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미정은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이게 꽉 막힌 거야? 장난도 유분수지, 얼마나 많은 사람이 한주 강씨 가문을 노리고 있는지 몰라서 그래? 그리 행동이 가벼워서야. 오늘은 이 소문 내일은 저 소문. 사람들이 우리 한주 강씨 가문을 어떻게 생각하겠어!"강한서는 신미정의 잔소리에 머리가 지끈거려, 머리를 돌려 유현진에게 말했다. "물이나 줘."유현진은 아까 사 온 물을 강한서에게 넘겨주었다.강한서는 병뚜껑을 따서 꿀꺽꿀꺽 들이마셨다. 신미정은 강한서의 창백한 얼굴을 보고는, 그 일로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물었다. "아침부터 병원에는 웬일이야.""친구 보러." 강한서는 대충 얼버무리더니 반문했다. "현서는 왜 또 데려왔어요? 두 달 전에 검사받은 거 아니었어요?"신미정은 그제야 정서를 가다듬고 말했다. "별일 아니고, 그냥 해 본 거야. 한약도 오래 마셨으니 뭐 좀 효과나 있나 해서. 온 여사네 아들이 작년에 결혼했는데 며느리가 벌써 만삭이지 뭐야. 너희는 결혼한 지도 삼 년인데 내가 다 급하다."이 말은 보나 마나 유현진을 탓하는 말이다.강한서는 아무렇지 않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급해한다고 되는 일이에요? 아무리 한약 오래 마셔도 소용이 없잖아요? 한약 너무 많이 마셔서 안 생기는 거일지도 몰라요."유현진......그녀는 쓰디쓴 한약을 마시기 싫었지만, 유현진의 뻔뻔한 말이 더 거슬렸다.'노력하지 않는데 어떻게 임신이 되겠어!''몇 달에 한 번도 모자라 매번 배란기는 피해 관계를 가지는데, 아무리 임신이 잘 되는 체질이라 해도 맞춰주지 않는데 어떻게 가능해?'강한서는 버럭버럭하며 화를 냈다. "한약을 많이 먹어서 임신이 안 된다고? 내가 얼마나 힘들게 구했는지 알기나 해? 내가 누구 때문에 이러는데? 유현진이 임신이 되면 내가 이러겠어?"유현진은 두 사람이 곧 싸울 것 같아 미리 말렸다. "진정하세요, 어머니. 보약 잘 챙겨 먹을게요, 물 한 잔 마셔요."신미정은 유현진의 손을 쳐내면서 쌀쌀하게 말했다. "생각해 줘도 욕먹는 걸
강한서는 알지 못하겠다는 표정으로 그녀를 보았다.유현진은 가방에서 지갑을 꺼내며 차갑게 말했다. "나 그렇게 못된 사람 아니야. 비록 당신이 먼저 시작했지만 나 때문에 다친 거니까 치료비는 내가 낼게. 적다고 생각해도 어쩔 수 없어. 아직 이혼 안 했으니 나도 이게 최선이야."말을 끝낸 유현진은 지표에 사인을 하고 강한서에게 넘겨주었다. 강한서가 수표를 보니, 지표에는 400만 원이라고 적혀져 있었다.강한서는 어두운 표정으로 수표를 찢어 버리고는 말했다. "유현진, 그만해!"유현진은 바닥에 너저분하게 흩어져있는 종이 쪼가리들을 보며 차분하게 말했다. "받은 거로 할게. 참, 이혼 얘기도 강 대표가 하루빨리 처리하길 바랄게. 내가 임신이 안 된다는 누명도, 이젠 들어줄 수 없어."병원에서 나온 유현진은, 어깨가 힘없이 축 처져버리고 말았다.하나도 뜻대로 되는 일 없이, 모든 게 엉망진창이었다.유현진은 자기가 억지 부린 것을 알고 있었다. 분명 자기의 잘못인데도, 강한서에게 화풀이했다.하지만, 그녀는 도저히 신미정에게서 받은 굴욕이 용서되지 않았다.유현진은 머리를 숙여 손등의 기다란 상처를 보았다. 신미정이 그녀의 손을 밀칠 때 긁힌 상처이다.신미정은 오랫동안 유현진에게 불만을 품어왔다. 비록 평소에 잘해주는 듯싶지만, 진심이 맞는지 아닌지는 눈빛만 보아도 알 수 있었다.유현진이라는 사람도, 그녀의 집안 배경도, 어느 하나 신미정의 마음에 드는 것이 없었다.게다가 결혼한 지도 몇 년이나 되었건만 아이도 생기지 않고, 강한서까지 그녀의 편만 들어주니, 신미정이 유현진에 대한 불만은 극치로 도달했다.세상 모든 시어머니가 아들 부부의 행복한 모습을 보기 싫어하는지, 아니면 젊은 시절에 남편을 여인 과부라 아들 사랑이 지극한 건지? 그녀는 도저히 알 수가 없었다.두 사람 사이가 그렇게 좋은 편은 아니었어도, 매번 강한서가 유현진의 편을 들어줄 때마다 신미정은 더욱 그녀를 미워했다.마치 그녀의 손등에 난 상처와 같이, 고의가 아니라면 이렇게 까지
유상수는 얼굴색이 어두워졌다. "안 대표님, 저는 모르고 있었어요. 우리 현진이한테 어찌 된 일인지 물어볼 테니, 분명 오해가 있을 거예요.""오해? 무슨 오해? 내 딸이 확실하게 말했어, 당신 딸이 부추겼다고. 이 팔찌 환불하던지, 당신이 사든지 알아서 해. 아니면 가만히 있지 않을 테니까!"상대방은 바로 전화를 끊어버렸다.유상수는 어두운 얼굴을 하고 핸드폰을 놓은 뒤, 머리를 들어 유현아에게 물었다. "안 대표님이 얘기한 일, 대체 어찌 된 일이야? 55억짜리 팔찌는 또 뭐야?"유현아는 속으로 안하윤을 한바탕 욕하고 나서, 어제 있었던 일을 유상수에게 말했다.당연히 자기가 안하윤에게 암시해주었던 말들은 쏙 빼놓고 말이다.그러고는 난처하다는 듯 말했다. "이번 일은 제가 생각이 짧았어요. 언니가 나 안 좋아하는 거 알면서도 안하윤 씨한테 끌려서 한 대표님의 샵으로 갔어요. 한 대표님과 매제는 사이도 좋고, 안 대표님은 한 대표님과 한주 강씨 가문을 건드릴 수 없으니 나한테 덮어씌우는 거예요. 제가 뭐라고 안하윤 씨가 내 말을 듣겠어요?"옆에 있던 여자가 휴지를 넘겨주며 유현아를 위로했다. "네 잘못이 아니야. 55억짜리 팔찌 따위가, 체면을 얼마나 세워줄 수 있다고?"이 여자는 바로 유상수의 비서인 백혜주이다. 유현진이 그날 지하 주차장에서 보았던, 유상수 옆에 있던 바로 그 여자였다.여자는 편한 옷차림으로, 당연하다는 듯 하현주의 자리에 앉아 여주인 행세를 하며 식사했다.유상수는 미간을 찌푸리고 백혜주를 보며 말했다. "지금 그까짓 말이 중요해? 안 대표가 우리더러 돈 내놓으라는 거잖아!""돈 내놓으라 그러면 줘야 해요?" 백혜주가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딸 하나 관리 못 해서 사고 쳐 놓고는 다른 사람한테 덮어씌우기는, 망할 회사 같으니라고, 동생이 시집 잘 간 덕에 버티고 있으면서! 다른 사람들이 안 대표님, 안 대표님 불러주니 정말 뭐라도 된 줄 아네요!""여자들은 머리만 길었지 생각은 어쩜 이리도 짧은지, 상암동의 땅도 안세걸
"한서 찾는 건 아니고, 너한테 물어볼 거 있어."'아빠가 나한테?'"현진아, 너 한 대표랑 잘 알아?""아니요." 유현진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했다.거짓말이 아니었다. 유현진은 실제로 한성우와 친한 사이는 아니다. 엄격히 말하면, 강한서 주위 사람들과 별로 친하지 않았다.강한서는 아마도 이혼을 예상한 듯 유현진과 친구들의 모임에 동행한 적이 별로 없었기도 하고, 굳이 함께 어울리기도 귀찮아했다.'갑자기 왜 한성우에 관해 물어보시는 거지?'얼마 안 가 그녀는 그 이유를 알게 되었다.유상수가 말했다. "현아가 그러는데, 어제 주얼리 샵에 보석 보러 갔다가 널 봤대."유현진은 눈을 가늘게 뜨고는 아무렇지 않은 듯 말했다. "그런 일 있었죠, 근데 왜요?""현아 친구가 55억도 넘는 팔찌 산 거 너도 알고 있어?"유현진은 그저 가볍게 "네" 하고 답하고 비꼬면서 말했다. "안하윤 씨 안광이 참 좋다고 하던데, 하이라이트 디자인을 바로 골랐다 그러더라고요."유상수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말했다. "안하윤이 그 팔찌가 싫다네, 그런데 환불이 안 된대. 한 대표 명의로 된 샵이라던데, 한서와 친구니까 네가 좀 물어봐, 환불 안 되겠냐고."'55억도 넘어가는 물건을 체면 때문에 질러버리고는, 이제야 정신 차리고 후회하는 거야?''안하윤을 내가 너무 단순하게 생각한 거지, 아빠를 찾을 줄은 생각도 못 했네.''내가 짠 판을, 내가 치울 이유가 없잖아?'"아빠, 아빠도 장사하시니까 잘 아실 거예요. 제품은 질량 문제만 아니면 환불이 어려워요. 다들 안하윤 씨처럼 사고 나서 후회돼 하루 지나 환불하면 장사 어떻게 해요?""도리는 맞지만 그래도 안 된다는 법은 없잖아. 네가 한서더러 한 대표한테 얘기해 보라고 해 봐. 한서 한마디면 되는 일이잖아?"유현진은 당연히 싫었지만, 말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래요, 한서 씨한테 물어볼게요. 그렇지만 한성우가 도와줄지는 저도 장담 못 해요."유상수는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한서와 한 대표 사이가
"네, 여보세요?"신호음이 들리자마자, 한성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평소랑은 다르게 가볍지 않고 신중한 목소리였다.유현진은 의아했다. '내 번호 저장했을 텐데?''안 했나?'그녀는 더는 생각할 틈도 없이 말했다. "저예요, 유현진."한성우는 깜짝 놀라며 말했다. "형수님이 어쩐 일로?"상대가 이토록 대놓고 말하니 유현진은 조금 멋쩍었지만, 지금은 멋쩍어할 시간도 없으니 바로 목적을 말했다. "한 대표님 도움이 필요해서요."한성우는 웃으며 말했다. "제가 도와드릴 게 뭐 있겠어요? 한서가 저보다 능력 있는데."그 말인즉, 강한서를 찾으라는 뜻이었다.유현진은 솔직하게 말했다. "우리 싸웠어요. 그 사람한테 말하고 싶지 않아요. 더군다나, 이 일은 한 대표님만이 도와줄 수 있는 일이에요."한성우는 바로 흥취가 생겼다. "싸웠다고요? 왜요? 얘기해 봐요."유현진....'우리 둘이 싸웠다는 데, 이 사람이 왜 흥분하는 거야?'"별거 아니에요. 그이한테 사주려던 양말을 제가 주 변호사한테 드려서, 그이가 삐쳤어요."한성우는 바로 중점을 캐치했다. "주 변호사한테 양말을 드려요?""주 변호사님이 파티에서 저한테 큰 도움을 주셔서, 넥타이를 선물 드린다는 것이 양말도 같이 들어갔더라고요.""아." 한성우는 의미심장하게 한숨을 쉬고 말했다. "그러면 한서가 잘못했네요. 그깟 양말 하나에 삐질 거 뭐 있다고?"유현진은 한성우와 잘잘못을 의논하기 싫었다. 한성우와 강한서는 절친이기 때문에, 아무 때고 말이 새 나가기 마련이다."한 대표님, 본론으로 돌아오죠. 저 부탁드릴 일이 있어요."​한성우는 궁금증을 풀고 나니 열정적으로 변했다. "가족 같은 사이에 부탁은요. 말씀하세요, 형수님."유현진...'태도가 이리도 쉽게 바로바로 바뀌는 건, 강한서뿐만 아니라 강한서 주위 사람들의 특징이네.'유현진은 돌려 말하지 않고, 바로 어제 주얼리 샵에서 발생한 일들과 유상수가 부탁한 일을 말했다.한성우는 사실 이 일을 어제 알
유현진은 안하윤이 거액의 팔찌를 구매했다는 것을 상류사회에 다 알리고 싶었다.'안세걸처럼 체면을 차리는 사람이 이때 환불을 하게 되면 다들 웃겨 죽을걸?'이것은 뒷길도 다 끊어버리는 최고의 방법이다.안세걸 본인이 환불을 포기한다면, 유상수도 더는 유현진에게 이 일을 부탁할 필요가 없다.한성우는 이런 짓을 해본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한성우가 한참 동안 말이 없자 유현진은 한성우를 떠보며 물었다. "어때요?""형수님, 경영학과 나오셨어요?"유현진..."저 연기 배웠는데요."한성우는 입술을 오므리더니 말했다. "형수님은 경영을 배웠어야 했어요. 그럼, 나는 무조건 높은 연봉으로 형수님을 스카우트 했을 거예요."유현진은 그저 농담으로 여겼다. "한 대표님은 어쩔 생각이죠?""좋아요. 우리 매니저도 홍보에 관해 얘기한 적 있기도 하고, 좋은 기회인 거 같아요. 바로 실시하도록 하죠."유현진은 안도의 숨을 내쉬며 말했다. "고마워요."한성우가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제가 형수님한테 고맙죠. 형수님 아니면, 이 팔찌가 언제 팔릴지 누가 알아요?"통화를 끝낸 뒤, 한성우는 바로 강한서에게 전화를 걸었다.한성우는 두 사람의 일이 업무보다 더 재미있었다.강한서가 병원에서 나올 무렵, 한성우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다.강한서는 아직도 병원에서 있었던 일로 화가 나 있어서 바로 전화를 꺼버렸다.하지만 한성우가 쉽게 포기할 사람이 아니다. 한성우는 다시 민경하에게 연락했다.민경하는 어쩔 수 없이, 핸드폰을 강한서에게로 넘겼다.강한서는 얼굴이 잔뜩 굳어서 전화를 받았다. "너 진짜 중요한 일이여야 할 거야!""너 와이프가 연락해 왔었어."강한서..."뭐라고?"한성우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유현진이 방금 나한테 연락했다고."강한서는 유현진이라는 말을 들으니 지표가 생각나, 또다시 코가 아파지는 것 같았다. 강한서는 화가 잔뜩 나서 말했다. "너한테 연락한 걸 나한테 왜 얘기해?""나한테 왜 연락했는지 궁금하지 않아?""전혀!"말을 끝낸
강한서는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차라리 유현진이 널 패고 위협했다면 내가 믿었을 거야.""유현진 그렇게 여리여리한데, 널 패는 거야?"강한서의 코는 또다시 지끈거렸다."말할 거야, 말 거야? 안 하면 나 끊는다!"한성우도 더는 끌지 않고, 유현진이 부탁한 일을 강한서에게 사실대로 말해주었다."유현진 정말 독한 여자야. 유상수가 베이칸 프로젝트를 낙찰받기 위해 절반 재산을 걸고 안세걸이 다리 놔주길 바라는데, 만약 이 일을 유상수가 해결 못 하면 안세걸 그 비겁한 사람이 더는 유상수를 돕지 않을 거야. 그럼, 낙찰도 없던 일이 될 테고. 딸이 어떻게 아빠한테 이렇게 독할 수 있어?"강한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유상수는 하현주가 사고 난지 얼마 안 돼 투약을 그만두고 치료를 멈췄다. 이 일은 충분히 유현진이 유상수를 평생 원망할 수 있는 일이기에 이번 일은 그거에 비하면 새 발의 피와도 같았다."어? 왜 아무 말도 없어?"강한서는 미간을 찌푸리고 말했다. "그렇게 궁금하면 직접 물어보지 그랬어?"한성우..."유현진 말만 나오면 반응이 격하네? 양말 가지고 그럴 거 뭐 있다고."강한서는 멈칫하더니 물었다. "양말 얘기는 누가 했어?""유현진이." 한성우는 실눈을 뜨며 웃었다. "너 혹시 양말을 강운이한테 줬다고 화난 거야?""개 소리 집어치워!"강한서는 표정이 차가워졌다. '이 여자는 별말을 다 하고 다니네!'한성우는 즐겁다는 듯 다시 물었다. "내가 도와줘, 말아?""네가 알겠다고 한 걸, 왜 나한테 물어봐?"강한서는 더는 한성우와 말하기 싫어서 전화를 끊어버렸다.강한서는 혼자 코웃음을 치고는 매니저에게 전화를 걸었다.유현진은 친구의 부탁으로 애니메이션 더빙을 위해, 녹음실로 갔다.오디션 결과도 아직 나오지 않았고 시간도 충족하니 그냥 간 것이다.이 친구는 처음 더빙을 접촉할 때 알게 된 친구이고 이름은 신엽인데 다들 그를 규선이라고 불렀다. 신엽은 업계 최고의 더빙 전문 성우지만 근 몇 년은 방송국과 일하지 않고 친구
유현진이 글을 쓰고 있는 순간에도, 여자는 재잘거리며 끝없이 말했다."눈이 너무 예쁘세요, 들어오실 때 저는 연예인인 줄 알았어요. 어느 학교 학생이에요?"유현진은 차분하게 말했다. "T 대요.""T 대요? 같은 학교네요, 저도 거기 다녀요! 전 공학 계산기 학과인데, 혹시 연기 학과?"유현진은 머리를 끄덕이고는 말했다. "졸업한 지 꽤 됐어요. 그쪽보다 나이 많아요."여자는 놀라움에 입을 벌리더니 말했다. "몰랐어요. 너무 동안이세요. 선배라고 불러도 되죠?""뭐라 불러도 다 돼요."여자는 목소리를 가다듬고 말했다. "선배님, 더빙해보셨어요? 이따가 녹음실에서 테스트도 해야 한다고 그러던데, 저는 컴퓨터 앞에서만 해봐서 녹음실이 어떻게 생겼는지도 몰라요. 근데 저 이력서에 더빙 경험 1년 된다고 적긴 했는데 들키지 않을까요?"유현진은 웃음이 나왔다. '겁쟁인데 담력도 있고, 재밌네.'유현진이 말했다. "사실 다들 가짜로 적어요. 면접 때 침착하고 차분하면 못 알아볼걸요.""어떻게 해야 할까요? 전 규선만 보면 아마도 긴장해서 말도 안 나올 것 같아요."유현진은 들어오는 남자를 짚으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저 남자 어때요?"여자는 머리를 돌려보았다. 180센티 좌우의 키에 얼굴선은 굵고 덩치도 산만 했으며 팔에는 문신이 있었다. 언뜻 봐도 조폭 같았다."좀 무섭네요."여자가 솔직하게 말했다."그럼 규선은 어떻게 생겼다고 생각해요?"신엽은 종래로 스크린에 얼굴을 비춘 적이 없다. 하지만 목소리가 관능적이라 목소리 하나만으로 수많은 여자의 마음을 얻었다.'이런 목소리의 소유자는 꼭 멋질 거야.'여자는 생각도 안 하고 답했다. "완전 만찢남이겠죠."유현진은 사인을 마친 노트를 건네준 뒤, 손을 흔들며 남자를 향해 외쳤다. "규선!"문신남은 이내 미소를 지으며 다가왔다. "벌써 왔어? 난 또 기다려야 할 줄 알았는데."여자는 얼굴이 굳어졌다. 눈앞의 조폭 같은 사람이 마음속의 "만찢남" 이라니.'얼굴과 목소리가 따로 놀았어?
강한서의 말에 죄책감이 든 한현진이 말했다. [널 탓하는 게 아니야. 그냥 물어본 거야.]강한서: [물어보는 네 말투가 나에겐 너무 상처였어. 지금 그 문자를 봐도 마음이 아픈 것 같아.]한현진: [...]강한서는 지식만 빨리 습득하는게 아니었다. 그의 비꼬기 기술도 무서운 속도로 발전했다. 하지만 강한서는 자신의 상대가 누군지 잊은 모양이었다. 한현진이 미안함이 가득 담긴 말투로 문자를 작성했다. [그럼 어떡해? 이젠 메시지를 삭제해도 소용없는데. 아니면 네가 아예 날 삭제할래? 그럼 내가 보낸 문자도 볼 수 없고, 그렇게 괴로워할 필요가 없잖아.]강한서는 한참 동안 답장이 없었다. 아마 한현진의 제안에 충격을 받은 듯 했다. 한현진: [삭제했어?]강한서: [...]한현진: [오빠, 얼른 삭제해. 난 오빠가 슬픈 건 싫어.]한현진은 차례로 문자를 잔뜩 전송했다. 결국 한현진의 등살에 못 이긴 강한서가 체념하며 답장했다. [여보, 내가 잘못했어.]한현진이 배배 꼬인 말투로 말했다. [오빠는 그저 자랑이 하고 싶었을 뿐인데, 오빠에게 무슨 잘못이 있겠어? 잘못한 건 나야. 이렇게 사소한 일로 시시콜콜 따지기나 하고.]말이 없던 강한서는 잠시 후 한현진에게 가방 사진을 잔뜩 보냈다. [자기야, 하나 골라.]한현진은 버럭 화를 내는 듯한 말투로 말했다. [오빠, 이게 무슨 뜻이야? 지금 내가 가방 때문에 이러는 것 같아?]강한서: [다 사.]한현진이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됐어. 농담이야. 사긴 뭘 사. 회사 조직개편에 성공하면 네 수입도 지금처럼 높지는 않을 거야. 우리 아이도 키워야 하는데 아껴야지. 돈 함부로 쓰지마.]강한서에게 한성 그룹이 유일한 수입원은 아니었다. 앞으로 한성 그룹의 수입이 줄어들더라도 그는 여전히 적지 않은 돈을 벌 수 있었다. 하지만 강한서는 이 가족을 위해 계산기를 두드리는 한현진의 모습이 귀엽기만 했다. [애들은 애들이고, 넌 너야. 아직 우리 와이프를 희생시켜야 할 정도는 아니라고
한성 그룹의 신제품 발표회는 전례 없는 성공을 걷었다. 신제품은 전부 품절되었고 루나의 테스트 영상은 밤새 조회수 1억을 넘겼다. 강한서도 신제품 발표회 후 인지도가 급상승했다. 짧디 짧은 3일 사이, 강한서의 페이스북 팔로워는 2000만 명을 넘기고 있었다. 그의 댓글창에는 벌써 골수팬도 잔뜩 찾아볼 수 있었다. 슬쩍 훑어보기만 해도 [오빠]라며 부르짖는 댓글이 가득이었다. 남녀를 불문하고 말이다. 예약 판매를 앞당기라는 요청과 페이스북의 업로드를 바라는 요청이 난무했다. 시간이 지나도 강한서가 페이스북에 피드를 올리지 않자 네티즌들은 그의 지난 피드를 캐기 시작했다. 그러다 결국 [결혼한 다이아몬드 수저 남편의 일상]이라는 계정을 발견했다. 오래 전부터 [결혼한 다이아몬드 수저 남편의 일상] 계정을 팔로워했고 요즘은 또 강한서에게 빠진 팬들은 순간 두 사람의 말투, 문장부호 사용 습관이 똑같다는 것을 발견했다. 심지어 두 계정이 동일한 휴대폰 기종을 사용하고 있고 같은 날 같은 장소에서 피드를 올린 적이 있다는 것까지 전부 알아냈다. ‘이건 강한서 부계정이잖아!’비록 [결혼한 다이아몬드 수저 남편의 일상]은 친구만 볼 수 있게 설정이 되어 지금은 아무 것도 확인할 수 없었지만 오래된 팬들이 남긴 애정행각 캡쳐본은 찾을 수 있었다. 그리고 곧 사람들은 천재는 아내 자랑도 남다르게 한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여행을 떠난 아내가 오랫동안 집을 비우자 강한서는 아내가 보고 싶었지만 그는 보고 싶다는 말 대신 이런 글을 남겼다. [꽃에 물을 준지 7일 째. 이미 한계야. 내일도 안 돌아오면, 시들든 말든 다신 상관 안 해. 난 말한대로 할 거야.]10일이 지나도 한현진이 돌아오지 않자 강한서는 말했다. [꽃은 죄가 없잖아. 죄가 있다면 기른다면서 물도 제대로 주지 않는 사람이겠지.]12일 째: [나한테 사진을 보냈어. 보고 싶지도 않았는데 말이야. 난 그저 저 꽃들에게 신경을 끄고 싶을 뿐이야.]18일 째: [돌아왔어. 물을 너무 많이
한현진의 말에 강한서가 조용해졌다. 그녀는 손을 뻗어 강한서의 얼굴을 어루만졌다. 눈물이 손바닥을 가득 적셨다. 발표회가 무사히 마무리된 그날 밤, 가여운 두 영혼은 서로를 부둥켜안고 한참을 울었다. 안방 밖에 쭈그리고 앉아있던 강민서는 결국 그 방문을 열 용기를 내지 못했다. 강민서의 휴대폰은 끊임없이 진동이 울렸다. 신미정이 쉴새없이 문자를 보내고 있었다. [민서야, 오빠에게 얘기했어?][엄마는 네 삼촌에게 속은 거야. 누가 더 중요한지 엄마가 모르겠니? 엄만 그저 외할아버지가 남긴 회사가 이렇게 무너지는 게 안타까워서 그럴 뿐이야.][엄만 한서와 모자의 인연을 끊을 생각이 없었다. 한서는 내 아들이야. 내가 설마 걔를 버리겠니? 한현진이 날 속여서 그 각서를 쓰게 한 거야. 난 그 각서는 법적 효력이 없다는 걸 알고 사인한 건데 그 X가 이런 식으로 날 X 먹일 줄 어떻게 알았겠니.][민서야, 인터넷에 떠도는 헛소리는 보지도 마. 한서도 내 아들이야. 내가 어떻게 한서를 사랑하지 않을 수 있겠어. 다만 한서는 너무 오랫동안 네 할머니 곁에서 자랐잖니. 할머니는 날 좋아하지 않으시고. 그러니 나도 네 오빠가 날 좋아하지 않는 것 같아서 가끔은 한서를 멀리했던 거야. 하지만 한서도 내 배 아파 낳은 내 자식이야. 한서가 힘들면 당연히 엄마도 더 힘들지.]강민서가 입술을 짓이겼다. 바닥에서 몸을 일으킨 강민서는 아래층으로 내려가며 신미정에게 전화를 걸었다. 아마 줄곧 휴대폰만 쳐다보고 있었던 듯, 신미정은 연결음이 들리자마자 전화를 받았다. “민서야, 우리 딸. 엄마가 부탁한 건 어떻게 됐어? 오빠한테 전부 얘기했어?”강민서가 갑자기 물었다. “엄마, 다음 주 수요일이 무슨 날인지 아세요?”신미정은 순간 강민서의 질문의 의도를 파악할 수 없었다. “얘는, 갑자기 왜 그런 걸 묻고 그래. 엄마는 이제 나이도 많은데 그런 걸 어떻게 기억하겠니. 힌트라도 줘.”강민서가 말했다. “다음 주 수요일은 오빠 생일이잖아요, 엄마. 다른 댁 사모
집에 도착하고 나서야 송병천의 답장을 확인한 한현진은 다행이면서도 안타까운 감정에 사로잡혔다. 하지만 송병천의 답장에 마음이 놓이는 것은 사실이었다. 최소한 지금의 송병천은 비록 화가 나긴 했지만 아예 마음을 돌릴 수도 없는 수준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주문 제작이야, 장인어른의 마음을 사기 위해서라면 반드시 해내야만 했다. 송병천에게 답장을 한 한현진은 고개를 돌려 침대에 누워있는 강한서를 쳐다보았다. 수트는 방금 민경하의 도움으로 벗길 수 있었다. 강한서 스스로 끌어내린 넥타이는 느슨하게 풀린 채 가슴 앞에 걸려있었다. 풀린 단추 사이로 붉게 물든 가슴이 보였다. 강한서의 안경은 여전히 그의 콧등에 걸려있었다. 날카로운 이목구비가 지금 이 순간만큼은 이상하리만치 부드러워 보였다. 한현진이 강한서의 옆에 누워 그의 몸에 기댄채 귓가에 속삭였다. “강한서, 강한서. 여보...”강한서는 조금 시끄러운 듯 머리에 힘을 실어 베개에 푹 파묻혔다. 위로 솟은 목 때문에 그의 목젖이 더 도드라져 보였다. 강한서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 한현진을 유혹하고 있었다. 한현진이 손을 뻗어 강한서의 안경을 벗겼다. 그녀는 그의 이마를 살며시 쓸었다. “여보, 샤워하고 자. 나 너 못 일으켜.”강한서가 흐리멍텅한 눈빛으로 눈을 떴다. 그는 눈앞에 보이는 흐릿한 인영에 갑자기 손을 뻗어 한현진을 끌어안고는 그녀의 얼굴에 입을 맞췄다. “현진아, 현진아...”강한서가 웅얼거리며 한현진의 이름을 불렀다. 한현진의 그의 부름이 일일이 대답하며 단추를 풀렀다. “나 여기 있어.”한현진의 이름을 부르던 강한서가 또 바보처럼 웃음을 터뜨렸다. 평소의 진지하던 모습은 온데간데 없고 그저 한없이 아이 같은 모습이었다. 강한서가 나지막이 말했다. “현진아, 내가 해냈어. 내가 해냈어, 현진아. 현진아...”십년이었다...강한서가 자신의 아버지에게, 자신을 따르는 사람들에게 그리고 한성을 지지하는 모든 고객에게 모두가 만족할 만한 결과를 내놓기까지 걸린 시간이.
송병천이 송민준을 재촉했다. 송민준은 제일 위에 있던 이모티콘을 삭제하곤 휴대폰을 송병천에게 돌려주었다. 이모티콘이 삭제된 것을 본 송병천이 순간 놀란 얼굴을 하며 물었다. “어떻게 사라진 거야?”송민준이 말했다. “인터넷 지연이 있었던 것 같아요.”송병천이 투덜거렸다. “업데이트를 하면 할수록 엉망이네.”송민준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송병천은 휴대폰을 들고 귀한 따님에게 답장을 보내며 송민준을 나무랐다. “너 이젠 나한테 이상한 이모티콘 보내지 마. 내가 실수로 이모티콘을 잘못 보내 네 동생이 보면 내 이미지가 깨지지 않겠어?”송민준이 마음속으로 중얼거렸다. ‘이미지가 어떨진 모르겠지만 아빠 아이큐가 몇인지는 깨달았을 것 같네요.’송병천은 문자를 썼다 지우기를 반복했다. 그는 한참 동안 어떻게 답장을 보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했다. 그는 결국 오다 주운 것 같은 아들에게 도움을 청해야 했다. “민준아, 내가 뭐라고 답장하면 현진이도 상처 안 받고 강한서에 대한 내 분노를 표현할 수 있을까?”송민준이 말했다. “엄마는 약을 주고, 아들은 술을 주네. 하나는 손자를 노리고 다른 하나는 아빠를 노리니 이러니저러니 해도 결국 다 죽어야 끝나겠어, 라고 보내요.”송병천이 송민준을 걷어찼다. “X 놈의 자식!”송민준이 소파에 기대 앉아 웃음을 터뜨렸다. “대체 강한서를 사위로 받아들이시긴 할 거예요? 그럴 생각이 없으신 거면 대체 왜 강한서 체면 따위를 생각해주시는 거예요? 바로 현진이를 데려와서 평생 못 만나게 하면 그만이잖아요.”송병천이 송민준을 노려보았다. “내가 받아들이지 않는다고 해서 뭐가 달라져? 네 동생이 좋다고 하잖아. 뱃속의 아이에게도 아빠는 필요해.”“그러지 마시라니까요. 아빠가 마음에 안 드시면 마지못해 사위로 받아들이셨다고 해도 결국 마음에 넘지 못한 산이 생길 거예요. 저라면 차라리 받아들이지 않겠어요. 현진이에게 다른 남자를 찾아주면 되죠. 현진이도 한서 외모에 반한 거잖아요. 우리 회사에 잘생긴 애
한성우의 말에 한현진의 눈가가 파르르 뛰었다. ‘이런 애정 표현을 안 하면 죽기라도 하는 거야?’한현진이 한성우의 말에 대답하려는데 강한서의 목소리가 먼저 들려왔다. “운이 좋긴 하지. 만약 우리처럼 1000분의 5에 가까운 확률로 쌍둥이까지 임신한다면 더 좋겠지만 말이야.”“...”한현진은 입가에 맴돌던 면박을 주려던 말을 더는 할 면목이 없었다. 한성우가 입술을 씰룩였다. “강한서, 너 이 자식. 하루라도 자랑 안 하면 죽는 병이라도 걸렸어? 그런 거냐고!”강한서가 진지하게 말했다. “죽을 수 있어.”화가 난 한성우는 바득, 소리를 내며 이를 악물었다. 그러면서 그는 속으로 조용히 다짐했다. ‘꼭 딸을 낳아서 강한서 아들을 꼬셨다가 다시 차버리게 할 거야. 몇 번이고 차버리게 할 거라고! 꼭 저 개자식이 나이를 잔뜩 먹고도 손주도 못 안게 만들 거야. 그때도 이렇게 까불 수 있는지 한 번 지켜보자고.’자리를 비운 주강운은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송가람은 아직 완전히 회복하지 못한 탓에 오늘 발표회에는 참석하지 못했다. 송민준은 발표회가 끝난 후 바로 가버렸고 송병천은 아예 하루 종일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굳이 생각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토라져 있는 것이 분명했다. 한현진이 송병천에게 좋은 와인 사진을 몇 장 보냈다. [아빠, 강한서가 일부러 아빠를 위해 남겨둔 거예요.]송병천은 답장이 없었다. 하지만 한현진이 남긴 문자 옆의 1이 사라졌다. 한성우와 민경하가 술에 취한 강한서를 차까지 부축하고 나서야 송병천의 답장을 받을 수 있었다. 그는 한현진에게 하찮아 보이는 표정으로 읍하는 이모티콘을 보냈다. 그 이모티콘을 본 한현진은 어리둥절해졌다. 한현진이 그 이모티콘을 보낸 의미를 알아차리기도 전에 송병천이 또다시 메시지를 보냈다. [삭제된 메시지입니다.]한현진은 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잠시 후. 송병천: [삭제된 메시지입니다.]1분 후.송병천: [삭제된 메시지입니다.]2분 후.송병천: [삭제된 메시
“빨리 뒷이야기를 마저 해봐요.”한현진이 다그치며 말했다. “뒷이야기는 더 막장이에요. 장준은 첫사랑도, 대타도 버릴 수 없었어요. 두 여자는 장준을 빼앗기 위해 피 터지도록 싸웠죠. 마지막엔 첫사랑이 대타가 마약을 했다고 신고를 했고 대타는 그로 인해 모든 것을 잃고 사라졌어요.”“대타가 사라지자 다들 장준은 이제 첫사랑만 볼 거라고 생각했어요. 전에 가족들과 그렇게 갈등을 빚은 것도 전부 첫사랑 때문이었으니까요. 하지만 장준은 그저 조용하기만 했어요. 오히려 장씨 가문에서 장준의 첫사랑이 그의 집안에 발을 들이는 일은 없을 거라는 뜻으로 얘기했죠. 게다가 그 일이 있고 몇 개월 후 장씨 가문에서는 장준과 전고현의 선 자리를 마련했어요.”“장준이 몇 년 동안 죽도록 난리를 피운 덕에 집안에서는 장준에게 완전히 실망하고 진작 포기해버렸어요. 장준이 대를 이어 주면 그 아이를 후계자로 키울 생각이었지만 장준이 마약 때문에 몸을 완전히 망쳐버린 탓에 그럴 수도 없었죠. 병원에 가서 검사를 전부 생식 능력이 전혀 없었어요. 장준이 아이를 낳지 못하니 아버지라도 나서야 했던 거죠. 그러다 진씨 가문에 그런 일이 생기면 결국 그 혼사도 무산되었지만요.”“하지만 이젠 장준의 대타가 돌아왔어요. 타락했던 예전의 모습을 찾아 볼 수 없는 걸 보면 대타에게 마음을 줬다는 소문이 사실이긴 한가 봐요. 만약 제가 그 첫사랑이었으면 아마 화가 나서 죽어버렸을지도 몰라요. 얼마나 오랜 시간을 들인 계획인데, 결국엔 내 손을 떠나 다른 사람 좋은 노릇만 했잖아요.”이야기를 들은 한현진과 강한서는 조금 멍해졌다. 한현진이 참지 못하고 물었다. “성우 씨는 어떻게 이렇게 자세하게 알고 있는 거예요?”한현진은 비록 이 일엔 신경 쓰지 않겠다고 말했지만 그럼에도 사람을 시켜 장준의 일을 조사하도록 했다. 그러나 장준의 첫사랑에 관한 이런 막장 스토리는 전혀 전해들은 바가 없었다. “에이, 뭐 이런 것쯤이야.”말하는 한성우는 어쩐지 눈을 피하는 것 같았다. “예전에 술 마
멈칫한 한현진과 강한서가 홱 고개를 돌려 뒤에서 중얼거리는 한성우를 쳐다보았다. 두 사람의 눈빛에 깜짝 놀란 한성우가 말했다. “왜 날 그렇게 노려봐?”한현진이 다급하게 물었다. “무슨 소문이요? 성우 씨는 뭘 알고 있는 거예요?”한성우가 눈을 깜빡였다. “소문에 장준이 첫사랑 대타와 사랑에 빠졌다고 하더라고요. 그 대타가 사라진 1년 동안 장준은 사는 게 사는 게 아닌 것처럼 지냈대요. 그리고 대타가 돌아오자 바로 활기가 넘쳐흐른다고 하더라고요. 그 모습에 빈정 상한 첫사랑이 매일 대타를 괴롭히고 있고.”한현진은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강한서는 그런 한현진보다 더 놀란 눈치였다. 한현진이 미간을 찌푸렸다. “장준은 술, 여자, 도박, 약 안 좋은 건 전부 한다고 하지 않았어요? 그런 인간에게도 첫사랑이 있어요?”“형수님은 무슨 말씀을 그렇게 섭섭하게 하세요. 병신에게도 청춘은 있어요. 게다가 장씨 가문 정도면 명문가에서는 싫다고 할지 몰라도 조건이 조금 떨어진 집안마저도 거절하겠어요?”그리고 한성우는 두 사람에게 끝장판 막장 스토리를 들려주었다. 장준에게는 어린 시절부터 함께 자란 첫사랑이 있었다. 그 여자는 장준 집에서 가정부로 일하던 사람의 딸이었다. 두 사람은 어린 시절을 함께 보내며 감정을 쌓아왔다. 두 사람에게 사랑이 싹 트던 초창기, 장준의 가족들은 두 사람을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단순히 장준이 그 여자를 가지고 놀다 질리면 그만일 거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그 여자는 생각보다 꽤 수완이 좋았던 것인지 장준은 그 여자의 일이라면 죽자고 달려들었다. 그저 장난감에 불과한 여자였다. 곁에 두고 노는 건 상관없었지만 그 여자가 장준의 안방까지 차지하려고 한다면, 장씨 가문에서는 절대 가만히 놔둘 수는 없었다. 그러니 장씨 가문에서는 돈을 주고 수작을 부려 그 여자를 내쫓았다. 하지만 여자가 사라지자 장준은 미친X처럼 날뛰기 시작했다. 그 여자가 떠나며 남긴 편지 때문이었다. [이번 생의 인연은 여기까지인 것 같아. 다
한현진은 조금 전 대화 내용은 간략하게 강한서에게 알려주었다. 강한서는 놀라움을 감추지 못하며 말했다. “문샤론? 그런 생각은 어떻게 하는 거야?”이야기는 전부 한현진이 즉흥으로 만들어낸 것이었다. 하지만 전부 그럴 듯하게 짜임새가 있는 스토리였다. ‘역시 대단한 여자야.’한현진이 말했다. “간민혜 씨는 죽기 직전까지도 강운 씨에게 한 마디 말도 남기지 않았어. 대체 그 이유가 뭔지, 우린 모르지만 어쩌면 강운 씨라면 알아낼 수 있을지도 몰라.”잠시 생각하던 한현진이 나지막이 말했다. “사실 난 줄곧 강운 씨 집안에서 누군가 이 일에—”강한서가 한현진의 손바닥을 꾹꾹 누르며 조용히 하라는 눈짓을 보냈다. 멈칫하던 한현진은 강한서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리자 정설희, 아니. 정서희가 보였다. 그녀는 장준과 손을 잡고 피로연 현장에 나타났다. 지금의 정서희는 예전의 정설희와 같은 스타일의 메이크업을 하고 있었다. 눈웃음을 짓는 눈가엔 은근한 색기가 흘렀다. 아름다운 이목구비와 화려한 옷차림은 자심이 병원에서 만났던 사람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닮아도 너무 닮았다. 완전히 똑같은 사람인 것 같았다. 함께 등장한 정서희와 장준은 스킨십이 제법 자연스러웠고 꽤 친근한 모습이었다. “강 대표님, 발표회 무사히 마치신 거 축하드려요.”잔을 들고 다가온 장준이 웃으며 강한서에게 축하 인사를 건넸다. 한현진은 순간 약쟁이였던 장준의 상태가 지난번 결혼식보다 너무 많이 나은 것을 발견했다. 광대뼈도 예전처럼 선명하게 튀어나오지 않았고 눈빛에도 생기가 돌았다. 여전히 삐쩍 마른 몸이었지만 정장을 입으니 제법 봐줄만 했다. 아무도 이런 모습의 장준을 보고 약쟁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을 것 같았다. 강한서가 손을 들어 장준과 가볍게 잔을 부딪쳤다. “고마워요.”장준의 시선이 한현진을 향했다. 깊은 눈매에는 나른한 기색이 묻어있었다. 그는 고개를 돌려 정서희를 보며 물었다. “두 사람 동창이라고 하지 않았어? 현진 씨는 당신을 보고도 왜 이렇게 냉담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