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한서...이건 정말 예전에 그가 했을 법한 말이었다. 아니, 어쩌면 어릴 때 신미정이 늘 그에게 했던 말이었다.어렸을 때 아무리 성적이 좋아도 신미정은 늘 같은 말이었다.“자만하지 마, 다음번엔 다른 애가 널 따라잡을지도 몰라.”“나와 네 아빠가 너한테 돈을 그렇게 많이 썼는데, 이 정도는 당연한 거 아니니?”그는 그녀에게서 칭찬을 받아본 적이 없었으니, 사랑하는 사람과 기쁨을 나눌 때도 어떻게 제대로 반응해야 할지 몰랐다.그래서 그가 생각한 격려는 상대방에게 상처와 비하로 들렸을 뿐이었다.신미정은 그에게 가장 잘못된 본보기를 주었기에 강한서는 자신이 그녀와 다르다고 믿었지만, 주변 사람들에게 계속해서 받들어지다 보니 자신도 그녀와 같은 착오를 범하고 있다는 걸 전혀 의식하지 못했다.강한서는 고개를 숙이고 그녀를 바라보며 작은 강아지처럼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당신은 예전의 나를 더 좋아해, 아니면 지금의 나를 더 좋아해?”한현진은 미소를 지으며 그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한서 씨는 자신의 잘못을 알고 고치는 사람이니까, 언제나 다 좋아해.”그의 눈이 별처럼 반짝이며 환하게 빛났다.그는 나지막이 말했다.“사실 나 그 영화 봤어. 개봉 전에 감독님 댁에서 원본을 봤는데, 연기 정말 좋더라.”“50원짜리 연기라며?”강한서가 웃으며 말했다.“이번에는 80원은 되던데.”한현진이 양서은에게 먼저 연락하기 전에 양시은이 먼저 연락을 해왔다.요 며칠 동안 전씨 가문의 일은 온 바닥에 소문났다.전태평의 죄목은 거의 확정된 상태로, 현재 관련 기관에 구속되어 절차만 기다리고 있었다.양시은은 사업 수완이 뛰어나지만, 지나치게 탐욕스러운 사람은 아니었다. 그래서 정치계의 회색지대는 전태평에게 절대 건드리지 말라고 계속해서 주의를 줬었다.그녀는 자산도 충분하고, 가정의 경제 사정도 여유로워 굳이 위험한 돈을 벌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만약 그런 돈을 만졌다가 사고가 나면 집안이 완전히 무너지는 건 시간문제였다.전태평은 말로는 잘 알겠다고
양시은은 오랫동안 참아온 화가 폭발한 모양이었다. 전태평을 구속시킨 뒤, 그녀는 바로 변호사를 찾아가 그가 애인인 최지영과 그 아들에게 쓴 모든 돈을 되찾아달라고 요청했다. 또한 최지영을 전태평, 신미정과 공모해 자신을 사기 친 혐의로 고소했다.그녀가 오랫동안 모아온 증거들로 승소는 확실했지만, 문제는 많은 절차를 거쳐야 한다는 것이었다. 절차가 너무 느리니 양시은은 답답했다. 그녀는 그 모자가 자신의 돈으로 산 집에서 사는 꼴을 더는 볼 수 없었다.그래서 그녀는 호텔에서 힘 좋은 보안 요원 일곱 명을 데려와, 설 연휴 기간에 그들을 집에서 쫓아냈다.한현진이 현장에 도착했을 때, 양시은은 이미 그들을 아파트 마당으로 내몰았고, 보안 요원들이 차례차례 그들의 짐을 밖으로 던져내고 있었다.단지 안은 여자의 욕설과 울음소리로 가득했다.차미주는 혀를 끌끌 차며 말했다.“시은 언니 진짜 세게 나가는데. 이렇게 사람을 쫓아냈다가 소송도 아직 안 끝났는데 경찰에 신고라도 당하면 어떡하려고 그러지?”한현진이 작은 소리로 말했다.“전태평이 정말 그렇게 대범하게 집을 그 여자 명의로 해줬을 거 같아? 이 집, 전태평 엄마 명의야. 그러니까 시은 언니는 그 여자를 쫓아낼 정당한 이유가 있는 거야. 자기 집에 남을 공짜로 살게 할 이유가 없잖아?”차미주가 놀라서 말했다.“헐. 그 개자식 완전 교활하네. 난 그가 진심으로 상간녀를 사랑하는 줄 알았는데 결국 뒤에서 다 대비하고 있었던 거네?”“애인 관계가 제일 불안정해. 부부는 적어도 법적으로 보호받지만, 애인은 아무런 보호가 없잖아. 그 여자가 집을 팔아버리고 도망가면, 전태평은 어디에 가서 찾겠어? 집 한 채로 묶어두면 아들까지 봐주니까 본인은 그저 매일 두 여자를 즐기면 되었던 거야. 시은 언니는 남편이 순박하다고 했는데 내가 보기엔 머리가 너무 팽팽 돌아가.”“근데 생각해 보면, 시은 언니도 참 운이 없어. 그 나쁜 놈이 횡령하고 뇌물 받은 것 때문에 벌금 물리면 결국 언니가 돈을 내야 할 거고, 남편이
한현진은 그녀에게 우유를 건네며 말했다.“상속권이 있다고 해서 꼭 돈을 받을 수 있는 건 아니에요. 전태평이 아직 멀쩡히 살아있잖아요?”차미주...양시은은 이 말에 분노를 감추지 못했다. 남편 집안사람들은 20년 동안 그녀를 속였고, 시어머니는 아들을 낳지 못한 것을 두고 늘 은근히 그녀를 괴롭혔다. 매년 며느리 중에서 자신이 섬긴 돈이 제일 많고, 선물도 제일 비쌌지만, 아들을 못 낳았다는 이유로 좋은 말 한마디 듣지 못했다.어제 시어머니는 친척들을 모아 그녀 집 앞에 몰려와 난리를 피우며 집안 재산을 다 털어서라도 전태평의 빚을 메우고 그를 구해내라고 했다.돈을 상간녀에게 주면서 집안 재산은 다 상간녀의 아들에게 넘기겠다고 해놓고, 자신을 부양하는 며느리에게는 아들을 못 낳았다며 불평하고, 손녀들마저도 차갑게 대하는 인간이 정말 무슨 염치로 그러는 건지.“좋아.”양시은이 냉랭한 목소리로 말했다.“전태평이 죽고 나서 그때 상속받으러 와. 하지만 그 사람은 아직 살아 있고, 우리도 이혼하지 않았으니까, 그의 재산 처분권은 나한테 있어!”그러고는 뒤에 있던 보안요원들에게 고개를 돌려 말했다.“잠시 후에 자물쇠를 바꾸고, 매일 돌아가면서 여길 지켜요. 그 두 사람이 우리 집 근처 3미터 안으로 오면, 그날부로 회사 나오지 마세요.”일고여덟 명의 건장한 청년들이 일제히 대답했다.“알겠습니다.”전태평의 아들은 젊은 혈기로 속이 이미 부글부글 끓고 있었다. 양시은이 돌아서는 순간, 그는 어디선가 커터 칼을 꺼내 들고 그녀를 향해 휘둘렀다.한현진은 깜짝 놀라 외쳤다.“조심해요!”이때 양시은 옆에 있던 건장한 남자가 재빠르게 상대방의 칼을 붙잡고, 무릎을 걷어찼다. 소년은 짧게 신음하며 그 자리에 무릎을 꿇었다.다른 보안 요원들도 서둘러 달려와 제압하고 바로 경찰에 신고했다.맨손으로 칼을 잡은 남자의 손이 피투성이인 걸 보자 양시은은 놀라서 창백해진 얼굴로 옆에 있던 비서에게 말했다.“빨리 병원으로 데려가. 치료비는 회사에서 부담하고.”
차미주는 멍해졌다.“이혼 안 해요? 그럼 쓰레기 같은 남자랑 계속 얽히겠다는 말씀이에요?”양시은은 담담하게 대답했다.“20년 전이었다면, 당연히 이혼했겠죠. 하지만 지금 이혼한다고 내가 얻을 게 뭐가 있을까요?”“전태평은 별문제 없으면 10년, 20년은 감옥에 있을 텐데, 지금 이혼하면 재산을 나눠야 하잖아요. 그런데 그는 감옥에서 돈을 쓸 수도 없으니 그 돈이 결국엔 누구에게 돌아가겠어요?”“전태평은 아마 당장이라도 이혼하고 싶을 거예요. 돈을 나눠서 아들과 어머니를 챙겨주려고요. 그걸 뻔히 아는데 내가 왜 들어주겠어요?”“내가 이혼하지 않으면 돈을 어떻게 쓸지는 내 마음이에요. 난 그 인간에게 돈 한 푼 없는 상황에서 그의 아들이 어떻게 망가지는지 보여줄 거예요.”“그럼 10년, 20년 후에 그가 나와서 이혼하고 재산을 나누려고 하면 어쩔 거예요? 그때면 언니는 더 많은 돈을 벌어놨을 텐데.”차미주가 계속 물었다.양미주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웃었다.“감옥에서 그렇게 오래 있다 나오면, 세상은 이미 많이 변했을 거예요. 애인은 늙었을 테고 아들은 아무 성과도 없는 무능한 전과자 신세가 됐겠죠. 반면 난 사업도 성공했고 딸들도 행복하게 잘 살고 있을 텐데 그 인간이 뭘 선택할지는 뻔하지 않겠어요?”그녀는 커피를 휘젓다가 말을 이어갔다.“그때가 되면 난 명절마다 그를 딸들과 외손주들 앞에 데려다 놓고, 그 사람의 과거 ‘화려한 업적’에 대해 잘 얘기해서 다들 교훈으로 삼게 할 거예요. 이렇게 생생한 예시인데, 다들 안 들을 수가 없겠죠.”차미주...한현진...전태평이 들어가면서 그녀의 복수는 이제 시작된 것이었다. 불충한 남편, 뻔뻔한 애인, 그리고 그들이 낳은 자식을 그녀는 하나도 용서할 생각이 없었다.양시은은 말을 끝내고 한현진을 쳐다보며 물었다.“강한서가 신미정에게 마음이 약해졌나 봐요. 현진 씨는 나한테 불난 데 기름 부으러 온 거죠?”한현진은 담담하게 말했다.“헛소문 좀 퍼뜨리지 말아요. 우리 남편 그렇게 어리석지 않아
그의 SNS 게시물에는 금세 수천 개의 댓글이 달렸다.[4천억이라니! 월급 500만 원으로는 6천여 년 동안 먹지도 않고 벌어야 겨우 모을 돈이야!][부자들이 기부하는 건 다 뻔한 얘기지.][그게 무슨 뜻이야? 잘 모르겠네.][세금 피하려고 하는 거지, 이왕이면 홍보도 하고.][윗분, 잘난 척 그만해. 기부금은 내야 할 세금에서 공제하는 거지, 네가 내는 세금이 아니야. 게다가 한도도 있어. 진짜 입법자들이 바보인 줄 알아? 외국의 상속세도 아니고 뭘 아는 척해?][4천억이나 기부했는데 홍보 좀 하는데 어때서? 넌 4천 원을 기부하고도 SNS에 자랑하고 싶어 하잖아.][난 기업들이 다 이렇게 기부 경쟁하면 좋겠어. 어차피 내 돈 나가는 거 아니니까 누가 많이 내든 상관없어. 한성 짱!][강 대표님, 인터넷에서 루나 2세 테스트 영상 올라온 거 봤어요. 우리 와이프가 그거 사달라고 졸라대는데, 와이프가 단념하게 가격 좀 말해주세요.][네 엄마가 일부러 사람 다치게 한 거 덮으려고 일부러 올린 거지? 그 미친 여자가 계단에 기름칠해서 청소부 두 명이나 그렇게 다치게 해놓고, 집에 돈 많으니까, 돈으로 입 막을 생각이잖아? 이런 인기 검색어까지 사서 덮어버리면 사람들이 다 잊어버릴 줄 알아?][입막음한 것 같진 않은데? 아내가 직접 가서 위로도 했고, 보상안도 논의했잖아.][보상금 주는 거야 책임 면하려고 그러는 거지. 그 미친 여자가 어떻게 처리됐는지 아직도 소식이 없는 걸 보면 벌써 돈으로 다 해결했나 봐.][말은 쉽지. 돈 안 받고 고소만 하면 네가 치료비랑 변호사비 다 대줄 거야? 어른답게 현실을 좀 보라고. 내 친구가 병원에 있는데, 그 청소부들 경상도 아니래. 하지만 한성은 언론을 막은 것도 없고 책임도 회피하지 않았잖아. 그리고 경찰 조사 결과도 아직 안 나왔는데 성급하게 결론 내리려는 사람들 왜 이렇게 많아? 강 대표가 네 귀에 대고 자기 엄마를 돈으로 빼냈다고 말해주던?]네티즌들 사이에 논란이 크게 일었다. 많은 사람들은 한성
서해금의 눈가가 파르르 뛰었다. “뭐?”송가람이 입을 꾹 다물었다. 서해금은 이미 송가람과 강한서를 이어주려던 생각을 접은 지 오래였다. 만약 송가람이 아직도 서해금 몰래 강한서와 연락을 주고받는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또 한바탕 핀잔을 받을 것이 뻔했다. “아무것도 아니야. 엄마 이 시간에 왜 아직도 안 자?”“머리가 아파서 잠이 안 와.”송가람 옆에 자리 잡고 앉은 서해금이 무심코 말했다. “너 요즘 왜 민준이 안 찾아? 예전엔 계속 붙어있으려고 했잖아.”송민준 얘기에 송가람의 얼굴에 차가운 기운이 서렸다. “오빠는 마음이 전부 친동생에게 가 있잖아. 날 신경 쓸 여유 같은 게 있을 리가 있겠어?”“무슨 말을 그렇게 하니? 너 어렸을 때, 민준이는 널 제일 예뻐했어. 나와는 별로 얘기를 안 했어도 넌 항상 데리고 다니길 좋아했는데. 어렸을 때부터 떨어져 있었던 한현진이 돌아왔으니 남매 사이가 당연히 더 돈독해졌겠지지. 하지만 너랑은 함께 자란 정이 있어. 민준이가 먼저 연락하지 않는다고 너도 다가가지 않으면 걔가 얼마나 섭섭하겠어.”송가람이 입술을 꾹 깨물었다. “오빠가 나한테 무슨 정이 남았어? 날 향했던 사랑은 한현진이 돌아온 후로 전부 그쪽으로 넘어갔어. 난 그냥 오빠가 친동생을 잃은 슬픔을 기탁할 대체품에 불과했던 거야. 지금은 그 친동생이 돌아왔는데, 내가 뭐라고.”“그건 네가 계속 한현진을 적대시하니까 그런 거잖아. 네 아빠 앞에서 한현진과 비교하며 애정을 갈구하면 네가 어떻게 친딸을 이길 수 있겠니? 네가 한현진에게 잘해줘야 네 아빠도 너한테 잘할 수 있어. 그래야 네 불쌍한 처지를 조금씩 알아챌 수 있다고. 알겠니?”서해금의 말에 송가람이 멍해졌다. 그녀는 서해금의 말뜻을 어쩌면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심심하면 네 오빠한테 자주 연락해. 누구랑 만나는지도 살펴보고.”송가람이 이해되지 않는다는 듯 말했다. “그건 왜 살펴보라고 하는 거야?”서해금이 덤덤한 말투로 말을 이었다. “네 오빠도 이젠 어린 나이가
강민서가 가져온 보고서를 보던 민경하가 웃으며 말했다. “대표님께서는 일하실 때는 완전이 몰두하시는 편이시라 시간을 자주 깜빡하시거든요. 어떨 땐 일부러 그렇게 늦게까지 일하시는 거 아니세요.”“약속 있으면 먼저 가요. 제가 나중에 대표님께 말씀드릴게요.”강민서가 입을 삐죽였다. “다들 퇴근 안 했는데 저만 가면 눈에 띄잖아요. 나중에 또 뭐라고 할 거예요. 그리고 오늘 할머니께서 저랑 같이 본가에 저녁 먹으러 오라고 했던 거 잊었어요?”까맣게 잊고 있었던 듯 민경하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안 가면 안 돼요?”민경하는 선뜻 강민서의 본가로 가기가 꺼려졌다. 워낙 꿍꿍이가 많은 어르신이라 밥 한 끼를 먹는 것도 신경을 바짝 곤두세워야 했다. “안 가도 되죠. 직접 안 갈 거라고 말씀드려요.”강민서의 말에 민경하는 입을 꾹 닫았다. 물을 마시고 있는 강민서를 힐끔 쳐다보던 민경하가 갑자기 입을 열었다. “민서 씨가 회장님께 저와 데이트 할 거라고 말씀드려요. 단둘이 있고 싶다고요.”입안에 머금었던 물을 뿜은 강민서는 사레가 들려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누가 실장님과 단둘이 있고 싶대요. 그렇게 말하고 싶으면 본인이 직접 해요. 그런 말은 전 창피해서 못 해요.”“그래요. 제가 말씀드릴게요.”민경하는 대답 하며 서류를 내려놓았다. 휴대폰을 꺼내 정인월에게 전화했다. 강민서는 귀를 쫑긋 세우고 민경하가 어떻게 정인월의 말을 거역하는지 들어볼 생각이었다. 통화가 연결되자마자 민경하가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회장님, 오늘 저희 둘 본가로 안 가도 될까요? 일이 있는 건 아니고 오늘 저녁에 연등 축제 있잖아요? 민서 씨가 저랑 같이 가보고 싶다고 해서요...”강민서의 얼굴이 순간 어두워졌다. ‘실장님이 전화 드리라고 했더니 내 탓으로 돌려?’강민서가 막 화를 내려는데 민경하가 초콜릿 하나를 집어 강민서의 입에 넣어주더니 웃으며 수화기 너머의 정인월에게 말했다. “네, 알겠어요. 민서 씨에게 사진 많이 찍어서 회장님께 보내드리
민경하가 물 만난 물고기처럼 강한서의 비서 실장이라는 위치를 유지할 수 있었던 건 그저 우연이 아니었다. 일반적으로 아부는 대표의 취향에 따르는 것이 다반사였다. 그러니 민경하 역시 강한서가 좋아하는 것을 잘 이용했다. 다만 민경하의 상사가 제일 좋아하는 것이 사모님이었을 따름이었다. 서둘러 집으로 돌아간 강한서는 도착하자마자 짐을 정리하고 있는 한현진을 볼 수 있었다. 멈칫하던 강한서가 물었다. “나가려고?”한현진이 짐을 정리하던 손을 멈추지 않고 대답했다. “전에 사고 났을 때 내가 유호촌에 있는 절에서 널 위해 소원을 빌었던 적이 있거든. 이젠 네가 건강도 회복했으니 감사의 의미로 예참을 드리고 오려고.”한현진의 말에 강한서가 잠시 멍해졌다. “왜 갑자기 지금 예참을 드리러 가는 거야?”“내가 잊고 있었는데, 민 실장님께서 귀띔해 주셨어. 네가 돌아온 지도 시간이 꽤 지났고 내 소원도 이루어졌으니 나도 그때 했던 약속을 지켜야지. 공양도 좀 올리고.”‘민 실장... 아주 얍삽한 놈이었네.’‘현진이가 다급하게 전화해서 돌아오라길래 무슨 급한 일이라도 있는 줄 알았더니...’민경하의 조언이었다는 말에 강한서는 순간 모든 것이 이해되었다. ‘날 회사에서 내보내고 일찍 퇴근해서 명절을 보내려고 그런 거였네.’입술을 앙다물었던 강한서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 절 말이야. 주강운이 널 위해 평안을 비는 부적을 받아 온 곳이지.”그 말에 어리둥절해졌던 한현진이 말했다. “네가 말하니까 생각났네. 주 변호사님이 나에게 준 부적은? 전에 네가 정장 주머니에 넣었었잖아. 집에 돌아와서도 돌려주지 않았어.”“...”‘쓸데없이 그 얘기를 꺼내는 게 아니었어!’“부적은?”한현진이 손을 내밀었다.강한서가 시선을 돌리며 말했다. “몰라. 아마 계속 그 주머니에 있을 거야. 안 건드렸거든.”의심하는 눈초리로 강한서를 한참 쳐다보던 한현진이 입을 열었다. “내가 찾아볼게.”말하며 몸을 일으킨 한현진이 드레스룸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
강한서가 가식적인 말투로 말했다. “부탁할게. 나중에 내가 너랑 여정 씨에게 크게 한 턱 쏠게.”강한서에게 등을 돌린 신우가 손을 들어 중지를 내밀었다. 한현진이 강한서에게 나지막이 물었다. “신우 씨가 널 꽤 귀찮아하는 것 같아. 전에 여정 씨에게 신우 씨는 욕을 하지 않는다고 들었던 것 같은데.’“아닐 걸?”강한서가 헛소리를 지껄였다. “난 우리 사이가 좋다고 생각해. 봐봐, 지금 얼마나 열심히 우릴 도와주고 있어.”한현진이 의심스러운 눈빛으로 강한서를 쳐다보았다. ‘그래? 난 왜 신우 씨가 마지못해 하는 것 같지?’생각하던 한현진이 말했다. “이제 이런 일로 신우 씨 번거롭게 하지 말자. 우리 다른 방법 찾아보자. 언제까지 부탁할 순 없잖아.”강한서가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그도 계속 신우에게만 매달리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문제는 신우처럼 능력 있고 입도 무거운 사람을 찾기 힘들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한현진의 말에도 일리가 있었다. 언제까지 신우에게 부탁할 수는 없었다. 신우의 할아버지가 위독하시기 때문에 지금은 삼촌들의 후계자 싸움이 가장 치열한 시기였다. 수많은 눈이 서로의 약점을 노리고 있었기에 신우의 처지 역시 살얼음판과 다를 바가 없었다. 이럴 때일수록 그 어떤 실수도 있어서는 안 된다. 신씨 가문에서 요즘 경쟁이 제일 치열한 것이 바로 제일 많은 계약금이 걸린 프로젝트였다. 강한서는 이 기회를 빌려 신우에게 투자금을 보태 그동안 진 신세를 갚을 생각이었다. 그날 오후, 지문 대조 결과가 나왔다. 편지 봉투와 그림에는 한현진과 강한서의 지문을 제외한 세 사람의 지문이 있었다. 그 세 사람 중 한 명은 주혁의 아내였고 또 다른 사람은 주혁의 아들인 주지호였다. 그리고 또 다른 하나는 지문 대조 시스템에 등록되어 있지 않은 또 다른 사람의 지문이었다. 그 결과에 한현진은 조금 실망스러웠다. 이 정보를 따라 뭔가를 캐낼 수 있을 것이라 여겼지만 이렇게 많은 노력에도 불구하고 조사 결과는 결국 시스템에조차 등록되어 있
시원하게 욕을 날린 신우는 의리 있게 강한서의 부탁을 들어줬다.10여 년 전 주혁이 경찰서에 남겼던 지문을 받은 강한서는 곧 생체 인식 실험실에 보내 두 지문을 대조하도록 했다. 2시간도 지나지 않아 결과가 나왔다. 한지와 편지봉투에서는 주혁의 지문을 찾을 수 없었다. 그 결과에 한현진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말도 안 돼. 뭔가 착오가 있는 거 아냐? 그때 직접 손으로 나에게 건네줬었어. 심지어 장갑도 하지 않았는데, 지문이 안 나왔다고?”신우가 말했다. “여긴 여정이와 여정이 사수가 함께 만든 실험실이에요. 게다가 형사들과 자주 협력하는 곳이기도 하고요. 지문 대조 시스템은 여길 따라올 곳이 없어요. 한 번도 틀린 적 없었어요.”신우의 말은 지문 대조 결과가 틀렸을 리가 없다는 얘기였다. 신우는 주머니에서 담배 한 갑을 꺼냈다. 이제 막 담배 한 대를 꺼내려던 그때, 손에 들린 담배가 강한서의 손에 내쳐져 툭, 쓰레기통으로 떨어졌다. 신우: ???머리가 복잡했던 한현진은 두 사람을 전혀 신경도 쓰지 않았다. 그녀는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그럼 왜 없는 거지?”여전히 오리무중에 빠진 한현진과 달리 강한서는 이미 눈치 채고 있은 듯 말했다. “혹시... 지금 그 사람은 애초부터 주혁이 아니었던 거야. 그래서 경찰에게 지문이 남아있을까 봐 그런 방법의 자신의 모든 지문을 지워버린 거야. 자신의 진짜 신분을 들키지 않기 위해.”강한서의 추측에 한현진의 등골이 오싹해졌다. “어떻게 같은 사람이 아니라는 거야? 그건 너무 많이 앞서간 거 아냐? 기사님은 가족도 있고 아이도 있어. 만약 정말 사람이 바뀐 거라면 가족들은 눈치 채야 하는 거 아냐?”“데가 이 세상에는 그렇게 똑같이 생긴 사람은 없어. 아무리 닮은 쌍둥이라고 해도 가족들은 한 눈에 알아볼 수 있잖아.”강한서가 입술을 짓이겼다. “어쩌면 가족들은 원래 그 사람이 돌아오길 바라지 않을 수도 있지.”한현진은 머리가 터질 것만 같았다. 그녀는 얼른 강한서에게 물었다.
“얼른 다시 가져와. 급히 쓸데가 있어.”강한서: ?“왜 그래?”한현진이 말했다. “전화로 얘기하긴 복잡한 일이야. 아무튼 얼른 전화해서 그림 다시 가져오라고 해. 만약 안 건드렸으면 못 건드리게ㅔ 하고 만약 꺼냈으면 얼른 다시 포장하라고 해. 내가 금방 갈게. 만나서 더 자세하게 얘기해 줄게.”강항서가 대답했다. “알겠어. 지금 당장 다시 가져올게.”한현진은 일찍 퇴근하고 집으로 향했다. 전화에서 한현진이 워낙 급하게 얘기한 탓에 강한서도 그녀가 걱정이라 손에 있던 일을 미리 마친 후 칼퇴근해 집으로 돌아왔다. 만나자마자 강한서를 본 한현진이 물었다. “기사님 아직 그림 안 넣었지?”강한서가 고개를 가로 저었다. “네가 너무 일찍 얘기해서 넣지도 못한 상황이야. 네가 그림을 가진 후로 우리 두 사람을 제외하면 아무도 그림을 본 적이 없어.”한현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서랍에서 일회용 장갑을 꺼내 낀 후 그림과 평지를 함께 꺼내 일회용 봉투에 넣었다. 한현진의 행동을 본 강한서의 눈가가 파를 뛰었다. “증거 수집해?”한현진은 봉토를 밀봉하며 말했다. “정말 증거가 될 수도 있어. 일단 가직해 둬.”“대체 무슨 일이야?”한현진이 장갑을 벗고 나서야 강한서에게 그동안 있었던 일과 본인의 의심과 의혹을 얘기했다. “이번 주에 기사님께서 뭔가 사고를 친게 틀림없어. 그래서 재판장에서 지문 인식하는 걸 거부하는 거겠지. 만약 기사님이 전과범이고 회사에서 그 사람을 그대로 둔다면 기사님이 영향을 끼치는 것 나뿐만이 아니야. 그건 말이 안 되는 것 같아.”“내가 생각해봤는데 일단 지문을 수집하는 게 더 나을 것 같아. 일단 고여정 씨께 이 사람이 대체 무슨 죄를 지었는지 알아봐. 그래야 만일이 사태에 대비를 하지.”한현진의 말을 들은 강한서가 의문을 제기했다. “주혁 씨의 지문은 이미 시스템에 등록되어 있어. 무슨 범죄를 저질렀는지는 신상 조회를 하면 바로 나올 텐데 지문을 지우는 게 무슨 소용 있어?”한현진이 멈칫했다. “없을
주현의 생각은 성월과 달랐다. 송가람은 사랑에 눈이 멀어 남자의 사랑을 바랐지만 주현은 아니었다. 그녀의 목표를 애초부터 매우 명확했다. 주현은 상대방이 자신에게 줄 수 있는 신분과 지위를 노렸다. 그건 20년, 30년을 노력해도 가질 수 없는 것들이었다. 지금 주현이 원하는 모든 것을 얻을 수 있는 지름길이 눈앞에 놓였는데 그 기회를 잡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하지만 주현은 성월의 성격을 잘 알았다. 성월은 반평생을 야심으로 가득 찬 서해금 곁을 지키며 진작 서해금의 충직한 개가 되었다. 성월에게 신분은 뛰어넘을 수 없는 벽 같은 거였고 자신의 미래는 스스로 기회를 잡아 개척해 나가야 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서해금 역시 자신의 두 손으로 그 자리에 오른 것은 아니었다. 송병천과의 결혼이 아니었다면 서민 출신에 남편을 잃고 아이를 키우는 싱글맘이 무슨 수로 지금의 자리에 오를 수 있었을까?‘웃기지 말라 그래.’하지만 그 말을 주현은 감히 성월 앞에선 할 수 없었다. 주현은 애교를 부리며 말했다. “이모, 도와줘요. 신씨 가문으로 돌아가든 아니든 저 한 번 해보고 싶어요. 송가람 씨와 조금이라도 가까이 할 수 있는 일로 부탁해요. 활동이든 파티든 데리고 다닐 수 있는 자리로요. 그래야 신씨 가문에 호감을 살 수 있죠.”성월의 학창 시절, 그녀의 집안은 그야말로 찢어지게 가난했다. 주현의 부모님이 빌려주신 돈으로 급한 불을 끈 덕에 성월은 늘 주현의 집안에 감사한 마음을 갖고 있었다. 주현의 애교에 견디지 못한 성월이 한숨을 내뱉으며 말했다. “송가람 씨 비서로 전근 보내볼게. 너, 네 남자친구한테 기본적인 건 잘 가르쳐. 묻는 말에 아무 것도 대답 못하면 안 돼.”주현이 순간 환한 미소를 지으며 성월에게 팔짱을 끼고 달콤한 목소리로 말했다. “고마워요, 이모! 역시 이모가 날 제일 예뻐할 줄 알았어. 주말에 집에 와서 식사해요. 안 가신지 꽤 됐잖아요...”한편, 사무실로 돌아온 한현진의 마음은 쉬이 가라앉지 않았다. 만약 어제 바로 세정제
서해금이 입술을 짓이기며 중얼거렸다. “이렇게 냉정하다니, 한현진 답지 않아.”성월이 말했다. “사실 전 그렇게 냉담한 것도 당연하다고 생각해요. 오일을 깨뜨린 것도 주혁 씨였고 몰래 부업을 하다 한 대표님 얼굴에 먹칠한 것도 주혁 씨잖아요. 그러니 당연히 원망하는 마음이 있을 거예요.”말이 없던 서해금이 잠시 후 입을 열었다. “인사팀에 잠깐 다녀와요. 일단 주혁을 가람이 운전기사로 전근시켜요.”성월이 놀란 얼굴로 말했다. “대표님, 가람 아가씨에게 운전기사를 붙일 생각이시면 제가 다른 기사님을 찾을게요. 회사에는 지금 마침 새로 입사한 젊은 신입사원들이 많아요. 어리고 건강하고 운전 경력도 전부 5년이 넘었어요. 주혁 씨는 한현진 곁에서 한동안 일을 하신 분인데, 가람 아가씨 운전기사로는 적합하지 않을 것 같아요.”“전근시키라고 하면 시켜요. 제가 이렇게 하는 덴 이유가 있어요. 그러니 성 비서는 나서지 말아요.”성월이 다급히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네.”성월이 사무실을 나서자 주현이 곧바로 그녀에게 다가갔다. “이모, 어떻게 됐어요? 대표님께 말씀 드렸어요?”성월이 고개를 가로 저었다. “대표님께서 이미 송가람 씨에게 다른 운전기사를 붙이셨어. 이미 결정된 일이야.”순간 주현은 조바심이 났다. “왜 갑자기 결정 난 거예요? 회사에서 요즘 새로 신입사원 모집했잖아요. 보안팀은 싫어할 거란 말이에요.”성월이 말했다. “대표님께서 주혁을 송가람 씨 운전기사로 전근시켰어. 지금 인사팀에 가서 그 일부터 처리해야 해.”그 말을 들은 주현이 투덜거렸다. “한현진 밑에 있던 사람이잖아요. 게다가 본인 상사를 배신까지 했고요. 대표님은 무슨 생각으로 그런 사람을 딸 운전기사로 쓰시겠다는 거예요?”순간 얼굴을 일그러뜨린 성월이 주현을 구석진 곳으로 끌고 갔다. 성월은 주변을 확인하고 나서야 주혁의 팔을 내치며 차가운 얼굴로 말했다. “너 미쳤어? 여긴 회사야. 여기서 집인 줄 알고 그렇게 큰 소리로 대표님 뒷담화를 하는 거야?
직원들은 열띤 토론을 벌이고 있었다. 어떤 직원은 회사의 조치가 꽤 인간적이라며 칭찬했고 또 어떤 직원은 아무리 화장실 청소라도 그렇게 부식성이 강한 세제를 쓰진 말았어야 했다며 안전 문제를 인지하지 못한 회사의 관리에 문제가 있다고 비난했다. 이번 일은 단순히 청소 직원이 화상을 입은 것으로 그쳤지만 만약 누군가 범행을 저지르려고 한다면 부식성이 강한 세정제는 범죄자에게 칼을 준비해준 것과 다를 것이 없는 꼴이었다. 의문을 제기하던 직원이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돌려 한현진과 눈을 마주쳤다. 그제야 실언했다는 것을 인지한 직원이 다급하게 말했다. “대표님, 전 회사에서 조치를 제대로 못했다는 뜻이 아니라요. 단지 위험 요소가 될 수도 있는 거니까, 저도 모르게 제일 최악의 상황을 상상해본 거예요.”한현진이 고개를 들었다. “무슨... 위험 요소요?”그 직원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못... 못 들으셨어요?”“죄송해요.”한현진이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조금 전 친구 문자에 답장하느라 못 들었어요.”직원이 입술을 달싹이며 말을 잇지 못했다. 옆에 있던 또 다른 직원이 얼른 말을 이었다. “회사에서 며칠 동안 청소하시는 직원분들이 다치는 사고가 있었잖아요. 그 일 때문에 다들 마음이 뒤숭숭해요.”한현진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한 직원이 말을 이었다. “아, 맞다. 대표님. 다치신 분 중에 대표님이 아는 사람도 있어요. 전에 대표님 운전 기사셨던 주혁 기사님이요. 그 분이 제일 심하게 다치셨어요.”한현진이 미간을 찌푸렸다.“기사님이요? 확실해요? 어제 볼 일 보러 갔다가 기사님 만났을 때까지만 해도 멀쩡하셨는데. 언제 다치신 거예요?”한현진의 말에 직원이 멍해졌다.“그럴 리가요. 며칠 전에 이미 다치셨어요. 대표님과 비슷한 시기에 휴가를 내셨어요.”한현진이 곰곰이 생각했다. “그날 제가 급한 일 때문에 길게 얘기를 나누진 못했어요. 손에 붕대 같은 건 본 기억도 없고 기사님께서도 저한테 그런 얘기는 없으셨는데... 심하게 다치셨어
막 전화를 끊으려던 그 순간, 박안수가 다시 불렀다.“아, 그리고...”“뭔데?”“오늘 경찰서에서 한현진과 마주쳤어.”서해금의 표정이 순식간에 일그러졌다. “한현진이 경찰서엔 왜?”“나도 자세한 건 안 물어 봐서 잘 몰라. 하지만 갑자기 일이 생겨서 간 것 같아. 혼자가 아니라 6, 7살 쯤 되는 어린 아이와 함께 왔었어.”미간을 찌푸리며 잠시 생각하던 서해금이 또 물었다. “한현진이랑 얘기했어? 무슨 얘기했는데?”“괜히 의심할까봐 내가 경찰서에 간 이유를 사실대로 얘기했어. 한현진도 더 묻지 않았고.”우물 쭈물거리며 숨기는 것보다는 차라리 당당하게 대답하는 편이 오히려 의심을 덜 사는 방법이었다. “그게 다야?”“응.”생각의 잠겼던 해금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경찰한테 손에 상처는 뭐라고 얘기했는데?”“회사에서 청소하다가 부식성 제품에 다친 거라고 했어.”서해금이 원망하듯 말했다. “왜 회사에서 다친 거라고 했어. 회사에서 그렇게 부식성이 강한 제품을 쓸 리가 없잖아.”“그렇다고 내가 집에서 다친 거라고 할 순 없잖아. 집에는 회사에서 다친 거라고 했는데. 조사 협조 요청을 나한테만 하는 게 아니잖아. 게다가 그 두 사람은 거짓말을 아예 못 해. 만약 경찰이 내 손에 관해 묻기라도 한다면 바로 들켜 버리는 거잖아.”서해금이 굳은 얼굴로 말했다. “여자는 미쳤고 애는 귀가 먹었는데, 그런 병X도 제대로 통제 못 해?”순간 얼굴을 찡그린 박안수가 말했다. “말 그렇게 하지 마. 두 사람 불쌍한 사람들이야.”“뭐가 불쌍해. 도박쟁이 가정폭력범을 성실하고 부지런한데다 박학다식한 남편으로 바꿔줬는데. 우리한테 고마워해도 모자라.”서해금의 말에 박안수는 왠지 마음이 불편해졌다.너는 대화를 이어 가고 싶지 않았던 서해금이 당부하며 말했다. “이만 끊어. 가람이한테 당신을 기사로 쓰라고 얘기하러 갈 거야. 소식 기다려.”박안수는 목 끝까지 차오른 말을 삼키며 나지막하게 대답했다.“그래.”전화를 끊은 서해금은 아무리 생
“아니.”서해금이 미간을 찌푸렸다. 도무지 마음을 놓을 수 없었다. “경찰에겐 뭐라고 했어?”수화기 너머의 사람이 담담하게 대답했다. “사실대로 얘기했어.”“박안수!”서해금은 참기 힘들 정도로 화가 끓어올랐다. “지금이 농담할 때야?”“농담 아냐.”말하는 사람의 목소리가 더 가라앉았다. “그럼 내가 뭐라고 말할까? 네가 준 신분이니 난 당연히 주어진 대본대로 연기할 수밖에. 그럼 내가 난 박안수라고 얘기했어야 해? 죽은지 27년도 더 된 사람이야. 박안수가 어떻게 돌아와?”그의 목소리엔 고통과 원망으로 가득 했다. 그 순간, 서해금의 얼굴이 끔찍하게 일그러졌다. “지금 날 탓하는 거야?”말이 없던 상대방은 잠시 후 덤덤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런 적 없어.”“박안수, 지금 날 탓하는 거잖아.”서해금이 공격적인 말투로 말을 이었다. “그때 빚을 진 사람도 당신이고, 그 아이디어를 낸 사람도 당신이었어. 당신이 가람이를 키울 능력이 없었던 거고, 당신이 가람이가 더 좋은 환경에서 살길 바랐고, 그래서 나한테 도와달라고 사정한게 당신이었어.”“내가 당신한테 돈 안 줬어? 지금껏 내가 당신한테 준 돈이 얼만데. 당신은 얼마든지 해외에서 지금보다 더 나은 인생을 살 수 있었어. 굳이 한주에 남겠다고 한 건 당신이야. 내가 당신에게 그럴 듯한 신분을 만들어주지 않았으면 당신이 무슨 명분으로 가람이 앞에 나타날 건데? 당신이 이렇게 당당하게 가람이를 만날 수나 있었을 것 같아?”목이 메인 남자는 한참만에야 눈을 감으며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 “네 탓한 거 아냐. 난 그저 이렇게 조마조마 마음 졸이는 생활에 지쳤을 뿐이야. 난 집에서도 감히 옷을 못 벗어. 잠도 깊게 잘 수가 없어. 길에서는 아는 사람이라도 만나면 그 사람은 날 보면서 반갑게 인사하는데 난 그 사람이 누군지도 몰라. 그러면서도 아는 척, 반가운 척 인사를 해야 해. 심지어 아무리 아파도 검사도 못 해. X발, 병원도 가질 못한다고!”남자가 깊은 숨을 몰아쉬며 말했다.
“네, 볼 일 봐요. 회사로 복귀하면 다시 얘기하죠.”한현진이 전화를 끊었을 때 차는 이미 회사에 도착했다. 차에서 내린 한현진은 곧바로 로비로 향했다. 회사의 프런트가 한현진에게 정중하게 인사를 건넸다. 짧게 인사를 받은 엘리베이터에 탄 한현진은 사무실이 아닌 2층을 눌렀다. 회사 건물은 2층부터 화장실이 있었기에 1층엔 화장실이 없었다. 한현진은 아예 2층부터 일일이 확인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오늘 역시 공교롭게도 2층에 도착한 한현진은 마친 청소 중인 직원과 마주쳤다. 근무 시간이 화장실엔 사람이 없었다. 직원은 바닥을 닦고 있었고 세면대와 멀지 않은 곳에 청소차가 세워져 있었다. 그 위엔 청소 용품으로 가득 했다. 한현진은 고개를 숙여 청소 용품을 확인했다. 청소차엔 수많은 플라스틱 통과 병이 있었고 그 안엔 전부 액체가 담겨져 있었다. 굳이 뚜껑을 열지 않아도 소독제의 냄새가 올라왔다. 그러나 그 제품들은 그 어떤 별다른 표시도 되어 있지 않았다. ‘하지만 부식성이 그렇게 강한 용액을 플라스틱 병에 담진 않았을 거 아냐.’“누구세요?”청소차를 관찰하는 한현진의 등 뒤로 사투리 억양이 섞인 여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한현진이 몸을 돌리니 청소 중이던 직원이 보였다. 그 직원은 아래층 청소를 도맡아 하는 분이라 한현진을 본 적이 없었다. 단순히 한현진이 화장실을 사용하려는 것이라 생각한 직원이 말했다. “아직 소독제를 쓰지 않았으니까 볼 일 보려면 얼른 봐요.”한현진은 그 말에 대답하지 않은 채 청소차의 물건들을 쳐다보며 물었다. “아주머니, 여쭤볼게 있어요. 화장실 청소를 하실 때 어느 브랜드의 농도가 얼마인 세정제를 사용하세요?”직원이 말했다. “도매 시장에서 파는 회색통이요. 커다란 거. 엄청 싸요. 이름이 뭔지는 모르겠는데. 사려고요?”한현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화장실이 항상 깨끗해서요. 저도 집에서 써보려고요.”청소 직원이 얼른 한현진을 말렸다. “절대 사지 마요. 변기의 때는 우리가 항상 솔로 조금씩 닦