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석석은 만자에게 사람을 보내 량소를 감시하게 했다. 탐화랑이 노부인의 보살핌을 받아 여전히 패기가 넘쳤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이 쓴 글을 들고 국자감으로 가 황제에게 제출해 줄 사람을 찾았지만 국자감에선 아무도 그를 상대해주지 않았다. 그렇기에 국자감의 사람들이 인재를 질투해서 그런 것이라고 생각하고 마음이 분개하여 한림원으로 들어가 사람을 찾으려 하였으나 모든 사람들이 그를 보기만 하면 피하기 바빴다. 황제께서 직접 면직을 선포한 탐화랑이 첩을 들여 아내를 냉대한 것도 모자라 백부를 떠나 세자까지 포기했다는 소문은 이미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퍼져 나갔다. 게다가 그가 상가의 딸을 아내로 맞아 아내의 돈으로 홍등가의 여인을 데리고 나온 사실이 알려지자 사람들은 윤리에 어긋나는 일이라고, 학자로서 부끄러운 일이라고 생각해 욕하 바빴다. 그리고 연유의 신분이 정말 사실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모두 꺼려했다. 량소는 며칠을 계속 뛰어다녔으나 성과가 없자 분노가 극에 달했고 시여묵의 압박 때문에 자신과 왕래하는 사람이 없다고 생각하자 속으로 분해서 술을 잔뜩 마시고 주먹을 휘두르며 마구 소리쳤다. “황권은 권세만 지켜주는구나! 사여묵의 권세가 하늘을 찌를 듯해 군공을 믿고 멋대로 행패를 부리는데 어쩜 나서서 막는 사람 한 명 없느냐? 조정의 문무백관은 모두 겁쟁이인 것이냐?!” 그가 공적인 자리에서 심한 말을 하자 불과 3일 만에 돌풍처럼 온 진성을 휩쓸어 결국 조정의 문무백관들까지 다 알게 되었다. 그 말에 탐화랑이 안하무인격으로 잘난 체한다는 문무백관들의 상주문이 승상에게로 날아왔다. 묵 승상은 이 일을 숨기지 않고 황제에게 바로 알렸다. 그러자 황제가 사여묵에게 물어 그날의 일을 알게 되었다. 란이는 황제의 사촌 여동생이다. 황제는 사촌 여동생이 어려서부터 영리하고 철이 들어 사람들의 사랑을 듬뿍 받았기에 그녀에게 그렇게 대할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그리고 연유의 신분이 장공주의 서녀라는 사실에 황제는 이상을 느꼈다.연유의 정
재스민 차의 향기가 혼 화청에 풍겼다. 보주는 구름떡을 들고 들어왔는데 밖에 비가 세차게 내리고 있어 그녀의 수놓은 신발이 흠뻑 젖어 바닥에 두줄의 발자국이 생길 정도였다. 송석석은 말을 하지 않고 의자에 앉아 천천히 차를 마셨다. 그렇게 이모와 조카는 네모난 탁자를 사이에 두고 앉았다. 보주는 구름떡을 탁자 위에 놓고 나가 문밖을 지켰다. 송석석은 보주가 놓고 간 손으로 구름떡을 집어 천천히 먹었는데 떡을 먹는 소리가 하도 작아 거의 들리지도 않았다. 회 왕비도 젓가락으로 한 조각을 집어서 부스러기가 보라색 꽃무늬 저고리 치마에 떨어지지 않도록 우아하게 작은 접시로 받치고 조금씩 집어 먹었다. 회 왕비의 피부가 안 그래도 노란 축에 속해 있는데 보라색 옷을 입으니 피부색이 더욱 어두워 보였다. 그리고 눈 밑이 검푸른 것이 며칠 동안 밤을 설친 게 분명했다. 송석석이 계속 입을 열지 않자 회 왕비가 결국 참지 못하고 접시와 젓가락을 내려놓고 손수건으로 입가를 닦으며 말을 하기 시작했다. “석석아, 넌 이모가 낯설다고 생각하니?” 그러자 송석석이 담담하게 말했다. “아뇨, 전 이모가 절 낯설어한다고 생각하옵니다.” 회 왕비는 가볍게 한숨을 쉬고 말했다. “네가 란이에게 혼수를 보탠 일 때문에 그러느냐? 그 일은 이모가 사과할 테니 그냥 넘어가면 안 되겠니? 가족끼리 이러는 걸 네 어머니가 하늘에서 본다면 얼마나 속상하시겠어.” “어머니께서 속상해하시는 것이 저 때문은 아닐 것입니다.” 송석석은 고개를 들어 회 왕비를 보며 계속 말을 이었다. “그리고 이모께서 란이에게 보낸 혼수를 거절하신 일을 저는 전혀 마음에 담아두고 있지 않사옵니다. 그러니 어머니 얘기는 그만하시고 오늘 무슨 일로 여기에 오셨는지 솔직하게 말해주십시오.” 그러자 회 왕비가 복잡한 심정으로 말했다. “마음에 담아두고 있지는 않다고 하지만 너 때문에 회왕부가 황제에게 한 달 동안 금족을 당한 건 알고 있느냐? 그 해 섣달 그믐날에도 우리는 너 하나 때문에 궁에 들어
송석석은 잠시 침묵하더니 말이 안 통한다고 느꼈는지 물음을 무시했다. “보주야, 손님을 배웅하거라.” 자신보다 어린 조카에게 무시를 당하자 회 왕비는 화가 치밀어 올랐다. “송석석, 내 말이 끝나지도 않았는데 날 쫓아내려는 것이냐? 내가 네 이모라는 사실을 잊었느냐?” 회 왕비는 화가 나서 찻잔을 바닥에 던져 산산조각이 났다. 송석석은 깨진 찻잔과 자신의 젖은 발을 보더니 고개를 들어 냉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모가 승은백부에서 찻잔을 던지며 화를 내고 량소를 양심 없는 자식이라며 욕해줬다면 저도 무척이나 기뻐하고 이모가 존경스럽게 느껴졌을 것입니다. 지금 란이가 얼마나 큰 억울함을 당했는지 그날 밤 보지 못하셨습니까? 이모는 계속 일을 구워삶기만 했습니다. 란이가 이혼하면 친정으로 돌아가는 것을 허락하느냐고 물어볼 때 이모가 참으라고만 하지 말고 고개를 끄덕였어도 그녀에겐 엄청난 위안이었을 것입니다. 일시적인 억울함 때문에 이혼하려고 했을지도 모르는데 이모가 단칼에 거절하니 란이가 얼마나 절망했을지는 생각해 보셨습니까?” “란이는 이혼하면 안 된다.” 회 왕비는 안색을 붉히며 말했다. “내가 이제껏 말했는데 넌 지금까지 뭘 들은 것이냐? 내가 이혼을 허락했다가 란이가 정말로 임신한 몸으로 처가로 돌아오면 어떡할 것이냐? 넌 진심으로 란이를 위해서 생각해 보았느냐? 란이는 널 그렇게 존경하는데 어떻게 그녀를 해칠 수 있느냐!” 회 왕비는 화가 나서 발을 동동 굴리며 손수건으로 계속 흐르는 눈물을 닦으며 말했다. “잠깐의 억울함이 뭐 어때서 그러느냐! 란이는 군주고 본처인데 홍등가의 출신인 첩을 두려워할 리가 있겠냐? 아무리 장공주의 서녀라고 해도 홍등가 같은 곳에 버러 져 자랐으니 시간이 지나면 량세자도 그녀에게 싫증이 날 테고, 난 결국엔 란이 곁으로 돌아올 것이라고 믿는다. 네가 란이에게 이러한 도리를 설명해 주면 된다. 란이는 네 말을 잘 듣지 않느냐? 그러니 네가 말하면 분명 들을 것이다.”회 왕비는 말을 마치고 다시 자리에 앉더
몇일 후 송석석이 회 왕비에게 화를 낸 일이 혜 태비의 귀에 들어갔다. 그녀는 화가 머리 끝까지 나 발을 동동 굴리며 보주를 불러 설명하게 했다. “그런 말을 듣고도 분개하지 않는 사람이 어디 있느냐? 석석이 아무리 친척이라도 그렇지 나였으면 따귀를 몇 대나 때렸을 것이다!” 그러고는 급히 보주에게 명령했다. “어서 부엌에 가서 석석이 좋아하는 음식을 만들라고 하거라. 계화꽃떡, 대추떡.. 아니다, 차라리 진성의 8가지 만두를 사 와서 석석에게 주거라. 그딴 사람 때문에 자신의 몸을 망치면 가치가 없는 일 아니겟느냐?” 소월이 급하게 사러 나가려 하자 시만자가 말했다. “제가 날렵하니 제가 가서 사오겠습니다.” “그래, 만자가 가서 사 오도록 해.” 혜 태비는 다소 긴장한 목소리였다. 그녀도 이전에 며느리가 화를 내는 것을 봤기 때문에이런 상황이 마치 언니에게 화가 나지만 화를 낼 수 없는 자신과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지. 언니는 그래도 도리를 따지고 날 위해서 화내는 것인데 어떻게 자신의 딸도 돌보지 않는 회 왕비와 같겠어?’ 하지만 이내 자신의 언니가 더 낫다는 생각에 기분이 좋아졌다. 송석석은 화가 나서 매화원으로 돌아가서도 오래도록 진정할 수 없었다. ‘책봉한 땅으로 들어갈까 봐 이렇게 비천하게 군다고? 친왕의 존엄마저 버리고 란이까지 자신들처럼 모욕을 당하라는 거야?’ 송석석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다들 여자들은 다 엄마가 되면 강해진다고 하던데, 회 왕비는 왜 일반 여자들보다 더 나약한 거야?’ 송석석은 란이가 분명 군주인데도 찍소리도 못 하는 연약한 성격이 모두 그들 때문에 만들어진 것이라고 생각했다. 송석석이 고민하고 있는 중에 갑자기 밖에서 발자국 소리가 나서 고개를 들어보니 시만자가 혜 태비의 팔짱을 끼고 손에는 붉은색으로 칠한 찬합을 들고 있었다. 그러자 송석석이 재빨리 몸을 일으키며 인사를 건넸다. “어머님, 어머님께서 여긴 어쩐 일로 오셨습니까?” 시만자가 찬합을 탁자 위에 올려놓고 웃으
송석석은 혜 태비에게 만두 한 조각을 건네며 말했다. “전 이제 괜찮습니다. 어머님께서도 어서 드십시오.” 송석석이 만두를 덕섭 집어 자신에게 주자 혜 태비는 눈살을 잔뜩 찌푸렸다. ‘이 며느리 행동이 너무 거친 거 아니야?’ 하지만 혜 태비는 한참을 망설이다가 결국 혜 송석석이 건네 온 만두를 건네 받았다. ‘괜찮아, 뭐 죽기라도 하겠어?’ 어사대는 다시 바쁘게 움직이며 탕화랑 량소를 고발하기 시작했다. 어사는 그가 덕을 잃고 사람들 앞에서 조정의 문무백관을 모욕했을 뿐만 아니라 황권을 경멸했으니 천자문생으로서 자격이 없다고 여겨 황제폐하께 등과록에서 량소의 이름을 취소해 달라고 간청했다. 그리고 동시에 승은백 세자의 자리를 취소해 달라고도 했다. 다시 말해 승은백부에서 세자를 바꿔야 했다. 황제는 아침 조정에서 량소의 승은백자 자리를 취소했지만 탐화랑의 자격은 취소하지 않았다. 탐화랑은 애초에 황제폐하께서 직접 지목하신 거라 취소를 하면 자신의 얼굴을 때리는 것이 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황제는 노발대발하여 승은백을 훈계했다. 그리고 퇴조 후 승은백을 황실 서재로 불러냈다. 황제는 아들을 제대로 가르치지 못했다며 통곡하는 승은백을 보며 오히려 담담하게 말했다. “이번이 내가 승은백부에게 주는 마지막 기회다. 군주까지 승은백부에서 억울함을 당한다면 승은백의 직위까지 그만둬야 할 것이다.” 황제의 말을 들은 승은백은 벼락을 맞은 듯 한참 동안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그는 그제야 군주가 황제의 사촌 여동생이라는 것이 기억났다. 회왕 부부가 아무리 무능하더라도 황제는 남매의 정은 생각하고 있었다. 그는 넋을 잃고 나가다가 북명왕이 황실 서재 문 앞에 서 있는 것을 보고 그날 밤 승은백부가 부서졌을 때가 떠올라 황급히 인사를 건넸다.승은백이 떠나자 사여묵이 서재에 들어가자 황제는 차를 한 모금 마시고 승은백부에 대한 분노를 삭인 뒤 사여묵에게 말했다. “예의 차릴 필요 없다. 앉거라.” “네.” 사여묵은 의자에 앉았다. “저보고 밖
사여묵이 물었다. “형님, 척사의 정체가 대체 무엇입니까?” 그가 처음 제린으로부터 척사의 정보를 받았을 때 포로로 잡혀간 사병을 포함한 남강전장의 모든 무장들을 조사하였었는데 척사라는 사람은 없었다. 숙청제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나도 모른다. 아마 아무도 모를 것이다. 애초에 네 장인이 그에게 정보를 받은 것이니 알 수도 있겠지만 그 조차도 모를 가능성이 크다.” “척사가 포로 진영에서 탈출했다는 것은 그의 무공이 뛰어나 보통 병사는 아니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그러자 사여묵은 잠시 눈썹을 찡그리며 생각했다. ‘전에 척사의 정보를 받고 그의 길을 따라갈 때도 그의 신분을 알아본 적이 없었다. 그리고 물어본다고 해도 말할 리가 없었다. 정보가 가로 차일 수도 있고 정보에 신원을 누설하는 것은 아주 위험한 행위기에 말할 수 없었다. 긴 생각 끝에 사여묵이 입을 열었다. “형님, 그는 많은 정보를 제공해 큰 공을 세운 사람이니 반드시 그를 구해야 합니다.” 숙청제는 고개를 끄덕이며 숙연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래서 나는 네가 직접 가 봤으면 좋겠다. 지금으로서는 그가 아직 살아있다는 것만 확인했을 뿐이다. 사국이 그를 이용해 성을 바꾸려고 하는데 방천림의 염탐에 의하면 그는 사국 변성에 있는 감옥에 갇혀 있다고 하는데 아직 어느 곳인지 모른다. 그러니 너는 일단 그가 갇힌 곳을 찾아내고 기회를 찾아 구출하거라.” 사여묵은 무릎을 꿇고 확고한 눈빛으로 말했다. “알겠습니다.” 숙청제가 한숨을 내쉬었다. “지금은 왕표가 협상을 미루고 있지만 사국인들이 그를 지극히 미워할 테니 몸이 성하진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가 살아있든 희생했든 그를 고국으로 데려와야 할 것이다. 적어도 누구인지는 알아야 할 것 아니냐?” “네, 대리사의 일은 잠시 진이에게 맡겨두고 제가 내일 사국 변성으로 떠나겠습니다.” 그러자 숙청제가 엄하게 당부했다. “너 혼자니 꼭 조심해야 한다. 무공이 높은 사람 몇 명을 데리고 가 평민으로 가장해서 조사
북명황실에서 송석석은 사여묵의 옷을 챙겨주며 걱정되는 말투로 물었다. “저도 함께 가면 안 됩니까? 당신 혼자 보내는 게 마음이 놓이지 않습니다.” “혼자 가는 게 아니라 장대성과 염 선생을 데리고 가는 것이니 따라오지 않는 것이 좋을 것 같구나. 한녕의 혼사도 준비해야 되고 서우도 서원에 보내야 하지 않겠나?” “염 선생의 무공은 어떻습니까?” 송석석은 비록 염 선생을 오랫동안 봐왔지만 그의 실력을 잘 알지는 못했다. 황실에서 중요한 인물이지만 왠지 항상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는 느낌이었다. “무공은 별로인데 머리가 좋지.” 송석석은 그래도 마음이 놓이지 않아서 말했다. “그럼 만자를 함께 보내는 건 어떻습니까?” 사여묵은 송석석의 걱정에 은근히 기분이 좋아져 손을 뻗어 그녀를 안으며 이마에 뽀뽀를 해댔다. “내가 사부님께 같이 가 달라고 부탁했으니 걱정하지 마시오.” “사숙께서 같이 가는 겁니까? 이제야 마음이 놓이네요.” ‘사숙은 무공도 대단하고 신출귀몰해서 먼 곳에 있는 것 같으면서도 잘못을 하면 바로 나타나곤 했지.’ 송석석은 사숙을 굳게 믿어 걱정이 다 사라졌다. “그래, 그러니 걱정하지 말거라. 내가 척사를 구해올 테니.” 사여묵은 송석석의 얼굴에 다시 한번 뽀뽀를 했다. 적어도 한 달은 떨어져 있어야 한다는 생각에 사여묵은 너무 아쉬웠다. “척사라고 합니까?” “그렇지, 전에 그가 계속 사국에서 남강으로 호송하는 물자 대열에 섞여 우리에게 정보를 전해주었고 서경 사람들이 사국의 병사로 변장한 일도 그에게 받은 정보야. 그리고 남강을 수복한 후 우리는 조정으로 돌아와 제린이 그와 연결을 했는데 원래는 사국에 1년 동안 남아 전쟁이 없다는 걸 확인하면 돌아올 것이라고 약속했었는데.” “그런데 이름이 칠 사와 발음이 같은데 혹시 무슨 암호입니까?” “그런 건 아니고 그저 이름이 척사라네.” 사여묵은 말을 하고 갑자기 무언가 떠오른 듯이 말했다. “칠과 사를 합하면 십일이잖아? 십일.. 시원...” 송석석은 그의 품
사여묵은 밤새 장대성과 염 선생을 데리고 성 밖으로 나가 비둘기로 만종문으로 서신을 보내 스승님께 도움을 요청했다. 시만자는 사여묵이 집을 떠난 뒤, 송석석이 허전해서 잠을 잘 수 없을까 봐 걱정된다는 이유로 함께 송석석의 방에서 잤다. 그러자 송석석이 그녀의 머리를 콩하고 때리며 말했다. “난 하나도 외롭지 않거든. 네가 심심해서 그런 것이겠지? 심심하면 몽동이를 찾아가서 노는 건 어떠느냐?” “그건 싫다네, 그가 부병의 교관이 된 후로부터 위풍당당해서 걸음걸이마저 수탉 같다.” 시만자는 침대에 엎드려 양손으로 얼굴을 받치고 말했다. “그리고 심심하지 않아. 나는 단지 너와 이야기를 나누고 싶을 뿐이야. 며칠 후에 전소환이 평양후부에 첩으로 들어간다는데 우리도 구경하러 가자.” 그러자 송석석이 두 손으로 머리를 괴고 말했다. “나도 그 소식 들었어. 하지만 난 지금 다른 일을 생각하고 있다네.” “무슨 생각? 설마 가의 군주가 화병에 걸려 죽는 생각을 하는 건 아니겠지?” 시만자가 몸을 옆으로 누워 웃으며 말했다. “아니, 넌 왜 그 집 일에만 관심을 쏟는 거냐?” “아닌데. 승은백부의 일도 지켜보고 있다.” 시만자는 두 다리를 뒤로 젖히고 편안한 자세로 몸을 돌렸다. “량소와 연유가 지금은 서로 없이는 못 살 것처럼 굴지만 세자의 자리가 취소된 걸 알면 어떤 반응을 보일지 궁금하군.” “그러게.” “이제 왜 예전처럼 웃지 않지?” 시만자가 송석석의 찌푸려진 미간을 짚고 말했다. “기쁘면 웃고, 재미있는 일이 있으면 구경하고, 재수 없는 사람이 있으면 크게 밟아줘야지.” 송석석은 옆으로 몸을 돌려 시만자를 바라보며 말했다. “만자야, 나 궁금한 게 있는데 우리가 전쟁터로 갈 때 네가 이미 결혼했다고 쳐. 근데 모두들 네가 희생한 줄 알고 있는데 사실 넌 포로로 잡혀 있었던 거야. 그리고 나중에 집으로 돌아와 보니 부군이 다른 여자와 결혼했다면 속상할 것 같아?”시만자는 잠깐 생각하더니 말했다. “난 결혼을 하지 않았고
그러자 송석석이 이내 고개를 돌리고 말했다. “왕씨 가문에서는 그녀를 아주 잘 대해줍니다. 조카딸의 혼담에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지금은 시집간 부군이 잘 대해준다 하더군요. 다만 그녀는 자신이 두 번 시집갔음에도 처가에 머무는 것이 조카들에게 미칠 영향이 걱정되어 그러는 모양입니다.”그 말에 전북망이 고개를 끄덕였는데, 순간 번개처럼 날렵하지만 마음씨 따뜻한 최씨 부인이 떠올랐다. 최씨 부인에게는 적자와 서자녀들이 있었고, 아직 혼담이 정해지지 않은 이들도 있었다. 그런 그녀가 혼인 문제로 얼마나 많은 유언비어에 시달렸을지 생각하니, 전북망은 진심으로 안타까웠다. 형수로서의 최씨 부인을 존중하며, 그녀의 처지를 이해하지 못할 바 없었다. 이때 송석석이 그의 생각을 끊었다. “그럼 천천히 생각해 보십시오.”전북망이 주변을 둘러보다가 문득 물었다. “우리 단둘이 여기에 있으면, 섭정왕이 질투하지 않을까요?” 송석석은 예상치 못한 질문에 잠시 당황했으나, 곧 침착하게 답했다. “이 정도 신뢰도 없다면, 제가 어찌 현갑군 지휘사로 오래 근무할 수 있었겠습니까? 우리는 서로 숨김없이 모든 걸 공유합니다. 이번 만남 역시 그분께 이미 알려두었죠.”송석석이 떠나자 전북망도 따라나섰다. 그는 섭정왕이 어딘가에서 이들을 지켜보고 있으리라 의심했지만, 정작 별청 주변에는 아무도 없었다. 앞마당에서야 섭정왕을 발견했는데, 그는 대장군과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송석석을 보자 미소로 맞이하며 불러세우는 섭정왕의 모습에 전북망은 마음이 착잡해졌다. ‘진정한 부부란 저런 것일까.'그러나 성릉관이든 진성이든, 남녀의 단독 만남은 명예에 흠이 될 수 있음도 잘 알았다. 특히 높은 지위에 오른 이들은 더욱 조심해야 했다. ‘내가 무슨 권리로 그들을 걱정하는가.’자조적인 생각이 들었지만, 왕청여의 제안은 여전히 그의 가슴을 두드렸다. 5일의 고민 시간이 주어졌다. 사여묵과 송석석이 진성으로 돌아가기 전까지. 최씨 부인의 이야기를 떠올리면 답은
소 대장군의 팔순 생신 때, 전북망은 송석석과 다시 만났다. 사실 그전에도 송석석이 성릉관으로 갔을 때 몇 번 본 적이 있었다. 그들은 서로 서먹해서 대화를 나누지는 않았지만 전북망은 송석석이 매번 성릉관을 떠날 때마다 몰래 배웅하곤 했다. 전북망은 자신이 당시 어떤 마음으로 그런 건지 알 수 없었다. 그는 늘 송석석에게 미안한 마음을 품고 있었다. 이방과 왕청여에게도 미안하긴 하지만, 그들과는 서로 감정을 소모하고 다투면서 서로에게 상처를 남겼다. 하지만 장군부만 송석석에게 상처를 줬을 뿐, 송석석은 장군부에게 조금의 상처도 주지 않았다. 비록 이혼한 후에는 전북망 어머니의 병세에 대해 상관하지 않았지만 큰형수에게 어떻게 단설환을 얻을 수 있는지 알려주기까지 했다. 소 대장군의 팔순 생신 때는 이미 섭정 왕비가 되어있고 나서였다. 변방의 전사들에겐 양식과 무기가 풍부하고, 봉록까지 올라, 그들에겐 이득이기에 이제는 조정의 정세에 관심을 두지 않아도 되었다. 섭정왕은 한때 장수였기에 병사들이 배불리 먹어야만 국토를 지킬 힘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전북망과 송석석이 다시 만났을 때, 그녀는 섭정왕과 함께 소 대장군에게 생신을 축하해주고 있었다. 그녀를 보는 소 대장군의 눈빛은 여전히 자애롭고 인자했다. 전북망은 사람들을 사이에 두고 멀리서 그 광경을 보며, 그때 그렇게 어리석지 않았다면 지금 송석석과 함께 노장군의 생신을 축하하는 사람이 바로 자신일 것이라는 후회를 했다. 오랜 세월이 흘렀는데도 여전히 같은 생각인 걸 보니, 자신만 제자리에서 멈춰 있는 듯한 기분마저 들었다. 그래서 그는 이번에도 송석석과 대화를 할 수 없을 줄 알았는데, 생일잔치가 끝난 후에 송석석이 뜻밖에도 먼저 그를 찾았다. 그와 송석석 외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는 속으로 생각했다. ‘섭정왕은 이상한 소문이 날까 봐 걱정되지도 않는가?’전북망은 당황하고 불안해 보였고, 송석석을 똑바로 쳐다보지도 못했다.먼저 입을 열지도 못하고 송석석이 말하기만을 기다리
전북망은 성릉관에서 몇 년 동안 두 번이나 발탁되었고, 지금은 장군의 신분으로 수천 명의 병사를 관리하고 있다. 계속 성릉관에 주둔하고 있어 다시 진성으로 돌아간 적이 없었고, 진성의 부름 없이는 제멋대로 돌아갈 수도 없었다. 그는 재혼도 하지 않고 여전히 혼자 살아갔다. 성릉관의 모래바람은 해마다 그의 얼굴에 흔적을 남겨 또래들보다 몇 살이나 더 늙어 보였다. 심지어는 몇 년 동안 불면증에 시달렸기에, 진정제를 먹어야만 잘 수 있었다. 그는 가끔 이런 생각을 했다. ‘만약 내가 그때 이방과 나쁜 짓을 하지 않았더라면… 지금쯤 어떻게 지내고 있었을까? 송석석과 모든 사람이 부러워하는 부부가 되었을까? 아마도 우린 귀여운 자녀도 낳았겠지. 그리고 나는 군대에서 열심히 일하고 석석은 가문의 내무를 책임지며 부모님을 모시고 아이를 돌보고 있었겠지? 설령 내가 승진을 하지 못하고 평생 장군으로만 살아도 그는 날 떠나지 않았겠지.’ 이전의 전북망은 송석석이 하늘을 나는 독수리였는데 자신을 위해 날개를 부러뜨리고 병든 시어머니를 돌보며 군부의 자질구레한 일들을 책임지었다는 사실을 몰랐다. 그리고 그가 알아차렸을 땐 이미 돌이킬 수도 없었다. 전북망에게는 이미 이방이 있었고 이방을 사랑한다고 했으니, 송석석이 이혼하자고 했을 때 그는 심한 말을 하고 후회하지 말라는 말 밖에 할 수 없었다. 송석석 또한 후회할 게 없었다. 이혼을 하면서 전북망을 위해 부러뜨렸던 날개가 다시 자라나 전쟁터로 날아가 쉽게 공을 세웠으니까 말이다. 이방은 송석석이 큰 가문의 아가씨인 데다가 부친과 오라버니가 그를 위해 길을 닦아주었기에 이런 성과를 이룰 수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전북망은 송석석의 성공은 그의 능력 때문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가문이 도움이 되었을지는 모르지만 주된 원인은 아닐 것이다. 만종문에서 송석석의 무공은 거의 최고였는데, 그건 송석석이 그만큼 노력을 했고, 그만큼 땀을 흘렸기에 가능했던 것이었다. 전북망은 송석석을 존경했지만 그는 자신이 송석석을
어머니께 간청해도 소용이 없자 신이는 아버지를 찾아갔다. 하지만 돌아온 건 더 심한 꾸지람이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신이가 이 혼사를 반대하는 것은 양지춘과 접촉한 적이 없기 때문이라고 생각해서, 양지춘에게 그녀를 데리고 나가서 놀며 감정을 쌓으라고 했다. 신이는 가기 싫었지만 어머니가 억지로 그녀를 마차에 태웠고, 심지어는 하녀에게 그녀가 부적절한 말을 하지 않도록 주의하라고 엄명했다. 양지춘의 얼굴은 그나마 멀쩡하게 생겼는데, 처음에는 신이를 조금이나마 존중하는 척하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바로 본성을 드러냈다. 그는 신이의 외모와 품평을 논하며 신이가 외모가 예쁘지 않았더라면 절대로 그를 부인으로 들이지 않겠다고까지 했다. 그의 오만한 태도는 신이를 매우 불편하게 했다. 단지 이것뿐이었다면 아마도 신이가 결혼하지 않겠다는 결정을 내리지는 않았을 것이다. 돌아오는 길에 양지춘은 일부러 신이를 마차에 태워주는 척하며 그녀의 엉덩이를 꼬집었다!그 순간 신이는 온몸의 피가 머리 위로 솟구친 듯한 느낌을 받았다. 그의 경박한 눈빛에 신이는 이내 눈물이 쏟아졌고, 모욕감에 온몸을 떨었지만, 감히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렇게 힘들게 집에 돌왔는데, 하녀와 마부는 그의 동작을 보지 못한 탓에, 오히려 그가 세심하고 자상하다며 그녀의 어머니 앞에서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신이는 억울해서 어머니에게 그 일을 말했지만 어머니는 오히려 그녀가 일부러 꾸민 말이라고 생각해, 그녀를 꾸짖으며 사흘 동안이나 외출을 금지했다. 신이는 그렇게 방에 갇혔고, 매일매일을 눈물로 얼굴을 씻었다. 심지어 그날 선비의 말을 듣고 호수에 뛰어들지 않은 것을 후회하기까지 했다. ‘내가 양지춘에게 시집가는 것이 물에 빠져 죽는 것과 대체 무엇이 다른가?’ 사흘 후, 외출 금지가 해제되자마자 신이는 다시 경산사로 가서 같은 핑계로 하녀를 내보냈다. 이번엔 정말 죽을 각오로 호숫가에 간 것이었는데, 뜻밖에도 그곳에서 다시 그 선비를 만났다.그는 쓸쓸하게 호숫가에 앉아 작은
신이가 깜짝 놀라 고개를 돌리자 한 사람이 멀지 않은 곳에 서 있었고, 나무 그늘에 몸이 가려져 있었다. 그 사람이 입고 있는 옷은 초라해 보였고 눈 밑에는 검푸른 빛을 띠고 있었다. 자세히 보니, 그 사람은 바로 다리 앞에서 그림을 팔던 선비이자, 학정이 말하던 퇴학 해서 기녀를 키우는 학생이었다!“헛소리하지 마십시오.” 신이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짜증을 냈지만, 그가 한 말을 떠올리자 내심 두려웠다. “나는 여기에 물귀신이 있다는 말을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그러니 당신이 거짓말하는 것이겠지요.” 신이는 죽음은 두렵지 않았지만, 귀신은 두려웠고 진흙탕에 영원히 깔려 있는 건 더욱 두려웠다. “거짓말이 아닙니다.” 그가 걸어 나오자 얼굴은 더욱 여위어 보였다. “호숫가의 주변을 보면 바로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왜 이런 아름다운 경치를 보러 오는 사람이 없겠습니까?” “그건 사람들이 이곳으로 예불하기 위해 오는 것이지, 경치를 보러 오는 것은 아니니까요. 절을 하고 바로 돌아가니 당연히 보지 못하겠지요.” 신이는 그렇게 말했지만, 순간 깊이가 보이지 않는 호수에 무언가가 있는 것처럼 느껴져 무의식적으로 한 걸음 물러섰다.그는 여전히 굳게 서서 말했다. “예불하는 사람은 천지와 자연을 경외하기 때문에 이런 좋은 경치가 있다면 반드시 한 번 보러 올 것입니다. 이런 곳은 인재를 배출할 수 있는 좋은 곳일 텐데 아무도 없다는 게 아기씨는 이상하지 않습니까?” 신이는 그것이 사실인지는 몰랐지만, 그는 믿을 수 없는 사람이라고 여겼다. 하지만 감히 그런 무서운 곳에서는 죽을 수 없겠다는 생각이 들어 몸을 돌려 떠나려 했다.그러자 뒤에서 그의 목소리가 은은하게 울려 퍼졌다. “한 번뿐인 인생이니 절대 쉽게 자신의 생명을 포기해서는 안 됩니다. 어떤 사람들은 살고 싶어도 살 지 못하지 않습니까?” 신이는 그의 말이 이상하게 느껴져서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는데, 그의 눈 밑은 이내 붉어졌고 눈물이 고여 반짝이는 것 같
신이의 사촌 여동생과 하녀는 신이를 찾으러 돌아왔다. 신이가 하녀보고 이순에게 삼백문을 주라고 하자 이순은 웃으며 고마움을 표시했다. 원래는 우연한 만남일 뿐이라 다시는 접점이 없을 줄 알았다. 하지만 한 달이 지나 조모님의 생신 때 가문 연회에서 공학정이 데리고 온 제자들 중에 이순이 있었다. 강남의 예의 규율은 진성처럼 엄격하지 않아서 연회에 참석할 때 여인들도 앞마당에 갈 수 있었다. 이순은 신이를 단번에 알아보지 못했다. 신이는 그때 면사포를 쓰고 있었고 두 눈만 드러냈기 때문에 알아보지 못하는 것도 이상할 건 없었다. 이순은 식사를 하지 않고, 신이의 조모에게 생신 축하 그림만 드린 후에 집에 일이 있다며 작별을 고했다. 그가 떠나자마자 학정이 그를 언급하며 안타까운 말투로 말했다. “총명하긴 한데 진취심이 없어서 계속 학교를 그만두겠다는 걸 여기로 데려와 진취성이 있는 사람들을 많이 사귀게 하려고 했는데… 이 정도로 사리분별을 할 줄 모르다니. 정말 실망이군. 학교를 그만두겠다면, 이젠 마음대로 하라고 해야겠어.” 그러자 신이의 부친이 위로했다. “화내실 필요 없습니다. 선생님껜 학생이 많으니 그가 나간다고 해서 큰 문제가 될 건 없지 않습니까?” 하지만 학정은 마치 울화가 쌓인 것처럼 말했다. “그는 내가 가장 아끼는 제자였다네. 그런데 진취성만 없는 것이 아니라 여기저기 동창에게 돈을 빌리질 않나, 게다가 집에 기녀까지 키우고 있다더군.” 신이의 아버지는 그런 사람을 가장 싫어하였다. “그런 사람은 얘기할 가치도 없습니다.” 신이는 그가 어떤 사람이라는 걸 알고 나서 왠지 마음속으로 실망감이 가득했다. 아마도 그날은 그가 그린 그림을 보고, 재능이 있는 사람이라는 것 같다고 생각해 마음이 갔던 것 같았다. 그렇게 몇 달 후, 신이의 혼사도 낙착되었다. 그녀의 약혼자는 회주 지부의 둘째 아들인 양지춘이고, 올해 22살이었다. 22살인데도 결혼하지 않았던 건 첩을 통해 서자를 낳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좋은 가문은 그
그의 이름은 신이었는데 그를 아는 사람들은 모두 그에 대해서 말할 때, 경멸하는 기색을 띠었고, 그의 이야기를 들으면 모르는 사람까지 모두 침을 뱉으며 뻔뻔하다고 할 정도였다. 알다시피 애인과 야반도주하는 것은 사람을 죽이고 불을 지르는 것보다 더 욕먹을 일이니 말이다. 많은 사람들은 그에게 후회하냐고 묻기도 했다. 그녀는 시집간 것을 후회하지 않지만 죄책감을 느끼긴 했다. 왜냐하면 그로 인해 시 씨 가문의 명성이 손상되어 형제자매들과 조카들이 혼사에 어려움이 생겼기 때문이었다. 신이는 시 씨 가문의 아가씨로서, 태어날 때부터 온갖 보살핌을 받아왔다. 먹는 것은 물론 모두 산해진미이고, 입는 것도 모두 능라 비단이었다. 게다가 보모님과 오라버니의 총애까지 한 몸에 받았다. 하지만 그녀에겐 한 가지 결함이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열네 살 때까지 월사가 오지 않은 것이었다. 많은 의사들을 불러 진찰을 받고 밤낮으로 약을 먹었지만 아무런 효과가 없었다. 어머니는 그녀에게 몸이 차서 그러니 몸조리를 하면 나을 수 있다고 위로했다. 하지만 그녀는 이미 몰래 의사가 부모님께 하는 말을 들었다. 의사는 그가 몸이 차서 그런 병이 생긴 것이 아닌, 아이를 키우는 곳이 어린아이와도 같아서 평생 아이를 가질 수 없다고 했다. 그리고 그녀의 몸이 마치 작은 꽃병과 같아서 꽃을 꽂을 수는 있지만 나무를 심고 꽃을 피워 열매를 맺는 건 불가능하다고 비유했다. 그녀는 아이를 낳지 못한다는 건 여자에게 어떤 의미인지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어머니는 그녀를 속일 수 없다는 것을 알고, 나중에 좋은 사람에게 시집가서 부군에게 첩을 들인 후, 첩이 낳은 아이를 친자식처럼 키우라고 조언해주었다.시 씨 가문이라는 후원이 있으면 그녀가 아이를 낳을 수 없어도 아무도 그녀의 지위를 흔들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시 씨 가문의 재물은 그녀가 평생 부귀하게 살기에 충분했다. 신이의 조모도 그녀에게 아이를 낳을 수 없으니 자세를 낮춰야 한다고 했다. 시 씨 가문의 딸이라고
추운 겨울이 되자 눈이 내려 성릉관은 하얗게 뒤덮였다. 세상이 마치 깨끗해진 것처럼 보였다. 이황자는 몇 년 동안 너덜너덜한 승복을 입고 발우를 받쳐 들고는, 가는 길에 동냥을 하다가 절을 보면 이틀 묵으며 부처님께 참회하면서 살았다. 사실 그는 원래 있던 절에서 계속 지낼 수 있었다. 편안하진 않지만 풍찬노숙할 필요도 없고 굶주림과 추위에 시달리지 않아도 되었다. 하지만 그런 안일한 곳에서는 평생 죄를 씻을 수 없다고 생각했고, 계속 길을 걷고 계속 고생해야 마음이 조금이나마 편했다. 그가 성릉관에 도착했을 때 짚신은 이미 찢겨 있었고 발바닥에는 두꺼운 굳은살이 박여 있었다. 이제는 신발을 신지 않고도 자갈이 가득한 길을 걸을 수 있게 되었다. 이런 추운 날씨에는 모든 옷을 껴입어도 추위를 막을 수 없었지만 이미 익숙해진 뒤였다. 그는 눈보라를 맞으며 성릉관에 위치한 감은사로 향했는데, 몇 년 동안 발걸음을 멈춘 적이 없는 탓에 고단함이 뼛속까지 스며들었다. 심지어는 이틀 동안 아무것도 먹지 않아 그는 눈이 가득 쌓인 길에서 의식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그리고 깨어났을 때 그는 따뜻한 두꺼운 이불 속에 누워 있었다. 그가 있는 방에는 숯불이 피워져 있었고, 살짝 열린 창문으로 눈에 눌려 허리가 굽은 나뭇가지가 보였다. 그는 눈동자를 돌려 주위를 둘러보았다. 이렇게 편안하고 따뜻한 느낌은 정말 오랜만이었다. 그의 마음속에 순간 욕심이 생겨 조금만 더 누워있고 싶어졌다. 그런데 바로 그때, 문이 활짝 열렸다. 그가 벌떡 일어나 앉았는데, 갑자기 눈앞이 핑핑 돌더니 다시 힘없이 침대로 쓰러지고 말았다. “움직이지 말고, 가만히 누워 있거라.” 이때 누군가가 부드러운 말투로 말하면서 약그릇을 그의 침대 옆에 놓았다. 그는 말하는 사람의 목소리가 익숙해, 어지러움을 가라앉히고 고개를 돌려보니, 그 사람은 얼굴에 미소를 띠고 있었다. “오랜만이야.” ‘서우 형?!’ 그는 자신이 잘못 보았을까 봐 다시 자세히 보려 했지만, 몸이 너무 어지러운
대황자는 봄 사냥 때 숙청제에게 꾸중을 듣고 돌아간 후 앓아누웠다. 당시 이황자와 서우가 모두가 걱정했는데 덕비는 오히려 기뻐했다. 그는 이번 일을 겪으면서 황제폐하께서는 분명히 대황자를 싫어하게 될 것이라고 했다. 덕비는 이황자를 안고 반드시 부지런해야 하고, 태부와 황숙의 말을 잘 듣고 누구보다 잘 배워 황형을 제압해야 한다고 당부까지 했다. 그로 인해 이황자의 마음은 몹시 복잡했다. 덕비가 줄곧 그에게 태자와 황제가 되는 것이 얼마나 좋은 지 말해주었을 때 비록 그도 마음이 설렜지만 자신과 거리가 먼 얘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심지어 지금 그와 대황형, 서우 형, 그리고 셋째 동생이 사이가 좋아 도저히 대황형을 미워할 수가 없었다. 매일 모순적으로 지내다 보니 오히려 학업이 나빠졌고 승마 연습을 할 때도 여러 번 실수를 했다. 하지만 덕비는 이상하게 그를 탓하지 않았고 며칠 동안 계속 게으르게 하라고 했다. 그렇게 덕비는 이황자를 데리고 복마마를 자주 뵈러 갔고, 복마마 궁전에서 숙청제를 만날 수도 있었다. 덕비는 며칠 동안 그곳을 드나들더니 어느 날 굳은 표정으로 다시는 가지 않겠다고 말했다. 그러고는 차가운 말투로 청이에게 자신의 보살핌이 없으면 아이가 태어날 수 있는지 보겠다고 했다. 황제폐하를 자주 뵈러 갈 수 없어 아쉬웠지만 이황자는 마음을 가다듬고 공부와 승마술에 전념했다. 이황자는 당시 앞날이 어떻게 될지도 몰랐고, 비록 매일 힘들긴했지만 한편으로는 즐거웠기에, 계속 이렇게 지내는 것도 좋을 것 같다고 생각했었다. 그리고 숙청제의 천추세에 승마대회를 개최할 예정이니 세 황자와 서우도 가서 겨뤄 보기로 했다. 원래 그런 대회에서 황자들은 재미있게 참석만하면 되지만, 덕비는 그 경기를 몹시 중시했다. 덕비가 이황자에게 마름쇠를 건넬 때, 그는 하늘이 무너져내리는듯한 기분을 느꼈다. 이황자는 원하지 않았다. 그는 절대로 그렇게 하고 싶지 않았다. 대황형의 목숨을 앗으려 하다니, 이황자는 처음으로 어마마마가 무서워졌다.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