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시아를 무릎 꿇게 해 이 분쟁을 면하게 하려는 것이었다.웨이터는 어느 장소에서든 모두 최하층이고 체면과 존엄도 짓밟힐 수 있다.임재욱도 유시아의 창백한 얼굴을 바라보며 양옆에 놓인 두 손을 점점 꽉 움켜쥐고 입술을 오므렸다. 조금만 더 기다려보고 유시가 이 굴욕을 참을 수 없을 때 도와주려고 했다.하지만 몇 초 뒤, 유시아는 무릎을 꿇었다. 두 무릎을 바닥에 대고 머리를 깊이 파묻은 채 한 손으로는 바닥을 짚고, 다른 한 손으로는 깨끗한 휴지를 들고 이유비의 신발 위에 묻은 술을 조금씩 닦아냈다. 유시아는 임재욱이 자기를 도와줄 리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만약 유시아가 무릎을 꿇지 않고 닦아주지도 않는다면 여기를 떠날 생각조차 하지 말아야 한다.임재욱의 모든 여자 중에서 유시아는 가장 보잘것없고 비천한 사람이었다.여기까지 생각할수록 유시아의 마음은 마치 칼이 이리저리 휘젓는 것처럼 온통 피투성이가 된 느낌이었다. 너무 아픈 그녀는 휴지를 든 손마저 살짝 떨렸다.임재욱의 각도에서는 유시아의 깡마른 등, 그리고 긴 머리카락만 보였다.임재욱은 약간 정신이 나갔고 심지어 얼떨떨하기까지 했다.'대체 뭘 하는 걸까? 시아는 또 어떻게 생각한걸가?'한참 후에야 유시아는 손을 거두었다."아가씨, 이 정도면 괜찮으시겠습니까?" 이유비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저 발을 들어 하이힐의 굽으로 유시아의 손등을 세게 밟았다.무딘 칼로 살을 베는 듯한 통증이 손등에서 퍼져 나오더니 유시아는 비명을 질렀다. "아…"이유비는 의기양양하게 그녀의 발밑에서 발버둥 치는 그 작은 손을 바라보며 냉소했다. "이번 일로 네가 기억 잘하고 물건을 똑바로 들고 자격을 갖춘 웨이터가 돼야지..." "그만해!" 임재욱은 마침내 차가운 얼굴로 입을 열었다. "우리 룸으로 돌아가자!" 주 매니저도 얼른 사과했다. "네, 아가씨 화 푸세요. 일개 웨이터랑 시시콜콜 따지지 마세요..." 두 사람은 주 매니저에 의해 재빨리 방으로 들어갔고 유시아는 여전히 무릎을 꿇
유시아는 천천히 자신을 꼭 끌어안고 바람을 피해 구석진 곳에 앉았는데 그 모습은 마치 가련한 어린 거지 같았다.주위는 어둡고 추우며 아무도 없다. 유시아는 억울함, 연약함 그리고 붕괴를 거리낌 없이 털어놓을 수 있었고 놀림당할 염려도 없었다.그제야 유시아는 그동안의 모든 노력이 오늘로 물거품이 되였다는 것을 깨달았다.모든 것이 다시 원점으로 돌아갔다.유시아는 여전히 가진 것 없이 아무한테나 괴롭힘당하고 짓밟히는 처지이다. 하지만 이번에는 다시는 그녀를 구할 수 있는 소현우가 없다.유시아는 소현우를 만나 이미 모든 운을 다 써버렸기 때문에 이제는 그렇게 운이 좋지 않았다.유시아는 더욱더 자신을 끌어안았고 그녀의 울음소리도 차가운 바람 속에 묻혔다.누군가 옥상에 올라와도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유시아는 자신의 슬픈 일에 잠겨있었다.핸드폰의 손전등에서 나오는 하얀 빛이 유시아의 얼굴을 비추자, 그녀는 깜짝 놀라며 본능적으로 손을 뻗어 자신의 눈을 가렸다. 남자의 얼굴은 잘 보이지 않았지만 그래도 임재욱이 아니라는 것은 더할 나위 없이 뚜렷하게 감지되었다.'하긴, 지금 임재욱은 아마도 그의 새 애인을 껴안고 룸에서 함께 놀고 있을 텐데 어떻게 옥상에 와서 찬 바람을 쐬겠어?'남자는 코웃음을 치면서 유시아의 붉어진 눈동자와 쓸쓸하고 공포에 질린 표정을 보더니 입고 있던 검은색 외투를 벗어 그녀의 몸에 던졌다. "한밤중에 왜 여기서 왜 울고 있어요? 여자 귀신을 연기하세요? 얼어 죽지 마세요. 그러다가 흉가로 되겠어요."큰 키와 차가운 음색은 젊어 보이는 모습이었다.유시아는 멍해 하더니 콧소리가 심하게 났다."감사합니다!" 유시아는 남자의 얄팍한 모습을 올려다보고는 걱정스러웠다. 게다가 유시아의 드레스룸에는 옷이 있었다. "옷은 필요 없습니다. 그냥 입으세요..." 유시아는 바닥에서 일어나 외투를 돌려주려고 했다. 그런데 막상 일어나 보니 두 다리가 얼어서 너무 저려 힘을 쓸 수가 없었다. 심지어 두 다리뿐만 아니라 그녀의 손도 무거운
5분 후에 화장실 문이 열렸다. 임재욱이 고개를 돌려보니 유시아가 허리를 살짝 구부린 채 화장실 문 앞에 서 있는 것을 보았다. 유시아의 얼굴은 여전히 가엾을 정도로 창백했다. 뺨 맞은 쪽 얼굴에는 뚜렷하지 않은 손가락 자국이 있었다."생리에요."유시아는 한 손으로 화장실 문틀을 짚고 임재욱을 한 번 더 쳐다보며 물었다."짐승도 이 정도는 아니겠지요?" 임재욱은 안색이 안 좋았다."나를 어떤 사람으로 생각하는 거야?" 유시아는 침대로 가서 몸을 웅크렸다. "그럼 왜 아직 안 가는데요?" 그녀는 또 스스로를 비웃으며 말을 이어갔다."아니면, 그 따귀에 내가 무릎을 꿇고 사과해도 여전히 당신 내연녀의 화를 풀어주지 못해 그녀를 대신해서 날 혼내주러 왔어요?" "네 눈에는 내가 그렇게밖에 안보이니?" 임재욱은 몸을 돌려 침대 위에 웅크리고 있는 유시아를 바라보며 어두운 얼굴로 그녀에게 다가왔다. "방금 걔가 너한테 그렇게 굴었을 때 넌 왜 나에게 도움을 요청하지 않았어?" "당신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것이 과연 소용 있을까요?" "소용없다는 건 어떻게 알아?" 아무도 정면으로 대답하려 하지 않았고 되묻기만 하여 원래부터 풀지 못한 문제를 무한히 쌓아 올리게 되었다.유시아는 입을 움직였지만 그저 참담하게 웃었다. 유시아는 감옥에 가고 싶지 않았을 때 임재욱에게 도움을 청한 적이 있었다. 그리고 늙은 남자에게 지고 싶지 않을 때도 발버둥을 쳤고 굴욕당하기 싫을 때도 반항을 했다.하지만 소용이 있었을까?임재욱은 유시아의 괴로움을 여태껏 외면했다. 임재욱에게 도움을 청하는 것은 주제넘게 굴거나 심지어 두 배의 굴욕을 당하는 것에 불과하다.임재욱은 유시아의 창백한 얼굴을 보면서 가볍게 한숨을 쉬고 침대 옆에 앉아 따뜻하고 넓은 손바닥을 그녀의 아랫배 위에 올렸다. 얇은 스웨터를 사이에 둔 열기가 서서히 유시아에게 전달되어 그녀는 약간의 시름에 잠겨 있었고 곧 임재욱의 손을 밀쳐 자신의 구름이를 안아 구름이의 털로 자신을 따뜻하게 했다.
임재욱은 유시아를 힐끗 쳐다보고는 상대하기 귀찮아서 일어나서 그녀의 작은 방에서 따뜻한 음식을 찾아 먹이고 싶었다.지난번 홍콩에 있었을 때, 병원의 여자 간호사가 임재욱에게 여자들이 생리 기간 때 생강 대추차를 마시면 복통을 완화할 수 있다고 말했다.유시아는 한 달에 한 번씩 아파하는데, 이런 물건은 그녀의 집에 항상 비치해야 한다.임재욱은 유시아의 작은 방을 한 바퀴 둘러보았지만 끝내 찾지 못했다. 오히려 입구에서 그녀가 신발장 위에 올려놓은 종이 봉지를 보았다. 손을 뻗어 열어 보니 안에는 검은색 남자 코트가 있었다. 남자 스타일! 은은한 페퍼민트 향기가 묻어있었다.임재욱은 침대 위에 웅크린 유시아를 돌아보며 물었다."이게 누구 옷이야?" 유시아는 구름이를 안고 눈꺼풀도 뜨지 않은 채 대답했다."당신이 상관할 일이 아니에요!"임재욱은 어느새 눈살을 찌푸리고 외투를 잡고 있던 손가락도 무의식적으로 조여와 실과 실 틈을 도려내다시피 했다.임재욱은 유시아와 바로 앞에서 한바탕 말다툼을 벌였는데, 그녀는 바로 남자의 옷을 집으로 가져왔다.'다음에 남자랑 같이 데려와야 하는 거 아니야?'"지난번 내가 왔을 때 나한테 그렇게 거칠게 굴더니..." 임재욱은 그녀를 바라보며 입가에 까칠하고 매서운 웃음을 지었다. "난 아직도 순진하게 네가 소현우를 위해 평생 몸을 옥처럼 지키리라 생각했는데, 보아하니 나는 여전히 너를 과대평가하고 있었구나." 소현우의 이름을 들었을 때 유시아는 그제야 침대에서 일어나 앉았고 표정이 약간 차가워졌다."임재욱, 나에게 그의 이름을 언급하지 마!" "이미 죽은 사람일 뿐인데 언급 못 할게 뭐가 있겠어? 게다가 너도 곧 그를 잊어버릴 거잖아?" 임재욱은 말하면서 그 옷을 들고 유시아를 향해 다가와 손을 뻗어 그녀의 옷깃을 잡고 품에 안으며 헐떡이는 목소리로 말했다."유시아, 일이 이 지경까지 됐는데 너는 아직도 그를 생각하고 있는 거야? 응?" 만약 유시아가 여전히 소현우를 생각한다는 것은 동시에 그녀는 여
격렬한 몸부림으로 인한 복통에 공포와 슬픔이 겹쳐 유시아의 작은 얼굴은 더욱 창백해졌다. 심지어 호흡마저 흐트러졌다. 임재욱을 바라보는 눈빛은 공포가 더해져 마치 덫에 걸린 사슴처럼 공포에 질린 채 사냥꾼을 바라보는 것 같았다. 임재욱은 마음이 갑자기 풀리더니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시아야, 매번 나를 화나게 하면 너에게 도대체 무슨 좋은 점이 있니?" 유시아는 실소를 금치 못했다. 임재욱의 눈에 유시아는 도대체 얼마나 천하게 보이는 걸까?임재욱은 유시아가 예전처럼 자존심과 체면을 버리고 비위를 맞춰주기를 기대했다.결국 유시아가 임재욱을 이렇게 만든 것이다! 그 바보 같은 여자는 일찍이 임재욱의 인생에 나타났다. 그러나 스무 살이 되던 해에 임재욱은 유시아를 감옥에 보내 직접 그녀를 죽인 셈이다.그 후로 유시아의 심장은 다시는 임재욱을 위해 뛰지 않았다.임재욱은 유시아가 아무 말을 하지 않자 손을 뻗어 그녀의 뜨거운 이마를 짚고 눈살을 찌푸렸다."열이 나는데, 집에 약 있어?" 유시아는 눈을 감았다. "재욱 씨, 나 피곤해!" 그녀의 쉰 목소리에는 수없이 많은 피곤함이 섞여 있어 임재욱의 가슴을 아프게 했다. 임재욱은 유시아의 이마를 만졌다."그럼 푹 자!" 육체적으로 몹시 피곤한 데다가 고열로 정신이 혼미해진 유시아는 정말 빨리 잠이 들었다. 방안은 매우 조용했고 공기도 맑은 향기를 풍겼다. 구름이는 유시아의 이불 속을 기웃거리며 가끔 임재욱을 한 번 쳐다보곤 했다. 임재욱은 유시아의 침대 옆에 앉아 점점 평온해지는 그녀의 숨소리를 듣고 나서야 한숨을 돌렸다. 임재욱은 손을 뻗어 내동댕이쳐진 검은 코트를 집었다. 좋은 질감의 베르사체 브랜드인 데다가 한정판이었다. 이 코트를 입을 수 있는 사람이 아마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임재욱은 말없이 옷 라벨에 적힌 상품 번호를 적고 다시 제자리에 갖다 놓고 살금살금 유시아의 작은 집을 떠났다. 계단을 내려가고 있을 때 이유비의 전화가 걸려왔다. 임재욱은 화면에 점프하는 비고 이름을
햇빛 화창한 어느 날, 이유비는 매니저와 함께 대우 그룹으로 향해 연예인 모델 계약서를 작성했다.한때 수많은 여자 연예인들이 서로 물고 뜯으며 쟁취하려 했던 대우 그룹 대변인의 신분이 마침내 이유비의 손에 떨어졌다.이 또한 앞으로 그녀는 더이상 이름 없는 작은 모델 신분이 아니라는 의미이기도 하다.연예계에서의 그녀의 지위는 계속하여 승승장구할 것이고 풍부한 자원, 명성, 그리고 재물까지 모두 제 발로 쏟아져 들어올 것이다.이유비의 매니저는 계약서를 작성하고 임재욱과 몇 마디 나누며 인사를 건네고는 자리를 떴지만, 이유비는 나가지 않았다.그녀는 임재욱을 따라 사무실로 들어가더니 애교를 부리기 시작했다.“어제 전화했는데 끊어버렸길래 난 또 대표님이 화나셔서 다시는 날 안 볼 줄 알았잖아요.”“그럴 리가?”임재욱은 이유비의 턱을 슬며시 어루만져주며 입을 열었다.“내가 널 어떻게 안 보겠어? 어쨌든 넌 이제 대우 그룹의 대변인이고 앞으로 연예계에서 가장 인기 있는 연예인이 될 텐데. 어젯밤에는 일이 좀 있어서 못 받은 거지 일부러 끊은 게 아니야.”이유비는 입술을 삐죽이며 임재욱의 가슴팍에 기대 투덜거렸다.“그럼 앞으로 그 웨이터 보지 말고 나만 봐줘요...”그녀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문밖에서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임재욱은 유리문 밖에 비친 그림자를 보고는 이유비를 밀어내며 자신의 몸에서 내려가라고 눈치 줬다.그러나 이유비는 계속하여 붙어있고 싶다고 고집을 부렸고 결국 두 손 두 발 다 들어버린 임재욱이 외쳤다.“들어오세요!”사무실의 문이 열리고 임재욱의 일상생활을 책임지고 있는 조윤희 비서가 들어오더니 손에 든 커피를 임재욱의 책상에 단정하게 올려놓고 그의 다리 위에 앉아있는 여자를 힐끗 쳐다보더니 입을 열었다.“대표님, 커피 타왔습니다.”임재욱이 싱긋 웃으며 답했다.“감사합니다.”조윤희가 떠난 뒤에야 임재욱은 다리 위에 앉아있는 여인을 밀어냈다.“먼저 돌아가. 난 좀 이따 회의가 있어서 저녁에 다시 찾아갈게.”“약속했어요
임재욱이 제멋대로 굴며 자신의 말에 반항해도 임태훈은 참는 데까지는 참곤 했다. 그의 한계를 건드리지 않는 이상 임태훈은 거의 임재욱과 싸워본 적이 없었다. 어쨌든 모두 임씨 가문의 후계자이고 외아들인데 교육을 하되 절대 그를 몰아붙여 자손과의 화목을 파괴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임재욱은 덤덤한 안색으로 소파에 앉아 임태훈과 얘기를 나누다가 겸사겸사 야생가의 얘기도 꺼내 보았다.“할아버지, 야생가의 사장, 한서준이라는 사람에 대해 들어보신 적이 있으신가요?”임재욱은 어릴 때부터 줄곧 타지에서 살아왔기에 할아버지의 손에 이끌려 정운시에 온 시간도 5년이 채 되지 않았다.자세히 계산해보면 임재욱이 정운시에서 보낸 시간은 한서준이 정운시에 머문 시간보다도 짧았다.하지만 그와 달리 임태훈은 정운시에서 몇십 년 동안 거주하였었기에 어쩌면 임태훈이 사설탐정보다 한서준에 대해 더 잘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임태훈은 잠깐 멈칫하더니 임재욱에게 되물었다.“왜 갑자기 야생가에 관해 묻는 것이냐?”“이쪽에 투자 좀 해보려고요.”임재욱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한 말투로 간단하게 답했다.“그런데 야생가는 대우 그룹이 오락산업에 발을 들이는 데에 장애물과 같은 존재라서 특별히 할아버지께 여쭈어보고 싶습니다.”임태훈은 별다른 의심 없이 그의 대답을 수긍하고는 피식 웃으며 입을 열었다.“젊은 사람이 계속 진취적으로 나아가는 것은 좋지만 요 몇 년간 보면 오락산업의 형세가 그렇게 좋지 않아서 투자를 안 하는 게 더 나아. 그리고 그 한서준이란 사람은 미국계 한국인인데 그 집안이 미국에서 꽤 큰 세력을 가지고 있다고 하더군...”말을 반쯤 했을 때 문밖에서 갑자기 엔진 소리가 들려왔다.이윽고 정유라가 손에 종이봉투 몇 개 들고 방으로 들어가려는데 그녀는 소파에 앉아있는 임재욱의 얼굴을 보고는 저도 모르게 방긋 미소를 지었다.“재욱 씨, 오셨어요...”말을 하며 그녀는 재빨리 다가와 임재욱의 옆자리에 앉았다.“오늘 친구들과 차도 마시고 쇼핑도 할 겸 나갔는데
“목숨은 건질 수 있지만...”아직 진정되지 않은 매니저가 머뭇거리며 입을 열었다.“하지만 남은 인생도 이제 망한 것 같습니다.”이유비는 모델이었다. 게다가 앞으로는 배우로 이미지를 바꿔 활동할 예정인 유망주였지만 두 다리를 잃어 장애가 생긴 미인은 연예계에서 조금의 관상 가치도 남지 않게 된다. 미인이 넘쳐나는 연예계에 누가 그녀에게 신경이라도 써주겠는가?대변인 계약서를 체결했다고 하더라도 이유비는 더이상 대우 그룹의 대변인으로 활동할 수 없다--이 점은 임재욱도 이미 예상하고 있었다.정유라든 임태훈이든 모두 밖에서 나뒹구는 여우 년이 대우 그룹의 대변인으로 활동하며 대우 그룹의 이미지에 먹칠하도록 놓아둘 리가 없다.이유비는 젊고 기세가 드높아 세상 무서운 줄도 모르며 자제할 줄도 몰랐고 할아버지와 정유라는 인정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사람들이니 이유비의 최후가 이토록 처량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하지만 일 처리가 이토록 절대적이고 잔인한 걸 보아하니 영감탱이의 수법보다는 오히려 정유라의 수법 같았다.영감탱이는 사람을 처리하든, 일을 처리하든 모두 여지를 남겨주는 것을 좋아한다. 비록 유시아가 당시 정말 그를 죽일 뻔했지만, 임태훈은 그저 그녀를 감옥에 보내 며칠간 괴롭힐 뿐이었지 그녀의 두 손을 정말 망쳐놓지는 않았었다.하지만 반면 정유라는 인간으로서 최소한의 인정은 베풀어야 한다는 도리를 모른다.가끔 여자의 질투가 극에 달하면 정말 목숨을 걸고 도박할 수도 있다.임재욱은 이유비의 처지가 조금 안타깝게 느껴졌다.“이 일에 대해서는 저도 알겠으니 좀 이따 돌아가서 비서더러 평생 먹고 살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될 돈을 보내라고 할게요.”임재욱은 말을 마친 뒤 매니저가 무어라 입을 열기도 전에 전화를 끊어버렸다.이윽고 그가 고개를 돌리자 정유라가 입구에서 싱긋 미소를 짓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재욱 씨, 무슨 일이에요? 얼마나 급한 일이길래 식사도 안 하시고 밖에 나와서 전화를 받으세요?”임재욱은 의미심장한 그녀의 미소를 보자마자 곧바
늦은 밤, 유시아의 카카오톡을 받았을 때 임재욱은 병원에 있었다.신시연은 도우미의 도움을 받으며 진료실에서 여러 검사를 받았고 그동안에 임재욱은 밖에서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늦은 밤의 사립 병원이라 사람이 그리 많지 않았다.당직을 서는 의사 선생님과 간호사 외에 거의 사람이 없이 무척이나 쓸쓸해 보였다.임재욱은 복도를 한참이나 누비다가 의자에 걸터앉았다.유시아를 병원으로 바래다주고 돌아서는 길에 신시연의 전화를 받고서 오게 된 것이다.배가 아프다고. 당장이라도 죽을 듯이 아프다고.신시연은 며칠 전에 병원에서 여러 번 신체검사를 받았으나 해외에서 그러한 몹쓸 짓을 당하며 우울증과 부인병이 있는 외에 다른 수치들은 정상 범위 안에 있었다.그 말인즉슨,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것이다.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임재욱은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신시연에게 남은 ‘가족’이라고는 임재욱 하나뿐이니 어찌 됐든 그녀를 잘 지켜야 하는 마음뿐이었다.그 누구에게도 다시는 상처를 받지 않게끔.바로 이러한 마음가짐으로 하여 임재욱은 그녀를 직접 병원까지 데리고 오고 의사 선생님 입에서 아무런 문제도 없다는 확답을 듣고 나야만 마음이 놓일 수 있다.애타게 검사 결과를 기다리고 있는 가운데 핸드폰 알림 소리가 울렸다.유시아가 보낸 카카오톡인데, 내용은 아주 간단했다.[보고 싶어요.]임재욱은 고개를 숙인 채 카톡 내용을 거듭 곱씹으며 유시아 사진으로 되어 있는 그녀의 프로필 사진을 바라보며 입꼬리가 주체하지 못하고 자꾸 올라갔다.‘내가 보고 싶어? 별거한 지 하루 만에 벌써 내가 보고 싶은 거야?’‘우리 시아 이제 제법 솔직하네.’핸드폰을 손에 꼭 쥐고 어떻게 답장할지 생각하고 있을 때 응급실 문이 열렸다.도우미 김향화가 얼굴에 핏기 하나 없는 신시연을 부축하고 걸어 나왔다.신시연은 디자인이 아주 심플한 데님 스커트를 입었고 윤기가 별로 없어 보이는 머리를 돌돌 말아 묶어 올렸다.무척이나 초췌해 보이는 것이 가여운 느낌도 물씬 풍기고 있어 기고만장했던 그
유리 구두를 품속에 꼭 안고 있는 유시아를 보고서 임재욱은 순간 이러한 생각이 들었다.참으로 달래기 쉬운 여자라는 것을.특히 결혼하고 나서 아주 살짝만 잘해주어도 유시아는 아주 오랫동안 기뻐하는 것만 같았다.유시아는 늘 임재욱 앞에만 서면 스스로 자세를 낮추고 자기를 낮은 위치에 놓는 데 습관 되어 있다.임재욱은 고개를 숙여 그녀의 정수리에 뽀뽀했다.“앞으로 매년 생일마다 예쁜 유리 구두 선물해 줄게. 어때?”“좋아요.”유시아는 말하면서 아주 유치하게 그를 향해 손가락을 내밀었다.“손가락 걸고 약속해요. 절대 어기지 않겠다고.”백화점에서 나온 두 사람은 일단 화실로 향했다.새로 구매한 공예품을 적당한 자리에 올려놓고 유시아의 제안으로 이채련의 병원까지 바래다주었다.유시아는 자기가 뱉은 말은 어떻게든 지키는 타입이라 이채련과 이미 약속했으니 꼭 지켜야 했다.하물며 자식도 없는 이체련에게 마지막 이 시간들이 더더욱 외로울 것이다.외부인들이 보기에도 불쌍할 정도로 외롭다.임재욱이 아무리 말해도 소용이 없었고 이채련에게 주어진 시간이 얼마 없다고 하니 마음은 내키지 않았지만 보내주었다.차는 곧 사립 병원 앞에 멈춰 섰고 임재욱은 차에서 내리지 않았다.유시아는 차창에 대고 거듭 강조했다.“유리 구두랑 드레스들 옷방에 고이 모셔두도록 해요. 마구 놓지 말고요.”“알았어.”임재욱은 말하고서 손을 내밀어 그녀의 목을 확 잡고서 찐한 키스를 남기고 나서야 순순히 놓아 주었다.“얼른 가 봐.”“조심해서 가요.”임재욱은 조수석에 앉아 한결 가벼워진 그녀의 뒷모습이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보고서야 시선을 거두고 집으로 향하려고 했다.가는 길에 갑자기 신시연으로부터 전화가 걸려 왔다.“오빠, 배가 너무 아파요.”...병실로 돌아와 보니 이채련은 아직 자고 있지 않았다.침대에 멍하니 누워 재미가 일도 없는 예능 프로를 보고 있었다.유시아가 문을 밀고 들어오는 것을 보고 이채련은 놀라고도 기뻤다.“시아야, 늦은 시간에 웬일이야?”유시아
쇼핑은 늘 설레는 일이다.유시아는 자기 취향대로 화실 장식품으로 쓰일 공예품을 골랐다.이윽고 임재욱은 또 유시아를 데리고 근처에 있는 매점으로 향했다.지난번에 두 사람은 함께 쇼핑하면서 많은 옷을 샀었지만, 신서현 부모님께 갑작스러운 상황이 일어나면서 유시아는 그 모든 옷을 모조리 청소 아주머니에게 줘 버렸다.그때의 아쉬움을 채워주기 위해 임재욱은 또다시 쇼핑하려고 한 것이다.게다가 다음 주면 대우 그룹 상장 20주년이다.정식적인 석상에 모습을 드러낼 때 유시아를 자기 아내 신분으로 남에게 소개해 주고 싶어 이브닝 파티에 어울릴만한 드레스와 신발을 살 예정이다.드레스는 그럭저럭 큰마음이 가지 않았는데, 유시아는 그 신발이 마음에 들었다.은백색의 하이힐로 예쁜 보석들로 가득 박혀 있어 매점 불빛 아래서 유난히 반짝이는 것이 신데렐라 동화에 나올 법한 유리 구두 같았다.매점 직원은 유시아가 마음에 들어 하는 것을 보고 바로 다가왔다.“손님 안목이 참 좋으시네요. 이 제품은 저희 디자이너 선생님의 최신 디자인으로 지금 딱 한 켤레만 있습니다. 만약 이 신발을 신고 나가신다면...”임재욱은 갑자기 직원의 말을 끊어버렸다.“이미 결혼했고요. 이 사람은 제 아내예요.”유시아는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들었는데, 자기를 바라보며 웃고 있는 그를 보고서 따라서 웃었다.“맞아요. 이 사람이 제 남편이에요.”매점 직원은 멍하니 있다가 바로 얼굴에 미소를 머금고 베스트 쇼핑 가이드다운 실력을 드러냈다.“어머, 어쩐지 너무 어울리신다 했어요...”직원의 칭찬에 두 사람은 얼굴에 웃음꽃이 피어났다.이윽고 매점 직원은 분위기를 파악하며 유리 구두에 대해 더욱 디테일한 설명을 첨부하기 시작했다.“이 제품의 새끼 양가죽으로 만들어졌으므로 착용감이 엄청 좋으실 거예요. 하루 종일 신고 걸으셔도 전혀 문제가 없다는 말이죠. 게다가 우리 디자이너 선생님이 즉흥으로 만들어내신 작품이라 절대 똑같은 제품을 시중에서 보실 수 없을 거예요.”한 켤레일 뿐만 아니라 사이
한서준은 눈살을 찌푸리며 되물었다.“내가 뭐?”“한서준 씨는 당당해요?”유시아는 바로 질문을 질문으로 돌려주었다.“임씨 가문에 접근한 그 의도를 다른 사람들이 모를 것 같아요? 할아버지, 재욱 씨 그리고 나까지 똑똑히 알고 있어요. 청아 씨만이 한서준 씨를 사랑해서 자신을 속이고 있는 거라고요. 그렇게 쭉 모르는 척을 하며 모든 걸 감당하고 있었던 거라고요. 한서준 씨 역시 청아 씨를 이용한 게 아닌가요?”마지막 한 마디에 한서준은 침묵하고 말았다.그렇다. 임청아에게 접근한 이유는 유시아가 ‘스파이’로 움직여 주지 않겠다고 거절했기에 어리석어 보이는 임씨 가문 천금을 노리게 된 것이다.하지만 사람 마음이라는 것은 결국 변하게 되어 있다.임청아 대한 마음은 모략에서 시작했으나 시간의 흐름에 따라 그 마음이 점점 사랑으로 끝을 맺게 된 것이다.늘 밝고 긍정적인 에너지를 띠고 다가왔던 임청아가 어두운 자신의 삶을 밝게 비춰주는 것만 같았다.따라서 한서준은 임청아와 평생을 함께하고 싶다는 마음이 차츰 생기게 된 것이다.임태훈이 반대한다고 하더라도 꼭 자기 곁으로 데리고 오고 싶었다.“청아 씨 지금 몸도 마음도 상처투성이에요.”“만약 청아 씨 행복하게 해 줄 수 없다면 신중하게 생각하고 결정하는 게 좋을 거예요.” 말을 마치고 유시아는 차 문을 밀고 차에서 내려 병원 밖으로 걸어갔다.택시에 오른 유시아는 긴 망설임 끝에 끝내는 더 스케치 화실 주소를 운전 기사에게 알렸다.차는 화실 맞은 편에 세워졌고 유시아는 화실 바로 맞은편에 있는 커피숍으로 들어가 창가 자리에 앉았다.화실 안의 상황을 바로 체크할 수 있고 자신의 정체를 드러내지 않아도 되는 최적의 위치라고 할 수 있다.한참 지나고 나서야 수많은 경호원들이 임태훈을 사이에 두고 화실에서 걸어 나오는 것이 보였다.임태훈은 벤틀리에 올라 강한 기운을 남기고 자리를 떠나버렸다.유시아는 그제야 한시름을 놓고 들고 있던 커피잔을 내려놓고는 바로 화실로 향해 달려갔다.화실 안과 밖은 겉은
전화를 마치고 유시아는 혼자 밖에 없는 휴게실을 보고서 깊은 번뇌에 잠겼다.남을 탓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에 임태훈처럼 막무가내로 어처구니가 없는 노인이 있다는 게 도통 이해가 되지 않았다.임태훈이 끔찍이 여기는 임청아를 유시아가 계단에서 밀어버린 것도 아닌데, 왜 애꿎은 자기 화실을 닫으려고 하는지 알 수 없었다.집안 내부에 문제가 생기면 일단 스스로 반성하는 법부터 배워야 하는데, 그게 무엇이든 일단 남한테서 문제를 찾고 있으니, 권력을 믿고 사람을 업신여기는 것이 분명했다.유시아는 생각하면 할수록 머리가 복잡해졌고 불안함도 점점 커졌다.지금 운영하고 있는 더 스케치 화실도 용재휘가 먼저 시작한 것인데, 그와 더불어 학생들까지 모두 함께 넘겨주었는데, 만약 이대로 화실을 망쳐버린다면 용재휘에게 너무 미안할 것 같았다.임재욱과 임태훈이 어느 정도로 얘기했는지 알 수 없었지만 화실이 그들 싸움의 희생물이 되지 않기만을 바랄 뿐이었다.임재욱에게 전화를 걸어 상황을 묻고 싶었으나 감히 그럴 용기가 없어 일단 지켜보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떨리는 심장을 부여잡은 채로.그렇게 한참이나 심장을 조이고 있었지만, 걸려 오는 전화는 없었다.유시아는 일이 어느 정도 망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학생 채팅방에 오늘 갑자기 일이 있다며 수업을 뒤로 미룬다고 알렸다.언제 다시 수업을 시작할지는 소식을 기다리라며 덧붙이기까지 했다.톡을 보내고서 유시아는 더 이상 핸드폰을 보지 않고 바로 병원 밖으로 나갔다.그러나 병원 대문을 나오자마자 한서준이 정면에서 오고 있었다.“유시아.”유시아는 고개를 들었고 그를 보게 되는 순간 정신이 아찔해 났다.직감이 알려주건대, 절대 좋은 일이 없다는 것이다.화실의 생존 여부도 알 수 없는 상황에서 그의 심기까지 건드리고 싶지 않았다.한서준은 쉽사리 유시아를 놓아 주지 않았고 손을 내밀어 유시아의 손목을 꼭 잡았다.“물어볼 일이 있어.”말하면서 근처에 있는 지프차를 가리켰다.“차에 타서 얘기 하자.”“그쪽이랑 할 말
유시아는 그 말을 이어받지 않고 집사의 바람대로 타이르기 시작했다.“몸이 아직 많이 허약해요. 먹고 싶지 않아도 억지로라도 좀 먹어야 하거든요. 일이 어찌 됐든 일단 건강부터 챙겨야 해요.”임청아 그 말을 듣고서 쓴웃음을 지었다.“건강 회복되면 할아버지한테 잡혀가서 집에 감금되는 것밖에 더 있겠어요?”“그렇게 생각하지 말아요.”유시아는 눈살을 찌푸리며 덧붙였다.“어찌 됐든 할아버지 마음은 한결같을 거예요. 청아 씨를 아끼고 사랑하는 거요. 서로 대화가 필요한 거 같아요. 서로 터놓고 얘기하고 나면 오해가 풀리고 마음도 풀리면서 모든 게 원점으로 돌아갈 수 있을 거예요.”임청아의 입가에 피식 웃음이 새어 나왔다.“저도 그렇게 생각했었어요. 아이 낳고 나면 할아버지도 서준이도 원한을 내려놓고 행복만 할 수 있다고요.”“근데 이렇게 몸도 아끼지 않고 점점 더 막무가내로 나가면 두 사람 사이의 원한은 점점 더 짙어질 거예요.”유시아는 말하면서 도우미 손에서 보신탕을 가져와 천천히 불며 임청아의 입가로 가져갔다.임청아는 생각 밖으로 무척이나 순순하게 유시아의 말을 따랐고 그녀의 말에 이치가 있는 것 같아 조용히 보신탕을 받아 마셨다.도우미와 집사는 두 사람이 티키타카 서로 말을 주고받는 것을 보고 서서히 마음이 놓였다.임청아가 뭐라도 먹기 시작하여 자기도 모르게 한시름을 놓으며 자리까지 비켜주려고 했다.두 사람이 마음 편히 말할 수 없을까 봐 눈치껏 일어서려는 것이다.“작은 사모님, 아가씨와 천천히 얘기하고 계세요. 밖에 나가 있을 테니 필요한 거 있으시면 언제든지 부르시고요.”“네, 가보세요.”도우미 일행이 나오고 나서야 유시아는 본론으로 들어갔다.“한서준 씨는 알고 있어요?”임청아는 고개를 저으며 쓴웃음을 지었다.“그런다고 숨겨질 일도 아니잖아요.”요즘 임태훈뿐만 아니라 한서준도 눈을 부라리고 임청아를 찾고 있었다.두 사람의 시선을 피하고자 아파트도 호텔도 들어갈 수 없었고 버려진 강아지처럼 유시아 화실에 몸을 숨기고 지낸 것
임청아 이름 석 자가 임재욱의 입에서 나오자, 유시아는 순간 청천벽력을 맞는 것만 같았다.심지어 지금까지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으니 말이다.한참 지나고 나서야 겨우 떨리는 심장을 부여잡고 물었다.“청아 씨가 왜 병원에 있는 거죠?”임청아는 임신한 것을 알고 매사에 조심하며 걸음 하나도 천천히 옮겼었다.게다가 해외에 있는 친구와 연락하여 해외로 떠날 준비까지 마쳤다고 했었다.그런데 관건이 되는 순간에 계단에서 굴러떨어졌다고?“할아버지를 너무 쉽게 생각한 거 아니야?”임재욱은 말하면서 차갑게 웃었다.“네 화실에 청아 숨겨 놓았잖아. 할아버지께서 그걸 과연 모르고 있었을 것 같아? 오늘 화실로 청아 데리러 갔었는데, 가지 않겠다고 청아가 하도 우기는 바람에 억지로 묶어서라도 데리고 가겠다며 서로 실랑이를 벌이다가 계단에서 굴러떨어진 거야.”그렇다면 아이를 유산했을지도 모른다.임태훈의 습관에 따라 생각해 본다면 이 화살은 결국 유시아에게로 돌아오게 되어 있다.임재욱이 그렇게 경고하였건만 유시아는 마음이 약한 사람이었다.약해지는 마음에 언젠가는 구렁이에 빠지게 될 날이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날이 바로 오늘 일 줄은 몰랐다. 임재욱은 한숨을 내쉬며 꾸짖고 싶은 마음을 겨우 억눌렀다.“병원 주소 보내줄 테니 얼른 가 봐.”말을 마치고 임재욱은 전화를 끊어버렸다.얼마 지나지 않아 메시지 한 통이 도착했고 운전 기사에게 새로운 목적지를 알려주었다.같은 시각, 병원 안에서.임청아는 이미 수술을 마쳤고 일반 병실로 옮겨져 있었다.이미 가문의 집사와 간호인이 옆에 있었고 병실 문 앞에는 임태훈이 보낸 경호원도 있었다.다만 경호원이 경계해야 할 상대는 유시아가 아니라 한서준이다.따라서 유시아는 별다른 막힘없이 바로 병실 안으로 들어갔다.병상에 누워 있는 임청아는 얼굴에 핏기 하나 없었고 초점을 잃은 두 눈으로 멍하니 천장만 바라보고 있었다.불과 하룻밤 사이에 모든 활력을 잃어버린 모습이었다.집사는 자리에서 일어서서 아주 공손하게 유시아에
조금 전까지 허겁지겁 밥을 먹고 있던 임재욱은 멈칫거리고 말았다.이윽고 고개를 천천히 들어 웃는 듯 마는 듯한 얼굴로 유시아를 바라보며 물었다.“별거하자는 뜻이야?”“그렇게 생각해도 좋아요.”유시아는 숟가락을 내려놓고 머리가 아픈 듯 이리저리 만지작거렸다.“지금 이러한 상황에서 이러는 것도 좋을 것 같아요. 나한테 신경 쓰지 않아도 되고 그 시간으로 시연이한테 집중해도 되잖아요. 나도 마침 어머님 곁에 좀 있어드리고... 서로에게 지금 이게 최우선인 것 같아요.”임재욱은 숨을 깊이 들이마시고서 낙담한 모습으로 말했다.“그래. 네가 좋다고 하면 그게 좋은 거겠지. 그렇게 하자.”말을 마치고 그는 계속 밥을 먹었다.유시아는 그런 그를 바라보고서 아련하게 웃고는 바로 자리에서 일어나 위층으로 올라갔다.이튿날 아침, 유시아는 임재욱이 출근하고 나서야 침대에서 일어났다.일상복 몇 벌과 일상용품을 챙겨 작은 트렁크 안에 놓고 바로 이채련한테 가려고 했다.허씨 아주머니는 트렁크를 들고 내려오는 유시아의 모습에 살짝 당황한 모습이었다.“사모님, 어디 가시는 거예요? 설마... 가출하려는 건 아니죠?”유시아는 허씨 아주머니를 향해 웃었다.“아니에요. 친척분이 좀 위독하신데 제가 옆에서 좀 챙겨드리고 싶어서 가는 거예요. 얼마 걸리지 않을 거고 곧 돌아올 수 있을 거예요.”말을 마치고 트렁크를 들고서 집을 나섰다.이채련이 지내고 있는 병실이 VIP 병실로 널찍한 객실까지 갖춰져 있다.유시아는 간호사에게 접이식 침대와 이불을 요구했고 간단히 정리하고 나니 잘 자리가 아늑하게 마련되었다.이채련은 더 이상 침대에서 내려올 수 없어 하루 24시간을 침대 위에서 보내고 있다.얼굴도 하도 여위어 본연의 모습을 점점 잃어가고 있었다.그전에도 유시아는 이채련에게 이곳에서 며칠 동안 함께 지내고 싶다는 의사를 밝힌 적이 있지만 이채련은 행여나 자기로 인해 두 사람 사이에 흠이 생기게 될까 봐 동의하지 않았었다.지금 이 자리까지 오게 된 것만으로도 갖은 풍
임재욱은 핸들을 꼭 움켜쥐고서 앞만 바라보았으나 두 눈에는 고통과 망연함이 가득했다.“시연이 해외에 있을 때, 몹쓸 짓을 당했어. 한번이 아니라 여러 번이나. 그래서 우울증에 걸리게 된 거야.”유시아는 두 눈이 휘둥그레지면서 볼륨까지 높아졌다.“어머, 어떡해요!”평소에 신시연에 대해 좋은 마음을 가지고 있었던 건 아니지만 그 소식을 듣게 되는 순간 심장이 덜컹 내려앉기는 했다.여자에게 있어서 그런 몹쓸 짓을 당한다는 건 치명적인 타격과 치욕이 아닐 수가 없다.게다가 부모님의 일까지 더해지니 조금 전 식당에서 봤던 신시연의 모습이 이해되었다.임재욱은 말하면서 후회와 자책하는 빛을 드러냈다.“그렇게 가고 싶지 않다는 시연이를 내가 억지로 보낸 거야.”그때는 모든 걸 너무 쉽게 생각했었다.낯선 곳으로 가서 마음을 가다듬고 학업에만 집중하면 자연스레 모든 걸 잊고 새로운 삶을 그려나갈 수 있으리라 믿었다.하지만 임재욱이 잊고 있었던 부분이 하나 있는데, 그건 바로 신시연이 이제 갓 20살을 넘은 꽃다운 여자아이라는 것이다.해외에는 불안정 요소도 많고 미처 생각지 못하는 위험도 많다.게다가 젊은 나이라 자칫 잘못하면 그릇된 길로 들어서기도 아주 위험하고 말이다.신시연 곁에 사람을 함께 보내긴 했지만 그렇다고 하여 24시간 동안 찰싹 달라붙어 다닐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유시아와 결혼하고 나서 신혼에 푹 빠져 있는 동안 신시연에게 더 많은 관심을 주지 않았기에 이러한 일이 일어난 게 아닌지 죄책감이 들기도 했다.지금 임재욱은 신서현에게 미안할 뿐이다. 하나뿐인 동생을 이 지경으로 만들었으니.하지만 그가 말한 본의와 달리 듣고 있는 유시아는 또 다른 뜻으로 받아들이게 되어 있다.유시아의 기억으로는 신시연이 해외로 보내진 이유는 이러하다.그때 신시연은 정운시 대학교 교내 사이트에 유시아를 먹칠하는 게시글을 올리면서 유시아로 하여금 학업을 이어갈 수도 수업을 들을 수도 없게 악한 상황을 만들었었다.마침 그 일을 소현우가 알게 되면서 유시아에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