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가람이 미간을 찌푸렸다. “무슨 말이에요? 전 꽃을 배달시킨 적이 없는데요.”“전화번호 끝자리가 8286인 남성분이 주문하셨어요. 꼭 직접 꽃을 받게 해달라고 부탁하셨는데, 내려오실 수 있으세요?”익숙한 전화번호 뒷자리에 송가람이 멈칫했다. ‘8286이면, 한서 오빠 전화번호잖아.’송가람이 벌떡 몸을 일으켰다. “잠깐만 기다려요. 지금 바로 내려갈게요.”로비.배달원이 커다란 장미꽃다발을 들고 프론트에 서 있었다. 로비를 오고가는 사람들은 참지 못하고 힐끔힐끔 배달원 손에 들린 꽃다발을 쳐다보더니 곧 고개를 돌려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회사로 꽃이 배달되는 것은 드라마에서나 많이 볼 수 있는 장면이지 현실에선 흔한 광경이 아니었다. 그러니 다들 꽃다발의 주인이 누군지 호기심에 가득 차 있었다. 잠시 후,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더니 송가람이 성큼성큼 프론트 쪽으로 걸어갔다. 본인 확인을 마친 배달원이 송가람에게 사인을 부탁하고 나서야 꽃다발을 전해주었다. 꽃다발을 받아든 송가람이 얼굴을 붉히며 물었다. “죄송한데 꽃을 주문한 남성분이 또 다른 말은 없었나요?”배달원이 고개를 가로 저으며 말했다. “사장님께 카드도 써달라고 부탁했어요. 카드는 꽃다발 속에 있어요.”송가람이 손을 뻗어 꽃을 뒤지자 그 안에는 예쁜 빨간색 카드가 들어있었다. 프론트에 있던 직원이 빙그레 미소 지으며 물었다. “가람 씨, 남자친구가 보내 준 거예요?”송가람이 붉게 물든 얼굴로 카드를 다시 꽃다발 속으로 넣으며 나지막이 대답했다. “아뇨, 친구가요.”그녀의 말에 다들 알겠다는 듯 말했다. “아, 가람 씨 짝사랑하시는 분이 보내신 거구나.”씩 미소 지은 송가람은 그들의 말을 부정하지 않고 꽃다발을 안은 채 사무실로 올라갔다. 사무실로 향하는 길에 송가람은 적지 않은 동료들과 마주쳤다. 곧, 송가람을 좋아하는 남자가 그녀에게 꽃을 선물했다는 소식이 회사 전체에 전해져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 송가람은 그런 소문이 퍼지는 것을 막지 않았다. 비록 입
강한서가 흥, 콧방귀를 뀌었다. [보름에 할아버님 댁에 있었을 때, 네 휴대폰에 있던 그 추석 인사는 누가 보낸 거야? 누가 보낸 건데 한 밤중에 그렇게 빤히 쳐다보고 있었던 건데?]멈칫하던 한현진이 그날의 기억을 떠올렸다. 그날 밤 잠에 들기 전 그녀는 주강운이 보낸 명절 축하 인사를 받았다. 당시 그녀는 문자를 보며 토끼 키링의 일을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니 그렇게 오랫동안 멍하니 있었던 것이다. [너 그때 잠든 거 아니었어?][내가 잠들었는지 아닌지는 신경 쓰지 말고. 내가 묻잖아. 앞으로 걔 문자는 내가 너 대신 답장할게. 그래도 돼?]한현진은 전혀 개의치 않아하며 말했다. [네가 하고 싶으면 해. 난 청렴결백해서 무서울 것도 없어.]원하는 대답을 들은 강한서는 순간 한현진에게 이용 당했다는 사실도 더 이상 신경 쓰이지 않았다. 심지어 그는 겸허한 태도로 한현진에게 조언을 구하기까지 했다. [그래서 송가람에게는 내가 뭐라고 답장하면 되는 건데?][답장할 거 없어. 앞으론 내가 옆에 없을 땐 송가람이 뭘 보내든 답장하지 마. 어차피 자기가 알아서 상상의 나래를 펼칠 거야.][...]강한서와 문자를 주고받는 한현진의 앞으로 송가람이 식판을 들고 와 맞은편에 자리잡고 앉았다. 고개를 들어 송가람을 마주 본 한현진은 조용히 대화창을 껐다. 송가람이 웃음기 가득한 말투로 입을 열었다. “현진 씨, 밥은 먹을 만해요? 만약 입에 안 맞으면 사무실 아래에 있는 식당도 맛있어요. 먹고 싶은 게 있으면 제가 사오라고 할게요.”멈칫하던 한현진이 미소 지으며 예의상 대답했다. “괜찮아요. 이것도 충분히 맛있어요.”송가람이 젓가락을 닦으며 무심코 흘리는 말인 듯 얘기했다. “현진 씨, 제 사무실에 꽃이 좀 있는데, 조금 이따 와서 몇 송이 좀 가져가서 사무실 꽃병에 꽂아요. 바쁠 한 번씩 보면 기분이 좋아지거든요.”‘낚였다.’한현진이 고개를 들어 웃으며 물었다. “좋아요. 무슨 꽃인데요?”송가람이 입을 열기도 전에 옆 테이블에 앉은
연기에 너무 몰입한 나머지 점심도 배불리 먹지 못한 한현진은 사무실에 앉아 강한서가 준비해준 산모 간식을 먹고 있었다. 그녀는 입을 오물거리며 성월이 가져 온 깔린느 각 부서의 자료를 살펴보았다. 센트가 깔린느로 이름을 바꾼 후 회사의 규모는 점자 확대되었다. 핵심 팀원들도 서해금에 의해 물갈이 되었다. 대대적인 구조조정에서 살아남은 몇 명 안 되는 초창기 멤버는 아마 서해금 본인의 사람이었을 것이다. 그 사이에 틈을 만들려면 아무래도 자기 사람을 올려 보내야 했다. 송민준이 데려올 그 여자 아이가 기대에 부응할 수 있을 지는 알 수 없었다. 02년생이라, 너무 어린 나이였다. 웅, 휴대폰 진동이 울렸다. 순조로운 첫 출근이냐며 묻는 차미주의 문자였다. 한현진은 휴대폰을 치켜든 한현진은 사무실을 빙 돌며 파라노마 모드로 사진을 찍은 후 차미주에게 전송했다. [완전 크지!]차미주: [!!! 커! 비서 부족하지 않아? 내가 면접 보러 갈게!]한현진이 살풋 웃음을 지었다. [한 대표가 비서로 있어주면 월급으로 1000만 원을 준다고 해도 싫다고 했던 애가 내가 줄 월급이 마음에 들기나 하겠어?][이건 달라. 한성우에게서 급여를 받는 건 왼쪽 주머니의 돈이 오른쪽으로 흘러가는 것과 같은 거잖아. 하지만 너에게서 받는 돈이야말로 정말 버는 거지. 얼마든 상관없어. 다른 건 모르겠고 복은 같이 누리고 힘든 건 네가 혼자 감내하는 거야.]차미주의 문자에 한현진은 어이가 없어 잠시 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좋은 건 늦게 배워도 나쁜 건 빨리도 배웠네. 너 지금 네가 말하는 꼴 좀 봐. 한성우 씨 그 조잔한 인간이랑 너무 비슷하지 않아?]한참 동안 웃음을 터뜨리던 차미주가 물었다.[이제 첫 출근인데 손가락 모녀가 네 뒤에서 이상한 짓거리는 하지 않았어?][서해금은 내가 멀리 보내버렸어. 그리고 송가람은... 무서워할 것도 없어.][어디로 보냈는데?]어제 있었던 일을 간략하게 설명하자 차미주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정말 대단한 애라니까. 아빠를
한현진이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그건 걔가 널 경찰서에 신고했던 게 미안해서 일부러 값을 많이 쳐준 거야.]차미주가 답장했다. [그때 그 사실을 알았을 땐 그까짓 돈 때문에 머리를 숙이고 싶진 않았는데. 지금 생각해 보니 두 시간 갇혀있는 대가로 2억이면 난 충분히 할 수 있어. 지금 돈 벌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넌 모를 거야. 최근 6개월 사이에 웹드라마 인기가 급상승하고 있어서 나 요즘 줄곧 그쪽 일 하고 있었다니까.][너무 인지도 있는 배우도 필요 없고 3일에서 5일 사이면 촬영이 끝나. 대본은 인터넷으로 모집하고 촬영 주기가 짧고 촬영 비용이 적게 들어. 최대 4000만 원에서 6000만 원이면 충분하거든. 하지만 한 작품만 성공시켜도 수십억을 벌어들일 수 있어. 수익이 충격적일 정도로 높다니까. 그러니 지금 우리 업계에서는 제작사마다 웹드라마 제작을 위한 팀을 하나씩은 꾸리고 있거든. 내가 불행하게도 그 팀으로 발령 났지. 매일 투고된 막장 대본을 읽고 있자니 머리가 다 터질 지경이야.]임신이라는 것을 알게 된 후로는 숏츠도 많이 보지 않게 된 한현진은 차미주가 말한 것들에 대해 잘 알 리가 없었다. 그녀는 차미주에게 무슨 웹드라마냐며 묻자 차미주가 사이트 하나를 보내주었다. 사이트로 들어가 한참을 보던 한현진의 머릿속에 아이디어 하나가 반짝하며 떠올랐다. 그녀는 다급하게 문자를 작성했다. [미주야, 나 대본 좀 써줄래?][뭐?]한현진이 말했다. [좀 이따 퇴근하면 너한테 갈게. 만나서 얘기해.]문자로 얘기하기엔 타자 속도가 너무 느렸고 할 말도 너무 많았다. 한현진이 순간 떠올린 아이디어는 바로 차미주에게 수십 년 전 송씨 가문의 일을 웹드라마로 제작하고 한현진이 돈을 써 그 웹드라마를 인기 차트에 올려 이슈화 만드는 것이었다. 만약 서해금의 공범이 있다면 당시 실제 사건과 비슷한 내용의 웹드라마가 인터넷에서 큰 인기를 얻고 있는 상황에 어쩌면 안절부절 할지도 모를 일이었다. 불안에 떨며 평정심을 잃는다면 덜미를 잡힐 수도 있었다.
송가람은 흰색 실크 소재의 셔츠를 입고 머리를 느슨하게 뒤로 땋아 내렸다. 진주 귀걸이는 그녀의 마른 몸매에 고급스러운 느낌을 더했다. 그녀의 뒤에 따라 붙은 두 사람은 두 손 가득 물건을 바리바리 싸들고 있었다. 포장을 보아하니 명품 화장품인 듯 했다. 쇼핑백의 개수로 보아 적은 양은 아니었다. 송가람이 다정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여러분, 바쁘신데 시간 뺏어서 죄송해요. 연휴가 끝난지 얼마 되지 않아 다들 바쁘셔서 사무실에 함께 모일 기회가 없었는데 오늘은 현진 씨 첫 출근이라 모처럼 모두 계시니 제가 여러분들을 위해 작은 선물을 준비했어요.”한현진이 생각했다. ‘작은 선물? 환심이나 사려는 거겠지. 어쩐지 주현 씨더러 날 여기까지 불러내더라니. 이걸 보여주려고 그런 거였네.’선물이라는 말에 사람들은 흥미를 보이며 하나둘 박수를 치기 시작했다. 사무실 분위기도 뜨거워졌다. 한현진은 송가람이 사온 선물을 슥 훑어보았다. 역시나 그녀의 생각대로 화장품과 향수였다. 너무 비싼 것도, 그렇다고 너무 싼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절대 사람들이 사지 못할 수준의 제품은 아니었다. 마음에 들든 아니든 사람은 선물을 사온 송가람의 성의를 생각해 감사의 인사를 전하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이 컬러는 전부 품절이라 살 수 없을 줄 알았는데. 고마워요, 팀장님.”“세상에, 불과 며칠 전에 이 파운데이션 리뷰를 봤었는데 이렇게 갑자기 선물로 받게 되다니. 팀장님, 센스가 너무 좋으세요.”“이 향수 진짜 좋아요. 저희 엄마가 계속 쓰시 거든요. 엄청 좋아하실 거예요.”“가람 씨, 무리하신 거 아녜요?”...송가람은 직원들의 인사에 일일이 대답해 주었다. 그녀는 심지어 웃으며 말했다. “별로 비싸지 않았어요. 저한텐 그다지 가치도 없는 물건일 뿐이에요. 친구가 가방 살 때 기다리면서 보다가 여러분들이 좋아하실 것 같아 그냥 샀어요.”그녀의 말에 직원들은 서로 얼굴을 마주보며 눈을 마주쳤다. 얼굴에 드리웠던 미소가 전보다 옅어졌지만 송가람은 전혀 눈
한현진이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별 거 아녜요. 올해가 유난히 춥잖아요. 보름이 지났는데도 아직도 날이 풀리지 않아서 몸을 따듯하게 해 줄 수 있는 걸 선물하면 어떨까 생각했었거든요. 평소에도 방한 용품으로 사용할 수 있고요.”‘방한 용품?’‘모자, 목도리, 장갑 아니면 무릎보호대인 건가?’방한이라는 두 글자에 사람들의 호기심은 절반으로 줄어들었다. 그런 물건들은 겨울이 다가오면 회사에서 늘 나누어주었었다. 그러지 도무지 기대가 되지 않았다. 게다가 한현진의 첫 출근 기념 발언을 떠올린 그들은 한현진을 그저 아무 생각도 없는 재벌 2세로 정도로 생각했다. ‘고작 저런 인간이 송가람 씨 모녀와 경영 다툼을 하겠다는 거야?’사람들의 눈빛을 보며 송가람이 씩 입꼬리를 올렸다. 그녀가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현진 씨, 이미 준비한 건데 차라리 지금 나눠줘요. 방한 용품이라 조금만 늦으면 아마 올해는 몇 번 사용하지도 못할 거예요.”주현도 송가람을 거들었다. “한 대표님이 고르신 건데, 방한 용품이라고는 해도 절대 평범한 건 아닐 거예요.”“한 대표님이 하고 계신 목도리도 예쁘잖아요. 혹시 전부 그 목도리로 준비하신 거예요?”“구찌 목도리요? 세상에. 진짜 그 목도리면 전 좋아서 미쳐 버릴 지도 몰라요. 한 대표님, 뜸 들이지 마시고 얼른 공개해주세요. 너무 기대돼요.”사람들은 서로 눈빛을 교환하며 한마디씩 주고받았다. 그들은 한현진을 높이 띄워주고 있었다. 미소를 짓고 있는 송가람의 눈가에는 비웃음이 서려있었다. 한현진이 준비한 물건이 직원들의 기대에 미치지 못한다면 뻘쭘한 상황이 펼쳐질 것이 분명했다. 송가람 혼자 조향팀을 마주해야 했기에 서해금은 이미 여러 사람들에게 언질을 해둔 상황이었다. 그덕에 송가람은 조향팀에서 자리 잡을 수 있었다. 깔린느에는 똑똑한 사람으로 가득했다. 절대 공략하기 쉬운 곳이 아니라는 뜻이었다. ‘창피도 좀 겪어봐야지. 고작 창립자의 딸이라는 신분만으로 깔린느에서 주인 행세를 할 수 있다고 생각했어?’
누군가 기다리지 못하고 물었다.“한 대표님, 이게 무슨 상황이에요?”한현진이 앞으로 나서며 난감하다는 듯 말했다. “방금 말했잖아요. 날이 추워져서 여러분께 몸을 따뜻하게 해 줄 수 있는 물건으로 준비했다고요.”“아니, 방금 통일된 물건을 준비하셨다고 하셨는데 전혀 같은 제품들이 아닌데요. 전부 다른 디자인이잖아요.”한현진이 말했다. “전부 같은 거예요. 제가 여러분들 옷 사이즈를 모르잖아요. 이제 첫 만남이라 직접 물어보기도 실례인 것 같고 그래서 전부 S사이즈로 구매했어요. 오늘 출근하고 보니까 몇 명은 저와 몸매가 비슷하신 것 같아서 몇 개는 M 사이즈로 바꾸려고 했었거든요. 하지만 가람 언니가 계속 오늘 주라고 하시고 또 여러분들도 기대를 하시는 것 같아서 가져올 수밖에 없었어요.”말하며 한현진은 옷의 재질을 매만지며 말했다. “이 옷들 보기에 두꺼운 것 같아도 입으면 보온성이 꽤 좋은 편이예요. 입기에도 편하고요. 가람 언니도 평소 이 브랜드의 옷을 좋아해서 같은 또래라 안목도 비슷할 것 같아 준비해 봤어요.”주현의 입 꼬리가 부들거렸다. 통일했다는 의미가 같은 사이즈로 구매했다는 뜻이었다니.‘일부러 아무 것도 모르는 척 연기하는 거 아냐?’주현이 고개를 돌려 송가람을 쳐다보았다. 송가람의 표정은 흉악스러워 보인다고 표현할 수 있을 정도로 일그러져 있었다. 물론 주현은 송가람이 왜 저토록 화를 내는지 알 리가 없었다. 하지만 송가람에게 눈앞의 광경은 화를 낼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지금 옷걸이에 걸린 모든 옷은 그녀가 한현진을 농락하기 위해 선물했던 옷이었기 때문이었다. 전부 한현진은 입을 수 없는 사이즈의 옷이었다. 송가람은 한현진이 그 옷들을 전부 가져와 깔린느의 직원들에게 선물로 주며 마음을 살 것이라고는 꿈에도 생각해 본 적 없었다. ‘말은 또 왜 저렇게 거창하게 하는 거야. 어떻게 저렇게 뻔뻔할 수가 있어.’사람들은 한현진이 아무 것도 모르는 척 연기를 하든 말든 신경 쓰지 않았다. 명품 브랜드의 옷은 한 벌당
한현진은 비록 미소를 짓고 있었지만 시선을 주위를 슥 훑어보았다. A구역 1팀의 팀원은 단 한 명도 없었다. 다른 팀의 팀원들 역시 몇 명만 보였고 오지 않은 사람도 있었다. 옷을 가지는 사람과 가지지 않는 사람은 비례는 대략 3:7 정도였다. 역시나 서해금은 깔린느에 깊이 뿌리박고 있는 듯 했다. 조향팀의 절반 이상이 모두 그녀의 사람이었다. 생각에 잠겨 있던 한현진은 갑자기 입구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곳엔 자료를 전달하러 온 젊은 여자가 서 있었다. 그녀는 고개를 내밀고 이쪽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한현진이 그녀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이쪽으로 와서 같이 골라요.”멈칫하던 젊은 여자가 얼른 입을 열었다. “한 대표님, 전 조향팀 팀원이 아니에요.”한현진은 여자의 목에 걸린 사원증을 슥 훑었다. 재무팀 은서하. 어린 나이로 보아 이제 졸업한지 얼마 되지 않는 신입인 것 같았다. 고개를 든 한현진이 웃으며 말했다. “본 사람 몫도 있어요. 지금 있을 때 얼른 줄 서요. 공짜잖아요.”은서하가 눈을 반짝였다. 그녀는 빨갛게 달아오른 귓불을 한 채 고맙다고 인사하더니 곧 줄을 서러 달려갔다. 은서하를 빤히 쳐다보는 송가람의 눈에는 불이 뿜어져 나올 것 같았다. 그녀는 굳은 얼굴로 주먹을 꽉 움켜쥐고 한현진 앞으로 다가갔다. “현진 씨가 팀원들을 위해 심사숙고해서 고른 옷들이 제가 전에 현진 씨에게 선물해줬던 옷과 같은 것 같네요. 혹시 제가 준 옷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 다시 다른 사람에게 선물하는 거예요?”그 말에 사람들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러니까 이게 지금 한현진이 안 입는 옷이라는 거야?’한현진은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웃음을 머금고 송가람을 바라보며 말했다. “가람 언니가 선물한 옷을 제가 어떻게 다른 사람에게 주겠어요.”송가람 역시 웃으며 말했다. “제가 기억력이 나쁜 편도 아니고, 전부 제가 고른 옷인데 설마 모르겠어요. 구매 지출 내역도 아직 제 휴대폰에 기록되어 있는 걸요.”한현진이 고개를 들어 송가람과 눈을
식사 자리가 마무리된 후 홍혜림을 배웅하러 나온 서해금의 뒤를 오성빈이 따라나서며 나지막이 물었다. “서 대표님이 말씀하신대로 했으니 약속하신 건...”“걱정마세요.”서해금이 시선을 거두며 옅은 미소를 지었다. “일만 잘 마무리 되면 약속드린 건 꼭 지켜드리죠.”“그럼 최대한 빨리 해결하도록 할게요. 질질 끌어봐야 좋을게 없으니까요.”“부탁드려요.”고개를 끄덕인 서해금이 성월에게 눈짓을 보냈다. 그러자 서해금의 뜻을 바로 알아들은 성월이 곧바로 오성빈을 배웅했다. 사실 학교에서는 진윤의 부정행위에 관해 아무런 결론도 내린 것이 없었다. 여론은 여전히 뜨겁기만 했다. 하지만 그런 때일수록 여론에 흔들리지 말아야 했다. 만약 조사 결과에 조금이라도 문제가 생긴다면 그 여론은 오히려 학교에 독이 될 수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오성빈은 학교 임원의 압박에도 불구하고 며칠 동안이나 홍혜림의 연락을 무시했다. 물론 그 역시도 최대한 빨리 이 일을 마무리하고 싶었다. 진윤이 부정행위를 저질렀다는 증거는 전혀 찾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오성빈이 모든 증거 수집을 마치고 드디어 진윤의 누명을 벗겨주는 쇼를 하려던 그때, 경찰이 갑자기 학교로 찾아왔다. 진수 그룹에서 진윤의 시험 부정행위 문제로 경찰에 신고를 한 탓이었다. 교장의 연락을 받은 오성빈은 그만 멍해졌다. 제일 먼저 서해금이 떠올랐지만 그녀가 약속했던 일을 떠올린 그는 곧 주먹을 꽉 움켜쥐고 서해금에게 연락하고 싶은 충동을 꾹 참으며 홍혜림의 연락처를 눌렀다. 홍혜림이 전화를 받자마자 오성빈이 물었다. “사모님, 어제 분명 진윤 학생 일은 잘 처리해 드리겠다고 말씀 드렸잖아요. 왜 신고를 하신 거예요?”홍혜림이 놀란 말투로 말했다. “신고라뇨? 전 신고한 적 없어요.”“사모님이 신고하신 게 아니라고요?”의아한 듯 묻는 오성 빈에게 홍혜림이 대답했다. “전 신고한 적 없어요. 교수님께서 이미 윤이가 부정행위를 하지 않았다는 증거를 찾으셨다면서 조치를 취하시겠다고 말씀하셨잖아요. 그래서 계속
장준의 아버지는 요직을 맡고 있었고 장씨 가문엔 그의 아버지를 제외하고도 수많은 정치인들이 있었다. 그랬기에 가족 중 단 한명이라도 꼬리를 밟힌다면 그의 가문은 수습 불가능한 상황으로 치닫기도 했다. 장준이 저질렀던 인간 같지도 않은 일들이 하나하나 밝혀지기 시작했다. 폭행, 음주 운전, 도박, 성폭행...피해자들이 하나둘 인터넷에 장준의 진짜 모습을 폭로했다. 수많은 피해자의 목소리를 누를 수 없었던 장씨 가문의 스캔들이 결국 전부 드러나고 말았다. 홍혜림 역시 그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그녀는 곧 회사 계정으로 진윤은 그날 운전을 하지 않았다는 입장을 발표와 함께 그와 관련된 증거들과 범죄경력증명서를 전부 공개 했다. [그러니까 진윤은 또 다른 도련님의 기사를 막기 위해 총알받이가 됐다는 거네?][어쩐지 뭔가 이상하더라니.][그렇게 심각한 교통사고에 진윤 한 사람만 공개 처형하는 것이 이상하다고 생각했어요. 역시 여론을 부추기는 사람이 있었다는 거네요.][발 빼려고 하지 마. 장준이 주범이었다고 하더라도 진윤이 그 경기와 아무런 관련도 없는 건 아니잖아. 끼리끼리는 과학이라고 했는데 그놈이 그놈 아니겠어? 서화 대학에서도 진윤의 재시험 부정행위를 인정 했잖아.][학교엔 이미 소문을 파다해요. 이번 일과는 관련이 없다고 해도 언젠가는 비슷한 사고를 쳤을 거예요. 장준이나 진윤이나 크게 다를 거 없잖아요.][저기요. 두 사람을 싸잡아 욕 하지는 마요. 한 명은 범죄자고 다른 한 명은 그저 인성에 문제가 있는 것뿐이에요. 그게 어떻게 같아요? 얼른 진상 규명이나 하시죠. 피해자에게 피해 보상은 해야 하잖아요.]...휴대폰을 한 쪽으로 던져버린 서해금이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장준이었어? 어쩐지...”성월이 그녀에게 차를 건네며 나지막이 물었다. “대표님, 진윤 씨 일은 이미 어느 정도 해결이 된 것 같아요. 그럼 저희 계획은 어떻게 해요?”“아직 끝나지 않았어요.”서해금이 찻잔을 들어 올리며 덤덤하게 말했다. “홍혜림은 누구보다
장씨 가문 아들이라는 이유로 여론이 들끓는 것을 염려한 탓인지 기사는 간단한 몇 마디 말로 상황을 간결하게 보도했다. 하지만 한현진은 감추려고 할수록 일은 점점 더 커질 것이라 생각했다. 드디어 주강운이 손을 쓴 모양이었다.고개를 들어 강한서를 바라보는 한현진의 눈이 별처럼 반짝였다.“여보, 장준이 잡힌 것 같아.”강한서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누가 그래?”한현진은 의미심장한 표정을 지으며 강한서에게 한성우가 보낸 기사를 보여주었다. “시간, 교통사고, 장 모 씨, 약물. 이 단어들만 봐도 누군지 뻔하잖아.”강한서가 놀랍다는 듯 말했다. “장 모 씨가 정말 장준이야? 어떻게 잡힌 거지? 누가 신고라도 한 건가.”“나쁜 짓을 그렇게 많이 했으니 벌을 받는 거지. 피해가 한두 명이면 집안 세력으로 어떻게든 막을 수 있겠지만 그 수많은 피해자를 전부 막을 수는 없잖아?”강한서가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기사에 다른 얘기는 없어?”“없어. 그냥 언급만 한 수준이야. 하지만 이 기사를 시작으로 진실을 밝혀 나가려는 사람은 분명 있을 거야. 그건 우리가 상관할 일이 아니지.”한현진이 나지막이 말했다. “장준과 관련된 기사가 퍼져 나가기 시작하면 사모님께 이 기회를 빌려 진윤 씨에 관련한 입장 발표를 하시라고 말씀 드려.”강한서가 고개를 끄덕였다. “내일 아침 연락드릴게.”강한서는 이상할 정도 순순히 대답했다. 예전이라면 어떻게 된 일이냐며 꼬치꼬치 캐 물었을 것이 분명했다. 지금처럼 쉽게 넘어갈 리가 없었다.자신을 빤히 바라보는 한현진의 시선에 강한서가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가 다정한 목소리로 한현진에게 물었다.“왜?”하지만 한현진은 곧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아무것도 아니야. 산책 가자.”강한서가 고개를 끄덕였다. “옷 가지고 올게.”강한서의 뒷모습을 지긋이 바라보던 한현진이 휴대폰을 들어 한성우에게 문자를 보냈다. [오늘 강한서가 좀 이상해요. 평소엔 꼬치꼬치 따지더니 오늘은 기사를 보여줘도 아무것도
멈칫한 강한서가 입술을 짓이겼다. “누가 어딜 들어갔다고?”강한서의 목소리에 수화기 너머의 사람은 순간 조용해졌다. 그러더니 곧 어색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한서야, 야근 안 했어? 오늘은 일찍 퇴근했네.”강한서는 화제를 돌리는 한성우의 말에 전혀 동요하지 않은 채 다시 물었다. “방금 누가 어딜 들어갔다고?”“방금 내가 뭐라고 했어?”한성우가 모른 척 대답했다. “갑자기 네가 튀어나오는 탓에 다 잊어버렸잖아.”강한서가 말했다. “강운이가 장준을 처넣었다며.”한성우: ...후회 막심한 얼굴로 자신의 입을 툭 친 한성우가 웃으며 대답했다. “어, 맞아. 바로 그거야. 나도 방금 어디서 그 소식을 듣고 형수님과 수다나 떨려고 전화한 거야. 너도 알잖아. 형수님과 내가 뒷담화 할 땐 죽이 척척 맞는 거.”“그래?”강한서가 담담한 말투로 말을 이었다. “난 두 사람이 나한테 뭔가 숨기는 게 있는 줄 알았지.”“그럴 리가 있겠어?” 한성우가 당당하게 말했다. “우리가 널 속일 수는 있고? 두 사람 요즘 진윤 씨 일 때문에 걱정이 많잖아. 그래서 나도 신경 좀 썼지. 봐, 소식을 듣고는 바로 알려 주려고 전화했잖아.”“그래.”강한서의 대답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던 한성우의 귓가로 곧 다시 강한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현진이가 강운이한테 뭐라고 했는데?”한성우: ...한성우가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 “뭐? 형수님이 강운이와 연락했어?”잠시 침묵하던 강한서가 다시 입을 열었다. “너한테 전해달라고 한 말이 뭐냐고.”의심이 아닌 확신에 찬 말투에 한성우는 머리가 찌릿, 할 정도로 소름이 돋았다. ‘조금만 참았다가 나중에 전화할 것이지, 난 왜 하필 지금 한 거야?’어차피 한강서가 전부 눈치 챈 마당에 더는 숨길 필요가 없어진 한성우는 결국 모든 것을 털어놓았다. “형수님이 너한테 숨겼다고 뭐라고 하지 마. 형수님이 강운이에게 연락한 게 아냐. 나한테 눈치를 주라고 부탁하셨어. 강운이네는 줄곧 장씨 가문과 사이가 안 좋았잖아
“실망이라니. 엄마는 단 한 번도 널 창피하게 여긴 적 없어. 넌 엄마가 배 아파 낳은 내 자식이야. 내가 널 몰라? 엄마는 그냥 네가 이번 일 때문에 힘들어 할까봐 그래. 엄마는 네가 행복했으면 좋겠어.”“요즘 네가 말도 없고 조용하기만 해서 우리가 얼마나 걱정했는지 알아?”진윤의 등을 어루만지며 홍혜림이 나지막이 말했다. “이런 일은 아무것도 아니야. 인생 살면서 이런 일 안 겪는 사람은 없어. 이겨내면 돼.”고개를 끄덕인 진윤이 홍혜림을 꽉 끌어안았다. ...아름드리.“그러니까 아주머니가 뒤에서 여론몰이에 동조했다는 거야?”한현진이 자몽을 까며 강한서에게 말하자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너무 절묘한 타이밍에 나타나서 알아봤더니 오성빈 교수라는 사람, 성 비서님의 먼 친척이시더라고. 그러니까 그분이 나서서 얘기만 해주면 잘 해결될 가능성이 높아.”잠시 생각하던 한현진이 말했다. “그래서 일부러 홍혜림 씨가 신세를 질 수밖에 없게 만드시겠다? 홍혜림 씨를 다시 뺏어가려는 거야?”“그럴 수도 있지만 그게 전부는 아닌 것 같아.”한현진이 눈을 반짝이며 강한서 곁으로 다가갔다. 꿍꿍이 가득한 얼굴로 한현진이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그럼 우리는 그걸 지켜보면 되겠네. 본인 계획대로 흘러가고 있다고 착각하게 만든 다음대체 뭘 하려는 생각인지 지켜보자고.”강한서가 어쩐지 음흉한 미소를 지으며 한현진을 쳐다보았다. 그 표정에 어리둥절해진 한현진이 물었다. “왜 그렇게 웃어? 뭐야, 그 음흉한 웃음은.”강한서가 나지막이 대답했다. “근묵자흑이라는 단어가 너무 맞는 말인 것 같아서.”한현진: ?“설명 똑바로 해. 누가 그 묵인데?”강한서는 씩 웃으며 한현진의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한현진이 깐 자몽을 가져가 한 입 베어 문 강한서의 표정이 곧 강한 신맛에 잔뜩 일그러졌다. 자몽을 겨우 삼킨 강한서가 인상을 찌푸린 채 믿을 수 없다는 듯 말했다. “넌 이걸 대체 어떻게 아무렇지 않게 먹을 수 있는 거야.”한현진이 눈을 깜빡였다.
[그래도 학교 측에서 끝까지 부정행위라고 주장하면서 재수강하라고 하면 어떡해요?]강한서가 웃으며 말했다. [넌 언제든 법적 대응을 할 수 있다는 걸 잊지 마. 내가 대신 신고해줘?]진윤은 그제야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듯 번뜩 정신이 들었다. 인터넷에 도배된 악플로 잔뜩 지친 진윤은 자신의 결백을 주장하는 일에만 몰두해 있었다. 그는 심지어 학교 측에 새로운 시험 문제를 내도록 제안한 후 라이브 방송을 통해 부정행위가 없었음을 증명할까 생각하기도 했다. 하지만 강한서의 한마디는 진윤의 모든 고민을 한 방에 해결했다. 스스로의 결백을 증명하는 건 결국 그 사람들이 파놓은 함정에 뛰어 드는 것 과 다를 바가 없었다. 사람들은 애초부터 그가 부정행위를 했을 거라 확신하고 있었다. 그러니 진윤이 라이브 방송으로 결백을 증명한다고 한다고 해도 사람들은 또 미리 답을 알고 있으면서 카메라 앞에서 쇼를 하는 것이라며 의심하게 뻔했다. 부정행위의 증명해야 할 사람은 진윤이 아니라 그를 의심한 사람들이었다. 진윤이 순간 눈을 반짝였다. [얼른 엄마를 말려야겠어요. 교수님에게 부탁할 필요가 없잖아요. 전 당당하니까 얼마든지 조사하라고 해요.][잠깐만.]강한서가 진윤을 불렀다. [잠깐만 기다려 봐.][왜요?]입술을 깨물던 강한서가 중얼거렸다. [고작 학생인 네가 시험에서 부정행위를 했다는 이유만으로 여론이 이 정도로 들끓는게 처음부터 이상했어. 이제야 의문이 조금 풀리는 것 같네.][그게 뭔데요. 얼른 얘기 해줘요.]성격 급한 진윤은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하는 강한서 때문에 괜히 마음만 조급해졌다. 강한서가 말했다. [넌 지금 아무것도 하지 마. 어머님께도 오 교수님이라는 분 만나보라고 해. 뭐라고 하는지 얘기나 들어 보고 다시 대책을 세워야해.]진윤이 조금 전처럼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형님, 어차피 이렇게 된 거 그 인간들의 계략을 역이용하시려는 거예요?]강한서가 쯧, 혀를 차며 말했다. [매형이라고 불러]진윤: ...홍혜림과
법적 장모님이라는 여섯 글자에 멍한 표정을 짓던 강한서가 물었다. [서해금 대표 말하는 거야?][네. 그 분, 현진 누나 새엄마잖아요. 그럼 형님에겐 법적 장모님 아녜요?]강한서: ...‘맞긴 하네.’[난 오성빈 교수님과는 전혀 모르는 사이야.]멈칫하던 강한서가 물었다. [그건 왜 묻는데?]강한서의 말에 기분이 축 처진 진윤이 한참만에야 대답했다. [학교에서 제 재시험 성적을 취소하더니 재수강하래요.]강한서가 미간을 찌푸렸다. [그게 무슨 말이야? 학교에서는 네가 부정행위를 했다고 판단한 거야?][명백하게 얘기한 건 아닌데 사실은 그런 셈이죠. 하지만 다른 처분은 없이 그냥 재수강만 하래요. 친한 친구에게 들은 건데 학교에 신고 전화가 빗발쳤었데요. 홈페이지에도 전부 부정행위 진상 규명을 바라는 댓글로 도배됐다고 하더라고요.][아마도 학교의 이미지 회복을 위한 판단이었던 것 같아요. 저에게 적당한 책임을 전가할 수도 있고 대중들에게는 그들이 원하던 조치를 취했다고 보여줄 수 있으니까요.]강한서는 여전히 이해되지 않는다는 듯 물었다. [그럼 교수님에게는 무슨 일로 연락을 하려는 거야?][조교님께서 이번 일은 오 교수님 담당이라고 하셔서요. 비록 재수강으로 결론이 났다고 하지만 아직 완전히 결정된 건 아니니까요. 그래서 엄마는 오해를 풀기 위해 오 교수님을 한 번 만나 얘기를 나누고 싶어 하세요.][아는 분께 부탁해 오 교수님과의 자리를 만들어보려고 했지만 결국은 연락이 닿지 않았어요. 하지만 마침 형님 법적 장모님께서 제 병문안을 오셨다가 그 얘기를 들으시더니 오 교수님과 아는 사이라고 하더라고요.][꽤 가까운 사이인 것 같아 엄마는 만약 가능하다면 그분께 다리를 놔달라고 부탁할 생각이세요.]진윤이 한숨을 내쉬었다. [워낙 지적인 얼굴을 하고 계서서 좋은 사람처럼 보이지는 않던데요. 딸인 현진 누나에게도 가식적으로 대하는 것 같던데 전 그런 사람이 진심으로 저희를 도와줄 리가 없잖아요.][방금 형님과 얘기를 하면서 혹시 형님도
홍혜림이 서해금에게 얘기를 꺼내려던 그때, 진윤이 그녀의 말을 잘랐다. “잠깐 실례할게요.”홍혜림이 곧바로 하려던 말을 삼키고 몸을 일으켰다. “엄마가 부축해줄게.”“네.”진윤이 대답했다. 진윤을 부축하며 병실을 나서는 홍혜림을 쳐다보던 서해금이 고개를 돌려 성월에게 물었다. “아무 문제없이 잘 해결했죠?”성월이 고개를 끄덕였다. “대표님께서 지시하신 대로 했어요.”멈칫하던 성월이 나지막이 물었다. “대표님, 정말 사모님께서 저희에게 부탁하러 오실까요?”서해금이 덤덤하게 말했다. “평소라면 부탁하지 않을 수도 있겠죠. 하지만 궁지에 몰린 상황이라면 분명 부탁할 수밖에 없을 거예요. 홍혜림은 지금 아들의 누명을 벗기기 위해 안달이 나 있는 상황이에요. 그러니 저를 통해 이 일을 해결할 수 있다는 걸 알게 된다면...”“아무리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는다고 해도 결국 머리를 숙일 수밖에 없어요.”“조향 대회의 마지막 경기는 OM향 협회의 투표로 승패가 결정돼요. 홍혜림은 OM향 협회의 오래된 회원이에요. 게다가 이번 조향 대회 열 명의 심사위원 중 한 명으로 선정되기도 했고요.”“홍혜림은 누구보다 의리를 중요하게 생각해요. 제가 큰 도움을 준다면 어떻게든 그 빚을 갚으려고 할 거예요. 전 준비가 안 된 싸움은 시작하지 않아요.”피식 웃음을 흘린 서해금의 눈빛이 멸시로 가득했다. “전 조금의 실수도 용납할 수 없어요.”성월은 이토록 치밀한 서해금에 탄복하지 않을 수 없었다. 오성빈의 친척과 친분이 있다는 얘기를 꺼내는 서해금의 모습에 성월은 그녀가 단지 빼앗긴 고객을 다시 찾아가기 위해 던지는 미끼일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서해금이 바라는 것은 자신에게 마음에 빚을 진 홍혜림이 조향대회에서 관건적인 한 표를 행사하는 것이었다. 서해금이 이렇게까지 서포트 해주고 있으니 송가람은 조금만 노력해도 좋은 성적을 거둘 수 있었다. 순간 뭔가를 떠올린 성월이 목소리를 잔뜩 낮추며 물었다. “대표님, 인터넷에서 진윤 씨에 관한 여론이 들끓고
“하지만 지금 이 상황에 가면 걔들은 거짓말을 들킨 네가 양심에 찔려서 해외로 도피하는 거라고 생각할 거야.”진윤이 눈시울을 붉히며 말했다. “걔들이 뭐라고 생각하든 저랑 무슨 상관이에요. 어차피 출국하면 아무것도 듣지도 보지도 못할 텐데.”“그럼 너 평생 해외에만 있을 거야? 안 돌아올래?”입술을 달싹인 진윤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당연히 그럴 수는 없었다. 부모님도, 집도, 가족도 전부 한주에 있으니 지금 당장 해외에 나간다고 해도 결국 돌아와야만 했다. 홍혜림이 의미심장한 말투로 입을 열었다. “윤아, 사람의 명성이라는 게 한 번 나빠지면 다시 좋아진다는 건 어려운 일이야. 해외로 도망쳐 이번 일을 지나보낸다고 해도 졸업하면 결국 여기 동기들과 다시 마주해야 한 텐데, 걔들이 널 보고도 옛날 얘기를 꺼내지 않을 것 같아?”“다들 널 안 좋게 보고 있는 지금, 네가 끝까지 네 결백을 증명해야 나중에 걔들이 다시 이 얘기를 꺼내도 억울하지는 않을 거야. 알겠어?”“결백을 뭐로 증명해요? CCTV도 없고 아무것도 없잖아요. 전 당당하다는 걸 아무도 증언해줄 사람이 없어요. 절 믿는 사람도 없다고요.”진윤이 잠김 목소리로 물었다. “엄마, 저 어떡해요?”홍혜림은 미어지는 가슴을 붙잡고 아들의 얼굴을 어루만지며 나지막한 목소리로 위로를 건넸다. “아무도 널 안 믿어도 엄마는 널 믿어. 네 아빠, 형 그리고 네 형수님도 널 믿어. 그러니까 아들, 괜찮아. 엄마가 있는 한 아무도 우리 아들 못 건드려. 엄마가 꼭 네가 정정당당하게 학교로 돌아갈 수 있게 할게.”홍혜림이 말에 진윤이 대답하려던 그때, 누군가 병실 문을 두드렸다. 진윤이 고개를 돌려 얼굴을 닦으며 감정을 추슬렀다. 홍혜림 역시 심호흡을 하고는 몸을 일으켰다. 문을 열자 보이는 의외의 인물에 홍혜림의 눈이 동그래졌다. 서해금이었다.서해금은 성월과 함께 진윤의 병실로 찾아왔다. 두 사람은 손에 선물을 잔뜩 들고 서 있었다. 병실 문이 열리자 서해금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