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현진이 대답했다. “알아요. 다른 사람에게 얘기하지 않아요. 그러니까 성우 씨도 제가 이 일에 대해 물어봤다는 걸 강한서에게 비밀로 해줘요.”“제가 미쳤다고 얘기하겠어요? 제가 오늘 이 얘기를 형수님께 한 걸 알면 제일 먼저 절 찾아올 사람이 강한서예요. 강운이 어머니를 도와 그 사람들 입을 막은 게 한서예요. 전 죽을 각오를 하고 형수님께 말씀드리는 거라고요. 저 배신하시면 안 돼요.”차미주가 한성우에게 하찮은 눈빛을 보냈다. “겁에 질린 꼴 좀 봐. 강한서가 뭐 호랑이도 돼? 널 잡아먹기라도 하는 거야?”한성우가 차미주를 부추기며 말했다. “그럼 네가 한서랑 싸우던가.”말문이 막힌 차미주가 순간 그 개자식에 의해 유치장에 들어갔던 일을 떠올리고는 헛기침하더니 곧 말을 돌렸다. “날 건드리지도 않았는데 내가 걔랑 왜 싸워?”한성우가 그런 차미주를 비웃으며 말했다. “이 겁쟁이야, 넌 그냥 나만 괴롭힐 수 있냐?”그룹 통화를 끈 한현진은 오랜만에 탐정 케이에게 문자를 보냈다. [한 번 뵐 수 있을까요?]상대방이 곧바로 답장을 보냈다. [A/S는 안 돼요.]할 말을 잃은 한현진이 문자를 전송했다. [전에 일이 아니라, 새로운 의뢰요.]탐정 케이가 무슨 의뢰냐고 물었다. 한현진은 그에게 당시 그들과 사고를 당했던 택시 운전기사와 승객의 정보를 알아봐달라고 했다. 탐정 케이는 한참 동안 답장이 없었다. 기다리다 조급해진 한현진이 다시 문자를 작성했다. [수고비는 전의 3배로 드릴게요. 정보를 찾아주시기만 하신다면요.]하지만 한현진이 그 문자를 전송하자 한참이 지나도 문자 옆에 표시된 1일은 사라지지 않았고 심지어 프로필도 비공개로 되어 있었다. 한현진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개자식, 날 차단해?’그녀는 어두운 얼굴로 탐정 케이에게 전화를 걸었다. 연속적으로 전화를 네 번이나 끊자 한현진이 분노했다. 그녀는 굳은 얼굴로 메시지를 작성해 그를 협박했다. [전화 안 받으시면 탐정님 신상정보를 인스타그램에 올려버릴 거예요.
[현진 이모, 저 세뱃돈 엄청 많이 모았어요. 내일 저랑 같이 놀러 갈래요? 한서 삼촌은 데려가지 마요.]멈칫하던 한현진이 빙그레 웃으며 문자를 작성했다. [그래. 하지만 내일 낮엔 일이 좀 있어서 저녁쯤 나가는 건 어때?]잠을 자지 않고 답장을 기다리던 은서가 문자를 확인하고는 바로 답장을 보냈다. [좋아요!]답장을 보낸 후에야 자기가 너무 적극적이었나 싶었던 건지 한참 문자를 쓰고 지우기를 반복하더니 또 문자 하나를 전송했다. [현진 이모, 아직도 안 주무셨어요?][한서 삼촌 기다리고 있어.][삼촌 또 야근해요?][그렇다고 할 수 있지.][이모는 정말 좋은 사람이에요.]갑작스러운 칭찬에 한현진이 어리둥절해졌다. 은서가 또다시 문자를 보냈다. [한서 삼촌이 이모는 예쁘고 음식도, 연기도 잘한다고 했어요. 이모를 만나고 나니까 이모는 삼촌이 말한 것보다 더 좋은 사람인 것 같아요. 저랑 문자하는 것도 좋고 제가 하자는 대로 다 해줘서 좋아요. 한서 삼촌 기다리는 것도 좋고... 아무튼 다 좋아요. 현진 이모, 전 이모가 너무 좋아요.]“...”‘요즘 애들은 이렇게 입에 꿀이라도 바른 것처럼 직설적으로 칭찬하는 거야?’아무리 뻔뻔한 한현진도 아이의 칭찬엔 얼굴이 뜨거워지는 것 같았다. 부끄러운 건 부끄러운 거고, 그녀는 지금 은서에게 물어봐야 할 것이 있었다. 한현진이 은서에게 전화를 걸었다. “은서야, 너 생일 언제야?”“내일이요.”생각지 못했던 대답에 한현진이 멍해졌다. “내일?”“한서 삼촌이 그랬어요. 내 생일은 내 마음대로 정하는 거라고요. 내일 이모랑 놀러 가니까 내일 생일 하고 싶어요.”“...”한현진은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 “은서야, 이모는 진짜 생일을 묻고 있는 거야.”“그럼 한서 삼촌이랑 같은 날이에요.”“강한서랑 같은 날이라고?”한현진이 멈칫했다. 강한서의 생일은 9월이 아닌 이번 달 말이었다. ‘내 추측이 틀린 건가?’“은서야, 한서 삼촌이 너한테 부모님 얘기한 적 없어?”은서가 말
한현진이 웃음을 참으며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어렸을 땐 티가 안 나. 나도 어렸을 땐 밖에서 많이 놀아서 하얗지도 않았어. 크면서 점점 하얘질 거야. 피부가 하얗지 않아도 괜찮아. 건강하고 자신감만 있으면 어떤 피부색이든 예뻐.”은서가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기분 좋게 한현진과 약속 시간을 정하고 전화를 끊었다. 한서는 은서가 보내준 아이의 사진을 보고 있었다. 사실 은서가 누굴 닮았는지는 전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확실한 건 주강운은 닮지 않았다는 사실이었다. 강한서의 “장례식”에서 주강운은 은서를 봤었지만 그는 어떤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한현진이 한숨을 내쉬었다. ‘설마, 정말 내가 괜한 착각을 한 건가?’——“민희 언니, 오늘 감이 좋으시네요. 얼마나 딴 거예요?”같이 카드를 하던 여자가 송민희에게 물었다. 송민희가 웃으며 말했다. “따기는 뭘. 조금 전 졌던 것만큼 다시 이긴 거야. 오늘 다들 집 가지 마. 조금 이따 여기서 야식 먹자고.”한 여자가 장난스레 말했다. “저희야 괜찮지만 단해 오빠 휴식하시는데 방해될까 봐 그러죠.”떠들썩한 분위기를 좋아하는 송민희는 자주 사람을 불러들여 집에서 카드를 놀았다. 그러나 강단해는 조용한 것을 좋아했기에 그는 송민희와 카드를 하는 사람들이 집으로 오면 인사는커녕 바로 방으로 올라갔다. 그러니 그들도 새벽까지 카드를 하는 경우는 극히 드물었다. “그 사람은 그 사람대로 쉬고, 우리는 우리대로 놀면 돼. 서로 방해되는 것도 아니잖아.”송민희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서재의 방문이 갑자기 열리더니 강단해가 외투를 걸치고 급히 밖을 나섰다. 깜짝 놀란 송민희가 몸을 일으키며 물었다. “당신, 이 저녁에 어딜 가요?”강단해가 신을 갈아신으며 대답했다. “회사에 급한 일이 생겨서 처리하러 가야 할 것 같아.”“이렇게 늦은 시간에 무슨 일이요?”“말해도 모르잖아.”말하며 강단해는 문을 열고 그대로 집을 나섰다. 몇 마디 중얼거리던 송민희는 다시 카드에 집중했다. “저기,
“난 또 누구라고. 우리 집안 큰도련님이셨네. 이 늦은 시간에 잠은 안 자고 왜 나한테 전화한 거야?”덤덤한 말투였지만 자세히 들으면 비아냥거림이 섞여 있었다. 그녀는 여전히 강한서가 강현우를 경찰에 신고한 일로 그를 원망하고 있었다. 비록 강현우는 무사히 돌아왔지만 그녀는 엄마로서 그때의 분노를 삼킬 수가 없었다. 강단해가 계속 충동적으로 일을 만들지 말라고 설득하지 않았다면 그녀는 진작 친정집을 동원해 강한서에게 책임을 물었을 것이다. 비꼬는 송민희에 강한서는 화를 내기는커녕 오히려 퍽 다정한 말투로 입을 열었다. “작은어머니, 저희 엄마가 경찰서에 연행됐어요.”송민희가 하하 웃더니 말했다. “하늘이 무심하시지는 않구나.”강한서가 말을 이었다. “삼촌 집에 안 계시죠?”멈칫하던 송민희가 물었다. “그건 왜 묻는 거니?”강한서가 말했다. “엄마가 도움을 청할 곳이 저희 집안 삼촌 말고는 없잖아요.”송민희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전화해서 날 모욕하려는 거니?”“아뇨. 전 작은어머니를 모시러 온 겁니다.”그 말에 송민희가 멍해졌다. “뭐라고?”강한서가 머뭇거리며 말을 이었다. “아무래도 도련님과 형수 사이가 유별한데, 엄마가 일이 생겼으니 삼촌에게 도움을 청할 수도 있죠. 하지만 삼촌 혼자 가는 건 좀 아닌 것 같은데, 작은어머니는 어떻게 생각하세요?”주먹을 꽉 움켜쥔 송민희가 고민 가득한 표정을 지었다. 한참이 지나서야 그녀가 입을 열었다. “너 지금 어디니?”“작은어머니 댁 앞이요.”“...”강한서가 말을 이었다. “나오세요. 사모님들 모두 가셨어요. 오늘 밤 일은 아무도 모를 거예요.”강한서는 송민희의 체면까지 모두 고려한 것 같았다. 송민희가 심호흡을 내뱉었다. 인정하고 싶지 않았지만 강한서는 아들인 강현우보다 훨씬 능력이 뛰어난 아이였다. ‘신미정 그 멍청이는 무슨 재간으로 이런 아들을 낳은 거야?’강한서가 기다린 지 얼마 되지 않아 송민희가 모습을 드러냈다. 강렬한 레드 외투로 갈아입은 그녀는 생기가
송민희는 오늘 밤 무슨 일이 있어도 강단해가 신미정을 도와주는 일이 없도록 해야겠다고 마음을 다잡았다. 그렇게 생각한 송민희가 휴대폰을 꺼내 두 형제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메시지를 전송한 그녀가 고개를 강한서를 쳐다보았다. “네가 네 엄마에게 이렇게까지 냉정하게 굴 줄은 몰랐네.”강한서가 태연하게 말했다. “엄마도 저에게 특별히 따뜻한 분은 아니셨잖아요. 작은어머니, 아들이 사고를 당했는데 유산을 나누는 일에만 급급한 엄마를 보신 적 있으세요?”송민희는 더 이상 말이 없었다. 솔직히 말해서 송민희는 강한서에게 반감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이었다. 만약 신미정이 매번 정인월 앞에서 강한서의 성적을 자랑하며 강현우를 무시하지만 않았다면 송민희는 강현우에게 강한서를 따라 배우라고 했을 것이다. 하지만 하필, 신미정은 인정머리가 없는 인간이었다. 신미정은 늘 송민희 앞에서 강현우의 성적이 낮다는 얘기를 언급했다. 그녀는 심지어 일부러 많은 사람들 앞에서 그 얘기를 꺼내기도 했다. 강현우에게 성적을 묻고는 강한서는 만점을 몇 개를 맞았느니, 한 번도 한서의 공부를 걱정해 본 적이 없다느니 하면서 자랑했다. 강한서가 좋은 성적을 거둔 것에 본인은 아무것도 도와준 것이 없으면서도 신미정은 모든 것이 전부 자기 덕분인 듯 말했다. 부모에 자식은 어떤 상황에서도 제일 귀한 보물이었다. 그러니 그런 귀에 거슬리는 비교를 듣고 싶어 하는 엄마는 없었다. 그러니 신미정은 진작 송민희에게 미운털이 박혔던 것이다. 강한서가 실종되었을 당시, 회사 경영권 분쟁을 떠나서 송민희는 진심으로 강한서를 걱정했고 또 그의 생사를 알 수 없어 슬퍼했었다. 신미정이 그토록 다급하게 강한서의 유산을 노릴 것이라고는 송민희 역시 생각지도 못한 일이었다. 그들 가족이 무슨 난리를 피우든 그건 송민희가 간섭할 문제가 아니었다. 하지만 강단해가 그 일에 끼어든 건 송민희를 불쾌하게 만들었다. 그녀는 늘 남편인 강단해를 똑똑한 사람이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그 일에서 강단해가 보인 행동은
강단해는 송민희의 말을 귓등으로도 듣지 않은 채 나지막이 말했다. “투정 그만 부리고 차에 가서 기다려.”송민희가 강단해의 옷을 잡고 사나운 목소리로 말했다. “안 된다고 했잖아요. 형님은 아들이 없어요, 딸이 없어요? 당신이 왜요?”“한서와 민서가 오겠다고 했으면 왜 나한테 전화했겠어? 어쩔 수 없으니까 날 찾은 게 분명하잖아.”화가 난 송민희가 어이없는 웃음을 흘렸다. “자기 아들딸도 풀어주지 않으려는 사람을 당신이 뭔데 도와주려는 건데요? 게네들이 안 온다고 해도 친정집 식구들도 있잖아요. 형님은 동생도 있는데 왜 당신이 나서서 나대는 거예요?”강단해의 얼굴이 순간 일그러졌다. “말을 왜 그렇게 하는 거야? 내가 나서서 나대다니? 형수님도 우리 강씨 가문 식구잖아. 형수님에게 일이 생기면 우리 가문은 얼굴을 어떻게 들고 다니라는 거야?”“강씨 가문 체면을 생각하기는 한 거예요?”송민희가 냉소 지었다. “그럼 오늘 밤 무슨 일이 있어서 형님이 경찰서에 잡혀 왔는지 알기는 해요?”강단해가 미간을 찌푸렸다. “무슨 일이든 우리가 그냥 모른 척 넘어갈 수는 없잖아.”“검찰이 전 의원을 데려갔어요. 형님은 전 의원을 딸과 장씨 가문을 맺어줬고요. 지금 검찰에서 전 의원의 비리를 캐고 있어요. 만약 형님이 정말 전 의원과 어떤 관련이 있다면 우리 가문도 같이 휘말리는 거라고요. 그런데도 형님을 풀어주는 일에 힘쓰고 싶어요? 사람들이 이 일을 빌미로 공격할까 봐 두렵지는 않아요?”강단해가 굳은 얼굴로 입술을 짓이겼다. “형수님께서는 전 의원과 경제적 거래가 없다고 하셨어. 이번 일은 형수님관 관련 없을 거야.”“형님 말이면 다 믿는 거예요? 형님이 그렇게 얘기하지 않았다면 당신이 이렇게 부랴부랴 달려와 형님을 감싸주려고 했겠어요?”강단해가 입술을 짓이겼다. “아무리 그래도 한 가족이잖아. 이대로 내버려둘 수는 없어.”“내버려둘 수 없으면요? 어떻게 할 건데요? 우리 가문 이미지 전부를 걸기라도 할 거예요? 아주버님이 돌아가시고 지금
말하며 송민희는 휴대폰으로 가족사진을 보여주었다. “형사님, 오해예요. 저 사람은 제 남편이에요. 얘들은 우리 조카들이고요. 설이라 조카들이 고모부에게 서프라이즈 이벤트를 해주고 싶다고 해서 일부러 식당까지 빌려 설 인사를 하려고 했거든요. 술을 마시기 싫어서 일부러 저러는 거예요.”강단해의 얼굴이 분노로 새파랗게 질려있었다. 그는 이를 악물고 말했다. “저 여자가 말도 안 되는 소리 하는 거예요.”경찰은 강단해를 힐끔 쳐다보더니 송민희가 보여준 사진을 자세히 관찰하고는 그녀에게 휴대폰을 돌려주며 손을 흔들었다. “입구 막지 마시고 차는 옆으로 빼주세요.”“알겠어요. 얼른 갈게요.”경찰에게 사과한 송민희는 고개를 돌리자마자 웃음을 거두고 조수석에 올라타 차갑게 말했다. “가자.”뒷좌석의 강단해는 직업 군인 출신인 두 조카 사이에 앉았다. 강단해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에 놓여있었다. 그는 지금 차에서 내리기는커녕 조금만 움직여도 손목을 꽉 잡혔다. 한평생 이런 창피는 당해본 적이 없는 강단해가 어두운 얼굴로 송민희에게 소리쳤다. “넌 정말 대단한 여자야. 내일 당장 이혼 서류 제출해.”송민희가 그런 강단해를 힐끔 쳐다보며 태연하게 말했다. “안 할 거예요.”스포츠카가 강한서가 타고 있던 차량을 지나치자 강한서는 갑자기 차창을 내려 덤덤한 시선을 보냈다. 멈칫, 행동을 멈춘 강단해는 그제야 송민희가 이곳을 정확하게 찾을 수 있던 이유를 알게 되었다. 그의 얼굴이 분노로 붉으락푸르락해졌다. 그들이 경찰서를 나서자 강한서가 모습을 드러냈다. 강단해는 송민희에 의해 잡혀갔지만 그가 데려온 변호사는 아직 경찰서에 있었다. 그 변호사는 지금 강단해의 비서와 연락해 지금 이 상황을 어떻게 처리하면 좋을지 상의하려고 했다. 소리 없이 그 변호사에게 다가간 강한서가 상대방의 휴대폰을 쓱 가져갔다. 그에 변호사가 깜짝 놀라며 입을 열었다. “대표님?”강한서가 휴대폰을 돌려주며 태연하게 말했다. “돌아가세요.”“하지만—”“아니
멈칫하던 강민서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신미정을 불렀다. “엄마...”신미정이 울음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민서야, 엄마가 오늘 일부러 너한테 그렇게 못되게 대한 거 아니야. 네가 한현진을 도와 날 속인 게 정말 너무 화가 나서 그랬어. 그래서 그런 거야. 너 어렸을 때 엄마가 널 얼마나 아꼈는데. 뭐든 좋은 건 전부 너에게 줬어. 네가 경찰서에 들어갔을 때도 내가 여기저기 부탁해서 겨우 꺼내줬는데, 네가 엄마를 나 몰라라 하면 안 되지.”강민서가 시선을 내리고 쉰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엄마, 전 못 도와드려요. 오빠가 허락하지 않을 거예요.”“그럼 넌 그렇게 두 눈 멀쩡히 뜨고 엄마가 들어가는 걸 보고 있을 거야? 넌 이 안에 어떤 상황인지 알기는 해? 7, 8명이 한방을 쓰고 있어. 침대도 없고 악취도 심하다고. 보일러도 없어서 추위에 덜덜 떨고 있어. 민서야, 엄마 몸이 안 좋아서 정말 못 견디겠어. 엄마 좀 도와줘.”강민서가 입술을 짓이겼다. “저도 어떤 곳인지 알아요. 거기선 엄마 성질 좀 죽여요. 안에 있는 사람들, 전부 범죄의 벼랑 끝에 있는 사람들이에요. 최대한 건드리지 마셔야 조금이라도 편하게 지낼 수 있어요.”강민서의 말에 신미정은 울던 것도 멈추고 그만 멍해졌다. 살려달라고 전화한 것이지 설교나 들으려고 했던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불쌍한 척해도 통하지 않자 연기는 아예 집어치운 신미정이 차가운 얼굴로 말했다. “강민서! 이 배은망덕한 것. 내가 널 괜히 예뻐했어. 사인하고 돈 좀 내면 되는 건데, 그것도 못 해줘? 내가 이 나이에 여기서 이러고 있으라니, 네가 사람이니? 네가 이런 애인 줄 진작 알았다면 애초부터 태어나자마자 널 목 졸라 죽여야 했어.”“내가 여기 있으면 너에겐 뭐 좋은 일이라고! 나에게 이런 오점이 생기는 한, 다른 사람이 넌 안 헐뜯을 것 같아? 고고한 재벌집 자제들이 너와 계속 친구 해줄 것 같냐고. 네가 그동안 한 짓들 때문에 넌 제대로 된 집안과는 결혼도 할 수 없을 거야. 너—”강민서
이틀 후 깔린느 정기 회의에서 서해금은 직원들의 건강검진을 언급하며 각 부서가 직원들의 시간을 조율하고 차례로 검진을 받을 수 있도록 준비하라고 말했다. 말을 마친 후 시간을 확인하며 말을 이었다.“그럼 특별한 사항 없으면 오늘 회의는 여기서 마치겠습니다.” “잠깐만요.” 한현진이 서해금의 말을 가로막았다. 모두가 그녀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서해금도 눈을 들어 한현진을 응시하며 여유 있게 말했다. “현진 씨, 더 지시할 거라도 있어요?” 한현진은 살짝 웃으며 말했다. “지시라뇨. 이 자리에 계신 분들 모두 제 선배님들이세요. 업무적인 부분은 앞으로도 많이 배우고 의지해야 할 분들입니다. 다만 서 대표님께서 직원 건강검진에 대해 언급하신 걸 듣고 마침 오늘 회사 고위층 분들도 다 계셔서 한 가지 제안을 드리고 싶어서요.” “서 대표님, 괜찮으실까요?”모두 서로 얼굴을 마주 보며 한현진이 아마도 회사 관리와 관련된 문제를 제기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녀가 회사에 온 지 몇 달이 되었고 비록 진씨 가문 사모님 홍혜림을 중심으로 몇몇 고객을 끌어들였지만 서해금의 기반은 그렇게 쉽게 흔들리지 않았다. 두 사람의 실력 차이가 매우 컸고 이렇게 오랜 시간이 지나도 큰 진전이 없었으니 한현진은 분명히 조급할 것이다.서해금은 두 손을 가볍게 포개어 테이블에 놓고 여유롭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 “정기 회의는 원래 경영진이 자유롭게 의견을 나누는 자리입니다. 어떤 의견이라도 편하게 말씀하세요. 좋은 제안이라면 우리는 반드시 적극적으로 채택할 겁니다.” 그녀는 매우 너그러운 태도로 민주적인 자세를 보여주었고 이것이 바로 서해금이 이렇게 확고한 위치를 유지하는 이유였다. 회의에서 나온 의견과 제안은 결코 당면에서 거절하지 않으며 오히려 지지하는 모습을 보이다가 뒤에서는 다른 수단을 써서 상대를 밀어내는 법이었다. 사람들의 마음을 다루는 데 그녀는 능숙했다.한현진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서 대표님이 이렇게 말씀하신다면 직설적을 말
송가람은 급히 말을 이었다. [지금 저도 정확히 알 수가 없어요.] 그녀는 강한서보다 더 초조해했다. 황 닥터는 금지된 물품을 소지하고 있던 이유로 출국 금지 명령을 받았고 당분간 국내로 돌아오지 못한다고 했다. 그가 오지 않으면 강한서를 제어할 수 있는 사람이 없었다. 시간이 지나면 그는 분명히 모든 것을 기억해 낼 것이다. 송가람은 점점 더 초조해졌다.[한서 오빠, 저랑 같이 외국에 가서 교수님한테 진료받으러 갈래요? 그쪽에서 꼭 잘 봐주실 거예요.] 송가람은 더 이상 다른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강한서는 잠시 침묵하다가 입을 열었다. [가람아, 평소 같았으면 바로 갔겠지만 지금은 안 될 것 같아. 너도 알잖아. 요즘 한주시 상황이 얼마나 복잡한지. 난 지금 이곳을 떠날 수 없어. 정말 어쩔 수 없으면 여기서 다른 의사를 찾아서 진료를 받는 방법을 찾아볼게.][그럴 수는 없어요!] 송가람이 목소리를 높였다. 강한서는 잠시 멈칫했다. [왜 안 되지?] 송가람은 자신이 너무 지나치게 행동했다는 걸 깨닫고 잠시 말을 더듬으며 겨우 입을 열었다. [교수님은 전 세계에서 가장 뛰어난 뇌과학 전문가 중 한 분이세요. 국내 의사들하고는 비교도 안 되죠.]의사를 바꾸면 강한서가 예전에 사용한 약에 대해 물어볼 것이었고 그렇다면 그녀는 그것을 말해야 하므로 폭로될 위험이 있었다. 그런 일은 절대 일어날 수 없었다. 강한서는 난처한 듯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지금은 다른 방법이 없는 것 같네.] 그는 잠시 침묵을 지킨 후 다시 말을 이었다. [사실 그 약은 효과가 좋았어. 매번 먹고 나면 머리가 맑아지고 잡생각들이 사라졌거든.] [그런데 지금은 그 약이 다 떨어져서 최근에 다시 두통이 찾아왔어. 그 약만 있으면 황 닥터가 올 때까지 버틸 수 있을 텐데.]송가람의 눈이 번쩍였다. ‘맞다. 그 약이 있었지.’ 그녀는 속으로 들뜬 마음을 억누르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한서 오빠, 너무 서두르지 마세요.
하지만 이 보험은 직원 개인에게만 해당되며 가족은 이 보험을 가입할 수 없다. 지금 강한서의 의도는 이 혜택을 직원의 가족에게까지 확장하려는 것이다. 주혁은 집에 두 명의 환자가 있고 약을 자주 복용해야 한다. 만약 그가 회사의 이 선의를 거절한다면 그의 이미지와 맞지 않는다. 예전에 아들을 위해 인공 와우 이식 수술을 받을 돈을 마련하려고 위험을 무릅쓰고 직장을 잃었던 전례가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절대로 거절할 수 없을 것이다. 또한 강한서의 개인적인 의도도 있었다. 이런 세심한 직원에 대한 배려는 점차 아래 직원들이 한현진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바꿀 수 있었기 때문이다. 고위층은 작은 이익에 별로 신경 쓰지 않지만 일반 직원들에게는 다르다. 대부분 사람들이 열심히 돈을 버는 이유는 가족을 먹여 살리기 위해서다. 그들 대부분은 삼십대에서 마흔다섯 사이로 이 나이대의 사람들은 부모님을 부양하고 자식들을 키워야 한다. 회사가 약속한 성과급 같은 허황한 말보다는 이런 쉽게 보상받을 수 있는 실비보험이 직원들에게 실질적인 혜택을 주기 때문에 더욱 마음을 얻을 수 있다. 한현진은 마치 뭔가 깨달은 듯 강한서의 어깨를 툭 치며 말했다. “이렇게 사람 마음을 얻는 거구나.” 강한서는 살짝 웃으며 말했다. “사실 처음엔 이런 생각까지는 못 했어. 할머니가 병원에 갈 때는 항상 진씨 아저씨랑 같이 가서 내가 직접 겪을 일이 거의 없었거든. 이런 일도 거의 없었고.” “그런데 한 번은 민 실장이랑 같이 출장 가는 길이였어. 그때 민 실장 어머니께서 비를 맞으면서 우리를 마중 나왔는데 길이 미끄러워서 자전거를 타다 넘어지셨어. 가벼운 사고가 나이었고 수술이 필요한 정도로 심했었지.”“그때 민 실장한테 병원에 남아서 어머니를 돌보라고 하고 혼자 고객을 만나러 갔어. 며칠 만에 일을 마치고 병원에 들렀더니 수술은 다행히 성공적이었어.” “그런데 입원부터 치료까지 전부 합쳐서 거의 천만 원 가까이 들었더라. 민 실장은 보험 청구를 했
강한서가 가식적인 말투로 말했다. “부탁할게. 나중에 내가 너랑 여정 씨에게 크게 한 턱 쏠게.”강한서에게 등을 돌린 신우가 손을 들어 중지를 내밀었다. 한현진이 강한서에게 나지막이 물었다. “신우 씨가 널 꽤 귀찮아하는 것 같아. 전에 여정 씨에게 신우 씨는 욕을 하지 않는다고 들었던 것 같은데.’“아닐 걸?”강한서가 헛소리를 지껄였다. “난 우리 사이가 좋다고 생각해. 봐봐, 지금 얼마나 열심히 우릴 도와주고 있어.”한현진이 의심스러운 눈빛으로 강한서를 쳐다보았다. ‘그래? 난 왜 신우 씨가 마지못해 하는 것 같지?’생각하던 한현진이 말했다. “이제 이런 일로 신우 씨 번거롭게 하지 말자. 우리 다른 방법 찾아보자. 언제까지 부탁할 순 없잖아.”강한서가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그도 계속 신우에게만 매달리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문제는 신우처럼 능력 있고 입도 무거운 사람을 찾기 힘들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한현진의 말에도 일리가 있었다. 언제까지 신우에게 부탁할 수는 없었다. 신우의 할아버지가 위독하시기 때문에 지금은 삼촌들의 후계자 싸움이 가장 치열한 시기였다. 수많은 눈이 서로의 약점을 노리고 있었기에 신우의 처지 역시 살얼음판과 다를 바가 없었다. 이럴 때일수록 그 어떤 실수도 있어서는 안 된다. 신씨 가문에서 요즘 경쟁이 제일 치열한 것이 바로 제일 많은 계약금이 걸린 프로젝트였다. 강한서는 이 기회를 빌려 신우에게 투자금을 보태 그동안 진 신세를 갚을 생각이었다. 그날 오후, 지문 대조 결과가 나왔다. 편지 봉투와 그림에는 한현진과 강한서의 지문을 제외한 세 사람의 지문이 있었다. 그 세 사람 중 한 명은 주혁의 아내였고 또 다른 사람은 주혁의 아들인 주지호였다. 그리고 또 다른 하나는 지문 대조 시스템에 등록되어 있지 않은 또 다른 사람의 지문이었다. 그 결과에 한현진은 조금 실망스러웠다. 이 정보를 따라 뭔가를 캐낼 수 있을 것이라 여겼지만 이렇게 많은 노력에도 불구하고 조사 결과는 결국 시스템에조차 등록되어 있
시원하게 욕을 날린 신우는 의리 있게 강한서의 부탁을 들어줬다.10여 년 전 주혁이 경찰서에 남겼던 지문을 받은 강한서는 곧 생체 인식 실험실에 보내 두 지문을 대조하도록 했다. 2시간도 지나지 않아 결과가 나왔다. 한지와 편지봉투에서는 주혁의 지문을 찾을 수 없었다. 그 결과에 한현진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말도 안 돼. 뭔가 착오가 있는 거 아냐? 그때 직접 손으로 나에게 건네줬었어. 심지어 장갑도 하지 않았는데, 지문이 안 나왔다고?”신우가 말했다. “여긴 여정이와 여정이 사수가 함께 만든 실험실이에요. 게다가 형사들과 자주 협력하는 곳이기도 하고요. 지문 대조 시스템은 여길 따라올 곳이 없어요. 한 번도 틀린 적 없었어요.”신우의 말은 지문 대조 결과가 틀렸을 리가 없다는 얘기였다. 신우는 주머니에서 담배 한 갑을 꺼냈다. 이제 막 담배 한 대를 꺼내려던 그때, 손에 들린 담배가 강한서의 손에 내쳐져 툭, 쓰레기통으로 떨어졌다. 신우: ???머리가 복잡했던 한현진은 두 사람을 전혀 신경도 쓰지 않았다. 그녀는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그럼 왜 없는 거지?”여전히 오리무중에 빠진 한현진과 달리 강한서는 이미 눈치 채고 있은 듯 말했다. “혹시... 지금 그 사람은 애초부터 주혁이 아니었던 거야. 그래서 경찰에게 지문이 남아있을까 봐 그런 방법의 자신의 모든 지문을 지워버린 거야. 자신의 진짜 신분을 들키지 않기 위해.”강한서의 추측에 한현진의 등골이 오싹해졌다. “어떻게 같은 사람이 아니라는 거야? 그건 너무 많이 앞서간 거 아냐? 기사님은 가족도 있고 아이도 있어. 만약 정말 사람이 바뀐 거라면 가족들은 눈치 채야 하는 거 아냐?”“데가 이 세상에는 그렇게 똑같이 생긴 사람은 없어. 아무리 닮은 쌍둥이라고 해도 가족들은 한 눈에 알아볼 수 있잖아.”강한서가 입술을 짓이겼다. “어쩌면 가족들은 원래 그 사람이 돌아오길 바라지 않을 수도 있지.”한현진은 머리가 터질 것만 같았다. 그녀는 얼른 강한서에게 물었다.
“얼른 다시 가져와. 급히 쓸데가 있어.”강한서: ?“왜 그래?”한현진이 말했다. “전화로 얘기하긴 복잡한 일이야. 아무튼 얼른 전화해서 그림 다시 가져오라고 해. 만약 안 건드렸으면 못 건드리게ㅔ 하고 만약 꺼냈으면 얼른 다시 포장하라고 해. 내가 금방 갈게. 만나서 더 자세하게 얘기해 줄게.”강항서가 대답했다. “알겠어. 지금 당장 다시 가져올게.”한현진은 일찍 퇴근하고 집으로 향했다. 전화에서 한현진이 워낙 급하게 얘기한 탓에 강한서도 그녀가 걱정이라 손에 있던 일을 미리 마친 후 칼퇴근해 집으로 돌아왔다. 만나자마자 강한서를 본 한현진이 물었다. “기사님 아직 그림 안 넣었지?”강한서가 고개를 가로 저었다. “네가 너무 일찍 얘기해서 넣지도 못한 상황이야. 네가 그림을 가진 후로 우리 두 사람을 제외하면 아무도 그림을 본 적이 없어.”한현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서랍에서 일회용 장갑을 꺼내 낀 후 그림과 평지를 함께 꺼내 일회용 봉투에 넣었다. 한현진의 행동을 본 강한서의 눈가가 파를 뛰었다. “증거 수집해?”한현진은 봉토를 밀봉하며 말했다. “정말 증거가 될 수도 있어. 일단 가직해 둬.”“대체 무슨 일이야?”한현진이 장갑을 벗고 나서야 강한서에게 그동안 있었던 일과 본인의 의심과 의혹을 얘기했다. “이번 주에 기사님께서 뭔가 사고를 친게 틀림없어. 그래서 재판장에서 지문 인식하는 걸 거부하는 거겠지. 만약 기사님이 전과범이고 회사에서 그 사람을 그대로 둔다면 기사님이 영향을 끼치는 것 나뿐만이 아니야. 그건 말이 안 되는 것 같아.”“내가 생각해봤는데 일단 지문을 수집하는 게 더 나을 것 같아. 일단 고여정 씨께 이 사람이 대체 무슨 죄를 지었는지 알아봐. 그래야 만일이 사태에 대비를 하지.”한현진의 말을 들은 강한서가 의문을 제기했다. “주혁 씨의 지문은 이미 시스템에 등록되어 있어. 무슨 범죄를 저질렀는지는 신상 조회를 하면 바로 나올 텐데 지문을 지우는 게 무슨 소용 있어?”한현진이 멈칫했다. “없을
주현의 생각은 성월과 달랐다. 송가람은 사랑에 눈이 멀어 남자의 사랑을 바랐지만 주현은 아니었다. 그녀의 목표를 애초부터 매우 명확했다. 주현은 상대방이 자신에게 줄 수 있는 신분과 지위를 노렸다. 그건 20년, 30년을 노력해도 가질 수 없는 것들이었다. 지금 주현이 원하는 모든 것을 얻을 수 있는 지름길이 눈앞에 놓였는데 그 기회를 잡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하지만 주현은 성월의 성격을 잘 알았다. 성월은 반평생을 야심으로 가득 찬 서해금 곁을 지키며 진작 서해금의 충직한 개가 되었다. 성월에게 신분은 뛰어넘을 수 없는 벽 같은 거였고 자신의 미래는 스스로 기회를 잡아 개척해 나가야 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서해금 역시 자신의 두 손으로 그 자리에 오른 것은 아니었다. 송병천과의 결혼이 아니었다면 서민 출신에 남편을 잃고 아이를 키우는 싱글맘이 무슨 수로 지금의 자리에 오를 수 있었을까?‘웃기지 말라 그래.’하지만 그 말을 주현은 감히 성월 앞에선 할 수 없었다. 주현은 애교를 부리며 말했다. “이모, 도와줘요. 신씨 가문으로 돌아가든 아니든 저 한 번 해보고 싶어요. 송가람 씨와 조금이라도 가까이 할 수 있는 일로 부탁해요. 활동이든 파티든 데리고 다닐 수 있는 자리로요. 그래야 신씨 가문에 호감을 살 수 있죠.”성월의 학창 시절, 그녀의 집안은 그야말로 찢어지게 가난했다. 주현의 부모님이 빌려주신 돈으로 급한 불을 끈 덕에 성월은 늘 주현의 집안에 감사한 마음을 갖고 있었다. 주현의 애교에 견디지 못한 성월이 한숨을 내뱉으며 말했다. “송가람 씨 비서로 전근 보내볼게. 너, 네 남자친구한테 기본적인 건 잘 가르쳐. 묻는 말에 아무 것도 대답 못하면 안 돼.”주현이 순간 환한 미소를 지으며 성월에게 팔짱을 끼고 달콤한 목소리로 말했다. “고마워요, 이모! 역시 이모가 날 제일 예뻐할 줄 알았어. 주말에 집에 와서 식사해요. 안 가신지 꽤 됐잖아요...”한편, 사무실로 돌아온 한현진의 마음은 쉬이 가라앉지 않았다. 만약 어제 바로 세정제
서해금이 입술을 짓이기며 중얼거렸다. “이렇게 냉정하다니, 한현진 답지 않아.”성월이 말했다. “사실 전 그렇게 냉담한 것도 당연하다고 생각해요. 오일을 깨뜨린 것도 주혁 씨였고 몰래 부업을 하다 한 대표님 얼굴에 먹칠한 것도 주혁 씨잖아요. 그러니 당연히 원망하는 마음이 있을 거예요.”말이 없던 서해금이 잠시 후 입을 열었다. “인사팀에 잠깐 다녀와요. 일단 주혁을 가람이 운전기사로 전근시켜요.”성월이 놀란 얼굴로 말했다. “대표님, 가람 아가씨에게 운전기사를 붙일 생각이시면 제가 다른 기사님을 찾을게요. 회사에는 지금 마침 새로 입사한 젊은 신입사원들이 많아요. 어리고 건강하고 운전 경력도 전부 5년이 넘었어요. 주혁 씨는 한현진 곁에서 한동안 일을 하신 분인데, 가람 아가씨 운전기사로는 적합하지 않을 것 같아요.”“전근시키라고 하면 시켜요. 제가 이렇게 하는 덴 이유가 있어요. 그러니 성 비서는 나서지 말아요.”성월이 다급히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네.”성월이 사무실을 나서자 주현이 곧바로 그녀에게 다가갔다. “이모, 어떻게 됐어요? 대표님께 말씀 드렸어요?”성월이 고개를 가로 저었다. “대표님께서 이미 송가람 씨에게 다른 운전기사를 붙이셨어. 이미 결정된 일이야.”순간 주현은 조바심이 났다. “왜 갑자기 결정 난 거예요? 회사에서 요즘 새로 신입사원 모집했잖아요. 보안팀은 싫어할 거란 말이에요.”성월이 말했다. “대표님께서 주혁을 송가람 씨 운전기사로 전근시켰어. 지금 인사팀에 가서 그 일부터 처리해야 해.”그 말을 들은 주현이 투덜거렸다. “한현진 밑에 있던 사람이잖아요. 게다가 본인 상사를 배신까지 했고요. 대표님은 무슨 생각으로 그런 사람을 딸 운전기사로 쓰시겠다는 거예요?”순간 얼굴을 일그러뜨린 성월이 주현을 구석진 곳으로 끌고 갔다. 성월은 주변을 확인하고 나서야 주혁의 팔을 내치며 차가운 얼굴로 말했다. “너 미쳤어? 여긴 회사야. 여기서 집인 줄 알고 그렇게 큰 소리로 대표님 뒷담화를 하는 거야?
직원들은 열띤 토론을 벌이고 있었다. 어떤 직원은 회사의 조치가 꽤 인간적이라며 칭찬했고 또 어떤 직원은 아무리 화장실 청소라도 그렇게 부식성이 강한 세제를 쓰진 말았어야 했다며 안전 문제를 인지하지 못한 회사의 관리에 문제가 있다고 비난했다. 이번 일은 단순히 청소 직원이 화상을 입은 것으로 그쳤지만 만약 누군가 범행을 저지르려고 한다면 부식성이 강한 세정제는 범죄자에게 칼을 준비해준 것과 다를 것이 없는 꼴이었다. 의문을 제기하던 직원이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돌려 한현진과 눈을 마주쳤다. 그제야 실언했다는 것을 인지한 직원이 다급하게 말했다. “대표님, 전 회사에서 조치를 제대로 못했다는 뜻이 아니라요. 단지 위험 요소가 될 수도 있는 거니까, 저도 모르게 제일 최악의 상황을 상상해본 거예요.”한현진이 고개를 들었다. “무슨... 위험 요소요?”그 직원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못... 못 들으셨어요?”“죄송해요.”한현진이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조금 전 친구 문자에 답장하느라 못 들었어요.”직원이 입술을 달싹이며 말을 잇지 못했다. 옆에 있던 또 다른 직원이 얼른 말을 이었다. “회사에서 며칠 동안 청소하시는 직원분들이 다치는 사고가 있었잖아요. 그 일 때문에 다들 마음이 뒤숭숭해요.”한현진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한 직원이 말을 이었다. “아, 맞다. 대표님. 다치신 분 중에 대표님이 아는 사람도 있어요. 전에 대표님 운전 기사셨던 주혁 기사님이요. 그 분이 제일 심하게 다치셨어요.”한현진이 미간을 찌푸렸다.“기사님이요? 확실해요? 어제 볼 일 보러 갔다가 기사님 만났을 때까지만 해도 멀쩡하셨는데. 언제 다치신 거예요?”한현진의 말에 직원이 멍해졌다.“그럴 리가요. 며칠 전에 이미 다치셨어요. 대표님과 비슷한 시기에 휴가를 내셨어요.”한현진이 곰곰이 생각했다. “그날 제가 급한 일 때문에 길게 얘기를 나누진 못했어요. 손에 붕대 같은 건 본 기억도 없고 기사님께서도 저한테 그런 얘기는 없으셨는데... 심하게 다치셨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