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현진의 말에 강한서가 침묵했다. “설마 제가 일부러 그랬다고 생각하는 거야?”한현진이 일부러 한숨을 쉬며 말했다. “난 혹시나 네가 내키지 않으면 타이밍을 봐서 주 변호사님께 돌려드리려고 했는데, 이제 보니 넌 그다지 신경—”“일부러 그런 거야!”얼른 말을 바꾼 강한서가 어두운 얼굴로 말했다. “날 앞에 두고 현진 씨에게 부적을 건네다니, 걔는 네 첫사랑과 다를 바 없는 놈이야. 그 두 사람 모두 그저 그런 인간이야.”‘한 명은 내 앞에서 선물을 주고 또 한 명은 고백까지 했어. 이놈이나 저놈이나 양심 없는 것들!’한현진이 피식 웃음을 흘렸다. “사실 나도 받을 생각 없었어. 그러게 누가 너더러 부적을 물에 떨어트리래? 내가 안 받으면 얼마나 뻘쭘하겠어.”한현진의 설명에 강한서는 말을 잇지 못했다. “왜 진작 얘기하지 않았어?”강한서가 조금은 후회 섞인 말투로 말했다. “내가 얘기할 기회도 없이 바로 툭, 물에 떨어트렸잖아. 그 타이밍에 내가 싫다고 하면 뭐가 되겠어?”‘그러니까 내가 부적을 받을 수밖에 없게 기회를 제공했다는 거야?’강한서는 짜증이 솟구쳤다. “그럼 주강운이 전에 줬던 목걸이는? 그땐 나도 그 자리에 없었잖아. 그건 왜 받은 거야? 전에도 줄곧 하고 있었잖아. 강아지 목줄처럼 생긴 걸 뭐가 이쁘다고.”그의 말에 한현진의 눈가가 파르르 뛰었다. “강아지 목줄이 맞긴 하지. 펜던트 안엔 사진도 있어. 엄청 멋있는데, 볼래?”한현진의 말에 강한서는 심장을 부여잡고 싶어졌다. “내가 없는 동안 주강운과 강아지까지 키웠어? 검둥이를 만지는 거로는 부족했어?”한현진이 서랍을 열어 안에 넣은 목걸이를 꺼내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검둥이도 좋긴 하지만 내가 키우지 않아서 나와는 안 친하잖아. 난 그래도 내가 직접 기른 게 좋아. 다른 사람에겐 으르렁대고 나만 좋아하는 그런 거.”강한서가 냉소 지었다. “고작 1달을 돌아오지 않았을 뿐이야. 한 달 사이 강아지가 완전히 주인으로 인정하게 하려고 하다니... 널 이용
강한서의 모습에 한현진은 웃음이 났다. “무거워서 아마 안 내려갈걸?”강한서가 바득 이를 갈았다. “일부러 나 신경 쓰이라고 침대맡에 목걸이를 둔 네가 할 얘기는 아닌 것 같은데.”한현진은 오히려 당당한 태도로 고개를 끄덕이며 씩 미소 지었다. “네가 언제까지 아닌 척할 수 있는지 지켜볼 거야.”“...”강한서는 화난 척 입을 열었다. “선 좀 지켜. 주강운에게 대체 선물을 얼마나 받는 거야?”“선물 받은 적 몇 번 없어. 목걸이 하나에 부적이 전부야.”화난 척하던 강한서가 진심으로 화를 냈다. “휴대폰은 먹어버렸나 봐?”“...”한현진은 머쓱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너무 오래전 일이라 깜빡했어.”그녀가 곧이어 변명을 늘어놓았다.“그리고 나 그때 공짜로 받은 거 아니야. 넥타이로 보답했거든. 139만 원이나 썼다고. 아무리 생각해도 내가 밑진 것 같아. 그 휴대폰은 그 정도 가격은 아니었는데.”강한서가 무표정한 얼굴로 대답했다. “141만 원이었어. 2만 원 적게 계산했잖아.”멈칫하던 한현진은 순간 양말 한 쌍을 떠올리고는 참지 못하고 말을 내뱉었다. “2만 원짜리 양말을 대체 언제까지 마음에 담아둘 생각이야?”강한서가 바득 이를 갈았다. “평생 기억할 거야.”말하며 고개를 돌려 한현진을 노려보았다. “너 또 나 몰래 주강운에게 다른 거 받은 거 있어?”“없어. 가만히 있다가 내가 뭘 받—”말을 잇던 한현진이 갑자기 멈칫하며 입을 닫았다. “추석 전에, 주 변호사님께서 나한테 송편을 보낸 적이 있어.”강한서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정말 받은 적이 있다고?”한현진이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지난 추석에 다윈 송편을 두 박스 보냈는데 미소가 좋아해서 받았어.”강한서의 말에 대답하며 순간 송편 선물 상자에 따라온 토끼 키링을 떠올렸다. 하는 차미주가 가져갔고 다른 하나는 한현진이 자주 들고 다니던 가방에 달았었다. 납치 사건 후 경찰 측에서 그녀에게 개인 소지품을 가져가라고 했을 당시 가방에 달렸던
강한서가 한현진을 힐끗 쳐다보았다. “갖고 싶은 사진 있으면 내가 인쇄해 줄게. 그리고 20살 때 내가 뭐 볼 게 있다고 그러는 거야. 머리에 피도 안 마른 애송이일 뿐이야.”“아니거든. 내 눈엔 멋있어 보여.”한현진이 눈을 예쁘게 휘며 아부를 떨었다. “지금보다 훨씬 멋져. 완전 네 미모의 전성기라니까. 넌 안 그렇게 생각해?”강한서는 한현진의 그 말에 기분이 좋아진 것이 분명해 보였다. 저도 모르게 입꼬리를 올린 강한서가 덤덤하게 말했다. “난 그래도 지금의 내가 더 좋아.”지금보다 더 어렸을 적 강한서의 준수한 미모는 회사에서는 그리 좋은 조건이 아니었다. 아무리 제일 선진적인 기술과 혁신적인 아이디어를 갖고 있다고 하더라도 얼굴 반반하고 소년미 가득한 남자아이의 외적인 모습으로는 사람들에게 신뢰감을 주기 어려웠다. 꽤 긴 시간 동안 줄곧 헬스를 해온 그 습관은 운동을 좋아해서가 아니라 건장한 체격과 이미지를 갖추어 소년다운 모습을 조금이라도 일찍 벗어나기 위한 그의 노력이었을 뿐이었다. 비록 지금도 여전히 똑같은 미모를 유지하고 있지만 덩치에서 오는 카리스마와 수년간 비즈니스로 다져진 경험에서 나오는 아우라로 인해 아무도 강한서를 감히 함부로 대하지 못했다. 20살의 강한서는 준수했고 30살의 강한서는 성숙한 남자의 매력이 더해졌다. 20살의 그는 어린 여자들의 관심을 끌었고 30살의 그는 한현진과 같은 새댁들의 관심 대상이었다. 한현진은 참지 못하고 강한서를 끌어안은 채 입을 맞추었다. “얼른 짐 정리 해. 늦으면 유호촌으로 가는 막차를 놓치게 될 거야. 거긴 길이 안 좋아서 운전해서 가면 더 불편하거든.”한현진이 말하며 강한서를 잡고 있던 손을 놓으려는데 그가 다시 그녀의 손을 잡아당겼다. “예참을 드리는 건 조금 더 나중에 가. 지금 이 시간엔 기도를 올리러 가는 사람들도 많아서 복닥거릴 텐데 지나다니다 만약 너한테 부딪히기라도 하면 어떡해? 그리고 길도 험한데 임산부한테 안 좋아.”강한서의 말에 한현진은 순간 머뭇거렸다
주씨 가문의 가족 모임은 언제나 주시윤이 중심이었다. 멀리서 온 시동생이든, 아니면 줄곧 주진철을 보살펴 온 막내 아들 가족이든 모두 주진철의 총애는 받지 못했다. 그건 주진철이 남자보다 여자를 귀히 여겨서는 아니었다. 주시윤을 편애하는 것은 단지 그녀가 주진철에게 버려졌던 그의 첫사랑과 닮아서였기 때문이었다. 명문가의 도련님인 그는 어떤 여자든지 연애는 할 수 있었지만 결혼은 집안이 맞는 여자로 선택해야 했다. 주강운의 할머니가 바로 그 집안이 맞는 여자였던 것이다. 그리고 주진철에게 버려진 그의 첫사랑은 주진철의 결혼식 날 강에 투신했다는 소문도 있었고 목공과 결혼해 남강으로 이사를 갔다는 소문이 돌기도 했다. 어쨌든 그 첫사랑은 다시는 나타나지 않았었다. 바람둥이였던 명문가 도련님은 결혼 후 아내를 존중하고 그녀를 깍듯이 대하며 살아왔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주강운의 할머니는 몸이 좋지 않아 네 번의 임신을 했지만 유산만 세 번을 했었다. 유일하게 살아남은 아들은 지적 장애가 있는 장애인이었고 주씨 가문의 어른들은 계속 그 아이를 족보에 넣는 것을 반대했다. 그리고 아이가 3살이 되던 해, 주진철은 밖에서 아들과 나이가 비슷한 또래의 아이를 데려왔다. 그 아이는 친아들의 이름으로 주씨 가문의 족보에 들어가 가족의 인정을 받을 수 있었다. 그 아이가 바로 주강운의 큰아버지였다. 그리고 마침 그때가 주강운의 할머니의 본가가 쇠퇴하고 있던 상황이라 그녀는 주씨 가문의 집안일을 신경 쓸 겨를이 도무지 없었다. 그러니 그녀는 어쩔 수 없이 그 모욕을 견뎌야만 했다. 처음이 있으니 두 번째가 있고 또 세 번째가 있었다. 둘째 삼촌과 아버지, 그리고 작은고모 주시윤까지 큰아버지를 데려온 후 몇 년 사이 하나둘 주씨 가문에 이름을 올렸다. 대외적으로 주진철은 슬하에 아들 셋에 딸 하나를 둔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그 네 명의 아이 모두 주강운의 할머니의 친자식이 아니라는 사실은 알지 못했다. 심지어 그녀의 유일한 아들의 존재조차도 모르고 있었다.
‘재밌네.'주강운은 생각하며 피식, 웃음을 흘렸다.고개를 들다 마침 주강운의 그 웃음을 본 주시윤이 갑자기 입을 열었다. "강운아. 너 요즘 양진환 대표님 따님과 가깝게 지낸다며. 둘이 사귀는 거야?"양진환이라는 이름에 주진철이 미간을 찌푸렸다. “그 일자무식의 벼락부자를 말하는 거니?”안 그래도 주름 가득한 얼굴에 미간까지 찌푸리자 야박한 이미지만 더 진해졌다. 주강운이 덤덤한 말투로 대답했다. “양 대표님은 그저 가방끈이 짧으신 것뿐이에요. 비전과 아이디어는 누구보다 뛰어나신 분이에요. 아니면 어떻게 에너지 산업의 리더가 되셨겠어요.”그의 말에 주진철이 코웃음 쳤다. “타이밍만 잘 맞으면 아무리 멍청한 놈도 돈은 벌 수 있어.”그러나 주강운은 주진철의 말에 오히려 피식 웃음을 흘렸다. “에너지 산업을 지원할 거라는 소식은 고모께서도 제일 먼저 알게 된 사람 중 한 분이시잖아요. 고모께서 그 타이밍을 놓치신 건 에너지 산업이 마음에 들지 않으셨기 때문인가요?”주씨 가문의 뿌리는 여기저기 뻗쳐 복잡하게 얽혀 똘똘 뭉쳐있었다. 그러니 위에서 어떤 산업에 전폭적인 지원을 할 거라는 소식이 있다면 그들이 제일 먼저 알게 될 것이었다. 에너지 산업은 주시윤이 타이밍을 놓친 것이 아니라 당시의 주시윤이 그 산업의 가치를 무시한 탓이었다. 그녀가 그 산업의 가치를 알게 되었을 때는 투자를 하기엔 이미 최적의 시기를 놓친 후였다. 주시윤과 그녀의 파트너는 에너지 산업에 꽤 큰 손실을 보았었다. 다행히도 다른 프로젝트가 성공한 덕에 그 구멍을 메꿀 수 있었고 그 덕에 엉망진창까지는 되지 않을 수 있었다. 그러니 주강운의 말은 주시윤의 상처를 들추는 것과 다를 바가 없었다. 주시윤의 표정이 바로 일그러졌다. 그녀와 달리 주진철은 참지 않고 주강운을 향해 분노를 표현했다. 그는 손을 뻗어 옆에 있던 컵을 들어 그대로 주강운에게 던져버렸다. 주강운은 날아오는 컵을 피하지 않았고 주진철이 던진 컵은 그대로 주강운의 이마에 부딪혔다. 그의 이마는 바로 빨
주강운은 말없이 주시윤 옆에 서서 계단 아래쪽을 내려다보았다. 그는 고개를 숙여 눈빛에 담긴 감정을 숨겼다. 그의 생각을 알아차릴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잠시 후 주강운이 입을 열었다. “담배 있어요?”주시윤이 담배와 라이터를 주강운에게 던져주었다. 첫 모금을 빨아들인 주강운이 참지 못하고 기침을 내뱉었다. 그런 주강운을 힐끔 쳐다본 주시윤이 덤덤하게 입을 열었다. “너 전엔 아버지 말씀이라면 전혀 거역하지 못하더니, 귀국 후엔 많이 변했네.”“그래요?”다시 담배를 한 모금 빤 주강운이 한참 후에야 입을 열었다. “제가 예전엔 어땠었는지 기억나지 않아요. 전 지금의 제 모습이 꽤 마음에 들거든요.”멈칫 행동을 멈춘 주시윤이 티 나지 않게 주강운의 표정을 살폈다. 담배 연기가 주강운의 얼굴을 감쌌다. 흐릿한 그 모습이 어쩐지 현실 같지가 않았다. 주시윤이 피식 웃더니 덤덤하게 말했다. “기억 못 하는 것도 나쁘진 않지.”담배 한 대를 다 태운 주강운이 내려가려고 하자 주시윤이 그를 불러세웠다. “강운아, 너 한현진 좋아하지.”움찔 몸을 굳힌 주강운이 고개를 돌려 주시윤을 쳐다보았다. 주시윤이 담배꽁초를 눌러 담배를 껐다. “네가 좋아하는 거면 고모가 도와줄게.”잠시 주시윤을 쳐다보던 주강운이 물었다. “어떻게 도와주실 건데요?”주시윤이 씩 웃더니 말했다. “남자와 여자의 사랑은 결국 소유욕인 거야. 한현진에게 약을 먹여 너와 이어지면 한서가 그래도 한현진을 만날 것 같아?”주강운도 주시윤을 따라 웃었다. 다만 그는 주시윤을 비웃고 있었다. 주시윤이 미간을 찌푸렸다. “왜 웃는 거니?”몸을 돌린 주강운이 하대하듯 주시윤을 빤히 내려다보았다. “그 나이를 먹고도 그런 말을 할 있다는 걸 웃는 거예요. 고모도 누군가에게 사랑받아 본 적 없으시죠?”주시윤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그녀의 말투마저도 차갑게 가라앉았다. “난 널 위해 방법을 생각해 준 건데, 넌 무슨 헛소리를 지껄이는 거야?”주강운이 냉담한 목소리로
주승윤이 말했다. “지금 올라가려고.”주강운의 어머니가 어이없다는 눈빛으로 주승윤을 쳐다보았다. “됐어요. 내가 가 볼게요. 당신은 주방에 가서 가족들 챙겨요. 술 많이 마시지 말고요.”주승윤이 알겠다며 대답했다. 주강운의 어머니가 약상자를 들고 주강운의 방으로 올라갔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주시윤이 갑자기 말했다. “형님은 여전히 현모양처시네요.”주승윤이 움찔 몸을 굳혔다. 그가 다시 고개를 들었을 땐 주시윤은 이미 주방으로 돌아간 후였다. 주방에선 인사치레를 건네는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하지만 주승윤은 서늘한 기운이 발바닥으로부터 천천히 손끝까지 전해지는 것 같았다. 그는 깊은숨을 들이쉬었다. 감정을 잘 추스르고 나서야 주시윤의 뒤를 따라 주방으로 들어갔다. 강한서와 한현진은 새벽이 되어서야 유호촌으로 향했다. 한현진은 어둠을 헤치며 강한서를 데리고 증조할아버지 댁으로 향했다. 두 사람이 아직 짐을 내려놓지도 못했는데 어디선가 갑자기 강아지 한 마리가 나타나 큰 소리로 짖어대며 강한서에게 달려들었다. 순간 강한서는 전에 없던 힘을 뿜어냈다. 그는 심지어 강아지를 똑바로 볼 새도 없이 한현진을 안아 들고 강아지를 피해 마당을 뛰어다녔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한현진은 어리둥절해졌다. 그녀는 강아지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강한서의 반응 때문에 깜짝 놀라고 말았다. 한현진은 행여나 강한서가 실수로 자기를 놓쳐 떨어뜨리기라도 할까 봐 강한서의 목을 꽉 끌어안았다. 꽤 큰 소란에 곧 주변 이웃이 모여들어 상황을 파악하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증조할아버지는 혼자 지내셨던 터라 주변 이웃들과 사이가 좋았다. 시끄러운 소리에 도둑이라도 든 줄 알았던 이웃들은 도구를 들고 문 앞에 나타났다. 하지만 마당의 불이 켜지고 조그만 강아지에게 쫓기며 마당을 뛰어다니는 강한서를 본 그들은 침묵에 빠졌다. ‘이거... 먼저 도둑을 잡아야 하나, 사람을 구해줘야 하나...?’옷을 입고 나온 증조할아버지 역시 마당에 펼쳐진 장면을 보고는 충격에 빠졌다.
이 마을에서만 수십 년을 살아온 이씨의 아내는 그동안 만나면 큰소리로 인사나 건네는 덩치 큰 무뢰한만 많이 봐왔었다. 이렇게 깔끔하게 정장을 차려입고 파리도 미끄러져 떨어질 것 같이 단정하게 머리를 빗어넘긴 엘리트는 몇 번 만나본 적이 없었다. 지난번에 만난 주강운도 바로 그런 사람이었다. 다만 주강운은 강한서보다는 조금 더 친근하게 느껴졌었다. 강한서는 너무 반듯하게 잘생긴 느낌이라 비록 미소를 띠고 있긴 하지만 그에게서 흐르는 타고난 귀티는 어쩐지 높으신 분이 시찰을 내려온 것만 같은 분위기가 흘렀다. 이씨의 아내는 순간 어쩌면 좋을지 몰라 당황하고 말았다. 그녀는 무의식적으로 손을 옷에 두어 번 문지른 후에야 강한서의 손을 맞잡았다. “강, 강, 강... 강 무슨 서라고.”강한서가 차분하게 대답했다. “강한서예요. 넓고 큰 모양 한, 상서 서를 쓰고 있어요.”고급스러운 소개에 멍해진 이씨의 아내가 말했다. “그럼 한서 씨라고 부를게요.”“...”그 모습을 본 한현진은 웃다가 숨이 넘어갈 지경이었다. 잔뜩 폼을 잡으며 소개했지만 상대방은 결국 두 글자만을 기억했다. 강한서의 입가에 걸린 미소가 굳어져 갔다. “한서라고 부르시면 돼요.”이씨의 아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애가 성격은 좋은 것 같은데 안 웃을 때면 사나워 보인단 말이야. 웃을 때면 잘 생기긴 했어.’게다가 강아지를 무서워하는 강한서의 모습은 187cm의 큰 키에도 불구하고 이씨 아내의 눈엔 그저 연약해 보이기만 했다. 강한서는 자신이 주강운보다 더 나은 사람이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먼저 이웃과 인사를 나누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의 사교성은 비즈니스를 하는 능구렁이들에겐 먹힐진 몰라도 목소리만 크고 다른 사람 얘기를 하기 좋아하는 완벽한 외향인 재질의 사람들을 당해내기엔 역부족이었다. 이씨가 말했다. “키도 크고 손발도 큰 것이 곡식 옮기는 건 엄청 잘 할 거야. 지난번에 온 강운이 녀석도 혼자서 두 포대씩 옮겼잖아.”그 말에 강한서의 눈가가 파르르 뛰었다.
한현진은 반나절이 걸려서야 일의 자초지종을 파악할 수 있었다. ‘어쩐지 지난번 홍혜림 씨 사건이 있었을 때 왜 진윤 씨가 갑자기 나타나 상황을 반전시키나 했더니, 이런 이유 때문이었다는 거잖아.’순간 한현진은 뻘쭘함에 어찌할 바를 몰랐다. 이럴 줄 알았다면 방금 전화를 받고 모르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을 때 입도 벙긋하지 말았어야 했다. 진윤의 말처럼 이건 정말 비열한 짓이었다. 유치한 강한서가 벌일 만한 일이 맞긴 한 것 같았다. 강한서 본인 역시 이번 일은 너무 얍삽했다고 생각한 것인지 어쩌다 아이를 달래주었다. “내가 제대로 설명하지 않은 탓이라고 해. [정상에서]에서 지금 자체 테스트 중인 스킨 한 세트 줄게. 어때?”진윤이 작게 울먹이며 말했다. “스킨 세 세트?“강한서는 어이없는 웃음을 터뜨렸다. 이 와중에 딜을 하는 걸 보니 그리 큰 상처를 받은 건 아닌 모양이었다. “세 세트 전부 줄게.”진윤이 곧바로 울음을 멈췄다. 절판되어 더는 살 수 없는 게임 스킨과 이미 다른 사람과 결혼한 여신 중 아무리 바보라도 그와 같은 선택을 할 것이다. “그래요. 제가 오해한 거라고 하죠.”말하며 한현진을 쳐다보던 진윤은 여전히 아쉬워하며 말했다. “현진 누나, 왜 이렇게 빨리 결혼하셨어요. 남자 때문에 손에 넣었던 트로피도 놓칠 수가 있어요.”강한서의 눈가가 파르르 뛰었다. “결혼이 커리어 영향주지 않아. 이간질 하려고 하지 마.”“형님은 남자니까 당연히 영향을 안 받으시겠죠.”강한서에게 농락을 당한데다 하루아침에 구닥다리에게 여신을 뺐긴 진윤은 누구보다 빨리 흑화 했다. “결혼하면 아이도 낳아야 하잖아요. 어떤 유명한 감독이 임산부를 캐스팅하려고 하겠어요. 제일 예쁠 나이를 남편과 아이에게 바치면 나중에 아이가 클 때쯤엔 본인의 레전드 시절은 이미 지났다고요. 제가 다 아쉬워서 그래요. 너무 불공평해요.”비록 진윤은 그저 이간질을 하기 위해 꺼낸 말이었지만 그 말은 현실이기도 했다. 임신과 출산은 여자의 커리어엔 고난과 역경이
한현진: ?강한서가 들고 있던 휴대폰 너머로 들려온 것은 차미주의 목소리였다. “현진아! 너 내연녀가 되어버렸어. 게다가 그 상대가 네 사촌 동생이래.”강한서: ?강한서는 어리둥절했다. 하지만 한현진은 그보다 더 혼란스러웠다. ‘전여친, 현여친이 뭐야? 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거야? 게다가 이 목소리, 왜 이렇게 귀에 익은 거지?’“저... 저기 혹시 전화 잘못 하신 거 아녜요?”한현진이 나지막이 물었다. 그러자 수화기 너머의 사람이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그리고 곳 충격이 가시지 않은 듯 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현, 현진 누나?”한현진이 멍해졌다. ‘날 알아?’“네. 제가 한현진이예요. 누구세요?”상대방은 말이 없었다. 그에게서는 그저 조금 흥분한 숨소리가 들려왔다. 강한서가 한현진의 손에서 휴대폰을 빼앗아 스피커폰으로 전환했다. “무슨 일이야?”진윤이 이를 악물었다. “방금 전화 받은 사람 누구예요!”강한서가 말했다. “내 와이프.”“그럴 리가 없어!”진윤이 바득 이를 갈았다. “이 사생팬 같은 아저씨가! 혹시 일부러 날 속이려고 옆에 성대모사하는 분이라고 모셔놓은 거 아녜요?”강한서가 태연하게 말했다. “내가 너처럼 유치한 인간인 줄 알아? 그리고 현진이는 아무도 대체할 수 없어.”진윤은 강한서의 말을 전혀 믿지 않았다. “거짓말 좀 그만 해요. 현진 누나는 지금 그 티베탄 마스티프와 데이트하는 중이라고요. 만약 누나가 정말 형님 와이프라면 형님이 이렇게 아무렇지 않게 누나가 딴 남자와 데이트하는 걸 지켜볼 수 있어요?”더 이상 진윤을 대꾸하기 귀찮았던 강한서가 그에게 영상통화를 보냈다. 몇뿐 후, 휴대폰 화면으로 자신이 그토록 좋아하던 여신과 딱 붙어 앉아있는 전남편 형님을 확인한 진윤은 순간 참지 못하고 눈물을 흘렸다. 한현진은 휴대폰에 비춰진 진윤을 보며 멍한 표정을 지었다. ‘진윤 씨가 강한서와는 어떻게 아는 사이인 거야?’진윤은 숨이 넘어갈 것처럼 울어댔다. “거짓말쟁이! 뻔뻔한 인간! 전
유난히 예쁘게 잘 나온 사진을 보며 한 현지는 신난 얼굴로 고개를 돌려 강한서에게 보여 주었다. 하지만 멍청하게 나온 것 같다면 마음에 들어 하지 않던 강한서는 굳이 자신이 찍겠다면 휴대폰을 달라고 했다.한현진이 눈을 실룩거렸다. “네가 사진을 찍겠다고? 168cm인 나를 138cm로 만들어 버리는 네가? 강 대표님 본인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 몰라서 그런 말씀을 하시는 거예요?”강한서가 인정할 수 없다는 듯 말했다. “내 실력이 그렇게 별로야?”한현진이 말했다. “쌀을 뿌린 휴대폰을 닭이 부리로 쪼아도 내가 찍은 것 보단 낫다고 할 수 있어.”왠지 수치를 당한 것 같은 기분에 강한서가 이를 악 물면 말했다. “그럼 난 왜 우리가 데이트했을 때 내가 찍어준 사진을 밤새도록 보고 있었던 거야?”강한서가 괜히 그 얘기를 꺼낸 탓에 잊혀 가던 한현진의 기억이 문득 돌아왔다.“사진을 보면서 넌 그저 사진을 찍을 줄 모르는 것뿐이라고 날 설득 하지 않는다면 호텔 앞에서 바로 너와 싸우 버릴 것 같았거든. 내 외모에, 감독님께서도 나에게 각도는 중요하지 않다고 말씀 하셨는데 넌 대체 어떻게 날 사실 눈으로 찍을 수 있었던 거야?”강한서: ...“사시눈... 처럼 나왔어?”한현진이 일을 악물었다. “내가 뛰어다니는 사진 좀 찍어달라고 하니까 유체 이탈한 것처럼 찍어줬잖아! 내가 피드를 업로드할 때 실수로 그 사진까지 넣었더니 애들이 나한테 대체 어디서 이런 심령사진을 찍었냐고 물었었어.”“...”활활 타오르던 강한서의 분노가 순식간에 사그라졌다. “어쩌다 가끔... 몇 십 장뿐이었잖아.”한현진이 어이없다는 듯 실소를 터뜨렸다. “하.”뭔가를 말하려던 강한서가 고개를 숙이자 무릎 정도까지 오는 어린 아이가 옆에 쭈그려 앉아 불쌍한 눈으로 자신을 쳐다보는 것이 보였다. “아저씨, 아직 더 놀 거예요? 저희 잠깐 놀게 해주시면 안 돼요?”강한서가 고개를 돌리자 뒤에는 어린 라이 대여섯 명이 줄을 서 있었다. 한현진: ...창피함에 고개
“하하하.”한현진이 마른 웃음을 지었다.“오빠. 제가 티슈 없는 건 어떻게 알았어요?”강한서가 눈을 씰룩였다. 그야말로 완벽한 핑계였다. 그는 입술을 달싹여 아내를 따라 염치 없이 말했다. “형님, 저도 없어요.”송민준이 가방과 티슈를 두 사람에게 던지며 강한서를 노려보았다. 탁, 소리와 함께 문이 닫겼다. 한현진: ...“오빠가 나한테 화 난 건 아니겠지?”강한서가 우울하게 말했다. “너보단 날 먼저 걱정해야 할 것 같아. 네 오빠가 아무리 너에게 화가 나도 결국은 나에게 그 화살이 돌아올 거야.”한현진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다면 마음이 좀 놓이네.”강한서: ?한현진이 그의 손을 잡으며 의미심장하게 말했다. “어차피 오빠가 널 탐탁지 않아 한게 하루 이틀도 아니잖아. 오늘 이 일로 크게 달라지진않을 거야.”“...”‘행복은 본인이 누리고 잘못은 내가 뒤집어쓰고. 정말 좋은 아내네.’강한서는 한현진을 데리고 호텔 라운지로 향했다. 입덧이 끝난 이후로 한현진의 식욕은 줄곧 안정적이었다. 매 끼니마다 많이 먹지 않아도 배가 불렀지만 배고픔도 빨리 찾아왔기에 하루에 몇 끼씩 먹어야 했다. 그 덕에 지금의 한현진은 송아지처럼 튼튼하기만 했다. 강한서는 임신한 한현진을 위해 오랫동안 공부했지만 한현진에게는 하나도 쓸모가 없었다. 그의 주변엔 임산부가 많이 없었지만 많은 아내들이 임신 후 남편을 괴롭힌다고 들은 적이 있었다. 하지만 한현진에겐 모든 임신의 호르몬 변화가 거짓말처럼 전혀 작용하지 않았다. 의사는 사람마다 체질이 다르기 때문에 어떤 사람은 큰 반응 없이 잘 먹고 잘 지내기도 한다고 말했다. 의사는 강한서에게 너무 걱정하지 말라며 시간이 날 때마다 산책을 자주 다니며 좋은 컨디션을 유지하면서 주기적으로 검사를 받으면 된다고 했다. 한현진은 정서적으로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심지어 조금 유치해지기도 했다. 바로 지금처럼 말이다. 한현진은 강한서의 팔을 끌며 굳이 아이들의 흔들 목마에게 타게 해달라며 떼를 썼다.
한현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안녕하세요, 채영 언니.”문채영이 가방에서 포장한 선물 박스를 건넸다. “첫 만남이라 어떤 선물을 준비하면 좋을지 몰라 제가 직접 향낭을 만들었어요. 향 맡아봐요.”한현진이 조금 의외라는 듯 말했다. “언니도 조향하세요?”문채영이 미소 지었다. “제가 조향에 입문하게 된 것도 민준이 덕분이었어요. 전엔 이런 거 만드는 거 좋아했었거든요.”한현진은 다시 한 번 충격에 휩싸였다. 그녀는 조향하는 송민준의 모습을 본 적이 없었다. 줄곧 송민준은 그쪽으론 취미가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송민준은 그 얘기를 꺼내는 것이 불쾌한 듯 담담하게 말했다. “주문부터 해. 배고파.”멈칫하던 문채영이 시선을 내려 눈에 맴도는 서운함을 숨겼다. 한현진이 얼른 화제를 돌렸다. “언니, 오랜만에 오셨을 텐데 오늘은 한주 음식으로 드시는 게 어때요?”문채영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좋아요. 현진 씨가 먹고 싶은 거로 주문해요.”주문한 음식 서빙을 마치고 룸을 나서려는 종업원에게 송민준이 갑자기 말했다. “장어 국수도 주문할게요.”문채영이 힐끗 송민준을 쳐다보자 시선을 올린 그가 마치 변명이라도 하듯 말했다. “환영회에 국수가 빠질 수 없지.”‘그래, 환영회에 국수가 빠질 수 없다고 하는 건 그렇다고 쳐. 하지만 하고 많은 국수 중에 왜 하필 장어 국수야?’‘오빠가 장어 국수라고 말할 때 언니 표정을 보면 설마 두 사람 사이에 장어 국수와 관련된 스토리가 있었던 건가?’호기심이 활활 불타오른 한현진이 몰래 테이블 아래로 강한서의 손을 꼬집었다. 그러자 강한서는 그녀에게 새우를 발라 주었다. 한현진: ...강한서과 문채영은 너무 친한 사이였다. 두 사람의 대화에서 한현진은 문채영의 외할머니와 강한서의 할머니가 먼 친척 사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하지만 워낙 촌수가 먼 사이라 피가 거의 섞이지 않은 가족이라고 할 수 있었다. 두 사람은 알고 지낸지 한참 후에야 두 가문이 몇 세대 전에는 친척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한현진이 고개를 들자 옆에 서 있는 벤틀리가 보였다. 송민준이 운전석에 앉아 두 사람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들의 차창은 닫혀 있었으니 송민준은 당연히 아무것도 볼 수 없었지만 강한서의 차라는 것은 알고 있었다. 차를 세운지 한참이 지나도 두 사람이 모습을 보이지 않자 송민준은 강한서가 또 이상한 수작을 부리고 있는 것이라 생각했다. 송민준의 목소리를 들은 강한서가 한현진의 손을 놓고 그녀의 옷을 정리하며 단정하게 자리에 앉았다. 민경하는 은연 중에 자신의 미래를 보고 있는 것만 같았다. 차에서 내린 송민준은 카키색의 캐주얼한 외투에 검정색 바지를 입고 있었다. 머리는 평소 한열이 자주하던 헤어스타일과 비슷했고 선글라스를 콧등에 걸친 채 입술을 앙다물고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넓은 어깨에 긴 다리의 그가 우뚝 서 있으니 카리스마와 매력이 흘러넘쳤다. 전엔 그가 한열과 닮았다는 생각을 하지 못했었는데 이런 차림에 선글라스까지 쓴 모습을 보니 만약 모르는 사람이 봤다면 아마 그를 한열로 착각할 것도 같았다. 닮아도 너무 닮았다. 차에서 내린 한현진이 가방을 메고 송민준을 향해 걸어갔다. “오빠, 오늘 왜 이렇게 멋져요?”송민준이 입꼬리를 씩 올렸다. “내가 언제 안 멋진 적이 있었어?”한현진이 눈웃음 지으며 말했다. “어떤 날이든 멋지긴 하죠. 그래서 언제 데뷔할 생각이요?”송민준이 한현진의 가방을 건네받으며 장난스레 말했다. “난 열이와 캐릭터가 너무 비슷해. 내가 데뷔하면 연예계에 걔 자리가 있긴 할 것 같아?”한현진이 웃음을 터뜨렸다. 송민준은 손을 들어 검지로 콧등에 걸린 선글라스를 아래로 내렸다. 그는 미간을 찌푸리고 강한서가 있는 쪽을 바라봤다. “쟨 차에서 뭐하는 거야?”“업무 통화 중이예요.”송민준이 한현진의 가방을 어깨에 걸치고 한현진을 잡아당기며 말했다. “가자. 우린 먼저 올라가는 게 좋겠어. 혼자 미적거리라고 해.”룸에 도착하자 송민준은 그제야 물었다. “너희 두 사람, 대체 무슨 중요한 얘기를 하려고 이렇
한현진이 장난기 가득한 말투로 말했다. 강한서가 씩 웃으며 대답했다. “마음 약해질 줄 알았는데, 내가 괜한 걱정을 했나 봐.”한현진이 말했다. “처음엔 마음이 약해졌는데 조금 전 불쾌한 일이 있었거든.”한현진은 간단하게 주혁이 무릎 꿇은 일을 서술했다. “난 사실 그렇게까지 화가 난 건 아니었어. 하지만 꿇어앉아 있는 기사님 모습을 본 순간 화가 치밀더라고. 그렇게 많은 사람이 보는 앞에서 그러니까 날 강박하는 것 같았거든. 그래서 그 기회를 빌려 바로 전근시켰어.”한현진이 한숨을 내쉬었다. “사실 오는 길에 계속 마음이 불편했어. 내가 너무 극단적으로 처리한 건 아닌가 싶었거든. 기사님은 지금 아들에게 인공 달팽이관을 해줄 돈이 부족한 상황이거든. 전근하면 월급은 당연히 전보다 줄어들 텐데.”강한서가 한현진의 손등을 토닥였다.“인공 달팽이관은 보청기와 비슷한 거야. 생명과 직결된 문제도 아니니 돈이 부족하다고 해도 당장 급할 건 없어. 하지만 굳이 너를 속여 가며 부업을 하려고 했어. 난 그 부분이 도무지 이해가 되질 않아.”멈칫한 한현진이 나지막이 물었다. “기사님이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거야?”강한서가 고개를 가로 저었다. “그건 모르지. 하지만 시도 때도 없이 무릎을 꿇고 자존심 따위는 쉽게 버릴 수 있는 사람이라면 그 사람이 원하는 건 자신의 존엄보다 훨씬 더 소중한 걸 거야. 전근이 제일 좋은 선택이었어. 네가 그 사람을 곁에 두는 건 내가 불안해.”강한서는 한현진의 손을 잡으며 나긋한 목소리로 말했다. “마음 약해지지 마. 네가 마음 약해질 때마다 난 심장이 떨려.”“휴. 신세를 지기도 했고 기사님 집에는 장애인이 두 명이나 있잖아. 안타까워서 그러지. 내가 언제 다른 사람에게 마음이 약해지는거 봤어? 난 아주 독한 사람이라고.”강한서는 곧바로 태클을 걸었다. “강운이에겐 마음 약하게 굴었잖아.”지나간 이야기를 꺼내려는 강한서의 태도에 한현진이 얼른 입을 열었다. “그건 내가 불쌍해 보이는 주 변호사님 외모
한현진이 민경하를 살펴보았다. “그래 보이지는 않는데. 얼마 전 야근 때문에 피곤해서 그런 거 아냐? 신제품 발표회도 마무리 됐으니 이젠 좀 쉬게 해줘야지. 민 실장님이 쓰러지면 나중에 너만 고생할 거야.”강한서가 한현진에게 텀블러를 건넸다. “내가 부하 직원 생사도 나 몰라라 하는 그런 대표 같아? 민 실장이 쉬고 싶다고 하면 언제든지 휴가 줄 거야.”그 말에 민경하가 재빨리 대답했다. “괜찮아요, 사모님. 저 건강해요. 휴가 필요 없어요.”만약 평소였다면 휴가를 주겠다는 강한서의 말에 당연히 쉬겠다고 대답했을 것이다. 하지만 조금 전 그 상황을 겪고 나니 지금의 민경하는 감히 그럴 수가 없었다. 오늘 민경하가 강민서와 밤낚시를 약속했다는 것을 알게 된 강한서는 한현진과 통화할 때까지만 해도 그리 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전화를 끊고 얼마나 갔을까, 강한서가 입을 열었다. “밤낚시... 몇 명이 가는 거예요?”민경하가 말했다. “밤낚시 모임이 있어요. 아마 20명 정도 있을 거예요. 다들 스케줄에 따라 다르겠지만 많을 땐 8명에서 10명 정도 모여요. 적을 땐 4, 5명이 만날 때도 있고요.”“그래요.”단답으로 대답한 강한서는 또 얼마 지나지 않아 민경하에게 물었다. “밤새 낚시하면 피고하지 않아요?”민경하가 말했다. “텐트가 있어서 피곤하면 들어가서 쉬면 돼요.”강한서가 또 다시 “그래요”라며 단답으로 대답했다. 하지만 얼마 못 가 그가 또 물었다. “두 사람... 같은 텐트에서 자요?”“...”그 질문에 민경하는 바짝 긴장했다. 어쩐지 그 어떤 대답도 목숨을 걸기에 충분한 것 같았다. “4, 5명이면 텐트 2개를 사용해요. 피곤한 사람끼리 돌아가면서 쉬고요.”강한서는 더는 말이 없었다. 5분 후. “두 사람 같이 쉰 적 있어요?”“...”‘같이 잤냐고 묻는 일만 남았네.’민경하가 식은땀을 삐질 흘렸다. “누워서 얘기만 좀 나눴어요.”“그래요.”10분 후. “얘기만 조금 나눈게 전부예요?”민
남자는 들고 있던 담배를 다 태울 때까지 아무 말이 없었다. 서해금이 또 말을 이었다. “당신이 뿌리를 제대로 뽑지 못해 이렇게 큰 후환을 남기지만 않았다면 우리 가람이 처지도 지금처럼 어렵진 않았을 거야.”서해금이 말한 후환은 당연히 한현진을 가리키는 것이었다. 한현진 말이 나오자 남자의 얼굴이 저도 모르게 어두워졌다.그 여자 아이가 죽지 않았다는 일은 그 역시도 송씨 가문에서 한현진을 데려오기 얼마 전에야 알게 되었다.당시 그 여자가 품에 안아 보여주던 여자 아이는 애초부터 송씨 가문의 딸이 아니었다. 그 여자는 다른 곳에서 죽은 아이를 안아와 한아람의 딸이라고 그를 속였던 것이다.친딸이 태어나는 모습도 두 눈으로 직접 보지 못한 그는 곧 자신의 친딸에게 인생을 빼앗길 아이를 마주했다. 그 이루 말할 수 없는 죄책감에 그는 심지어 아이를 똑바로 쳐다볼 수도 없었다. 그는 그저 아이의 죽음을 확인하기만 하면 목적을 달성했다고 생각했다. 포섭당한 사람 중 누군가가 마음이 약해졌다는 사실도 모른 채 말이다. 한현진이 죽지 않았으니 송씨 가문이나 한씨 가문에서는 기필코 당시 분만실에서 있었던 일을 밝히려고 할 것이 분명했다. 다행히 서해금은 일처리를 함에 있어서 화근을 남기지 않는 스타일이었다. 당시 그 일에 연루되어 있는 사람들은 이미 전부 죽거나 도망간 상태였기에 아무리 쥐 잡듯이 뒤져도 그 해의 진실은 알아내 수 없을 것이었다. “내가 뭐 도와줄까?”남자가 나지막이 물었다. “아니.”서해금이 담담한 말투로 말했다. “한현진은 그렇게 멍청하지 않아. 쓸데없는 짓해서 괜한 의심 사지 마. 걔는 걔 엄마랑 똑같아. 의리가 치명적인 약점이거든. 잠깐만 조용히 지내.”잠시 멈칫하던 서해금이 말을 이었다. “앞으로 내 지시 없이 함부로 회사에 나타나지 마. 회사는 여기저기 보는 눈이 많아. 조그만 실수라도 있었다간 우리 가족 전부 끝장이라고.”우리 가족이라는 두 단어에 남자는 그만 멍해졌다. 그의 눈빛이 미래에 대한 희망으로 반짝였다. 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