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현은 창백해진 얼굴로 손가락을 빙빙 돌렸다. 그녀는 고개를 숙인 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 말들은 분명 송가람이 표정으로 눈치를 줬기에 내뱉은 것이었다. 만약 그 말을 꺼내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면 왜 현장에서는 제지하지 않은 걸까?한현진은 송가람보다 선물도 훨씬 좋은 것으로 준비했고 말도 그녀보다 더 잘했기에 송가람은 창피를 당해야 했고 그녀의 화를 돋웠다. 마음이 언짢아진 송가람은 화풀이 대상을 찾아 분노를 터뜨려야 했다. 그리고 주현이 바로 그 화풀이 대상이었다. 있는 대로 성질을 부린 송가람이 드디어 진정하자 주현은 그제야 용기를 내 입을 열었다. “팀장님, 사실 전 이것도 꼭 안 좋은 일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아요. 오늘 일로 최소한 사람들의 마음이 누구를 향해 있는지 확실히 알아볼 수 있었잖아요. 앞으로 어떤 사람을 곁에 두어야 하는지 이제 판단이 서시겠죠.”송가람은 이제야 이성을 되찾았다. 한현진은 준비한 옷들을 전부 나눠주지는 못했다. 서해금의 사람과 중립을 유지하고 있는 사람은 아직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다. 깔린느는 스트레인지가 아니었다. ‘한현진, 고작 이런 수단으로 사람의 마음을 사려고 했겠지만 네 생각처럼 쉽진 않을 거야.’머리로는 충분히 이해하고 받아들였지만 직원이 가득 모인 자리에서 창피를 당하고도 한 마디도 하지 못한다면 송가람은 도무지 그 분노를 잠재울 수가 없었다. 주현이 나지막이 말했다. “팀장님, 저에게 생각이 있어요. 한 사람을 벌해 백 사람이 경계하도록 해야 한다는 말이 있잖아요. 아랫사람에게 본때를 보여주어 누구의 물건을 가져도 되고 누구의 물건을 건드리지도 말아야 하는지 똑똑히 알려주면 돼요.”송가람이 멈칫하더니 고개를 들어 주현을 바라보았다. “어떻게요?”“금방 재무팀에서 온 은서하있잖아요. 재무팀은 전부 서 대표님 인맥이에요. 눈치도 없이 한현진이 주는 선물을 받았으니 본보기를 보일 제일 좋은 대상이죠.”잠시 침묵하던 송가람이 말했다. “엄마는 제가 아무런 이유 없이 직원을 자른
송가람의 인스타엔 전혀 관심이 없었던 강한서가 입꼬리를 씩 올리며 타자했다. [웨딩 사진 줄곧 네 휴대폰에 있었어?]한현진이 어리둥절해졌다. ‘지금 그게 중요한 거야?’강한서가 계속 질문을 이어갔다. [너 전엔 이혼하면서 사진 다 지웠다며? 나 속인 거였어?][...]강한서가 추측을 이어갔다. [사실 너 그때 나 안 좋아한다고 말한 것도 거짓말이었지? 현진아, 너 혹시... 결혼할 때부터 이미 나 좋아하고 있었던 거 아냐?]한현진이 답장했다. [그럴 리가. 내가 너와 결혼한 건 유상수에게 끌려 아저씨 같은 사람과 결혼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였어. 그때 나 좋다고 따라다닌 사람 많았거든? 정명석만 봐도 어떤 사람들이 날 좋아했었는지 바로 알 수 있잖아. 내가 그런 남자들을 두고 왜 널 좋아하겠어?]강한서가 천천히 문장 한 줄을 작성했다. [날 좋아해서, 그래서 나와 결혼했던 거지.][아니. 난 네 돈이 좋아서 결혼한 거야.]문자 전송을 누르자마자 강한서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사무실에 도청기가 있다는 사실을 잊지 않은 한현진은 감히 전화를 받을 수가 없어 통화를 거절해버렸다. 하지만 강한서는 다시 곧 전화를 걸어왔다. 한현진은 어쩔 수 없이 통화 버튼을 눌렀다. 그녀가 목소리를 잔뜩 낮추고 물었다. “뭔데?”‘꼭 통화를 해야 하는 거냐고.’강한서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한현진을 불렀다. “현진아.”한현진이 말했다. “듣고 있어. 말해.”강한서는 여전히 그녀의 이름을 부르고 있었다. “현진아. 현진아...”부를 때마다 조금씩 더 끈적끈적해지는 목소리에 한현진의 귓불이 빨갛게 물들었다. “대체 하고 싶은 말이 뭐야?”강한서는 말없이 그저 피식 웃음을 흘리더니 만족스럽다는 듯 그제야 나지막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네 마음엔 계속 나밖에 없었던 거지?”한현진은 휴대폰을 꽉 움켜쥐었다. 강한서의 웃음소리가 심장을 두드리기라도 하듯 찌릿한 기분이 들어 괜히 부끄러워졌다. 입가를 맴돌던 “아니”라는 대답을 다시 삼키고
당황하던 송가람의 표정이 미묘하게 변했다. 그녀는 얼른 변명하듯 말했다. “엄마는 장미과 중에서도 해당화에 알레르기가 있으신 거예요. 장미과 식물이 꼭 해당화인 건 아니잖아요. 분명 다른점이 있어요. 모란과 작약이 모두 작약과이긴 하지만 작약 알레르기가 있다고 해서 꼭 모란에도 알레르기 반응을 보이는 건 아니듯 말이에요. 같은 품종은 아니니까요.”“그렇군요.”고개를 끄덕이던 한현진이 또 물었다. “가람 언니, 이 꽃에도 아무런 반응이 없는 걸 보니 천식은 다 나은 거예요?”오늘 한현진에게 뒤통수를 맞은 송가람은 그녀와 대화를 나누며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생뚱맞게 천식에 대해 묻다니, 설마 그 핑계로 날 조향팀에서 내보내려는 거야?’송가람이 신중하게 대답했다. “많이 좋아졌어요. 그리고 전 원래 꽃가루 알레르기는 없었거든요. 아니면 조향팀에 들어올 수도 없었겠죠. 조향팀은 후각에 대한 요구가 높은 편이잖아요.”“그래요? 제가 가람 언니를 만나고 일 년도 되지 않았지만 그동안 언니가 발병하는 모습을 두 번이나 봤어요. 게다가 그 두 번 모두 약이 있었지만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것 같았어요. 그런 상태로 정말 조향팀에 있어도 괜찮아요? 가람 언니, 물론 일도 중요하지만 건강보다 중요한 건 없지 않겠어요? 만약 천식 때문에 자리에서 쓰러지기라도 한다면 아빠는 언니가 회사에 입사하도록 허락하신 걸 분명 후회하실 거예요.”송가람은 당연히 한현진이 건강을 핑계로 그녀를 깔린느에게 추방시키도록 놔둘 리가 없었다. 한현진의 말을 들은 송가람이 얼른 말했다. “현진 씨가 괜한 걱정을 했네요. 제가 조향팀으로 들어온 건 당연히 교수님께서도 허락하셨기 때문이에요. 교수님께서 저에게 검사 보고서를 주셨으니 그거로 제 지금 건강 상태가 조향팀에서 근무하기에 적합하다는 걸 증명할 수 있을 거예요.”“그래요?”송가람을 잠시 훑어보던 한현진이 물었다. “그러니까 향수를 제조하기 위한 재료들과 꽃가루에도 발병하지 않는다는 얘기죠?”송가람이 고개를 끄덕였다.
송가람이 아무런 소리조차 내지 않자 서해금이 목소리를 높였다. 입을 삐죽이던 송가람이 입술을 짓이기며 말했다. “알겠어요.”서해금이 말했다. “한현진은 애플 망고와 체리를 좋아해. 나중에 사람을 시켜서 준비해뒀다가 사무실로 보내줘. 그리고 인사팀에 얘기해서 기사도 한 명 붙여주고. 섭섭한 것 없이 하나하나 다 챙겨줘. 네 아빠도 네가 얼마나 노력했는지 아실 거야.”송가람이 뾰루퉁하게 대답했다. 그녀는 서해금에게 은서하의 얘기를 꺼내고 싶었다. 주현의 말이 계속 귀에서 맴돌았다. 송가람은 사실 도무지 이 일을 이렇게 넘길 수는 없었다. 이번 일을 기회로 삼아 직원들에게 보여주고 싶었다. 하지만 송가람이 입을 열기도 전에 서해금은 그녀에게 사고치지 말라고 당부한 후 급하게 전화를 끊었다. 입술을 앙다문 송가람은 어쩔 수 없이 휴대폰을 내리고 화장실로 향했다. 송가람이 화장실로 들어서려는데, 완전히 닫히지 않았던 문 사이로 대화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누군가 말했다. “샤넬 향수, 아르마니 파운데이션이라니. 대단하기도 하지. 난 또 얼마나 비싼 선물을 준다고. 그 오만한 말투 좀 봐. 누군 그 정도도 못 사는 줄 알아? 마음은 사고 싶고 돈 쓰기는 아까우면서 그까짓 자존심은 내려놓지도 못하면서 말이야. 그러니 너무 오냐오냐 키우면 애를 망친다는 얘기가 있는 거야. 서 대표님이 아무리 대단하신 분이면 뭐해. 딸은 저렇게 보잘것없는데.””그러니까 말이야. 고작 화장품 따위가 얼마나 한다고. 사용할 수나 있으면 그나마 다행이지. 안 맞는 제품이면 당근에 내놔도 모조품이라고 의심만 할 거야. 조금 실용적인 선물을 했으면 얼마나 좋아.””한 대표님께서 주신 선물은 완전 실용적이잖아. 옷 재질 좀 봐. 대박이더라니까. 방금 지은 씨가 사무실에서 입어봤는데 엄청 예쁜 거 있지. 방금 안 가진 거 후회돼 죽겠어. 자기들 고래 싸움에 우리 같은 작은 새우가 대체 무슨 죄야? 난 누가 대표가 되는 전혀 관심 없어. 난 그저 어느 대표님이 더 호탕하신 분인지, 그
한성우는 대답 대신 한현진을 관찰하기 시작했다. 잠시 후, 갑자기 웃음을 터뜨린 한성우가 그녀에게 물었다. “돈을 벌 수 있는 새로운 구멍인가요?”한현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곤 오늘 차미주가 그녀에게 알려준 웹드라마의 발전 가능성을 부풀리며 한성우를 낚으려 했다. “지상파 드라마는 손익분기점이 높지만 웹드라마는 아니예요. 투자가 적으니 수익률이 높죠. 게다가 지금은 제한도 많지 않아 어떤 장르든 전부 촬영이 가능해요. 지금 웹드라마에 뛰어들지 않았다가 나중에 다른 제작사들이 웹드라마로 재미를 봤을 땐 이미 아무런 기회도 없을 거예요.”고양이에게 간식을 먹이던 한성우가 웃으며 말했다. “형수님, 그렇게 돈이 되는 프로젝트를 왜 혼자선 하시지 않으시는 거예요?”한현진이 한숨을 내쉬었다. “안 하고 싶은 게 아니라, 지금 몸이 그럴 수 있는 상황이 아니잖아요.”한성우는 그 핑계를 받아들인 듯 시선을 내리고 고양이를 만지며 또 질문을 던졌다. “아이디어는 좋네요. 하지만 대본을 찾는게 쉬운 일은 아니잖아요.”한현진이 말했다. “미주에게 부탁해요. 미주 대본 잘 쓰잖아요. 미주에게 대본을 맡기면 그 기회에 사이가 좋아질 수도 있고 성우 씨 능력도 보여줄 수 있잖아요. 미주는 저와는 달리 똑똑한 남자를 좋아하는 편이라 일 할 때 지성적인 남자가 완전 취향이거든요.”한성우가 피식 웃었다. 한현진의 말을 믿은 것인지 알 수는 없었다. 잠시 후 그가 입을 열었다. “꽤 좋은 제안이네요.”한현진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러니까 성우 씨 말은...”한성우가 말했다. “형수님, 어떤 장르든 상관없어요. 네가 제작비를 전액 투자하는 것도 괜찮아요. 하지만 딱 한 가지 조건이 있어요.”“...”한현진이 헛웃음을 지었다. “성우 씨 돈 벌라고 한 말인데 저와 무슨 상관이 있다고 그래요.”“아, 네.”한성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요. 그럼 됐어요. 전 지금 돈 버는 데엔 별 관심이 없거든요. 한서는 먹여 살려야 하는 마누라에 자식까지 있
차미주는 한현진을 보자마자 그녀를 끌고 한참을 푸념을 늘어놓았다. 출근하고 있었던 일부터 일생적인 것까지 전부. 그녀의 말에서 얼마나 충실한 하루하루를 보냈는지 알 수 있었다. 꿀꺽꿀꺽 물을 마신 차미주는 그제야 본론으로 돌아갔다. “아, 맞다. 너 문자로 대본 써달라고 했잖아. 무슨 웹드라마인데?”한현진이 가방에서 오후 내내 사무실에서 끄적인 콘티를 꺼내 차미주에게 보여주었다. “대충 이런 스토리와 인물 설정이야. 이걸 바탕으로 대본 쓸 수 있을지 봐줘.”그녀가 가져온 콘티를 본 차미주가 웃으며 대답했다. “너무 가능하지. 하지만 이런 서술 방식으론 안 돼. 스토리가 너무 고구마라 시청자들이 좋아하지 않을 거야. 지금은 주로 복수 장르가 인기거든. 스토리는 그대로 두고 착안점만 조금 바꾸면 될 것 같아.”차미주는 한현진에게 그녀가 생각한 스토리 라인을 들려주었다. 차미주의 말을 들은 한현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네가 말한 스토리를 들었을 땐 재밌을 것 같아.”절정이 가득한 차미주가 말했다. “내가 요 며칠 야근해서라도 대본 완성시킬게. 나중에 대본 나오면 한 번 읽어보고 다시 회의하자.”“그래.”주방에서 나온 한성우가 외투를 입으며 말했다. “도둑아, 생각이 없어서 가서 사올게. 불 좀 봐줘.”“잠깐만. 나랑 현진이가 갈게. 넌 하던 일마저 해.”차미주가 몸을 일으켜 한현진을 잡아끌었다. “생강만 사? 아니면 다른 거도 살까?”한성우가 외투를 내려놓았다. “다른 건 네가 봐서 사. 간식도 다 떨어졌어. 먹고 싶은 거로 골라. 현관 서랍에 현금 있어.”집에서 나온 후 차미주는 몇 번이나 입술을 달싹이며 말을 꺼내지 못했다. 그런 그녀를 힐끔 쳐다보던 한현진이 말했다. “대체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야?”차미주가 한숨을 내쉬었다. “설에 엄마에게 남자친구가 생겼다고 얘기했어.”그 말에 한현진은 깜짝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다. ‘벌써 얘기했구나.’하지만 한현진은 곧 만약 아주머니와 얘기가 잘 끝났다면 이렇게 차
한현진은 순간 멍해졌다. 그녀는 차미주의 말이 이해가 되는 것 같기도 아닌 것 같기도 했다. 그런 한현진의 반응에 차미주가 더 직설적으로 설명했다. “그러니까 엄마 말은, 꼭 아이가 있어야 한다는 거야. 만약 개자식이 아이를 낳을 수 없다면 죽마고우든 뭐든 때려서라도 갈라놓겠다는 거지. 엄마는 왕위를 이를 사람이 필요한 건데 난 가망이 없는 것 같으니 손주를 키워보시겠대.”“...”한현진의 인생 대본이 차미주 인생에서 거꾸로 일어나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조금 혼란해진 한현진이 물었다. “아주머니가 물려주고 싶어 하시는 왕위가 대체 뭐야?”우물쭈물 거리던 차미주가 한참만에야 옆에 있던 데일리마트를 가리키며 말했다. “저 마트 보여?”한현진이 처미주의 손길을 따라 시선을 돌렸다. 전국 10위 안에 드는 대형마트였다. ‘저 마트가 미주네 왕위와 무슨 상관이 있다는 거지?’그리고 곧 한현진의 귓가로 제일 친한 친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저 마트가 바로 엄마가 창립하신 거야. 마트 외에도 야채와 과일 재배기지, 축산물 기지, 각종 음료와 육류 가공 공장도 있어...”충격에 빠진 한현짐은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평소엔 워낙 티 내지 않고 지낸데다 한현진 보다 더 따졌던 탓에 그녀는 차미주를 일반 월급을 받으며 살아가는 집안의 딸 정도로만 생각하고 있었다. 한현진은 단 한 번도 자신의 친구가 숨겨진 부자일 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이제 생각해 보니 사실 차미주도 완벽하게 숨긴 것은 아니었다. 예를 들면 그녀의 손에는 언제나 데일리마트의 상품권이 있었다. 데일리마트는 절대 싼 편이 아니었다. 차미주는 다른 마트에서 물건을 살 때면 몇 번이고 고민하며 골랐다. 하지만 데일리마트에서는 가격을 보지도 않았다. 심지어 어느 한현진의 생일엔 데일리마트의 100만원 상품권을 선물로 주기도 했다. 당시 한현진은 차미주가 술에 취해 비싼 상품권을 샀다고 생각해 감히 선물을 받지도 못했었다. 그리고 신미정이 한현진의 카드를
“그럼 넌 지금 어떻게 할 생각이야?”한현진이 물었다. 그 말에 차미주가 한숨을 내쉬었다. “개자식은 눈치가 없기가 나무 같다니까. 내가 어젯밤 잠옷만 입고 개자식 방으로 갔더니 이 자식이 글쎄 밤새 같이 게임만 한 거 있지. 레벨 올리려다 잠들어버렸다니까.”차미주가 분노를 터뜨렸다. “개자식, 야한 농담은 툭툭 잘만 던지더니 기회를 줄 땐 바보처럼 가만히 있더라고. 대체 머릿속에 뭐가 들었는지 모르겠어.”그녀의 말에 한현진이 웃음을 터뜨렸다. 두 사람은 정말 환상의 짝꿍 같았다. 한 명은 부모님을 찾아뵙고 결혼 허락을 받는 모든 절차를 거친 후 첫날밤을 치루기 위해 갖은 애를 썼고 다른 한 명은 온통 첫날밤을 치룰 생각뿐이었다. 심란해하던 차미주가 웃음을 터뜨린 한현진을 보더니 갑자기 물었다. “현진아, 넌 그게 하고 싶을 땐 어떻게 강한서가 눈치 챌 수 있게 해?”한현진은 순간 웃을 수가 없어졌다. 그런 한현진과 달리 차미주가 눈을 반짝였다. “네 경험 좀 알려줘. 나도 개자식 쓰러트리게.”“... 나도 그 방면엔 경력이 전혀 없어.”차미주가 한현진을 노려보았다. “경력이 없이 네 아이는 어떻게 온 건데?”비록 한현진 본인도 스스로가 뻔뻔한 편이라고 생각했지만 배우겠다는 일념 하나로 이렇게 꼬치꼬치 캐묻는 사람 앞에선 그 정도는 아무 것도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강한서에게 어떻게 눈치를 줬냐고? 강한서는 목젖에 입맞추면 참질 못했어...’마른기침을 한 한현진이 아무 말이나 내뱉었다. “그건 말이야. 분위기를 봐야지. 분위기만 생기면 자연스럽게 되는 거야.”“그럼 그 분위기는 어떻게 만드는데?”한현진은 다시 한 번 말문이 막혔다. 그녀는 한참만에야 입을 열었다. “아니면 같이 살래?”차미주가 어리둥절해졌다. 한현진이 보낸 코스프레 의상을 판매하는 링크를 클릭한 차미주는 얼굴을 붉히며 한현진을 노려보았다. “너희 두 사람 너무 안 순결한 거 아니야?”한현진이 생각했다. ‘내가 너에게 보내준 바니 의상은 이미
주현의 생각은 성월과 달랐다. 송가람은 사랑에 눈이 멀어 남자의 사랑을 바랐지만 주현은 아니었다. 그녀의 목표를 애초부터 매우 명확했다. 주현은 상대방이 자신에게 줄 수 있는 신분과 지위를 노렸다. 그건 20년, 30년을 노력해도 가질 수 없는 것들이었다. 지금 주현이 원하는 모든 것을 얻을 수 있는 지름길이 눈앞에 놓였는데 그 기회를 잡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하지만 주현은 성월의 성격을 잘 알았다. 성월은 반평생을 야심으로 가득 찬 서해금 곁을 지키며 진작 서해금의 충직한 개가 되었다. 성월에게 신분은 뛰어넘을 수 없는 벽 같은 거였고 자신의 미래는 스스로 기회를 잡아 개척해 나가야 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서해금 역시 자신의 두 손으로 그 자리에 오른 것은 아니었다. 송병천과의 결혼이 아니었다면 서민 출신에 남편을 잃고 아이를 키우는 싱글맘이 무슨 수로 지금의 자리에 오를 수 있었을까?‘웃기지 말라 그래.’하지만 그 말을 주현은 감히 성월 앞에선 할 수 없었다. 주현은 애교를 부리며 말했다. “이모, 도와줘요. 신씨 가문으로 돌아가든 아니든 저 한 번 해보고 싶어요. 송가람 씨와 조금이라도 가까이 할 수 있는 일로 부탁해요. 활동이든 파티든 데리고 다닐 수 있는 자리로요. 그래야 신씨 가문에 호감을 살 수 있죠.”성월의 학창 시절, 그녀의 집안은 그야말로 찢어지게 가난했다. 주현의 부모님이 빌려주신 돈으로 급한 불을 끈 덕에 성월은 늘 주현의 집안에 감사한 마음을 갖고 있었다. 주현의 애교에 견디지 못한 성월이 한숨을 내뱉으며 말했다. “송가람 씨 비서로 전근 보내볼게. 너, 네 남자친구한테 기본적인 건 잘 가르쳐. 묻는 말에 아무 것도 대답 못하면 안 돼.”주현이 순간 환한 미소를 지으며 성월에게 팔짱을 끼고 달콤한 목소리로 말했다. “고마워요, 이모! 역시 이모가 날 제일 예뻐할 줄 알았어. 주말에 집에 와서 식사해요. 안 가신지 꽤 됐잖아요...”한편, 사무실로 돌아온 한현진의 마음은 쉬이 가라앉지 않았다. 만약 어제 바로 세정제
서해금이 입술을 짓이기며 중얼거렸다. “이렇게 냉정하다니, 한현진 답지 않아.”성월이 말했다. “사실 전 그렇게 냉담한 것도 당연하다고 생각해요. 오일을 깨뜨린 것도 주혁 씨였고 몰래 부업을 하다 한 대표님 얼굴에 먹칠한 것도 주혁 씨잖아요. 그러니 당연히 원망하는 마음이 있을 거예요.”말이 없던 서해금이 잠시 후 입을 열었다. “인사팀에 잠깐 다녀와요. 일단 주혁을 가람이 운전기사로 전근시켜요.”성월이 놀란 얼굴로 말했다. “대표님, 가람 아가씨에게 운전기사를 붙일 생각이시면 제가 다른 기사님을 찾을게요. 회사에는 지금 마침 새로 입사한 젊은 신입사원들이 많아요. 어리고 건강하고 운전 경력도 전부 5년이 넘었어요. 주혁 씨는 한현진 곁에서 한동안 일을 하신 분인데, 가람 아가씨 운전기사로는 적합하지 않을 것 같아요.”“전근시키라고 하면 시켜요. 제가 이렇게 하는 덴 이유가 있어요. 그러니 성 비서는 나서지 말아요.”성월이 다급히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네.”성월이 사무실을 나서자 주현이 곧바로 그녀에게 다가갔다. “이모, 어떻게 됐어요? 대표님께 말씀 드렸어요?”성월이 고개를 가로 저었다. “대표님께서 이미 송가람 씨에게 다른 운전기사를 붙이셨어. 이미 결정된 일이야.”순간 주현은 조바심이 났다. “왜 갑자기 결정 난 거예요? 회사에서 요즘 새로 신입사원 모집했잖아요. 보안팀은 싫어할 거란 말이에요.”성월이 말했다. “대표님께서 주혁을 송가람 씨 운전기사로 전근시켰어. 지금 인사팀에 가서 그 일부터 처리해야 해.”그 말을 들은 주현이 투덜거렸다. “한현진 밑에 있던 사람이잖아요. 게다가 본인 상사를 배신까지 했고요. 대표님은 무슨 생각으로 그런 사람을 딸 운전기사로 쓰시겠다는 거예요?”순간 얼굴을 일그러뜨린 성월이 주현을 구석진 곳으로 끌고 갔다. 성월은 주변을 확인하고 나서야 주혁의 팔을 내치며 차가운 얼굴로 말했다. “너 미쳤어? 여긴 회사야. 여기서 집인 줄 알고 그렇게 큰 소리로 대표님 뒷담화를 하는 거야?
직원들은 열띤 토론을 벌이고 있었다. 어떤 직원은 회사의 조치가 꽤 인간적이라며 칭찬했고 또 어떤 직원은 아무리 화장실 청소라도 그렇게 부식성이 강한 세제를 쓰진 말았어야 했다며 안전 문제를 인지하지 못한 회사의 관리에 문제가 있다고 비난했다. 이번 일은 단순히 청소 직원이 화상을 입은 것으로 그쳤지만 만약 누군가 범행을 저지르려고 한다면 부식성이 강한 세정제는 범죄자에게 칼을 준비해준 것과 다를 것이 없는 꼴이었다. 의문을 제기하던 직원이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돌려 한현진과 눈을 마주쳤다. 그제야 실언했다는 것을 인지한 직원이 다급하게 말했다. “대표님, 전 회사에서 조치를 제대로 못했다는 뜻이 아니라요. 단지 위험 요소가 될 수도 있는 거니까, 저도 모르게 제일 최악의 상황을 상상해본 거예요.”한현진이 고개를 들었다. “무슨... 위험 요소요?”그 직원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못... 못 들으셨어요?”“죄송해요.”한현진이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조금 전 친구 문자에 답장하느라 못 들었어요.”직원이 입술을 달싹이며 말을 잇지 못했다. 옆에 있던 또 다른 직원이 얼른 말을 이었다. “회사에서 며칠 동안 청소하시는 직원분들이 다치는 사고가 있었잖아요. 그 일 때문에 다들 마음이 뒤숭숭해요.”한현진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한 직원이 말을 이었다. “아, 맞다. 대표님. 다치신 분 중에 대표님이 아는 사람도 있어요. 전에 대표님 운전 기사셨던 주혁 기사님이요. 그 분이 제일 심하게 다치셨어요.”한현진이 미간을 찌푸렸다.“기사님이요? 확실해요? 어제 볼 일 보러 갔다가 기사님 만났을 때까지만 해도 멀쩡하셨는데. 언제 다치신 거예요?”한현진의 말에 직원이 멍해졌다.“그럴 리가요. 며칠 전에 이미 다치셨어요. 대표님과 비슷한 시기에 휴가를 내셨어요.”한현진이 곰곰이 생각했다. “그날 제가 급한 일 때문에 길게 얘기를 나누진 못했어요. 손에 붕대 같은 건 본 기억도 없고 기사님께서도 저한테 그런 얘기는 없으셨는데... 심하게 다치셨어
막 전화를 끊으려던 그 순간, 박안수가 다시 불렀다.“아, 그리고...”“뭔데?”“오늘 경찰서에서 한현진과 마주쳤어.”서해금의 표정이 순식간에 일그러졌다. “한현진이 경찰서엔 왜?”“나도 자세한 건 안 물어 봐서 잘 몰라. 하지만 갑자기 일이 생겨서 간 것 같아. 혼자가 아니라 6, 7살 쯤 되는 어린 아이와 함께 왔었어.”미간을 찌푸리며 잠시 생각하던 서해금이 또 물었다. “한현진이랑 얘기했어? 무슨 얘기했는데?”“괜히 의심할까봐 내가 경찰서에 간 이유를 사실대로 얘기했어. 한현진도 더 묻지 않았고.”우물 쭈물거리며 숨기는 것보다는 차라리 당당하게 대답하는 편이 오히려 의심을 덜 사는 방법이었다. “그게 다야?”“응.”생각의 잠겼던 해금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경찰한테 손에 상처는 뭐라고 얘기했는데?”“회사에서 청소하다가 부식성 제품에 다친 거라고 했어.”서해금이 원망하듯 말했다. “왜 회사에서 다친 거라고 했어. 회사에서 그렇게 부식성이 강한 제품을 쓸 리가 없잖아.”“그렇다고 내가 집에서 다친 거라고 할 순 없잖아. 집에는 회사에서 다친 거라고 했는데. 조사 협조 요청을 나한테만 하는 게 아니잖아. 게다가 그 두 사람은 거짓말을 아예 못 해. 만약 경찰이 내 손에 관해 묻기라도 한다면 바로 들켜 버리는 거잖아.”서해금이 굳은 얼굴로 말했다. “여자는 미쳤고 애는 귀가 먹었는데, 그런 병X도 제대로 통제 못 해?”순간 얼굴을 찡그린 박안수가 말했다. “말 그렇게 하지 마. 두 사람 불쌍한 사람들이야.”“뭐가 불쌍해. 도박쟁이 가정폭력범을 성실하고 부지런한데다 박학다식한 남편으로 바꿔줬는데. 우리한테 고마워해도 모자라.”서해금의 말에 박안수는 왠지 마음이 불편해졌다.너는 대화를 이어 가고 싶지 않았던 서해금이 당부하며 말했다. “이만 끊어. 가람이한테 당신을 기사로 쓰라고 얘기하러 갈 거야. 소식 기다려.”박안수는 목 끝까지 차오른 말을 삼키며 나지막하게 대답했다.“그래.”전화를 끊은 서해금은 아무리 생
“아니.”서해금이 미간을 찌푸렸다. 도무지 마음을 놓을 수 없었다. “경찰에겐 뭐라고 했어?”수화기 너머의 사람이 담담하게 대답했다. “사실대로 얘기했어.”“박안수!”서해금은 참기 힘들 정도로 화가 끓어올랐다. “지금이 농담할 때야?”“농담 아냐.”말하는 사람의 목소리가 더 가라앉았다. “그럼 내가 뭐라고 말할까? 네가 준 신분이니 난 당연히 주어진 대본대로 연기할 수밖에. 그럼 내가 난 박안수라고 얘기했어야 해? 죽은지 27년도 더 된 사람이야. 박안수가 어떻게 돌아와?”그의 목소리엔 고통과 원망으로 가득 했다. 그 순간, 서해금의 얼굴이 끔찍하게 일그러졌다. “지금 날 탓하는 거야?”말이 없던 상대방은 잠시 후 덤덤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런 적 없어.”“박안수, 지금 날 탓하는 거잖아.”서해금이 공격적인 말투로 말을 이었다. “그때 빚을 진 사람도 당신이고, 그 아이디어를 낸 사람도 당신이었어. 당신이 가람이를 키울 능력이 없었던 거고, 당신이 가람이가 더 좋은 환경에서 살길 바랐고, 그래서 나한테 도와달라고 사정한게 당신이었어.”“내가 당신한테 돈 안 줬어? 지금껏 내가 당신한테 준 돈이 얼만데. 당신은 얼마든지 해외에서 지금보다 더 나은 인생을 살 수 있었어. 굳이 한주에 남겠다고 한 건 당신이야. 내가 당신에게 그럴 듯한 신분을 만들어주지 않았으면 당신이 무슨 명분으로 가람이 앞에 나타날 건데? 당신이 이렇게 당당하게 가람이를 만날 수나 있었을 것 같아?”목이 메인 남자는 한참만에야 눈을 감으며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 “네 탓한 거 아냐. 난 그저 이렇게 조마조마 마음 졸이는 생활에 지쳤을 뿐이야. 난 집에서도 감히 옷을 못 벗어. 잠도 깊게 잘 수가 없어. 길에서는 아는 사람이라도 만나면 그 사람은 날 보면서 반갑게 인사하는데 난 그 사람이 누군지도 몰라. 그러면서도 아는 척, 반가운 척 인사를 해야 해. 심지어 아무리 아파도 검사도 못 해. X발, 병원도 가질 못한다고!”남자가 깊은 숨을 몰아쉬며 말했다.
“네, 볼 일 봐요. 회사로 복귀하면 다시 얘기하죠.”한현진이 전화를 끊었을 때 차는 이미 회사에 도착했다. 차에서 내린 한현진은 곧바로 로비로 향했다. 회사의 프런트가 한현진에게 정중하게 인사를 건넸다. 짧게 인사를 받은 엘리베이터에 탄 한현진은 사무실이 아닌 2층을 눌렀다. 회사 건물은 2층부터 화장실이 있었기에 1층엔 화장실이 없었다. 한현진은 아예 2층부터 일일이 확인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오늘 역시 공교롭게도 2층에 도착한 한현진은 마친 청소 중인 직원과 마주쳤다. 근무 시간이 화장실엔 사람이 없었다. 직원은 바닥을 닦고 있었고 세면대와 멀지 않은 곳에 청소차가 세워져 있었다. 그 위엔 청소 용품으로 가득 했다. 한현진은 고개를 숙여 청소 용품을 확인했다. 청소차엔 수많은 플라스틱 통과 병이 있었고 그 안엔 전부 액체가 담겨져 있었다. 굳이 뚜껑을 열지 않아도 소독제의 냄새가 올라왔다. 그러나 그 제품들은 그 어떤 별다른 표시도 되어 있지 않았다. ‘하지만 부식성이 그렇게 강한 용액을 플라스틱 병에 담진 않았을 거 아냐.’“누구세요?”청소차를 관찰하는 한현진의 등 뒤로 사투리 억양이 섞인 여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한현진이 몸을 돌리니 청소 중이던 직원이 보였다. 그 직원은 아래층 청소를 도맡아 하는 분이라 한현진을 본 적이 없었다. 단순히 한현진이 화장실을 사용하려는 것이라 생각한 직원이 말했다. “아직 소독제를 쓰지 않았으니까 볼 일 보려면 얼른 봐요.”한현진은 그 말에 대답하지 않은 채 청소차의 물건들을 쳐다보며 물었다. “아주머니, 여쭤볼게 있어요. 화장실 청소를 하실 때 어느 브랜드의 농도가 얼마인 세정제를 사용하세요?”직원이 말했다. “도매 시장에서 파는 회색통이요. 커다란 거. 엄청 싸요. 이름이 뭔지는 모르겠는데. 사려고요?”한현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화장실이 항상 깨끗해서요. 저도 집에서 써보려고요.”청소 직원이 얼른 한현진을 말렸다. “절대 사지 마요. 변기의 때는 우리가 항상 솔로 조금씩 닦
또 다른 경찰이 물었다. “그래서 지장은 찍을 수 있어요?”“손이 그 지경인데 지장을 어떻게 찍어? 손을 보니까 지장은 무리인 것 같아서 포기했지. 어차피 지문도 완전히 회복하긴 힘들 것 같았어. 그래서 애들한테 홍채와 성문을 따라고 했어.”말을 마친 키 큰 형사가 한현진에게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나중에 회사에 가셔서 얘기 좀 하세요. 그렇게 부식성이 강한 제품은 얼른 교체하라고요. 만약 누가 나쁜 마음이라도 먹고 그 제품으로 가해라도 하면 회사에서도 책임지셔야 해요.”생각에 잠겼던 한현진이 그 말에 얼른 대답했다. “네, 알겠어요. 알려주셔서 고마워요.”경찰서에서 나온 한현진은 내내 미간을 찌푸린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조금 전 은서가 본 것은 주혁의 태반이나 점이 아니라 청소 용액에 부식되어 생긴 상처였다. 어차피 납치 사건의 범인은 이미 잡혀 경찰서에 있는데, 대체 뭐가 그렇게 급해서 상처를 치료도 하지 않고 경찰서로 달려온 것일까?한현진은 아무리 머리를 굴려도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게다가 이해되지 않는 부분이 하나 더 있었다. 회사에선 그런 고농도의 부식성 제품을 구매했을 리가 없었다. 형사의 말처럼 그런 제품은 위험부담이 너무 컸다. 한현진은 이시연의 연락처를 찾아 그녀에게 전화를 걸었다. 하지만 연결음이 거의 끝나가도록 이시연은 전화를 받지 않았다. 전화를 끊은 한현진은 곧이어 강한서에게 연락했다. 몇 초 후 통화가 연결되었지만 전화를 받은 사람은 강한서가 아닌 민경하였다. 강한서는 오늘 중요한 회의가 있어 전화를 받을 상황이 아니었기에 민경하가 그의 휴대폰을 갖고 있었다. “사모님, 저예요. 대표님께서 지금 중요한 회의 중이시라 전화를 받기 힘든 상황이에요. 급한 일이시면 저에게 얘기하셔도 돼요. 급한 일이 아니면 회의가 끝나면 바로 전화 드리라고 대표님께 말씀 드릴게요.”“급한 건 아녜요. 제가 지금 급히 회사에 가봐야 하는데 아직 은서랑 같이 있어서요. 제가 조금 이따가 회사로 가는 길에 은서를 먼저 한
주혁은 한현진보다 조금 더 먼저 경찰서에 도착한 것 같았다. 한현진이 도착했을 땐 주혁은 입구에서 통화 중이었다. 안색이 어두웠지만 그는 목소리를 잔뜩 낮춘 채 대화하고 있었다. 그를 먼저 발견한 한현진이 가까이 다가가려 하자 주혁이 곧 경계하듯 고개를 돌렸다. 한현진을 본 주혁이 멈칫하더니 곧 전화를 끊고 다가왔다. “대표님? 여긴 어쩐 일이세요?”한현진이 말했다. “일이 좀 있어서요. 기사님도 일 보러 오셨어요?”짧게 대꾸한 주혁이 머뭇거리더니 말을 이었다. “8년 전 제 아들을 납치한 마지막 용의자가 잡혔다고 해서요. 조사에 협조해달라는 연락을 받고 왔어요.”한현진이 놀라운 듯 물었다. “아드님이 납치되었었어요?”주혁이 솔직하게 대답했다. “8, 9년 전 일이죠. 납치된 동안 납치범에게 맞아 치료 시간을 놓쳐 청력도 잃게 된 거예요. 그 사건을 맡은 형사님이 그러시더라고요. 사건이 종결되면 배상금을 어느 정도 받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요.”얘기하는 동안 주혁은 아래쪽에서 자신의 손을 지긋이 쳐다보는 시선을 느꼈다. 그는 입술을 짓이기며 조용히 손바닥을 다리에 대고 말을 이었다. “곧 아이에게 인공 달팽이관을 해줄 수 있을 것 같아요.”주혁의 이야기가 한현진의 호기심을 자극하긴 했지만 그녀는 예의상 더는 그 일에 관해 묻지 않았다. 한현진은 대화주제를 돌리며 주혁에게 물었다. “제가 전에 추천해준 의사 분께 가 보셨어요?”주혁이 멈칫하며 대답했다. “아직이요.”한현진에게는 꽤 의외의 대답이었다. 그녀는 주혁이 최대한 빨리 아이를 데리고 검사를 받으러 가 인공 달팽이관을 제작할 것이라 여겼다. 아무래도 주혁은 규정을 어기고 부업을 할 만큼 누구보다 간절하게 수술을 바라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한현진이 그에게 일반 병원보다 더 싼 가격에 수술을 받을 수 있는 의사를 추천해주었음에도 지금까지 검사조차 받지 않았다고 한다.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요즘 아내가 몸이 안 좋아서요. 전근된 곳이 전처럼
하온이는 적합한 골수를 기다리지 못한 것이 아니었다. 아이에게는 골수를 의식할 수 있는 기회가 두 번이나 있었다. 처음으로 하은이에게 기회가 찾아 왔을 때는 골수 의식의 최적의 타이밍이었다. 하지만 하온의 병을 치료하기 위해 그의 집안은 이미 빚더미에 앉은 상황이라 아무리 여기저기서 돈을 빌려도 수술비를 모을 수 없었다. 그러니 하온의 부모님은 어쩔 수 없이 마음을 독하게 먹고 수술을 포기한 채 아득바득 돈을 모으며 다음을 기약해야 했다. 하지만 곧 있을 줄 알았던 두 번째 기회는 그리 빨리 오지 않았다. 너무 오랜 기다림을 견뎌냈지만 하온의 몸은 이미 수술을 진행 할 수 없을 정도로 허약해져 있었다. 하온은 하루하루 날이 다르게 시들어 가는 꽃 같았다. 은서는 낮엔 하온이와 놀다가도 저녁엔 침대에 누워 눈물을 흘렸다. 하온이가 세상을 떠나기 전날 밤, 은서는 강한서 품에 안겨 닭똥 같은 눈물을 뚝뚝 흘렸다. 은서가 말했다. “삼촌, 저도 죽어요?”“삼촌, 우린 왜 이런 병에 걸린 거예요?”“삼촌 부자잖아요. 하온이 오빠가 수술할 수 있게 돈 빌려주시면 안 돼요? 제가 커서 돈 벌면서 갚을게요. 하온이 오빠 죽는거 싫어요.”강한서는 은서의 머리카락을 어루만지며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은서는 아직 너무 어려서, 인생은 가끔 이렇게 운명의 장난 앞에서는 무력하기만 하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목숨으로 돈을 맞바꾸기는 쉬운 일이었지만 돈으로 목숨을 살 수는 없었다. 강한서는 은서가 아직까지 그 일을 기억하고 있을 줄은 몰랐다. 그때의 은서는 고작 5살이었다. 눈시울이 붉어진 한현진은 말을 잇지 못했다. 이 세상에는 가여운 사람이 너무도 많았다. 그러니 혼자의 힘으로는 고작 얼마의 힘이나 보탤 수 있을까. 그렇다고 세상이 나아질 것이라 기대하는 아이의 기대를 깨트릴 수도 없었다. 한현진은 정중하게 물었다. “정말 이거 전부 기부할 거야? 기부하면 은서에겐 아무 것도 없는 거야.”고개를 끄덕이던 은서가 곧 찬란한 미소를 지었다. “저 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