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하윤은 유시아와 함께 뒷좌석에 앉았고 혹시나 감기에 걸릴까 봐 입고 있던 외투를 벗어 유시아에게 덮어줬다.“의외인데요?”용재휘가 혀를 내둘렀다.“시아 누나는 얼굴은 여리여리한데 술 먹을 때 보니... 악!”말이 끝나기도 전에 와인색 스포츠카가 갑자기 무언가와 충돌하면서 심하게 흔들렸다.차에 타고 있던 세 사람은 안전벨트를 매기도 전에 관성으로 인해 몸이 앞으로 쏠렸다.곧바로 '사고 운전자'는 이미 뒤쪽 차에서 내렸다. 그리고 차 문을 벌컥 열어 심하윤의 다리에 누워 있는 유시아를 잡아당겨 앉히더니 그대로 둘러메고 아무 일도 없는 듯이 자기 차가 있는 쪽으로 걸어갔다.“미친! 어디서 굴러온 또라이지?”용재휘는 놀란 듯 차에서 내려 임재욱을 향해 외쳤다.“저기요, 누구세요? 당장 그 사람 내려놔요. 그렇지 않으면 경찰에 신고할 거예요!”“재휘야!”심하윤이 큰소리로 그를 부르면서 차에서 내리더니 빠른 걸음으로 임재욱의 뒤를 쫓아가 그의 앞을 가로막고 물었다.“임 대표님, 시아가 지금 술에 취한 상태인데 어디로 데려가나요?”술집 입구의 화려한 불빛이 마침 임재욱의 차가운 얼굴을 비추었다.“그러는 당신들은 시아를 지금 어디로 데려가는 거죠?”심하윤은 살짝 기분이 좋지 않았다.“당연히 집에 데려다주죠. 아니면 저희가 어디에 팔아먹기라도 할까 봐요?”“그럴 필요 없어요.”임재욱은 돌아서서 유시아를 자신의 조수석에 앉히고 그녀의 몸에 감긴 외투를 벗기더니 용재휘에게 던졌다.“옷은 돌려드릴게요!”속내를 알 수 없는 절친이라는 사람과 분명히 유시아에게 흑심을 품을 것 같은 남자가 퍽이나 그녀를 집에 잘 데려다주겠다고 생각했다.심하윤은 이렇게 퍼런 대낮에 사람을 거의 납치하는 수준으로 데려가는 짓을 임재욱이 하게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못가요!”그녀는 잠시 멍하니 있다가 몇 초 후에야 정신을 차리고 차 앞을 가로막았다.“시아를 좋아하지도 않으면서 왜 놓아주지 않는 거죠? 시아가 빚이라도 졌나요?”임재욱 그녀를 차갑게 쏘아보며 두 글자
힐튼 호텔 방.유시아는 남자에 의해 거칠게 큰 침대로 던져지면서 깔끔하던 하얀 시트가 순식간에 구겨졌다.그녀는 깊이 잠에 든 것처럼 보였고 작고 약간 솟아있는 그녀의 입은 살짝 벌려져 있었다. 그리고 길고 빼곡한 속눈썹이 눈꺼풀에 부채꼴 모양의 그림자를 만들었다.여자의 독특한 체향과 다양한 알코올 향은 그녀를 맛있는 금단의 열매처럼 보이게 했으며 탐하면 안 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여전히 그에게 치명적인 매력을 느끼게 했다.임재욱은 침을 꿀꺽 삼키더니 몸을 돌려 욕실로 들어가 물의 온도를 최하로 맞췄다.찬물이 머리 위에서 떨어지면서 오장육부가 얼어붙은 것 같았지만 하필이면 마음속의 그 불덩어리가 꺼지지 않고 오히려 점점 더 강해져 언제라도 그를 잿더미로 만들 수 있을 것 같았다.이때 욕실 문이 갑자기 밖에서부터 세차게 열리더니 유시아가 허둥지둥 들어오면서 변기에 머리를 박고 먹은 것을 다 토해냈다.그녀의 위는 교도소에서의 3년 생활을 겪어오면서 더 이상 학창 시절처럼 튼튼하지 못했다. 알코올의 자극 때문에 뒤집힌 위는 모든 것을 다 토해내고 나서야 비로소 편안해졌다.유시아는 변기 옆에 무릎을 꿇고 앉아 힘겹게 물 내리는 버튼을 눌렀다.이제야 고개를 들어보니 웬 기다란 그림자가 자신의 앞에 드리워져 있었다. 그녀가 어리둥절해하며 고개를 돌린 순간 웬 남자가 물에 흠뻑 젖은 채 서 있었다. 살짝 실눈을 뜨면서 자세하게 보려고 애쓰더니 갑자기 그를 향해 웃으며 중얼거렸다. “재욱 씨...재욱 씨...”알코올의 자극 때문에 목소리가 예전처럼 맑고 청아하지 않았다. 지금은 낮고 허스키한 상태인데 묘하게 야했다.그녀는 꿈을 꾸고 있는 것 같았다. 임재욱을 만나다니. 그는 여전했다.보아하니 이건 그저 꿈이 아니라 춘몽이다!유시아는 이런 자신을 비웃듯 쓴웃음을 지었다. 얼마나 멍청하고 그를 사랑했으면 지금처럼 매일 생각하고 그에 대한 꿈까지 꾸는 걸까?그녀는 마음속으로 자신을 경멸하면서도 탐욕스럽게 남자를 쳐다보았고 자신의 시선을 그의 얼굴에서 떼지
가끔 유명한 동문 신분으로 남운대에 돌아올 때마다 혹시 대학 시절에 약간 뻔뻔하고 그림 좋아하던 여자아이가 3년 내내 당신을 쫓아다니면서 좋아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지 궁금했다.감히 묻지 못했다.꿈나라에서도 그 사람 앞에서는 건방지게 굴지 못했다.임재욱은 결코 유시아에게 그 어떤 여지도 준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그녀는 눈을 감고 눈물을 뚝뚝 흘렸다.임재욱은 눈살을 찌푸리더니 아무 생각 없이 그녀에게 입을 맞췄다.여자의 피부는 옥같이 희고 또 이 나이의 여자들만 가지고 있는 특유의 성감대가 있는데 그의 뜨거운 입맞춤으로 빠르게 온몸이 뜨거워졌다.그는 여자를 완전히 자신에게 스며들도록 만들고 싶었다!밤이 깊어지고 주위는 고요했다.임재욱이 여자를 안고 욕실에서 나와보니 방에서 휴대전화 벨 소리가 울렸다.그는 잠시 멍하니 서 있다가 기절해 있던 여자를 이불 안에 넣어주고 바닥에서 가방을 집어 들더니 안에서 그녀의 휴대전화를 꺼냈다.화면에는 저장하지 않은 전화번호가 떴는데 임재욱은 이게 소현우의 전화번호라고 기억하고 있었다.그는 살짝 미소를 짓더니 창가 쪽으로 걸어가서 바깥의 밤하늘을 보며 여유롭게 전화를 받았다.“여보세요?”“...”소현우 쪽에서 몇 초의 정적이 흐르다가 물었다.“시아는요?”“샤워하고 지금 잠들었어요.”임재욱은 웃을 듯 말 듯하면서 다시 말했다.“무슨 일인지는 몰라도 내일 깨나면 제가 시아한테 알려줄게요.”“임재욱 씨!”소현우는 이를 악물고 말했다.“3년 전, 당신이 유시아 씨를 짓밟은 것도 모자라 정성스레 지옥까지 보냈죠. 이제 겨우 숨통이 트여서 살아났는데 그녀를 또다시 죽음으로 몰아넣어야 속이 시원한가요?”임재욱이 코웃음을 쳤다.“누가 죽음으로 몰아넣어요? 방금 우리 두 사람이 함께 있을 때는 분명히 좋아했는데!”“뻔뻔하네요!”임재욱은 껄껄거리며 웃더니 더 이상 대꾸도 안 하고 전화를 끊었다.“여보세요? 임재욱 씨, 똑바로 말해요. 여보세요!”소현우는 순간 눈살을 찌푸리더니 그대로 핸드폰을 차 바
다음날, 새벽.유시아는 약간의 어지러움을 느끼며 잠에서 깨어났다. 어젯밤 일은 꿈만 같았다.꿈에서 깨어난 뒤에도 여운이 가시지 않았다.그저...유시아는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 침대 맞은편의 통유리 창문과 침대 옆 카펫에 놓인 남자 넥타이를 바라보았다.여긴... 고급 호텔 방 같은데...“깼군.”그 소리와 함께 단정한 옷차림의 남자가 욕실에서 걸어 나왔다. 잘 만들어진 검은색 정장이 남자의 건장한 몸을 감싸고 있었다. 아침햇살을 받아 금빛으로 빛나는 그는 평소보다 더욱 활기차 보였다.그가 손에 든 봉지 하나를 그녀의 머리맡에 던지며 말했다.“네 옷, 직원더러 잘 씻어서 말려놓으라 했어. 입고 나와, 식당에서 기다릴 테니.”말을 끝낸 남자는 몸을 홱 돌려 떠나갔다.“...”그녀는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문질렀다. 어젯밤의 기억이 서서히 떠올랐다. 자신이 심하윤의 생일파티에서 취했던 일, 호텔에 들어왔던 일, 욕실에서 임재욱과...이 모든 일들을 그녀는 지금까지 꿈이라 여기고 있었다.더욱 우스운 사실은, 꿈이라 여겼던 그 상황 속에서 그녀는 자신을, 자신의 사랑을, 자신의 서러움과 아쉬움을 모두 내보였다는 것이다.임재욱은 식당에서 잠깐 기다리다 유시아가 내려오지 않자, 몸을 일으켜 침실로 걸어갔다.침실 문에 가까워질 무렵, 문이 갑자기 열리더니 머리를 풀어 헤친 유시아가 안에서 뛰쳐나왔다. 그녀는 임재욱을 쓱 보고는 급히 “실례했어.”라는 말만을 남긴 채 빠르게 바깥을 향해 걸어갔다.임재욱은 그녀의 얇은 팔을 잡고 물었다.“어디 가게?”“집에 가야 해요...”임재욱은 유시아를 끌고 식당으로 향했다.“밥 먹고 내가 데려다줄게!”유시아는 의견을 굽히지 않고 말했다.“재욱 씨와 밥 먹기 싫어요...”임재욱은 유시아의 팔을 잡은 손에 힘을 주며 말했다.“홍콩 가는 저녁 비행기를 예약했어. 같이 밥 먹고, 같이 네 집에 가 짐을 챙기자, 그리고 저녁에 바로 가는 거야. 석 선생님이 처방해 주신 약은 거의 다 먹었겠지? 선생님이 다음
분명 그의 마음속엔 신서현 한 사람뿐이면서, 그녀의 일이면 무엇이든 참견하는 것이 정말 참을 수 없었다.이건 사랑이 아니라 건방진 동정, 심지어는 모욕이다...!그가 그녀에게 준 아픔을 그더러 치료하게 둘 수는 없었다. 그런 동정 따위 필요 없었다!임재욱은 유시아의 결심한 듯한 눈빛을 보며 무의식적으로 그녀의 팔을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소현우가 그녀에게 준 도움은 따뜻함인데, 임재욱이 그녀에게 준 도움은 모욕이라니!유시아가 자신에 대한 편견이 이렇게나 강할 줄 몰랐다.건달의 손에서 그녀를 구해냈다 하더라도, 먼 곳 홍콩까지 한달음에 달려가 그녀를 찾았다 하더라도,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편의점에 가 여성용품을 샀다 하더라도, 일정을 비워내 직접 그녀를 데리고 홍콩의 병원에 간다고 하더라도 그 편견을 깰 수 없었다!심지어, 그녀는 이를 자신에 대한 모욕이라 생각하고 있었다!그럼, 그는 왜 굳이 이런 일들을 해야 할까? 유시아가 자신에 대한 혐오를 없앨 수도 없는데 대체 왜 그녀에게 잘해줘야 할까? 그냥 그녀를 자신 주변에 감금해 두고 하고 싶은 대로 하는 게 더 낫지 않나? 왜 이렇게 힘든 길을 가는 걸까?유시아는 임재욱의 눈 속에서 이글거리는 불꽃을 보았다. 무서워진 그녀는 임재욱의 손을 뿌리치고 재빨리 밖으로 걸어 나갔다.거실 식탁까지 갔을 뿐인데 임재욱이 벌써 쫓아 나왔다. 그는 한쪽 손으로 유시아의 손목을 단단히 움켜쥐고 다른 한쪽 손으로 식탁 위의 물건들을 바닥으로 쓸어버리고는 유시아를 식탁 위로 던지다시피 밀었다.“널 데리고 병원에 가는 게 널 모욕하는 거야? 유시아, 가만히 놔뒀더니 모욕당하는 느낌을 잊은 거야?”임재욱의 건장한 몸이 그녀를 향해 다가왔다. 순간 무서워진 유시아의 눈에서 순식간에 눈물이 떨어졌다. 그녀는 눈물을 매달고 손을 뻗어 계속해 임재욱을 밀어냈다.“싫어요, 재욱 씨, 제발... 하지 마요...”“싫어? 왜 싫은데...?”임재욱은 피식 웃고는 손을 뻗어 그녀의 여린 두 손목을 움켜쥐고는 그녀의 머리 위에
유시아는 정말 죽음에 대해 생각했다.아빠처럼, 모든 원한과 갈등은 세상에 남겨버리고 깃털처럼 사라져 다시는 세속에 고통받지 않고 싶었다. 목숨은 소중하다지만 이 남자와 끝없이 엮이는 게 너무도 피곤하고 싫었다.골치 아파 죽을 것 같았다!임재욱은 그녀의 갸름한 턱을 들어 올리고는 모든 음절에 힘을 주며 말했다.“유시아, 감히 죽으려 한다면 좋은 꼴로 못 있게 할 거야. 네 아버지의 무덤을 파헤치고, 네가 죽어도 편히 눈감지 못하게!”그는 유시아의 분노와 경악이 섞인 얼굴을 보며 소름 돋는 웃음을 지었다.“시아야, 난 그렇게 고상한 사람이 아니거든.”가장 사랑하는 여인은 이미 잃었지만, 가장 재미있는 장난감은 잃기 싫었다.임재욱에게 유시아는 그저 장난감이었다!임재욱이 충분히 놀지 못했으니, 유시아는 죽을 자격조차 없었다.한참 뒤, 임재욱은 천천히 몸을 일으키고는 그녀의 얼굴을 받쳐 들고 말했다.“시아야, 다른 사람 너무 신경 쓰지 마. 남자도, 여자도. 너무 중요하게 생각하지 말고, 온 힘을 다해 사랑하지도 마!”자신뿐 아니라 여자에게도 똑같이.임재욱은 어젯밤 일에 대해서는 소현우와 비슷한 생각이었다. 심하윤이 일부러 그녀에게 술을 먹인 뒤 그 보라 머리 남자의 침대 위에 갖다 놓으려 했다는 것이다.자신이 유시아를 데려간 일도 전화씩이나 걸어 소현우에게 알려줬으니, 이건 소현우더러 그들이 또 함께 밤을 보냈다고 알려주려는 게 분명했다!여자들의 기 싸움은 정치인들과 다를 게 없었다. 심하윤의 수단은 유시아같이 단순한 사람이 대응할 수 없는 것이었다. 한 번 더 진다면 그녀는 정말 모든 걸 잃게 될지도 몰랐다.유시아는 그녀가 그렇게나 오래 사랑했던 남자가 그녀를 배신할 거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임재욱이 이렇게 말하는 게 진심인지 비꼬는 것인지도 몰랐다!남자는 그녀가 알다가도 모를 존재였다.하지만 그는 자신의 모든 걸 꿰뚫어 보고는 손안에 꼭 쥐고 있었다. 유시아는 단정한 옷차림으로 임재욱 앞에 서 있었지만 마치 실오라기 하나 걸
이런 그는 신서현에게, 그리고 유시아에게 떳떳하지 못했다!임재욱은 천천히 손을 들어 올려 미간을 주물렀다. 그는 지금의 유시아보다 더 혼란스러웠다.-단숨에 호텔을 뛰쳐나온 유시아는 택시를 불러세웠다.“아저씨, 화랑 아파트로 가주세요!”밀폐된 작은 공간 속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유시아가 고개를 들자 택시 기사가 황급히 시선을 피했다. 그녀는 어리둥절해 있다가 이내 고개를 숙여 자신의 옷깃으로 목덜미의 붉은 자국을 가렸다.그녀는 씁쓸하게 웃었다. 택시 기사 눈에 자신은 아마, 호텔 남성 이용객들 침대 위의 일회용품이겠지?택시는 아파트 입구에 멈췄다. 유시아는 돈을 내고 차에서 내렸다.고개를 돌리니 소현우가 멀지 않은 곳에 서 있었다. 그는 언제나처럼 단정한 옷차림이었다. 그러나 눈이 충혈된 것이, 밤잠을 설친 사람처럼 보였다.그는 급히 유시아를 향해 걸어왔다.“시아야, 밤새 찾았잖아...”그럼, 어젯밤 일어난 일들도 알고 있을 테니 굳이 말할 필요가 없었다.유시아는 옅게 웃고는 목덜미의 키스마크를 가리지 않은 채 물었다.“무슨 일이세요?”소현우는 그녀에게로 두어 걸음 더 다가왔다. 사랑이 가득한 눈빛이 유시아의 얼굴로 향했다. 그는 밤새 유시아를 찾았지만, 임재욱의 손에서 그녀를 구해오지 못해 여기서 그녀를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시아야...”그는 유시아의 손을 잡고 한참을 망설이다 겨우 입을 열었다.“시아야, 우리... 우리 약혼하자!”유시아는 눈을 크게 뜬 채 그를 바라보았다. 자신이 잘못 들은 줄로만 알았다.“뭐라고요?”“우리, 약혼하자고!”소현우의 말투는 담담했지만, 깊은 감정이 들어있었다.“시아야, 난 사람이야. 혼자 생각할 줄 아는 사람이라고. 네 마음대로 움직이는 물건이 아니야. 나도 선택할 권리가 있어.”그는 최근 그녀를 찾지 않았다. 일이 바빠 다른 걸 신경 쓸 겨를이 없었던 것도 있지만 그녀가 학교에서 마음껏 자기 일을 하길 바라는 마음도 있었다.서로 할 일을 하면서 생각을 정리하려 했다.그러나
소현우는 아무 말 없이 그녀의 맞은편에서 그녀가 억지로 지어낸 웃음이 점점 사라지는 것을 지켜보았다. 얼굴의 근육은 더 이상 그녀의 말을 듣지 않은 채 굳어져 갔다.유시아는 몸을 돌려 황급히 도망쳤다.소현우가 손을 뻗어 그녀의 손목을 잡고 말했다.“유시아, 왜 도망쳐?”“우린 안 돼요, 현우 씨...”유시아는 입술을 축이며 횡설수설하기 시작했다.“현우 씨... 현우 씨는 하윤 언니와 어울려요. 두 사람 정말 괜찮은 한 쌍이에요. 어서 하윤 언니에게 가요. 제게 오지 말고요...”심하윤이 한 일을 모두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심하윤이 소현우에 대한 사랑을 부정할 수는 없었다. 유시아도 심하윤이 영원히 마음 변하지 않고 소현우만을 사랑할 거라 믿고 있었다.소현우는 유시아를 보며 옅게 웃었다.“너 우리 엄마랑 똑같은 말을 하네!”소현우의 엄마는 심하윤을 마음에 들어 했다. 소현우와 심하윤의 집안과 나이가 비슷한 데다가 심하윤이 소현우에 대한 사랑을 그 누구도 의심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이런 여자와 함께하면 정말 편할 것이었다!소현우는 일이 바빠 가정에 쏟을 시간과 힘이 없었다. 그리고 심하윤은 그를 도와 가정을 잘 꾸려나가고 그의 버팀목이 돼 줄 수 있었다.부모의 입장에서 생각했을 때, 그녀는 소현우에게 가장 어울리는 짝을 골라주고 싶었다. 소현우 본인이 마음에 드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같이 살다 보면 정들기 마련이니까.결혼하고 오랫동안 함께 살다 보면 하나의 공동체가 되고, 그러면 사랑 따위 중요하지 않을 것이었다!그녀 나이대의 사람들은 모두 이렇게 해왔다. 게다가 상류사회의 결혼에서 사람은 가장 쓸모없는 것이 되어버렸다.“하윤 씨가 좋은 사람인 건 나도 알아. 하지만, 시아야, 난 그러기 싫어! 만약 널 만나지 않았다면 하윤 씨와 재결합해 결혼할 수도 있었겠지. 하지만 시아야, 널 만난 뒤로 다른 사람은 눈에 들어오지도 않아!”“소현우 씨, 저는...”소현우는 따뜻한 눈길로 유시아를 바라보았다.“홍콩에서는 임재욱이 널 몰아붙
늦은 밤, 유시아의 카카오톡을 받았을 때 임재욱은 병원에 있었다.신시연은 도우미의 도움을 받으며 진료실에서 여러 검사를 받았고 그동안에 임재욱은 밖에서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늦은 밤의 사립 병원이라 사람이 그리 많지 않았다.당직을 서는 의사 선생님과 간호사 외에 거의 사람이 없이 무척이나 쓸쓸해 보였다.임재욱은 복도를 한참이나 누비다가 의자에 걸터앉았다.유시아를 병원으로 바래다주고 돌아서는 길에 신시연의 전화를 받고서 오게 된 것이다.배가 아프다고. 당장이라도 죽을 듯이 아프다고.신시연은 며칠 전에 병원에서 여러 번 신체검사를 받았으나 해외에서 그러한 몹쓸 짓을 당하며 우울증과 부인병이 있는 외에 다른 수치들은 정상 범위 안에 있었다.그 말인즉슨,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것이다.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임재욱은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신시연에게 남은 ‘가족’이라고는 임재욱 하나뿐이니 어찌 됐든 그녀를 잘 지켜야 하는 마음뿐이었다.그 누구에게도 다시는 상처를 받지 않게끔.바로 이러한 마음가짐으로 하여 임재욱은 그녀를 직접 병원까지 데리고 오고 의사 선생님 입에서 아무런 문제도 없다는 확답을 듣고 나야만 마음이 놓일 수 있다.애타게 검사 결과를 기다리고 있는 가운데 핸드폰 알림 소리가 울렸다.유시아가 보낸 카카오톡인데, 내용은 아주 간단했다.[보고 싶어요.]임재욱은 고개를 숙인 채 카톡 내용을 거듭 곱씹으며 유시아 사진으로 되어 있는 그녀의 프로필 사진을 바라보며 입꼬리가 주체하지 못하고 자꾸 올라갔다.‘내가 보고 싶어? 별거한 지 하루 만에 벌써 내가 보고 싶은 거야?’‘우리 시아 이제 제법 솔직하네.’핸드폰을 손에 꼭 쥐고 어떻게 답장할지 생각하고 있을 때 응급실 문이 열렸다.도우미 김향화가 얼굴에 핏기 하나 없는 신시연을 부축하고 걸어 나왔다.신시연은 디자인이 아주 심플한 데님 스커트를 입었고 윤기가 별로 없어 보이는 머리를 돌돌 말아 묶어 올렸다.무척이나 초췌해 보이는 것이 가여운 느낌도 물씬 풍기고 있어 기고만장했던 그
유리 구두를 품속에 꼭 안고 있는 유시아를 보고서 임재욱은 순간 이러한 생각이 들었다.참으로 달래기 쉬운 여자라는 것을.특히 결혼하고 나서 아주 살짝만 잘해주어도 유시아는 아주 오랫동안 기뻐하는 것만 같았다.유시아는 늘 임재욱 앞에만 서면 스스로 자세를 낮추고 자기를 낮은 위치에 놓는 데 습관 되어 있다.임재욱은 고개를 숙여 그녀의 정수리에 뽀뽀했다.“앞으로 매년 생일마다 예쁜 유리 구두 선물해 줄게. 어때?”“좋아요.”유시아는 말하면서 아주 유치하게 그를 향해 손가락을 내밀었다.“손가락 걸고 약속해요. 절대 어기지 않겠다고.”백화점에서 나온 두 사람은 일단 화실로 향했다.새로 구매한 공예품을 적당한 자리에 올려놓고 유시아의 제안으로 이채련의 병원까지 바래다주었다.유시아는 자기가 뱉은 말은 어떻게든 지키는 타입이라 이채련과 이미 약속했으니 꼭 지켜야 했다.하물며 자식도 없는 이체련에게 마지막 이 시간들이 더더욱 외로울 것이다.외부인들이 보기에도 불쌍할 정도로 외롭다.임재욱이 아무리 말해도 소용이 없었고 이채련에게 주어진 시간이 얼마 없다고 하니 마음은 내키지 않았지만 보내주었다.차는 곧 사립 병원 앞에 멈춰 섰고 임재욱은 차에서 내리지 않았다.유시아는 차창에 대고 거듭 강조했다.“유리 구두랑 드레스들 옷방에 고이 모셔두도록 해요. 마구 놓지 말고요.”“알았어.”임재욱은 말하고서 손을 내밀어 그녀의 목을 확 잡고서 찐한 키스를 남기고 나서야 순순히 놓아 주었다.“얼른 가 봐.”“조심해서 가요.”임재욱은 조수석에 앉아 한결 가벼워진 그녀의 뒷모습이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보고서야 시선을 거두고 집으로 향하려고 했다.가는 길에 갑자기 신시연으로부터 전화가 걸려 왔다.“오빠, 배가 너무 아파요.”...병실로 돌아와 보니 이채련은 아직 자고 있지 않았다.침대에 멍하니 누워 재미가 일도 없는 예능 프로를 보고 있었다.유시아가 문을 밀고 들어오는 것을 보고 이채련은 놀라고도 기뻤다.“시아야, 늦은 시간에 웬일이야?”유시아
쇼핑은 늘 설레는 일이다.유시아는 자기 취향대로 화실 장식품으로 쓰일 공예품을 골랐다.이윽고 임재욱은 또 유시아를 데리고 근처에 있는 매점으로 향했다.지난번에 두 사람은 함께 쇼핑하면서 많은 옷을 샀었지만, 신서현 부모님께 갑작스러운 상황이 일어나면서 유시아는 그 모든 옷을 모조리 청소 아주머니에게 줘 버렸다.그때의 아쉬움을 채워주기 위해 임재욱은 또다시 쇼핑하려고 한 것이다.게다가 다음 주면 대우 그룹 상장 20주년이다.정식적인 석상에 모습을 드러낼 때 유시아를 자기 아내 신분으로 남에게 소개해 주고 싶어 이브닝 파티에 어울릴만한 드레스와 신발을 살 예정이다.드레스는 그럭저럭 큰마음이 가지 않았는데, 유시아는 그 신발이 마음에 들었다.은백색의 하이힐로 예쁜 보석들로 가득 박혀 있어 매점 불빛 아래서 유난히 반짝이는 것이 신데렐라 동화에 나올 법한 유리 구두 같았다.매점 직원은 유시아가 마음에 들어 하는 것을 보고 바로 다가왔다.“손님 안목이 참 좋으시네요. 이 제품은 저희 디자이너 선생님의 최신 디자인으로 지금 딱 한 켤레만 있습니다. 만약 이 신발을 신고 나가신다면...”임재욱은 갑자기 직원의 말을 끊어버렸다.“이미 결혼했고요. 이 사람은 제 아내예요.”유시아는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들었는데, 자기를 바라보며 웃고 있는 그를 보고서 따라서 웃었다.“맞아요. 이 사람이 제 남편이에요.”매점 직원은 멍하니 있다가 바로 얼굴에 미소를 머금고 베스트 쇼핑 가이드다운 실력을 드러냈다.“어머, 어쩐지 너무 어울리신다 했어요...”직원의 칭찬에 두 사람은 얼굴에 웃음꽃이 피어났다.이윽고 매점 직원은 분위기를 파악하며 유리 구두에 대해 더욱 디테일한 설명을 첨부하기 시작했다.“이 제품의 새끼 양가죽으로 만들어졌으므로 착용감이 엄청 좋으실 거예요. 하루 종일 신고 걸으셔도 전혀 문제가 없다는 말이죠. 게다가 우리 디자이너 선생님이 즉흥으로 만들어내신 작품이라 절대 똑같은 제품을 시중에서 보실 수 없을 거예요.”한 켤레일 뿐만 아니라 사이
한서준은 눈살을 찌푸리며 되물었다.“내가 뭐?”“한서준 씨는 당당해요?”유시아는 바로 질문을 질문으로 돌려주었다.“임씨 가문에 접근한 그 의도를 다른 사람들이 모를 것 같아요? 할아버지, 재욱 씨 그리고 나까지 똑똑히 알고 있어요. 청아 씨만이 한서준 씨를 사랑해서 자신을 속이고 있는 거라고요. 그렇게 쭉 모르는 척을 하며 모든 걸 감당하고 있었던 거라고요. 한서준 씨 역시 청아 씨를 이용한 게 아닌가요?”마지막 한 마디에 한서준은 침묵하고 말았다.그렇다. 임청아에게 접근한 이유는 유시아가 ‘스파이’로 움직여 주지 않겠다고 거절했기에 어리석어 보이는 임씨 가문 천금을 노리게 된 것이다.하지만 사람 마음이라는 것은 결국 변하게 되어 있다.임청아 대한 마음은 모략에서 시작했으나 시간의 흐름에 따라 그 마음이 점점 사랑으로 끝을 맺게 된 것이다.늘 밝고 긍정적인 에너지를 띠고 다가왔던 임청아가 어두운 자신의 삶을 밝게 비춰주는 것만 같았다.따라서 한서준은 임청아와 평생을 함께하고 싶다는 마음이 차츰 생기게 된 것이다.임태훈이 반대한다고 하더라도 꼭 자기 곁으로 데리고 오고 싶었다.“청아 씨 지금 몸도 마음도 상처투성이에요.”“만약 청아 씨 행복하게 해 줄 수 없다면 신중하게 생각하고 결정하는 게 좋을 거예요.” 말을 마치고 유시아는 차 문을 밀고 차에서 내려 병원 밖으로 걸어갔다.택시에 오른 유시아는 긴 망설임 끝에 끝내는 더 스케치 화실 주소를 운전 기사에게 알렸다.차는 화실 맞은 편에 세워졌고 유시아는 화실 바로 맞은편에 있는 커피숍으로 들어가 창가 자리에 앉았다.화실 안의 상황을 바로 체크할 수 있고 자신의 정체를 드러내지 않아도 되는 최적의 위치라고 할 수 있다.한참 지나고 나서야 수많은 경호원들이 임태훈을 사이에 두고 화실에서 걸어 나오는 것이 보였다.임태훈은 벤틀리에 올라 강한 기운을 남기고 자리를 떠나버렸다.유시아는 그제야 한시름을 놓고 들고 있던 커피잔을 내려놓고는 바로 화실로 향해 달려갔다.화실 안과 밖은 겉은
전화를 마치고 유시아는 혼자 밖에 없는 휴게실을 보고서 깊은 번뇌에 잠겼다.남을 탓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에 임태훈처럼 막무가내로 어처구니가 없는 노인이 있다는 게 도통 이해가 되지 않았다.임태훈이 끔찍이 여기는 임청아를 유시아가 계단에서 밀어버린 것도 아닌데, 왜 애꿎은 자기 화실을 닫으려고 하는지 알 수 없었다.집안 내부에 문제가 생기면 일단 스스로 반성하는 법부터 배워야 하는데, 그게 무엇이든 일단 남한테서 문제를 찾고 있으니, 권력을 믿고 사람을 업신여기는 것이 분명했다.유시아는 생각하면 할수록 머리가 복잡해졌고 불안함도 점점 커졌다.지금 운영하고 있는 더 스케치 화실도 용재휘가 먼저 시작한 것인데, 그와 더불어 학생들까지 모두 함께 넘겨주었는데, 만약 이대로 화실을 망쳐버린다면 용재휘에게 너무 미안할 것 같았다.임재욱과 임태훈이 어느 정도로 얘기했는지 알 수 없었지만 화실이 그들 싸움의 희생물이 되지 않기만을 바랄 뿐이었다.임재욱에게 전화를 걸어 상황을 묻고 싶었으나 감히 그럴 용기가 없어 일단 지켜보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떨리는 심장을 부여잡은 채로.그렇게 한참이나 심장을 조이고 있었지만, 걸려 오는 전화는 없었다.유시아는 일이 어느 정도 망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학생 채팅방에 오늘 갑자기 일이 있다며 수업을 뒤로 미룬다고 알렸다.언제 다시 수업을 시작할지는 소식을 기다리라며 덧붙이기까지 했다.톡을 보내고서 유시아는 더 이상 핸드폰을 보지 않고 바로 병원 밖으로 나갔다.그러나 병원 대문을 나오자마자 한서준이 정면에서 오고 있었다.“유시아.”유시아는 고개를 들었고 그를 보게 되는 순간 정신이 아찔해 났다.직감이 알려주건대, 절대 좋은 일이 없다는 것이다.화실의 생존 여부도 알 수 없는 상황에서 그의 심기까지 건드리고 싶지 않았다.한서준은 쉽사리 유시아를 놓아 주지 않았고 손을 내밀어 유시아의 손목을 꼭 잡았다.“물어볼 일이 있어.”말하면서 근처에 있는 지프차를 가리켰다.“차에 타서 얘기 하자.”“그쪽이랑 할 말
유시아는 그 말을 이어받지 않고 집사의 바람대로 타이르기 시작했다.“몸이 아직 많이 허약해요. 먹고 싶지 않아도 억지로라도 좀 먹어야 하거든요. 일이 어찌 됐든 일단 건강부터 챙겨야 해요.”임청아 그 말을 듣고서 쓴웃음을 지었다.“건강 회복되면 할아버지한테 잡혀가서 집에 감금되는 것밖에 더 있겠어요?”“그렇게 생각하지 말아요.”유시아는 눈살을 찌푸리며 덧붙였다.“어찌 됐든 할아버지 마음은 한결같을 거예요. 청아 씨를 아끼고 사랑하는 거요. 서로 대화가 필요한 거 같아요. 서로 터놓고 얘기하고 나면 오해가 풀리고 마음도 풀리면서 모든 게 원점으로 돌아갈 수 있을 거예요.”임청아의 입가에 피식 웃음이 새어 나왔다.“저도 그렇게 생각했었어요. 아이 낳고 나면 할아버지도 서준이도 원한을 내려놓고 행복만 할 수 있다고요.”“근데 이렇게 몸도 아끼지 않고 점점 더 막무가내로 나가면 두 사람 사이의 원한은 점점 더 짙어질 거예요.”유시아는 말하면서 도우미 손에서 보신탕을 가져와 천천히 불며 임청아의 입가로 가져갔다.임청아는 생각 밖으로 무척이나 순순하게 유시아의 말을 따랐고 그녀의 말에 이치가 있는 것 같아 조용히 보신탕을 받아 마셨다.도우미와 집사는 두 사람이 티키타카 서로 말을 주고받는 것을 보고 서서히 마음이 놓였다.임청아가 뭐라도 먹기 시작하여 자기도 모르게 한시름을 놓으며 자리까지 비켜주려고 했다.두 사람이 마음 편히 말할 수 없을까 봐 눈치껏 일어서려는 것이다.“작은 사모님, 아가씨와 천천히 얘기하고 계세요. 밖에 나가 있을 테니 필요한 거 있으시면 언제든지 부르시고요.”“네, 가보세요.”도우미 일행이 나오고 나서야 유시아는 본론으로 들어갔다.“한서준 씨는 알고 있어요?”임청아는 고개를 저으며 쓴웃음을 지었다.“그런다고 숨겨질 일도 아니잖아요.”요즘 임태훈뿐만 아니라 한서준도 눈을 부라리고 임청아를 찾고 있었다.두 사람의 시선을 피하고자 아파트도 호텔도 들어갈 수 없었고 버려진 강아지처럼 유시아 화실에 몸을 숨기고 지낸 것
임청아 이름 석 자가 임재욱의 입에서 나오자, 유시아는 순간 청천벽력을 맞는 것만 같았다.심지어 지금까지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으니 말이다.한참 지나고 나서야 겨우 떨리는 심장을 부여잡고 물었다.“청아 씨가 왜 병원에 있는 거죠?”임청아는 임신한 것을 알고 매사에 조심하며 걸음 하나도 천천히 옮겼었다.게다가 해외에 있는 친구와 연락하여 해외로 떠날 준비까지 마쳤다고 했었다.그런데 관건이 되는 순간에 계단에서 굴러떨어졌다고?“할아버지를 너무 쉽게 생각한 거 아니야?”임재욱은 말하면서 차갑게 웃었다.“네 화실에 청아 숨겨 놓았잖아. 할아버지께서 그걸 과연 모르고 있었을 것 같아? 오늘 화실로 청아 데리러 갔었는데, 가지 않겠다고 청아가 하도 우기는 바람에 억지로 묶어서라도 데리고 가겠다며 서로 실랑이를 벌이다가 계단에서 굴러떨어진 거야.”그렇다면 아이를 유산했을지도 모른다.임태훈의 습관에 따라 생각해 본다면 이 화살은 결국 유시아에게로 돌아오게 되어 있다.임재욱이 그렇게 경고하였건만 유시아는 마음이 약한 사람이었다.약해지는 마음에 언젠가는 구렁이에 빠지게 될 날이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날이 바로 오늘 일 줄은 몰랐다. 임재욱은 한숨을 내쉬며 꾸짖고 싶은 마음을 겨우 억눌렀다.“병원 주소 보내줄 테니 얼른 가 봐.”말을 마치고 임재욱은 전화를 끊어버렸다.얼마 지나지 않아 메시지 한 통이 도착했고 운전 기사에게 새로운 목적지를 알려주었다.같은 시각, 병원 안에서.임청아는 이미 수술을 마쳤고 일반 병실로 옮겨져 있었다.이미 가문의 집사와 간호인이 옆에 있었고 병실 문 앞에는 임태훈이 보낸 경호원도 있었다.다만 경호원이 경계해야 할 상대는 유시아가 아니라 한서준이다.따라서 유시아는 별다른 막힘없이 바로 병실 안으로 들어갔다.병상에 누워 있는 임청아는 얼굴에 핏기 하나 없었고 초점을 잃은 두 눈으로 멍하니 천장만 바라보고 있었다.불과 하룻밤 사이에 모든 활력을 잃어버린 모습이었다.집사는 자리에서 일어서서 아주 공손하게 유시아에
조금 전까지 허겁지겁 밥을 먹고 있던 임재욱은 멈칫거리고 말았다.이윽고 고개를 천천히 들어 웃는 듯 마는 듯한 얼굴로 유시아를 바라보며 물었다.“별거하자는 뜻이야?”“그렇게 생각해도 좋아요.”유시아는 숟가락을 내려놓고 머리가 아픈 듯 이리저리 만지작거렸다.“지금 이러한 상황에서 이러는 것도 좋을 것 같아요. 나한테 신경 쓰지 않아도 되고 그 시간으로 시연이한테 집중해도 되잖아요. 나도 마침 어머님 곁에 좀 있어드리고... 서로에게 지금 이게 최우선인 것 같아요.”임재욱은 숨을 깊이 들이마시고서 낙담한 모습으로 말했다.“그래. 네가 좋다고 하면 그게 좋은 거겠지. 그렇게 하자.”말을 마치고 그는 계속 밥을 먹었다.유시아는 그런 그를 바라보고서 아련하게 웃고는 바로 자리에서 일어나 위층으로 올라갔다.이튿날 아침, 유시아는 임재욱이 출근하고 나서야 침대에서 일어났다.일상복 몇 벌과 일상용품을 챙겨 작은 트렁크 안에 놓고 바로 이채련한테 가려고 했다.허씨 아주머니는 트렁크를 들고 내려오는 유시아의 모습에 살짝 당황한 모습이었다.“사모님, 어디 가시는 거예요? 설마... 가출하려는 건 아니죠?”유시아는 허씨 아주머니를 향해 웃었다.“아니에요. 친척분이 좀 위독하신데 제가 옆에서 좀 챙겨드리고 싶어서 가는 거예요. 얼마 걸리지 않을 거고 곧 돌아올 수 있을 거예요.”말을 마치고 트렁크를 들고서 집을 나섰다.이채련이 지내고 있는 병실이 VIP 병실로 널찍한 객실까지 갖춰져 있다.유시아는 간호사에게 접이식 침대와 이불을 요구했고 간단히 정리하고 나니 잘 자리가 아늑하게 마련되었다.이채련은 더 이상 침대에서 내려올 수 없어 하루 24시간을 침대 위에서 보내고 있다.얼굴도 하도 여위어 본연의 모습을 점점 잃어가고 있었다.그전에도 유시아는 이채련에게 이곳에서 며칠 동안 함께 지내고 싶다는 의사를 밝힌 적이 있지만 이채련은 행여나 자기로 인해 두 사람 사이에 흠이 생기게 될까 봐 동의하지 않았었다.지금 이 자리까지 오게 된 것만으로도 갖은 풍
임재욱은 핸들을 꼭 움켜쥐고서 앞만 바라보았으나 두 눈에는 고통과 망연함이 가득했다.“시연이 해외에 있을 때, 몹쓸 짓을 당했어. 한번이 아니라 여러 번이나. 그래서 우울증에 걸리게 된 거야.”유시아는 두 눈이 휘둥그레지면서 볼륨까지 높아졌다.“어머, 어떡해요!”평소에 신시연에 대해 좋은 마음을 가지고 있었던 건 아니지만 그 소식을 듣게 되는 순간 심장이 덜컹 내려앉기는 했다.여자에게 있어서 그런 몹쓸 짓을 당한다는 건 치명적인 타격과 치욕이 아닐 수가 없다.게다가 부모님의 일까지 더해지니 조금 전 식당에서 봤던 신시연의 모습이 이해되었다.임재욱은 말하면서 후회와 자책하는 빛을 드러냈다.“그렇게 가고 싶지 않다는 시연이를 내가 억지로 보낸 거야.”그때는 모든 걸 너무 쉽게 생각했었다.낯선 곳으로 가서 마음을 가다듬고 학업에만 집중하면 자연스레 모든 걸 잊고 새로운 삶을 그려나갈 수 있으리라 믿었다.하지만 임재욱이 잊고 있었던 부분이 하나 있는데, 그건 바로 신시연이 이제 갓 20살을 넘은 꽃다운 여자아이라는 것이다.해외에는 불안정 요소도 많고 미처 생각지 못하는 위험도 많다.게다가 젊은 나이라 자칫 잘못하면 그릇된 길로 들어서기도 아주 위험하고 말이다.신시연 곁에 사람을 함께 보내긴 했지만 그렇다고 하여 24시간 동안 찰싹 달라붙어 다닐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유시아와 결혼하고 나서 신혼에 푹 빠져 있는 동안 신시연에게 더 많은 관심을 주지 않았기에 이러한 일이 일어난 게 아닌지 죄책감이 들기도 했다.지금 임재욱은 신서현에게 미안할 뿐이다. 하나뿐인 동생을 이 지경으로 만들었으니.하지만 그가 말한 본의와 달리 듣고 있는 유시아는 또 다른 뜻으로 받아들이게 되어 있다.유시아의 기억으로는 신시연이 해외로 보내진 이유는 이러하다.그때 신시연은 정운시 대학교 교내 사이트에 유시아를 먹칠하는 게시글을 올리면서 유시아로 하여금 학업을 이어갈 수도 수업을 들을 수도 없게 악한 상황을 만들었었다.마침 그 일을 소현우가 알게 되면서 유시아에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