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을 마친 임재욱은 전화를 끊고 즉시 차를 돌려 병원 방향으로 달려왔다.한낮이어서 그런지 오는 길 내내 차가 막혔다.임재욱은 입술을 바짝 오므렸고 잔뜩 긴장한 듯 턱도 조이고 있었다. 수려한 그 이목구비는 서리가 덮인 듯 차가운 기운을 뿜고 있었다.‘이제 겨우 이틀밖에 안 됐는데... 벌써 그 용재휘랑 어울리러 갔다고? 유시아, 너 정말 능력 있는 여자네.’병원에 도착하여 건물 입구에 있을 때, 임재욱은 그곳에서 기다리고 있는 용재휘를 발견했다.그는 파란색 패딩 차림을 한 채 싸울 준비가 되었다는 듯 주머니에 두 손을 꽂고 서 있었다.임재욱은 그런 용재휘를 보고 저도 모르게 웃음이 튀어나왔다.“시아는요?”그러자 용재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다짜고짜 임재욱의 얼굴을 향해 주먹을 휘둘렀다.충동적인 그를 보며 임재욱은 입가에 웃음기를 띠었다.이내 임재욱은 손을 뻗어 용재휘의 손목을 잡고 힘껏 뒤로 비틀었다.곧이어 들리는 “우두둑”하는 소리.“아...”용재휘의 얼굴이 심한 통증 때문에 일그러졌다.안색은 창백해졌고 이마에는 식은땀이 흘렀다.“임재욱, 도대체 뭘 어쩌겠다는 거야? 응?”“내가 뭘 어떻게 하든 너는 물을 자격도, 이 일에 참견할 자격도 없어!”임재욱은 냉랭하게 비웃으며 고통에 표정이 일그러진 용재휘에게 다가갔다.“오히려 내가 묻고 싶어. 시아한테 너는 뭔데? 남자친구라도 돼? 쯧쯧. 시아도 너같이 쓸모없는 놈은 눈에 들지도 않을 텐데.”“라이벌”에게 수모를 당하자, 자존심이 강했던 용재휘는 순간 자제하지 못하고 되받아쳤다.“한 여자를 괴롭히고, 억지로 자기 곁에 남겨두고... 임재욱, 너도 참 능력 있다. 성취감이 아주 대단하겠어?”이를 들은 임재욱이 비웃었다.“너희 같은 젊은 애들이나 순수한 사랑 같은 거 좋아하겠지. 어른들은 말이야, 좋아하면 반드시 얻어야 하는 게 능력이야!”이렇게 말하며 임재욱은 용재휘를 계단에서 힘껏 밀어버렸다.“재휘 씨!”막 옆문에서 나온 유시아가 이 광경을 보고 깜짝 놀라 거의 본능
그는 유시아의 신이고 그녀의 주인이다.그래서 유시아는 모욕이든, 고문이든, 심지어는 감옥살이일지라도 임재욱이 준 것이라면 뭐든 좋아할 것이다.유시아는 천천히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용재휘와 마주했다.“네, 맞아요! 재휘 씨, 저 이런 사람이에요. 제가 천하다고 생각해도 괜찮습니다.”말을 마치고 그녀는 고개를 돌려 임재욱을 바라보았다. 심지어 입가에 미소를 띤 채 말이다.“재욱 씨, 우리 집에 가요.”“응.”임재욱은 순종스러운 유시아의 모습에 만족하며 그녀의 작은 손을 잡고 계단을 내려갔다.한쪽 다리가 부러졌는지 용재휘는 전혀 움직일 수 없었다.유시아가 임재욱에게 끌려 계단에서 내려오는 것을 보며 용재휘는 마음속이 온통 잿빛이 된 것만 같았다.그는 유시아를 사랑했고 그녀에게 근심 걱정 없는 삶을 선물해주고 싶었다. 하지만 현재의 용재휘는 그녀를 구할 능력이 없었고 그저 임재욱에게 수모를 당하는 모습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마이바흐의 조수석이 열렸고, 막 올라타려던 유시아는 뒤에서 누군가가 세게 미는 바람에 뒷좌석에 엎어지고 말았다.곧이어 ‘쾅’하는 차 문 닫히는 소리가 들려왔다.임재욱은 냉랭한 얼굴로 다른 쪽 차 문에서 올라 웃는 듯 아닌 듯한 말투로 말했다.“이성 관계가 참 좋나 봐. 여기저기 남자도 많네. 소현우 같은 엘리트 뿐만 아니라 용재휘 같은 열혈 청년까지... 넌 나를 참 우습게 보는구나?”“아니에요, 재욱 씨.”유시아은 창백한 얼굴로 그에게 해명했다.“재욱 씨 말 듣고 아저씨한테 물건 전달하러 왔었어요. 그리고 돌아가던 도중 엘리베이터에서 기절했고 용재휘 씨가 저를 발견하고 링거를 놔준 거예요...”링거를 맞을 때 그녀는 자신의 핸드폰 벨 소리를 얼떨결에 들었지만 일어나지 못했다.그렇게 의식이 완전히 회복한 뒤에는 자신이 너무 오래 밖에 나온 탓에 임재욱이 기분 나빠할까 봐 바로 주삿바늘을 뽑고 나온 것이었다. 그런데 병원 건물 입구에서 두 남자가 싸우는 것을 보게 될 줄은 전혀 생각지도 못했다.곧 고개를 숙인 임
그 말에 유시아는 눈살을 찌푸리며 다시 젓가락을 집어 한 입 한 입 먹어야 했다.하지만 가슴이 너무 꽉 막힌 듯한 기분이 들어 눈앞의 진수성찬도 독이 된 듯 삼키기가 힘들었다.보다 못한 임재욱이 자리에서 일어나 말했다.“먹고 싶지 않으면 먹지 마! 음식 낭비하지 말고.”이렇게 말하며 그는 성큼성큼 밖으로 걸어갔다.유시아는 재빨리 따라가 그의 차에 올라탔다.“재욱 씨, 우리 집에 가요?”“아니.”임재욱은 그녀를 힐끗 보고 차에 시동을 걸더니 한 마디 툭 던졌다.“너랑 소현우가 살던 집으로 갈 거야. 네 물건 가져와야 할 것 아니야. 겸사겸사 그 개도 좀 처리하고!”유시아는 갑자기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소현우가 그녀에게 준 다이아몬드 반지를 지키지 못한 건 물론, 이제 구름이도 위태로워졌다.유시아는 정말 어느 날 소현우가 그녀에게 남겨 놓은 모든 것들, 그 아름다웠던 추억까지 포함해 전부 임재욱에 의해 깨끗이 씻겨져 버릴까 봐 두려웠다.자기를 줄곧 사랑해줬던 남자에 대한 기억이 조금도 남지 않는다면...이것은 소현우에게나 유시아에게나, 모두에게 큰 슬픔이 될 것이다.임재욱은 백미러로 그녀를 힐끗 쳐다보며 피식 냉소했다.“왜? 섭섭해?”“아니요...”억지로 웃는 유시아의 모습이 참 안쓰러웠다.“재욱 씨가 원한다면 그렇게 해야죠. 전 재욱 씨가 기쁘면 좋겠어요!”진심이 담긴 말이 아니었지만, 임재욱은 입꼬리가 하늘로 승천할 듯했다.사랑을 받아서가 아니다. 그는 오로지 유시아를 정복했다는 생각에 기뻤다!반월 별장 단지 입구에 이르러 유시아가 내리자 임재욱도 함께 차에서 내렸다.“같이 가줄게.”“네.”뒤이어 유시아는 그를 데리고 별장 안으로 걸어갔다.비밀번호를 입력하여 문을 열리자 익숙한 기운이 감돌았다.오래 살았다 보니 유시아의 물건도 많아졌다. 게다가 혼자 살다 보니 조금 편해져서 소파 위에는 그녀의 잠옷이 놓여 있었고 테이블 위에는 머리끈, 머리핀과 반쯤 먹은 간식들이 놓여 있었다.구름이가 인기척을 듣고 즉시 그들
물론 있었다!그래서 그 칼로 그녀는 임재욱의 심장이나 목구멍이 아닌 아랫배를 찔렀다.애초에 임재욱이 유시아를 매우 신뢰했기 때문에, 그녀는 그를 단칼에 절명할 기회가 있었다!하지만 이제 와 말해봤자 아무 소용이 없을 것 같았다.어차피 임재욱은 믿지 않을 테니 말이다. 그는 여태껏 그녀를 믿은 적이 없었다.그때의 칼부림 사건이든 신서현의 일이든, 유시아의 해명은 늘 헛수고일 뿐이었다!유시아는 고개를 숙이고 맛있게 사료를 먹고 있는 구름이를 보다가 문득 생각했다.‘아마 구름이는 절대 모르겠지. 이게 최후의 만찬이라는걸...’임재욱은 쪼그려 앉아있는 그 작은 몸집을 보고 불현듯 마음이 아파왔다.“나중에 시간이 나면, 고양이 한 마리 사서 줄게.”그는 고양이를 좋아했다. 왜냐하면 장난기 많은 강아지와 달리 고양이는 온순하고 약삭빠르기 때문이다.학생이던 시절, 그는 길고양이 몇 마리에게 먹이를 주던 적이 있었다. 그러다 나중에 유시아에게 발견되었고 그녀는 자진해서 말린 생선을 사며 그와 함께 먹이를 주었다. 그 뒤로 화가 난 임재욱은 다시는 그 길고양이들을 돌보지 않았다.그의 말을 들은 유시아는 구름이에게 우유를 부어주며 고개도 들지 않은 채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알겠어요!”고양이는 말할 것도 없고, 설령 그가 준 것이 가시덤불이라 해도 유시아는 기꺼이 손에 힘껏 쥐어 피를 철철 흘릴 것이다!물건을 챙긴 후, 임재욱은 유시아를 데리고 돌아오며 고집을 부리는 구름이도 트렁크에 쑤셔 넣으라 했다. 다시는 도망가지 못하도록 말이다.소현우가 유시아에게 남긴 모든 것들이 임재욱은 눈에 거슬렸다.‘빨리 저것들 다 처리해야지!’유시아는 난처한 듯 그를 쳐다보더니 입술을 살짝 오므리고 순순히 구름이를 트렁크에 넣었다. 그러고는 구름이의 귀를 어루만져준 후에야 트렁크 뚜껑을 닫고 조수석에 올라탔다.그렇게 임재욱은 차를 몰아 그린레이크로 돌아왔다. 그는 차에서 내리지 않고 유시아를 도와 물건을 내려준 뒤 곧 차를 몰아 떠났다.백미러를 통해 임재욱은
임재욱은 수화기를 들고 잠시 망설이다가 말했다.“들어오게 하세요.” 몇 분 후에 마침내 사무실 문이 울렸다.임재욱은 키보드를 두드리던 손을 살짝 멈칫하더니 입을 열었다.“들어오세요.”“대표님.”비서가 문을 열었다.“심하윤 씨께서 도착하셨습니다.”이내 비서가 옆으로 길을 내주었다.심하윤은 밝은 갈색 캐시미어 코트를 입고 있었고, 손에는 서류 봉투를 들고 있었다. 최근 줄곧 병원에서 지낸 탓인지 오밀조밀 예뻤던 그녀의 얼굴은 유난히 초췌하고 지저분해 보였다. 책상 뒤의 임재욱을 보고 심하윤은 고개를 더욱 숙였지만, 어쩔 수 없이 울며 겨자 먹기로 그를 향해 걸어갔다.“대표님...”그녀는 자신의 책상 위에 서류 봉투를 가져다 놓고 마치 대단한 용기를 낸 것처럼 말했다.“이건 대표님께서 시아에게 부탁해 저희 아버지께 전달한 것입니다. 다시 돌려드릴 테니 시아를 제발 놔주세요. 시아는 줄곧 이 일과 아무런 관계가 없었어요!”유시아의 일에 대해 그녀는 이미 용재휘에게서 전해 들은 뒤였다.비록 심씨 가문이 현재 대우 그룹의 도움이 필요한 건 맞지만, 그녀는 유시아의 고통을 밟고 심씨 가문이 다시 일어나기를 원하지 않았다.서류 봉투는 그녀가 심송학에게서 훔친 것이다. 심하윤은 그것을 다시 임재욱에게 돌려줬다. 거래를 끊고 유시아에게 자유를 되찾아주려고 말이다.이미 3년 동안 감옥살이를 한 유시아가 인생의 가장 아름다운 시절을 임재욱이라는 인간쓰레기에게 전부 낭비하도록 내버려 둘 수는 없다!임재욱은 이를 보고 피식 웃었다.“심하윤 씨가 이러는 거 가족들도 알아요?”“가족들은...”심하윤은 잠시 머뭇거리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이건 어차피 상관하실 필요 없습니다. 물건은 이미 돌려드렸으니 저희 심씨 가문은 대표님께 빚진 게 없습니다. 물론 시아도 빚진 건 없고요. 대표님, 제발 시아를 놓아주세요...”“제가 선물한 걸 다시 돌려주는 법이 어디 있나요!”임재욱은 계약서를 가리키며 입가에 조롱이 섞인 미소를 띠었다.“이건 도로 다시 가져
임재욱은 그녀의 뒷모습을 보고 오랫동안 움직이지 않았다.머릿속에는 조금 전 심하윤이 한 말이 여전히 울려 퍼지고 있다.“시아 꼭 잘 대해줘요...”임재욱 또한 그녀에게 조금 더 잘해줄 타산이었다. 그는 모든 것을 유시아에게 줄 수 있었다. 자신의 목숨을 포함해서 말이다.하지만 유일하게 줄 수 없는 것이 자유였다.왜냐하면 유시아가 일단 자유로워지기만 하면 그녀를 더 이상 사랑할 수 없기 때문이다.그렇게 되면 유시아는 떠날 것이고 임재욱의 삶에서 사라져 다른 사람과 사랑에 빠질지도 모른다.마치 한 마리의 새와 같이, 그녀는 임재욱이 일단 손을 놓기만 하면 멀리 훨훨 날아갈 것이다. 평생 뒤도 돌아보지 않을 것이다!예전에는 소현우, 지금은 용재휘...임재욱은 이 두 남자가 유시아의 마음속에 자기보다 더욱 많은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고 생각했다.저녁 무렵이 되어서야 임재욱은 차를 몰고 집으로 돌아갔다.1층 홀은 오직 허씨 아주머니만이 몇 명의 하인들에게 일을 지휘하고 있을 뿐 매우 조용했다.내일이 바로 정월 대보름날이다. 허씨 아주머니는 미리 꽃집에 가서 신선한 꽃들을 사와 거실을 예쁘게 꾸몄다. 그래서인지 거실에는 명절 분위기가 물씬 풍겼다.임재욱은 입고 있던 외투를 벗고는 한쪽 소파 등받이에 팔을 걸치고 앉아 물었다.“시아는요?”허씨 아주머니가 대답했다.“시아 씨는 저녁을 먹고 바로 위층으로 올라가 쉬고 있습니다!”“아, 네.”곧 임재욱은 빠른 걸음으로 위층으로 향했다.2층은 1층보다 더 조용했는데 그야말로 쥐죽은 듯이 고요하다고 표현할 수 있었다.침실 문을 열고 그가 안으로 들어갔다. 슬리퍼가 얇은 재질이라 카펫에 닿아도 아무런 소리가 나지 않았다.유시아는 그들의 큰 침대 위에 누워있었다. 가냘픈 몸체를 두꺼운 이불 아래에 감춘 채, 검은 머리카락만이 베개 옆으로 흘러나왔다. 윤기 나는 말꼬리와 같아 보였다.임재욱이 곁에 있을 때 유시아는 전혀 잠을 자지 못해 온종일 정신이 없었다. 그래서 딱 보았을 때 병에 걸린 고양이 같
“그런 거 아니에요.”유시아는 연신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부정하기 바빴다.“그냥 좀 불편해서 그러는 거예요...”임재욱은 손을 그녀의 베개 위에 놓은 채 뚫어지라 바라보았다.그러고는 한참 지나고 나서야 다시 입을 열었다.웃는 듯 마는듯한 모습과 더불어 비아냥거리는 말투로.“요즘 심하윤한테서 전화 왔었어? 괜찮데? 빚쟁이들은 다시 찾아오지 않았고? 난 도무지 상상이 되지 않아. 공주님처럼 편하게 살다가 갑자기 바닥으로 훅 떨어진 심하윤의 꼴을. 얼마나 처량하고 비참할까?”유시아는 입술을 꽉 사리물었다. 숨 막히는 말과 행동에 얼굴빛도 점점 어두워지고 있다.늘 이렇듯 임재욱은 유시아에 대해서 너무 잘 알고 있다. 어떻게 하면 그녀를 벼랑 끝으로 몰아세울 수 있는지, 어떻게 하면 그녀의 숨통을 조일 수 있는지.유시아를 자기 곁에 둠으로써 그가 얻을 수 있는 건 ‘쾌락’이다.마치 애완견처럼 임재욱한테 충성을 다하는 것이 유시아의 가치가 아닌가 싶다.유시아는 모든 걸 내려놓은 채 그에게로 온 것이다.하지만 임재욱은 단지 그것만으로 만족하지 않은 듯 계속 유시아를 아프게 하고 있다.임재욱으로 인해 용재휘가 다치고 임재욱으로 인해 구름이가 곁을 떠나야만 했음에도 불구하고.유시아는 지금 두렵기만 하다.심씨 가문이 파산 날까 봐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이 자기로 인해 다치게 될까 봐.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유시아는 떨리는 손으로 그의 목을 천천히 감싸안았다.그리고 차가운 입술로 천천히 다가가 그의 입술을 부딪혔다.입술이 닿자마자 임재욱은 순간 불타오르기 시작했다. 이에 유시아는 더 이상 망설이지 않고 한 손으로 그의 목을 감싸안은 채 다른 한 손으로 그의 옷 단추를 닥치는 대로 풀어 헤쳤다.맨 정신에 이러한 행동을 취하는 건 이번이 처음이다.수치스러움에 유시아는 얼굴이 당장 터질 것만 같았다. 단추를 풀고 있는 손가락 끝도 어찌나 떨리는지 아무리 애를 써도 단추가 풀리지 않았다.이에 임재욱은 그만 참지 못한 채 혼자 손을 뻗어 단추를 뜯
정유라가 아직 해외에 있다는 말을 듣고 임태훈은 순간 놀라워 마지 못했다.“유리가 아직 해외에 있다니 그게 무슨 소리야?”함께 해외로 떠났었던 두 사람이다.임재욱이 귀국했을 때 임태훈은 아내인 정유라도 당연히 함께 돌아온 줄 알았다.두 사람의 사이가 다시 좋아지기 시작하면서 응당 같이 지내고 있으리라 생각했다.근데 손주며느리와 증손주까지 해외에 두고 혼자서 돌아올 줄은 미처 생각지도 못했다.그 말을 듣고 나서 가만히 생각해 보니 슬슬 퍼즐이 맞혀지기는 했다.‘그래. 귀국했으면 응당 집으로 찾아왔을 건데 말이지.’임태훈에게 있어서 정유라는 더없이 착하고 바른 이미지를 가진 손주며느리이다.귀국하자마자 선물을 들고 집안 어른들에게 인사하러 올 것인데, 아무리 기다려도 오지 않았다.속으로 이상하다고 생각하고 있었으나 그동안 임청하의 일로 하도 정신이 없어서 미처 신경을 쓰지 못한 것이다.해외에 두고 온 것으로 모자라서 덤덤하기 그지없는 임재욱의 말투에 임태훈은 화가 더욱 치밀어 올랐다.“유라 혼자 해외에 두고 너 혼자 돌아왔단 말이냐? 같이 있어 주지는 못할망정 왜 혼자 기어들어 오고 난리야?”“제가 돌아오지 않으면 대우 그룹은 누가 나서서 챙기나요? 할아버지께서 직접 출근이라도 하시려는 거예요?”질문을 질문으로 돌려주는 여유와 더불어 임재욱은 피식 웃으며 덧붙였다.“그리고 유라는 홀몸이 아니잖아요. 해외에서 한 번 들어오려면 비행기도 오래 타야 하고 힘들어해요. 그래서 해외에 있는 요양 센터로 보냈어요. 편히 쉴 수 있게끔. 환경도 좋고 조건도 좋고 의료 자원까지 충족해서 정운시보다 훨씬 좋거든요.”임태훈은 본래 경계심이 많은 편이다.임재욱의 말을 듣고 난 뒤 그는 순간 이상함을 감지하고 대뜸 소리쳤다.“아니야! 너 지금 거짓말하고 있는 것 같은데. 만약 네가 말한 대로라면 유라가 집으로 연락하지 않을 리가 없어. 그러고 보니 유라랑 통화한 지도 꽤 되는 것 같은데, 너 도대체 뭐 하고 다니는 거야?”귀가 잘 들리지 않는 임태훈은
늦은 밤, 유시아의 카카오톡을 받았을 때 임재욱은 병원에 있었다.신시연은 도우미의 도움을 받으며 진료실에서 여러 검사를 받았고 그동안에 임재욱은 밖에서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늦은 밤의 사립 병원이라 사람이 그리 많지 않았다.당직을 서는 의사 선생님과 간호사 외에 거의 사람이 없이 무척이나 쓸쓸해 보였다.임재욱은 복도를 한참이나 누비다가 의자에 걸터앉았다.유시아를 병원으로 바래다주고 돌아서는 길에 신시연의 전화를 받고서 오게 된 것이다.배가 아프다고. 당장이라도 죽을 듯이 아프다고.신시연은 며칠 전에 병원에서 여러 번 신체검사를 받았으나 해외에서 그러한 몹쓸 짓을 당하며 우울증과 부인병이 있는 외에 다른 수치들은 정상 범위 안에 있었다.그 말인즉슨,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것이다.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임재욱은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신시연에게 남은 ‘가족’이라고는 임재욱 하나뿐이니 어찌 됐든 그녀를 잘 지켜야 하는 마음뿐이었다.그 누구에게도 다시는 상처를 받지 않게끔.바로 이러한 마음가짐으로 하여 임재욱은 그녀를 직접 병원까지 데리고 오고 의사 선생님 입에서 아무런 문제도 없다는 확답을 듣고 나야만 마음이 놓일 수 있다.애타게 검사 결과를 기다리고 있는 가운데 핸드폰 알림 소리가 울렸다.유시아가 보낸 카카오톡인데, 내용은 아주 간단했다.[보고 싶어요.]임재욱은 고개를 숙인 채 카톡 내용을 거듭 곱씹으며 유시아 사진으로 되어 있는 그녀의 프로필 사진을 바라보며 입꼬리가 주체하지 못하고 자꾸 올라갔다.‘내가 보고 싶어? 별거한 지 하루 만에 벌써 내가 보고 싶은 거야?’‘우리 시아 이제 제법 솔직하네.’핸드폰을 손에 꼭 쥐고 어떻게 답장할지 생각하고 있을 때 응급실 문이 열렸다.도우미 김향화가 얼굴에 핏기 하나 없는 신시연을 부축하고 걸어 나왔다.신시연은 디자인이 아주 심플한 데님 스커트를 입었고 윤기가 별로 없어 보이는 머리를 돌돌 말아 묶어 올렸다.무척이나 초췌해 보이는 것이 가여운 느낌도 물씬 풍기고 있어 기고만장했던 그
유리 구두를 품속에 꼭 안고 있는 유시아를 보고서 임재욱은 순간 이러한 생각이 들었다.참으로 달래기 쉬운 여자라는 것을.특히 결혼하고 나서 아주 살짝만 잘해주어도 유시아는 아주 오랫동안 기뻐하는 것만 같았다.유시아는 늘 임재욱 앞에만 서면 스스로 자세를 낮추고 자기를 낮은 위치에 놓는 데 습관 되어 있다.임재욱은 고개를 숙여 그녀의 정수리에 뽀뽀했다.“앞으로 매년 생일마다 예쁜 유리 구두 선물해 줄게. 어때?”“좋아요.”유시아는 말하면서 아주 유치하게 그를 향해 손가락을 내밀었다.“손가락 걸고 약속해요. 절대 어기지 않겠다고.”백화점에서 나온 두 사람은 일단 화실로 향했다.새로 구매한 공예품을 적당한 자리에 올려놓고 유시아의 제안으로 이채련의 병원까지 바래다주었다.유시아는 자기가 뱉은 말은 어떻게든 지키는 타입이라 이채련과 이미 약속했으니 꼭 지켜야 했다.하물며 자식도 없는 이체련에게 마지막 이 시간들이 더더욱 외로울 것이다.외부인들이 보기에도 불쌍할 정도로 외롭다.임재욱이 아무리 말해도 소용이 없었고 이채련에게 주어진 시간이 얼마 없다고 하니 마음은 내키지 않았지만 보내주었다.차는 곧 사립 병원 앞에 멈춰 섰고 임재욱은 차에서 내리지 않았다.유시아는 차창에 대고 거듭 강조했다.“유리 구두랑 드레스들 옷방에 고이 모셔두도록 해요. 마구 놓지 말고요.”“알았어.”임재욱은 말하고서 손을 내밀어 그녀의 목을 확 잡고서 찐한 키스를 남기고 나서야 순순히 놓아 주었다.“얼른 가 봐.”“조심해서 가요.”임재욱은 조수석에 앉아 한결 가벼워진 그녀의 뒷모습이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보고서야 시선을 거두고 집으로 향하려고 했다.가는 길에 갑자기 신시연으로부터 전화가 걸려 왔다.“오빠, 배가 너무 아파요.”...병실로 돌아와 보니 이채련은 아직 자고 있지 않았다.침대에 멍하니 누워 재미가 일도 없는 예능 프로를 보고 있었다.유시아가 문을 밀고 들어오는 것을 보고 이채련은 놀라고도 기뻤다.“시아야, 늦은 시간에 웬일이야?”유시아
쇼핑은 늘 설레는 일이다.유시아는 자기 취향대로 화실 장식품으로 쓰일 공예품을 골랐다.이윽고 임재욱은 또 유시아를 데리고 근처에 있는 매점으로 향했다.지난번에 두 사람은 함께 쇼핑하면서 많은 옷을 샀었지만, 신서현 부모님께 갑작스러운 상황이 일어나면서 유시아는 그 모든 옷을 모조리 청소 아주머니에게 줘 버렸다.그때의 아쉬움을 채워주기 위해 임재욱은 또다시 쇼핑하려고 한 것이다.게다가 다음 주면 대우 그룹 상장 20주년이다.정식적인 석상에 모습을 드러낼 때 유시아를 자기 아내 신분으로 남에게 소개해 주고 싶어 이브닝 파티에 어울릴만한 드레스와 신발을 살 예정이다.드레스는 그럭저럭 큰마음이 가지 않았는데, 유시아는 그 신발이 마음에 들었다.은백색의 하이힐로 예쁜 보석들로 가득 박혀 있어 매점 불빛 아래서 유난히 반짝이는 것이 신데렐라 동화에 나올 법한 유리 구두 같았다.매점 직원은 유시아가 마음에 들어 하는 것을 보고 바로 다가왔다.“손님 안목이 참 좋으시네요. 이 제품은 저희 디자이너 선생님의 최신 디자인으로 지금 딱 한 켤레만 있습니다. 만약 이 신발을 신고 나가신다면...”임재욱은 갑자기 직원의 말을 끊어버렸다.“이미 결혼했고요. 이 사람은 제 아내예요.”유시아는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들었는데, 자기를 바라보며 웃고 있는 그를 보고서 따라서 웃었다.“맞아요. 이 사람이 제 남편이에요.”매점 직원은 멍하니 있다가 바로 얼굴에 미소를 머금고 베스트 쇼핑 가이드다운 실력을 드러냈다.“어머, 어쩐지 너무 어울리신다 했어요...”직원의 칭찬에 두 사람은 얼굴에 웃음꽃이 피어났다.이윽고 매점 직원은 분위기를 파악하며 유리 구두에 대해 더욱 디테일한 설명을 첨부하기 시작했다.“이 제품의 새끼 양가죽으로 만들어졌으므로 착용감이 엄청 좋으실 거예요. 하루 종일 신고 걸으셔도 전혀 문제가 없다는 말이죠. 게다가 우리 디자이너 선생님이 즉흥으로 만들어내신 작품이라 절대 똑같은 제품을 시중에서 보실 수 없을 거예요.”한 켤레일 뿐만 아니라 사이
한서준은 눈살을 찌푸리며 되물었다.“내가 뭐?”“한서준 씨는 당당해요?”유시아는 바로 질문을 질문으로 돌려주었다.“임씨 가문에 접근한 그 의도를 다른 사람들이 모를 것 같아요? 할아버지, 재욱 씨 그리고 나까지 똑똑히 알고 있어요. 청아 씨만이 한서준 씨를 사랑해서 자신을 속이고 있는 거라고요. 그렇게 쭉 모르는 척을 하며 모든 걸 감당하고 있었던 거라고요. 한서준 씨 역시 청아 씨를 이용한 게 아닌가요?”마지막 한 마디에 한서준은 침묵하고 말았다.그렇다. 임청아에게 접근한 이유는 유시아가 ‘스파이’로 움직여 주지 않겠다고 거절했기에 어리석어 보이는 임씨 가문 천금을 노리게 된 것이다.하지만 사람 마음이라는 것은 결국 변하게 되어 있다.임청아 대한 마음은 모략에서 시작했으나 시간의 흐름에 따라 그 마음이 점점 사랑으로 끝을 맺게 된 것이다.늘 밝고 긍정적인 에너지를 띠고 다가왔던 임청아가 어두운 자신의 삶을 밝게 비춰주는 것만 같았다.따라서 한서준은 임청아와 평생을 함께하고 싶다는 마음이 차츰 생기게 된 것이다.임태훈이 반대한다고 하더라도 꼭 자기 곁으로 데리고 오고 싶었다.“청아 씨 지금 몸도 마음도 상처투성이에요.”“만약 청아 씨 행복하게 해 줄 수 없다면 신중하게 생각하고 결정하는 게 좋을 거예요.” 말을 마치고 유시아는 차 문을 밀고 차에서 내려 병원 밖으로 걸어갔다.택시에 오른 유시아는 긴 망설임 끝에 끝내는 더 스케치 화실 주소를 운전 기사에게 알렸다.차는 화실 맞은 편에 세워졌고 유시아는 화실 바로 맞은편에 있는 커피숍으로 들어가 창가 자리에 앉았다.화실 안의 상황을 바로 체크할 수 있고 자신의 정체를 드러내지 않아도 되는 최적의 위치라고 할 수 있다.한참 지나고 나서야 수많은 경호원들이 임태훈을 사이에 두고 화실에서 걸어 나오는 것이 보였다.임태훈은 벤틀리에 올라 강한 기운을 남기고 자리를 떠나버렸다.유시아는 그제야 한시름을 놓고 들고 있던 커피잔을 내려놓고는 바로 화실로 향해 달려갔다.화실 안과 밖은 겉은
전화를 마치고 유시아는 혼자 밖에 없는 휴게실을 보고서 깊은 번뇌에 잠겼다.남을 탓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에 임태훈처럼 막무가내로 어처구니가 없는 노인이 있다는 게 도통 이해가 되지 않았다.임태훈이 끔찍이 여기는 임청아를 유시아가 계단에서 밀어버린 것도 아닌데, 왜 애꿎은 자기 화실을 닫으려고 하는지 알 수 없었다.집안 내부에 문제가 생기면 일단 스스로 반성하는 법부터 배워야 하는데, 그게 무엇이든 일단 남한테서 문제를 찾고 있으니, 권력을 믿고 사람을 업신여기는 것이 분명했다.유시아는 생각하면 할수록 머리가 복잡해졌고 불안함도 점점 커졌다.지금 운영하고 있는 더 스케치 화실도 용재휘가 먼저 시작한 것인데, 그와 더불어 학생들까지 모두 함께 넘겨주었는데, 만약 이대로 화실을 망쳐버린다면 용재휘에게 너무 미안할 것 같았다.임재욱과 임태훈이 어느 정도로 얘기했는지 알 수 없었지만 화실이 그들 싸움의 희생물이 되지 않기만을 바랄 뿐이었다.임재욱에게 전화를 걸어 상황을 묻고 싶었으나 감히 그럴 용기가 없어 일단 지켜보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떨리는 심장을 부여잡은 채로.그렇게 한참이나 심장을 조이고 있었지만, 걸려 오는 전화는 없었다.유시아는 일이 어느 정도 망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학생 채팅방에 오늘 갑자기 일이 있다며 수업을 뒤로 미룬다고 알렸다.언제 다시 수업을 시작할지는 소식을 기다리라며 덧붙이기까지 했다.톡을 보내고서 유시아는 더 이상 핸드폰을 보지 않고 바로 병원 밖으로 나갔다.그러나 병원 대문을 나오자마자 한서준이 정면에서 오고 있었다.“유시아.”유시아는 고개를 들었고 그를 보게 되는 순간 정신이 아찔해 났다.직감이 알려주건대, 절대 좋은 일이 없다는 것이다.화실의 생존 여부도 알 수 없는 상황에서 그의 심기까지 건드리고 싶지 않았다.한서준은 쉽사리 유시아를 놓아 주지 않았고 손을 내밀어 유시아의 손목을 꼭 잡았다.“물어볼 일이 있어.”말하면서 근처에 있는 지프차를 가리켰다.“차에 타서 얘기 하자.”“그쪽이랑 할 말
유시아는 그 말을 이어받지 않고 집사의 바람대로 타이르기 시작했다.“몸이 아직 많이 허약해요. 먹고 싶지 않아도 억지로라도 좀 먹어야 하거든요. 일이 어찌 됐든 일단 건강부터 챙겨야 해요.”임청아 그 말을 듣고서 쓴웃음을 지었다.“건강 회복되면 할아버지한테 잡혀가서 집에 감금되는 것밖에 더 있겠어요?”“그렇게 생각하지 말아요.”유시아는 눈살을 찌푸리며 덧붙였다.“어찌 됐든 할아버지 마음은 한결같을 거예요. 청아 씨를 아끼고 사랑하는 거요. 서로 대화가 필요한 거 같아요. 서로 터놓고 얘기하고 나면 오해가 풀리고 마음도 풀리면서 모든 게 원점으로 돌아갈 수 있을 거예요.”임청아의 입가에 피식 웃음이 새어 나왔다.“저도 그렇게 생각했었어요. 아이 낳고 나면 할아버지도 서준이도 원한을 내려놓고 행복만 할 수 있다고요.”“근데 이렇게 몸도 아끼지 않고 점점 더 막무가내로 나가면 두 사람 사이의 원한은 점점 더 짙어질 거예요.”유시아는 말하면서 도우미 손에서 보신탕을 가져와 천천히 불며 임청아의 입가로 가져갔다.임청아는 생각 밖으로 무척이나 순순하게 유시아의 말을 따랐고 그녀의 말에 이치가 있는 것 같아 조용히 보신탕을 받아 마셨다.도우미와 집사는 두 사람이 티키타카 서로 말을 주고받는 것을 보고 서서히 마음이 놓였다.임청아가 뭐라도 먹기 시작하여 자기도 모르게 한시름을 놓으며 자리까지 비켜주려고 했다.두 사람이 마음 편히 말할 수 없을까 봐 눈치껏 일어서려는 것이다.“작은 사모님, 아가씨와 천천히 얘기하고 계세요. 밖에 나가 있을 테니 필요한 거 있으시면 언제든지 부르시고요.”“네, 가보세요.”도우미 일행이 나오고 나서야 유시아는 본론으로 들어갔다.“한서준 씨는 알고 있어요?”임청아는 고개를 저으며 쓴웃음을 지었다.“그런다고 숨겨질 일도 아니잖아요.”요즘 임태훈뿐만 아니라 한서준도 눈을 부라리고 임청아를 찾고 있었다.두 사람의 시선을 피하고자 아파트도 호텔도 들어갈 수 없었고 버려진 강아지처럼 유시아 화실에 몸을 숨기고 지낸 것
임청아 이름 석 자가 임재욱의 입에서 나오자, 유시아는 순간 청천벽력을 맞는 것만 같았다.심지어 지금까지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으니 말이다.한참 지나고 나서야 겨우 떨리는 심장을 부여잡고 물었다.“청아 씨가 왜 병원에 있는 거죠?”임청아는 임신한 것을 알고 매사에 조심하며 걸음 하나도 천천히 옮겼었다.게다가 해외에 있는 친구와 연락하여 해외로 떠날 준비까지 마쳤다고 했었다.그런데 관건이 되는 순간에 계단에서 굴러떨어졌다고?“할아버지를 너무 쉽게 생각한 거 아니야?”임재욱은 말하면서 차갑게 웃었다.“네 화실에 청아 숨겨 놓았잖아. 할아버지께서 그걸 과연 모르고 있었을 것 같아? 오늘 화실로 청아 데리러 갔었는데, 가지 않겠다고 청아가 하도 우기는 바람에 억지로 묶어서라도 데리고 가겠다며 서로 실랑이를 벌이다가 계단에서 굴러떨어진 거야.”그렇다면 아이를 유산했을지도 모른다.임태훈의 습관에 따라 생각해 본다면 이 화살은 결국 유시아에게로 돌아오게 되어 있다.임재욱이 그렇게 경고하였건만 유시아는 마음이 약한 사람이었다.약해지는 마음에 언젠가는 구렁이에 빠지게 될 날이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날이 바로 오늘 일 줄은 몰랐다. 임재욱은 한숨을 내쉬며 꾸짖고 싶은 마음을 겨우 억눌렀다.“병원 주소 보내줄 테니 얼른 가 봐.”말을 마치고 임재욱은 전화를 끊어버렸다.얼마 지나지 않아 메시지 한 통이 도착했고 운전 기사에게 새로운 목적지를 알려주었다.같은 시각, 병원 안에서.임청아는 이미 수술을 마쳤고 일반 병실로 옮겨져 있었다.이미 가문의 집사와 간호인이 옆에 있었고 병실 문 앞에는 임태훈이 보낸 경호원도 있었다.다만 경호원이 경계해야 할 상대는 유시아가 아니라 한서준이다.따라서 유시아는 별다른 막힘없이 바로 병실 안으로 들어갔다.병상에 누워 있는 임청아는 얼굴에 핏기 하나 없었고 초점을 잃은 두 눈으로 멍하니 천장만 바라보고 있었다.불과 하룻밤 사이에 모든 활력을 잃어버린 모습이었다.집사는 자리에서 일어서서 아주 공손하게 유시아에
조금 전까지 허겁지겁 밥을 먹고 있던 임재욱은 멈칫거리고 말았다.이윽고 고개를 천천히 들어 웃는 듯 마는 듯한 얼굴로 유시아를 바라보며 물었다.“별거하자는 뜻이야?”“그렇게 생각해도 좋아요.”유시아는 숟가락을 내려놓고 머리가 아픈 듯 이리저리 만지작거렸다.“지금 이러한 상황에서 이러는 것도 좋을 것 같아요. 나한테 신경 쓰지 않아도 되고 그 시간으로 시연이한테 집중해도 되잖아요. 나도 마침 어머님 곁에 좀 있어드리고... 서로에게 지금 이게 최우선인 것 같아요.”임재욱은 숨을 깊이 들이마시고서 낙담한 모습으로 말했다.“그래. 네가 좋다고 하면 그게 좋은 거겠지. 그렇게 하자.”말을 마치고 그는 계속 밥을 먹었다.유시아는 그런 그를 바라보고서 아련하게 웃고는 바로 자리에서 일어나 위층으로 올라갔다.이튿날 아침, 유시아는 임재욱이 출근하고 나서야 침대에서 일어났다.일상복 몇 벌과 일상용품을 챙겨 작은 트렁크 안에 놓고 바로 이채련한테 가려고 했다.허씨 아주머니는 트렁크를 들고 내려오는 유시아의 모습에 살짝 당황한 모습이었다.“사모님, 어디 가시는 거예요? 설마... 가출하려는 건 아니죠?”유시아는 허씨 아주머니를 향해 웃었다.“아니에요. 친척분이 좀 위독하신데 제가 옆에서 좀 챙겨드리고 싶어서 가는 거예요. 얼마 걸리지 않을 거고 곧 돌아올 수 있을 거예요.”말을 마치고 트렁크를 들고서 집을 나섰다.이채련이 지내고 있는 병실이 VIP 병실로 널찍한 객실까지 갖춰져 있다.유시아는 간호사에게 접이식 침대와 이불을 요구했고 간단히 정리하고 나니 잘 자리가 아늑하게 마련되었다.이채련은 더 이상 침대에서 내려올 수 없어 하루 24시간을 침대 위에서 보내고 있다.얼굴도 하도 여위어 본연의 모습을 점점 잃어가고 있었다.그전에도 유시아는 이채련에게 이곳에서 며칠 동안 함께 지내고 싶다는 의사를 밝힌 적이 있지만 이채련은 행여나 자기로 인해 두 사람 사이에 흠이 생기게 될까 봐 동의하지 않았었다.지금 이 자리까지 오게 된 것만으로도 갖은 풍
임재욱은 핸들을 꼭 움켜쥐고서 앞만 바라보았으나 두 눈에는 고통과 망연함이 가득했다.“시연이 해외에 있을 때, 몹쓸 짓을 당했어. 한번이 아니라 여러 번이나. 그래서 우울증에 걸리게 된 거야.”유시아는 두 눈이 휘둥그레지면서 볼륨까지 높아졌다.“어머, 어떡해요!”평소에 신시연에 대해 좋은 마음을 가지고 있었던 건 아니지만 그 소식을 듣게 되는 순간 심장이 덜컹 내려앉기는 했다.여자에게 있어서 그런 몹쓸 짓을 당한다는 건 치명적인 타격과 치욕이 아닐 수가 없다.게다가 부모님의 일까지 더해지니 조금 전 식당에서 봤던 신시연의 모습이 이해되었다.임재욱은 말하면서 후회와 자책하는 빛을 드러냈다.“그렇게 가고 싶지 않다는 시연이를 내가 억지로 보낸 거야.”그때는 모든 걸 너무 쉽게 생각했었다.낯선 곳으로 가서 마음을 가다듬고 학업에만 집중하면 자연스레 모든 걸 잊고 새로운 삶을 그려나갈 수 있으리라 믿었다.하지만 임재욱이 잊고 있었던 부분이 하나 있는데, 그건 바로 신시연이 이제 갓 20살을 넘은 꽃다운 여자아이라는 것이다.해외에는 불안정 요소도 많고 미처 생각지 못하는 위험도 많다.게다가 젊은 나이라 자칫 잘못하면 그릇된 길로 들어서기도 아주 위험하고 말이다.신시연 곁에 사람을 함께 보내긴 했지만 그렇다고 하여 24시간 동안 찰싹 달라붙어 다닐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유시아와 결혼하고 나서 신혼에 푹 빠져 있는 동안 신시연에게 더 많은 관심을 주지 않았기에 이러한 일이 일어난 게 아닌지 죄책감이 들기도 했다.지금 임재욱은 신서현에게 미안할 뿐이다. 하나뿐인 동생을 이 지경으로 만들었으니.하지만 그가 말한 본의와 달리 듣고 있는 유시아는 또 다른 뜻으로 받아들이게 되어 있다.유시아의 기억으로는 신시연이 해외로 보내진 이유는 이러하다.그때 신시연은 정운시 대학교 교내 사이트에 유시아를 먹칠하는 게시글을 올리면서 유시아로 하여금 학업을 이어갈 수도 수업을 들을 수도 없게 악한 상황을 만들었었다.마침 그 일을 소현우가 알게 되면서 유시아에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