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재욱처럼 교만하고 제멋대로인 사람이 할아버지 말을 들을 리가 없었다. 그러면 배 속 아이는 사생아로 되어버릴 게 아닌가.정유라는 이 아이를 포기하고 싶었다. 하지만 아직 큰 작용을 발휘하지 못한 상태에서 유산하는 건 아쉬웠다.이런 갈등 때문에 그녀는 짜증이 났고 심지어 잠을 설치기도 했다.넋을 놓고 생각에 빠져 있을 때, 병실 입구에서 소리가 들려왔다.고개를 들고 보니 임재욱이 두 박스의 보약을 손에 든 채 병실 밖에 서 있었다.임재욱이 걸친 검은 코트엔 아직 눈송이가 달린 걸 보니 밖에 눈이 내린 듯했다.“어머, 도련님 오셨어요?”세상 물정에 밝은 도우미가 서둘러 앞으로 나아가 임재욱의 손에서 물건을 받아 정성스럽게 정유라의 침대맡에 내려놓았다.“두 분 먼저 얘기를 나누세요. 전 밖에 물건을 가지러 갈게요.”그러더니 금세 병실에서 사라지더니 친절하게 문까지 닫아 주었다.“재욱 씨.”정유라는 몸을 일으켰다. 재욱을 본 순간, 창백하던 얼굴에 약간의 붉은 끼가 돌았다.“여... 여긴 어쩐 일이에요? 눈 내렸어요? 춥지 않아요?”“할아버지께서 유라 씨가 입원했다고 하시길래 병문안하러 왔어요.”임재욱은 예전처럼 그녀를 차갑게 대하지 않았다. 그는 심지어 정유라 곁에 다가가 아까 도우미가 앉았던 자리에 앉기까지 했다. “좀 어때요? 의사가 뭐라고 했어요?”이러한 관심에 정유라는 몸 둘 바를 몰랐다. “저, 저는 괜찮아요. 임신할 때 힘들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겠어요? 할아버지께서도 제가 너무 걱정돼서 재욱 씨한테 전화한 걸 거예요. 업무에 지장을 준 건 아니죠?”임재욱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는 유라의 아랫배를 보면서 눈을 가늘게 떴다.“이 아이, 꼭 무사히 낳아줘요.”정유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꼭 그럴게요.”잠시 멈칫하더니 그녀는 입을 열었다.“재욱 씨, 그 일은 미안하게 됐어요. 이젠 나 좀 용서해 줘요...”“됐어요. 이미 지난 일이니까.” 임재욱은 말했다.“나한텐 그 일은 이미 지나간 거예요. 그러니까 앞
임재욱이 해외에 출장 간다는 소리를 들었을 때 정유라는 조금 언짢았다.해외는 너무 멀어서 그녀의 세력권에 있지 않았다. 심지어 그녀는 의심스러웠다. 출장을 이용하여 유시아와 해외에서 즐겁게 지낼 게 아닌가 하고.하지만 뜻밖에도 그는 자신에게 함께 가달라고 했다.임태훈은 연세가 많아 별로 도움이 되지 않았다. 임청아도 새로 사귄 남자 친구 때문에 임태훈의 강한 반대를 받고 있었는지라 최근 들어 자주 소란을 피웠고, 성격도 점점 변덕스러워졌다.그러니 정유라는 본가에서 말할 사람 하나 없을 정도로 외로웠다.생각해 보니 임재욱과 함께 해외에 가는 것도 좋은 선택이었다.그가 일할 때 그녀는 호텔에서 묵으면서 그가 오기를 기다리고, 또 아기가 크기를 기다리면 된다...한바탕 계산을 끝낸 후에 정유라는 고개를 끄덕였다.“좋아요. 마침 남동생이 미국에서 공부하고 있으니까 자주 만날 수 있어서 좋은 것 같아요.”임재욱은 그녀를 보며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미국으로 가는 일은 임재욱과 정유라 두 사람이 함께 결정했다.부부 두 사람 모두 동의하는 사안인 만큼 어르신들도 반대할 여지도, 이유도 없는 듯했다.그래서 지극히 평범한 섣달그믐을 보내고 나서야 임재욱은 정유라를 데리고 미국으로 떠날 준비를 했다.-유시아는 차에서 내리자마자 길 건너에 있는 임재욱과 정유라를 발견했다.설을 쇠고 나니 봄바람이 쌀쌀했다. 임재욱은 검은색 코트를 입었고, 정유라는 하얀 밍크코트를 입고 있었다. 손에는 루이뷔통의 한정판 가방을 들고서 임재욱 곁에 딱 붙어 서서는 많은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공항으로 향했다.가까이 붙어 있는 두 사람의 뒷모습은 마침 검은색과 흰색이어서 그런지 더 튀었다. 유시아는 멍하니 선 채 두 사람이 시야에서 사라지는 것을 말없이 바라보다가 공항 출구로 걸음을 옮겼다.그녀는 오늘 공항에 마중을 나왔다.용재휘는 원래 미국에서 부모님을 모시고 보름을 쇤 다음 다시 정운시로 오려고 했는데 고모부 심송학이 갑자기 아파서 병원에 입원한 것을 듣고 급하게 귀
점심 때가 다 되어서야 공항 출구 쪽에서 용재휘의 모습이 보였다.그는 옅은 회색 패딩 점퍼를 입고 흰색 캐시미어 목도리를 한 채 한 손으로 캐리어를 끌며 그녀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시아 씨!”유시아는 그에게 웃음을 보이며 걸어갔다.“재휘 씨, 한국에 돌아온 걸 환영해요.”두 사람은 나란히 걸으면서 심씨 집안의 차에 올라 병원으로 직행했다.심송학은 지금도 시내에 있는 사립병원에 입원 중이었다. 그는 이곳의 원장과 오랜 친구였고, 또 평소에도 병원에 각종 후원을 아끼지 않았다. 그래서 지금은 이 병원만이 그를 받아주었다.두 사람이 도착했을 때 심송학은 이미 잠들었고, 채경숙은 옆 의자에 앉아 있었다. 며칠 동안 피부관리에 소홀한 데다가 화장도 하지 않은 그녀는 꽤 초췌해 보였다.심하윤이 없는 걸 보니 밥을 사러 나간 것 같았다.“고모.”용재휘는 앞으로 다가가 채경숙에게 물었다. “고모부는 어떠세요? 의사 선생님께선 뭐래요?”채경숙은 친정 조카를 보자 눈시울을 붉혔다. “재휘야, 네 고모부의 상태는 별로 좋지 않아. 우리 심씨 집안도...”그녀는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하고 얼굴을 가린 채 작은 소리로 흐느끼기 시작했다.유시아는 자신이 외부인임을 깨닫고 그 자리에 있기가 민망해 조용히 말했다. “아주머니, 재휘 씨, 말씀 나누세요, 전 하윤 언니를 찾으러 갈게요.”그리고 식당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얼마 지나지 않아 심하윤이 도시락 두 개와 과일을 넣은 봉지를 들고 식당에서 나왔다.집안 사업이 부도나고 남자 친구에게 차인 데다가 웨딩숍마저 운영이 안 돼 문을 닫은 충격으로 심하윤은 평소보다 훨씬 야위어 보였다. 얼마 없었던 볼살마저 빠져 턱이 유독 돋보였는데 예전의 생기를 잃은 것 같았다.“하윤 언니.”유시아는 그녀를 부르며 앞으로 다가가 무거운 과일 봉지를 받아 갔다.“아저씨는 아직 깨어나지 않으셨고 재휘 씨가 방금 왔어요. 지금 아주머니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거예요. 언니, 걱정하지 말아요. 모든 게 다 지나갈 거예요.”
“아닐 거예요, 하윤 언니...”유시아는 탁자 위를 치우며 말했다.“일이 어쩌면 우리가 생각했던 것처럼 그렇게 나쁘지 않을 수 있어요. 그러니 너무 비관하지 마요. 모든 게 다 지나갈 거예요.”그 말을 들은 심하윤은 조금 멍해졌다.그녀는 심송학, 심씨 가문의 상황에 대해 잘 알고 있었는데 무릇 어떤 위기가 찾아온들 심송학의 건강이 이토록 심하게 악화한 적은 없었다. 심지어 병상에 누워 일어나지 못할 정도로 말이다!그 역시 해결하지 못한 일을 심하윤 모녀가 어떻게 해결할 수 있겠는가?서로 속고 속이는 상업계에서의 일에 대해 그녀들은 전혀 아는 바가 없었다.게다가 심하윤은 디자인을 할 때도 웨딩드레스 가게를 열 때도 항상 아버지인 심송학이 뒤에서 지탱해주었기에, 그녀는 전혀 혼자 생활하며 돈을 벌 능력이 없었다!심송학이 쓰러진 마당에, 그녀는 보호자가 없어 노숙하게 될지도 모른다.그런 날들을 심하윤은 평생 상상해본 적이 없었다!저녁 무렵, 그녀는 소파에 누워 잠이 들었다.유시아는 심하윤에게 담요를 덮어주고 문 입구에 앉아 휴대폰을 만지작거리며 시간을 보냈다.이때 용재휘가 보낸 메시지가 그녀의 핸드폰으로 전송되었다.[시아야, 이번 고모네 일이 조금 많이 까다로워. 내가 도울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을 것 같아!]두 줄의 짧은 문자였지만, 유시아는 되레 한숨을 푹 내쉬었다.[뭔데?][고모부네 회사에 적자가 너무 많아. 몇천억의 자금도 없어서 도저히 도움을 줄 수 있는 상황이 아니야!]해외에 있는 용재휘네 회사 역시 총자산이 몇십억 원에 불과하기 때문에 모든 것을 쏟아부어도 이 “구멍”을 메울 방법이 없다!‘몇천억이라...’유시아는 조용히 입을 꼭 다물었다. 몇천억, 그녀에게 있어 이건 정말 천문학적인 숫자라 할 수 있다!예전에 그녀는 부득이한 상황이 되면 집을 사서 그들을 어느 정도 도울 수 있겠다 생각했었다. 하지만 인제 보니 그건 쥐꼬리만 한 도움일 뿐이었다!유시아가 손가락을 떨며 그에게 답장을 보내던 중, 병실에서 심송학의
“안됩니다. 가질 수 없어요!” 유시아는 단호히 거절했다.“아저씨, 저도 손발 다 있고 스스로 먹고 살 수 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아저씨 돈을 받을 수 있겠어요? 이 돈은 아저씨 의료비로 하거나 하윤 언니한테 남겨주세요. 저는 정말 받을 수 없습니다...”심씨 가문의 현재 상황에 비추어 볼 때, 지금 유시아가 돈을 받는 것은 불이 난 틈을 타 강도질을 하는 것과 다를 바 없는 것 같았다.“아니, 꼭 네가 받아둬야 한다!”심송학은 갑자기 엄숙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네 아버지가 떠날 때, 내가 너를 잘 돌봐주겠다고 약속했다. 네 아버지는 나를 위해 많은 일을 했지만, 나는 잘 돌봐주지도 못하고 되레 너를 지금 외롭게 하고 있어. 죽은 후에 네 아버지를 볼 면목이 없게 하고 싶지는 않구나. 시아야, 아저씨가 이렇게 부탁하니 돈은 꼭 받아주렴...”부탁이었던 것이 마지막에는 애원하는 것으로 변했다.유시아는 마지 못해 그 카드를 움켜쥐었다.“상심해 마세요, 아저씨. 이 카드는 제가 받을게요.”“그래. 고맙구나.”심송학은 모든 것을 끝내고 나서야 천천히 베개에 기대었다.“너도 나가서 쉬어. 아저씨는 좀 혼자 있고 싶구나.”유시아는 고개를 끄덕였다.“네. 그럼 일찍 쉬세요.”곧이어 그녀는 심송학을 도와 불을 끄고 난 뒤 병실을 떠났다.다음 날 아침에도 여전히 유시아가 먼저 깨어났다.그녀는 화장실로 가서 간단히 씻은 다음 아래층으로 내려가 조식을 샀다.돌아왔을 때, 심송학 부녀는 모두 깨어난 뒤였고 세 사람은 함께 앉아 밥을 먹었다.식사를 마친 후에는 유시아가 심하윤에게 함께 설거지를 도와달라고 부탁했다.그렇게 화장실에 도착하자 그녀는 그 카드를 꺼내어 심하윤의 옷 주머니에 넣었다.“카드 비밀번호는 0 여섯 개예요. 아저씨께서 어제저녁 저한테 생활비 하라면서 주신 거예요. 근데 지금은 제가 돈이 부족한 상황이 아니라... 언니가 이거 받고 나중에 급할 때 써요.”그러자 심하윤은 아연실색하며 서둘러 말했다.“너한테 줬으니 네 거지
심씨 가문의 문제는 조금도 해결되지 않았다.자금이 하루라도 확보되지 않는 한 심씨 가문 소유의 부동산 회사는 채권자들이 언제든 찾아올 수 있는 위태로운 상황에 처해 있다.심씨 가문의 별장 역시 회사의 장부에 예치되어 있기에 만약 파산한다면 집도 은행에 압류된다.그들 세 식구를 기다리는 것은 바로 길거리 노숙이었다.심씨 가문의 자금이 수천억이나 부족하다는 것을 알았을 때 가족들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골치가 아팠지만、 조금도 내색하지 않고 억지로 웃으며 이야기꽃을 피웠다.그렇지 않으면 심리적 압박이 더욱 커질 테니 말이다!저녁 무렵이 되자 용재휘는 유시아에게 가서 쉬라고 권했고, 그는 심하윤과 함께 남아 고모부를 돌보기로 했다.유시아는 심하윤이 조금 안쓰러워 그녀더러 쉬게 하고 자신은 여기에 남아있기를 원했다.하지만 거실의 소파가 좁아서 잠들기 불편했고, 심하윤도 며칠 동안 잠을 제대로 자지 못했다.그녀가 오히려 유시아를 말렸다.“그냥 돌아가. 재휘랑 둘이 있어도 괜찮으니까 걱정하지 말고.”채경숙도 유시아의 팔을 잡아당겼다.“그래, 시아야. 나랑 함께 차 타고 돌아가자!”유시아는 눈을 치켜들고 채경숙의 눈을 바라보다가 마치 자신에게 할 말이 있는 것 같아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를 따라 자동차에 탔다.차는 아주 빨리 심씨 저택 마당으로 들어가서 별장 입구에 천천히 멈춰 섰다.“시아야...”채경숙은 나지막한 목소리로 그녀를 불렀다.“단둘이 하고 싶은 말이 있는데, 잠시 시간 좀 내줄래?”유시아는 곰곰이 생각하다가 고개를 끄덕이고 채경숙을 따라 함께 별장으로 향했다.이전에도 그녀는 심씨 저택에 몇 번 온 적이 있었는데, 유럽식의 큰 별장은 넓고 화려해 매번 각양각색의 사람들이 이곳에서 일하곤 했다. 어떤 사람은 차를 대접하고 또 어떤 사람은 꽃과 나무를 다듬어 별장이 더욱 기품이 넘치게 했다.그러나 지금의 별장은 텅 비어 사람의 그림자라고는 하나도 없이 쓸쓸해 보였다.유시아는 그녀를 부축하며 소파에 앉았다.“제가 가서 물 끓
채경숙은 그녀의 손목을 힘껏 끌고 있었다. 너무 초조한 탓인지 말투가 심지어는 신경질적이고 어눌하기까지 했다.“임재욱은 줄곧 너를 사랑했어. 지금 아내랑은 그냥 쇼윈도 부부일 뿐이야. 소현우가 죽었을 때, 임재욱이 도망치고 너 보러도 갔었잖아. 너를 이렇게 사랑하는데 어떻게 네 부탁을 무시할 수 있겠어. 시아야, 아줌마가 이렇게 빌게. 우리 심씨 가문을 구해줘. 안 그러면 우리는 살 길이 없어...”유시아는 힘겹게 그녀를 밀치며 두 걸음 뒤로 물러섰다.“죄송해요, 아줌마. 저... 저는 도울 수 없을 것 같네요!”임재욱은 자선가가 아닐뿐더러 유시아의 꼭두각시는 더더욱 아니었다.얻을 이익이 없으면 상업가들은 나서지 않는 법이다. 심씨 가문과 평소에 아무런 접점도 없었는데 임재욱이 무엇을 믿고 그들을 도와주겠는가?더군다나 이렇게 까다로운 일은 임태훈도 반드시 동의하지 않을 것이다!채경숙은 그녀를 향해 무릎으로 몇 걸음 걸어가다 손을 뻗어 유시아의 옷자락을 꼭 움켜쥐었다.“너 말고는 없어. 우리 집이 정말 막다른 골목에 몰려있다는 거 너도 알잖니. 아마 얼마 안 있으면 빚쟁이가 찾아와 우리를 여기서 쫓아낼 거야. 그러면 우리는 길거리에서 노숙을 할 수밖에 없을 텐데...”앞으로의 고된 생활을 예상해서인지 채경숙은 더욱 펑펑 울었고 급기야 통곡하기 시작했다.“시아야, 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우리가 여태껏 너를 돌봐 주었잖니. 그 정을 봐서라도 임재욱한테 부탁해주면 안 돼? 우리 좀 도와달라고, 우리 좀 살려달라고 부탁해줘. 제발... 내가 이렇게 머리 조아리마!”그녀는 울면서 이마를 땅바닥에 쿵 하고 박았다.유시아는 깜짝 놀라 난처한 안색으로 얼른 손을 뻗어 그녀의 팔뚝을 잡아당겼다.“아줌마, 이건 지금 저 협박하시는 거나 다름없어요!”“나도 정말 어쩔 수 없어서 그래!”땅에 웅크리고 있는 채경숙의 머리는 잔뜩 어수선해져 예전의 귀부인다운 풍모는 일찍이 사라졌다!회사가 파산하고 빚더미에 올라앉은 것은 이런 부자들에게 생사가 걸린 큰일이라
‘재정 위기는 심씨 가문에서 발생한 건데 왜 되레 내가 결단을 내리도록 강요당하는 거지?’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심씨 가문이 그동안 자신을 위해 한 모든 것을 유시아는 한 번도 잊은 적이 없다. 만약 기회가 있다면 그녀도 그들에게 보답할 수 있기를 원한다.하지만 그들에게 보답하는 방식이 임재욱에게 도움을 청하는 것이라면 말이 달라진다!유시아는 차에 앉아 멍하니 바깥 거리 풍경을 바라보았다.반월별장 단지에 도착해 기사가 차를 멈춰 세우자, 유시아는 비로소 정신을 차리고 문을 열어 차에서 내렸다.“허 기사님, 데려다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허 기사는 그녀를 향해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이더니 본인 역시 차에서 내렸다.그는 이전에 유시아의 아버지 유병철과 함께 심씨 가문에서 여러 해 동안 일해온 경력이 있어 서로 아주 잘 아는 사이였다.비록 유시아와 만날 기회가 많지 않았지만, 오랜 동료의 딸인지라 그는 마치 자신의 친딸을 대하듯 친절하게 작별 인사를 건넸다.“시아야, 내가 심씨 가문에 출근하는 건 오늘로써 끝이야.”유시아는 조금 의아해졌다.“허 기사님도 가시는 거예요?”‘아저씨 병이 아직 낫지 않아서 개인 운전기사 없이 매일 집과 병원을 오가려면 가족들이 아마 많이 불편할 텐데...’“나도 어쩔 수 없어.”허 기사는 다소 무력해하며 말했다.“그래도 심씨 가문을 떠나는 사람 중에 내가 제일 마지막이야. 나도 부양해야 할 부모님과 아이가 있는지라 쭉 여기서 시간을 다 소비할 수는 없어. 몇 달 치 월급도 포기하고 여기를 떠나는 거란다.”유시아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입을 굳게 오므렸다.‘그래, 허 기사님한테도 부양해야 할 가족이 있는데... 의리가 실질적으로 밥 먹여주는 것도, 돈을 주는 것도 아니고 언제까지나 의리에 기대 배 채우기를 기다릴 수는 없지. 모든 사람에게는 어쩔 수 없는 저마다의 사정이 있는 법이잖아. 나도 남에게 너무 많은 걸 요구할 수는 없어.’가로등 아래에 서서 깊은 생각에 잠긴 듯한 유시아를 보고 허 기사는
늦은 밤, 유시아의 카카오톡을 받았을 때 임재욱은 병원에 있었다.신시연은 도우미의 도움을 받으며 진료실에서 여러 검사를 받았고 그동안에 임재욱은 밖에서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늦은 밤의 사립 병원이라 사람이 그리 많지 않았다.당직을 서는 의사 선생님과 간호사 외에 거의 사람이 없이 무척이나 쓸쓸해 보였다.임재욱은 복도를 한참이나 누비다가 의자에 걸터앉았다.유시아를 병원으로 바래다주고 돌아서는 길에 신시연의 전화를 받고서 오게 된 것이다.배가 아프다고. 당장이라도 죽을 듯이 아프다고.신시연은 며칠 전에 병원에서 여러 번 신체검사를 받았으나 해외에서 그러한 몹쓸 짓을 당하며 우울증과 부인병이 있는 외에 다른 수치들은 정상 범위 안에 있었다.그 말인즉슨,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것이다.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임재욱은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신시연에게 남은 ‘가족’이라고는 임재욱 하나뿐이니 어찌 됐든 그녀를 잘 지켜야 하는 마음뿐이었다.그 누구에게도 다시는 상처를 받지 않게끔.바로 이러한 마음가짐으로 하여 임재욱은 그녀를 직접 병원까지 데리고 오고 의사 선생님 입에서 아무런 문제도 없다는 확답을 듣고 나야만 마음이 놓일 수 있다.애타게 검사 결과를 기다리고 있는 가운데 핸드폰 알림 소리가 울렸다.유시아가 보낸 카카오톡인데, 내용은 아주 간단했다.[보고 싶어요.]임재욱은 고개를 숙인 채 카톡 내용을 거듭 곱씹으며 유시아 사진으로 되어 있는 그녀의 프로필 사진을 바라보며 입꼬리가 주체하지 못하고 자꾸 올라갔다.‘내가 보고 싶어? 별거한 지 하루 만에 벌써 내가 보고 싶은 거야?’‘우리 시아 이제 제법 솔직하네.’핸드폰을 손에 꼭 쥐고 어떻게 답장할지 생각하고 있을 때 응급실 문이 열렸다.도우미 김향화가 얼굴에 핏기 하나 없는 신시연을 부축하고 걸어 나왔다.신시연은 디자인이 아주 심플한 데님 스커트를 입었고 윤기가 별로 없어 보이는 머리를 돌돌 말아 묶어 올렸다.무척이나 초췌해 보이는 것이 가여운 느낌도 물씬 풍기고 있어 기고만장했던 그
유리 구두를 품속에 꼭 안고 있는 유시아를 보고서 임재욱은 순간 이러한 생각이 들었다.참으로 달래기 쉬운 여자라는 것을.특히 결혼하고 나서 아주 살짝만 잘해주어도 유시아는 아주 오랫동안 기뻐하는 것만 같았다.유시아는 늘 임재욱 앞에만 서면 스스로 자세를 낮추고 자기를 낮은 위치에 놓는 데 습관 되어 있다.임재욱은 고개를 숙여 그녀의 정수리에 뽀뽀했다.“앞으로 매년 생일마다 예쁜 유리 구두 선물해 줄게. 어때?”“좋아요.”유시아는 말하면서 아주 유치하게 그를 향해 손가락을 내밀었다.“손가락 걸고 약속해요. 절대 어기지 않겠다고.”백화점에서 나온 두 사람은 일단 화실로 향했다.새로 구매한 공예품을 적당한 자리에 올려놓고 유시아의 제안으로 이채련의 병원까지 바래다주었다.유시아는 자기가 뱉은 말은 어떻게든 지키는 타입이라 이채련과 이미 약속했으니 꼭 지켜야 했다.하물며 자식도 없는 이체련에게 마지막 이 시간들이 더더욱 외로울 것이다.외부인들이 보기에도 불쌍할 정도로 외롭다.임재욱이 아무리 말해도 소용이 없었고 이채련에게 주어진 시간이 얼마 없다고 하니 마음은 내키지 않았지만 보내주었다.차는 곧 사립 병원 앞에 멈춰 섰고 임재욱은 차에서 내리지 않았다.유시아는 차창에 대고 거듭 강조했다.“유리 구두랑 드레스들 옷방에 고이 모셔두도록 해요. 마구 놓지 말고요.”“알았어.”임재욱은 말하고서 손을 내밀어 그녀의 목을 확 잡고서 찐한 키스를 남기고 나서야 순순히 놓아 주었다.“얼른 가 봐.”“조심해서 가요.”임재욱은 조수석에 앉아 한결 가벼워진 그녀의 뒷모습이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보고서야 시선을 거두고 집으로 향하려고 했다.가는 길에 갑자기 신시연으로부터 전화가 걸려 왔다.“오빠, 배가 너무 아파요.”...병실로 돌아와 보니 이채련은 아직 자고 있지 않았다.침대에 멍하니 누워 재미가 일도 없는 예능 프로를 보고 있었다.유시아가 문을 밀고 들어오는 것을 보고 이채련은 놀라고도 기뻤다.“시아야, 늦은 시간에 웬일이야?”유시아
쇼핑은 늘 설레는 일이다.유시아는 자기 취향대로 화실 장식품으로 쓰일 공예품을 골랐다.이윽고 임재욱은 또 유시아를 데리고 근처에 있는 매점으로 향했다.지난번에 두 사람은 함께 쇼핑하면서 많은 옷을 샀었지만, 신서현 부모님께 갑작스러운 상황이 일어나면서 유시아는 그 모든 옷을 모조리 청소 아주머니에게 줘 버렸다.그때의 아쉬움을 채워주기 위해 임재욱은 또다시 쇼핑하려고 한 것이다.게다가 다음 주면 대우 그룹 상장 20주년이다.정식적인 석상에 모습을 드러낼 때 유시아를 자기 아내 신분으로 남에게 소개해 주고 싶어 이브닝 파티에 어울릴만한 드레스와 신발을 살 예정이다.드레스는 그럭저럭 큰마음이 가지 않았는데, 유시아는 그 신발이 마음에 들었다.은백색의 하이힐로 예쁜 보석들로 가득 박혀 있어 매점 불빛 아래서 유난히 반짝이는 것이 신데렐라 동화에 나올 법한 유리 구두 같았다.매점 직원은 유시아가 마음에 들어 하는 것을 보고 바로 다가왔다.“손님 안목이 참 좋으시네요. 이 제품은 저희 디자이너 선생님의 최신 디자인으로 지금 딱 한 켤레만 있습니다. 만약 이 신발을 신고 나가신다면...”임재욱은 갑자기 직원의 말을 끊어버렸다.“이미 결혼했고요. 이 사람은 제 아내예요.”유시아는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들었는데, 자기를 바라보며 웃고 있는 그를 보고서 따라서 웃었다.“맞아요. 이 사람이 제 남편이에요.”매점 직원은 멍하니 있다가 바로 얼굴에 미소를 머금고 베스트 쇼핑 가이드다운 실력을 드러냈다.“어머, 어쩐지 너무 어울리신다 했어요...”직원의 칭찬에 두 사람은 얼굴에 웃음꽃이 피어났다.이윽고 매점 직원은 분위기를 파악하며 유리 구두에 대해 더욱 디테일한 설명을 첨부하기 시작했다.“이 제품의 새끼 양가죽으로 만들어졌으므로 착용감이 엄청 좋으실 거예요. 하루 종일 신고 걸으셔도 전혀 문제가 없다는 말이죠. 게다가 우리 디자이너 선생님이 즉흥으로 만들어내신 작품이라 절대 똑같은 제품을 시중에서 보실 수 없을 거예요.”한 켤레일 뿐만 아니라 사이
한서준은 눈살을 찌푸리며 되물었다.“내가 뭐?”“한서준 씨는 당당해요?”유시아는 바로 질문을 질문으로 돌려주었다.“임씨 가문에 접근한 그 의도를 다른 사람들이 모를 것 같아요? 할아버지, 재욱 씨 그리고 나까지 똑똑히 알고 있어요. 청아 씨만이 한서준 씨를 사랑해서 자신을 속이고 있는 거라고요. 그렇게 쭉 모르는 척을 하며 모든 걸 감당하고 있었던 거라고요. 한서준 씨 역시 청아 씨를 이용한 게 아닌가요?”마지막 한 마디에 한서준은 침묵하고 말았다.그렇다. 임청아에게 접근한 이유는 유시아가 ‘스파이’로 움직여 주지 않겠다고 거절했기에 어리석어 보이는 임씨 가문 천금을 노리게 된 것이다.하지만 사람 마음이라는 것은 결국 변하게 되어 있다.임청아 대한 마음은 모략에서 시작했으나 시간의 흐름에 따라 그 마음이 점점 사랑으로 끝을 맺게 된 것이다.늘 밝고 긍정적인 에너지를 띠고 다가왔던 임청아가 어두운 자신의 삶을 밝게 비춰주는 것만 같았다.따라서 한서준은 임청아와 평생을 함께하고 싶다는 마음이 차츰 생기게 된 것이다.임태훈이 반대한다고 하더라도 꼭 자기 곁으로 데리고 오고 싶었다.“청아 씨 지금 몸도 마음도 상처투성이에요.”“만약 청아 씨 행복하게 해 줄 수 없다면 신중하게 생각하고 결정하는 게 좋을 거예요.” 말을 마치고 유시아는 차 문을 밀고 차에서 내려 병원 밖으로 걸어갔다.택시에 오른 유시아는 긴 망설임 끝에 끝내는 더 스케치 화실 주소를 운전 기사에게 알렸다.차는 화실 맞은 편에 세워졌고 유시아는 화실 바로 맞은편에 있는 커피숍으로 들어가 창가 자리에 앉았다.화실 안의 상황을 바로 체크할 수 있고 자신의 정체를 드러내지 않아도 되는 최적의 위치라고 할 수 있다.한참 지나고 나서야 수많은 경호원들이 임태훈을 사이에 두고 화실에서 걸어 나오는 것이 보였다.임태훈은 벤틀리에 올라 강한 기운을 남기고 자리를 떠나버렸다.유시아는 그제야 한시름을 놓고 들고 있던 커피잔을 내려놓고는 바로 화실로 향해 달려갔다.화실 안과 밖은 겉은
전화를 마치고 유시아는 혼자 밖에 없는 휴게실을 보고서 깊은 번뇌에 잠겼다.남을 탓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에 임태훈처럼 막무가내로 어처구니가 없는 노인이 있다는 게 도통 이해가 되지 않았다.임태훈이 끔찍이 여기는 임청아를 유시아가 계단에서 밀어버린 것도 아닌데, 왜 애꿎은 자기 화실을 닫으려고 하는지 알 수 없었다.집안 내부에 문제가 생기면 일단 스스로 반성하는 법부터 배워야 하는데, 그게 무엇이든 일단 남한테서 문제를 찾고 있으니, 권력을 믿고 사람을 업신여기는 것이 분명했다.유시아는 생각하면 할수록 머리가 복잡해졌고 불안함도 점점 커졌다.지금 운영하고 있는 더 스케치 화실도 용재휘가 먼저 시작한 것인데, 그와 더불어 학생들까지 모두 함께 넘겨주었는데, 만약 이대로 화실을 망쳐버린다면 용재휘에게 너무 미안할 것 같았다.임재욱과 임태훈이 어느 정도로 얘기했는지 알 수 없었지만 화실이 그들 싸움의 희생물이 되지 않기만을 바랄 뿐이었다.임재욱에게 전화를 걸어 상황을 묻고 싶었으나 감히 그럴 용기가 없어 일단 지켜보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떨리는 심장을 부여잡은 채로.그렇게 한참이나 심장을 조이고 있었지만, 걸려 오는 전화는 없었다.유시아는 일이 어느 정도 망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학생 채팅방에 오늘 갑자기 일이 있다며 수업을 뒤로 미룬다고 알렸다.언제 다시 수업을 시작할지는 소식을 기다리라며 덧붙이기까지 했다.톡을 보내고서 유시아는 더 이상 핸드폰을 보지 않고 바로 병원 밖으로 나갔다.그러나 병원 대문을 나오자마자 한서준이 정면에서 오고 있었다.“유시아.”유시아는 고개를 들었고 그를 보게 되는 순간 정신이 아찔해 났다.직감이 알려주건대, 절대 좋은 일이 없다는 것이다.화실의 생존 여부도 알 수 없는 상황에서 그의 심기까지 건드리고 싶지 않았다.한서준은 쉽사리 유시아를 놓아 주지 않았고 손을 내밀어 유시아의 손목을 꼭 잡았다.“물어볼 일이 있어.”말하면서 근처에 있는 지프차를 가리켰다.“차에 타서 얘기 하자.”“그쪽이랑 할 말
유시아는 그 말을 이어받지 않고 집사의 바람대로 타이르기 시작했다.“몸이 아직 많이 허약해요. 먹고 싶지 않아도 억지로라도 좀 먹어야 하거든요. 일이 어찌 됐든 일단 건강부터 챙겨야 해요.”임청아 그 말을 듣고서 쓴웃음을 지었다.“건강 회복되면 할아버지한테 잡혀가서 집에 감금되는 것밖에 더 있겠어요?”“그렇게 생각하지 말아요.”유시아는 눈살을 찌푸리며 덧붙였다.“어찌 됐든 할아버지 마음은 한결같을 거예요. 청아 씨를 아끼고 사랑하는 거요. 서로 대화가 필요한 거 같아요. 서로 터놓고 얘기하고 나면 오해가 풀리고 마음도 풀리면서 모든 게 원점으로 돌아갈 수 있을 거예요.”임청아의 입가에 피식 웃음이 새어 나왔다.“저도 그렇게 생각했었어요. 아이 낳고 나면 할아버지도 서준이도 원한을 내려놓고 행복만 할 수 있다고요.”“근데 이렇게 몸도 아끼지 않고 점점 더 막무가내로 나가면 두 사람 사이의 원한은 점점 더 짙어질 거예요.”유시아는 말하면서 도우미 손에서 보신탕을 가져와 천천히 불며 임청아의 입가로 가져갔다.임청아는 생각 밖으로 무척이나 순순하게 유시아의 말을 따랐고 그녀의 말에 이치가 있는 것 같아 조용히 보신탕을 받아 마셨다.도우미와 집사는 두 사람이 티키타카 서로 말을 주고받는 것을 보고 서서히 마음이 놓였다.임청아가 뭐라도 먹기 시작하여 자기도 모르게 한시름을 놓으며 자리까지 비켜주려고 했다.두 사람이 마음 편히 말할 수 없을까 봐 눈치껏 일어서려는 것이다.“작은 사모님, 아가씨와 천천히 얘기하고 계세요. 밖에 나가 있을 테니 필요한 거 있으시면 언제든지 부르시고요.”“네, 가보세요.”도우미 일행이 나오고 나서야 유시아는 본론으로 들어갔다.“한서준 씨는 알고 있어요?”임청아는 고개를 저으며 쓴웃음을 지었다.“그런다고 숨겨질 일도 아니잖아요.”요즘 임태훈뿐만 아니라 한서준도 눈을 부라리고 임청아를 찾고 있었다.두 사람의 시선을 피하고자 아파트도 호텔도 들어갈 수 없었고 버려진 강아지처럼 유시아 화실에 몸을 숨기고 지낸 것
임청아 이름 석 자가 임재욱의 입에서 나오자, 유시아는 순간 청천벽력을 맞는 것만 같았다.심지어 지금까지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으니 말이다.한참 지나고 나서야 겨우 떨리는 심장을 부여잡고 물었다.“청아 씨가 왜 병원에 있는 거죠?”임청아는 임신한 것을 알고 매사에 조심하며 걸음 하나도 천천히 옮겼었다.게다가 해외에 있는 친구와 연락하여 해외로 떠날 준비까지 마쳤다고 했었다.그런데 관건이 되는 순간에 계단에서 굴러떨어졌다고?“할아버지를 너무 쉽게 생각한 거 아니야?”임재욱은 말하면서 차갑게 웃었다.“네 화실에 청아 숨겨 놓았잖아. 할아버지께서 그걸 과연 모르고 있었을 것 같아? 오늘 화실로 청아 데리러 갔었는데, 가지 않겠다고 청아가 하도 우기는 바람에 억지로 묶어서라도 데리고 가겠다며 서로 실랑이를 벌이다가 계단에서 굴러떨어진 거야.”그렇다면 아이를 유산했을지도 모른다.임태훈의 습관에 따라 생각해 본다면 이 화살은 결국 유시아에게로 돌아오게 되어 있다.임재욱이 그렇게 경고하였건만 유시아는 마음이 약한 사람이었다.약해지는 마음에 언젠가는 구렁이에 빠지게 될 날이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날이 바로 오늘 일 줄은 몰랐다. 임재욱은 한숨을 내쉬며 꾸짖고 싶은 마음을 겨우 억눌렀다.“병원 주소 보내줄 테니 얼른 가 봐.”말을 마치고 임재욱은 전화를 끊어버렸다.얼마 지나지 않아 메시지 한 통이 도착했고 운전 기사에게 새로운 목적지를 알려주었다.같은 시각, 병원 안에서.임청아는 이미 수술을 마쳤고 일반 병실로 옮겨져 있었다.이미 가문의 집사와 간호인이 옆에 있었고 병실 문 앞에는 임태훈이 보낸 경호원도 있었다.다만 경호원이 경계해야 할 상대는 유시아가 아니라 한서준이다.따라서 유시아는 별다른 막힘없이 바로 병실 안으로 들어갔다.병상에 누워 있는 임청아는 얼굴에 핏기 하나 없었고 초점을 잃은 두 눈으로 멍하니 천장만 바라보고 있었다.불과 하룻밤 사이에 모든 활력을 잃어버린 모습이었다.집사는 자리에서 일어서서 아주 공손하게 유시아에
조금 전까지 허겁지겁 밥을 먹고 있던 임재욱은 멈칫거리고 말았다.이윽고 고개를 천천히 들어 웃는 듯 마는 듯한 얼굴로 유시아를 바라보며 물었다.“별거하자는 뜻이야?”“그렇게 생각해도 좋아요.”유시아는 숟가락을 내려놓고 머리가 아픈 듯 이리저리 만지작거렸다.“지금 이러한 상황에서 이러는 것도 좋을 것 같아요. 나한테 신경 쓰지 않아도 되고 그 시간으로 시연이한테 집중해도 되잖아요. 나도 마침 어머님 곁에 좀 있어드리고... 서로에게 지금 이게 최우선인 것 같아요.”임재욱은 숨을 깊이 들이마시고서 낙담한 모습으로 말했다.“그래. 네가 좋다고 하면 그게 좋은 거겠지. 그렇게 하자.”말을 마치고 그는 계속 밥을 먹었다.유시아는 그런 그를 바라보고서 아련하게 웃고는 바로 자리에서 일어나 위층으로 올라갔다.이튿날 아침, 유시아는 임재욱이 출근하고 나서야 침대에서 일어났다.일상복 몇 벌과 일상용품을 챙겨 작은 트렁크 안에 놓고 바로 이채련한테 가려고 했다.허씨 아주머니는 트렁크를 들고 내려오는 유시아의 모습에 살짝 당황한 모습이었다.“사모님, 어디 가시는 거예요? 설마... 가출하려는 건 아니죠?”유시아는 허씨 아주머니를 향해 웃었다.“아니에요. 친척분이 좀 위독하신데 제가 옆에서 좀 챙겨드리고 싶어서 가는 거예요. 얼마 걸리지 않을 거고 곧 돌아올 수 있을 거예요.”말을 마치고 트렁크를 들고서 집을 나섰다.이채련이 지내고 있는 병실이 VIP 병실로 널찍한 객실까지 갖춰져 있다.유시아는 간호사에게 접이식 침대와 이불을 요구했고 간단히 정리하고 나니 잘 자리가 아늑하게 마련되었다.이채련은 더 이상 침대에서 내려올 수 없어 하루 24시간을 침대 위에서 보내고 있다.얼굴도 하도 여위어 본연의 모습을 점점 잃어가고 있었다.그전에도 유시아는 이채련에게 이곳에서 며칠 동안 함께 지내고 싶다는 의사를 밝힌 적이 있지만 이채련은 행여나 자기로 인해 두 사람 사이에 흠이 생기게 될까 봐 동의하지 않았었다.지금 이 자리까지 오게 된 것만으로도 갖은 풍
임재욱은 핸들을 꼭 움켜쥐고서 앞만 바라보았으나 두 눈에는 고통과 망연함이 가득했다.“시연이 해외에 있을 때, 몹쓸 짓을 당했어. 한번이 아니라 여러 번이나. 그래서 우울증에 걸리게 된 거야.”유시아는 두 눈이 휘둥그레지면서 볼륨까지 높아졌다.“어머, 어떡해요!”평소에 신시연에 대해 좋은 마음을 가지고 있었던 건 아니지만 그 소식을 듣게 되는 순간 심장이 덜컹 내려앉기는 했다.여자에게 있어서 그런 몹쓸 짓을 당한다는 건 치명적인 타격과 치욕이 아닐 수가 없다.게다가 부모님의 일까지 더해지니 조금 전 식당에서 봤던 신시연의 모습이 이해되었다.임재욱은 말하면서 후회와 자책하는 빛을 드러냈다.“그렇게 가고 싶지 않다는 시연이를 내가 억지로 보낸 거야.”그때는 모든 걸 너무 쉽게 생각했었다.낯선 곳으로 가서 마음을 가다듬고 학업에만 집중하면 자연스레 모든 걸 잊고 새로운 삶을 그려나갈 수 있으리라 믿었다.하지만 임재욱이 잊고 있었던 부분이 하나 있는데, 그건 바로 신시연이 이제 갓 20살을 넘은 꽃다운 여자아이라는 것이다.해외에는 불안정 요소도 많고 미처 생각지 못하는 위험도 많다.게다가 젊은 나이라 자칫 잘못하면 그릇된 길로 들어서기도 아주 위험하고 말이다.신시연 곁에 사람을 함께 보내긴 했지만 그렇다고 하여 24시간 동안 찰싹 달라붙어 다닐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유시아와 결혼하고 나서 신혼에 푹 빠져 있는 동안 신시연에게 더 많은 관심을 주지 않았기에 이러한 일이 일어난 게 아닌지 죄책감이 들기도 했다.지금 임재욱은 신서현에게 미안할 뿐이다. 하나뿐인 동생을 이 지경으로 만들었으니.하지만 그가 말한 본의와 달리 듣고 있는 유시아는 또 다른 뜻으로 받아들이게 되어 있다.유시아의 기억으로는 신시연이 해외로 보내진 이유는 이러하다.그때 신시연은 정운시 대학교 교내 사이트에 유시아를 먹칠하는 게시글을 올리면서 유시아로 하여금 학업을 이어갈 수도 수업을 들을 수도 없게 악한 상황을 만들었었다.마침 그 일을 소현우가 알게 되면서 유시아에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