌이 들었어. 마음에 들어?” 차미주가 대답했다. “좋아. 근데...” “좋으면 됐어. 앞으로도 우리 둘 다 더 많이 벌 수 있을 거야. 그때 가면 팔찌 같은 건 아무것도 아니야. 건물이라도 망설이지 않고 너한테 줄 수 있어.” 차미주가 웃으며 말했다. “그건 됐어. 건물은 너무 비싸. 너랑 강한서가 또 이혼하고 나한테 재산 반환을 요구하면 어떻게 해?” 한현진은 혀를 차며 이빨을 간 채 말했다. “우리 둘한테
한현진이 그녀의 손등을 툭 쳤다. “그만 떠들고 가만히 서 있어 봐.” 차미주는 바로 허리를 펴고 자세를 잡았다. 한현진이 그녀를 이리저리 살펴보다가 갑자기 중얼거렸다. “뭔가 하나가 부족한데...” 차미주는 고개를 갸웃했다. “뭐가?” 한현진의 입꼬리가 의미심장하게 올라갔다. “조금만 기다려 봐.” 30분도 채 지나지 않아 초인종 소리가 울렸다. 차미주가 문을 열자 문 앞에 서 있는 사람은 강한서였다. 그는 손에 작은 상자 하나를 들고 있었고 표정은 평소처럼 담담했다. 차미주는 놀라서 물었다. “너 여기 웬일이야?” “너희 집에서는 현관문 열고 얘기하면 몇 년 받냐?” 차미주는 말문이 막혔다. 차미주는 멋쩍게 길을 비켜주며 그 귀한 분을 집 안으로 들였다. 강한서는 한현진의 눈짓에 따라 손에 든 상자를 거실 테이블 위에 내려놨다. 한현진이 소파 가장자리에 앉아 상자를 열자 차미주는 호기심에 슬쩍 고개를 내밀어 안을 들여다봤다. 그리고 바로 눈이 휘둥그레졌다. 상자 안에는 투명한 광택을 띠는 옥 팔찌가 들어 있었다. 차미주는 옥 팔찌에 대해 잘 몰랐다. 엄마가 몇 개 가지고 있긴 했지만 대부분 짙은 녹색이라 촌스럽다고 생각했었다. 늘 옥 팔찌는 나이 든 사람이나 좋아하는 물건이라고 여겼다. 하지만 눈앞에 있는 이 팔찌는 달랐다. 맑고 투명한 빛에 가장자리엔 은은한 황금빛이 스며들어 있었고 자연광 아래에선 촉촉하게 윤기가 돌았다. 마치 물기를 머금은 꽃잎 같았다. 차미주는 눈앞에 옥 팔찌가 너무 마음에 들었다. “미주야, 이리 와.” 한현진이 불렀다. 차미주는 정신이 번쩍 들어 그녀 앞으로 다가갔다. 한현진은 차미주의 손목을 잡고 팔찌를 들어올렸다. 팔찌를 손목에 끼웠다. 안 들어갔다. 다시 시도했다. 또 안 들어갔다. 세 번, 네 번, 다섯 번... 차미주의 손목은 붉게 달아올랐고 팔찌는 손목 중간쯤에서 멈춰서 올라가지도 내려가지도 않았다.
차미주는 얼굴이 살짝 붉어졌다. “아직 안 정했어. 그의 생일에 맞춰서 먼저 혼인신고를 하고 결혼식은 양쪽 부모님이 서로 만나고 만족하면 우리 엄마가 사람을 불러서 날짜를 정해줄 거야. 우리한테 맞는 날을 고르기만 하면 돼.”한현진은 놀라서 물었다. “너희 둘 진도가 언제 이렇게 빨라졌어?”차미주는 웃으면서 대답했다. “그 개자식이 나한테 청혼할 때 내가 고민할 것도 없이 바로 받아 줬어. 후에 웃으면서 말하더라구. 내가 너무 급하게 받아줬다고. 좀 더 밀당했어야 한다고. 근데 그때는 전혀 그런 생각이 안 들었어. 내 머릿속엔 오직 ‘그래. 나도 결혼하는구나.’라는 생각뿐이었어. 하하.”한현진은 웃으면서도 어이가 없었다. “누가 너를 자극한 거야?”“자극이라기보단...” 차미주는 입술을 삐죽이며 천천히 말을 이었다. “너 기억나? 내가 말했던 그 큰 이모. 그 이모는 두 아들을 두었는데 첫째는 나보다 두 살 많고 둘째는 아직 고등학교에 다니고 있어. 우리 할머니는 그 집안을 아주 좋게 봤어. 그래서 어릴 때부터 그 집에 편애가 심했지. 내가 사촌오빠랑 싸우면 그 오빠가 나를 이기지 못하고 항상 고자질을 했거든.”“그 큰 이모는 나를 볼 때마다 그런 얘기를 했어.” ‘너처럼 덩치 크고 성격도 안 좋으면 커서 누가 너랑 결혼해주냐?’ “사실 그 말이 나한텐 꽤 큰 걱정거리였어. 물론 자라면서 그 이모가 입이 가벼운 사람이란 걸 알게 됐지만 그때는 정말 결혼 못할까 봐 불안했어. 아니면 왜 20년이 넘도록 아무도 나를 좋아하지 않았겠어.”한현진은 웃음을 멈출 수 없었다. “너한테 남자가 없는 게 아니라 너를 좋아했던 사람들을 네가 죄다 친구로 만들어버린 건 아닐까?”사실 그녀가 알기로만 해도 대학 시절 차미주에게 호감을 보였던 남자는 둘이나 있었다. 첫 번째 남자가 어떻게 포기했는지는 몰라도 두 번째 남자는 차미주에게 농구 경기를 같이 보러 가자고 직접 데이트 신청까지 했었다. 차미주는 선뜻 따라갔지만 농구장은 그저 핑계일 뿐이었다
한현진은 그녀의 호적지를 보고 잠시 멈칫했다.이시연은 오래 기다렸고 그 사이 네 명이 더 끼어든 후에야 은서하가 비로소 돌아왔다. 그녀는 땀에 젖어 얼굴이 여전히 창백했고 얼굴색이 좋지 않아 보였다.이시연은 그녀를 보며 걱정스레 물었다. “아직도 괜찮지 않은 거예요? 의사한테 같이 가줄까요?”은서하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괜찮아요. 화장실 갔다 오니까 많이 나아졌어요. 기다리게 해서 미안해요.”이시연은 결과지를 건네며 웃으면서 말했다. “미안하면 승진하고 나 좀 잘 챙겨줘요.”은서하는 웃으며 대답했다. “일자리만 지킬 수 있어도 감사하죠. 승진은 꿈도 안 꿔요.”잠시 멈추고선 덧붙였다. “대회 준비는 어떻게 돼가요?”“그냥 그럭저럭이죠. 서 대표님이 이번에 강력한 카드를 데려왔으니까 우리는 그저 배경일 뿐이죠.” 이시연의 자조 섞인 웃음이 흘러나왔다. “친선 경기라고 보면 되죠 뭐.”은서하는 향료 조향에 대해 잘 알지 못했지만 잠시 생각한 후 말했다. “그래도 좀 더 열심히 해봐야죠. 안 그러면 너무 아쉬울 거 같아요.”이시연은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았다. 그녀 차례가 되었기 때문이다.클라우드 아파트 902.“현진아, 이건 어때?”차미주는 흰 티에 청바지 오버롤을 입고 한현진 앞에서 빙그르르 돌며 물었다. “어때?”한현진은 턱을 괴고 생각에 잠긴 듯 여유 있게 대답했다. “나쁘지 않아.”“그럼 아까 그 꽃무늬 원피스는?”“그것도 괜찮아.”차미주는 눈꺼플이 살짝 뛰었다. “그럼 이 노란 운동복은?”“비슷해.”차미주는 이를 악물며 말했다. “너 지금 뭐야? 그냥 대충 말하는 거지? 다 비슷하면 난 도대체 뭘 입어야 해?”한현진은 웃으며 그녀를 달래듯 말했다. “내가 너 대충 대하는 게 아니야. 오면서 계속 생각했어. 너한테 좀 더 격식을 차린 옷을 입힐지 아니면 너의 스타일에 맞는 옷을 입힐지 말이야. 평소에 이렇게 캐주얼한 옷을 입고 다니니까 갑자기 정장 스타일을 입으면 길도 제대로 못 걸을 거고 스
한현진은 잠시 동작을 멈추고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살짝 웃으며 말했다. “서해금 옆에 있은 지 얼마 되지도 않은데 벌써 사람들 사이를 이간질하는 법을 배우셨군요.”은서하의 얼굴이 잠시 창백해졌지만 이내 급히 마음을 가다듬었다. “한 대표님, 저를 싫어하시든 미워하시든 상관없어요. 하지만 주혁이라는 사람. 그 사람만큼은 정말 조심하셔야 해요. 단순한 사람이 아니에요.”“주혁 씨가 왜 그런 사람이라고 생각하는데요? 그냥 운전기사일 뿐인데? 당신 말대로라면 그 사람이 다른 정체를 숨기고 있다는 건가요?” “정확하게 말하지 않으면 난 당신이 정말로 걱정해서 경고해 주는 건지 아니면 고의로 우리 사이를 흔들려는 건지 잘 모르겠어요.”은서하는 더 조급해졌다. “저는 이간질하려는 게 아니에요. 그 사람만큼은 가까이 하지 말고 멀리 하세요. 한 대표님, 당신이 저를 도와주셨어요. 제가 아무리 배은망덕한 사람이라도 당신에게 해가 되는 일은 절대 안 할 거예요.”초조해하는 은서하와는 달리 한현진은 차분한 태도를 유지한 채 단호하게 물었다. “내가 그때 당신을 도와줬을 때 당신은 어떻게 했죠? 갑자기 등을 돌리지 않았나요? 은서하 씨, 내가 당신을 믿을 수 있을까요?”은서하는 갑자기 몸을 움츠리며 눈시울이 붉어지기 시작했다. “한 대표님, 저는 겁이 많고 피할 줄 밖에 모르는 사람입니다. 하지만 그 정도는 알아요. 최소한 저를 도와주셨던 대표님을 해칠 수 없다는거요.” 그녀의 진지한 말투에 한현진은 마음이 흔들렸다. 침묵을 지키며 그녀를 바라보다 차갑게 입을 열었다. “그럼 주혁 씨를 멀리하라는 이유라고 말해보세요. 내가 믿을 수 있도록 설득 될 만한 이유요.”은서하는 더 이상 말하지 않고 손을 움켜잡은 채 잠시 입을 다물었다.한현진은 지칠 대로 지쳐 얼굴을 굳히며 말했다. “이유가 없다면 더 이상 여기서 나를 걱정한다는 이런 말도 안 되는 얘기 하지 말고 그냥 가세요.”은서하는 급히 당황한 기색을 보이며 말했다. “아니에요. 제가 말하지
[서해금이 나를 눈엣가시로 여기고 온갖 방법을 동원해서 나를 회사에서 쫓아내려고 하고 있어. 만약 네가 은서하고 우연히 내가 임신한 사실을 알게 된다면 그걸 이용해서 서대금이 나를 잠시라도 회사에서 밀어낼 수 있게 할 수 있어. 그리고 넌 그 기회를 통해 승진하고 월급도 올리고 사장 앞에서 좋은 이미지도 쌓을 수 있어. 그 상황에서 너라면 그걸 참을 수 있겠어?]차미주는 그 말에 감탄하며 말했다. [임신한 채로도 이렇게 계산적이네? 너 아이 낳으면 두 명의 도깨비가 나올까 봐 걱정돼.]한현진은 잠시 말문이 막혔다. [그럴 리 없을 거야. 강한서가 매일 내 옆에서 를 읽어주고 있어. 맨날 애들한테도 읽어주니까 조금은 성품이 좋을 거야.][강한서 진짜 대단하다. 넌 그걸 듣고 있어?][안 듣지.] 한현진이 대답했다. [난 이어폰 끼고 드라마 봐. 강한서가 애들한테 읽어주고.]차미주는 웃으며 말했다. [그럼 결국 는 아무 소용없다는 거네.][왜?] 한현진이 물었다.차미주가 익살스럽게 웃으며 답했다. [우리 엄마가 항상 그러셨어. 아이는 유전이 중요하다고.] [옛말에 그런 말 있잖아. 용은 용을 낳고 봉항은 봉황이 낳는다고. 네가 도덕이 없다면 강한서이 아무리 를 많이 읽어줘도 소용없어.”[너 진짜!] 한현진이 이빨을 갈며 말했다. [한성우 씨랑 있더닌 이제는 입만 잘 돌아가네.][오래 배운 거 이럴 때 써먹어야지.]한현진은 코웃음을 쳤다. [나랑 연습하면 뭐 해. 능력 있으면 너희 사장한테 가서 연습해.]차미주는 웃으면서 대답했다. [그건 안 돼. 사장한테서 월급 받아야 해.]차미주는 잠시 말을 멈추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 있잖아.그 사람이 나를 자기 집에 초대해서 밥을 먹자고 하는데 네가 봤을 때 첫 만남에 뭘 입고 어떤 선물을 가져가야 할까? 정말 고민돼.]한현진은 답했다. [내가 경험이 많아 보여?][두 번이나 결혼했잖아. 너가 없으면 누가 경험 있겠어.]한현진은 담담하게
은서하는 빠르게 시선을 거두고 건강검진표를 꽉 쥔 채 한현진의 뒤로 갔다. 그러나 그녀의 시선은 자연스레 한현진의 배로 향했다. 한현진은 회사에 와서부터 항상 허리 라인이 보이지 않는 넉넉한 옷만 입었다. 뒷모습으로 보면 여전히 날씬해 보였고 이상한 점은 전혀 없었다. 하지만 한현진이 특정 동작을 할 때 배가 살짝 불룩한 것을 알 수 있었다. 전에 한현진의 차에 탔을 때 그 모습을 잠깐 본 적이 있었다. 처음엔 그저 살이 찐 것이라 생각했지만 사실은 임신한 것이었다. 그 사실을 깨닫자 은서하의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왜 한현진은 회사에 임신 사실을 알리지 않았을까?’ ‘혹시 서해금 때문일까?’은서하는 복잡한 마음을 안고 있었지만 한현진은 마치 그녀의 발견에 전혀 개의치 않는 듯했다. 잠시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다가 전화를 받고 몇 마디를 나누고선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는 줄을 빠져나갔다.은서하는 잠시 멈칫하며 물었다. “한 대표님, 검사 안 하세요?”한현진은 천천히 돌아보며 담담하게 대답했다. “괜찮아요. 일이 생겨서 나중에 다시 올려구요.” 그리고는 아무런 표정 없이 그 자리를 떠났다.한현진이 떠난 뒤 이시연이 나타났다. “한 대표님 어디 가셨어요?” 이시연은 주위를 살펴보며 물었다.은서하가 대답했다. “전화를 받으시더니 일이 생겼다며 먼저 가셨어요. 나중에 다시 오신다고 했어요.”“그렇군요.” 이시연은 잠시 생각하다가 다시 물었다. “그런데 한 대표님과 얘기 해봤어요? 예전에 그 분의 옷을 받고 따돌림 당하고 급여도 깎였다고 했을 때 한 대표님이 굉장히 마음 아파했어요.” “그때 한 대표님이 먼저 도와주겠다고 했었죠. 후에 그렇게 된 건 어쩔 수 없지만 한 대표님은 정말 착한 분이세요. 잘 사과하면 한 대표님이 이해해줄 거예요.”은서하는 고개를 숙인 채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한 대표님이 신경 쓰지 않으셔도 저는 그런 얘길 꺼낼 입장이 아니에요. 그리고 저는 그냥 작은 직
그녀가 고개를 돌리자 멀지 않은 곳에서 이시연과 은서하가 진단서를 들고 다가오는 모습이 보였다.이시연이 은서하의 손을 이끌고 다가오며 말했다. “한 대표님, 여기서 뵙네요. 건강검진 받으러 오신 거예요?” 한현진은 고개를 끄덕였다가 은서하를 가볍게 훑어본 뒤 다시 이사연에게 시선을 돌렸다. “두 분도 오늘입니까?” 이시연이 웃으며 말했다. “원래는 어제가 제 날짜였는데 어제는 아는 사람이 별로 없어서 다른 분이랑 바꿨어요. 서하 씨랑 같이 오려고요.” “가족은 안 데리고 왔어요?” 이시연이 담담하게 말했다. “우리 부모님은 직장에서 추가 의료보험을 들어두셔서 제가 신경 쓸 필요 없어요. 서하 씨 외할머니의 병은 보험으로는 혜택을 받을 수가 없어서요.”은서하는 내내 말이 없었다. 이시연이 얘기하는 동안 그녀의 시선은 자꾸만 주혁에게로 흘러갔다. 주혁은 예민하게 그 시선을 포착했다. 둘의 눈이 맞닿자 은서하는 움켜쥔 손에 힘을 주며 차분히 고개를 끄덕였다. 주혁도 묵묵히 고개를 끄덕여 답하고는 별다른 말 없이 시선을 돌렸다. 마침 건강검진 순서가 불리기 시작했다. 주혁이 먼저 입을 열었다. “한 대표님, 얘기 나누세요. 전 애들 데리고 먼저 검진 받으러 가겠습니다.” 그가 주상욱와 함께 자리를 떠나자 이시연이 한현진에게 조용히 제안했다. “한 대표님, 같이 가실래요? 먼저 채혈하고 나서 초음파 검사하면 순서가 빨라요. 그러면 금방 검사 끝내고 식사하실 수 있을 거예요.” 한현진은 고개를 가볍게 저었다. “채혈은 이미 했어요. 먼저 가요. 난 초음파실 앞에서 번호표 뽑아둘게요.” 한현진은 애초에 건강검진을 받으러 온 게 아니었다. 주혁이 진짜 주혁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의심이 들고 난 뒤부터 직접 그를 만나보고 싶었다. 방금까지 대화를 나누는 동안 그녀는 내내 무심한 척 주혁을 은근히 살폈다. 주혁의 외모는 평범했다. 사람들 사이에 섞이면 눈에 띄지 않을 정도로 흐릿한 얼굴이었다.
주혁이 설명했다. “상욱이가 자신이 보낸 그림 잘 받았는지 물어봐요. 마음에 드는지 궁금해해요.”한현진은 고개를 끄덕이며 낮은 목소리로 주혁에게 물었다. “마음에 든다는 걸 수화로 어떻게 하면 돼요?”주혁이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 “그냥 말하면 돼요. 상욱이는 들을 수는 있지만 말하는 게 서툴러요.”사실 주상욱은 말을 못 하는 건 아니었다. 그는 납치 사건에서 구출된 후 청력을 잃었다. 오랫동안 그는 청각장애인처럼 생활했으며 오랜 시간동안 소리를 못 들은 것도 있지만 또한 납치 당시 겪은 충격 때문에 사람과 접촉하는 것을 두려워했다. 언어 능력도 점차 떨어졌고 말을 꺼내는 것조차 원하지 않았다. 이후 보청기를 장착한 뒤 청력은 조금씩 회복되었지만 언어 능력은 여전히 회복되지 않았다. 그는 사람들과 소통할 때 수화를 사용하는 것을 더 편하게 느꼈다.한현진은 주상욱에게 미소 지으며 따뜻한 목소리로 말했다. “고마워. 정말 마음에 들어.”주상욱은 눈이 반짝이며 수화를 하려다가 잠시 멈췄다. 그리고는 핸드폰을 꺼내 글을 한 문장 써서 한현진에게 건넸다.“나 보라고?” 한현진이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주상욱은 고개를 끄덕였다.한현진은 고개를 숙여서 화면을 읽었다. [누나, 아빠에게 휴가를 주셔서 고마워요. 덕분에 아빠와 함께 생일을 보낼 수 있었어요. 아빠가 잘못한 일이 있어서 이제 누나 옆에서 일할 수 없다고 하더라고요. 아빠를 미워하지 말아 주세요. 아빠는 정말 좋은 사람이에요. 저와 엄마를 위해 많은 고생을 했어요. 우리가 아빠를 힘들게 한 거예요. 아빠 대신 사과하고 싶어요. 아빠를 용서해 주실 수 있나요?]한현진은 입술을 꽉 깨물었다.아이의 말은 서툴고 순수했지만 그 마음은 진심에서 우러나왔다. 그러나 그는 알지 못했다. 그가 입에 담은 ‘아빠’가 진짜 아빠가 아닐지도 모른다는 사실을.한현진은 아무 말 없이 자신의 핸드폰에 글 한 줄을 적었다. [다 지나간 일이야. 이제 네 아빠를 탓하지 않아.]주혁은 이제 그녀 곁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