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운은 이미 1년 중 기온이 가장 높은 달에 접어들었고, 오후가 되었는데도 지면 온도는 여전히 높고 더위가 기승을 부리고 있었다.유시아는 수업 가는 길에 너무 더워, 저도 몰래 길가에 있는 아이스크림 가게 앞에서 멈추었다.“사장님, 바닐라 아이스크림 하나 주세요. 음... 설탕 알갱이 많이 뿌려서요, 감사합니다.” 카카오페이로 돈을 계산하고, 유시아는 가게 사장 손에서 설탕 알갱이로 장식된 알록달록한 아이스크림을 건네받으며 기분이 한층 밝아지는 것 같았다. 그녀가 한창 그것을 입 속에 넣으려고 하는데, 주머니 속의 휴대전화가 윙윙거리기 시작했다.통화가 연결되자마자 그 안에서 임재욱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아이스크림 먹지 마!”유시아는 깜짝 놀라 무의식적으로 사방을 둘러보았다.주변은 모두 행인들이었고, 맞은편에는 넓은 도로가 있었다. 마침 빨강 신호등이라 도로에 여러 차량이 서 있었다.임재욱은 아마 저 차들 중에 어느 한대의 뒷좌석에 앉아 자신을 보고 있을 것이라 하며 그녀는 생각했다.다른 한편에서, 임재욱의 말투는 더욱 엄격해졌다.“석 선생이 너한테 찬 음식을 먹지 말라고 당부했잖아. 먹고 또 배가 아프면 어떡해? 네 몸 건강을 그런 식으로 챙기는 거야? 어?”비록 사람은 보이지 않지만, 유시아는 꾸중을 들으며 저절로 고개가 숙어졌다.“날씨가 너무 더워서 하나 사 먹었는데, 평소에는 안 먹었...”임재욱한테서 차가운 명령이 떨어졌다.“얼른 버려! 내가 차에서 내려 네 손에서 뺏기 전에!”“......”그녀는 원래 애티난 귀염 상 얼굴을 갖고 있는데, 아이스크림을 손에 쥔 채 버리기는 아깝고, 그렇다고 먹을 엄두는 내지 못하며, 서러워하는 가여운 모습이 마치 어린아이를 보는 것 같았다.임재욱은 그런 그녀의 모습이 왠지 우스꽝스럽기도 하고 귀엽기도 해서, 입가에 저도모르게 웃음이 새어 나왔다. 그리고 뜻밖으로 그녀와 타협했다.“그럼 한 입만 먹고 버려.”그의 승낙을 받자, 유시아는 입을 벌려 아이스크림을 한 입 크게 베어 물었다.
유시아가 학교에 일찍 도착한 바람에 교실 안은 아직 텅 비어 있었다.그녀는 여전히 구석에 자리를 골라 앉아 화판을 받치고 책을 꺼내 읽으며 교수님이 수업하러 오기를 기다렸다.미술학과 강의실은 2층에 있었는데, 창문을 사이에 두고 운동장에서 학생들이 장난치며 수다를 떨고 있는 소리가 희미하게 들렸다. 그러다 갑자기 낯익은 여자 목소리가 그녀의 주의를 끌었다.유시아는 잠시 멍하니 있다가 창가로 가서 밖을 내다보았다. 밖에는 과연 그녀가 잘 알고 있는 여자, 신시연이 있었다.신시연은 치타 무늬의 나시에 검은색 반바지를 입고, 두 여학생과 어깨동무를 하고 유시아가 있는 이 건물을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비록 그녀들이 자신이 있는 교실에 올 거라는 건 확실하지 않지만, 유시아의 마음속에서는 이미 1급 경보가 울렸다.만약 신시연한테 자신이 여기서 방청하고 있다는 것을 들키게 된다면, 그녀는 예전처럼 사람들 앞에서 뺨을 때리고 욕하지는 않을 것이다.하지만 지난번에 신시연이 자기 때문에 경찰서에 잡혀간 적도 있고, 신시연 언니의 그 오래된 빚까지 합쳐 신시연은 아마 자신을 무지막지 미워할 것인데, 여기서 자신을 만난다면 절대 그냥 넘어가지는 않을 것이다. 그리고 감옥에 있었던 일이 일단 밝혀지면, 그녀는 앞으로 이곳에서 방청할 수 없게 된다...왜 오늘 재수가 이렇게 없지? 신시연이 다니는 학교는 정운의 또 다른 대학인데, 왜 하필 여기서 만나게 된 건지. 참으로 원수는 외나무다리에서 만난다더니, 오늘 상황이 딱 그러하다.유시아는 재빨리 물건을 간단히 치우고 복도 너머로 빠져나가려고 했다. 오늘 수업은 일단 듣지 않기로 하고, 나중에 다시 외출하게 되면, 오늘의 운세를 한번 훑어보고 나와야겠다고 생각했다. 신시연을 다시 만난다는 건 끔찍한 일이니까.그런데 긴장할수록 두 손이 떨렸고, 가까스로 화판을 들고 문으로 돌진했을 때 마침 강의실에 들어오는 남학생과 정면으로 부딪쳤다. 물감 상자가 뒤집히며 알록달록한 물감이 그 남학생 셔츠에 뿌려져 매우 꼴이 아니었다.
한걸음에 건물 밖으로 뛰쳐나온 유시아는 놀란 마음을 달래며 뒤를 돌아보았다.신시연이 쫓아오지 않은 것을 확인하고서야 천천히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손으로 가슴을 쓸어내린 그녀는 그제야 자신의 화판이 방금 다른 사람과 부딪힐 때 떨어졌다는 걸 알게 되었다.유시아는 자신을 탓하며 머리를 세게 툭툭 쳤다. 도망치는 데만 집중하다 화판도 챙기지 않고 바보 멍청이 같다고 중얼댔다.하지만 다시 가지러 들어갈 용기는 없었다. 화판이 그다지 값진 물건은 아니니 나중에 수업 들으러 갈 때 다시 찾아보면 되고, 어차피 다음에 가게 되면 방금 부딪힌 남학생한테도 보상해야 한다고 생각했다.유시아는 다른 생각 할 겨를이 없이, 정운대 교문을 나와 버스를 타고 집으로 향했다.버스 안은 사람들로 북적거렸고, 그 속에는 예쁘게 화장한 직장인 여자, 시장에 장을 보고 오는 주부, 이 근처 학교의 어린 커플, 그리고 아이들을 데리고 놀러 나온 애 엄마까지, 형형색색의 사람들이 있었다.유시아는 그들을 보고 있자 갑자기 마음 한구석이 울적했다.그녀는 언제 이 사람들처럼 당당하고, 누구한테 들통날까 봐 두려움에 떨지 않고, 차별받지 않으면서 살 수 있을까?감옥살이를 한 오점을 어떻게 해야 깨끗이 씻어낼 수 있을까?생각하면 할수록 실망스럽고 절망적이었다.유시아는 이러한 생각에 정신이 흐리멍덩해져, 버스에서 내리는 걸 까먹고 종착역까지 가버려, 다시 버스를 타고 돌아와야 했다. 그리하여 집에 들어왔을 때는 이미 7시가 넘었는데, 날이 막 어두워지고 있었다.요 며칠 동안 그녀는 줄곧 정운대학에서 수업을 방청했고, 구름이는 집에 혼자 있어 매우 지루했을 것이다.그래서 그런지 문이 열리고 주인이 돌아오자, 구름이는 즉시 소파에서 뛰어내렸고, 유시아의 품에 안겨 끙끙 소리를 내며 그녀에게 몸을 문질렀다.이처럼 매일 학교 가서 수업을 듣고 그 누구한테 방해받지 않는 나날이 영원했으면 얼마나 좋을까...사람 한 명과 개 한 마리의 저녁 식사는 바로 준비되었다. 유시아는 그녀의 작은 방이
매일 사생 아니면 구름이와 산책하러 다니며 유시아는 무미건조하게 며칠을 보냈다.일주일이 지나자, 유시아는 더는 참을 수 없었다.신시연을 피하려고 두문불출할 수는 없지 않은가. 그녀는 자신의 운이 그렇게까지 나쁘지는 않을 거라 스스로를 위로했다. 게다가 그 보라색 머리를 한 남자한테 사과도 해야 하고, 평생 남의 눈을 피해 움츠리고 사는 건 아니라 생각했다.그리고 정운대의 수업 스케줄을 찾아보고 수업이 있는 날을 골라, 학교에 방청하러 왔다.익숙한 교실에 들어서서 그녀는 여전히 구석 자리에 앉았다.교실 안의 사람이 점점 많아지자, 그녀는 교실 안을 한번 훑어보았다. 지난번에 부딪힐 때 너무 갑작스러워, 그녀도 자신에게 치인 그 남학생이 어떻게 생겼는지 잘 보지 못했다. 그러나 그 남학생의 보라색 머리카락에 대해 매우 인상 깊었던지라, 강의실에서 줄곧 보라색 머리를 찾았다.한 바퀴 둘러봐도 그 사람은 보이지 않았는데, 오히려 사람들의 시선이 점점 자신에게 쏠리는 걸 느꼈다.그 시선은 경멸에 찬 눈빛이었고 자신을 마치 하찮은 벌레 보듯이 보는 것 같았다.유시아는 잠시 어리둥절했다가 마음속에 갑자기 좋지 않은 예감이 일었다.‘도둑이 제 발 저리다.’유시아는 이 속담이 머릿속에 떠올랐다.그녀는 감옥에 갔었기 때문에 항상 사람들에게 들통나고 대중에게 알려질까 봐 전전긍긍했다.유시아는 황급히 고개를 숙였고, 다리에 얹은 작은 두 손은 때로는 꽉 쥐었다가 때로는 풀면서, 긴장하고 불안하여 안절부절못했다.그녀가 한창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을 때, 학교 관리자 같아 보이는 사람이 문 앞에 서서 유시아를 바라보며 퉁명스럽게 말했다.“유시아 양, 저랑 함께 사무실로 좀 가시죠!”30분 후, 유시아는 넋이 나간 채 학교 사무실에서 나왔다.학교 관리자는 유시아의 일이 이미 캠퍼스 웹사이트에서 떠들썩하게 돌아다닌다고 말했다. 그들은 그녀처럼 빨간 줄이 있는 학생은 받아들이기를 원하지 않기 때문에, 그녀가 앞으로 다시는 이곳에 와서 방청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유시아는 끝내 고개 돌려 그녀를 노려봤다.“너희 언니 남자를 네가 이래라저래라 할 자격은 없는 것 같은데?”“...”신시연은 말문이 막혀 아무런 대답도 못 하고 있다가 그녀의 뺨을 치려고 손을 번쩍 들었다.지난번 유시아 때문에 체포된 이후로 신시연도 영악해져서 일부러 변호사에게 문의해 어떤 일은 해도 되고 어떤 일은 하지 말아야 하는지 꼼꼼하게 여쭸다.고작 뺨 한 대 치고 능멸하는 말 몇 마디 해서는 지나친 영향을 미치지 않고 신시연도 딱히 처벌을 받지 않는다.유시아는 그녀가 손을 든 순간 재빨리 뒤로 물러섰다.“으악.”신시연은 새로 한 네일로 그녀 얼굴에 마치 고양이에게 할퀸 듯 두 줄의 빨간 자국을 남겼다. 다행히 찢기거나 출혈은 없고 따끔하게 아플 뿐이었다.유시아는 손으로 얼굴을 움켜쥐고 뒷걸음질 치다가 하마터면 누군가에게 부딪칠 뻔했다.그녀는 곧바로 사과했다.“죄송합니다...”상대의 얼굴을 본 순간 유시아는 어안이 벙벙해지고 심장이 미친 듯이 쿵쾅댔다!그는 바로 이 세상에서 그녀에게 제일 잘해주고 또한 그녀에게 가장 깊게 상처받은 남자 소현우였다.소현우는 은백색 양복을 입고 있었는데 깔끔한 짧은 머리와 온화한 표정이 유독 눈부셨다.그는 미간을 살짝 구기며 그녀의 얼굴을 감싼 손을 내리고 상처를 살펴보려 했다.“어디 봐봐...”이 제스처에 유시아는 하마터면 눈물을 왈칵 쏟을 뻔했다.강한 척, 담담한 척 애쓰던 그녀는 이 한마디에 와르르 무너져내렸다. 마치 괴롭힘을 당하던 어린아이가 드디어 부모님을 만나고 마음껏 억울함을 털어놓는 것처럼 말이다.유시아는 한사코 얼굴을 안 보여주려 했고 소현우도 더는 강요하지 않았다. 그는 유시아를 안고 차 쪽으로 걸어갔다.“시아야, 잠깐만!”말을 마친 소현우는 차 문을 닫고 신시연에게 성큼성큼 다가갔다.신시연은 그를 보자 저도 몰래 뒤로 한 걸음 물러섰다.“뭐... 어쩌려고요?”그녀는 소현우가 약간 무섭긴 했다.저번에 소현우 때문에 감방에 갇혔을 때 임재욱이 간신히 빼줬는데 방금
이전에 아빠도 자주 이렇게 놀렸었는데 돌아가신 이후론 아무도 그녀를 아이처럼 대하는 사람이 없었다. 소현우가 처음이자 유일한 사람이다!“시아야,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야? 신시연이 또 널 괴롭혔어?”유시아는 머리를 내저었다.“우연이 마주치고 실랑이 좀 벌인 것뿐이에요! 나 괜찮으니까 걱정 말아요 현우 씨.”신시연의 배후엔 임재욱이 있다. 유시아는 이까짓 일로 소현우가 또다시 그와 충돌하는 걸 원치 않는다.고작 그녀 때문에 이럴 가치는 없으니까.게다가 소현우는 그녀에게 빚진 것도 없는데 번마다 이렇게 그녈 위해 시간 낭비할 필요가 없다.“제가 요즘 좀 바빴어요. 이젠 집에 가서 구름이 돌봐야 해요. 오늘 도와줘서 고마워요.”유시아는 말하면서 차 문을 열었다.“저 먼저 갈게요. 나중에 다시...”차 문이 열리지 않자 그녀는 고개 돌려 소현우를 쳐다봤다.소현우도 그녀를 마주 보며 나지막이 물었다.“시아야, 너 이 학교 다니고 싶어?”유시아는 살짝 놀란 기색이 역력했다.“어떻게 알았어요?”소현우는 쓴웃음을 지었다. 그가 모를 리 있을까?정운대는 그의 모교이기도 하니 졸업한 지 몇 년이 돼도 가끔 은사님 뵈러 찾아오곤 한다. 더욱이 정운대 온라인 커뮤니티를 수년간 지켜봐 와서 유시아가 여기서 방청하는 것도 잘 알고 있다.그는 유시아가 방청하는 것도 나름 괜찮다고 생각했다.공부에 몰두하면 많은 일을 잊을 수 있어 종일 허송세월하는 것보단 나으니까.교내 환경도 사회보단 훨씬 단순하니 그녀가 공부하며 상처를 치유하는 동시에 마음도 정화하고 그야말로 일거양득인 셈이다!하지만 최근 한 주 동안 유시아의 일이 정운대 온라인 커뮤니티에 퍼지기 시작했고 심지어 많은 학생들이 학교에 청원서까지 내며 유시아를 정운대에서 퇴출하라고 한다.소현우는 오늘 이 일을 처리하려고 일부러 시간 내서 찾아왔는데 방금 그 광경을 목격했다.그는 차 문을 열고 유시아의 손을 잡았다.“시아야, 나랑 함께 학교로 찾아가서 똑똑히 말하자!”소현우는 유명한 동문으로서 매
교무실.유시아는 소현우 옆에 앉아 고개를 푹 숙이고 초조한 나머지 손가락만 꼼지락거렸다.불과 몇 분 전까지만 해도 대학교 공식 계정에 올라온 온갖 악플과 욕설을 보지 않았는가?「살인자의 딸?! 임씨 집안 사모님이 된 지 반나절 만에 사기죄 혐의로 3년을 감옥에서 보내다니?」이러한 루머는 어렵사리 회복한 마음의 상처를 무자비하게 생채기 내서 다시 한번 죽을 만큼 힘든 고통을 겪게 했다.소현우는 대학교 임직원과 이야기꽃을 피우며 마치 용기라도 불어넣어 주려는 듯 격려 차원에서 유시아의 손을 꼭 붙잡아 주었다.유시아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 남자와 함께라면 왠지 모르게 든든하고 믿음직스러웠다.“영웅은 출신을 불문하죠. 출신론을 강조하는 자체가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해요. 비록 시아는 방청생에 불과하지만, 매일 같이 제일 먼저 강의실이 도착해서 늦게까지 있다가 가죠. 학문 연구를 위해 보여준 성실함과 세심함은 다른 학생에게서 찾아보기 힘든 부분이에요. 그리고 천부적인 재능도 출중한 편이라...”말을 이어가던 와중에 소현우의 안주머니에 있던 휴대폰이 별안간 울렸다.유시아도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돌렸고, 화면에 떡하니 나타난 ‘심하윤’이라는 이름을 발견했다.이내 몰래 시선을 피하고 자그마한 손을 꼼지락거리며 어찌할 바를 몰랐다.도둑이 제 발 저린 느낌이 또다시 그녀를 덮쳤다.절친의 남자 친구와 함께 시간을 보낸다는 자체가 부도덕한 짓이지 않은가?소현우는 전화를 받는 대신 뚝 끊어버리고 고개를 들어 말을 이어갔다.“학교는 당연히 학업을 위주로 해야 하지 않겠어요? 이미 지나간 사소한 일 때문에 끝까지 붙잡고 늘어진다면 얼마나 옹졸해 보입니까? 기껏해야 기량이 이 정도라는 걸 보여줄 뿐, 그게 바로 학교의 명예에 먹칠하는 거잖아요. 아닌가요?”몇몇 임직원들이 멋쩍은 얼굴로 서로를 멀뚱멀뚱 쳐다보았다. 비록 속으로는 반박할 이유를 무수히 떠올렸지만, 다들 바보는 아닌지라 소현우가 유시아를 마음에 들어 한다는 사실을 단번에 눈치챘다.반면, 그들도
반면, 재학생으로 인정받을 기회를 얻어 정정당당하게 학교를 드나들 수 있지도 않은가? 이런 생각에 그녀는 희망이 풍선처럼 부풀어 올랐다.소현우가 피식 웃었다.“알았어. 이제 다시 학교에 다니게 되었는데 축하하는 의미로 이따가 밥이나 같이 먹을까? 기운도 북돋아 줄 테니까 겸사겸사...”“아니요.”유시아가 불쑥 끼어들었다.“오늘 일은 진심으로 고마워요. 하지만 선약이 있어 어려울 것 같아요.”소현우는 눈살을 찌푸리더니 이내 웃는 둥 마는 둥 물었다.“선약 있다고? 재욱 씨랑?”흠칫 놀란 유시아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충 얼버무렸다. 그리고 입가에 미소를 띤 채 근처 버스 정류장을 가리켰다.“버스가 와서 먼저 갈게요. 다음에 봐요!”말을 마치고는 소현우가 대답하기도 전에 재빨리 버스 정류장을 향해 달려가 도망치듯 그의 곁을 벗어났다.버스에 올라타 자리에 앉은 유시아는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지금은 대체 심하윤와 어떻게 되었을까? 사실 아까부터 물어보고 싶었지만, 그녀의 신분으로 주제넘다는 생각에 괜히 어색한 상황이 벌어질까 봐 두려웠다.어차피 짚신도 제짝이 있는 법, 이내 머릿속에서 훌훌 털어버렸다.유시아는 손을 뻗어 관자놀이를 문지른 뒤 얼굴을 돌려 창밖을 바라보았고, 정운대 교재를 사러 가기로 마음먹었다.소현우는 제자리에 서서 그녀를 태운 버스가 모퉁이를 돌아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넋 놓고 바라보다가 그제야 시선을 돌려 차에 탔다.운전대를 돌리려는 순간 심하윤의 전화가 다시 걸려 왔다.이번에 그는 전화를 받았다.“여보세요?”생기 넘치면서도 나긋나긋한 심하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현우야, 지금 어디야? 저녁에 집에 와서 어머님이랑 같이 식사하자. 호주에서 공수해 온 랍스터를 선물 받았는데, 너 치즈 랍스터구이를 제일 좋아하잖아. 내가 직접 요리할 테니까 맛 한 번 봐봐.”“저녁에 일 있어서 못 갈 것 같아.”소현우의 목소리는 AI처럼 딱딱했다.“난 기다리지 말고 엄마 모시고 먼저 먹어.”한동안의 침묵을 끝으로 심하윤
늦은 밤, 유시아의 카카오톡을 받았을 때 임재욱은 병원에 있었다.신시연은 도우미의 도움을 받으며 진료실에서 여러 검사를 받았고 그동안에 임재욱은 밖에서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늦은 밤의 사립 병원이라 사람이 그리 많지 않았다.당직을 서는 의사 선생님과 간호사 외에 거의 사람이 없이 무척이나 쓸쓸해 보였다.임재욱은 복도를 한참이나 누비다가 의자에 걸터앉았다.유시아를 병원으로 바래다주고 돌아서는 길에 신시연의 전화를 받고서 오게 된 것이다.배가 아프다고. 당장이라도 죽을 듯이 아프다고.신시연은 며칠 전에 병원에서 여러 번 신체검사를 받았으나 해외에서 그러한 몹쓸 짓을 당하며 우울증과 부인병이 있는 외에 다른 수치들은 정상 범위 안에 있었다.그 말인즉슨,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것이다.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임재욱은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신시연에게 남은 ‘가족’이라고는 임재욱 하나뿐이니 어찌 됐든 그녀를 잘 지켜야 하는 마음뿐이었다.그 누구에게도 다시는 상처를 받지 않게끔.바로 이러한 마음가짐으로 하여 임재욱은 그녀를 직접 병원까지 데리고 오고 의사 선생님 입에서 아무런 문제도 없다는 확답을 듣고 나야만 마음이 놓일 수 있다.애타게 검사 결과를 기다리고 있는 가운데 핸드폰 알림 소리가 울렸다.유시아가 보낸 카카오톡인데, 내용은 아주 간단했다.[보고 싶어요.]임재욱은 고개를 숙인 채 카톡 내용을 거듭 곱씹으며 유시아 사진으로 되어 있는 그녀의 프로필 사진을 바라보며 입꼬리가 주체하지 못하고 자꾸 올라갔다.‘내가 보고 싶어? 별거한 지 하루 만에 벌써 내가 보고 싶은 거야?’‘우리 시아 이제 제법 솔직하네.’핸드폰을 손에 꼭 쥐고 어떻게 답장할지 생각하고 있을 때 응급실 문이 열렸다.도우미 김향화가 얼굴에 핏기 하나 없는 신시연을 부축하고 걸어 나왔다.신시연은 디자인이 아주 심플한 데님 스커트를 입었고 윤기가 별로 없어 보이는 머리를 돌돌 말아 묶어 올렸다.무척이나 초췌해 보이는 것이 가여운 느낌도 물씬 풍기고 있어 기고만장했던 그
유리 구두를 품속에 꼭 안고 있는 유시아를 보고서 임재욱은 순간 이러한 생각이 들었다.참으로 달래기 쉬운 여자라는 것을.특히 결혼하고 나서 아주 살짝만 잘해주어도 유시아는 아주 오랫동안 기뻐하는 것만 같았다.유시아는 늘 임재욱 앞에만 서면 스스로 자세를 낮추고 자기를 낮은 위치에 놓는 데 습관 되어 있다.임재욱은 고개를 숙여 그녀의 정수리에 뽀뽀했다.“앞으로 매년 생일마다 예쁜 유리 구두 선물해 줄게. 어때?”“좋아요.”유시아는 말하면서 아주 유치하게 그를 향해 손가락을 내밀었다.“손가락 걸고 약속해요. 절대 어기지 않겠다고.”백화점에서 나온 두 사람은 일단 화실로 향했다.새로 구매한 공예품을 적당한 자리에 올려놓고 유시아의 제안으로 이채련의 병원까지 바래다주었다.유시아는 자기가 뱉은 말은 어떻게든 지키는 타입이라 이채련과 이미 약속했으니 꼭 지켜야 했다.하물며 자식도 없는 이체련에게 마지막 이 시간들이 더더욱 외로울 것이다.외부인들이 보기에도 불쌍할 정도로 외롭다.임재욱이 아무리 말해도 소용이 없었고 이채련에게 주어진 시간이 얼마 없다고 하니 마음은 내키지 않았지만 보내주었다.차는 곧 사립 병원 앞에 멈춰 섰고 임재욱은 차에서 내리지 않았다.유시아는 차창에 대고 거듭 강조했다.“유리 구두랑 드레스들 옷방에 고이 모셔두도록 해요. 마구 놓지 말고요.”“알았어.”임재욱은 말하고서 손을 내밀어 그녀의 목을 확 잡고서 찐한 키스를 남기고 나서야 순순히 놓아 주었다.“얼른 가 봐.”“조심해서 가요.”임재욱은 조수석에 앉아 한결 가벼워진 그녀의 뒷모습이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보고서야 시선을 거두고 집으로 향하려고 했다.가는 길에 갑자기 신시연으로부터 전화가 걸려 왔다.“오빠, 배가 너무 아파요.”...병실로 돌아와 보니 이채련은 아직 자고 있지 않았다.침대에 멍하니 누워 재미가 일도 없는 예능 프로를 보고 있었다.유시아가 문을 밀고 들어오는 것을 보고 이채련은 놀라고도 기뻤다.“시아야, 늦은 시간에 웬일이야?”유시아
쇼핑은 늘 설레는 일이다.유시아는 자기 취향대로 화실 장식품으로 쓰일 공예품을 골랐다.이윽고 임재욱은 또 유시아를 데리고 근처에 있는 매점으로 향했다.지난번에 두 사람은 함께 쇼핑하면서 많은 옷을 샀었지만, 신서현 부모님께 갑작스러운 상황이 일어나면서 유시아는 그 모든 옷을 모조리 청소 아주머니에게 줘 버렸다.그때의 아쉬움을 채워주기 위해 임재욱은 또다시 쇼핑하려고 한 것이다.게다가 다음 주면 대우 그룹 상장 20주년이다.정식적인 석상에 모습을 드러낼 때 유시아를 자기 아내 신분으로 남에게 소개해 주고 싶어 이브닝 파티에 어울릴만한 드레스와 신발을 살 예정이다.드레스는 그럭저럭 큰마음이 가지 않았는데, 유시아는 그 신발이 마음에 들었다.은백색의 하이힐로 예쁜 보석들로 가득 박혀 있어 매점 불빛 아래서 유난히 반짝이는 것이 신데렐라 동화에 나올 법한 유리 구두 같았다.매점 직원은 유시아가 마음에 들어 하는 것을 보고 바로 다가왔다.“손님 안목이 참 좋으시네요. 이 제품은 저희 디자이너 선생님의 최신 디자인으로 지금 딱 한 켤레만 있습니다. 만약 이 신발을 신고 나가신다면...”임재욱은 갑자기 직원의 말을 끊어버렸다.“이미 결혼했고요. 이 사람은 제 아내예요.”유시아는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들었는데, 자기를 바라보며 웃고 있는 그를 보고서 따라서 웃었다.“맞아요. 이 사람이 제 남편이에요.”매점 직원은 멍하니 있다가 바로 얼굴에 미소를 머금고 베스트 쇼핑 가이드다운 실력을 드러냈다.“어머, 어쩐지 너무 어울리신다 했어요...”직원의 칭찬에 두 사람은 얼굴에 웃음꽃이 피어났다.이윽고 매점 직원은 분위기를 파악하며 유리 구두에 대해 더욱 디테일한 설명을 첨부하기 시작했다.“이 제품의 새끼 양가죽으로 만들어졌으므로 착용감이 엄청 좋으실 거예요. 하루 종일 신고 걸으셔도 전혀 문제가 없다는 말이죠. 게다가 우리 디자이너 선생님이 즉흥으로 만들어내신 작품이라 절대 똑같은 제품을 시중에서 보실 수 없을 거예요.”한 켤레일 뿐만 아니라 사이
한서준은 눈살을 찌푸리며 되물었다.“내가 뭐?”“한서준 씨는 당당해요?”유시아는 바로 질문을 질문으로 돌려주었다.“임씨 가문에 접근한 그 의도를 다른 사람들이 모를 것 같아요? 할아버지, 재욱 씨 그리고 나까지 똑똑히 알고 있어요. 청아 씨만이 한서준 씨를 사랑해서 자신을 속이고 있는 거라고요. 그렇게 쭉 모르는 척을 하며 모든 걸 감당하고 있었던 거라고요. 한서준 씨 역시 청아 씨를 이용한 게 아닌가요?”마지막 한 마디에 한서준은 침묵하고 말았다.그렇다. 임청아에게 접근한 이유는 유시아가 ‘스파이’로 움직여 주지 않겠다고 거절했기에 어리석어 보이는 임씨 가문 천금을 노리게 된 것이다.하지만 사람 마음이라는 것은 결국 변하게 되어 있다.임청아 대한 마음은 모략에서 시작했으나 시간의 흐름에 따라 그 마음이 점점 사랑으로 끝을 맺게 된 것이다.늘 밝고 긍정적인 에너지를 띠고 다가왔던 임청아가 어두운 자신의 삶을 밝게 비춰주는 것만 같았다.따라서 한서준은 임청아와 평생을 함께하고 싶다는 마음이 차츰 생기게 된 것이다.임태훈이 반대한다고 하더라도 꼭 자기 곁으로 데리고 오고 싶었다.“청아 씨 지금 몸도 마음도 상처투성이에요.”“만약 청아 씨 행복하게 해 줄 수 없다면 신중하게 생각하고 결정하는 게 좋을 거예요.” 말을 마치고 유시아는 차 문을 밀고 차에서 내려 병원 밖으로 걸어갔다.택시에 오른 유시아는 긴 망설임 끝에 끝내는 더 스케치 화실 주소를 운전 기사에게 알렸다.차는 화실 맞은 편에 세워졌고 유시아는 화실 바로 맞은편에 있는 커피숍으로 들어가 창가 자리에 앉았다.화실 안의 상황을 바로 체크할 수 있고 자신의 정체를 드러내지 않아도 되는 최적의 위치라고 할 수 있다.한참 지나고 나서야 수많은 경호원들이 임태훈을 사이에 두고 화실에서 걸어 나오는 것이 보였다.임태훈은 벤틀리에 올라 강한 기운을 남기고 자리를 떠나버렸다.유시아는 그제야 한시름을 놓고 들고 있던 커피잔을 내려놓고는 바로 화실로 향해 달려갔다.화실 안과 밖은 겉은
전화를 마치고 유시아는 혼자 밖에 없는 휴게실을 보고서 깊은 번뇌에 잠겼다.남을 탓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에 임태훈처럼 막무가내로 어처구니가 없는 노인이 있다는 게 도통 이해가 되지 않았다.임태훈이 끔찍이 여기는 임청아를 유시아가 계단에서 밀어버린 것도 아닌데, 왜 애꿎은 자기 화실을 닫으려고 하는지 알 수 없었다.집안 내부에 문제가 생기면 일단 스스로 반성하는 법부터 배워야 하는데, 그게 무엇이든 일단 남한테서 문제를 찾고 있으니, 권력을 믿고 사람을 업신여기는 것이 분명했다.유시아는 생각하면 할수록 머리가 복잡해졌고 불안함도 점점 커졌다.지금 운영하고 있는 더 스케치 화실도 용재휘가 먼저 시작한 것인데, 그와 더불어 학생들까지 모두 함께 넘겨주었는데, 만약 이대로 화실을 망쳐버린다면 용재휘에게 너무 미안할 것 같았다.임재욱과 임태훈이 어느 정도로 얘기했는지 알 수 없었지만 화실이 그들 싸움의 희생물이 되지 않기만을 바랄 뿐이었다.임재욱에게 전화를 걸어 상황을 묻고 싶었으나 감히 그럴 용기가 없어 일단 지켜보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떨리는 심장을 부여잡은 채로.그렇게 한참이나 심장을 조이고 있었지만, 걸려 오는 전화는 없었다.유시아는 일이 어느 정도 망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학생 채팅방에 오늘 갑자기 일이 있다며 수업을 뒤로 미룬다고 알렸다.언제 다시 수업을 시작할지는 소식을 기다리라며 덧붙이기까지 했다.톡을 보내고서 유시아는 더 이상 핸드폰을 보지 않고 바로 병원 밖으로 나갔다.그러나 병원 대문을 나오자마자 한서준이 정면에서 오고 있었다.“유시아.”유시아는 고개를 들었고 그를 보게 되는 순간 정신이 아찔해 났다.직감이 알려주건대, 절대 좋은 일이 없다는 것이다.화실의 생존 여부도 알 수 없는 상황에서 그의 심기까지 건드리고 싶지 않았다.한서준은 쉽사리 유시아를 놓아 주지 않았고 손을 내밀어 유시아의 손목을 꼭 잡았다.“물어볼 일이 있어.”말하면서 근처에 있는 지프차를 가리켰다.“차에 타서 얘기 하자.”“그쪽이랑 할 말
유시아는 그 말을 이어받지 않고 집사의 바람대로 타이르기 시작했다.“몸이 아직 많이 허약해요. 먹고 싶지 않아도 억지로라도 좀 먹어야 하거든요. 일이 어찌 됐든 일단 건강부터 챙겨야 해요.”임청아 그 말을 듣고서 쓴웃음을 지었다.“건강 회복되면 할아버지한테 잡혀가서 집에 감금되는 것밖에 더 있겠어요?”“그렇게 생각하지 말아요.”유시아는 눈살을 찌푸리며 덧붙였다.“어찌 됐든 할아버지 마음은 한결같을 거예요. 청아 씨를 아끼고 사랑하는 거요. 서로 대화가 필요한 거 같아요. 서로 터놓고 얘기하고 나면 오해가 풀리고 마음도 풀리면서 모든 게 원점으로 돌아갈 수 있을 거예요.”임청아의 입가에 피식 웃음이 새어 나왔다.“저도 그렇게 생각했었어요. 아이 낳고 나면 할아버지도 서준이도 원한을 내려놓고 행복만 할 수 있다고요.”“근데 이렇게 몸도 아끼지 않고 점점 더 막무가내로 나가면 두 사람 사이의 원한은 점점 더 짙어질 거예요.”유시아는 말하면서 도우미 손에서 보신탕을 가져와 천천히 불며 임청아의 입가로 가져갔다.임청아는 생각 밖으로 무척이나 순순하게 유시아의 말을 따랐고 그녀의 말에 이치가 있는 것 같아 조용히 보신탕을 받아 마셨다.도우미와 집사는 두 사람이 티키타카 서로 말을 주고받는 것을 보고 서서히 마음이 놓였다.임청아가 뭐라도 먹기 시작하여 자기도 모르게 한시름을 놓으며 자리까지 비켜주려고 했다.두 사람이 마음 편히 말할 수 없을까 봐 눈치껏 일어서려는 것이다.“작은 사모님, 아가씨와 천천히 얘기하고 계세요. 밖에 나가 있을 테니 필요한 거 있으시면 언제든지 부르시고요.”“네, 가보세요.”도우미 일행이 나오고 나서야 유시아는 본론으로 들어갔다.“한서준 씨는 알고 있어요?”임청아는 고개를 저으며 쓴웃음을 지었다.“그런다고 숨겨질 일도 아니잖아요.”요즘 임태훈뿐만 아니라 한서준도 눈을 부라리고 임청아를 찾고 있었다.두 사람의 시선을 피하고자 아파트도 호텔도 들어갈 수 없었고 버려진 강아지처럼 유시아 화실에 몸을 숨기고 지낸 것
임청아 이름 석 자가 임재욱의 입에서 나오자, 유시아는 순간 청천벽력을 맞는 것만 같았다.심지어 지금까지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으니 말이다.한참 지나고 나서야 겨우 떨리는 심장을 부여잡고 물었다.“청아 씨가 왜 병원에 있는 거죠?”임청아는 임신한 것을 알고 매사에 조심하며 걸음 하나도 천천히 옮겼었다.게다가 해외에 있는 친구와 연락하여 해외로 떠날 준비까지 마쳤다고 했었다.그런데 관건이 되는 순간에 계단에서 굴러떨어졌다고?“할아버지를 너무 쉽게 생각한 거 아니야?”임재욱은 말하면서 차갑게 웃었다.“네 화실에 청아 숨겨 놓았잖아. 할아버지께서 그걸 과연 모르고 있었을 것 같아? 오늘 화실로 청아 데리러 갔었는데, 가지 않겠다고 청아가 하도 우기는 바람에 억지로 묶어서라도 데리고 가겠다며 서로 실랑이를 벌이다가 계단에서 굴러떨어진 거야.”그렇다면 아이를 유산했을지도 모른다.임태훈의 습관에 따라 생각해 본다면 이 화살은 결국 유시아에게로 돌아오게 되어 있다.임재욱이 그렇게 경고하였건만 유시아는 마음이 약한 사람이었다.약해지는 마음에 언젠가는 구렁이에 빠지게 될 날이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날이 바로 오늘 일 줄은 몰랐다. 임재욱은 한숨을 내쉬며 꾸짖고 싶은 마음을 겨우 억눌렀다.“병원 주소 보내줄 테니 얼른 가 봐.”말을 마치고 임재욱은 전화를 끊어버렸다.얼마 지나지 않아 메시지 한 통이 도착했고 운전 기사에게 새로운 목적지를 알려주었다.같은 시각, 병원 안에서.임청아는 이미 수술을 마쳤고 일반 병실로 옮겨져 있었다.이미 가문의 집사와 간호인이 옆에 있었고 병실 문 앞에는 임태훈이 보낸 경호원도 있었다.다만 경호원이 경계해야 할 상대는 유시아가 아니라 한서준이다.따라서 유시아는 별다른 막힘없이 바로 병실 안으로 들어갔다.병상에 누워 있는 임청아는 얼굴에 핏기 하나 없었고 초점을 잃은 두 눈으로 멍하니 천장만 바라보고 있었다.불과 하룻밤 사이에 모든 활력을 잃어버린 모습이었다.집사는 자리에서 일어서서 아주 공손하게 유시아에
조금 전까지 허겁지겁 밥을 먹고 있던 임재욱은 멈칫거리고 말았다.이윽고 고개를 천천히 들어 웃는 듯 마는 듯한 얼굴로 유시아를 바라보며 물었다.“별거하자는 뜻이야?”“그렇게 생각해도 좋아요.”유시아는 숟가락을 내려놓고 머리가 아픈 듯 이리저리 만지작거렸다.“지금 이러한 상황에서 이러는 것도 좋을 것 같아요. 나한테 신경 쓰지 않아도 되고 그 시간으로 시연이한테 집중해도 되잖아요. 나도 마침 어머님 곁에 좀 있어드리고... 서로에게 지금 이게 최우선인 것 같아요.”임재욱은 숨을 깊이 들이마시고서 낙담한 모습으로 말했다.“그래. 네가 좋다고 하면 그게 좋은 거겠지. 그렇게 하자.”말을 마치고 그는 계속 밥을 먹었다.유시아는 그런 그를 바라보고서 아련하게 웃고는 바로 자리에서 일어나 위층으로 올라갔다.이튿날 아침, 유시아는 임재욱이 출근하고 나서야 침대에서 일어났다.일상복 몇 벌과 일상용품을 챙겨 작은 트렁크 안에 놓고 바로 이채련한테 가려고 했다.허씨 아주머니는 트렁크를 들고 내려오는 유시아의 모습에 살짝 당황한 모습이었다.“사모님, 어디 가시는 거예요? 설마... 가출하려는 건 아니죠?”유시아는 허씨 아주머니를 향해 웃었다.“아니에요. 친척분이 좀 위독하신데 제가 옆에서 좀 챙겨드리고 싶어서 가는 거예요. 얼마 걸리지 않을 거고 곧 돌아올 수 있을 거예요.”말을 마치고 트렁크를 들고서 집을 나섰다.이채련이 지내고 있는 병실이 VIP 병실로 널찍한 객실까지 갖춰져 있다.유시아는 간호사에게 접이식 침대와 이불을 요구했고 간단히 정리하고 나니 잘 자리가 아늑하게 마련되었다.이채련은 더 이상 침대에서 내려올 수 없어 하루 24시간을 침대 위에서 보내고 있다.얼굴도 하도 여위어 본연의 모습을 점점 잃어가고 있었다.그전에도 유시아는 이채련에게 이곳에서 며칠 동안 함께 지내고 싶다는 의사를 밝힌 적이 있지만 이채련은 행여나 자기로 인해 두 사람 사이에 흠이 생기게 될까 봐 동의하지 않았었다.지금 이 자리까지 오게 된 것만으로도 갖은 풍
임재욱은 핸들을 꼭 움켜쥐고서 앞만 바라보았으나 두 눈에는 고통과 망연함이 가득했다.“시연이 해외에 있을 때, 몹쓸 짓을 당했어. 한번이 아니라 여러 번이나. 그래서 우울증에 걸리게 된 거야.”유시아는 두 눈이 휘둥그레지면서 볼륨까지 높아졌다.“어머, 어떡해요!”평소에 신시연에 대해 좋은 마음을 가지고 있었던 건 아니지만 그 소식을 듣게 되는 순간 심장이 덜컹 내려앉기는 했다.여자에게 있어서 그런 몹쓸 짓을 당한다는 건 치명적인 타격과 치욕이 아닐 수가 없다.게다가 부모님의 일까지 더해지니 조금 전 식당에서 봤던 신시연의 모습이 이해되었다.임재욱은 말하면서 후회와 자책하는 빛을 드러냈다.“그렇게 가고 싶지 않다는 시연이를 내가 억지로 보낸 거야.”그때는 모든 걸 너무 쉽게 생각했었다.낯선 곳으로 가서 마음을 가다듬고 학업에만 집중하면 자연스레 모든 걸 잊고 새로운 삶을 그려나갈 수 있으리라 믿었다.하지만 임재욱이 잊고 있었던 부분이 하나 있는데, 그건 바로 신시연이 이제 갓 20살을 넘은 꽃다운 여자아이라는 것이다.해외에는 불안정 요소도 많고 미처 생각지 못하는 위험도 많다.게다가 젊은 나이라 자칫 잘못하면 그릇된 길로 들어서기도 아주 위험하고 말이다.신시연 곁에 사람을 함께 보내긴 했지만 그렇다고 하여 24시간 동안 찰싹 달라붙어 다닐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유시아와 결혼하고 나서 신혼에 푹 빠져 있는 동안 신시연에게 더 많은 관심을 주지 않았기에 이러한 일이 일어난 게 아닌지 죄책감이 들기도 했다.지금 임재욱은 신서현에게 미안할 뿐이다. 하나뿐인 동생을 이 지경으로 만들었으니.하지만 그가 말한 본의와 달리 듣고 있는 유시아는 또 다른 뜻으로 받아들이게 되어 있다.유시아의 기억으로는 신시연이 해외로 보내진 이유는 이러하다.그때 신시연은 정운시 대학교 교내 사이트에 유시아를 먹칠하는 게시글을 올리면서 유시아로 하여금 학업을 이어갈 수도 수업을 들을 수도 없게 악한 상황을 만들었었다.마침 그 일을 소현우가 알게 되면서 유시아에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