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는 강한서가 화를 낼거라고 생각했다.그들 집안이 얼마나 강민서를 아끼는지는 그녀가 제일 잘 알았다. 그녀가 그들이 애지중지하는 보배를 그토록 쥐어팼으니 강한서가 가만히 안 있을거라 생각했다.하지만 강한서는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오랫동안 침묵을 지켰고 그제서야 입을 열었다."집으로 돌아가자, 어르신께서 보신탕을 잡수시고 싶대."유현진은 흠칫했다.하지만 목을 풀고는 아무 말도 꺼내지 않았다.강민서가 그녀에게 맞은 사실은 강씨 가문이 의도적으로 덮고 있는지 외부에는 잘 알려지지 않았다.필경 묶여서 한 번 맞았던건 용서를 할수 없는 일이지만 만약 이 소문이 퍼진다면 여론이 어떨지는 알 수가 없었다. 그래서 강씨 가문은 이 소식을 덮기로 결정했다.경찰쪽에서도 아무런 진전은 없었다.본래 아주 평범한 폭력상해안건이라고 생각했었지만 수사도중 번번히 난관에 봉착했다. 먼저 CCTV영상이 바뀌는가 하면 사람을 납치하는데 쓴 이동수단은 폐차예정이였던 차량이였다.그들이 찾아갔을땐 이미 폐차가 진행된후라 아무런 단서도 찾을수 없었다.신미정은 몇 번이나 경찰서에 가서 소란을 피웠다, 때문에 하마트면 공무집행방해죄로 행정구속이 될 뻔했으나 할머니께서 친히 나서서 이 일을 잠재웠었다. 그래서 신미정도 할머니께 엄청 야단을 맞았었다.유현진은 자신도 이 일이 이런 결과를 맞이할거라고 생각도 못했다.일주일이 지나고 어르신께서는 퇴원수속을 밟았다. 어르신의 몸은 회복이 어느정도 된 상태라 예전과 같이 아침운동을 나갈수 있게 되였다.3일후의 저녁, 유현진은 집으로 돌아왔다. 평소와 같이 그녀를 반겨주는 어르신은 집에 없었다. 그녀는 어르신께서 자주 앉았던 의자에서 쪽지를 발견했다."고향집에 있는 꽃돼지가 애기를 낳는다고 하더라, 내가 돌아가서 애기 낳는것만 봐주고 추석에 돼지고기를 가지고 올테니 걱정하지 마렴."어르신은 이렇든 소리소문없이 한주시를 떠났다.유현진은 어르신이 무사히 고향집에 도착한걸 확인한후 연기와 팔순잔치 준비에 눈 코 뜰새없이 바쁜 나날을 보냈
강민서는 입안이 아파서 음식도 제대로 먹지 못했다, 그녀는 화가 나서 그릇을 바닥에 내동댕이쳤다.가정부는 혹시 그녀의 심기를 건드릴까봐 두려워서 벌벌 떨며 바닥을 치웠다. 그녀는 유리컵을 들어 가정부 발밑으로 던졌다.부서져 흩날리는 유리파편이 가정부의 손에 스치며 피가 뿜어져 나왔다."꺼져! 다 꺼지란 말이야!"고함을 지르기 무섭게 그녀는 아파오는 볼을 꽉 잡았다."아주머니는 무슨 잘못이 있다고 그래?"신미정은 그녀를 혼낸후 고개를 돌려 가정부를 보며 입을 열었다."그만 정리하고 상처를 먼저 치료해요."가정부는 이에 응하고는 방에서 나갔다.신미정은 또 다른 그릇에 담겨있는 죽을 강민서에게 넘겨주었다."이건 식은거야, 천천히 먹어."요 몇일간 구강내의 상처때문에 강민서는 음식을 삼키기도 어려웠다. 영양분 섭취가 어려워지니 사람은 몰라보게 허약해졌고 안색도 아주 안 좋아졌다.게다가 계속되는 통증에 원래도 괴팍한 성격이 더욱더 심해졌다."나 안 먹을래, 엄마 나 너무 아파......"그녀는 낮은 소리로 흐느껴 울기 시작했다.신미정은 부쩍 살이 빠진 딸을 보고 이를 꽉 깨물었다. 조금후 그녀는 입을 열었다."일단 밥 얼른 먹어, 그래야 상처가 빨리 낫지. 걱정하지 마련, 이번 일, 엄마가 절대로 그냥 안 넘어갈거야."- - - -차미주는 밖에서 유현진을 기다리고 있었다. 유현진은 방금 전여사와 대화를 마치고 나오는 중이였다. 그녀는 다급하게 물었다."어때, 합의는 됐어?"유현진은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용호의 사장이 전여사야."차미주는 멈칫 했다."그 너한테 몇천만원 정도 잃고 사사건건 훼방을 놓던 그 전여사 말이야?"유현진은 고개를 끄덕였다."원수를 외나무다리에서 만난다고 하더니 이런 우연이. 너한테 있는 개인적인 원한때문에 일부러 안 빌려주는거 아니야?""가능성 있어."아마도 이 가능성의 확률은 엄청 높을것이였다.전여사는 강씨 가문에서 잔치를 준비하고 있는 사실을 모를래야 모를수가 없을것이였다. 신미정은 진작에
차미주는 불쾌한 기색을 드러냈다."나 아직 여자로서의 즐거움도 다 못 느꼈는데 성전환이라도 하라고? 만약 한다해도 적어도 남자랑 사랑을 나눠본후에 생각해볼거야."유현진은 어이가 없어서 말이 나오지 않았다.그녀가 왜 이 주제로 대화를 나누고 있는지 어이가 없었다.원래 가는 도중에 핸드폰으로 예약을 하고 병원에 도착해서 빨리 진료를 받을거라 생각했지만 유선외과에서 진료하고 있는 사람이 너무나도 많았다.그리고 대부분은 그들과 나이가 비슷한 여성들이였다.요즘 젊은 여성들이 받는 스트레스량이 증가가 원인이 아닐까 싶었다, 뭔가 유선질병의 발병시기가 점점 더 앞당겨지고 있는듯한 느낌이 들었다.그녀는 원래 차미주를 위로해주려고 고개를 돌렸지만 정작 차미주는 모바일 게임을 하고있었다.유현진은 입꼬리가 떨렸다."유방암에 걸렸을지도 모르는듯 걱정도 안돼?"차미주는 얼굴도 들지 않고 말했다."정 안되면 성전환이라도 하지 뭐."그녀는 희망적인 차미주를 보고는 괜히 걱정했다는 생각이 들었다."그럼 너 여기서 줄 서고 있어, 나 화장실 한 번 다녀올게.""그럼 빨리 돌아와야돼? 나 혼자 들어가기엔 무서워, 내 옆에 있어줘.""알았어."민경하가 생수를 받고 있을때 화장실로 향하는 익숙한 그림자를 발견했다.그는 어안이 벙벙했다.(사모님께서 왜 병원에 계시지?)그는 곰곰히 생각하더니 그녀를 뒤를 밟기 시작했다, 유현진이 화장실에서 나온뒤 계단을 올라가는걸 보았다.그는 계속해서 그녀의 뒤를 밟았다. 그리고는 유선외과 진료실에 들어가는 유현진을 발견했다.그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듯 했다. 그리고는 황급히 강한서에게 전화를 걸었다."강 대표님, 사모님께서 유선외과 진료실에 들어가시는걸 봤습니다."- - - -병원 병실.강한서는 의자에 앉아서 사진앨범을 보고있었다.간호사는 옷을 정리하고 병실에 들어왔다."강 선생님, 오늘도 은서를 보러 오셨어요?"생각이 끊긴 강한서는 입술을 만지며 핸드폰 화면을 껐다."요즘은 어떤가요?""최근에 은서 상태가 많
강한서는 고개를 돌렸다, 문앞에 빨간 모자를 쓰고 있는 다여섯살 돼보이는 작은 아가씨가 동그란 눈으론 그를 부르고 있었다.그 애는 작고 여위였으며 단발에 큰 눈을 갖고 있었기에 아주 카리스마가 있었다.강한서는 입술을 만지며 물었다."방금 날 뭐라고 불렀니?"작은 계집애는 입을 뾰루퉁하게 내밀면서"삼촌이요."이에 강한서는 손을 흔들며"이리 오렴."계집애는 걸어가서 그의 다리에 올라앉았다."다음엔 다른 색갈의 모자를 쓰면 안돼요? 모자색갈이 저랑 너무 안 어울려요. 다 저한테 동화속 성냥팔이 소녀가 성냥갑을 들고 있는것 같대요."강한서는 자세히 훑어보더니 평가를 시작했다."비슷하긴 하네, 그래도 색갈은 두개밖에 없어, 나머지는 검은색이야.""그럼 검은색 주세요.""그럼 이미 다 탄 성냥개비 같은데?"은서는 할말을 잃었다."이모랑은 아직도 화해하지 않았어요?"은서는 그의 목에 매달리며 물었다.강한서는 멈칫 하더니"그건 누구한테서 들었니?""민 삼촌이 말해줬어요."계집애는 흥얼거리기 시작했다."안 말해도 알았을거예요, 삼촌이 몇번동안 입은 옷이랑 전에 입었던 옷이랑 냄새가 달라요. 이모의 향기가 없어졌어요."그리고는 코를 갖다대며 냄새를 맡았다."이것 봐요, 오늘도 그 향기가 없어요."강한서는 계집애의 코를 꼬집으며 물었다."그런것도 맡아낼수 있어?"계집애는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이모랑 싸우면 방에 들이지 않아서 그렇죠?"말하고는 한숨을 쉬었다."휴, 이러면 저는 언제쯤이면 동생을 가질수 있을까요?"강한서는 눈가가 떨렸다. 그를 말하는건지 그녀를 말하는건지는 알수 없었다.계집애가 요즘들어 누구랑 어울리는지 점점 더 할머니느낌이 났다.서로 대화를 나누던 도중 강한서의 핸드폰이 울렸다."강 대표님, 사모님께서 유선외과 진료실에 들어가시는걸 봤습니다."강한서는 안색이 살짝 변하기 시작했다."지금은 어디있는데?""방금 들어가셔서 아직 어떤 상황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강한서는 전화를 끊은후 다리위에 앉아있는
"아직도 안 나왔어?"민경하는고개를 끄덕였다."들어간지 꽤 되셨어요."말하는 도중, 안에서 여인의 비명소리가 들려왔다.강한서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듯 했다, 무의식적으로 문을 열고 들어갈려고 했으나 아주머니가 황급히 그들을 불러세웠다."의사선생님께서 검사하시는 중이예요, 만약 안에 있는 종양을 만지면 종종 아파서 저렇게 소리를 질러요. 지금 들어가면 의사선생님 진료에 방해가 될거예요."강한서는 문을 열려고 내민 손을 거두었다, 그의 입술은 타들어가기 시작했다.아주머니는 그들이 엄청 걱정하고 있는 표정을 보고는 위로를 건넸다."조 선생님의 의술은 아주 뛰여나요. 사람이 잘 생겼고 온화해서 분명히 문제 없을거예요."강한서는 눈가가 떨리기 시작했다, 민경하가 그가 물어보려던 말을 먼저 물어봤다."조 선생님은 남자 의산가요?""어, 요즘은 남자 의사가 진료하는게 정상 아닌가요? 산부인과에도 남자 의사가 얼마나 많은데. 병만 잘 치료한다면 남자이건 여자이건 무슨 상관이 있나요. 왜 젊은 사람들이 이 늙은 아줌마보다도 아는게 없어요?"강한서는 입을 열수가 없었다.민경하는 힐끔 자신의 사장님을 쳐다보았다, 그의 안색은 절대로 좋다고 말할수 없었다. 그래서 민경하는 그를 대신해서 계속해 물었다."대체적으로 어떻게 검사하는데요?""뭘 어떻게 검사해요? 만져봐야 어떤 상황인지 알수 있고 그에 따른 진단서도 떼죠."민경하는 입가가 떨렸다."만...... 만진다고요?"아주머니는 이상하다는듯이 물었다."남자 비뇨기과도 진료할때 만지잖아요?"민경하는 반박을 할수 없었다.그는 평소라면 꼬치꼬치 캐물었었겠지만 이번 일은 계속해 묻기가 어려웠다.결국엔 기침을 짓더니 낮은 소리로"강 대표님, 정상적인 검사랍니다."강한서는 그를 한번 보고는 뻗뻗하게 굳은 얼굴을 하고 한마디도 입밖에 내지 않았다.한편 문진실내에서는.차미주는 얼굴을 붉히며 앞에 있는 반듯하게 생긴 의사를 쳐다보고있었다.유현진은 차마 볼수가 없었다."이렇게 누르면 아파요?"조 선
유현진은 듣자마자 그녀가 농담을 건네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챘다.유현진은 그녀가 평소에 무슨 순진한 척 다 하더니 잘생긴 사람을 만나면 똑같이 맥을 못추는게 웃겼다.조 선생님은 웃으면서 그녀에게 진단서를 넘겨주었다."촉진은 검사를 할때 가장 기본적인 겁니다, 저희 과의 선생님들이라면 모두 할 줄 압니다.""그럼 선생님은 여기에서 제일 실력이 있으신 분이시겠네요. 아니면 선생님 진료를 기다리는 사람이 저렇게 많을리가 없잖아ㅛ ."조 선생님은 웃고는 말을 잇지 않았다."조 선생님, 카톡 남겨주실수 있나요? 제가 처음으로 이런 병에 걸려서 아직도 많이 무섭네요. 만약 갑자기 아플때 카톡으로 여쭤봐도 돼요?"조 선생님은 조금 생각을 하더니 이에 답했다."좋습니다."두 사람은 서로 카톡을 주고받았다, 유현진은 미련이 남아서 떠나지 않는 차미주를 끌고선 진료실을 나섰다."조 선생님 너무 멋지다고 생각 안해? 의사 가운에 다리도 엄청 길고 그 테 없는 안경까지 너무 반듯하지...... 양아치?"차미주는 말이 끊나기도 전에 앞에 서있는 강한서를 보고는 생각없이 "양아치" 라는 단어를 입밖에 내고 말았다.그녀는 자신의 혀를 깨물고 싶었다. 강한서가 뒤끝이 길다는걸 그녀는 잠시 까먹은듯 했다. 그리고는 급히 방금의 태도를 바꾸며"강 대표님, 오랜만이예요. 혹시 조 선생님께 진료를 받으시러 오셨나요?"민경하......유현진......강한서......강한서의 안색이 점점 나빠지는걸 발견한 유현진은 이 사고뭉치를 떠나 보냈다."빨리 검사하러 가, 난 여기서 기다릴게."차미주는 기다렸다는듯이 진단서를 가지고 부리나케 도망갔다.차미주가 떠나기를 기다린후에야 강한서가 입을 열었다."진료받는걸 옆에서 도와준거야?"유현진은 머리를 끄덕였다."당신이 검사받은건 아니지?""내가 이렇게 멀쩡한데 검사받을게 뭐가 있어?"유현진은 그에게 이상한 눈길을 보냈다.이를 듣자 강한서의 잔뜩 찌푸린 눈썹은 그제서야 조금 수그러들었다. 그리고는 민경하를 째려보았다.
강한서는 진료실 밖에 서서 사람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그가 주위의 모든 시선을 끌고 있다는 사실을 전혀 눈치채고 있지 않았다.그는 잘생겼을뿐만 아니라 와이프 진료를 곁에서 도와주러 왔다는 필터가 더해지자 줄을 선 여성들은 그에 대해 호기심을 가지지 않을수 없었다.하지만 방금의 아주머니만은 그를 보는 표정이 아리송한듯했다.강한서도 이를 눈치채고는 상대방의 시선을 가렸다고 생각해 옆으로 몇 발자국 움직였다.결국 이 사교성이 활발한 아주머니는 참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사람이 좋아보여서 하는 말인데 왜 저런 비서를 곁에 두었어요?"강한서는 어안이 벙벙했다.그가 이해를 못하겠다는 표정을 드러내자 아주머니는 의미심장한 말을 뱉었다."방금 오지 않았을때 당신의 비서가 밖에서 이리저리 왔다갔다 하는걸 봤어요, 얼마나 급해 하던지, 누가 남의 와이프를 기다리는데 그렇게 조급해해요? 그쪽도 마찬가지예요, 와이프가 저렇게나 예쁜데, 저렇게 젊은 비서한테 맡기면 혹시 무슨짓을 할지 누가 알아요?"강한서는 눈가가 떨리기 시작했다. 그는 입술을 만지며 답했다.아주머니는 다리를 탁 치더니"그럼 더더욱 위험하죠, 몇년동안 봐왔는데 제 아무리 부처라도 감정이 생길수 밖에 없지요."아주머니는 자신이 발견한 "의문점" 에 대해서 주절주절 늘어놓기 시작했다, 자신의 차례가 되어서야 말하는걸 그만했다.떠나기 전 강한서에게 신신당부하며 말했다."꼭 조심해요, 마지막에 모든걸 잃고 후회하지 말고."강한서는 굳은 표정으로 물을 사온 민경하를 노려보았다.그는 맘속으론 뜨금했는지 미소를 지으며"강 대표님, 사모님께서는 아직 돌아오지 않으셨나요?""아니."강한서의 목소리는 차가움이 약간 묻어있었다.민경하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강 대표님, 물 드시겠습니까? 차가운거 따뜻한거, 음료까지 다 있습니다.""몇명밖에 없는데 왤케 많이 사왔어?""사모님들께서는 따뜻한걸 드시면 좋지 않을가 생각해서요."강한서는 그를 1초간 노려보더니 갑자기 밑도끝도 없이 한마디 뱉었
차미주가 맥빠진 소리로 말했다"양성이래."유현진은 차미주의 반응이 어이가 없었다."양성인데 표정이 왜 이래?""조 선생님이 반 년에 한 번씩 재검사를 하면 된대. 그럼 조 선생님을 반 년에 한 번 만날 수 있는 거잖아."차미주는 한숨을 푹 쉬면서 입으로 중얼거렸다."왜 양성이냐고."그런 차미주를 보고 있자니 유현진은 한심해서 입술이 떨렸다."머리가 어떻게 된 거 아냐? 미쳤어?"그러자 차미주가 유현진을 노려보면서 진지하게 말했다."네가 뭘 알아? 재검사를 자주 하지 않으면 어떻게 두 사람이 만날 기회를 만드냐고. 정말 내가 독거 노인으로 죽어가는 꼴을 보고싶은 거 아니지?"유현진이 흰자위를 희번덕거리면서 말했다."카톡 추가했잖아.""맞다."차미주가 손으로 머리를 툭 치면서 말했다."내가 그걸 왜 까먹었지?"그러고는 이내 휴대폰을 뒤졌다. 조 선생님은 이미 그의 친구 요청을 수락한 상태였다. 조 선생님의 프사는 사복을 입은 본인 사진이었다.헬스장에서 런닝셔츠 차림으로 옷자락을 살짝 들어올리면서 거울을 보고 복근을 찍은 모습이었다.차미주의 눈에서 빛이 반짝거렸다."복근 봐봐!"유현진이 바로 얼굴을 갖다 대고 폰을 들여다 봤다."괜찮네. 의사가운을 입으니까 전혀 안 알리더니.""지난번에 네가 나한테 보내준 그 BJ보다 훨씬 났잖아."유현진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면서 답했다."아니지. 그래도 그 BJ가 났지.""조 선생님이 더 났다니까."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있던 강한서의 눈가가 부르르 떨렸다.이때 민경하가 상사를 대신해서 물었다."BJ요?"유현진이 말리기도 전에 차미주는 이미 대답하고 있었다."몸이 엄청 좋은 BJ인데요. 생방송할 때면 부잣집 사모님들이 유독 즐기는 춤을 춰요.""부잣집 사모님들이 즐기는 춤이요?"두 사람의 대화를 듣자니 왠지 모르게 자신의 식견이 짧아 보이는 민경하였다.차미주가 아예 동영상을 보여 주었다."이거요."민경하가 가까이에 가서 영상을 보더니 입가가 떨렸다."이게 부잣지 사
한현진은 목소리를 가다듬으며 딱딱하게 물었다.“말해 빨리, 나 잘 거니까.”“네가 싫다고 해도 내가 강제로 몰아붙이는 거 좋아한다고 했잖아. 그런데 하다가 네가 진짜로 하기 싫어질 수도 있는 건데 그걸 내가 구별할 수 있을까? 네가 진짜 싫은 건지 아니면 그냥 하는 말인지 잘 몰라서 실수하면 어떡해?”“잘 나가다가 내가 갑자기 왜 화를 내겠어?”“지금도 갑자기 화내잖아, 아까는 막 나 유혹하더니. 아무 예고도 없이 화내는 게 한두 번이야?”그 말을 들은 한현진은 돌아누워 강한서와 눈을 맞추며 따지기 시작했다.“그러니까 네 말은 내가 이유도 없이 자꾸 화만 낸다 그거야?”“아니, 그런 게 아니라 네가 진짜 하기 싫은 건데 내가 그걸 못 알아보고 계속하다가 너 다치게 할까 봐 그러지.”“진짜 싫으면 내가 너 물 거니까 그딴 걱정 할 필요 없어.”그 말에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던 강한서는 언제 풀었는지는 모르지만 이미 자유로워진 손으로 한현진의 손목을 잡으며 그녀의 입술에 입을 맞췄다.한현진이 그걸 왜 혼자 풀어냈냐고 따지기도 전에 혀를 입속으로 밀어 넣으며 치열을 고르게 훑고 지나가는 강한서에 한현진의 몸은 빠르게 나른해졌다.강한서가 입을 뗐을 때 한현진의 얼굴과 입술은 이미 빨개져 있었고 그녀는 가만히 누운 채 숨만 내뱉으며 아무런 힘도 쓰지 못하고 있었다.한현진 위에 올라타 있었던 강한서는 얼굴에 옅은 미소를 띤 채 그녀를 바라보더니 득의양양하게 말했다.“안 깨물었네.”한현진이 그 말의 뜻의 완전히 깨닫기도 전에 강한서는 또다시 입을 맞춰왔다.시간을 얼추 계산해보니 3달은 넘은 것 같아 사실상 관계를 한다고 해도 문제 될 건 없었기에 한현진은 쥐고 있던 강한서의 머리채를 놓아주고 몸에 힘을 뺐다.그렇게 키스를 이어나가던 강한서는 한참 만에 한현진을 놓아주더니 그대로 이불을 덮어주고는 그녀의 이마에 입을 맞추며 말했다.“자자 이제.”그 말에 어이가 없다는 듯 천장만 바라보던 한현진은 문득 인터넷에서 봤던 피드가 하나 떠올랐다.
강한서는 영문은 몰랐지만 그래도 한현진에게 벨트를 건네주었다.“뒤돌아서 손 등 뒤로 보내.”강한서는 한현진이 뭘 할지 알았지만 그래도 고분고분하게 뒤로 돌고는 손을 등 뒤로 교차시켰다.오래전에 배웠던 로프 묶는 방법을 오늘에서야 쓰게 되니 기뻤는지 한현진은 잔뜩 흥분한 채로 강한서의 손목을 묶었다.“이제 뒤 돌아도 돼.”한현진의 말에 따라 뒤로 돈 강한서는 손이 묶인 채로 그녀 앞에 꿇어앉았다.방금 샤워를 하고 나와 젖은 머리카락을 대충 뒤로 넘겨두었는데 강한서가 고개를 숙이니 머리카락도 앞으로 툭 하고 떨어져나와 그의 반쪽 얼굴을 가려버렸다.얼굴 앞에 드리운 머리칼 사이로 보이는 검은 눈동자에 한현진의 심장은 다시금 두근대기 시작했다.이제 보니 여자들이 정장을 입은 남자가 꿇어앉아 있는데 환장하는 이유가 있는 것 같았다.“맘에 들어?”낮은 목소리로 누구 하나 홀리려고 작정한 듯이 말하는 강한서에 한현진은 귀를 붉힌 채 말했다.“응, 맘에 들어.”“강운 그룹 사모님이 이런 취향인 줄은 몰랐는데, 진작에 나 이렇게 묶어 놓고 싶었겠네?”웃음을 흘리며 말하는 강한서에 한현진은 헛기침을 하며 떨리는 심장을 진정시키고는 입을 열었다.“그건 아니고. 난 네가 날 이렇게 대해주길 더 원했어.”오랜 시간 동안 부부로 살아온 좋은 점이라 하면 아마도 서로에게 더 뻔뻔해질 수 있는 게 아닐까 싶다.그래서 이런 낯간지러운 말을 해도 부끄러움이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강한서는 가만히 꿇어앉아 제 아내가 하는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나는 내가 싫다고 해도 네가 억지로 하는 걸 더 좋아해. 그리고 다 한 다음에 침대에 꿇어앉아서 나한테 용서를 비는 게 보고 싶었어. 내 취향은 그런 거라서.”한현진의 말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었던 강한서는 한참 만에 입을 열었다.“그럼 전에 우리가 싸울 때 내가 화나서 입 맞췄을 때는 왜 나 때린 거야? 그날도 내가 억지로 너 몰아세우고 하려고 했었잖아, 좋아한다면서 그때는 왜 나 죽이겠다고 그런 건데?”“진짜
송가람은 생각했다. ‘오빠는 그날 히비스커스 호텔에서 있었던 일 때문에 아직 나를 어떻게 마주하면 좋을지 모르겠는 거야. 게다가 내가 오빠 외숙모 때문에 다치기까지 했으니 분명 엄청난 죄책감에 시달리고 있을 거야. 그러니 이렇게 간단한 문자에도 오래 고민하는 거겠지.’강한서가 대화창을 보며 물었다. “뭐라고 답장한 거야?”한현진이 불퉁한 말투로 말했다. “이래도 안 돼, 저래도 안 되라고 하니까 어쩌겠어. 어떻게 답장하면 좋을지 모르겠으니까 모르겠다고 했지.”한현진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송가람에게서 답장이 왔다. [한서 오빠, 사실 그날 호텔에서 있었던 일은 저희 엄마가 너무 하셨어요. 오빠가 그렇게 대답한 것도 어쩔 수 없어서 그랬다는 거 알아요. 저 오빠 원망 안 해요.]눈을 마주친 강한서와 한현진 두 사람 모두 할 말을 잃었다. 이쪽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 상대방이 알아서 넘어왔다. 두 사람이 이렇게 열띤 토론을 펼칠 이유가 전혀 없었다. 한현진이 문자를 보냈다. [몸은 어때. 삼촌 일은, 내가 미안해.]송가람은 다시 한 번 그동안 강한서가 연락하지 않은 이유를 확신할 수 있었다. 그녀가 얼른 답장을 보냈다. [전 괜찮아요, 오빠. 네가 멋대로 결정했다고 오빠가 널 미워하지만 않는다면요.]한현진: [치료 잘 받아.]송가람이 얌전함을 표현하는 이모티콘을 전송했다. [오빠, 생일 파티할 거예요?]한현진: [아니. 그럴 기분이 아니라서.]그 말에 송가람의 얼굴엔 실망한 기색이 역력했다. 그녀느 사실 강한서가 조금 보고 싶었다. 고백 멘트를 작성하던 송가람은 서해금의 충고를 떠올리고 문자를 삭제했다. ‘조금만 더 기다려. 한현진을 회사에서 쫓아낼 때까지만.’송가람이 여전히 문자를 작성하고 있던 그 시점에 상대방에게서 문자가 도착했다. [현진 씨에게 들으니까 요즘 회사에서 대회 준비가 한창이라던데. 요즘 바빠?]송가람: [네. 조향 대회가 있어서요. 지금 한창 참가자 신청을 받고 있어요.]한현진: [네가 대회에서 좋은
한현진이 귀를 쫑긋 세웠다.“누구야?”강한서가 휴대폰을 한현진에게 건넸다. “내 불륜녀.”그 말 한 마디에 수화기 너머의 한성우는 머리가 어지러웠다. “네 뭐라고?”강한서를 힐끔 쳐다본 한현진은 강한서의 손에서 휴대폰을 건네받았다. 강한서는 한현진이 보내는 칭찬의 눈빛을 알아보고는 순간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한성우는 호기심에 겨워 잔뜩 흥분한 채 난리를 부리고 있었다. “두 사람 대체 뭐하는 거야? 네 불륜녀를 감히 조강지처 앞에서 이렇게 당당하게 밝힌다고?”두 사람은 한성우를 전혀 신경도 쓰지 않았다. 한현진은 사랑의 라이벌을 한 번 떠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송가람의 질문에 대답하지는 않고 오히려 반문했다. [가람아, 다친 건 어때? 아직도 아파?]강한서의 눈빛이 파르르 떨렸다. “이건 너무 하잖아. 내가 언제 이렇게 오글거리는 말을 한다고 그래?”한현진이 생각해도 이건 너무 강한서 답지 않은 문자였다. 그녀는 [아직도 아파?]라는 문자를 삭제했다. 하지만 강한서는 여전히 마음에 내키지 않았다. “이렇게 자상하게 얘기하지마. 지난 번에 홍혜림 씨를 만났을 때도 다신 연락하지 않겠다고 얘기했어. 하지만 네가 이렇게 답장을 보내면 나중에 만났을 때 내가 더는 선을 긋지 않을 거라고 생각해서 들이대면 나더러 어떡하라고.”강한서의 말에 한현진은 [다친 건 어때?]라는 글을 지우고 문자를 다시 작성했다. [계획 없어. 좋은 제안이라도 있어?]강한서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생일에 뭐할까 고민한 건 가까운 사이에서만 가능한 거야. 네가 이렇게 물어보면 걔가 뭐라고 생각하겠어?”한현진이 눈썹을 씰룩였다. “조용히 해. 애초부터 네 불륜녀에게는 내가 답장할 거라고 얘기했잖아. 네가 뭔데 나서?”강한서가 말했다. “내가 답장은 네가 하라고 얘기한 건 맞지만 이렇게 하는 건 아니지. 현실 반영은 해야 하잖아.”한성우는 궁금해 미칠 지경이었다. “형수님, 불륜녀라뇨. 강한서에게 언제부터 불륜녀가 있었어요. 남자예요, 여
여러 루트를 통해 송가람은 드디어 시계 관련 소식을 전해들을 수 있었다. 지금은 재고가 없어 7일을 기다려야 했다. 하지만 오늘 마침 빈해시의 한 고객이 시계를 반품했고 송가람이 동의한다면 먼저 그 시계를 가질 수 있다고 했다. 빈해시는 한주와 그리 멀지 않았다. 오늘 저녁이면 시계를 받을 수 있었다. 전화를 받은 매니저가 말했다. “고객님은 오늘 두 번째로 이 시계에 관해 물어보신 분이세요. 점장님 친구 분이라고 하셔서 먼저 연락드렸어요. 만약 구매 의향이 있으시다면 지금 바로 보내드릴게요.”송가람이 물었다. “저 말고 또 누가 물어본 거죠?”“죄송해요, 고객님. 그건 고객님 개인 정보라 말씀 드릴 수가 없어요.”굳이 묻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한현진이 분명했다. 송가람은 괜히 어깨가 으쓱해졌다. 결국은 자신이 한현진보다 먼저 시계를 구해내고야 말았다. 송가람이 태연한 말투로 말했다. “지금 준비해줘요. 물건은 바로 저에게 보내주시고요.”“알겠어요. 돈을 입금해주시면 저희가 영수증과 함께 시계를 포장해 최대한 빨리 보내드릴게요.”송가람은 자신이 가진 절반 이상의 돈을 신미정에게 사기 당했다. 이 시계까지 사고 나면 송가람은 거의 전 재산을 탕진하는 것과 다름이 없었다. 하지만 이렇게라도 한현진에게 골탕을 먹이는 것은 물론 강한서의 마음도 살 수 있다고 생각하니 송가람은 큰마음을 먹고 계좌 이체를 할 수밖에 없었다. 송가람이 입금을 하자마자 한성우에게 한 통의 전화가 걸려왔다. “세상에, 대박. 팔렸어요. 형수님, 저희 회사에서 영업을 하시는 게 어때요? 한 달 매출의 절반을 원하신대도 괜찮아요.”한현진이 말했다.“꿈 깨요. 이렇게 쉽게 속는 바보가 그렇게 많을 줄 알아요?”그 시계는 신우의 사촌 동생의 것이었다. 사긴 했지만 하고 다닌 적은 없었고 집에 한 달 째 고이 모셔두고 있다가 갑자기 실증이 나 환불한 것이다. 이런 명품 시계는 애초부터 재고가 많지 않았다. 하지만 구매한 지 한 달이 되어서야 환불을 하려니 쉽지 않
송가람은 조금 멍해졌다. 서해금은 얼마 전까지만 해도 강한서와의 만남을 강력하게 반대했다. 그 때문에 모녀가 몇 번을 싸웠는지 기억도 나지 않을 정도였다. 그런 서해금이 갑자기 뜻을 굽히니 송가람은 심지어 자신이 잘못 들은 것은 아닌지 의아하기까지 했다. 그녀는 한참만에야 정신을 차리고 환한 얼굴로 말했다. “엄마, 정말 반대 안 할 거야?”서해금이 어이가 없다는 듯 말했다. “내가 아무리 반대해도 무슨 소용 있어? 내가 반대한다고 네가 내 말을 들은 적이나 있어? 넌 엄마를 원수 취급하려고 했잖아.”“엄마, 정말 날 속이려고 하는 말 아니지?”송가람이 몇 번이고 서해금의 마음을 확인했다. 서해금이 한숨을 내쉬었다. “세상에 자식 이기는 부모가 어디 있어? 지금 네 꼴을 봐봐. 강한서를 위해 얼마나 비참한 모습을 하고도 돌아서려 하지 않는지. 이런 널 보고 내가 뭘 어떡할 수 있겠어?”송가람이 와락 서해금을 끌어안았다. 날아갈 듯이 기쁜 마음이 도무지 감춰지지 않았다. “엄마, 전엔 다 내가 잘못했어. 난 그냥 한서 오빠가 너무 좋아서 그랬어. 엄마, 걱정하지 마. 내가 한서 오빠를 좋아하는 걸 반대하지만 않으면 앞으로 뭐든 엄마가 하라는 대로 할게.”서해금이 가볍게 송가람의 등을 쓸었다. 그녀의 눈빛이 밝게 빛났다. “벌써 좋아하지 마. 내가 말한 조건 잊지 마. 엄마는 깔린느에 반 평생을 쏟아부었어. 깔린느는 엄마가 너에게 남겨주는 거야. 그러니까 네가 깔린느를 지킬 능력이 있다는 걸 보여줘. 네에게 그런 능력이 있어야 앞으로 네 결혼 생활이 어떻든, 깔린느가 네 손에 있는 이상 아무도 널 함부로 대할 수 없어.”“알겠어, 엄마. 엄마가 날 위해서 그러는 거 알아. 엄마를 실망시키지 않을게.”전엔 아무리 말해도 들은 척도 하지 않더니 강한서를 미끼로 사용하니 이제야 조금 말귀를 알아듣는 것 같았다. 서해금이 답답한 마음을 꾹 누르며 나지막이 말했다.“세은이가 회사에 입사할 때, 한현진이 어떤 약속을 했었는지 기억해?”송가람은
스쳐지나면 바로 잊어버릴 만큼 그저 평범하기 그지없는 얼굴이었다. 하지만 그 평범한 미모에 파묻힌 두 눈은 은서하의 등골을 서늘하게 했다.저도 모르게 뒤로 한걸음 물러선 은서하는 실수로 바닥에 놓인 화분을 건드렸다. 꽃병이 흔들리는 소리에 은서하가 번뜩 정신을 차렸다. 한현진 역시 그 소리를 듣고 무의식적으로 은서하를 쳐다보았다. 은서가 얼른 고개를 숙이고 말했다. “죄송해요, 대표님.”은서하의 목소리가 작게 떨렸다. 하지만 그리 티가 나는 떨림은 아니라 한현진도 알아차리지 못했다. “괜찮아요.”한현진이 사인을 마친 서류철을 은서하에게 건넸다. “결재 다 했어요. 가봐요.”한현진이 건넨 서류철을 받아 꼭 끌어안은 은서하가 가볍게 허리를 숙여 한현진에게 인사를 하고는 몸을 돌려 사무실을 나섰다. 은서하는 사무실 문을 닫으며 다시 한 번 주혁을 쳐다보았다. 그 시선을 느낀 듯, 상대방 역시 사무실 문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은서하는 얼른 시선을 피하며 문을 닫았다. 서류철을 끌어안은 은서하의 머릿속은 백짓장이 되었다. 그녀는 멍한 눈으로 서류철을 쥔 손에 꽉 힘을 실었다. 결재 서류에 크고 작은 구겨진 자국이 났다. 흐리멍덩한 정신으로 걷던 은서하는 누군가와 부딪혔다. 품 안의 서류가 툭 날리며 바닥 여기저기에 엉망으로 흩어졌다. 은서하가 부딪힌 건 그녀와 친분이 있는 사람이었다. 꽤 가까운 사이였던 그 사람은 허리를 숙여 은서하를 도와 서류를 주으며 핀잔을 줬다. “넌 키가 작아서 내 얼굴에 부딪히지 않아서 다행이야. 아니면 내가 얼마 전에 고친 코가 너 때문에 부러질 뻔 했잖아.”은서하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물었다. “코를 고쳐? 너 성형했어?”“기억력이 너무 형편없는 거 아냐? 성형한지 이제 6개월도 지났어. 이번엔 다시 손 좀 본 거야.”상대방은 말하며 은서하의 이마를 톡 쳤다. “너도 얼른 그 복코 수술 좀 해. 네 얼굴은 코 때문에 다 망쳤어. 날 수술해준 의사 선생님이 기술이 꽤 좋아. 할 생각 있으면 얘기해. 소개해줄게
은서하는 부끄러운 듯 두 손을 움켜쥐고 웅얼거리며 말을 이었다. “이건 대표님께서 전에 이 팀장님을 통해 주신 외할머니 병원비예요. 2000만 원. 카드 비밀 번호는 000000이예요.”한현진은 카드를 받는 대신 펜을 내려놓으며 은서하에게 물었다. “돈은 어디서 났어요?”은서하는 말이 없었다. 한현진이 태연하게 말했다. “합법적인 루트로 얻은 돈이 아니라면, 제가 이 돈을 받는다고 해도 결국 다시 돌려주어야 할 거예요.”은서하가 다급하게 말했다. “불법적인 돈이 아녜요. 저 회사 사내 대출을 받았어요.”깔린느에는 직원 복지를 위한 사내 대출이 있었다. 대출 이자는 3년에 3% 정도로 낮은 편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이자가 낮다고 해도 결국은 갚아야 하는 빚이었다. 은서하는 안 그래도 경제적인 스트레스에 시달리고 있었다. 대출 이자는 그녀에겐 엎친 데 덮친 격이었다. 한현진이 손가락으로 책상 위의 마우스를 살며시 쓸더니 갑자기 말했다. “혹시 제가 이 일을 계기로 서하 씨를 제 사람으로 끌어들일까 걱정인 거예요? 서하 씨에게 은혜를 베풀었다는 것을 빌미로 곤란한 일이라도 시킬까 봐?”한현진의 말에 은서하는 그만 멍해졌다. 그녀는 한현진이 이렇게 단도직입적으로 얘기를 꺼낼 줄은 몰랐다. 은서하는 입술을 짓이기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묵인이었다. 한현진이 입사한지도 시간이 꽤 지났다. 사람들은 이젠 한현진이 회사에 들어온 목적을 어느 정도는 눈치 챌 수 있었다. 다만 서해금이 깔린느에 너무 오랫동안 몸담고 있었던 터라 깔린느의 핵심부서에는 전부 서해금의 사람이 진을 치고 있었다. 그런 서해금에게서 실권을 빼앗으려는 한현진을 좋게 보는 사람은 없었다. 설사 서해금의 편에 서지는 않더라도 그녀의 눈 밖에 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물론 은서하도 그들과 같은 생각이었다. 그녀는 그 어떤 진영에도 서고 싶지 않았다. 은서하는 그저 조용히 출근하고 월급을 받아 외할머니의 병을 치료할 수 있다면 충분했다. 은서하의 침묵의 의미를 알아차린 한현진
강한서의 말에 죄책감이 든 한현진이 말했다. [널 탓하는 게 아니야. 그냥 물어본 거야.]강한서: [물어보는 네 말투가 나에겐 너무 상처였어. 지금 그 문자를 봐도 마음이 아픈 것 같아.]한현진: [...]강한서는 지식만 빨리 습득하는게 아니었다. 그의 비꼬기 기술도 무서운 속도로 발전했다. 하지만 강한서는 자신의 상대가 누군지 잊은 모양이었다. 한현진이 미안함이 가득 담긴 말투로 문자를 작성했다. [그럼 어떡해? 이젠 메시지를 삭제해도 소용없는데. 아니면 네가 아예 날 삭제할래? 그럼 내가 보낸 문자도 볼 수 없고, 그렇게 괴로워할 필요가 없잖아.]강한서는 한참 동안 답장이 없었다. 아마 한현진의 제안에 충격을 받은 듯 했다. 한현진: [삭제했어?]강한서: [...]한현진: [오빠, 얼른 삭제해. 난 오빠가 슬픈 건 싫어.]한현진은 차례로 문자를 잔뜩 전송했다. 결국 한현진의 등살에 못 이긴 강한서가 체념하며 답장했다. [여보, 내가 잘못했어.]한현진이 배배 꼬인 말투로 말했다. [오빠는 그저 자랑이 하고 싶었을 뿐인데, 오빠에게 무슨 잘못이 있겠어? 잘못한 건 나야. 이렇게 사소한 일로 시시콜콜 따지기나 하고.]말이 없던 강한서는 잠시 후 한현진에게 가방 사진을 잔뜩 보냈다. [자기야, 하나 골라.]한현진은 버럭 화를 내는 듯한 말투로 말했다. [오빠, 이게 무슨 뜻이야? 지금 내가 가방 때문에 이러는 것 같아?]강한서: [다 사.]한현진이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됐어. 농담이야. 사긴 뭘 사. 회사 조직개편에 성공하면 네 수입도 지금처럼 높지는 않을 거야. 우리 아이도 키워야 하는데 아껴야지. 돈 함부로 쓰지마.]강한서에게 한성 그룹이 유일한 수입원은 아니었다. 앞으로 한성 그룹의 수입이 줄어들더라도 그는 여전히 적지 않은 돈을 벌 수 있었다. 하지만 강한서는 이 가족을 위해 계산기를 두드리는 한현진의 모습이 귀엽기만 했다. [애들은 애들이고, 넌 너야. 아직 우리 와이프를 희생시켜야 할 정도는 아니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