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럼 넌 지금 어떻게 할 생각이야?”한현진이 물었다. 그 말에 차미주가 한숨을 내쉬었다. “개자식은 눈치가 없기가 나무 같다니까. 내가 어젯밤 잠옷만 입고 개자식 방으로 갔더니 이 자식이 글쎄 밤새 같이 게임만 한 거 있지. 레벨 올리려다 잠들어버렸다니까.”차미주가 분노를 터뜨렸다. “개자식, 야한 농담은 툭툭 잘만 던지더니 기회를 줄 땐 바보처럼 가만히 있더라고. 대체 머릿속에 뭐가 들었는지 모르겠어.”그녀의 말에 한현진이 웃음을 터뜨렸다. 두 사람은 정말 환상의 짝꿍 같았다. 한 명은 부모님을 찾아뵙고 결혼 허락을 받는 모든 절차를 거친 후 첫날밤을 치루기 위해 갖은 애를 썼고 다른 한 명은 온통 첫날밤을 치룰 생각뿐이었다. 심란해하던 차미주가 웃음을 터뜨린 한현진을 보더니 갑자기 물었다. “현진아, 넌 그게 하고 싶을 땐 어떻게 강한서가 눈치 챌 수 있게 해?”한현진은 순간 웃을 수가 없어졌다. 그런 한현진과 달리 차미주가 눈을 반짝였다. “네 경험 좀 알려줘. 나도 개자식 쓰러트리게.”“... 나도 그 방면엔 경력이 전혀 없어.”차미주가 한현진을 노려보았다. “경력이 없이 네 아이는 어떻게 온 건데?”비록 한현진 본인도 스스로가 뻔뻔한 편이라고 생각했지만 배우겠다는 일념 하나로 이렇게 꼬치꼬치 캐묻는 사람 앞에선 그 정도는 아무 것도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강한서에게 어떻게 눈치를 줬냐고? 강한서는 목젖에 입맞추면 참질 못했어...’마른기침을 한 한현진이 아무 말이나 내뱉었다. “그건 말이야. 분위기를 봐야지. 분위기만 생기면 자연스럽게 되는 거야.”“그럼 그 분위기는 어떻게 만드는데?”한현진은 다시 한 번 말문이 막혔다. 그녀는 한참만에야 입을 열었다. “아니면 같이 살래?”차미주가 어리둥절해졌다. 한현진이 보낸 코스프레 의상을 판매하는 링크를 클릭한 차미주는 얼굴을 붉히며 한현진을 노려보았다. “너희 두 사람 너무 안 순결한 거 아니야?”한현진이 생각했다. ‘내가 너에게 보내준 바니 의상은 이미
안방 문을 힐끔 쳐다보던 한현진이 목소리를 낮추며 한성우에게 말했다. “운동 열심히 하고 엽산도 좀 먹어요. 성우 씨 소원이 곧 이뤄질 거예요.”한성우는 어리둥절해졌다. 그는 테이블 위에 놓인 과일 포크를 한현진에게 건넸다. 그는 또 과일 접시를 한현진 쪽으로 밀며 겸손한 태도로 조언을 구했다. “운동이라뇨. 도둑이가 절 데리고 장모님 만나러 가게 설득해달라고 했잖아요.”포크를 건네받은 한현진이 사과를 찍으며 말했다. “방금 제가 말한게 바로 성우 씨가 최대한 빨리 미주 집에 인사갈 수 있는 방법이에요.”멍해진 한성우가 갑자기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일단 일을 저지르고 나중에 해결하란 얘기에요?”‘엽산은 임신을 위해 먹는 거잖아.’잠시 침묵하던 한현진이 말했다. “그렇게 생각해도 돼요.”‘성우 씨 미래 장모님께서 성우 씨가 아이를 낳지 못할까 봐 먼저 테스트해보는 거라고 말할 수는 없잖아요. 얼마나 자존심 상하겠어요.’한현진을 보는 한성우의 눈빛이 순간 달라졌다. “미주는 형수님을 제일 좋은 친구로 여기는데 형수님은 대체 어떻게 그걸 방법이라고 알려주시는 거예요.”“성우 씨가 최대한 빨리 아주머니에게 인정받고 싶다면서요. 그게 얼마나 빠른 방법인데요. 아이가 생겼는데 설마 아주머니께서 결혼을 반대하시겠어요?”한성우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형수님은 미주 제일 친한 친구잖아요. 지금 절 부추겼다가 제가 책임지지 않으면 어쩌시려고요. 잘 들어요. 제가 미주와 결혼하고 싶은 건 진심이지만, 절대 그런 비열한 수단은 쓰지 않을 거예요.”말하며 한성우는 한현진 손에 들린 포크를 빼앗으며 그녀를 노려보았다. “무슨 자격으로 과일을 먹어요!”“...”한현진이 막 입을 열어 변명하려는데 국을 들고 나오던 차미주가 마침 그 장면을 목격하고는 소리쳤다. “개자식아, 누구한테 소리를 지르는 거야.”한성우는 차미주를 떠보라고 한현진을 꼬드겼던 일을 털어놓을 수는 없었다. 하지만 양심도 없는 강한서의 와이프에게 간 쓸개 다 내줄 것처럼 구는
한현진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럼 넌 어떻게 할 생각이야?”차미주가 머리를 쥐어뜯더니 한참 만에야 입을 열었다. “일단 한성우랑 잠자리를 가져서 임신하면 결혼하고 임신이 안 되면 그땐 다른 방법을 생각해 봐야지. 어차피 난 이번 생은 한성우로 정했어. 내가 개자식과 만나는 것 때문에 엄마와 갈등을 빚고 싶지 않아. 나 키우느라 너무 많이 고생하셨잖아. 정말 그런 상황이 온다고 해도 절충안을 찾을 수 있었으면 좋겠어.”본인의 커리어가 있는 탓일까, 차미주의 어머니는 딸이 남편 될 사람을 고르는 것에 꽤 자신이 있었다. 한현진은 심지어 차미주의 어머니는 단순히 차미주와 한성우에게 아이가 생겨야 결혼을 시키려는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어쩌면 이 기회를 빌려 한성우를 테스트하고 싶은 걸지도 몰랐다. 욱하며 성질을 부리던 한성우는 곧 화를 가라앉히고 강한서가 도착한 후 함께 식탁에 둘러앉아 식사했다. 집으로 돌아가는 차에서 한현진은 한성우에게 문자를 전송했다. 대충 자꾸 혼자 추측하지 말고 차미주와 얘기를 많이 나눠보라는 내용이었다. 그러면서 한현진은 은근히 차미주의 어머니가 아이를 좋아한다는 정보를 흘리며 그가 눈치채기를 바랐다. 한현진의 옆에 앉아 힐끔 문자 내용을 확인하던 강한서가 물었다. “무슨 잘못을 했는데 이렇게 비굴해 보이는 말투로 문자를 하는 거야?”한현진이 대답했다. “전에 그쪽으로 안 된다고 미주 속였었잖아. 지금 아주머니께서 성우 씨가 정말 그쪽으론 영 아닌 줄 아시고 미주가 임심해야 두 사람 결혼을 허락하시겠다고 하셨거든. 미주가 워낙 쑥스러움이 많아서 성우 씨에게 직접 얘기하지 못하고 있는데 남인 내가 어떻게 그 얘기를 꺼내겠어. 그래서 운동 열심히 하고 엽산 좀 먹어두라고 그랬지.”“그랬더니 성우 씨가 내가 돈이라면 눈이 멀어서 인정사정도 없이 친구인 미주를 해치라고 떠민다고 오해하고는 사람 취급도 안 하고 있는 중이야. 네가 안 왔으면 아마 저녁 내내 날 무시했을 거야.”강한서가 놀란 눈을 뜨며 말했다
곧 한현진은 강한서가 준비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 수 있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을 거란 것은 거짓말은 아니었다. 강한서는 한현진에게 입을 맞추는 것 말고는 전혀 건드리지 않았다. ‘하지만 너도 아무 짓도 하지 말아야지!’심지어 강한서는 내내 한현진을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그녀는 줄곧 강한서는 그쪽으론 꽤 보수적인 사람이라고 생각했었다. 어떤 코스튬에 이상한 집착이 있는 것을 제외하면 대부분 상황에선 이루 말할 수 없이 신사적이었다. 도가 지나친 행위는 전혀 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한현진이 꺼낸 간접 성교라는 말에 얼굴을 붉히며 그녀를 혼내던 사람이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그날 밤, 강한서는 과감히 자신의 틀을 깨고 한현진에게 입을 맞추며 스스로 욕구를 해소했다. 촉촉하게 젖은 눈빛, 사람을 미치게 하는 그의 행위에 얼굴을 붉힌 한현진은 부끄러움에 고개를 돌려 벽에 걸린 시계의 초침을 따라 시선을 옮겼다. 그 모습에 피식 웃음을 흘린 강한서가 낮게 잠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현진아, 내가 왜 한복 입은 네 모습을 좋아하는지 알아?”강한서가 내뱉은 숨소리에 한현진은 목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어쩐지 머리도 어지러운 것 같은 기분에 그녀가 되물었다. “왜 좋아하는데?”강한서는 한현진에게 다가가 그녀의 귓불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그 입맞춤은 마치 물 위에 떨어진 먹이 순식간에 퍼지듯 그녀의 귓불은 순간 빨갛게 물들였다. 그는 다른 한 손을 뻗어 한현진의 목덜미를 감쌌다. 슬며시 한현진의 피부를 매만지며 그가 속삭이듯 입을 열었다. “넌 부끄러워할 땐 이렇게 귓불부터 여기까지 빨갛게 물들거든. 연기력이 아무리 좋아도 남자 배우들과 촬영할 땐 표정은 마치 진짜처럼 연기할 순 있어도 여긴 빨개지지 않아. 하지만 나와 있을 땐 이렇게 달아오르잖아.”잠시 말을 멈춘 강한서가 다시 강조하며 말했다. “나와 있을 때만.”그는 한복을 입은 한현진의 모습을 좋아한 것이 아니라 그녀가 자신에게만 진심이라는 사실을 계속 증명하고 싶었던 것이다.
한현진이 생각 없이 말을 내뱉었다. “강 대표님, 연구원이시니까 데이터가 얼마나 중요한지 잘 알고 계시겠죠? 정확하게 작성하셔야지, 데이터를 위조하시면 어떡해요?”입을 파르르 떨던 강한서가 냉소 지었다. “또 헛소리하면 비교 실험을 진행해서 데이터를 다시 한번 수집할 거야.”그 말에 한현진은 비록 입을 꾹 다물었지만 여전히 눈을 반짝이며 깜박거렸다. 강한서는 손을 뻗어 한현진의 눈을 막고는 그녀에게 키스를 퍼부었다. 그가 이를 악물고 입을 열었다. “눈 감고 잠이나 자.”피식 웃음을 흘린 한현진이 강한서의 팔을 베고 그를 꼭 끌어안았다. 의식이 흐릿해지며 잠이 들려던 그때, 한현진의 휴대폰이 울렸다. 강한서가 한현진를 톡톡 두드렸다. “왜 무음으로 안 해 놓은 거야?”“깜빡했어.”휴대폰을 가져온 한현진이 무음 모드로 전환하려던 그때, 주강운이 그녀에게 카톡을 보내왔다.[현진 씨, 정설희 씨 알아요?]메시시지 아래에는 사진이 한 장 있었다. 문자를 확인한 한현진이 갑자기 몸을 일으켜 자리에 앉았다. 그녀의 행동에 깜짝 놀란 강한서가 눈을 뜨고는 물었다. “왜 그래?”한현진이 말했다. “주 변호사님이 어릴 적 친구에 관해서 물으시네.”강한서가 미간을 찌푸렸다. “무슨 친구인데 이 저녁에 너에게 묻는 거야?”한현진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물어봐야겠어.”주강운이 보낸 사진 속 여자 아이의 이름이 바로 정설희였다. 한현진의 대학 동기였다. 대학교 시절엔 꽤 사이가 좋았었다. 청순한 외모의 정설희는 대학교 3학년이 되던 그해, 한 제작사의 눈에 띄어 로맨스 한 편을 찍고 일약 스타덤에 올랐다. 그 후 정설희는 여러 드라마에 캐스팅되었고 당시 제일 핫한 라이징스타가 되었다. 바쁜 스케줄과 일을 시작하면서 겪은 심경의 변화로 인해 점차 연락이 줄었지만 연락이 완전히 끊긴 건 아니었다. 드라마로 인한 인기는 순식간에 그녀를 스타로 만들었지만 그 인기는 곧 거품처럼 사라졌다. 정설희의 소속사는 수익을 위해 전부 비슷한 느낌의 대본을
“...”한현진이 강한서의 머리카락을 잡아당기며 이를 악물고 말했다. “너 왜 이런 말도 안 되는 답장을 하는 거야?”강한서가 한현진을 품에 꾹 누르며 말했다. “너 전에 나한테 약속했던 거 잊었어?”“뭘?”한현진을 힐끔 쳐다본 강한서가 말했다. “내 내연녀에겐 네가 대신 답장하고 네 내연남에겐 내가 대신 답장하기로 했잖아.”한현진이 강한서를 노려보았다. “강운 씨는 내 내연남이 아니야.”강한서가 냉소 지었다. “그럼 송가람은 내 내연녀라는 거야?”한현진은 그만 말문이 막혔다. 힐끔 한현진을 쳐다본 강한서는 갑자기 휴대폰을 한현진에게 돌려주었다. 그녀는 시선을 내리고는 말을 이었다. “그 말은 못 들은 거로 해. 네가 해, 답장. 내가 기억을 잃었을 때 너에게 상처 주는 말을 그렇게 많이 했으니 네가 날 믿지 못하는 것도 당연하지. 내가 주제도 모르고 내가 널 믿는 것처럼 너도 날 믿어달라고 하면 안 되는 거였어.”말을 마친 강한서는 몸을 돌려 한현진을 등졌다. 덤덤한 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가서 전화 받아.”“...”한현진에 대한 질책은 단 한마디도 없었지만 말하면 할수록 그가 점점 더 불쌍하게 느껴졌다. 한현진은 괜히 마음이 불편해졌다. 그녀는 강한서의 어깨를 잡아당기며 나지막이 말했다. “너 안 믿은 거 아냐.”강한서는 말이 없었다. 한현진이 또 말을 이었다. “네가 방금 보낸 메시지 좀 봐. 너무 예의가 없잖아. 내 말투가 전혀 아니라고.”강한서는 여전히 고개를 돌려 그녀를 보려 하지 않았다. 이를 악문 한현진이 휴대폰을 강한서에게 건넸다. “내가 답장하지 말라고 한 적도 없잖아. 자, 휴대폰.”강한서는 그제야 고개를 돌려 한현진을 쳐다보았다. “굳이 내가 답장하고 싶어서 널 강박하려는 게 아니야. 네가 싫으면 어쩔 수 없지. 일부러 그러지 않아도 돼.”한현진이 한숨을 내쉬었다. “됐어요, 대표님. 비꼬지 마. 봐. 네가 보고 답장하면 될 거 아냐?”좋은 건 안 배우고 가스라이팅으로 사람 마음
강한서는 아무 말없이 사진을 확대했다. 주강운이 보낸 건 정설희의 최근 사진인 것 같았다. 누런 피부에 거친 머리결, 움푹 들어간 눈덩이와 툭 튀어나와 보이는 광대까지. 누가 봐도 초췌한 모습이었다.처음 보는 듯한 얼굴이었지만 그녀의 눈빛만큼은 강한서는 은연중에 어디선가 본 적이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TV를 통해서가 아니라 현실에서 말이다. 사진을 한참 들여다보던 강한서가 갑자기 입을 열었다. “현진아. 만약 강운이가 물어볼 게 있다고 만나자고 하면 깔린느로 찾아오라고 해. 둘이 따로 밖에서 만나지 말고. 언제 강운이를 만나든 꼭 네가 잘 알고 익숙한 곳에서 만나. 아니면 박 비서와 같이 가.”한현진이 입을 삐죽였다. “난 박 실장님이 믿을만한 사람이 아닌 것 같아. 송가람과 동창인 데다 사이도 꽤 좋아보이던데.”강한서가 웃음을 흘렸다. “민준이를 믿어. 조사도 제대로 하지 않은 사람을 네 곁에 붙였을 리가 없어.”한현진이 입술을 짓이기며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알겠어.”한현진의 휴대폰을 가져간 강한서가 주강운에게 답장했다. [할 얘기 있으면 내일 다시 해요. 제가 피곤해서요.]주강운이 답장했다. [네.]휴대폰을 침대 협탁에 올려둔 강한서가 한현진을 끌어오더니 그녀의 머리를 꾹 눌렀다. “이제 자.”한편. 시선을 내려 대화창을 한참 내려다보던 주강운이 테이블 위에 놓인 사진을 들어 올렸다. 한 클럽의 룸에서 찍은 사진이었다. 어두운 불빛 아래 많은 사람이 자리에 있었다. 남녀가 뒤섞인 사진 속, 정설희는 카메라와 제일 가까운 곳에서 브이를 하고 있었다. 그녀의 등 뒤로 사람들은 카메라를 향해 포즈를 취하고 있었다. 오직 한 사람만이 고개를 숙이고 휴대폰을 보고 있었다. 그는 주강운이 세상에서 제일 잘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바로 강한서였다. 사진이 촬영된 시간은 6년 전이었다. 주강운은 사진을 서류봉투에 넣었다. 그리곤 다른 자료들과 함께 서류 가방에 넣었다. 다음날 대학 동기의 그룹 채팅방에는 정설희가 입원했다는
잠시 침묵하던 강한서가 또 문자를 보냈다. [내일 내가 데려다줄게.]한현진이 피식 웃음을 흘렸다. [대외적으론 넌 아직도 기억상실이거든. 자제 좀 해. 내일 주 변호사님도 병원에 있을 것 같아. 넌 눈에 띄지 않는 게 좋을 거야.]정설희의 부활은 만약 주강운이 한현진을 속이려는 것이 아니라면 뭔가 또 다른 음모가 있는 것이 분명했다. 어쩌면 일부러 한현진을 유인하려는 수작일지도 몰랐다. 동기들과 함께 가기로 했으니 사고가 생길 수도 있다는 두려움은 없었다. 그리고 그녀는 주강운의 목표가 자신이 아님을 잘 알고 있었다. 정말 그녀의 예상대로 함정이라고 해도 지금의 상황에선 주강운은 그녀에게 손을 대지는 않을 것이다.오히려 강한서가 병원에 간다면 한현진이 그것이 더 걱정이었다. 그는 아직 기억을 잃은 척 해야 했다. 변변찮은 강한서의 연기력으론 다른 사람은 속일 수 있을 지 몰라도 주강운은 그리 호락호락한 상대가 아니었다. 한현진의 고집을 꺾지 못한 강한서는 결국 그녀의 뜻을 따르기로 했다. 똑똑, 사무실 문을 두드리는 소리와 함께 송가람이 서류를 한가득 안고 들어왔다. 그녀가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현진 씨. 현진 씨가 사인해 줘야 할 서류들이에요.”한현진이 휴대폰을 내려놓았다. “가져와요.”서류를 한현진 앞에 올려둔 송가람은 빠르게 주변을 훑어보았다. 한현진의 사무실 책상은 먼지 하나 없이 깨끗했다. 위에는 책 한 권도 없었고 그저 노트 하나와 연필 하나가 전부였다. 노트에는 뭔가가 빼곡하게 적혀있었다. 송가람이 슬며시 걸음을 옮겨 뒤꿈치를 살짝 들고 힐끔 노트를 훑었다. 내용을 확인한 송가람이 눈썹을 씰룩였다. 노트에는 아무런 내용도 적혀 있지 않았고 거북이가 잔뜩 그려져 있었다. 송가람은 또 힐끔 한현진의 컴퓨터 화면을 훔쳐보았다. 그녀의 모니터에는 지뢰 찾기 게임이 켜져 있었고 게임 시간은 여전히 흐르고 있었다. 옆 테이블에는 먹다 남은 과일이, 종이 위에는 뱉어놓은 과일 씨가 잔뜩이었다. ‘엄마는 이런 병 X 같은 인간
식사 자리가 마무리된 후 홍혜림을 배웅하러 나온 서해금의 뒤를 오성빈이 따라나서며 나지막이 물었다. “서 대표님이 말씀하신대로 했으니 약속하신 건...”“걱정마세요.”서해금이 시선을 거두며 옅은 미소를 지었다. “일만 잘 마무리 되면 약속드린 건 꼭 지켜드리죠.”“그럼 최대한 빨리 해결하도록 할게요. 질질 끌어봐야 좋을게 없으니까요.”“부탁드려요.”고개를 끄덕인 서해금이 성월에게 눈짓을 보냈다. 그러자 서해금의 뜻을 바로 알아들은 성월이 곧바로 오성빈을 배웅했다. 사실 학교에서는 진윤의 부정행위에 관해 아무런 결론도 내린 것이 없었다. 여론은 여전히 뜨겁기만 했다. 하지만 그런 때일수록 여론에 흔들리지 말아야 했다. 만약 조사 결과에 조금이라도 문제가 생긴다면 그 여론은 오히려 학교에 독이 될 수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오성빈은 학교 임원의 압박에도 불구하고 며칠 동안이나 홍혜림의 연락을 무시했다. 물론 그 역시도 최대한 빨리 이 일을 마무리하고 싶었다. 진윤이 부정행위를 저질렀다는 증거는 전혀 찾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오성빈이 모든 증거 수집을 마치고 드디어 진윤의 누명을 벗겨주는 쇼를 하려던 그때, 경찰이 갑자기 학교로 찾아왔다. 진수 그룹에서 진윤의 시험 부정행위 문제로 경찰에 신고를 한 탓이었다. 교장의 연락을 받은 오성빈은 그만 멍해졌다. 제일 먼저 서해금이 떠올랐지만 그녀가 약속했던 일을 떠올린 그는 곧 주먹을 꽉 움켜쥐고 서해금에게 연락하고 싶은 충동을 꾹 참으며 홍혜림의 연락처를 눌렀다. 홍혜림이 전화를 받자마자 오성빈이 물었다. “사모님, 어제 분명 진윤 학생 일은 잘 처리해 드리겠다고 말씀 드렸잖아요. 왜 신고를 하신 거예요?”홍혜림이 놀란 말투로 말했다. “신고라뇨? 전 신고한 적 없어요.”“사모님이 신고하신 게 아니라고요?”의아한 듯 묻는 오성 빈에게 홍혜림이 대답했다. “전 신고한 적 없어요. 교수님께서 이미 윤이가 부정행위를 하지 않았다는 증거를 찾으셨다면서 조치를 취하시겠다고 말씀하셨잖아요. 그래서 계속
장준의 아버지는 요직을 맡고 있었고 장씨 가문엔 그의 아버지를 제외하고도 수많은 정치인들이 있었다. 그랬기에 가족 중 단 한명이라도 꼬리를 밟힌다면 그의 가문은 수습 불가능한 상황으로 치닫기도 했다. 장준이 저질렀던 인간 같지도 않은 일들이 하나하나 밝혀지기 시작했다. 폭행, 음주 운전, 도박, 성폭행...피해자들이 하나둘 인터넷에 장준의 진짜 모습을 폭로했다. 수많은 피해자의 목소리를 누를 수 없었던 장씨 가문의 스캔들이 결국 전부 드러나고 말았다. 홍혜림 역시 그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그녀는 곧 회사 계정으로 진윤은 그날 운전을 하지 않았다는 입장을 발표와 함께 그와 관련된 증거들과 범죄경력증명서를 전부 공개 했다. [그러니까 진윤은 또 다른 도련님의 기사를 막기 위해 총알받이가 됐다는 거네?][어쩐지 뭔가 이상하더라니.][그렇게 심각한 교통사고에 진윤 한 사람만 공개 처형하는 것이 이상하다고 생각했어요. 역시 여론을 부추기는 사람이 있었다는 거네요.][발 빼려고 하지 마. 장준이 주범이었다고 하더라도 진윤이 그 경기와 아무런 관련도 없는 건 아니잖아. 끼리끼리는 과학이라고 했는데 그놈이 그놈 아니겠어? 서화 대학에서도 진윤의 재시험 부정행위를 인정 했잖아.][학교엔 이미 소문을 파다해요. 이번 일과는 관련이 없다고 해도 언젠가는 비슷한 사고를 쳤을 거예요. 장준이나 진윤이나 크게 다를 거 없잖아요.][저기요. 두 사람을 싸잡아 욕 하지는 마요. 한 명은 범죄자고 다른 한 명은 그저 인성에 문제가 있는 것뿐이에요. 그게 어떻게 같아요? 얼른 진상 규명이나 하시죠. 피해자에게 피해 보상은 해야 하잖아요.]...휴대폰을 한 쪽으로 던져버린 서해금이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장준이었어? 어쩐지...”성월이 그녀에게 차를 건네며 나지막이 물었다. “대표님, 진윤 씨 일은 이미 어느 정도 해결이 된 것 같아요. 그럼 저희 계획은 어떻게 해요?”“아직 끝나지 않았어요.”서해금이 찻잔을 들어 올리며 덤덤하게 말했다. “홍혜림은 누구보다
장씨 가문 아들이라는 이유로 여론이 들끓는 것을 염려한 탓인지 기사는 간단한 몇 마디 말로 상황을 간결하게 보도했다. 하지만 한현진은 감추려고 할수록 일은 점점 더 커질 것이라 생각했다. 드디어 주강운이 손을 쓴 모양이었다.고개를 들어 강한서를 바라보는 한현진의 눈이 별처럼 반짝였다.“여보, 장준이 잡힌 것 같아.”강한서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누가 그래?”한현진은 의미심장한 표정을 지으며 강한서에게 한성우가 보낸 기사를 보여주었다. “시간, 교통사고, 장 모 씨, 약물. 이 단어들만 봐도 누군지 뻔하잖아.”강한서가 놀랍다는 듯 말했다. “장 모 씨가 정말 장준이야? 어떻게 잡힌 거지? 누가 신고라도 한 건가.”“나쁜 짓을 그렇게 많이 했으니 벌을 받는 거지. 피해가 한두 명이면 집안 세력으로 어떻게든 막을 수 있겠지만 그 수많은 피해자를 전부 막을 수는 없잖아?”강한서가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기사에 다른 얘기는 없어?”“없어. 그냥 언급만 한 수준이야. 하지만 이 기사를 시작으로 진실을 밝혀 나가려는 사람은 분명 있을 거야. 그건 우리가 상관할 일이 아니지.”한현진이 나지막이 말했다. “장준과 관련된 기사가 퍼져 나가기 시작하면 사모님께 이 기회를 빌려 진윤 씨에 관련한 입장 발표를 하시라고 말씀 드려.”강한서가 고개를 끄덕였다. “내일 아침 연락드릴게.”강한서는 이상할 정도 순순히 대답했다. 예전이라면 어떻게 된 일이냐며 꼬치꼬치 캐 물었을 것이 분명했다. 지금처럼 쉽게 넘어갈 리가 없었다.자신을 빤히 바라보는 한현진의 시선에 강한서가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가 다정한 목소리로 한현진에게 물었다.“왜?”하지만 한현진은 곧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아무것도 아니야. 산책 가자.”강한서가 고개를 끄덕였다. “옷 가지고 올게.”강한서의 뒷모습을 지긋이 바라보던 한현진이 휴대폰을 들어 한성우에게 문자를 보냈다. [오늘 강한서가 좀 이상해요. 평소엔 꼬치꼬치 따지더니 오늘은 기사를 보여줘도 아무것도
멈칫한 강한서가 입술을 짓이겼다. “누가 어딜 들어갔다고?”강한서의 목소리에 수화기 너머의 사람은 순간 조용해졌다. 그러더니 곧 어색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한서야, 야근 안 했어? 오늘은 일찍 퇴근했네.”강한서는 화제를 돌리는 한성우의 말에 전혀 동요하지 않은 채 다시 물었다. “방금 누가 어딜 들어갔다고?”“방금 내가 뭐라고 했어?”한성우가 모른 척 대답했다. “갑자기 네가 튀어나오는 탓에 다 잊어버렸잖아.”강한서가 말했다. “강운이가 장준을 처넣었다며.”한성우: ...후회 막심한 얼굴로 자신의 입을 툭 친 한성우가 웃으며 대답했다. “어, 맞아. 바로 그거야. 나도 방금 어디서 그 소식을 듣고 형수님과 수다나 떨려고 전화한 거야. 너도 알잖아. 형수님과 내가 뒷담화 할 땐 죽이 척척 맞는 거.”“그래?”강한서가 담담한 말투로 말을 이었다. “난 두 사람이 나한테 뭔가 숨기는 게 있는 줄 알았지.”“그럴 리가 있겠어?” 한성우가 당당하게 말했다. “우리가 널 속일 수는 있고? 두 사람 요즘 진윤 씨 일 때문에 걱정이 많잖아. 그래서 나도 신경 좀 썼지. 봐, 소식을 듣고는 바로 알려 주려고 전화했잖아.”“그래.”강한서의 대답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던 한성우의 귓가로 곧 다시 강한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현진이가 강운이한테 뭐라고 했는데?”한성우: ...한성우가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 “뭐? 형수님이 강운이와 연락했어?”잠시 침묵하던 강한서가 다시 입을 열었다. “너한테 전해달라고 한 말이 뭐냐고.”의심이 아닌 확신에 찬 말투에 한성우는 머리가 찌릿, 할 정도로 소름이 돋았다. ‘조금만 참았다가 나중에 전화할 것이지, 난 왜 하필 지금 한 거야?’어차피 한강서가 전부 눈치 챈 마당에 더는 숨길 필요가 없어진 한성우는 결국 모든 것을 털어놓았다. “형수님이 너한테 숨겼다고 뭐라고 하지 마. 형수님이 강운이에게 연락한 게 아냐. 나한테 눈치를 주라고 부탁하셨어. 강운이네는 줄곧 장씨 가문과 사이가 안 좋았잖아
“실망이라니. 엄마는 단 한 번도 널 창피하게 여긴 적 없어. 넌 엄마가 배 아파 낳은 내 자식이야. 내가 널 몰라? 엄마는 그냥 네가 이번 일 때문에 힘들어 할까봐 그래. 엄마는 네가 행복했으면 좋겠어.”“요즘 네가 말도 없고 조용하기만 해서 우리가 얼마나 걱정했는지 알아?”진윤의 등을 어루만지며 홍혜림이 나지막이 말했다. “이런 일은 아무것도 아니야. 인생 살면서 이런 일 안 겪는 사람은 없어. 이겨내면 돼.”고개를 끄덕인 진윤이 홍혜림을 꽉 끌어안았다. ...아름드리.“그러니까 아주머니가 뒤에서 여론몰이에 동조했다는 거야?”한현진이 자몽을 까며 강한서에게 말하자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너무 절묘한 타이밍에 나타나서 알아봤더니 오성빈 교수라는 사람, 성 비서님의 먼 친척이시더라고. 그러니까 그분이 나서서 얘기만 해주면 잘 해결될 가능성이 높아.”잠시 생각하던 한현진이 말했다. “그래서 일부러 홍혜림 씨가 신세를 질 수밖에 없게 만드시겠다? 홍혜림 씨를 다시 뺏어가려는 거야?”“그럴 수도 있지만 그게 전부는 아닌 것 같아.”한현진이 눈을 반짝이며 강한서 곁으로 다가갔다. 꿍꿍이 가득한 얼굴로 한현진이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그럼 우리는 그걸 지켜보면 되겠네. 본인 계획대로 흘러가고 있다고 착각하게 만든 다음대체 뭘 하려는 생각인지 지켜보자고.”강한서가 어쩐지 음흉한 미소를 지으며 한현진을 쳐다보았다. 그 표정에 어리둥절해진 한현진이 물었다. “왜 그렇게 웃어? 뭐야, 그 음흉한 웃음은.”강한서가 나지막이 대답했다. “근묵자흑이라는 단어가 너무 맞는 말인 것 같아서.”한현진: ?“설명 똑바로 해. 누가 그 묵인데?”강한서는 씩 웃으며 한현진의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한현진이 깐 자몽을 가져가 한 입 베어 문 강한서의 표정이 곧 강한 신맛에 잔뜩 일그러졌다. 자몽을 겨우 삼킨 강한서가 인상을 찌푸린 채 믿을 수 없다는 듯 말했다. “넌 이걸 대체 어떻게 아무렇지 않게 먹을 수 있는 거야.”한현진이 눈을 깜빡였다.
[그래도 학교 측에서 끝까지 부정행위라고 주장하면서 재수강하라고 하면 어떡해요?]강한서가 웃으며 말했다. [넌 언제든 법적 대응을 할 수 있다는 걸 잊지 마. 내가 대신 신고해줘?]진윤은 그제야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듯 번뜩 정신이 들었다. 인터넷에 도배된 악플로 잔뜩 지친 진윤은 자신의 결백을 주장하는 일에만 몰두해 있었다. 그는 심지어 학교 측에 새로운 시험 문제를 내도록 제안한 후 라이브 방송을 통해 부정행위가 없었음을 증명할까 생각하기도 했다. 하지만 강한서의 한마디는 진윤의 모든 고민을 한 방에 해결했다. 스스로의 결백을 증명하는 건 결국 그 사람들이 파놓은 함정에 뛰어 드는 것 과 다를 바가 없었다. 사람들은 애초부터 그가 부정행위를 했을 거라 확신하고 있었다. 그러니 진윤이 라이브 방송으로 결백을 증명한다고 한다고 해도 사람들은 또 미리 답을 알고 있으면서 카메라 앞에서 쇼를 하는 것이라며 의심하게 뻔했다. 부정행위의 증명해야 할 사람은 진윤이 아니라 그를 의심한 사람들이었다. 진윤이 순간 눈을 반짝였다. [얼른 엄마를 말려야겠어요. 교수님에게 부탁할 필요가 없잖아요. 전 당당하니까 얼마든지 조사하라고 해요.][잠깐만.]강한서가 진윤을 불렀다. [잠깐만 기다려 봐.][왜요?]입술을 깨물던 강한서가 중얼거렸다. [고작 학생인 네가 시험에서 부정행위를 했다는 이유만으로 여론이 이 정도로 들끓는게 처음부터 이상했어. 이제야 의문이 조금 풀리는 것 같네.][그게 뭔데요. 얼른 얘기 해줘요.]성격 급한 진윤은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하는 강한서 때문에 괜히 마음만 조급해졌다. 강한서가 말했다. [넌 지금 아무것도 하지 마. 어머님께도 오 교수님이라는 분 만나보라고 해. 뭐라고 하는지 얘기나 들어 보고 다시 대책을 세워야해.]진윤이 조금 전처럼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형님, 어차피 이렇게 된 거 그 인간들의 계략을 역이용하시려는 거예요?]강한서가 쯧, 혀를 차며 말했다. [매형이라고 불러]진윤: ...홍혜림과
법적 장모님이라는 여섯 글자에 멍한 표정을 짓던 강한서가 물었다. [서해금 대표 말하는 거야?][네. 그 분, 현진 누나 새엄마잖아요. 그럼 형님에겐 법적 장모님 아녜요?]강한서: ...‘맞긴 하네.’[난 오성빈 교수님과는 전혀 모르는 사이야.]멈칫하던 강한서가 물었다. [그건 왜 묻는데?]강한서의 말에 기분이 축 처진 진윤이 한참만에야 대답했다. [학교에서 제 재시험 성적을 취소하더니 재수강하래요.]강한서가 미간을 찌푸렸다. [그게 무슨 말이야? 학교에서는 네가 부정행위를 했다고 판단한 거야?][명백하게 얘기한 건 아닌데 사실은 그런 셈이죠. 하지만 다른 처분은 없이 그냥 재수강만 하래요. 친한 친구에게 들은 건데 학교에 신고 전화가 빗발쳤었데요. 홈페이지에도 전부 부정행위 진상 규명을 바라는 댓글로 도배됐다고 하더라고요.][아마도 학교의 이미지 회복을 위한 판단이었던 것 같아요. 저에게 적당한 책임을 전가할 수도 있고 대중들에게는 그들이 원하던 조치를 취했다고 보여줄 수 있으니까요.]강한서는 여전히 이해되지 않는다는 듯 물었다. [그럼 교수님에게는 무슨 일로 연락을 하려는 거야?][조교님께서 이번 일은 오 교수님 담당이라고 하셔서요. 비록 재수강으로 결론이 났다고 하지만 아직 완전히 결정된 건 아니니까요. 그래서 엄마는 오해를 풀기 위해 오 교수님을 한 번 만나 얘기를 나누고 싶어 하세요.][아는 분께 부탁해 오 교수님과의 자리를 만들어보려고 했지만 결국은 연락이 닿지 않았어요. 하지만 마침 형님 법적 장모님께서 제 병문안을 오셨다가 그 얘기를 들으시더니 오 교수님과 아는 사이라고 하더라고요.][꽤 가까운 사이인 것 같아 엄마는 만약 가능하다면 그분께 다리를 놔달라고 부탁할 생각이세요.]진윤이 한숨을 내쉬었다. [워낙 지적인 얼굴을 하고 계서서 좋은 사람처럼 보이지는 않던데요. 딸인 현진 누나에게도 가식적으로 대하는 것 같던데 전 그런 사람이 진심으로 저희를 도와줄 리가 없잖아요.][방금 형님과 얘기를 하면서 혹시 형님도
홍혜림이 서해금에게 얘기를 꺼내려던 그때, 진윤이 그녀의 말을 잘랐다. “잠깐 실례할게요.”홍혜림이 곧바로 하려던 말을 삼키고 몸을 일으켰다. “엄마가 부축해줄게.”“네.”진윤이 대답했다. 진윤을 부축하며 병실을 나서는 홍혜림을 쳐다보던 서해금이 고개를 돌려 성월에게 물었다. “아무 문제없이 잘 해결했죠?”성월이 고개를 끄덕였다. “대표님께서 지시하신 대로 했어요.”멈칫하던 성월이 나지막이 물었다. “대표님, 정말 사모님께서 저희에게 부탁하러 오실까요?”서해금이 덤덤하게 말했다. “평소라면 부탁하지 않을 수도 있겠죠. 하지만 궁지에 몰린 상황이라면 분명 부탁할 수밖에 없을 거예요. 홍혜림은 지금 아들의 누명을 벗기기 위해 안달이 나 있는 상황이에요. 그러니 저를 통해 이 일을 해결할 수 있다는 걸 알게 된다면...”“아무리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는다고 해도 결국 머리를 숙일 수밖에 없어요.”“조향 대회의 마지막 경기는 OM향 협회의 투표로 승패가 결정돼요. 홍혜림은 OM향 협회의 오래된 회원이에요. 게다가 이번 조향 대회 열 명의 심사위원 중 한 명으로 선정되기도 했고요.”“홍혜림은 누구보다 의리를 중요하게 생각해요. 제가 큰 도움을 준다면 어떻게든 그 빚을 갚으려고 할 거예요. 전 준비가 안 된 싸움은 시작하지 않아요.”피식 웃음을 흘린 서해금의 눈빛이 멸시로 가득했다. “전 조금의 실수도 용납할 수 없어요.”성월은 이토록 치밀한 서해금에 탄복하지 않을 수 없었다. 오성빈의 친척과 친분이 있다는 얘기를 꺼내는 서해금의 모습에 성월은 그녀가 단지 빼앗긴 고객을 다시 찾아가기 위해 던지는 미끼일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서해금이 바라는 것은 자신에게 마음에 빚을 진 홍혜림이 조향대회에서 관건적인 한 표를 행사하는 것이었다. 서해금이 이렇게까지 서포트 해주고 있으니 송가람은 조금만 노력해도 좋은 성적을 거둘 수 있었다. 순간 뭔가를 떠올린 성월이 목소리를 잔뜩 낮추며 물었다. “대표님, 인터넷에서 진윤 씨에 관한 여론이 들끓고
“하지만 지금 이 상황에 가면 걔들은 거짓말을 들킨 네가 양심에 찔려서 해외로 도피하는 거라고 생각할 거야.”진윤이 눈시울을 붉히며 말했다. “걔들이 뭐라고 생각하든 저랑 무슨 상관이에요. 어차피 출국하면 아무것도 듣지도 보지도 못할 텐데.”“그럼 너 평생 해외에만 있을 거야? 안 돌아올래?”입술을 달싹인 진윤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당연히 그럴 수는 없었다. 부모님도, 집도, 가족도 전부 한주에 있으니 지금 당장 해외에 나간다고 해도 결국 돌아와야만 했다. 홍혜림이 의미심장한 말투로 입을 열었다. “윤아, 사람의 명성이라는 게 한 번 나빠지면 다시 좋아진다는 건 어려운 일이야. 해외로 도망쳐 이번 일을 지나보낸다고 해도 졸업하면 결국 여기 동기들과 다시 마주해야 한 텐데, 걔들이 널 보고도 옛날 얘기를 꺼내지 않을 것 같아?”“다들 널 안 좋게 보고 있는 지금, 네가 끝까지 네 결백을 증명해야 나중에 걔들이 다시 이 얘기를 꺼내도 억울하지는 않을 거야. 알겠어?”“결백을 뭐로 증명해요? CCTV도 없고 아무것도 없잖아요. 전 당당하다는 걸 아무도 증언해줄 사람이 없어요. 절 믿는 사람도 없다고요.”진윤이 잠김 목소리로 물었다. “엄마, 저 어떡해요?”홍혜림은 미어지는 가슴을 붙잡고 아들의 얼굴을 어루만지며 나지막한 목소리로 위로를 건넸다. “아무도 널 안 믿어도 엄마는 널 믿어. 네 아빠, 형 그리고 네 형수님도 널 믿어. 그러니까 아들, 괜찮아. 엄마가 있는 한 아무도 우리 아들 못 건드려. 엄마가 꼭 네가 정정당당하게 학교로 돌아갈 수 있게 할게.”홍혜림이 말에 진윤이 대답하려던 그때, 누군가 병실 문을 두드렸다. 진윤이 고개를 돌려 얼굴을 닦으며 감정을 추슬렀다. 홍혜림 역시 심호흡을 하고는 몸을 일으켰다. 문을 열자 보이는 의외의 인물에 홍혜림의 눈이 동그래졌다. 서해금이었다.서해금은 성월과 함께 진윤의 병실로 찾아왔다. 두 사람은 손에 선물을 잔뜩 들고 서 있었다. 병실 문이 열리자 서해금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