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민서가 가져온 보고서를 보던 민경하가 웃으며 말했다. “대표님께서는 일하실 때는 완전이 몰두하시는 편이시라 시간을 자주 깜빡하시거든요. 어떨 땐 일부러 그렇게 늦게까지 일하시는 거 아니세요.”“약속 있으면 먼저 가요. 제가 나중에 대표님께 말씀드릴게요.”강민서가 입을 삐죽였다. “다들 퇴근 안 했는데 저만 가면 눈에 띄잖아요. 나중에 또 뭐라고 할 거예요. 그리고 오늘 할머니께서 저랑 같이 본가에 저녁 먹으러 오라고 했던 거 잊었어요?”까맣게 잊고 있었던 듯 민경하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안 가면 안 돼요?”민경하는 선뜻 강민서의 본가로 가기가 꺼려졌다. 워낙 꿍꿍이가 많은 어르신이라 밥 한 끼를 먹는 것도 신경을 바짝 곤두세워야 했다. “안 가도 되죠. 직접 안 갈 거라고 말씀드려요.”강민서의 말에 민경하는 입을 꾹 닫았다. 물을 마시고 있는 강민서를 힐끔 쳐다보던 민경하가 갑자기 입을 열었다. “민서 씨가 회장님께 저와 데이트 할 거라고 말씀드려요. 단둘이 있고 싶다고요.”입안에 머금었던 물을 뿜은 강민서는 사레가 들려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누가 실장님과 단둘이 있고 싶대요. 그렇게 말하고 싶으면 본인이 직접 해요. 그런 말은 전 창피해서 못 해요.”“그래요. 제가 말씀드릴게요.”민경하는 대답 하며 서류를 내려놓았다. 휴대폰을 꺼내 정인월에게 전화했다. 강민서는 귀를 쫑긋 세우고 민경하가 어떻게 정인월의 말을 거역하는지 들어볼 생각이었다. 통화가 연결되자마자 민경하가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회장님, 오늘 저희 둘 본가로 안 가도 될까요? 일이 있는 건 아니고 오늘 저녁에 연등 축제 있잖아요? 민서 씨가 저랑 같이 가보고 싶다고 해서요...”강민서의 얼굴이 순간 어두워졌다. ‘실장님이 전화 드리라고 했더니 내 탓으로 돌려?’강민서가 막 화를 내려는데 민경하가 초콜릿 하나를 집어 강민서의 입에 넣어주더니 웃으며 수화기 너머의 정인월에게 말했다. “네, 알겠어요. 민서 씨에게 사진 많이 찍어서 회장님께 보내드리
민경하가 물 만난 물고기처럼 강한서의 비서 실장이라는 위치를 유지할 수 있었던 건 그저 우연이 아니었다. 일반적으로 아부는 대표의 취향에 따르는 것이 다반사였다. 그러니 민경하 역시 강한서가 좋아하는 것을 잘 이용했다. 다만 민경하의 상사가 제일 좋아하는 것이 사모님이었을 따름이었다. 서둘러 집으로 돌아간 강한서는 도착하자마자 짐을 정리하고 있는 한현진을 볼 수 있었다. 멈칫하던 강한서가 물었다. “나가려고?”한현진이 짐을 정리하던 손을 멈추지 않고 대답했다. “전에 사고 났을 때 내가 유호촌에 있는 절에서 널 위해 소원을 빌었던 적이 있거든. 이젠 네가 건강도 회복했으니 감사의 의미로 예참을 드리고 오려고.”한현진의 말에 강한서가 잠시 멍해졌다. “왜 갑자기 지금 예참을 드리러 가는 거야?”“내가 잊고 있었는데, 민 실장님께서 귀띔해 주셨어. 네가 돌아온 지도 시간이 꽤 지났고 내 소원도 이루어졌으니 나도 그때 했던 약속을 지켜야지. 공양도 좀 올리고.”‘민 실장... 아주 얍삽한 놈이었네.’‘현진이가 다급하게 전화해서 돌아오라길래 무슨 급한 일이라도 있는 줄 알았더니...’민경하의 조언이었다는 말에 강한서는 순간 모든 것이 이해되었다. ‘날 회사에서 내보내고 일찍 퇴근해서 명절을 보내려고 그런 거였네.’입술을 앙다물었던 강한서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 절 말이야. 주강운이 널 위해 평안을 비는 부적을 받아 온 곳이지.”그 말에 어리둥절해졌던 한현진이 말했다. “네가 말하니까 생각났네. 주 변호사님이 나에게 준 부적은? 전에 네가 정장 주머니에 넣었었잖아. 집에 돌아와서도 돌려주지 않았어.”“...”‘쓸데없이 그 얘기를 꺼내는 게 아니었어!’“부적은?”한현진이 손을 내밀었다.강한서가 시선을 돌리며 말했다. “몰라. 아마 계속 그 주머니에 있을 거야. 안 건드렸거든.”의심하는 눈초리로 강한서를 한참 쳐다보던 한현진이 입을 열었다. “내가 찾아볼게.”말하며 몸을 일으킨 한현진이 드레스룸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
한현진의 말에 강한서가 침묵했다. “설마 제가 일부러 그랬다고 생각하는 거야?”한현진이 일부러 한숨을 쉬며 말했다. “난 혹시나 네가 내키지 않으면 타이밍을 봐서 주 변호사님께 돌려드리려고 했는데, 이제 보니 넌 그다지 신경—”“일부러 그런 거야!”얼른 말을 바꾼 강한서가 어두운 얼굴로 말했다. “날 앞에 두고 현진 씨에게 부적을 건네다니, 걔는 네 첫사랑과 다를 바 없는 놈이야. 그 두 사람 모두 그저 그런 인간이야.”‘한 명은 내 앞에서 선물을 주고 또 한 명은 고백까지 했어. 이놈이나 저놈이나 양심 없는 것들!’한현진이 피식 웃음을 흘렸다. “사실 나도 받을 생각 없었어. 그러게 누가 너더러 부적을 물에 떨어트리래? 내가 안 받으면 얼마나 뻘쭘하겠어.”한현진의 설명에 강한서는 말을 잇지 못했다. “왜 진작 얘기하지 않았어?”강한서가 조금은 후회 섞인 말투로 말했다. “내가 얘기할 기회도 없이 바로 툭, 물에 떨어트렸잖아. 그 타이밍에 내가 싫다고 하면 뭐가 되겠어?”‘그러니까 내가 부적을 받을 수밖에 없게 기회를 제공했다는 거야?’강한서는 짜증이 솟구쳤다. “그럼 주강운이 전에 줬던 목걸이는? 그땐 나도 그 자리에 없었잖아. 그건 왜 받은 거야? 전에도 줄곧 하고 있었잖아. 강아지 목줄처럼 생긴 걸 뭐가 이쁘다고.”그의 말에 한현진의 눈가가 파르르 뛰었다. “강아지 목줄이 맞긴 하지. 펜던트 안엔 사진도 있어. 엄청 멋있는데, 볼래?”한현진의 말에 강한서는 심장을 부여잡고 싶어졌다. “내가 없는 동안 주강운과 강아지까지 키웠어? 검둥이를 만지는 거로는 부족했어?”한현진이 서랍을 열어 안에 넣은 목걸이를 꺼내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검둥이도 좋긴 하지만 내가 키우지 않아서 나와는 안 친하잖아. 난 그래도 내가 직접 기른 게 좋아. 다른 사람에겐 으르렁대고 나만 좋아하는 그런 거.”강한서가 냉소 지었다. “고작 1달을 돌아오지 않았을 뿐이야. 한 달 사이 강아지가 완전히 주인으로 인정하게 하려고 하다니... 널 이용
강한서의 모습에 한현진은 웃음이 났다. “무거워서 아마 안 내려갈걸?”강한서가 바득 이를 갈았다. “일부러 나 신경 쓰이라고 침대맡에 목걸이를 둔 네가 할 얘기는 아닌 것 같은데.”한현진은 오히려 당당한 태도로 고개를 끄덕이며 씩 미소 지었다. “네가 언제까지 아닌 척할 수 있는지 지켜볼 거야.”“...”강한서는 화난 척 입을 열었다. “선 좀 지켜. 주강운에게 대체 선물을 얼마나 받는 거야?”“선물 받은 적 몇 번 없어. 목걸이 하나에 부적이 전부야.”화난 척하던 강한서가 진심으로 화를 냈다. “휴대폰은 먹어버렸나 봐?”“...”한현진은 머쓱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너무 오래전 일이라 깜빡했어.”그녀가 곧이어 변명을 늘어놓았다.“그리고 나 그때 공짜로 받은 거 아니야. 넥타이로 보답했거든. 139만 원이나 썼다고. 아무리 생각해도 내가 밑진 것 같아. 그 휴대폰은 그 정도 가격은 아니었는데.”강한서가 무표정한 얼굴로 대답했다. “141만 원이었어. 2만 원 적게 계산했잖아.”멈칫하던 한현진은 순간 양말 한 쌍을 떠올리고는 참지 못하고 말을 내뱉었다. “2만 원짜리 양말을 대체 언제까지 마음에 담아둘 생각이야?”강한서가 바득 이를 갈았다. “평생 기억할 거야.”말하며 고개를 돌려 한현진을 노려보았다. “너 또 나 몰래 주강운에게 다른 거 받은 거 있어?”“없어. 가만히 있다가 내가 뭘 받—”말을 잇던 한현진이 갑자기 멈칫하며 입을 닫았다. “추석 전에, 주 변호사님께서 나한테 송편을 보낸 적이 있어.”강한서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정말 받은 적이 있다고?”한현진이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지난 추석에 다윈 송편을 두 박스 보냈는데 미소가 좋아해서 받았어.”강한서의 말에 대답하며 순간 송편 선물 상자에 따라온 토끼 키링을 떠올렸다. 하는 차미주가 가져갔고 다른 하나는 한현진이 자주 들고 다니던 가방에 달았었다. 납치 사건 후 경찰 측에서 그녀에게 개인 소지품을 가져가라고 했을 당시 가방에 달렸던
강한서가 한현진을 힐끗 쳐다보았다. “갖고 싶은 사진 있으면 내가 인쇄해 줄게. 그리고 20살 때 내가 뭐 볼 게 있다고 그러는 거야. 머리에 피도 안 마른 애송이일 뿐이야.”“아니거든. 내 눈엔 멋있어 보여.”한현진이 눈을 예쁘게 휘며 아부를 떨었다. “지금보다 훨씬 멋져. 완전 네 미모의 전성기라니까. 넌 안 그렇게 생각해?”강한서는 한현진의 그 말에 기분이 좋아진 것이 분명해 보였다. 저도 모르게 입꼬리를 올린 강한서가 덤덤하게 말했다. “난 그래도 지금의 내가 더 좋아.”지금보다 더 어렸을 적 강한서의 준수한 미모는 회사에서는 그리 좋은 조건이 아니었다. 아무리 제일 선진적인 기술과 혁신적인 아이디어를 갖고 있다고 하더라도 얼굴 반반하고 소년미 가득한 남자아이의 외적인 모습으로는 사람들에게 신뢰감을 주기 어려웠다. 꽤 긴 시간 동안 줄곧 헬스를 해온 그 습관은 운동을 좋아해서가 아니라 건장한 체격과 이미지를 갖추어 소년다운 모습을 조금이라도 일찍 벗어나기 위한 그의 노력이었을 뿐이었다. 비록 지금도 여전히 똑같은 미모를 유지하고 있지만 덩치에서 오는 카리스마와 수년간 비즈니스로 다져진 경험에서 나오는 아우라로 인해 아무도 강한서를 감히 함부로 대하지 못했다. 20살의 강한서는 준수했고 30살의 강한서는 성숙한 남자의 매력이 더해졌다. 20살의 그는 어린 여자들의 관심을 끌었고 30살의 그는 한현진과 같은 새댁들의 관심 대상이었다. 한현진은 참지 못하고 강한서를 끌어안은 채 입을 맞추었다. “얼른 짐 정리 해. 늦으면 유호촌으로 가는 막차를 놓치게 될 거야. 거긴 길이 안 좋아서 운전해서 가면 더 불편하거든.”한현진이 말하며 강한서를 잡고 있던 손을 놓으려는데 그가 다시 그녀의 손을 잡아당겼다. “예참을 드리는 건 조금 더 나중에 가. 지금 이 시간엔 기도를 올리러 가는 사람들도 많아서 복닥거릴 텐데 지나다니다 만약 너한테 부딪히기라도 하면 어떡해? 그리고 길도 험한데 임산부한테 안 좋아.”강한서의 말에 한현진은 순간 머뭇거렸다
주씨 가문의 가족 모임은 언제나 주시윤이 중심이었다. 멀리서 온 시동생이든, 아니면 줄곧 주진철을 보살펴 온 막내 아들 가족이든 모두 주진철의 총애는 받지 못했다. 그건 주진철이 남자보다 여자를 귀히 여겨서는 아니었다. 주시윤을 편애하는 것은 단지 그녀가 주진철에게 버려졌던 그의 첫사랑과 닮아서였기 때문이었다. 명문가의 도련님인 그는 어떤 여자든지 연애는 할 수 있었지만 결혼은 집안이 맞는 여자로 선택해야 했다. 주강운의 할머니가 바로 그 집안이 맞는 여자였던 것이다. 그리고 주진철에게 버려진 그의 첫사랑은 주진철의 결혼식 날 강에 투신했다는 소문도 있었고 목공과 결혼해 남강으로 이사를 갔다는 소문이 돌기도 했다. 어쨌든 그 첫사랑은 다시는 나타나지 않았었다. 바람둥이였던 명문가 도련님은 결혼 후 아내를 존중하고 그녀를 깍듯이 대하며 살아왔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주강운의 할머니는 몸이 좋지 않아 네 번의 임신을 했지만 유산만 세 번을 했었다. 유일하게 살아남은 아들은 지적 장애가 있는 장애인이었고 주씨 가문의 어른들은 계속 그 아이를 족보에 넣는 것을 반대했다. 그리고 아이가 3살이 되던 해, 주진철은 밖에서 아들과 나이가 비슷한 또래의 아이를 데려왔다. 그 아이는 친아들의 이름으로 주씨 가문의 족보에 들어가 가족의 인정을 받을 수 있었다. 그 아이가 바로 주강운의 큰아버지였다. 그리고 마침 그때가 주강운의 할머니의 본가가 쇠퇴하고 있던 상황이라 그녀는 주씨 가문의 집안일을 신경 쓸 겨를이 도무지 없었다. 그러니 그녀는 어쩔 수 없이 그 모욕을 견뎌야만 했다. 처음이 있으니 두 번째가 있고 또 세 번째가 있었다. 둘째 삼촌과 아버지, 그리고 작은고모 주시윤까지 큰아버지를 데려온 후 몇 년 사이 하나둘 주씨 가문에 이름을 올렸다. 대외적으로 주진철은 슬하에 아들 셋에 딸 하나를 둔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그 네 명의 아이 모두 주강운의 할머니의 친자식이 아니라는 사실은 알지 못했다. 심지어 그녀의 유일한 아들의 존재조차도 모르고 있었다.
‘재밌네.'주강운은 생각하며 피식, 웃음을 흘렸다.고개를 들다 마침 주강운의 그 웃음을 본 주시윤이 갑자기 입을 열었다. "강운아. 너 요즘 양진환 대표님 따님과 가깝게 지낸다며. 둘이 사귀는 거야?"양진환이라는 이름에 주진철이 미간을 찌푸렸다. “그 일자무식의 벼락부자를 말하는 거니?”안 그래도 주름 가득한 얼굴에 미간까지 찌푸리자 야박한 이미지만 더 진해졌다. 주강운이 덤덤한 말투로 대답했다. “양 대표님은 그저 가방끈이 짧으신 것뿐이에요. 비전과 아이디어는 누구보다 뛰어나신 분이에요. 아니면 어떻게 에너지 산업의 리더가 되셨겠어요.”그의 말에 주진철이 코웃음 쳤다. “타이밍만 잘 맞으면 아무리 멍청한 놈도 돈은 벌 수 있어.”그러나 주강운은 주진철의 말에 오히려 피식 웃음을 흘렸다. “에너지 산업을 지원할 거라는 소식은 고모께서도 제일 먼저 알게 된 사람 중 한 분이시잖아요. 고모께서 그 타이밍을 놓치신 건 에너지 산업이 마음에 들지 않으셨기 때문인가요?”주씨 가문의 뿌리는 여기저기 뻗쳐 복잡하게 얽혀 똘똘 뭉쳐있었다. 그러니 위에서 어떤 산업에 전폭적인 지원을 할 거라는 소식이 있다면 그들이 제일 먼저 알게 될 것이었다. 에너지 산업은 주시윤이 타이밍을 놓친 것이 아니라 당시의 주시윤이 그 산업의 가치를 무시한 탓이었다. 그녀가 그 산업의 가치를 알게 되었을 때는 투자를 하기엔 이미 최적의 시기를 놓친 후였다. 주시윤과 그녀의 파트너는 에너지 산업에 꽤 큰 손실을 보았었다. 다행히도 다른 프로젝트가 성공한 덕에 그 구멍을 메꿀 수 있었고 그 덕에 엉망진창까지는 되지 않을 수 있었다. 그러니 주강운의 말은 주시윤의 상처를 들추는 것과 다를 바가 없었다. 주시윤의 표정이 바로 일그러졌다. 그녀와 달리 주진철은 참지 않고 주강운을 향해 분노를 표현했다. 그는 손을 뻗어 옆에 있던 컵을 들어 그대로 주강운에게 던져버렸다. 주강운은 날아오는 컵을 피하지 않았고 주진철이 던진 컵은 그대로 주강운의 이마에 부딪혔다. 그의 이마는 바로 빨
“23번 유현진 씨, 가족분께 연락하셨나요?“이제 간호사가 몇 번째로 유현진을 재촉하는지 알 수 없었다. 그녀는 고개를 숙여 휴대폰을 흘긋 확인해보았으나 강한서에게 건 전화는 여전히 응답이 없는 상태였다.한주시 북부 환형 육교에서 연속 차량 충돌 사고가 발생하며 버스 한 대가 옆으로 기울다 강에 빠져버렸다. 그로 인해 수십 명의 부상자가 병원으로 이송되었고 그들의 가족들이 하나둘씩 병원에 도착했지만 오직 그녀의 남편은 늦도록 연락되지 않았다.처참했던 사고 현장이 여전히 눈앞에서 어른거렸다. 사고 당시 느꼈던 공포보다 이 순간 밀려오는 서운함에 마음이 더 아팠다.“유현진 씨?”간호사의 부름에 유현진이 번뜩 정신을 차렸다. 그녀의 셔츠는 핏자국으로 얼룩져 있었는데 그 덕분에 새하얀 얼굴이 더 창백해 보였다. 그녀는 목소리가 갈라지고 몰골이 처참했으나 여전히 품위 있게 대답했다.“죄송합니다. 연락되지 않는 것을 보니 지금 좀 바쁜 것 같아요. 제가 직접 사인해도 될까요?”“안타깝지만 그럴 수 없어요. 만약 가족분께서 사인할 수 없다면 병원에 남아 좀 더 지켜봐야 할 거예요. 뇌진탕은 빠른 진단을 내릴 수 없으니까요. 병원에선 당신의 생명과 안전을 책임져야 해요.”유현진은 입술을 꾹 닫고 망설이다가 고개를 들었다. “그럼 제가 다시 전화를 걸어 볼게요.”그녀는 휴대폰을 들고 병실 밖으로 나왔다. 의료 기기를 담은 플라스틱 카트를 들고 지나가던 두 간호사를 만나자 그녀가 몸을 살짝 움직여 길을 비켜줬다. 그때, 간호사 중 한 명이 말했다.“16번 환자, 누군지 알아요?““아뇨. 누구죠?““송민영 몰라요? 엄청나게 유명해요! 얼마 전에 찍은 핫한 드라마 ’비밀의 연인‘에서 여주인공 역할을 맡은 분이에요.““저런! 그분, 많이 다치셨어요?““조금 늦게 오셨어요. 그리고 팔에 스친 상처가 있긴 한데 그때 이미 약간 아문 상태였어요. 하지만 연예인들 얼굴이 간판이잖아요. 당연히 우리 같은 일반인과 비길 수 없죠. 내가 만약 송민영과 같은 얼굴과 몸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