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한서가 한현진을 힐끗 쳐다보았다. “갖고 싶은 사진 있으면 내가 인쇄해 줄게. 그리고 20살 때 내가 뭐 볼 게 있다고 그러는 거야. 머리에 피도 안 마른 애송이일 뿐이야.”“아니거든. 내 눈엔 멋있어 보여.”한현진이 눈을 예쁘게 휘며 아부를 떨었다. “지금보다 훨씬 멋져. 완전 네 미모의 전성기라니까. 넌 안 그렇게 생각해?”강한서는 한현진의 그 말에 기분이 좋아진 것이 분명해 보였다. 저도 모르게 입꼬리를 올린 강한서가 덤덤하게 말했다. “난 그래도 지금의 내가 더 좋아.”지금보다 더 어렸을 적 강한서의 준수한 미모는 회사에서는 그리 좋은 조건이 아니었다. 아무리 제일 선진적인 기술과 혁신적인 아이디어를 갖고 있다고 하더라도 얼굴 반반하고 소년미 가득한 남자아이의 외적인 모습으로는 사람들에게 신뢰감을 주기 어려웠다. 꽤 긴 시간 동안 줄곧 헬스를 해온 그 습관은 운동을 좋아해서가 아니라 건장한 체격과 이미지를 갖추어 소년다운 모습을 조금이라도 일찍 벗어나기 위한 그의 노력이었을 뿐이었다. 비록 지금도 여전히 똑같은 미모를 유지하고 있지만 덩치에서 오는 카리스마와 수년간 비즈니스로 다져진 경험에서 나오는 아우라로 인해 아무도 강한서를 감히 함부로 대하지 못했다. 20살의 강한서는 준수했고 30살의 강한서는 성숙한 남자의 매력이 더해졌다. 20살의 그는 어린 여자들의 관심을 끌었고 30살의 그는 한현진과 같은 새댁들의 관심 대상이었다. 한현진은 참지 못하고 강한서를 끌어안은 채 입을 맞추었다. “얼른 짐 정리 해. 늦으면 유호촌으로 가는 막차를 놓치게 될 거야. 거긴 길이 안 좋아서 운전해서 가면 더 불편하거든.”한현진이 말하며 강한서를 잡고 있던 손을 놓으려는데 그가 다시 그녀의 손을 잡아당겼다. “예참을 드리는 건 조금 더 나중에 가. 지금 이 시간엔 기도를 올리러 가는 사람들도 많아서 복닥거릴 텐데 지나다니다 만약 너한테 부딪히기라도 하면 어떡해? 그리고 길도 험한데 임산부한테 안 좋아.”강한서의 말에 한현진은 순간 머뭇거렸다
주씨 가문의 가족 모임은 언제나 주시윤이 중심이었다. 멀리서 온 시동생이든, 아니면 줄곧 주진철을 보살펴 온 막내 아들 가족이든 모두 주진철의 총애는 받지 못했다. 그건 주진철이 남자보다 여자를 귀히 여겨서는 아니었다. 주시윤을 편애하는 것은 단지 그녀가 주진철에게 버려졌던 그의 첫사랑과 닮아서였기 때문이었다. 명문가의 도련님인 그는 어떤 여자든지 연애는 할 수 있었지만 결혼은 집안이 맞는 여자로 선택해야 했다. 주강운의 할머니가 바로 그 집안이 맞는 여자였던 것이다. 그리고 주진철에게 버려진 그의 첫사랑은 주진철의 결혼식 날 강에 투신했다는 소문도 있었고 목공과 결혼해 남강으로 이사를 갔다는 소문이 돌기도 했다. 어쨌든 그 첫사랑은 다시는 나타나지 않았었다. 바람둥이였던 명문가 도련님은 결혼 후 아내를 존중하고 그녀를 깍듯이 대하며 살아왔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주강운의 할머니는 몸이 좋지 않아 네 번의 임신을 했지만 유산만 세 번을 했었다. 유일하게 살아남은 아들은 지적 장애가 있는 장애인이었고 주씨 가문의 어른들은 계속 그 아이를 족보에 넣는 것을 반대했다. 그리고 아이가 3살이 되던 해, 주진철은 밖에서 아들과 나이가 비슷한 또래의 아이를 데려왔다. 그 아이는 친아들의 이름으로 주씨 가문의 족보에 들어가 가족의 인정을 받을 수 있었다. 그 아이가 바로 주강운의 큰아버지였다. 그리고 마침 그때가 주강운의 할머니의 본가가 쇠퇴하고 있던 상황이라 그녀는 주씨 가문의 집안일을 신경 쓸 겨를이 도무지 없었다. 그러니 그녀는 어쩔 수 없이 그 모욕을 견뎌야만 했다. 처음이 있으니 두 번째가 있고 또 세 번째가 있었다. 둘째 삼촌과 아버지, 그리고 작은고모 주시윤까지 큰아버지를 데려온 후 몇 년 사이 하나둘 주씨 가문에 이름을 올렸다. 대외적으로 주진철은 슬하에 아들 셋에 딸 하나를 둔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그 네 명의 아이 모두 주강운의 할머니의 친자식이 아니라는 사실은 알지 못했다. 심지어 그녀의 유일한 아들의 존재조차도 모르고 있었다.
‘재밌네.'주강운은 생각하며 피식, 웃음을 흘렸다.고개를 들다 마침 주강운의 그 웃음을 본 주시윤이 갑자기 입을 열었다. "강운아. 너 요즘 양진환 대표님 따님과 가깝게 지낸다며. 둘이 사귀는 거야?"양진환이라는 이름에 주진철이 미간을 찌푸렸다. “그 일자무식의 벼락부자를 말하는 거니?”안 그래도 주름 가득한 얼굴에 미간까지 찌푸리자 야박한 이미지만 더 진해졌다. 주강운이 덤덤한 말투로 대답했다. “양 대표님은 그저 가방끈이 짧으신 것뿐이에요. 비전과 아이디어는 누구보다 뛰어나신 분이에요. 아니면 어떻게 에너지 산업의 리더가 되셨겠어요.”그의 말에 주진철이 코웃음 쳤다. “타이밍만 잘 맞으면 아무리 멍청한 놈도 돈은 벌 수 있어.”그러나 주강운은 주진철의 말에 오히려 피식 웃음을 흘렸다. “에너지 산업을 지원할 거라는 소식은 고모께서도 제일 먼저 알게 된 사람 중 한 분이시잖아요. 고모께서 그 타이밍을 놓치신 건 에너지 산업이 마음에 들지 않으셨기 때문인가요?”주씨 가문의 뿌리는 여기저기 뻗쳐 복잡하게 얽혀 똘똘 뭉쳐있었다. 그러니 위에서 어떤 산업에 전폭적인 지원을 할 거라는 소식이 있다면 그들이 제일 먼저 알게 될 것이었다. 에너지 산업은 주시윤이 타이밍을 놓친 것이 아니라 당시의 주시윤이 그 산업의 가치를 무시한 탓이었다. 그녀가 그 산업의 가치를 알게 되었을 때는 투자를 하기엔 이미 최적의 시기를 놓친 후였다. 주시윤과 그녀의 파트너는 에너지 산업에 꽤 큰 손실을 보았었다. 다행히도 다른 프로젝트가 성공한 덕에 그 구멍을 메꿀 수 있었고 그 덕에 엉망진창까지는 되지 않을 수 있었다. 그러니 주강운의 말은 주시윤의 상처를 들추는 것과 다를 바가 없었다. 주시윤의 표정이 바로 일그러졌다. 그녀와 달리 주진철은 참지 않고 주강운을 향해 분노를 표현했다. 그는 손을 뻗어 옆에 있던 컵을 들어 그대로 주강운에게 던져버렸다. 주강운은 날아오는 컵을 피하지 않았고 주진철이 던진 컵은 그대로 주강운의 이마에 부딪혔다. 그의 이마는 바로 빨
“23번 유현진 씨, 가족분께 연락하셨나요?“이제 간호사가 몇 번째로 유현진을 재촉하는지 알 수 없었다. 그녀는 고개를 숙여 휴대폰을 흘긋 확인해보았으나 강한서에게 건 전화는 여전히 응답이 없는 상태였다.한주시 북부 환형 육교에서 연속 차량 충돌 사고가 발생하며 버스 한 대가 옆으로 기울다 강에 빠져버렸다. 그로 인해 수십 명의 부상자가 병원으로 이송되었고 그들의 가족들이 하나둘씩 병원에 도착했지만 오직 그녀의 남편은 늦도록 연락되지 않았다.처참했던 사고 현장이 여전히 눈앞에서 어른거렸다. 사고 당시 느꼈던 공포보다 이 순간 밀려오는 서운함에 마음이 더 아팠다.“유현진 씨?”간호사의 부름에 유현진이 번뜩 정신을 차렸다. 그녀의 셔츠는 핏자국으로 얼룩져 있었는데 그 덕분에 새하얀 얼굴이 더 창백해 보였다. 그녀는 목소리가 갈라지고 몰골이 처참했으나 여전히 품위 있게 대답했다.“죄송합니다. 연락되지 않는 것을 보니 지금 좀 바쁜 것 같아요. 제가 직접 사인해도 될까요?”“안타깝지만 그럴 수 없어요. 만약 가족분께서 사인할 수 없다면 병원에 남아 좀 더 지켜봐야 할 거예요. 뇌진탕은 빠른 진단을 내릴 수 없으니까요. 병원에선 당신의 생명과 안전을 책임져야 해요.”유현진은 입술을 꾹 닫고 망설이다가 고개를 들었다. “그럼 제가 다시 전화를 걸어 볼게요.”그녀는 휴대폰을 들고 병실 밖으로 나왔다. 의료 기기를 담은 플라스틱 카트를 들고 지나가던 두 간호사를 만나자 그녀가 몸을 살짝 움직여 길을 비켜줬다. 그때, 간호사 중 한 명이 말했다.“16번 환자, 누군지 알아요?““아뇨. 누구죠?““송민영 몰라요? 엄청나게 유명해요! 얼마 전에 찍은 핫한 드라마 ’비밀의 연인‘에서 여주인공 역할을 맡은 분이에요.““저런! 그분, 많이 다치셨어요?““조금 늦게 오셨어요. 그리고 팔에 스친 상처가 있긴 한데 그때 이미 약간 아문 상태였어요. 하지만 연예인들 얼굴이 간판이잖아요. 당연히 우리 같은 일반인과 비길 수 없죠. 내가 만약 송민영과 같은 얼굴과 몸매
뜨거운 열기가 귓가에 뿜어지고 달아오른 체온까지 더해 유현진의 귓불을 뜨겁게 달구었다. 다만 그녀는 복부에 난 멍 때문에 몹시 괴로워하며 입술이 하얗게 질렸다.다행히 불이 꺼져있어 그는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그녀는 고개를 들고 그의 목젖에 키스했다. 강한서는 가쁜 숨을 몰아쉬며 짙은 눈빛으로 머리를 숙이고 그녀의 목덜미를 한입 물었다. 곧이어 유현진이 담담한 어투로 말했다.“나 오늘 배란기야, 할 때가 됐어.”강한서는 몸이 굳어지더니 눈가에 스친 욕망도 순식간에 사라졌다. 그는 어두운 표정을 지으며 살짝 분노에 찬 말투로 물었다.“네 머릿속엔 온통 이 생각뿐이야?”유현진은 천장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뜨거웠던 귓불도 서서히 열기가 식었다.“너희 엄마가 계속 날 다그치잖아. 나 혼자 할 수 있는 일도 아닌데, 차라리 너 정자 기증할래? 그럼 내가 시험관시술 할게.”강한서가 비난 조로 되물었다.“엄마가 재촉한 게 아니라 네가 사모님 자리를 지키지 못할까 봐 아이라도 낳으려는 거 아니야?”유현진은 가슴을 후벼 파듯 아팠지만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로 옅은 미소만 지었다.“맞아, 네가 날 버리면 어떡해? 이렇게 해서라도 우리 둘 사이를 더 단단하게 만들어야지.”강한서는 단추를 채우고 짜증 섞인 눈길로 그녀를 쳐다봤다.“이런 데 신경 쓰지 마. 난 아이 안 가질 거야.”유현진의 미소 짓던 얼굴이 조금 굳어졌다. 그녀는 문밖을 나서려는 강한서를 불러세웠다.“강한서, 넌 대체 아이를 갖기 싫은 거야 아니면 내 아이를 갖기 싫은 거야?”강한서는 걸음을 멈추고 차갑게 쏘아붙였다.“뭐가 다른데?”유현진은 주먹을 꽉 쥐고 대답했다.“같은 뜻이라면 결혼도 아무 의미 없겠지. 이혼해 그냥.”“네 마음대로 해.”강한서는 이 한마디를 내뱉은 후 문을 박차고 나갔다.유현진은 베개를 문에 힘껏 내던졌고 눈가에 눈물이 맺혔다.다음 날 아침, 조깅을 마치고 돌아온 강한서는 식탁 앞에 앉아 메일을 확인했다.아침을 준비한 지 반나절이 됐지만 그는 도통 수저를
차미주는 꿈속에서 헤매다가 노크 소리를 듣고 잠이 깼다. 문을 연 순간 유현진이 한 손에 캐리어를 들고 떡하니 서 있었다. 그녀는 입꼬리를 씩 올리며 청아한 목소리로 물었다.“숙박 좀 할 수 있을까?”차미주는 그녀에게 아이스 콜라 한 병 건넸다. 유현진이 콜라를 건네받자 그녀는 불쑥 제 머리를 툭 쳤다.“내 정신 좀 봐. 너 탄산음료 안 마시지? 우유 갖다 줄게.”“아니야, 괜찮아.”유현진은 캔 뚜껑을 따고 한 모금 마셨다.“못 마시는 게 어디 있어?”전에는 임신 준비 때문에 술과 담배, 음료 및 자극적인 것들을 싹 다 멀리했지만 이혼을 앞둔 지금은 이런 것 따위 전혀 신경 쓸 이유가 없었다. 기분이 내키는 대로 하면 그만인 것을.‘임신 준비? 그딴 건 무능한 강한서더러 하라고 해!’“너 정말 강한서 씨랑 이혼할 생각이야?”차미주는 소파의 반대편에 앉으며 확실치 않은 표정으로 물었다.“응.”유현진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말을 이었다.“그 사람 또 송민영이랑 만나.”차미주는 대뜸 욕설을 퍼부었다.“그 여잔 대체 왜 이렇게 뻔뻔한 거야? 애초에 결혼할 때도 찾아와 소란을 피우더니 3년이 지난 후 또다시 나타나? 세상에 남자가 없대? 아니 왜 유부남을 물고 늘어지는 거냐고? 강한서 그 자식도 한심해. 놀다 버린 장난감에 아직도 미련이 남은 거야?”유현진은 순간 말문이 막혔다.‘지금 대체 누굴 욕하는 거지?’차미주는 마른기침을 하고 계속 말을 이어갔다.“너 지금 이런 사소한 것에 연연할 때가 아니야. 그 두 사람이 함께 있으면 넌 그냥 빠지려고? 왜 그런 비겁한 인간들을 봐줘? 끝까지 맞서 싸우란 말이야! 그 여자가 온갖 청순한 척을 다 떨잖아. 사람들 앞에서 그 가면을 확 벗겨버려! 청순은 개뿔, 유부남이나 만나는 뻔뻔스러운 년인 주제에!”“그래서? 내 결혼생활이 파탄 났다는 걸 온 세상에 알려? 남편 하나 제대로 관리하지 못한 가여운 여자로 남아?”유현진이 한숨을 내쉬었다.“이 결혼은 이미 실패야. 떠날 때까지 비참하게 굴고 싶
“네? 대표님은 아직 주무십니다.”“그럼 침실로 가서 깨워요!”유현진은 살짝 화가 치밀었다. 전화기 너머로 한참 침묵이 흐르더니 중저음의 남자 목소리가 들려왔다.“무슨 일이야?”질문이 너무 자연스러웠고 심지어 이제 막 잠에서 깬 잠긴 목소리라 한순간 유현진도 저 자신을 의심할 뻔했다.그녀는 입술을 꼭 깨물며 숨을 깊게 들이쉬었다.“며칠 뒤에 네 옷장의 옷들이 어느 위치에 있는지 리스트를 작성해서 보내줄게. 앞으론 이런 따분한 일들로 전화 걸지 말았으면 좋겠어!”“따분한 일?”강한서가 차갑게 웃었다.“유현진, 이런 따분한 일들은 네가 가장 좋아하던 일이었잖아. 내가 무슨 속옷을 입는 것까지 일일이 책임졌잖아. 이게 고작 네가 추구하던 삶이 아니었어?”유현진은 숨이 턱 막혔다. 그녀는 주먹을 불끈 쥐고 심장이 쑤시듯이 아팠다.강한서에게 자신이 그저 이런 이미지였다는 걸 진작 알고 있었지만 막상 듣게 되니 느낌이 새삼 달랐다.대체 마음이 얼마나 단단해야 이런 수모를 겪었을 때 아무런 느낌이 없을까?전화기에 잠시 침묵이 흘렀고 아무도 말을 하지 않았다.한참 후에야 유현진이 잠긴 목소리로 먼저 입을 열었다.“내가 봐도 한심했어. 그러니까 이젠 더이상 책임지지 않겠다고. 얼른 사인해. 우리 둘 사이 빨리 끝내자.”화제가 또다시 이혼으로 돌아왔고 이제 막 화가 가라앉았던 강한서는 금세 분노가 차올랐다.“제발 적당히 해!”유현진은 피식 웃으며 비난 조로 되물었다.“내가 뭘 어쨌는데?”“너 후회하지 마!”강한서는 이 말만 남기고 전화를 툭 끊었다.유현진은 입술을 꼭 깨물었다. 자상하게 챙겨주고 묵묵히 헌신했던 지난날들이 강한서에겐 그저 한낱 놀림거리에 불과하다니.매번 그를 위해 여러 장소에서 입을 옷들을 정성껏 챙겨줄 때 정작 뒤에서 그녀를 바라보던 그의 눈빛엔 짜증이 잔뜩 담겨있었을지도 모른다.종일 하루 세끼와 먹고 입는 것에 신경 쓰는 여자가 얼마나 창피했을까? 그녀가 생각해도 이런 저 자신이 너무 한심하고 어리석어 보였다.“대
곧이어 그녀는 안티카페에서 퇴출당하고 말았다....“왜 넋 놓고 있어?”이때 훤칠한 남자가 프런트 데스크를 두어 번 두드리며 팔꿈치를 괴고 있었다. 그는 턱을 살짝 들고 웃을 듯 말 듯한 표정을 지었다.“너더러 넋 놓고 있으라고 월급 주는 줄 알아?”그는 바로 옆 건물의 사장이자 섬블 컴퍼니의 사장인 한성우였다.여직원은 한성우의 성격을 잘 알고 있어 전혀 그를 두려워하지 않았다.“사장님도 종일 뵙기 힘들잖아요.”“입만 살았어!”그가 계속 여직원과 말장난을 걸려고 할 때 등 뒤에서 누군가가 마른기침을 하는 소리가 들렸다. 한성우는 동작을 멈추고 순간 장난기 어린 표정을 거두며 진지하게 말했다.“박 감독 어디 있어? 지금 바로 내려오라고 해.”“감독님은 녹음 테스트를 하고 계세요.”“녹음 테스트?”한성우는 흠칫 놀라며 되물었다.“선셋 스타가 왔어?”여직원이 머리를 끄덕였다.한성우는 살짝 기쁜 기색이 역력했지만 고개 돌려 굳은 표정의 강한서를 본 순간 재빨리 마음을 억누르고 정색하며 말했다.“박 감독한테 전화해서 내가 몇 가지 물을 게 있다고 전해.”곧이어 전화가 연결되자 한성우는 스피커폰을 눌렀다.“박 감독, 녹음 테스트는 잘 돼가? 나한테도 목소리가 괜찮은 배우가 있긴 한데.”“괜찮아, 테스트 다 했고 이미 계약도 마쳤어.”박정문은 비록 계약서를 작성하지 않았지만 한성우의 말뜻을 바로 알아챘다. 한성우는 한숨을 돌리고는 일부러 사장 포스를 내며 말했다.“이젠 나랑 상의도 없이 계약까지 하는 거야? 대체 누가 사장이야?”박정문은 전화를 툭 끊었고 한성우는 계속 구시렁댔다.“얘는 내가 점점 안중에 없는 것 같다니까!”이어서 그는 고개 돌려 강한서에게 말했다.“너도 들었지? 이미 계약했대. 다음에 버전 업데이트하고 알맞은 캐릭터가 있으면 그때 다시 써줄게.”‘정상에서’는 최근 섬블 컴퍼니에서 그가 가장 만족하는 작품이라 송민영이 이 완벽함을 망치는 걸 절대 지켜볼 수 없다.강한서는 담담한 눈빛으로 그의 얼굴을 흘겨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