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상수는 얼굴색이 어두워졌다. "안 대표님, 저는 모르고 있었어요. 우리 현진이한테 어찌 된 일인지 물어볼 테니, 분명 오해가 있을 거예요.""오해? 무슨 오해? 내 딸이 확실하게 말했어, 당신 딸이 부추겼다고. 이 팔찌 환불하던지, 당신이 사든지 알아서 해. 아니면 가만히 있지 않을 테니까!"상대방은 바로 전화를 끊어버렸다.유상수는 어두운 얼굴을 하고 핸드폰을 놓은 뒤, 머리를 들어 유현아에게 물었다. "안 대표님이 얘기한 일, 대체 어찌 된 일이야? 55억짜리 팔찌는 또 뭐야?"유현아는 속으로 안하윤을 한바탕 욕하고 나서, 어제 있었던 일을 유상수에게 말했다.당연히 자기가 안하윤에게 암시해주었던 말들은 쏙 빼놓고 말이다.그러고는 난처하다는 듯 말했다. "이번 일은 제가 생각이 짧았어요. 언니가 나 안 좋아하는 거 알면서도 안하윤 씨한테 끌려서 한 대표님의 샵으로 갔어요. 한 대표님과 매제는 사이도 좋고, 안 대표님은 한 대표님과 한주 강씨 가문을 건드릴 수 없으니 나한테 덮어씌우는 거예요. 제가 뭐라고 안하윤 씨가 내 말을 듣겠어요?"옆에 있던 여자가 휴지를 넘겨주며 유현아를 위로했다. "네 잘못이 아니야. 55억짜리 팔찌 따위가, 체면을 얼마나 세워줄 수 있다고?"이 여자는 바로 유상수의 비서인 백혜주이다. 유현진이 그날 지하 주차장에서 보았던, 유상수 옆에 있던 바로 그 여자였다.여자는 편한 옷차림으로, 당연하다는 듯 하현주의 자리에 앉아 여주인 행세를 하며 식사했다.유상수는 미간을 찌푸리고 백혜주를 보며 말했다. "지금 그까짓 말이 중요해? 안 대표가 우리더러 돈 내놓으라는 거잖아!""돈 내놓으라 그러면 줘야 해요?" 백혜주가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딸 하나 관리 못 해서 사고 쳐 놓고는 다른 사람한테 덮어씌우기는, 망할 회사 같으니라고, 동생이 시집 잘 간 덕에 버티고 있으면서! 다른 사람들이 안 대표님, 안 대표님 불러주니 정말 뭐라도 된 줄 아네요!""여자들은 머리만 길었지 생각은 어쩜 이리도 짧은지, 상암동의 땅도 안세걸
"한서 찾는 건 아니고, 너한테 물어볼 거 있어."'아빠가 나한테?'"현진아, 너 한 대표랑 잘 알아?""아니요." 유현진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했다.거짓말이 아니었다. 유현진은 실제로 한성우와 친한 사이는 아니다. 엄격히 말하면, 강한서 주위 사람들과 별로 친하지 않았다.강한서는 아마도 이혼을 예상한 듯 유현진과 친구들의 모임에 동행한 적이 별로 없었기도 하고, 굳이 함께 어울리기도 귀찮아했다.'갑자기 왜 한성우에 관해 물어보시는 거지?'얼마 안 가 그녀는 그 이유를 알게 되었다.유상수가 말했다. "현아가 그러는데, 어제 주얼리 샵에 보석 보러 갔다가 널 봤대."유현진은 눈을 가늘게 뜨고는 아무렇지 않은 듯 말했다. "그런 일 있었죠, 근데 왜요?""현아 친구가 55억도 넘는 팔찌 산 거 너도 알고 있어?"유현진은 그저 가볍게 "네" 하고 답하고 비꼬면서 말했다. "안하윤 씨 안광이 참 좋다고 하던데, 하이라이트 디자인을 바로 골랐다 그러더라고요."유상수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말했다. "안하윤이 그 팔찌가 싫다네, 그런데 환불이 안 된대. 한 대표 명의로 된 샵이라던데, 한서와 친구니까 네가 좀 물어봐, 환불 안 되겠냐고."'55억도 넘어가는 물건을 체면 때문에 질러버리고는, 이제야 정신 차리고 후회하는 거야?''안하윤을 내가 너무 단순하게 생각한 거지, 아빠를 찾을 줄은 생각도 못 했네.''내가 짠 판을, 내가 치울 이유가 없잖아?'"아빠, 아빠도 장사하시니까 잘 아실 거예요. 제품은 질량 문제만 아니면 환불이 어려워요. 다들 안하윤 씨처럼 사고 나서 후회돼 하루 지나 환불하면 장사 어떻게 해요?""도리는 맞지만 그래도 안 된다는 법은 없잖아. 네가 한서더러 한 대표한테 얘기해 보라고 해 봐. 한서 한마디면 되는 일이잖아?"유현진은 당연히 싫었지만, 말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래요, 한서 씨한테 물어볼게요. 그렇지만 한성우가 도와줄지는 저도 장담 못 해요."유상수는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한서와 한 대표 사이가
"네, 여보세요?"신호음이 들리자마자, 한성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평소랑은 다르게 가볍지 않고 신중한 목소리였다.유현진은 의아했다. '내 번호 저장했을 텐데?''안 했나?'그녀는 더는 생각할 틈도 없이 말했다. "저예요, 유현진."한성우는 깜짝 놀라며 말했다. "형수님이 어쩐 일로?"상대가 이토록 대놓고 말하니 유현진은 조금 멋쩍었지만, 지금은 멋쩍어할 시간도 없으니 바로 목적을 말했다. "한 대표님 도움이 필요해서요."한성우는 웃으며 말했다. "제가 도와드릴 게 뭐 있겠어요? 한서가 저보다 능력 있는데."그 말인즉, 강한서를 찾으라는 뜻이었다.유현진은 솔직하게 말했다. "우리 싸웠어요. 그 사람한테 말하고 싶지 않아요. 더군다나, 이 일은 한 대표님만이 도와줄 수 있는 일이에요."한성우는 바로 흥취가 생겼다. "싸웠다고요? 왜요? 얘기해 봐요."유현진....'우리 둘이 싸웠다는 데, 이 사람이 왜 흥분하는 거야?'"별거 아니에요. 그이한테 사주려던 양말을 제가 주 변호사한테 드려서, 그이가 삐쳤어요."한성우는 바로 중점을 캐치했다. "주 변호사한테 양말을 드려요?""주 변호사님이 파티에서 저한테 큰 도움을 주셔서, 넥타이를 선물 드린다는 것이 양말도 같이 들어갔더라고요.""아." 한성우는 의미심장하게 한숨을 쉬고 말했다. "그러면 한서가 잘못했네요. 그깟 양말 하나에 삐질 거 뭐 있다고?"유현진은 한성우와 잘잘못을 의논하기 싫었다. 한성우와 강한서는 절친이기 때문에, 아무 때고 말이 새 나가기 마련이다."한 대표님, 본론으로 돌아오죠. 저 부탁드릴 일이 있어요."​한성우는 궁금증을 풀고 나니 열정적으로 변했다. "가족 같은 사이에 부탁은요. 말씀하세요, 형수님."유현진...'태도가 이리도 쉽게 바로바로 바뀌는 건, 강한서뿐만 아니라 강한서 주위 사람들의 특징이네.'유현진은 돌려 말하지 않고, 바로 어제 주얼리 샵에서 발생한 일들과 유상수가 부탁한 일을 말했다.한성우는 사실 이 일을 어제 알
유현진은 안하윤이 거액의 팔찌를 구매했다는 것을 상류사회에 다 알리고 싶었다.'안세걸처럼 체면을 차리는 사람이 이때 환불을 하게 되면 다들 웃겨 죽을걸?'이것은 뒷길도 다 끊어버리는 최고의 방법이다.안세걸 본인이 환불을 포기한다면, 유상수도 더는 유현진에게 이 일을 부탁할 필요가 없다.한성우는 이런 짓을 해본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한성우가 한참 동안 말이 없자 유현진은 한성우를 떠보며 물었다. "어때요?""형수님, 경영학과 나오셨어요?"유현진..."저 연기 배웠는데요."한성우는 입술을 오므리더니 말했다. "형수님은 경영을 배웠어야 했어요. 그럼, 나는 무조건 높은 연봉으로 형수님을 스카우트 했을 거예요."유현진은 그저 농담으로 여겼다. "한 대표님은 어쩔 생각이죠?""좋아요. 우리 매니저도 홍보에 관해 얘기한 적 있기도 하고, 좋은 기회인 거 같아요. 바로 실시하도록 하죠."유현진은 안도의 숨을 내쉬며 말했다. "고마워요."한성우가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제가 형수님한테 고맙죠. 형수님 아니면, 이 팔찌가 언제 팔릴지 누가 알아요?"통화를 끝낸 뒤, 한성우는 바로 강한서에게 전화를 걸었다.한성우는 두 사람의 일이 업무보다 더 재미있었다.강한서가 병원에서 나올 무렵, 한성우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다.강한서는 아직도 병원에서 있었던 일로 화가 나 있어서 바로 전화를 꺼버렸다.하지만 한성우가 쉽게 포기할 사람이 아니다. 한성우는 다시 민경하에게 연락했다.민경하는 어쩔 수 없이, 핸드폰을 강한서에게로 넘겼다.강한서는 얼굴이 잔뜩 굳어서 전화를 받았다. "너 진짜 중요한 일이여야 할 거야!""너 와이프가 연락해 왔었어."강한서..."뭐라고?"한성우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유현진이 방금 나한테 연락했다고."강한서는 유현진이라는 말을 들으니 지표가 생각나, 또다시 코가 아파지는 것 같았다. 강한서는 화가 잔뜩 나서 말했다. "너한테 연락한 걸 나한테 왜 얘기해?""나한테 왜 연락했는지 궁금하지 않아?""전혀!"말을 끝낸
강한서는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차라리 유현진이 널 패고 위협했다면 내가 믿었을 거야.""유현진 그렇게 여리여리한데, 널 패는 거야?"강한서의 코는 또다시 지끈거렸다."말할 거야, 말 거야? 안 하면 나 끊는다!"한성우도 더는 끌지 않고, 유현진이 부탁한 일을 강한서에게 사실대로 말해주었다."유현진 정말 독한 여자야. 유상수가 베이칸 프로젝트를 낙찰받기 위해 절반 재산을 걸고 안세걸이 다리 놔주길 바라는데, 만약 이 일을 유상수가 해결 못 하면 안세걸 그 비겁한 사람이 더는 유상수를 돕지 않을 거야. 그럼, 낙찰도 없던 일이 될 테고. 딸이 어떻게 아빠한테 이렇게 독할 수 있어?"강한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유상수는 하현주가 사고 난지 얼마 안 돼 투약을 그만두고 치료를 멈췄다. 이 일은 충분히 유현진이 유상수를 평생 원망할 수 있는 일이기에 이번 일은 그거에 비하면 새 발의 피와도 같았다."어? 왜 아무 말도 없어?"강한서는 미간을 찌푸리고 말했다. "그렇게 궁금하면 직접 물어보지 그랬어?"한성우..."유현진 말만 나오면 반응이 격하네? 양말 가지고 그럴 거 뭐 있다고."강한서는 멈칫하더니 물었다. "양말 얘기는 누가 했어?""유현진이." 한성우는 실눈을 뜨며 웃었다. "너 혹시 양말을 강운이한테 줬다고 화난 거야?""개 소리 집어치워!"강한서는 표정이 차가워졌다. '이 여자는 별말을 다 하고 다니네!'한성우는 즐겁다는 듯 다시 물었다. "내가 도와줘, 말아?""네가 알겠다고 한 걸, 왜 나한테 물어봐?"강한서는 더는 한성우와 말하기 싫어서 전화를 끊어버렸다.강한서는 혼자 코웃음을 치고는 매니저에게 전화를 걸었다.유현진은 친구의 부탁으로 애니메이션 더빙을 위해, 녹음실로 갔다.오디션 결과도 아직 나오지 않았고 시간도 충족하니 그냥 간 것이다.이 친구는 처음 더빙을 접촉할 때 알게 된 친구이고 이름은 신엽인데 다들 그를 규선이라고 불렀다. 신엽은 업계 최고의 더빙 전문 성우지만 근 몇 년은 방송국과 일하지 않고 친구
유현진이 글을 쓰고 있는 순간에도, 여자는 재잘거리며 끝없이 말했다."눈이 너무 예쁘세요, 들어오실 때 저는 연예인인 줄 알았어요. 어느 학교 학생이에요?"유현진은 차분하게 말했다. "T 대요.""T 대요? 같은 학교네요, 저도 거기 다녀요! 전 공학 계산기 학과인데, 혹시 연기 학과?"유현진은 머리를 끄덕이고는 말했다. "졸업한 지 꽤 됐어요. 그쪽보다 나이 많아요."여자는 놀라움에 입을 벌리더니 말했다. "몰랐어요. 너무 동안이세요. 선배라고 불러도 되죠?""뭐라 불러도 다 돼요."여자는 목소리를 가다듬고 말했다. "선배님, 더빙해보셨어요? 이따가 녹음실에서 테스트도 해야 한다고 그러던데, 저는 컴퓨터 앞에서만 해봐서 녹음실이 어떻게 생겼는지도 몰라요. 근데 저 이력서에 더빙 경험 1년 된다고 적긴 했는데 들키지 않을까요?"유현진은 웃음이 나왔다. '겁쟁인데 담력도 있고, 재밌네.'유현진이 말했다. "사실 다들 가짜로 적어요. 면접 때 침착하고 차분하면 못 알아볼걸요.""어떻게 해야 할까요? 전 규선만 보면 아마도 긴장해서 말도 안 나올 것 같아요."유현진은 들어오는 남자를 짚으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저 남자 어때요?"여자는 머리를 돌려보았다. 180센티 좌우의 키에 얼굴선은 굵고 덩치도 산만 했으며 팔에는 문신이 있었다. 언뜻 봐도 조폭 같았다."좀 무섭네요."여자가 솔직하게 말했다."그럼 규선은 어떻게 생겼다고 생각해요?"신엽은 종래로 스크린에 얼굴을 비춘 적이 없다. 하지만 목소리가 관능적이라 목소리 하나만으로 수많은 여자의 마음을 얻었다.'이런 목소리의 소유자는 꼭 멋질 거야.'여자는 생각도 안 하고 답했다. "완전 만찢남이겠죠."유현진은 사인을 마친 노트를 건네준 뒤, 손을 흔들며 남자를 향해 외쳤다. "규선!"문신남은 이내 미소를 지으며 다가왔다. "벌써 왔어? 난 또 기다려야 할 줄 알았는데."여자는 얼굴이 굳어졌다. 눈앞의 조폭 같은 사람이 마음속의 "만찢남" 이라니.'얼굴과 목소리가 따로 놀았어?
규선은 강한서보다 나이가 조금 많았으며, 어린이집에 다니는 딸이 있었다.유현진은 최초에 규선의 소개로 애니메이션 더빙을 접촉하였으며, 두 사람은 몇 차례 함께 프로젝트를 완성했다. 심지어 유현진의 발음 기교도 규선이 가르쳐준 것이었다.유현진은 규선을 항상 오빠처럼, 사부님처럼 여겼다.유현진은 파트가 적다 보니 얼마 안 가 바로 끝냈다.규선은 완성품에 대해 아주 만족하며 녹음실에서 나와 유현진을 불러 세웠다. "잠깐 기다려, 우리 와이프가 선해가에 자리 예약했으니 내 차로 이동해.""아니에요, 집 가까우니까 가서 먹으면 돼요."말을 끝낸 유현진은 바로 뒤 돌아섰지만, 규선은 재빨리 그녀의 팔목을 잡고 노려보았다. "밥 한번 같이 먹기 엄청 힘드네? 누가 너 팔아먹는대?""오빠, 그게 아니라...""그러면 같이 가! 아니면 우리 와이프 너랑 나 의심해. 같이 만나지도 않고."유현진..."그래요."사실 유현진은 그런 뜻이 아니란 걸 알고 있었다.규선의 와이프는 역사 교사이고 유현진은 몇 번 본 적이 있었다. 말투와 행동도 단아해 규선이 푹 빠져 있건만, 어찌 다른 여자에게 한눈을 팔 가?사실 규선은 이 애니메이션의 여자 배역을 유현진에게 부탁하려고 했었다. 미리 얘기도 했고 유현진도 응낙했던 일이었지만, 얼마 안 가 다른 파트너가 인지도가 어느 정도 있는 자기의 여자친구를 꽂아 넣었다.정식 계약이 아닌 구두상의 계약이라 규선도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미안한 마음에 몇 번이고 유현진에게 밥을 사주며 사과하려 했지만, 매번 돌아오는 건 그녀의 거절뿐이었다.그래서 규선은 이번에 와이프를 무기로 사용했다.선해가는 룸이 없지만, 늘 손님들로 꽉 차 있는 샤브샤브 맛집이다.규선은 다른 유명한 성우들과 다르게 인기를 얻은 후에도 스크린에 얼굴을 비추지 않았다. 심지어 동종 업계 지인들의 모임을 제외한 일체 활동도 참여하지 않았다.이런 미스터리한 콘셉트로 사람들은 그에게 더 열광했다.유현진은 그와 가까워진 뒤 농담으로 물은 적이 있었다. 혹시
'차이현?''많이 듣던 이름인데?''그 사람도 감독인데?''설마.'유현진은 설마 하며 머리를 돌렸다가 깜짝 놀랐다.규선이 말하는 감독이 바로, 유현진이 예전에 오디션을 보았었던 작품의 감독인 차이현이었다!'보통 감독이 아니잖아?'차이현은 업계에서 알아주는 감독이다. 그가 맡은 작품은 어떠한 앱에서도 별점이 7점 이하였던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별점이 7점을 넘어가는 작품은 무조건 봐야 할 작품이다. 하지만 차이현의 작품은 최저 별점이 7.8 점이었다!예상치도 못한 차이현 감독과의 사적인 식사에 유현진은 심장이 떨려왔다.차이현은 그녀의 멍한 표정을 보며 자연스럽게 걸어와 규선 부부와 인사를 나눴다.두 사람의 대화에서 유현진은 두 사람은 동문이고 사이가 좋다는 것과 규선의 와이프가 차이현의 사촌 여동생이라는 것, 그리고 두 사람은 차이현으로 인해 부부가 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형, 소개할게요. 이쪽은 내 후배 유현진. 우리 바닥에서 꽤 유명해요. 내가 자주 말했던 선셋 스타가 바로 유현진이예요. 얼굴도 예쁜데 목소리도 좋고 성격까지 좋아요. 현진아, 너한테 얘기했던 내 친구 차이현이야. 인사해."차이현의 반응으로 봤을 땐 아마도 그녀를 알아보았지만, 굳이 이에 관한 얘기를 꺼내지 않았다. 유현진도 어색했지만, 그저 아무 말 없이 손을 내밀어 인사를 청했다. "감독님, 반가워요. 유현진이예요."하지만 차이현은 그녀의 악수에 응하지 않고, 그저 가볍게 머리를 끄덕였다.유현진은 멈칫하더니 어색하게 손을 서서히 내렸다.규선의 와이프는 이상함을 감지했지만 깊이 생각지 않고 주문부터 했다. "음식 올려주세요. 다들 배고프니 드시면서 얘기 나눠요.""그래, 음식부터 올려."열정적인 규선 부부와 달리 차이현은 직업 특징상 성격이 무뚝뚝했다. 어쩌면 유현진이라는 어색한 사람이 자리에 있어 더 말을 아꼈을지도 모른다.더군다나 유현진은, 규선이 유현진에 관한 화젯거리만 꺼내면 차이현의 말수가 더 적어지는 것을 발견했다.유현진은 너무 어색했다
염색은 한 시간이 지나서야 끝이 났다. 잘생긴 포즈로 거울 셀카를 찍은 진윤이 강한서에게 사진을 전송했다. [다시 시작.]강한서는 사진 속 검은 머리에 순해 보이는 젊은이를 보며 피식 웃음을 흘렸다. 그의 웃음소리에 읽던 책을 내려놓은 한현진이 고개를 돌려 강한서를 쳐다보았다. “왜?”강한서가 진윤의 셀카를 한현진에게 보여주었다. 한현진 역시 사진을 보자마자 웃음을 터뜨렸다. “어쩐지 금발에 눈썹도 살짝 밀어버리는 스타일을 고집하더라니. 눈썹 피어싱까지 빼니까 그냥 아기였네. 너무 귀엽게 생겼잖아. 훈이보다 어려 보여.”강한서도 한현진을 따라 웃었다. “선배도 그렇잖아. 50살도 넘은 분이 아직도 30대처럼 보이니까. 성우가 처음 선배를 봤을 때 형이라고 불렀다가 예의 없다고 혼났어. 그러다 다른 애들도 형이라고 하니까 말이 없더라고.”그 장면을 상상한 한현진은 웃음을 멈추질 못했다. “역시 동안이 좋아. 50대가 되어서도 얼굴 하나로 젊은이들의 마음을 살 수 있잖아. 난 왜 동안이 아닐까?”그 말에 멈칫한 강한서가 한현진을 힐끔 쳐다보았다. “누구 마음을 사려고?”한현진이 눈웃음을 지었다. “강 대표님, 몇 십 년 후의 일도 미리 질투하실 거예요?”강한서가 태연하게 대답했다. “그 정도는 아냐.”한현진이 의외라는 듯 물었다. “정말?”강한서가 확신에 찬 말투로 대답했다. “안 해, 질투.”예상 밖의 대답에 호기심이 불타오른 한현진이 물었다. 몇 십 년 후엔 사랑보다 정으로 사는 거라 신경 쓰지 않는 거야?”강한서가 대답했다. “그건 모르겠지만 한 가지는 확신할 수 있어.”“뭔데?”강한서가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이 몸이 살아있는 한 그대들은 그저 첩에 불과해.”멍해졌던 한현진이 폭소를 터뜨렸다. 그녀는 강한서를 품에 안고 뽀뽀 세례를 날렸다. “진지한 얼굴로 실없는 농담을 던질 때 정말 귀여워 죽겠다니까.”강한서가 힐끔 한현진을 쳐다보았다. “이런 걸 바로 조강지처의 자신감이라고 하는 거야.”한
순간 불쾌한 기분에 빠진 진윤이 미간을 찌푸렸다. 이런 아마추어 경기는 사석에서 주최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라 전문적인 레이싱 경기도 아니었다. 오직 속도에서 주는 쾌락만을 추구하는 경기였다. 상금이 높은 만큼 위험부담도 컸다. 하지만 진윤이 경기에 참가한 것은 상금 때문이 아니었다. 돈 걱정 없이 산 진윤이 목숨 건 돈에 욕심낼 필요는 없었다. 그는 단지 경기의 주최 측에 F1 레전드 인물도 있다는 소식에 우승을 하면 그 사람과 만나 얘기를 나눌 기회라도 있지 않을까 싶어 참가한 것이었다. 진윤은 그의 팀원들 역시 레이싱에 대한 열정으로 함께 지금까지 뭉칠 수 있었던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자신을 무시하는 친구의 말은 불쾌하기 짝이 없었다. 모든 사람이 진윤처럼 레이싱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프로 선수가 되길 꿈꾸는 것은 아니었다. 어떤 이들이 사랑하는 것은 어쩌면 레이싱 자체가 아니라 그것이 지니고 있는 상금이라는 거대한 유혹일 수도 있었다. 팀원 중 위험한 내기 경기에 참석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진윤은 알고 있었다. 그들은 마치 경주마처럼 미친 듯이 산길을 휘저었다. 목숨을 내걸고 재벌들의 도박판에서 기꺼이 주사위가 되었다. 아차 하는 사이,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널 수도 있었다. 하지만 경기에서 이기면 그만큼 어마어마한 상금이 주어졌다. 불행히 절벽 아래로 떨어진다고 해도 그의 가족들은 놀라운 액수의 보상금을 받을 수 있었으니 위험을 감수하고 뛰어드는 사람은 얼마든지 있었다. 처음으로 팀원에게 그 얘기를 들었을 때의 진윤은 충격에 빠졌었다. 하지만 팀원들은 마치 일상적이 대화를 하듯 당연한 말투로 말을 이었다. 그때의 진윤은 그저 그들이 비슷한 일을 너무 많이 들은 탓에 익숙해져서 그런 것이라 생각했었다. 하지만 이제 보니 그들은 그렇게 위험 부담마저도 부러웠었던 같았다. 팀원 중 대부분의 사람에게 레이싱은 그저 짧은 시간 사이 많은 돈을 벌 수 있는 도구에 불과했다. 뜬 눈으로 꿈을 꾸고 있는 진윤이야말로 그들에겐 이상한 인간
“아들. 네가 공부가 하고 싶다면 복수 전공이 아니라 10개 전공을 배우겠다고 해도 엄마는 찬성이야. 엄마 지금 너무 기뻐. 만약 농담하는 거라면 지금 당장 거짓말이었다고 얘기해. 안 그럼 엄마는 진심으로 받아들일 거야.”진윤이 웃으며 홍혜림의 팔을 끌어안았다. “엄마. 저도 형처럼 엄마의 자랑이면 안 돼요?”홍혜림이 진윤의 금발을 어루만졌다. “너도 예전엔 엄마의 자랑이었지. 금발로 염색한 후로는 자랑이 아니게 되었지만.”진윤: ...“그럼 다시 염색할게요.”홍혜림이 얼른 헤어숍 VIP카드를 건네며 말했다. “얼른 가. 여긴 새벽 12시가 되어야 영업이 끝나는 곳이야. 지금 가면 아직 시간 있어.”진윤은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홍혜림이 얼마나 진윤의 금발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알 수 있었다. “네, 네, 네. 지금 갈게요.”외투를 챙겨주며 문앞까지 배웅 나온 홍혜림이 진윤에게 물었다. “아들. 조금 전에 누구한테 들은 말 때문에 생각이 바뀌었다고 했잖아. 그 분 너희 교수님이셔?”“우리 교수님은 아녜요. 하지만 좋은 스승님이긴 해요.”‘사기꾼이기도 해. 하지만 꽤 능력 있는 사기꾼.’홍혜림이 호기심에 가득 찬 말투로 물었다. “그 분 한 마디에 바로 생각이 바뀐 거야? 내가 너한테 얼마나 많이 얘기했었는데, 그땐 들은 척도 안 하더니.”진윤이 말했다. “절 데리고 20km를 뛰었어요. 자길 이기면 날 뉴벨리 팀에 입단시켜 주겠다고 하더라고요. 나보다 10살이나 많아서 나이 많은 어르신한테 지겠어? 라고 생각했는데 제가 졌어요.”진윤이 창피한 듯 머리를 긁적였다. “사실 저보다 빨리 뛴 건 아니었어요. 제가 적을 만만하게 생각한 거죠. 하지만 무서운 사람이에요. 지독하게 강해서 무서운 사람. 그 사람은 못 해낼 일이 없는 것 같아요. 입단은 무슨, 그냥 그 기회를 벌어 저에게 설교를 하려던 것뿐이었어요.”“내가 공부에 전념할 수 있게 레이싱을 그만두게 하려고. 처음엔 엄마가 보낸 스파이인 줄 알았다니까요. 하지만
진윤에게 묻는 홍혜림은 마음속으로 간절히 바랐다. ‘얘기해. 엄마 괜찮아. 파산이라도 하지, 뭐. 돈은 없으면 다시 벌 수 있어. 아빠가 안 된다고 하면 쫓아내면 돼.’처음으로 느끼는 죄책감에 진윤은 고개를 숙였다. 홍혜림이 비록 관리를 잘 하긴 했지만 귀밑머리는 이미 하얀 서리가 내려있었다. 큰형은 어려서부터 얌전하고 말을 잘 듣는 아이라 부모님의 속을 썩인 적이 없었다. 유독 진윤이 고집을 부리며 걸음마를 뗄 때부터 뒤에서 마음을 졸이게 했다. 진윤의 수능성적은 그리 좋은 편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지금 그가 다니고 있는 대학교 전공은 전부 부모님이 수많은 돈을 들여 기획한 결과였다. 하지만 진윤은 본인이 좋아하지 않는 전공이라는 이유로 자포자기하며 지냈다. 부모님이 통제욕이 강하다는 것은 그저 진윤이 그들에게 씌워놓은 프레임에 불과했다. 정말 부모님의 통제 속에서 살아가는 친구들은 매일 모든 스케줄, 심지어 먹는 음식까지 전부 부모님에게 보고해야 했다. 그런 사람에 비하면 그의 부모님은 그저 애교에 가까운 수준이었다. 레이싱을 좋아하는 진윤이 못마땅했지만 그럼에도 그저 설득하는 것이 전부였다. 홍혜림은 단 한 번도 진윤의 레이싱 장비를 부순 적이 없었다. 매번 더는 새 장비를 사주지 않겠다고 했지만 그 다짐도 진윤의 애교 몇 번에 곧 무너지고 말았다. ‘언제까지 실망만 안겨드릴 순 없잖아. 나도 엄마의 자랑이 되어야지 않겠어?’“엄마. 저 복수 전공하고 싶어요. 전 레이싱이 좋아요. 도무지 포기가 안 돼요. 저 실력 그 정도 아닌 거 알아요. 하지만 자동차 관련한 전공을 배워보고 싶어요. 지금 전공은 절대, 두 번 다시는 F학점 받는 일 없을 거라 약속 드려요. 복수 전공하게 해주면 안 돼요?”홍혜림: ??“그거 말고 다른 건 없어?”진윤이 멍해졌다. “네?”홍혜림이 말했다. “네가 나에게 하려는 말이 그거야?”진윤이 어리둥절한 얼굴로 되물었다. “네. 그게 아니면요?”홍혜림: “사람을 치거나, 교통사고를 낸 게 아니고?”
눈에 띄게 변한 진윤의 모습을 홍혜림은 믿을 수가 없었다.집 바로 앞이 학교라 진윤은 기숙사 생활을 하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집에 자주 들어오는 것도 아니었다. 집에서 레이싱 게임을 할 때마다 부모님의 잔소리가 끊이질 않아 진윤은 큰형 아파트에 몰래 숨어있는 것을 좋아했다. 진윤의 큰형은 일 때문에 그에게 신경을 쓸 여유가 없었다. 9살이나 더 많은 그의 형은 가끔 부모님보다 더 진윤을 아끼기도 했다. 심지어 가끔은 진윤의 편을 들어 그의 비밀을 지켜주기도 했다. 큰형에게는 결혼을 약속한 여자친구가 있었다. 그러니 제발 눈치껏 본가로 들어오라고 홍혜림은 몇 번이고 진윤에게 얘기했었다. 사실 예비 며느리는 그저 핑계에 불과했다. 진윤을 본가로 불러들이는 이유는 진윤이 곁에 없으니 도무지 관리를 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진윤은 그 점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니 매번 홍혜림이 같은 얘기를 꺼낼 때마다 그는 두 귀를 닫고 못 듣는 척 연기했다. 하지만 이번엔 홍혜림이 먼저 얘기를 꺼내기도 전에 진윤 스스로 본가로 돌아왔다. 집으로 돌아온 진윤에 홍혜림은 혹시 형제가 싸우기라도 한 걸까 전화를 했지만 아니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그 말에 홍혜림은 생각했다. ‘이 자식 또 무슨 사고라도 치고 돌아와서 얌전한 척 연기하는 거 아냐?’‘교통사고라도 내서 배상해 줘야 하는 건가? 아니면 레이싱 카가 망가져서 새 차를 살 돈이 필요한 건가?’‘설마 사람을 친 건 아니겠지?’진윤이 집에서 열심히 공부할수록 홍혜림은 점점 더 사람을 쳤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사로잡혔다. 그녀는 매일 밤 아무 일도 없는 척 진윤의 방 앞을 서성이며 생각했다. ‘먼저 잘못을 인정하면 요즘 얌전하게 지냈던 걸 정상참작해서 욕을 좀 덜해야겠어.’하지만 3일이 지나도록 진윤은 홍혜림을 부르지 않았다. ‘이상해.’‘너무 이상하잖아!’‘설마 사람을 친 것보다 더 큰 사고는 아니겠지?’‘대체 얼마를 배상해야 하는 거야?’1 주일이 지나자 더 이상 참지 못한 홍혜림은 진윤의
진윤: ...강한서가 진윤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그래서 싫다면서 현 상황을 바꿔보려고 하지도 않은 거야?”진윤: ...‘왜 선생님께 혼나는 기분이 드는 거지? 진지하게 핵심만 꼬집고 있잖아.’입을 달싹이던 진윤은 변명이라도 해보고 싶었지만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는 한참만에야 입을 열었다. “그런 생각은 안 해봤어요.”진윤은 그동안 어떻게 반항해야할지, 그런 생각만 하고 있었다. 강한서가 말했다. “네 인생은 네 거야. 네가 열심히 살든, 대충 살든 네 하루하루는 다름없이 흘러가고 있어. 네 태도에 따라 싫었던 그 경험들이 사라지지 않아. 단지 네가 싫다는 이유로 아무 문제도 해결하지 않고 대충 흘려보냈을 뿐 그것들은 계속 존재해.”“대충 공부해서 대충 졸업하면 또 대충 취직이나 하겠지. 아니면 아예 너희 회사로 입사할 수도 있겠지. 하지만 그 다음에? 그렇게 평생을 대충 흘려보낼 거야? 그게 네가 원하는 인생이야?”멍하니 강한서를 쳐다보던 진윤이 한참만에야 대답했다. “아뇨.”부모님이 선택해준 전공이 싫어 공부도 제대로 하지 않은 채 얼른 졸업하기만을 바랐다. 하지만 강한서의 말처럼 졸업 후엔? 전공에 맞는 직업을 찾아 그저 그런 삶을 살아갈까, 아니면 부모님 회사에 입사해 되는대로 살아갈까. 어떤 선택이든 그건 진윤이 원하는 인생은 아니었다. 4년이란 시간을 허무히 흘러 보내고 나면 남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하지만 전 이미 3학년이에요. 전과를 하기엔 늦었잖아요. 이젠 뭘 하려고 너무 늦은 것 같아요.”속상한 듯 대답하는 진윤의 말에 한현진이 말했다. “진윤 씨는 완전 MZ세대잖아요. 이제 갓 이십 대 초반인데 뭘 해도 늦지 않은 나이예요. 너무 빨리 본인의 가능성을 단정 짓지 말아요. 60세에 대학생이 됐다는 기사 못 봤어요?”“진윤 씨보다 나이가 훨씬 많아도 늦었다고 생각 안 하는데, 진윤 씨가 왜 겁을 내요?”“전...”입술을 달싹이던 진윤이 한참이 지나서야 한숨을 내뱉었다. “두 사람 문제아 갱생
진윤은 6분 차이로 강한서에게 패배했다. 그가 결승점에 도착했을 때, 강한서는 이미 안정적인 호흡을 되찾고 있었다. 결승점을 통과한 진윤은 다리가 풀려 바닥에 털썩 주저앉으려 했다. 강한서가 다가가 그런 진윤을 일으켜 세웠다. “서서 쉬다가 나중에 앉아.”말하며 물뚜껑을 따 진윤에게 건넸다. “천천히 마셔.”진윤은 이 상황이 창피하기 그지없었다. 처음엔 강한서를 얕보고 경기에 진 자신에게 화가 났다. 하지만 챙겨주는 강한서를 보며 자신이 너무 유치했던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숨을 몰아쉬며 강한서가 내민 물을 받은 진윤은 아무 말 없이 꿀꺽꿀꺽 물을 삼켰다. 한현진이 강한서에게 또 물을 한 병 가져다주며 나지막이 물었다. “넌 괜찮아?”강한서가 머리를 가로 저었다. “괜찮아.”힘들지 않다면 거짓말이었다. 비록 꾸준히 러닝을 하고 있었지만 하프 마라톤을 뛴 건 오랜만이었다. 강한서가 고개를 돌려 진윤을 쳐다보았다. 충격이 꽤 컸는지 입술을 삐죽이고 있는 아이는 풀이 죽은 얼굴로 당장이라도 눈물을 흘릴 것만 같았다. 기대했던 것만큼 큰 실망이 안겨왔다. 진윤은 심지어 주호를 앞에 두고도 대화를 나눌 의욕조차 찾지 못했다. “가자. 쉬다가 같이 밥이나 먹어.”진윤이 시선을 올렸다. “이겼다고 저랑 축하라도 하시게요?”강한서가 웃으며 대답했다. “조 회장님 소개해줄게.”멈칫한 진윤이 믿을 수 없다는 듯 말했다. “하지만 제가 졌잖아요.”강한서가 고개를 끄덕였다. “졌으니까 팀에 입단할 수는 없지만 소개는 받을 수 있잖아.”강한서가 말을 이었다. “아니면 소개받고 싶지 않은 거야?”“아뇨!”다급하게 대답하던 진윤이 곧 쑥스러운 듯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그 뭐야... 형님 그 나이에 체력이 아직도 좋으시네요. 제가 졌어요. 인정해요. 형님이 이기셨어요.”진윤의 말에 강한서가 멈칫했다. “그 나이라니?”곧 불혹의 나이라고 대답하려던 진윤은 강한서 뒤에서 눈짓을 보내는 한현진의 모습에 순간 뭔가를 깨달은 듯 아부했다.
한현진은 한참을 멍한 얼굴로 앉아있었다. 그녀는 강한서에게 그날의 일에 관해 물은 적이 있었다. 하지만 그때의 강한서는 본인 덕에 한현진이 월급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이라고 얘기하지 않았다. 그러니 한현진은 줄곧 월급을 전부 돌려받을 수 있었던 건 주최 측에서 한현진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밝혀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지금 보니 꽤 단순한 생각이었다. 모터쇼라는 큰 활동에 주최 측에서 안내 요원까지 신경 쓸 리가 없었다. 알바의 잘못이든 아니든, 그건 그들의 관심 밖의 얘기였다. 문제가 생겼을 때 그들이 원하는 것은 제일 간단한 방법으로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었다. ‘강한서였어... 강한서가...’“강한서 그 자식, 마음을 꼭꼭 숨기기도 했네. 이미 그때부터 눈 여겨 보고 있었던 거네요.”감탄하는 주한과 달리 한현진은 웃음을 터뜨렸다. “선배님, 강한서가 절 도와줬을 땐 아무런 사심도 없었을 거라고 전 생각해요. 그날 그런 일을 당한 사람이 저든 아니든, 한서는 그렇게 했을 거예요.”당시 강한서는 한현진을 부르지도, 인사도 하지 않았었다. 심지어 시간이 흘러 한현진이 다시 그 얘기를 꺼냈지만 그는 여전히 솔직한 사실을 털어놓지 않았고 그 일을 핑계로 점수를 더 받으려고 하지도 않았다. 그러니 한현진은 확신할 수 있었다. 강한서가 한현진을 도운 건 절대 사심이 있어서가 아니라는 것을. 조한이 웃으며 말했다. “사심이 있었든 아니든, 그게 중요한 게 아니죠. 어쨌든 두 사람 인연은 삼심할 매가 쇠줄로 꽉 묶어놓은 것 같네요. 인연이 깊어도 너무 깊어.”한현진도 그 말에 깊이 공감하는 바였다. 만약 한현진이 죽은 그 태아와 바뀌지 않았다면 그녀와 강한서는 어릴 적부터 함께 자란 둘도 없는 사이였을 것이다. 바뀌었어도 결국은 돌고 돌아 다시 만나게 되었으니 하늘이 이어준 인연이 틀림없었다. 진윤은 빠른 속도로 첫 바퀴를 완주했다. 강한서는 진윤과 2km정도 뒤떨어져 있었다. 하지만 두 번째 바퀴부터 진윤의 속도는 점점 느려졌지만 강한서는 여전
조한이 선글라스를 벗자 지적인 이미지의 얼굴이 드러났다. 그는 입꼬리를 올려 씩 웃으며 말했다. “학교 다닐 땐 선배라고 부르더니 졸업하니까 회장님이야?”강한서가 한현진을 향해 설명했다. “대학원 선배님이셔. 같은 지도교수님이었거든.”한현진이 조한의 비위에 맞게 대답했다. “선배님, 안녕하세요.”“역시, 제수씨가 한서보다 낫네.”한현진과 인사 몇 마디를 나눈 조한이 강한서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넌 나이가 몇인데 어린애랑 따지고 그래?”강한서가 말했다. “선배보다는 어려요. 제 아내는 아직도 대학생 같다고 하던데요.”조한이 어이없다는 표정을 짓더니 한참만에야 입을 열었다. “제수씨가 아이 달래듯 잘 하나봐.”한현진: ...대화를 주고받는 사이, 진윤도 도착했다. 강한서가 승부를 인정하지 않을까 걱정된 그는 증인이 되어줄 친구 두 명을 데리고 나타났다. 기세등등하게 걸어오던 진윤은 한현진을 보더니 곧바로 우물쭈물하며 어쩔 줄 몰라 했다. 그러더니 조한을 발견하고는 말조차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 진윤은 그제야 강한서의 말이 농담이 아니라는 것을 확신할 수 있었다. ‘정말 날 뉴벨리 팀에 추천해줄 수 있나봐.’조한이 장난스러운 말투로 진윤을 응원했다. “청년, 저 자식을 쓰러뜨릴 수 있다면 내가 팀장 자리도 고민해볼게요.”한현진도 진윤을 향해 말했다. “파이팅! 결승점에서 기다릴게요.”두 사람의 응원에 후끈 달아오른 진윤은 마음속으로 각오를 다지며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했다. 진윤에게 한현진과 조한은 그야말로 우주대스타였다. 그러니 그들의 응원은 그에게 흥분제와도 다를 바가 없었다. 이 경기에서 진다는 것은 자신의 우상 앞에서 망신을 당하는 일이었다. 준비 운동을 마치고 시작을 알리는 경보음이 울리자 진윤은 쏜살같이 앞으로 달려 나갔다. 어린 나이라 그런지 폭발력이 대단했다. 그는 곧 강한서와 차이를 벌리며 앞서나갔다. 강한서는 진윤의 속도를 따라 빨리 달리지 않고 꾸준히 똑같은 페이스를 유지했다. 한현진은 망원경을 통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