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시은은 오랫동안 참아온 화가 폭발한 모양이었다. 전태평을 구속시킨 뒤, 그녀는 바로 변호사를 찾아가 그가 애인인 최지영과 그 아들에게 쓴 모든 돈을 되찾아달라고 요청했다. 또한 최지영을 전태평, 신미정과 공모해 자신을 사기 친 혐의로 고소했다.그녀가 오랫동안 모아온 증거들로 승소는 확실했지만, 문제는 많은 절차를 거쳐야 한다는 것이었다. 절차가 너무 느리니 양시은은 답답했다. 그녀는 그 모자가 자신의 돈으로 산 집에서 사는 꼴을 더는 볼 수 없었다.그래서 그녀는 호텔에서 힘 좋은 보안 요원 일곱 명을 데려와, 설 연휴 기간에 그들을 집에서 쫓아냈다.한현진이 현장에 도착했을 때, 양시은은 이미 그들을 아파트 마당으로 내몰았고, 보안 요원들이 차례차례 그들의 짐을 밖으로 던져내고 있었다.단지 안은 여자의 욕설과 울음소리로 가득했다.차미주는 혀를 끌끌 차며 말했다.“시은 언니 진짜 세게 나가는데. 이렇게 사람을 쫓아냈다가 소송도 아직 안 끝났는데 경찰에 신고라도 당하면 어떡하려고 그러지?”한현진이 작은 소리로 말했다.“전태평이 정말 그렇게 대범하게 집을 그 여자 명의로 해줬을 거 같아? 이 집, 전태평 엄마 명의야. 그러니까 시은 언니는 그 여자를 쫓아낼 정당한 이유가 있는 거야. 자기 집에 남을 공짜로 살게 할 이유가 없잖아?”차미주가 놀라서 말했다.“헐. 그 개자식 완전 교활하네. 난 그가 진심으로 상간녀를 사랑하는 줄 알았는데 결국 뒤에서 다 대비하고 있었던 거네?”“애인 관계가 제일 불안정해. 부부는 적어도 법적으로 보호받지만, 애인은 아무런 보호가 없잖아. 그 여자가 집을 팔아버리고 도망가면, 전태평은 어디에 가서 찾겠어? 집 한 채로 묶어두면 아들까지 봐주니까 본인은 그저 매일 두 여자를 즐기면 되었던 거야. 시은 언니는 남편이 순박하다고 했는데 내가 보기엔 머리가 너무 팽팽 돌아가.”“근데 생각해 보면, 시은 언니도 참 운이 없어. 그 나쁜 놈이 횡령하고 뇌물 받은 것 때문에 벌금 물리면 결국 언니가 돈을 내야 할 거고, 남편이
한현진은 그녀에게 우유를 건네며 말했다.“상속권이 있다고 해서 꼭 돈을 받을 수 있는 건 아니에요. 전태평이 아직 멀쩡히 살아있잖아요?”차미주...양시은은 이 말에 분노를 감추지 못했다. 남편 집안사람들은 20년 동안 그녀를 속였고, 시어머니는 아들을 낳지 못한 것을 두고 늘 은근히 그녀를 괴롭혔다. 매년 며느리 중에서 자신이 섬긴 돈이 제일 많고, 선물도 제일 비쌌지만, 아들을 못 낳았다는 이유로 좋은 말 한마디 듣지 못했다.어제 시어머니는 친척들을 모아 그녀 집 앞에 몰려와 난리를 피우며 집안 재산을 다 털어서라도 전태평의 빚을 메우고 그를 구해내라고 했다.돈을 상간녀에게 주면서 집안 재산은 다 상간녀의 아들에게 넘기겠다고 해놓고, 자신을 부양하는 며느리에게는 아들을 못 낳았다며 불평하고, 손녀들마저도 차갑게 대하는 인간이 정말 무슨 염치로 그러는 건지.“좋아.”양시은이 냉랭한 목소리로 말했다.“전태평이 죽고 나서 그때 상속받으러 와. 하지만 그 사람은 아직 살아 있고, 우리도 이혼하지 않았으니까, 그의 재산 처분권은 나한테 있어!”그러고는 뒤에 있던 보안요원들에게 고개를 돌려 말했다.“잠시 후에 자물쇠를 바꾸고, 매일 돌아가면서 여길 지켜요. 그 두 사람이 우리 집 근처 3미터 안으로 오면, 그날부로 회사 나오지 마세요.”일고여덟 명의 건장한 청년들이 일제히 대답했다.“알겠습니다.”전태평의 아들은 젊은 혈기로 속이 이미 부글부글 끓고 있었다. 양시은이 돌아서는 순간, 그는 어디선가 커터 칼을 꺼내 들고 그녀를 향해 휘둘렀다.한현진은 깜짝 놀라 외쳤다.“조심해요!”이때 양시은 옆에 있던 건장한 남자가 재빠르게 상대방의 칼을 붙잡고, 무릎을 걷어찼다. 소년은 짧게 신음하며 그 자리에 무릎을 꿇었다.다른 보안 요원들도 서둘러 달려와 제압하고 바로 경찰에 신고했다.맨손으로 칼을 잡은 남자의 손이 피투성이인 걸 보자 양시은은 놀라서 창백해진 얼굴로 옆에 있던 비서에게 말했다.“빨리 병원으로 데려가. 치료비는 회사에서 부담하고.”
차미주는 멍해졌다.“이혼 안 해요? 그럼 쓰레기 같은 남자랑 계속 얽히겠다는 말씀이에요?”양시은은 담담하게 대답했다.“20년 전이었다면, 당연히 이혼했겠죠. 하지만 지금 이혼한다고 내가 얻을 게 뭐가 있을까요?”“전태평은 별문제 없으면 10년, 20년은 감옥에 있을 텐데, 지금 이혼하면 재산을 나눠야 하잖아요. 그런데 그는 감옥에서 돈을 쓸 수도 없으니 그 돈이 결국엔 누구에게 돌아가겠어요?”“전태평은 아마 당장이라도 이혼하고 싶을 거예요. 돈을 나눠서 아들과 어머니를 챙겨주려고요. 그걸 뻔히 아는데 내가 왜 들어주겠어요?”“내가 이혼하지 않으면 돈을 어떻게 쓸지는 내 마음이에요. 난 그 인간에게 돈 한 푼 없는 상황에서 그의 아들이 어떻게 망가지는지 보여줄 거예요.”“그럼 10년, 20년 후에 그가 나와서 이혼하고 재산을 나누려고 하면 어쩔 거예요? 그때면 언니는 더 많은 돈을 벌어놨을 텐데.”차미주가 계속 물었다.양미주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웃었다.“감옥에서 그렇게 오래 있다 나오면, 세상은 이미 많이 변했을 거예요. 애인은 늙었을 테고 아들은 아무 성과도 없는 무능한 전과자 신세가 됐겠죠. 반면 난 사업도 성공했고 딸들도 행복하게 잘 살고 있을 텐데 그 인간이 뭘 선택할지는 뻔하지 않겠어요?”그녀는 커피를 휘젓다가 말을 이어갔다.“그때가 되면 난 명절마다 그를 딸들과 외손주들 앞에 데려다 놓고, 그 사람의 과거 ‘화려한 업적’에 대해 잘 얘기해서 다들 교훈으로 삼게 할 거예요. 이렇게 생생한 예시인데, 다들 안 들을 수가 없겠죠.”차미주...한현진...전태평이 들어가면서 그녀의 복수는 이제 시작된 것이었다. 불충한 남편, 뻔뻔한 애인, 그리고 그들이 낳은 자식을 그녀는 하나도 용서할 생각이 없었다.양시은은 말을 끝내고 한현진을 쳐다보며 물었다.“강한서가 신미정에게 마음이 약해졌나 봐요. 현진 씨는 나한테 불난 데 기름 부으러 온 거죠?”한현진은 담담하게 말했다.“헛소문 좀 퍼뜨리지 말아요. 우리 남편 그렇게 어리석지 않아
그의 SNS 게시물에는 금세 수천 개의 댓글이 달렸다.[4천억이라니! 월급 500만 원으로는 6천여 년 동안 먹지도 않고 벌어야 겨우 모을 돈이야!][부자들이 기부하는 건 다 뻔한 얘기지.][그게 무슨 뜻이야? 잘 모르겠네.][세금 피하려고 하는 거지, 이왕이면 홍보도 하고.][윗분, 잘난 척 그만해. 기부금은 내야 할 세금에서 공제하는 거지, 네가 내는 세금이 아니야. 게다가 한도도 있어. 진짜 입법자들이 바보인 줄 알아? 외국의 상속세도 아니고 뭘 아는 척해?][4천억이나 기부했는데 홍보 좀 하는데 어때서? 넌 4천 원을 기부하고도 SNS에 자랑하고 싶어 하잖아.][난 기업들이 다 이렇게 기부 경쟁하면 좋겠어. 어차피 내 돈 나가는 거 아니니까 누가 많이 내든 상관없어. 한성 짱!][강 대표님, 인터넷에서 루나 2세 테스트 영상 올라온 거 봤어요. 우리 와이프가 그거 사달라고 졸라대는데, 와이프가 단념하게 가격 좀 말해주세요.][네 엄마가 일부러 사람 다치게 한 거 덮으려고 일부러 올린 거지? 그 미친 여자가 계단에 기름칠해서 청소부 두 명이나 그렇게 다치게 해놓고, 집에 돈 많으니까, 돈으로 입 막을 생각이잖아? 이런 인기 검색어까지 사서 덮어버리면 사람들이 다 잊어버릴 줄 알아?][입막음한 것 같진 않은데? 아내가 직접 가서 위로도 했고, 보상안도 논의했잖아.][보상금 주는 거야 책임 면하려고 그러는 거지. 그 미친 여자가 어떻게 처리됐는지 아직도 소식이 없는 걸 보면 벌써 돈으로 다 해결했나 봐.][말은 쉽지. 돈 안 받고 고소만 하면 네가 치료비랑 변호사비 다 대줄 거야? 어른답게 현실을 좀 보라고. 내 친구가 병원에 있는데, 그 청소부들 경상도 아니래. 하지만 한성은 언론을 막은 것도 없고 책임도 회피하지 않았잖아. 그리고 경찰 조사 결과도 아직 안 나왔는데 성급하게 결론 내리려는 사람들 왜 이렇게 많아? 강 대표가 네 귀에 대고 자기 엄마를 돈으로 빼냈다고 말해주던?]네티즌들 사이에 논란이 크게 일었다. 많은 사람들은 한성
서해금의 눈가가 파르르 뛰었다. “뭐?”송가람이 입을 꾹 다물었다. 서해금은 이미 송가람과 강한서를 이어주려던 생각을 접은 지 오래였다. 만약 송가람이 아직도 서해금 몰래 강한서와 연락을 주고받는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또 한바탕 핀잔을 받을 것이 뻔했다. “아무것도 아니야. 엄마 이 시간에 왜 아직도 안 자?”“머리가 아파서 잠이 안 와.”송가람 옆에 자리 잡고 앉은 서해금이 무심코 말했다. “너 요즘 왜 민준이 안 찾아? 예전엔 계속 붙어있으려고 했잖아.”송민준 얘기에 송가람의 얼굴에 차가운 기운이 서렸다. “오빠는 마음이 전부 친동생에게 가 있잖아. 날 신경 쓸 여유 같은 게 있을 리가 있겠어?”“무슨 말을 그렇게 하니? 너 어렸을 때, 민준이는 널 제일 예뻐했어. 나와는 별로 얘기를 안 했어도 넌 항상 데리고 다니길 좋아했는데. 어렸을 때부터 떨어져 있었던 한현진이 돌아왔으니 남매 사이가 당연히 더 돈독해졌겠지지. 하지만 너랑은 함께 자란 정이 있어. 민준이가 먼저 연락하지 않는다고 너도 다가가지 않으면 걔가 얼마나 섭섭하겠어.”송가람이 입술을 꾹 깨물었다. “오빠가 나한테 무슨 정이 남았어? 날 향했던 사랑은 한현진이 돌아온 후로 전부 그쪽으로 넘어갔어. 난 그냥 오빠가 친동생을 잃은 슬픔을 기탁할 대체품에 불과했던 거야. 지금은 그 친동생이 돌아왔는데, 내가 뭐라고.”“그건 네가 계속 한현진을 적대시하니까 그런 거잖아. 네 아빠 앞에서 한현진과 비교하며 애정을 갈구하면 네가 어떻게 친딸을 이길 수 있겠니? 네가 한현진에게 잘해줘야 네 아빠도 너한테 잘할 수 있어. 그래야 네 불쌍한 처지를 조금씩 알아챌 수 있다고. 알겠니?”서해금의 말에 송가람이 멍해졌다. 그녀는 서해금의 말뜻을 어쩌면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심심하면 네 오빠한테 자주 연락해. 누구랑 만나는지도 살펴보고.”송가람이 이해되지 않는다는 듯 말했다. “그건 왜 살펴보라고 하는 거야?”서해금이 덤덤한 말투로 말을 이었다. “네 오빠도 이젠 어린 나이가
강민서가 가져온 보고서를 보던 민경하가 웃으며 말했다. “대표님께서는 일하실 때는 완전이 몰두하시는 편이시라 시간을 자주 깜빡하시거든요. 어떨 땐 일부러 그렇게 늦게까지 일하시는 거 아니세요.”“약속 있으면 먼저 가요. 제가 나중에 대표님께 말씀드릴게요.”강민서가 입을 삐죽였다. “다들 퇴근 안 했는데 저만 가면 눈에 띄잖아요. 나중에 또 뭐라고 할 거예요. 그리고 오늘 할머니께서 저랑 같이 본가에 저녁 먹으러 오라고 했던 거 잊었어요?”까맣게 잊고 있었던 듯 민경하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안 가면 안 돼요?”민경하는 선뜻 강민서의 본가로 가기가 꺼려졌다. 워낙 꿍꿍이가 많은 어르신이라 밥 한 끼를 먹는 것도 신경을 바짝 곤두세워야 했다. “안 가도 되죠. 직접 안 갈 거라고 말씀드려요.”강민서의 말에 민경하는 입을 꾹 닫았다. 물을 마시고 있는 강민서를 힐끔 쳐다보던 민경하가 갑자기 입을 열었다. “민서 씨가 회장님께 저와 데이트 할 거라고 말씀드려요. 단둘이 있고 싶다고요.”입안에 머금었던 물을 뿜은 강민서는 사레가 들려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누가 실장님과 단둘이 있고 싶대요. 그렇게 말하고 싶으면 본인이 직접 해요. 그런 말은 전 창피해서 못 해요.”“그래요. 제가 말씀드릴게요.”민경하는 대답 하며 서류를 내려놓았다. 휴대폰을 꺼내 정인월에게 전화했다. 강민서는 귀를 쫑긋 세우고 민경하가 어떻게 정인월의 말을 거역하는지 들어볼 생각이었다. 통화가 연결되자마자 민경하가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회장님, 오늘 저희 둘 본가로 안 가도 될까요? 일이 있는 건 아니고 오늘 저녁에 연등 축제 있잖아요? 민서 씨가 저랑 같이 가보고 싶다고 해서요...”강민서의 얼굴이 순간 어두워졌다. ‘실장님이 전화 드리라고 했더니 내 탓으로 돌려?’강민서가 막 화를 내려는데 민경하가 초콜릿 하나를 집어 강민서의 입에 넣어주더니 웃으며 수화기 너머의 정인월에게 말했다. “네, 알겠어요. 민서 씨에게 사진 많이 찍어서 회장님께 보내드리
민경하가 물 만난 물고기처럼 강한서의 비서 실장이라는 위치를 유지할 수 있었던 건 그저 우연이 아니었다. 일반적으로 아부는 대표의 취향에 따르는 것이 다반사였다. 그러니 민경하 역시 강한서가 좋아하는 것을 잘 이용했다. 다만 민경하의 상사가 제일 좋아하는 것이 사모님이었을 따름이었다. 서둘러 집으로 돌아간 강한서는 도착하자마자 짐을 정리하고 있는 한현진을 볼 수 있었다. 멈칫하던 강한서가 물었다. “나가려고?”한현진이 짐을 정리하던 손을 멈추지 않고 대답했다. “전에 사고 났을 때 내가 유호촌에 있는 절에서 널 위해 소원을 빌었던 적이 있거든. 이젠 네가 건강도 회복했으니 감사의 의미로 예참을 드리고 오려고.”한현진의 말에 강한서가 잠시 멍해졌다. “왜 갑자기 지금 예참을 드리러 가는 거야?”“내가 잊고 있었는데, 민 실장님께서 귀띔해 주셨어. 네가 돌아온 지도 시간이 꽤 지났고 내 소원도 이루어졌으니 나도 그때 했던 약속을 지켜야지. 공양도 좀 올리고.”‘민 실장... 아주 얍삽한 놈이었네.’‘현진이가 다급하게 전화해서 돌아오라길래 무슨 급한 일이라도 있는 줄 알았더니...’민경하의 조언이었다는 말에 강한서는 순간 모든 것이 이해되었다. ‘날 회사에서 내보내고 일찍 퇴근해서 명절을 보내려고 그런 거였네.’입술을 앙다물었던 강한서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 절 말이야. 주강운이 널 위해 평안을 비는 부적을 받아 온 곳이지.”그 말에 어리둥절해졌던 한현진이 말했다. “네가 말하니까 생각났네. 주 변호사님이 나에게 준 부적은? 전에 네가 정장 주머니에 넣었었잖아. 집에 돌아와서도 돌려주지 않았어.”“...”‘쓸데없이 그 얘기를 꺼내는 게 아니었어!’“부적은?”한현진이 손을 내밀었다.강한서가 시선을 돌리며 말했다. “몰라. 아마 계속 그 주머니에 있을 거야. 안 건드렸거든.”의심하는 눈초리로 강한서를 한참 쳐다보던 한현진이 입을 열었다. “내가 찾아볼게.”말하며 몸을 일으킨 한현진이 드레스룸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
한현진의 말에 강한서가 침묵했다. “설마 제가 일부러 그랬다고 생각하는 거야?”한현진이 일부러 한숨을 쉬며 말했다. “난 혹시나 네가 내키지 않으면 타이밍을 봐서 주 변호사님께 돌려드리려고 했는데, 이제 보니 넌 그다지 신경—”“일부러 그런 거야!”얼른 말을 바꾼 강한서가 어두운 얼굴로 말했다. “날 앞에 두고 현진 씨에게 부적을 건네다니, 걔는 네 첫사랑과 다를 바 없는 놈이야. 그 두 사람 모두 그저 그런 인간이야.”‘한 명은 내 앞에서 선물을 주고 또 한 명은 고백까지 했어. 이놈이나 저놈이나 양심 없는 것들!’한현진이 피식 웃음을 흘렸다. “사실 나도 받을 생각 없었어. 그러게 누가 너더러 부적을 물에 떨어트리래? 내가 안 받으면 얼마나 뻘쭘하겠어.”한현진의 설명에 강한서는 말을 잇지 못했다. “왜 진작 얘기하지 않았어?”강한서가 조금은 후회 섞인 말투로 말했다. “내가 얘기할 기회도 없이 바로 툭, 물에 떨어트렸잖아. 그 타이밍에 내가 싫다고 하면 뭐가 되겠어?”‘그러니까 내가 부적을 받을 수밖에 없게 기회를 제공했다는 거야?’강한서는 짜증이 솟구쳤다. “그럼 주강운이 전에 줬던 목걸이는? 그땐 나도 그 자리에 없었잖아. 그건 왜 받은 거야? 전에도 줄곧 하고 있었잖아. 강아지 목줄처럼 생긴 걸 뭐가 이쁘다고.”그의 말에 한현진의 눈가가 파르르 뛰었다. “강아지 목줄이 맞긴 하지. 펜던트 안엔 사진도 있어. 엄청 멋있는데, 볼래?”한현진의 말에 강한서는 심장을 부여잡고 싶어졌다. “내가 없는 동안 주강운과 강아지까지 키웠어? 검둥이를 만지는 거로는 부족했어?”한현진이 서랍을 열어 안에 넣은 목걸이를 꺼내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검둥이도 좋긴 하지만 내가 키우지 않아서 나와는 안 친하잖아. 난 그래도 내가 직접 기른 게 좋아. 다른 사람에겐 으르렁대고 나만 좋아하는 그런 거.”강한서가 냉소 지었다. “고작 1달을 돌아오지 않았을 뿐이야. 한 달 사이 강아지가 완전히 주인으로 인정하게 하려고 하다니... 널 이용
주현의 생각은 성월과 달랐다. 송가람은 사랑에 눈이 멀어 남자의 사랑을 바랐지만 주현은 아니었다. 그녀의 목표를 애초부터 매우 명확했다. 주현은 상대방이 자신에게 줄 수 있는 신분과 지위를 노렸다. 그건 20년, 30년을 노력해도 가질 수 없는 것들이었다. 지금 주현이 원하는 모든 것을 얻을 수 있는 지름길이 눈앞에 놓였는데 그 기회를 잡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하지만 주현은 성월의 성격을 잘 알았다. 성월은 반평생을 야심으로 가득 찬 서해금 곁을 지키며 진작 서해금의 충직한 개가 되었다. 성월에게 신분은 뛰어넘을 수 없는 벽 같은 거였고 자신의 미래는 스스로 기회를 잡아 개척해 나가야 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서해금 역시 자신의 두 손으로 그 자리에 오른 것은 아니었다. 송병천과의 결혼이 아니었다면 서민 출신에 남편을 잃고 아이를 키우는 싱글맘이 무슨 수로 지금의 자리에 오를 수 있었을까?‘웃기지 말라 그래.’하지만 그 말을 주현은 감히 성월 앞에선 할 수 없었다. 주현은 애교를 부리며 말했다. “이모, 도와줘요. 신씨 가문으로 돌아가든 아니든 저 한 번 해보고 싶어요. 송가람 씨와 조금이라도 가까이 할 수 있는 일로 부탁해요. 활동이든 파티든 데리고 다닐 수 있는 자리로요. 그래야 신씨 가문에 호감을 살 수 있죠.”성월의 학창 시절, 그녀의 집안은 그야말로 찢어지게 가난했다. 주현의 부모님이 빌려주신 돈으로 급한 불을 끈 덕에 성월은 늘 주현의 집안에 감사한 마음을 갖고 있었다. 주현의 애교에 견디지 못한 성월이 한숨을 내뱉으며 말했다. “송가람 씨 비서로 전근 보내볼게. 너, 네 남자친구한테 기본적인 건 잘 가르쳐. 묻는 말에 아무 것도 대답 못하면 안 돼.”주현이 순간 환한 미소를 지으며 성월에게 팔짱을 끼고 달콤한 목소리로 말했다. “고마워요, 이모! 역시 이모가 날 제일 예뻐할 줄 알았어. 주말에 집에 와서 식사해요. 안 가신지 꽤 됐잖아요...”한편, 사무실로 돌아온 한현진의 마음은 쉬이 가라앉지 않았다. 만약 어제 바로 세정제
서해금이 입술을 짓이기며 중얼거렸다. “이렇게 냉정하다니, 한현진 답지 않아.”성월이 말했다. “사실 전 그렇게 냉담한 것도 당연하다고 생각해요. 오일을 깨뜨린 것도 주혁 씨였고 몰래 부업을 하다 한 대표님 얼굴에 먹칠한 것도 주혁 씨잖아요. 그러니 당연히 원망하는 마음이 있을 거예요.”말이 없던 서해금이 잠시 후 입을 열었다. “인사팀에 잠깐 다녀와요. 일단 주혁을 가람이 운전기사로 전근시켜요.”성월이 놀란 얼굴로 말했다. “대표님, 가람 아가씨에게 운전기사를 붙일 생각이시면 제가 다른 기사님을 찾을게요. 회사에는 지금 마침 새로 입사한 젊은 신입사원들이 많아요. 어리고 건강하고 운전 경력도 전부 5년이 넘었어요. 주혁 씨는 한현진 곁에서 한동안 일을 하신 분인데, 가람 아가씨 운전기사로는 적합하지 않을 것 같아요.”“전근시키라고 하면 시켜요. 제가 이렇게 하는 덴 이유가 있어요. 그러니 성 비서는 나서지 말아요.”성월이 다급히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네.”성월이 사무실을 나서자 주현이 곧바로 그녀에게 다가갔다. “이모, 어떻게 됐어요? 대표님께 말씀 드렸어요?”성월이 고개를 가로 저었다. “대표님께서 이미 송가람 씨에게 다른 운전기사를 붙이셨어. 이미 결정된 일이야.”순간 주현은 조바심이 났다. “왜 갑자기 결정 난 거예요? 회사에서 요즘 새로 신입사원 모집했잖아요. 보안팀은 싫어할 거란 말이에요.”성월이 말했다. “대표님께서 주혁을 송가람 씨 운전기사로 전근시켰어. 지금 인사팀에 가서 그 일부터 처리해야 해.”그 말을 들은 주현이 투덜거렸다. “한현진 밑에 있던 사람이잖아요. 게다가 본인 상사를 배신까지 했고요. 대표님은 무슨 생각으로 그런 사람을 딸 운전기사로 쓰시겠다는 거예요?”순간 얼굴을 일그러뜨린 성월이 주현을 구석진 곳으로 끌고 갔다. 성월은 주변을 확인하고 나서야 주혁의 팔을 내치며 차가운 얼굴로 말했다. “너 미쳤어? 여긴 회사야. 여기서 집인 줄 알고 그렇게 큰 소리로 대표님 뒷담화를 하는 거야?
직원들은 열띤 토론을 벌이고 있었다. 어떤 직원은 회사의 조치가 꽤 인간적이라며 칭찬했고 또 어떤 직원은 아무리 화장실 청소라도 그렇게 부식성이 강한 세제를 쓰진 말았어야 했다며 안전 문제를 인지하지 못한 회사의 관리에 문제가 있다고 비난했다. 이번 일은 단순히 청소 직원이 화상을 입은 것으로 그쳤지만 만약 누군가 범행을 저지르려고 한다면 부식성이 강한 세정제는 범죄자에게 칼을 준비해준 것과 다를 것이 없는 꼴이었다. 의문을 제기하던 직원이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돌려 한현진과 눈을 마주쳤다. 그제야 실언했다는 것을 인지한 직원이 다급하게 말했다. “대표님, 전 회사에서 조치를 제대로 못했다는 뜻이 아니라요. 단지 위험 요소가 될 수도 있는 거니까, 저도 모르게 제일 최악의 상황을 상상해본 거예요.”한현진이 고개를 들었다. “무슨... 위험 요소요?”그 직원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못... 못 들으셨어요?”“죄송해요.”한현진이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조금 전 친구 문자에 답장하느라 못 들었어요.”직원이 입술을 달싹이며 말을 잇지 못했다. 옆에 있던 또 다른 직원이 얼른 말을 이었다. “회사에서 며칠 동안 청소하시는 직원분들이 다치는 사고가 있었잖아요. 그 일 때문에 다들 마음이 뒤숭숭해요.”한현진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한 직원이 말을 이었다. “아, 맞다. 대표님. 다치신 분 중에 대표님이 아는 사람도 있어요. 전에 대표님 운전 기사셨던 주혁 기사님이요. 그 분이 제일 심하게 다치셨어요.”한현진이 미간을 찌푸렸다.“기사님이요? 확실해요? 어제 볼 일 보러 갔다가 기사님 만났을 때까지만 해도 멀쩡하셨는데. 언제 다치신 거예요?”한현진의 말에 직원이 멍해졌다.“그럴 리가요. 며칠 전에 이미 다치셨어요. 대표님과 비슷한 시기에 휴가를 내셨어요.”한현진이 곰곰이 생각했다. “그날 제가 급한 일 때문에 길게 얘기를 나누진 못했어요. 손에 붕대 같은 건 본 기억도 없고 기사님께서도 저한테 그런 얘기는 없으셨는데... 심하게 다치셨어
막 전화를 끊으려던 그 순간, 박안수가 다시 불렀다.“아, 그리고...”“뭔데?”“오늘 경찰서에서 한현진과 마주쳤어.”서해금의 표정이 순식간에 일그러졌다. “한현진이 경찰서엔 왜?”“나도 자세한 건 안 물어 봐서 잘 몰라. 하지만 갑자기 일이 생겨서 간 것 같아. 혼자가 아니라 6, 7살 쯤 되는 어린 아이와 함께 왔었어.”미간을 찌푸리며 잠시 생각하던 서해금이 또 물었다. “한현진이랑 얘기했어? 무슨 얘기했는데?”“괜히 의심할까봐 내가 경찰서에 간 이유를 사실대로 얘기했어. 한현진도 더 묻지 않았고.”우물 쭈물거리며 숨기는 것보다는 차라리 당당하게 대답하는 편이 오히려 의심을 덜 사는 방법이었다. “그게 다야?”“응.”생각의 잠겼던 해금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경찰한테 손에 상처는 뭐라고 얘기했는데?”“회사에서 청소하다가 부식성 제품에 다친 거라고 했어.”서해금이 원망하듯 말했다. “왜 회사에서 다친 거라고 했어. 회사에서 그렇게 부식성이 강한 제품을 쓸 리가 없잖아.”“그렇다고 내가 집에서 다친 거라고 할 순 없잖아. 집에는 회사에서 다친 거라고 했는데. 조사 협조 요청을 나한테만 하는 게 아니잖아. 게다가 그 두 사람은 거짓말을 아예 못 해. 만약 경찰이 내 손에 관해 묻기라도 한다면 바로 들켜 버리는 거잖아.”서해금이 굳은 얼굴로 말했다. “여자는 미쳤고 애는 귀가 먹었는데, 그런 병X도 제대로 통제 못 해?”순간 얼굴을 찡그린 박안수가 말했다. “말 그렇게 하지 마. 두 사람 불쌍한 사람들이야.”“뭐가 불쌍해. 도박쟁이 가정폭력범을 성실하고 부지런한데다 박학다식한 남편으로 바꿔줬는데. 우리한테 고마워해도 모자라.”서해금의 말에 박안수는 왠지 마음이 불편해졌다.너는 대화를 이어 가고 싶지 않았던 서해금이 당부하며 말했다. “이만 끊어. 가람이한테 당신을 기사로 쓰라고 얘기하러 갈 거야. 소식 기다려.”박안수는 목 끝까지 차오른 말을 삼키며 나지막하게 대답했다.“그래.”전화를 끊은 서해금은 아무리 생
“아니.”서해금이 미간을 찌푸렸다. 도무지 마음을 놓을 수 없었다. “경찰에겐 뭐라고 했어?”수화기 너머의 사람이 담담하게 대답했다. “사실대로 얘기했어.”“박안수!”서해금은 참기 힘들 정도로 화가 끓어올랐다. “지금이 농담할 때야?”“농담 아냐.”말하는 사람의 목소리가 더 가라앉았다. “그럼 내가 뭐라고 말할까? 네가 준 신분이니 난 당연히 주어진 대본대로 연기할 수밖에. 그럼 내가 난 박안수라고 얘기했어야 해? 죽은지 27년도 더 된 사람이야. 박안수가 어떻게 돌아와?”그의 목소리엔 고통과 원망으로 가득 했다. 그 순간, 서해금의 얼굴이 끔찍하게 일그러졌다. “지금 날 탓하는 거야?”말이 없던 상대방은 잠시 후 덤덤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런 적 없어.”“박안수, 지금 날 탓하는 거잖아.”서해금이 공격적인 말투로 말을 이었다. “그때 빚을 진 사람도 당신이고, 그 아이디어를 낸 사람도 당신이었어. 당신이 가람이를 키울 능력이 없었던 거고, 당신이 가람이가 더 좋은 환경에서 살길 바랐고, 그래서 나한테 도와달라고 사정한게 당신이었어.”“내가 당신한테 돈 안 줬어? 지금껏 내가 당신한테 준 돈이 얼만데. 당신은 얼마든지 해외에서 지금보다 더 나은 인생을 살 수 있었어. 굳이 한주에 남겠다고 한 건 당신이야. 내가 당신에게 그럴 듯한 신분을 만들어주지 않았으면 당신이 무슨 명분으로 가람이 앞에 나타날 건데? 당신이 이렇게 당당하게 가람이를 만날 수나 있었을 것 같아?”목이 메인 남자는 한참만에야 눈을 감으며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 “네 탓한 거 아냐. 난 그저 이렇게 조마조마 마음 졸이는 생활에 지쳤을 뿐이야. 난 집에서도 감히 옷을 못 벗어. 잠도 깊게 잘 수가 없어. 길에서는 아는 사람이라도 만나면 그 사람은 날 보면서 반갑게 인사하는데 난 그 사람이 누군지도 몰라. 그러면서도 아는 척, 반가운 척 인사를 해야 해. 심지어 아무리 아파도 검사도 못 해. X발, 병원도 가질 못한다고!”남자가 깊은 숨을 몰아쉬며 말했다.
“네, 볼 일 봐요. 회사로 복귀하면 다시 얘기하죠.”한현진이 전화를 끊었을 때 차는 이미 회사에 도착했다. 차에서 내린 한현진은 곧바로 로비로 향했다. 회사의 프런트가 한현진에게 정중하게 인사를 건넸다. 짧게 인사를 받은 엘리베이터에 탄 한현진은 사무실이 아닌 2층을 눌렀다. 회사 건물은 2층부터 화장실이 있었기에 1층엔 화장실이 없었다. 한현진은 아예 2층부터 일일이 확인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오늘 역시 공교롭게도 2층에 도착한 한현진은 마친 청소 중인 직원과 마주쳤다. 근무 시간이 화장실엔 사람이 없었다. 직원은 바닥을 닦고 있었고 세면대와 멀지 않은 곳에 청소차가 세워져 있었다. 그 위엔 청소 용품으로 가득 했다. 한현진은 고개를 숙여 청소 용품을 확인했다. 청소차엔 수많은 플라스틱 통과 병이 있었고 그 안엔 전부 액체가 담겨져 있었다. 굳이 뚜껑을 열지 않아도 소독제의 냄새가 올라왔다. 그러나 그 제품들은 그 어떤 별다른 표시도 되어 있지 않았다. ‘하지만 부식성이 그렇게 강한 용액을 플라스틱 병에 담진 않았을 거 아냐.’“누구세요?”청소차를 관찰하는 한현진의 등 뒤로 사투리 억양이 섞인 여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한현진이 몸을 돌리니 청소 중이던 직원이 보였다. 그 직원은 아래층 청소를 도맡아 하는 분이라 한현진을 본 적이 없었다. 단순히 한현진이 화장실을 사용하려는 것이라 생각한 직원이 말했다. “아직 소독제를 쓰지 않았으니까 볼 일 보려면 얼른 봐요.”한현진은 그 말에 대답하지 않은 채 청소차의 물건들을 쳐다보며 물었다. “아주머니, 여쭤볼게 있어요. 화장실 청소를 하실 때 어느 브랜드의 농도가 얼마인 세정제를 사용하세요?”직원이 말했다. “도매 시장에서 파는 회색통이요. 커다란 거. 엄청 싸요. 이름이 뭔지는 모르겠는데. 사려고요?”한현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화장실이 항상 깨끗해서요. 저도 집에서 써보려고요.”청소 직원이 얼른 한현진을 말렸다. “절대 사지 마요. 변기의 때는 우리가 항상 솔로 조금씩 닦
또 다른 경찰이 물었다. “그래서 지장은 찍을 수 있어요?”“손이 그 지경인데 지장을 어떻게 찍어? 손을 보니까 지장은 무리인 것 같아서 포기했지. 어차피 지문도 완전히 회복하긴 힘들 것 같았어. 그래서 애들한테 홍채와 성문을 따라고 했어.”말을 마친 키 큰 형사가 한현진에게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나중에 회사에 가셔서 얘기 좀 하세요. 그렇게 부식성이 강한 제품은 얼른 교체하라고요. 만약 누가 나쁜 마음이라도 먹고 그 제품으로 가해라도 하면 회사에서도 책임지셔야 해요.”생각에 잠겼던 한현진이 그 말에 얼른 대답했다. “네, 알겠어요. 알려주셔서 고마워요.”경찰서에서 나온 한현진은 내내 미간을 찌푸린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조금 전 은서가 본 것은 주혁의 태반이나 점이 아니라 청소 용액에 부식되어 생긴 상처였다. 어차피 납치 사건의 범인은 이미 잡혀 경찰서에 있는데, 대체 뭐가 그렇게 급해서 상처를 치료도 하지 않고 경찰서로 달려온 것일까?한현진은 아무리 머리를 굴려도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게다가 이해되지 않는 부분이 하나 더 있었다. 회사에선 그런 고농도의 부식성 제품을 구매했을 리가 없었다. 형사의 말처럼 그런 제품은 위험부담이 너무 컸다. 한현진은 이시연의 연락처를 찾아 그녀에게 전화를 걸었다. 하지만 연결음이 거의 끝나가도록 이시연은 전화를 받지 않았다. 전화를 끊은 한현진은 곧이어 강한서에게 연락했다. 몇 초 후 통화가 연결되었지만 전화를 받은 사람은 강한서가 아닌 민경하였다. 강한서는 오늘 중요한 회의가 있어 전화를 받을 상황이 아니었기에 민경하가 그의 휴대폰을 갖고 있었다. “사모님, 저예요. 대표님께서 지금 중요한 회의 중이시라 전화를 받기 힘든 상황이에요. 급한 일이시면 저에게 얘기하셔도 돼요. 급한 일이 아니면 회의가 끝나면 바로 전화 드리라고 대표님께 말씀 드릴게요.”“급한 건 아녜요. 제가 지금 급히 회사에 가봐야 하는데 아직 은서랑 같이 있어서요. 제가 조금 이따가 회사로 가는 길에 은서를 먼저 한
주혁은 한현진보다 조금 더 먼저 경찰서에 도착한 것 같았다. 한현진이 도착했을 땐 주혁은 입구에서 통화 중이었다. 안색이 어두웠지만 그는 목소리를 잔뜩 낮춘 채 대화하고 있었다. 그를 먼저 발견한 한현진이 가까이 다가가려 하자 주혁이 곧 경계하듯 고개를 돌렸다. 한현진을 본 주혁이 멈칫하더니 곧 전화를 끊고 다가왔다. “대표님? 여긴 어쩐 일이세요?”한현진이 말했다. “일이 좀 있어서요. 기사님도 일 보러 오셨어요?”짧게 대꾸한 주혁이 머뭇거리더니 말을 이었다. “8년 전 제 아들을 납치한 마지막 용의자가 잡혔다고 해서요. 조사에 협조해달라는 연락을 받고 왔어요.”한현진이 놀라운 듯 물었다. “아드님이 납치되었었어요?”주혁이 솔직하게 대답했다. “8, 9년 전 일이죠. 납치된 동안 납치범에게 맞아 치료 시간을 놓쳐 청력도 잃게 된 거예요. 그 사건을 맡은 형사님이 그러시더라고요. 사건이 종결되면 배상금을 어느 정도 받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요.”얘기하는 동안 주혁은 아래쪽에서 자신의 손을 지긋이 쳐다보는 시선을 느꼈다. 그는 입술을 짓이기며 조용히 손바닥을 다리에 대고 말을 이었다. “곧 아이에게 인공 달팽이관을 해줄 수 있을 것 같아요.”주혁의 이야기가 한현진의 호기심을 자극하긴 했지만 그녀는 예의상 더는 그 일에 관해 묻지 않았다. 한현진은 대화주제를 돌리며 주혁에게 물었다. “제가 전에 추천해준 의사 분께 가 보셨어요?”주혁이 멈칫하며 대답했다. “아직이요.”한현진에게는 꽤 의외의 대답이었다. 그녀는 주혁이 최대한 빨리 아이를 데리고 검사를 받으러 가 인공 달팽이관을 제작할 것이라 여겼다. 아무래도 주혁은 규정을 어기고 부업을 할 만큼 누구보다 간절하게 수술을 바라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한현진이 그에게 일반 병원보다 더 싼 가격에 수술을 받을 수 있는 의사를 추천해주었음에도 지금까지 검사조차 받지 않았다고 한다.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요즘 아내가 몸이 안 좋아서요. 전근된 곳이 전처럼
하온이는 적합한 골수를 기다리지 못한 것이 아니었다. 아이에게는 골수를 의식할 수 있는 기회가 두 번이나 있었다. 처음으로 하은이에게 기회가 찾아 왔을 때는 골수 의식의 최적의 타이밍이었다. 하지만 하온의 병을 치료하기 위해 그의 집안은 이미 빚더미에 앉은 상황이라 아무리 여기저기서 돈을 빌려도 수술비를 모을 수 없었다. 그러니 하온의 부모님은 어쩔 수 없이 마음을 독하게 먹고 수술을 포기한 채 아득바득 돈을 모으며 다음을 기약해야 했다. 하지만 곧 있을 줄 알았던 두 번째 기회는 그리 빨리 오지 않았다. 너무 오랜 기다림을 견뎌냈지만 하온의 몸은 이미 수술을 진행 할 수 없을 정도로 허약해져 있었다. 하온은 하루하루 날이 다르게 시들어 가는 꽃 같았다. 은서는 낮엔 하온이와 놀다가도 저녁엔 침대에 누워 눈물을 흘렸다. 하온이가 세상을 떠나기 전날 밤, 은서는 강한서 품에 안겨 닭똥 같은 눈물을 뚝뚝 흘렸다. 은서가 말했다. “삼촌, 저도 죽어요?”“삼촌, 우린 왜 이런 병에 걸린 거예요?”“삼촌 부자잖아요. 하온이 오빠가 수술할 수 있게 돈 빌려주시면 안 돼요? 제가 커서 돈 벌면서 갚을게요. 하온이 오빠 죽는거 싫어요.”강한서는 은서의 머리카락을 어루만지며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은서는 아직 너무 어려서, 인생은 가끔 이렇게 운명의 장난 앞에서는 무력하기만 하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목숨으로 돈을 맞바꾸기는 쉬운 일이었지만 돈으로 목숨을 살 수는 없었다. 강한서는 은서가 아직까지 그 일을 기억하고 있을 줄은 몰랐다. 그때의 은서는 고작 5살이었다. 눈시울이 붉어진 한현진은 말을 잇지 못했다. 이 세상에는 가여운 사람이 너무도 많았다. 그러니 혼자의 힘으로는 고작 얼마의 힘이나 보탤 수 있을까. 그렇다고 세상이 나아질 것이라 기대하는 아이의 기대를 깨트릴 수도 없었다. 한현진은 정중하게 물었다. “정말 이거 전부 기부할 거야? 기부하면 은서에겐 아무 것도 없는 거야.”고개를 끄덕이던 은서가 곧 찬란한 미소를 지었다. “저 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