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대적으로 폐쇄된 공간에 외로운 남녀...임재욱은 자신을 다른 이성의 품에 안겨도 절대 마음이 흐트러지지 않는 사람이라 여기지 않았다. 애초에 그런 고생을 하고 싶지도 않았다.“싫다면요. 여기 우리 집인데 입고 싶은 대로 입을 거예요!”정유라는 그대로 한쪽 무릎을 임재욱 앞에 놓인 카펫 위에 꿇고는 축축한 한쪽 팔을 그의 다리 위에 가로놓았다. 대담하게 행동을 저질렀지만, 그녀의 말투는 조금 삐진 것 같기도 하고 쓸쓸하게도 느껴졌다.“재욱 씨, 저희 이제 결혼한 지도 1년이 다 돼가요. 그런데 왜 아직도 절 이렇게 대하세요?”임재욱은 그 말을 듣고서야 신문에 파묻었던 얼굴을 들어 올려 그녀를 바라보았다.“아니라면? 제가 당신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데요?”정유라가 입술을 깨물며 한참 동안 침묵하더니 이내 용기를 내고 입을 열었다.“재욱 씨, 우리 아기 가져요. 저에게 아기가 생긴다면 앞으로 다시는 재욱 씨에게 들러붙지도 않을 거고요. 가고 싶은 곳이 있다면 얼마든지 가세요. 저를 평생 하인 취급을 한다고 해도 인정할게요.”임태훈은 하루빨리 손자를 보고 싶어 했고 그녀도 사모님의 자리를 굳히기 위해서는 아이가 필요했다.게다가 정유라는 자신이 그의 부인으로서 이 정도 요구를 제기하는 건 정당하다고 생각했다.“지금 무슨 바보 같은 소리를 하는 겁니까? 예?”임재욱은 그제야 손에 쥐어진 신문지를 내려놓고 모호한 표정을 짓고는 정유라의 눈을 마주했다.“당신이 만약 아이를 가지게 된다면 그건 혼외자라고 합니다. 그때의 저처럼 아버지가 없고 보육원에 보내져 자멸하는 겁니다. 알겠어요?”임재욱의 가벼운 말 한마디는 정유라에게 있어 마치 무딘 칼에 살을 베이는 느낌이었다.능지와도 같은 고통에 정유라의 안색은 그대로 새하얗게 질리고 말았다.이윽고 임재욱은 자신의 다리에 걸쳐있던 그녀의 팔을 쳐내고 몸을 일으켜 창가로 걸어가 아래층에 별장을 둘러싼 철통과도 같은 우람진 경호원들과 손목시계를 번갈아 보았다.하지만 여전히 고집을 꺾지 않은 정유라는 다급히
예전에 임재욱은 단지 정유라를 투명인간 취급하며 무시했고 그녀가 그의 앞에서 어떤 억지를 부려도 스스로 모두 차단해버리고 그녀와 그 어떤 대화도 나누려 하지 않고 터치도 하지 않으려 했었다.그러나 정유라는 이번에 그의 언행 속에서 원망을 느꼈다.임재욱도 정유라를 원망했다. 그녀가 당시 약속을 지키지 않은 것을 원망했고 연극을 현실로 만들어 버려 대중들과 할아버지 눈앞에서 진짜 부부가 된 것을 원망했다.유시아가 다시 그의 인생에 나타난 것을 제외하면 정유라는 도무지 다른 원인을 생각해 낼 수 없었다.임재욱은 눈을 가늘게 뜨더니 계속하여 신문지를 넘기며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정유라는 그렇게 창가에서 한참 동안 서 있고서야 몸을 돌려 킹사이즈 침대에 누워 잠을 취했다.밤 12시가 되자 임재욱이 집을 나서는 소리가 또렷하게 들렸다. 정유라는 깊이 심호흡을 하였지만 꿋꿋하게 참아오던 눈물은 결국 하염없이 볼을 타고 흘러 고운 머리카락을 적셨다.저녁에 너무 슬퍼했던 탓인지 정유라는 다음 날 아침 조금 늦게 일어나 아침 식사도 하지 못했다.점심 무렵, 정유라가 거실에 앉아 꽃을 꽂고 있을 때, 밖에서 차 소리가 들렸고 이는 다름 아닌 강석호가 돌아온 것이다.“사모님.”강석호는 집안에 들어와 매우 다정하게 그녀에게 인사를 건넸다.정유라도 인사에 답하고는 물었다.“왜 이제야 들어와요? 재욱 씨를 도와 물건 가지러 온 거예요?”강석호가 고개를 끄덕였다.“네. 오후에 미팅할 때 서류 하나가 필요한데 어르신 쪽에 보관되어 있어서요. 대표님께서 지금은 시간이 되시지 않아 제가 잠깐 가지러 왔습니다.”정유라:“아, 그럼 빨리 가보세요. 괜히 재욱 씨 중요한 일을 그르치지 말고요.”정유라는 위층으로 올라가는 강석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잠깐 사색에 잠겼다.몇 분 뒤, 강석호가 가죽 서류봉투를 들고 위층에서 다급히 내려오는 것을 보자 정유라가 싱긋 웃으며 물었다.“이렇게 급하게 가요?”강석호도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임 대표님께서는 늦는 걸 싫어하시
강석호한테서 걸려온 전화를 받았을 때 이유비는 조금 멍해 있었다.그의 용건을 들은 이유는 순간 눈빛이 반짝이며 서둘러 옷방으로 뛰어 들어가 자신을 단장하기 시작했다.40분이 지나서야 그녀는 선글라스를 끼고 건물을 내려가 대기 중이던 차 안으로 들어갔다.임재욱은 오늘 방금 새 마이바흐 한 대를 뽑았는데 그 차는 최고급 부속품은 물론이고 내부 가죽 의자까지 모두 외국에서 수입된 표범 가죽으로 은은한 비린 냄새까지 완벽했으며 군데군데 럭셔리한 부티가 맴돌았다.이유비는 뒷좌석에 앉아 조금 궁금한 듯 강석호에게 물었다.“임 대표님께서 오늘 웬일로 갑자기 절 보고 싶으시대요? 지금은 뭘 하시는데요?”강석호는 싱긋 웃으며 모호한 대답만 늘어놓았다.“직접 만나시면 알게 되지 않을까요?”그러자 이유비가 입을 삐죽이며 의자 등받이에 기대어 화장 거울을 꺼내 화장을 체크하며 퉁명스럽게 입을 열었다.“하긴, 운전기사가 어떻게 그런 걸 알 수 있겠어?”강석호는 백미러로 그녀를 힐끗 쳐다보고는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운전에만 집중하기 시작했다.40분 뒤, 자동차는 대우 그룹의 건물 아래에 멈춰 섰다.강석호는 손목시계를 체크하며 시간을 확인하더니 이내 입을 열었다.“아직 약 40분 정도 있으면 대표님께서 퇴근하시는데 아가씨는 여기에서 기다리시면 됩니다.”그러자 가만히 창밖으로 대우 그룹의 본사 건물을 바라보던 이유비가 갑자기 입을 열었다.“아니요. 여기까지 왔는데 그냥 올라가서 기다릴게요.”말을 하며 이유비는 강석호의 말림에도 불구하고 차 문을 열고는 차에서 내려 대우 그룹의 건물 안을 향해 걸어갔다.임재욱과 알게 된 지 이제 3개월이 다 되어가는데 그때 한미나는 막 지금의 소속사와 계약하고 사장에 의해 접대에 끌려 나왔다가 호의로 임재욱에게 선물로 넘겨진 것이다.임재욱도 그녀를 거절하지는 않았고 한미나를 데리고 골프 치러 한 번 다녀왔고 접대도 한 번 데리고 간 적이 있었다.이를 제외하면 이유비는 줄곧 폐비 취급을 받아왔었다.아마 임 대표가 평소에
여인은 마치 훈련을 거친 꾀꼬리처럼 부드럽고 가냘픈 목소리로 쉴 새 없이 임재욱의 귓가에서 떠들어댔다.임재욱은 저도 모르게 눈살을 찌푸리며 입을 열었다.“다음에 날 만나러 올 땐 향수 좀 적당히 뿌려.”이유비는 그 말을 듣자 잠깐 계면쩍은 표정을 짓고는 너무 난감해지지 않기 위해 뾰로통한 얼굴을 하고는 애교를 부렸다.“아이참, 몰라요...”호텔에 도착하고 이유비가 가장 처음에 한 일은 바로 욕실에서 샤워하는 것이다.그녀는 옷을 벗을 때 잊지 않고 자신의 원피스를 가져와 냄새를 맡아보았는데 향수 냄새가 특별히 진하다는 느낌은 전혀 들지 않았다. 오히려 임재욱의 코가 이상하게 된 것은 아닌지 의심이 들었다.아마 부자들은 원래 다 이렇게 괴상한가 보지.특히나 임재욱은 그녀를 데리고 다녔던 몇 번은 항상 사람들 앞에서는 화기애애하고 뒤에서는 냉랭하기 그지없는 얼굴을 하고 있어 도무지 그의 마음을 종잡을 수 없었다.하지만 이번에는 호텔까지 와서 방까지 잡았으니 아무리 종잡을 수 없는 남자라도 침대에만 올라오면 쉽게 풀리기 마련이다.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이유비는 즐거운 듯 미소를 지으며 샤워를 하기 시작했다.샤워를 마치고 그녀는 헤어드라이어로 머리카락의 볼륨도 살리고 윤기가 흐르는 머리카락을 만들어낸 뒤 샤워가운을 대충 몸에 두르고는 맨발로 욕실에서 걸어 나왔다.“임 대표님...”텅 비어버린 방안에는 아무도 그녀의 말에 응해주지 않았다.이유는 잠깐 멈칫하고는 방을 돌아다니며 한 바퀴 다 둘러 보았지만, 거실의 탁자 위에 남자의 외투와 맞춤 라이터가 놓여있을 뿐 그 어디에서도 임재욱의 모습을 찾아볼 수가 없었다...--화려한 등불이 켜지자 야생가도 영업을 시작하였다.유시아는 오늘 야간근무인지라 일찍이 술을 들고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바쁘게 돌아다녔다.이윽고 유시아는 매우 비싸다고 들은 와인 두 병을 조심스럽게 들고 위층 VIP룸으로 향했다. 가는 길 내내 그녀는 실수로 술을 깨버리기라도 할까 봐 길을 걷는 동시에 줄곧 시선을 쟁반 위의 와인
날씨는 이미 가을에 들어섰지만, 유시아의 집에는 아직 보일러를 틀지 않아 조금 추운 상태였다. 남자의 몸에는 검은 캐시미어 트렌치코트가 걸쳐져 있었고 지나치게 큰 키에 어쩔 수 없이 다리를 구부리고 작은 침대에 앉아 있을 수밖에 없는 모습이 다소 집의 풍경과 어우러지지 못하고 위화감이 느껴졌다.그는 고개를 들고 입구에서 넋이 나가버린 여인을 바라보며 싱긋 미소를 지었다.“시아야, 오랜만이야.”임재욱은 한나절 동안 그녀를 기다리다가 이번에는 별다른 수확 없이 돌아가게 될 줄 알았다.그의 자성을 띤 목소리에 유시아는 마치 매끄러운 리본 하나가 천천히 그의 목을 옥죄어 오는듯한 기분에 숨 쉬는 것조차 힘들어졌다.유시아는 꿈에도 임재욱이 갑자기 하늘에서 뚝 떨어져 그녀의 앞에 나타나리라고 생각지 못했다.이건 결국 그녀의 평화로운 일상도 이제 끝자락이 보인다는 것을 의미한다.한순간, 유시아의 마음은 끝없는 두려움에 사로잡혔고 다른 걸 신경 쓸 새도 없이 문을 박차고 도망갈 준비를 하였다.하지만 임재욱의 동작이 그녀보다 한발 빨랐고 성큼성큼 달려가더니 그녀의 옷깃을 잡아당겨 그대로 안아 들어 거세게 침대에 내던졌다.동작의 폭이 너무 격렬했는지 유시아는 한동안 머리가 어질어질해지는 기분이었다.이윽고 임재욱도 유시아의 몸 위에 올라타 그녀의 두 손목을 꽉 쥐어 잡고는 침대 위에 고정하고 말았다.“날 찌르고는 그냥 이렇게 도망가려고? 응?”유시아는 임재욱의 몸 아래에 깔린 채 꼼짝도 하지 못했지만, 처음에 느껴졌던 두려움은 이제 많이 사라졌고 오히려 큰 용기를 얻었다.유시아의 두려움은 종래로 이 남자의 동정이나 측은함을 불러일으킨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전에 유시아는 감옥에 가기 매우 무서워했는데 임재욱은 직접 그녀를 감옥에 보냈고 출소한 뒤 그를 마주하기 매우 두려워했지만 임재욱은 또다시 한번 그녀에게 상처를 주었었다.매번 그녀는 오직 자신의 힘만으로 힘든 시기를 이겨낸 것이다.이럴 바에는 차라리 자신의 두려움과 나약함을 거두는 것이 훨씬 낫다.
“나한테 빚진 게 없다고?”임재욱은 의미심장한 웃음으로 바보를 바라보고 있는 듯 유시아를 바라보았다.“그럼 그때 날 찌른 건 뭔데? 장난이야? 아니면 나에게 주는 이별 선물이야?”“그건 당신이 맞아 응당한 벌이야!”유시아가 싸늘한 목소리로 말했다.임재욱이 아니었다면 소현우가 죽을 일도 없었고 그녀도 지금처럼 외롭지 않았을 것이다.오늘 유시아가 마주하게 된 상황은 모두 임재욱 때문에 이뤄진 것이다.임재욱은 그녀의 싸늘하고 날카로운 눈매를 바라보고 있자니 마음속에 얼마 남지 않은 유일한 그 열기에 찬물을 끼얹는 것 같았고 그렇게 그의 마음은 그대로 식어버리고 말았다.비록 소현우는 죽었지만, 그는 그 어떤 상황에서도 마멸되지 않고 영원히 유시아의 마음속에서 살아있을 것이다.임재욱이 아무리 그녀에게 잘해주고 사랑해주어도 결국 죽은 사람 하나를 이기지 못하는 신세이다.심지어 소현우의 죽음으로 인해 유시아는 평생 그를 미워할 것이니 아무리 잘해주어도 결국 아무 소용이 없을 것이다.유시아는 영원히 임재욱이 그녀의 행복한 생활을 망쳐버렸다고 기억하고 있다.사랑하지 않으니 참으로 잔인했다--이 도리는 남녀 공용인듯싶다.하지만 임재욱은 오래전에 이미 사랑을 받는 사람으로부터 주동적으로 사랑을 주는 사람이 되어있었다.그러니 지금 그의 모습이 얼마나 슬프고 웃긴가. 마치 당시 그의 뒤를 졸졸 쫓던 유시아처럼 바보 같았다.유시아는 불안한 듯 몸을 움직이더니 조금 부드러운 말투로 임재욱을 타일렀다.“임재욱, 저 이제 놔줘요. 앞으로 우리 이제 계속 서로의 선 밖에서 지내면서 엮이지 말아요. 가정도 있고 사업도 있는데 저한테 시간을 낭비하기에는 너무 아까워요...”그 말을 듣자 임재욱은 자조하는듯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만약 내가 너한테 모든 시간을 낭비하고 싶다면? 전에는 내 시간을 너에게 써주길 그렇게 바랐잖아...”그때, 유시아가 그의 말을 단칼에 자르며 더욱 단단해진 목소리로 언성을 높였다.“당신 미워하게 만들지 말아요!”아무리 이빨을 세우
이유비는 정말로 호텔에서 오랫동안 기다렸다.처음에는 임재욱에게 급한 일이 생겨 그녀에게 인사도 하지 못한 채 떠난 줄로만 알고 있었는데 그의 외투나 물건이 모두 호텔에 있으니 이유비는 임재욱이 다시 돌아오리라고 굳게 믿고 혼자 스튜디오에서 영화를 보며 그를 기다린 것이다.그러나 결국 이유비가 중간에 몇 번이나 잠들었는데도 임재욱의 모습이 보이지 않자 그제야 참지 못하고 전화를 건 것이다. 그녀는 마지막까지 애교도 잊지 않은 채 한마디 덧붙였다.“계속 돌아오지 않는다면 저 정말 갈 거예요.”임재욱은 유시아의 두 눈을 바라보고는 천천히 몸을 숙여 그녀의 쇄골에 입술을 포개며 물었다.“그러니까, 아직 떠나지 않고 날 기다렸다는 말인 거야?”계속된 키스에 조금 가려워지자 유시아는 무의식적으로 뒤로 몸을 피했고 임재욱은 아예 그녀를 품에 꼭 끌어안은 채 움직이지 말라는 경고의 눈치를 주었다.이제 유시아는 입술을 꽉 깨물고 정말 아무 소리도 낼 수 없었다.그러나 유시아는 단 한 번도 임재욱이 달려와 그녀를 찾을 때 처음으로 그에게 전화를 걸어 그를 찾는 사람이 그와 결혼한 본처 정유라가 아니라 어디서 나타났는지도 모르는 내연녀일 줄 생각지 못했다.“당연히 아직 호텔에 있죠.”이유비는 무료한 듯 손에 있는 리모컨을 만지작거리며 입을 열었다.“임 대표님은 언제 들어오세요? 저 혼자 이렇게 큰 집에서 살자니 저녁이 되니까 조금 무서워요.”그러자 임재욱이 피식 웃음을 터뜨리며 말을 꺼냈다.“조금만 기다려. 최대한 빨리 갈게.”말을 마치고 전화를 끊었다.이유비는 손에 쥐어진 휴대폰을 힐끗 바라보고는 그대로 침대에 내팽개치고 자기도 침대에 기어 올라가 잠을 청하며 중얼거렸다.“결정적인 순간에만 도망가는 게 말이 되냐고. 얼굴만 반반했지 쓸모가 없네.”한편, 임재욱이 샤워를 마치고 욕실에서 나올 때도 유시아는 여전히 침대에 묶여 있었는데 아직 포기하지 않은 그녀는 두 손을 벨트에서 꺼내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유시아가 고개를 기울여 그녀의 핑크
유시아는 임재욱을 한바탕 호되게 욕하고 싶었지만 머릿속으로 한참을 생각하고 나서야 세 가지 욕설 단어가 생각났다.그녀는 임재욱에게 있어서 이런 말들이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래서 자신이 한 모든 일과 말들이 모두 부질없는 것이라는 것도 알고 있다.임재욱은 그녀의 손을 다시 이불 속에 집어넣고 그녀의 등을 꼬집으며 비웃었다."너의 어휘력은 예나 지금이나 여전히 부족하구나."이 점은 예전부터 임재욱의 미움을 많이 받았다. 유시아는 입술을 깨물며 손을 뻗어 침대 머리맡에서 과일칼을 꺼냈다. "이 칼은 처음에 당신을 찔렀던 바로 그 칼이예요. 제가 줄곧 곁에 두고 있거든요!" 유시아는 임재욱의 손에 칼을 쥐여주며 말했다. "만약 지금 당신의 마음이 편치 않다면 다시 저를 찌르세요. 제가 당신에게 빚진 것은 일시금으로 갚을 테니까 다시는 귀찮게 하지 말아요. 저… 저는 이런 게 너무 싫어요!" 임재욱은 손에 든 과일칼을 보면서 자신도 모르게 쓴웃음을 지었다. '이 세상의 일을 모두 간단한 덧셈과 뺄셈으로 계산할 수 있다면 좋겠다. 네가 나를 한 번 다치게 하고 내가 너를 한 번 다치게 했으니 이걸로 깨끗이 청산할 수 있다. 너는 나를 사랑했고 나도 너를 사랑했으니 우린 이젠 서로 빚지지 않았다.'그러나 실제로 한번 시작하면 끝을 맺지 못하는 일들이 있다.그 사람이 죽지 않는 한 말이다.임재욱은 등을 돌리고 깔끔하게 옷을 입었다. 정리를 다 한 뒤, 임재욱은 다시 과일칼을 집어 들었다."이 칼은 내가 먼저 장부에 적어 둘 테니 네가 언제 갚아야 할 때 내가 너를 찾으러 올게!" 임재욱은 말을 마치고 몸을 돌려 유시아의 작은 방을 떠났다. 밖의 가로등은 대부분 이미 고장 나서 새벽 두세 시의 거리는 텅 비어있었다.임재욱은 몇 걸음 걷다가 머리 위의 밝은 달을 쳐다보며 문득 이렇게 생각했다. '그녀가 나에게 빚진 게 어디 이 칼뿐이겠어? 나도 유시아에게 빚진 것은 단지 소현우처럼 단순한 것이 아니야. 만약 시간을 거슬러 나
늦은 밤, 유시아의 카카오톡을 받았을 때 임재욱은 병원에 있었다.신시연은 도우미의 도움을 받으며 진료실에서 여러 검사를 받았고 그동안에 임재욱은 밖에서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늦은 밤의 사립 병원이라 사람이 그리 많지 않았다.당직을 서는 의사 선생님과 간호사 외에 거의 사람이 없이 무척이나 쓸쓸해 보였다.임재욱은 복도를 한참이나 누비다가 의자에 걸터앉았다.유시아를 병원으로 바래다주고 돌아서는 길에 신시연의 전화를 받고서 오게 된 것이다.배가 아프다고. 당장이라도 죽을 듯이 아프다고.신시연은 며칠 전에 병원에서 여러 번 신체검사를 받았으나 해외에서 그러한 몹쓸 짓을 당하며 우울증과 부인병이 있는 외에 다른 수치들은 정상 범위 안에 있었다.그 말인즉슨,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것이다.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임재욱은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신시연에게 남은 ‘가족’이라고는 임재욱 하나뿐이니 어찌 됐든 그녀를 잘 지켜야 하는 마음뿐이었다.그 누구에게도 다시는 상처를 받지 않게끔.바로 이러한 마음가짐으로 하여 임재욱은 그녀를 직접 병원까지 데리고 오고 의사 선생님 입에서 아무런 문제도 없다는 확답을 듣고 나야만 마음이 놓일 수 있다.애타게 검사 결과를 기다리고 있는 가운데 핸드폰 알림 소리가 울렸다.유시아가 보낸 카카오톡인데, 내용은 아주 간단했다.[보고 싶어요.]임재욱은 고개를 숙인 채 카톡 내용을 거듭 곱씹으며 유시아 사진으로 되어 있는 그녀의 프로필 사진을 바라보며 입꼬리가 주체하지 못하고 자꾸 올라갔다.‘내가 보고 싶어? 별거한 지 하루 만에 벌써 내가 보고 싶은 거야?’‘우리 시아 이제 제법 솔직하네.’핸드폰을 손에 꼭 쥐고 어떻게 답장할지 생각하고 있을 때 응급실 문이 열렸다.도우미 김향화가 얼굴에 핏기 하나 없는 신시연을 부축하고 걸어 나왔다.신시연은 디자인이 아주 심플한 데님 스커트를 입었고 윤기가 별로 없어 보이는 머리를 돌돌 말아 묶어 올렸다.무척이나 초췌해 보이는 것이 가여운 느낌도 물씬 풍기고 있어 기고만장했던 그
유리 구두를 품속에 꼭 안고 있는 유시아를 보고서 임재욱은 순간 이러한 생각이 들었다.참으로 달래기 쉬운 여자라는 것을.특히 결혼하고 나서 아주 살짝만 잘해주어도 유시아는 아주 오랫동안 기뻐하는 것만 같았다.유시아는 늘 임재욱 앞에만 서면 스스로 자세를 낮추고 자기를 낮은 위치에 놓는 데 습관 되어 있다.임재욱은 고개를 숙여 그녀의 정수리에 뽀뽀했다.“앞으로 매년 생일마다 예쁜 유리 구두 선물해 줄게. 어때?”“좋아요.”유시아는 말하면서 아주 유치하게 그를 향해 손가락을 내밀었다.“손가락 걸고 약속해요. 절대 어기지 않겠다고.”백화점에서 나온 두 사람은 일단 화실로 향했다.새로 구매한 공예품을 적당한 자리에 올려놓고 유시아의 제안으로 이채련의 병원까지 바래다주었다.유시아는 자기가 뱉은 말은 어떻게든 지키는 타입이라 이채련과 이미 약속했으니 꼭 지켜야 했다.하물며 자식도 없는 이체련에게 마지막 이 시간들이 더더욱 외로울 것이다.외부인들이 보기에도 불쌍할 정도로 외롭다.임재욱이 아무리 말해도 소용이 없었고 이채련에게 주어진 시간이 얼마 없다고 하니 마음은 내키지 않았지만 보내주었다.차는 곧 사립 병원 앞에 멈춰 섰고 임재욱은 차에서 내리지 않았다.유시아는 차창에 대고 거듭 강조했다.“유리 구두랑 드레스들 옷방에 고이 모셔두도록 해요. 마구 놓지 말고요.”“알았어.”임재욱은 말하고서 손을 내밀어 그녀의 목을 확 잡고서 찐한 키스를 남기고 나서야 순순히 놓아 주었다.“얼른 가 봐.”“조심해서 가요.”임재욱은 조수석에 앉아 한결 가벼워진 그녀의 뒷모습이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보고서야 시선을 거두고 집으로 향하려고 했다.가는 길에 갑자기 신시연으로부터 전화가 걸려 왔다.“오빠, 배가 너무 아파요.”...병실로 돌아와 보니 이채련은 아직 자고 있지 않았다.침대에 멍하니 누워 재미가 일도 없는 예능 프로를 보고 있었다.유시아가 문을 밀고 들어오는 것을 보고 이채련은 놀라고도 기뻤다.“시아야, 늦은 시간에 웬일이야?”유시아
쇼핑은 늘 설레는 일이다.유시아는 자기 취향대로 화실 장식품으로 쓰일 공예품을 골랐다.이윽고 임재욱은 또 유시아를 데리고 근처에 있는 매점으로 향했다.지난번에 두 사람은 함께 쇼핑하면서 많은 옷을 샀었지만, 신서현 부모님께 갑작스러운 상황이 일어나면서 유시아는 그 모든 옷을 모조리 청소 아주머니에게 줘 버렸다.그때의 아쉬움을 채워주기 위해 임재욱은 또다시 쇼핑하려고 한 것이다.게다가 다음 주면 대우 그룹 상장 20주년이다.정식적인 석상에 모습을 드러낼 때 유시아를 자기 아내 신분으로 남에게 소개해 주고 싶어 이브닝 파티에 어울릴만한 드레스와 신발을 살 예정이다.드레스는 그럭저럭 큰마음이 가지 않았는데, 유시아는 그 신발이 마음에 들었다.은백색의 하이힐로 예쁜 보석들로 가득 박혀 있어 매점 불빛 아래서 유난히 반짝이는 것이 신데렐라 동화에 나올 법한 유리 구두 같았다.매점 직원은 유시아가 마음에 들어 하는 것을 보고 바로 다가왔다.“손님 안목이 참 좋으시네요. 이 제품은 저희 디자이너 선생님의 최신 디자인으로 지금 딱 한 켤레만 있습니다. 만약 이 신발을 신고 나가신다면...”임재욱은 갑자기 직원의 말을 끊어버렸다.“이미 결혼했고요. 이 사람은 제 아내예요.”유시아는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들었는데, 자기를 바라보며 웃고 있는 그를 보고서 따라서 웃었다.“맞아요. 이 사람이 제 남편이에요.”매점 직원은 멍하니 있다가 바로 얼굴에 미소를 머금고 베스트 쇼핑 가이드다운 실력을 드러냈다.“어머, 어쩐지 너무 어울리신다 했어요...”직원의 칭찬에 두 사람은 얼굴에 웃음꽃이 피어났다.이윽고 매점 직원은 분위기를 파악하며 유리 구두에 대해 더욱 디테일한 설명을 첨부하기 시작했다.“이 제품의 새끼 양가죽으로 만들어졌으므로 착용감이 엄청 좋으실 거예요. 하루 종일 신고 걸으셔도 전혀 문제가 없다는 말이죠. 게다가 우리 디자이너 선생님이 즉흥으로 만들어내신 작품이라 절대 똑같은 제품을 시중에서 보실 수 없을 거예요.”한 켤레일 뿐만 아니라 사이
한서준은 눈살을 찌푸리며 되물었다.“내가 뭐?”“한서준 씨는 당당해요?”유시아는 바로 질문을 질문으로 돌려주었다.“임씨 가문에 접근한 그 의도를 다른 사람들이 모를 것 같아요? 할아버지, 재욱 씨 그리고 나까지 똑똑히 알고 있어요. 청아 씨만이 한서준 씨를 사랑해서 자신을 속이고 있는 거라고요. 그렇게 쭉 모르는 척을 하며 모든 걸 감당하고 있었던 거라고요. 한서준 씨 역시 청아 씨를 이용한 게 아닌가요?”마지막 한 마디에 한서준은 침묵하고 말았다.그렇다. 임청아에게 접근한 이유는 유시아가 ‘스파이’로 움직여 주지 않겠다고 거절했기에 어리석어 보이는 임씨 가문 천금을 노리게 된 것이다.하지만 사람 마음이라는 것은 결국 변하게 되어 있다.임청아 대한 마음은 모략에서 시작했으나 시간의 흐름에 따라 그 마음이 점점 사랑으로 끝을 맺게 된 것이다.늘 밝고 긍정적인 에너지를 띠고 다가왔던 임청아가 어두운 자신의 삶을 밝게 비춰주는 것만 같았다.따라서 한서준은 임청아와 평생을 함께하고 싶다는 마음이 차츰 생기게 된 것이다.임태훈이 반대한다고 하더라도 꼭 자기 곁으로 데리고 오고 싶었다.“청아 씨 지금 몸도 마음도 상처투성이에요.”“만약 청아 씨 행복하게 해 줄 수 없다면 신중하게 생각하고 결정하는 게 좋을 거예요.” 말을 마치고 유시아는 차 문을 밀고 차에서 내려 병원 밖으로 걸어갔다.택시에 오른 유시아는 긴 망설임 끝에 끝내는 더 스케치 화실 주소를 운전 기사에게 알렸다.차는 화실 맞은 편에 세워졌고 유시아는 화실 바로 맞은편에 있는 커피숍으로 들어가 창가 자리에 앉았다.화실 안의 상황을 바로 체크할 수 있고 자신의 정체를 드러내지 않아도 되는 최적의 위치라고 할 수 있다.한참 지나고 나서야 수많은 경호원들이 임태훈을 사이에 두고 화실에서 걸어 나오는 것이 보였다.임태훈은 벤틀리에 올라 강한 기운을 남기고 자리를 떠나버렸다.유시아는 그제야 한시름을 놓고 들고 있던 커피잔을 내려놓고는 바로 화실로 향해 달려갔다.화실 안과 밖은 겉은
전화를 마치고 유시아는 혼자 밖에 없는 휴게실을 보고서 깊은 번뇌에 잠겼다.남을 탓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에 임태훈처럼 막무가내로 어처구니가 없는 노인이 있다는 게 도통 이해가 되지 않았다.임태훈이 끔찍이 여기는 임청아를 유시아가 계단에서 밀어버린 것도 아닌데, 왜 애꿎은 자기 화실을 닫으려고 하는지 알 수 없었다.집안 내부에 문제가 생기면 일단 스스로 반성하는 법부터 배워야 하는데, 그게 무엇이든 일단 남한테서 문제를 찾고 있으니, 권력을 믿고 사람을 업신여기는 것이 분명했다.유시아는 생각하면 할수록 머리가 복잡해졌고 불안함도 점점 커졌다.지금 운영하고 있는 더 스케치 화실도 용재휘가 먼저 시작한 것인데, 그와 더불어 학생들까지 모두 함께 넘겨주었는데, 만약 이대로 화실을 망쳐버린다면 용재휘에게 너무 미안할 것 같았다.임재욱과 임태훈이 어느 정도로 얘기했는지 알 수 없었지만 화실이 그들 싸움의 희생물이 되지 않기만을 바랄 뿐이었다.임재욱에게 전화를 걸어 상황을 묻고 싶었으나 감히 그럴 용기가 없어 일단 지켜보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떨리는 심장을 부여잡은 채로.그렇게 한참이나 심장을 조이고 있었지만, 걸려 오는 전화는 없었다.유시아는 일이 어느 정도 망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학생 채팅방에 오늘 갑자기 일이 있다며 수업을 뒤로 미룬다고 알렸다.언제 다시 수업을 시작할지는 소식을 기다리라며 덧붙이기까지 했다.톡을 보내고서 유시아는 더 이상 핸드폰을 보지 않고 바로 병원 밖으로 나갔다.그러나 병원 대문을 나오자마자 한서준이 정면에서 오고 있었다.“유시아.”유시아는 고개를 들었고 그를 보게 되는 순간 정신이 아찔해 났다.직감이 알려주건대, 절대 좋은 일이 없다는 것이다.화실의 생존 여부도 알 수 없는 상황에서 그의 심기까지 건드리고 싶지 않았다.한서준은 쉽사리 유시아를 놓아 주지 않았고 손을 내밀어 유시아의 손목을 꼭 잡았다.“물어볼 일이 있어.”말하면서 근처에 있는 지프차를 가리켰다.“차에 타서 얘기 하자.”“그쪽이랑 할 말
유시아는 그 말을 이어받지 않고 집사의 바람대로 타이르기 시작했다.“몸이 아직 많이 허약해요. 먹고 싶지 않아도 억지로라도 좀 먹어야 하거든요. 일이 어찌 됐든 일단 건강부터 챙겨야 해요.”임청아 그 말을 듣고서 쓴웃음을 지었다.“건강 회복되면 할아버지한테 잡혀가서 집에 감금되는 것밖에 더 있겠어요?”“그렇게 생각하지 말아요.”유시아는 눈살을 찌푸리며 덧붙였다.“어찌 됐든 할아버지 마음은 한결같을 거예요. 청아 씨를 아끼고 사랑하는 거요. 서로 대화가 필요한 거 같아요. 서로 터놓고 얘기하고 나면 오해가 풀리고 마음도 풀리면서 모든 게 원점으로 돌아갈 수 있을 거예요.”임청아의 입가에 피식 웃음이 새어 나왔다.“저도 그렇게 생각했었어요. 아이 낳고 나면 할아버지도 서준이도 원한을 내려놓고 행복만 할 수 있다고요.”“근데 이렇게 몸도 아끼지 않고 점점 더 막무가내로 나가면 두 사람 사이의 원한은 점점 더 짙어질 거예요.”유시아는 말하면서 도우미 손에서 보신탕을 가져와 천천히 불며 임청아의 입가로 가져갔다.임청아는 생각 밖으로 무척이나 순순하게 유시아의 말을 따랐고 그녀의 말에 이치가 있는 것 같아 조용히 보신탕을 받아 마셨다.도우미와 집사는 두 사람이 티키타카 서로 말을 주고받는 것을 보고 서서히 마음이 놓였다.임청아가 뭐라도 먹기 시작하여 자기도 모르게 한시름을 놓으며 자리까지 비켜주려고 했다.두 사람이 마음 편히 말할 수 없을까 봐 눈치껏 일어서려는 것이다.“작은 사모님, 아가씨와 천천히 얘기하고 계세요. 밖에 나가 있을 테니 필요한 거 있으시면 언제든지 부르시고요.”“네, 가보세요.”도우미 일행이 나오고 나서야 유시아는 본론으로 들어갔다.“한서준 씨는 알고 있어요?”임청아는 고개를 저으며 쓴웃음을 지었다.“그런다고 숨겨질 일도 아니잖아요.”요즘 임태훈뿐만 아니라 한서준도 눈을 부라리고 임청아를 찾고 있었다.두 사람의 시선을 피하고자 아파트도 호텔도 들어갈 수 없었고 버려진 강아지처럼 유시아 화실에 몸을 숨기고 지낸 것
임청아 이름 석 자가 임재욱의 입에서 나오자, 유시아는 순간 청천벽력을 맞는 것만 같았다.심지어 지금까지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으니 말이다.한참 지나고 나서야 겨우 떨리는 심장을 부여잡고 물었다.“청아 씨가 왜 병원에 있는 거죠?”임청아는 임신한 것을 알고 매사에 조심하며 걸음 하나도 천천히 옮겼었다.게다가 해외에 있는 친구와 연락하여 해외로 떠날 준비까지 마쳤다고 했었다.그런데 관건이 되는 순간에 계단에서 굴러떨어졌다고?“할아버지를 너무 쉽게 생각한 거 아니야?”임재욱은 말하면서 차갑게 웃었다.“네 화실에 청아 숨겨 놓았잖아. 할아버지께서 그걸 과연 모르고 있었을 것 같아? 오늘 화실로 청아 데리러 갔었는데, 가지 않겠다고 청아가 하도 우기는 바람에 억지로 묶어서라도 데리고 가겠다며 서로 실랑이를 벌이다가 계단에서 굴러떨어진 거야.”그렇다면 아이를 유산했을지도 모른다.임태훈의 습관에 따라 생각해 본다면 이 화살은 결국 유시아에게로 돌아오게 되어 있다.임재욱이 그렇게 경고하였건만 유시아는 마음이 약한 사람이었다.약해지는 마음에 언젠가는 구렁이에 빠지게 될 날이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날이 바로 오늘 일 줄은 몰랐다. 임재욱은 한숨을 내쉬며 꾸짖고 싶은 마음을 겨우 억눌렀다.“병원 주소 보내줄 테니 얼른 가 봐.”말을 마치고 임재욱은 전화를 끊어버렸다.얼마 지나지 않아 메시지 한 통이 도착했고 운전 기사에게 새로운 목적지를 알려주었다.같은 시각, 병원 안에서.임청아는 이미 수술을 마쳤고 일반 병실로 옮겨져 있었다.이미 가문의 집사와 간호인이 옆에 있었고 병실 문 앞에는 임태훈이 보낸 경호원도 있었다.다만 경호원이 경계해야 할 상대는 유시아가 아니라 한서준이다.따라서 유시아는 별다른 막힘없이 바로 병실 안으로 들어갔다.병상에 누워 있는 임청아는 얼굴에 핏기 하나 없었고 초점을 잃은 두 눈으로 멍하니 천장만 바라보고 있었다.불과 하룻밤 사이에 모든 활력을 잃어버린 모습이었다.집사는 자리에서 일어서서 아주 공손하게 유시아에
조금 전까지 허겁지겁 밥을 먹고 있던 임재욱은 멈칫거리고 말았다.이윽고 고개를 천천히 들어 웃는 듯 마는 듯한 얼굴로 유시아를 바라보며 물었다.“별거하자는 뜻이야?”“그렇게 생각해도 좋아요.”유시아는 숟가락을 내려놓고 머리가 아픈 듯 이리저리 만지작거렸다.“지금 이러한 상황에서 이러는 것도 좋을 것 같아요. 나한테 신경 쓰지 않아도 되고 그 시간으로 시연이한테 집중해도 되잖아요. 나도 마침 어머님 곁에 좀 있어드리고... 서로에게 지금 이게 최우선인 것 같아요.”임재욱은 숨을 깊이 들이마시고서 낙담한 모습으로 말했다.“그래. 네가 좋다고 하면 그게 좋은 거겠지. 그렇게 하자.”말을 마치고 그는 계속 밥을 먹었다.유시아는 그런 그를 바라보고서 아련하게 웃고는 바로 자리에서 일어나 위층으로 올라갔다.이튿날 아침, 유시아는 임재욱이 출근하고 나서야 침대에서 일어났다.일상복 몇 벌과 일상용품을 챙겨 작은 트렁크 안에 놓고 바로 이채련한테 가려고 했다.허씨 아주머니는 트렁크를 들고 내려오는 유시아의 모습에 살짝 당황한 모습이었다.“사모님, 어디 가시는 거예요? 설마... 가출하려는 건 아니죠?”유시아는 허씨 아주머니를 향해 웃었다.“아니에요. 친척분이 좀 위독하신데 제가 옆에서 좀 챙겨드리고 싶어서 가는 거예요. 얼마 걸리지 않을 거고 곧 돌아올 수 있을 거예요.”말을 마치고 트렁크를 들고서 집을 나섰다.이채련이 지내고 있는 병실이 VIP 병실로 널찍한 객실까지 갖춰져 있다.유시아는 간호사에게 접이식 침대와 이불을 요구했고 간단히 정리하고 나니 잘 자리가 아늑하게 마련되었다.이채련은 더 이상 침대에서 내려올 수 없어 하루 24시간을 침대 위에서 보내고 있다.얼굴도 하도 여위어 본연의 모습을 점점 잃어가고 있었다.그전에도 유시아는 이채련에게 이곳에서 며칠 동안 함께 지내고 싶다는 의사를 밝힌 적이 있지만 이채련은 행여나 자기로 인해 두 사람 사이에 흠이 생기게 될까 봐 동의하지 않았었다.지금 이 자리까지 오게 된 것만으로도 갖은 풍
임재욱은 핸들을 꼭 움켜쥐고서 앞만 바라보았으나 두 눈에는 고통과 망연함이 가득했다.“시연이 해외에 있을 때, 몹쓸 짓을 당했어. 한번이 아니라 여러 번이나. 그래서 우울증에 걸리게 된 거야.”유시아는 두 눈이 휘둥그레지면서 볼륨까지 높아졌다.“어머, 어떡해요!”평소에 신시연에 대해 좋은 마음을 가지고 있었던 건 아니지만 그 소식을 듣게 되는 순간 심장이 덜컹 내려앉기는 했다.여자에게 있어서 그런 몹쓸 짓을 당한다는 건 치명적인 타격과 치욕이 아닐 수가 없다.게다가 부모님의 일까지 더해지니 조금 전 식당에서 봤던 신시연의 모습이 이해되었다.임재욱은 말하면서 후회와 자책하는 빛을 드러냈다.“그렇게 가고 싶지 않다는 시연이를 내가 억지로 보낸 거야.”그때는 모든 걸 너무 쉽게 생각했었다.낯선 곳으로 가서 마음을 가다듬고 학업에만 집중하면 자연스레 모든 걸 잊고 새로운 삶을 그려나갈 수 있으리라 믿었다.하지만 임재욱이 잊고 있었던 부분이 하나 있는데, 그건 바로 신시연이 이제 갓 20살을 넘은 꽃다운 여자아이라는 것이다.해외에는 불안정 요소도 많고 미처 생각지 못하는 위험도 많다.게다가 젊은 나이라 자칫 잘못하면 그릇된 길로 들어서기도 아주 위험하고 말이다.신시연 곁에 사람을 함께 보내긴 했지만 그렇다고 하여 24시간 동안 찰싹 달라붙어 다닐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유시아와 결혼하고 나서 신혼에 푹 빠져 있는 동안 신시연에게 더 많은 관심을 주지 않았기에 이러한 일이 일어난 게 아닌지 죄책감이 들기도 했다.지금 임재욱은 신서현에게 미안할 뿐이다. 하나뿐인 동생을 이 지경으로 만들었으니.하지만 그가 말한 본의와 달리 듣고 있는 유시아는 또 다른 뜻으로 받아들이게 되어 있다.유시아의 기억으로는 신시연이 해외로 보내진 이유는 이러하다.그때 신시연은 정운시 대학교 교내 사이트에 유시아를 먹칠하는 게시글을 올리면서 유시아로 하여금 학업을 이어갈 수도 수업을 들을 수도 없게 악한 상황을 만들었었다.마침 그 일을 소현우가 알게 되면서 유시아에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