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유현은 줄곧 돌아가지 않고 유시아네 집에 머물렀다.냉장고에 아무것도 없었기 때문에 두 사람은 요리를 하지 않고 아예 배달을 시켰다. 다 먹은 후에는 그저 쓰레기통에 던지면 되니 편리하고 아주 빨랐다.밤공기는 물처럼 차가웠다. 열려있는 침실창문에서 시원한 밤바람이 불어오자 흰색 커튼이 가볍게 흔들렸는데 마치 나비의 날개 같았다!심유현은 이전처럼 유시아의 침대에 옹기종기 모여 앉아있었다. 그때, 그녀가 한 손으로 유시아의 손목을 잡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시아야, 너 해외에 있다가 언제 다시 돌아올 거야?”“아직은 생각해보지 않았어요, 아마 몇 년 동안은 안 돌아올 거예요!”설령 돌아온다고 하더라도 그들 사이의 감정이 깊어지고 떼려야 뗄 수 없는 지경에 이를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지금 그녀가 떠나는 것도 별 의미가 없을 테니 말이다!유시아는 고개를 돌려 손을 뻗고는 심유현의 눈가에 흐르는 눈물을 닦았다.“울지 말고 이제 자요!'말을 마치고 유시아는 고개를 돌려 더는 심유현을 신경 쓰지 않았다.다음날 오전, 공항 근처 카페에서 사람을 기다리고 있던 임재욱은 창밖에서 심유현과 유시아가 함께 나타나는 것을 보았다.심유현은 하이힐에 버버리 셋업을 입고 손에는 캐리어를 끌고 있었다. 하지만 유시아는 심플한 스타일의 트레이닝복을 입고 손에는 작은 강아지 켄넬을 들고 있었다. 그리고 안에 있는 하얀 털의 강아지 한 마리는 호기심 어린 표정으로 밖을 바라보고 있었다.도대체 두 사람 중 누가 먼 길을 떠나려는 것인지, 아니면 함께 여행을 떠나려는 것인지 알 수가 없다!‘유시아 대체 나랑 무슨 인연인 거야, 금방 헤어지고 나서 겨우 마음 다잡고 내 모든 정력과 시간을 일에 쏟아붓고 있는데, 또 내 눈앞에 띄어?’그는 약간 눈살을 찌푸리며 유시아와의 일을 생각하고 있었다. 그때, 마침 고객의 전화가 걸려와서, 임재욱은 어쩔 수 없이 정신을 차리고 그 잡념들을 머리 뒤로 던져 버렸다!절친한 친구인 이민성의 전세기에 유시아를 태운 뒤,
소현우는 값을 매길 수 있는 사람이 아니다. 그가 유시아에게 준 온 세상을 그녀는 그 무엇과도 바꾸고 싶지 않았다.하지만 만약 누군가가 유시아보다 더 적합하고, 그에게 더 잘해 줄 수 있다면, 유시아는 아무런 조건 없이 물러나 줄 수 있다!심유현은 고집스러운 그녀의 작은 얼굴을 바라보았다. 참고 또 참았지만, 눈물은 저도 모르게 흘러나오고 있었다.심유현은 자신이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지 아주 잘 알고 있다. 그녀도 자신이 이렇게 모질게 마음을 먹고 유시아를 멀리 타향으로 떠나게 해, 그녀의 상처를 밟고 자신의 사랑과 행복을 완성하도록 강요할 줄은 더더욱 생각지 못했다!하지만 어떡하겠는가. 심유현은 정말 소현우를 사랑하고 있었고 잃고 싶지 않았다!그 사실은 하늘도 알 것이다. 미국에 있는 3년 동안, 심유현은 시도 때도 없이 그를 생각했고, 그녀는 심지어 소현우가 없는 그 3년을 어떻게 지냈는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그녀는 자신의 양심이 사라질 때까지 소현우를 사랑했다.“시아야.”심유현이 그녀를 꼭 끌어안으며 울먹였다.“시아야, 꼭 잘 있어야 해! 나를 용서해줘!” 말을 마친 후, 그녀는 손을 풀고 빠른 걸음으로 몸을 돌려 기내에서 빠져나갔다.유시아는 그녀의 뒷모습을 보며 자신의 핸드폰을 꺼내 문자 메시지를 적었다.「우리 이만 헤어져요, 나는 내가 해야 할 더 중요한 일이 있어요.」곧이어 유시아는 메시지 예약전송 시간을 설정한 뒤, 자신의 핸드폰에 있던 SIM 카드를 뽑아 가위로 두 동강 내고 한쪽 쓰레기통에 버렸다.출장을 다녀온 소현우에게 바로 이런 메시지를 보게 하는 것은, 사실 매우 좋지 않다.그러나 유시아는 이외에 다른 방법은 떠오르지 않았다.그녀는 정말 소현우에게 어울리지 않았다. 유시아에게는 감옥에 다녀왔다는 오점이 있을 뿐만 아니라, 더욱이 임재욱이 그녀를 가만두지 않으려 하니 말이다. 그녀는 한 번, 또 한 번 임재욱이 자신에게 남긴 애매한 흔적들을 달고 소현우를 찾아갈 수 없었다!이것은 너무 불공평하고, 더욱이 소현우
임재욱은 이 일이 참으로 황당하고 우스꽝스럽다 느껴져서 줄곧 정유라를 상대하기 싫어했다.하지만 임태훈이 이 혼사를 매우 신경 쓰고 있었다. 그의 말에 의하면 정유라는 어려서부터 임씨 가문 손주며느리의 기준에 따라 가르침을 받았고, 외모와 가문을 막론하고 그녀는 모두 임씨 가문의 손주며느리 자리에 비할 데 없이 적합하다고 한다!임재욱은 나이가 어리기 때문에 아직 줏대가 올곧지 않았다.게다가 그는 성인이 된 후에야 비로소 임씨 가문에 들어오게 되었기에, 임태훈은 임재욱에 대한 불신이 조금 있어 몰래 그의 곁에 적지 않은 사람을 두었다.사실 임재욱은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저 처리하기가 귀찮았을 뿐. 그는 반쯤 죽어가는 노인과 따지기가 싫었다.“그래도 그 아이는 너의 미래 와이프야, 평생 너와 손잡고 살아갈...”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임재욱은 참지 못하고 냉소하며 말했다.“평생 손잡고 사는 동안, 중간에 바람피워도 됩니까?”그러자 임태훈의 안색이 조금 어두워졌다.“그게 무슨 헛소리냐?”임청아조차도 참지 못하고 고개를 들어 임재욱을 잔인하게 노려보았다. 표정에는 불멸과 경멸이 섞여 있었다!모두가 알 수 있었다. 임재욱의 이 말은 그의 생부를 조롱하는 것이라는 걸.사생아라는 자신의 신분을 임재욱은 전혀 숨기지도, 숨길 필요도 없다고 느꼈다.심지어, 그는 가끔 이것을 무기로 삼아 다른 사람을 공격하기도 했다. 정말 부끄러워 해야 할 사람은 사생아가 아니라, 그 사생아를 이 세상에 데려온 사람들이니 말이다!“허튼 소리한 게 아닌데요.”임재욱은 임태훈을 보며 가볍게 웃었다.“유전자의 힘은 위대해요. 저한테 생부 외에 또 어떤 삼촌이나 큰아버지가 있을지 누가 알아요?”남에게 역겨움을 선사하는 능력에 있어, 임재욱은 스스로 둘째라고 자인했다. 아마 아무도 감히 일등을 인정할 수 없을 것 같아서 말이다!젓가락을 잡고 있는 임태훈은 생각보다 크게 화를 내지 않고 심지어 웃기까지 했다.“만약 있다면, 대우그룹 대표 자리가 너한테 돌아갈 것 같
오랜 세월을 겪어온 임태훈으로 말하자면, 일단 여자애는 반드시 부유하게 길러야 하고, 돈도 마음대로 쓰며 세상 물정을 봐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임청아는 어려서부터 지금까지 모두 사치스럽고 극진한 케어를 받으며 살아왔다!그러나 그녀는 큰 임무를 담당할 수 없고, 가업을 계승할 수 없기 때문에 임태훈은 차라리 사람을 보내서 천 길 낭떠러지로 반역한 임재욱을 데려오기를 원했다. 그는 자신이 가장 총애하는 손녀가 대우그룹을 계승하게 할 생각은 전혀 하지 않았다!임청아는 거의 꿀단지 속에서 자라서 하늘의 별과 달을 제외하고, 나머지 원하는 것은 거의 다 가질 수 있었다!그러나 아버지와 오빠가 죽은 후에야 그녀는 성별 문제 때문에, 자신은 임씨 가문의 돈을 마음대로 쓸 수 있지만, 결코 가문의 자금 원천에 접근할 기회가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굳이 말하자면, 임태훈의 마음속에 그녀는 그저 귀엽지만 결코 큰일은 맡길 수 없는 어리석은 아이일 뿐이었다. 그래서 장차 시집을 간 후에는, 그녀의 존재감도 서서히 없어질 것이다! ...임씨 저택에서 나온 임재욱은 자신의 차로 돌아와 직접 핸드폰을 꺼내 유시아에게 전화를 걸었다.그녀의 핸드폰 번호는 지난번에 세현 그룹 파티에서 별장으로 데려왔을 때 알아낸 것이다. 그날 임재욱은 그녀의 새 핸드폰을 샅샅이 뒤졌는데, 그 안에는 오직 두 사람의 핸드폰 번호만 있었다.바로 소현우와 심유현, 자신의 남자친구와 절친 말이다!그는 또한 유시아와 소현우의 모든 채팅 기록을 보기도 했다. 두 사람은 담담하면서도 약간의 달콤함이 섞여 있었다.임재욱은 오늘 어찌 된 일인지 모르겠지만, 그녀를 꼭 만나고 싶었다.그는 유시아의 전화가 꺼져 있는 것을 보고 곧장 차를 몰고 화랑 아파트로 향했다.익숙한 입구에 도착한 뒤, 그는 손을 뻗어 초인종을 눌렀으나 아무 응답도 없었다. 이윽고 그는 눈살을 찌푸리며 아예 직접 손으로 쾅쾅 두드렸지만, 안에는 여전히 사람이 없었다!그러더니 그는 곧장 건물 앞으로 돌아가 보았다. 유시아네 집 창문
유시아의 집은 깨끗하게 치워져 있어 사람의 흔적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다.수도와 전기가 모두 멈췄고, 그림판도 걷었고, 소파와 차 테이블에는 방진포가 씌워져 있어, 마치 먼 길을 떠나 잠시 돌아오지 않을 사람 같아 보였다.소현우는 임재욱에게 전화를 걸자마자 또 심유현에게 전화를 걸고는 다소 초조해하며 물었다.“너 시아한테 무슨 말 했어? 왜 갑자기 나한테 헤어지자는 문자가 와?”심유현은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미안해, 당최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시아가 없어졌어. 혹시 일주일 동안, 너랑 만난 적 없어?”그러자 심유현이 담담하게 웃으며 말했다.“현우 씨, 여기서 나를 탓하는 게 아니라 두 사람 그동안의 감정이 왜 흩어졌는지 잘 반성해봐야 할 것 같은데?”말을 마친 뒤, 그녀는 전화를 끊고 온천 벽에 힘껏 몸을 기댔다.유시아는 이미 떠났고, 앞으로 소현우는 잠시 마음을 가라앉히기 어려울 것이다. 그에게는 평정을 되찾고 이 사실을 받아들일 시간이 필요했다. 물론 심유현도 마찬가지로, 자신의 마음의 죄책감과 불안을 희석시킬 시간이 필요했다.심유현은 가볍게 한숨을 쉬고 이내 온천에 머리를 파묻었다. 그리고 10여 초 후, 다시 물 위로 올라와 심호흡하고는 얼굴의 물기를 닦고 손을 뻗어 쟁반 위의 와인 한 잔을 가져왔다.그녀가 막 마시려고 할 때, 룸의 문이 갑자기 밖에서 크게 걷어차여 열렸다.심유현은 놀라서 손을 흠칫 떨었다. 그 바람에 와인잔이 온천 속으로 풍덩 떨어졌고, 그녀는 자신을 향해 정면으로 걸어오는 임재욱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그녀의 작은 얼굴의 핏빛이 순식간에 사라졌다.“어... 어떻게 들어왔어요?”이곳은 그녀의 친구가 운영하는 개인 온천이다. 심하윤은 이곳에 와 온천을 즐길 때면, 늘 룸을 예약해 다른 사람의 방해를 받지 않게끔 했다. 그런데 지금 그녀의 개인 공간이 뚫린 것이다!임재욱은 사람을 데리고 건방지게 쳐들어왔고, 그녀에 대한 이 위협은 말할 필요도 없이 자명하다!그는 예사롭지 않은 눈빛으로 대리석으로 쌓은 온
심유현이 고개를 끄덕였다.“제가 홍콩에 있는 세인트 미대를 알아봐 줬어요. 아마... 아마 지금은 입학수속을 밟고 있을 거에요, 거기에 가서 한 번 찾아봐요...”그 말을 들은 뒤, 임재욱은 돌아서서 밖으로 나가려 했다.심유현은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더니 문득 물었다.“시아를 데려올거예요?”“그쪽일이나 신경 써요!”곧이어 임재욱은 경호원을 데리고 밖으로 떠났고, 심유현 홀로 이곳에 남게 되었다.임재욱은 온천에서 나와 자신의 차에 올라탔다. 그러고는 그의 개인 비서 강석호에게 홍콩으로 가는 비행기표를 예약하라고 분부했다. 동시에 그는 차에 있는 노트북을 켜고 세인트 미대를 검색해보았다.한참을 검색했지만, 꽤 초라한 공식 사이트 외에는, 그 어떤 쓸모 있는 정보도 없어서 아무래도 학교운영 자질조차 조사해봐야 할 것 같았다!얼마 후, 임재욱은 눈앞의 노트북을 껐다. 그의 마음은 이루 말할 수 없이 울적했다.예전에 유시아는 그래도 꽤 알아주는 명문대에 다녔었는데, 이번에 심유현이 그녀에게 찾아준 곳은 뜻밖에도 볼품없는 대학이었다.저녁 비행기가 딜레이 되는 바람에, 그가 홍콩에 도착했을 때는 마침 오전 시간대였다.임재욱은 공항에서 나와 호텔에 가서 쉬지 않고, 바로 강석호와 함께 차를 몰고 세인트 미대로 갔다. 학교 환경은 괜찮아 보이지만, 부지가 비교적 작고 규모도 별로 크지 않았다. 임재욱은 눈살을 살짝 찌푸리더니 곧장 교무처로 향했다.그는 유시아의 주민등록번호와 이름을 알려줬다.그러나 상대방이 말하길, 이 학교에는 유시아라는 여학생이 없다고 했다!‘그런 사람이 없다고...?’임재욱은 어리둥절해졌다. 도리대로라면, 심유현은 그를 속일 필요도 없고 그럴 배짱도 없는데, 어떻게 유시아가 이 학교에 없을 수 있겠는가?그는 곰곰이 생각하다가 다시 한번 물었다.“다시 한번 봐주세요. 유, 시, 아. 아마 이번 주에 입학 수속받으러 왔을 텐데요?”그러나 안경을 쓴 여직원이 다시 컴퓨터에 이름을 입력하더니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죄송합니다. 우
심유현은 유시아가 이미 정상적으로 입학했다고 여겼다. 하지만 뜻밖에도 그녀가 학교에 없다니...유시아에게 그곳은 태어나 처음 가보는 낯선 곳일 텐데, 대체 그녀가 어디에 있을 수 있단 말인가?심유현은 약간 짜증이 나서 자신의 머리채를 잡았다.“임 대표님, 시아는 아무 일도 없을 겁니다. 이미 충분한 돈을 가지고 있거든요. 아마도 시아는 우리가 보고 싶지 않아서 일부러 숨어 있는 것 같아요!”그러자 임재욱이 눈살을 찌푸리며 냉랭하게 말했다.“만약 시아한테 정말 무슨 일이 생긴 거라면, 심유현 씨도 각오하시는 게 좋을 겁니다!”그가 말을 끝마치자, 통화는 이내 끊겼다.임재욱의 말 때문에, 핸드폰을 쥐고 있는 심유현의 얼굴색은 급격히 창백해졌다.‘이게 바로 자업자득인 건가...’...홍콩의 여름은 정운시보다 훨씬 더웠다.특히 최근 며칠째 비가 부슬부슬 내리면서 유시아는 집이 물이 뚝뚝 떨어질 만큼 눅눅해진 것처럼 느껴졌다. 그래서 제습기 두 개를 두었지만, 전혀 소용이 없었다.구름이는 최근 열과 배탈에 시달리고 있어, 유시아는 구름이를 데리고 매일 동물병원에 가서 주사를 맞아야 했다.동물병원에서 돌아왔을 때는 이미 초저녁이었다.그녀는 흑백의 줄무늬 운동복을 입고 있었고, 머리카락은 최근 매우 빨리 자란 탓에 눈을 가릴 지경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미용실에 가 다듬을 시간도 없었던지라, 그녀는 대충 진주 머리핀을 꽂았다. 그래서 보기에 더욱 앳되고 세상 물정에 어두운 여학생처럼 보였다.반려견을 데리고 다니기 때문에 지하철을 탈 수 없으므로 유시아는 택시를 타고 자신이 세 들어 사는 집 아래까지 이동했다.홍콩의 집값과 물가는 정운시보다 비교적 비싼 편이었다. 수중에 있는 돈이 비록 적지 않았지만, 그녀는 앉아서 빈털터리가 될 수 없었다. 꼭 자신이 돈을 버는 속도가 돈을 쓰는 속도보다 빠르게 만들어야 했다. 그것도 안되면, 적어도 이 두 속도가 같게 만들어야 한다!돈을 절약하기 위해서, 그녀가 세 들어 사는 곳도 비교적 멀리 떨어져 있는데
홍콩 쪽의 채용 시스템은 다소 엄격하였다. 유시아는 별 업무 경력도 없었고, 3년이란 시간을 감방에서 보낸지라 일자리를 찾기가 여간 어려운 게 아니었다.그렇게 긴 시간이 흐른 뒤 그녀는 나가서 일하겠다는 마음은 접어두고, 집에서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밖에 선물 가계에 그림을 팔며 반려견 구름이를 키울 생각이었다. 한창 그림을 그리다가 한 부분을 수정하려던 찰나, 갑자기 집주인 이 씨 아주머니가 국수 한 그릇을 들고 웃으며 들어오는 것이었다.“시아양, 내가 저녁에 국수 좀 끓였는데 특별히 시아양 꺼 한 그릇 남겼어. 계속 라면만 먹으면 몸에도 안 좋을 거야...”유시아는 재빠르게 일어나 아주머니의 손에 들고 있는 그릇을 받아들었다.“고맙습니다, 아주머니…”그녀는 한쪽으로 인사하며, 한쪽으로는 책상 위에 그릇을 올려놓았다. 그러고는 과일 봉지를 집어 들며 말했다.“아주머니, 제가 과일 좀 샀는데 이거 가져가서 드세요. 비타민C도 자주 보충해줘야 해요!”집주인 아주머니는 허허 웃어 보이며 말했다.“아유, 그래도 이걸 어떻게 가져가?”“괜찮아요, 가져가세요.”유시아는 미소를 지어 보이며 답했다.“그동안 제가 여기 묵으면서 많은 폐를 끼쳤잖아요. 이거 받지 않으시면, 저도 속에서 내려가지 않을 거예요!”집주인 아주머니는 인색하기로 소문난 사람이었다. 그녀는 혹시라도 누가 불을 조금 더 켜고 있거나, 물이라도 조금 더 많이 쓰면 그런 것까지도 하나하나 다 따졌다. 한편 유시아는 이런 먹고 쓰는 일에서 굳이 신세 지고 싶지 않았다.“아이고 젊은 처자가 참 예쁘고 똑 부러지네. 거기다 그림까지 그릴 줄 아는 거야? 누가 데려갈지 모르겠지만 그놈은 복 받았네...”집주인 아주머니는 말하다 말고 갑자기 대화 주제를 돌렸다.“근데 시아양은 남자친구 있어?”유시아는 미소를 지으며 자리에 앉아 밑그림을 정리하면서, 자연스럽게 답했다.“그럼요. 며칠 뒤면 저 보러 여기 온다고 했어요.”그녀는 집주인 아주머니의 그 말에 의도를 눈치챌 수 있
늦은 밤, 유시아의 카카오톡을 받았을 때 임재욱은 병원에 있었다.신시연은 도우미의 도움을 받으며 진료실에서 여러 검사를 받았고 그동안에 임재욱은 밖에서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늦은 밤의 사립 병원이라 사람이 그리 많지 않았다.당직을 서는 의사 선생님과 간호사 외에 거의 사람이 없이 무척이나 쓸쓸해 보였다.임재욱은 복도를 한참이나 누비다가 의자에 걸터앉았다.유시아를 병원으로 바래다주고 돌아서는 길에 신시연의 전화를 받고서 오게 된 것이다.배가 아프다고. 당장이라도 죽을 듯이 아프다고.신시연은 며칠 전에 병원에서 여러 번 신체검사를 받았으나 해외에서 그러한 몹쓸 짓을 당하며 우울증과 부인병이 있는 외에 다른 수치들은 정상 범위 안에 있었다.그 말인즉슨,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것이다.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임재욱은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신시연에게 남은 ‘가족’이라고는 임재욱 하나뿐이니 어찌 됐든 그녀를 잘 지켜야 하는 마음뿐이었다.그 누구에게도 다시는 상처를 받지 않게끔.바로 이러한 마음가짐으로 하여 임재욱은 그녀를 직접 병원까지 데리고 오고 의사 선생님 입에서 아무런 문제도 없다는 확답을 듣고 나야만 마음이 놓일 수 있다.애타게 검사 결과를 기다리고 있는 가운데 핸드폰 알림 소리가 울렸다.유시아가 보낸 카카오톡인데, 내용은 아주 간단했다.[보고 싶어요.]임재욱은 고개를 숙인 채 카톡 내용을 거듭 곱씹으며 유시아 사진으로 되어 있는 그녀의 프로필 사진을 바라보며 입꼬리가 주체하지 못하고 자꾸 올라갔다.‘내가 보고 싶어? 별거한 지 하루 만에 벌써 내가 보고 싶은 거야?’‘우리 시아 이제 제법 솔직하네.’핸드폰을 손에 꼭 쥐고 어떻게 답장할지 생각하고 있을 때 응급실 문이 열렸다.도우미 김향화가 얼굴에 핏기 하나 없는 신시연을 부축하고 걸어 나왔다.신시연은 디자인이 아주 심플한 데님 스커트를 입었고 윤기가 별로 없어 보이는 머리를 돌돌 말아 묶어 올렸다.무척이나 초췌해 보이는 것이 가여운 느낌도 물씬 풍기고 있어 기고만장했던 그
유리 구두를 품속에 꼭 안고 있는 유시아를 보고서 임재욱은 순간 이러한 생각이 들었다.참으로 달래기 쉬운 여자라는 것을.특히 결혼하고 나서 아주 살짝만 잘해주어도 유시아는 아주 오랫동안 기뻐하는 것만 같았다.유시아는 늘 임재욱 앞에만 서면 스스로 자세를 낮추고 자기를 낮은 위치에 놓는 데 습관 되어 있다.임재욱은 고개를 숙여 그녀의 정수리에 뽀뽀했다.“앞으로 매년 생일마다 예쁜 유리 구두 선물해 줄게. 어때?”“좋아요.”유시아는 말하면서 아주 유치하게 그를 향해 손가락을 내밀었다.“손가락 걸고 약속해요. 절대 어기지 않겠다고.”백화점에서 나온 두 사람은 일단 화실로 향했다.새로 구매한 공예품을 적당한 자리에 올려놓고 유시아의 제안으로 이채련의 병원까지 바래다주었다.유시아는 자기가 뱉은 말은 어떻게든 지키는 타입이라 이채련과 이미 약속했으니 꼭 지켜야 했다.하물며 자식도 없는 이체련에게 마지막 이 시간들이 더더욱 외로울 것이다.외부인들이 보기에도 불쌍할 정도로 외롭다.임재욱이 아무리 말해도 소용이 없었고 이채련에게 주어진 시간이 얼마 없다고 하니 마음은 내키지 않았지만 보내주었다.차는 곧 사립 병원 앞에 멈춰 섰고 임재욱은 차에서 내리지 않았다.유시아는 차창에 대고 거듭 강조했다.“유리 구두랑 드레스들 옷방에 고이 모셔두도록 해요. 마구 놓지 말고요.”“알았어.”임재욱은 말하고서 손을 내밀어 그녀의 목을 확 잡고서 찐한 키스를 남기고 나서야 순순히 놓아 주었다.“얼른 가 봐.”“조심해서 가요.”임재욱은 조수석에 앉아 한결 가벼워진 그녀의 뒷모습이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보고서야 시선을 거두고 집으로 향하려고 했다.가는 길에 갑자기 신시연으로부터 전화가 걸려 왔다.“오빠, 배가 너무 아파요.”...병실로 돌아와 보니 이채련은 아직 자고 있지 않았다.침대에 멍하니 누워 재미가 일도 없는 예능 프로를 보고 있었다.유시아가 문을 밀고 들어오는 것을 보고 이채련은 놀라고도 기뻤다.“시아야, 늦은 시간에 웬일이야?”유시아
쇼핑은 늘 설레는 일이다.유시아는 자기 취향대로 화실 장식품으로 쓰일 공예품을 골랐다.이윽고 임재욱은 또 유시아를 데리고 근처에 있는 매점으로 향했다.지난번에 두 사람은 함께 쇼핑하면서 많은 옷을 샀었지만, 신서현 부모님께 갑작스러운 상황이 일어나면서 유시아는 그 모든 옷을 모조리 청소 아주머니에게 줘 버렸다.그때의 아쉬움을 채워주기 위해 임재욱은 또다시 쇼핑하려고 한 것이다.게다가 다음 주면 대우 그룹 상장 20주년이다.정식적인 석상에 모습을 드러낼 때 유시아를 자기 아내 신분으로 남에게 소개해 주고 싶어 이브닝 파티에 어울릴만한 드레스와 신발을 살 예정이다.드레스는 그럭저럭 큰마음이 가지 않았는데, 유시아는 그 신발이 마음에 들었다.은백색의 하이힐로 예쁜 보석들로 가득 박혀 있어 매점 불빛 아래서 유난히 반짝이는 것이 신데렐라 동화에 나올 법한 유리 구두 같았다.매점 직원은 유시아가 마음에 들어 하는 것을 보고 바로 다가왔다.“손님 안목이 참 좋으시네요. 이 제품은 저희 디자이너 선생님의 최신 디자인으로 지금 딱 한 켤레만 있습니다. 만약 이 신발을 신고 나가신다면...”임재욱은 갑자기 직원의 말을 끊어버렸다.“이미 결혼했고요. 이 사람은 제 아내예요.”유시아는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들었는데, 자기를 바라보며 웃고 있는 그를 보고서 따라서 웃었다.“맞아요. 이 사람이 제 남편이에요.”매점 직원은 멍하니 있다가 바로 얼굴에 미소를 머금고 베스트 쇼핑 가이드다운 실력을 드러냈다.“어머, 어쩐지 너무 어울리신다 했어요...”직원의 칭찬에 두 사람은 얼굴에 웃음꽃이 피어났다.이윽고 매점 직원은 분위기를 파악하며 유리 구두에 대해 더욱 디테일한 설명을 첨부하기 시작했다.“이 제품의 새끼 양가죽으로 만들어졌으므로 착용감이 엄청 좋으실 거예요. 하루 종일 신고 걸으셔도 전혀 문제가 없다는 말이죠. 게다가 우리 디자이너 선생님이 즉흥으로 만들어내신 작품이라 절대 똑같은 제품을 시중에서 보실 수 없을 거예요.”한 켤레일 뿐만 아니라 사이
한서준은 눈살을 찌푸리며 되물었다.“내가 뭐?”“한서준 씨는 당당해요?”유시아는 바로 질문을 질문으로 돌려주었다.“임씨 가문에 접근한 그 의도를 다른 사람들이 모를 것 같아요? 할아버지, 재욱 씨 그리고 나까지 똑똑히 알고 있어요. 청아 씨만이 한서준 씨를 사랑해서 자신을 속이고 있는 거라고요. 그렇게 쭉 모르는 척을 하며 모든 걸 감당하고 있었던 거라고요. 한서준 씨 역시 청아 씨를 이용한 게 아닌가요?”마지막 한 마디에 한서준은 침묵하고 말았다.그렇다. 임청아에게 접근한 이유는 유시아가 ‘스파이’로 움직여 주지 않겠다고 거절했기에 어리석어 보이는 임씨 가문 천금을 노리게 된 것이다.하지만 사람 마음이라는 것은 결국 변하게 되어 있다.임청아 대한 마음은 모략에서 시작했으나 시간의 흐름에 따라 그 마음이 점점 사랑으로 끝을 맺게 된 것이다.늘 밝고 긍정적인 에너지를 띠고 다가왔던 임청아가 어두운 자신의 삶을 밝게 비춰주는 것만 같았다.따라서 한서준은 임청아와 평생을 함께하고 싶다는 마음이 차츰 생기게 된 것이다.임태훈이 반대한다고 하더라도 꼭 자기 곁으로 데리고 오고 싶었다.“청아 씨 지금 몸도 마음도 상처투성이에요.”“만약 청아 씨 행복하게 해 줄 수 없다면 신중하게 생각하고 결정하는 게 좋을 거예요.” 말을 마치고 유시아는 차 문을 밀고 차에서 내려 병원 밖으로 걸어갔다.택시에 오른 유시아는 긴 망설임 끝에 끝내는 더 스케치 화실 주소를 운전 기사에게 알렸다.차는 화실 맞은 편에 세워졌고 유시아는 화실 바로 맞은편에 있는 커피숍으로 들어가 창가 자리에 앉았다.화실 안의 상황을 바로 체크할 수 있고 자신의 정체를 드러내지 않아도 되는 최적의 위치라고 할 수 있다.한참 지나고 나서야 수많은 경호원들이 임태훈을 사이에 두고 화실에서 걸어 나오는 것이 보였다.임태훈은 벤틀리에 올라 강한 기운을 남기고 자리를 떠나버렸다.유시아는 그제야 한시름을 놓고 들고 있던 커피잔을 내려놓고는 바로 화실로 향해 달려갔다.화실 안과 밖은 겉은
전화를 마치고 유시아는 혼자 밖에 없는 휴게실을 보고서 깊은 번뇌에 잠겼다.남을 탓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에 임태훈처럼 막무가내로 어처구니가 없는 노인이 있다는 게 도통 이해가 되지 않았다.임태훈이 끔찍이 여기는 임청아를 유시아가 계단에서 밀어버린 것도 아닌데, 왜 애꿎은 자기 화실을 닫으려고 하는지 알 수 없었다.집안 내부에 문제가 생기면 일단 스스로 반성하는 법부터 배워야 하는데, 그게 무엇이든 일단 남한테서 문제를 찾고 있으니, 권력을 믿고 사람을 업신여기는 것이 분명했다.유시아는 생각하면 할수록 머리가 복잡해졌고 불안함도 점점 커졌다.지금 운영하고 있는 더 스케치 화실도 용재휘가 먼저 시작한 것인데, 그와 더불어 학생들까지 모두 함께 넘겨주었는데, 만약 이대로 화실을 망쳐버린다면 용재휘에게 너무 미안할 것 같았다.임재욱과 임태훈이 어느 정도로 얘기했는지 알 수 없었지만 화실이 그들 싸움의 희생물이 되지 않기만을 바랄 뿐이었다.임재욱에게 전화를 걸어 상황을 묻고 싶었으나 감히 그럴 용기가 없어 일단 지켜보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떨리는 심장을 부여잡은 채로.그렇게 한참이나 심장을 조이고 있었지만, 걸려 오는 전화는 없었다.유시아는 일이 어느 정도 망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학생 채팅방에 오늘 갑자기 일이 있다며 수업을 뒤로 미룬다고 알렸다.언제 다시 수업을 시작할지는 소식을 기다리라며 덧붙이기까지 했다.톡을 보내고서 유시아는 더 이상 핸드폰을 보지 않고 바로 병원 밖으로 나갔다.그러나 병원 대문을 나오자마자 한서준이 정면에서 오고 있었다.“유시아.”유시아는 고개를 들었고 그를 보게 되는 순간 정신이 아찔해 났다.직감이 알려주건대, 절대 좋은 일이 없다는 것이다.화실의 생존 여부도 알 수 없는 상황에서 그의 심기까지 건드리고 싶지 않았다.한서준은 쉽사리 유시아를 놓아 주지 않았고 손을 내밀어 유시아의 손목을 꼭 잡았다.“물어볼 일이 있어.”말하면서 근처에 있는 지프차를 가리켰다.“차에 타서 얘기 하자.”“그쪽이랑 할 말
유시아는 그 말을 이어받지 않고 집사의 바람대로 타이르기 시작했다.“몸이 아직 많이 허약해요. 먹고 싶지 않아도 억지로라도 좀 먹어야 하거든요. 일이 어찌 됐든 일단 건강부터 챙겨야 해요.”임청아 그 말을 듣고서 쓴웃음을 지었다.“건강 회복되면 할아버지한테 잡혀가서 집에 감금되는 것밖에 더 있겠어요?”“그렇게 생각하지 말아요.”유시아는 눈살을 찌푸리며 덧붙였다.“어찌 됐든 할아버지 마음은 한결같을 거예요. 청아 씨를 아끼고 사랑하는 거요. 서로 대화가 필요한 거 같아요. 서로 터놓고 얘기하고 나면 오해가 풀리고 마음도 풀리면서 모든 게 원점으로 돌아갈 수 있을 거예요.”임청아의 입가에 피식 웃음이 새어 나왔다.“저도 그렇게 생각했었어요. 아이 낳고 나면 할아버지도 서준이도 원한을 내려놓고 행복만 할 수 있다고요.”“근데 이렇게 몸도 아끼지 않고 점점 더 막무가내로 나가면 두 사람 사이의 원한은 점점 더 짙어질 거예요.”유시아는 말하면서 도우미 손에서 보신탕을 가져와 천천히 불며 임청아의 입가로 가져갔다.임청아는 생각 밖으로 무척이나 순순하게 유시아의 말을 따랐고 그녀의 말에 이치가 있는 것 같아 조용히 보신탕을 받아 마셨다.도우미와 집사는 두 사람이 티키타카 서로 말을 주고받는 것을 보고 서서히 마음이 놓였다.임청아가 뭐라도 먹기 시작하여 자기도 모르게 한시름을 놓으며 자리까지 비켜주려고 했다.두 사람이 마음 편히 말할 수 없을까 봐 눈치껏 일어서려는 것이다.“작은 사모님, 아가씨와 천천히 얘기하고 계세요. 밖에 나가 있을 테니 필요한 거 있으시면 언제든지 부르시고요.”“네, 가보세요.”도우미 일행이 나오고 나서야 유시아는 본론으로 들어갔다.“한서준 씨는 알고 있어요?”임청아는 고개를 저으며 쓴웃음을 지었다.“그런다고 숨겨질 일도 아니잖아요.”요즘 임태훈뿐만 아니라 한서준도 눈을 부라리고 임청아를 찾고 있었다.두 사람의 시선을 피하고자 아파트도 호텔도 들어갈 수 없었고 버려진 강아지처럼 유시아 화실에 몸을 숨기고 지낸 것
임청아 이름 석 자가 임재욱의 입에서 나오자, 유시아는 순간 청천벽력을 맞는 것만 같았다.심지어 지금까지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으니 말이다.한참 지나고 나서야 겨우 떨리는 심장을 부여잡고 물었다.“청아 씨가 왜 병원에 있는 거죠?”임청아는 임신한 것을 알고 매사에 조심하며 걸음 하나도 천천히 옮겼었다.게다가 해외에 있는 친구와 연락하여 해외로 떠날 준비까지 마쳤다고 했었다.그런데 관건이 되는 순간에 계단에서 굴러떨어졌다고?“할아버지를 너무 쉽게 생각한 거 아니야?”임재욱은 말하면서 차갑게 웃었다.“네 화실에 청아 숨겨 놓았잖아. 할아버지께서 그걸 과연 모르고 있었을 것 같아? 오늘 화실로 청아 데리러 갔었는데, 가지 않겠다고 청아가 하도 우기는 바람에 억지로 묶어서라도 데리고 가겠다며 서로 실랑이를 벌이다가 계단에서 굴러떨어진 거야.”그렇다면 아이를 유산했을지도 모른다.임태훈의 습관에 따라 생각해 본다면 이 화살은 결국 유시아에게로 돌아오게 되어 있다.임재욱이 그렇게 경고하였건만 유시아는 마음이 약한 사람이었다.약해지는 마음에 언젠가는 구렁이에 빠지게 될 날이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날이 바로 오늘 일 줄은 몰랐다. 임재욱은 한숨을 내쉬며 꾸짖고 싶은 마음을 겨우 억눌렀다.“병원 주소 보내줄 테니 얼른 가 봐.”말을 마치고 임재욱은 전화를 끊어버렸다.얼마 지나지 않아 메시지 한 통이 도착했고 운전 기사에게 새로운 목적지를 알려주었다.같은 시각, 병원 안에서.임청아는 이미 수술을 마쳤고 일반 병실로 옮겨져 있었다.이미 가문의 집사와 간호인이 옆에 있었고 병실 문 앞에는 임태훈이 보낸 경호원도 있었다.다만 경호원이 경계해야 할 상대는 유시아가 아니라 한서준이다.따라서 유시아는 별다른 막힘없이 바로 병실 안으로 들어갔다.병상에 누워 있는 임청아는 얼굴에 핏기 하나 없었고 초점을 잃은 두 눈으로 멍하니 천장만 바라보고 있었다.불과 하룻밤 사이에 모든 활력을 잃어버린 모습이었다.집사는 자리에서 일어서서 아주 공손하게 유시아에
조금 전까지 허겁지겁 밥을 먹고 있던 임재욱은 멈칫거리고 말았다.이윽고 고개를 천천히 들어 웃는 듯 마는 듯한 얼굴로 유시아를 바라보며 물었다.“별거하자는 뜻이야?”“그렇게 생각해도 좋아요.”유시아는 숟가락을 내려놓고 머리가 아픈 듯 이리저리 만지작거렸다.“지금 이러한 상황에서 이러는 것도 좋을 것 같아요. 나한테 신경 쓰지 않아도 되고 그 시간으로 시연이한테 집중해도 되잖아요. 나도 마침 어머님 곁에 좀 있어드리고... 서로에게 지금 이게 최우선인 것 같아요.”임재욱은 숨을 깊이 들이마시고서 낙담한 모습으로 말했다.“그래. 네가 좋다고 하면 그게 좋은 거겠지. 그렇게 하자.”말을 마치고 그는 계속 밥을 먹었다.유시아는 그런 그를 바라보고서 아련하게 웃고는 바로 자리에서 일어나 위층으로 올라갔다.이튿날 아침, 유시아는 임재욱이 출근하고 나서야 침대에서 일어났다.일상복 몇 벌과 일상용품을 챙겨 작은 트렁크 안에 놓고 바로 이채련한테 가려고 했다.허씨 아주머니는 트렁크를 들고 내려오는 유시아의 모습에 살짝 당황한 모습이었다.“사모님, 어디 가시는 거예요? 설마... 가출하려는 건 아니죠?”유시아는 허씨 아주머니를 향해 웃었다.“아니에요. 친척분이 좀 위독하신데 제가 옆에서 좀 챙겨드리고 싶어서 가는 거예요. 얼마 걸리지 않을 거고 곧 돌아올 수 있을 거예요.”말을 마치고 트렁크를 들고서 집을 나섰다.이채련이 지내고 있는 병실이 VIP 병실로 널찍한 객실까지 갖춰져 있다.유시아는 간호사에게 접이식 침대와 이불을 요구했고 간단히 정리하고 나니 잘 자리가 아늑하게 마련되었다.이채련은 더 이상 침대에서 내려올 수 없어 하루 24시간을 침대 위에서 보내고 있다.얼굴도 하도 여위어 본연의 모습을 점점 잃어가고 있었다.그전에도 유시아는 이채련에게 이곳에서 며칠 동안 함께 지내고 싶다는 의사를 밝힌 적이 있지만 이채련은 행여나 자기로 인해 두 사람 사이에 흠이 생기게 될까 봐 동의하지 않았었다.지금 이 자리까지 오게 된 것만으로도 갖은 풍
임재욱은 핸들을 꼭 움켜쥐고서 앞만 바라보았으나 두 눈에는 고통과 망연함이 가득했다.“시연이 해외에 있을 때, 몹쓸 짓을 당했어. 한번이 아니라 여러 번이나. 그래서 우울증에 걸리게 된 거야.”유시아는 두 눈이 휘둥그레지면서 볼륨까지 높아졌다.“어머, 어떡해요!”평소에 신시연에 대해 좋은 마음을 가지고 있었던 건 아니지만 그 소식을 듣게 되는 순간 심장이 덜컹 내려앉기는 했다.여자에게 있어서 그런 몹쓸 짓을 당한다는 건 치명적인 타격과 치욕이 아닐 수가 없다.게다가 부모님의 일까지 더해지니 조금 전 식당에서 봤던 신시연의 모습이 이해되었다.임재욱은 말하면서 후회와 자책하는 빛을 드러냈다.“그렇게 가고 싶지 않다는 시연이를 내가 억지로 보낸 거야.”그때는 모든 걸 너무 쉽게 생각했었다.낯선 곳으로 가서 마음을 가다듬고 학업에만 집중하면 자연스레 모든 걸 잊고 새로운 삶을 그려나갈 수 있으리라 믿었다.하지만 임재욱이 잊고 있었던 부분이 하나 있는데, 그건 바로 신시연이 이제 갓 20살을 넘은 꽃다운 여자아이라는 것이다.해외에는 불안정 요소도 많고 미처 생각지 못하는 위험도 많다.게다가 젊은 나이라 자칫 잘못하면 그릇된 길로 들어서기도 아주 위험하고 말이다.신시연 곁에 사람을 함께 보내긴 했지만 그렇다고 하여 24시간 동안 찰싹 달라붙어 다닐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유시아와 결혼하고 나서 신혼에 푹 빠져 있는 동안 신시연에게 더 많은 관심을 주지 않았기에 이러한 일이 일어난 게 아닌지 죄책감이 들기도 했다.지금 임재욱은 신서현에게 미안할 뿐이다. 하나뿐인 동생을 이 지경으로 만들었으니.하지만 그가 말한 본의와 달리 듣고 있는 유시아는 또 다른 뜻으로 받아들이게 되어 있다.유시아의 기억으로는 신시연이 해외로 보내진 이유는 이러하다.그때 신시연은 정운시 대학교 교내 사이트에 유시아를 먹칠하는 게시글을 올리면서 유시아로 하여금 학업을 이어갈 수도 수업을 들을 수도 없게 악한 상황을 만들었었다.마침 그 일을 소현우가 알게 되면서 유시아에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