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방 문을 힐끔 쳐다보던 한현진이 목소리를 낮추며 한성우에게 말했다. “운동 열심히 하고 엽산도 좀 먹어요. 성우 씨 소원이 곧 이뤄질 거예요.”한성우는 어리둥절해졌다. 그는 테이블 위에 놓인 과일 포크를 한현진에게 건넸다. 그는 또 과일 접시를 한현진 쪽으로 밀며 겸손한 태도로 조언을 구했다. “운동이라뇨. 도둑이가 절 데리고 장모님 만나러 가게 설득해달라고 했잖아요.”포크를 건네받은 한현진이 사과를 찍으며 말했다. “방금 제가 말한게 바로 성우 씨가 최대한 빨리 미주 집에 인사갈 수 있는 방법이에요.”멍해진 한성우가 갑자기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일단 일을 저지르고 나중에 해결하란 얘기에요?”‘엽산은 임신을 위해 먹는 거잖아.’잠시 침묵하던 한현진이 말했다. “그렇게 생각해도 돼요.”‘성우 씨 미래 장모님께서 성우 씨가 아이를 낳지 못할까 봐 먼저 테스트해보는 거라고 말할 수는 없잖아요. 얼마나 자존심 상하겠어요.’한현진을 보는 한성우의 눈빛이 순간 달라졌다. “미주는 형수님을 제일 좋은 친구로 여기는데 형수님은 대체 어떻게 그걸 방법이라고 알려주시는 거예요.”“성우 씨가 최대한 빨리 아주머니에게 인정받고 싶다면서요. 그게 얼마나 빠른 방법인데요. 아이가 생겼는데 설마 아주머니께서 결혼을 반대하시겠어요?”한성우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형수님은 미주 제일 친한 친구잖아요. 지금 절 부추겼다가 제가 책임지지 않으면 어쩌시려고요. 잘 들어요. 제가 미주와 결혼하고 싶은 건 진심이지만, 절대 그런 비열한 수단은 쓰지 않을 거예요.”말하며 한성우는 한현진 손에 들린 포크를 빼앗으며 그녀를 노려보았다. “무슨 자격으로 과일을 먹어요!”“...”한현진이 막 입을 열어 변명하려는데 국을 들고 나오던 차미주가 마침 그 장면을 목격하고는 소리쳤다. “개자식아, 누구한테 소리를 지르는 거야.”한성우는 차미주를 떠보라고 한현진을 꼬드겼던 일을 털어놓을 수는 없었다. 하지만 양심도 없는 강한서의 와이프에게 간 쓸개 다 내줄 것처럼 구는
한현진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럼 넌 어떻게 할 생각이야?”차미주가 머리를 쥐어뜯더니 한참 만에야 입을 열었다. “일단 한성우랑 잠자리를 가져서 임신하면 결혼하고 임신이 안 되면 그땐 다른 방법을 생각해 봐야지. 어차피 난 이번 생은 한성우로 정했어. 내가 개자식과 만나는 것 때문에 엄마와 갈등을 빚고 싶지 않아. 나 키우느라 너무 많이 고생하셨잖아. 정말 그런 상황이 온다고 해도 절충안을 찾을 수 있었으면 좋겠어.”본인의 커리어가 있는 탓일까, 차미주의 어머니는 딸이 남편 될 사람을 고르는 것에 꽤 자신이 있었다. 한현진은 심지어 차미주의 어머니는 단순히 차미주와 한성우에게 아이가 생겨야 결혼을 시키려는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어쩌면 이 기회를 빌려 한성우를 테스트하고 싶은 걸지도 몰랐다. 욱하며 성질을 부리던 한성우는 곧 화를 가라앉히고 강한서가 도착한 후 함께 식탁에 둘러앉아 식사했다. 집으로 돌아가는 차에서 한현진은 한성우에게 문자를 전송했다. 대충 자꾸 혼자 추측하지 말고 차미주와 얘기를 많이 나눠보라는 내용이었다. 그러면서 한현진은 은근히 차미주의 어머니가 아이를 좋아한다는 정보를 흘리며 그가 눈치채기를 바랐다. 한현진의 옆에 앉아 힐끔 문자 내용을 확인하던 강한서가 물었다. “무슨 잘못을 했는데 이렇게 비굴해 보이는 말투로 문자를 하는 거야?”한현진이 대답했다. “전에 그쪽으로 안 된다고 미주 속였었잖아. 지금 아주머니께서 성우 씨가 정말 그쪽으론 영 아닌 줄 아시고 미주가 임심해야 두 사람 결혼을 허락하시겠다고 하셨거든. 미주가 워낙 쑥스러움이 많아서 성우 씨에게 직접 얘기하지 못하고 있는데 남인 내가 어떻게 그 얘기를 꺼내겠어. 그래서 운동 열심히 하고 엽산 좀 먹어두라고 그랬지.”“그랬더니 성우 씨가 내가 돈이라면 눈이 멀어서 인정사정도 없이 친구인 미주를 해치라고 떠민다고 오해하고는 사람 취급도 안 하고 있는 중이야. 네가 안 왔으면 아마 저녁 내내 날 무시했을 거야.”강한서가 놀란 눈을 뜨며 말했다
곧 한현진은 강한서가 준비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 수 있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을 거란 것은 거짓말은 아니었다. 강한서는 한현진에게 입을 맞추는 것 말고는 전혀 건드리지 않았다. ‘하지만 너도 아무 짓도 하지 말아야지!’심지어 강한서는 내내 한현진을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그녀는 줄곧 강한서는 그쪽으론 꽤 보수적인 사람이라고 생각했었다. 어떤 코스튬에 이상한 집착이 있는 것을 제외하면 대부분 상황에선 이루 말할 수 없이 신사적이었다. 도가 지나친 행위는 전혀 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한현진이 꺼낸 간접 성교라는 말에 얼굴을 붉히며 그녀를 혼내던 사람이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그날 밤, 강한서는 과감히 자신의 틀을 깨고 한현진에게 입을 맞추며 스스로 욕구를 해소했다. 촉촉하게 젖은 눈빛, 사람을 미치게 하는 그의 행위에 얼굴을 붉힌 한현진은 부끄러움에 고개를 돌려 벽에 걸린 시계의 초침을 따라 시선을 옮겼다. 그 모습에 피식 웃음을 흘린 강한서가 낮게 잠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현진아, 내가 왜 한복 입은 네 모습을 좋아하는지 알아?”강한서가 내뱉은 숨소리에 한현진은 목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어쩐지 머리도 어지러운 것 같은 기분에 그녀가 되물었다. “왜 좋아하는데?”강한서는 한현진에게 다가가 그녀의 귓불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그 입맞춤은 마치 물 위에 떨어진 먹이 순식간에 퍼지듯 그녀의 귓불은 순간 빨갛게 물들였다. 그는 다른 한 손을 뻗어 한현진의 목덜미를 감쌌다. 슬며시 한현진의 피부를 매만지며 그가 속삭이듯 입을 열었다. “넌 부끄러워할 땐 이렇게 귓불부터 여기까지 빨갛게 물들거든. 연기력이 아무리 좋아도 남자 배우들과 촬영할 땐 표정은 마치 진짜처럼 연기할 순 있어도 여긴 빨개지지 않아. 하지만 나와 있을 땐 이렇게 달아오르잖아.”잠시 말을 멈춘 강한서가 다시 강조하며 말했다. “나와 있을 때만.”그는 한복을 입은 한현진의 모습을 좋아한 것이 아니라 그녀가 자신에게만 진심이라는 사실을 계속 증명하고 싶었던 것이다.
한현진이 생각 없이 말을 내뱉었다. “강 대표님, 연구원이시니까 데이터가 얼마나 중요한지 잘 알고 계시겠죠? 정확하게 작성하셔야지, 데이터를 위조하시면 어떡해요?”입을 파르르 떨던 강한서가 냉소 지었다. “또 헛소리하면 비교 실험을 진행해서 데이터를 다시 한번 수집할 거야.”그 말에 한현진은 비록 입을 꾹 다물었지만 여전히 눈을 반짝이며 깜박거렸다. 강한서는 손을 뻗어 한현진의 눈을 막고는 그녀에게 키스를 퍼부었다. 그가 이를 악물고 입을 열었다. “눈 감고 잠이나 자.”피식 웃음을 흘린 한현진이 강한서의 팔을 베고 그를 꼭 끌어안았다. 의식이 흐릿해지며 잠이 들려던 그때, 한현진의 휴대폰이 울렸다. 강한서가 한현진를 톡톡 두드렸다. “왜 무음으로 안 해 놓은 거야?”“깜빡했어.”휴대폰을 가져온 한현진이 무음 모드로 전환하려던 그때, 주강운이 그녀에게 카톡을 보내왔다.[현진 씨, 정설희 씨 알아요?]메시시지 아래에는 사진이 한 장 있었다. 문자를 확인한 한현진이 갑자기 몸을 일으켜 자리에 앉았다. 그녀의 행동에 깜짝 놀란 강한서가 눈을 뜨고는 물었다. “왜 그래?”한현진이 말했다. “주 변호사님이 어릴 적 친구에 관해서 물으시네.”강한서가 미간을 찌푸렸다. “무슨 친구인데 이 저녁에 너에게 묻는 거야?”한현진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물어봐야겠어.”주강운이 보낸 사진 속 여자 아이의 이름이 바로 정설희였다. 한현진의 대학 동기였다. 대학교 시절엔 꽤 사이가 좋았었다. 청순한 외모의 정설희는 대학교 3학년이 되던 그해, 한 제작사의 눈에 띄어 로맨스 한 편을 찍고 일약 스타덤에 올랐다. 그 후 정설희는 여러 드라마에 캐스팅되었고 당시 제일 핫한 라이징스타가 되었다. 바쁜 스케줄과 일을 시작하면서 겪은 심경의 변화로 인해 점차 연락이 줄었지만 연락이 완전히 끊긴 건 아니었다. 드라마로 인한 인기는 순식간에 그녀를 스타로 만들었지만 그 인기는 곧 거품처럼 사라졌다. 정설희의 소속사는 수익을 위해 전부 비슷한 느낌의 대본을
“...”한현진이 강한서의 머리카락을 잡아당기며 이를 악물고 말했다. “너 왜 이런 말도 안 되는 답장을 하는 거야?”강한서가 한현진을 품에 꾹 누르며 말했다. “너 전에 나한테 약속했던 거 잊었어?”“뭘?”한현진을 힐끔 쳐다본 강한서가 말했다. “내 내연녀에겐 네가 대신 답장하고 네 내연남에겐 내가 대신 답장하기로 했잖아.”한현진이 강한서를 노려보았다. “강운 씨는 내 내연남이 아니야.”강한서가 냉소 지었다. “그럼 송가람은 내 내연녀라는 거야?”한현진은 그만 말문이 막혔다. 힐끔 한현진을 쳐다본 강한서는 갑자기 휴대폰을 한현진에게 돌려주었다. 그녀는 시선을 내리고는 말을 이었다. “그 말은 못 들은 거로 해. 네가 해, 답장. 내가 기억을 잃었을 때 너에게 상처 주는 말을 그렇게 많이 했으니 네가 날 믿지 못하는 것도 당연하지. 내가 주제도 모르고 내가 널 믿는 것처럼 너도 날 믿어달라고 하면 안 되는 거였어.”말을 마친 강한서는 몸을 돌려 한현진을 등졌다. 덤덤한 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가서 전화 받아.”“...”한현진에 대한 질책은 단 한마디도 없었지만 말하면 할수록 그가 점점 더 불쌍하게 느껴졌다. 한현진은 괜히 마음이 불편해졌다. 그녀는 강한서의 어깨를 잡아당기며 나지막이 말했다. “너 안 믿은 거 아냐.”강한서는 말이 없었다. 한현진이 또 말을 이었다. “네가 방금 보낸 메시지 좀 봐. 너무 예의가 없잖아. 내 말투가 전혀 아니라고.”강한서는 여전히 고개를 돌려 그녀를 보려 하지 않았다. 이를 악문 한현진이 휴대폰을 강한서에게 건넸다. “내가 답장하지 말라고 한 적도 없잖아. 자, 휴대폰.”강한서는 그제야 고개를 돌려 한현진을 쳐다보았다. “굳이 내가 답장하고 싶어서 널 강박하려는 게 아니야. 네가 싫으면 어쩔 수 없지. 일부러 그러지 않아도 돼.”한현진이 한숨을 내쉬었다. “됐어요, 대표님. 비꼬지 마. 봐. 네가 보고 답장하면 될 거 아냐?”좋은 건 안 배우고 가스라이팅으로 사람 마음
강한서는 아무 말없이 사진을 확대했다. 주강운이 보낸 건 정설희의 최근 사진인 것 같았다. 누런 피부에 거친 머리결, 움푹 들어간 눈덩이와 툭 튀어나와 보이는 광대까지. 누가 봐도 초췌한 모습이었다.처음 보는 듯한 얼굴이었지만 그녀의 눈빛만큼은 강한서는 은연중에 어디선가 본 적이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TV를 통해서가 아니라 현실에서 말이다. 사진을 한참 들여다보던 강한서가 갑자기 입을 열었다. “현진아. 만약 강운이가 물어볼 게 있다고 만나자고 하면 깔린느로 찾아오라고 해. 둘이 따로 밖에서 만나지 말고. 언제 강운이를 만나든 꼭 네가 잘 알고 익숙한 곳에서 만나. 아니면 박 비서와 같이 가.”한현진이 입을 삐죽였다. “난 박 실장님이 믿을만한 사람이 아닌 것 같아. 송가람과 동창인 데다 사이도 꽤 좋아보이던데.”강한서가 웃음을 흘렸다. “민준이를 믿어. 조사도 제대로 하지 않은 사람을 네 곁에 붙였을 리가 없어.”한현진이 입술을 짓이기며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알겠어.”한현진의 휴대폰을 가져간 강한서가 주강운에게 답장했다. [할 얘기 있으면 내일 다시 해요. 제가 피곤해서요.]주강운이 답장했다. [네.]휴대폰을 침대 협탁에 올려둔 강한서가 한현진을 끌어오더니 그녀의 머리를 꾹 눌렀다. “이제 자.”한편. 시선을 내려 대화창을 한참 내려다보던 주강운이 테이블 위에 놓인 사진을 들어 올렸다. 한 클럽의 룸에서 찍은 사진이었다. 어두운 불빛 아래 많은 사람이 자리에 있었다. 남녀가 뒤섞인 사진 속, 정설희는 카메라와 제일 가까운 곳에서 브이를 하고 있었다. 그녀의 등 뒤로 사람들은 카메라를 향해 포즈를 취하고 있었다. 오직 한 사람만이 고개를 숙이고 휴대폰을 보고 있었다. 그는 주강운이 세상에서 제일 잘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바로 강한서였다. 사진이 촬영된 시간은 6년 전이었다. 주강운은 사진을 서류봉투에 넣었다. 그리곤 다른 자료들과 함께 서류 가방에 넣었다. 다음날 대학 동기의 그룹 채팅방에는 정설희가 입원했다는
잠시 침묵하던 강한서가 또 문자를 보냈다. [내일 내가 데려다줄게.]한현진이 피식 웃음을 흘렸다. [대외적으론 넌 아직도 기억상실이거든. 자제 좀 해. 내일 주 변호사님도 병원에 있을 것 같아. 넌 눈에 띄지 않는 게 좋을 거야.]정설희의 부활은 만약 주강운이 한현진을 속이려는 것이 아니라면 뭔가 또 다른 음모가 있는 것이 분명했다. 어쩌면 일부러 한현진을 유인하려는 수작일지도 몰랐다. 동기들과 함께 가기로 했으니 사고가 생길 수도 있다는 두려움은 없었다. 그리고 그녀는 주강운의 목표가 자신이 아님을 잘 알고 있었다. 정말 그녀의 예상대로 함정이라고 해도 지금의 상황에선 주강운은 그녀에게 손을 대지는 않을 것이다.오히려 강한서가 병원에 간다면 한현진이 그것이 더 걱정이었다. 그는 아직 기억을 잃은 척 해야 했다. 변변찮은 강한서의 연기력으론 다른 사람은 속일 수 있을 지 몰라도 주강운은 그리 호락호락한 상대가 아니었다. 한현진의 고집을 꺾지 못한 강한서는 결국 그녀의 뜻을 따르기로 했다. 똑똑, 사무실 문을 두드리는 소리와 함께 송가람이 서류를 한가득 안고 들어왔다. 그녀가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현진 씨. 현진 씨가 사인해 줘야 할 서류들이에요.”한현진이 휴대폰을 내려놓았다. “가져와요.”서류를 한현진 앞에 올려둔 송가람은 빠르게 주변을 훑어보았다. 한현진의 사무실 책상은 먼지 하나 없이 깨끗했다. 위에는 책 한 권도 없었고 그저 노트 하나와 연필 하나가 전부였다. 노트에는 뭔가가 빼곡하게 적혀있었다. 송가람이 슬며시 걸음을 옮겨 뒤꿈치를 살짝 들고 힐끔 노트를 훑었다. 내용을 확인한 송가람이 눈썹을 씰룩였다. 노트에는 아무런 내용도 적혀 있지 않았고 거북이가 잔뜩 그려져 있었다. 송가람은 또 힐끔 한현진의 컴퓨터 화면을 훔쳐보았다. 그녀의 모니터에는 지뢰 찾기 게임이 켜져 있었고 게임 시간은 여전히 흐르고 있었다. 옆 테이블에는 먹다 남은 과일이, 종이 위에는 뱉어놓은 과일 씨가 잔뜩이었다. ‘엄마는 이런 병 X 같은 인간
송가람이 화를 내며 물었다. “한 대표님께서 사인하지 않으셔서 계약을 위반하게 된다면 그 책임은 누가 져요?”“이 계약을 책임졌던 사람이 지셔야죠. 경력이 몇 년인데, 출하일 하나도 제대로 예측하지 못하는 거예요?”송가람이 계속 말을 이으려고 하자 한현진이 손을 가로저었다. “송 팀장님, 다른 일 없으면 먼저 나가보시죠. 피곤해서 좀 쉬어야겠어요.”송가람이 끓어오르는 화를 꾹 눌러 참았다. 그녀는 결국 어둡게 가라앉은 얼굴로 계약서를 손에 든 채 사무실을 벗어났다. 송가람이 사무실을 나간 후 얼마 되지 않아 서해금이 그녀에게 전화했다. 전화를 받지 않은 한현진은 휴대폰 벨소리가 끊긴 후에야 휴대폰을 들어 송병천에게 전화했다. “아빠, 재밌으세요?”잔뜩 흥분한 송병천은 이틀 사이 있었던 일을 한현진에게 주절주절 늘어놓았다. 회포를 다 풀고 나서야 송병천이 말했다. “현진아, 나중에 네가 오면 아빠와 스쿠버다이빙하러 가. 열대어 구경도 하고 말이야.”한현진이 웃으며 말했다. “하지만 전 스쿠버다이빙할 줄 모르잖아요.”“아빠가 가르쳐줄게. 엄청 쉬워.”잠시 말을 멈춘 송병천이 한현진에게 물었다. “회사에선 요즘 좀 어때? 일은 할 만 해?”“괜찮아요. 저 첫출근하던 날 아주머니 비서께서 일부러 회사 전직원을 로비로 불러 모아 절 직원분들께 소개해 줬어요. 다들 잘 챙겨주세요.”송병천이 멈칫했다. “성 비서가 전직원을 불러 로비에서 널 맞이했다고?”“그렇다니까요. 아주머니께서도 참, 미리 언질이라도 주시지. 아무런 준비도 못하고 있다가 조금 뻘쭘했 거든요.”송병천은 한참 동안 말이 없었다. 그 역시도 사업가였으니 한현진이 직설적으로 얘기하지 않아도 송병천은 어떻게 된 일인지 대충 짐작할 수 있었다. 사람을 오만하게 만들어 나락으로 보내는 건 직장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수작이었다. 한현진이 원하는 건 바로 송병천의 마음에 의심의 씨앗을 뿌리는 것이었다. “얘기는 이쯤 해요, 아빠. 재밌게 즐기시고 돌아오실 땐 잊지 말고 전화해요.
한현진은 반나절이 걸려서야 일의 자초지종을 파악할 수 있었다. ‘어쩐지 지난번 홍혜림 씨 사건이 있었을 때 왜 진윤 씨가 갑자기 나타나 상황을 반전시키나 했더니, 이런 이유 때문이었다는 거잖아.’순간 한현진은 뻘쭘함에 어찌할 바를 몰랐다. 이럴 줄 알았다면 방금 전화를 받고 모르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을 때 입도 벙긋하지 말았어야 했다. 진윤의 말처럼 이건 정말 비열한 짓이었다. 유치한 강한서가 벌일 만한 일이 맞긴 한 것 같았다. 강한서 본인 역시 이번 일은 너무 얍삽했다고 생각한 것인지 어쩌다 아이를 달래주었다. “내가 제대로 설명하지 않은 탓이라고 해. [정상에서]에서 지금 자체 테스트 중인 스킨 한 세트 줄게. 어때?”진윤이 작게 울먹이며 말했다. “스킨 세 세트?“강한서는 어이없는 웃음을 터뜨렸다. 이 와중에 딜을 하는 걸 보니 그리 큰 상처를 받은 건 아닌 모양이었다. “세 세트 전부 줄게.”진윤이 곧바로 울음을 멈췄다. 절판되어 더는 살 수 없는 게임 스킨과 이미 다른 사람과 결혼한 여신 중 아무리 바보라도 그와 같은 선택을 할 것이다. “그래요. 제가 오해한 거라고 하죠.”말하며 한현진을 쳐다보던 진윤은 여전히 아쉬워하며 말했다. “현진 누나, 왜 이렇게 빨리 결혼하셨어요. 남자 때문에 손에 넣었던 트로피도 놓칠 수가 있어요.”강한서의 눈가가 파르르 뛰었다. “결혼이 커리어 영향주지 않아. 이간질 하려고 하지 마.”“형님은 남자니까 당연히 영향을 안 받으시겠죠.”강한서에게 농락을 당한데다 하루아침에 구닥다리에게 여신을 뺐긴 진윤은 누구보다 빨리 흑화 했다. “결혼하면 아이도 낳아야 하잖아요. 어떤 유명한 감독이 임산부를 캐스팅하려고 하겠어요. 제일 예쁠 나이를 남편과 아이에게 바치면 나중에 아이가 클 때쯤엔 본인의 레전드 시절은 이미 지났다고요. 제가 다 아쉬워서 그래요. 너무 불공평해요.”비록 진윤은 그저 이간질을 하기 위해 꺼낸 말이었지만 그 말은 현실이기도 했다. 임신과 출산은 여자의 커리어엔 고난과 역경이
한현진: ?강한서가 들고 있던 휴대폰 너머로 들려온 것은 차미주의 목소리였다. “현진아! 너 내연녀가 되어버렸어. 게다가 그 상대가 네 사촌 동생이래.”강한서: ?강한서는 어리둥절했다. 하지만 한현진은 그보다 더 혼란스러웠다. ‘전여친, 현여친이 뭐야? 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거야? 게다가 이 목소리, 왜 이렇게 귀에 익은 거지?’“저... 저기 혹시 전화 잘못 하신 거 아녜요?”한현진이 나지막이 물었다. 그러자 수화기 너머의 사람이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그리고 곳 충격이 가시지 않은 듯 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현, 현진 누나?”한현진이 멍해졌다. ‘날 알아?’“네. 제가 한현진이예요. 누구세요?”상대방은 말이 없었다. 그에게서는 그저 조금 흥분한 숨소리가 들려왔다. 강한서가 한현진의 손에서 휴대폰을 빼앗아 스피커폰으로 전환했다. “무슨 일이야?”진윤이 이를 악물었다. “방금 전화 받은 사람 누구예요!”강한서가 말했다. “내 와이프.”“그럴 리가 없어!”진윤이 바득 이를 갈았다. “이 사생팬 같은 아저씨가! 혹시 일부러 날 속이려고 옆에 성대모사하는 분이라고 모셔놓은 거 아녜요?”강한서가 태연하게 말했다. “내가 너처럼 유치한 인간인 줄 알아? 그리고 현진이는 아무도 대체할 수 없어.”진윤은 강한서의 말을 전혀 믿지 않았다. “거짓말 좀 그만 해요. 현진 누나는 지금 그 티베탄 마스티프와 데이트하는 중이라고요. 만약 누나가 정말 형님 와이프라면 형님이 이렇게 아무렇지 않게 누나가 딴 남자와 데이트하는 걸 지켜볼 수 있어요?”더 이상 진윤을 대꾸하기 귀찮았던 강한서가 그에게 영상통화를 보냈다. 몇뿐 후, 휴대폰 화면으로 자신이 그토록 좋아하던 여신과 딱 붙어 앉아있는 전남편 형님을 확인한 진윤은 순간 참지 못하고 눈물을 흘렸다. 한현진은 휴대폰에 비춰진 진윤을 보며 멍한 표정을 지었다. ‘진윤 씨가 강한서와는 어떻게 아는 사이인 거야?’진윤은 숨이 넘어갈 것처럼 울어댔다. “거짓말쟁이! 뻔뻔한 인간! 전
유난히 예쁘게 잘 나온 사진을 보며 한 현지는 신난 얼굴로 고개를 돌려 강한서에게 보여 주었다. 하지만 멍청하게 나온 것 같다면 마음에 들어 하지 않던 강한서는 굳이 자신이 찍겠다면 휴대폰을 달라고 했다.한현진이 눈을 실룩거렸다. “네가 사진을 찍겠다고? 168cm인 나를 138cm로 만들어 버리는 네가? 강 대표님 본인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 몰라서 그런 말씀을 하시는 거예요?”강한서가 인정할 수 없다는 듯 말했다. “내 실력이 그렇게 별로야?”한현진이 말했다. “쌀을 뿌린 휴대폰을 닭이 부리로 쪼아도 내가 찍은 것 보단 낫다고 할 수 있어.”왠지 수치를 당한 것 같은 기분에 강한서가 이를 악 물면 말했다. “그럼 난 왜 우리가 데이트했을 때 내가 찍어준 사진을 밤새도록 보고 있었던 거야?”강한서가 괜히 그 얘기를 꺼낸 탓에 잊혀 가던 한현진의 기억이 문득 돌아왔다.“사진을 보면서 넌 그저 사진을 찍을 줄 모르는 것뿐이라고 날 설득 하지 않는다면 호텔 앞에서 바로 너와 싸우 버릴 것 같았거든. 내 외모에, 감독님께서도 나에게 각도는 중요하지 않다고 말씀 하셨는데 넌 대체 어떻게 날 사실 눈으로 찍을 수 있었던 거야?”강한서: ...“사시눈... 처럼 나왔어?”한현진이 일을 악물었다. “내가 뛰어다니는 사진 좀 찍어달라고 하니까 유체 이탈한 것처럼 찍어줬잖아! 내가 피드를 업로드할 때 실수로 그 사진까지 넣었더니 애들이 나한테 대체 어디서 이런 심령사진을 찍었냐고 물었었어.”“...”활활 타오르던 강한서의 분노가 순식간에 사그라졌다. “어쩌다 가끔... 몇 십 장뿐이었잖아.”한현진이 어이없다는 듯 실소를 터뜨렸다. “하.”뭔가를 말하려던 강한서가 고개를 숙이자 무릎 정도까지 오는 어린 아이가 옆에 쭈그려 앉아 불쌍한 눈으로 자신을 쳐다보는 것이 보였다. “아저씨, 아직 더 놀 거예요? 저희 잠깐 놀게 해주시면 안 돼요?”강한서가 고개를 돌리자 뒤에는 어린 라이 대여섯 명이 줄을 서 있었다. 한현진: ...창피함에 고개
“하하하.”한현진이 마른 웃음을 지었다.“오빠. 제가 티슈 없는 건 어떻게 알았어요?”강한서가 눈을 씰룩였다. 그야말로 완벽한 핑계였다. 그는 입술을 달싹여 아내를 따라 염치 없이 말했다. “형님, 저도 없어요.”송민준이 가방과 티슈를 두 사람에게 던지며 강한서를 노려보았다. 탁, 소리와 함께 문이 닫겼다. 한현진: ...“오빠가 나한테 화 난 건 아니겠지?”강한서가 우울하게 말했다. “너보단 날 먼저 걱정해야 할 것 같아. 네 오빠가 아무리 너에게 화가 나도 결국은 나에게 그 화살이 돌아올 거야.”한현진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다면 마음이 좀 놓이네.”강한서: ?한현진이 그의 손을 잡으며 의미심장하게 말했다. “어차피 오빠가 널 탐탁지 않아 한게 하루 이틀도 아니잖아. 오늘 이 일로 크게 달라지진않을 거야.”“...”‘행복은 본인이 누리고 잘못은 내가 뒤집어쓰고. 정말 좋은 아내네.’강한서는 한현진을 데리고 호텔 라운지로 향했다. 입덧이 끝난 이후로 한현진의 식욕은 줄곧 안정적이었다. 매 끼니마다 많이 먹지 않아도 배가 불렀지만 배고픔도 빨리 찾아왔기에 하루에 몇 끼씩 먹어야 했다. 그 덕에 지금의 한현진은 송아지처럼 튼튼하기만 했다. 강한서는 임신한 한현진을 위해 오랫동안 공부했지만 한현진에게는 하나도 쓸모가 없었다. 그의 주변엔 임산부가 많이 없었지만 많은 아내들이 임신 후 남편을 괴롭힌다고 들은 적이 있었다. 하지만 한현진에겐 모든 임신의 호르몬 변화가 거짓말처럼 전혀 작용하지 않았다. 의사는 사람마다 체질이 다르기 때문에 어떤 사람은 큰 반응 없이 잘 먹고 잘 지내기도 한다고 말했다. 의사는 강한서에게 너무 걱정하지 말라며 시간이 날 때마다 산책을 자주 다니며 좋은 컨디션을 유지하면서 주기적으로 검사를 받으면 된다고 했다. 한현진은 정서적으로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심지어 조금 유치해지기도 했다. 바로 지금처럼 말이다. 한현진은 강한서의 팔을 끌며 굳이 아이들의 흔들 목마에게 타게 해달라며 떼를 썼다.
한현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안녕하세요, 채영 언니.”문채영이 가방에서 포장한 선물 박스를 건넸다. “첫 만남이라 어떤 선물을 준비하면 좋을지 몰라 제가 직접 향낭을 만들었어요. 향 맡아봐요.”한현진이 조금 의외라는 듯 말했다. “언니도 조향하세요?”문채영이 미소 지었다. “제가 조향에 입문하게 된 것도 민준이 덕분이었어요. 전엔 이런 거 만드는 거 좋아했었거든요.”한현진은 다시 한 번 충격에 휩싸였다. 그녀는 조향하는 송민준의 모습을 본 적이 없었다. 줄곧 송민준은 그쪽으론 취미가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송민준은 그 얘기를 꺼내는 것이 불쾌한 듯 담담하게 말했다. “주문부터 해. 배고파.”멈칫하던 문채영이 시선을 내려 눈에 맴도는 서운함을 숨겼다. 한현진이 얼른 화제를 돌렸다. “언니, 오랜만에 오셨을 텐데 오늘은 한주 음식으로 드시는 게 어때요?”문채영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좋아요. 현진 씨가 먹고 싶은 거로 주문해요.”주문한 음식 서빙을 마치고 룸을 나서려는 종업원에게 송민준이 갑자기 말했다. “장어 국수도 주문할게요.”문채영이 힐끗 송민준을 쳐다보자 시선을 올린 그가 마치 변명이라도 하듯 말했다. “환영회에 국수가 빠질 수 없지.”‘그래, 환영회에 국수가 빠질 수 없다고 하는 건 그렇다고 쳐. 하지만 하고 많은 국수 중에 왜 하필 장어 국수야?’‘오빠가 장어 국수라고 말할 때 언니 표정을 보면 설마 두 사람 사이에 장어 국수와 관련된 스토리가 있었던 건가?’호기심이 활활 불타오른 한현진이 몰래 테이블 아래로 강한서의 손을 꼬집었다. 그러자 강한서는 그녀에게 새우를 발라 주었다. 한현진: ...강한서과 문채영은 너무 친한 사이였다. 두 사람의 대화에서 한현진은 문채영의 외할머니와 강한서의 할머니가 먼 친척 사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하지만 워낙 촌수가 먼 사이라 피가 거의 섞이지 않은 가족이라고 할 수 있었다. 두 사람은 알고 지낸지 한참 후에야 두 가문이 몇 세대 전에는 친척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한현진이 고개를 들자 옆에 서 있는 벤틀리가 보였다. 송민준이 운전석에 앉아 두 사람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들의 차창은 닫혀 있었으니 송민준은 당연히 아무것도 볼 수 없었지만 강한서의 차라는 것은 알고 있었다. 차를 세운지 한참이 지나도 두 사람이 모습을 보이지 않자 송민준은 강한서가 또 이상한 수작을 부리고 있는 것이라 생각했다. 송민준의 목소리를 들은 강한서가 한현진의 손을 놓고 그녀의 옷을 정리하며 단정하게 자리에 앉았다. 민경하는 은연 중에 자신의 미래를 보고 있는 것만 같았다. 차에서 내린 송민준은 카키색의 캐주얼한 외투에 검정색 바지를 입고 있었다. 머리는 평소 한열이 자주하던 헤어스타일과 비슷했고 선글라스를 콧등에 걸친 채 입술을 앙다물고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넓은 어깨에 긴 다리의 그가 우뚝 서 있으니 카리스마와 매력이 흘러넘쳤다. 전엔 그가 한열과 닮았다는 생각을 하지 못했었는데 이런 차림에 선글라스까지 쓴 모습을 보니 만약 모르는 사람이 봤다면 아마 그를 한열로 착각할 것도 같았다. 닮아도 너무 닮았다. 차에서 내린 한현진이 가방을 메고 송민준을 향해 걸어갔다. “오빠, 오늘 왜 이렇게 멋져요?”송민준이 입꼬리를 씩 올렸다. “내가 언제 안 멋진 적이 있었어?”한현진이 눈웃음 지으며 말했다. “어떤 날이든 멋지긴 하죠. 그래서 언제 데뷔할 생각이요?”송민준이 한현진의 가방을 건네받으며 장난스레 말했다. “난 열이와 캐릭터가 너무 비슷해. 내가 데뷔하면 연예계에 걔 자리가 있긴 할 것 같아?”한현진이 웃음을 터뜨렸다. 송민준은 손을 들어 검지로 콧등에 걸린 선글라스를 아래로 내렸다. 그는 미간을 찌푸리고 강한서가 있는 쪽을 바라봤다. “쟨 차에서 뭐하는 거야?”“업무 통화 중이예요.”송민준이 한현진의 가방을 어깨에 걸치고 한현진을 잡아당기며 말했다. “가자. 우린 먼저 올라가는 게 좋겠어. 혼자 미적거리라고 해.”룸에 도착하자 송민준은 그제야 물었다. “너희 두 사람, 대체 무슨 중요한 얘기를 하려고 이렇
한현진이 장난기 가득한 말투로 말했다. 강한서가 씩 웃으며 대답했다. “마음 약해질 줄 알았는데, 내가 괜한 걱정을 했나 봐.”한현진이 말했다. “처음엔 마음이 약해졌는데 조금 전 불쾌한 일이 있었거든.”한현진은 간단하게 주혁이 무릎 꿇은 일을 서술했다. “난 사실 그렇게까지 화가 난 건 아니었어. 하지만 꿇어앉아 있는 기사님 모습을 본 순간 화가 치밀더라고. 그렇게 많은 사람이 보는 앞에서 그러니까 날 강박하는 것 같았거든. 그래서 그 기회를 빌려 바로 전근시켰어.”한현진이 한숨을 내쉬었다. “사실 오는 길에 계속 마음이 불편했어. 내가 너무 극단적으로 처리한 건 아닌가 싶었거든. 기사님은 지금 아들에게 인공 달팽이관을 해줄 돈이 부족한 상황이거든. 전근하면 월급은 당연히 전보다 줄어들 텐데.”강한서가 한현진의 손등을 토닥였다.“인공 달팽이관은 보청기와 비슷한 거야. 생명과 직결된 문제도 아니니 돈이 부족하다고 해도 당장 급할 건 없어. 하지만 굳이 너를 속여 가며 부업을 하려고 했어. 난 그 부분이 도무지 이해가 되질 않아.”멈칫한 한현진이 나지막이 물었다. “기사님이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거야?”강한서가 고개를 가로 저었다. “그건 모르지. 하지만 시도 때도 없이 무릎을 꿇고 자존심 따위는 쉽게 버릴 수 있는 사람이라면 그 사람이 원하는 건 자신의 존엄보다 훨씬 더 소중한 걸 거야. 전근이 제일 좋은 선택이었어. 네가 그 사람을 곁에 두는 건 내가 불안해.”강한서는 한현진의 손을 잡으며 나긋한 목소리로 말했다. “마음 약해지지 마. 네가 마음 약해질 때마다 난 심장이 떨려.”“휴. 신세를 지기도 했고 기사님 집에는 장애인이 두 명이나 있잖아. 안타까워서 그러지. 내가 언제 다른 사람에게 마음이 약해지는거 봤어? 난 아주 독한 사람이라고.”강한서는 곧바로 태클을 걸었다. “강운이에겐 마음 약하게 굴었잖아.”지나간 이야기를 꺼내려는 강한서의 태도에 한현진이 얼른 입을 열었다. “그건 내가 불쌍해 보이는 주 변호사님 외모
한현진이 민경하를 살펴보았다. “그래 보이지는 않는데. 얼마 전 야근 때문에 피곤해서 그런 거 아냐? 신제품 발표회도 마무리 됐으니 이젠 좀 쉬게 해줘야지. 민 실장님이 쓰러지면 나중에 너만 고생할 거야.”강한서가 한현진에게 텀블러를 건넸다. “내가 부하 직원 생사도 나 몰라라 하는 그런 대표 같아? 민 실장이 쉬고 싶다고 하면 언제든지 휴가 줄 거야.”그 말에 민경하가 재빨리 대답했다. “괜찮아요, 사모님. 저 건강해요. 휴가 필요 없어요.”만약 평소였다면 휴가를 주겠다는 강한서의 말에 당연히 쉬겠다고 대답했을 것이다. 하지만 조금 전 그 상황을 겪고 나니 지금의 민경하는 감히 그럴 수가 없었다. 오늘 민경하가 강민서와 밤낚시를 약속했다는 것을 알게 된 강한서는 한현진과 통화할 때까지만 해도 그리 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전화를 끊고 얼마나 갔을까, 강한서가 입을 열었다. “밤낚시... 몇 명이 가는 거예요?”민경하가 말했다. “밤낚시 모임이 있어요. 아마 20명 정도 있을 거예요. 다들 스케줄에 따라 다르겠지만 많을 땐 8명에서 10명 정도 모여요. 적을 땐 4, 5명이 만날 때도 있고요.”“그래요.”단답으로 대답한 강한서는 또 얼마 지나지 않아 민경하에게 물었다. “밤새 낚시하면 피고하지 않아요?”민경하가 말했다. “텐트가 있어서 피곤하면 들어가서 쉬면 돼요.”강한서가 또 다시 “그래요”라며 단답으로 대답했다. 하지만 얼마 못 가 그가 또 물었다. “두 사람... 같은 텐트에서 자요?”“...”그 질문에 민경하는 바짝 긴장했다. 어쩐지 그 어떤 대답도 목숨을 걸기에 충분한 것 같았다. “4, 5명이면 텐트 2개를 사용해요. 피곤한 사람끼리 돌아가면서 쉬고요.”강한서는 더는 말이 없었다. 5분 후. “두 사람 같이 쉰 적 있어요?”“...”‘같이 잤냐고 묻는 일만 남았네.’민경하가 식은땀을 삐질 흘렸다. “누워서 얘기만 좀 나눴어요.”“그래요.”10분 후. “얘기만 조금 나눈게 전부예요?”민
남자는 들고 있던 담배를 다 태울 때까지 아무 말이 없었다. 서해금이 또 말을 이었다. “당신이 뿌리를 제대로 뽑지 못해 이렇게 큰 후환을 남기지만 않았다면 우리 가람이 처지도 지금처럼 어렵진 않았을 거야.”서해금이 말한 후환은 당연히 한현진을 가리키는 것이었다. 한현진 말이 나오자 남자의 얼굴이 저도 모르게 어두워졌다.그 여자 아이가 죽지 않았다는 일은 그 역시도 송씨 가문에서 한현진을 데려오기 얼마 전에야 알게 되었다.당시 그 여자가 품에 안아 보여주던 여자 아이는 애초부터 송씨 가문의 딸이 아니었다. 그 여자는 다른 곳에서 죽은 아이를 안아와 한아람의 딸이라고 그를 속였던 것이다.친딸이 태어나는 모습도 두 눈으로 직접 보지 못한 그는 곧 자신의 친딸에게 인생을 빼앗길 아이를 마주했다. 그 이루 말할 수 없는 죄책감에 그는 심지어 아이를 똑바로 쳐다볼 수도 없었다. 그는 그저 아이의 죽음을 확인하기만 하면 목적을 달성했다고 생각했다. 포섭당한 사람 중 누군가가 마음이 약해졌다는 사실도 모른 채 말이다. 한현진이 죽지 않았으니 송씨 가문이나 한씨 가문에서는 기필코 당시 분만실에서 있었던 일을 밝히려고 할 것이 분명했다. 다행히 서해금은 일처리를 함에 있어서 화근을 남기지 않는 스타일이었다. 당시 그 일에 연루되어 있는 사람들은 이미 전부 죽거나 도망간 상태였기에 아무리 쥐 잡듯이 뒤져도 그 해의 진실은 알아내 수 없을 것이었다. “내가 뭐 도와줄까?”남자가 나지막이 물었다. “아니.”서해금이 담담한 말투로 말했다. “한현진은 그렇게 멍청하지 않아. 쓸데없는 짓해서 괜한 의심 사지 마. 걔는 걔 엄마랑 똑같아. 의리가 치명적인 약점이거든. 잠깐만 조용히 지내.”잠시 멈칫하던 서해금이 말을 이었다. “앞으로 내 지시 없이 함부로 회사에 나타나지 마. 회사는 여기저기 보는 눈이 많아. 조그만 실수라도 있었다간 우리 가족 전부 끝장이라고.”우리 가족이라는 두 단어에 남자는 그만 멍해졌다. 그의 눈빛이 미래에 대한 희망으로 반짝였다. 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