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시은은 오랫동안 참아온 화가 폭발한 모양이었다. 전태평을 구속시킨 뒤, 그녀는 바로 변호사를 찾아가 그가 애인인 최지영과 그 아들에게 쓴 모든 돈을 되찾아달라고 요청했다. 또한 최지영을 전태평, 신미정과 공모해 자신을 사기 친 혐의로 고소했다.그녀가 오랫동안 모아온 증거들로 승소는 확실했지만, 문제는 많은 절차를 거쳐야 한다는 것이었다. 절차가 너무 느리니 양시은은 답답했다. 그녀는 그 모자가 자신의 돈으로 산 집에서 사는 꼴을 더는 볼 수 없었다.그래서 그녀는 호텔에서 힘 좋은 보안 요원 일곱 명을 데려와, 설 연휴 기간에 그들을 집에서 쫓아냈다.한현진이 현장에 도착했을 때, 양시은은 이미 그들을 아파트 마당으로 내몰았고, 보안 요원들이 차례차례 그들의 짐을 밖으로 던져내고 있었다.단지 안은 여자의 욕설과 울음소리로 가득했다.차미주는 혀를 끌끌 차며 말했다.“시은 언니 진짜 세게 나가는데. 이렇게 사람을 쫓아냈다가 소송도 아직 안 끝났는데 경찰에 신고라도 당하면 어떡하려고 그러지?”한현진이 작은 소리로 말했다.“전태평이 정말 그렇게 대범하게 집을 그 여자 명의로 해줬을 거 같아? 이 집, 전태평 엄마 명의야. 그러니까 시은 언니는 그 여자를 쫓아낼 정당한 이유가 있는 거야. 자기 집에 남을 공짜로 살게 할 이유가 없잖아?”차미주가 놀라서 말했다.“헐. 그 개자식 완전 교활하네. 난 그가 진심으로 상간녀를 사랑하는 줄 알았는데 결국 뒤에서 다 대비하고 있었던 거네?”“애인 관계가 제일 불안정해. 부부는 적어도 법적으로 보호받지만, 애인은 아무런 보호가 없잖아. 그 여자가 집을 팔아버리고 도망가면, 전태평은 어디에 가서 찾겠어? 집 한 채로 묶어두면 아들까지 봐주니까 본인은 그저 매일 두 여자를 즐기면 되었던 거야. 시은 언니는 남편이 순박하다고 했는데 내가 보기엔 머리가 너무 팽팽 돌아가.”“근데 생각해 보면, 시은 언니도 참 운이 없어. 그 나쁜 놈이 횡령하고 뇌물 받은 것 때문에 벌금 물리면 결국 언니가 돈을 내야 할 거고, 남편이
한현진은 그녀에게 우유를 건네며 말했다.“상속권이 있다고 해서 꼭 돈을 받을 수 있는 건 아니에요. 전태평이 아직 멀쩡히 살아있잖아요?”차미주...양시은은 이 말에 분노를 감추지 못했다. 남편 집안사람들은 20년 동안 그녀를 속였고, 시어머니는 아들을 낳지 못한 것을 두고 늘 은근히 그녀를 괴롭혔다. 매년 며느리 중에서 자신이 섬긴 돈이 제일 많고, 선물도 제일 비쌌지만, 아들을 못 낳았다는 이유로 좋은 말 한마디 듣지 못했다.어제 시어머니는 친척들을 모아 그녀 집 앞에 몰려와 난리를 피우며 집안 재산을 다 털어서라도 전태평의 빚을 메우고 그를 구해내라고 했다.돈을 상간녀에게 주면서 집안 재산은 다 상간녀의 아들에게 넘기겠다고 해놓고, 자신을 부양하는 며느리에게는 아들을 못 낳았다며 불평하고, 손녀들마저도 차갑게 대하는 인간이 정말 무슨 염치로 그러는 건지.“좋아.”양시은이 냉랭한 목소리로 말했다.“전태평이 죽고 나서 그때 상속받으러 와. 하지만 그 사람은 아직 살아 있고, 우리도 이혼하지 않았으니까, 그의 재산 처분권은 나한테 있어!”그러고는 뒤에 있던 보안요원들에게 고개를 돌려 말했다.“잠시 후에 자물쇠를 바꾸고, 매일 돌아가면서 여길 지켜요. 그 두 사람이 우리 집 근처 3미터 안으로 오면, 그날부로 회사 나오지 마세요.”일고여덟 명의 건장한 청년들이 일제히 대답했다.“알겠습니다.”전태평의 아들은 젊은 혈기로 속이 이미 부글부글 끓고 있었다. 양시은이 돌아서는 순간, 그는 어디선가 커터 칼을 꺼내 들고 그녀를 향해 휘둘렀다.한현진은 깜짝 놀라 외쳤다.“조심해요!”이때 양시은 옆에 있던 건장한 남자가 재빠르게 상대방의 칼을 붙잡고, 무릎을 걷어찼다. 소년은 짧게 신음하며 그 자리에 무릎을 꿇었다.다른 보안 요원들도 서둘러 달려와 제압하고 바로 경찰에 신고했다.맨손으로 칼을 잡은 남자의 손이 피투성이인 걸 보자 양시은은 놀라서 창백해진 얼굴로 옆에 있던 비서에게 말했다.“빨리 병원으로 데려가. 치료비는 회사에서 부담하고.”
차미주는 멍해졌다.“이혼 안 해요? 그럼 쓰레기 같은 남자랑 계속 얽히겠다는 말씀이에요?”양시은은 담담하게 대답했다.“20년 전이었다면, 당연히 이혼했겠죠. 하지만 지금 이혼한다고 내가 얻을 게 뭐가 있을까요?”“전태평은 별문제 없으면 10년, 20년은 감옥에 있을 텐데, 지금 이혼하면 재산을 나눠야 하잖아요. 그런데 그는 감옥에서 돈을 쓸 수도 없으니 그 돈이 결국엔 누구에게 돌아가겠어요?”“전태평은 아마 당장이라도 이혼하고 싶을 거예요. 돈을 나눠서 아들과 어머니를 챙겨주려고요. 그걸 뻔히 아는데 내가 왜 들어주겠어요?”“내가 이혼하지 않으면 돈을 어떻게 쓸지는 내 마음이에요. 난 그 인간에게 돈 한 푼 없는 상황에서 그의 아들이 어떻게 망가지는지 보여줄 거예요.”“그럼 10년, 20년 후에 그가 나와서 이혼하고 재산을 나누려고 하면 어쩔 거예요? 그때면 언니는 더 많은 돈을 벌어놨을 텐데.”차미주가 계속 물었다.양미주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웃었다.“감옥에서 그렇게 오래 있다 나오면, 세상은 이미 많이 변했을 거예요. 애인은 늙었을 테고 아들은 아무 성과도 없는 무능한 전과자 신세가 됐겠죠. 반면 난 사업도 성공했고 딸들도 행복하게 잘 살고 있을 텐데 그 인간이 뭘 선택할지는 뻔하지 않겠어요?”그녀는 커피를 휘젓다가 말을 이어갔다.“그때가 되면 난 명절마다 그를 딸들과 외손주들 앞에 데려다 놓고, 그 사람의 과거 ‘화려한 업적’에 대해 잘 얘기해서 다들 교훈으로 삼게 할 거예요. 이렇게 생생한 예시인데, 다들 안 들을 수가 없겠죠.”차미주...한현진...전태평이 들어가면서 그녀의 복수는 이제 시작된 것이었다. 불충한 남편, 뻔뻔한 애인, 그리고 그들이 낳은 자식을 그녀는 하나도 용서할 생각이 없었다.양시은은 말을 끝내고 한현진을 쳐다보며 물었다.“강한서가 신미정에게 마음이 약해졌나 봐요. 현진 씨는 나한테 불난 데 기름 부으러 온 거죠?”한현진은 담담하게 말했다.“헛소문 좀 퍼뜨리지 말아요. 우리 남편 그렇게 어리석지 않아
그의 SNS 게시물에는 금세 수천 개의 댓글이 달렸다.[4천억이라니! 월급 500만 원으로는 6천여 년 동안 먹지도 않고 벌어야 겨우 모을 돈이야!][부자들이 기부하는 건 다 뻔한 얘기지.][그게 무슨 뜻이야? 잘 모르겠네.][세금 피하려고 하는 거지, 이왕이면 홍보도 하고.][윗분, 잘난 척 그만해. 기부금은 내야 할 세금에서 공제하는 거지, 네가 내는 세금이 아니야. 게다가 한도도 있어. 진짜 입법자들이 바보인 줄 알아? 외국의 상속세도 아니고 뭘 아는 척해?][4천억이나 기부했는데 홍보 좀 하는데 어때서? 넌 4천 원을 기부하고도 SNS에 자랑하고 싶어 하잖아.][난 기업들이 다 이렇게 기부 경쟁하면 좋겠어. 어차피 내 돈 나가는 거 아니니까 누가 많이 내든 상관없어. 한성 짱!][강 대표님, 인터넷에서 루나 2세 테스트 영상 올라온 거 봤어요. 우리 와이프가 그거 사달라고 졸라대는데, 와이프가 단념하게 가격 좀 말해주세요.][네 엄마가 일부러 사람 다치게 한 거 덮으려고 일부러 올린 거지? 그 미친 여자가 계단에 기름칠해서 청소부 두 명이나 그렇게 다치게 해놓고, 집에 돈 많으니까, 돈으로 입 막을 생각이잖아? 이런 인기 검색어까지 사서 덮어버리면 사람들이 다 잊어버릴 줄 알아?][입막음한 것 같진 않은데? 아내가 직접 가서 위로도 했고, 보상안도 논의했잖아.][보상금 주는 거야 책임 면하려고 그러는 거지. 그 미친 여자가 어떻게 처리됐는지 아직도 소식이 없는 걸 보면 벌써 돈으로 다 해결했나 봐.][말은 쉽지. 돈 안 받고 고소만 하면 네가 치료비랑 변호사비 다 대줄 거야? 어른답게 현실을 좀 보라고. 내 친구가 병원에 있는데, 그 청소부들 경상도 아니래. 하지만 한성은 언론을 막은 것도 없고 책임도 회피하지 않았잖아. 그리고 경찰 조사 결과도 아직 안 나왔는데 성급하게 결론 내리려는 사람들 왜 이렇게 많아? 강 대표가 네 귀에 대고 자기 엄마를 돈으로 빼냈다고 말해주던?]네티즌들 사이에 논란이 크게 일었다. 많은 사람들은 한성
서해금의 눈가가 파르르 뛰었다. “뭐?”송가람이 입을 꾹 다물었다. 서해금은 이미 송가람과 강한서를 이어주려던 생각을 접은 지 오래였다. 만약 송가람이 아직도 서해금 몰래 강한서와 연락을 주고받는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또 한바탕 핀잔을 받을 것이 뻔했다. “아무것도 아니야. 엄마 이 시간에 왜 아직도 안 자?”“머리가 아파서 잠이 안 와.”송가람 옆에 자리 잡고 앉은 서해금이 무심코 말했다. “너 요즘 왜 민준이 안 찾아? 예전엔 계속 붙어있으려고 했잖아.”송민준 얘기에 송가람의 얼굴에 차가운 기운이 서렸다. “오빠는 마음이 전부 친동생에게 가 있잖아. 날 신경 쓸 여유 같은 게 있을 리가 있겠어?”“무슨 말을 그렇게 하니? 너 어렸을 때, 민준이는 널 제일 예뻐했어. 나와는 별로 얘기를 안 했어도 넌 항상 데리고 다니길 좋아했는데. 어렸을 때부터 떨어져 있었던 한현진이 돌아왔으니 남매 사이가 당연히 더 돈독해졌겠지지. 하지만 너랑은 함께 자란 정이 있어. 민준이가 먼저 연락하지 않는다고 너도 다가가지 않으면 걔가 얼마나 섭섭하겠어.”송가람이 입술을 꾹 깨물었다. “오빠가 나한테 무슨 정이 남았어? 날 향했던 사랑은 한현진이 돌아온 후로 전부 그쪽으로 넘어갔어. 난 그냥 오빠가 친동생을 잃은 슬픔을 기탁할 대체품에 불과했던 거야. 지금은 그 친동생이 돌아왔는데, 내가 뭐라고.”“그건 네가 계속 한현진을 적대시하니까 그런 거잖아. 네 아빠 앞에서 한현진과 비교하며 애정을 갈구하면 네가 어떻게 친딸을 이길 수 있겠니? 네가 한현진에게 잘해줘야 네 아빠도 너한테 잘할 수 있어. 그래야 네 불쌍한 처지를 조금씩 알아챌 수 있다고. 알겠니?”서해금의 말에 송가람이 멍해졌다. 그녀는 서해금의 말뜻을 어쩌면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심심하면 네 오빠한테 자주 연락해. 누구랑 만나는지도 살펴보고.”송가람이 이해되지 않는다는 듯 말했다. “그건 왜 살펴보라고 하는 거야?”서해금이 덤덤한 말투로 말을 이었다. “네 오빠도 이젠 어린 나이가
강민서가 가져온 보고서를 보던 민경하가 웃으며 말했다. “대표님께서는 일하실 때는 완전이 몰두하시는 편이시라 시간을 자주 깜빡하시거든요. 어떨 땐 일부러 그렇게 늦게까지 일하시는 거 아니세요.”“약속 있으면 먼저 가요. 제가 나중에 대표님께 말씀드릴게요.”강민서가 입을 삐죽였다. “다들 퇴근 안 했는데 저만 가면 눈에 띄잖아요. 나중에 또 뭐라고 할 거예요. 그리고 오늘 할머니께서 저랑 같이 본가에 저녁 먹으러 오라고 했던 거 잊었어요?”까맣게 잊고 있었던 듯 민경하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안 가면 안 돼요?”민경하는 선뜻 강민서의 본가로 가기가 꺼려졌다. 워낙 꿍꿍이가 많은 어르신이라 밥 한 끼를 먹는 것도 신경을 바짝 곤두세워야 했다. “안 가도 되죠. 직접 안 갈 거라고 말씀드려요.”강민서의 말에 민경하는 입을 꾹 닫았다. 물을 마시고 있는 강민서를 힐끔 쳐다보던 민경하가 갑자기 입을 열었다. “민서 씨가 회장님께 저와 데이트 할 거라고 말씀드려요. 단둘이 있고 싶다고요.”입안에 머금었던 물을 뿜은 강민서는 사레가 들려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누가 실장님과 단둘이 있고 싶대요. 그렇게 말하고 싶으면 본인이 직접 해요. 그런 말은 전 창피해서 못 해요.”“그래요. 제가 말씀드릴게요.”민경하는 대답 하며 서류를 내려놓았다. 휴대폰을 꺼내 정인월에게 전화했다. 강민서는 귀를 쫑긋 세우고 민경하가 어떻게 정인월의 말을 거역하는지 들어볼 생각이었다. 통화가 연결되자마자 민경하가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회장님, 오늘 저희 둘 본가로 안 가도 될까요? 일이 있는 건 아니고 오늘 저녁에 연등 축제 있잖아요? 민서 씨가 저랑 같이 가보고 싶다고 해서요...”강민서의 얼굴이 순간 어두워졌다. ‘실장님이 전화 드리라고 했더니 내 탓으로 돌려?’강민서가 막 화를 내려는데 민경하가 초콜릿 하나를 집어 강민서의 입에 넣어주더니 웃으며 수화기 너머의 정인월에게 말했다. “네, 알겠어요. 민서 씨에게 사진 많이 찍어서 회장님께 보내드리
민경하가 물 만난 물고기처럼 강한서의 비서 실장이라는 위치를 유지할 수 있었던 건 그저 우연이 아니었다. 일반적으로 아부는 대표의 취향에 따르는 것이 다반사였다. 그러니 민경하 역시 강한서가 좋아하는 것을 잘 이용했다. 다만 민경하의 상사가 제일 좋아하는 것이 사모님이었을 따름이었다. 서둘러 집으로 돌아간 강한서는 도착하자마자 짐을 정리하고 있는 한현진을 볼 수 있었다. 멈칫하던 강한서가 물었다. “나가려고?”한현진이 짐을 정리하던 손을 멈추지 않고 대답했다. “전에 사고 났을 때 내가 유호촌에 있는 절에서 널 위해 소원을 빌었던 적이 있거든. 이젠 네가 건강도 회복했으니 감사의 의미로 예참을 드리고 오려고.”한현진의 말에 강한서가 잠시 멍해졌다. “왜 갑자기 지금 예참을 드리러 가는 거야?”“내가 잊고 있었는데, 민 실장님께서 귀띔해 주셨어. 네가 돌아온 지도 시간이 꽤 지났고 내 소원도 이루어졌으니 나도 그때 했던 약속을 지켜야지. 공양도 좀 올리고.”‘민 실장... 아주 얍삽한 놈이었네.’‘현진이가 다급하게 전화해서 돌아오라길래 무슨 급한 일이라도 있는 줄 알았더니...’민경하의 조언이었다는 말에 강한서는 순간 모든 것이 이해되었다. ‘날 회사에서 내보내고 일찍 퇴근해서 명절을 보내려고 그런 거였네.’입술을 앙다물었던 강한서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 절 말이야. 주강운이 널 위해 평안을 비는 부적을 받아 온 곳이지.”그 말에 어리둥절해졌던 한현진이 말했다. “네가 말하니까 생각났네. 주 변호사님이 나에게 준 부적은? 전에 네가 정장 주머니에 넣었었잖아. 집에 돌아와서도 돌려주지 않았어.”“...”‘쓸데없이 그 얘기를 꺼내는 게 아니었어!’“부적은?”한현진이 손을 내밀었다.강한서가 시선을 돌리며 말했다. “몰라. 아마 계속 그 주머니에 있을 거야. 안 건드렸거든.”의심하는 눈초리로 강한서를 한참 쳐다보던 한현진이 입을 열었다. “내가 찾아볼게.”말하며 몸을 일으킨 한현진이 드레스룸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
한현진의 말에 강한서가 침묵했다. “설마 제가 일부러 그랬다고 생각하는 거야?”한현진이 일부러 한숨을 쉬며 말했다. “난 혹시나 네가 내키지 않으면 타이밍을 봐서 주 변호사님께 돌려드리려고 했는데, 이제 보니 넌 그다지 신경—”“일부러 그런 거야!”얼른 말을 바꾼 강한서가 어두운 얼굴로 말했다. “날 앞에 두고 현진 씨에게 부적을 건네다니, 걔는 네 첫사랑과 다를 바 없는 놈이야. 그 두 사람 모두 그저 그런 인간이야.”‘한 명은 내 앞에서 선물을 주고 또 한 명은 고백까지 했어. 이놈이나 저놈이나 양심 없는 것들!’한현진이 피식 웃음을 흘렸다. “사실 나도 받을 생각 없었어. 그러게 누가 너더러 부적을 물에 떨어트리래? 내가 안 받으면 얼마나 뻘쭘하겠어.”한현진의 설명에 강한서는 말을 잇지 못했다. “왜 진작 얘기하지 않았어?”강한서가 조금은 후회 섞인 말투로 말했다. “내가 얘기할 기회도 없이 바로 툭, 물에 떨어트렸잖아. 그 타이밍에 내가 싫다고 하면 뭐가 되겠어?”‘그러니까 내가 부적을 받을 수밖에 없게 기회를 제공했다는 거야?’강한서는 짜증이 솟구쳤다. “그럼 주강운이 전에 줬던 목걸이는? 그땐 나도 그 자리에 없었잖아. 그건 왜 받은 거야? 전에도 줄곧 하고 있었잖아. 강아지 목줄처럼 생긴 걸 뭐가 이쁘다고.”그의 말에 한현진의 눈가가 파르르 뛰었다. “강아지 목줄이 맞긴 하지. 펜던트 안엔 사진도 있어. 엄청 멋있는데, 볼래?”한현진의 말에 강한서는 심장을 부여잡고 싶어졌다. “내가 없는 동안 주강운과 강아지까지 키웠어? 검둥이를 만지는 거로는 부족했어?”한현진이 서랍을 열어 안에 넣은 목걸이를 꺼내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검둥이도 좋긴 하지만 내가 키우지 않아서 나와는 안 친하잖아. 난 그래도 내가 직접 기른 게 좋아. 다른 사람에겐 으르렁대고 나만 좋아하는 그런 거.”강한서가 냉소 지었다. “고작 1달을 돌아오지 않았을 뿐이야. 한 달 사이 강아지가 완전히 주인으로 인정하게 하려고 하다니... 널 이용
한현진은 반나절이 걸려서야 일의 자초지종을 파악할 수 있었다. ‘어쩐지 지난번 홍혜림 씨 사건이 있었을 때 왜 진윤 씨가 갑자기 나타나 상황을 반전시키나 했더니, 이런 이유 때문이었다는 거잖아.’순간 한현진은 뻘쭘함에 어찌할 바를 몰랐다. 이럴 줄 알았다면 방금 전화를 받고 모르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을 때 입도 벙긋하지 말았어야 했다. 진윤의 말처럼 이건 정말 비열한 짓이었다. 유치한 강한서가 벌일 만한 일이 맞긴 한 것 같았다. 강한서 본인 역시 이번 일은 너무 얍삽했다고 생각한 것인지 어쩌다 아이를 달래주었다. “내가 제대로 설명하지 않은 탓이라고 해. [정상에서]에서 지금 자체 테스트 중인 스킨 한 세트 줄게. 어때?”진윤이 작게 울먹이며 말했다. “스킨 세 세트?“강한서는 어이없는 웃음을 터뜨렸다. 이 와중에 딜을 하는 걸 보니 그리 큰 상처를 받은 건 아닌 모양이었다. “세 세트 전부 줄게.”진윤이 곧바로 울음을 멈췄다. 절판되어 더는 살 수 없는 게임 스킨과 이미 다른 사람과 결혼한 여신 중 아무리 바보라도 그와 같은 선택을 할 것이다. “그래요. 제가 오해한 거라고 하죠.”말하며 한현진을 쳐다보던 진윤은 여전히 아쉬워하며 말했다. “현진 누나, 왜 이렇게 빨리 결혼하셨어요. 남자 때문에 손에 넣었던 트로피도 놓칠 수가 있어요.”강한서의 눈가가 파르르 뛰었다. “결혼이 커리어 영향주지 않아. 이간질 하려고 하지 마.”“형님은 남자니까 당연히 영향을 안 받으시겠죠.”강한서에게 농락을 당한데다 하루아침에 구닥다리에게 여신을 뺐긴 진윤은 누구보다 빨리 흑화 했다. “결혼하면 아이도 낳아야 하잖아요. 어떤 유명한 감독이 임산부를 캐스팅하려고 하겠어요. 제일 예쁠 나이를 남편과 아이에게 바치면 나중에 아이가 클 때쯤엔 본인의 레전드 시절은 이미 지났다고요. 제가 다 아쉬워서 그래요. 너무 불공평해요.”비록 진윤은 그저 이간질을 하기 위해 꺼낸 말이었지만 그 말은 현실이기도 했다. 임신과 출산은 여자의 커리어엔 고난과 역경이
한현진: ?강한서가 들고 있던 휴대폰 너머로 들려온 것은 차미주의 목소리였다. “현진아! 너 내연녀가 되어버렸어. 게다가 그 상대가 네 사촌 동생이래.”강한서: ?강한서는 어리둥절했다. 하지만 한현진은 그보다 더 혼란스러웠다. ‘전여친, 현여친이 뭐야? 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거야? 게다가 이 목소리, 왜 이렇게 귀에 익은 거지?’“저... 저기 혹시 전화 잘못 하신 거 아녜요?”한현진이 나지막이 물었다. 그러자 수화기 너머의 사람이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그리고 곳 충격이 가시지 않은 듯 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현, 현진 누나?”한현진이 멍해졌다. ‘날 알아?’“네. 제가 한현진이예요. 누구세요?”상대방은 말이 없었다. 그에게서는 그저 조금 흥분한 숨소리가 들려왔다. 강한서가 한현진의 손에서 휴대폰을 빼앗아 스피커폰으로 전환했다. “무슨 일이야?”진윤이 이를 악물었다. “방금 전화 받은 사람 누구예요!”강한서가 말했다. “내 와이프.”“그럴 리가 없어!”진윤이 바득 이를 갈았다. “이 사생팬 같은 아저씨가! 혹시 일부러 날 속이려고 옆에 성대모사하는 분이라고 모셔놓은 거 아녜요?”강한서가 태연하게 말했다. “내가 너처럼 유치한 인간인 줄 알아? 그리고 현진이는 아무도 대체할 수 없어.”진윤은 강한서의 말을 전혀 믿지 않았다. “거짓말 좀 그만 해요. 현진 누나는 지금 그 티베탄 마스티프와 데이트하는 중이라고요. 만약 누나가 정말 형님 와이프라면 형님이 이렇게 아무렇지 않게 누나가 딴 남자와 데이트하는 걸 지켜볼 수 있어요?”더 이상 진윤을 대꾸하기 귀찮았던 강한서가 그에게 영상통화를 보냈다. 몇뿐 후, 휴대폰 화면으로 자신이 그토록 좋아하던 여신과 딱 붙어 앉아있는 전남편 형님을 확인한 진윤은 순간 참지 못하고 눈물을 흘렸다. 한현진은 휴대폰에 비춰진 진윤을 보며 멍한 표정을 지었다. ‘진윤 씨가 강한서와는 어떻게 아는 사이인 거야?’진윤은 숨이 넘어갈 것처럼 울어댔다. “거짓말쟁이! 뻔뻔한 인간! 전
유난히 예쁘게 잘 나온 사진을 보며 한 현지는 신난 얼굴로 고개를 돌려 강한서에게 보여 주었다. 하지만 멍청하게 나온 것 같다면 마음에 들어 하지 않던 강한서는 굳이 자신이 찍겠다면 휴대폰을 달라고 했다.한현진이 눈을 실룩거렸다. “네가 사진을 찍겠다고? 168cm인 나를 138cm로 만들어 버리는 네가? 강 대표님 본인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 몰라서 그런 말씀을 하시는 거예요?”강한서가 인정할 수 없다는 듯 말했다. “내 실력이 그렇게 별로야?”한현진이 말했다. “쌀을 뿌린 휴대폰을 닭이 부리로 쪼아도 내가 찍은 것 보단 낫다고 할 수 있어.”왠지 수치를 당한 것 같은 기분에 강한서가 이를 악 물면 말했다. “그럼 난 왜 우리가 데이트했을 때 내가 찍어준 사진을 밤새도록 보고 있었던 거야?”강한서가 괜히 그 얘기를 꺼낸 탓에 잊혀 가던 한현진의 기억이 문득 돌아왔다.“사진을 보면서 넌 그저 사진을 찍을 줄 모르는 것뿐이라고 날 설득 하지 않는다면 호텔 앞에서 바로 너와 싸우 버릴 것 같았거든. 내 외모에, 감독님께서도 나에게 각도는 중요하지 않다고 말씀 하셨는데 넌 대체 어떻게 날 사실 눈으로 찍을 수 있었던 거야?”강한서: ...“사시눈... 처럼 나왔어?”한현진이 일을 악물었다. “내가 뛰어다니는 사진 좀 찍어달라고 하니까 유체 이탈한 것처럼 찍어줬잖아! 내가 피드를 업로드할 때 실수로 그 사진까지 넣었더니 애들이 나한테 대체 어디서 이런 심령사진을 찍었냐고 물었었어.”“...”활활 타오르던 강한서의 분노가 순식간에 사그라졌다. “어쩌다 가끔... 몇 십 장뿐이었잖아.”한현진이 어이없다는 듯 실소를 터뜨렸다. “하.”뭔가를 말하려던 강한서가 고개를 숙이자 무릎 정도까지 오는 어린 아이가 옆에 쭈그려 앉아 불쌍한 눈으로 자신을 쳐다보는 것이 보였다. “아저씨, 아직 더 놀 거예요? 저희 잠깐 놀게 해주시면 안 돼요?”강한서가 고개를 돌리자 뒤에는 어린 라이 대여섯 명이 줄을 서 있었다. 한현진: ...창피함에 고개
“하하하.”한현진이 마른 웃음을 지었다.“오빠. 제가 티슈 없는 건 어떻게 알았어요?”강한서가 눈을 씰룩였다. 그야말로 완벽한 핑계였다. 그는 입술을 달싹여 아내를 따라 염치 없이 말했다. “형님, 저도 없어요.”송민준이 가방과 티슈를 두 사람에게 던지며 강한서를 노려보았다. 탁, 소리와 함께 문이 닫겼다. 한현진: ...“오빠가 나한테 화 난 건 아니겠지?”강한서가 우울하게 말했다. “너보단 날 먼저 걱정해야 할 것 같아. 네 오빠가 아무리 너에게 화가 나도 결국은 나에게 그 화살이 돌아올 거야.”한현진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다면 마음이 좀 놓이네.”강한서: ?한현진이 그의 손을 잡으며 의미심장하게 말했다. “어차피 오빠가 널 탐탁지 않아 한게 하루 이틀도 아니잖아. 오늘 이 일로 크게 달라지진않을 거야.”“...”‘행복은 본인이 누리고 잘못은 내가 뒤집어쓰고. 정말 좋은 아내네.’강한서는 한현진을 데리고 호텔 라운지로 향했다. 입덧이 끝난 이후로 한현진의 식욕은 줄곧 안정적이었다. 매 끼니마다 많이 먹지 않아도 배가 불렀지만 배고픔도 빨리 찾아왔기에 하루에 몇 끼씩 먹어야 했다. 그 덕에 지금의 한현진은 송아지처럼 튼튼하기만 했다. 강한서는 임신한 한현진을 위해 오랫동안 공부했지만 한현진에게는 하나도 쓸모가 없었다. 그의 주변엔 임산부가 많이 없었지만 많은 아내들이 임신 후 남편을 괴롭힌다고 들은 적이 있었다. 하지만 한현진에겐 모든 임신의 호르몬 변화가 거짓말처럼 전혀 작용하지 않았다. 의사는 사람마다 체질이 다르기 때문에 어떤 사람은 큰 반응 없이 잘 먹고 잘 지내기도 한다고 말했다. 의사는 강한서에게 너무 걱정하지 말라며 시간이 날 때마다 산책을 자주 다니며 좋은 컨디션을 유지하면서 주기적으로 검사를 받으면 된다고 했다. 한현진은 정서적으로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심지어 조금 유치해지기도 했다. 바로 지금처럼 말이다. 한현진은 강한서의 팔을 끌며 굳이 아이들의 흔들 목마에게 타게 해달라며 떼를 썼다.
한현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안녕하세요, 채영 언니.”문채영이 가방에서 포장한 선물 박스를 건넸다. “첫 만남이라 어떤 선물을 준비하면 좋을지 몰라 제가 직접 향낭을 만들었어요. 향 맡아봐요.”한현진이 조금 의외라는 듯 말했다. “언니도 조향하세요?”문채영이 미소 지었다. “제가 조향에 입문하게 된 것도 민준이 덕분이었어요. 전엔 이런 거 만드는 거 좋아했었거든요.”한현진은 다시 한 번 충격에 휩싸였다. 그녀는 조향하는 송민준의 모습을 본 적이 없었다. 줄곧 송민준은 그쪽으론 취미가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송민준은 그 얘기를 꺼내는 것이 불쾌한 듯 담담하게 말했다. “주문부터 해. 배고파.”멈칫하던 문채영이 시선을 내려 눈에 맴도는 서운함을 숨겼다. 한현진이 얼른 화제를 돌렸다. “언니, 오랜만에 오셨을 텐데 오늘은 한주 음식으로 드시는 게 어때요?”문채영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좋아요. 현진 씨가 먹고 싶은 거로 주문해요.”주문한 음식 서빙을 마치고 룸을 나서려는 종업원에게 송민준이 갑자기 말했다. “장어 국수도 주문할게요.”문채영이 힐끗 송민준을 쳐다보자 시선을 올린 그가 마치 변명이라도 하듯 말했다. “환영회에 국수가 빠질 수 없지.”‘그래, 환영회에 국수가 빠질 수 없다고 하는 건 그렇다고 쳐. 하지만 하고 많은 국수 중에 왜 하필 장어 국수야?’‘오빠가 장어 국수라고 말할 때 언니 표정을 보면 설마 두 사람 사이에 장어 국수와 관련된 스토리가 있었던 건가?’호기심이 활활 불타오른 한현진이 몰래 테이블 아래로 강한서의 손을 꼬집었다. 그러자 강한서는 그녀에게 새우를 발라 주었다. 한현진: ...강한서과 문채영은 너무 친한 사이였다. 두 사람의 대화에서 한현진은 문채영의 외할머니와 강한서의 할머니가 먼 친척 사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하지만 워낙 촌수가 먼 사이라 피가 거의 섞이지 않은 가족이라고 할 수 있었다. 두 사람은 알고 지낸지 한참 후에야 두 가문이 몇 세대 전에는 친척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한현진이 고개를 들자 옆에 서 있는 벤틀리가 보였다. 송민준이 운전석에 앉아 두 사람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들의 차창은 닫혀 있었으니 송민준은 당연히 아무것도 볼 수 없었지만 강한서의 차라는 것은 알고 있었다. 차를 세운지 한참이 지나도 두 사람이 모습을 보이지 않자 송민준은 강한서가 또 이상한 수작을 부리고 있는 것이라 생각했다. 송민준의 목소리를 들은 강한서가 한현진의 손을 놓고 그녀의 옷을 정리하며 단정하게 자리에 앉았다. 민경하는 은연 중에 자신의 미래를 보고 있는 것만 같았다. 차에서 내린 송민준은 카키색의 캐주얼한 외투에 검정색 바지를 입고 있었다. 머리는 평소 한열이 자주하던 헤어스타일과 비슷했고 선글라스를 콧등에 걸친 채 입술을 앙다물고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넓은 어깨에 긴 다리의 그가 우뚝 서 있으니 카리스마와 매력이 흘러넘쳤다. 전엔 그가 한열과 닮았다는 생각을 하지 못했었는데 이런 차림에 선글라스까지 쓴 모습을 보니 만약 모르는 사람이 봤다면 아마 그를 한열로 착각할 것도 같았다. 닮아도 너무 닮았다. 차에서 내린 한현진이 가방을 메고 송민준을 향해 걸어갔다. “오빠, 오늘 왜 이렇게 멋져요?”송민준이 입꼬리를 씩 올렸다. “내가 언제 안 멋진 적이 있었어?”한현진이 눈웃음 지으며 말했다. “어떤 날이든 멋지긴 하죠. 그래서 언제 데뷔할 생각이요?”송민준이 한현진의 가방을 건네받으며 장난스레 말했다. “난 열이와 캐릭터가 너무 비슷해. 내가 데뷔하면 연예계에 걔 자리가 있긴 할 것 같아?”한현진이 웃음을 터뜨렸다. 송민준은 손을 들어 검지로 콧등에 걸린 선글라스를 아래로 내렸다. 그는 미간을 찌푸리고 강한서가 있는 쪽을 바라봤다. “쟨 차에서 뭐하는 거야?”“업무 통화 중이예요.”송민준이 한현진의 가방을 어깨에 걸치고 한현진을 잡아당기며 말했다. “가자. 우린 먼저 올라가는 게 좋겠어. 혼자 미적거리라고 해.”룸에 도착하자 송민준은 그제야 물었다. “너희 두 사람, 대체 무슨 중요한 얘기를 하려고 이렇
한현진이 장난기 가득한 말투로 말했다. 강한서가 씩 웃으며 대답했다. “마음 약해질 줄 알았는데, 내가 괜한 걱정을 했나 봐.”한현진이 말했다. “처음엔 마음이 약해졌는데 조금 전 불쾌한 일이 있었거든.”한현진은 간단하게 주혁이 무릎 꿇은 일을 서술했다. “난 사실 그렇게까지 화가 난 건 아니었어. 하지만 꿇어앉아 있는 기사님 모습을 본 순간 화가 치밀더라고. 그렇게 많은 사람이 보는 앞에서 그러니까 날 강박하는 것 같았거든. 그래서 그 기회를 빌려 바로 전근시켰어.”한현진이 한숨을 내쉬었다. “사실 오는 길에 계속 마음이 불편했어. 내가 너무 극단적으로 처리한 건 아닌가 싶었거든. 기사님은 지금 아들에게 인공 달팽이관을 해줄 돈이 부족한 상황이거든. 전근하면 월급은 당연히 전보다 줄어들 텐데.”강한서가 한현진의 손등을 토닥였다.“인공 달팽이관은 보청기와 비슷한 거야. 생명과 직결된 문제도 아니니 돈이 부족하다고 해도 당장 급할 건 없어. 하지만 굳이 너를 속여 가며 부업을 하려고 했어. 난 그 부분이 도무지 이해가 되질 않아.”멈칫한 한현진이 나지막이 물었다. “기사님이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거야?”강한서가 고개를 가로 저었다. “그건 모르지. 하지만 시도 때도 없이 무릎을 꿇고 자존심 따위는 쉽게 버릴 수 있는 사람이라면 그 사람이 원하는 건 자신의 존엄보다 훨씬 더 소중한 걸 거야. 전근이 제일 좋은 선택이었어. 네가 그 사람을 곁에 두는 건 내가 불안해.”강한서는 한현진의 손을 잡으며 나긋한 목소리로 말했다. “마음 약해지지 마. 네가 마음 약해질 때마다 난 심장이 떨려.”“휴. 신세를 지기도 했고 기사님 집에는 장애인이 두 명이나 있잖아. 안타까워서 그러지. 내가 언제 다른 사람에게 마음이 약해지는거 봤어? 난 아주 독한 사람이라고.”강한서는 곧바로 태클을 걸었다. “강운이에겐 마음 약하게 굴었잖아.”지나간 이야기를 꺼내려는 강한서의 태도에 한현진이 얼른 입을 열었다. “그건 내가 불쌍해 보이는 주 변호사님 외모
한현진이 민경하를 살펴보았다. “그래 보이지는 않는데. 얼마 전 야근 때문에 피곤해서 그런 거 아냐? 신제품 발표회도 마무리 됐으니 이젠 좀 쉬게 해줘야지. 민 실장님이 쓰러지면 나중에 너만 고생할 거야.”강한서가 한현진에게 텀블러를 건넸다. “내가 부하 직원 생사도 나 몰라라 하는 그런 대표 같아? 민 실장이 쉬고 싶다고 하면 언제든지 휴가 줄 거야.”그 말에 민경하가 재빨리 대답했다. “괜찮아요, 사모님. 저 건강해요. 휴가 필요 없어요.”만약 평소였다면 휴가를 주겠다는 강한서의 말에 당연히 쉬겠다고 대답했을 것이다. 하지만 조금 전 그 상황을 겪고 나니 지금의 민경하는 감히 그럴 수가 없었다. 오늘 민경하가 강민서와 밤낚시를 약속했다는 것을 알게 된 강한서는 한현진과 통화할 때까지만 해도 그리 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전화를 끊고 얼마나 갔을까, 강한서가 입을 열었다. “밤낚시... 몇 명이 가는 거예요?”민경하가 말했다. “밤낚시 모임이 있어요. 아마 20명 정도 있을 거예요. 다들 스케줄에 따라 다르겠지만 많을 땐 8명에서 10명 정도 모여요. 적을 땐 4, 5명이 만날 때도 있고요.”“그래요.”단답으로 대답한 강한서는 또 얼마 지나지 않아 민경하에게 물었다. “밤새 낚시하면 피고하지 않아요?”민경하가 말했다. “텐트가 있어서 피곤하면 들어가서 쉬면 돼요.”강한서가 또 다시 “그래요”라며 단답으로 대답했다. 하지만 얼마 못 가 그가 또 물었다. “두 사람... 같은 텐트에서 자요?”“...”그 질문에 민경하는 바짝 긴장했다. 어쩐지 그 어떤 대답도 목숨을 걸기에 충분한 것 같았다. “4, 5명이면 텐트 2개를 사용해요. 피곤한 사람끼리 돌아가면서 쉬고요.”강한서는 더는 말이 없었다. 5분 후. “두 사람 같이 쉰 적 있어요?”“...”‘같이 잤냐고 묻는 일만 남았네.’민경하가 식은땀을 삐질 흘렸다. “누워서 얘기만 좀 나눴어요.”“그래요.”10분 후. “얘기만 조금 나눈게 전부예요?”민
남자는 들고 있던 담배를 다 태울 때까지 아무 말이 없었다. 서해금이 또 말을 이었다. “당신이 뿌리를 제대로 뽑지 못해 이렇게 큰 후환을 남기지만 않았다면 우리 가람이 처지도 지금처럼 어렵진 않았을 거야.”서해금이 말한 후환은 당연히 한현진을 가리키는 것이었다. 한현진 말이 나오자 남자의 얼굴이 저도 모르게 어두워졌다.그 여자 아이가 죽지 않았다는 일은 그 역시도 송씨 가문에서 한현진을 데려오기 얼마 전에야 알게 되었다.당시 그 여자가 품에 안아 보여주던 여자 아이는 애초부터 송씨 가문의 딸이 아니었다. 그 여자는 다른 곳에서 죽은 아이를 안아와 한아람의 딸이라고 그를 속였던 것이다.친딸이 태어나는 모습도 두 눈으로 직접 보지 못한 그는 곧 자신의 친딸에게 인생을 빼앗길 아이를 마주했다. 그 이루 말할 수 없는 죄책감에 그는 심지어 아이를 똑바로 쳐다볼 수도 없었다. 그는 그저 아이의 죽음을 확인하기만 하면 목적을 달성했다고 생각했다. 포섭당한 사람 중 누군가가 마음이 약해졌다는 사실도 모른 채 말이다. 한현진이 죽지 않았으니 송씨 가문이나 한씨 가문에서는 기필코 당시 분만실에서 있었던 일을 밝히려고 할 것이 분명했다. 다행히 서해금은 일처리를 함에 있어서 화근을 남기지 않는 스타일이었다. 당시 그 일에 연루되어 있는 사람들은 이미 전부 죽거나 도망간 상태였기에 아무리 쥐 잡듯이 뒤져도 그 해의 진실은 알아내 수 없을 것이었다. “내가 뭐 도와줄까?”남자가 나지막이 물었다. “아니.”서해금이 담담한 말투로 말했다. “한현진은 그렇게 멍청하지 않아. 쓸데없는 짓해서 괜한 의심 사지 마. 걔는 걔 엄마랑 똑같아. 의리가 치명적인 약점이거든. 잠깐만 조용히 지내.”잠시 멈칫하던 서해금이 말을 이었다. “앞으로 내 지시 없이 함부로 회사에 나타나지 마. 회사는 여기저기 보는 눈이 많아. 조그만 실수라도 있었다간 우리 가족 전부 끝장이라고.”우리 가족이라는 두 단어에 남자는 그만 멍해졌다. 그의 눈빛이 미래에 대한 희망으로 반짝였다. 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