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한서가 흥, 콧방귀를 뀌었다. [보름에 할아버님 댁에 있었을 때, 네 휴대폰에 있던 그 추석 인사는 누가 보낸 거야? 누가 보낸 건데 한 밤중에 그렇게 빤히 쳐다보고 있었던 건데?]멈칫하던 한현진이 그날의 기억을 떠올렸다. 그날 밤 잠에 들기 전 그녀는 주강운이 보낸 명절 축하 인사를 받았다. 당시 그녀는 문자를 보며 토끼 키링의 일을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니 그렇게 오랫동안 멍하니 있었던 것이다. [너 그때 잠든 거 아니었어?][내가 잠들었는지 아닌지는 신경 쓰지 말고. 내가 묻잖아. 앞으로 걔 문자는 내가 너 대신 답장할게. 그래도 돼?]한현진은 전혀 개의치 않아하며 말했다. [네가 하고 싶으면 해. 난 청렴결백해서 무서울 것도 없어.]원하는 대답을 들은 강한서는 순간 한현진에게 이용 당했다는 사실도 더 이상 신경 쓰이지 않았다. 심지어 그는 겸허한 태도로 한현진에게 조언을 구하기까지 했다. [그래서 송가람에게는 내가 뭐라고 답장하면 되는 건데?][답장할 거 없어. 앞으론 내가 옆에 없을 땐 송가람이 뭘 보내든 답장하지 마. 어차피 자기가 알아서 상상의 나래를 펼칠 거야.][...]강한서와 문자를 주고받는 한현진의 앞으로 송가람이 식판을 들고 와 맞은편에 자리잡고 앉았다. 고개를 들어 송가람을 마주 본 한현진은 조용히 대화창을 껐다. 송가람이 웃음기 가득한 말투로 입을 열었다. “현진 씨, 밥은 먹을 만해요? 만약 입에 안 맞으면 사무실 아래에 있는 식당도 맛있어요. 먹고 싶은 게 있으면 제가 사오라고 할게요.”멈칫하던 한현진이 미소 지으며 예의상 대답했다. “괜찮아요. 이것도 충분히 맛있어요.”송가람이 젓가락을 닦으며 무심코 흘리는 말인 듯 얘기했다. “현진 씨, 제 사무실에 꽃이 좀 있는데, 조금 이따 와서 몇 송이 좀 가져가서 사무실 꽃병에 꽂아요. 바쁠 한 번씩 보면 기분이 좋아지거든요.”‘낚였다.’한현진이 고개를 들어 웃으며 물었다. “좋아요. 무슨 꽃인데요?”송가람이 입을 열기도 전에 옆 테이블에 앉은
연기에 너무 몰입한 나머지 점심도 배불리 먹지 못한 한현진은 사무실에 앉아 강한서가 준비해준 산모 간식을 먹고 있었다. 그녀는 입을 오물거리며 성월이 가져 온 깔린느 각 부서의 자료를 살펴보았다. 센트가 깔린느로 이름을 바꾼 후 회사의 규모는 점자 확대되었다. 핵심 팀원들도 서해금에 의해 물갈이 되었다. 대대적인 구조조정에서 살아남은 몇 명 안 되는 초창기 멤버는 아마 서해금 본인의 사람이었을 것이다. 그 사이에 틈을 만들려면 아무래도 자기 사람을 올려 보내야 했다. 송민준이 데려올 그 여자 아이가 기대에 부응할 수 있을 지는 알 수 없었다. 02년생이라, 너무 어린 나이였다. 웅, 휴대폰 진동이 울렸다. 순조로운 첫 출근이냐며 묻는 차미주의 문자였다. 한현진은 휴대폰을 치켜든 한현진은 사무실을 빙 돌며 파라노마 모드로 사진을 찍은 후 차미주에게 전송했다. [완전 크지!]차미주: [!!! 커! 비서 부족하지 않아? 내가 면접 보러 갈게!]한현진이 살풋 웃음을 지었다. [한 대표가 비서로 있어주면 월급으로 1000만 원을 준다고 해도 싫다고 했던 애가 내가 줄 월급이 마음에 들기나 하겠어?][이건 달라. 한성우에게서 급여를 받는 건 왼쪽 주머니의 돈이 오른쪽으로 흘러가는 것과 같은 거잖아. 하지만 너에게서 받는 돈이야말로 정말 버는 거지. 얼마든 상관없어. 다른 건 모르겠고 복은 같이 누리고 힘든 건 네가 혼자 감내하는 거야.]차미주의 문자에 한현진은 어이가 없어 잠시 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좋은 건 늦게 배워도 나쁜 건 빨리도 배웠네. 너 지금 네가 말하는 꼴 좀 봐. 한성우 씨 그 조잔한 인간이랑 너무 비슷하지 않아?]한참 동안 웃음을 터뜨리던 차미주가 물었다.[이제 첫 출근인데 손가락 모녀가 네 뒤에서 이상한 짓거리는 하지 않았어?][서해금은 내가 멀리 보내버렸어. 그리고 송가람은... 무서워할 것도 없어.][어디로 보냈는데?]어제 있었던 일을 간략하게 설명하자 차미주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정말 대단한 애라니까. 아빠를
한현진이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그건 걔가 널 경찰서에 신고했던 게 미안해서 일부러 값을 많이 쳐준 거야.]차미주가 답장했다. [그때 그 사실을 알았을 땐 그까짓 돈 때문에 머리를 숙이고 싶진 않았는데. 지금 생각해 보니 두 시간 갇혀있는 대가로 2억이면 난 충분히 할 수 있어. 지금 돈 벌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넌 모를 거야. 최근 6개월 사이에 웹드라마 인기가 급상승하고 있어서 나 요즘 줄곧 그쪽 일 하고 있었다니까.][너무 인지도 있는 배우도 필요 없고 3일에서 5일 사이면 촬영이 끝나. 대본은 인터넷으로 모집하고 촬영 주기가 짧고 촬영 비용이 적게 들어. 최대 4000만 원에서 6000만 원이면 충분하거든. 하지만 한 작품만 성공시켜도 수십억을 벌어들일 수 있어. 수익이 충격적일 정도로 높다니까. 그러니 지금 우리 업계에서는 제작사마다 웹드라마 제작을 위한 팀을 하나씩은 꾸리고 있거든. 내가 불행하게도 그 팀으로 발령 났지. 매일 투고된 막장 대본을 읽고 있자니 머리가 다 터질 지경이야.]임신이라는 것을 알게 된 후로는 숏츠도 많이 보지 않게 된 한현진은 차미주가 말한 것들에 대해 잘 알 리가 없었다. 그녀는 차미주에게 무슨 웹드라마냐며 묻자 차미주가 사이트 하나를 보내주었다. 사이트로 들어가 한참을 보던 한현진의 머릿속에 아이디어 하나가 반짝하며 떠올랐다. 그녀는 다급하게 문자를 작성했다. [미주야, 나 대본 좀 써줄래?][뭐?]한현진이 말했다. [좀 이따 퇴근하면 너한테 갈게. 만나서 얘기해.]문자로 얘기하기엔 타자 속도가 너무 느렸고 할 말도 너무 많았다. 한현진이 순간 떠올린 아이디어는 바로 차미주에게 수십 년 전 송씨 가문의 일을 웹드라마로 제작하고 한현진이 돈을 써 그 웹드라마를 인기 차트에 올려 이슈화 만드는 것이었다. 만약 서해금의 공범이 있다면 당시 실제 사건과 비슷한 내용의 웹드라마가 인터넷에서 큰 인기를 얻고 있는 상황에 어쩌면 안절부절 할지도 모를 일이었다. 불안에 떨며 평정심을 잃는다면 덜미를 잡힐 수도 있었다.
송가람은 흰색 실크 소재의 셔츠를 입고 머리를 느슨하게 뒤로 땋아 내렸다. 진주 귀걸이는 그녀의 마른 몸매에 고급스러운 느낌을 더했다. 그녀의 뒤에 따라 붙은 두 사람은 두 손 가득 물건을 바리바리 싸들고 있었다. 포장을 보아하니 명품 화장품인 듯 했다. 쇼핑백의 개수로 보아 적은 양은 아니었다. 송가람이 다정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여러분, 바쁘신데 시간 뺏어서 죄송해요. 연휴가 끝난지 얼마 되지 않아 다들 바쁘셔서 사무실에 함께 모일 기회가 없었는데 오늘은 현진 씨 첫 출근이라 모처럼 모두 계시니 제가 여러분들을 위해 작은 선물을 준비했어요.”한현진이 생각했다. ‘작은 선물? 환심이나 사려는 거겠지. 어쩐지 주현 씨더러 날 여기까지 불러내더라니. 이걸 보여주려고 그런 거였네.’선물이라는 말에 사람들은 흥미를 보이며 하나둘 박수를 치기 시작했다. 사무실 분위기도 뜨거워졌다. 한현진은 송가람이 사온 선물을 슥 훑어보았다. 역시나 그녀의 생각대로 화장품과 향수였다. 너무 비싼 것도, 그렇다고 너무 싼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절대 사람들이 사지 못할 수준의 제품은 아니었다. 마음에 들든 아니든 사람은 선물을 사온 송가람의 성의를 생각해 감사의 인사를 전하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이 컬러는 전부 품절이라 살 수 없을 줄 알았는데. 고마워요, 팀장님.”“세상에, 불과 며칠 전에 이 파운데이션 리뷰를 봤었는데 이렇게 갑자기 선물로 받게 되다니. 팀장님, 센스가 너무 좋으세요.”“이 향수 진짜 좋아요. 저희 엄마가 계속 쓰시 거든요. 엄청 좋아하실 거예요.”“가람 씨, 무리하신 거 아녜요?”...송가람은 직원들의 인사에 일일이 대답해 주었다. 그녀는 심지어 웃으며 말했다. “별로 비싸지 않았어요. 저한텐 그다지 가치도 없는 물건일 뿐이에요. 친구가 가방 살 때 기다리면서 보다가 여러분들이 좋아하실 것 같아 그냥 샀어요.”그녀의 말에 직원들은 서로 얼굴을 마주보며 눈을 마주쳤다. 얼굴에 드리웠던 미소가 전보다 옅어졌지만 송가람은 전혀 눈
한현진이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별 거 아녜요. 올해가 유난히 춥잖아요. 보름이 지났는데도 아직도 날이 풀리지 않아서 몸을 따듯하게 해 줄 수 있는 걸 선물하면 어떨까 생각했었거든요. 평소에도 방한 용품으로 사용할 수 있고요.”‘방한 용품?’‘모자, 목도리, 장갑 아니면 무릎보호대인 건가?’방한이라는 두 글자에 사람들의 호기심은 절반으로 줄어들었다. 그런 물건들은 겨울이 다가오면 회사에서 늘 나누어주었었다. 그러지 도무지 기대가 되지 않았다. 게다가 한현진의 첫 출근 기념 발언을 떠올린 그들은 한현진을 그저 아무 생각도 없는 재벌 2세로 정도로 생각했다. ‘고작 저런 인간이 송가람 씨 모녀와 경영 다툼을 하겠다는 거야?’사람들의 눈빛을 보며 송가람이 씩 입꼬리를 올렸다. 그녀가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현진 씨, 이미 준비한 건데 차라리 지금 나눠줘요. 방한 용품이라 조금만 늦으면 아마 올해는 몇 번 사용하지도 못할 거예요.”주현도 송가람을 거들었다. “한 대표님이 고르신 건데, 방한 용품이라고는 해도 절대 평범한 건 아닐 거예요.”“한 대표님이 하고 계신 목도리도 예쁘잖아요. 혹시 전부 그 목도리로 준비하신 거예요?”“구찌 목도리요? 세상에. 진짜 그 목도리면 전 좋아서 미쳐 버릴 지도 몰라요. 한 대표님, 뜸 들이지 마시고 얼른 공개해주세요. 너무 기대돼요.”사람들은 서로 눈빛을 교환하며 한마디씩 주고받았다. 그들은 한현진을 높이 띄워주고 있었다. 미소를 짓고 있는 송가람의 눈가에는 비웃음이 서려있었다. 한현진이 준비한 물건이 직원들의 기대에 미치지 못한다면 뻘쭘한 상황이 펼쳐질 것이 분명했다. 송가람 혼자 조향팀을 마주해야 했기에 서해금은 이미 여러 사람들에게 언질을 해둔 상황이었다. 그덕에 송가람은 조향팀에서 자리 잡을 수 있었다. 깔린느에는 똑똑한 사람으로 가득했다. 절대 공략하기 쉬운 곳이 아니라는 뜻이었다. ‘창피도 좀 겪어봐야지. 고작 창립자의 딸이라는 신분만으로 깔린느에서 주인 행세를 할 수 있다고 생각했어?’
누군가 기다리지 못하고 물었다.“한 대표님, 이게 무슨 상황이에요?”한현진이 앞으로 나서며 난감하다는 듯 말했다. “방금 말했잖아요. 날이 추워져서 여러분께 몸을 따뜻하게 해 줄 수 있는 물건으로 준비했다고요.”“아니, 방금 통일된 물건을 준비하셨다고 하셨는데 전혀 같은 제품들이 아닌데요. 전부 다른 디자인이잖아요.”한현진이 말했다. “전부 같은 거예요. 제가 여러분들 옷 사이즈를 모르잖아요. 이제 첫 만남이라 직접 물어보기도 실례인 것 같고 그래서 전부 S사이즈로 구매했어요. 오늘 출근하고 보니까 몇 명은 저와 몸매가 비슷하신 것 같아서 몇 개는 M 사이즈로 바꾸려고 했었거든요. 하지만 가람 언니가 계속 오늘 주라고 하시고 또 여러분들도 기대를 하시는 것 같아서 가져올 수밖에 없었어요.”말하며 한현진은 옷의 재질을 매만지며 말했다. “이 옷들 보기에 두꺼운 것 같아도 입으면 보온성이 꽤 좋은 편이예요. 입기에도 편하고요. 가람 언니도 평소 이 브랜드의 옷을 좋아해서 같은 또래라 안목도 비슷할 것 같아 준비해 봤어요.”주현의 입 꼬리가 부들거렸다. 통일했다는 의미가 같은 사이즈로 구매했다는 뜻이었다니.‘일부러 아무 것도 모르는 척 연기하는 거 아냐?’주현이 고개를 돌려 송가람을 쳐다보았다. 송가람의 표정은 흉악스러워 보인다고 표현할 수 있을 정도로 일그러져 있었다. 물론 주현은 송가람이 왜 저토록 화를 내는지 알 리가 없었다. 하지만 송가람에게 눈앞의 광경은 화를 낼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지금 옷걸이에 걸린 모든 옷은 그녀가 한현진을 농락하기 위해 선물했던 옷이었기 때문이었다. 전부 한현진은 입을 수 없는 사이즈의 옷이었다. 송가람은 한현진이 그 옷들을 전부 가져와 깔린느의 직원들에게 선물로 주며 마음을 살 것이라고는 꿈에도 생각해 본 적 없었다. ‘말은 또 왜 저렇게 거창하게 하는 거야. 어떻게 저렇게 뻔뻔할 수가 있어.’사람들은 한현진이 아무 것도 모르는 척 연기를 하든 말든 신경 쓰지 않았다. 명품 브랜드의 옷은 한 벌당
한현진은 비록 미소를 짓고 있었지만 시선을 주위를 슥 훑어보았다. A구역 1팀의 팀원은 단 한 명도 없었다. 다른 팀의 팀원들 역시 몇 명만 보였고 오지 않은 사람도 있었다. 옷을 가지는 사람과 가지지 않는 사람은 비례는 대략 3:7 정도였다. 역시나 서해금은 깔린느에 깊이 뿌리박고 있는 듯 했다. 조향팀의 절반 이상이 모두 그녀의 사람이었다. 생각에 잠겨 있던 한현진은 갑자기 입구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곳엔 자료를 전달하러 온 젊은 여자가 서 있었다. 그녀는 고개를 내밀고 이쪽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한현진이 그녀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이쪽으로 와서 같이 골라요.”멈칫하던 젊은 여자가 얼른 입을 열었다. “한 대표님, 전 조향팀 팀원이 아니에요.”한현진은 여자의 목에 걸린 사원증을 슥 훑었다. 재무팀 은서하. 어린 나이로 보아 이제 졸업한지 얼마 되지 않는 신입인 것 같았다. 고개를 든 한현진이 웃으며 말했다. “본 사람 몫도 있어요. 지금 있을 때 얼른 줄 서요. 공짜잖아요.”은서하가 눈을 반짝였다. 그녀는 빨갛게 달아오른 귓불을 한 채 고맙다고 인사하더니 곧 줄을 서러 달려갔다. 은서하를 빤히 쳐다보는 송가람의 눈에는 불이 뿜어져 나올 것 같았다. 그녀는 굳은 얼굴로 주먹을 꽉 움켜쥐고 한현진 앞으로 다가갔다. “현진 씨가 팀원들을 위해 심사숙고해서 고른 옷들이 제가 전에 현진 씨에게 선물해줬던 옷과 같은 것 같네요. 혹시 제가 준 옷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 다시 다른 사람에게 선물하는 거예요?”그 말에 사람들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러니까 이게 지금 한현진이 안 입는 옷이라는 거야?’한현진은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웃음을 머금고 송가람을 바라보며 말했다. “가람 언니가 선물한 옷을 제가 어떻게 다른 사람에게 주겠어요.”송가람 역시 웃으며 말했다. “제가 기억력이 나쁜 편도 아니고, 전부 제가 고른 옷인데 설마 모르겠어요. 구매 지출 내역도 아직 제 휴대폰에 기록되어 있는 걸요.”한현진이 고개를 들어 송가람과 눈을
주현은 창백해진 얼굴로 손가락을 빙빙 돌렸다. 그녀는 고개를 숙인 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 말들은 분명 송가람이 표정으로 눈치를 줬기에 내뱉은 것이었다. 만약 그 말을 꺼내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면 왜 현장에서는 제지하지 않은 걸까?한현진은 송가람보다 선물도 훨씬 좋은 것으로 준비했고 말도 그녀보다 더 잘했기에 송가람은 창피를 당해야 했고 그녀의 화를 돋웠다. 마음이 언짢아진 송가람은 화풀이 대상을 찾아 분노를 터뜨려야 했다. 그리고 주현이 바로 그 화풀이 대상이었다. 있는 대로 성질을 부린 송가람이 드디어 진정하자 주현은 그제야 용기를 내 입을 열었다. “팀장님, 사실 전 이것도 꼭 안 좋은 일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아요. 오늘 일로 최소한 사람들의 마음이 누구를 향해 있는지 확실히 알아볼 수 있었잖아요. 앞으로 어떤 사람을 곁에 두어야 하는지 이제 판단이 서시겠죠.”송가람은 이제야 이성을 되찾았다. 한현진은 준비한 옷들을 전부 나눠주지는 못했다. 서해금의 사람과 중립을 유지하고 있는 사람은 아직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다. 깔린느는 스트레인지가 아니었다. ‘한현진, 고작 이런 수단으로 사람의 마음을 사려고 했겠지만 네 생각처럼 쉽진 않을 거야.’머리로는 충분히 이해하고 받아들였지만 직원이 가득 모인 자리에서 창피를 당하고도 한 마디도 하지 못한다면 송가람은 도무지 그 분노를 잠재울 수가 없었다. 주현이 나지막이 말했다. “팀장님, 저에게 생각이 있어요. 한 사람을 벌해 백 사람이 경계하도록 해야 한다는 말이 있잖아요. 아랫사람에게 본때를 보여주어 누구의 물건을 가져도 되고 누구의 물건을 건드리지도 말아야 하는지 똑똑히 알려주면 돼요.”송가람이 멈칫하더니 고개를 들어 주현을 바라보았다. “어떻게요?”“금방 재무팀에서 온 은서하있잖아요. 재무팀은 전부 서 대표님 인맥이에요. 눈치도 없이 한현진이 주는 선물을 받았으니 본보기를 보일 제일 좋은 대상이죠.”잠시 침묵하던 송가람이 말했다. “엄마는 제가 아무런 이유 없이 직원을 자른
주현의 생각은 성월과 달랐다. 송가람은 사랑에 눈이 멀어 남자의 사랑을 바랐지만 주현은 아니었다. 그녀의 목표를 애초부터 매우 명확했다. 주현은 상대방이 자신에게 줄 수 있는 신분과 지위를 노렸다. 그건 20년, 30년을 노력해도 가질 수 없는 것들이었다. 지금 주현이 원하는 모든 것을 얻을 수 있는 지름길이 눈앞에 놓였는데 그 기회를 잡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하지만 주현은 성월의 성격을 잘 알았다. 성월은 반평생을 야심으로 가득 찬 서해금 곁을 지키며 진작 서해금의 충직한 개가 되었다. 성월에게 신분은 뛰어넘을 수 없는 벽 같은 거였고 자신의 미래는 스스로 기회를 잡아 개척해 나가야 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서해금 역시 자신의 두 손으로 그 자리에 오른 것은 아니었다. 송병천과의 결혼이 아니었다면 서민 출신에 남편을 잃고 아이를 키우는 싱글맘이 무슨 수로 지금의 자리에 오를 수 있었을까?‘웃기지 말라 그래.’하지만 그 말을 주현은 감히 성월 앞에선 할 수 없었다. 주현은 애교를 부리며 말했다. “이모, 도와줘요. 신씨 가문으로 돌아가든 아니든 저 한 번 해보고 싶어요. 송가람 씨와 조금이라도 가까이 할 수 있는 일로 부탁해요. 활동이든 파티든 데리고 다닐 수 있는 자리로요. 그래야 신씨 가문에 호감을 살 수 있죠.”성월의 학창 시절, 그녀의 집안은 그야말로 찢어지게 가난했다. 주현의 부모님이 빌려주신 돈으로 급한 불을 끈 덕에 성월은 늘 주현의 집안에 감사한 마음을 갖고 있었다. 주현의 애교에 견디지 못한 성월이 한숨을 내뱉으며 말했다. “송가람 씨 비서로 전근 보내볼게. 너, 네 남자친구한테 기본적인 건 잘 가르쳐. 묻는 말에 아무 것도 대답 못하면 안 돼.”주현이 순간 환한 미소를 지으며 성월에게 팔짱을 끼고 달콤한 목소리로 말했다. “고마워요, 이모! 역시 이모가 날 제일 예뻐할 줄 알았어. 주말에 집에 와서 식사해요. 안 가신지 꽤 됐잖아요...”한편, 사무실로 돌아온 한현진의 마음은 쉬이 가라앉지 않았다. 만약 어제 바로 세정제
서해금이 입술을 짓이기며 중얼거렸다. “이렇게 냉정하다니, 한현진 답지 않아.”성월이 말했다. “사실 전 그렇게 냉담한 것도 당연하다고 생각해요. 오일을 깨뜨린 것도 주혁 씨였고 몰래 부업을 하다 한 대표님 얼굴에 먹칠한 것도 주혁 씨잖아요. 그러니 당연히 원망하는 마음이 있을 거예요.”말이 없던 서해금이 잠시 후 입을 열었다. “인사팀에 잠깐 다녀와요. 일단 주혁을 가람이 운전기사로 전근시켜요.”성월이 놀란 얼굴로 말했다. “대표님, 가람 아가씨에게 운전기사를 붙일 생각이시면 제가 다른 기사님을 찾을게요. 회사에는 지금 마침 새로 입사한 젊은 신입사원들이 많아요. 어리고 건강하고 운전 경력도 전부 5년이 넘었어요. 주혁 씨는 한현진 곁에서 한동안 일을 하신 분인데, 가람 아가씨 운전기사로는 적합하지 않을 것 같아요.”“전근시키라고 하면 시켜요. 제가 이렇게 하는 덴 이유가 있어요. 그러니 성 비서는 나서지 말아요.”성월이 다급히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네.”성월이 사무실을 나서자 주현이 곧바로 그녀에게 다가갔다. “이모, 어떻게 됐어요? 대표님께 말씀 드렸어요?”성월이 고개를 가로 저었다. “대표님께서 이미 송가람 씨에게 다른 운전기사를 붙이셨어. 이미 결정된 일이야.”순간 주현은 조바심이 났다. “왜 갑자기 결정 난 거예요? 회사에서 요즘 새로 신입사원 모집했잖아요. 보안팀은 싫어할 거란 말이에요.”성월이 말했다. “대표님께서 주혁을 송가람 씨 운전기사로 전근시켰어. 지금 인사팀에 가서 그 일부터 처리해야 해.”그 말을 들은 주현이 투덜거렸다. “한현진 밑에 있던 사람이잖아요. 게다가 본인 상사를 배신까지 했고요. 대표님은 무슨 생각으로 그런 사람을 딸 운전기사로 쓰시겠다는 거예요?”순간 얼굴을 일그러뜨린 성월이 주현을 구석진 곳으로 끌고 갔다. 성월은 주변을 확인하고 나서야 주혁의 팔을 내치며 차가운 얼굴로 말했다. “너 미쳤어? 여긴 회사야. 여기서 집인 줄 알고 그렇게 큰 소리로 대표님 뒷담화를 하는 거야?
직원들은 열띤 토론을 벌이고 있었다. 어떤 직원은 회사의 조치가 꽤 인간적이라며 칭찬했고 또 어떤 직원은 아무리 화장실 청소라도 그렇게 부식성이 강한 세제를 쓰진 말았어야 했다며 안전 문제를 인지하지 못한 회사의 관리에 문제가 있다고 비난했다. 이번 일은 단순히 청소 직원이 화상을 입은 것으로 그쳤지만 만약 누군가 범행을 저지르려고 한다면 부식성이 강한 세정제는 범죄자에게 칼을 준비해준 것과 다를 것이 없는 꼴이었다. 의문을 제기하던 직원이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돌려 한현진과 눈을 마주쳤다. 그제야 실언했다는 것을 인지한 직원이 다급하게 말했다. “대표님, 전 회사에서 조치를 제대로 못했다는 뜻이 아니라요. 단지 위험 요소가 될 수도 있는 거니까, 저도 모르게 제일 최악의 상황을 상상해본 거예요.”한현진이 고개를 들었다. “무슨... 위험 요소요?”그 직원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못... 못 들으셨어요?”“죄송해요.”한현진이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조금 전 친구 문자에 답장하느라 못 들었어요.”직원이 입술을 달싹이며 말을 잇지 못했다. 옆에 있던 또 다른 직원이 얼른 말을 이었다. “회사에서 며칠 동안 청소하시는 직원분들이 다치는 사고가 있었잖아요. 그 일 때문에 다들 마음이 뒤숭숭해요.”한현진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한 직원이 말을 이었다. “아, 맞다. 대표님. 다치신 분 중에 대표님이 아는 사람도 있어요. 전에 대표님 운전 기사셨던 주혁 기사님이요. 그 분이 제일 심하게 다치셨어요.”한현진이 미간을 찌푸렸다.“기사님이요? 확실해요? 어제 볼 일 보러 갔다가 기사님 만났을 때까지만 해도 멀쩡하셨는데. 언제 다치신 거예요?”한현진의 말에 직원이 멍해졌다.“그럴 리가요. 며칠 전에 이미 다치셨어요. 대표님과 비슷한 시기에 휴가를 내셨어요.”한현진이 곰곰이 생각했다. “그날 제가 급한 일 때문에 길게 얘기를 나누진 못했어요. 손에 붕대 같은 건 본 기억도 없고 기사님께서도 저한테 그런 얘기는 없으셨는데... 심하게 다치셨어
막 전화를 끊으려던 그 순간, 박안수가 다시 불렀다.“아, 그리고...”“뭔데?”“오늘 경찰서에서 한현진과 마주쳤어.”서해금의 표정이 순식간에 일그러졌다. “한현진이 경찰서엔 왜?”“나도 자세한 건 안 물어 봐서 잘 몰라. 하지만 갑자기 일이 생겨서 간 것 같아. 혼자가 아니라 6, 7살 쯤 되는 어린 아이와 함께 왔었어.”미간을 찌푸리며 잠시 생각하던 서해금이 또 물었다. “한현진이랑 얘기했어? 무슨 얘기했는데?”“괜히 의심할까봐 내가 경찰서에 간 이유를 사실대로 얘기했어. 한현진도 더 묻지 않았고.”우물 쭈물거리며 숨기는 것보다는 차라리 당당하게 대답하는 편이 오히려 의심을 덜 사는 방법이었다. “그게 다야?”“응.”생각의 잠겼던 해금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경찰한테 손에 상처는 뭐라고 얘기했는데?”“회사에서 청소하다가 부식성 제품에 다친 거라고 했어.”서해금이 원망하듯 말했다. “왜 회사에서 다친 거라고 했어. 회사에서 그렇게 부식성이 강한 제품을 쓸 리가 없잖아.”“그렇다고 내가 집에서 다친 거라고 할 순 없잖아. 집에는 회사에서 다친 거라고 했는데. 조사 협조 요청을 나한테만 하는 게 아니잖아. 게다가 그 두 사람은 거짓말을 아예 못 해. 만약 경찰이 내 손에 관해 묻기라도 한다면 바로 들켜 버리는 거잖아.”서해금이 굳은 얼굴로 말했다. “여자는 미쳤고 애는 귀가 먹었는데, 그런 병X도 제대로 통제 못 해?”순간 얼굴을 찡그린 박안수가 말했다. “말 그렇게 하지 마. 두 사람 불쌍한 사람들이야.”“뭐가 불쌍해. 도박쟁이 가정폭력범을 성실하고 부지런한데다 박학다식한 남편으로 바꿔줬는데. 우리한테 고마워해도 모자라.”서해금의 말에 박안수는 왠지 마음이 불편해졌다.너는 대화를 이어 가고 싶지 않았던 서해금이 당부하며 말했다. “이만 끊어. 가람이한테 당신을 기사로 쓰라고 얘기하러 갈 거야. 소식 기다려.”박안수는 목 끝까지 차오른 말을 삼키며 나지막하게 대답했다.“그래.”전화를 끊은 서해금은 아무리 생
“아니.”서해금이 미간을 찌푸렸다. 도무지 마음을 놓을 수 없었다. “경찰에겐 뭐라고 했어?”수화기 너머의 사람이 담담하게 대답했다. “사실대로 얘기했어.”“박안수!”서해금은 참기 힘들 정도로 화가 끓어올랐다. “지금이 농담할 때야?”“농담 아냐.”말하는 사람의 목소리가 더 가라앉았다. “그럼 내가 뭐라고 말할까? 네가 준 신분이니 난 당연히 주어진 대본대로 연기할 수밖에. 그럼 내가 난 박안수라고 얘기했어야 해? 죽은지 27년도 더 된 사람이야. 박안수가 어떻게 돌아와?”그의 목소리엔 고통과 원망으로 가득 했다. 그 순간, 서해금의 얼굴이 끔찍하게 일그러졌다. “지금 날 탓하는 거야?”말이 없던 상대방은 잠시 후 덤덤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런 적 없어.”“박안수, 지금 날 탓하는 거잖아.”서해금이 공격적인 말투로 말을 이었다. “그때 빚을 진 사람도 당신이고, 그 아이디어를 낸 사람도 당신이었어. 당신이 가람이를 키울 능력이 없었던 거고, 당신이 가람이가 더 좋은 환경에서 살길 바랐고, 그래서 나한테 도와달라고 사정한게 당신이었어.”“내가 당신한테 돈 안 줬어? 지금껏 내가 당신한테 준 돈이 얼만데. 당신은 얼마든지 해외에서 지금보다 더 나은 인생을 살 수 있었어. 굳이 한주에 남겠다고 한 건 당신이야. 내가 당신에게 그럴 듯한 신분을 만들어주지 않았으면 당신이 무슨 명분으로 가람이 앞에 나타날 건데? 당신이 이렇게 당당하게 가람이를 만날 수나 있었을 것 같아?”목이 메인 남자는 한참만에야 눈을 감으며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 “네 탓한 거 아냐. 난 그저 이렇게 조마조마 마음 졸이는 생활에 지쳤을 뿐이야. 난 집에서도 감히 옷을 못 벗어. 잠도 깊게 잘 수가 없어. 길에서는 아는 사람이라도 만나면 그 사람은 날 보면서 반갑게 인사하는데 난 그 사람이 누군지도 몰라. 그러면서도 아는 척, 반가운 척 인사를 해야 해. 심지어 아무리 아파도 검사도 못 해. X발, 병원도 가질 못한다고!”남자가 깊은 숨을 몰아쉬며 말했다.
“네, 볼 일 봐요. 회사로 복귀하면 다시 얘기하죠.”한현진이 전화를 끊었을 때 차는 이미 회사에 도착했다. 차에서 내린 한현진은 곧바로 로비로 향했다. 회사의 프런트가 한현진에게 정중하게 인사를 건넸다. 짧게 인사를 받은 엘리베이터에 탄 한현진은 사무실이 아닌 2층을 눌렀다. 회사 건물은 2층부터 화장실이 있었기에 1층엔 화장실이 없었다. 한현진은 아예 2층부터 일일이 확인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오늘 역시 공교롭게도 2층에 도착한 한현진은 마친 청소 중인 직원과 마주쳤다. 근무 시간이 화장실엔 사람이 없었다. 직원은 바닥을 닦고 있었고 세면대와 멀지 않은 곳에 청소차가 세워져 있었다. 그 위엔 청소 용품으로 가득 했다. 한현진은 고개를 숙여 청소 용품을 확인했다. 청소차엔 수많은 플라스틱 통과 병이 있었고 그 안엔 전부 액체가 담겨져 있었다. 굳이 뚜껑을 열지 않아도 소독제의 냄새가 올라왔다. 그러나 그 제품들은 그 어떤 별다른 표시도 되어 있지 않았다. ‘하지만 부식성이 그렇게 강한 용액을 플라스틱 병에 담진 않았을 거 아냐.’“누구세요?”청소차를 관찰하는 한현진의 등 뒤로 사투리 억양이 섞인 여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한현진이 몸을 돌리니 청소 중이던 직원이 보였다. 그 직원은 아래층 청소를 도맡아 하는 분이라 한현진을 본 적이 없었다. 단순히 한현진이 화장실을 사용하려는 것이라 생각한 직원이 말했다. “아직 소독제를 쓰지 않았으니까 볼 일 보려면 얼른 봐요.”한현진은 그 말에 대답하지 않은 채 청소차의 물건들을 쳐다보며 물었다. “아주머니, 여쭤볼게 있어요. 화장실 청소를 하실 때 어느 브랜드의 농도가 얼마인 세정제를 사용하세요?”직원이 말했다. “도매 시장에서 파는 회색통이요. 커다란 거. 엄청 싸요. 이름이 뭔지는 모르겠는데. 사려고요?”한현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화장실이 항상 깨끗해서요. 저도 집에서 써보려고요.”청소 직원이 얼른 한현진을 말렸다. “절대 사지 마요. 변기의 때는 우리가 항상 솔로 조금씩 닦
또 다른 경찰이 물었다. “그래서 지장은 찍을 수 있어요?”“손이 그 지경인데 지장을 어떻게 찍어? 손을 보니까 지장은 무리인 것 같아서 포기했지. 어차피 지문도 완전히 회복하긴 힘들 것 같았어. 그래서 애들한테 홍채와 성문을 따라고 했어.”말을 마친 키 큰 형사가 한현진에게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나중에 회사에 가셔서 얘기 좀 하세요. 그렇게 부식성이 강한 제품은 얼른 교체하라고요. 만약 누가 나쁜 마음이라도 먹고 그 제품으로 가해라도 하면 회사에서도 책임지셔야 해요.”생각에 잠겼던 한현진이 그 말에 얼른 대답했다. “네, 알겠어요. 알려주셔서 고마워요.”경찰서에서 나온 한현진은 내내 미간을 찌푸린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조금 전 은서가 본 것은 주혁의 태반이나 점이 아니라 청소 용액에 부식되어 생긴 상처였다. 어차피 납치 사건의 범인은 이미 잡혀 경찰서에 있는데, 대체 뭐가 그렇게 급해서 상처를 치료도 하지 않고 경찰서로 달려온 것일까?한현진은 아무리 머리를 굴려도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게다가 이해되지 않는 부분이 하나 더 있었다. 회사에선 그런 고농도의 부식성 제품을 구매했을 리가 없었다. 형사의 말처럼 그런 제품은 위험부담이 너무 컸다. 한현진은 이시연의 연락처를 찾아 그녀에게 전화를 걸었다. 하지만 연결음이 거의 끝나가도록 이시연은 전화를 받지 않았다. 전화를 끊은 한현진은 곧이어 강한서에게 연락했다. 몇 초 후 통화가 연결되었지만 전화를 받은 사람은 강한서가 아닌 민경하였다. 강한서는 오늘 중요한 회의가 있어 전화를 받을 상황이 아니었기에 민경하가 그의 휴대폰을 갖고 있었다. “사모님, 저예요. 대표님께서 지금 중요한 회의 중이시라 전화를 받기 힘든 상황이에요. 급한 일이시면 저에게 얘기하셔도 돼요. 급한 일이 아니면 회의가 끝나면 바로 전화 드리라고 대표님께 말씀 드릴게요.”“급한 건 아녜요. 제가 지금 급히 회사에 가봐야 하는데 아직 은서랑 같이 있어서요. 제가 조금 이따가 회사로 가는 길에 은서를 먼저 한
주혁은 한현진보다 조금 더 먼저 경찰서에 도착한 것 같았다. 한현진이 도착했을 땐 주혁은 입구에서 통화 중이었다. 안색이 어두웠지만 그는 목소리를 잔뜩 낮춘 채 대화하고 있었다. 그를 먼저 발견한 한현진이 가까이 다가가려 하자 주혁이 곧 경계하듯 고개를 돌렸다. 한현진을 본 주혁이 멈칫하더니 곧 전화를 끊고 다가왔다. “대표님? 여긴 어쩐 일이세요?”한현진이 말했다. “일이 좀 있어서요. 기사님도 일 보러 오셨어요?”짧게 대꾸한 주혁이 머뭇거리더니 말을 이었다. “8년 전 제 아들을 납치한 마지막 용의자가 잡혔다고 해서요. 조사에 협조해달라는 연락을 받고 왔어요.”한현진이 놀라운 듯 물었다. “아드님이 납치되었었어요?”주혁이 솔직하게 대답했다. “8, 9년 전 일이죠. 납치된 동안 납치범에게 맞아 치료 시간을 놓쳐 청력도 잃게 된 거예요. 그 사건을 맡은 형사님이 그러시더라고요. 사건이 종결되면 배상금을 어느 정도 받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요.”얘기하는 동안 주혁은 아래쪽에서 자신의 손을 지긋이 쳐다보는 시선을 느꼈다. 그는 입술을 짓이기며 조용히 손바닥을 다리에 대고 말을 이었다. “곧 아이에게 인공 달팽이관을 해줄 수 있을 것 같아요.”주혁의 이야기가 한현진의 호기심을 자극하긴 했지만 그녀는 예의상 더는 그 일에 관해 묻지 않았다. 한현진은 대화주제를 돌리며 주혁에게 물었다. “제가 전에 추천해준 의사 분께 가 보셨어요?”주혁이 멈칫하며 대답했다. “아직이요.”한현진에게는 꽤 의외의 대답이었다. 그녀는 주혁이 최대한 빨리 아이를 데리고 검사를 받으러 가 인공 달팽이관을 제작할 것이라 여겼다. 아무래도 주혁은 규정을 어기고 부업을 할 만큼 누구보다 간절하게 수술을 바라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한현진이 그에게 일반 병원보다 더 싼 가격에 수술을 받을 수 있는 의사를 추천해주었음에도 지금까지 검사조차 받지 않았다고 한다.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요즘 아내가 몸이 안 좋아서요. 전근된 곳이 전처럼
하온이는 적합한 골수를 기다리지 못한 것이 아니었다. 아이에게는 골수를 의식할 수 있는 기회가 두 번이나 있었다. 처음으로 하은이에게 기회가 찾아 왔을 때는 골수 의식의 최적의 타이밍이었다. 하지만 하온의 병을 치료하기 위해 그의 집안은 이미 빚더미에 앉은 상황이라 아무리 여기저기서 돈을 빌려도 수술비를 모을 수 없었다. 그러니 하온의 부모님은 어쩔 수 없이 마음을 독하게 먹고 수술을 포기한 채 아득바득 돈을 모으며 다음을 기약해야 했다. 하지만 곧 있을 줄 알았던 두 번째 기회는 그리 빨리 오지 않았다. 너무 오랜 기다림을 견뎌냈지만 하온의 몸은 이미 수술을 진행 할 수 없을 정도로 허약해져 있었다. 하온은 하루하루 날이 다르게 시들어 가는 꽃 같았다. 은서는 낮엔 하온이와 놀다가도 저녁엔 침대에 누워 눈물을 흘렸다. 하온이가 세상을 떠나기 전날 밤, 은서는 강한서 품에 안겨 닭똥 같은 눈물을 뚝뚝 흘렸다. 은서가 말했다. “삼촌, 저도 죽어요?”“삼촌, 우린 왜 이런 병에 걸린 거예요?”“삼촌 부자잖아요. 하온이 오빠가 수술할 수 있게 돈 빌려주시면 안 돼요? 제가 커서 돈 벌면서 갚을게요. 하온이 오빠 죽는거 싫어요.”강한서는 은서의 머리카락을 어루만지며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은서는 아직 너무 어려서, 인생은 가끔 이렇게 운명의 장난 앞에서는 무력하기만 하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목숨으로 돈을 맞바꾸기는 쉬운 일이었지만 돈으로 목숨을 살 수는 없었다. 강한서는 은서가 아직까지 그 일을 기억하고 있을 줄은 몰랐다. 그때의 은서는 고작 5살이었다. 눈시울이 붉어진 한현진은 말을 잇지 못했다. 이 세상에는 가여운 사람이 너무도 많았다. 그러니 혼자의 힘으로는 고작 얼마의 힘이나 보탤 수 있을까. 그렇다고 세상이 나아질 것이라 기대하는 아이의 기대를 깨트릴 수도 없었다. 한현진은 정중하게 물었다. “정말 이거 전부 기부할 거야? 기부하면 은서에겐 아무 것도 없는 거야.”고개를 끄덕이던 은서가 곧 찬란한 미소를 지었다. “저 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