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현진이 어쩔 수 없다는 듯이 말했다.“상처를 내 얼굴 앞에 갖다 대는데 내가 못 볼 리가 있겠어?”강한서가 부드럽게 쳐다보면서 말했다.“봤으면서 왜 화를 안 내는 건데?”“화를 왜 내? 내가 뭐 고슴도치도 아니고 맨날 화내게?”한현진이 째려보면서 말했다.“기억을 회복했으면서 아닌 척해서, 그런 고생까지 하게 해서 화난 건 사실인데 상처까지 봐서 마음이 아파죽겠는데 어떻게 화를 내. 분명 나를 보호하려다 난 상처인데. 상처마다 내 심장을 쿡쿡 찌르고 있다고.”강한서는 당황한 나머지 다급하게 설명했다.“그런 뜻이 아니라.”“그런 뜻이 아니라는 거 알아. 그런 마음이 있었다면 내가 여보를 좋아하지도 않았겠지. 기억 상실한 척하는 것도 내가 끄집어내 줘야 하고, 도망가려다 일부러 잡힌 척도 해야 하고. 여보가 무슨 생각 하고 있는지 모를 것 같아?”강한서는 할 말을 잃었다.“날 칭찬하는 것 같지 않은데?”한현진이 피식 웃더니 몸을 숙여 강한서의 턱을 잡았다.“왜 칭찬이 아닌데? 정말 궁금해 죽겠네. 혼인 신고할 때도 그럴듯한 핑계로 결혼까지 시키더니. 어떻게 저녁에 정명석을 만나자마자 들통이 나? 계속 기억 상실되었다고 핑계를 대지 그랬어?”강한서는 뻘쭘하게 웃고 말았다. 한현진이 웃을 듯 말 듯 한 표정으로 쳐다보자 그는 이를 꽉 깨물면서 말했다.“내가 계속 기억이 상실된 척하면 너를 빼앗아 갈 거 아니야.”한현진이 웃으면서 말했다.“기억 상실되었을 때는 나랑 이혼하겠다고 그러더니. 정명석과 다시 만나라고 하더니. 마음이 그렇게 넓던 사람이 왜 기억을 회복하자마자 소심해진 거야?”강한서는 사레가 들고 말았다. 기억 상실되었을 때 했던 부질없던 말들이 비수처럼 가슴에 와 꽂혔다.강한서가 나지막하게 말했다.“그때는 약에 취해 제정신이 아니었어. 그때 했던 말은 못 들은 걸로 해.”“그래.”쉽게 넘어가는 한현진의 모습에 강한서는 의외라는 생각이 들었다.그러다 곧 이야기가 끝나지 않았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한현진이 계속해서
강한서가 고개를 끄덕이면서 말했다.“정말 알고 싶어.”설전까지는 완벽하게 속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한현진이 그의 귓가에 속삭였다.“나 독심술을 배웠잖아. 언제 기억을 회복했는지는 물론 언제 정관수술을 했는지, 수술 부위가 어떻게 생겼는지도 알아.”그 자리에 얼어붙은 강한서는 한참이나 한현진을 쳐다보더니 갑자기 물었다.“내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게?”한현진은 발끝으로 그의 복근을 터치하면서 말했다.“어디 한번 계속 해 봐.”강한서는 할 말을 잃었다.앞에 한 말이 진짜인지는 몰라도 이 말은 맞는 말이었다.강한서는 그녀의 발목을 잡고 발바닥을 간지럽혔다.“거짓말하지 마. 애들이 뱃속에서 들으면 어떡하려고.”한현진이 피식 웃더니 물었다.“섣달그믐날 밤 기억나?”‘섣달그믐날 밤?’강한서가 기억을 되돌리면서 말했다.“내가 사진 가져간 날?”“무슨 사진을 가져갔는데?”강한서는 입을 닫고 말았다.‘사진을 말한 게 아니었어.’한현진이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물었다.“무슨 사진을 가져갔는데?”강한서가 우물쭈물하면서 시선을 피했다.“말하지 않을 거야? 그러면 우리 오빠한테 물어보면 되지.”한현진이 핸드폰을 꺼내려고 하자 강한서가 말리면서 부자연스럽게 말했다.“그냥... 여보의 어릴 적 사진...”“어떤 사진?”강한서가 머뭇거리면서 침대 협탁 위에 있는 책 사이에서 사진 한 장을 꺼내 한현진에게 건넸다.한현진이 한창 동안 보면서 침묵을 지켰다.“어떻게 된 거 아니야? 그 많은 예쁜 사진을 놔두고 왜 이렇게 못생긴 사진을 가져온 건데?”강한서가 말했다.“이 사진만 나한테 없거든.”한현진의 마음은 사르르 녹는 것만 같았다.“바보. 사진첩에서 사진을 훔친걸 우리 아빠가 알면 기억이 회복된 거 들키면 어떡하려고.”강한서는 뻘쭘하기만 했다.“그때 술김에 훔친 거야. 내내 불안에 떨고 있었는데 아버님이 아직 발견 못 한 것 같더라고.”“그럴 리가. 아빠가 내 어릴 적 물건을 얼마나 소중히 여기시는데. 사진첩을 자주 보셔
“왜요?”한현진은 멈칫하고 말았다.이때 송민준이 참지 못하고 말했다.“2주나 지났는데 이제 와서 수습해? 물에 빠졌다가 머리가 어떻게 된 건가? 아님 머리에 든 것이 없나? 소 잃고 외양간 고치는 거잖아. 머리가 정상이면 이런 짓을 했겠어?”한현진과 강한서는 할 말을 잃고 말았다.비록 욕이 담기지는 않았지만 그야말로 듣기 거북했다.한현진이 조심스럽게 물었다.“오빠. 어떻게 강한서가 가져간 걸 알게 된 거에요?”송민준이 콧방귀를 뀌었다.“내가 뒷수습해 줬는데 모를 리가. 내가 먼저 사진첩을 봤기 다행이지 아버지가 먼저 보셨으면 바로 경찰에 신고했을 거야.”송민준의 말을 들어보면 그날 집을 떠나자마자 사진이 한 장 모자라다는 걸 발견하고 몇 장 더 뽑아서 도우미 아줌마한테 회사에 두겠다고 송병천한테 전해달라고 했다.보물처럼 여기던 사진이 없어졌는데도 묻지 않았던 이유가 바로 이 때문이었다.한현진이 강한서에게 술을 먹여 속마음을 떠보고 있을 때, 송민준은 이미 사진 한 장으로 강한서가 기억 상실한 척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뒷수습까지 해준 것이다.똑같은 배에서 나왔는데 유전자가 이렇게 우월할 수가 없었다.한현진은 송민준이 강한서한테 뭐라 하는 것이 듣기 싫었는지 편을 들어주기 시작했다.“그날은 취해서 머리가 늦게 돌아가서 그런 걸 거예요. 오빠도 참. 진작에 발견했으면서 왜 말하지 않았어요?”“그래?”송민준이 서서히 말했다.“난 너희 둘만의 흥취인 줄 알았지. 머리에 물이 들어가서 기억이 상실된 전남편과 그런 남편을 버리지 않는 임산부와의 이야기랄까... 한서 씨가 도망가면 네가 쫓으러 다니고. 그야말로 천생연분 아니냐고.”송민준의 비아냥거림의 상대가 되고 만 한현진은 할 말을 잃었다.“오빠. 좋은 소식 하나 알려드릴게요.”송민준이 진지하게 말했다.“아이가 너의 성을 따르기로 했어? 이것 빼곤 좋은 소식이 없을 것 같은데.”송민준은 옆에 강한서가 있다는 것을 알고 일부러 이러는 것 같았다.하지만 곧 아이 아빠가 될 강한서
한현진이 목을 축이더니 말했다.“오빠. 내년 설에 돈 봉투를 두 개나 준비해야겠어요.”아무런 반응 없던 송민준은 한참 후 이를 꽉 깨물면서 말했다.“이런 젠장! 글쎄 왜 마음이 넓어졌다 했어! 우리 동생을 고생시키니까 좋아? 정말 대단하네.”강한서가 진지하게 말했다.“저는 차라리 고생하는 사람이 저였으면 좋겠어요.”“입만 번지르르해서. 능력 있으면 자기도 임신해 보든가!”할 말을 잃은 강한서는 계속 대화를 이어가서는 안 된다고 판단했다.한현진이 배를 끌어안고 웃으면서 말했다.“아직 젊을 때 과학기술이 좋아지면 셋째는 여보가 낳아.”강한서는 어쩔 수 없다는 듯이 한현진을 쳐다보았다. 강한서에게 이런 장난을 쳐도 한 소리를 듣지 않는 사람은 한현진뿐이었다.“쌍둥이라...”혼자서 중얼거리던 송민준은 갑자기 기분이 좋아졌다.“내가 아버지한테 말할까 아니면 너희가 직접 말할래?”“나중에요... 한서가 기억 상실된 것부터 해결하고요. 오래 걸리진 않을거예요.”“내가 뭐 도와줄 거 있어?”“아직요. 아, 맞다. 오빠. 저번에 조사해달라고 했던 도일준이라는 사람, 신상 파악되셨어요?”강한서는 처음 들어보는 이름에 귀를 쫑긋 세웠다.송민준이 말했다.“응. 확인해 봤는데 아줌마랑 아무런 연관 없는 것 같더라고.”한현진이 급히 물었다.“어떤 걸 확인했는데요?”“도일준은 우리나라 사람이 아니라 M 국 사람이더라고. 할아버지 때 M 국에 이민을가셨고 본명은 이헌이었어. 부모님이 전부 다 의사 선생님이셨고 본인도 의학전공이더라고. 30년 전쯤인가 아버지가 한주시에 3년 반 동안 학술교류를 오면서 이름을 도일준이라고 개명한 거야. 국내에 있었던 그 3년 반을 조사해 보려고 했는데 시간이 너무 오래 지나 증거가 없더라고. 그때 자주 사용했던 주소는 아줌마랑 같은 동네가 아니라 아무런 접점도 없었어. 이 도일준이라는 사람도 많이 불행했더라고. 20년 전 집에 가스가 폭발해 와이프는 임신한 채로 사망했고 그 사람도 그때 이후로 사고 후유증으로 수술칼을
“23번 유현진 씨, 가족분께 연락하셨나요?“이제 간호사가 몇 번째로 유현진을 재촉하는지 알 수 없었다. 그녀는 고개를 숙여 휴대폰을 흘긋 확인해보았으나 강한서에게 건 전화는 여전히 응답이 없는 상태였다.한주시 북부 환형 육교에서 연속 차량 충돌 사고가 발생하며 버스 한 대가 옆으로 기울다 강에 빠져버렸다. 그로 인해 수십 명의 부상자가 병원으로 이송되었고 그들의 가족들이 하나둘씩 병원에 도착했지만 오직 그녀의 남편은 늦도록 연락되지 않았다.처참했던 사고 현장이 여전히 눈앞에서 어른거렸다. 사고 당시 느꼈던 공포보다 이 순간 밀려오는 서운함에 마음이 더 아팠다.“유현진 씨?”간호사의 부름에 유현진이 번뜩 정신을 차렸다. 그녀의 셔츠는 핏자국으로 얼룩져 있었는데 그 덕분에 새하얀 얼굴이 더 창백해 보였다. 그녀는 목소리가 갈라지고 몰골이 처참했으나 여전히 품위 있게 대답했다.“죄송합니다. 연락되지 않는 것을 보니 지금 좀 바쁜 것 같아요. 제가 직접 사인해도 될까요?”“안타깝지만 그럴 수 없어요. 만약 가족분께서 사인할 수 없다면 병원에 남아 좀 더 지켜봐야 할 거예요. 뇌진탕은 빠른 진단을 내릴 수 없으니까요. 병원에선 당신의 생명과 안전을 책임져야 해요.”유현진은 입술을 꾹 닫고 망설이다가 고개를 들었다. “그럼 제가 다시 전화를 걸어 볼게요.”그녀는 휴대폰을 들고 병실 밖으로 나왔다. 의료 기기를 담은 플라스틱 카트를 들고 지나가던 두 간호사를 만나자 그녀가 몸을 살짝 움직여 길을 비켜줬다. 그때, 간호사 중 한 명이 말했다.“16번 환자, 누군지 알아요?““아뇨. 누구죠?““송민영 몰라요? 엄청나게 유명해요! 얼마 전에 찍은 핫한 드라마 ’비밀의 연인‘에서 여주인공 역할을 맡은 분이에요.““저런! 그분, 많이 다치셨어요?““조금 늦게 오셨어요. 그리고 팔에 스친 상처가 있긴 한데 그때 이미 약간 아문 상태였어요. 하지만 연예인들 얼굴이 간판이잖아요. 당연히 우리 같은 일반인과 비길 수 없죠. 내가 만약 송민영과 같은 얼굴과 몸매
뜨거운 열기가 귓가에 뿜어지고 달아오른 체온까지 더해 유현진의 귓불을 뜨겁게 달구었다. 다만 그녀는 복부에 난 멍 때문에 몹시 괴로워하며 입술이 하얗게 질렸다.다행히 불이 꺼져있어 그는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그녀는 고개를 들고 그의 목젖에 키스했다. 강한서는 가쁜 숨을 몰아쉬며 짙은 눈빛으로 머리를 숙이고 그녀의 목덜미를 한입 물었다. 곧이어 유현진이 담담한 어투로 말했다.“나 오늘 배란기야, 할 때가 됐어.”강한서는 몸이 굳어지더니 눈가에 스친 욕망도 순식간에 사라졌다. 그는 어두운 표정을 지으며 살짝 분노에 찬 말투로 물었다.“네 머릿속엔 온통 이 생각뿐이야?”유현진은 천장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뜨거웠던 귓불도 서서히 열기가 식었다.“너희 엄마가 계속 날 다그치잖아. 나 혼자 할 수 있는 일도 아닌데, 차라리 너 정자 기증할래? 그럼 내가 시험관시술 할게.”강한서가 비난 조로 되물었다.“엄마가 재촉한 게 아니라 네가 사모님 자리를 지키지 못할까 봐 아이라도 낳으려는 거 아니야?”유현진은 가슴을 후벼 파듯 아팠지만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로 옅은 미소만 지었다.“맞아, 네가 날 버리면 어떡해? 이렇게 해서라도 우리 둘 사이를 더 단단하게 만들어야지.”강한서는 단추를 채우고 짜증 섞인 눈길로 그녀를 쳐다봤다.“이런 데 신경 쓰지 마. 난 아이 안 가질 거야.”유현진의 미소 짓던 얼굴이 조금 굳어졌다. 그녀는 문밖을 나서려는 강한서를 불러세웠다.“강한서, 넌 대체 아이를 갖기 싫은 거야 아니면 내 아이를 갖기 싫은 거야?”강한서는 걸음을 멈추고 차갑게 쏘아붙였다.“뭐가 다른데?”유현진은 주먹을 꽉 쥐고 대답했다.“같은 뜻이라면 결혼도 아무 의미 없겠지. 이혼해 그냥.”“네 마음대로 해.”강한서는 이 한마디를 내뱉은 후 문을 박차고 나갔다.유현진은 베개를 문에 힘껏 내던졌고 눈가에 눈물이 맺혔다.다음 날 아침, 조깅을 마치고 돌아온 강한서는 식탁 앞에 앉아 메일을 확인했다.아침을 준비한 지 반나절이 됐지만 그는 도통 수저를
차미주는 꿈속에서 헤매다가 노크 소리를 듣고 잠이 깼다. 문을 연 순간 유현진이 한 손에 캐리어를 들고 떡하니 서 있었다. 그녀는 입꼬리를 씩 올리며 청아한 목소리로 물었다.“숙박 좀 할 수 있을까?”차미주는 그녀에게 아이스 콜라 한 병 건넸다. 유현진이 콜라를 건네받자 그녀는 불쑥 제 머리를 툭 쳤다.“내 정신 좀 봐. 너 탄산음료 안 마시지? 우유 갖다 줄게.”“아니야, 괜찮아.”유현진은 캔 뚜껑을 따고 한 모금 마셨다.“못 마시는 게 어디 있어?”전에는 임신 준비 때문에 술과 담배, 음료 및 자극적인 것들을 싹 다 멀리했지만 이혼을 앞둔 지금은 이런 것 따위 전혀 신경 쓸 이유가 없었다. 기분이 내키는 대로 하면 그만인 것을.‘임신 준비? 그딴 건 무능한 강한서더러 하라고 해!’“너 정말 강한서 씨랑 이혼할 생각이야?”차미주는 소파의 반대편에 앉으며 확실치 않은 표정으로 물었다.“응.”유현진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말을 이었다.“그 사람 또 송민영이랑 만나.”차미주는 대뜸 욕설을 퍼부었다.“그 여잔 대체 왜 이렇게 뻔뻔한 거야? 애초에 결혼할 때도 찾아와 소란을 피우더니 3년이 지난 후 또다시 나타나? 세상에 남자가 없대? 아니 왜 유부남을 물고 늘어지는 거냐고? 강한서 그 자식도 한심해. 놀다 버린 장난감에 아직도 미련이 남은 거야?”유현진은 순간 말문이 막혔다.‘지금 대체 누굴 욕하는 거지?’차미주는 마른기침을 하고 계속 말을 이어갔다.“너 지금 이런 사소한 것에 연연할 때가 아니야. 그 두 사람이 함께 있으면 넌 그냥 빠지려고? 왜 그런 비겁한 인간들을 봐줘? 끝까지 맞서 싸우란 말이야! 그 여자가 온갖 청순한 척을 다 떨잖아. 사람들 앞에서 그 가면을 확 벗겨버려! 청순은 개뿔, 유부남이나 만나는 뻔뻔스러운 년인 주제에!”“그래서? 내 결혼생활이 파탄 났다는 걸 온 세상에 알려? 남편 하나 제대로 관리하지 못한 가여운 여자로 남아?”유현진이 한숨을 내쉬었다.“이 결혼은 이미 실패야. 떠날 때까지 비참하게 굴고 싶
“네? 대표님은 아직 주무십니다.”“그럼 침실로 가서 깨워요!”유현진은 살짝 화가 치밀었다. 전화기 너머로 한참 침묵이 흐르더니 중저음의 남자 목소리가 들려왔다.“무슨 일이야?”질문이 너무 자연스러웠고 심지어 이제 막 잠에서 깬 잠긴 목소리라 한순간 유현진도 저 자신을 의심할 뻔했다.그녀는 입술을 꼭 깨물며 숨을 깊게 들이쉬었다.“며칠 뒤에 네 옷장의 옷들이 어느 위치에 있는지 리스트를 작성해서 보내줄게. 앞으론 이런 따분한 일들로 전화 걸지 말았으면 좋겠어!”“따분한 일?”강한서가 차갑게 웃었다.“유현진, 이런 따분한 일들은 네가 가장 좋아하던 일이었잖아. 내가 무슨 속옷을 입는 것까지 일일이 책임졌잖아. 이게 고작 네가 추구하던 삶이 아니었어?”유현진은 숨이 턱 막혔다. 그녀는 주먹을 불끈 쥐고 심장이 쑤시듯이 아팠다.강한서에게 자신이 그저 이런 이미지였다는 걸 진작 알고 있었지만 막상 듣게 되니 느낌이 새삼 달랐다.대체 마음이 얼마나 단단해야 이런 수모를 겪었을 때 아무런 느낌이 없을까?전화기에 잠시 침묵이 흘렀고 아무도 말을 하지 않았다.한참 후에야 유현진이 잠긴 목소리로 먼저 입을 열었다.“내가 봐도 한심했어. 그러니까 이젠 더이상 책임지지 않겠다고. 얼른 사인해. 우리 둘 사이 빨리 끝내자.”화제가 또다시 이혼으로 돌아왔고 이제 막 화가 가라앉았던 강한서는 금세 분노가 차올랐다.“제발 적당히 해!”유현진은 피식 웃으며 비난 조로 되물었다.“내가 뭘 어쨌는데?”“너 후회하지 마!”강한서는 이 말만 남기고 전화를 툭 끊었다.유현진은 입술을 꼭 깨물었다. 자상하게 챙겨주고 묵묵히 헌신했던 지난날들이 강한서에겐 그저 한낱 놀림거리에 불과하다니.매번 그를 위해 여러 장소에서 입을 옷들을 정성껏 챙겨줄 때 정작 뒤에서 그녀를 바라보던 그의 눈빛엔 짜증이 잔뜩 담겨있었을지도 모른다.종일 하루 세끼와 먹고 입는 것에 신경 쓰는 여자가 얼마나 창피했을까? 그녀가 생각해도 이런 저 자신이 너무 한심하고 어리석어 보였다.“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