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석석이 고개를 들어 청작에게 물었다. “다른 진료 방법은 없는지요, 당신의 사부는요?”청작이 답했다.“당연히 오셨지요. 그저 아씨에게 알리지 않았을 뿐입니다.사부께서는 왕비가 얼마나 버틸 수 있을지 모른다고 하셨습니다.만약 약이 끊기면 하루 이틀도 버거울 수 있다고도 하셨고요.”송석석이 고개를 세게 끄덕였다.“약이 끊겨서는 절대 안됩니다.”청작은 안타까운 듯 대답했다.“약을 먹어도 연말을 넘길 수 있을지는 모르겠습니다.15일이 고비입니다.”송석석은 눈물을 흘러내렸다.그녀는 연왕비의 상황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심지어 단 신의와 홍작도 아무 말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현재 약과 침을 번갈아 사용하면서 진통을 낮출 뿐입니다.”청작이 그녀를 위로하듯 말했다.청작이 떠나보냈던 사람들이 많았지만 연왕비에게는 각별한 안타까움을 표했다.얼마나 재수가 없으면 남편도 모자라 자신의 두 딸에게 버림을 받았을까.처갓집도 힘이 없고, 먼 곳에서 지내는 바람에 왕비를 보러 오는 사람도 없다.나쁜 짓을 한 사람이라면 마땅하다고 생각하겠지만, 평생 ‘선’을 쫓던 사람에게 어찌 이러한 결말이 있을 수 있겠는가.“만자야, 너는 내일 경성으로 돌아가거라.난 여기서 이모를 지킬 거야.”송석석이 눈물을 닦은 채 계속 말을 이었다.“이모를 쓸쓸히 두고 싶게 하지 않아.”하지만 시만자는 의리를 지키는 사람이다.“나도 여기서 있을 게. 하지만 몽동이는 저 나무집에서 지내게 해. 남자 손님을 위한 방이기도 해.”“하지만 이제 곧 설이야.외롭고, 조용해서 힘들 수도 있어.”“힘든 건 전쟁터에서 다 겪었어.”송석석은 손수건을 쥐면서 그녀의 말에 잠시 멍을 때렸다.‘연왕이 시만자와 혼인하려는 이유가 그녀가 전쟁에 참여 해서가 아닐까.’하지만 금방 생각을 가다 듬었다.만약 병권을 가진 왕이 그러한 생각을 가진 다면 이해가 가능하지만, 연왕의 부대는 병사가 고작 500명 밖에 없다.게다가 황제도 그를 감시하고 있을 것이 분명하다, 어찌 반역을 계
“연왕부에 몰래 들어가서 해치워 버릴까 봐.”시만자가 뒤척이다가 한마디 뱉었다.“바보 같은 소리 하지 마. 폐하를 사살하면 네 가족 전체가 다 죽어.”송석석이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집안에서 혼사를 진행할까 봐 걱정인 거야?”시만자가 두 손을 머리 뒤로 두었다.“나도 모르겠어. 하지만 부친은 절대로 동의하지 않을 거야. 할아버지도 나를 예뻐하셔서 역시 동의하지 않으실 거고. 하지만 우리 가문은 명성을 되돌리기 위해서라도 혼사가 필요해. 집안의 다른 사람들이 두 분을 설득할까 봐 두려워.”“하지만 두 분께서 동의한다고 해도 혼인하지 않을 거잖아.”“응, 안해.”시만자의 목소리에 점점 힘이 빠졌다.“하지만 내가 혼인을 하지 않으면 다른 집안 여인이 혼인하게 될 거야.나 때문에 희생하는 거잖아. 내가 그 꼴을 어떻게 가만히 지켜볼 수 있겠어? 특히 그 사람이 우리 집안이라면 더더욱 말이야.”그녀는 걱정스러운 마음에 당장이라도 가문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가보는 게 어때?"송석석이 물었다.“그러고 싶긴 한데 가진 않을 거야. 너의 선배가 사람을 두고 갔잖아. 홍현를 보내서 상황을 알아보게 하면 돼.”“그래.”이불을 머리끝까지 덮자 눈물이 흘러내렸다. 결국 한숨도 자지 못하고 아침을 맞이했다.아침이 되자 송석석은 직접 죽을 끓여서 연왕비에게 가져갔다. 그녀가 먹여 준 덕에 어느새 연왕비는 반 공기를 해치웠다.국춘이 말했다.“이 정도는 많이 드신 편입니다. 평소에는 두어 입 드시고는 더 이상 드시지 않으셨습니다. 인삼탕과 여러 귀한 약재가 아니었으면 벌써 세상을 떠나셨을 지도 모릅니다.”“대공자와 두 현자께서 오시면 금세 회복하실지도 모르는데...”“됐습니다. 대공자는 오고 싶어도 오지 못합니다. 그리고 두 현자는 김씨한테 대들지도 못하고 있지 않습니까.”청작이 말했다.그의 말에 송석석은 화가 나서 잠시 자리를 떴다.시만자가 그런 그녀를 보고 물었다.“어디가?”시만자는 외투를 껴입었다. 하얀 여우 털이 그녀의 턱을 가린
보름 안에 황제가 직접 제천단에 참여해 성문, 시민들과 함께 불꽃놀이를 관람할 예정이었다.그리하여 황제와 조정들을 위해 경위와 순방영을 준비 시켜 놓고, 불꽃놀이를 바로 볼 수 있게 성루 외곽에 높은 대좌를 설치해야 했다.연왕비와 인사를 나눈 후, 송석석과 사여묵은 작은방에 들어가 이야기를 나누었다. 몽동이가 하룻 밤 묵었지만 이불 배게 정리가 확실하게 되어 있었고 탁자와 의자도 깨끗하게 닦여 있었다.송석석은 연왕비의 상황을 그에게 설명해 주었다. 그녀와 마찬가지로 이혼장 이야기에 사여묵이 경악을 감추지 못했다.“황당하오. 아들이 없고 질투심이 많다는 게 이혼 사유 라니. 누가 이 터무니없는 말을 믿어 주겠소?”“하지만 질병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은 납득만 할 이유입니다.”송석석이 깊은 한숨을 내쉬며 억울한 마음을 토로했다.“그리고 시만자와 혼인을 하려 하다니, 연왕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가 없소이다.”사여묵은 미간을 찌푸렸다. 그의 비상적인 행동에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송석석과 마찬가지로 만약 진짜 일이 일어난다면 연왕의 권력은 곧 끝이 날 것이라 생각했다.시씨 가문은 강남의 유명 집안이다. 비록 진성에서 관직을 하는 사람은 없지만 각 지방 관료는 적지 않았다. 게다가 시씨 가문은 장사를 크게 했다. 나라의 부와 맞먹을 정도는 아니지만, 상국 제일의 부유 집안은 확실했다. 그러나 오로지 재물만 보면 측비 김씨가 훨씬 우위였다.그가 시씨 집안에서 얻고자 하는 것은 단지 금전만은 아니었다. 정확히 시만자를 고른 이유도 어쩌면 다른 목적이 있는 것이 확실했다.“유의 하겠소.”사여묵이 잠시 멈칫했다. 그는 자신도 황제에게 경계 받고 있음을 다시 한번 더 떠올렸다.“그저 은밀히 살펴보는 수밖에 없겠습니다.”송석석은 그가 남강전쟁에서 겪었던 고난을 떠올렸다. 모두가 찬양했지만 사실상 폐하의 의심을 받아 병권마저 뺏겼었다. 만약 그가 연왕을 조사하다가 들키면 폐하에게 또 의심을 사게 된다.그녀는 근심 가득한 표정을 지었다.“차라리
연왕비는 세게 그녀의 손목을 잡았다. 그리고 밖을 잠시 바라보고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명심하거라. 그 사람은 결코 착한 사람이 아니야. 아마 장공주랑 무언가를 계획하고 있는 모양이야.”송석석이 깜짝 놀랐다.“네?”그녀는 하인들을 급히 내보내고 시만자를 시켜 문을 지키도록 부탁했다. “이모,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연왕비는 고개를 푹 숙였다. 이어서 나오는 말투에는 두려움과 서늘함이 섞여있다.“수년 동안 연주에서 몰래 군사를 모으고 있었어. 그 군자금은 장공주와 측비 김 씨가 대주고 있고. 지금 군사들을 옹현에 숨겨 두었을 것이야.”송석석은 옹현을 알고 있었다. 그곳은 장공주의 봉지이자 선제가 준 혼수였다.“절대로 그의 눈에 띄어서는 안 돼. 또한 그와 적이 되어서도 안 되느니라. 그렇게 간단한 사람이 아니야.”말을 끝내자 연왕비의 기운이 약해졌다. 어쩌면 많이 두려웠던 모양이다.“요 몇 년 동안 그가 첩을 아끼고 본처를 싫어한다는 소문은 들어 봤겠지? 사실 황제의 의심을 피하기 위해서 나쁜 평판을 일부로 만들었던 것이야.”송석석은 등이 서늘했다.사실 모두가 연왕을 무능한 사람이라고 여겼다. 적어도 그녀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황제가 아무리 사람을 보내 감시한다고 하여도 장공주의 봉지인 옹현을 주의 깊게 볼 리가 없었다.그녀는 그제야 장공주가 재물에 대한 욕심이 강한 이유를 찾아냈다.그렇게 연왕비는 말을 끝내고 다시 잠에 들었다.섣달 스무여드레가 되던 날에 연왕비의 정신이 유난히 또렷했다. 점심으로 반 공기 가량의 죽을 드시고, 저녁도 반 공기를 먹었다. 도중에 그릇에 죽을 추가하기도 했다.송석석은 연왕비의 병세가 나아진 줄 알고 기뻐했다. 그녀는 왕비의 손을 잡고는 겨울이 지나면 다시 오겠다고 전했다.그 말에 연왕비가 잔잔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그래, 그렇게 하려무나.”송석석은 기쁜 마음에 젖어 청작과 국춘의 한숨은 보지 못했다.어느덧, 밤이 되었고 국춘이 문을 두드렸다. 동시에 울먹거리는 소리가 문 너머로 들려
경성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섣달그믐달이 다 되었다.설날은 일 년 중에 백성들이 제일 기뻐하고 기대되는 명절이다. 집집마다 다과와 다양한 음식들을 준비해 새해를 맞이할 준비를 했다.이런 화목한 날에 연왕비가 조용히 눈을 감았다. 그녀의 죽음은 연왕부에서조차 파문을 일으키지 못했다. 연왕 일가가 경성에 도착하여 아직 듣지 못한 모양이었다. 한편, 송석석이 집에 들어서자마자 연왕 일가가 방문하여 혜 태비가 접대를 하고 있다는 말을 들었다.시만자는 말채찍을 마차꾼에게 건네면서 이 소식을 전해 들었다. 그리고 주먹을 꽉 쥐고는 지금이라도 연왕에게 주먹을 내려치고 싶었다. 사여묵은 옆에서 미간을 찌푸리고는 혼잣말을 했다. “외출할 때 진성에 도착하지 않은 걸 생각해 보면 아마도 방금 진성에 도착했다는 건데… 태후에게 문안을 드리지 않고 바로 북명황실을 찾는다니, 내가 연왕을 너무 얕잡아 봤군.”송석석도 미간을 찌푸렸다.“북명황실에 먼저 문안을 드린 것은 황제에게 보여주기 위함입니다. 상국에는 북명왕만 있고 황제는 없다는 뜻이 담겨 있지요.”사여묵은 송석석의 슬픔을 알고 있었다. 동시에 그 일가의 사람들은 보기 싫은 마음이 클 것이라 생각했다. “그대는 일단 매화원에서 쉬는 게 나을 듯하오. 상황은 내가 잘 살펴보겠소.”하지만 송석석의 눈빛에 살의가 서렸다.“아니요. 제가 직접 말씀드릴 겁니다. 연말에 부고 하나 전해 드리면 무척이나 좋아하실 겁니다.”사여묵은 그녀의 팔목을 잡으며 걱정하는 눈빛으로 말했다.“이러지 마시오. 그냥 차라리 우는 게 어떻겠소.”연왕비가 죽고 나서 송석석은 눈물을 단 한 방울도 흘리지 않았었다. 돌아오는 길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심지어 연왕과 장공주의 관계를 알려 주었을 때도 침착을 유지했다.사여묵의 말에 송석석은 고개를 저었다.‘울어도 아무런 소용이 없지 않은가.’울면 이미 상처 난 마음에 다시 살점을 도려내는 것과 같았다. 눈물을 흘린다 하여 가족을 잃은 아픔은 결코 사라지지 않으니.송석석은 옷을 갈아입지 않고
청목암 얘기가 나오자 연왕 일가의 얼굴이 급변했다.자리에 앉으려던 사여령이 그 말을 듣고 물었다.“청목암이요? 어마마마의 병세는 어떻게 되었나요?”“뭘 어떻게 되긴요!”송석석은 사여령을 보며 싸늘하게 답했다.“그렇게 걱정되면 왜 한 번도 찾아가 보지 않았나요?”사여령은 연왕의 눈치를 힐끗 살폈다. 연왕은 싸늘한 얼굴로 침묵을 유지하고 있었다.“저는… 글공부하느라 바빠서 시간이 나지 않습니다.”그가 어색한 얼굴로 말했다.“그래요? 연왕부 이 많은 사람들 중에 여유가 남는 사람이 한 명도 없단 말입니까? 시종만 보내면 다인가요? 단 신의의 두 제자가 아니었으면 청목암에서 며칠이나 더 버틸 수 있었을까요?”옥영 현주는 안 그래도 별 볼일 없다고 생각하는 재가한 사촌 형님의 말에 불쾌감을 드러냈다.“형님께서 우리 집안일에 그렇게 관심이 많은 줄은 몰랐네요.”송석석은 날카로운 눈빛으로 옥영 현주를 노려보며 말했다.“나도 세간에 이런 불효녀가 있는 줄은 몰랐네요!”“뭐라고요?”옥영 현주가 눈시울을 붉히며 말했다.“정말 근거도 없는 소리를 하네요. 제가 불효를 저질렀다고 어떻게 그렇게 속단해요? 제가 어머니께 효도하는 걸 보지도 못하셨잖아요?”“당연히 못 봤지요. 하지민 연왕비 마마가 돌아가실 때 당신들 중 아무도 자리에 없었다는 건 압니다.”사여령이 하얗게 질린 얼굴로 물었다.“뭐라고요? 어머니께서 돌아가셨단 말씀인가요?”그는 이 사실을 받아들일 수 없다는 듯이 눈물을 흘렸다.송석석이 보기에 한심했지만 그 눈물은 연기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옥영과 옥경 두 사람도 멈칫하더니 눈시울을 붉혔다. 하지만 어쩐 일인지 아무리 쥐어짜도 눈물은 흐르지 않았다.연왕이 가슴을 치더니 한숨을 쉬며 한탄하듯 말했다.“몸이 안 좋은 걸 알면서도 청목암에 요양하러 가겠다고 고집을 피웠었지. 과거에 이루지 못한 소원을 이루러 가는 거라고 했어. 하늘에 계신 송 부인을 위해 기도하러 간다고 했지.”송석석이 뭐라고 하기도 전에 시만자가 버럭 화를
순간 연왕의 안색이 급변했다.‘이혼서가 남아 있었어?’그는 속으로 심부름을 보냈던 하인들을 저주했다.‘멍청한 놈들, 이런 것 하나 제대로 처리 못 하다니.’사여령은 떨리는 손으로 이혼서를 받아서 펼쳤다. 그 위에는 부친의 친필 필적이 남아 있었다.그는 고개를 들고 주먹을 꽉 쥔 채로 연왕을 바라보며 물었다.“아버지, 이게 어떻게 된 거지요?”연왕은 불쾌한 기색으로 입술을 앙다물고 아들을 노려보기만 했다.김 측비가 다급히 분위기를 무마하려 나섰다.“이게 어떻게 네 아버지가 쓴 거겠어? 분명 누군가가 네 아버지의 필적을 모방하여 우리 집안을 이간질하려는 거야. 네 아버지가 네 어머니를 내칠 리 없잖느냐.”그녀는 대놓고 송석석을 비난하지 못하니 시만자에게 화풀이를 했다.“이혼서 네가 가져온 거지? 우리 연왕부와 무슨 원한이 있기에 가짜 이혼서를 들고 가서 왕비를 자극한 게야? 왕비께서 돌아가신 것도 다 네 잘못이다!”시만자가 싸늘하게 말했다.“내가 누군지도 모르면서 우리 집에 와서 날 며느리로 들이고 싶다고 했군요? 난 연왕 전하와 안면식도 없는 사이인데 전하의 필체를 어떻게 모방합니까? 모방했다고 하더라도 매일 전하의 옆에 있는 측비께서 하셨겠죠. 설마 왕비를 죽이려고 전하의 필체를 모방한 이혼서를 청목암에 보냈나요?”연왕과 김 측비의 시선이 일제히 시만자에게 닿았다.연왕은 그녀가 시만자라는 말에 눈을 반짝 빛냈다.반면 김 측비의 표정은 어두웠다.송석석은 대공자인 사여령을 제외하고 전혀 슬픈 표정이 없는 연왕부 일가족을 둘러보았다.어쩌면 이들에게 연왕비는 청목암으로 떠날 때 이미 죽은 사람이었을지도 모른다.사여령의 눈물이 진심인지는 알 길이 없으나 적어도 그는 눈물이라도 흘렸다.송석석은 이모의 처지가 가엽고 한탄스러웠다. 그리고 부군을 잘못 만난 여인의 처지가 참으로 기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그녀는 싸늘한 시선으로 두 현주를 바라보며 말했다.“생모가 죽었는데 눈물 한 방울 안 흘리네요.”옥경 현주는 급기야 가련한 표정을 지
이때 사여령이 눈물을 글썽이며 사여묵에게 다가갔다. 그러자 연왕은 짜증스럽게 소리를 질렀다.“못 들었느냐? 우리한테 나가라고 하지 않았느냐!”사여령은 눈물을 흘리며 사여묵과 송석석에게 예를 취하고 비틀거리며 밖으로 나갔다.나머지 사람들도 콧방귀를 뀌며 밖으로 나가고 측실 김씨는 여전히 우아함을 유지한 채 예를 올렸다.“태비마마, 안녕히 계십시오. 소첩 이만 물러가겠사옵니다.”김 측비는 나가기 전 시만자에게 묘한 눈빛을 주었다. 시만자는 심드렁한 얼굴로 대꾸도 하지 않았다.혜태비는 여전히 혼란스러워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조금 전까지도 화기애애한 분위기였고 예의 바르고 착실한 아이들이라 생각했는데 이처럼 양심을 상실한 인간들일 줄은 생각도 못 했다.연왕비가 죽었다는 소식에 사여령을 제외하고 다른 사람들은 슬픈 내색 하나 비추지 않았다.그리고 옥영과 옥경 현주는 친모가 청목암에서 고독사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혜태비는 저도 모르게 소름이 돋았다. 출궁하여 아들과 며느리의 보살핌을 받으며 살아갈 생각이었고 당연히 자식들이니 효도해야 한다고 생각했다.하지만 만약 자식들의 생각은 그렇지 않다면?사여묵은 혜태비가 유일하게 기댈 수 있는 존재였다.혜태비는 다급히 일어나 송석석을 거들며 연왕 일가에게 욕설을 퍼부었다.그러고는 다가가서 며느리의 등을 다독이며 말했다.“그런 인간들 때문에 화낼 거 없다. 연왕비가 그들을 용서하지 않을 거고 그들은 자신이 저지른 일에 대한 대가를 치를 거야. 너무 상심하지 말거라.”송석석은 시어머니의 위로를 받고 갑갑했던 속이 그나마 풀렸다.“가서 좀 씻고 준비되면 입궁하자구나.”혜태비는 어린애 달래듯이 송석석을 달래다가 멀뚱멀뚱 서 있는 아들을 보고 인상을 찌푸렸다.“넌 왜 가만히 서 있는 게야? 어서 같이 들어가지 않고. 석석이 손 차가운 것 좀 봐. 부군인 네가 챙겨야지, 누가 챙기겠어?”사여묵은 처음 보는 어머니의 모습에 순간 당황했다.어릴 때도 꾸중은 많이 들었지만 그가 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