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하리가 입꼬리를 씩 올리며 말했다. “너 질까 봐 그러는 거지? 짠돌아.”말하며 주위를 쓱 둘러보던 신하리가 말을 이었다. “누가 졌어요?”나머지 세 사람이 약속이나 한 듯이 한열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고개를 돌린 신하리가 한열을 툭 차며 말했다. “아마추어는 일어나. 내가 다 이겨줄게.”한열의 눈가가 파르르 뛰었다. “제가 왜 아마추어예요.”신하리가 피식 웃음을 흘렸다. “내가 이겨주면 어떡할 거야?”한열은 신하리의 말에 낚이지 않았다. “이기면 그건 신하리 씨가 노름에 눈이 멀었다는 거겠죠.”신하리가 풋 작게 웃어버렸다. “내가 이기면 좀 이따 내려가서 키스해.”한열이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 “꿈 깨요.”신하리는 더 이상 한열을 놀리지 않았다. 그녀는 한열을 밀어버리더니 곧 자기가 한열의 자리에 앉았다. 한현진은 여전히 인터넷에서 떠도는, 한열에게는 불리한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는 스캔들 걱정뿐이었다. “신하리 씨, 일단 열이 일부터 처리하고 노는 게 어때요?”신하리가 화투패를 섞으며 말했다. “급한 것 없어요. 일단 난리들 치게 둬요.”한현진이 한성우에게 시선을 돌리자 그는 걱정하지 말라는 눈빛을 보냈다. 한열의 단물을 쪽 빼먹던 세 사람은 신하리에게도 똑같은 수작을 쓸 생각이었다. 신하리도 한열과 마찬가지로 톱스타이니 그녀 역시 한열 못지않게 돈이 많을 것이었다. 그러니 할 수 있는 것만큼 단물을 쪽 빨아야 했다. 하지만 신하리는 한열처럼 호락호락하게 당해주지 않았다. 그녀는 화투패를 기억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상대방이 던진 패를 통해 그가 점수를 딸 수 있는 패가 어떤 것인지 추측했다. 한열처럼 고스톱을 잘 못하는 사람을 속일 수는 있었지만 신하리 같은 타짜 앞에선 패를 바꿀 기회도 없이 이미 패배를 맛보아야 했다. 몇 판만에 신하리는 이미 한열의 복수를 완벽히 끝냈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세 사람에게서 기프티콘을 받기도 했다. “신하리 씨, 투시라도 되는 거예요?”패배가 계속되자 차미주는 그 상황
입 맞추는 두 사람 뒤로 한현진은 병풍처럼 서 있었다. 눈썰미가 좋은 네티즌이 뒤에 서 있는 그 병풍이 바로 차에서 한열의 얼굴을 만지던 여자라는 것을 눈치챘다. ‘옷도 똑같잖아.’‘신하리가 이걸 참는다고?’그러나 얼마 후, 신하리가 기프티콘을 받은 채팅창 캡처본을 트위터에 올렸다. [사촌 언니를 이겨서 화내시진 않았겠지? @한열]신하리는 이미 은근슬쩍 자랑하는 말투를 완전히 마스터한 사람 같았다. 그녀가 올린 피드에 네티즌들의 궁금증이 폭발했다. [사촌 언니?]그리고 한열이 곧 그 피드에 답글을 달았다. [아마 화낼 거예요. 저희 누나는 뒤끝이 길거든요.]한열의 댓글에 네티즌들은 충격의 도가니에 빠졌다. ‘그게 한열의 사촌 누나였다고?’그리고 곧 #신하리, 한열 가족에게 인사드리다 라는 검색어가 실검에 올랐다. 트위터는 그 소식에 발칵 뒤집혔다. [내가 데뷔할 수 있게 도와줬더니, 신하리네 집에 데릴사위로 들어가?][열이는 신하리를 안지도 않았는데 그 여자가 먼저 다가와서 입 맞춘 거잖아. 열아, 만약 강요를 당하고 있는 거라면 눈을 깜빡여봐.][공개 연애하자마자 가족들에게 인사하러 가다니, 결혼을 전제로 만나는 건가 봐.][이건 신하리가 한열 대신 해명하는 거잖아. 바람 어쩌고 했던 애들은 이제 좀 닥쳐.][얼른 좀 사라져. 역겹게 굴지 말고.][선남선녀라 잘 어울리는데 너희들이 반대할 주제는 돼?]...이런 댓글은 그나마 양호한 편이었다. 신하리의 트위터 아래 달린 댓글이야말로 가관이었다. 거기엔 비꼬는 말도 찾아보기 어려울 정도로 아예 욕설로 도배되어 있었다. 늙어빠진 여우라거나 빨리 죽어버리라는 둥 눈에 담기도 어려운 악플로 가득했다. 몰래 트위터를 다시 다운로드 받아 악플들을 본 한열의 미간엔 깊은 주름이 자리 잡았다. 그가 고개를 돌려 신하리를 보자 그녀는 립스틱을 꺼내 바르고 있었다. 한열의 시선이 느껴지자 신하리는 눈길도 주지 않은 채 말했다. “왜, 또 키스하고 싶어? 립스틱 다 바르면 다시
“살 안 빠졌어요. 오히려 몸무게는 전보다 더 나가요.”이훈이 자연스레 한현진의 가방을 들어주며 장난스럽게 말했다. “오히려 누나는 왜 이렇게 살이 쪘어요? 매형이 잘 먹이나 봐요?”한현진은 순간 이훈 이 자식을 때려버릴까 싶은 충동을 느꼈다. 그녀는 어두워진 얼굴로 말했다. “말을 예쁘게 못할바엔 차라리 입을 닫아. 지금 내 모습을 바로 글래머라고 하는 거야. 모든 사람이 너처럼 뼈만 앙상하게 삐쩍 마른 줄 알아? 그렇게 젓가락 같은 팔, 다리로는 전혀 안전감을 줄 수가 없다고. 그래서 여자친구는 만날 수 있겠어?”이훈이 흥 콧방귀를 뀌었다. “몸 더 키울 거라고요.”“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얼른 물건이나 사러 가.”매해 설이 되면 한현진은 보육원 아이들에게 줄 선물을 바리바리 샀었다. 그러니 아이들이 제일 좋아하는 건 새해마다 한현진이 사다 주는 선물이었다. 누군가 그 아이들을 기억하고 있다면 그들은 더 이상 사랑해 주는 사람 하나 없이 버림받은 아이들이 아니게 되는 것이다. 선물을 고르고 있는 한현진에게 이훈이 말했다. “현진 누나, 내년 등록비를 안 보내주셔도 돼요.”한현진은 이훈을 쳐다보지도 않은 채 카트에 선물을 넣으며 말했다. “로또라도 당첨된 거야?”“아뇨.”이훈이 가볍게 기침하며 목을 가다듬더니 말했다. “내년엔 장학금을 받을 수 있을 것 같아요.”멈칫하던 한현진이 이훈을 놀리며 말했다. “이제 1학기잖아. 아직 2학기 남았어. 어떻게 그렇게 네가 받을 수 있을 거라고 확신해?”이훈이 말했다. “저 1학기 학점 4점이에요. 2등이 3.8점이고요. 만약 2학기에 절 이기려면 4학점은 받아야 해요. 하지만 2학기엔 깐깐한 교수님이 계신 수업이 있어서 4학점을 받을 수 있는 사람은 없어요.”자랑스럽다는 듯 까불거리는 말투로 이훈이 말을 이었다. “제가 무조건 1등일 거예요.”한현진이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장학금은 네가 모아둬. 등록금이랑 생활비는 네가 신경 쓸 거 없어. 그건 지금 네가 고민할 문제가 아
“집에서 자고 있어요. 오늘 아침 오빠가 친척분들께 인사하러 갔잖아요. 오빠가 너무 비싼 선물을 준비했다고 하면서 난리를 피워서 오빠와 한바탕 싸웠어요. 오빠가 한현진을 집에 버려두고 혼자 갔거든요. 아마 지금쯤 방에서 울고 있을 거예요.”강민서의 말에 민경하가 어리둥절해졌다. “자기가 뭐라도 되는 줄 안다니까요. 다른 사람이 왜 자기 말이라면 다 들어야 하는 건데요.”신미정이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그녀의 얼굴이 잔뜩 일그러져 있었다. “그래? 요즘도 자주 싸우니?”“네. 한현진은 아직도 오빠가 예전 같은 줄 알고 뭐든 자기 마음대로 하려고 한다니까요. 하지만 오빠가 이젠 한현진을 기억하지 못하잖아요. 한현진이 그러는 걸 볼 때마다 짜증을 내더라고요.”신미정이 눈을 감았다. “넌 지금 어디야?”“저요?”강민서가 멈칫하더니 말을 이었다. “저도 집이죠. 지금 바닥에 기름칠하는 중이에요. 좀 이따 위층에서 내려오다 미끄러지면 애가 떨어지지 않고는 못 배길 거예요.”강민서의 통화를 듣고 있던 민경하의 얼굴이 의문으로 가득 찼다. 주먹을 쥐고 있던 신미정의 손에 더 힘이 실렸다. “그래, 잘하고 있어.”신미정의 말투가 어쩐지 이상한 느낌이 들어 강민서는 조금 불안해졌다. “엄마, 왜 그래요?”차에 올라타는 한현진의 모습을 보며 신미정이 낮게 깔린 목소리로 말했다. “아무것도 아냐. 너무 티 나게 굴지 마. 며칠 있으면 시은 씨 딸 결혼식이야. 한현진도 불러서 같이 와.”강민서가 멈칫했다. “엄마, 한현진은 그분과는 앙숙 같은 사이였잖아요. 안 가려고 하지 않겠어요?”“안 가겠다고 하면 어떻게든 방법을 찾아서 가게 만들어.”신미정이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 “넌 똑똑하니까 이 정도는 어려운 일 아니겠지.”미간을 찌푸린 강민서가 한참 만에야 말했다. “알겠어요.”전화를 끊은 신미정이 휴대폰을 있는 힘껏 내동댕이쳤다. 그녀의 얼굴이 무서울 정도로 일그러져 있었다. 전화를 끊은 강민서가 고개를 돌리자 이상한 눈빛으로 자기를 훑
“안 가요.”“그래요.”민경하가 휴대폰을 꺼내며 말했다. “마침 회장님께 보고드리면 되겠네요.”그의 말에 강민서는 하마터면 눈알이 튀어나올 뻔했다. “잠, 잠깐만요.”민경하는 느긋하게 강민서를 바라보았다. 주먹을 꽉 움켜쥔 강민서는 한참 만에야 웅얼거리며 대답했다. “가면 되잖아요.”영화관에 도착해 민경하가 ‘살의’를 예매했다는 것을 안 강민서는 그대로 몸을 돌려 영화관을 나가려고 했다. 하지만 그녀는 걸음을 옮기기도 전에 민경하에게 끌려 상영관으로 들어갔다. “미쳤어요? 설 연휴에 저더러 한현진 흥행이나 도우라고요?”민경하가 말했다. “편견은 버리고 봐요. 영화 평점은 높으니까.”강민서가 민경하의 말을 받아치기도 전에 옆에서 다른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이없네. 코미디 영화를 예매했더니 미스터리 영화나 보여주고 있네. 누가 이거 보러 왔대? 노이즈 마케팅이나 하는 것들이 발연기나 하는 거로 모자라 이런 식으로 관객수까지 속이다니.”강민서가 민경하를 밀어냈다. “누가 관객수를 속였다는 거예요? ‘서강월’ 티켓으로 ‘살의’를 보고 있으면서 그쪽 돈을 벌어간 게 누군지도 모르는 거예요?”강민서에게 된통 혼난 그 사람은 멍한 표정을 지었다. 민경하가 얼른 강민서를 잡아당기며 말했다. “죄송해요, 취해서요.”“미친.”욕설을 내뱉은 그 사람이 상영관을 나섰다. 강민서는 씩씩거리며 민경하를 노려보았다. “어물쩍 넘어갈 줄밖에 몰라요?”민경하가 말했다. “사모님을 뭐라 하는 건데 왜 강민서 씨가 화를 내고 그래요?”“전...”민경하가 이를 악물었다. “전 한현진이 오빠 얼굴에 먹칠할까 봐 그러는 거예요. 고작 영화 하나 촬영하면서 관객수를 속인다는 말이나 들으니, 나중에 흥행 기록이 엉망이면 얼마나 X 팔려요.”말하며 민경하를 뿌리친 강민서는 프런트 데스크로 달려가 전석을 예매해 버렸다. 민경하는 그 자리에 그대로 서서 한참을 웃더니 강민서에게로 걸음을 옮겼다. 한편, 한현진이 탄 차는 곧 보육원에 도착했다.
정신을 차린 한현진은 도일준과 악수를 나누었다. “보육원에 지원을 아끼지 않아 주셔서 감사해요.”그 사람은 얼굴을 꽁꽁 가렸을 뿐만 아니라 악수할 때도 장갑을 벗지 않았다. 상대방과 악수를 한 한현진은 그의 손이 그리 크지 않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남자 손이 이렇게까지 작은 건 본 적이 없는데, 키가 작아서 그런가?’상대방이 말했다. “돈이란 건 태어날 때 가지고 올 수도 없고 죽어서 가지고 갈 수도 없는 거잖아요. 제가 아직 걸을 수 있을 때 조금이라도 더 도움이 될 수 있다면 그것 또한 저를 위해 음덕을 쌓는 일이겠죠.”그 말은 마치 이미 속세의 모든 것을 꿰뚫어 본 한 인간의 죽기 직전 유언 같았다. 한현진은 도일준을 훑어보았지만 너무 꽁꽁 숨기고 있던 터라 자세히 볼 수 있는 것은 눈뿐이었다. 하지만 눈을 봐서 그다지 나이가 있어 보이지는 않았다. 이상한 사람이었다. “요즘... 요즘 잘 지내셨어요?”상대방이 건넨 갑작스러운 질문이었다. 멍해졌던 한현진의 눈빛이 깊어졌다. “절 아세요?”도일준의 눈빛엔 큰 변화가 없었다. 그는 마치 별거 아닌 듯 가볍게 말했다. “전 현진 씨 어머니이신 하현주 씨와 안면이 조금 있는 사이에요.”하현주의 친구들은 이미 대부분 그녀의 장례식에 참석했었다. 그녀와 친구들은 하현준의 휴대폰에 저장된 연락처에 따라 하나하나 직접 부고를 보냈었다. 하현준의 장례식에서 한현진은 눈앞의 사람을 본 기억이 없었다. 어머니가 병상에 누워있던 그 몇 년 동안에도 한현진은 이런 사람이 병문안 온 것도 본 적이 없었다. ‘그저 몇 번 안면이 있는 사이일 뿐인데, 이렇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고?’‘게다가 좋은 일을 하려는 목적의 사람이 다른 곳도 아니고 하필 엄마가 후원한 적이 있는 보육원에 기부를...?’잠시 생각하던 한현진이 말했다. “엄마 지인분이셨군요. 연락처를 알려주실 수 있으세요? 엄마께서 생전에 늘 젊은 시절의 창업은 주변 친구들의 도움을 많이 받으셨다고 하셨거든요. 그래서 명절마다
노원장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두 번인가 왔었던 게 전부야. 올 때마다 현금으로 가지고 오셨어. 지난번에 왔을 때 먹는 약을 봤더니 항암치료제더라고. 아마 아프신 것 같아. 그것도 아주 많이.”방금 모자가 떨어지며 드러났던 듬성듬성한 머리를 떠올리니 아마 항암치료의 부작용인 것 같았다. ‘설마 살날이 얼마 남지 않아서 좋은 일이라도 하시려는 걸까.’한현진이 미간을 찌푸렸다. 어쩐지 이상한 사람 같았다. 게다가 요즘 같은 시대에 현금으로 기부하는 것도 조금 이상했다. 처음에는 2000만 원을, 그다음에는 4000만 원을 기부했다. 만 원권으로 그렇게 많은 현금을 가지고 오는 것도 쉽지는 않았을 텐데. 무엇보다 현금다발을 들고 오는 것이 그다지 안전한 방법도 아니었다. 한현진은 고개를 숙여 사진을 확인했다. 역시 눈밖에 알아볼 수 없었다. 사진에 잠시 머무르던 손가락을 움직여 카톡 채팅창으로 들어간 한현진이 송민준에게 문자를 보냈다. [오빠, 도일준이라는 사람 좀 알아봐 줘요.]아직 비행기에 있을 송민준은 아마 착륙해서야 이 문자를 볼 수 있을 것이다. 송민준이 3일 동안 M 국에 머무르자 서해금은 매일매일을 불안하고 초조한 마음으로 지내고 있었다. 설 연휴가 끝나는 날, 송민준이 돌아왔다. 한현진과 강한서가 공항으로 마중을 나갔고 세 사람이 함께 한현진의 본가로 돌아갔다. 송병천은 비록 티를 내지 않았지만 아들이 M국으로 가 있는 동안 그 역시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당시 대사관에서 걸려 온 전화는 아무래도 그에게 지우기 힘든 트라우마를 남긴 모양이었다. 집에 도착해 차를 끓였다. 잠깐의 휴식 후 송병천이 물었다. “어떻게 됐어? 비행기 사고 원인은 알아냈어?”차를 한 모금 마신 송민준이 찻잔을 내려놓고 나서야 대답했다. “알아냈어요.”송병천이 다급하게 물었다. “사고 원인이 뭐야?”서해금이 고개를 숙이고 귤을 까고 있었다. 평온해 보이는 표정이었다. 무미건조한 송민준의 눈빛이 슥 서해금을 훑었다. 그가 한숨을 내쉬며
서해금이 입술을 짓이기더니 말했다. “여보, 깔린느가 설립되었을 때, 아름 언니가 제조했던 첫 향수 제조 방법이 유출됐던 일 기억해요?”그 말에 멈칫한 송병천이 미간을 찌푸린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미 오래전 일이었다. 강한서를 비롯한 아이들은 그 일에 대해 전혀 기억하지 못했지만 송병천은 알고 있는 일이었다. 당시 제조 방법을 유출된 건 회사의 한 인턴 때문이었다. 그 직원은 인턴 기간이 끝나자 첫 제조 방법을 가지고 다른 회사로 이직했다. 그로 인해 깔린느의 첫 향수는 폐기 되어야 했고 향수 제조에 투입되었던 모든 인력과 자금은 전부 수포로 돌아가게 되었다. 그리고 1년 후 깔린느의 메인 향수인 미스틱이 출시되고 나서야 회사는 기밀 유출 사건의 손해를 메꿀 수 있었다. 서해금이 온화한 목소리로 말했다. “제가 인정이 없는 게 아니라, 이미 그런 일을 한 번 겪어봤었잖아요. 아람 언니도 그 일로 회사에 인턴을 채용하지 않는다는 규정도 세웠었고요. 깔린느는 지금까지 단 한 번도 그 규정을 어긴 적이 없어요. 만약 이번 일로 특혜가 주어진다면 회사에 계신 다른 직원분들께 뭐라 드릴 말이 없잖아요.”서해금의 말이 거짓말은 아니었다. 당시 기밀 유출 사건으로 인해 회사의 인턴에게 트라우마가 생긴 한아람은 더 이상의 인턴 채용을 거부했었다. 하지만 그 말에 한현진은 오히려 피식 웃음을 흘렸다. 갑작스러운 그녀의 웃음소리는 모두가 진지한 상황과는 조금 어울리지 않는 소리였다. 모두의 시선이 한현진을 향했다. 한현진이 컵 안에 담긴 대추를 돌리며 태연하게 말했다. “아주머니, 회사 인사 규정에는 호흡기 질환이 있는 사람은 채용하지 않는다는 조항도 있어요. 하지만 천식이 있는 가람 언니도 깔린느 직원으로 출근하고 있잖아요. 인사팀에서 서류 심사를 제대로 하지 않은 건가요, 아니면 특혜인가요?”한현진의 말에 서해금은 턱, 말문이 막혔다. 그와 달리 송가람은 그건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듯 눈을 치켜뜨며 말했다. “그게 어떻게 같아요? 깔린느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