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벌집 막내딸 특유의 오만한 기질이 있는 강민서가 흥 콧방귀 뀌며 말했다. “필요 없어.”한현진이 강한서를 쳐다보았다. “월급 올려줬어? 배짱이 좋네.”강한서가 말했다. “아뇨. 여전히 340만 원이죠.”“아니야. 지금은 우리 집에 살고 있는데 월세를 안 깎았잖아. 여긴 별장이니까 월세로 100만 원을 받는 건 괜찮지?”한현진의 말에 강민서의 눈가가 파르르 뛰었다. 어쩐지 불안한 예감이 엄습했다. 잠시 생각하던 강한서가 말했다. “조금 적은 것 같아요. 남향의 게스트 룸에 욕실도 혼자 쓰고 있고 수영장도 있잖아요. 베란다와 안마 의자도요. 민 실장이 전에 살던 회사 근처의 오피스텔도 월세가 140만원이었는데, 우린 별장이잖아요.”“민서는 네 동생이니까 할인해줘야지.”강한서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죠. 현진 씨가 100만 원이라고 했으니 100만 원으로 하죠. 나중에 재무팀에게 직접 현진 씨 계좌로 넣으라고 할게요.”한현진이 말했다. “우리 집에서 끼니도 해결하고 있어. 우리 정도면 반찬이 나쁘지는 않은데. 킹크랩, 굴, 상어 지느러미, 연와, 캐비아... 이 정도 수준이면 매달 100만 원을 받아도 무리는 아니겠지?”강한서가 말했다.“가성비로는 최고네요. 전에 제가 한세 한식당에서 예약 주문했을 땐 매달 260만 원이었어요. 식재료도 저희만큼 풍부하진 않았고요. 100만 원이면 식재료 값으로도 부족해요.”한현진이 강한서를 나무랐다. “100만 원으로 해. 오빠랑 새언니가 되어서는 동생이 얹혀 살고 있는데 조금이라도 보태야 하지 않겠어?”강한서가 대답했다. “그럼 그것도 재무팀에 얘기해서 매달 민서 월급에서 100만 원을 현진 씨 계좌에 이체하라고 할게요.”“그리고 민서 방에 있는 매트리스. 그 매트리스 엄청 비싼 건데 매일 거기서 자고 있으니 그로 인한 손실도 계산해서 해야 하는 거 아냐? 그때 아마 가격이 일—”“오빠, 오빠. 내가 할게. 들어가서 쉬어. 새언니, 이것만 하면 돼?”강민서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녀
한현진이 정리한 옷들을 툭툭 두드리며 고개를 들었다. “이 옷들, 누가 선물한 건지 알아?”강한서가 고개를 가로 저었다. 하지만 한현진의 표정을 살펴보던 그가 떠보듯 물었다. “송가람?”“똑똑하네.”강한서가 미간을 찌푸렸다. “이건 네가 임신하지 않았다고 해도 안 맞는 사이즈잖아. 입지도 못할 옷은 왜 선물한 거야?”‘왜냐고? 당연히 날 기분 나쁘게 하려고 그러는 거지.’사고를 강요당했으니 마음에 내키지 않아 선물을 주는 것도 꼼수를 부린 것일 테였다. 그런 생각을 하던 한현진이 말했다. “자기가 나보다 날씬하다는 걸 자랑하고 싶었겠지. 다리도 젓가락처럼 가늘고 곧아서 나보다 예쁘고. 안 그래?”“눈 여겨 본 적 없어.”강한서는 한현진이 판 함정에 전혀 뛰어들지 않았다. 눈치가 빨라서가 아니라 그는 정말 전혀 신경조차 쓰지 않았다. 강한서에게 이성은 한현진과 다른 여자 두 종류뿐이었다. 다른 사람이야 예쁘든 몸매가 좋든, 강한서의 관심사가 아니었다. 강한서가 기억하는 송가람에 대한 이미지는 그저 지나치게 부각되어 보이던 쇄골이 전부였다. 물론 그 쇄골이 예뻐 보여서 기억에 남은 건 아니었다. 다만 그는 송가람의 쇄골을 보며 불현듯 시사 뉴스에서 보았던 앙상하게 마른 피난민의 모습을 떠올렸다. 영양실조가 분명해 보였다. 그에 비해 한현진은 아기처럼 동글동글한 수준까진 아니었지만 선명한 이목구비에 생기발랄한 분위기가 넘쳐났다. 그녀의 피부는 언제나 탱탱한 상태를 유지하고 있었고 몸매는 너무 마르지도 그렇다고 너무 뚱뚱하지도 않았다. 혈색이 좋아 그녀의 입술은 언제나 빨갛게 윤기가 돌았기에 립스틱을 바르지 않아도 바른 것 같은 착각이 들게 했다. 한현진은 심지어 머리숱도 풍성했다. 그녀가 이렇게 좋은 상태를 유지할 수 있었던 건 전부 편식하지 않는 그녀의 식습관 때문이었다. 한현진이 마르든 뚱뚱하든 강한서는 아무 상관없었다. 그는 단지 그녀가 조금이라도 더 건강하기를 바랐다. 지금처럼 말이다. 하지만 송가람처럼 삐쩍 마른 건 용납할 수
강한서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넌 워낙 도도한 애라 싸구려 시계를 착용하면 오히려 더 의심스러울 거야. 민 실장이 이 시계가 제일 좋댔어. 네 이미지와 완벽히 어울리다면서. 그리고 설사 빼앗는다고 하더라도 이렇게 비싼 시계를 당장 팔수도 없을 거야. 그러니까 범인이 시계를 팔기 전에 내가 반드시 널 먼저 찾을 수 있어. 하지만 난 영원히 이 시계를 쓸 일이 없었으면 좋겠어.”네 이미지와 완벽히 어울린다는 말이 어쩐지 비꼬는 것 같아 이를 갈았다. “내 이미지가 어때서? 졸부 같다는 거야?”순간 어리둥절해진 강한서가 씩 웃으며 한현진을 끌어안았다. 그는 한현진의 머리카락에 입을 맞추었다. “사실 난 돈을 좋아하는 네 모습이 너무 좋아.”한현진이 강한서를 힐끔 쳐다보았다. “네 취향도 정말 특이해.”강한서가 목소리를 낮추며 말했다. “왜냐면 난 돈이라면 충분히 많거든.”“...”한현진은 예상치도 못한 돈자랑 공격을 당하고 말았다. 다음 날 아침 일찍 박해서는 한현진에게로 도착했다. 그들은 먼저 송병천과 서해금을 공항에 데려다줬다. 박해서는 눈시울을 붉힌 송병천과 서해금과 작별 인사를 나누는 한현진을 지켜보았다. 그녀는 꼭 안전에 주의하고 매일 전화하라며 두 사람에게 당부했다. 아직 출발하지도 않았지만 벌써부터 보고 싶은 것 같다던 한현진은 두 사람이 대합실로 들어가자마자 바로 눈물을 거두었고 심지어 선바이저를 내려 거울을 보며 화장을 고쳤다. 박해서는 몰래 그런 한현진을 힐끔 쳐다보았다. 그러자 한현진은 고개도 돌리지 않은 채 덤덤하게 말했다.“왜요?”박해서가 시선을 돌리며 고개를 가로 저었다.“아니에요.”머리를 정리한 한현진이 고개를 돌려 박해서를 쳐다보았다. “박 실장님. 오빠한테서 들었는데 가람 언니 동창이라면서요?”박해서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초등학교 동창이에요.”“그럼 두 분은 사이가 좋으시겠네요. 오빠가 박 실장님을 채용한 것도 가람 언니가 실장님을 근면성실하신데다 정직한 분이시라고 말해줬기 때문이잖아요.”
말을 마친 성월이 먼저 박수를 치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본 사람들도 하나둘 성월을 따라 박수를 치기 시작했다. 다만 그들은 서로 다른 표정을 짓고 있었다. 대부분의 사람은 한현진을 훑어보았고 어떤 사람은 인정할 수 없다는 눈빛을 보냈다. ‘인정하지 않는게 맞는 거지.’한현진이 생각했다. ‘나라도 쉽게 받아들일 수 없었을 거야.’영문도 없이 떨어진 낙하산 직장 상사가 아직 실력은 보여주지도 않고 위신만 세우고 있으니 그 누구라도 그 상황에 놓이면 불쾌했을 것이다. 서해금은 비록 현장에 없었지만 한현진을 위해 꽤 많은 장애물을 설치해 놓은 듯 했다. 한현진이 이제 그만하라는 뜻으로 손을 들었다. 박수 소리가 점차 줄어들자 한현진은 그제야 입을 열어 성월에게 물었다. “성 비서님, 전에 가람 언니가 첫출근하셨을 때도 이렇게 성대한 환영 의식을 열어줬었나요?”성월이 웃으며 말했다. “가람 씨는 그저 제향 부서의 작은 팀장일 뿐이에요. 다른 사람들처럼 일반적인 입사 절차를 밟으셨고요. 하지만 현진 씨는 다르잖아요. 대표님이시니까요. 그러니 어느 정도의 스케일은 있어야죠.”송가람 역시 성월의 말에 맞장구치며 나긋한 목소리로 말했다. “현진 씨, 전 현진 씨와는 달라요. 전 깔린느에 첫출근은 아니거든요. 전엔 입사를 안 한 것뿐이라 여기 계신 분들은 절 아시거든요. 현진 씨는 처음이시니까 정식으로 인사할 기회를 마련해드려야죠.”한현진이 피식 웃음을 흘렸다. “가람 언니나 저나 그저 다 같은 낙하산인데 무슨 직책을 따지고 그래요? 이렇게 성대한 환영 인사라니, 모르는 분들이 보시면 제가 첫날부터 대표라고 허세를 부리는 거라고 생각하겠어요.”한현진의 말에 송가람은 그만 말문이 막혔다. 송가람은 한현진이 그녀를 공격하기 위해 스스로를 깎아내릴 것이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않았었다. 본인이 낙하산이라는 것을 공개하는 것은 물론 물귀신 작전이라도 쓰듯 송가람도 같이 물속으로 끌어내렸다. 낙하산은 그 어느 때에도 사람들의 사랑을 받지 못했다. 그런 이유로
직원들이 각자 자리로 돌아간 후 성월은 한현진을 데리고 그녀의 사무실로 향했다. 서해금은 송가람보다는 똑똑한 사람이었다. 그녀는 쉽게 경계를 늦출 만한 곳에서 함정을 파놓긴 했지만 절대 대놓고 괴롭히지는 않았다. 예를 들면 지금 이 사무실이 그랬다. 서해금이 한현진을 위해 준비해준 사무실의 규모는 강한서와도 비교할 수 있을 정도로 크고 넓었다. “한 대표님, 여기가 바로 업무를 보실 사무실이에요. 옆 사무실엔 대표님을 위한 보좌관 사무실과 비서실이 준비되어 있으니 필요하신 게 있으시면 그쪽으로 연락하면 되세요.”주위를 빙 둘러본 한현진이 물었다. “서 대표님 사무실은 어디예요?”“한 대표님 바로 위층이에요.”“그래요. 먼저 나가보세요.”한현진이 휘휘 손을 내저었다. “전 여기서 구경하고 있을게요.”고개를 끄덕인 성월이 사무실을 나섰다. 한현진이 박해서를 힐끔 쳐다보았다. “박 실장님, 밀크티 한 잔 사다줘요. 아무 맛이든 괜찮아요. 너무 달지 않게요.”알겠다며 대답한 박해서가 문을 열고 자리를 비웠다. 앞으로 한 발 나선 한현진은 박해서가 사무실을 벗어난 후 조용히 문을 걸어잠궜다. 그리곤 가방에서 강한서가 준 탐지 장비를 꺼내 사무실 곳곳을 스캔하기 시작했다. 강한서의 말대로라면 도청 기계가 있거나 카메라가 있으면 장비가 진동할 것이다. 그녀는 꼼꼼하게 사무실의 모든 곳을 스캔했다. 그녀는 심지어 그 어떤 구석도 놓치지 않았다. 하지만 그 어떤 것도 탐지되지 않았다. ‘설마 내가 괜한 걱정을 한 건가?’사무실을 한참을 돌아다녔지만 아무 것도 발견하지 못한 한현진이 탐지 장비를 티 테이블 위에 올려두었다. 하지만 그 순간, 장비가 웅웅 소리를 내며 진동하기 시작했다. 멈칫, 행동을 멈춘 한현진이 장비를 들고 티 테이블 주변을 훑었다. 이윽고 장비가 돈을 불러온다는 의미를 가진 파키라에 가까워지자 또다시 진동이 울렸다. 입술을 앙다문 한현진이 화분 표면의 이끼를 들어냈다. 그러자 그 아래에는 랩으로 휘감은 물건이 나타났다.
협박이 통하지 않자 한현진은 노선을 바꿔 애교를 부리기 시작했다. [여보가 도와주면 내가 이번 달은 뭐든 당신 말만 들을게.]힐끔 달력을 확인한 강한서가 말했다. [이번 달이 지나기까지 13시간 남았어.][그럼 다음 달까지 네 말 들을게. 다음 달은 네가 가장인 거야. 네 말이 다 맞아.]지켜지지 않을 한현진의 약속에 많이 당한 강한서는 그녀의 말은 전혀 믿지 않았다. 그는 능청스럽게 책임을 전가했다. [됐어. 난 가장이 될 그런 자격이 없어. 그러니까 억지로 그런 책임은 지지 않을래. 내가 보기엔 네가 잘 하고 있는 것 같은데 난 네가 관리해 주는 게 좋아. 우리 집은 고생스럽겠지만 사모님이 가장하셔야겠네요.]강한서의 말에 한현진은 그만 말문이 막혔다. 약속을 하기만 하고 지키지 않으니 바보 같은 강한서도 이젠 쉽게 당하지 않았다. ‘뭐든 희생해야 해.’생각한 한현진이 회심의 한 방을 날렸다. [여보. 황후가 입었던 촬영 의상 아직 기억해? 내가 입었던 것들 중에 사실 예쁜 의상이 몇 벌 더 있었어. 만약 네가 원한다면 내가 차이현 씨에게 전화해서 우리가 전부 사오는 거야. 내가 밤새 한 벌씩 입어서 보여줄게, 어때?]컵을 들어 물을 한 모금 마신 강한서는 한현진이 답장한 내용을 보며 하마터면 사레가 들려 죽을 뻔 했다. 기침을 하느라 귓불마저 새빨개져 있었다. 한현진은 사라졌다가 다시 나타나는 입력 중이라는 글자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문자를 기다리며 그의 소식을 기다리다 세월이 다 흘러버릴 것 같다는 기분을 느낄 쯤, 강한서가 드디어 문자를 보냈다. [아니, 내가 차이현 씨에게서 예약할게. 하지만 배달 어플 아이디는 빌려줄 수 있어.]한현진은 “오빠, 알겠어.”라는 이모티콘을 보냈다. 강한서가 씩 입꼬리를 올렸다. 그의 눈에는 웃음기가 가득했다. 그가 한현진에게 귀띔했다. [네가 한 약속 잊지 마. 이번에도 안 지키면 다신 더 안 믿어.]누이 좋고 매부 좋은 “좋은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한현진은 창피함을 무릅쓰고 차이현
알겠다며 대답한 박해서는 동료와 함께 엘리베이터에서 내리는 송가람을 지켜보았다. 송가람 곁에 있던 동료가 호기심 가득한 말투로 물었다. “가람 씨, 한 대표님 비서와 많이 친하세요?”송가람은 그저 씩 웃으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박해서는 조금은 틀에 박힌 듯 한 사람이라 규정대로만 일을 처리하려고 했고 융통성이 없는 편이었다. 사실 송가람은 박해서가 썩 마음에 들지는 않았다. 당시 박해서가 면접 보러 왔을 때 송가람은 마침 볼 일이 있어 송민준에게 가고 있던 중이었다. 그녀는 송민준 사무실로 향하는 길에 면접을 마치고 나온 박해서와 마주쳤다. 사실 송가람은 박해서라는 사람을 잊은지 오래였다. 박해서가 먼저 인사를 건네며 두 사람이 동창이라는 사실을 언급했다. 송가람에게 초등학교 시절의 일은 그리 좋은 추억은 아니었다. 그러니 박해서가 그녀에게 어린 시절 얘기를 꺼냈을 때, 송가람은 그저 아무런 감정 없이 대꾸해줬을 뿐이었다. 하지만 박해서는 의외로 실력이 있는 사람이었다. 수도 없이 비서를 바꾸고도 눈에 차지 않아하던 까다로운 송민준은 박해서를 마음에 들어 한 것은 물론 벌써 몇 년 동안 그를 곁에 두고 있었다. 송가람은 마음을 나누지 않은 사람과 인간관계를 유지하는 것을 싫어했다. 그녀에게 박해서가 바로 그런 사람이었다. 하지만 서해금은 늘 그녀에게 박해서와 어느 정도의 관계를 유지하라고 당부했다. 동창이니 서로 도와주라면서 말이다. 그 당부는 서해금이 박해서에게서 한현진의 유전자 검사 소식을 전해들은 이후로 최고조를 찍었다. 송가람은 박해서가 그녀를 도와줄 수 있는 일을 거라 생각하지 않았다. 최소한 한현진이 깔린느에 출근하기 전까진, 그녀는 박해서는 아무런 쓸모도 없는 사람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 이제 보니 서해금의 선경지명이 틀린 것은 아니었다. 송가람은 손에 들린 밀크티를 동료에게 건넸다. “이거 현이 씨가 마셔요.”주현이 멈칫하더니 물었다. “박 실장님이 일부러 사오신 건데 안 마셔요?”송가람이 웃으며 말했다.
송가람이 미간을 찌푸렸다. “무슨 말이에요? 전 꽃을 배달시킨 적이 없는데요.”“전화번호 끝자리가 8286인 남성분이 주문하셨어요. 꼭 직접 꽃을 받게 해달라고 부탁하셨는데, 내려오실 수 있으세요?”익숙한 전화번호 뒷자리에 송가람이 멈칫했다. ‘8286이면, 한서 오빠 전화번호잖아.’송가람이 벌떡 몸을 일으켰다. “잠깐만 기다려요. 지금 바로 내려갈게요.”로비.배달원이 커다란 장미꽃다발을 들고 프론트에 서 있었다. 로비를 오고가는 사람들은 참지 못하고 힐끔힐끔 배달원 손에 들린 꽃다발을 쳐다보더니 곧 고개를 돌려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회사로 꽃이 배달되는 것은 드라마에서나 많이 볼 수 있는 장면이지 현실에선 흔한 광경이 아니었다. 그러니 다들 꽃다발의 주인이 누군지 호기심에 가득 차 있었다. 잠시 후,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더니 송가람이 성큼성큼 프론트 쪽으로 걸어갔다. 본인 확인을 마친 배달원이 송가람에게 사인을 부탁하고 나서야 꽃다발을 전해주었다. 꽃다발을 받아든 송가람이 얼굴을 붉히며 물었다. “죄송한데 꽃을 주문한 남성분이 또 다른 말은 없었나요?”배달원이 고개를 가로 저으며 말했다. “사장님께 카드도 써달라고 부탁했어요. 카드는 꽃다발 속에 있어요.”송가람이 손을 뻗어 꽃을 뒤지자 그 안에는 예쁜 빨간색 카드가 들어있었다. 프론트에 있던 직원이 빙그레 미소 지으며 물었다. “가람 씨, 남자친구가 보내 준 거예요?”송가람이 붉게 물든 얼굴로 카드를 다시 꽃다발 속으로 넣으며 나지막이 대답했다. “아뇨, 친구가요.”그녀의 말에 다들 알겠다는 듯 말했다. “아, 가람 씨 짝사랑하시는 분이 보내신 거구나.”씩 미소 지은 송가람은 그들의 말을 부정하지 않고 꽃다발을 안은 채 사무실로 올라갔다. 사무실로 향하는 길에 송가람은 적지 않은 동료들과 마주쳤다. 곧, 송가람을 좋아하는 남자가 그녀에게 꽃을 선물했다는 소식이 회사 전체에 전해져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 송가람은 그런 소문이 퍼지는 것을 막지 않았다. 비록 입
한현진은 반나절이 걸려서야 일의 자초지종을 파악할 수 있었다. ‘어쩐지 지난번 홍혜림 씨 사건이 있었을 때 왜 진윤 씨가 갑자기 나타나 상황을 반전시키나 했더니, 이런 이유 때문이었다는 거잖아.’순간 한현진은 뻘쭘함에 어찌할 바를 몰랐다. 이럴 줄 알았다면 방금 전화를 받고 모르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을 때 입도 벙긋하지 말았어야 했다. 진윤의 말처럼 이건 정말 비열한 짓이었다. 유치한 강한서가 벌일 만한 일이 맞긴 한 것 같았다. 강한서 본인 역시 이번 일은 너무 얍삽했다고 생각한 것인지 어쩌다 아이를 달래주었다. “내가 제대로 설명하지 않은 탓이라고 해. [정상에서]에서 지금 자체 테스트 중인 스킨 한 세트 줄게. 어때?”진윤이 작게 울먹이며 말했다. “스킨 세 세트?“강한서는 어이없는 웃음을 터뜨렸다. 이 와중에 딜을 하는 걸 보니 그리 큰 상처를 받은 건 아닌 모양이었다. “세 세트 전부 줄게.”진윤이 곧바로 울음을 멈췄다. 절판되어 더는 살 수 없는 게임 스킨과 이미 다른 사람과 결혼한 여신 중 아무리 바보라도 그와 같은 선택을 할 것이다. “그래요. 제가 오해한 거라고 하죠.”말하며 한현진을 쳐다보던 진윤은 여전히 아쉬워하며 말했다. “현진 누나, 왜 이렇게 빨리 결혼하셨어요. 남자 때문에 손에 넣었던 트로피도 놓칠 수가 있어요.”강한서의 눈가가 파르르 뛰었다. “결혼이 커리어 영향주지 않아. 이간질 하려고 하지 마.”“형님은 남자니까 당연히 영향을 안 받으시겠죠.”강한서에게 농락을 당한데다 하루아침에 구닥다리에게 여신을 뺐긴 진윤은 누구보다 빨리 흑화 했다. “결혼하면 아이도 낳아야 하잖아요. 어떤 유명한 감독이 임산부를 캐스팅하려고 하겠어요. 제일 예쁠 나이를 남편과 아이에게 바치면 나중에 아이가 클 때쯤엔 본인의 레전드 시절은 이미 지났다고요. 제가 다 아쉬워서 그래요. 너무 불공평해요.”비록 진윤은 그저 이간질을 하기 위해 꺼낸 말이었지만 그 말은 현실이기도 했다. 임신과 출산은 여자의 커리어엔 고난과 역경이
한현진: ?강한서가 들고 있던 휴대폰 너머로 들려온 것은 차미주의 목소리였다. “현진아! 너 내연녀가 되어버렸어. 게다가 그 상대가 네 사촌 동생이래.”강한서: ?강한서는 어리둥절했다. 하지만 한현진은 그보다 더 혼란스러웠다. ‘전여친, 현여친이 뭐야? 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거야? 게다가 이 목소리, 왜 이렇게 귀에 익은 거지?’“저... 저기 혹시 전화 잘못 하신 거 아녜요?”한현진이 나지막이 물었다. 그러자 수화기 너머의 사람이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그리고 곳 충격이 가시지 않은 듯 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현, 현진 누나?”한현진이 멍해졌다. ‘날 알아?’“네. 제가 한현진이예요. 누구세요?”상대방은 말이 없었다. 그에게서는 그저 조금 흥분한 숨소리가 들려왔다. 강한서가 한현진의 손에서 휴대폰을 빼앗아 스피커폰으로 전환했다. “무슨 일이야?”진윤이 이를 악물었다. “방금 전화 받은 사람 누구예요!”강한서가 말했다. “내 와이프.”“그럴 리가 없어!”진윤이 바득 이를 갈았다. “이 사생팬 같은 아저씨가! 혹시 일부러 날 속이려고 옆에 성대모사하는 분이라고 모셔놓은 거 아녜요?”강한서가 태연하게 말했다. “내가 너처럼 유치한 인간인 줄 알아? 그리고 현진이는 아무도 대체할 수 없어.”진윤은 강한서의 말을 전혀 믿지 않았다. “거짓말 좀 그만 해요. 현진 누나는 지금 그 티베탄 마스티프와 데이트하는 중이라고요. 만약 누나가 정말 형님 와이프라면 형님이 이렇게 아무렇지 않게 누나가 딴 남자와 데이트하는 걸 지켜볼 수 있어요?”더 이상 진윤을 대꾸하기 귀찮았던 강한서가 그에게 영상통화를 보냈다. 몇뿐 후, 휴대폰 화면으로 자신이 그토록 좋아하던 여신과 딱 붙어 앉아있는 전남편 형님을 확인한 진윤은 순간 참지 못하고 눈물을 흘렸다. 한현진은 휴대폰에 비춰진 진윤을 보며 멍한 표정을 지었다. ‘진윤 씨가 강한서와는 어떻게 아는 사이인 거야?’진윤은 숨이 넘어갈 것처럼 울어댔다. “거짓말쟁이! 뻔뻔한 인간! 전
유난히 예쁘게 잘 나온 사진을 보며 한 현지는 신난 얼굴로 고개를 돌려 강한서에게 보여 주었다. 하지만 멍청하게 나온 것 같다면 마음에 들어 하지 않던 강한서는 굳이 자신이 찍겠다면 휴대폰을 달라고 했다.한현진이 눈을 실룩거렸다. “네가 사진을 찍겠다고? 168cm인 나를 138cm로 만들어 버리는 네가? 강 대표님 본인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 몰라서 그런 말씀을 하시는 거예요?”강한서가 인정할 수 없다는 듯 말했다. “내 실력이 그렇게 별로야?”한현진이 말했다. “쌀을 뿌린 휴대폰을 닭이 부리로 쪼아도 내가 찍은 것 보단 낫다고 할 수 있어.”왠지 수치를 당한 것 같은 기분에 강한서가 이를 악 물면 말했다. “그럼 난 왜 우리가 데이트했을 때 내가 찍어준 사진을 밤새도록 보고 있었던 거야?”강한서가 괜히 그 얘기를 꺼낸 탓에 잊혀 가던 한현진의 기억이 문득 돌아왔다.“사진을 보면서 넌 그저 사진을 찍을 줄 모르는 것뿐이라고 날 설득 하지 않는다면 호텔 앞에서 바로 너와 싸우 버릴 것 같았거든. 내 외모에, 감독님께서도 나에게 각도는 중요하지 않다고 말씀 하셨는데 넌 대체 어떻게 날 사실 눈으로 찍을 수 있었던 거야?”강한서: ...“사시눈... 처럼 나왔어?”한현진이 일을 악물었다. “내가 뛰어다니는 사진 좀 찍어달라고 하니까 유체 이탈한 것처럼 찍어줬잖아! 내가 피드를 업로드할 때 실수로 그 사진까지 넣었더니 애들이 나한테 대체 어디서 이런 심령사진을 찍었냐고 물었었어.”“...”활활 타오르던 강한서의 분노가 순식간에 사그라졌다. “어쩌다 가끔... 몇 십 장뿐이었잖아.”한현진이 어이없다는 듯 실소를 터뜨렸다. “하.”뭔가를 말하려던 강한서가 고개를 숙이자 무릎 정도까지 오는 어린 아이가 옆에 쭈그려 앉아 불쌍한 눈으로 자신을 쳐다보는 것이 보였다. “아저씨, 아직 더 놀 거예요? 저희 잠깐 놀게 해주시면 안 돼요?”강한서가 고개를 돌리자 뒤에는 어린 라이 대여섯 명이 줄을 서 있었다. 한현진: ...창피함에 고개
“하하하.”한현진이 마른 웃음을 지었다.“오빠. 제가 티슈 없는 건 어떻게 알았어요?”강한서가 눈을 씰룩였다. 그야말로 완벽한 핑계였다. 그는 입술을 달싹여 아내를 따라 염치 없이 말했다. “형님, 저도 없어요.”송민준이 가방과 티슈를 두 사람에게 던지며 강한서를 노려보았다. 탁, 소리와 함께 문이 닫겼다. 한현진: ...“오빠가 나한테 화 난 건 아니겠지?”강한서가 우울하게 말했다. “너보단 날 먼저 걱정해야 할 것 같아. 네 오빠가 아무리 너에게 화가 나도 결국은 나에게 그 화살이 돌아올 거야.”한현진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다면 마음이 좀 놓이네.”강한서: ?한현진이 그의 손을 잡으며 의미심장하게 말했다. “어차피 오빠가 널 탐탁지 않아 한게 하루 이틀도 아니잖아. 오늘 이 일로 크게 달라지진않을 거야.”“...”‘행복은 본인이 누리고 잘못은 내가 뒤집어쓰고. 정말 좋은 아내네.’강한서는 한현진을 데리고 호텔 라운지로 향했다. 입덧이 끝난 이후로 한현진의 식욕은 줄곧 안정적이었다. 매 끼니마다 많이 먹지 않아도 배가 불렀지만 배고픔도 빨리 찾아왔기에 하루에 몇 끼씩 먹어야 했다. 그 덕에 지금의 한현진은 송아지처럼 튼튼하기만 했다. 강한서는 임신한 한현진을 위해 오랫동안 공부했지만 한현진에게는 하나도 쓸모가 없었다. 그의 주변엔 임산부가 많이 없었지만 많은 아내들이 임신 후 남편을 괴롭힌다고 들은 적이 있었다. 하지만 한현진에겐 모든 임신의 호르몬 변화가 거짓말처럼 전혀 작용하지 않았다. 의사는 사람마다 체질이 다르기 때문에 어떤 사람은 큰 반응 없이 잘 먹고 잘 지내기도 한다고 말했다. 의사는 강한서에게 너무 걱정하지 말라며 시간이 날 때마다 산책을 자주 다니며 좋은 컨디션을 유지하면서 주기적으로 검사를 받으면 된다고 했다. 한현진은 정서적으로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심지어 조금 유치해지기도 했다. 바로 지금처럼 말이다. 한현진은 강한서의 팔을 끌며 굳이 아이들의 흔들 목마에게 타게 해달라며 떼를 썼다.
한현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안녕하세요, 채영 언니.”문채영이 가방에서 포장한 선물 박스를 건넸다. “첫 만남이라 어떤 선물을 준비하면 좋을지 몰라 제가 직접 향낭을 만들었어요. 향 맡아봐요.”한현진이 조금 의외라는 듯 말했다. “언니도 조향하세요?”문채영이 미소 지었다. “제가 조향에 입문하게 된 것도 민준이 덕분이었어요. 전엔 이런 거 만드는 거 좋아했었거든요.”한현진은 다시 한 번 충격에 휩싸였다. 그녀는 조향하는 송민준의 모습을 본 적이 없었다. 줄곧 송민준은 그쪽으론 취미가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송민준은 그 얘기를 꺼내는 것이 불쾌한 듯 담담하게 말했다. “주문부터 해. 배고파.”멈칫하던 문채영이 시선을 내려 눈에 맴도는 서운함을 숨겼다. 한현진이 얼른 화제를 돌렸다. “언니, 오랜만에 오셨을 텐데 오늘은 한주 음식으로 드시는 게 어때요?”문채영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좋아요. 현진 씨가 먹고 싶은 거로 주문해요.”주문한 음식 서빙을 마치고 룸을 나서려는 종업원에게 송민준이 갑자기 말했다. “장어 국수도 주문할게요.”문채영이 힐끗 송민준을 쳐다보자 시선을 올린 그가 마치 변명이라도 하듯 말했다. “환영회에 국수가 빠질 수 없지.”‘그래, 환영회에 국수가 빠질 수 없다고 하는 건 그렇다고 쳐. 하지만 하고 많은 국수 중에 왜 하필 장어 국수야?’‘오빠가 장어 국수라고 말할 때 언니 표정을 보면 설마 두 사람 사이에 장어 국수와 관련된 스토리가 있었던 건가?’호기심이 활활 불타오른 한현진이 몰래 테이블 아래로 강한서의 손을 꼬집었다. 그러자 강한서는 그녀에게 새우를 발라 주었다. 한현진: ...강한서과 문채영은 너무 친한 사이였다. 두 사람의 대화에서 한현진은 문채영의 외할머니와 강한서의 할머니가 먼 친척 사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하지만 워낙 촌수가 먼 사이라 피가 거의 섞이지 않은 가족이라고 할 수 있었다. 두 사람은 알고 지낸지 한참 후에야 두 가문이 몇 세대 전에는 친척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한현진이 고개를 들자 옆에 서 있는 벤틀리가 보였다. 송민준이 운전석에 앉아 두 사람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들의 차창은 닫혀 있었으니 송민준은 당연히 아무것도 볼 수 없었지만 강한서의 차라는 것은 알고 있었다. 차를 세운지 한참이 지나도 두 사람이 모습을 보이지 않자 송민준은 강한서가 또 이상한 수작을 부리고 있는 것이라 생각했다. 송민준의 목소리를 들은 강한서가 한현진의 손을 놓고 그녀의 옷을 정리하며 단정하게 자리에 앉았다. 민경하는 은연 중에 자신의 미래를 보고 있는 것만 같았다. 차에서 내린 송민준은 카키색의 캐주얼한 외투에 검정색 바지를 입고 있었다. 머리는 평소 한열이 자주하던 헤어스타일과 비슷했고 선글라스를 콧등에 걸친 채 입술을 앙다물고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넓은 어깨에 긴 다리의 그가 우뚝 서 있으니 카리스마와 매력이 흘러넘쳤다. 전엔 그가 한열과 닮았다는 생각을 하지 못했었는데 이런 차림에 선글라스까지 쓴 모습을 보니 만약 모르는 사람이 봤다면 아마 그를 한열로 착각할 것도 같았다. 닮아도 너무 닮았다. 차에서 내린 한현진이 가방을 메고 송민준을 향해 걸어갔다. “오빠, 오늘 왜 이렇게 멋져요?”송민준이 입꼬리를 씩 올렸다. “내가 언제 안 멋진 적이 있었어?”한현진이 눈웃음 지으며 말했다. “어떤 날이든 멋지긴 하죠. 그래서 언제 데뷔할 생각이요?”송민준이 한현진의 가방을 건네받으며 장난스레 말했다. “난 열이와 캐릭터가 너무 비슷해. 내가 데뷔하면 연예계에 걔 자리가 있긴 할 것 같아?”한현진이 웃음을 터뜨렸다. 송민준은 손을 들어 검지로 콧등에 걸린 선글라스를 아래로 내렸다. 그는 미간을 찌푸리고 강한서가 있는 쪽을 바라봤다. “쟨 차에서 뭐하는 거야?”“업무 통화 중이예요.”송민준이 한현진의 가방을 어깨에 걸치고 한현진을 잡아당기며 말했다. “가자. 우린 먼저 올라가는 게 좋겠어. 혼자 미적거리라고 해.”룸에 도착하자 송민준은 그제야 물었다. “너희 두 사람, 대체 무슨 중요한 얘기를 하려고 이렇
한현진이 장난기 가득한 말투로 말했다. 강한서가 씩 웃으며 대답했다. “마음 약해질 줄 알았는데, 내가 괜한 걱정을 했나 봐.”한현진이 말했다. “처음엔 마음이 약해졌는데 조금 전 불쾌한 일이 있었거든.”한현진은 간단하게 주혁이 무릎 꿇은 일을 서술했다. “난 사실 그렇게까지 화가 난 건 아니었어. 하지만 꿇어앉아 있는 기사님 모습을 본 순간 화가 치밀더라고. 그렇게 많은 사람이 보는 앞에서 그러니까 날 강박하는 것 같았거든. 그래서 그 기회를 빌려 바로 전근시켰어.”한현진이 한숨을 내쉬었다. “사실 오는 길에 계속 마음이 불편했어. 내가 너무 극단적으로 처리한 건 아닌가 싶었거든. 기사님은 지금 아들에게 인공 달팽이관을 해줄 돈이 부족한 상황이거든. 전근하면 월급은 당연히 전보다 줄어들 텐데.”강한서가 한현진의 손등을 토닥였다.“인공 달팽이관은 보청기와 비슷한 거야. 생명과 직결된 문제도 아니니 돈이 부족하다고 해도 당장 급할 건 없어. 하지만 굳이 너를 속여 가며 부업을 하려고 했어. 난 그 부분이 도무지 이해가 되질 않아.”멈칫한 한현진이 나지막이 물었다. “기사님이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거야?”강한서가 고개를 가로 저었다. “그건 모르지. 하지만 시도 때도 없이 무릎을 꿇고 자존심 따위는 쉽게 버릴 수 있는 사람이라면 그 사람이 원하는 건 자신의 존엄보다 훨씬 더 소중한 걸 거야. 전근이 제일 좋은 선택이었어. 네가 그 사람을 곁에 두는 건 내가 불안해.”강한서는 한현진의 손을 잡으며 나긋한 목소리로 말했다. “마음 약해지지 마. 네가 마음 약해질 때마다 난 심장이 떨려.”“휴. 신세를 지기도 했고 기사님 집에는 장애인이 두 명이나 있잖아. 안타까워서 그러지. 내가 언제 다른 사람에게 마음이 약해지는거 봤어? 난 아주 독한 사람이라고.”강한서는 곧바로 태클을 걸었다. “강운이에겐 마음 약하게 굴었잖아.”지나간 이야기를 꺼내려는 강한서의 태도에 한현진이 얼른 입을 열었다. “그건 내가 불쌍해 보이는 주 변호사님 외모
한현진이 민경하를 살펴보았다. “그래 보이지는 않는데. 얼마 전 야근 때문에 피곤해서 그런 거 아냐? 신제품 발표회도 마무리 됐으니 이젠 좀 쉬게 해줘야지. 민 실장님이 쓰러지면 나중에 너만 고생할 거야.”강한서가 한현진에게 텀블러를 건넸다. “내가 부하 직원 생사도 나 몰라라 하는 그런 대표 같아? 민 실장이 쉬고 싶다고 하면 언제든지 휴가 줄 거야.”그 말에 민경하가 재빨리 대답했다. “괜찮아요, 사모님. 저 건강해요. 휴가 필요 없어요.”만약 평소였다면 휴가를 주겠다는 강한서의 말에 당연히 쉬겠다고 대답했을 것이다. 하지만 조금 전 그 상황을 겪고 나니 지금의 민경하는 감히 그럴 수가 없었다. 오늘 민경하가 강민서와 밤낚시를 약속했다는 것을 알게 된 강한서는 한현진과 통화할 때까지만 해도 그리 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전화를 끊고 얼마나 갔을까, 강한서가 입을 열었다. “밤낚시... 몇 명이 가는 거예요?”민경하가 말했다. “밤낚시 모임이 있어요. 아마 20명 정도 있을 거예요. 다들 스케줄에 따라 다르겠지만 많을 땐 8명에서 10명 정도 모여요. 적을 땐 4, 5명이 만날 때도 있고요.”“그래요.”단답으로 대답한 강한서는 또 얼마 지나지 않아 민경하에게 물었다. “밤새 낚시하면 피고하지 않아요?”민경하가 말했다. “텐트가 있어서 피곤하면 들어가서 쉬면 돼요.”강한서가 또 다시 “그래요”라며 단답으로 대답했다. 하지만 얼마 못 가 그가 또 물었다. “두 사람... 같은 텐트에서 자요?”“...”그 질문에 민경하는 바짝 긴장했다. 어쩐지 그 어떤 대답도 목숨을 걸기에 충분한 것 같았다. “4, 5명이면 텐트 2개를 사용해요. 피곤한 사람끼리 돌아가면서 쉬고요.”강한서는 더는 말이 없었다. 5분 후. “두 사람 같이 쉰 적 있어요?”“...”‘같이 잤냐고 묻는 일만 남았네.’민경하가 식은땀을 삐질 흘렸다. “누워서 얘기만 좀 나눴어요.”“그래요.”10분 후. “얘기만 조금 나눈게 전부예요?”민
남자는 들고 있던 담배를 다 태울 때까지 아무 말이 없었다. 서해금이 또 말을 이었다. “당신이 뿌리를 제대로 뽑지 못해 이렇게 큰 후환을 남기지만 않았다면 우리 가람이 처지도 지금처럼 어렵진 않았을 거야.”서해금이 말한 후환은 당연히 한현진을 가리키는 것이었다. 한현진 말이 나오자 남자의 얼굴이 저도 모르게 어두워졌다.그 여자 아이가 죽지 않았다는 일은 그 역시도 송씨 가문에서 한현진을 데려오기 얼마 전에야 알게 되었다.당시 그 여자가 품에 안아 보여주던 여자 아이는 애초부터 송씨 가문의 딸이 아니었다. 그 여자는 다른 곳에서 죽은 아이를 안아와 한아람의 딸이라고 그를 속였던 것이다.친딸이 태어나는 모습도 두 눈으로 직접 보지 못한 그는 곧 자신의 친딸에게 인생을 빼앗길 아이를 마주했다. 그 이루 말할 수 없는 죄책감에 그는 심지어 아이를 똑바로 쳐다볼 수도 없었다. 그는 그저 아이의 죽음을 확인하기만 하면 목적을 달성했다고 생각했다. 포섭당한 사람 중 누군가가 마음이 약해졌다는 사실도 모른 채 말이다. 한현진이 죽지 않았으니 송씨 가문이나 한씨 가문에서는 기필코 당시 분만실에서 있었던 일을 밝히려고 할 것이 분명했다. 다행히 서해금은 일처리를 함에 있어서 화근을 남기지 않는 스타일이었다. 당시 그 일에 연루되어 있는 사람들은 이미 전부 죽거나 도망간 상태였기에 아무리 쥐 잡듯이 뒤져도 그 해의 진실은 알아내 수 없을 것이었다. “내가 뭐 도와줄까?”남자가 나지막이 물었다. “아니.”서해금이 담담한 말투로 말했다. “한현진은 그렇게 멍청하지 않아. 쓸데없는 짓해서 괜한 의심 사지 마. 걔는 걔 엄마랑 똑같아. 의리가 치명적인 약점이거든. 잠깐만 조용히 지내.”잠시 멈칫하던 서해금이 말을 이었다. “앞으로 내 지시 없이 함부로 회사에 나타나지 마. 회사는 여기저기 보는 눈이 많아. 조그만 실수라도 있었다간 우리 가족 전부 끝장이라고.”우리 가족이라는 두 단어에 남자는 그만 멍해졌다. 그의 눈빛이 미래에 대한 희망으로 반짝였다. 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