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우미는 옆에서 그녀를 쳐다보았다. 임재욱이 신시연을 아끼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입술을 삐쭉거릴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걱정스럽게 위층을 바라볼 뿐이었다.유시아는 그에 의해 위층을 끌려왔다. 그녀는 자기 가슴이 다 드러난 것도 신경 쓰지 않고 격렬하게 반항했다. 반면 임재욱은 그녀를 뒤돌아보고 놀랐다. 입고 있던 잠옷은 이미 어깨까지 내려가 있었다. 노출된 흰 피부에 연하게 남아있는 키스 마크와 차에서 뛰어내릴 때 생긴 상처, 그리고 방금 신시연이 손톱으로 할퀴어 피 나는 상처까지.엉망이 된 그녀의 모습은 보기만 해도 아파 보였다.임재욱의 시선이 몇 초 동안 그녀의 상처에 머물더니 그녀의 양손을 잡고 뒤에 있는 벽에 단단히 밀착시켰다.“유시아, 왜? 왜 그랬어?”“내가 그 여자를 원망하니까.”유시아는 흔들리는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창백한 얼굴에는 씁쓸한 미소가 남아있었다.“그 여자를 원망하니까요. 이거면 만족스러운 대답이 됐어요?”그녀는 신서현이 원망스러웠다. 한 번도 만난 적은 없었지만 그녀의 모든 비극은 신서현과 연관되어 있었다. 지금도 신서현은 죽었지만 임재욱의 마음속에 남아있는 가장 완벽한 여자였다. 결코 늙거나 못생겨질 수도 없었고 실수를 저지를 수도 없었다. 그는 평생 신서현을 놓지 못할 것이다.신서현 때문에 유시아도 평생 임재욱의 마음을 얻을 수 없었다.그런데 어떻게 그녀를 원망하지 않을 수 있을까?임재욱은 붉어진 두 눈으로 그녀를 뚫어져라 쳐다보더니 갑자기 손을 뻗어 가녀린 그녀의 목을 졸랐다.“유시아, 네가 뭔데? 응? 네가 뭔데 서현이를 원망해?”유시아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손을 뻗어 그의 뺨을 세게 때리려고 했다. 그러나 그는 고개를 돌려 그녀의 손을 피했다. 유시아는 포기하지 않고 긴 손톱으로 그의 목을 마구잡이로 할퀴었다.증오를 가득 담은 손짓에 그의 목에는 끔찍한 상처가 났고 피가 흘렀다.그녀가 신서현을 원망하는 것은 아무런 이유가 없었다.사랑하는 사람을 쫓는 것엔 큰 용기와 한결같은
임태훈은 약간 언짢아했지만, 그의 죽은 아들과 손자에 비해 확실히 임재욱이 그의 성격과 가장 비슷하다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이는 그에게 조금이나마 위로가 되었다.그래서 임재욱이 밖에서 아무리 소란을 피워도, 그것이 선을 넘는 행동이 아닌 한 임태훈을 거의 간섭하지 않았다. 스트레스를 덜 받아야 몇 년 더 오래 살 수 있으니 말이다.이번 일에 소현우만 연관되지 않았어도 그는 사실 간섭하지 않았을 것이다.최근 몇 년 동안 세현 그룹은 나날이 발전하여 정운시에서 매우 중요한 회사로 자리매김했다. 그러니 한 여자를 두고 소현우와 모순이 생겨 상업계의 적수가 하나 더 생기는 것은 정말 수지에 맞지 않는 일이었다! “할아버지 오늘 한가하세요?”임재욱은 이렇게 말하면서 임태훈의 곁에 있는 1인용 소파에 앉았다.“왜 갑자기 저 찾아오셨어요?'임태훈은 가볍게 기침을 한 번 하고는 덤덤히 그의 목에 있는 붉은 자국을 들여다보더니 말했다.“듣자 하니 내 착한 손주가 요즘 여기에 여자를 감추고 논다더구나, 그래서 내가 한번 보러 왔다!”옆에 서 있던 신시연은 그 말을 듣고 입을 살짝 삐죽거렸다.‘여자를 숨겨두긴 무슨, 유시아 그 빌어먹을 년이 스스로 온건데, 오빠는 전혀 좋게 봐줄 리가 없다고!’하지만 임재욱은 그저 피식 가볍게 웃을 뿐이었다.“할아버지 이제 연세도 많으시잖아요. 이런 일은 젊은이들에게는 물론 나이 드신 분들 정신 건강에도 좋지 않아요.”그의 몇 마디에 임태훈은 도리어 얼굴이 빨갛게 달아오르더니 손에 든 지팡이로 힘껏 땅바닥을 내리쳤다.“개자식아! 이제 할아버지한테 농담도 해?!”임재욱은 미간을 찌푸리며 이 상황이 귀찮게만 느껴졌다.“도대체 무슨 일이 있으신데요?”그가 직설적으로 묻자 임태훈도 더 이상 감추지 않고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그 여자 다시 소현우한테 돌려보내 줘! 네가 버린 여자를 굳이 한 번 돌아봐서 소현우한테 밉보여야겠어? 그건 우리 대우그룹이 상업계에서 강적을 하나 더 두는 거랑 다름없다고!”그러자 임재욱
키가 큰 임재욱은 잠옷 사이즈도 자연히 큰 편이어서 윗옷 하나만으로도 그녀가 치마로 입을 수 있을 정도였다. 유시아는 자신의 가슴을 꽉 여몄고, 다리가 다 나른해졌지만 어떻게든 넘어지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썼다.“유시아 씨.”임태훈이 가볍게 기침 소리를 내더니, 정중하게 말했다.“이번 일은 재욱이가 너무 무모하게 행동하는 바람에 유시아 씨 입장이 난감해진 것 같네요. 그러나 내가 보장하겠습니다. 다음에는 이런 일이 생기지 않도록 말입니다.”그러자 유시아는 그를 향해 몸을 굽히며 말했다.“정말 감사합니다! 그럼 전 이만 물러가 보겠습니다!”말을 마치고 그녀는 곧장 몸을 돌려 문 입구를 향해 갔다.절반쯤 갔을 무렵, 갑자기 임재욱이 엄숙한 목소리로 불렀다.“유시아...”그녀는 멈칫하다가 그가 자신에게 무슨 좋은 이야기를 하지 않을 것이라고 여기고는, 이내 무시하고 그냥 문을 열어 떠났다.소현우의 차는 예운 별장 부근에 멈춰 서 있었다. 그는 유시아가 임재욱네 정원에서 나오는 것을 보고 즉시 문을 밀고 내려와 그녀를 향해 달려갔다.“시아야...”그러고는 유시아의 이름을 부르며 그녀를 품에 꼭 안았다.“시아야, 괜찮아. 이제 내가 있어. 내가 집으로 데려다줄게.”유시아는 고개를 들어 가볍게 웃어 보이더니 곧 눈을 감고 그의 품 안으로 곤두박질쳤다. 그녀는 정말 피곤하기도 아프기도 했다. 마치 지옥에서 한바탕 구르다 온 것 마냥, 죽지는 않았어도 껍질이 벗겨지는 것 같은 고통이었다!그날 밤, 그녀는 악몽과 함께 고열에 시달렸고, 거의 밤새 편히 잠을 자지 못했다.소현우는 그녀를 안고 침대에 누워, 몇 번이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달래며 위로했다.“시아야, 이제 아무 일도 없어, 모든 게 다 지나갔어, 내가 있잖아. 봐봐, 여기는 너희 집이야.”유시아는 입술을 깨물더니 갑자기 목이 메는 듯했다.“나 아빠 보고 싶어요, 현우 씨, 나 너무 보고 싶어...”만약 아빠가 있었다면, 그는 자기 딸이 그렇게 괴롭힘을 당하는 것을 지켜보지 못했을 것이
더 묻지 않아도 이 가죽 구두의 주인이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심하윤은 잠시 시선을 그 구두에 멈췄다가 이내 웃으며 말했다.“그냥 너 보러 왔어. 시아야, 지금은 좀 어때?”“난 이제 괜찮아요.”유시아도 따라서 미소를 지었다.“그나저나 왜 이렇게 빨리 왔어요?”슬리퍼로 갈아신고 안으로 들어간 심하윤은 부엌에 있는 소현우의 행동을 보고 피식 웃는 듯 아닌 듯한 표정을 지었다.“빠르긴! 나보다 더 빠른 사람도 있구먼!”소현우는 옅은 회색 셔츠를 입고 있었고 그와 매치한 검은색 정장 바지는 이미 약간 구겨져 있었다. 그는 처음으로 이곳에서 유시아와 하룻밤을 보냈다. 유시아에게는 남자 옷이 없었기 때문에 그는 원래의 차림대로 있을 수밖에 없었다.분명히 약간 지저분한 옷차림이지만, 소현우가 입고 있으니 그래도 훈남의 포스가 물씬 풍기는 것 같았다.그는 심하윤을 보더니 담담하게 미소를 지었다.“사실 저는 어젯밤부터 줄곧 이곳에 있었어요. 그래서 말하자면, 하윤 씨가 더 빠른 겁니다!”심하윤은 순간 흠칫하더니 이내 뒤돌아서 유시아를 바라보았다.그러자 유시아의 작은 얼굴이 금세 빨갛게 달아올랐다.“아니, 아니, 그게 아니고 사실은….”“됐어, 설명하지마, 설명은 뭔가를 감추려는 거야.”심하윤은 싱글벙글 웃다가 고개를 돌려 부엌에 있는 소현우에게 말했다.“제가 아침을 안 먹어서 그러는데, 혹시 뭐라도 먹을 게 좀 있나요?”뒤이어 소현우가 “우유와 계란후라이는 어때요?”라며 제안했고 심하윤은 손가락을 튕겼다.“빙고, 내가 이 두 가지를 가장 즐겨 먹는다는 거 기억하고 있었어요?”“그냥 멋대로 추측해본 거예요!”소현우가 눈살을 찌푸리며 담담하게 말했다.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내색하지 않고 유시아를 바라보았다.그러나 유시아는 평소와 다름없는 표정으로 마치 듣지 못했다는 듯 심하윤을 거실로 끌고 가서 앉았다.그제야 소현우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곧이어 그는 손을 뻗어 가스레인지를 켠 뒤, 냉장고에서 계란 두 개를 가져와 달걀부침 두 개를 부
유시아는 그를 바라보며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네!”소현우는 손을 뻗어 그녀의 단발머리를 만진 후 몸을 일으켜 일어섰다.“나 먼저 갈게! 두 사람 좋은 시간 보내요!”그가 이곳을 떠나게 되면 심하윤이 유시아에게 해서는 안 될 말을 할 확률이 높다. 하지만 심하윤이 말하려고 마음먹은 한, 그건 단지 시간문제였다. 소현우는 유시아의 귀를 막을 수도, 심하윤의 입을 막을 수도 없으니 말이다.하지만 어차피 큰일도 아니었기에 괜찮았다. 단지 이전에 그가 심하윤과 잠깐의 연애를 한 적이 있을 뿐. 심하윤이 말할 수 있는 것은 이것밖에 없었다!말하지 말아야 할 그런 것들에 대해, 그는 심하윤도 절대로 감히 단 한 마디조차 내뱉지 못하리라 생각했다!소현우를 배웅하고 유시아는 그제야 식탁으로 걸어갔다.“이걸로 충분해요? 빵이라도 더 구워줄까요?”“이미 충분해. 현우 씨는 원래 돼지 기르듯이 사람을 잘 먹여, 몇 년이 지나도 안 고쳐지는 습관이군.”심하윤은 원망스럽다는 듯 말하며 마지막 우유를 삼키고는 접시와 우유컵을 부엌으로 가져가 씻기 시작했다.유시아는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갑자기 쓴웃음을 지었다.심하윤이 이렇게 명명백백히 암시를 보내는데, 아무리 바보같은 사람이라도 알아들었을 것이다.슬프게도 이 절친들은 가장 난감한 상황에 맞닥뜨렸는데, 바로 같은 남자와 감정의 모순이 생겼다는 것이다.접시와 컵을 씻고 고개를 돌린 심하윤은 눈시울을 붉히고 서 있는 유시아를 보고 얼떨떨해졌다.“시아야, 너 왜 그래?”그러자 유시아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별거 아니에요, 방금 속눈썹이 눈에 들어가서 두 번 문질렀더니... 빨개요?”심하윤은 “응.”하고 짧게 대답하고는 그녀의 말을 믿은 척 거실로 가서 작은 걸상을 찾아 앉았다.“시아야, 괜찮으면 내 초상화 하나 그리는 거 도와줄 수 있어? 집에 가서 걸어놓으려고. 나중에 네가 유명화가가 되면 내 초상화는 엄청난 가치가 있을 거야!”“좋아요!”유시아는 미소를 띤 얼굴로 말했다.이내 유시아는 그녀에게
유시아는 조용히 그녀의 말을 다 듣고서야 담담하게 웃었다.“좋아요!”“...”순간, 그녀는 뜻밖에도 무슨 말을 해야 좋을지 몰랐다.애초에 이 방법을 생각해냈을 때, 그녀는 만약 유시아가 받아들이지 않으면 어떻게 할까 계속 고민하고 있었으니 말이다.현재, 소현우는 한창 사업이 잘 나가고 있으므로 정운시를 떠나 유시아와 함께 홍콩에 갈 리 없었다. 그러나 열애 중인 두 사람, 게다가 소현우는 유시아의 유일한 생명의 지푸라기인데, 그녀가 어찌 쉽게 그를 떠날 수 있겠는가!그래서 심하윤은 머리를 쥐어짜 여러 가지 방법을 생각해냈다. 유시아가 떠날 수 있도록 말이다. 하지만 결국 모두 쓸모없어지고 말았다. 대체 그 누가 유시아가 이렇게 쉽게 승낙할 줄 알았겠는가!유시아는 더 이상 심하윤을 보지 않고 손을 뻗어 그녀에게 그려준 초상화를 그림판에서 떼어내어 한쪽에 놓고는, 다시 펜을 들어 구름이를 그리기 시작했다.그 순간, 심하윤은 갑자기 유시아가 그들의 과거, 그녀의 마음, 그리고 그녀가 여전히 소현우에게 미련이 남아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고 느껴졌다. 그래서 소현우를 자신에게 양보하는 큰 결정을 한 거라고!이윽고 심하윤은 부끄러움을 느끼며 손을 뻗어 유시아를 끌어안았다. 그러고는 그 작은 얼굴을 유시아의 옷 속에 묻으며 말했다.“시아야, 너는 반드시 아주 대단한 화가가 될 거야! 난 널 믿어!”유시아는 그림판 위의 그림을 보며 쓴웃음을 지었지만, 여전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저녁 무렵, 소현우가 유시아에게 전화를 걸었을 때, 심하윤이 이미 떠난 뒤였다. 혼자 집에 있던 유시아는 거울을 보며 화장을 하고 있었다.사실 예전에 그녀는 아름다움을 좋아했다. 특히나 여러 가지 색채에 아주 민감해 짙은 화장과 여러 가지 섀도, 하이라이트를 즐겨 그렸다. 그래서 화장대에는 늘 화장품들이 가득 쌓여 있었다.하지만 임재욱은 그녀의 짙은 화장을 매우 싫어했고, 심지어는 그녀의 얼굴이 엎어진 팔레트 같다며 싫어했다.어렸을 적 유시아는 임재욱이 무뚝뚝해서 짙은
소현우도 그녀를 따라 그쪽을 바라보며 웃었다.“맞아, 작년에 인테리어를 한 번 한거야. 사람은 옷을 입어야 하잖아? 회사도 마찬가지야!”유시아는 고개를 들고 계속해서 그 건물을 바라보았다.“현우 씨, 정말 대단해요!”게다가, 그는 유시아가 여태 한 번도 본 적이 있는 가장 대단하고, 또한 가장 부드러운 남자였다!소현우는 유시아를 바라보며 옅은 미소를 짓고는 그녀의 작은 손을 꼭 쥐었다.“나는 내가 좀 더 대단해졌으면 좋겠어, 그래야 네 이 귀여움을 평생 손에 넣을 수 있을 테니까!”유시아는 손을 뒤집어 그와 손깍지를 끼고는 입꼬리를 위로 살짝 올렸다. 하지만 끝내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계속 얼굴을 돌려 창밖을 바라보았다.두 사람이 함께 식사를 마쳤을 때는 여전히 이른 시간이었다. 공교롭게도 그 식당은 화운 백화점과 가까이 있었던지라 소현우는 그녀의 손목을 잡아당기며 말했다.“시아야, 우리 겸사겸사 뭐 살 겸 쇼핑이나 갈까?”그는 그녀가 오랫동안 새 옷을 사지 않았다는 것을 기억하고 있었다.심하윤이 그녀에게 사준 몇 벌을 제외하고는 모두 유시아가 감옥에 가기 전에 사둔 옷이었다. 장신구도 없이 초라하고 가련한 게, 마치 동화 속 신데렐라 같았다.소현우는 물론 감히 스스로를 왕자라 칭할 수는 없었지만 적어도 지금은 돈이 부족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유시아에게 가장 아름다운 원피스, 가장 진귀한 장신구, 가장 좋은 생활을 주기를 원했다!유시아는 고개를 들어 그 화려하고 웅장한 백화점 빌딩을 보더니 말했다.“에이, 됐어요.”뒤이어 그녀가 소현우의 팔을 잡아당기며 말을 이었다.“나는 드라이브나 가고 싶어요!”“애기야.”소현우는 약간 실소하며 그녀의 허리를 감쌌다.“지금 한창 퇴근 시간이라 차가 많이 막힐 텐데, 그래도 드라이브 가고 싶어?”“가고 싶어요!”유시아는 고개를 끄덕이며 더할 나위 없이 진지하게 말했다.“나는 현우 씨가 나를 태우고 정운시를 한 바퀴 돌았으면 좋겠어요. 음... 아이스크림 하나도 사주고요!”“좋아.”
유시아는 곰곰이 생각하다가 고개를 저으며 거절했다.“아무래도 현우 씨 혼자 가는 게 좋겠어요, 다음 주에 아빠 성묘하러 가려고요.”계산해 보니, 며칠 후가 유병철의 기일인 것 같았다.유시아는 감옥에서 3년 동안 살면서 거의 한 번도 유병철의 묘에 가보지 못했다. 때문에 누구에게도 성묘하러 간다는 그녀를 막을 이유가 없었다.게다가 소현우는 그동안 종일 유시아에게 붙어 있는 탓에 일 적인 면에서 지체된 게 아주 많았다. 그래서 이번 출장에서 그의 스케줄은 빠듯할 것이고, 아마 그녀와 함께할 시간도 확실히 없을 것이다.이렇게 생각을 끝마치자, 그는 마지못해 말했다.“그럼 최대한 일찍 돌아오도록 할게, 올 때 선물도 꼭 사 올게!”말을 끝낸 뒤, 소현우는 몸을 돌려 떠났다.유시아는 부엌 창턱에 엎드려 소현우의 그림자가 문에서 나와 단지 밖을 향해 걸어갈 때까지 줄곧 바라보았다. 그가 어둠 속으로 완전히 사라지고 나서야 그녀는 몸을 돌려 자신의 방으로 돌아갔다.구름이는 어느새 앞발 두 개를 차 탁자에 걸치고 목을 빼 들어 그 위에 놓여 있던, 소현우가 그녀에게 사준 장미꽃을 뜯어 먹고 있었다.그래서 유시아는 재빨리 그 장미 다발을 가져가 더 높은 수납장 위에 올려놓은 다음, 보관함으로가서 구름이의 사료와 햄을 가져다주었다.구름이는 정말 맛있게 먹었고, 유시아는 그 옆의 양탄자에 앉아 구름이를 바라보며 조용히 정신을 차렸다.다음 날 아침, 심유현이 그녀에게 전화를 걸었다.“시아야, 내가 이미 홍콩에 갈 때 필요한 수속은 다 처리해놨어. 하지만 학교 쪽의 수속은 좀 더 기다려야 해. 마침 며칠 후에 내 친구 전세기가 홍콩을 비행할 테니까, 그때 그거 타고 시아 너도 가면 돼!”이렇게 되면 유시아의 여권과 티켓 구매 정보를 확인할 방법이 없고, 소현우는 유시아가 어디로 갔는지 알 수 없게 된다. 그녀가 직접 나타나지 않는 한, 소현우는 절대로 그녀를 찾을 수 없을 것이다.유시아는 이를 듣고 씩 미소를 지었다.“좋아요, 그런데 저, 우리 구름이도
늦은 밤, 유시아의 카카오톡을 받았을 때 임재욱은 병원에 있었다.신시연은 도우미의 도움을 받으며 진료실에서 여러 검사를 받았고 그동안에 임재욱은 밖에서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늦은 밤의 사립 병원이라 사람이 그리 많지 않았다.당직을 서는 의사 선생님과 간호사 외에 거의 사람이 없이 무척이나 쓸쓸해 보였다.임재욱은 복도를 한참이나 누비다가 의자에 걸터앉았다.유시아를 병원으로 바래다주고 돌아서는 길에 신시연의 전화를 받고서 오게 된 것이다.배가 아프다고. 당장이라도 죽을 듯이 아프다고.신시연은 며칠 전에 병원에서 여러 번 신체검사를 받았으나 해외에서 그러한 몹쓸 짓을 당하며 우울증과 부인병이 있는 외에 다른 수치들은 정상 범위 안에 있었다.그 말인즉슨,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것이다.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임재욱은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신시연에게 남은 ‘가족’이라고는 임재욱 하나뿐이니 어찌 됐든 그녀를 잘 지켜야 하는 마음뿐이었다.그 누구에게도 다시는 상처를 받지 않게끔.바로 이러한 마음가짐으로 하여 임재욱은 그녀를 직접 병원까지 데리고 오고 의사 선생님 입에서 아무런 문제도 없다는 확답을 듣고 나야만 마음이 놓일 수 있다.애타게 검사 결과를 기다리고 있는 가운데 핸드폰 알림 소리가 울렸다.유시아가 보낸 카카오톡인데, 내용은 아주 간단했다.[보고 싶어요.]임재욱은 고개를 숙인 채 카톡 내용을 거듭 곱씹으며 유시아 사진으로 되어 있는 그녀의 프로필 사진을 바라보며 입꼬리가 주체하지 못하고 자꾸 올라갔다.‘내가 보고 싶어? 별거한 지 하루 만에 벌써 내가 보고 싶은 거야?’‘우리 시아 이제 제법 솔직하네.’핸드폰을 손에 꼭 쥐고 어떻게 답장할지 생각하고 있을 때 응급실 문이 열렸다.도우미 김향화가 얼굴에 핏기 하나 없는 신시연을 부축하고 걸어 나왔다.신시연은 디자인이 아주 심플한 데님 스커트를 입었고 윤기가 별로 없어 보이는 머리를 돌돌 말아 묶어 올렸다.무척이나 초췌해 보이는 것이 가여운 느낌도 물씬 풍기고 있어 기고만장했던 그
유리 구두를 품속에 꼭 안고 있는 유시아를 보고서 임재욱은 순간 이러한 생각이 들었다.참으로 달래기 쉬운 여자라는 것을.특히 결혼하고 나서 아주 살짝만 잘해주어도 유시아는 아주 오랫동안 기뻐하는 것만 같았다.유시아는 늘 임재욱 앞에만 서면 스스로 자세를 낮추고 자기를 낮은 위치에 놓는 데 습관 되어 있다.임재욱은 고개를 숙여 그녀의 정수리에 뽀뽀했다.“앞으로 매년 생일마다 예쁜 유리 구두 선물해 줄게. 어때?”“좋아요.”유시아는 말하면서 아주 유치하게 그를 향해 손가락을 내밀었다.“손가락 걸고 약속해요. 절대 어기지 않겠다고.”백화점에서 나온 두 사람은 일단 화실로 향했다.새로 구매한 공예품을 적당한 자리에 올려놓고 유시아의 제안으로 이채련의 병원까지 바래다주었다.유시아는 자기가 뱉은 말은 어떻게든 지키는 타입이라 이채련과 이미 약속했으니 꼭 지켜야 했다.하물며 자식도 없는 이체련에게 마지막 이 시간들이 더더욱 외로울 것이다.외부인들이 보기에도 불쌍할 정도로 외롭다.임재욱이 아무리 말해도 소용이 없었고 이채련에게 주어진 시간이 얼마 없다고 하니 마음은 내키지 않았지만 보내주었다.차는 곧 사립 병원 앞에 멈춰 섰고 임재욱은 차에서 내리지 않았다.유시아는 차창에 대고 거듭 강조했다.“유리 구두랑 드레스들 옷방에 고이 모셔두도록 해요. 마구 놓지 말고요.”“알았어.”임재욱은 말하고서 손을 내밀어 그녀의 목을 확 잡고서 찐한 키스를 남기고 나서야 순순히 놓아 주었다.“얼른 가 봐.”“조심해서 가요.”임재욱은 조수석에 앉아 한결 가벼워진 그녀의 뒷모습이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보고서야 시선을 거두고 집으로 향하려고 했다.가는 길에 갑자기 신시연으로부터 전화가 걸려 왔다.“오빠, 배가 너무 아파요.”...병실로 돌아와 보니 이채련은 아직 자고 있지 않았다.침대에 멍하니 누워 재미가 일도 없는 예능 프로를 보고 있었다.유시아가 문을 밀고 들어오는 것을 보고 이채련은 놀라고도 기뻤다.“시아야, 늦은 시간에 웬일이야?”유시아
쇼핑은 늘 설레는 일이다.유시아는 자기 취향대로 화실 장식품으로 쓰일 공예품을 골랐다.이윽고 임재욱은 또 유시아를 데리고 근처에 있는 매점으로 향했다.지난번에 두 사람은 함께 쇼핑하면서 많은 옷을 샀었지만, 신서현 부모님께 갑작스러운 상황이 일어나면서 유시아는 그 모든 옷을 모조리 청소 아주머니에게 줘 버렸다.그때의 아쉬움을 채워주기 위해 임재욱은 또다시 쇼핑하려고 한 것이다.게다가 다음 주면 대우 그룹 상장 20주년이다.정식적인 석상에 모습을 드러낼 때 유시아를 자기 아내 신분으로 남에게 소개해 주고 싶어 이브닝 파티에 어울릴만한 드레스와 신발을 살 예정이다.드레스는 그럭저럭 큰마음이 가지 않았는데, 유시아는 그 신발이 마음에 들었다.은백색의 하이힐로 예쁜 보석들로 가득 박혀 있어 매점 불빛 아래서 유난히 반짝이는 것이 신데렐라 동화에 나올 법한 유리 구두 같았다.매점 직원은 유시아가 마음에 들어 하는 것을 보고 바로 다가왔다.“손님 안목이 참 좋으시네요. 이 제품은 저희 디자이너 선생님의 최신 디자인으로 지금 딱 한 켤레만 있습니다. 만약 이 신발을 신고 나가신다면...”임재욱은 갑자기 직원의 말을 끊어버렸다.“이미 결혼했고요. 이 사람은 제 아내예요.”유시아는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들었는데, 자기를 바라보며 웃고 있는 그를 보고서 따라서 웃었다.“맞아요. 이 사람이 제 남편이에요.”매점 직원은 멍하니 있다가 바로 얼굴에 미소를 머금고 베스트 쇼핑 가이드다운 실력을 드러냈다.“어머, 어쩐지 너무 어울리신다 했어요...”직원의 칭찬에 두 사람은 얼굴에 웃음꽃이 피어났다.이윽고 매점 직원은 분위기를 파악하며 유리 구두에 대해 더욱 디테일한 설명을 첨부하기 시작했다.“이 제품의 새끼 양가죽으로 만들어졌으므로 착용감이 엄청 좋으실 거예요. 하루 종일 신고 걸으셔도 전혀 문제가 없다는 말이죠. 게다가 우리 디자이너 선생님이 즉흥으로 만들어내신 작품이라 절대 똑같은 제품을 시중에서 보실 수 없을 거예요.”한 켤레일 뿐만 아니라 사이
한서준은 눈살을 찌푸리며 되물었다.“내가 뭐?”“한서준 씨는 당당해요?”유시아는 바로 질문을 질문으로 돌려주었다.“임씨 가문에 접근한 그 의도를 다른 사람들이 모를 것 같아요? 할아버지, 재욱 씨 그리고 나까지 똑똑히 알고 있어요. 청아 씨만이 한서준 씨를 사랑해서 자신을 속이고 있는 거라고요. 그렇게 쭉 모르는 척을 하며 모든 걸 감당하고 있었던 거라고요. 한서준 씨 역시 청아 씨를 이용한 게 아닌가요?”마지막 한 마디에 한서준은 침묵하고 말았다.그렇다. 임청아에게 접근한 이유는 유시아가 ‘스파이’로 움직여 주지 않겠다고 거절했기에 어리석어 보이는 임씨 가문 천금을 노리게 된 것이다.하지만 사람 마음이라는 것은 결국 변하게 되어 있다.임청아 대한 마음은 모략에서 시작했으나 시간의 흐름에 따라 그 마음이 점점 사랑으로 끝을 맺게 된 것이다.늘 밝고 긍정적인 에너지를 띠고 다가왔던 임청아가 어두운 자신의 삶을 밝게 비춰주는 것만 같았다.따라서 한서준은 임청아와 평생을 함께하고 싶다는 마음이 차츰 생기게 된 것이다.임태훈이 반대한다고 하더라도 꼭 자기 곁으로 데리고 오고 싶었다.“청아 씨 지금 몸도 마음도 상처투성이에요.”“만약 청아 씨 행복하게 해 줄 수 없다면 신중하게 생각하고 결정하는 게 좋을 거예요.” 말을 마치고 유시아는 차 문을 밀고 차에서 내려 병원 밖으로 걸어갔다.택시에 오른 유시아는 긴 망설임 끝에 끝내는 더 스케치 화실 주소를 운전 기사에게 알렸다.차는 화실 맞은 편에 세워졌고 유시아는 화실 바로 맞은편에 있는 커피숍으로 들어가 창가 자리에 앉았다.화실 안의 상황을 바로 체크할 수 있고 자신의 정체를 드러내지 않아도 되는 최적의 위치라고 할 수 있다.한참 지나고 나서야 수많은 경호원들이 임태훈을 사이에 두고 화실에서 걸어 나오는 것이 보였다.임태훈은 벤틀리에 올라 강한 기운을 남기고 자리를 떠나버렸다.유시아는 그제야 한시름을 놓고 들고 있던 커피잔을 내려놓고는 바로 화실로 향해 달려갔다.화실 안과 밖은 겉은
전화를 마치고 유시아는 혼자 밖에 없는 휴게실을 보고서 깊은 번뇌에 잠겼다.남을 탓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에 임태훈처럼 막무가내로 어처구니가 없는 노인이 있다는 게 도통 이해가 되지 않았다.임태훈이 끔찍이 여기는 임청아를 유시아가 계단에서 밀어버린 것도 아닌데, 왜 애꿎은 자기 화실을 닫으려고 하는지 알 수 없었다.집안 내부에 문제가 생기면 일단 스스로 반성하는 법부터 배워야 하는데, 그게 무엇이든 일단 남한테서 문제를 찾고 있으니, 권력을 믿고 사람을 업신여기는 것이 분명했다.유시아는 생각하면 할수록 머리가 복잡해졌고 불안함도 점점 커졌다.지금 운영하고 있는 더 스케치 화실도 용재휘가 먼저 시작한 것인데, 그와 더불어 학생들까지 모두 함께 넘겨주었는데, 만약 이대로 화실을 망쳐버린다면 용재휘에게 너무 미안할 것 같았다.임재욱과 임태훈이 어느 정도로 얘기했는지 알 수 없었지만 화실이 그들 싸움의 희생물이 되지 않기만을 바랄 뿐이었다.임재욱에게 전화를 걸어 상황을 묻고 싶었으나 감히 그럴 용기가 없어 일단 지켜보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떨리는 심장을 부여잡은 채로.그렇게 한참이나 심장을 조이고 있었지만, 걸려 오는 전화는 없었다.유시아는 일이 어느 정도 망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학생 채팅방에 오늘 갑자기 일이 있다며 수업을 뒤로 미룬다고 알렸다.언제 다시 수업을 시작할지는 소식을 기다리라며 덧붙이기까지 했다.톡을 보내고서 유시아는 더 이상 핸드폰을 보지 않고 바로 병원 밖으로 나갔다.그러나 병원 대문을 나오자마자 한서준이 정면에서 오고 있었다.“유시아.”유시아는 고개를 들었고 그를 보게 되는 순간 정신이 아찔해 났다.직감이 알려주건대, 절대 좋은 일이 없다는 것이다.화실의 생존 여부도 알 수 없는 상황에서 그의 심기까지 건드리고 싶지 않았다.한서준은 쉽사리 유시아를 놓아 주지 않았고 손을 내밀어 유시아의 손목을 꼭 잡았다.“물어볼 일이 있어.”말하면서 근처에 있는 지프차를 가리켰다.“차에 타서 얘기 하자.”“그쪽이랑 할 말
유시아는 그 말을 이어받지 않고 집사의 바람대로 타이르기 시작했다.“몸이 아직 많이 허약해요. 먹고 싶지 않아도 억지로라도 좀 먹어야 하거든요. 일이 어찌 됐든 일단 건강부터 챙겨야 해요.”임청아 그 말을 듣고서 쓴웃음을 지었다.“건강 회복되면 할아버지한테 잡혀가서 집에 감금되는 것밖에 더 있겠어요?”“그렇게 생각하지 말아요.”유시아는 눈살을 찌푸리며 덧붙였다.“어찌 됐든 할아버지 마음은 한결같을 거예요. 청아 씨를 아끼고 사랑하는 거요. 서로 대화가 필요한 거 같아요. 서로 터놓고 얘기하고 나면 오해가 풀리고 마음도 풀리면서 모든 게 원점으로 돌아갈 수 있을 거예요.”임청아의 입가에 피식 웃음이 새어 나왔다.“저도 그렇게 생각했었어요. 아이 낳고 나면 할아버지도 서준이도 원한을 내려놓고 행복만 할 수 있다고요.”“근데 이렇게 몸도 아끼지 않고 점점 더 막무가내로 나가면 두 사람 사이의 원한은 점점 더 짙어질 거예요.”유시아는 말하면서 도우미 손에서 보신탕을 가져와 천천히 불며 임청아의 입가로 가져갔다.임청아는 생각 밖으로 무척이나 순순하게 유시아의 말을 따랐고 그녀의 말에 이치가 있는 것 같아 조용히 보신탕을 받아 마셨다.도우미와 집사는 두 사람이 티키타카 서로 말을 주고받는 것을 보고 서서히 마음이 놓였다.임청아가 뭐라도 먹기 시작하여 자기도 모르게 한시름을 놓으며 자리까지 비켜주려고 했다.두 사람이 마음 편히 말할 수 없을까 봐 눈치껏 일어서려는 것이다.“작은 사모님, 아가씨와 천천히 얘기하고 계세요. 밖에 나가 있을 테니 필요한 거 있으시면 언제든지 부르시고요.”“네, 가보세요.”도우미 일행이 나오고 나서야 유시아는 본론으로 들어갔다.“한서준 씨는 알고 있어요?”임청아는 고개를 저으며 쓴웃음을 지었다.“그런다고 숨겨질 일도 아니잖아요.”요즘 임태훈뿐만 아니라 한서준도 눈을 부라리고 임청아를 찾고 있었다.두 사람의 시선을 피하고자 아파트도 호텔도 들어갈 수 없었고 버려진 강아지처럼 유시아 화실에 몸을 숨기고 지낸 것
임청아 이름 석 자가 임재욱의 입에서 나오자, 유시아는 순간 청천벽력을 맞는 것만 같았다.심지어 지금까지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으니 말이다.한참 지나고 나서야 겨우 떨리는 심장을 부여잡고 물었다.“청아 씨가 왜 병원에 있는 거죠?”임청아는 임신한 것을 알고 매사에 조심하며 걸음 하나도 천천히 옮겼었다.게다가 해외에 있는 친구와 연락하여 해외로 떠날 준비까지 마쳤다고 했었다.그런데 관건이 되는 순간에 계단에서 굴러떨어졌다고?“할아버지를 너무 쉽게 생각한 거 아니야?”임재욱은 말하면서 차갑게 웃었다.“네 화실에 청아 숨겨 놓았잖아. 할아버지께서 그걸 과연 모르고 있었을 것 같아? 오늘 화실로 청아 데리러 갔었는데, 가지 않겠다고 청아가 하도 우기는 바람에 억지로 묶어서라도 데리고 가겠다며 서로 실랑이를 벌이다가 계단에서 굴러떨어진 거야.”그렇다면 아이를 유산했을지도 모른다.임태훈의 습관에 따라 생각해 본다면 이 화살은 결국 유시아에게로 돌아오게 되어 있다.임재욱이 그렇게 경고하였건만 유시아는 마음이 약한 사람이었다.약해지는 마음에 언젠가는 구렁이에 빠지게 될 날이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날이 바로 오늘 일 줄은 몰랐다. 임재욱은 한숨을 내쉬며 꾸짖고 싶은 마음을 겨우 억눌렀다.“병원 주소 보내줄 테니 얼른 가 봐.”말을 마치고 임재욱은 전화를 끊어버렸다.얼마 지나지 않아 메시지 한 통이 도착했고 운전 기사에게 새로운 목적지를 알려주었다.같은 시각, 병원 안에서.임청아는 이미 수술을 마쳤고 일반 병실로 옮겨져 있었다.이미 가문의 집사와 간호인이 옆에 있었고 병실 문 앞에는 임태훈이 보낸 경호원도 있었다.다만 경호원이 경계해야 할 상대는 유시아가 아니라 한서준이다.따라서 유시아는 별다른 막힘없이 바로 병실 안으로 들어갔다.병상에 누워 있는 임청아는 얼굴에 핏기 하나 없었고 초점을 잃은 두 눈으로 멍하니 천장만 바라보고 있었다.불과 하룻밤 사이에 모든 활력을 잃어버린 모습이었다.집사는 자리에서 일어서서 아주 공손하게 유시아에
조금 전까지 허겁지겁 밥을 먹고 있던 임재욱은 멈칫거리고 말았다.이윽고 고개를 천천히 들어 웃는 듯 마는 듯한 얼굴로 유시아를 바라보며 물었다.“별거하자는 뜻이야?”“그렇게 생각해도 좋아요.”유시아는 숟가락을 내려놓고 머리가 아픈 듯 이리저리 만지작거렸다.“지금 이러한 상황에서 이러는 것도 좋을 것 같아요. 나한테 신경 쓰지 않아도 되고 그 시간으로 시연이한테 집중해도 되잖아요. 나도 마침 어머님 곁에 좀 있어드리고... 서로에게 지금 이게 최우선인 것 같아요.”임재욱은 숨을 깊이 들이마시고서 낙담한 모습으로 말했다.“그래. 네가 좋다고 하면 그게 좋은 거겠지. 그렇게 하자.”말을 마치고 그는 계속 밥을 먹었다.유시아는 그런 그를 바라보고서 아련하게 웃고는 바로 자리에서 일어나 위층으로 올라갔다.이튿날 아침, 유시아는 임재욱이 출근하고 나서야 침대에서 일어났다.일상복 몇 벌과 일상용품을 챙겨 작은 트렁크 안에 놓고 바로 이채련한테 가려고 했다.허씨 아주머니는 트렁크를 들고 내려오는 유시아의 모습에 살짝 당황한 모습이었다.“사모님, 어디 가시는 거예요? 설마... 가출하려는 건 아니죠?”유시아는 허씨 아주머니를 향해 웃었다.“아니에요. 친척분이 좀 위독하신데 제가 옆에서 좀 챙겨드리고 싶어서 가는 거예요. 얼마 걸리지 않을 거고 곧 돌아올 수 있을 거예요.”말을 마치고 트렁크를 들고서 집을 나섰다.이채련이 지내고 있는 병실이 VIP 병실로 널찍한 객실까지 갖춰져 있다.유시아는 간호사에게 접이식 침대와 이불을 요구했고 간단히 정리하고 나니 잘 자리가 아늑하게 마련되었다.이채련은 더 이상 침대에서 내려올 수 없어 하루 24시간을 침대 위에서 보내고 있다.얼굴도 하도 여위어 본연의 모습을 점점 잃어가고 있었다.그전에도 유시아는 이채련에게 이곳에서 며칠 동안 함께 지내고 싶다는 의사를 밝힌 적이 있지만 이채련은 행여나 자기로 인해 두 사람 사이에 흠이 생기게 될까 봐 동의하지 않았었다.지금 이 자리까지 오게 된 것만으로도 갖은 풍
임재욱은 핸들을 꼭 움켜쥐고서 앞만 바라보았으나 두 눈에는 고통과 망연함이 가득했다.“시연이 해외에 있을 때, 몹쓸 짓을 당했어. 한번이 아니라 여러 번이나. 그래서 우울증에 걸리게 된 거야.”유시아는 두 눈이 휘둥그레지면서 볼륨까지 높아졌다.“어머, 어떡해요!”평소에 신시연에 대해 좋은 마음을 가지고 있었던 건 아니지만 그 소식을 듣게 되는 순간 심장이 덜컹 내려앉기는 했다.여자에게 있어서 그런 몹쓸 짓을 당한다는 건 치명적인 타격과 치욕이 아닐 수가 없다.게다가 부모님의 일까지 더해지니 조금 전 식당에서 봤던 신시연의 모습이 이해되었다.임재욱은 말하면서 후회와 자책하는 빛을 드러냈다.“그렇게 가고 싶지 않다는 시연이를 내가 억지로 보낸 거야.”그때는 모든 걸 너무 쉽게 생각했었다.낯선 곳으로 가서 마음을 가다듬고 학업에만 집중하면 자연스레 모든 걸 잊고 새로운 삶을 그려나갈 수 있으리라 믿었다.하지만 임재욱이 잊고 있었던 부분이 하나 있는데, 그건 바로 신시연이 이제 갓 20살을 넘은 꽃다운 여자아이라는 것이다.해외에는 불안정 요소도 많고 미처 생각지 못하는 위험도 많다.게다가 젊은 나이라 자칫 잘못하면 그릇된 길로 들어서기도 아주 위험하고 말이다.신시연 곁에 사람을 함께 보내긴 했지만 그렇다고 하여 24시간 동안 찰싹 달라붙어 다닐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유시아와 결혼하고 나서 신혼에 푹 빠져 있는 동안 신시연에게 더 많은 관심을 주지 않았기에 이러한 일이 일어난 게 아닌지 죄책감이 들기도 했다.지금 임재욱은 신서현에게 미안할 뿐이다. 하나뿐인 동생을 이 지경으로 만들었으니.하지만 그가 말한 본의와 달리 듣고 있는 유시아는 또 다른 뜻으로 받아들이게 되어 있다.유시아의 기억으로는 신시연이 해외로 보내진 이유는 이러하다.그때 신시연은 정운시 대학교 교내 사이트에 유시아를 먹칠하는 게시글을 올리면서 유시아로 하여금 학업을 이어갈 수도 수업을 들을 수도 없게 악한 상황을 만들었었다.마침 그 일을 소현우가 알게 되면서 유시아에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