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석호의 답장을 받은 임재욱은 곧장 운전하여 유시아가 사는 곳으로 달려갔다.이곳의 도로 사정에 대해 잘 모르는지라 임재욱은 여기저기서 헤매다 날이 어두워지고 나서야 유시아네 집 아래로 도착했다. 집 아래에서는 나이 드신 할머니 두 분이 부채질하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임재욱은 그 둘에게 다가가 유시아의 사진을 보여주었다.“안녕하세요, 뭐 좀 물어보려고요. 혹시 이 여자분 보신 적 있으세요? 이름은 유시아라고 하고... 음, 지금은 아마 단발머리일 거예요. 평소에 그림 그리는 거 좋아하고요...”그중 한 할머니가 사진을 자세히 들여다보더니 입을 열었다.“응? 이 처녀 그 이 씨 아줌마네 세입자 아니야?”그 옆에 있던 또 다른 할머니는 고개를 들어 임재욱을 바라보더니 오지랖 넓게 말을 이어갔다.“그 처녀 남자친구 있다고 하던데, 당신이구먼?”임재욱은 멈칫하다가 다시 물었다.“혹시 지금 어디 살아요?”그러자 그 중 한 명이 친절하게 길을 알려줬다.“여기 가장 안쪽 문으로 들어가서 위층으로 올라가 봐. 다락방에 살고 있으니까 그냥 위층으로 올라가면 될 거야…”임재욱은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이미 사진을 넣고 유시아가 사는 그 건물을 향해 재빨리 달려갔다.낡은 건물 안에는 엘리베이터도 없고 시설도 뒤떨어졌다. 복도에는 여러 물건이 뒤섞여 있었고 공기조차 통하지 않아 낡은 기운으로 가득 찼다.임재욱은 미간을 찌푸리며 그 잡동사니들을 지나쳐 빠르게 위층으로 올라갔다. 4층에 올라갔을 때쯤, 강아지 짖는 소리가 귓가에 울려 퍼졌다.그 소리는 구름이 소리와 비슷했다!임재욱은 몇 초 동안 멍하니 있다가 곧바로 다시 속도를 높여 그 소리가 나는 곳을 향해 달려갔다.멀리서 그는 새하얀 털을 가진 구름이가 문 앞에 서서 짖는 것을 보았고, 다락방에서는 남자의 욕설 소리가 어렴풋이 들려왔다.“너 다시 한번 물어봐, 이 쌍년이. 너 오늘 한번 죽어봐라. 씨...”현수의 귀에서는 피가 흐르고 있었고, 눈도 새빨개져서는 마치 궁지에 몰린 도박꾼과도 같았다
임재욱은 혼란스러움과 함께 응급실 앞에 서 있었다.그는 한숨을 내쉬며 주머니에 있는 담배를 꺼내 들었다. 담배에 불을 지피려던 찰나, 여기가 병원임을 깨닫고 다시 도로 집어넣었다.한참 시간이 흐른 뒤, 드디어 응급실 문이 열렸고 의사 선생님들이 유시아가 누워있는 침대를 밀며 나왔다.그녀는 아직도 혼수상태였고, 뺨에 붓기는 여전히 가라앉지 않은 채 손에는 링거를 꽂고 있었다. 그녀의 삐쩍 마른 몸에 병원용 흰 이불을 덮으니, 마치 빈 침대만 끌려 나온 것 같았다.임재욱은 멈칫하더니 얼른 다가가 물었다.“선생님, 아기는 괜찮나요?”그 말에 의사 선생님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으며 서로 멀뚱멀뚱 쳐다보고만 있었다.이때 한 여간호사가 그를 흘겨보며 말했다.“여자친구분 임신한 게 아니라 그냥 생리 중이에요! 이럴 때일수록 신경을 더 써야 하는 건데. 제발 폭행은 삼가시죠?”“…”그는 그녀를 안고 차에서 내릴 때 시트에 묻은 피가 드라마에서 나올법한 그런 상황인 줄 알았다.뭐가 어찌 됐든 간에 얼마 전 그가 심 씨네 집 화장실에서 그녀를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였고, 지금쯤이면 아마 한 달은 됐으니 그는 너무도 당연하게...하지만 유시아가 그의 아이를 남길 리가 없었다.더 억울한 건 그는 진짜로 유시아를 때린 게 아니라 오히려 구한 건데, 여간호사는 그 말을 믿지 않는 듯했다. 일반 병실로 갈 때까지 여간호사는 임재욱을 가정 폭력 남으로 보며 끝까지 굳은 표정으로 그에게 말했다.“환자분 깨어난 뒤에도 계속 배가 아프다고 하면, 따뜻한 생강 대추차라도 줘요. 진통제는 더 이상 복용하면 안 됩니다. 그리고 차가운 물은 가까이하지 마시고, 다시는 때리지 마세요!”말을 마친 간호사는 눈을 흘기며 병실을 나갔다.임재욱은 한숨을 내쉬며 의자에 앉았다.이 병원이 그녀의 집에서 가장 가깝긴 했지만, 규모는 별로 크지 않았다. 거기에 몇 안 되는 1인용 작은 병실에는 침대 외에 책상과 의자만 있었고, 소파조차도 없었다.그는 그날 저녁 가지 않기로 하고, 그
세월이 흐른 뒤, 현재의 유시아는 깨어난 후 임재욱을 보고 과연 어떤 느낌일까? 아마 기분이 더 안 좋을 수도 있을 듯하다.유시아가 지금 임재욱에 대한 두려움과 혐오감은 몇 년 전 임재욱이 유시아에 대한 귀찮음과 혐오감과 막상막하일 것이다!-유시아는 드디어 깨어났고, 깨어나 보니 이미 깊은 밤이었다.그녀가 편안하게 잠들 수 있도록 병실에는 수면 등만 켜져 있었고, 조명이 어두워서 마치 다락방에서 자는 듯한 느낌을 주었다.하지만 그녀는 자신의 다락방에는 소독약 냄새가 전혀 나지 않는다는 걸 즉시 깨달았다.그녀의 시력은 점차 여기의 빛에 적응했고, 이어서 머리 위에 있는 링거병을 바라보았다. 아랫배에는 뭔가 뜨겁고 묵직한 것이 느껴져 손을 뻗어 만져보니 따뜻한 핫팩이 있었다. 그건 생리 중인 유시아에게 꼭 필요한 물건이었다!이때 그녀는 낯선 호흡 소리를 듣게 되었고, 그 순간 심장이 철렁 내려앉는 듯했다. 고개를 돌려보니 침대 옆에 웬 남자가 엎드려 있는 것이었다.“악…”유시아는 현수에 대한 끔찍한 기억이 다시 떠올랐고, 심장이 조여오는 것만 같았다. 그녀는 침대에 숨어 있다가 실수로 손등에 걸려 있던 바늘을 잡아당겨 피가 순식간에 역류했다.임재욱은 원래부터 잠귀가 밝은 데다 또 낯선 환경이라 조그만 인기척에도 쉽게 잠에서 깼다. 그는 얼른 손을 뻗어 머리 위에 있는 등을 켰다.병실은 순식간에 밝아졌다.그렇게 둘은 두 눈이 마주쳤고, 한동안은 숨소리만 들릴 정도로 둘 다 침묵하고 있었다.한참 뒤, 임재욱은 그제야 그녀의 손등 바늘 때문에 피가 역류하는 걸 보았고, 재빨리 그녀 손등의 링거를 뽑았다. 그러고는 다소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그녀를 쳐다봤다.“왜 마음대로 움직여?”유시아도 잠시 멈칫하더니 입을 열었다.“여긴 왜 왔어요?”그 말을 들은 임재욱은 차갑게 웃어 보였다.“내가 안 왔더라면, 너 아마 산채로 그 낡은 집에서 맞아 죽었을 거야!”말을 하면서도 그는 현수가 자신한테 맞아 거의 죽어가는 모습을 떠올렸고, 아무리 생각해도
유시아의 아버지가 신서현을 사고로 죽여 임재욱과 신서현을 헤어지게 했다.현재, 유시아는 감방 생활도 했었고, 전보다 많이 더럽혀진 상태이기에, 소현우와 어울리지 않는다 생각하여 혼자 이곳으로 올 수밖에 없었다. 한마디로 그냥 갚아야 할 걸 갚을 뿐이다!‘보복’이라는 두 글자를 들은 임재욱은, 누군가가 손으로 심장을 쥐어뜯는 것만 같았다. 분명 기분이 좋지 않았지만, 그걸 어떻게 표출해야 할지 몰랐다. 게다가 그는 유시아의 앞에서 가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사람이 되어버리곤 한다. 임재욱은 이런 기분이 싫었고, 심지어 두려움까지 느껴졌다.그는 화가 난 듯 자리에서 일어서더니 뒤도 안 돌아보고 밖으로 나갔다. 유시아는 그런 그의 행동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본인이 분명히 맞는 말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대체 왜 저렇게 화가 나 있는지 말이다. 하지만 제대로 생각해보면, 이번뿐만 아니라 수년간 동안 그가 이해가 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이해했었다면 그에게 그 정도로 당하진 않았을 것이다!늦은 밤, 병원 부근의 24시간 편의점.임재욱은 생리대가 가득한 진열대 앞에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서 있었다.이건 그가 단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부분이었고, 뭘 어떤 걸 해야 할지 전혀 알 수 없었다. 그는 병원의 간호사에게 더는 그런 취급을 당하고 싶지 않았다. 자신이 마치 유시아게게 용서받지 못할 큰 죄를 지은 사람 취급 말이다.임재욱은 이왕 어떤 걸 사야 할지 모를 바에는, 차라리 비싼 것만 골라서 사야겠다고 생각했다. 비싼 물건은 언제나 맞는 선택이었으니 말이다. 그는 가격이 가장 높은 몇 개를 고른 뒤 계산대로 걸어갔다.계산대에 젊은 여성은 바코드를 찍으며 수시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러고는 순식간에 부러움으로 가득 찼다.'이렇게 잘생긴 남자가 자기 여자친구를 위해서라면 생리대도 직접 살 수 있구나!'계산을 마치고 편의점에서 나오는 순간, 임재욱은 심하윤에게서 걸려온 전화를 받게 되었다. 전화기 너머로는 걱정과 상실감이 가득한 목소리가 들려왔다.“임
말을 마친 뒤, 임재욱은 전화를 끊고 계속하여 병원 쪽을 향해 갔다. 병원 입구 쪽에 도착해보니, 불빛 아래에 삐쩍 마른 모습을 한 사람이 길옆에서 손을 흔들며 택시를 잡는 것이었다. 생리 기간의 복통은 유시아에게 있어 병이라 할 수도 없을뿐더러, 병원에 입원할 필요도 없는 것이다.게다가 여기 병원은 비용도 불투명해 유시아 혼자서 다 감당해낼 수 없었다. 그녀는 해야 할 일도 많고, 집에 가서 구름이도 돌보면서 밑그림 작업도 해야 했다. 게다가 간호사가 준 생강 대추차를 마시고, 핫팩을 배에 붙이니 더는 병원에 돈을 낭비할 필요 없이 많이 나아진 듯했다.곧 한 택시가 멈춰 섰고, 유시아가 그 문을 열자, 뒤에서 임재욱이 다시 차 문을 닫았다.“유시아!”고개를 돌려보니 임재욱이 굳은 얼굴로 그녀를 쳐다보고 있었다.“지금 뭐 하는 거야? 누가 퇴원해도 된대?”“저 입원할 필요 없어요!”유시아는 그의 얼굴을 바라보며 진지하게 말했다.“그리고 저 대신 낸 병원비용은 제가 다시 돌려드릴게요!”그녀는 아주 차분하게 답했지만, 그녀의 사방에서는 불꽃이 튀어 오르는 듯했고, 그 불꽃이 튀어 올라 임재욱의 가슴에 작은 상처를 남겼다. 눈에 띄지는 않지만, 그 타는듯한 느낌은 무시할 수 없다!이때, 택시기사가 유시아를 재촉했다. 임재욱은 얼른 허리를 숙여 차 안의 기사님께 이야기했다.“죄송합니다. 저희 안 탈 거에요!”그러면서 그는 유시아를 어깨에 들쳐 안고는 빠른 걸음으로 병원에 들어갔다. 유시아는 임재욱이 이럴 거라 예상을 못 했고, 그의 품에서 몸부림치기 시작했다.“임재욱 씨, 빨리 저 내려줘요. 저 괜찮다고 했잖아요, 병원에 입원하지 않아도 된다고요...”“근데 의사 선생님이 퇴원하라고는 안 했잖아!”유시아는 그의 옆모습을 보며 갑자기 쓴웃음을 지어 보였다.“임재욱 씨, 그거 알아요? 저 생리하면서 이미 36회 아파 왔어요. 이번이 가장 덜 아픈 한 번이고요!” 3년 동안 그녀는 그렇게 버텨왔다. 뜨거운 물, 뜨거운 밥은 상상도 못 했고,
유시아는 ‘왜’라는 말이 목 끝까지 차올랐지만 다시금 참았다. 그 둘의 사이에서 ‘왜’라는 단어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임재욱이 그녀에게 잘해주고 싶으면 잘해주는 거고, 언제 그녀를 속이고 싶으면 속이는 거고, 밑 장을 까고 싶을 때면 까는 거였다.게다가 그녀는 단 한 번도 거절의 여지가 없었다!유시아는 따뜻해진 배를 어루만지며 다시 침대에 누워있었고, 머릿속으로는 구름이가 보고 싶었다. 지금쯤이면 집에서 유시아를 찾기 바쁠 것이다. 게다가 밥은 먹었는지, 굶지는 않는지, 밖에 맘대로 나가지는 않았는지, 아니면 누가 훔쳐 가지는 않았는지 등 머릿속에는 온통 구름이 걱정 뿐이었다. 걱정스러운 마음 때문인지 유시아는 거의 제대로 자지 못했다. 제대로 자지 못한 건 임재욱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의자에 앉아 제대로 잠을 잘 수 없었던지라, 이튿날 아침 일찍 일어났고, 눈 밑에는 옅은 다크서클이 생겨 다소 초췌해 보였다.임재욱은 오늘은 웬일인지 협조적으로 유시아의 퇴원절차를 밟아줬다. 그렇게 퇴원 후, 그는 유시아의 손목을 끌고 강석호의 차량 쪽으로 걸어갔다.유시아는 있는 힘껏 그의 손을 뿌리쳤다.“이거 놔요. 저 재욱 씨랑 같이 안 가요. 이거 놓으라고요! 재욱 씨, 저 싫어했잖아요...”그녀는 마치 무서운 사람을 마주한 것처럼 당황한 표정을 지었고, 임재욱은 부드러운 말투로 그녀에게 타이를 수 밖에 없었다.“다른 건 없고 그냥 너 데리고 병 보러 가려는 것 뿐이야. 그 병 제때 안 고치면, 다음 달, 그 다음 달도 계속 아플 거라고... 시아야, 내 말 들어!”신기한 건 그가 부드럽게 대할수록 유시아는 더욱 겁이 났다. 혹시라도 다시 한번 그의 부드러움 속에 빠져 헤어나오지 못할까 봐 말이다!그녀는 다시는 그와 가까이하고 싶지 않았고 더욱이 그 사람의 배려와 관심 또한 받고 싶지 않았다! 게다가 그와 같이 가고 싶지도 않았다!그 시각, 시간도 이미 어느 정도 흐른지라 병원에는 많은 사람들이 오고 갔고, 그 두 사람의 모습은 순식간에 사람들의
그는 유시아의 상황이 이토록 심각할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심지어 그 유명한 석 선생도 장담할 수 없다니!게다가 이 모든 원인은 3년 전 옥살이로 인한 것이라니!처음에 그는 단지 유병철이 신서현을 죽인 게 유시아하고도 연관이 있을 거라고 생각해, 그녀가 대응되는 대가를 치르게 하고 싶었다. 그 대가는 바로 감방에 그녀를 넣는 것이고, 고생 좀 하게 하려는 것이었다!하지만 고생스럽다고 해도, 신서현보다는 덜하다고 생각했다. 신서현은 다시는 돌아오지 못하니 말이다!게다가 그는 유시아가 그 3년을 버틸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건 크나큰 착각이었다. 한낱 여자의 신체는 그가 생각하는 것보다도 더 나약하니 말이다!3년 뒤, 유시아는 옥살이가 끝나고 자유와 함께 각종 질병까지 동반되어 나왔다.특히, 임신이 되지 않을 수도 있다고 한다. 게다가 유시아는 아이를 좋아하는 사람으로서, 예전에 그와 결혼 당시 아들 하나, 딸 하나 낳기로 계획까지 했었다…임재욱은 가슴이 찢어지는 듯 아파 났고 손을 뻗어 옆에 있는 의약 사물함을 잡았다. “선생님, 이 일은 저 여자한테 알리지 않으면 안 될까요?? 일단 위로 좀 해주세요. 아니면 아주 무서울 것이에요…”말을 마친 임재욱은 그런 자신이 웃겼다.사실 이 소식을 무서워하는 사람은 유시아가 아니다. 그녀는 미리 모든 걸 다 눈치챘고, 혼자서 늙어 죽을 준비까지 해둔 상태였다.진짜로 그 소식에 대해 무서워하는 사람은 다름 아닌 자기 자신이었다!왜냐하면 그의 악랄함 때문에, 그는 자신을 깊이 사랑하는 여자를 아주 철저하게 파괴하고, 거의 죽을 지경까지 궁지로 몰았다!그는 그녀에게 목숨만 남겨줬을 뿐, 다른 건 남겨준 게 하나도 없다!그녀에게 있어 그는 망나니나다름없는 거로 낙인이 찍힌 것이다!진료소에서 나올 때 강석호의 손에는 이미 달인 한약들이 들려져 있었고, 각각 작은 봉지에 포장되어 있었다. 석 선생님은 일단 매일 한 봉지씩 1달 동안 먹어보라고 하였다.좋은 약이 입에 쓴 거기에, 유시아는 그렇게
임재욱은 그런 그녀를 보며 어찌할 방법이 없었지만, 또 그 피곤함에 찌든 상태에서 버둥거리는 모습을 보니 이 상황이 아주 웃겼다.예전에 그도 그녀에게 자기를 좀 상관하지 말아 달라고 많이 말했었다.그렇게 세월이 흐른 뒤, 이제는 유시아가 그런 얘기를 하고 있었다.어떻게 이럴 수가?그리고 그녀에게 복수할 생각만 하고, 그녀가 정말 무죄일 가능성은 무시했다. 게다가 그녀가 3년 동안 옥살이를 한 상황만 알고 있었지, 그동안 그녀가 받은 고통과 괴롭힘 또한 무시했었다…역시나 그는 그녀에게 마음이 움직여서는 안 되었다.마음이 움직이면, 깊게 빠져 헤어나기 어렵기 때문이다!그는 한참 뒤 그제야 답했다.“내가 이렇게 하는 건 다 그만한 이유가 있어서야. 그러니까 그냥 내 말대로 하기만 하면 돼!”말을 마친 뒤 그는 차 문을 열어 그녀의 머리를 누르며 밀어 넣었다.차 문이 닫히는 소리와 함께 임재욱은 강석호에게 분부했다.“센터패시아를 잠그고 호텔로 먼저 가줘요!”유시아는 그의 차가운 옆모습을 보며 말했다.“임재욱, 당신은 그냥 나쁜 놈이야!”임재욱은 턱에 힘을 주더니, 한참 뒤에야 답했다.“맞아, 난 나쁜 놈이야. 그러니까 잘 알아둬. 괜히 나쁜 놈 건드리지 않는 게 좋을 거야!”유시아는 그를 잠시 바라보다 곧바로 고개를 돌려 창밖을 내다보았다. 그리고 몸도 의식적으로 자기 쪽 차 문에 접근하여 그와 최대한 먼 거리를 유지하려 했다!그녀를 보고 있던 임재욱이 뭔 말을 하려던 찰나, 갑자기 옷 속에 있는 핸드폰이 울렸다.번호를 보니 심하윤에게서 걸려 온 전화였다.임재욱은 잠시 머뭇거리더니 곧바로 그 전화를 끊어버리고 심하윤에게 메시지를 하나 전송했다.「30분 뒤에, 무슨 방법을 써서든지 소현우랑 사계 호텔 VIP 구역으로 와요.」-40분 뒤, 차는 사계 호텔 지하 주차장에 세워졌다.임재욱은 유시아의 손목을 끌고 엘리베이터로 들어갔다. 그녀의 탱탱한 얼굴을 보더니 그는 참을 수 없다는 듯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시아야, 내 앞에서
늦은 밤, 유시아의 카카오톡을 받았을 때 임재욱은 병원에 있었다.신시연은 도우미의 도움을 받으며 진료실에서 여러 검사를 받았고 그동안에 임재욱은 밖에서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늦은 밤의 사립 병원이라 사람이 그리 많지 않았다.당직을 서는 의사 선생님과 간호사 외에 거의 사람이 없이 무척이나 쓸쓸해 보였다.임재욱은 복도를 한참이나 누비다가 의자에 걸터앉았다.유시아를 병원으로 바래다주고 돌아서는 길에 신시연의 전화를 받고서 오게 된 것이다.배가 아프다고. 당장이라도 죽을 듯이 아프다고.신시연은 며칠 전에 병원에서 여러 번 신체검사를 받았으나 해외에서 그러한 몹쓸 짓을 당하며 우울증과 부인병이 있는 외에 다른 수치들은 정상 범위 안에 있었다.그 말인즉슨,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것이다.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임재욱은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신시연에게 남은 ‘가족’이라고는 임재욱 하나뿐이니 어찌 됐든 그녀를 잘 지켜야 하는 마음뿐이었다.그 누구에게도 다시는 상처를 받지 않게끔.바로 이러한 마음가짐으로 하여 임재욱은 그녀를 직접 병원까지 데리고 오고 의사 선생님 입에서 아무런 문제도 없다는 확답을 듣고 나야만 마음이 놓일 수 있다.애타게 검사 결과를 기다리고 있는 가운데 핸드폰 알림 소리가 울렸다.유시아가 보낸 카카오톡인데, 내용은 아주 간단했다.[보고 싶어요.]임재욱은 고개를 숙인 채 카톡 내용을 거듭 곱씹으며 유시아 사진으로 되어 있는 그녀의 프로필 사진을 바라보며 입꼬리가 주체하지 못하고 자꾸 올라갔다.‘내가 보고 싶어? 별거한 지 하루 만에 벌써 내가 보고 싶은 거야?’‘우리 시아 이제 제법 솔직하네.’핸드폰을 손에 꼭 쥐고 어떻게 답장할지 생각하고 있을 때 응급실 문이 열렸다.도우미 김향화가 얼굴에 핏기 하나 없는 신시연을 부축하고 걸어 나왔다.신시연은 디자인이 아주 심플한 데님 스커트를 입었고 윤기가 별로 없어 보이는 머리를 돌돌 말아 묶어 올렸다.무척이나 초췌해 보이는 것이 가여운 느낌도 물씬 풍기고 있어 기고만장했던 그
유리 구두를 품속에 꼭 안고 있는 유시아를 보고서 임재욱은 순간 이러한 생각이 들었다.참으로 달래기 쉬운 여자라는 것을.특히 결혼하고 나서 아주 살짝만 잘해주어도 유시아는 아주 오랫동안 기뻐하는 것만 같았다.유시아는 늘 임재욱 앞에만 서면 스스로 자세를 낮추고 자기를 낮은 위치에 놓는 데 습관 되어 있다.임재욱은 고개를 숙여 그녀의 정수리에 뽀뽀했다.“앞으로 매년 생일마다 예쁜 유리 구두 선물해 줄게. 어때?”“좋아요.”유시아는 말하면서 아주 유치하게 그를 향해 손가락을 내밀었다.“손가락 걸고 약속해요. 절대 어기지 않겠다고.”백화점에서 나온 두 사람은 일단 화실로 향했다.새로 구매한 공예품을 적당한 자리에 올려놓고 유시아의 제안으로 이채련의 병원까지 바래다주었다.유시아는 자기가 뱉은 말은 어떻게든 지키는 타입이라 이채련과 이미 약속했으니 꼭 지켜야 했다.하물며 자식도 없는 이체련에게 마지막 이 시간들이 더더욱 외로울 것이다.외부인들이 보기에도 불쌍할 정도로 외롭다.임재욱이 아무리 말해도 소용이 없었고 이채련에게 주어진 시간이 얼마 없다고 하니 마음은 내키지 않았지만 보내주었다.차는 곧 사립 병원 앞에 멈춰 섰고 임재욱은 차에서 내리지 않았다.유시아는 차창에 대고 거듭 강조했다.“유리 구두랑 드레스들 옷방에 고이 모셔두도록 해요. 마구 놓지 말고요.”“알았어.”임재욱은 말하고서 손을 내밀어 그녀의 목을 확 잡고서 찐한 키스를 남기고 나서야 순순히 놓아 주었다.“얼른 가 봐.”“조심해서 가요.”임재욱은 조수석에 앉아 한결 가벼워진 그녀의 뒷모습이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보고서야 시선을 거두고 집으로 향하려고 했다.가는 길에 갑자기 신시연으로부터 전화가 걸려 왔다.“오빠, 배가 너무 아파요.”...병실로 돌아와 보니 이채련은 아직 자고 있지 않았다.침대에 멍하니 누워 재미가 일도 없는 예능 프로를 보고 있었다.유시아가 문을 밀고 들어오는 것을 보고 이채련은 놀라고도 기뻤다.“시아야, 늦은 시간에 웬일이야?”유시아
쇼핑은 늘 설레는 일이다.유시아는 자기 취향대로 화실 장식품으로 쓰일 공예품을 골랐다.이윽고 임재욱은 또 유시아를 데리고 근처에 있는 매점으로 향했다.지난번에 두 사람은 함께 쇼핑하면서 많은 옷을 샀었지만, 신서현 부모님께 갑작스러운 상황이 일어나면서 유시아는 그 모든 옷을 모조리 청소 아주머니에게 줘 버렸다.그때의 아쉬움을 채워주기 위해 임재욱은 또다시 쇼핑하려고 한 것이다.게다가 다음 주면 대우 그룹 상장 20주년이다.정식적인 석상에 모습을 드러낼 때 유시아를 자기 아내 신분으로 남에게 소개해 주고 싶어 이브닝 파티에 어울릴만한 드레스와 신발을 살 예정이다.드레스는 그럭저럭 큰마음이 가지 않았는데, 유시아는 그 신발이 마음에 들었다.은백색의 하이힐로 예쁜 보석들로 가득 박혀 있어 매점 불빛 아래서 유난히 반짝이는 것이 신데렐라 동화에 나올 법한 유리 구두 같았다.매점 직원은 유시아가 마음에 들어 하는 것을 보고 바로 다가왔다.“손님 안목이 참 좋으시네요. 이 제품은 저희 디자이너 선생님의 최신 디자인으로 지금 딱 한 켤레만 있습니다. 만약 이 신발을 신고 나가신다면...”임재욱은 갑자기 직원의 말을 끊어버렸다.“이미 결혼했고요. 이 사람은 제 아내예요.”유시아는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들었는데, 자기를 바라보며 웃고 있는 그를 보고서 따라서 웃었다.“맞아요. 이 사람이 제 남편이에요.”매점 직원은 멍하니 있다가 바로 얼굴에 미소를 머금고 베스트 쇼핑 가이드다운 실력을 드러냈다.“어머, 어쩐지 너무 어울리신다 했어요...”직원의 칭찬에 두 사람은 얼굴에 웃음꽃이 피어났다.이윽고 매점 직원은 분위기를 파악하며 유리 구두에 대해 더욱 디테일한 설명을 첨부하기 시작했다.“이 제품의 새끼 양가죽으로 만들어졌으므로 착용감이 엄청 좋으실 거예요. 하루 종일 신고 걸으셔도 전혀 문제가 없다는 말이죠. 게다가 우리 디자이너 선생님이 즉흥으로 만들어내신 작품이라 절대 똑같은 제품을 시중에서 보실 수 없을 거예요.”한 켤레일 뿐만 아니라 사이
한서준은 눈살을 찌푸리며 되물었다.“내가 뭐?”“한서준 씨는 당당해요?”유시아는 바로 질문을 질문으로 돌려주었다.“임씨 가문에 접근한 그 의도를 다른 사람들이 모를 것 같아요? 할아버지, 재욱 씨 그리고 나까지 똑똑히 알고 있어요. 청아 씨만이 한서준 씨를 사랑해서 자신을 속이고 있는 거라고요. 그렇게 쭉 모르는 척을 하며 모든 걸 감당하고 있었던 거라고요. 한서준 씨 역시 청아 씨를 이용한 게 아닌가요?”마지막 한 마디에 한서준은 침묵하고 말았다.그렇다. 임청아에게 접근한 이유는 유시아가 ‘스파이’로 움직여 주지 않겠다고 거절했기에 어리석어 보이는 임씨 가문 천금을 노리게 된 것이다.하지만 사람 마음이라는 것은 결국 변하게 되어 있다.임청아 대한 마음은 모략에서 시작했으나 시간의 흐름에 따라 그 마음이 점점 사랑으로 끝을 맺게 된 것이다.늘 밝고 긍정적인 에너지를 띠고 다가왔던 임청아가 어두운 자신의 삶을 밝게 비춰주는 것만 같았다.따라서 한서준은 임청아와 평생을 함께하고 싶다는 마음이 차츰 생기게 된 것이다.임태훈이 반대한다고 하더라도 꼭 자기 곁으로 데리고 오고 싶었다.“청아 씨 지금 몸도 마음도 상처투성이에요.”“만약 청아 씨 행복하게 해 줄 수 없다면 신중하게 생각하고 결정하는 게 좋을 거예요.” 말을 마치고 유시아는 차 문을 밀고 차에서 내려 병원 밖으로 걸어갔다.택시에 오른 유시아는 긴 망설임 끝에 끝내는 더 스케치 화실 주소를 운전 기사에게 알렸다.차는 화실 맞은 편에 세워졌고 유시아는 화실 바로 맞은편에 있는 커피숍으로 들어가 창가 자리에 앉았다.화실 안의 상황을 바로 체크할 수 있고 자신의 정체를 드러내지 않아도 되는 최적의 위치라고 할 수 있다.한참 지나고 나서야 수많은 경호원들이 임태훈을 사이에 두고 화실에서 걸어 나오는 것이 보였다.임태훈은 벤틀리에 올라 강한 기운을 남기고 자리를 떠나버렸다.유시아는 그제야 한시름을 놓고 들고 있던 커피잔을 내려놓고는 바로 화실로 향해 달려갔다.화실 안과 밖은 겉은
전화를 마치고 유시아는 혼자 밖에 없는 휴게실을 보고서 깊은 번뇌에 잠겼다.남을 탓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에 임태훈처럼 막무가내로 어처구니가 없는 노인이 있다는 게 도통 이해가 되지 않았다.임태훈이 끔찍이 여기는 임청아를 유시아가 계단에서 밀어버린 것도 아닌데, 왜 애꿎은 자기 화실을 닫으려고 하는지 알 수 없었다.집안 내부에 문제가 생기면 일단 스스로 반성하는 법부터 배워야 하는데, 그게 무엇이든 일단 남한테서 문제를 찾고 있으니, 권력을 믿고 사람을 업신여기는 것이 분명했다.유시아는 생각하면 할수록 머리가 복잡해졌고 불안함도 점점 커졌다.지금 운영하고 있는 더 스케치 화실도 용재휘가 먼저 시작한 것인데, 그와 더불어 학생들까지 모두 함께 넘겨주었는데, 만약 이대로 화실을 망쳐버린다면 용재휘에게 너무 미안할 것 같았다.임재욱과 임태훈이 어느 정도로 얘기했는지 알 수 없었지만 화실이 그들 싸움의 희생물이 되지 않기만을 바랄 뿐이었다.임재욱에게 전화를 걸어 상황을 묻고 싶었으나 감히 그럴 용기가 없어 일단 지켜보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떨리는 심장을 부여잡은 채로.그렇게 한참이나 심장을 조이고 있었지만, 걸려 오는 전화는 없었다.유시아는 일이 어느 정도 망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학생 채팅방에 오늘 갑자기 일이 있다며 수업을 뒤로 미룬다고 알렸다.언제 다시 수업을 시작할지는 소식을 기다리라며 덧붙이기까지 했다.톡을 보내고서 유시아는 더 이상 핸드폰을 보지 않고 바로 병원 밖으로 나갔다.그러나 병원 대문을 나오자마자 한서준이 정면에서 오고 있었다.“유시아.”유시아는 고개를 들었고 그를 보게 되는 순간 정신이 아찔해 났다.직감이 알려주건대, 절대 좋은 일이 없다는 것이다.화실의 생존 여부도 알 수 없는 상황에서 그의 심기까지 건드리고 싶지 않았다.한서준은 쉽사리 유시아를 놓아 주지 않았고 손을 내밀어 유시아의 손목을 꼭 잡았다.“물어볼 일이 있어.”말하면서 근처에 있는 지프차를 가리켰다.“차에 타서 얘기 하자.”“그쪽이랑 할 말
유시아는 그 말을 이어받지 않고 집사의 바람대로 타이르기 시작했다.“몸이 아직 많이 허약해요. 먹고 싶지 않아도 억지로라도 좀 먹어야 하거든요. 일이 어찌 됐든 일단 건강부터 챙겨야 해요.”임청아 그 말을 듣고서 쓴웃음을 지었다.“건강 회복되면 할아버지한테 잡혀가서 집에 감금되는 것밖에 더 있겠어요?”“그렇게 생각하지 말아요.”유시아는 눈살을 찌푸리며 덧붙였다.“어찌 됐든 할아버지 마음은 한결같을 거예요. 청아 씨를 아끼고 사랑하는 거요. 서로 대화가 필요한 거 같아요. 서로 터놓고 얘기하고 나면 오해가 풀리고 마음도 풀리면서 모든 게 원점으로 돌아갈 수 있을 거예요.”임청아의 입가에 피식 웃음이 새어 나왔다.“저도 그렇게 생각했었어요. 아이 낳고 나면 할아버지도 서준이도 원한을 내려놓고 행복만 할 수 있다고요.”“근데 이렇게 몸도 아끼지 않고 점점 더 막무가내로 나가면 두 사람 사이의 원한은 점점 더 짙어질 거예요.”유시아는 말하면서 도우미 손에서 보신탕을 가져와 천천히 불며 임청아의 입가로 가져갔다.임청아는 생각 밖으로 무척이나 순순하게 유시아의 말을 따랐고 그녀의 말에 이치가 있는 것 같아 조용히 보신탕을 받아 마셨다.도우미와 집사는 두 사람이 티키타카 서로 말을 주고받는 것을 보고 서서히 마음이 놓였다.임청아가 뭐라도 먹기 시작하여 자기도 모르게 한시름을 놓으며 자리까지 비켜주려고 했다.두 사람이 마음 편히 말할 수 없을까 봐 눈치껏 일어서려는 것이다.“작은 사모님, 아가씨와 천천히 얘기하고 계세요. 밖에 나가 있을 테니 필요한 거 있으시면 언제든지 부르시고요.”“네, 가보세요.”도우미 일행이 나오고 나서야 유시아는 본론으로 들어갔다.“한서준 씨는 알고 있어요?”임청아는 고개를 저으며 쓴웃음을 지었다.“그런다고 숨겨질 일도 아니잖아요.”요즘 임태훈뿐만 아니라 한서준도 눈을 부라리고 임청아를 찾고 있었다.두 사람의 시선을 피하고자 아파트도 호텔도 들어갈 수 없었고 버려진 강아지처럼 유시아 화실에 몸을 숨기고 지낸 것
임청아 이름 석 자가 임재욱의 입에서 나오자, 유시아는 순간 청천벽력을 맞는 것만 같았다.심지어 지금까지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으니 말이다.한참 지나고 나서야 겨우 떨리는 심장을 부여잡고 물었다.“청아 씨가 왜 병원에 있는 거죠?”임청아는 임신한 것을 알고 매사에 조심하며 걸음 하나도 천천히 옮겼었다.게다가 해외에 있는 친구와 연락하여 해외로 떠날 준비까지 마쳤다고 했었다.그런데 관건이 되는 순간에 계단에서 굴러떨어졌다고?“할아버지를 너무 쉽게 생각한 거 아니야?”임재욱은 말하면서 차갑게 웃었다.“네 화실에 청아 숨겨 놓았잖아. 할아버지께서 그걸 과연 모르고 있었을 것 같아? 오늘 화실로 청아 데리러 갔었는데, 가지 않겠다고 청아가 하도 우기는 바람에 억지로 묶어서라도 데리고 가겠다며 서로 실랑이를 벌이다가 계단에서 굴러떨어진 거야.”그렇다면 아이를 유산했을지도 모른다.임태훈의 습관에 따라 생각해 본다면 이 화살은 결국 유시아에게로 돌아오게 되어 있다.임재욱이 그렇게 경고하였건만 유시아는 마음이 약한 사람이었다.약해지는 마음에 언젠가는 구렁이에 빠지게 될 날이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날이 바로 오늘 일 줄은 몰랐다. 임재욱은 한숨을 내쉬며 꾸짖고 싶은 마음을 겨우 억눌렀다.“병원 주소 보내줄 테니 얼른 가 봐.”말을 마치고 임재욱은 전화를 끊어버렸다.얼마 지나지 않아 메시지 한 통이 도착했고 운전 기사에게 새로운 목적지를 알려주었다.같은 시각, 병원 안에서.임청아는 이미 수술을 마쳤고 일반 병실로 옮겨져 있었다.이미 가문의 집사와 간호인이 옆에 있었고 병실 문 앞에는 임태훈이 보낸 경호원도 있었다.다만 경호원이 경계해야 할 상대는 유시아가 아니라 한서준이다.따라서 유시아는 별다른 막힘없이 바로 병실 안으로 들어갔다.병상에 누워 있는 임청아는 얼굴에 핏기 하나 없었고 초점을 잃은 두 눈으로 멍하니 천장만 바라보고 있었다.불과 하룻밤 사이에 모든 활력을 잃어버린 모습이었다.집사는 자리에서 일어서서 아주 공손하게 유시아에
조금 전까지 허겁지겁 밥을 먹고 있던 임재욱은 멈칫거리고 말았다.이윽고 고개를 천천히 들어 웃는 듯 마는 듯한 얼굴로 유시아를 바라보며 물었다.“별거하자는 뜻이야?”“그렇게 생각해도 좋아요.”유시아는 숟가락을 내려놓고 머리가 아픈 듯 이리저리 만지작거렸다.“지금 이러한 상황에서 이러는 것도 좋을 것 같아요. 나한테 신경 쓰지 않아도 되고 그 시간으로 시연이한테 집중해도 되잖아요. 나도 마침 어머님 곁에 좀 있어드리고... 서로에게 지금 이게 최우선인 것 같아요.”임재욱은 숨을 깊이 들이마시고서 낙담한 모습으로 말했다.“그래. 네가 좋다고 하면 그게 좋은 거겠지. 그렇게 하자.”말을 마치고 그는 계속 밥을 먹었다.유시아는 그런 그를 바라보고서 아련하게 웃고는 바로 자리에서 일어나 위층으로 올라갔다.이튿날 아침, 유시아는 임재욱이 출근하고 나서야 침대에서 일어났다.일상복 몇 벌과 일상용품을 챙겨 작은 트렁크 안에 놓고 바로 이채련한테 가려고 했다.허씨 아주머니는 트렁크를 들고 내려오는 유시아의 모습에 살짝 당황한 모습이었다.“사모님, 어디 가시는 거예요? 설마... 가출하려는 건 아니죠?”유시아는 허씨 아주머니를 향해 웃었다.“아니에요. 친척분이 좀 위독하신데 제가 옆에서 좀 챙겨드리고 싶어서 가는 거예요. 얼마 걸리지 않을 거고 곧 돌아올 수 있을 거예요.”말을 마치고 트렁크를 들고서 집을 나섰다.이채련이 지내고 있는 병실이 VIP 병실로 널찍한 객실까지 갖춰져 있다.유시아는 간호사에게 접이식 침대와 이불을 요구했고 간단히 정리하고 나니 잘 자리가 아늑하게 마련되었다.이채련은 더 이상 침대에서 내려올 수 없어 하루 24시간을 침대 위에서 보내고 있다.얼굴도 하도 여위어 본연의 모습을 점점 잃어가고 있었다.그전에도 유시아는 이채련에게 이곳에서 며칠 동안 함께 지내고 싶다는 의사를 밝힌 적이 있지만 이채련은 행여나 자기로 인해 두 사람 사이에 흠이 생기게 될까 봐 동의하지 않았었다.지금 이 자리까지 오게 된 것만으로도 갖은 풍
임재욱은 핸들을 꼭 움켜쥐고서 앞만 바라보았으나 두 눈에는 고통과 망연함이 가득했다.“시연이 해외에 있을 때, 몹쓸 짓을 당했어. 한번이 아니라 여러 번이나. 그래서 우울증에 걸리게 된 거야.”유시아는 두 눈이 휘둥그레지면서 볼륨까지 높아졌다.“어머, 어떡해요!”평소에 신시연에 대해 좋은 마음을 가지고 있었던 건 아니지만 그 소식을 듣게 되는 순간 심장이 덜컹 내려앉기는 했다.여자에게 있어서 그런 몹쓸 짓을 당한다는 건 치명적인 타격과 치욕이 아닐 수가 없다.게다가 부모님의 일까지 더해지니 조금 전 식당에서 봤던 신시연의 모습이 이해되었다.임재욱은 말하면서 후회와 자책하는 빛을 드러냈다.“그렇게 가고 싶지 않다는 시연이를 내가 억지로 보낸 거야.”그때는 모든 걸 너무 쉽게 생각했었다.낯선 곳으로 가서 마음을 가다듬고 학업에만 집중하면 자연스레 모든 걸 잊고 새로운 삶을 그려나갈 수 있으리라 믿었다.하지만 임재욱이 잊고 있었던 부분이 하나 있는데, 그건 바로 신시연이 이제 갓 20살을 넘은 꽃다운 여자아이라는 것이다.해외에는 불안정 요소도 많고 미처 생각지 못하는 위험도 많다.게다가 젊은 나이라 자칫 잘못하면 그릇된 길로 들어서기도 아주 위험하고 말이다.신시연 곁에 사람을 함께 보내긴 했지만 그렇다고 하여 24시간 동안 찰싹 달라붙어 다닐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유시아와 결혼하고 나서 신혼에 푹 빠져 있는 동안 신시연에게 더 많은 관심을 주지 않았기에 이러한 일이 일어난 게 아닌지 죄책감이 들기도 했다.지금 임재욱은 신서현에게 미안할 뿐이다. 하나뿐인 동생을 이 지경으로 만들었으니.하지만 그가 말한 본의와 달리 듣고 있는 유시아는 또 다른 뜻으로 받아들이게 되어 있다.유시아의 기억으로는 신시연이 해외로 보내진 이유는 이러하다.그때 신시연은 정운시 대학교 교내 사이트에 유시아를 먹칠하는 게시글을 올리면서 유시아로 하여금 학업을 이어갈 수도 수업을 들을 수도 없게 악한 상황을 만들었었다.마침 그 일을 소현우가 알게 되면서 유시아에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