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연히 사과드릴 겁니다, 이 일로 정씨 가문과 정 아가씨의 체면을 구겼습니다. 책임을 회피하지 않을 테니까 정씨 가문에서 원하는 대로 할 것입니다."임태훈은 손에 문명봉을 쥐고 내색하지 않았다."그다음에는?" "무슨 다음이요?" 임태훈은 손자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며, 눈빛이 이글거렸다."단지 사과하는 것뿐이야? 사과한 후에, 정유라에게 성대한 결혼식으로 보상해 줄 거야, 아니면 이 일을 완전히 뒤집고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할 거야? 응?" 어른들의 세계에서 사과는 가장 쓸모없는 행동이다.그래서 임태훈이 가장 신경 쓰는 것은 그의 말뿐인 사과의 여부가 아니라 그의 후속 실질적인 행동이다.임재욱은 담담하게 웃었다."사과한 후에 파혼할 수밖에 없어요. 할아버지께서는 이 일이 터진 이상 정 아가씨가 다시 저와 결혼하기를 원한다고 생각하십니까?" 임태훈은 자신도 모르게 임재욱이 결국 이 말을 내뱉었구나고 비웃었다.그는 소현우가 죽고 유시아가 또 한 번 독신이 되었음을 알았다. 그래서 임재욱의 마음도 따라서 흐트러지고 자기 입으로 승낙한 약혼도 거절하려는 것을 알았다.유시아의 사건에 대해 임태훈이 임재욱에게 기회를 주지 않은 것은 아니다. 3년 전에 그녀가 살인범의 딸이었음에도 임태훈은 임재욱과 그녀를 결혼시키기로 허락했다.'이럴 줄 알았으면 왜 애초에 그녀를 감옥으로 보냈을까?'애초에 결혼했으면 후회하지 않았을텐데, 아쉽게도 지금의 그는 기회가 없었다. 임씨 가문에서는 살인범의 딸을 손주며느리로 받아들일 수는 있지만, 감옥살이를 하고 신혼 당일 과부가 된 여자는 불운과 살기에 물들까 봐 받아들일 수 없었다."임재욱, 네가 이 혼사를 승낙한 이상 발뺌할 생각은 하지 마라. 설령 네 체면을 돌보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우리 임씨 가문은 너처럼 이랬다저랬다 하는 소인배는 절대 용납하지 않을 것이야!" 임태훈은 말을 마치고 소파에서 일어나 고개를 돌려 위층으로 향했다. 가는 도중에 잠시 멈춰 소파에 앉아 있는 임재욱을 바라보며 말했다."
하나뿐인 아들이 죽고, 그녀의 모든 희망도 사라졌다. 운명에 등골이 뽑힌 마냥 예전의 아름다움을 찾아볼 수 없었다. 의해 등골이 부러진 것처럼, 다시는 예전의 풍화를 되찾을 수 없었다. 유시아에 대한 그녀의 태도는 그다지 좋지 않았다. 아마도 유시아가 최근 이틀 동안 나타나지 않은 것이 불만이었는지 유시아를 향해 냉소를 지었다."유산을 나눈다고 하니 우리 며느님이 빨리도 왔네 그래." 유시아의 작은 얼굴이 붉어지더니, 그대로 선 채 앉지도 가지도 못하고, 그렇게 난감할리 없다. 유시아와 소현우는 혼인등기를 한 사이이기에 유시아는 소현우의 합법적인 아내이다. 하지만 그녀는 소여사와 함께 살아본 적도 며느리로서 말을 나누어 본 적이 없는지라 어떻게 해야 할지 속수무책이었다. 없어서 쩔쩔맸다.유시아 역시 자신이 소씨 가문의 일원이 맞는지 의심스러웠다. 가족인지 아닌지 몰랐다.다행히 변호사는 곧 소현우의 유언장을 처리하기 시작했다.유언장은 소현우가 결혼식 3일 전에 작성한 것으로, 소부인과 유시아는 전혀 몰랐으며 눈치조차 채지 못했다. 유언장에는 자신이 죽은 뒤 소유한 모든 재산을 엄마인 소부인과 아내 유시아 두 사람에게 평균 분배한다고 정해져 있었다. 생전에 사들인 반월 별장과 결혼 전에 살던 아파트는 유시아에게 기념으로 남긴다고 특별히 언급했다. 주식은 당장 현금화할 방법이 없기에 변호사에게 위탁 매각하여 희망공사에 기부하기로 했다.이는 소현우가 천신만고 끝에 다시 일으켜 세운 세현 그룹이 더는 존재하지 않게 된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각종 은행카드와 계약서들이 테이블 위에 놓여 있는 것을 본 유시아는 눈앞이 흐릿해졌다. 그녀가 소현우와 결혼할 때 원했던 것은 결코 이런 금전적인 것이 아니라 그 남자의 따뜻함과 열정이었다. 이제 그는 없다. 아무리 많은 재물과 호화로운 집이 있더라도 그녀에게는 그저 슬프기만 할 뿐이다. 유시아는 반월 별장과 소현우와 생전에 살았던 아파트만 가지기로했다. 이것은 유언장에서 소현우가 특별히 그녀에게 남겨
유시아는 다소 의아한 표정으로 소여사를 돌아보았다. 남은 말이 뭐가 더 있을 지 알수 없었다. 전에는 소현우가 있으니, 그녀가 어쩌면 유시아의 체면을 차려줬을 지도 모르지만, 지금은 그가 존재하지 않기에 두 여자 사이의 유일한 연결고리도 없어졌으니, 남과 다름 없다.소여사는 유시아의 얼굴에 담긴 의구심을 바라보더니 말했다. "현우에 관한 거야."유시아는 가슴이 찌릿하더니 곧바로 순순히 그녀를 따라 차에 올랐다. 밀폐된 공간에는 운전기사와 가정부 모두 소여사가 쫓아내고 둘만 있다."이 휴대폰은 현우의 유물인데 교통사고로 심하게 훼손되었다..." 소여사는 말하면서 아이폰을 유시아에게 내밀었다. "근데, 내가 어제 수리를 맡겼다." 유시아는 손을 내밀어 허름한 케이스의 휴대폰을 받으면서 어리둥절해 하며 물었다."그래서요?" 만일 그녀에게 소현우의 휴대폰을 기념으로 주고 싶다면 지금처럼 이렇게 모든 사람들의 눈을 피할 것 없이 당당하게 주면 그만인 것을. 유시아는 소현우의 미망인이기에 그녀에게 휴대폰을 주는 것도 합리적이었다. 소여사는 살짝 미간을 찌푸리더니 인차 해명했다."사고 보고서에는 현우가 대형트럭과 충돌한 이유는 운전하면서 통화를 했기때문이라고 나와 있었다. 그래서 내가 그 휴대전화를 살펴 보았는데, 너희 둘 결혼식 당일 현우가 사고가 났을 그 당시 임재욱과 통화를 하고 있었다는 것을 발견했다." 임재욱...유시아는 깜짝 놀라며 고개를 들어 소여사를 바라보았다. "네?" 그리고 고개를 숙여 떨리는 손으로 소현우의 휴대전화를 열어 통화 기록을 확인해보았다. 역시, 역시 그 시간에 소현우는 임재욱과 통화하고 있었고, 그 뒤에 교통사고가 났던 것이다. 통화 기록과 시간은 조작할 수 없었고 소여사도 이것으로 그녀를 속일 리 없다.소현우는 죽기 전 진짜로 임재욱과 전화통화를 하고 있었고, 그래서 사고가 났을 시 임재욱은 그 누구보다도 먼저 울 수 있었던 것이다...적어도 그녀가 확인한는 바로는 이렇다. "임재욱이예요, 그가 현우
"네가 모를 수 있겠니?" 소여사는 싸늘하게 웃으면서 "현우가 널 사랑했었고, 지금은 너 때문에 죽게 된 거야. 그렇다면 네가 현우를 위해서 무언가를 해야 하지 않겠니?" 유시아는 소여사의 눈을 바라보면서 그저 멍하니 있었다.그녀는 당연히 소현우를 위해 무언가를 하고 싶을 것이다. 앞으로 더 많은 시간 동안 소여사의 곁을 지켜주고 그녀가 나이 들면 보살피고 엄마처럼 효도하려고 했다. 이로써 하늘에 있는 소현우의 영혼을 위로하고 싶었다.하지만 이것만으로는 터무니없이 부족했다.적어도 소부인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소여사는 임재욱이 죽기를 원했다. 이에는 이 눈에는 눈이다.소여사는 울고 있는 유시아에게 한 글자 한 글자 독하게 내뱉었다."유시아, 너 만일 현우를 진정 사랑한다면 현우를 위해 복수해서 현우의 원을 풀어줘야 하는 것 아니냐? 아니면 그 동안 현우가 너한테 쏟아부은 정성에 미안하지 않겠니?" 복수... 듣는 순간 유시아는 등골이 싸늘하다.감옥살이를 해 봤던 사람은 법의식이 유난히 강하다. 복수라 함은 임재욱을 죽여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묘지 입구에 있던 차들이 차츰 떠나갔다.나중에는 임재욱의 벤틀리만 외로이 남아있었다. 차에서 내린 임재욱은 손에 커다란 검은색 우산을 들고 멀리 유시아를 향해 걸어갔다. 소여사는 소현우의 휴대폰을 그녀에게 주고 한 바탕 쏟아 붓은 뒤 그녀를 차에서 내쫓고는 쌩하니 가버렸다. 유시아는 소현우의 휴대폰을 손에 꼭 쥐고 혼자 빗속을 걸으면서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다. 지금도 그녀는 당황하기 그지없다. 소현우가 떠난 뒤, 그녀는 버려진 아이마냥 누구를 믿어야 할지 심지어 진위 선악을 분별할 능력조차 없어져 버렸다."시아야..." 머리 위의 빗줄기가 갑자기 그치자 유시아는 고개를 들어 눈앞의 남자를 바라보며 망설이다가 눈에는 한 줄기 증오의 빛이 서렸다. 유시아는 소여사의 말이 떠오르면서 소현우의 핸드폰에 담긴 통화 기록을 떠올렸다. 의도했든 의도하지 않았든 소현우의 죽음은 이
그 말을 들은 임재욱은 흠칫하더니 그녀가 손에 쥐고 있는 아이폰을 내려다 보았다. 그것은 소현우의 핸드폰으로, 그 안에는 그들 사이의 통화 기록이 저장되어 있었다.유시아가 이렇게 묻는다는 것은 그녀가 이미 알고 있다는 것으로 단지 그에게 다시 한번 확인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임재욱은 거짓말을 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여 아예 사실대로 말했다."확실히 전화를 한 번 하긴 했었어.첫째는 너희들의 결혼을 축하하기 위해서였고, 둘째는 너를 잘 보살펴달라고 부탁한 것뿐이야. 예전에 내가 너에게 줄 수 없었던 것을 소현우가 너에게 줄 수 있기를 바랬어!" 이 두 가지 외에는 그는 진짜로 소현우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시아야, 나는 일이 이렇게 될 줄 몰랐어. 그때 마침 운전 중 일지도 몰랐고 더더욱..." 미간을 잔뜩 찌푸린 임재욱의 모습은 끝없는 고통과 유감을 품고 있는 것 같았다.그는 그녀에게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몰랐다. 아무리 설명해도 지금의 참혹한 상황은 바뀌지 않는다. 그것은 바로, 유시아가 손만 뻗으면 닿을 수 있던 행복을 자신의 손으로 망쳐져 버렸기 때문이다.그는 어렵게 유시아를 보내주기로 마음 먹었고 심지어 자신이 사랑하지 않는 여자와 평생 살 계획까지 세웠지만, 하늘은 결코 그들을 가만두지 않았다. 마치 운명이 두 사람을 조롱이라도 하듯 둘 사이는 얽히고 설킨 고기 그물과도 같았고 순탄했던 적이 없다. 그녀가 그에게 미안해야 하거나 그가 그녀에게 상처를 주거나.유시아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구멍 난 가슴으로는 차가운 바람이 비집고 들어와 삽시에 그녀의 오장육부를 얼려버렸다. 소부인이 했던 말과 그녀가 본 모든 것이 임재욱을 통해 입증되었다.소현우는 결국 임재욱의 손에 죽은 것이다! 두 사람 사이에 한참의 침묵이 흐른 뒤에야 차는 화랑 아파트 입구에서 멈첬다. 유시아는 밖을 내다보며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미안하지만 반월 별장으로 가줘요." 이 말을 들은 임재욱은 눈살을 찌푸렸다."사람도 없는데 거기 가서 뭐 할꺼야
기말고사 성적이 나왔고 유시아는 모든 과목에서 우수한 성적을 받았기에 학교 측은 전에 약속한 대로 그녀에게 졸업장을 수여하기로 했다. 앞으로 그녀는 정운대학교의 졸업생이다!그녀는 전화를 끊고 벽에 걸린 사진을 쳐다보며 중얼거렸다. "보아하니 당신 말이 맞았어요. 시험 볼 때 자신감이 넘치면 오히려 좋은 성적을 못 받고 시험을 못 봤다고 생각하면 무난하게 통과할 수 있다고요. 현우 씨, 저 모든 과목에서 A플 따냈고 졸업도 했어요, 저 잘했죠?"남자는 여전히 아무 대답도 없이 온화한 눈빛으로 그녀를 부드럽게 바라볼 뿐이었다. 유시아의 눈에서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내가 이렇게 훌륭하고 괜찮은 사람인데 당신은 어떻게 내 곁을 떠날 수 있어요? 현우 씨 없이 사는 나날이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알아요? 내가 어떻게 버티고 있는지 알아요?'줄곧 지옥에 있는 것은 결코 무서운 것이 아니다. 진정 무서운 것은 분명히 천국의 아름다움을 봐버렸고 천국과 한 걸음 떨어져 있을 때, 지옥으로 떨어져버리는 것이다!유시아는 이런 느낌을 이미 두 번이나 맛보았다. 한 번은 임재욱이 자신의 결혼식 현장에서 그녀를 감옥에 보내버린 것, 또한번은 소현후가 결혼식 당일 사망한 것. 현우 씨, 당신이 나를 그렇게 사랑하는데, 어떻게 임재욱처럼 내가 가장 행복했던 날에 나를 버릴 수 있어요? 어떻게?"고요한 별장 안에서 유시아는 자신을 꼭 끌어안고 어린아이처럼 울었다. 정운대학교 졸업식에 유시아는 참석하지 않고 사전에 학교에 가서 자신의 졸업장을 받아왔다.학교 사무실에서 나온 유시아는 바로 떠나지 않고 근처를 걸었다.정운대의 가장 유명한 곳은 캠퍼스의 단풍나무 숲이다. 늦가을이 되면 단풍이 들어 캠퍼스 전체를 붉게 물들여 많은 커플이 오동나무 아래에 모여 사진을 찍는다. 하여 이곳의 단풍나무는 학생들에게 사랑나무라고도 불리운다.다만 지금은 아직 때가 되지 않아서 그런지 사람이 그다지 많지 않고 아주 조용하다. 단풍나무 숲 끄트머리에 있는 작은 정자에서 심하윤을 만
헤어짐은 심하윤이 먼저 꺼낸 것이었다. 소현우는 그때 젊고 기력이 왕성했지만, 그는 몰랐다. 여자들이 헤어짐을 먼저 꺼낸 이유가 단지 그녀에게 좀 더 관심을 갖고 좀 더 달래주기를 바랄 뿐이었다는 것을.만약 그가 사과하고 말을 예쁘게 하고 그녀를 잘 달랬더라면 아무 일도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소현우는 그러지 않았다. 그는 아마도 그녀의 성질에 싫증이 났을 것이고 그녀도 소현우 주변의 여학생들에 대한 온갖 경계에 싫증이 났을 것이다. 그래서 그는 이별을 승낙했다. 심하윤은 뒤늦게 후회해도 소용없었지만 그를 어쩔 수도 없었다.그 후 세현 그룹이 파산하고, 너무 많은 일이 밀려왔다. 게다가 심씨 가문에서 파란을 더 크게 일으키자, 그는 심하윤을 완전히 마음속에 묻쳐두고 과거로 받아들였다.이런 지난 일을 생각하자 심하윤은 흐느껴 울었다.사실, 문제도 많고 이유도 많았는데, 결국은 사랑하는 마음이 부족했기 때문이다.소현우와 같은 사람은 오랫동안 사랑할 수 없다.그래서 사실 심하윤은 그와 유시아의 앞으로의 삶이 어떤 모습일지 항상 기대했다. 과연 한결 같을까? 평생 유시아 한 명만 지켜줄까? 아쉽게도 소현우는 기회를 주지 않았고 손을 놓고 말았다.심하윤은 오랫동안 묵묵히 있다가 쓴웃음을 지으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시아야, 다시는 소현우라는 사람을 생각하지 마. 너 자신을 잘 돌봐. 오직 너를 위해 살아, 알겠어?" 유시아는 그녀의 진지한 얼굴을 보며 쓴웃음을 지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그녀는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잃어버린 것은 되찾을 수 없다. 눈앞의 것을 잡아도 아무런 의미가 없다! 정운대학에서 나왔을 때는 이미 저녁 무렵이었다. 유시아는 택시를 타고 별장으로 돌아갔다. 유시아는 세현 건물을 지날 때도 참지 못하고 목을 빼고 밖을 내다봤다.원래 사람들의 왕래가 잦았던 웅장하고 화려했던 그룹 건물은 이제 거의 비워지고 자물쇠가 채워져 있었다.이 건물을 포함한 안의 자산은 모두 이미 신탁회사에 의해 하나씩 매각되었다. 듣자니, 이
유시아는 용재휘를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 "재휘야, 오랜만이야!" 확실히 안 만나지 며칠 되였다. 유시아는 기말고사 이후 결혼식 준비로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정운대 동기들을 소홀히 할 수밖에 없었다. 용재휘는 그녀의 옆자리에 앉아서 빈 잔을 달라고 사장님께 말했고 유시아의 눈앞에서 잔을 흔들었다."술 한 잔 얻어 마셔도 되지?"유시아는 웃음을 터뜨렸다."내가 취할까 봐 걱정돼?""예쁘고 우울한 여자가 술집에서 취하면 정말 귀찮은 일이지!" 그녀가 말을 하지 않자 용재휘는 다시 한번 되물었다. "그렇지 않아?" "……" "그래, 술은 너한테 반으로 나누어줄게!" 용재휘는 와인 반병을 들이키고 나서야 물었다. "졸업하면 앞으로 뭐 할 거야?""아직 모르겠어." 유시아는 용재휘를 힐끗 쳐다보며 물었다. "너는? 정운에 머물 거야, 아니면 미국으로 돌아갈 거야?" "우리 엄마 아빠는 미국으로 돌아오라고 했어. 근데 가기 싫어, 그렇다고 정운에 있고 싶지도 않고..." 용재휘는 는 말을 끝내자마자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시아야, 아니면 우리 같이 여행 가자. 나라가 크니 강산 대천을 유람하는 데도 적지 않은 시간이 걸릴 것이야. 걸으면서 그림을 그리면 다른 영감을 찾을 수도 있어. 어쩌면 우리가 여행하고 돌아왔을 때는 이미 큰 화가가 될 수 있을지도 모르잖아." 유시아는 웃으면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다만 그가 좀 유치하다고 생각했다. 용재휘는 오히려 이렇게 말했다."우리는 가난한 여행을 할 수도 있고, 직접 차를 몰고 여행할 수도 있어. 시아야, 넌 아직 젊고 어리니까 여러 곳 다녀봐. 너에게는 이익만 있을 뿐 아무런 해가 되지 않아!""하지만 난 여기 있고 싶어."유시아는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정운시, 나도, 그도 함께 살았던 곳인데..." "유시아!" 용재휘는 그녀의 말을 가로챘다."우리 그냥 밖에 나가서 걷기만 하는 것이지, 나중에 돌아오지 않는 것은 아니야. 너의 모든 세계에서 오직 소
늦은 밤, 유시아의 카카오톡을 받았을 때 임재욱은 병원에 있었다.신시연은 도우미의 도움을 받으며 진료실에서 여러 검사를 받았고 그동안에 임재욱은 밖에서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늦은 밤의 사립 병원이라 사람이 그리 많지 않았다.당직을 서는 의사 선생님과 간호사 외에 거의 사람이 없이 무척이나 쓸쓸해 보였다.임재욱은 복도를 한참이나 누비다가 의자에 걸터앉았다.유시아를 병원으로 바래다주고 돌아서는 길에 신시연의 전화를 받고서 오게 된 것이다.배가 아프다고. 당장이라도 죽을 듯이 아프다고.신시연은 며칠 전에 병원에서 여러 번 신체검사를 받았으나 해외에서 그러한 몹쓸 짓을 당하며 우울증과 부인병이 있는 외에 다른 수치들은 정상 범위 안에 있었다.그 말인즉슨,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것이다.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임재욱은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신시연에게 남은 ‘가족’이라고는 임재욱 하나뿐이니 어찌 됐든 그녀를 잘 지켜야 하는 마음뿐이었다.그 누구에게도 다시는 상처를 받지 않게끔.바로 이러한 마음가짐으로 하여 임재욱은 그녀를 직접 병원까지 데리고 오고 의사 선생님 입에서 아무런 문제도 없다는 확답을 듣고 나야만 마음이 놓일 수 있다.애타게 검사 결과를 기다리고 있는 가운데 핸드폰 알림 소리가 울렸다.유시아가 보낸 카카오톡인데, 내용은 아주 간단했다.[보고 싶어요.]임재욱은 고개를 숙인 채 카톡 내용을 거듭 곱씹으며 유시아 사진으로 되어 있는 그녀의 프로필 사진을 바라보며 입꼬리가 주체하지 못하고 자꾸 올라갔다.‘내가 보고 싶어? 별거한 지 하루 만에 벌써 내가 보고 싶은 거야?’‘우리 시아 이제 제법 솔직하네.’핸드폰을 손에 꼭 쥐고 어떻게 답장할지 생각하고 있을 때 응급실 문이 열렸다.도우미 김향화가 얼굴에 핏기 하나 없는 신시연을 부축하고 걸어 나왔다.신시연은 디자인이 아주 심플한 데님 스커트를 입었고 윤기가 별로 없어 보이는 머리를 돌돌 말아 묶어 올렸다.무척이나 초췌해 보이는 것이 가여운 느낌도 물씬 풍기고 있어 기고만장했던 그
유리 구두를 품속에 꼭 안고 있는 유시아를 보고서 임재욱은 순간 이러한 생각이 들었다.참으로 달래기 쉬운 여자라는 것을.특히 결혼하고 나서 아주 살짝만 잘해주어도 유시아는 아주 오랫동안 기뻐하는 것만 같았다.유시아는 늘 임재욱 앞에만 서면 스스로 자세를 낮추고 자기를 낮은 위치에 놓는 데 습관 되어 있다.임재욱은 고개를 숙여 그녀의 정수리에 뽀뽀했다.“앞으로 매년 생일마다 예쁜 유리 구두 선물해 줄게. 어때?”“좋아요.”유시아는 말하면서 아주 유치하게 그를 향해 손가락을 내밀었다.“손가락 걸고 약속해요. 절대 어기지 않겠다고.”백화점에서 나온 두 사람은 일단 화실로 향했다.새로 구매한 공예품을 적당한 자리에 올려놓고 유시아의 제안으로 이채련의 병원까지 바래다주었다.유시아는 자기가 뱉은 말은 어떻게든 지키는 타입이라 이채련과 이미 약속했으니 꼭 지켜야 했다.하물며 자식도 없는 이체련에게 마지막 이 시간들이 더더욱 외로울 것이다.외부인들이 보기에도 불쌍할 정도로 외롭다.임재욱이 아무리 말해도 소용이 없었고 이채련에게 주어진 시간이 얼마 없다고 하니 마음은 내키지 않았지만 보내주었다.차는 곧 사립 병원 앞에 멈춰 섰고 임재욱은 차에서 내리지 않았다.유시아는 차창에 대고 거듭 강조했다.“유리 구두랑 드레스들 옷방에 고이 모셔두도록 해요. 마구 놓지 말고요.”“알았어.”임재욱은 말하고서 손을 내밀어 그녀의 목을 확 잡고서 찐한 키스를 남기고 나서야 순순히 놓아 주었다.“얼른 가 봐.”“조심해서 가요.”임재욱은 조수석에 앉아 한결 가벼워진 그녀의 뒷모습이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보고서야 시선을 거두고 집으로 향하려고 했다.가는 길에 갑자기 신시연으로부터 전화가 걸려 왔다.“오빠, 배가 너무 아파요.”...병실로 돌아와 보니 이채련은 아직 자고 있지 않았다.침대에 멍하니 누워 재미가 일도 없는 예능 프로를 보고 있었다.유시아가 문을 밀고 들어오는 것을 보고 이채련은 놀라고도 기뻤다.“시아야, 늦은 시간에 웬일이야?”유시아
쇼핑은 늘 설레는 일이다.유시아는 자기 취향대로 화실 장식품으로 쓰일 공예품을 골랐다.이윽고 임재욱은 또 유시아를 데리고 근처에 있는 매점으로 향했다.지난번에 두 사람은 함께 쇼핑하면서 많은 옷을 샀었지만, 신서현 부모님께 갑작스러운 상황이 일어나면서 유시아는 그 모든 옷을 모조리 청소 아주머니에게 줘 버렸다.그때의 아쉬움을 채워주기 위해 임재욱은 또다시 쇼핑하려고 한 것이다.게다가 다음 주면 대우 그룹 상장 20주년이다.정식적인 석상에 모습을 드러낼 때 유시아를 자기 아내 신분으로 남에게 소개해 주고 싶어 이브닝 파티에 어울릴만한 드레스와 신발을 살 예정이다.드레스는 그럭저럭 큰마음이 가지 않았는데, 유시아는 그 신발이 마음에 들었다.은백색의 하이힐로 예쁜 보석들로 가득 박혀 있어 매점 불빛 아래서 유난히 반짝이는 것이 신데렐라 동화에 나올 법한 유리 구두 같았다.매점 직원은 유시아가 마음에 들어 하는 것을 보고 바로 다가왔다.“손님 안목이 참 좋으시네요. 이 제품은 저희 디자이너 선생님의 최신 디자인으로 지금 딱 한 켤레만 있습니다. 만약 이 신발을 신고 나가신다면...”임재욱은 갑자기 직원의 말을 끊어버렸다.“이미 결혼했고요. 이 사람은 제 아내예요.”유시아는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들었는데, 자기를 바라보며 웃고 있는 그를 보고서 따라서 웃었다.“맞아요. 이 사람이 제 남편이에요.”매점 직원은 멍하니 있다가 바로 얼굴에 미소를 머금고 베스트 쇼핑 가이드다운 실력을 드러냈다.“어머, 어쩐지 너무 어울리신다 했어요...”직원의 칭찬에 두 사람은 얼굴에 웃음꽃이 피어났다.이윽고 매점 직원은 분위기를 파악하며 유리 구두에 대해 더욱 디테일한 설명을 첨부하기 시작했다.“이 제품의 새끼 양가죽으로 만들어졌으므로 착용감이 엄청 좋으실 거예요. 하루 종일 신고 걸으셔도 전혀 문제가 없다는 말이죠. 게다가 우리 디자이너 선생님이 즉흥으로 만들어내신 작품이라 절대 똑같은 제품을 시중에서 보실 수 없을 거예요.”한 켤레일 뿐만 아니라 사이
한서준은 눈살을 찌푸리며 되물었다.“내가 뭐?”“한서준 씨는 당당해요?”유시아는 바로 질문을 질문으로 돌려주었다.“임씨 가문에 접근한 그 의도를 다른 사람들이 모를 것 같아요? 할아버지, 재욱 씨 그리고 나까지 똑똑히 알고 있어요. 청아 씨만이 한서준 씨를 사랑해서 자신을 속이고 있는 거라고요. 그렇게 쭉 모르는 척을 하며 모든 걸 감당하고 있었던 거라고요. 한서준 씨 역시 청아 씨를 이용한 게 아닌가요?”마지막 한 마디에 한서준은 침묵하고 말았다.그렇다. 임청아에게 접근한 이유는 유시아가 ‘스파이’로 움직여 주지 않겠다고 거절했기에 어리석어 보이는 임씨 가문 천금을 노리게 된 것이다.하지만 사람 마음이라는 것은 결국 변하게 되어 있다.임청아 대한 마음은 모략에서 시작했으나 시간의 흐름에 따라 그 마음이 점점 사랑으로 끝을 맺게 된 것이다.늘 밝고 긍정적인 에너지를 띠고 다가왔던 임청아가 어두운 자신의 삶을 밝게 비춰주는 것만 같았다.따라서 한서준은 임청아와 평생을 함께하고 싶다는 마음이 차츰 생기게 된 것이다.임태훈이 반대한다고 하더라도 꼭 자기 곁으로 데리고 오고 싶었다.“청아 씨 지금 몸도 마음도 상처투성이에요.”“만약 청아 씨 행복하게 해 줄 수 없다면 신중하게 생각하고 결정하는 게 좋을 거예요.” 말을 마치고 유시아는 차 문을 밀고 차에서 내려 병원 밖으로 걸어갔다.택시에 오른 유시아는 긴 망설임 끝에 끝내는 더 스케치 화실 주소를 운전 기사에게 알렸다.차는 화실 맞은 편에 세워졌고 유시아는 화실 바로 맞은편에 있는 커피숍으로 들어가 창가 자리에 앉았다.화실 안의 상황을 바로 체크할 수 있고 자신의 정체를 드러내지 않아도 되는 최적의 위치라고 할 수 있다.한참 지나고 나서야 수많은 경호원들이 임태훈을 사이에 두고 화실에서 걸어 나오는 것이 보였다.임태훈은 벤틀리에 올라 강한 기운을 남기고 자리를 떠나버렸다.유시아는 그제야 한시름을 놓고 들고 있던 커피잔을 내려놓고는 바로 화실로 향해 달려갔다.화실 안과 밖은 겉은
전화를 마치고 유시아는 혼자 밖에 없는 휴게실을 보고서 깊은 번뇌에 잠겼다.남을 탓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에 임태훈처럼 막무가내로 어처구니가 없는 노인이 있다는 게 도통 이해가 되지 않았다.임태훈이 끔찍이 여기는 임청아를 유시아가 계단에서 밀어버린 것도 아닌데, 왜 애꿎은 자기 화실을 닫으려고 하는지 알 수 없었다.집안 내부에 문제가 생기면 일단 스스로 반성하는 법부터 배워야 하는데, 그게 무엇이든 일단 남한테서 문제를 찾고 있으니, 권력을 믿고 사람을 업신여기는 것이 분명했다.유시아는 생각하면 할수록 머리가 복잡해졌고 불안함도 점점 커졌다.지금 운영하고 있는 더 스케치 화실도 용재휘가 먼저 시작한 것인데, 그와 더불어 학생들까지 모두 함께 넘겨주었는데, 만약 이대로 화실을 망쳐버린다면 용재휘에게 너무 미안할 것 같았다.임재욱과 임태훈이 어느 정도로 얘기했는지 알 수 없었지만 화실이 그들 싸움의 희생물이 되지 않기만을 바랄 뿐이었다.임재욱에게 전화를 걸어 상황을 묻고 싶었으나 감히 그럴 용기가 없어 일단 지켜보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떨리는 심장을 부여잡은 채로.그렇게 한참이나 심장을 조이고 있었지만, 걸려 오는 전화는 없었다.유시아는 일이 어느 정도 망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학생 채팅방에 오늘 갑자기 일이 있다며 수업을 뒤로 미룬다고 알렸다.언제 다시 수업을 시작할지는 소식을 기다리라며 덧붙이기까지 했다.톡을 보내고서 유시아는 더 이상 핸드폰을 보지 않고 바로 병원 밖으로 나갔다.그러나 병원 대문을 나오자마자 한서준이 정면에서 오고 있었다.“유시아.”유시아는 고개를 들었고 그를 보게 되는 순간 정신이 아찔해 났다.직감이 알려주건대, 절대 좋은 일이 없다는 것이다.화실의 생존 여부도 알 수 없는 상황에서 그의 심기까지 건드리고 싶지 않았다.한서준은 쉽사리 유시아를 놓아 주지 않았고 손을 내밀어 유시아의 손목을 꼭 잡았다.“물어볼 일이 있어.”말하면서 근처에 있는 지프차를 가리켰다.“차에 타서 얘기 하자.”“그쪽이랑 할 말
유시아는 그 말을 이어받지 않고 집사의 바람대로 타이르기 시작했다.“몸이 아직 많이 허약해요. 먹고 싶지 않아도 억지로라도 좀 먹어야 하거든요. 일이 어찌 됐든 일단 건강부터 챙겨야 해요.”임청아 그 말을 듣고서 쓴웃음을 지었다.“건강 회복되면 할아버지한테 잡혀가서 집에 감금되는 것밖에 더 있겠어요?”“그렇게 생각하지 말아요.”유시아는 눈살을 찌푸리며 덧붙였다.“어찌 됐든 할아버지 마음은 한결같을 거예요. 청아 씨를 아끼고 사랑하는 거요. 서로 대화가 필요한 거 같아요. 서로 터놓고 얘기하고 나면 오해가 풀리고 마음도 풀리면서 모든 게 원점으로 돌아갈 수 있을 거예요.”임청아의 입가에 피식 웃음이 새어 나왔다.“저도 그렇게 생각했었어요. 아이 낳고 나면 할아버지도 서준이도 원한을 내려놓고 행복만 할 수 있다고요.”“근데 이렇게 몸도 아끼지 않고 점점 더 막무가내로 나가면 두 사람 사이의 원한은 점점 더 짙어질 거예요.”유시아는 말하면서 도우미 손에서 보신탕을 가져와 천천히 불며 임청아의 입가로 가져갔다.임청아는 생각 밖으로 무척이나 순순하게 유시아의 말을 따랐고 그녀의 말에 이치가 있는 것 같아 조용히 보신탕을 받아 마셨다.도우미와 집사는 두 사람이 티키타카 서로 말을 주고받는 것을 보고 서서히 마음이 놓였다.임청아가 뭐라도 먹기 시작하여 자기도 모르게 한시름을 놓으며 자리까지 비켜주려고 했다.두 사람이 마음 편히 말할 수 없을까 봐 눈치껏 일어서려는 것이다.“작은 사모님, 아가씨와 천천히 얘기하고 계세요. 밖에 나가 있을 테니 필요한 거 있으시면 언제든지 부르시고요.”“네, 가보세요.”도우미 일행이 나오고 나서야 유시아는 본론으로 들어갔다.“한서준 씨는 알고 있어요?”임청아는 고개를 저으며 쓴웃음을 지었다.“그런다고 숨겨질 일도 아니잖아요.”요즘 임태훈뿐만 아니라 한서준도 눈을 부라리고 임청아를 찾고 있었다.두 사람의 시선을 피하고자 아파트도 호텔도 들어갈 수 없었고 버려진 강아지처럼 유시아 화실에 몸을 숨기고 지낸 것
임청아 이름 석 자가 임재욱의 입에서 나오자, 유시아는 순간 청천벽력을 맞는 것만 같았다.심지어 지금까지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으니 말이다.한참 지나고 나서야 겨우 떨리는 심장을 부여잡고 물었다.“청아 씨가 왜 병원에 있는 거죠?”임청아는 임신한 것을 알고 매사에 조심하며 걸음 하나도 천천히 옮겼었다.게다가 해외에 있는 친구와 연락하여 해외로 떠날 준비까지 마쳤다고 했었다.그런데 관건이 되는 순간에 계단에서 굴러떨어졌다고?“할아버지를 너무 쉽게 생각한 거 아니야?”임재욱은 말하면서 차갑게 웃었다.“네 화실에 청아 숨겨 놓았잖아. 할아버지께서 그걸 과연 모르고 있었을 것 같아? 오늘 화실로 청아 데리러 갔었는데, 가지 않겠다고 청아가 하도 우기는 바람에 억지로 묶어서라도 데리고 가겠다며 서로 실랑이를 벌이다가 계단에서 굴러떨어진 거야.”그렇다면 아이를 유산했을지도 모른다.임태훈의 습관에 따라 생각해 본다면 이 화살은 결국 유시아에게로 돌아오게 되어 있다.임재욱이 그렇게 경고하였건만 유시아는 마음이 약한 사람이었다.약해지는 마음에 언젠가는 구렁이에 빠지게 될 날이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날이 바로 오늘 일 줄은 몰랐다. 임재욱은 한숨을 내쉬며 꾸짖고 싶은 마음을 겨우 억눌렀다.“병원 주소 보내줄 테니 얼른 가 봐.”말을 마치고 임재욱은 전화를 끊어버렸다.얼마 지나지 않아 메시지 한 통이 도착했고 운전 기사에게 새로운 목적지를 알려주었다.같은 시각, 병원 안에서.임청아는 이미 수술을 마쳤고 일반 병실로 옮겨져 있었다.이미 가문의 집사와 간호인이 옆에 있었고 병실 문 앞에는 임태훈이 보낸 경호원도 있었다.다만 경호원이 경계해야 할 상대는 유시아가 아니라 한서준이다.따라서 유시아는 별다른 막힘없이 바로 병실 안으로 들어갔다.병상에 누워 있는 임청아는 얼굴에 핏기 하나 없었고 초점을 잃은 두 눈으로 멍하니 천장만 바라보고 있었다.불과 하룻밤 사이에 모든 활력을 잃어버린 모습이었다.집사는 자리에서 일어서서 아주 공손하게 유시아에
조금 전까지 허겁지겁 밥을 먹고 있던 임재욱은 멈칫거리고 말았다.이윽고 고개를 천천히 들어 웃는 듯 마는 듯한 얼굴로 유시아를 바라보며 물었다.“별거하자는 뜻이야?”“그렇게 생각해도 좋아요.”유시아는 숟가락을 내려놓고 머리가 아픈 듯 이리저리 만지작거렸다.“지금 이러한 상황에서 이러는 것도 좋을 것 같아요. 나한테 신경 쓰지 않아도 되고 그 시간으로 시연이한테 집중해도 되잖아요. 나도 마침 어머님 곁에 좀 있어드리고... 서로에게 지금 이게 최우선인 것 같아요.”임재욱은 숨을 깊이 들이마시고서 낙담한 모습으로 말했다.“그래. 네가 좋다고 하면 그게 좋은 거겠지. 그렇게 하자.”말을 마치고 그는 계속 밥을 먹었다.유시아는 그런 그를 바라보고서 아련하게 웃고는 바로 자리에서 일어나 위층으로 올라갔다.이튿날 아침, 유시아는 임재욱이 출근하고 나서야 침대에서 일어났다.일상복 몇 벌과 일상용품을 챙겨 작은 트렁크 안에 놓고 바로 이채련한테 가려고 했다.허씨 아주머니는 트렁크를 들고 내려오는 유시아의 모습에 살짝 당황한 모습이었다.“사모님, 어디 가시는 거예요? 설마... 가출하려는 건 아니죠?”유시아는 허씨 아주머니를 향해 웃었다.“아니에요. 친척분이 좀 위독하신데 제가 옆에서 좀 챙겨드리고 싶어서 가는 거예요. 얼마 걸리지 않을 거고 곧 돌아올 수 있을 거예요.”말을 마치고 트렁크를 들고서 집을 나섰다.이채련이 지내고 있는 병실이 VIP 병실로 널찍한 객실까지 갖춰져 있다.유시아는 간호사에게 접이식 침대와 이불을 요구했고 간단히 정리하고 나니 잘 자리가 아늑하게 마련되었다.이채련은 더 이상 침대에서 내려올 수 없어 하루 24시간을 침대 위에서 보내고 있다.얼굴도 하도 여위어 본연의 모습을 점점 잃어가고 있었다.그전에도 유시아는 이채련에게 이곳에서 며칠 동안 함께 지내고 싶다는 의사를 밝힌 적이 있지만 이채련은 행여나 자기로 인해 두 사람 사이에 흠이 생기게 될까 봐 동의하지 않았었다.지금 이 자리까지 오게 된 것만으로도 갖은 풍
임재욱은 핸들을 꼭 움켜쥐고서 앞만 바라보았으나 두 눈에는 고통과 망연함이 가득했다.“시연이 해외에 있을 때, 몹쓸 짓을 당했어. 한번이 아니라 여러 번이나. 그래서 우울증에 걸리게 된 거야.”유시아는 두 눈이 휘둥그레지면서 볼륨까지 높아졌다.“어머, 어떡해요!”평소에 신시연에 대해 좋은 마음을 가지고 있었던 건 아니지만 그 소식을 듣게 되는 순간 심장이 덜컹 내려앉기는 했다.여자에게 있어서 그런 몹쓸 짓을 당한다는 건 치명적인 타격과 치욕이 아닐 수가 없다.게다가 부모님의 일까지 더해지니 조금 전 식당에서 봤던 신시연의 모습이 이해되었다.임재욱은 말하면서 후회와 자책하는 빛을 드러냈다.“그렇게 가고 싶지 않다는 시연이를 내가 억지로 보낸 거야.”그때는 모든 걸 너무 쉽게 생각했었다.낯선 곳으로 가서 마음을 가다듬고 학업에만 집중하면 자연스레 모든 걸 잊고 새로운 삶을 그려나갈 수 있으리라 믿었다.하지만 임재욱이 잊고 있었던 부분이 하나 있는데, 그건 바로 신시연이 이제 갓 20살을 넘은 꽃다운 여자아이라는 것이다.해외에는 불안정 요소도 많고 미처 생각지 못하는 위험도 많다.게다가 젊은 나이라 자칫 잘못하면 그릇된 길로 들어서기도 아주 위험하고 말이다.신시연 곁에 사람을 함께 보내긴 했지만 그렇다고 하여 24시간 동안 찰싹 달라붙어 다닐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유시아와 결혼하고 나서 신혼에 푹 빠져 있는 동안 신시연에게 더 많은 관심을 주지 않았기에 이러한 일이 일어난 게 아닌지 죄책감이 들기도 했다.지금 임재욱은 신서현에게 미안할 뿐이다. 하나뿐인 동생을 이 지경으로 만들었으니.하지만 그가 말한 본의와 달리 듣고 있는 유시아는 또 다른 뜻으로 받아들이게 되어 있다.유시아의 기억으로는 신시연이 해외로 보내진 이유는 이러하다.그때 신시연은 정운시 대학교 교내 사이트에 유시아를 먹칠하는 게시글을 올리면서 유시아로 하여금 학업을 이어갈 수도 수업을 들을 수도 없게 악한 상황을 만들었었다.마침 그 일을 소현우가 알게 되면서 유시아에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