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도 젊은데 친구 몇명정도 더 아는것도 나쁘지 않죠."유현진은 숨을 말뜻을 모르는듯 고개를 돌려 강현우한테 말을 걸었다."도련님, 혹시 여자친구를 사귈 마음이 있으시면 형수한테 말해주세요, 제가 소개시켜드릴게요."강현우는 그녀를 바라보더니 입꼬리를 올려 웃으며 천천히 대답했다."그럼 이제 형수님께 부탁드리겠습니다."송민희는 불쾌한 눈빛으로 그녀를 한번 흘겨보았다. 예의를 차리는 말을 잘못 알아들은거에서 신미정이 왜서 그녀를 거들떠보지도 않는지 이유를 알아냈다, 신분도 없고 똑똑하지도 않고.유현진은 당연히 바보가 아니였다, 그냥 둘째 작은 어머니와 척을 지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였다, 신미정과 송민희사이에 어떤 일이 벌어지든지 그녀는 송민희가 자신을 끌어들이지만 않으면 됐었다."어렵게 모였는데 입 그만 놀리고 다들 자리 찾아서 앉게나."할머니께서 입을 열자 다들 조용해지고 자리를 찾아 앉았다.강한서가 앉기를 기다리고 할머니는 그의 이마의 푸른 상처를 보더니 눈썹을 찌푸리며 물었다."그 이마의 상처는 뭐니?"유현진은 심장이 내려앉는듯 했다, 강한서의 이마의 상처는 몇일전 유람선우에서 폭풍우때문에 그녀와 부딪혔을때 생긴 상처였다.비록 상처가 유람선에서는 지금보다 더 심했었지만 지금은 그나마 많이 옅어진 상태였다.하지만 할머니께서 손자를 엄청 사랑하기에 한 눈에 이상함을 발견했다.강한서는 사건의 범인을 한번 바라보고는 태연하게 대답했다."잘때 떨어졌어요.""그래도 너무 조심성이 없어, 내 방에 약이 있으니 좀 이따가 현진이보고 치료해달라고 해."유현진은 말문이 막혔다.(이 상처는 이마에 난거라 자기 손으로 충분히 할수 있는데 굳이 내가 도와줄 필요가 있을까? 손이 없는것도 아니고.)당연하게도 이건 속으로 말한거였다, 저번에 피임약 일로 할머니의 마음에 상처를 남겼었는데 어찌 감히 말대답을 할수 있겠을까, 얌전하게 말을 들을수밖에 없었다.강한서에게 물은후 할머니는 차례차례 다른 사람들의 근황을 묻기 시작했다.비록 그녀는 년세가 들
은영선생님은 지금 시대의 국악의 대가로서 최고의 실력을 가지고 있고 그의 대표곡은 "백화정" 이였다.유현진도 이 사람을 아주 잘 알고있었다. 왜냐하면 그녀의 어머니 하현주가 은영의 광팬이였었고 집안에 은영선생님의 앨범이 잔뜩 보관되여있었다.게다가 그녀는 어릴때 하현주를 따라서 몇번이나 콘서트장에 간적이 있었다, 콘서트장에 울려퍼지는 그의 곡조는 과연 최고라고 하여도 과언이 아니였다.은영선생님은 그녀가 성우에 관심을 가지게 된 계기라고도 할 수 있겠다.그녀는 은영선생님의 목소리에 매료되어 목소리로 감정을 전달하는 성우의 직업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녀도 자신의 목소리로 남한테 즐거움을 주고 싶었다.은영선생님께서 나이가 50이 되던 해에 은퇴를 선언하고 이후부터 교육사업에 매진할것이라고 선포했다. 그때로부터 8년이 지난 지금, 은영선생님은 한번도 무대에 선적이 없었다. 이 기간동안 수없이 많은 사람이 그에게 초청을 보냈었지만 하나도 예외없이 모두 다 거절을 당했다.(송민희가 그 사람의 제자를 안다 한들 무슨 방법이 있어? 당시에 은영선생님의 가족들과도 친한 사람도 결국엔 실패했잖아.)송민희는 아마도 직접 가보진 않은것 같았다, 그래서 그녀는 아주 자신 있는 목소리로"비록 은퇴하셨지만 친구의 부탁을 매몰차게 거절하시진 않겠지요? 원래 제가 바로 친구를 찾아가서 초청하려고 했는데 아직 형수님이랑 상의해보진 않았고 또 형수님께서 어떻게 생각하실지 몰라서 아직까지 미뤘어요."송민희는 숨을 고른후 말을 계속해 이어갔다."듣기론 형수님께서 최근에 미용원에 투자를 하셨다고, 방금 개업해서 신경써야 될 일이 많으시죠? 형수님 번거로울까봐 어머님 팔순잔치는 제가 맡을게요.신미정은 그녀를 흘겨보며"동서 그게 무슨 말이야? 어머니 팔순잔치보다 더 중요한게 어디 있겠어? 그 미용원은 그냥 심심풀이로 투자 조금 한 것 뿐이야, 대주주도 아니고, 그냥 연말에 보너스 타가는 정도지. 그래서 평일엔 한가해. 그리고 팔순잔치는 당연히 맏며느리가 도맡아 해야지 않겠어? 어
강민서도 동참하며 한마디 거들었다."할머니, 제 오빠 생일준비도 제대로 못하는데, 팔순잔치라는 큰 일을 해낼수 있을까요? 무조건 망신을 당할거예요."강한서의 얼굴색이 어두워지더니"어른들이 말하시는데 어딜 감히 끼어들어? 예절 못 배웠어?"이에 강민서는 입을 다물고는 말 없이 유현진을 째려봤다.유현진은 감히 찍소리도 낼수 없었다.이건 그녀한테 청천벽력같은 일이였고 결코 좋은 일이 아니였다.지혜로운 할머니는 분명 둘중에 한 명을 선택한다면 다른 한쪽에게 원한을 살 수 있었기에 그 누구에게도 상처를 주지 않는 방법을 찾았다.그래서 이 뜨거운 감자는 그녀의 손에 쥐어졌다."너희들도 다 젊었을 때가 있었잖니? 젊은 사람은 많이 경험해 봐야해, 누구나 태여날때부터 잘 하는 사람은 없어. 현진아, 네 생각은 어떻니?"할머니는 유현진을 바라봤다.비록 할머니는 의사를 물어보는듯이 질문을 건넸지만 그 눈빛은 마치"감히 안 한다고 말 할수 있을까?"라고 말하는것 같았다.유현진은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는 난처한 상황에 빠져서 반나절이 지나서야 대답했다."할머니, 저는 제가 실수라도 할까봐 두려워요.""젊은 사람은 실패하는걸 두려워해선 안된단다, 계속되는 실패속에서 교훈을 얻는거야. 할 줄 모르면 옆에서 배우고 모르는게 있으면 너의 시어머니랑 작은 어머니한테 물어보거라, 모두 흔쾌히 알려줄거다."송민희는 할머니의 태도에서 이번 팔순잔치에서 그녀의 역할은 없다는걸 보아냈다.그녀는 신미정을 흘겨보았다. 상대방의 안색은 그녀보다 더욱 안 좋았다.그녀는 이를 보고는 마음이 편해졌다. 그녀가 못 한걸 신미정도 못했으니, 심지어 맏며느리에게 유현진에게 맡길 정도면 할머니의 맘속에서는 그녀가 자신보다 높은 위치에 자리하고 있는것 같지는 않았다.그리고 이 일이 유현진에게 돌아간 이상, 그녀가 나서지 않아도 신미정이 알아서 그녀를 방해할것이라고 생각했다.여기까지 생각이 미친 송민희는 입을 열었다."이렇게 까지 말씀하시는데 저희가 어쩔 도리가 있나요? 애
송민희는 신미정이 반나절동안 말을 하지 않는걸 보고는 미소를 지으며 입을 뗐다."형수님, 왜 아무말도 하지 않으세요? 혹시 이 처사에 대해서 맘에 들지 않으시는건 아니죠? 현진이가 준비하는거랑 형수님께서 준비하는게 뭐가 다릅니까, 모두 큰집에서 하는건데. 준비 잘하면 모두한테 좋을거예요."이와 같이 만약 준비를 잘 못한다면 큰집 모두의 체면을 잃게 될게 뻔했다.신미정은 마음속의 울분을 억누르고 태연하게 송민희를 훑어보며 입을 열었다."어머니가 현진이한테 시킨것에 대해선 아무런 의견도 없어, 그냥 걱정이 들 뿐이야."말을 마치고 유현진을 바라보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다시 말을 이어나갔다."현진아, 끝난후에 집에 잠깐 들르거라, 내가 전체 순서를 한 번 알려주마, 모르는게 있으면 맘껏 물어봐도 된단다, 돈 아끼지 말고 되도록 완벽하게 준비해야 돼."유현진은 고개를 숙이고 가볍게 대답했다."알겠습니다, 어머니."다른 사람이 어떻게 생각하든지 할머니는 아주 기뻐보였다. 공적인 대화가 끝나고 할머니는 배가 고프다고 일찍 식사를 하자고 했다.강씨 가문의 규칙을 비록 많진 않지만 모두가 할 일이 명확히 정해져 있었다.예를 들면 할머니께서 공적인 일에 대해서 말할때 강씨 가문의 며느리들은 말을 끼어들어선 안되고 사적인 일을 말할땐 남자들이 말해선 안 되였다. 마치 방금 팔순잔치에 대해서 토론할때 처음부터 끝까지 강한서와 둘째 삼촌은 이에 대해 자신의 견해를 드러내지 않았다.밥상위에서 할머니가 회사에 대한 일들을 묻자 둘째 삼촌과 강한서가 주로 이에 대답했고 다른 사람들은 조용히 이 말들을 듣고 있었다.식사가 끝나고 모두들 거실에서 티타임을 가지고 있었다, 유현진은 식사가 끝나고 주방정리를 도우고 있었다.진씨 아주머니는 눈치가 빨랐기에 낮은 목소리로 유현진에게 말을 걸었다."사모님, 이런건 제가 할테니 거실에서 모두와 함께 티타임을 즐기시는게 어떤가요?""괜찮아요, 방금 먹은걸 소화시킬겸 하고 있는거예요."그녀가 신미정이 바라는걸 빼앗았기에 만약
주얼리 전시회에서 주제넘게 나섰고, 그녀의 사람을 짤랐고, 그리고 전화통화에서 아주 건방지게 말했었던 일로 하여금 두사람의 관계는 표면상의 평온함만 간간히 유지하고 있었다.그녀가 만약 잔치준비를 신미정한테 넘긴다 하더라도 신미정은 그 마음을 알아주지 않을게 뻔했다.어쨌든 미움을 살 만큼 샀으니 기회가 손에 들어온 이상 놓치지 않으리라 생각했다, 예를 들면 잔치준비에 대한 사례금이라던가.(10년전에 사례금이 아홉자리수나 되는데 10년이 지난 지금 그보단 적지 않겠지?)유현진은 과일접시를 들고 주방에서 나오는 도중에 강현우와 맞닥뜨렸다.강현우는 벽에 기대고 있었다. 그의 입에서 아직 불붙지 않은 담배가 떨어졌고 눈을 조용히 감고있었다.유현진은 그를 발견하고는 입꼬리를 씰룩거리더니 고개를 돌리고는 거실로 향했다.강현우는 담배를 귀에 걸고 그녀의 앞을 가로막으며 접시위의 딸기를 손에 쥐였다."형수님, 오래간만에 뵙는데, 어째서 이렇게 매정하신가요?"유현진은 차갑게 바라보며"비켜."라고 외마디를 뱉었다.강현우는 그녀 손안의 과일접시를 힐끔 보고는 갑자기 손을 내밀어 손가락으로 유현진의 손끝을 스치며 입을 열었다."이렇게 차가운데 제가 들어드리죠."유현진은 그의 터치를 피하며 진지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강현우, 역시 사람성격은 안 변한다더니, 밖에서 충분히 놀만큼 놀지 않았어? 이젠 나한테 까지 손을 대? 미쳤어?"강현우는 입술을 만지며 말을 계속해 이어나갔다."형수님, 그게 아니죠. 처음부터 저를 꼬신건 형수님이 아니십니까? 결혼첫날밤도 저랑 함께 하셨으면서 너무 매정한거 아닌가요?"유현진은 얼굴색이 어두워지면서 그를 노려봤다."강현우, 그 말을 어디 한번 강한서 앞에서 지껄이지그래? 그 사람이 널 어떻게 대할까?"강현우는 이에 아무렇지도 않은듯"말하라면 말하죠, 이 일에 대해선 제가 피해잔데요?"유현진은 갑자기"여보 다 들었죠?"강현우는 이를 듣고는 온 힘을 다해 고개를 돌렸다, 그의 등에선 식은 땀이 나고 있었다.하지
계단을 오르고 있을때에서야 강한서는 방금 일에 대해 물어보고있었다.그는 강현우와 유현진이 무슨 대화를 나눴는지는 몰랐다.할머니와 둘째 삼촌은 공적인 일로 대화하러 서재에 들어갔고 송민희는 팔순잔치의 일로 아직까지도 불만을 토로했고 신미정도 이에 대해서 결코 가만히 있지 않고 있었다. 강한서는 옆에서 들어주기 귀찮아서 구실을 찾아서 거실에서 빠져나와 유현진한테 갔었다.도착하자마자 강현우가 유현진앞을 가로막고 있었고 무슨 대화를 나누고 있는진 몰랐지만 유현진은 인상을 쓰고 있었고 표정도 아주 좋치 못했다.저번에 회사에서의 상황과 똑같았다.유현진은 강현우에 대한 혐오감을 하나도 감추지 않았다."별 거 아니야, 그냥 농담 몇마디 주고받았어."유현진은 몇마디로 얼버무리며 넘어가려 하였다.사실 이 일에 대해선 그녀도 어떻게 설명해야 될지 잘 몰랐다, 이 일을 자세히 말하기 시작한다면 강민서와 신미정도 서로 연관되여 있다는걸 알수있기 때문이였다.당시 결혼식장에서 강한서가 그녀를 내버려두고 떠난후에 그녀가 술대접을 하는 도중 비록 신학의 도움으로 위기에선 벗어났지만 그래도 많은 술을 마신 상태였다.집에 돌아가고 있을땐 이미 휘청거리고 있었다.강민서와 집안의 가정부가 그녀를 도와서 방안에 데려다 주었다.당시 그녀는 스무살 남짓이였기에 신혼 첫날밤에 그녀를 내팽겨치고 다른 여자와 함께 떠났다는 사실에 대해서 속상하고 억울한 감정을 아무리 감추려고 해도 감출수 없었다.방안에 돌아오자 마자 옷도 안 갈아입고 침대에 누워서 눈물을 훔쳤다.시간이 지나고 우는것에 지친 그녀는 정신이 희미한 채로 잠에 들었다.잠결에 누군가가 그녀의 위에 올라타서 그녀를 만지고 있었고 그 힘이 너무도 쎄서 아파서 깨났다.방안은 어두컴컴했고 술도 적잖히 마셨었고 눈 앞에 광경이 뚜렷하게 보이지않았기에 강한서로 착각했었다.오늘 하루의 억울함이 물밀듯 몰려와서 그녀는 상대방의 어깨를 안고 낮은 소리로 그를 원망했다.상대방은 그녀의 턱을 잡고 낮은 숨소리를 내며"얼굴만 예쁘게 생
강민서가 그를 방에 데려다 준 이후로 유현진은 방을 나선 적이 없기에 스스로 방을 잘못 찾아 들어갈 리 없었다. 결혼하고 나서 강씨 가족의 옛 저택에 처음 간 유현진은 강한서의 방이 어디에 있는지도 몰랐고, 그저 강민서가 안내하는 대로 따라갔다.하지만 유현진이 아무리 변명해도 신미정은 그가 술을 너무 많이 마셔서 잘못 기억했다고 우겼다.당시 유현진은 어렸고, 잘잘못을 따져 자신의 결백을 증명하기에 급급했기에 당장 정인월을 찾아가 이 일을 명백히 조사하겠다고 하였다. 그러자 신미정의 얼굴이 순간 굳었다.그는 이 사건 자체가 너무 황당무계하여 더 떠벌려봐야 강한서의 오점만 더 되겠냐고 하였다. 진실이 어떠하든 어쨌거나 신혼 첫날밤 유현진이 강현우와 엮인 건 사실이고, 아무리 정인월에게 알려봐야 아무 소용 없다고 말이다.당시 너무 단순했던 유현진은 신미정이 강한서를 내세우자 바로 위축됐다.그는 강한서마저 자신을 이상한 여자로 생각할까봐 두려웠다. 타인의 시선은 간과할 수 있으나 강한서의 시선은 신경이 쓰였다.신미정은 '집안 망신'이라는 이유로 갖은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 유현진이 당시 그 사건을 무덤까지 가져가도록 구슬렸다. 강현우야 자신이 형수를 추행한 사실을 자신의 입으로 떠벌릴 리 없었다.그 일이 있고나서 시간이 꽤 오래 지나서야 유현진은 당시 신미정이 그 일을 묻으려고 한 것이 강민서를 보호하기 위함이라는 것을 깨달았다.이런 일은 일단 조사하기 시작하면 진실은 자연스레 수면 위에 떠오른다. 유현진은 한때 강한서에게 이 일을 솔직히 말하고도 싶었다. 하지만 강한서가 안다고 한들 뭐가 달라지겠는가?강민서는 강한서의 동생이다. 가족이라면 끔찍한 그로서는 기껏해야 몇 마디 혼내고 말겠지. 아니면 아예 신민정처럼 진실을 알면서도 강민서를 보호하기 위해 잘못을 자신에게 들씌우거나.어떠하든지 결과는 다를 게 없다는 게 당시 유현진의 판단이었다.그렇게 시간은 흘렀고, 유현진 스스로도 더이상 그 일에 대해 언급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강한서가 물어
"슥"유현진은 눈썹을 찌푸리면서 강산서의 손등을 내리쳤다."아파! 당신 상처를 누르면 안 아파?"유현진의 팔꿈치에 난 성처도 강한서의 머리에 난 상처와 같이 크루즈에 올랐던 당일 밤에 남은 것이다.팔꿈치 뿐만 아니라 유현진은 무릎에도 상처가 났다.강한서는 유현진을 흘끔 쳐다보더니 말했다."아무말 없길래 난 또 안 아픈 줄 알았지."그러면서 면봉으로 약을 묻혀서는 유현진의 팔꿈치에 부드럽게 발라주었다."이 약은 할머니가 의사선생님께 특별히 부탁해서 조제한 거라, 다친 데 엄청 효과가 좋아. 한 번 바르면 바로 좋아질 거야.""그렇게 좋아? 그럼 갈 때 가져가야겠다."촬영할 때 다치는 건 흔한 일이다. 멍 들면 외관에 영향 주는 건 차치하더라도 엄청 아프다. 이 약이 그렇게 효과가 좋은면 당연히 가져가서 사용해야지.그러자 강한서의 눈가가 부르르 떨렸다."할머니에게도 이 한 병밖에 없어. 그 의사선생님이 세계일주 여행을 떠나서 1년 안에는 돌아오지 않을 거야. 그래서 할머니가 이 약을 보배처럼 여기고 있어. 지난번에 민서가 말 타다가 떨어져 발목을 삐었는데도 할머니가 아까워서 안 내놓았는데, 지금 아예 가져가겠다고?"이 말은 꿈 깨라는 소리다!유현진이 입을 삐죽거리면서 속으로 할머니가 나한테 그렇게 큰 임무를 맡겼는데 약 한 병이 뭐라고?"여보! 우리 뭐 좀 의논하자!"이 말에 강한서는 갑자기 머리가 지끈거렸다. 지난번에 유현진이 이런 말투로 시작해서 그에게 요구한 것은 신혼집을 가지겠다는 거였다.강한서는 입술을 깨물고 약을 다 바른 유현진의 다리를 훅 던지면서 냉담하게 한마디 했다. "의논할 거 없어!"유현진이 입술을 떨면서 말했다."내가 뭘 말할지 알고?"강한서가 유현진을 한번 훑어보더니 말했다."좋은 일이면 당신이 나랑 의논할 리 없잖아?"유현진이 켕기는지 헛기침을 하더니 말했다."그건 또 무슨 말이야? 좋은 일이니까 여보랑 의논하는 거지."강한서는 전혀 동요하지 않고 면봉을 버리고 자리를 정리하기 시작했다.그러자
한성우가 흥, 콧방귀를 뀌었다. “형수님도 양심은 없으시네요. 아무리 그대로 강운이가 형수님을 좋아하는 건 사실이잖아요. 이렇게 이용하시면 마음에 안 찔리세요?”한성우의 말에 한현진의 말투가 차갑게 가라앉았다. “좋아하면 강한서를 자극하기 위해 절 간민혜 씨 모습으로 분장시킬 수 있어요? 저와 주 변호사님은 그저 지인 딱 그 정도예요. 말 할 거예요, 말 거예요? 말 안 할 거면 됐어요.”‘강한서에게 덫을 놓은 건 내가 평생 기억하고 있을 거야.’말을 잘못 꺼냈음을 인지한 한성우가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얘기하면 되잖아요. 왜 화를 내고 그래요. 하지만 제가 얘기한다고 해서 강운이가 나설 거란 보장은 저도 못해요.”한현진이 덤덤하게 말했다. “할 거예요.”주강운이라는 사람의 모든 면을 잘 안다고 할 수 없었지만 한현진은 변호사로서의 그의 능력은 의심한 적이 없었다. 정서희의 의뢰를 받고 정설희 사건을 조사하고 있으니 당연히 장준도 눈여겨보고 있을 것이 분명했다. 그러니 제 발로 찾아온 기회는 주강운은 거절할 리가 없었다. 주강운에게 전화해 안부를 묻던 한성우는 돌고 돌아 전국을 떠들썩하게 만든 불법 레이싱 교통사고에 관한 이야기를 꺼냈다. “3명이 죽고 15명이 부상을 입었대. 전부 이제 갓 20살이 된 어린 애들이던데 안타깝게 됐어. 학교나 열심히 다닐 것이지 레이싱은 대체 왜 한 거야. 목숨이 아깝지도 않나 봐.”커피를 한 모금이 마신 주강운이 서류를 넘기며 말했다. “이젠 사회 뉴스도 봐?”“아니, 그냥 우연하게 본 건데 놀라워서 그러지. 바로 주변에서 일어난 일이잖아. 부상자 중에 진수 그룹 막내아들도 있었고. 탄식이 절로 나오더라니까.”물을 한 모금 마신 한성우가 툭 던지듯 물었다. “넌 이런 뉴스 안 봐?”주강운이 말했다. “봤는데 자세히는 안 봤어.”“사건 관련 기사는 아무것도 아니야. 숨겨진 뒷이야기가 더 충격적이야. 그러니까...”“잠깐만.”주강운이 한성우의 말을 잘랐다. “나 할 일이 있어서 나중에 끝
[아니, 지금 중요한 건 사고 원인을 밝히는 거 아녜요? 대체 왜 부상자 신상정보나 캐고 있는 거예요? 일부러 여론 몰이 하려는 거 아녜요?][그러니까요. 이렇게 큰 교통사고면 한 사람만의 문제는 아닐 텐데, 이 경기의 주최 측에 문제점을 둬야하는 거잖아요.][속도 제한 구간에서 불법 레이싱을 하다 교통사고가 발생했어요. 뭐 더 할 말 있어요? 위에 댓글 혹시 진수 그룹 알바 아니세요?][그래서 진모 씨는 경기에 참가하지 않은 건가요? 피해자라도 된대요? 피해자는 그 인간들 차에 치인 사람이에요. 논리적인 척 하는 거 웃기네요. 쓰레기 같은 인간 때문에 목숨을 잃은 피해자는 나 몰라라 하면서 그것도 인간이라고 신상정보가 털리는 게 안타까워요?][진윤. 남. 서화 대학 전기정보공학과 2학년. 주민등록 번호: XXXX. 전화번호: XXXX.]진윤의 신상정보가 인터넷에 전부 폭로되었고 수많은 사람들이 그의 정보를 공유했다. 심지어 진윤의 수능성적을 폭로하며 그의 성적으로는 서화 대학에 입학할 수 없다며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도 있었다. 불법 레이싱으로 인한 교통사고로 한 사람을 향해 공격을 퍼붓기 시작했고 여론은 이미 이상한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한 일이었다. 여론 몰이가 필요한 상황이었다고 해도 그 대상이 진윤이 될 이유가 없었다. 누군가 진윤을 이용해 사건의 요점을 흐리려는 의도이거나 이번 일을 계기로 진수 그룹에 타격을 주려는 것이 분명했다. 진상을 조사하기 위해 한현진이 한성우에게 연락했다. 진윤의 일로 전화했다는 것을 안 한성우가 말했다. “이번은 그리 간단한 문제가 아녜요. 일단 불법 레이싱도 문제이긴 하지만 제일 중요하건 레이싱에 참가한 사람 중 마약을 한 인간이 있다는 거예요. 그게 이번 사고가 일어난 제일 중요한 원인이기도 하고요.”“지금 그 인간을 숨기기 위해 인터넷에서는 이 사건의 모든 화살을 진윤 씨에게 돌리고 있어요. 형수님과 한서는 이번 일에 끼어들지 말아요.”한현진이 멈칫하며 물었다. “그
한현진은 어쩔 수 없이 민경하에게 전화를 걸었다. 약혼식 준비를 하는 민경하를 위해 강한서는 특별 휴가를 지급했다. 그러니 민경하도 지금은 강한서가 어디에 있는지 알지 못했다.“아주머니 말로는 아침 여섯 시부터 급하게 나갔다고 해요. 무슨 일이 있는 건 아닌지 걱정이 돼서요.”한현진이 한숨을 내쉬었다. “다른 사람에게 물어봐야겠어요.”“잠깐만요, 사모님.”갑자기 한현진을 부른 민경하가 나지막이 물었다. “오늘 아침 뉴스 보셨어요?”“아직요. 왜요?”민경하가 말했다. “어젯밤 남서신길에서 레이싱 경기가 있었는데 큰 교통사고가 발생했어요. 3명이 죽고 15명이 부상을 입었다고 해요. 남서신길 쪽에 저희 자회사에서 시공을 진행하고 있는 프로젝트가 있어요.”“오늘 아침 6시쯤에 뉴스가 터진 거니까 대표님께서 급히 나간 게 그 일 때문이 아닐까 싶어요.”“남서신길이요?”잠깐 생각에 잠겼던 한현진이 움찔 몸을 떨었다. ‘진윤 씨가 전에 참가하겠다고 고집 부리던 경기잖아?’한현진이 곧바로 진윤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그뿐만 아니라 홍혜림도 연락을 받지 않았다. 비록 진씨 가문과 연이 깊은 것도 아니었고 진윤에게 다가간 것도 홍혜림에게 물어볼 것이 있기 때문이었지만 혹시라도 사고를 당했을지 모른다는 생각에 불안한 마음을 떨칠 수 없었다. ‘이 자식! 분명 강한서와 더는 그런 위험한 경기엔 참가하지 않겠다고 약속했으면서. 대체 왜 이렇게 말을 듣지 않는 거야.’아무도 연락을 받지 않자 한현진은 마지막이라는 생각으로 한열에게 전화를 걸었다. 신하리에게 물어봐달라고 할 생각이었다. 진윤의 사촌누나이니 어쩌면 남인 그들보다 먼저 소식을 들었을 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한열이 말했다. “진윤 씨도 다쳐서 아직 깨어나지 못했대요. 신하리 씨도 아까 공항으로 가서 아마 지금쯤 그쪽으로 출발했을 거예요. 아직 사람을 보지도 못했으니 신하리 씨도 상황은 잘 모르고 있을 거예요.”제일 염려했던 일이 결국은 일어나고 말았다. 진윤도 그 사고 현장에 있었다. 그
염색은 한 시간이 지나서야 끝이 났다. 잘생긴 포즈로 거울 셀카를 찍은 진윤이 강한서에게 사진을 전송했다. [다시 시작.]강한서는 사진 속 검은 머리에 순해 보이는 젊은이를 보며 피식 웃음을 흘렸다. 그의 웃음소리에 읽던 책을 내려놓은 한현진이 고개를 돌려 강한서를 쳐다보았다. “왜?”강한서가 진윤의 셀카를 한현진에게 보여주었다. 한현진 역시 사진을 보자마자 웃음을 터뜨렸다. “어쩐지 금발에 눈썹도 살짝 밀어버리는 스타일을 고집하더라니. 눈썹 피어싱까지 빼니까 그냥 아기였네. 너무 귀엽게 생겼잖아. 훈이보다 어려 보여.”강한서도 한현진을 따라 웃었다. “선배도 그렇잖아. 50살도 넘은 분이 아직도 30대처럼 보이니까. 성우가 처음 선배를 봤을 때 형이라고 불렀다가 예의 없다고 혼났어. 그러다 다른 애들도 형이라고 하니까 말이 없더라고.”그 장면을 상상한 한현진은 웃음을 멈추질 못했다. “역시 동안이 좋아. 50대가 되어서도 얼굴 하나로 젊은이들의 마음을 살 수 있잖아. 난 왜 동안이 아닐까?”그 말에 멈칫한 강한서가 한현진을 힐끔 쳐다보았다. “누구 마음을 사려고?”한현진이 눈웃음을 지었다. “강 대표님, 몇 십 년 후의 일도 미리 질투하실 거예요?”강한서가 태연하게 대답했다. “그 정도는 아냐.”한현진이 의외라는 듯 물었다. “정말?”강한서가 확신에 찬 말투로 대답했다. “안 해, 질투.”예상 밖의 대답에 호기심이 불타오른 한현진이 물었다. 몇 십 년 후엔 사랑보다 정으로 사는 거라 신경 쓰지 않는 거야?”강한서가 대답했다. “그건 모르겠지만 한 가지는 확신할 수 있어.”“뭔데?”강한서가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이 몸이 살아있는 한 그대들은 그저 첩에 불과해.”멍해졌던 한현진이 폭소를 터뜨렸다. 그녀는 강한서를 품에 안고 뽀뽀 세례를 날렸다. “진지한 얼굴로 실없는 농담을 던질 때 정말 귀여워 죽겠다니까.”강한서가 힐끔 한현진을 쳐다보았다. “이런 걸 바로 조강지처의 자신감이라고 하는 거야.”한
순간 불쾌한 기분에 빠진 진윤이 미간을 찌푸렸다. 이런 아마추어 경기는 사석에서 주최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라 전문적인 레이싱 경기도 아니었다. 오직 속도에서 주는 쾌락만을 추구하는 경기였다. 상금이 높은 만큼 위험부담도 컸다. 하지만 진윤이 경기에 참가한 것은 상금 때문이 아니었다. 돈 걱정 없이 산 진윤이 목숨 건 돈에 욕심낼 필요는 없었다. 그는 단지 경기의 주최 측에 F1 레전드 인물도 있다는 소식에 우승을 하면 그 사람과 만나 얘기를 나눌 기회라도 있지 않을까 싶어 참가한 것이었다. 진윤은 그의 팀원들 역시 레이싱에 대한 열정으로 함께 지금까지 뭉칠 수 있었던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자신을 무시하는 친구의 말은 불쾌하기 짝이 없었다. 모든 사람이 진윤처럼 레이싱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프로 선수가 되길 꿈꾸는 것은 아니었다. 어떤 이들이 사랑하는 것은 어쩌면 레이싱 자체가 아니라 그것이 지니고 있는 상금이라는 거대한 유혹일 수도 있었다. 팀원 중 위험한 내기 경기에 참석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진윤은 알고 있었다. 그들은 마치 경주마처럼 미친 듯이 산길을 휘저었다. 목숨을 내걸고 재벌들의 도박판에서 기꺼이 주사위가 되었다. 아차 하는 사이,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널 수도 있었다. 하지만 경기에서 이기면 그만큼 어마어마한 상금이 주어졌다. 불행히 절벽 아래로 떨어진다고 해도 그의 가족들은 놀라운 액수의 보상금을 받을 수 있었으니 위험을 감수하고 뛰어드는 사람은 얼마든지 있었다. 처음으로 팀원에게 그 얘기를 들었을 때의 진윤은 충격에 빠졌었다. 하지만 팀원들은 마치 일상적이 대화를 하듯 당연한 말투로 말을 이었다. 그때의 진윤은 그저 그들이 비슷한 일을 너무 많이 들은 탓에 익숙해져서 그런 것이라 생각했었다. 하지만 이제 보니 그들은 그렇게 위험 부담마저도 부러웠었던 같았다. 팀원 중 대부분의 사람에게 레이싱은 그저 짧은 시간 사이 많은 돈을 벌 수 있는 도구에 불과했다. 뜬 눈으로 꿈을 꾸고 있는 진윤이야말로 그들에겐 이상한 인간
“아들. 네가 공부가 하고 싶다면 복수 전공이 아니라 10개 전공을 배우겠다고 해도 엄마는 찬성이야. 엄마 지금 너무 기뻐. 만약 농담하는 거라면 지금 당장 거짓말이었다고 얘기해. 안 그럼 엄마는 진심으로 받아들일 거야.”진윤이 웃으며 홍혜림의 팔을 끌어안았다. “엄마. 저도 형처럼 엄마의 자랑이면 안 돼요?”홍혜림이 진윤의 금발을 어루만졌다. “너도 예전엔 엄마의 자랑이었지. 금발로 염색한 후로는 자랑이 아니게 되었지만.”진윤: ...“그럼 다시 염색할게요.”홍혜림이 얼른 헤어숍 VIP카드를 건네며 말했다. “얼른 가. 여긴 새벽 12시가 되어야 영업이 끝나는 곳이야. 지금 가면 아직 시간 있어.”진윤은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홍혜림이 얼마나 진윤의 금발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알 수 있었다. “네, 네, 네. 지금 갈게요.”외투를 챙겨주며 문앞까지 배웅 나온 홍혜림이 진윤에게 물었다. “아들. 조금 전에 누구한테 들은 말 때문에 생각이 바뀌었다고 했잖아. 그 분 너희 교수님이셔?”“우리 교수님은 아녜요. 하지만 좋은 스승님이긴 해요.”‘사기꾼이기도 해. 하지만 꽤 능력 있는 사기꾼.’홍혜림이 호기심에 가득 찬 말투로 물었다. “그 분 한 마디에 바로 생각이 바뀐 거야? 내가 너한테 얼마나 많이 얘기했었는데, 그땐 들은 척도 안 하더니.”진윤이 말했다. “절 데리고 20km를 뛰었어요. 자길 이기면 날 뉴벨리 팀에 입단시켜 주겠다고 하더라고요. 나보다 10살이나 많아서 나이 많은 어르신한테 지겠어? 라고 생각했는데 제가 졌어요.”진윤이 창피한 듯 머리를 긁적였다. “사실 저보다 빨리 뛴 건 아니었어요. 제가 적을 만만하게 생각한 거죠. 하지만 무서운 사람이에요. 지독하게 강해서 무서운 사람. 그 사람은 못 해낼 일이 없는 것 같아요. 입단은 무슨, 그냥 그 기회를 벌어 저에게 설교를 하려던 것뿐이었어요.”“내가 공부에 전념할 수 있게 레이싱을 그만두게 하려고. 처음엔 엄마가 보낸 스파이인 줄 알았다니까요. 하지만
진윤에게 묻는 홍혜림은 마음속으로 간절히 바랐다. ‘얘기해. 엄마 괜찮아. 파산이라도 하지, 뭐. 돈은 없으면 다시 벌 수 있어. 아빠가 안 된다고 하면 쫓아내면 돼.’처음으로 느끼는 죄책감에 진윤은 고개를 숙였다. 홍혜림이 비록 관리를 잘 하긴 했지만 귀밑머리는 이미 하얀 서리가 내려있었다. 큰형은 어려서부터 얌전하고 말을 잘 듣는 아이라 부모님의 속을 썩인 적이 없었다. 유독 진윤이 고집을 부리며 걸음마를 뗄 때부터 뒤에서 마음을 졸이게 했다. 진윤의 수능성적은 그리 좋은 편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지금 그가 다니고 있는 대학교 전공은 전부 부모님이 수많은 돈을 들여 기획한 결과였다. 하지만 진윤은 본인이 좋아하지 않는 전공이라는 이유로 자포자기하며 지냈다. 부모님이 통제욕이 강하다는 것은 그저 진윤이 그들에게 씌워놓은 프레임에 불과했다. 정말 부모님의 통제 속에서 살아가는 친구들은 매일 모든 스케줄, 심지어 먹는 음식까지 전부 부모님에게 보고해야 했다. 그런 사람에 비하면 그의 부모님은 그저 애교에 가까운 수준이었다. 레이싱을 좋아하는 진윤이 못마땅했지만 그럼에도 그저 설득하는 것이 전부였다. 홍혜림은 단 한 번도 진윤의 레이싱 장비를 부순 적이 없었다. 매번 더는 새 장비를 사주지 않겠다고 했지만 그 다짐도 진윤의 애교 몇 번에 곧 무너지고 말았다. ‘언제까지 실망만 안겨드릴 순 없잖아. 나도 엄마의 자랑이 되어야지 않겠어?’“엄마. 저 복수 전공하고 싶어요. 전 레이싱이 좋아요. 도무지 포기가 안 돼요. 저 실력 그 정도 아닌 거 알아요. 하지만 자동차 관련한 전공을 배워보고 싶어요. 지금 전공은 절대, 두 번 다시는 F학점 받는 일 없을 거라 약속 드려요. 복수 전공하게 해주면 안 돼요?”홍혜림: ??“그거 말고 다른 건 없어?”진윤이 멍해졌다. “네?”홍혜림이 말했다. “네가 나에게 하려는 말이 그거야?”진윤이 어리둥절한 얼굴로 되물었다. “네. 그게 아니면요?”홍혜림: “사람을 치거나, 교통사고를 낸 게 아니고?”
눈에 띄게 변한 진윤의 모습을 홍혜림은 믿을 수가 없었다.집 바로 앞이 학교라 진윤은 기숙사 생활을 하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집에 자주 들어오는 것도 아니었다. 집에서 레이싱 게임을 할 때마다 부모님의 잔소리가 끊이질 않아 진윤은 큰형 아파트에 몰래 숨어있는 것을 좋아했다. 진윤의 큰형은 일 때문에 그에게 신경을 쓸 여유가 없었다. 9살이나 더 많은 그의 형은 가끔 부모님보다 더 진윤을 아끼기도 했다. 심지어 가끔은 진윤의 편을 들어 그의 비밀을 지켜주기도 했다. 큰형에게는 결혼을 약속한 여자친구가 있었다. 그러니 제발 눈치껏 본가로 들어오라고 홍혜림은 몇 번이고 진윤에게 얘기했었다. 사실 예비 며느리는 그저 핑계에 불과했다. 진윤을 본가로 불러들이는 이유는 진윤이 곁에 없으니 도무지 관리를 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진윤은 그 점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니 매번 홍혜림이 같은 얘기를 꺼낼 때마다 그는 두 귀를 닫고 못 듣는 척 연기했다. 하지만 이번엔 홍혜림이 먼저 얘기를 꺼내기도 전에 진윤 스스로 본가로 돌아왔다. 집으로 돌아온 진윤에 홍혜림은 혹시 형제가 싸우기라도 한 걸까 전화를 했지만 아니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그 말에 홍혜림은 생각했다. ‘이 자식 또 무슨 사고라도 치고 돌아와서 얌전한 척 연기하는 거 아냐?’‘교통사고라도 내서 배상해 줘야 하는 건가? 아니면 레이싱 카가 망가져서 새 차를 살 돈이 필요한 건가?’‘설마 사람을 친 건 아니겠지?’진윤이 집에서 열심히 공부할수록 홍혜림은 점점 더 사람을 쳤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사로잡혔다. 그녀는 매일 밤 아무 일도 없는 척 진윤의 방 앞을 서성이며 생각했다. ‘먼저 잘못을 인정하면 요즘 얌전하게 지냈던 걸 정상참작해서 욕을 좀 덜해야겠어.’하지만 3일이 지나도록 진윤은 홍혜림을 부르지 않았다. ‘이상해.’‘너무 이상하잖아!’‘설마 사람을 친 것보다 더 큰 사고는 아니겠지?’‘대체 얼마를 배상해야 하는 거야?’1 주일이 지나자 더 이상 참지 못한 홍혜림은 진윤의
진윤: ...강한서가 진윤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그래서 싫다면서 현 상황을 바꿔보려고 하지도 않은 거야?”진윤: ...‘왜 선생님께 혼나는 기분이 드는 거지? 진지하게 핵심만 꼬집고 있잖아.’입을 달싹이던 진윤은 변명이라도 해보고 싶었지만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는 한참만에야 입을 열었다. “그런 생각은 안 해봤어요.”진윤은 그동안 어떻게 반항해야할지, 그런 생각만 하고 있었다. 강한서가 말했다. “네 인생은 네 거야. 네가 열심히 살든, 대충 살든 네 하루하루는 다름없이 흘러가고 있어. 네 태도에 따라 싫었던 그 경험들이 사라지지 않아. 단지 네가 싫다는 이유로 아무 문제도 해결하지 않고 대충 흘려보냈을 뿐 그것들은 계속 존재해.”“대충 공부해서 대충 졸업하면 또 대충 취직이나 하겠지. 아니면 아예 너희 회사로 입사할 수도 있겠지. 하지만 그 다음에? 그렇게 평생을 대충 흘려보낼 거야? 그게 네가 원하는 인생이야?”멍하니 강한서를 쳐다보던 진윤이 한참만에야 대답했다. “아뇨.”부모님이 선택해준 전공이 싫어 공부도 제대로 하지 않은 채 얼른 졸업하기만을 바랐다. 하지만 강한서의 말처럼 졸업 후엔? 전공에 맞는 직업을 찾아 그저 그런 삶을 살아갈까, 아니면 부모님 회사에 입사해 되는대로 살아갈까. 어떤 선택이든 그건 진윤이 원하는 인생은 아니었다. 4년이란 시간을 허무히 흘러 보내고 나면 남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하지만 전 이미 3학년이에요. 전과를 하기엔 늦었잖아요. 이젠 뭘 하려고 너무 늦은 것 같아요.”속상한 듯 대답하는 진윤의 말에 한현진이 말했다. “진윤 씨는 완전 MZ세대잖아요. 이제 갓 이십 대 초반인데 뭘 해도 늦지 않은 나이예요. 너무 빨리 본인의 가능성을 단정 짓지 말아요. 60세에 대학생이 됐다는 기사 못 봤어요?”“진윤 씨보다 나이가 훨씬 많아도 늦었다고 생각 안 하는데, 진윤 씨가 왜 겁을 내요?”“전...”입술을 달싹이던 진윤이 한참이 지나서야 한숨을 내뱉었다. “두 사람 문제아 갱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