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석석은 잠시 침묵하더니 말이 안 통한다고 느꼈는지 물음을 무시했다. “보주야, 손님을 배웅하거라.” 자신보다 어린 조카에게 무시를 당하자 회 왕비는 화가 치밀어 올랐다. “송석석, 내 말이 끝나지도 않았는데 날 쫓아내려는 것이냐? 내가 네 이모라는 사실을 잊었느냐?” 회 왕비는 화가 나서 찻잔을 바닥에 던져 산산조각이 났다. 송석석은 깨진 찻잔과 자신의 젖은 발을 보더니 고개를 들어 냉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모가 승은백부에서 찻잔을 던지며 화를 내고 량소를 양심 없는 자식이라며 욕해줬다면 저도 무척이나 기뻐하고 이모가 존경스럽게 느껴졌을 것입니다. 지금 란이가 얼마나 큰 억울함을 당했는지 그날 밤 보지 못하셨습니까? 이모는 계속 일을 구워삶기만 했습니다. 란이가 이혼하면 친정으로 돌아가는 것을 허락하느냐고 물어볼 때 이모가 참으라고만 하지 말고 고개를 끄덕였어도 그녀에겐 엄청난 위안이었을 것입니다. 일시적인 억울함 때문에 이혼하려고 했을지도 모르는데 이모가 단칼에 거절하니 란이가 얼마나 절망했을지는 생각해 보셨습니까?” “란이는 이혼하면 안 된다.” 회 왕비는 안색을 붉히며 말했다. “내가 이제껏 말했는데 넌 지금까지 뭘 들은 것이냐? 내가 이혼을 허락했다가 란이가 정말로 임신한 몸으로 처가로 돌아오면 어떡할 것이냐? 넌 진심으로 란이를 위해서 생각해 보았느냐? 란이는 널 그렇게 존경하는데 어떻게 그녀를 해칠 수 있느냐!” 회 왕비는 화가 나서 발을 동동 굴리며 손수건으로 계속 흐르는 눈물을 닦으며 말했다. “잠깐의 억울함이 뭐 어때서 그러느냐! 란이는 군주고 본처인데 홍등가의 출신인 첩을 두려워할 리가 있겠냐? 아무리 장공주의 서녀라고 해도 홍등가 같은 곳에 버러 져 자랐으니 시간이 지나면 량세자도 그녀에게 싫증이 날 테고, 난 결국엔 란이 곁으로 돌아올 것이라고 믿는다. 네가 란이에게 이러한 도리를 설명해 주면 된다. 란이는 네 말을 잘 듣지 않느냐? 그러니 네가 말하면 분명 들을 것이다.”회 왕비는 말을 마치고 다시 자리에 앉더
몇일 후 송석석이 회 왕비에게 화를 낸 일이 혜 태비의 귀에 들어갔다. 그녀는 화가 머리 끝까지 나 발을 동동 굴리며 보주를 불러 설명하게 했다. “그런 말을 듣고도 분개하지 않는 사람이 어디 있느냐? 석석이 아무리 친척이라도 그렇지 나였으면 따귀를 몇 대나 때렸을 것이다!” 그러고는 급히 보주에게 명령했다. “어서 부엌에 가서 석석이 좋아하는 음식을 만들라고 하거라. 계화꽃떡, 대추떡.. 아니다, 차라리 진성의 8가지 만두를 사 와서 석석에게 주거라. 그딴 사람 때문에 자신의 몸을 망치면 가치가 없는 일 아니겟느냐?” 소월이 급하게 사러 나가려 하자 시만자가 말했다. “제가 날렵하니 제가 가서 사오겠습니다.” “그래, 만자가 가서 사 오도록 해.” 혜 태비는 다소 긴장한 목소리였다. 그녀도 이전에 며느리가 화를 내는 것을 봤기 때문에이런 상황이 마치 언니에게 화가 나지만 화를 낼 수 없는 자신과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지. 언니는 그래도 도리를 따지고 날 위해서 화내는 것인데 어떻게 자신의 딸도 돌보지 않는 회 왕비와 같겠어?’ 하지만 이내 자신의 언니가 더 낫다는 생각에 기분이 좋아졌다. 송석석은 화가 나서 매화원으로 돌아가서도 오래도록 진정할 수 없었다. ‘책봉한 땅으로 들어갈까 봐 이렇게 비천하게 군다고? 친왕의 존엄마저 버리고 란이까지 자신들처럼 모욕을 당하라는 거야?’ 송석석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다들 여자들은 다 엄마가 되면 강해진다고 하던데, 회 왕비는 왜 일반 여자들보다 더 나약한 거야?’ 송석석은 란이가 분명 군주인데도 찍소리도 못 하는 연약한 성격이 모두 그들 때문에 만들어진 것이라고 생각했다. 송석석이 고민하고 있는 중에 갑자기 밖에서 발자국 소리가 나서 고개를 들어보니 시만자가 혜 태비의 팔짱을 끼고 손에는 붉은색으로 칠한 찬합을 들고 있었다. 그러자 송석석이 재빨리 몸을 일으키며 인사를 건넸다. “어머님, 어머님께서 여긴 어쩐 일로 오셨습니까?” 시만자가 찬합을 탁자 위에 올려놓고 웃으
송석석은 혜 태비에게 만두 한 조각을 건네며 말했다. “전 이제 괜찮습니다. 어머님께서도 어서 드십시오.” 송석석이 만두를 덕섭 집어 자신에게 주자 혜 태비는 눈살을 잔뜩 찌푸렸다. ‘이 며느리 행동이 너무 거친 거 아니야?’ 하지만 혜 태비는 한참을 망설이다가 결국 혜 송석석이 건네 온 만두를 건네 받았다. ‘괜찮아, 뭐 죽기라도 하겠어?’ 어사대는 다시 바쁘게 움직이며 탕화랑 량소를 고발하기 시작했다. 어사는 그가 덕을 잃고 사람들 앞에서 조정의 문무백관을 모욕했을 뿐만 아니라 황권을 경멸했으니 천자문생으로서 자격이 없다고 여겨 황제폐하께 등과록에서 량소의 이름을 취소해 달라고 간청했다. 그리고 동시에 승은백 세자의 자리를 취소해 달라고도 했다. 다시 말해 승은백부에서 세자를 바꿔야 했다. 황제는 아침 조정에서 량소의 승은백자 자리를 취소했지만 탐화랑의 자격은 취소하지 않았다. 탐화랑은 애초에 황제폐하께서 직접 지목하신 거라 취소를 하면 자신의 얼굴을 때리는 것이 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황제는 노발대발하여 승은백을 훈계했다. 그리고 퇴조 후 승은백을 황실 서재로 불러냈다. 황제는 아들을 제대로 가르치지 못했다며 통곡하는 승은백을 보며 오히려 담담하게 말했다. “이번이 내가 승은백부에게 주는 마지막 기회다. 군주까지 승은백부에서 억울함을 당한다면 승은백의 직위까지 그만둬야 할 것이다.” 황제의 말을 들은 승은백은 벼락을 맞은 듯 한참 동안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그는 그제야 군주가 황제의 사촌 여동생이라는 것이 기억났다. 회왕 부부가 아무리 무능하더라도 황제는 남매의 정은 생각하고 있었다. 그는 넋을 잃고 나가다가 북명왕이 황실 서재 문 앞에 서 있는 것을 보고 그날 밤 승은백부가 부서졌을 때가 떠올라 황급히 인사를 건넸다.승은백이 떠나자 사여묵이 서재에 들어가자 황제는 차를 한 모금 마시고 승은백부에 대한 분노를 삭인 뒤 사여묵에게 말했다. “예의 차릴 필요 없다. 앉거라.” “네.” 사여묵은 의자에 앉았다. “저보고 밖
사여묵이 물었다. “형님, 척사의 정체가 대체 무엇입니까?” 그가 처음 제린으로부터 척사의 정보를 받았을 때 포로로 잡혀간 사병을 포함한 남강전장의 모든 무장들을 조사하였었는데 척사라는 사람은 없었다. 숙청제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나도 모른다. 아마 아무도 모를 것이다. 애초에 네 장인이 그에게 정보를 받은 것이니 알 수도 있겠지만 그 조차도 모를 가능성이 크다.” “척사가 포로 진영에서 탈출했다는 것은 그의 무공이 뛰어나 보통 병사는 아니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그러자 사여묵은 잠시 눈썹을 찡그리며 생각했다. ‘전에 척사의 정보를 받고 그의 길을 따라갈 때도 그의 신분을 알아본 적이 없었다. 그리고 물어본다고 해도 말할 리가 없었다. 정보가 가로 차일 수도 있고 정보에 신원을 누설하는 것은 아주 위험한 행위기에 말할 수 없었다. 긴 생각 끝에 사여묵이 입을 열었다. “형님, 그는 많은 정보를 제공해 큰 공을 세운 사람이니 반드시 그를 구해야 합니다.” 숙청제는 고개를 끄덕이며 숙연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래서 나는 네가 직접 가 봤으면 좋겠다. 지금으로서는 그가 아직 살아있다는 것만 확인했을 뿐이다. 사국이 그를 이용해 성을 바꾸려고 하는데 방천림의 염탐에 의하면 그는 사국 변성에 있는 감옥에 갇혀 있다고 하는데 아직 어느 곳인지 모른다. 그러니 너는 일단 그가 갇힌 곳을 찾아내고 기회를 찾아 구출하거라.” 사여묵은 무릎을 꿇고 확고한 눈빛으로 말했다. “알겠습니다.” 숙청제가 한숨을 내쉬었다. “지금은 왕표가 협상을 미루고 있지만 사국인들이 그를 지극히 미워할 테니 몸이 성하진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가 살아있든 희생했든 그를 고국으로 데려와야 할 것이다. 적어도 누구인지는 알아야 할 것 아니냐?” “네, 대리사의 일은 잠시 진이에게 맡겨두고 제가 내일 사국 변성으로 떠나겠습니다.” 그러자 숙청제가 엄하게 당부했다. “너 혼자니 꼭 조심해야 한다. 무공이 높은 사람 몇 명을 데리고 가 평민으로 가장해서 조사
북명황실에서 송석석은 사여묵의 옷을 챙겨주며 걱정되는 말투로 물었다. “저도 함께 가면 안 됩니까? 당신 혼자 보내는 게 마음이 놓이지 않습니다.” “혼자 가는 게 아니라 장대성과 염 선생을 데리고 가는 것이니 따라오지 않는 것이 좋을 것 같구나. 한녕의 혼사도 준비해야 되고 서우도 서원에 보내야 하지 않겠나?” “염 선생의 무공은 어떻습니까?” 송석석은 비록 염 선생을 오랫동안 봐왔지만 그의 실력을 잘 알지는 못했다. 황실에서 중요한 인물이지만 왠지 항상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는 느낌이었다. “무공은 별로인데 머리가 좋지.” 송석석은 그래도 마음이 놓이지 않아서 말했다. “그럼 만자를 함께 보내는 건 어떻습니까?” 사여묵은 송석석의 걱정에 은근히 기분이 좋아져 손을 뻗어 그녀를 안으며 이마에 뽀뽀를 해댔다. “내가 사부님께 같이 가 달라고 부탁했으니 걱정하지 마시오.” “사숙께서 같이 가는 겁니까? 이제야 마음이 놓이네요.” ‘사숙은 무공도 대단하고 신출귀몰해서 먼 곳에 있는 것 같으면서도 잘못을 하면 바로 나타나곤 했지.’ 송석석은 사숙을 굳게 믿어 걱정이 다 사라졌다. “그래, 그러니 걱정하지 말거라. 내가 척사를 구해올 테니.” 사여묵은 송석석의 얼굴에 다시 한번 뽀뽀를 했다. 적어도 한 달은 떨어져 있어야 한다는 생각에 사여묵은 너무 아쉬웠다. “척사라고 합니까?” “그렇지, 전에 그가 계속 사국에서 남강으로 호송하는 물자 대열에 섞여 우리에게 정보를 전해주었고 서경 사람들이 사국의 병사로 변장한 일도 그에게 받은 정보야. 그리고 남강을 수복한 후 우리는 조정으로 돌아와 제린이 그와 연결을 했는데 원래는 사국에 1년 동안 남아 전쟁이 없다는 걸 확인하면 돌아올 것이라고 약속했었는데.” “그런데 이름이 칠 사와 발음이 같은데 혹시 무슨 암호입니까?” “그런 건 아니고 그저 이름이 척사라네.” 사여묵은 말을 하고 갑자기 무언가 떠오른 듯이 말했다. “칠과 사를 합하면 십일이잖아? 십일.. 시원...” 송석석은 그의 품
전북망의 본가, 문희거(文熙居). 창호지 너머로 은은한 불빛이 아른거리며 그림자를 흔들어놓았다. 송석석(宋惜惜)은 수수한 옷차림으로 의자에 앉아 두 손을 포갠 채 눈앞의 남자를 바라봤다. 그는 결혼 후 곧바로 전장으로 떠나 일 년이나 보지 못했던 남편이었다. 전북망(战北望)은 전장에서 돌아온 복장 그대로 당당히 그녀를 마주보고 있었다.“폐하의 교지(旨意)까지 내려진 이상, 되돌릴 수 없소. 이방(易昉)은 이 집에 들어오게 될 것이오."송석석은 손깍지를 끼면서 어두운 눈빛으로 전북망에게 물었다."태후(太后)마마께서도 능력을 인정한, 그 이방 장군님이 첩이 되길 받아들이셨단 말씀입니까?"그 말을 들은 전북망의 눈빛에 살짝 노기가 서렸다."아니, 이방은 첩으로 들어오는 것이 아니오. 평처(平妻: 본처와 같은 지위를 가진 여인)라, 그대와 다를 것이 없소."송석석은 자세를 바꾸지 않고 말을 이었다."장군님도 아시다시피 평처라는 명칭은 듣기 좋을 뿐, 실제로는 첩과 다를 것이 없습니다."전북망이 눈살을 찌푸리며 대답했다."첩이라니, 이방과 나는 전장에서 마음을 나누면서 서로 사랑하게 되었소. 그리고 이건 나와 이방이 군공(军功: 군사적 공로)으로 받은 교지이니, 사실상 그대의 동의는 필요 없소."송석석은 억누를 수 없는 비웃음을 입가에 띄우며 말했다."서로를 사랑하게 되었다라, 그럼 출정 전에 저에게 했던 약속은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일 년 전, 출정 명령이 떨어진 혼례 첫날밤에 전북망은 약속했었다. 평생 그 하나만을 바라보며 절대로 첩을 들이지 않겠다고. 송석석이 언급하자 그제야 약속을 떠올린 전북망은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그 약속은 잊어버리시오. 그때 나는 진정한 사랑을 알지 못했소. 그저 그대를 아내로서 적합하다고 판단했을 뿐. 하지만 이방을 만나고 마음이 달라졌소."이방을 떠올린 그의 표정이 서서히 부드러워졌다. 그가 숨길 수 없는 깊은 감정이 느껴지는 눈빛으로 말을 이어갔다."이방은 내가 만난 그 어떤 여인과도 비교할 수 없소.
전북망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왜 어려운 길을 자처하시오? 이 혼인은 폐하의 어명이오. 더군다나 이방이 들어온다고 한들, 서로 다른 별채에 머물 텐데, 뭐가 걱정이오? 이방은 안살림에 관심이 없소. 또한 그대의 권한을 빼앗는 일도 없을 것이오. 그대가 중요시 여기는 것들, 이방에겐 아무런 가치도 없다는 걸 모르겠소?”“권한이요? 제가 겨우 그런 것 때문에 이러시는 줄 아십니까?”송석석이 반문했다. 장군부(將軍府: 장군의 집) 살림이란 그리 만만한 것이 아니었다. 노부인한테 들어가는 약값만 해도 매달 수십 냥(两: 화폐 단위)이었고, 그 외 사람들한테 들어가는 생활비도 만만치 않았다. 만약 그녀가 들고 온 지참금이 아니었다면, 이 집안은 진작에 파산했을 것이다. 지난 1년 동안 헌신한 대가가 겨우 이거라니, 정말 황당했다.반면, 전북망도 점점 인내심을 잃어가고 있었다.“됐소. 더 말하지 않겠소. 본래 통보만 하면 되는 일이었고, 그대가 허락하든 하지 않든 변하는 것은 없을 것이오.”그 말을 끝으로 전북망은 소매를 털며 자리를 떠났다. 송석석은 그런 그의 뒷모습을 보며 허탈한 웃음을 지었다.“아가씨.”보주(寶珠)가 옆에서 눈물을 훔치며 말했다.“장군님도 참 너무하세요.”“됐어, 이렇게 된 이상 움직이자.”송석석이 차갑게 눈빛을 굳히며 보주를 쳐다보았다.“첫날밤도 치르지 못했는데, 정식으로 부부가 되었다고 볼 수도 없지. 일단 가서 내가 이 집안에 들어올 때 들고 온 지참금 목록을 가지고 와 봐.”“지참금 목록은 왜요?”보주가 물었다. 그러자 송석석이 그녀의 이마를 손바닥으로 툭 치며 답했다.“바보야. 계속 이 집에 머물 거야?”그러자 보주가 이마를 감싸며 울먹이는 목소리로 말했다.“하지만 이 혼사는 부인께서 아가씨를 위해 직접 예비하신 거잖아요. 어르신도 살아계실 때, 얼마나 아가씨가 잘 살길 바라셨는데요.”부모님의 얘기가 나오자 송석석의 눈가가 촉촉해졌다.송석석의 부모님은 참 금슬이 좋았다. 그녀를 포함해 자식이 여섯이나 됐지
보주가 지참금 목록을 가져오며 말했다.“근 1년 동안, 아가씨께서 이 집안 살림에 보탠다고 사용한 화폐만 해도 6천 냥이 넘어요. 그래도 다행히 상점과 주택, 장원은 그대로예요. 또한 부인께서 남겨주신 예금 증서와 집문서, 땅문서도 그대로 상자에 담겨 있어요.”“알겠어.”송석석은 목록을 보며 전에 어머니가 준 지참금을 떠올렸다. 그녀의 어머니는 혹시라도 딸이 시집에서 고생할까 봐 참 많은 지참금을 챙겨줬었다. 정말 그리움이 사무쳤다. 옆에 있던 보주도 그녀의 기분에 공감하며 눈물을 글썽였다.“이곳을 나간다면 저희는 어디로 갑니까? 진북후부, 아니면 매산입니까?”송석석은 아직도 그 처참했던 진북후부의 현장이 생생했다. 참을 수 없는 슬픔이 가슴속에서 밀려 나왔다.“어디로 가든 여기 있는 것보다는 낫겠지.”“아가씨, 이대로 떠나면 진짜 후회 안 하시겠어요?”송석석이 담담히 답했다.“후회할 게 뭐 있어. 내가 떠나지 않으면 평생 이들 사이에 괴롭게 살아야 할 텐데. 보주, 우리 집엔 이제 나밖에 없어. 내가 잘 사는 모습을 보여줘야 우리 가족들도 저승에서 마음 편히 쉬지.”“아가씨!”보주가 기어이 눈물을 터트리고 말았다. 그녀는 송석석과 마찬가지로 진북후부에서 나고 자란 사람이었다. 송석석의 가족들이 몰살당할 때, 보주의 가족들도 함께 희생되었다.장군부를 떠나게 되더라도, 진북후부로 돌아가는 건 편치 않았다. 그곳은 두 사람 모두에게 큰 아픔이었다.“아가씨, 정말 다른 방법은 없을까요?”송석석이 한층 깊어진 눈동자로 답했다.“있기는 하지. 폐하께 아뢰어 그동안 아버지와 오라버니들이 이룬 공로를 명목으로 교지를 철회해 달라고 요청해 봐야지. 통하지 않는다면, 금란전(金鑾殿: 황제의 궁) 벽에 확 머리 박고 죽어버리겠다고 협박도 해보고.”보주가 놀라 송석석의 다리를 부여잡았다.“아가씨, 그건 절대로 아니될 말입니다!”송석석이 냉철히 눈을 빛내며 나지막이 웃었다.“농담이야. 설마 내가 그런 바보 같은 짓을 할까? 교지를 철회해주지 않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