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미정의 얼굴색이 어두워지더니 물었다."무슨 뜻이지?"이 말이 그녀의 아픈곳을 찌른게 분명했다.강한서가 얼마나 우수하든 결국엔 그녀의 뜻을 따르지 않고 벼락부자의 딸을 데려왔었으니.송민희는 이에 웃으면서"별 뜻 없어요, 그냥 한번 비유해본거예요, 아내를 찾을땐 현명한 사람을 골라라. 비록 현진이가 다른 방면에선 좀 떨어지지만 그래도 사람이 엄청 현명하고 눈치가 빠르잖아요? 어머님 말고 저도 보고만 있으면 웃음이 나는걸요."유현진은 어이가 없어서 말이 안 나왔다.유현진은 이 싸움에 휘말리게 될거라곤 상상도 못했다.신미정과 송민희는 모두 다 그녀로썬 상대하기 어려운 사람들이였다, 이것은 그녀가 갓 시집왔을때부터 알고있었다.구체적인 원인이라하면 두 집안간의 상속권 전쟁이라고 할수 있겠다.한성 그룹은 강단한이 손수 일으켜세웠던 회사였고 만약 일찍이 세상을 떠나지만 않았더라면 한성 그룹은 틀림없이 장남한테로 돌아갈게 뻔했다.하지만 강단한이 일찍 세상을 떠나고 아들 딸 모두 나이가 어렸었기에 한성 그룹은 한동안 강단해의 경영하에 있었다. 신미정은 어머니를 일찍 여의고 혼자였기에 비록 강씨 가문에서 먹을 걱정 입을 걱정이 없었다 해도 회사에 대해서는 경영권이 없었기에 남의 비위를 맞추면서 살수밖에 없었다.강한서가 성인이 되기전 다른사람들로부터 사모님이라 불리던 사람도 송민희뿐이였다. 강단해가 회사를 더욱더 크게 만드는 동안 송민희의 지위도 점차 높아져만갔다.게다가 그녀의 본가도 어느정도 실력이 있는 집안이였기에 사교계에서는 그야말로 절대자였다, 그 당시 누가 신미정을 거들떠나 봤을까?사교계안의 룰은 간단했다, 누구의 집안이 더 대단한가였다.신미정은 남편을 보내고 그녀의 본가도 한주시에선 유명하지 않았기에 강씨 가문의 맏 며느리라는 칭호를 빼고는 아무것도 없었다.신미정처럼 자존감이 높은 사람이 평소에 송민희한테 눌리우고 살았으니 얼마나 분했을까?회사에서 강한서의 지위가 높아지고 강단해와 서로 경쟁이 가능한 권력을 가지고 나서야 그나마 그녀는 어
"나이도 젊은데 친구 몇명정도 더 아는것도 나쁘지 않죠."유현진은 숨을 말뜻을 모르는듯 고개를 돌려 강현우한테 말을 걸었다."도련님, 혹시 여자친구를 사귈 마음이 있으시면 형수한테 말해주세요, 제가 소개시켜드릴게요."강현우는 그녀를 바라보더니 입꼬리를 올려 웃으며 천천히 대답했다."그럼 이제 형수님께 부탁드리겠습니다."송민희는 불쾌한 눈빛으로 그녀를 한번 흘겨보았다. 예의를 차리는 말을 잘못 알아들은거에서 신미정이 왜서 그녀를 거들떠보지도 않는지 이유를 알아냈다, 신분도 없고 똑똑하지도 않고.유현진은 당연히 바보가 아니였다, 그냥 둘째 작은 어머니와 척을 지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였다, 신미정과 송민희사이에 어떤 일이 벌어지든지 그녀는 송민희가 자신을 끌어들이지만 않으면 됐었다."어렵게 모였는데 입 그만 놀리고 다들 자리 찾아서 앉게나."할머니께서 입을 열자 다들 조용해지고 자리를 찾아 앉았다.강한서가 앉기를 기다리고 할머니는 그의 이마의 푸른 상처를 보더니 눈썹을 찌푸리며 물었다."그 이마의 상처는 뭐니?"유현진은 심장이 내려앉는듯 했다, 강한서의 이마의 상처는 몇일전 유람선우에서 폭풍우때문에 그녀와 부딪혔을때 생긴 상처였다.비록 상처가 유람선에서는 지금보다 더 심했었지만 지금은 그나마 많이 옅어진 상태였다.하지만 할머니께서 손자를 엄청 사랑하기에 한 눈에 이상함을 발견했다.강한서는 사건의 범인을 한번 바라보고는 태연하게 대답했다."잘때 떨어졌어요.""그래도 너무 조심성이 없어, 내 방에 약이 있으니 좀 이따가 현진이보고 치료해달라고 해."유현진은 말문이 막혔다.(이 상처는 이마에 난거라 자기 손으로 충분히 할수 있는데 굳이 내가 도와줄 필요가 있을까? 손이 없는것도 아니고.)당연하게도 이건 속으로 말한거였다, 저번에 피임약 일로 할머니의 마음에 상처를 남겼었는데 어찌 감히 말대답을 할수 있겠을까, 얌전하게 말을 들을수밖에 없었다.강한서에게 물은후 할머니는 차례차례 다른 사람들의 근황을 묻기 시작했다.비록 그녀는 년세가 들
은영선생님은 지금 시대의 국악의 대가로서 최고의 실력을 가지고 있고 그의 대표곡은 "백화정" 이였다.유현진도 이 사람을 아주 잘 알고있었다. 왜냐하면 그녀의 어머니 하현주가 은영의 광팬이였었고 집안에 은영선생님의 앨범이 잔뜩 보관되여있었다.게다가 그녀는 어릴때 하현주를 따라서 몇번이나 콘서트장에 간적이 있었다, 콘서트장에 울려퍼지는 그의 곡조는 과연 최고라고 하여도 과언이 아니였다.은영선생님은 그녀가 성우에 관심을 가지게 된 계기라고도 할 수 있겠다.그녀는 은영선생님의 목소리에 매료되어 목소리로 감정을 전달하는 성우의 직업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녀도 자신의 목소리로 남한테 즐거움을 주고 싶었다.은영선생님께서 나이가 50이 되던 해에 은퇴를 선언하고 이후부터 교육사업에 매진할것이라고 선포했다. 그때로부터 8년이 지난 지금, 은영선생님은 한번도 무대에 선적이 없었다. 이 기간동안 수없이 많은 사람이 그에게 초청을 보냈었지만 하나도 예외없이 모두 다 거절을 당했다.(송민희가 그 사람의 제자를 안다 한들 무슨 방법이 있어? 당시에 은영선생님의 가족들과도 친한 사람도 결국엔 실패했잖아.)송민희는 아마도 직접 가보진 않은것 같았다, 그래서 그녀는 아주 자신 있는 목소리로"비록 은퇴하셨지만 친구의 부탁을 매몰차게 거절하시진 않겠지요? 원래 제가 바로 친구를 찾아가서 초청하려고 했는데 아직 형수님이랑 상의해보진 않았고 또 형수님께서 어떻게 생각하실지 몰라서 아직까지 미뤘어요."송민희는 숨을 고른후 말을 계속해 이어갔다."듣기론 형수님께서 최근에 미용원에 투자를 하셨다고, 방금 개업해서 신경써야 될 일이 많으시죠? 형수님 번거로울까봐 어머님 팔순잔치는 제가 맡을게요.신미정은 그녀를 흘겨보며"동서 그게 무슨 말이야? 어머니 팔순잔치보다 더 중요한게 어디 있겠어? 그 미용원은 그냥 심심풀이로 투자 조금 한 것 뿐이야, 대주주도 아니고, 그냥 연말에 보너스 타가는 정도지. 그래서 평일엔 한가해. 그리고 팔순잔치는 당연히 맏며느리가 도맡아 해야지 않겠어? 어
강민서도 동참하며 한마디 거들었다."할머니, 제 오빠 생일준비도 제대로 못하는데, 팔순잔치라는 큰 일을 해낼수 있을까요? 무조건 망신을 당할거예요."강한서의 얼굴색이 어두워지더니"어른들이 말하시는데 어딜 감히 끼어들어? 예절 못 배웠어?"이에 강민서는 입을 다물고는 말 없이 유현진을 째려봤다.유현진은 감히 찍소리도 낼수 없었다.이건 그녀한테 청천벽력같은 일이였고 결코 좋은 일이 아니였다.지혜로운 할머니는 분명 둘중에 한 명을 선택한다면 다른 한쪽에게 원한을 살 수 있었기에 그 누구에게도 상처를 주지 않는 방법을 찾았다.그래서 이 뜨거운 감자는 그녀의 손에 쥐어졌다."너희들도 다 젊었을 때가 있었잖니? 젊은 사람은 많이 경험해 봐야해, 누구나 태여날때부터 잘 하는 사람은 없어. 현진아, 네 생각은 어떻니?"할머니는 유현진을 바라봤다.비록 할머니는 의사를 물어보는듯이 질문을 건넸지만 그 눈빛은 마치"감히 안 한다고 말 할수 있을까?"라고 말하는것 같았다.유현진은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는 난처한 상황에 빠져서 반나절이 지나서야 대답했다."할머니, 저는 제가 실수라도 할까봐 두려워요.""젊은 사람은 실패하는걸 두려워해선 안된단다, 계속되는 실패속에서 교훈을 얻는거야. 할 줄 모르면 옆에서 배우고 모르는게 있으면 너의 시어머니랑 작은 어머니한테 물어보거라, 모두 흔쾌히 알려줄거다."송민희는 할머니의 태도에서 이번 팔순잔치에서 그녀의 역할은 없다는걸 보아냈다.그녀는 신미정을 흘겨보았다. 상대방의 안색은 그녀보다 더욱 안 좋았다.그녀는 이를 보고는 마음이 편해졌다. 그녀가 못 한걸 신미정도 못했으니, 심지어 맏며느리에게 유현진에게 맡길 정도면 할머니의 맘속에서는 그녀가 자신보다 높은 위치에 자리하고 있는것 같지는 않았다.그리고 이 일이 유현진에게 돌아간 이상, 그녀가 나서지 않아도 신미정이 알아서 그녀를 방해할것이라고 생각했다.여기까지 생각이 미친 송민희는 입을 열었다."이렇게 까지 말씀하시는데 저희가 어쩔 도리가 있나요? 애
송민희는 신미정이 반나절동안 말을 하지 않는걸 보고는 미소를 지으며 입을 뗐다."형수님, 왜 아무말도 하지 않으세요? 혹시 이 처사에 대해서 맘에 들지 않으시는건 아니죠? 현진이가 준비하는거랑 형수님께서 준비하는게 뭐가 다릅니까, 모두 큰집에서 하는건데. 준비 잘하면 모두한테 좋을거예요."이와 같이 만약 준비를 잘 못한다면 큰집 모두의 체면을 잃게 될게 뻔했다.신미정은 마음속의 울분을 억누르고 태연하게 송민희를 훑어보며 입을 열었다."어머니가 현진이한테 시킨것에 대해선 아무런 의견도 없어, 그냥 걱정이 들 뿐이야."말을 마치고 유현진을 바라보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다시 말을 이어나갔다."현진아, 끝난후에 집에 잠깐 들르거라, 내가 전체 순서를 한 번 알려주마, 모르는게 있으면 맘껏 물어봐도 된단다, 돈 아끼지 말고 되도록 완벽하게 준비해야 돼."유현진은 고개를 숙이고 가볍게 대답했다."알겠습니다, 어머니."다른 사람이 어떻게 생각하든지 할머니는 아주 기뻐보였다. 공적인 대화가 끝나고 할머니는 배가 고프다고 일찍 식사를 하자고 했다.강씨 가문의 규칙을 비록 많진 않지만 모두가 할 일이 명확히 정해져 있었다.예를 들면 할머니께서 공적인 일에 대해서 말할때 강씨 가문의 며느리들은 말을 끼어들어선 안되고 사적인 일을 말할땐 남자들이 말해선 안 되였다. 마치 방금 팔순잔치에 대해서 토론할때 처음부터 끝까지 강한서와 둘째 삼촌은 이에 대해 자신의 견해를 드러내지 않았다.밥상위에서 할머니가 회사에 대한 일들을 묻자 둘째 삼촌과 강한서가 주로 이에 대답했고 다른 사람들은 조용히 이 말들을 듣고 있었다.식사가 끝나고 모두들 거실에서 티타임을 가지고 있었다, 유현진은 식사가 끝나고 주방정리를 도우고 있었다.진씨 아주머니는 눈치가 빨랐기에 낮은 목소리로 유현진에게 말을 걸었다."사모님, 이런건 제가 할테니 거실에서 모두와 함께 티타임을 즐기시는게 어떤가요?""괜찮아요, 방금 먹은걸 소화시킬겸 하고 있는거예요."그녀가 신미정이 바라는걸 빼앗았기에 만약
주얼리 전시회에서 주제넘게 나섰고, 그녀의 사람을 짤랐고, 그리고 전화통화에서 아주 건방지게 말했었던 일로 하여금 두사람의 관계는 표면상의 평온함만 간간히 유지하고 있었다.그녀가 만약 잔치준비를 신미정한테 넘긴다 하더라도 신미정은 그 마음을 알아주지 않을게 뻔했다.어쨌든 미움을 살 만큼 샀으니 기회가 손에 들어온 이상 놓치지 않으리라 생각했다, 예를 들면 잔치준비에 대한 사례금이라던가.(10년전에 사례금이 아홉자리수나 되는데 10년이 지난 지금 그보단 적지 않겠지?)유현진은 과일접시를 들고 주방에서 나오는 도중에 강현우와 맞닥뜨렸다.강현우는 벽에 기대고 있었다. 그의 입에서 아직 불붙지 않은 담배가 떨어졌고 눈을 조용히 감고있었다.유현진은 그를 발견하고는 입꼬리를 씰룩거리더니 고개를 돌리고는 거실로 향했다.강현우는 담배를 귀에 걸고 그녀의 앞을 가로막으며 접시위의 딸기를 손에 쥐였다."형수님, 오래간만에 뵙는데, 어째서 이렇게 매정하신가요?"유현진은 차갑게 바라보며"비켜."라고 외마디를 뱉었다.강현우는 그녀 손안의 과일접시를 힐끔 보고는 갑자기 손을 내밀어 손가락으로 유현진의 손끝을 스치며 입을 열었다."이렇게 차가운데 제가 들어드리죠."유현진은 그의 터치를 피하며 진지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강현우, 역시 사람성격은 안 변한다더니, 밖에서 충분히 놀만큼 놀지 않았어? 이젠 나한테 까지 손을 대? 미쳤어?"강현우는 입술을 만지며 말을 계속해 이어나갔다."형수님, 그게 아니죠. 처음부터 저를 꼬신건 형수님이 아니십니까? 결혼첫날밤도 저랑 함께 하셨으면서 너무 매정한거 아닌가요?"유현진은 얼굴색이 어두워지면서 그를 노려봤다."강현우, 그 말을 어디 한번 강한서 앞에서 지껄이지그래? 그 사람이 널 어떻게 대할까?"강현우는 이에 아무렇지도 않은듯"말하라면 말하죠, 이 일에 대해선 제가 피해잔데요?"유현진은 갑자기"여보 다 들었죠?"강현우는 이를 듣고는 온 힘을 다해 고개를 돌렸다, 그의 등에선 식은 땀이 나고 있었다.하지
계단을 오르고 있을때에서야 강한서는 방금 일에 대해 물어보고있었다.그는 강현우와 유현진이 무슨 대화를 나눴는지는 몰랐다.할머니와 둘째 삼촌은 공적인 일로 대화하러 서재에 들어갔고 송민희는 팔순잔치의 일로 아직까지도 불만을 토로했고 신미정도 이에 대해서 결코 가만히 있지 않고 있었다. 강한서는 옆에서 들어주기 귀찮아서 구실을 찾아서 거실에서 빠져나와 유현진한테 갔었다.도착하자마자 강현우가 유현진앞을 가로막고 있었고 무슨 대화를 나누고 있는진 몰랐지만 유현진은 인상을 쓰고 있었고 표정도 아주 좋치 못했다.저번에 회사에서의 상황과 똑같았다.유현진은 강현우에 대한 혐오감을 하나도 감추지 않았다."별 거 아니야, 그냥 농담 몇마디 주고받았어."유현진은 몇마디로 얼버무리며 넘어가려 하였다.사실 이 일에 대해선 그녀도 어떻게 설명해야 될지 잘 몰랐다, 이 일을 자세히 말하기 시작한다면 강민서와 신미정도 서로 연관되여 있다는걸 알수있기 때문이였다.당시 결혼식장에서 강한서가 그녀를 내버려두고 떠난후에 그녀가 술대접을 하는 도중 비록 신학의 도움으로 위기에선 벗어났지만 그래도 많은 술을 마신 상태였다.집에 돌아가고 있을땐 이미 휘청거리고 있었다.강민서와 집안의 가정부가 그녀를 도와서 방안에 데려다 주었다.당시 그녀는 스무살 남짓이였기에 신혼 첫날밤에 그녀를 내팽겨치고 다른 여자와 함께 떠났다는 사실에 대해서 속상하고 억울한 감정을 아무리 감추려고 해도 감출수 없었다.방안에 돌아오자 마자 옷도 안 갈아입고 침대에 누워서 눈물을 훔쳤다.시간이 지나고 우는것에 지친 그녀는 정신이 희미한 채로 잠에 들었다.잠결에 누군가가 그녀의 위에 올라타서 그녀를 만지고 있었고 그 힘이 너무도 쎄서 아파서 깨났다.방안은 어두컴컴했고 술도 적잖히 마셨었고 눈 앞에 광경이 뚜렷하게 보이지않았기에 강한서로 착각했었다.오늘 하루의 억울함이 물밀듯 몰려와서 그녀는 상대방의 어깨를 안고 낮은 소리로 그를 원망했다.상대방은 그녀의 턱을 잡고 낮은 숨소리를 내며"얼굴만 예쁘게 생
강민서가 그를 방에 데려다 준 이후로 유현진은 방을 나선 적이 없기에 스스로 방을 잘못 찾아 들어갈 리 없었다. 결혼하고 나서 강씨 가족의 옛 저택에 처음 간 유현진은 강한서의 방이 어디에 있는지도 몰랐고, 그저 강민서가 안내하는 대로 따라갔다.하지만 유현진이 아무리 변명해도 신미정은 그가 술을 너무 많이 마셔서 잘못 기억했다고 우겼다.당시 유현진은 어렸고, 잘잘못을 따져 자신의 결백을 증명하기에 급급했기에 당장 정인월을 찾아가 이 일을 명백히 조사하겠다고 하였다. 그러자 신미정의 얼굴이 순간 굳었다.그는 이 사건 자체가 너무 황당무계하여 더 떠벌려봐야 강한서의 오점만 더 되겠냐고 하였다. 진실이 어떠하든 어쨌거나 신혼 첫날밤 유현진이 강현우와 엮인 건 사실이고, 아무리 정인월에게 알려봐야 아무 소용 없다고 말이다.당시 너무 단순했던 유현진은 신미정이 강한서를 내세우자 바로 위축됐다.그는 강한서마저 자신을 이상한 여자로 생각할까봐 두려웠다. 타인의 시선은 간과할 수 있으나 강한서의 시선은 신경이 쓰였다.신미정은 '집안 망신'이라는 이유로 갖은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 유현진이 당시 그 사건을 무덤까지 가져가도록 구슬렸다. 강현우야 자신이 형수를 추행한 사실을 자신의 입으로 떠벌릴 리 없었다.그 일이 있고나서 시간이 꽤 오래 지나서야 유현진은 당시 신미정이 그 일을 묻으려고 한 것이 강민서를 보호하기 위함이라는 것을 깨달았다.이런 일은 일단 조사하기 시작하면 진실은 자연스레 수면 위에 떠오른다. 유현진은 한때 강한서에게 이 일을 솔직히 말하고도 싶었다. 하지만 강한서가 안다고 한들 뭐가 달라지겠는가?강민서는 강한서의 동생이다. 가족이라면 끔찍한 그로서는 기껏해야 몇 마디 혼내고 말겠지. 아니면 아예 신민정처럼 진실을 알면서도 강민서를 보호하기 위해 잘못을 자신에게 들씌우거나.어떠하든지 결과는 다를 게 없다는 게 당시 유현진의 판단이었다.그렇게 시간은 흘렀고, 유현진 스스로도 더이상 그 일에 대해 언급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강한서가 물어
한현진은 목소리를 가다듬으며 딱딱하게 물었다.“말해 빨리, 나 잘 거니까.”“네가 싫다고 해도 내가 강제로 몰아붙이는 거 좋아한다고 했잖아. 그런데 하다가 네가 진짜로 하기 싫어질 수도 있는 건데 그걸 내가 구별할 수 있을까? 네가 진짜 싫은 건지 아니면 그냥 하는 말인지 잘 몰라서 실수하면 어떡해?”“잘 나가다가 내가 갑자기 왜 화를 내겠어?”“지금도 갑자기 화내잖아, 아까는 막 나 유혹하더니. 아무 예고도 없이 화내는 게 한두 번이야?”그 말을 들은 한현진은 돌아누워 강한서와 눈을 맞추며 따지기 시작했다.“그러니까 네 말은 내가 이유도 없이 자꾸 화만 낸다 그거야?”“아니, 그런 게 아니라 네가 진짜 하기 싫은 건데 내가 그걸 못 알아보고 계속하다가 너 다치게 할까 봐 그러지.”“진짜 싫으면 내가 너 물 거니까 그딴 걱정 할 필요 없어.”그 말에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던 강한서는 언제 풀었는지는 모르지만 이미 자유로워진 손으로 한현진의 손목을 잡으며 그녀의 입술에 입을 맞췄다.한현진이 그걸 왜 혼자 풀어냈냐고 따지기도 전에 혀를 입속으로 밀어 넣으며 치열을 고르게 훑고 지나가는 강한서에 한현진의 몸은 빠르게 나른해졌다.강한서가 입을 뗐을 때 한현진의 얼굴과 입술은 이미 빨개져 있었고 그녀는 가만히 누운 채 숨만 내뱉으며 아무런 힘도 쓰지 못하고 있었다.한현진 위에 올라타 있었던 강한서는 얼굴에 옅은 미소를 띤 채 그녀를 바라보더니 득의양양하게 말했다.“안 깨물었네.”한현진이 그 말의 뜻의 완전히 깨닫기도 전에 강한서는 또다시 입을 맞춰왔다.시간을 얼추 계산해보니 3달은 넘은 것 같아 사실상 관계를 한다고 해도 문제 될 건 없었기에 한현진은 쥐고 있던 강한서의 머리채를 놓아주고 몸에 힘을 뺐다.그렇게 키스를 이어나가던 강한서는 한참 만에 한현진을 놓아주더니 그대로 이불을 덮어주고는 그녀의 이마에 입을 맞추며 말했다.“자자 이제.”그 말에 어이가 없다는 듯 천장만 바라보던 한현진은 문득 인터넷에서 봤던 피드가 하나 떠올랐다.
강한서는 영문은 몰랐지만 그래도 한현진에게 벨트를 건네주었다.“뒤돌아서 손 등 뒤로 보내.”강한서는 한현진이 뭘 할지 알았지만 그래도 고분고분하게 뒤로 돌고는 손을 등 뒤로 교차시켰다.오래전에 배웠던 로프 묶는 방법을 오늘에서야 쓰게 되니 기뻤는지 한현진은 잔뜩 흥분한 채로 강한서의 손목을 묶었다.“이제 뒤 돌아도 돼.”한현진의 말에 따라 뒤로 돈 강한서는 손이 묶인 채로 그녀 앞에 꿇어앉았다.방금 샤워를 하고 나와 젖은 머리카락을 대충 뒤로 넘겨두었는데 강한서가 고개를 숙이니 머리카락도 앞으로 툭 하고 떨어져나와 그의 반쪽 얼굴을 가려버렸다.얼굴 앞에 드리운 머리칼 사이로 보이는 검은 눈동자에 한현진의 심장은 다시금 두근대기 시작했다.이제 보니 여자들이 정장을 입은 남자가 꿇어앉아 있는데 환장하는 이유가 있는 것 같았다.“맘에 들어?”낮은 목소리로 누구 하나 홀리려고 작정한 듯이 말하는 강한서에 한현진은 귀를 붉힌 채 말했다.“응, 맘에 들어.”“강운 그룹 사모님이 이런 취향인 줄은 몰랐는데, 진작에 나 이렇게 묶어 놓고 싶었겠네?”웃음을 흘리며 말하는 강한서에 한현진은 헛기침을 하며 떨리는 심장을 진정시키고는 입을 열었다.“그건 아니고. 난 네가 날 이렇게 대해주길 더 원했어.”오랜 시간 동안 부부로 살아온 좋은 점이라 하면 아마도 서로에게 더 뻔뻔해질 수 있는 게 아닐까 싶다.그래서 이런 낯간지러운 말을 해도 부끄러움이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강한서는 가만히 꿇어앉아 제 아내가 하는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나는 내가 싫다고 해도 네가 억지로 하는 걸 더 좋아해. 그리고 다 한 다음에 침대에 꿇어앉아서 나한테 용서를 비는 게 보고 싶었어. 내 취향은 그런 거라서.”한현진의 말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었던 강한서는 한참 만에 입을 열었다.“그럼 전에 우리가 싸울 때 내가 화나서 입 맞췄을 때는 왜 나 때린 거야? 그날도 내가 억지로 너 몰아세우고 하려고 했었잖아, 좋아한다면서 그때는 왜 나 죽이겠다고 그런 건데?”“진짜
송가람은 생각했다. ‘오빠는 그날 히비스커스 호텔에서 있었던 일 때문에 아직 나를 어떻게 마주하면 좋을지 모르겠는 거야. 게다가 내가 오빠 외숙모 때문에 다치기까지 했으니 분명 엄청난 죄책감에 시달리고 있을 거야. 그러니 이렇게 간단한 문자에도 오래 고민하는 거겠지.’강한서가 대화창을 보며 물었다. “뭐라고 답장한 거야?”한현진이 불퉁한 말투로 말했다. “이래도 안 돼, 저래도 안 되라고 하니까 어쩌겠어. 어떻게 답장하면 좋을지 모르겠으니까 모르겠다고 했지.”한현진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송가람에게서 답장이 왔다. [한서 오빠, 사실 그날 호텔에서 있었던 일은 저희 엄마가 너무 하셨어요. 오빠가 그렇게 대답한 것도 어쩔 수 없어서 그랬다는 거 알아요. 저 오빠 원망 안 해요.]눈을 마주친 강한서와 한현진 두 사람 모두 할 말을 잃었다. 이쪽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 상대방이 알아서 넘어왔다. 두 사람이 이렇게 열띤 토론을 펼칠 이유가 전혀 없었다. 한현진이 문자를 보냈다. [몸은 어때. 삼촌 일은, 내가 미안해.]송가람은 다시 한 번 그동안 강한서가 연락하지 않은 이유를 확신할 수 있었다. 그녀가 얼른 답장을 보냈다. [전 괜찮아요, 오빠. 네가 멋대로 결정했다고 오빠가 널 미워하지만 않는다면요.]한현진: [치료 잘 받아.]송가람이 얌전함을 표현하는 이모티콘을 전송했다. [오빠, 생일 파티할 거예요?]한현진: [아니. 그럴 기분이 아니라서.]그 말에 송가람의 얼굴엔 실망한 기색이 역력했다. 그녀느 사실 강한서가 조금 보고 싶었다. 고백 멘트를 작성하던 송가람은 서해금의 충고를 떠올리고 문자를 삭제했다. ‘조금만 더 기다려. 한현진을 회사에서 쫓아낼 때까지만.’송가람이 여전히 문자를 작성하고 있던 그 시점에 상대방에게서 문자가 도착했다. [현진 씨에게 들으니까 요즘 회사에서 대회 준비가 한창이라던데. 요즘 바빠?]송가람: [네. 조향 대회가 있어서요. 지금 한창 참가자 신청을 받고 있어요.]한현진: [네가 대회에서 좋은
한현진이 귀를 쫑긋 세웠다.“누구야?”강한서가 휴대폰을 한현진에게 건넸다. “내 불륜녀.”그 말 한 마디에 수화기 너머의 한성우는 머리가 어지러웠다. “네 뭐라고?”강한서를 힐끔 쳐다본 한현진은 강한서의 손에서 휴대폰을 건네받았다. 강한서는 한현진이 보내는 칭찬의 눈빛을 알아보고는 순간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한성우는 호기심에 겨워 잔뜩 흥분한 채 난리를 부리고 있었다. “두 사람 대체 뭐하는 거야? 네 불륜녀를 감히 조강지처 앞에서 이렇게 당당하게 밝힌다고?”두 사람은 한성우를 전혀 신경도 쓰지 않았다. 한현진은 사랑의 라이벌을 한 번 떠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송가람의 질문에 대답하지는 않고 오히려 반문했다. [가람아, 다친 건 어때? 아직도 아파?]강한서의 눈빛이 파르르 떨렸다. “이건 너무 하잖아. 내가 언제 이렇게 오글거리는 말을 한다고 그래?”한현진이 생각해도 이건 너무 강한서 답지 않은 문자였다. 그녀는 [아직도 아파?]라는 문자를 삭제했다. 하지만 강한서는 여전히 마음에 내키지 않았다. “이렇게 자상하게 얘기하지마. 지난 번에 홍혜림 씨를 만났을 때도 다신 연락하지 않겠다고 얘기했어. 하지만 네가 이렇게 답장을 보내면 나중에 만났을 때 내가 더는 선을 긋지 않을 거라고 생각해서 들이대면 나더러 어떡하라고.”강한서의 말에 한현진은 [다친 건 어때?]라는 글을 지우고 문자를 다시 작성했다. [계획 없어. 좋은 제안이라도 있어?]강한서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생일에 뭐할까 고민한 건 가까운 사이에서만 가능한 거야. 네가 이렇게 물어보면 걔가 뭐라고 생각하겠어?”한현진이 눈썹을 씰룩였다. “조용히 해. 애초부터 네 불륜녀에게는 내가 답장할 거라고 얘기했잖아. 네가 뭔데 나서?”강한서가 말했다. “내가 답장은 네가 하라고 얘기한 건 맞지만 이렇게 하는 건 아니지. 현실 반영은 해야 하잖아.”한성우는 궁금해 미칠 지경이었다. “형수님, 불륜녀라뇨. 강한서에게 언제부터 불륜녀가 있었어요. 남자예요, 여
여러 루트를 통해 송가람은 드디어 시계 관련 소식을 전해들을 수 있었다. 지금은 재고가 없어 7일을 기다려야 했다. 하지만 오늘 마침 빈해시의 한 고객이 시계를 반품했고 송가람이 동의한다면 먼저 그 시계를 가질 수 있다고 했다. 빈해시는 한주와 그리 멀지 않았다. 오늘 저녁이면 시계를 받을 수 있었다. 전화를 받은 매니저가 말했다. “고객님은 오늘 두 번째로 이 시계에 관해 물어보신 분이세요. 점장님 친구 분이라고 하셔서 먼저 연락드렸어요. 만약 구매 의향이 있으시다면 지금 바로 보내드릴게요.”송가람이 물었다. “저 말고 또 누가 물어본 거죠?”“죄송해요, 고객님. 그건 고객님 개인 정보라 말씀 드릴 수가 없어요.”굳이 묻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한현진이 분명했다. 송가람은 괜히 어깨가 으쓱해졌다. 결국은 자신이 한현진보다 먼저 시계를 구해내고야 말았다. 송가람이 태연한 말투로 말했다. “지금 준비해줘요. 물건은 바로 저에게 보내주시고요.”“알겠어요. 돈을 입금해주시면 저희가 영수증과 함께 시계를 포장해 최대한 빨리 보내드릴게요.”송가람은 자신이 가진 절반 이상의 돈을 신미정에게 사기 당했다. 이 시계까지 사고 나면 송가람은 거의 전 재산을 탕진하는 것과 다름이 없었다. 하지만 이렇게라도 한현진에게 골탕을 먹이는 것은 물론 강한서의 마음도 살 수 있다고 생각하니 송가람은 큰마음을 먹고 계좌 이체를 할 수밖에 없었다. 송가람이 입금을 하자마자 한성우에게 한 통의 전화가 걸려왔다. “세상에, 대박. 팔렸어요. 형수님, 저희 회사에서 영업을 하시는 게 어때요? 한 달 매출의 절반을 원하신대도 괜찮아요.”한현진이 말했다.“꿈 깨요. 이렇게 쉽게 속는 바보가 그렇게 많을 줄 알아요?”그 시계는 신우의 사촌 동생의 것이었다. 사긴 했지만 하고 다닌 적은 없었고 집에 한 달 째 고이 모셔두고 있다가 갑자기 실증이 나 환불한 것이다. 이런 명품 시계는 애초부터 재고가 많지 않았다. 하지만 구매한 지 한 달이 되어서야 환불을 하려니 쉽지 않
송가람은 조금 멍해졌다. 서해금은 얼마 전까지만 해도 강한서와의 만남을 강력하게 반대했다. 그 때문에 모녀가 몇 번을 싸웠는지 기억도 나지 않을 정도였다. 그런 서해금이 갑자기 뜻을 굽히니 송가람은 심지어 자신이 잘못 들은 것은 아닌지 의아하기까지 했다. 그녀는 한참만에야 정신을 차리고 환한 얼굴로 말했다. “엄마, 정말 반대 안 할 거야?”서해금이 어이가 없다는 듯 말했다. “내가 아무리 반대해도 무슨 소용 있어? 내가 반대한다고 네가 내 말을 들은 적이나 있어? 넌 엄마를 원수 취급하려고 했잖아.”“엄마, 정말 날 속이려고 하는 말 아니지?”송가람이 몇 번이고 서해금의 마음을 확인했다. 서해금이 한숨을 내쉬었다. “세상에 자식 이기는 부모가 어디 있어? 지금 네 꼴을 봐봐. 강한서를 위해 얼마나 비참한 모습을 하고도 돌아서려 하지 않는지. 이런 널 보고 내가 뭘 어떡할 수 있겠어?”송가람이 와락 서해금을 끌어안았다. 날아갈 듯이 기쁜 마음이 도무지 감춰지지 않았다. “엄마, 전엔 다 내가 잘못했어. 난 그냥 한서 오빠가 너무 좋아서 그랬어. 엄마, 걱정하지 마. 내가 한서 오빠를 좋아하는 걸 반대하지만 않으면 앞으로 뭐든 엄마가 하라는 대로 할게.”서해금이 가볍게 송가람의 등을 쓸었다. 그녀의 눈빛이 밝게 빛났다. “벌써 좋아하지 마. 내가 말한 조건 잊지 마. 엄마는 깔린느에 반 평생을 쏟아부었어. 깔린느는 엄마가 너에게 남겨주는 거야. 그러니까 네가 깔린느를 지킬 능력이 있다는 걸 보여줘. 네에게 그런 능력이 있어야 앞으로 네 결혼 생활이 어떻든, 깔린느가 네 손에 있는 이상 아무도 널 함부로 대할 수 없어.”“알겠어, 엄마. 엄마가 날 위해서 그러는 거 알아. 엄마를 실망시키지 않을게.”전엔 아무리 말해도 들은 척도 하지 않더니 강한서를 미끼로 사용하니 이제야 조금 말귀를 알아듣는 것 같았다. 서해금이 답답한 마음을 꾹 누르며 나지막이 말했다.“세은이가 회사에 입사할 때, 한현진이 어떤 약속을 했었는지 기억해?”송가람은
스쳐지나면 바로 잊어버릴 만큼 그저 평범하기 그지없는 얼굴이었다. 하지만 그 평범한 미모에 파묻힌 두 눈은 은서하의 등골을 서늘하게 했다.저도 모르게 뒤로 한걸음 물러선 은서하는 실수로 바닥에 놓인 화분을 건드렸다. 꽃병이 흔들리는 소리에 은서하가 번뜩 정신을 차렸다. 한현진 역시 그 소리를 듣고 무의식적으로 은서하를 쳐다보았다. 은서가 얼른 고개를 숙이고 말했다. “죄송해요, 대표님.”은서하의 목소리가 작게 떨렸다. 하지만 그리 티가 나는 떨림은 아니라 한현진도 알아차리지 못했다. “괜찮아요.”한현진이 사인을 마친 서류철을 은서하에게 건넸다. “결재 다 했어요. 가봐요.”한현진이 건넨 서류철을 받아 꼭 끌어안은 은서하가 가볍게 허리를 숙여 한현진에게 인사를 하고는 몸을 돌려 사무실을 나섰다. 은서하는 사무실 문을 닫으며 다시 한 번 주혁을 쳐다보았다. 그 시선을 느낀 듯, 상대방 역시 사무실 문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은서하는 얼른 시선을 피하며 문을 닫았다. 서류철을 끌어안은 은서하의 머릿속은 백짓장이 되었다. 그녀는 멍한 눈으로 서류철을 쥔 손에 꽉 힘을 실었다. 결재 서류에 크고 작은 구겨진 자국이 났다. 흐리멍덩한 정신으로 걷던 은서하는 누군가와 부딪혔다. 품 안의 서류가 툭 날리며 바닥 여기저기에 엉망으로 흩어졌다. 은서하가 부딪힌 건 그녀와 친분이 있는 사람이었다. 꽤 가까운 사이였던 그 사람은 허리를 숙여 은서하를 도와 서류를 주으며 핀잔을 줬다. “넌 키가 작아서 내 얼굴에 부딪히지 않아서 다행이야. 아니면 내가 얼마 전에 고친 코가 너 때문에 부러질 뻔 했잖아.”은서하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물었다. “코를 고쳐? 너 성형했어?”“기억력이 너무 형편없는 거 아냐? 성형한지 이제 6개월도 지났어. 이번엔 다시 손 좀 본 거야.”상대방은 말하며 은서하의 이마를 톡 쳤다. “너도 얼른 그 복코 수술 좀 해. 네 얼굴은 코 때문에 다 망쳤어. 날 수술해준 의사 선생님이 기술이 꽤 좋아. 할 생각 있으면 얘기해. 소개해줄게
은서하는 부끄러운 듯 두 손을 움켜쥐고 웅얼거리며 말을 이었다. “이건 대표님께서 전에 이 팀장님을 통해 주신 외할머니 병원비예요. 2000만 원. 카드 비밀 번호는 000000이예요.”한현진은 카드를 받는 대신 펜을 내려놓으며 은서하에게 물었다. “돈은 어디서 났어요?”은서하는 말이 없었다. 한현진이 태연하게 말했다. “합법적인 루트로 얻은 돈이 아니라면, 제가 이 돈을 받는다고 해도 결국 다시 돌려주어야 할 거예요.”은서하가 다급하게 말했다. “불법적인 돈이 아녜요. 저 회사 사내 대출을 받았어요.”깔린느에는 직원 복지를 위한 사내 대출이 있었다. 대출 이자는 3년에 3% 정도로 낮은 편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이자가 낮다고 해도 결국은 갚아야 하는 빚이었다. 은서하는 안 그래도 경제적인 스트레스에 시달리고 있었다. 대출 이자는 그녀에겐 엎친 데 덮친 격이었다. 한현진이 손가락으로 책상 위의 마우스를 살며시 쓸더니 갑자기 말했다. “혹시 제가 이 일을 계기로 서하 씨를 제 사람으로 끌어들일까 걱정인 거예요? 서하 씨에게 은혜를 베풀었다는 것을 빌미로 곤란한 일이라도 시킬까 봐?”한현진의 말에 은서하는 그만 멍해졌다. 그녀는 한현진이 이렇게 단도직입적으로 얘기를 꺼낼 줄은 몰랐다. 은서하는 입술을 짓이기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묵인이었다. 한현진이 입사한지도 시간이 꽤 지났다. 사람들은 이젠 한현진이 회사에 들어온 목적을 어느 정도는 눈치 챌 수 있었다. 다만 서해금이 깔린느에 너무 오랫동안 몸담고 있었던 터라 깔린느의 핵심부서에는 전부 서해금의 사람이 진을 치고 있었다. 그런 서해금에게서 실권을 빼앗으려는 한현진을 좋게 보는 사람은 없었다. 설사 서해금의 편에 서지는 않더라도 그녀의 눈 밖에 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물론 은서하도 그들과 같은 생각이었다. 그녀는 그 어떤 진영에도 서고 싶지 않았다. 은서하는 그저 조용히 출근하고 월급을 받아 외할머니의 병을 치료할 수 있다면 충분했다. 은서하의 침묵의 의미를 알아차린 한현진
강한서의 말에 죄책감이 든 한현진이 말했다. [널 탓하는 게 아니야. 그냥 물어본 거야.]강한서: [물어보는 네 말투가 나에겐 너무 상처였어. 지금 그 문자를 봐도 마음이 아픈 것 같아.]한현진: [...]강한서는 지식만 빨리 습득하는게 아니었다. 그의 비꼬기 기술도 무서운 속도로 발전했다. 하지만 강한서는 자신의 상대가 누군지 잊은 모양이었다. 한현진이 미안함이 가득 담긴 말투로 문자를 작성했다. [그럼 어떡해? 이젠 메시지를 삭제해도 소용없는데. 아니면 네가 아예 날 삭제할래? 그럼 내가 보낸 문자도 볼 수 없고, 그렇게 괴로워할 필요가 없잖아.]강한서는 한참 동안 답장이 없었다. 아마 한현진의 제안에 충격을 받은 듯 했다. 한현진: [삭제했어?]강한서: [...]한현진: [오빠, 얼른 삭제해. 난 오빠가 슬픈 건 싫어.]한현진은 차례로 문자를 잔뜩 전송했다. 결국 한현진의 등살에 못 이긴 강한서가 체념하며 답장했다. [여보, 내가 잘못했어.]한현진이 배배 꼬인 말투로 말했다. [오빠는 그저 자랑이 하고 싶었을 뿐인데, 오빠에게 무슨 잘못이 있겠어? 잘못한 건 나야. 이렇게 사소한 일로 시시콜콜 따지기나 하고.]말이 없던 강한서는 잠시 후 한현진에게 가방 사진을 잔뜩 보냈다. [자기야, 하나 골라.]한현진은 버럭 화를 내는 듯한 말투로 말했다. [오빠, 이게 무슨 뜻이야? 지금 내가 가방 때문에 이러는 것 같아?]강한서: [다 사.]한현진이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됐어. 농담이야. 사긴 뭘 사. 회사 조직개편에 성공하면 네 수입도 지금처럼 높지는 않을 거야. 우리 아이도 키워야 하는데 아껴야지. 돈 함부로 쓰지마.]강한서에게 한성 그룹이 유일한 수입원은 아니었다. 앞으로 한성 그룹의 수입이 줄어들더라도 그는 여전히 적지 않은 돈을 벌 수 있었다. 하지만 강한서는 이 가족을 위해 계산기를 두드리는 한현진의 모습이 귀엽기만 했다. [애들은 애들이고, 넌 너야. 아직 우리 와이프를 희생시켜야 할 정도는 아니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