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변에 있던 사람들이 증조할아버지의 말에 하나둘 모여들었다. 캐리어에는 스티로폼에 쌓인 강아지와 비슷하게 생겼지만 강아지보다는 훨씬 못생긴 쇠뭉치가 들어있었다. 이렇게 생긴 물건은 처음 본 사람들은 그저 희한하기만 했다. 방금까지 강한서를 제일 심하게 놀리던 허씨가 이번에도 제일 큰 소리로 웃었다. “자네 손주사위가 장난감이라도 사 준 거야? 그럴듯하게 생기긴 했지만 너무 못생겼어. 왜 털이 달린 건 안 샀대? 스피커라도 달아서 방문 앞에 두고 매일 개 짖는 소리를 재생하면 정말 놀라긴 하겠어.”그 말에 이웃들이 박장대소했다. 증조할아버지가 허씨를 힐끔 쳐다보았다. “털이 없어도 난 마음에 들어. 최소한 선물이라도 할 줄 알잖아. 자네 손주는 일자리를 찾은 지도 몇 년이나 지났는데 한 번도 자네에게 뭐라도 사 온 꼴을 본 적이 없어.”말문이 막힌 허씨가 변명하며 말했다. “큰 도시에 사는 젊은이들은 부담이 커.”증조할아버지가 받아쳤다. “그렇지. 우리 집 손주사위는 털이 없는 철 강아지를 선물로 줬지.”눈가를 파르르 떨던 허씨가 고집스레 말을 이었다. “우리가 그렇다고 아이들에게만 기대며 살 수는 없잖아. 일을 하지 못하는 것도 아니고 말이야.”증조할아버지가 말했다. “우리 집은 털이 없는 철 강아지를 줬어.”“...”증조할아버지가 또 말했다. “털이 없는 철 강아지를 말이야.”허씨가 어두운 얼굴로 입을 열었다. “닥쳐.”두 분은 젊었을 적엔 아내와 자식을 비기더니 나이가 드니 손자와 증손자로 비교하기 일쑤였다. 이웃들은 진작 이런 상황에 익숙해져 있었다. 그저 재미를 위한 말다툼에 불과했다. 진심으로 얼굴을 붉히며 싸우는 일은 없었다. 한현진은 강한서를 잡아끌며 그에게 자랑을 좀 하라고 눈짓했다. 강한서는 그제야 입을 열었다. “할아버님, 이건 털이 없는 철강아지가 아니라 로봇 강아지예요.”증조할아버지는 여전히 이해되지 않는다는 듯 말했다. “로봇 강아지... 그것도 철 강아지 아냐?””...그렇다고 할 수 있죠.”
“강 교수, 젊은 나이에 전도가 유망하군.”“강 교수, 어렸을 때 공부 엄청 잘했겠네.”어깨가 하늘을 찌를 듯 솟아오른 증조할아버지는 과장을 보탠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그거야 당연하지. 천재팀이 함부로 아무나 들어갈 수 있는 곳인 줄 알아? 당연히 어렸을 때부터 잘해야지. 3살에 글을 떼고 5살엔 천자문을 거꾸로 외울 수 있었고 7살엔 더 이상 모르는 글이 없었어.”증조할아버지의 말에 사레가 들린 강한서는 기침하느라 얼굴마저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한현진은 손을 뻗어 강한서의 등을 두드리며 참지 못하고 나지막이 말했다. “나도 네가 그렇게 대단한 줄 몰랐는데.”강한서가 말했다. “나도 방금 알았어.”마을 사람은 당연하게도 강한서에게 천자문을 거꾸로 외워보라고 했다. 하지만 강한서가 외운다고 해도 알아듣지 못하니 오히려 그에게 몇 글자 적어보라며 부추기기 시작했다. 몇 글자 적어보라는 주민들의 말에 증조할아버지는 순간 마음에 켕겼다. 그는 단지 한현진의 체면을 세워주려고 손주사위를 잔뜩 띄워준 것이었다. 강한서의 실력이 어떤지는 사실 그도 잘 알지 못했다. 강한서는 주민들이 계속 소란스럽게 굴도록 놔두지 않았다. 그가 부드러운 말투로 입을 열었다. “내일요. 원하시면 내일 몇 글자 적어드릴게요. 오늘은 너무 늦었어요. 저녁이라 어둡기도 하고요.”강한서의 말에 마을 주민들도 더 이상 소란스럽게 굴지 않고 몇 마디 인사를 건넨 후 하나둘 집으로 돌아갔다. 이씨의 아내는 낮에 끓인 백숙이라며 집에서 냄비 하나를 가져왔다. 냄비에 남은 백숙은 아직 먹지 않았던 것이라며 따뜻할 때 먹으라며 말이다. 유호촌의 주민들은 수십 년을 같은 마을에서 살아온 이웃들이라 평소에도 서로 도와주며 지내왔다. 순박하기 그지없는 사이였다. 한현진은 냄비를 받아 들고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 그녀는 이씨의 막내 손주에게 용돈을 쥐여주었다. 이씨의 아내가 한사코 거절했지만 강한서가 말했다. “이모님, 명절이라 아이에게 용돈 주는 거예요. 새해 복 많이 받으라고요.
강한서는 뜨거운 귓불을 어루만지며 한현진을 따라 방으로 돌아갔다. 그녀가 한 앞부분의 말은 전혀 신경도 쓰지 않은 채. 방으로 들어서자 강한서는 증조할아버지와 한현진이 잠자리를 펴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이젠 제법 눈치를 볼 줄 아는 강한서가 얼른 앞으로 다가가 잠자리 정돈을 도왔다. 증조할아버지도 거절하지 않으시고 침대 시트와 이불을 강한서에게 던져주고는 오곡밥을 먹이겠다며 한현진을 데리고 나갔다. 강한서는 어쩔 수 없이 혼자 잠자리를 펴야 했다. 오곡밥에 반찬까지 가져오고 나서야 증조할아버지가 물었다. “이젠 다 괜찮니?”한현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고개를 돌려 강한서가 있는 방으로 보며 나지막이 말했다. “다 제자리를 찾았어요.”“괘씸한 녀석, 괜히 사람 걱정시키더니.”중얼거리던 증조할아버지가 또다시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게, 내가 그랬잖아. 저렇게 밉상인 녀석을 염라대왕도 받지 않을 거라고.”한현진이 증조할아버지를 따라 웃었다. 그동안 있었던 험난했던 일은 오직 두 사람만이 알고 있는 것이었다. 돌아온 것만으로도 이미 하늘이 그들을 불쌍히 여겨준 덕이었다. “아, 맞다. 할아버지, 강한서가 할아버지께 드릴 보양식도 많이 가져왔어요. 제가 가져올게요.”증조할아버지가 꽤 놀라워하며 말했다. “처세가 이렇게 많이 늘었어? 지난번에 한주에 있을 때만 해도 널 따라 간 관광지에서 눈치도 없이 물 한 병 사는 것도 알려줘야 움직이더니 말이야. 혹시 네가 산 건데 일부러 저 놈이 샀다고 말해서 내 점수를 따려는 건 아니지?”한현진이 그 말에 웃음을 터뜨렸다. “정말 제가 산 거 아니에요.”증조할아버지를 속이려 하는 말이 아니었다. 두 사람은 캐리어 두 개와 큰 가방 하나를 들고 왔다. 두 사람이 갈아입을 옷과 일상용품 조금을 제외하면 전부 유호촌으로 오는 길에 강한서가 산 선물이었다. 강한서는 다른 처세는 잘 몰라도 사람을 찾아뵙고 선물을 드리는 일만큼은 누구보다 꼼꼼하게 챙겼다. 그는 유상수를 좋아하지는 않았지만 유상수의 집을
한현진이 차미주의 문자에 답장했다. [송가람이 또 무슨 짓을 벌인 거야?]차미주가 얼른 문자를 작성했다. [대박, 이걸 알아맞힌다고?][송가람이 뭘 했는데?][개자식이 그러는데, 네 새엄마가 송가람을 데리고 요즘 실력 있는 조향사를 만났대. 그분은 조향사 쪽에서는 거의 원조라고 하더라고. 그 원조급 거물이 손가락을 제자로 받아들였다는 소식이 이미 여기저기 전해지고 있어. 나도 방금 봤는데 마케팅 계정에서도 그 기사를 업로드하고 있어.]차미주가 기사 하나를 보내왔다. 한현진이 그녀가 보낸 링크를 클릭해 기사를 확인했다. [조향의 대가, 지민욱의 제자. 송씨 가문 규수로 추정,]기사 아래에는 수백 개의 댓글이 달린 것으로 보아 핫이슈까지는 아닌 듯했지만 기사의 인기 순위는 계속 오르고 있었다. 누군가가 의도한 것이 분명해 보였다. 한현진은 댓글창을 슥 훑어보았다. 알바 군단이 작성한 댓글을 제외하고도 재밌는 댓글이 꽤 있었다. [송씨 가문? 운해 그룹을 말하는 거야?][전에 친딸을 찾아 떠들썩하게 피로연을 연 재벌가가 바로 송씨 가문이었잖아. 역시 부잣집이야. 친딸을 데려오자마자 이렇게 엄청난 사람을 스승으로 모시다니.][금방 돌아온 그분은 아직 하늘에서 뚝 떨어진 부귀에 정신을 못 마치고 있을 것 같은데. 기사에서 보니까 이분은 송씨 가문에서 어렸을 때부터 돈과 노력을 들여 기른 진짜 부잣집 규수더라고. 각종 악기는 물론 전통 회화도 할 줄 아는 사람이야. 글씨체는 서예의 대가인 마지철에게서 전승받아 강단 있으면서도 우아하고 활기찬 모양이 일품이야. 정말 전형적인 타고날수록 노력하는 인간이라니까.][그 사람은 송씨 가문 규수가 아니지 않아요?][양딸은 딸도 아니라는 거야? 부모님이 결혼한 지 20년이 넘었는데 어떻게 딸이 아니라는 거지?][남들과는 다른 출발선에서 시작했음에도 이렇게 노력하다니. 오히려 금방 집으로 데려온 친딸이야말로 운이 따른 케이스지. 2, 30년을 떨어져 있었으니 그사이 벌어진 거리는 쉽게 따라갈 수 있는 게 아닐
송가람은 역시 자기 생각이 맞았다면 속으로 기뻐했다. [현진 씨는 평소 말이 많은 편도 아닌데 시끄럽다니. 한서 오빠, 두 사람 혹시 싸웠어요?]한현진은 점점 더 능숙하게 강한서인 척 연기했다. [현진 씨가 민서와 사이가 좋지 않아서 만나기만 하면 싸우니까 시끄러워 죽겠어.]이건 더할 나위 없이 합리한 설명이었다. 마침 얼마 전 강민서가 송가람에게 전했던 소식과도 일치했다. 송가람이 강한서를 위로하며 말했다. [현진 씨가 좀 욱하는 성격이긴 하죠. 평소 집에선 엄마와 아빠께서 참아주라고 하세요.]상대방은 또 한참 동안 답장이 없었다. 강한서가 답장이 없자 조급해진 송가람이 아예 전화를 걸었다. 한현진은 전화를 뚝 끊어버리고는 송가람에게 문자했다. [여기 신호가 안 좋아. 할 말 있으면 카톡으로 해.]송가람은 어쩔 수 없이 다시 문자를 작성했다. [한서 오빠. 요즘 몸은 좀 어때요? 현진 씨가 오빠 집에 가 있은지도 꽤 됐는데, 뭐 좀 기억나는 거 있어요?]한현진이 답장했다. [여전히 똑같지, 뭐.]송가람이 떠보듯 물었다. [한서 오빠. 현진 씨가 그렇게 오래 오빠 곁에 있었는데도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았는데 내보낼 생각은 안 해보셨어요?][그러니까 제 말은, 아직 결혼도 안 했는데 계속 오빠 집에 같이 있으면 남들이 들으면 어떻게 생각하겠어요. 게다가 민서랑도 사이가 안 좋으니 계속 그렇게 다투다간 두 집안 사이도 멀어지게 할 수 있잖아요.]송가람의 문자를 읽던 한현진이 입 꼬리를 씩 올렸다. ‘날 강한서 옆에서 떼어내시려고? 핑계도 제법 잘 찾네.’한현진이 답장했다. [나중에. 그 얘기만 나오면 할머니께 고자질해서 귀찮을 지경이야. 매일 하는 일도 없고 아무 것도 하려고도 하지 않아. 나이도 먹을 만큼 먹은 사람이 전혀 독립적이지 못해. 보기만 짜증이 난다니까.]상대방에게서 온 답장을 보며 적잖이 놀란 송가람은 한참 동안 말이 없었다. 그러자 한현진은 혹시 들킨 것은 아닌지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교양 있는 강한서라
총망하게 유호촌을 찾았던 두 사람은 또 바삐 한주로 돌아갔다. 아쉬운 마음에 증조할아버지는 화선지 한뭉치를 꺼내며 강한서에게 붓글씨를 조금 더 쓰고 가라며 부탁했다. 떠나기 직전까지 손주사위의 자랑거리를 만들어 두려는 증조할아버지의 부탁에 한현진은 두 손 두 발 다 들어야했다. 강한서는 증조할아버지의 부탁을 거절하지 않았고 바로 한선지에 붓글씨 수집 장을 써내려갔다. 곧 증조할아버지의 마당 곳곳엔 한선지가 가득 걸렸다. 한현진의 귓가로 먹을 말리며 중얼거리는 증조할아버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손씨가 변변치 않은 서예 실력으로도 붓글씨 하나에 1만 6천 원에 팔던데. 한서는 실력도 출중하니 최소한 2만 원은 받지 않겠어?”그 말에 한현진은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장사 좀 할 줄 아시네.’한주로 돌아가는 길, 한현진은 사망한 기장의 장례와 기타 뒷일을 잘 마무리했다는 송민준의 연락을 받았다. 그는 지금 주세은의 학교 수속을 도와주기 위해 H국으로 가는 중이며 3일이면 돌아갈 수 있다고 했다. “내가 돌아가면 같이 회사로 가.”송민준은 여전히 막 깔린느에 발을 들인 한현진이 사람들에게 인정받지 못할까 걱정이었다. 그는 한현진과 함께 회사로 가 그녀의 체면을 세워줄 생각이었다. 그 말을 들은 한현진이 웃음을 터뜨렸다. “오빠, 그럴 필요 없어요. 마음 놓고 그쪽 일 잘 해결해요. 전 어차피 낙하산이잖아요. 오빠가 가든 안 가든 어차피 당분간은 인정받을 수 없어요. 오빠가 오면 오히려 제가 오너 가문 딸이라는 신분으로 위세를 떨치려고 한다고 생각할 거예요. 그러면 미움만 더 살 거라고요.”송민준은 여전히 걱정을 멈출 수가 없었다. “아빠가 비록 깔린느의 지분을 너에게 많이 주셨지만 사실 아빠는 조향에 대해 잘 모르셔서 회사 운영에 별로 참여하지 않으셨어. 지금껏 줄곧 아주머니께서 실권을 장악하고 계서서 회사에서도 입지가 꽤 높아. 처음엔 인정을 받는 게 쉽지 않을 테니까 마음의 준비 좀 해야 할 거야.”한현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고 있
“사실 오빠가 M국에서 만난 그 간호사 있잖아. 그다지 도움이 될 만한 정보를 주지 않았어. 그 간호사는 모든 일의 변두리에 있는 아주 작은 캐릭터일 뿐이야. 알고 있는 사실도 한정적이고. 만약 내가 범인이라면 난 진작 그 여자가 어느 정도의 정보를 갖고 있는지 알고 있기 때문에 유용한 정보를 전할 수도 없다는 걸 알았을 거야. 그럼 내가 왜 굳이 오빠에게 손을 썼을까. 그건 내가 범인이라고 자백하는 것과 마찬가지잖아.”바로 그 비행기 추락사고 때문에 송민준과 한현진은 범인이 바로 곁에 있는 사람일 것이라고 확신했다. 솔직히 말하면 비행기 사고를 일으킨 것은 너무 멍청한 수단이었다. 자신을 완전히 용의선상으로 폭로했기 때문이었다. 한현진의 의심은 바로 강한서도 고민한 적 있는 문제였다. 잠시 생각에 잠겼던 그가 자신의 추축을 말했다. “혹시, 범인이 한 명이 아닐 수도 있는 거 아냐? 내부에서 의견이 좁혀지지 않았고 마음 급한 한 명이 들킬까 봐 겁이나 형님에게 손을 쓴 거라면?”서해금은 매우 똑똑한데다 신중하기까지 한 사람이었다. 만약 서해금이라면 절대 이렇게 쓸데없는 멍청한 짓은 벌이지 않았을 것이다. 강한서의 말에 한현진이 멍해졌다. ‘한 명이 아니라...’이건 그녀가 전혀 생각해 본 적 없는 추측이었다. 만약 상대방을 완전히 믿을 수 없다면 감히 누군가의 생명을 해치는 일에 동참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만 생각해.”강한서가 한현진의 머리카락을 어루만졌다. “지금 상대방은 어두운 곳에 몸을 숨기고 있고 우리는 밝은 곳에 노출되어 있는 것과 마찬가지인 상황이야. 너무 큰 움직임이 있어서는 안 돼. 아직 당시 일을 알고 있는 사람 한 명을 못 찾았잖아. 그 사람을 찾으면 어쩌면 모든 것이 쉽게 해결될지도 몰라.”한현진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 사람이 살아있길 바래야지.”차로 4시간 정도 걸리는 거리였다. 두 사람은 저녁이 되어서야 한주에 도착했다. 의심을 사지 않기 위해 강한서는 도중에 차를 갈아타고 회사로 향했다. 민경하는
한현진의 말에 송병천이 침묵했다. ‘내가... 현진이에게 저런 말을 한 적이 있었나?’한현진이 집으로 돌아온 후, 송병천은 사실 한 번도 그녀와 서해금의 일에 관해 얘기를 꺼낸 적이 없었다. 새로운 가정을 꾸린 것이라 그가 재혼했다는 사실로 오해가 생겨 한현진과 멀어지면 어쩌나 하는 걱정 때문이었다. 솔직히 말하면 서해금과 결혼하고 지금까지 그녀의 도움으로 이 가정을 잘 이끌어 나갈 수 있었다. 하지만 그런 고마운 마음을 착한 딸의 입으로 들으려니 어쩐지 조금 어색하게 느껴졌다. ‘고마운 마음은 다른 것으로 표현하면 되는 건데, 왜 꼭 여행을 보내는 거야.’송병천은 몰래 한현진의 소매를 잡아당겼다. 그러나 한현진은 전해 내색하지 않고 그의 손에 팔을 빼냈다. “...”한현진의 말에 처음엔 놀라는 듯 보이던 서해금은 곧 다시 평정심을 되찾았다. 그녀가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얘는 가족끼리 무슨 고맙다는 말을 하고 그러니. 네 아빠와 나는 부부야. 그러니 네 아빠와 민준이를 보살피는 건 내가 해야 할 일이야. 오히려 너야 말로 어려서부터 곁에 없어서 얼마나 고생했겠어. 네 아빠는 그 생각만 하면 오랫동안 마음 아파 하셔.”“내일이면 출근할 텐데, 처음 입사하는 거라 일이 꽤 많을 거야. 각 부서도 너에 대해 잘 모를 텐데 내가 이 타이밍에 여행을 가면 너 혼자 맨땅에 헤딩하는 것 같을 거야. 네 아빠도 마음이 놓이지 않을 테고.”서해금은 말하며 송병천을 쳐다보았다. “그렇죠, 여보.”막 대답하려는 송병천에게 한현진이 또 대추 하나를 건넸다. “아빠, 하나 더 드세요. 소화에 좋아요.”송병천은 목구멍까지 올라온 말을 다시 삼키고 대추를 건네받았다. 한현진은 티슈 한 장을 뽑아 살며시 손가락을 닦았다. 턱을 살짝 치켜올리고 은은한 미소를 띠며 농담을 던지듯 송병천에게 말했다. “아빠, 아주머니가 저를 어린애 취급해요.”말하며 한현진은 서해금에게로 시선을 돌리고는 웃으며 말했다. “아주머니, 회사에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 모르는 게
주현의 생각은 성월과 달랐다. 송가람은 사랑에 눈이 멀어 남자의 사랑을 바랐지만 주현은 아니었다. 그녀의 목표를 애초부터 매우 명확했다. 주현은 상대방이 자신에게 줄 수 있는 신분과 지위를 노렸다. 그건 20년, 30년을 노력해도 가질 수 없는 것들이었다. 지금 주현이 원하는 모든 것을 얻을 수 있는 지름길이 눈앞에 놓였는데 그 기회를 잡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하지만 주현은 성월의 성격을 잘 알았다. 성월은 반평생을 야심으로 가득 찬 서해금 곁을 지키며 진작 서해금의 충직한 개가 되었다. 성월에게 신분은 뛰어넘을 수 없는 벽 같은 거였고 자신의 미래는 스스로 기회를 잡아 개척해 나가야 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서해금 역시 자신의 두 손으로 그 자리에 오른 것은 아니었다. 송병천과의 결혼이 아니었다면 서민 출신에 남편을 잃고 아이를 키우는 싱글맘이 무슨 수로 지금의 자리에 오를 수 있었을까?‘웃기지 말라 그래.’하지만 그 말을 주현은 감히 성월 앞에선 할 수 없었다. 주현은 애교를 부리며 말했다. “이모, 도와줘요. 신씨 가문으로 돌아가든 아니든 저 한 번 해보고 싶어요. 송가람 씨와 조금이라도 가까이 할 수 있는 일로 부탁해요. 활동이든 파티든 데리고 다닐 수 있는 자리로요. 그래야 신씨 가문에 호감을 살 수 있죠.”성월의 학창 시절, 그녀의 집안은 그야말로 찢어지게 가난했다. 주현의 부모님이 빌려주신 돈으로 급한 불을 끈 덕에 성월은 늘 주현의 집안에 감사한 마음을 갖고 있었다. 주현의 애교에 견디지 못한 성월이 한숨을 내뱉으며 말했다. “송가람 씨 비서로 전근 보내볼게. 너, 네 남자친구한테 기본적인 건 잘 가르쳐. 묻는 말에 아무 것도 대답 못하면 안 돼.”주현이 순간 환한 미소를 지으며 성월에게 팔짱을 끼고 달콤한 목소리로 말했다. “고마워요, 이모! 역시 이모가 날 제일 예뻐할 줄 알았어. 주말에 집에 와서 식사해요. 안 가신지 꽤 됐잖아요...”한편, 사무실로 돌아온 한현진의 마음은 쉬이 가라앉지 않았다. 만약 어제 바로 세정제
서해금이 입술을 짓이기며 중얼거렸다. “이렇게 냉정하다니, 한현진 답지 않아.”성월이 말했다. “사실 전 그렇게 냉담한 것도 당연하다고 생각해요. 오일을 깨뜨린 것도 주혁 씨였고 몰래 부업을 하다 한 대표님 얼굴에 먹칠한 것도 주혁 씨잖아요. 그러니 당연히 원망하는 마음이 있을 거예요.”말이 없던 서해금이 잠시 후 입을 열었다. “인사팀에 잠깐 다녀와요. 일단 주혁을 가람이 운전기사로 전근시켜요.”성월이 놀란 얼굴로 말했다. “대표님, 가람 아가씨에게 운전기사를 붙일 생각이시면 제가 다른 기사님을 찾을게요. 회사에는 지금 마침 새로 입사한 젊은 신입사원들이 많아요. 어리고 건강하고 운전 경력도 전부 5년이 넘었어요. 주혁 씨는 한현진 곁에서 한동안 일을 하신 분인데, 가람 아가씨 운전기사로는 적합하지 않을 것 같아요.”“전근시키라고 하면 시켜요. 제가 이렇게 하는 덴 이유가 있어요. 그러니 성 비서는 나서지 말아요.”성월이 다급히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네.”성월이 사무실을 나서자 주현이 곧바로 그녀에게 다가갔다. “이모, 어떻게 됐어요? 대표님께 말씀 드렸어요?”성월이 고개를 가로 저었다. “대표님께서 이미 송가람 씨에게 다른 운전기사를 붙이셨어. 이미 결정된 일이야.”순간 주현은 조바심이 났다. “왜 갑자기 결정 난 거예요? 회사에서 요즘 새로 신입사원 모집했잖아요. 보안팀은 싫어할 거란 말이에요.”성월이 말했다. “대표님께서 주혁을 송가람 씨 운전기사로 전근시켰어. 지금 인사팀에 가서 그 일부터 처리해야 해.”그 말을 들은 주현이 투덜거렸다. “한현진 밑에 있던 사람이잖아요. 게다가 본인 상사를 배신까지 했고요. 대표님은 무슨 생각으로 그런 사람을 딸 운전기사로 쓰시겠다는 거예요?”순간 얼굴을 일그러뜨린 성월이 주현을 구석진 곳으로 끌고 갔다. 성월은 주변을 확인하고 나서야 주혁의 팔을 내치며 차가운 얼굴로 말했다. “너 미쳤어? 여긴 회사야. 여기서 집인 줄 알고 그렇게 큰 소리로 대표님 뒷담화를 하는 거야?
직원들은 열띤 토론을 벌이고 있었다. 어떤 직원은 회사의 조치가 꽤 인간적이라며 칭찬했고 또 어떤 직원은 아무리 화장실 청소라도 그렇게 부식성이 강한 세제를 쓰진 말았어야 했다며 안전 문제를 인지하지 못한 회사의 관리에 문제가 있다고 비난했다. 이번 일은 단순히 청소 직원이 화상을 입은 것으로 그쳤지만 만약 누군가 범행을 저지르려고 한다면 부식성이 강한 세정제는 범죄자에게 칼을 준비해준 것과 다를 것이 없는 꼴이었다. 의문을 제기하던 직원이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돌려 한현진과 눈을 마주쳤다. 그제야 실언했다는 것을 인지한 직원이 다급하게 말했다. “대표님, 전 회사에서 조치를 제대로 못했다는 뜻이 아니라요. 단지 위험 요소가 될 수도 있는 거니까, 저도 모르게 제일 최악의 상황을 상상해본 거예요.”한현진이 고개를 들었다. “무슨... 위험 요소요?”그 직원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못... 못 들으셨어요?”“죄송해요.”한현진이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조금 전 친구 문자에 답장하느라 못 들었어요.”직원이 입술을 달싹이며 말을 잇지 못했다. 옆에 있던 또 다른 직원이 얼른 말을 이었다. “회사에서 며칠 동안 청소하시는 직원분들이 다치는 사고가 있었잖아요. 그 일 때문에 다들 마음이 뒤숭숭해요.”한현진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한 직원이 말을 이었다. “아, 맞다. 대표님. 다치신 분 중에 대표님이 아는 사람도 있어요. 전에 대표님 운전 기사셨던 주혁 기사님이요. 그 분이 제일 심하게 다치셨어요.”한현진이 미간을 찌푸렸다.“기사님이요? 확실해요? 어제 볼 일 보러 갔다가 기사님 만났을 때까지만 해도 멀쩡하셨는데. 언제 다치신 거예요?”한현진의 말에 직원이 멍해졌다.“그럴 리가요. 며칠 전에 이미 다치셨어요. 대표님과 비슷한 시기에 휴가를 내셨어요.”한현진이 곰곰이 생각했다. “그날 제가 급한 일 때문에 길게 얘기를 나누진 못했어요. 손에 붕대 같은 건 본 기억도 없고 기사님께서도 저한테 그런 얘기는 없으셨는데... 심하게 다치셨어
막 전화를 끊으려던 그 순간, 박안수가 다시 불렀다.“아, 그리고...”“뭔데?”“오늘 경찰서에서 한현진과 마주쳤어.”서해금의 표정이 순식간에 일그러졌다. “한현진이 경찰서엔 왜?”“나도 자세한 건 안 물어 봐서 잘 몰라. 하지만 갑자기 일이 생겨서 간 것 같아. 혼자가 아니라 6, 7살 쯤 되는 어린 아이와 함께 왔었어.”미간을 찌푸리며 잠시 생각하던 서해금이 또 물었다. “한현진이랑 얘기했어? 무슨 얘기했는데?”“괜히 의심할까봐 내가 경찰서에 간 이유를 사실대로 얘기했어. 한현진도 더 묻지 않았고.”우물 쭈물거리며 숨기는 것보다는 차라리 당당하게 대답하는 편이 오히려 의심을 덜 사는 방법이었다. “그게 다야?”“응.”생각의 잠겼던 해금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경찰한테 손에 상처는 뭐라고 얘기했는데?”“회사에서 청소하다가 부식성 제품에 다친 거라고 했어.”서해금이 원망하듯 말했다. “왜 회사에서 다친 거라고 했어. 회사에서 그렇게 부식성이 강한 제품을 쓸 리가 없잖아.”“그렇다고 내가 집에서 다친 거라고 할 순 없잖아. 집에는 회사에서 다친 거라고 했는데. 조사 협조 요청을 나한테만 하는 게 아니잖아. 게다가 그 두 사람은 거짓말을 아예 못 해. 만약 경찰이 내 손에 관해 묻기라도 한다면 바로 들켜 버리는 거잖아.”서해금이 굳은 얼굴로 말했다. “여자는 미쳤고 애는 귀가 먹었는데, 그런 병X도 제대로 통제 못 해?”순간 얼굴을 찡그린 박안수가 말했다. “말 그렇게 하지 마. 두 사람 불쌍한 사람들이야.”“뭐가 불쌍해. 도박쟁이 가정폭력범을 성실하고 부지런한데다 박학다식한 남편으로 바꿔줬는데. 우리한테 고마워해도 모자라.”서해금의 말에 박안수는 왠지 마음이 불편해졌다.너는 대화를 이어 가고 싶지 않았던 서해금이 당부하며 말했다. “이만 끊어. 가람이한테 당신을 기사로 쓰라고 얘기하러 갈 거야. 소식 기다려.”박안수는 목 끝까지 차오른 말을 삼키며 나지막하게 대답했다.“그래.”전화를 끊은 서해금은 아무리 생
“아니.”서해금이 미간을 찌푸렸다. 도무지 마음을 놓을 수 없었다. “경찰에겐 뭐라고 했어?”수화기 너머의 사람이 담담하게 대답했다. “사실대로 얘기했어.”“박안수!”서해금은 참기 힘들 정도로 화가 끓어올랐다. “지금이 농담할 때야?”“농담 아냐.”말하는 사람의 목소리가 더 가라앉았다. “그럼 내가 뭐라고 말할까? 네가 준 신분이니 난 당연히 주어진 대본대로 연기할 수밖에. 그럼 내가 난 박안수라고 얘기했어야 해? 죽은지 27년도 더 된 사람이야. 박안수가 어떻게 돌아와?”그의 목소리엔 고통과 원망으로 가득 했다. 그 순간, 서해금의 얼굴이 끔찍하게 일그러졌다. “지금 날 탓하는 거야?”말이 없던 상대방은 잠시 후 덤덤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런 적 없어.”“박안수, 지금 날 탓하는 거잖아.”서해금이 공격적인 말투로 말을 이었다. “그때 빚을 진 사람도 당신이고, 그 아이디어를 낸 사람도 당신이었어. 당신이 가람이를 키울 능력이 없었던 거고, 당신이 가람이가 더 좋은 환경에서 살길 바랐고, 그래서 나한테 도와달라고 사정한게 당신이었어.”“내가 당신한테 돈 안 줬어? 지금껏 내가 당신한테 준 돈이 얼만데. 당신은 얼마든지 해외에서 지금보다 더 나은 인생을 살 수 있었어. 굳이 한주에 남겠다고 한 건 당신이야. 내가 당신에게 그럴 듯한 신분을 만들어주지 않았으면 당신이 무슨 명분으로 가람이 앞에 나타날 건데? 당신이 이렇게 당당하게 가람이를 만날 수나 있었을 것 같아?”목이 메인 남자는 한참만에야 눈을 감으며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 “네 탓한 거 아냐. 난 그저 이렇게 조마조마 마음 졸이는 생활에 지쳤을 뿐이야. 난 집에서도 감히 옷을 못 벗어. 잠도 깊게 잘 수가 없어. 길에서는 아는 사람이라도 만나면 그 사람은 날 보면서 반갑게 인사하는데 난 그 사람이 누군지도 몰라. 그러면서도 아는 척, 반가운 척 인사를 해야 해. 심지어 아무리 아파도 검사도 못 해. X발, 병원도 가질 못한다고!”남자가 깊은 숨을 몰아쉬며 말했다.
“네, 볼 일 봐요. 회사로 복귀하면 다시 얘기하죠.”한현진이 전화를 끊었을 때 차는 이미 회사에 도착했다. 차에서 내린 한현진은 곧바로 로비로 향했다. 회사의 프런트가 한현진에게 정중하게 인사를 건넸다. 짧게 인사를 받은 엘리베이터에 탄 한현진은 사무실이 아닌 2층을 눌렀다. 회사 건물은 2층부터 화장실이 있었기에 1층엔 화장실이 없었다. 한현진은 아예 2층부터 일일이 확인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오늘 역시 공교롭게도 2층에 도착한 한현진은 마친 청소 중인 직원과 마주쳤다. 근무 시간이 화장실엔 사람이 없었다. 직원은 바닥을 닦고 있었고 세면대와 멀지 않은 곳에 청소차가 세워져 있었다. 그 위엔 청소 용품으로 가득 했다. 한현진은 고개를 숙여 청소 용품을 확인했다. 청소차엔 수많은 플라스틱 통과 병이 있었고 그 안엔 전부 액체가 담겨져 있었다. 굳이 뚜껑을 열지 않아도 소독제의 냄새가 올라왔다. 그러나 그 제품들은 그 어떤 별다른 표시도 되어 있지 않았다. ‘하지만 부식성이 그렇게 강한 용액을 플라스틱 병에 담진 않았을 거 아냐.’“누구세요?”청소차를 관찰하는 한현진의 등 뒤로 사투리 억양이 섞인 여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한현진이 몸을 돌리니 청소 중이던 직원이 보였다. 그 직원은 아래층 청소를 도맡아 하는 분이라 한현진을 본 적이 없었다. 단순히 한현진이 화장실을 사용하려는 것이라 생각한 직원이 말했다. “아직 소독제를 쓰지 않았으니까 볼 일 보려면 얼른 봐요.”한현진은 그 말에 대답하지 않은 채 청소차의 물건들을 쳐다보며 물었다. “아주머니, 여쭤볼게 있어요. 화장실 청소를 하실 때 어느 브랜드의 농도가 얼마인 세정제를 사용하세요?”직원이 말했다. “도매 시장에서 파는 회색통이요. 커다란 거. 엄청 싸요. 이름이 뭔지는 모르겠는데. 사려고요?”한현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화장실이 항상 깨끗해서요. 저도 집에서 써보려고요.”청소 직원이 얼른 한현진을 말렸다. “절대 사지 마요. 변기의 때는 우리가 항상 솔로 조금씩 닦
또 다른 경찰이 물었다. “그래서 지장은 찍을 수 있어요?”“손이 그 지경인데 지장을 어떻게 찍어? 손을 보니까 지장은 무리인 것 같아서 포기했지. 어차피 지문도 완전히 회복하긴 힘들 것 같았어. 그래서 애들한테 홍채와 성문을 따라고 했어.”말을 마친 키 큰 형사가 한현진에게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나중에 회사에 가셔서 얘기 좀 하세요. 그렇게 부식성이 강한 제품은 얼른 교체하라고요. 만약 누가 나쁜 마음이라도 먹고 그 제품으로 가해라도 하면 회사에서도 책임지셔야 해요.”생각에 잠겼던 한현진이 그 말에 얼른 대답했다. “네, 알겠어요. 알려주셔서 고마워요.”경찰서에서 나온 한현진은 내내 미간을 찌푸린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조금 전 은서가 본 것은 주혁의 태반이나 점이 아니라 청소 용액에 부식되어 생긴 상처였다. 어차피 납치 사건의 범인은 이미 잡혀 경찰서에 있는데, 대체 뭐가 그렇게 급해서 상처를 치료도 하지 않고 경찰서로 달려온 것일까?한현진은 아무리 머리를 굴려도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게다가 이해되지 않는 부분이 하나 더 있었다. 회사에선 그런 고농도의 부식성 제품을 구매했을 리가 없었다. 형사의 말처럼 그런 제품은 위험부담이 너무 컸다. 한현진은 이시연의 연락처를 찾아 그녀에게 전화를 걸었다. 하지만 연결음이 거의 끝나가도록 이시연은 전화를 받지 않았다. 전화를 끊은 한현진은 곧이어 강한서에게 연락했다. 몇 초 후 통화가 연결되었지만 전화를 받은 사람은 강한서가 아닌 민경하였다. 강한서는 오늘 중요한 회의가 있어 전화를 받을 상황이 아니었기에 민경하가 그의 휴대폰을 갖고 있었다. “사모님, 저예요. 대표님께서 지금 중요한 회의 중이시라 전화를 받기 힘든 상황이에요. 급한 일이시면 저에게 얘기하셔도 돼요. 급한 일이 아니면 회의가 끝나면 바로 전화 드리라고 대표님께 말씀 드릴게요.”“급한 건 아녜요. 제가 지금 급히 회사에 가봐야 하는데 아직 은서랑 같이 있어서요. 제가 조금 이따가 회사로 가는 길에 은서를 먼저 한
주혁은 한현진보다 조금 더 먼저 경찰서에 도착한 것 같았다. 한현진이 도착했을 땐 주혁은 입구에서 통화 중이었다. 안색이 어두웠지만 그는 목소리를 잔뜩 낮춘 채 대화하고 있었다. 그를 먼저 발견한 한현진이 가까이 다가가려 하자 주혁이 곧 경계하듯 고개를 돌렸다. 한현진을 본 주혁이 멈칫하더니 곧 전화를 끊고 다가왔다. “대표님? 여긴 어쩐 일이세요?”한현진이 말했다. “일이 좀 있어서요. 기사님도 일 보러 오셨어요?”짧게 대꾸한 주혁이 머뭇거리더니 말을 이었다. “8년 전 제 아들을 납치한 마지막 용의자가 잡혔다고 해서요. 조사에 협조해달라는 연락을 받고 왔어요.”한현진이 놀라운 듯 물었다. “아드님이 납치되었었어요?”주혁이 솔직하게 대답했다. “8, 9년 전 일이죠. 납치된 동안 납치범에게 맞아 치료 시간을 놓쳐 청력도 잃게 된 거예요. 그 사건을 맡은 형사님이 그러시더라고요. 사건이 종결되면 배상금을 어느 정도 받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요.”얘기하는 동안 주혁은 아래쪽에서 자신의 손을 지긋이 쳐다보는 시선을 느꼈다. 그는 입술을 짓이기며 조용히 손바닥을 다리에 대고 말을 이었다. “곧 아이에게 인공 달팽이관을 해줄 수 있을 것 같아요.”주혁의 이야기가 한현진의 호기심을 자극하긴 했지만 그녀는 예의상 더는 그 일에 관해 묻지 않았다. 한현진은 대화주제를 돌리며 주혁에게 물었다. “제가 전에 추천해준 의사 분께 가 보셨어요?”주혁이 멈칫하며 대답했다. “아직이요.”한현진에게는 꽤 의외의 대답이었다. 그녀는 주혁이 최대한 빨리 아이를 데리고 검사를 받으러 가 인공 달팽이관을 제작할 것이라 여겼다. 아무래도 주혁은 규정을 어기고 부업을 할 만큼 누구보다 간절하게 수술을 바라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한현진이 그에게 일반 병원보다 더 싼 가격에 수술을 받을 수 있는 의사를 추천해주었음에도 지금까지 검사조차 받지 않았다고 한다.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요즘 아내가 몸이 안 좋아서요. 전근된 곳이 전처럼
하온이는 적합한 골수를 기다리지 못한 것이 아니었다. 아이에게는 골수를 의식할 수 있는 기회가 두 번이나 있었다. 처음으로 하은이에게 기회가 찾아 왔을 때는 골수 의식의 최적의 타이밍이었다. 하지만 하온의 병을 치료하기 위해 그의 집안은 이미 빚더미에 앉은 상황이라 아무리 여기저기서 돈을 빌려도 수술비를 모을 수 없었다. 그러니 하온의 부모님은 어쩔 수 없이 마음을 독하게 먹고 수술을 포기한 채 아득바득 돈을 모으며 다음을 기약해야 했다. 하지만 곧 있을 줄 알았던 두 번째 기회는 그리 빨리 오지 않았다. 너무 오랜 기다림을 견뎌냈지만 하온의 몸은 이미 수술을 진행 할 수 없을 정도로 허약해져 있었다. 하온은 하루하루 날이 다르게 시들어 가는 꽃 같았다. 은서는 낮엔 하온이와 놀다가도 저녁엔 침대에 누워 눈물을 흘렸다. 하온이가 세상을 떠나기 전날 밤, 은서는 강한서 품에 안겨 닭똥 같은 눈물을 뚝뚝 흘렸다. 은서가 말했다. “삼촌, 저도 죽어요?”“삼촌, 우린 왜 이런 병에 걸린 거예요?”“삼촌 부자잖아요. 하온이 오빠가 수술할 수 있게 돈 빌려주시면 안 돼요? 제가 커서 돈 벌면서 갚을게요. 하온이 오빠 죽는거 싫어요.”강한서는 은서의 머리카락을 어루만지며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은서는 아직 너무 어려서, 인생은 가끔 이렇게 운명의 장난 앞에서는 무력하기만 하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목숨으로 돈을 맞바꾸기는 쉬운 일이었지만 돈으로 목숨을 살 수는 없었다. 강한서는 은서가 아직까지 그 일을 기억하고 있을 줄은 몰랐다. 그때의 은서는 고작 5살이었다. 눈시울이 붉어진 한현진은 말을 잇지 못했다. 이 세상에는 가여운 사람이 너무도 많았다. 그러니 혼자의 힘으로는 고작 얼마의 힘이나 보탤 수 있을까. 그렇다고 세상이 나아질 것이라 기대하는 아이의 기대를 깨트릴 수도 없었다. 한현진은 정중하게 물었다. “정말 이거 전부 기부할 거야? 기부하면 은서에겐 아무 것도 없는 거야.”고개를 끄덕이던 은서가 곧 찬란한 미소를 지었다. “저 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