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현진의 말에 송병천이 침묵했다. ‘내가... 현진이에게 저런 말을 한 적이 있었나?’한현진이 집으로 돌아온 후, 송병천은 사실 한 번도 그녀와 서해금의 일에 관해 얘기를 꺼낸 적이 없었다. 새로운 가정을 꾸린 것이라 그가 재혼했다는 사실로 오해가 생겨 한현진과 멀어지면 어쩌나 하는 걱정 때문이었다. 솔직히 말하면 서해금과 결혼하고 지금까지 그녀의 도움으로 이 가정을 잘 이끌어 나갈 수 있었다. 하지만 그런 고마운 마음을 착한 딸의 입으로 들으려니 어쩐지 조금 어색하게 느껴졌다. ‘고마운 마음은 다른 것으로 표현하면 되는 건데, 왜 꼭 여행을 보내는 거야.’송병천은 몰래 한현진의 소매를 잡아당겼다. 그러나 한현진은 전해 내색하지 않고 그의 손에 팔을 빼냈다. “...”한현진의 말에 처음엔 놀라는 듯 보이던 서해금은 곧 다시 평정심을 되찾았다. 그녀가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얘는 가족끼리 무슨 고맙다는 말을 하고 그러니. 네 아빠와 나는 부부야. 그러니 네 아빠와 민준이를 보살피는 건 내가 해야 할 일이야. 오히려 너야 말로 어려서부터 곁에 없어서 얼마나 고생했겠어. 네 아빠는 그 생각만 하면 오랫동안 마음 아파 하셔.”“내일이면 출근할 텐데, 처음 입사하는 거라 일이 꽤 많을 거야. 각 부서도 너에 대해 잘 모를 텐데 내가 이 타이밍에 여행을 가면 너 혼자 맨땅에 헤딩하는 것 같을 거야. 네 아빠도 마음이 놓이지 않을 테고.”서해금은 말하며 송병천을 쳐다보았다. “그렇죠, 여보.”막 대답하려는 송병천에게 한현진이 또 대추 하나를 건넸다. “아빠, 하나 더 드세요. 소화에 좋아요.”송병천은 목구멍까지 올라온 말을 다시 삼키고 대추를 건네받았다. 한현진은 티슈 한 장을 뽑아 살며시 손가락을 닦았다. 턱을 살짝 치켜올리고 은은한 미소를 띠며 농담을 던지듯 송병천에게 말했다. “아빠, 아주머니가 저를 어린애 취급해요.”말하며 한현진은 서해금에게로 시선을 돌리고는 웃으며 말했다. “아주머니, 회사에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 모르는 게
송병천도 여행을 가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딸의 효심을 차마 저버릴 수 없어 대답했다. “당신, 조금 이따 비서에게 얘기해서 밀 좀 미뤄둬. 애가 어쩌다 마음 써줬는데 우리도 쉬러 간다 생각하자고.”서해금이 주먹을 꽉 움켜쥐고 한현진을 힐끔 쳐다보았다. 그리고 곧 빙그레 미소 지으며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당신이 그렇게 말하니 당신 말대로 해야죠.”한현진은 몰래 혀를 찼다. 서해금은 참을성이 좋은 것은 물론 너무 냉정하기까지 했다. 처음 봤을 때부터 지금까지, 그녀가 평정심을 잃고 실수한 것은 피로연이 유일했다. 꾀병을 부린 송가람에게 한열이 한승을 투척해 깨어나게 만든 그 일 말이다. 하지만 그 일로 서해금이 이성을 잃은 것은 단지 몇 분 뿐이었다. 당시 그녀는 곧 이성을 되찾았었다. 하지만 고작 그 몇 분으로 서해금은 그녀의 약점을 들키고 말았다. 서해금 같은 강적은 만약 그녀에게 발목을 잡는 파트너만 없었다면 지금보다 훨씬 상대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그녀는 송병천 앞에서는 너무 좋은 이미지를 유지하고 있었다. 송병천에게 서해금은 온화하고 이치에 밝은 사람이었다. 송민준과 한현진, 그리고 송가람 사이에 다툼이 생기면 서해금은 늘 송민준이나 한현진의 편을 들었다. 게다가 효심이 지극하고 송병천을 위해 희생을 마다하지 않았다. 만약 한현진에게도 서해금 같은 사람이 간쓸개 다 내줄 것처럼 그녀를 사랑한다면 설사 그를 사랑할 수는 없더라도 상처는 주지 않을 것이었다. 그것이 바로 서해금이 둔 신의 한 수였다. 그런 생각에 한현진은 또 저도 모르게 송병천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그 시선이 어쩐지 따끔거려 송병천은 으스스 소름이 돋았다. 심지어 짐을 정리하는 동안에도 송병천은 등 뒤로 날아오는 날카로운 한현진의 시선을 느낄 수 있었다. 더 이상 그 눈빛을 견딜 수 없었던 송병천이 참지 못하고 옷을 개는 한현진에게 물었다. “대체 무슨 말이 하고 싶어서 한참 동안 빤히 쳐다보고 있는 거야?”“아, 아무 것도 아니에요.”시선을 내리고 옷을
송병천의 말에 한현진이 멍해졌다. 그녀는 줄곧 그녀와 송민준의 입장에서만 이 문제를 생각했었다. 송병천의 입장을 생각해 본 적은 거의 없었다. 송병천이 재혼을 했고 재혼의 상대가 하필이면 하현주가 생전 제일 친한 친구였다는 것이 꽤 마음에 걸렸다는 사실을 한현진은 인정해야 했다. 하지만 당시의 일에 있어서 한현진은 그 일을 직접 겪은 당사자가 아니었다. 그러니 송병천이 대체 어떤 상황에서 서해금과 재혼했는지는 알 수 없었다. 하현주가 세상을 뜨고 송병천이 재혼하기까지 6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그 시간 동안 송병천이 얼마나 많은 저항을 했는지는 그만이 알고 있을 일이었다. 아이 딸린 홀아비, 집에는 병상에 시달리는 어머니가 계셨다. 서해금의 출현은 마치 윤활유처럼 녹이 슬어 삐걱거리던 집안을 다시 돌아가게 했다. 나이 지긋한 어머니는 본인이 돌아가신 후 혼자 쓸쓸히 남겨질 아들과 손주가 걱정이 되었을 테고, 때마침 나타난 현명한 여자와 아들을 이어주고 싶어 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살아가면서 미련 둘 것이 생긴 사람은 많은 것을 원하는 대로만 살아갈 수는 없다. 송병천은 아마도 임종을 앞둔 어머니의 소원을 마다할 수 없었을 것이다. 같은 이유로 자기를 위해 목숨까지 바친 여자에게 이혼 얘기를 꺼낼 수도 없었다. 한현진은 심지어 그런 생각까지 했다. 어쩌면 송병천이 서해금에게 깔린느의 권한을 쥐어준 것도 어쩌면 마음을 줄 수 없는 것에 대한 미안함 때문일지도 모른다고 말이다. 서해금이 송병천에게 어떤 마음을 품고 있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그녀는 송병천에 대해 아주 알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몸을 숙여 송병천을 꼭 끌어안은 한현진이 나지막이 그를 불렀다. “아빠.”송병천이 고개를 돌려 한현진을 쳐다보았다. 한현진은 송병천의 등을 톡톡 두드렸다. “아빠. 아빠는 오빠도 잘 기르셨고 저도 찾아주셨어요. 아빠가 우리 가족을 온전하게 만드신 거예요. 너무 대단하세요.”눈시울을 붉힌 송병천이 고개를 돌려 북받치는 감정을 추슬렀다. 그는 한참
재벌집 막내딸 특유의 오만한 기질이 있는 강민서가 흥 콧방귀 뀌며 말했다. “필요 없어.”한현진이 강한서를 쳐다보았다. “월급 올려줬어? 배짱이 좋네.”강한서가 말했다. “아뇨. 여전히 340만 원이죠.”“아니야. 지금은 우리 집에 살고 있는데 월세를 안 깎았잖아. 여긴 별장이니까 월세로 100만 원을 받는 건 괜찮지?”한현진의 말에 강민서의 눈가가 파르르 뛰었다. 어쩐지 불안한 예감이 엄습했다. 잠시 생각하던 강한서가 말했다. “조금 적은 것 같아요. 남향의 게스트 룸에 욕실도 혼자 쓰고 있고 수영장도 있잖아요. 베란다와 안마 의자도요. 민 실장이 전에 살던 회사 근처의 오피스텔도 월세가 140만원이었는데, 우린 별장이잖아요.”“민서는 네 동생이니까 할인해줘야지.”강한서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죠. 현진 씨가 100만 원이라고 했으니 100만 원으로 하죠. 나중에 재무팀에게 직접 현진 씨 계좌로 넣으라고 할게요.”한현진이 말했다. “우리 집에서 끼니도 해결하고 있어. 우리 정도면 반찬이 나쁘지는 않은데. 킹크랩, 굴, 상어 지느러미, 연와, 캐비아... 이 정도 수준이면 매달 100만 원을 받아도 무리는 아니겠지?”강한서가 말했다.“가성비로는 최고네요. 전에 제가 한세 한식당에서 예약 주문했을 땐 매달 260만 원이었어요. 식재료도 저희만큼 풍부하진 않았고요. 100만 원이면 식재료 값으로도 부족해요.”한현진이 강한서를 나무랐다. “100만 원으로 해. 오빠랑 새언니가 되어서는 동생이 얹혀 살고 있는데 조금이라도 보태야 하지 않겠어?”강한서가 대답했다. “그럼 그것도 재무팀에 얘기해서 매달 민서 월급에서 100만 원을 현진 씨 계좌에 이체하라고 할게요.”“그리고 민서 방에 있는 매트리스. 그 매트리스 엄청 비싼 건데 매일 거기서 자고 있으니 그로 인한 손실도 계산해서 해야 하는 거 아냐? 그때 아마 가격이 일—”“오빠, 오빠. 내가 할게. 들어가서 쉬어. 새언니, 이것만 하면 돼?”강민서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녀
한현진이 정리한 옷들을 툭툭 두드리며 고개를 들었다. “이 옷들, 누가 선물한 건지 알아?”강한서가 고개를 가로 저었다. 하지만 한현진의 표정을 살펴보던 그가 떠보듯 물었다. “송가람?”“똑똑하네.”강한서가 미간을 찌푸렸다. “이건 네가 임신하지 않았다고 해도 안 맞는 사이즈잖아. 입지도 못할 옷은 왜 선물한 거야?”‘왜냐고? 당연히 날 기분 나쁘게 하려고 그러는 거지.’사고를 강요당했으니 마음에 내키지 않아 선물을 주는 것도 꼼수를 부린 것일 테였다. 그런 생각을 하던 한현진이 말했다. “자기가 나보다 날씬하다는 걸 자랑하고 싶었겠지. 다리도 젓가락처럼 가늘고 곧아서 나보다 예쁘고. 안 그래?”“눈 여겨 본 적 없어.”강한서는 한현진이 판 함정에 전혀 뛰어들지 않았다. 눈치가 빨라서가 아니라 그는 정말 전혀 신경조차 쓰지 않았다. 강한서에게 이성은 한현진과 다른 여자 두 종류뿐이었다. 다른 사람이야 예쁘든 몸매가 좋든, 강한서의 관심사가 아니었다. 강한서가 기억하는 송가람에 대한 이미지는 그저 지나치게 부각되어 보이던 쇄골이 전부였다. 물론 그 쇄골이 예뻐 보여서 기억에 남은 건 아니었다. 다만 그는 송가람의 쇄골을 보며 불현듯 시사 뉴스에서 보았던 앙상하게 마른 피난민의 모습을 떠올렸다. 영양실조가 분명해 보였다. 그에 비해 한현진은 아기처럼 동글동글한 수준까진 아니었지만 선명한 이목구비에 생기발랄한 분위기가 넘쳐났다. 그녀의 피부는 언제나 탱탱한 상태를 유지하고 있었고 몸매는 너무 마르지도 그렇다고 너무 뚱뚱하지도 않았다. 혈색이 좋아 그녀의 입술은 언제나 빨갛게 윤기가 돌았기에 립스틱을 바르지 않아도 바른 것 같은 착각이 들게 했다. 한현진은 심지어 머리숱도 풍성했다. 그녀가 이렇게 좋은 상태를 유지할 수 있었던 건 전부 편식하지 않는 그녀의 식습관 때문이었다. 한현진이 마르든 뚱뚱하든 강한서는 아무 상관없었다. 그는 단지 그녀가 조금이라도 더 건강하기를 바랐다. 지금처럼 말이다. 하지만 송가람처럼 삐쩍 마른 건 용납할 수
강한서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넌 워낙 도도한 애라 싸구려 시계를 착용하면 오히려 더 의심스러울 거야. 민 실장이 이 시계가 제일 좋댔어. 네 이미지와 완벽히 어울리다면서. 그리고 설사 빼앗는다고 하더라도 이렇게 비싼 시계를 당장 팔수도 없을 거야. 그러니까 범인이 시계를 팔기 전에 내가 반드시 널 먼저 찾을 수 있어. 하지만 난 영원히 이 시계를 쓸 일이 없었으면 좋겠어.”네 이미지와 완벽히 어울린다는 말이 어쩐지 비꼬는 것 같아 이를 갈았다. “내 이미지가 어때서? 졸부 같다는 거야?”순간 어리둥절해진 강한서가 씩 웃으며 한현진을 끌어안았다. 그는 한현진의 머리카락에 입을 맞추었다. “사실 난 돈을 좋아하는 네 모습이 너무 좋아.”한현진이 강한서를 힐끔 쳐다보았다. “네 취향도 정말 특이해.”강한서가 목소리를 낮추며 말했다. “왜냐면 난 돈이라면 충분히 많거든.”“...”한현진은 예상치도 못한 돈자랑 공격을 당하고 말았다. 다음 날 아침 일찍 박해서는 한현진에게로 도착했다. 그들은 먼저 송병천과 서해금을 공항에 데려다줬다. 박해서는 눈시울을 붉힌 송병천과 서해금과 작별 인사를 나누는 한현진을 지켜보았다. 그녀는 꼭 안전에 주의하고 매일 전화하라며 두 사람에게 당부했다. 아직 출발하지도 않았지만 벌써부터 보고 싶은 것 같다던 한현진은 두 사람이 대합실로 들어가자마자 바로 눈물을 거두었고 심지어 선바이저를 내려 거울을 보며 화장을 고쳤다. 박해서는 몰래 그런 한현진을 힐끔 쳐다보았다. 그러자 한현진은 고개도 돌리지 않은 채 덤덤하게 말했다.“왜요?”박해서가 시선을 돌리며 고개를 가로 저었다.“아니에요.”머리를 정리한 한현진이 고개를 돌려 박해서를 쳐다보았다. “박 실장님. 오빠한테서 들었는데 가람 언니 동창이라면서요?”박해서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초등학교 동창이에요.”“그럼 두 분은 사이가 좋으시겠네요. 오빠가 박 실장님을 채용한 것도 가람 언니가 실장님을 근면성실하신데다 정직한 분이시라고 말해줬기 때문이잖아요.”
말을 마친 성월이 먼저 박수를 치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본 사람들도 하나둘 성월을 따라 박수를 치기 시작했다. 다만 그들은 서로 다른 표정을 짓고 있었다. 대부분의 사람은 한현진을 훑어보았고 어떤 사람은 인정할 수 없다는 눈빛을 보냈다. ‘인정하지 않는게 맞는 거지.’한현진이 생각했다. ‘나라도 쉽게 받아들일 수 없었을 거야.’영문도 없이 떨어진 낙하산 직장 상사가 아직 실력은 보여주지도 않고 위신만 세우고 있으니 그 누구라도 그 상황에 놓이면 불쾌했을 것이다. 서해금은 비록 현장에 없었지만 한현진을 위해 꽤 많은 장애물을 설치해 놓은 듯 했다. 한현진이 이제 그만하라는 뜻으로 손을 들었다. 박수 소리가 점차 줄어들자 한현진은 그제야 입을 열어 성월에게 물었다. “성 비서님, 전에 가람 언니가 첫출근하셨을 때도 이렇게 성대한 환영 의식을 열어줬었나요?”성월이 웃으며 말했다. “가람 씨는 그저 제향 부서의 작은 팀장일 뿐이에요. 다른 사람들처럼 일반적인 입사 절차를 밟으셨고요. 하지만 현진 씨는 다르잖아요. 대표님이시니까요. 그러니 어느 정도의 스케일은 있어야죠.”송가람 역시 성월의 말에 맞장구치며 나긋한 목소리로 말했다. “현진 씨, 전 현진 씨와는 달라요. 전 깔린느에 첫출근은 아니거든요. 전엔 입사를 안 한 것뿐이라 여기 계신 분들은 절 아시거든요. 현진 씨는 처음이시니까 정식으로 인사할 기회를 마련해드려야죠.”한현진이 피식 웃음을 흘렸다. “가람 언니나 저나 그저 다 같은 낙하산인데 무슨 직책을 따지고 그래요? 이렇게 성대한 환영 인사라니, 모르는 분들이 보시면 제가 첫날부터 대표라고 허세를 부리는 거라고 생각하겠어요.”한현진의 말에 송가람은 그만 말문이 막혔다. 송가람은 한현진이 그녀를 공격하기 위해 스스로를 깎아내릴 것이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않았었다. 본인이 낙하산이라는 것을 공개하는 것은 물론 물귀신 작전이라도 쓰듯 송가람도 같이 물속으로 끌어내렸다. 낙하산은 그 어느 때에도 사람들의 사랑을 받지 못했다. 그런 이유로
직원들이 각자 자리로 돌아간 후 성월은 한현진을 데리고 그녀의 사무실로 향했다. 서해금은 송가람보다는 똑똑한 사람이었다. 그녀는 쉽게 경계를 늦출 만한 곳에서 함정을 파놓긴 했지만 절대 대놓고 괴롭히지는 않았다. 예를 들면 지금 이 사무실이 그랬다. 서해금이 한현진을 위해 준비해준 사무실의 규모는 강한서와도 비교할 수 있을 정도로 크고 넓었다. “한 대표님, 여기가 바로 업무를 보실 사무실이에요. 옆 사무실엔 대표님을 위한 보좌관 사무실과 비서실이 준비되어 있으니 필요하신 게 있으시면 그쪽으로 연락하면 되세요.”주위를 빙 둘러본 한현진이 물었다. “서 대표님 사무실은 어디예요?”“한 대표님 바로 위층이에요.”“그래요. 먼저 나가보세요.”한현진이 휘휘 손을 내저었다. “전 여기서 구경하고 있을게요.”고개를 끄덕인 성월이 사무실을 나섰다. 한현진이 박해서를 힐끔 쳐다보았다. “박 실장님, 밀크티 한 잔 사다줘요. 아무 맛이든 괜찮아요. 너무 달지 않게요.”알겠다며 대답한 박해서가 문을 열고 자리를 비웠다. 앞으로 한 발 나선 한현진은 박해서가 사무실을 벗어난 후 조용히 문을 걸어잠궜다. 그리곤 가방에서 강한서가 준 탐지 장비를 꺼내 사무실 곳곳을 스캔하기 시작했다. 강한서의 말대로라면 도청 기계가 있거나 카메라가 있으면 장비가 진동할 것이다. 그녀는 꼼꼼하게 사무실의 모든 곳을 스캔했다. 그녀는 심지어 그 어떤 구석도 놓치지 않았다. 하지만 그 어떤 것도 탐지되지 않았다. ‘설마 내가 괜한 걱정을 한 건가?’사무실을 한참을 돌아다녔지만 아무 것도 발견하지 못한 한현진이 탐지 장비를 티 테이블 위에 올려두었다. 하지만 그 순간, 장비가 웅웅 소리를 내며 진동하기 시작했다. 멈칫, 행동을 멈춘 한현진이 장비를 들고 티 테이블 주변을 훑었다. 이윽고 장비가 돈을 불러온다는 의미를 가진 파키라에 가까워지자 또다시 진동이 울렸다. 입술을 앙다문 한현진이 화분 표면의 이끼를 들어냈다. 그러자 그 아래에는 랩으로 휘감은 물건이 나타났다.
주현의 생각은 성월과 달랐다. 송가람은 사랑에 눈이 멀어 남자의 사랑을 바랐지만 주현은 아니었다. 그녀의 목표를 애초부터 매우 명확했다. 주현은 상대방이 자신에게 줄 수 있는 신분과 지위를 노렸다. 그건 20년, 30년을 노력해도 가질 수 없는 것들이었다. 지금 주현이 원하는 모든 것을 얻을 수 있는 지름길이 눈앞에 놓였는데 그 기회를 잡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하지만 주현은 성월의 성격을 잘 알았다. 성월은 반평생을 야심으로 가득 찬 서해금 곁을 지키며 진작 서해금의 충직한 개가 되었다. 성월에게 신분은 뛰어넘을 수 없는 벽 같은 거였고 자신의 미래는 스스로 기회를 잡아 개척해 나가야 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서해금 역시 자신의 두 손으로 그 자리에 오른 것은 아니었다. 송병천과의 결혼이 아니었다면 서민 출신에 남편을 잃고 아이를 키우는 싱글맘이 무슨 수로 지금의 자리에 오를 수 있었을까?‘웃기지 말라 그래.’하지만 그 말을 주현은 감히 성월 앞에선 할 수 없었다. 주현은 애교를 부리며 말했다. “이모, 도와줘요. 신씨 가문으로 돌아가든 아니든 저 한 번 해보고 싶어요. 송가람 씨와 조금이라도 가까이 할 수 있는 일로 부탁해요. 활동이든 파티든 데리고 다닐 수 있는 자리로요. 그래야 신씨 가문에 호감을 살 수 있죠.”성월의 학창 시절, 그녀의 집안은 그야말로 찢어지게 가난했다. 주현의 부모님이 빌려주신 돈으로 급한 불을 끈 덕에 성월은 늘 주현의 집안에 감사한 마음을 갖고 있었다. 주현의 애교에 견디지 못한 성월이 한숨을 내뱉으며 말했다. “송가람 씨 비서로 전근 보내볼게. 너, 네 남자친구한테 기본적인 건 잘 가르쳐. 묻는 말에 아무 것도 대답 못하면 안 돼.”주현이 순간 환한 미소를 지으며 성월에게 팔짱을 끼고 달콤한 목소리로 말했다. “고마워요, 이모! 역시 이모가 날 제일 예뻐할 줄 알았어. 주말에 집에 와서 식사해요. 안 가신지 꽤 됐잖아요...”한편, 사무실로 돌아온 한현진의 마음은 쉬이 가라앉지 않았다. 만약 어제 바로 세정제
서해금이 입술을 짓이기며 중얼거렸다. “이렇게 냉정하다니, 한현진 답지 않아.”성월이 말했다. “사실 전 그렇게 냉담한 것도 당연하다고 생각해요. 오일을 깨뜨린 것도 주혁 씨였고 몰래 부업을 하다 한 대표님 얼굴에 먹칠한 것도 주혁 씨잖아요. 그러니 당연히 원망하는 마음이 있을 거예요.”말이 없던 서해금이 잠시 후 입을 열었다. “인사팀에 잠깐 다녀와요. 일단 주혁을 가람이 운전기사로 전근시켜요.”성월이 놀란 얼굴로 말했다. “대표님, 가람 아가씨에게 운전기사를 붙일 생각이시면 제가 다른 기사님을 찾을게요. 회사에는 지금 마침 새로 입사한 젊은 신입사원들이 많아요. 어리고 건강하고 운전 경력도 전부 5년이 넘었어요. 주혁 씨는 한현진 곁에서 한동안 일을 하신 분인데, 가람 아가씨 운전기사로는 적합하지 않을 것 같아요.”“전근시키라고 하면 시켜요. 제가 이렇게 하는 덴 이유가 있어요. 그러니 성 비서는 나서지 말아요.”성월이 다급히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네.”성월이 사무실을 나서자 주현이 곧바로 그녀에게 다가갔다. “이모, 어떻게 됐어요? 대표님께 말씀 드렸어요?”성월이 고개를 가로 저었다. “대표님께서 이미 송가람 씨에게 다른 운전기사를 붙이셨어. 이미 결정된 일이야.”순간 주현은 조바심이 났다. “왜 갑자기 결정 난 거예요? 회사에서 요즘 새로 신입사원 모집했잖아요. 보안팀은 싫어할 거란 말이에요.”성월이 말했다. “대표님께서 주혁을 송가람 씨 운전기사로 전근시켰어. 지금 인사팀에 가서 그 일부터 처리해야 해.”그 말을 들은 주현이 투덜거렸다. “한현진 밑에 있던 사람이잖아요. 게다가 본인 상사를 배신까지 했고요. 대표님은 무슨 생각으로 그런 사람을 딸 운전기사로 쓰시겠다는 거예요?”순간 얼굴을 일그러뜨린 성월이 주현을 구석진 곳으로 끌고 갔다. 성월은 주변을 확인하고 나서야 주혁의 팔을 내치며 차가운 얼굴로 말했다. “너 미쳤어? 여긴 회사야. 여기서 집인 줄 알고 그렇게 큰 소리로 대표님 뒷담화를 하는 거야?
직원들은 열띤 토론을 벌이고 있었다. 어떤 직원은 회사의 조치가 꽤 인간적이라며 칭찬했고 또 어떤 직원은 아무리 화장실 청소라도 그렇게 부식성이 강한 세제를 쓰진 말았어야 했다며 안전 문제를 인지하지 못한 회사의 관리에 문제가 있다고 비난했다. 이번 일은 단순히 청소 직원이 화상을 입은 것으로 그쳤지만 만약 누군가 범행을 저지르려고 한다면 부식성이 강한 세정제는 범죄자에게 칼을 준비해준 것과 다를 것이 없는 꼴이었다. 의문을 제기하던 직원이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돌려 한현진과 눈을 마주쳤다. 그제야 실언했다는 것을 인지한 직원이 다급하게 말했다. “대표님, 전 회사에서 조치를 제대로 못했다는 뜻이 아니라요. 단지 위험 요소가 될 수도 있는 거니까, 저도 모르게 제일 최악의 상황을 상상해본 거예요.”한현진이 고개를 들었다. “무슨... 위험 요소요?”그 직원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못... 못 들으셨어요?”“죄송해요.”한현진이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조금 전 친구 문자에 답장하느라 못 들었어요.”직원이 입술을 달싹이며 말을 잇지 못했다. 옆에 있던 또 다른 직원이 얼른 말을 이었다. “회사에서 며칠 동안 청소하시는 직원분들이 다치는 사고가 있었잖아요. 그 일 때문에 다들 마음이 뒤숭숭해요.”한현진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한 직원이 말을 이었다. “아, 맞다. 대표님. 다치신 분 중에 대표님이 아는 사람도 있어요. 전에 대표님 운전 기사셨던 주혁 기사님이요. 그 분이 제일 심하게 다치셨어요.”한현진이 미간을 찌푸렸다.“기사님이요? 확실해요? 어제 볼 일 보러 갔다가 기사님 만났을 때까지만 해도 멀쩡하셨는데. 언제 다치신 거예요?”한현진의 말에 직원이 멍해졌다.“그럴 리가요. 며칠 전에 이미 다치셨어요. 대표님과 비슷한 시기에 휴가를 내셨어요.”한현진이 곰곰이 생각했다. “그날 제가 급한 일 때문에 길게 얘기를 나누진 못했어요. 손에 붕대 같은 건 본 기억도 없고 기사님께서도 저한테 그런 얘기는 없으셨는데... 심하게 다치셨어
막 전화를 끊으려던 그 순간, 박안수가 다시 불렀다.“아, 그리고...”“뭔데?”“오늘 경찰서에서 한현진과 마주쳤어.”서해금의 표정이 순식간에 일그러졌다. “한현진이 경찰서엔 왜?”“나도 자세한 건 안 물어 봐서 잘 몰라. 하지만 갑자기 일이 생겨서 간 것 같아. 혼자가 아니라 6, 7살 쯤 되는 어린 아이와 함께 왔었어.”미간을 찌푸리며 잠시 생각하던 서해금이 또 물었다. “한현진이랑 얘기했어? 무슨 얘기했는데?”“괜히 의심할까봐 내가 경찰서에 간 이유를 사실대로 얘기했어. 한현진도 더 묻지 않았고.”우물 쭈물거리며 숨기는 것보다는 차라리 당당하게 대답하는 편이 오히려 의심을 덜 사는 방법이었다. “그게 다야?”“응.”생각의 잠겼던 해금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경찰한테 손에 상처는 뭐라고 얘기했는데?”“회사에서 청소하다가 부식성 제품에 다친 거라고 했어.”서해금이 원망하듯 말했다. “왜 회사에서 다친 거라고 했어. 회사에서 그렇게 부식성이 강한 제품을 쓸 리가 없잖아.”“그렇다고 내가 집에서 다친 거라고 할 순 없잖아. 집에는 회사에서 다친 거라고 했는데. 조사 협조 요청을 나한테만 하는 게 아니잖아. 게다가 그 두 사람은 거짓말을 아예 못 해. 만약 경찰이 내 손에 관해 묻기라도 한다면 바로 들켜 버리는 거잖아.”서해금이 굳은 얼굴로 말했다. “여자는 미쳤고 애는 귀가 먹었는데, 그런 병X도 제대로 통제 못 해?”순간 얼굴을 찡그린 박안수가 말했다. “말 그렇게 하지 마. 두 사람 불쌍한 사람들이야.”“뭐가 불쌍해. 도박쟁이 가정폭력범을 성실하고 부지런한데다 박학다식한 남편으로 바꿔줬는데. 우리한테 고마워해도 모자라.”서해금의 말에 박안수는 왠지 마음이 불편해졌다.너는 대화를 이어 가고 싶지 않았던 서해금이 당부하며 말했다. “이만 끊어. 가람이한테 당신을 기사로 쓰라고 얘기하러 갈 거야. 소식 기다려.”박안수는 목 끝까지 차오른 말을 삼키며 나지막하게 대답했다.“그래.”전화를 끊은 서해금은 아무리 생
“아니.”서해금이 미간을 찌푸렸다. 도무지 마음을 놓을 수 없었다. “경찰에겐 뭐라고 했어?”수화기 너머의 사람이 담담하게 대답했다. “사실대로 얘기했어.”“박안수!”서해금은 참기 힘들 정도로 화가 끓어올랐다. “지금이 농담할 때야?”“농담 아냐.”말하는 사람의 목소리가 더 가라앉았다. “그럼 내가 뭐라고 말할까? 네가 준 신분이니 난 당연히 주어진 대본대로 연기할 수밖에. 그럼 내가 난 박안수라고 얘기했어야 해? 죽은지 27년도 더 된 사람이야. 박안수가 어떻게 돌아와?”그의 목소리엔 고통과 원망으로 가득 했다. 그 순간, 서해금의 얼굴이 끔찍하게 일그러졌다. “지금 날 탓하는 거야?”말이 없던 상대방은 잠시 후 덤덤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런 적 없어.”“박안수, 지금 날 탓하는 거잖아.”서해금이 공격적인 말투로 말을 이었다. “그때 빚을 진 사람도 당신이고, 그 아이디어를 낸 사람도 당신이었어. 당신이 가람이를 키울 능력이 없었던 거고, 당신이 가람이가 더 좋은 환경에서 살길 바랐고, 그래서 나한테 도와달라고 사정한게 당신이었어.”“내가 당신한테 돈 안 줬어? 지금껏 내가 당신한테 준 돈이 얼만데. 당신은 얼마든지 해외에서 지금보다 더 나은 인생을 살 수 있었어. 굳이 한주에 남겠다고 한 건 당신이야. 내가 당신에게 그럴 듯한 신분을 만들어주지 않았으면 당신이 무슨 명분으로 가람이 앞에 나타날 건데? 당신이 이렇게 당당하게 가람이를 만날 수나 있었을 것 같아?”목이 메인 남자는 한참만에야 눈을 감으며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 “네 탓한 거 아냐. 난 그저 이렇게 조마조마 마음 졸이는 생활에 지쳤을 뿐이야. 난 집에서도 감히 옷을 못 벗어. 잠도 깊게 잘 수가 없어. 길에서는 아는 사람이라도 만나면 그 사람은 날 보면서 반갑게 인사하는데 난 그 사람이 누군지도 몰라. 그러면서도 아는 척, 반가운 척 인사를 해야 해. 심지어 아무리 아파도 검사도 못 해. X발, 병원도 가질 못한다고!”남자가 깊은 숨을 몰아쉬며 말했다.
“네, 볼 일 봐요. 회사로 복귀하면 다시 얘기하죠.”한현진이 전화를 끊었을 때 차는 이미 회사에 도착했다. 차에서 내린 한현진은 곧바로 로비로 향했다. 회사의 프런트가 한현진에게 정중하게 인사를 건넸다. 짧게 인사를 받은 엘리베이터에 탄 한현진은 사무실이 아닌 2층을 눌렀다. 회사 건물은 2층부터 화장실이 있었기에 1층엔 화장실이 없었다. 한현진은 아예 2층부터 일일이 확인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오늘 역시 공교롭게도 2층에 도착한 한현진은 마친 청소 중인 직원과 마주쳤다. 근무 시간이 화장실엔 사람이 없었다. 직원은 바닥을 닦고 있었고 세면대와 멀지 않은 곳에 청소차가 세워져 있었다. 그 위엔 청소 용품으로 가득 했다. 한현진은 고개를 숙여 청소 용품을 확인했다. 청소차엔 수많은 플라스틱 통과 병이 있었고 그 안엔 전부 액체가 담겨져 있었다. 굳이 뚜껑을 열지 않아도 소독제의 냄새가 올라왔다. 그러나 그 제품들은 그 어떤 별다른 표시도 되어 있지 않았다. ‘하지만 부식성이 그렇게 강한 용액을 플라스틱 병에 담진 않았을 거 아냐.’“누구세요?”청소차를 관찰하는 한현진의 등 뒤로 사투리 억양이 섞인 여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한현진이 몸을 돌리니 청소 중이던 직원이 보였다. 그 직원은 아래층 청소를 도맡아 하는 분이라 한현진을 본 적이 없었다. 단순히 한현진이 화장실을 사용하려는 것이라 생각한 직원이 말했다. “아직 소독제를 쓰지 않았으니까 볼 일 보려면 얼른 봐요.”한현진은 그 말에 대답하지 않은 채 청소차의 물건들을 쳐다보며 물었다. “아주머니, 여쭤볼게 있어요. 화장실 청소를 하실 때 어느 브랜드의 농도가 얼마인 세정제를 사용하세요?”직원이 말했다. “도매 시장에서 파는 회색통이요. 커다란 거. 엄청 싸요. 이름이 뭔지는 모르겠는데. 사려고요?”한현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화장실이 항상 깨끗해서요. 저도 집에서 써보려고요.”청소 직원이 얼른 한현진을 말렸다. “절대 사지 마요. 변기의 때는 우리가 항상 솔로 조금씩 닦
또 다른 경찰이 물었다. “그래서 지장은 찍을 수 있어요?”“손이 그 지경인데 지장을 어떻게 찍어? 손을 보니까 지장은 무리인 것 같아서 포기했지. 어차피 지문도 완전히 회복하긴 힘들 것 같았어. 그래서 애들한테 홍채와 성문을 따라고 했어.”말을 마친 키 큰 형사가 한현진에게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나중에 회사에 가셔서 얘기 좀 하세요. 그렇게 부식성이 강한 제품은 얼른 교체하라고요. 만약 누가 나쁜 마음이라도 먹고 그 제품으로 가해라도 하면 회사에서도 책임지셔야 해요.”생각에 잠겼던 한현진이 그 말에 얼른 대답했다. “네, 알겠어요. 알려주셔서 고마워요.”경찰서에서 나온 한현진은 내내 미간을 찌푸린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조금 전 은서가 본 것은 주혁의 태반이나 점이 아니라 청소 용액에 부식되어 생긴 상처였다. 어차피 납치 사건의 범인은 이미 잡혀 경찰서에 있는데, 대체 뭐가 그렇게 급해서 상처를 치료도 하지 않고 경찰서로 달려온 것일까?한현진은 아무리 머리를 굴려도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게다가 이해되지 않는 부분이 하나 더 있었다. 회사에선 그런 고농도의 부식성 제품을 구매했을 리가 없었다. 형사의 말처럼 그런 제품은 위험부담이 너무 컸다. 한현진은 이시연의 연락처를 찾아 그녀에게 전화를 걸었다. 하지만 연결음이 거의 끝나가도록 이시연은 전화를 받지 않았다. 전화를 끊은 한현진은 곧이어 강한서에게 연락했다. 몇 초 후 통화가 연결되었지만 전화를 받은 사람은 강한서가 아닌 민경하였다. 강한서는 오늘 중요한 회의가 있어 전화를 받을 상황이 아니었기에 민경하가 그의 휴대폰을 갖고 있었다. “사모님, 저예요. 대표님께서 지금 중요한 회의 중이시라 전화를 받기 힘든 상황이에요. 급한 일이시면 저에게 얘기하셔도 돼요. 급한 일이 아니면 회의가 끝나면 바로 전화 드리라고 대표님께 말씀 드릴게요.”“급한 건 아녜요. 제가 지금 급히 회사에 가봐야 하는데 아직 은서랑 같이 있어서요. 제가 조금 이따가 회사로 가는 길에 은서를 먼저 한
주혁은 한현진보다 조금 더 먼저 경찰서에 도착한 것 같았다. 한현진이 도착했을 땐 주혁은 입구에서 통화 중이었다. 안색이 어두웠지만 그는 목소리를 잔뜩 낮춘 채 대화하고 있었다. 그를 먼저 발견한 한현진이 가까이 다가가려 하자 주혁이 곧 경계하듯 고개를 돌렸다. 한현진을 본 주혁이 멈칫하더니 곧 전화를 끊고 다가왔다. “대표님? 여긴 어쩐 일이세요?”한현진이 말했다. “일이 좀 있어서요. 기사님도 일 보러 오셨어요?”짧게 대꾸한 주혁이 머뭇거리더니 말을 이었다. “8년 전 제 아들을 납치한 마지막 용의자가 잡혔다고 해서요. 조사에 협조해달라는 연락을 받고 왔어요.”한현진이 놀라운 듯 물었다. “아드님이 납치되었었어요?”주혁이 솔직하게 대답했다. “8, 9년 전 일이죠. 납치된 동안 납치범에게 맞아 치료 시간을 놓쳐 청력도 잃게 된 거예요. 그 사건을 맡은 형사님이 그러시더라고요. 사건이 종결되면 배상금을 어느 정도 받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요.”얘기하는 동안 주혁은 아래쪽에서 자신의 손을 지긋이 쳐다보는 시선을 느꼈다. 그는 입술을 짓이기며 조용히 손바닥을 다리에 대고 말을 이었다. “곧 아이에게 인공 달팽이관을 해줄 수 있을 것 같아요.”주혁의 이야기가 한현진의 호기심을 자극하긴 했지만 그녀는 예의상 더는 그 일에 관해 묻지 않았다. 한현진은 대화주제를 돌리며 주혁에게 물었다. “제가 전에 추천해준 의사 분께 가 보셨어요?”주혁이 멈칫하며 대답했다. “아직이요.”한현진에게는 꽤 의외의 대답이었다. 그녀는 주혁이 최대한 빨리 아이를 데리고 검사를 받으러 가 인공 달팽이관을 제작할 것이라 여겼다. 아무래도 주혁은 규정을 어기고 부업을 할 만큼 누구보다 간절하게 수술을 바라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한현진이 그에게 일반 병원보다 더 싼 가격에 수술을 받을 수 있는 의사를 추천해주었음에도 지금까지 검사조차 받지 않았다고 한다.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요즘 아내가 몸이 안 좋아서요. 전근된 곳이 전처럼
하온이는 적합한 골수를 기다리지 못한 것이 아니었다. 아이에게는 골수를 의식할 수 있는 기회가 두 번이나 있었다. 처음으로 하은이에게 기회가 찾아 왔을 때는 골수 의식의 최적의 타이밍이었다. 하지만 하온의 병을 치료하기 위해 그의 집안은 이미 빚더미에 앉은 상황이라 아무리 여기저기서 돈을 빌려도 수술비를 모을 수 없었다. 그러니 하온의 부모님은 어쩔 수 없이 마음을 독하게 먹고 수술을 포기한 채 아득바득 돈을 모으며 다음을 기약해야 했다. 하지만 곧 있을 줄 알았던 두 번째 기회는 그리 빨리 오지 않았다. 너무 오랜 기다림을 견뎌냈지만 하온의 몸은 이미 수술을 진행 할 수 없을 정도로 허약해져 있었다. 하온은 하루하루 날이 다르게 시들어 가는 꽃 같았다. 은서는 낮엔 하온이와 놀다가도 저녁엔 침대에 누워 눈물을 흘렸다. 하온이가 세상을 떠나기 전날 밤, 은서는 강한서 품에 안겨 닭똥 같은 눈물을 뚝뚝 흘렸다. 은서가 말했다. “삼촌, 저도 죽어요?”“삼촌, 우린 왜 이런 병에 걸린 거예요?”“삼촌 부자잖아요. 하온이 오빠가 수술할 수 있게 돈 빌려주시면 안 돼요? 제가 커서 돈 벌면서 갚을게요. 하온이 오빠 죽는거 싫어요.”강한서는 은서의 머리카락을 어루만지며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은서는 아직 너무 어려서, 인생은 가끔 이렇게 운명의 장난 앞에서는 무력하기만 하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목숨으로 돈을 맞바꾸기는 쉬운 일이었지만 돈으로 목숨을 살 수는 없었다. 강한서는 은서가 아직까지 그 일을 기억하고 있을 줄은 몰랐다. 그때의 은서는 고작 5살이었다. 눈시울이 붉어진 한현진은 말을 잇지 못했다. 이 세상에는 가여운 사람이 너무도 많았다. 그러니 혼자의 힘으로는 고작 얼마의 힘이나 보탤 수 있을까. 그렇다고 세상이 나아질 것이라 기대하는 아이의 기대를 깨트릴 수도 없었다. 한현진은 정중하게 물었다. “정말 이거 전부 기부할 거야? 기부하면 은서에겐 아무 것도 없는 거야.”고개를 끄덕이던 은서가 곧 찬란한 미소를 지었다. “저 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