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왕비는 세게 그녀의 손목을 잡았다. 그리고 밖을 잠시 바라보고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명심하거라. 그 사람은 결코 착한 사람이 아니야. 아마 장공주랑 무언가를 계획하고 있는 모양이야.”송석석이 깜짝 놀랐다.“네?”그녀는 하인들을 급히 내보내고 시만자를 시켜 문을 지키도록 부탁했다. “이모,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연왕비는 고개를 푹 숙였다. 이어서 나오는 말투에는 두려움과 서늘함이 섞여있다.“수년 동안 연주에서 몰래 군사를 모으고 있었어. 그 군자금은 장공주와 측비 김 씨가 대주고 있고. 지금 군사들을 옹현에 숨겨 두었을 것이야.”송석석은 옹현을 알고 있었다. 그곳은 장공주의 봉지이자 선제가 준 혼수였다.“절대로 그의 눈에 띄어서는 안 돼. 또한 그와 적이 되어서도 안 되느니라. 그렇게 간단한 사람이 아니야.”말을 끝내자 연왕비의 기운이 약해졌다. 어쩌면 많이 두려웠던 모양이다.“요 몇 년 동안 그가 첩을 아끼고 본처를 싫어한다는 소문은 들어 봤겠지? 사실 황제의 의심을 피하기 위해서 나쁜 평판을 일부로 만들었던 것이야.”송석석은 등이 서늘했다.사실 모두가 연왕을 무능한 사람이라고 여겼다. 적어도 그녀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황제가 아무리 사람을 보내 감시한다고 하여도 장공주의 봉지인 옹현을 주의 깊게 볼 리가 없었다.그녀는 그제야 장공주가 재물에 대한 욕심이 강한 이유를 찾아냈다.그렇게 연왕비는 말을 끝내고 다시 잠에 들었다.섣달 스무여드레가 되던 날에 연왕비의 정신이 유난히 또렷했다. 점심으로 반 공기 가량의 죽을 드시고, 저녁도 반 공기를 먹었다. 도중에 그릇에 죽을 추가하기도 했다.송석석은 연왕비의 병세가 나아진 줄 알고 기뻐했다. 그녀는 왕비의 손을 잡고는 겨울이 지나면 다시 오겠다고 전했다.그 말에 연왕비가 잔잔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그래, 그렇게 하려무나.”송석석은 기쁜 마음에 젖어 청작과 국춘의 한숨은 보지 못했다.어느덧, 밤이 되었고 국춘이 문을 두드렸다. 동시에 울먹거리는 소리가 문 너머로 들려
경성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섣달그믐달이 다 되었다.설날은 일 년 중에 백성들이 제일 기뻐하고 기대되는 명절이다. 집집마다 다과와 다양한 음식들을 준비해 새해를 맞이할 준비를 했다.이런 화목한 날에 연왕비가 조용히 눈을 감았다. 그녀의 죽음은 연왕부에서조차 파문을 일으키지 못했다. 연왕 일가가 경성에 도착하여 아직 듣지 못한 모양이었다. 한편, 송석석이 집에 들어서자마자 연왕 일가가 방문하여 혜 태비가 접대를 하고 있다는 말을 들었다.시만자는 말채찍을 마차꾼에게 건네면서 이 소식을 전해 들었다. 그리고 주먹을 꽉 쥐고는 지금이라도 연왕에게 주먹을 내려치고 싶었다. 사여묵은 옆에서 미간을 찌푸리고는 혼잣말을 했다. “외출할 때 진성에 도착하지 않은 걸 생각해 보면 아마도 방금 진성에 도착했다는 건데… 태후에게 문안을 드리지 않고 바로 북명황실을 찾는다니, 내가 연왕을 너무 얕잡아 봤군.”송석석도 미간을 찌푸렸다.“북명황실에 먼저 문안을 드린 것은 황제에게 보여주기 위함입니다. 상국에는 북명왕만 있고 황제는 없다는 뜻이 담겨 있지요.”사여묵은 송석석의 슬픔을 알고 있었다. 동시에 그 일가의 사람들은 보기 싫은 마음이 클 것이라 생각했다. “그대는 일단 매화원에서 쉬는 게 나을 듯하오. 상황은 내가 잘 살펴보겠소.”하지만 송석석의 눈빛에 살의가 서렸다.“아니요. 제가 직접 말씀드릴 겁니다. 연말에 부고 하나 전해 드리면 무척이나 좋아하실 겁니다.”사여묵은 그녀의 팔목을 잡으며 걱정하는 눈빛으로 말했다.“이러지 마시오. 그냥 차라리 우는 게 어떻겠소.”연왕비가 죽고 나서 송석석은 눈물을 단 한 방울도 흘리지 않았었다. 돌아오는 길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심지어 연왕과 장공주의 관계를 알려 주었을 때도 침착을 유지했다.사여묵의 말에 송석석은 고개를 저었다.‘울어도 아무런 소용이 없지 않은가.’울면 이미 상처 난 마음에 다시 살점을 도려내는 것과 같았다. 눈물을 흘린다 하여 가족을 잃은 아픔은 결코 사라지지 않으니.송석석은 옷을 갈아입지 않고
청목암 얘기가 나오자 연왕 일가의 얼굴이 급변했다.자리에 앉으려던 사여령이 그 말을 듣고 물었다.“청목암이요? 어마마마의 병세는 어떻게 되었나요?”“뭘 어떻게 되긴요!”송석석은 사여령을 보며 싸늘하게 답했다.“그렇게 걱정되면 왜 한 번도 찾아가 보지 않았나요?”사여령은 연왕의 눈치를 힐끗 살폈다. 연왕은 싸늘한 얼굴로 침묵을 유지하고 있었다.“저는… 글공부하느라 바빠서 시간이 나지 않습니다.”그가 어색한 얼굴로 말했다.“그래요? 연왕부 이 많은 사람들 중에 여유가 남는 사람이 한 명도 없단 말입니까? 시종만 보내면 다인가요? 단 신의의 두 제자가 아니었으면 청목암에서 며칠이나 더 버틸 수 있었을까요?”옥영 현주는 안 그래도 별 볼일 없다고 생각하는 재가한 사촌 형님의 말에 불쾌감을 드러냈다.“형님께서 우리 집안일에 그렇게 관심이 많은 줄은 몰랐네요.”송석석은 날카로운 눈빛으로 옥영 현주를 노려보며 말했다.“나도 세간에 이런 불효녀가 있는 줄은 몰랐네요!”“뭐라고요?”옥영 현주가 눈시울을 붉히며 말했다.“정말 근거도 없는 소리를 하네요. 제가 불효를 저질렀다고 어떻게 그렇게 속단해요? 제가 어머니께 효도하는 걸 보지도 못하셨잖아요?”“당연히 못 봤지요. 하지민 연왕비 마마가 돌아가실 때 당신들 중 아무도 자리에 없었다는 건 압니다.”사여령이 하얗게 질린 얼굴로 물었다.“뭐라고요? 어머니께서 돌아가셨단 말씀인가요?”그는 이 사실을 받아들일 수 없다는 듯이 눈물을 흘렸다.송석석이 보기에 한심했지만 그 눈물은 연기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옥영과 옥경 두 사람도 멈칫하더니 눈시울을 붉혔다. 하지만 어쩐 일인지 아무리 쥐어짜도 눈물은 흐르지 않았다.연왕이 가슴을 치더니 한숨을 쉬며 한탄하듯 말했다.“몸이 안 좋은 걸 알면서도 청목암에 요양하러 가겠다고 고집을 피웠었지. 과거에 이루지 못한 소원을 이루러 가는 거라고 했어. 하늘에 계신 송 부인을 위해 기도하러 간다고 했지.”송석석이 뭐라고 하기도 전에 시만자가 버럭 화를
순간 연왕의 안색이 급변했다.‘이혼서가 남아 있었어?’그는 속으로 심부름을 보냈던 하인들을 저주했다.‘멍청한 놈들, 이런 것 하나 제대로 처리 못 하다니.’사여령은 떨리는 손으로 이혼서를 받아서 펼쳤다. 그 위에는 부친의 친필 필적이 남아 있었다.그는 고개를 들고 주먹을 꽉 쥔 채로 연왕을 바라보며 물었다.“아버지, 이게 어떻게 된 거지요?”연왕은 불쾌한 기색으로 입술을 앙다물고 아들을 노려보기만 했다.김 측비가 다급히 분위기를 무마하려 나섰다.“이게 어떻게 네 아버지가 쓴 거겠어? 분명 누군가가 네 아버지의 필적을 모방하여 우리 집안을 이간질하려는 거야. 네 아버지가 네 어머니를 내칠 리 없잖느냐.”그녀는 대놓고 송석석을 비난하지 못하니 시만자에게 화풀이를 했다.“이혼서 네가 가져온 거지? 우리 연왕부와 무슨 원한이 있기에 가짜 이혼서를 들고 가서 왕비를 자극한 게야? 왕비께서 돌아가신 것도 다 네 잘못이다!”시만자가 싸늘하게 말했다.“내가 누군지도 모르면서 우리 집에 와서 날 며느리로 들이고 싶다고 했군요? 난 연왕 전하와 안면식도 없는 사이인데 전하의 필체를 어떻게 모방합니까? 모방했다고 하더라도 매일 전하의 옆에 있는 측비께서 하셨겠죠. 설마 왕비를 죽이려고 전하의 필체를 모방한 이혼서를 청목암에 보냈나요?”연왕과 김 측비의 시선이 일제히 시만자에게 닿았다.연왕은 그녀가 시만자라는 말에 눈을 반짝 빛냈다.반면 김 측비의 표정은 어두웠다.송석석은 대공자인 사여령을 제외하고 전혀 슬픈 표정이 없는 연왕부 일가족을 둘러보았다.어쩌면 이들에게 연왕비는 청목암으로 떠날 때 이미 죽은 사람이었을지도 모른다.사여령의 눈물이 진심인지는 알 길이 없으나 적어도 그는 눈물이라도 흘렸다.송석석은 이모의 처지가 가엽고 한탄스러웠다. 그리고 부군을 잘못 만난 여인의 처지가 참으로 기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그녀는 싸늘한 시선으로 두 현주를 바라보며 말했다.“생모가 죽었는데 눈물 한 방울 안 흘리네요.”옥경 현주는 급기야 가련한 표정을 지
이때 사여령이 눈물을 글썽이며 사여묵에게 다가갔다. 그러자 연왕은 짜증스럽게 소리를 질렀다.“못 들었느냐? 우리한테 나가라고 하지 않았느냐!”사여령은 눈물을 흘리며 사여묵과 송석석에게 예를 취하고 비틀거리며 밖으로 나갔다.나머지 사람들도 콧방귀를 뀌며 밖으로 나가고 측실 김씨는 여전히 우아함을 유지한 채 예를 올렸다.“태비마마, 안녕히 계십시오. 소첩 이만 물러가겠사옵니다.”김 측비는 나가기 전 시만자에게 묘한 눈빛을 주었다. 시만자는 심드렁한 얼굴로 대꾸도 하지 않았다.혜태비는 여전히 혼란스러워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조금 전까지도 화기애애한 분위기였고 예의 바르고 착실한 아이들이라 생각했는데 이처럼 양심을 상실한 인간들일 줄은 생각도 못 했다.연왕비가 죽었다는 소식에 사여령을 제외하고 다른 사람들은 슬픈 내색 하나 비추지 않았다.그리고 옥영과 옥경 현주는 친모가 청목암에서 고독사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혜태비는 저도 모르게 소름이 돋았다. 출궁하여 아들과 며느리의 보살핌을 받으며 살아갈 생각이었고 당연히 자식들이니 효도해야 한다고 생각했다.하지만 만약 자식들의 생각은 그렇지 않다면?사여묵은 혜태비가 유일하게 기댈 수 있는 존재였다.혜태비는 다급히 일어나 송석석을 거들며 연왕 일가에게 욕설을 퍼부었다.그러고는 다가가서 며느리의 등을 다독이며 말했다.“그런 인간들 때문에 화낼 거 없다. 연왕비가 그들을 용서하지 않을 거고 그들은 자신이 저지른 일에 대한 대가를 치를 거야. 너무 상심하지 말거라.”송석석은 시어머니의 위로를 받고 갑갑했던 속이 그나마 풀렸다.“가서 좀 씻고 준비되면 입궁하자구나.”혜태비는 어린애 달래듯이 송석석을 달래다가 멀뚱멀뚱 서 있는 아들을 보고 인상을 찌푸렸다.“넌 왜 가만히 서 있는 게야? 어서 같이 들어가지 않고. 석석이 손 차가운 것 좀 봐. 부군인 네가 챙겨야지, 누가 챙기겠어?”사여묵은 처음 보는 어머니의 모습에 순간 당황했다.어릴 때도 꾸중은 많이 들었지만 그가 무
목욕을 마친 뒤, 송석석은 화려한 예복으로 갈아입었다.그리고 분을 얇게 발라 창백한 안색을 가렸다.황가의 연회이고 종친들이 모두 모이는 자리였기에 지켜야 할 예법도 많았다.그녀는 거울 앞에서 길게 심호흡하면서 심란한 마음을 달래려고 애썼다.‘이 슬픔 역시 지나갈 거야. 적응해야 해.’그녀는 그렇게 속으로 되뇌었다.거울 속에는 화려한 비녀에 빛나는 목걸이까지 착용한 아름다운 여인이 앉아 있었다.사부님이 혼수로 준비해 주신 장신구들이었다. 값비싼 동주로 만들어진 장신구들을 상자째 보내오신 분이었다.귀걸이 역시 같은 계열인 동주 귀걸이로 착용해서 귀티가 풍겼다.눈가의 미인점은 오늘따라 더 선혈처럼 빨갛게 돋보였다.그녀는 시선을 내리깔아 분노로 폭발할 것 같은 살기를 감추었다.사여묵은 그녀의 손을 잡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가자.”예복을 갖추어 입은 사여묵은 훤칠한 키에 준수한 용모를 남김없이 자랑하고 있었다. 송석석은 그를 향해 억지로 미소를 지어 보였다.“예, 어머님을 오래 기다리시게 하면 안 되지요.”혜태비는 평소에 비해 단촐하게 단장했다. 연한 색상의 옥비녀에 붉은 산호 목걸이를 착영하려다가 돌아간 연왕비가 떠올라 목걸이를 내려놓고 평소에 늘 하고 다니던 옥팔찌도 뺐다.한녕은 사랑스럽게 단장한 서우와 함께 밖으로 나왔다.연붉은 치맛자락은 그녀의 사랑스러운 용모에 빛을 더했다. 그녀는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서우의 손을 잡은 채 다가와서 차례로 혜태비와 사여묵, 송석석에게 인사를 올렸다.처음 만났을 때와는 완전히 다르게 서우의 얼굴에 비친 천진난만한 미소를 보며 송석석은 위안을 삼았다.“부상이 나은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뛰지 말고 천천히 걸어 다니렴.”태비가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며칠 함께 지내다 보니 혜태비는 예의 바르고 온순한 서우에게 호감을 느꼈다.“예, 태비마마.”서우는 그제야 뛰던 것을 멈추고 공손히 말했다. 사실 이제 뛰는 것 정도는 거뜬했지만 태비마마의 말씀을 거스를 필요는 없었다.고모가 출가할
혜태비에게 계속 위로의 말을 듣는 것도 죄송스러운 일이었다.그녀는 서우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괜찮다. 기분이 좀 안 좋은 일이 있었는데 연회에 가면 맛있는 것들도 많이 먹을 수 있다는 생각에 기분이 좋아졌어.”그녀는 일부러 가벼운 우스개로 분위기를 띄웠다.혜태비와 한녕마저 그녀의 거짓말에 속은 듯했다.매년 있는 궁중 연회이지만 그 규모가 상당하니 매번 설레고 기대가 되는 것도 사실이었다.곳곳에 채색등이 걸려 있고 복도에는 유리등으로 대낮처럼 궁궐을 밝혔다.연왕은 일가족들과 함께 태후와 황제 내외를 알현했다. 황태후는 선황의 동생인 연왕이 그리 반갑지 않았다. 그가 첩을 총애하고 정실을 홀대했다는 소문이 이미 경성까지 퍼진 탓이었다.연왕비의 모습이 보이지 않자 다들 그녀가 병세가 깊어 못 온 거라고만 생각했다. 그러면서도 단 신의가 친히 보살피고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만약 연왕과 김 측비에게만 맡겼더라면 아마 진작에 명을 달리했을 것이다.황태후는 넌지시 연왕비의 안부를 물었다.당연한 인사말이고 황태후도 이들이 진실을 말할 거라는 기대는 하지 않았다. 그런데 연왕의 태도가 이상했다. 그는 우물쭈물하며 대답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송석석이 연왕비의 죽음을 까발리기 전이었다면 예전처럼 그냥 병이 깊어 외출이 힘들다는 핑계를 댔겠지만 북명 왕부 사람들이 다 알게 된 이상 거짓말을 할 수가 없었다. 궁중 연회에서 송석석이 갑자기 이 일을 입 밖으로 내지는 않겠지만 이 일이 알려지는 건 시간문제였다.그는 나오지도 않는 눈물을 억지로 쥐어짜며 슬픈 표정으로 말했다.“마마, 경성에 도착하자마자 왕비가 사망했다는 소식을 전달받았사옵니다.”순간 태후가 들고 있던 찻잔을 놓치며 바닥에 떨어졌다.“뭐라?”황제와 황후도 당황한 얼굴로 연왕에게 시선을 보냈다.게다가 왕비가 사망했는데 바로 돌아가지 않고 일가족을 데리고 경성에 머무르는 연왕의 행동도 이상했다. 궁중 연회보다는 당연히 왕비의 장례가 먼저가 되어야 하지 않은가!“그럼 어서 연주로 돌아
선황 문제는 의귀비를 총애했기에 그녀의 자식인 장공주도 무척 총애했다. 영비는 장공주를 맡아서 돌보게 되면서 수많은 하사를 받았다.지금은 영태비가 되어 조용히 지내고 있었다. 다른 태비들에 비하면 존재감이 별로 없는 사람이지만 그래도 선황이 세상을 떠나고 같이 순장하거나 절에 보내진 다른 비빈들보다는 나았다.품계로 따지면 윗순위에 속했지만 후궁은 품계만 가지고 살아가는 곳이 아니었다.선황은 연왕에게 영지를 내려 멀리 보내고 영태비는 궁에 남겼다. 그것은 연왕을 견제하기 위함이었다.현재까지 연왕은 무능하고 미색을 좋아하는 별 볼일 없는 친왕이었다.그래서 황제는 은혜를 베풀어 영태비를 연왕부에 보내주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하고는 했었다.하지만 연왕비의 부고 소식을 듣자 그럴 마음이 싹 사라졌다.어차피 궐에는 장공주도 있고 장공주도 영태비의 자식이니 그리 급하게 서두를 건 없었다.연왕은 일가족과 함께 대전을 나와 영태비를 뵈러 장수궁으로 갔다. 마침 장공주도 그곳에 있었다.이미 백발이 된 영태비는 아들을 보자 반가운 마음에 달려 나왔다.그들이 큰절을 올린 뒤, 영태비는 만면에 미소를 지으며 그들에게 안부를 물었다.연왕은 장공주에게 다가가서 인사를 건넸다.“오랜만이구나.”사실 남매라고는 하지만 연왕과 장공주는 같은 해 같은 달에 태어나 날짜도 이틀밖에 차이 나지 않았다.장공주가 말했다.“3년 만인가요, 오라버니?”“그래. 지난번에 왔을 때는 왕비의 친척인 송가 여식의 혼사 때문이었지.”연왕은 송석석을 떠올리자 음침한 표정으로 말했다.송석석 얘기가 나오자 장공주도 불쾌한 표정으로 망토를 여미고는 밖으로 나갔다.연왕은 그녀의 뒤를 따르며 궁금한 얼굴로 물었다.“송가의 여식이 마음에 안 들어?”장공주가 싸늘하게 말했다.“마음에 안 들기만 하겠어요? 죽이고 싶을 정도로 거슬리는 계집이에요.”연왕이 묘한 표정으로 말했다.“그 아이는 송회안의 여식이야.”송회안 얘기가 나오자 장공주의 두 눈이 증오로 가득 물들었다. 가
그러자 송석석이 이내 고개를 돌리고 말했다. “왕씨 가문에서는 그녀를 아주 잘 대해줍니다. 조카딸의 혼담에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지금은 시집간 부군이 잘 대해준다 하더군요. 다만 그녀는 자신이 두 번 시집갔음에도 처가에 머무는 것이 조카들에게 미칠 영향이 걱정되어 그러는 모양입니다.”그 말에 전북망이 고개를 끄덕였는데, 순간 번개처럼 날렵하지만 마음씨 따뜻한 최씨 부인이 떠올랐다. 최씨 부인에게는 적자와 서자녀들이 있었고, 아직 혼담이 정해지지 않은 이들도 있었다. 그런 그녀가 혼인 문제로 얼마나 많은 유언비어에 시달렸을지 생각하니, 전북망은 진심으로 안타까웠다. 형수로서의 최씨 부인을 존중하며, 그녀의 처지를 이해하지 못할 바 없었다. 이때 송석석이 그의 생각을 끊었다. “그럼 천천히 생각해 보십시오.”전북망이 주변을 둘러보다가 문득 물었다. “우리 단둘이 여기에 있으면, 섭정왕이 질투하지 않을까요?” 송석석은 예상치 못한 질문에 잠시 당황했으나, 곧 침착하게 답했다. “이 정도 신뢰도 없다면, 제가 어찌 현갑군 지휘사로 오래 근무할 수 있었겠습니까? 우리는 서로 숨김없이 모든 걸 공유합니다. 이번 만남 역시 그분께 이미 알려두었죠.”송석석이 떠나자 전북망도 따라나섰다. 그는 섭정왕이 어딘가에서 이들을 지켜보고 있으리라 의심했지만, 정작 별청 주변에는 아무도 없었다. 앞마당에서야 섭정왕을 발견했는데, 그는 대장군과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송석석을 보자 미소로 맞이하며 불러세우는 섭정왕의 모습에 전북망은 마음이 착잡해졌다. ‘진정한 부부란 저런 것일까.'그러나 성릉관이든 진성이든, 남녀의 단독 만남은 명예에 흠이 될 수 있음도 잘 알았다. 특히 높은 지위에 오른 이들은 더욱 조심해야 했다. ‘내가 무슨 권리로 그들을 걱정하는가.’자조적인 생각이 들었지만, 왕청여의 제안은 여전히 그의 가슴을 두드렸다. 5일의 고민 시간이 주어졌다. 사여묵과 송석석이 진성으로 돌아가기 전까지. 최씨 부인의 이야기를 떠올리면 답은
소 대장군의 팔순 생신 때, 전북망은 송석석과 다시 만났다. 사실 그전에도 송석석이 성릉관으로 갔을 때 몇 번 본 적이 있었다. 그들은 서로 서먹해서 대화를 나누지는 않았지만 전북망은 송석석이 매번 성릉관을 떠날 때마다 몰래 배웅하곤 했다. 전북망은 자신이 당시 어떤 마음으로 그런 건지 알 수 없었다. 그는 늘 송석석에게 미안한 마음을 품고 있었다. 이방과 왕청여에게도 미안하긴 하지만, 그들과는 서로 감정을 소모하고 다투면서 서로에게 상처를 남겼다. 하지만 장군부만 송석석에게 상처를 줬을 뿐, 송석석은 장군부에게 조금의 상처도 주지 않았다. 비록 이혼한 후에는 전북망 어머니의 병세에 대해 상관하지 않았지만 큰형수에게 어떻게 단설환을 얻을 수 있는지 알려주기까지 했다. 소 대장군의 팔순 생신 때는 이미 섭정 왕비가 되어있고 나서였다. 변방의 전사들에겐 양식과 무기가 풍부하고, 봉록까지 올라, 그들에겐 이득이기에 이제는 조정의 정세에 관심을 두지 않아도 되었다. 섭정왕은 한때 장수였기에 병사들이 배불리 먹어야만 국토를 지킬 힘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전북망과 송석석이 다시 만났을 때, 그녀는 섭정왕과 함께 소 대장군에게 생신을 축하해주고 있었다. 그녀를 보는 소 대장군의 눈빛은 여전히 자애롭고 인자했다. 전북망은 사람들을 사이에 두고 멀리서 그 광경을 보며, 그때 그렇게 어리석지 않았다면 지금 송석석과 함께 노장군의 생신을 축하하는 사람이 바로 자신일 것이라는 후회를 했다. 오랜 세월이 흘렀는데도 여전히 같은 생각인 걸 보니, 자신만 제자리에서 멈춰 있는 듯한 기분마저 들었다. 그래서 그는 이번에도 송석석과 대화를 할 수 없을 줄 알았는데, 생일잔치가 끝난 후에 송석석이 뜻밖에도 먼저 그를 찾았다. 그와 송석석 외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는 속으로 생각했다. ‘섭정왕은 이상한 소문이 날까 봐 걱정되지도 않는가?’전북망은 당황하고 불안해 보였고, 송석석을 똑바로 쳐다보지도 못했다.먼저 입을 열지도 못하고 송석석이 말하기만을 기다리
전북망은 성릉관에서 몇 년 동안 두 번이나 발탁되었고, 지금은 장군의 신분으로 수천 명의 병사를 관리하고 있다. 계속 성릉관에 주둔하고 있어 다시 진성으로 돌아간 적이 없었고, 진성의 부름 없이는 제멋대로 돌아갈 수도 없었다. 그는 재혼도 하지 않고 여전히 혼자 살아갔다. 성릉관의 모래바람은 해마다 그의 얼굴에 흔적을 남겨 또래들보다 몇 살이나 더 늙어 보였다. 심지어는 몇 년 동안 불면증에 시달렸기에, 진정제를 먹어야만 잘 수 있었다. 그는 가끔 이런 생각을 했다. ‘만약 내가 그때 이방과 나쁜 짓을 하지 않았더라면… 지금쯤 어떻게 지내고 있었을까? 송석석과 모든 사람이 부러워하는 부부가 되었을까? 아마도 우린 귀여운 자녀도 낳았겠지. 그리고 나는 군대에서 열심히 일하고 석석은 가문의 내무를 책임지며 부모님을 모시고 아이를 돌보고 있었겠지? 설령 내가 승진을 하지 못하고 평생 장군으로만 살아도 그는 날 떠나지 않았겠지.’ 이전의 전북망은 송석석이 하늘을 나는 독수리였는데 자신을 위해 날개를 부러뜨리고 병든 시어머니를 돌보며 군부의 자질구레한 일들을 책임지었다는 사실을 몰랐다. 그리고 그가 알아차렸을 땐 이미 돌이킬 수도 없었다. 전북망에게는 이미 이방이 있었고 이방을 사랑한다고 했으니, 송석석이 이혼하자고 했을 때 그는 심한 말을 하고 후회하지 말라는 말 밖에 할 수 없었다. 송석석 또한 후회할 게 없었다. 이혼을 하면서 전북망을 위해 부러뜨렸던 날개가 다시 자라나 전쟁터로 날아가 쉽게 공을 세웠으니까 말이다. 이방은 송석석이 큰 가문의 아가씨인 데다가 부친과 오라버니가 그를 위해 길을 닦아주었기에 이런 성과를 이룰 수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전북망은 송석석의 성공은 그의 능력 때문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가문이 도움이 되었을지는 모르지만 주된 원인은 아닐 것이다. 만종문에서 송석석의 무공은 거의 최고였는데, 그건 송석석이 그만큼 노력을 했고, 그만큼 땀을 흘렸기에 가능했던 것이었다. 전북망은 송석석을 존경했지만 그는 자신이 송석석을
어머니께 간청해도 소용이 없자 신이는 아버지를 찾아갔다. 하지만 돌아온 건 더 심한 꾸지람이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신이가 이 혼사를 반대하는 것은 양지춘과 접촉한 적이 없기 때문이라고 생각해서, 양지춘에게 그녀를 데리고 나가서 놀며 감정을 쌓으라고 했다. 신이는 가기 싫었지만 어머니가 억지로 그녀를 마차에 태웠고, 심지어는 하녀에게 그녀가 부적절한 말을 하지 않도록 주의하라고 엄명했다. 양지춘의 얼굴은 그나마 멀쩡하게 생겼는데, 처음에는 신이를 조금이나마 존중하는 척하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바로 본성을 드러냈다. 그는 신이의 외모와 품평을 논하며 신이가 외모가 예쁘지 않았더라면 절대로 그를 부인으로 들이지 않겠다고까지 했다. 그의 오만한 태도는 신이를 매우 불편하게 했다. 단지 이것뿐이었다면 아마도 신이가 결혼하지 않겠다는 결정을 내리지는 않았을 것이다. 돌아오는 길에 양지춘은 일부러 신이를 마차에 태워주는 척하며 그녀의 엉덩이를 꼬집었다!그 순간 신이는 온몸의 피가 머리 위로 솟구친 듯한 느낌을 받았다. 그의 경박한 눈빛에 신이는 이내 눈물이 쏟아졌고, 모욕감에 온몸을 떨었지만, 감히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렇게 힘들게 집에 돌왔는데, 하녀와 마부는 그의 동작을 보지 못한 탓에, 오히려 그가 세심하고 자상하다며 그녀의 어머니 앞에서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신이는 억울해서 어머니에게 그 일을 말했지만 어머니는 오히려 그녀가 일부러 꾸민 말이라고 생각해, 그녀를 꾸짖으며 사흘 동안이나 외출을 금지했다. 신이는 그렇게 방에 갇혔고, 매일매일을 눈물로 얼굴을 씻었다. 심지어 그날 선비의 말을 듣고 호수에 뛰어들지 않은 것을 후회하기까지 했다. ‘내가 양지춘에게 시집가는 것이 물에 빠져 죽는 것과 대체 무엇이 다른가?’ 사흘 후, 외출 금지가 해제되자마자 신이는 다시 경산사로 가서 같은 핑계로 하녀를 내보냈다. 이번엔 정말 죽을 각오로 호숫가에 간 것이었는데, 뜻밖에도 그곳에서 다시 그 선비를 만났다.그는 쓸쓸하게 호숫가에 앉아 작은
신이가 깜짝 놀라 고개를 돌리자 한 사람이 멀지 않은 곳에 서 있었고, 나무 그늘에 몸이 가려져 있었다. 그 사람이 입고 있는 옷은 초라해 보였고 눈 밑에는 검푸른 빛을 띠고 있었다. 자세히 보니, 그 사람은 바로 다리 앞에서 그림을 팔던 선비이자, 학정이 말하던 퇴학 해서 기녀를 키우는 학생이었다!“헛소리하지 마십시오.” 신이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짜증을 냈지만, 그가 한 말을 떠올리자 내심 두려웠다. “나는 여기에 물귀신이 있다는 말을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그러니 당신이 거짓말하는 것이겠지요.” 신이는 죽음은 두렵지 않았지만, 귀신은 두려웠고 진흙탕에 영원히 깔려 있는 건 더욱 두려웠다. “거짓말이 아닙니다.” 그가 걸어 나오자 얼굴은 더욱 여위어 보였다. “호숫가의 주변을 보면 바로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왜 이런 아름다운 경치를 보러 오는 사람이 없겠습니까?” “그건 사람들이 이곳으로 예불하기 위해 오는 것이지, 경치를 보러 오는 것은 아니니까요. 절을 하고 바로 돌아가니 당연히 보지 못하겠지요.” 신이는 그렇게 말했지만, 순간 깊이가 보이지 않는 호수에 무언가가 있는 것처럼 느껴져 무의식적으로 한 걸음 물러섰다.그는 여전히 굳게 서서 말했다. “예불하는 사람은 천지와 자연을 경외하기 때문에 이런 좋은 경치가 있다면 반드시 한 번 보러 올 것입니다. 이런 곳은 인재를 배출할 수 있는 좋은 곳일 텐데 아무도 없다는 게 아기씨는 이상하지 않습니까?” 신이는 그것이 사실인지는 몰랐지만, 그는 믿을 수 없는 사람이라고 여겼다. 하지만 감히 그런 무서운 곳에서는 죽을 수 없겠다는 생각이 들어 몸을 돌려 떠나려 했다.그러자 뒤에서 그의 목소리가 은은하게 울려 퍼졌다. “한 번뿐인 인생이니 절대 쉽게 자신의 생명을 포기해서는 안 됩니다. 어떤 사람들은 살고 싶어도 살 지 못하지 않습니까?” 신이는 그의 말이 이상하게 느껴져서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는데, 그의 눈 밑은 이내 붉어졌고 눈물이 고여 반짝이는 것 같
신이의 사촌 여동생과 하녀는 신이를 찾으러 돌아왔다. 신이가 하녀보고 이순에게 삼백문을 주라고 하자 이순은 웃으며 고마움을 표시했다. 원래는 우연한 만남일 뿐이라 다시는 접점이 없을 줄 알았다. 하지만 한 달이 지나 조모님의 생신 때 가문 연회에서 공학정이 데리고 온 제자들 중에 이순이 있었다. 강남의 예의 규율은 진성처럼 엄격하지 않아서 연회에 참석할 때 여인들도 앞마당에 갈 수 있었다. 이순은 신이를 단번에 알아보지 못했다. 신이는 그때 면사포를 쓰고 있었고 두 눈만 드러냈기 때문에 알아보지 못하는 것도 이상할 건 없었다. 이순은 식사를 하지 않고, 신이의 조모에게 생신 축하 그림만 드린 후에 집에 일이 있다며 작별을 고했다. 그가 떠나자마자 학정이 그를 언급하며 안타까운 말투로 말했다. “총명하긴 한데 진취심이 없어서 계속 학교를 그만두겠다는 걸 여기로 데려와 진취성이 있는 사람들을 많이 사귀게 하려고 했는데… 이 정도로 사리분별을 할 줄 모르다니. 정말 실망이군. 학교를 그만두겠다면, 이젠 마음대로 하라고 해야겠어.” 그러자 신이의 부친이 위로했다. “화내실 필요 없습니다. 선생님껜 학생이 많으니 그가 나간다고 해서 큰 문제가 될 건 없지 않습니까?” 하지만 학정은 마치 울화가 쌓인 것처럼 말했다. “그는 내가 가장 아끼는 제자였다네. 그런데 진취성만 없는 것이 아니라 여기저기 동창에게 돈을 빌리질 않나, 게다가 집에 기녀까지 키우고 있다더군.” 신이의 아버지는 그런 사람을 가장 싫어하였다. “그런 사람은 얘기할 가치도 없습니다.” 신이는 그가 어떤 사람이라는 걸 알고 나서 왠지 마음속으로 실망감이 가득했다. 아마도 그날은 그가 그린 그림을 보고, 재능이 있는 사람이라는 것 같다고 생각해 마음이 갔던 것 같았다. 그렇게 몇 달 후, 신이의 혼사도 낙착되었다. 그녀의 약혼자는 회주 지부의 둘째 아들인 양지춘이고, 올해 22살이었다. 22살인데도 결혼하지 않았던 건 첩을 통해 서자를 낳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좋은 가문은 그
그의 이름은 신이었는데 그를 아는 사람들은 모두 그에 대해서 말할 때, 경멸하는 기색을 띠었고, 그의 이야기를 들으면 모르는 사람까지 모두 침을 뱉으며 뻔뻔하다고 할 정도였다. 알다시피 애인과 야반도주하는 것은 사람을 죽이고 불을 지르는 것보다 더 욕먹을 일이니 말이다. 많은 사람들은 그에게 후회하냐고 묻기도 했다. 그녀는 시집간 것을 후회하지 않지만 죄책감을 느끼긴 했다. 왜냐하면 그로 인해 시 씨 가문의 명성이 손상되어 형제자매들과 조카들이 혼사에 어려움이 생겼기 때문이었다. 신이는 시 씨 가문의 아가씨로서, 태어날 때부터 온갖 보살핌을 받아왔다. 먹는 것은 물론 모두 산해진미이고, 입는 것도 모두 능라 비단이었다. 게다가 보모님과 오라버니의 총애까지 한 몸에 받았다. 하지만 그녀에겐 한 가지 결함이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열네 살 때까지 월사가 오지 않은 것이었다. 많은 의사들을 불러 진찰을 받고 밤낮으로 약을 먹었지만 아무런 효과가 없었다. 어머니는 그녀에게 몸이 차서 그러니 몸조리를 하면 나을 수 있다고 위로했다. 하지만 그녀는 이미 몰래 의사가 부모님께 하는 말을 들었다. 의사는 그가 몸이 차서 그런 병이 생긴 것이 아닌, 아이를 키우는 곳이 어린아이와도 같아서 평생 아이를 가질 수 없다고 했다. 그리고 그녀의 몸이 마치 작은 꽃병과 같아서 꽃을 꽂을 수는 있지만 나무를 심고 꽃을 피워 열매를 맺는 건 불가능하다고 비유했다. 그녀는 아이를 낳지 못한다는 건 여자에게 어떤 의미인지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어머니는 그녀를 속일 수 없다는 것을 알고, 나중에 좋은 사람에게 시집가서 부군에게 첩을 들인 후, 첩이 낳은 아이를 친자식처럼 키우라고 조언해주었다.시 씨 가문이라는 후원이 있으면 그녀가 아이를 낳을 수 없어도 아무도 그녀의 지위를 흔들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시 씨 가문의 재물은 그녀가 평생 부귀하게 살기에 충분했다. 신이의 조모도 그녀에게 아이를 낳을 수 없으니 자세를 낮춰야 한다고 했다. 시 씨 가문의 딸이라고
추운 겨울이 되자 눈이 내려 성릉관은 하얗게 뒤덮였다. 세상이 마치 깨끗해진 것처럼 보였다. 이황자는 몇 년 동안 너덜너덜한 승복을 입고 발우를 받쳐 들고는, 가는 길에 동냥을 하다가 절을 보면 이틀 묵으며 부처님께 참회하면서 살았다. 사실 그는 원래 있던 절에서 계속 지낼 수 있었다. 편안하진 않지만 풍찬노숙할 필요도 없고 굶주림과 추위에 시달리지 않아도 되었다. 하지만 그런 안일한 곳에서는 평생 죄를 씻을 수 없다고 생각했고, 계속 길을 걷고 계속 고생해야 마음이 조금이나마 편했다. 그가 성릉관에 도착했을 때 짚신은 이미 찢겨 있었고 발바닥에는 두꺼운 굳은살이 박여 있었다. 이제는 신발을 신지 않고도 자갈이 가득한 길을 걸을 수 있게 되었다. 이런 추운 날씨에는 모든 옷을 껴입어도 추위를 막을 수 없었지만 이미 익숙해진 뒤였다. 그는 눈보라를 맞으며 성릉관에 위치한 감은사로 향했는데, 몇 년 동안 발걸음을 멈춘 적이 없는 탓에 고단함이 뼛속까지 스며들었다. 심지어는 이틀 동안 아무것도 먹지 않아 그는 눈이 가득 쌓인 길에서 의식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그리고 깨어났을 때 그는 따뜻한 두꺼운 이불 속에 누워 있었다. 그가 있는 방에는 숯불이 피워져 있었고, 살짝 열린 창문으로 눈에 눌려 허리가 굽은 나뭇가지가 보였다. 그는 눈동자를 돌려 주위를 둘러보았다. 이렇게 편안하고 따뜻한 느낌은 정말 오랜만이었다. 그의 마음속에 순간 욕심이 생겨 조금만 더 누워있고 싶어졌다. 그런데 바로 그때, 문이 활짝 열렸다. 그가 벌떡 일어나 앉았는데, 갑자기 눈앞이 핑핑 돌더니 다시 힘없이 침대로 쓰러지고 말았다. “움직이지 말고, 가만히 누워 있거라.” 이때 누군가가 부드러운 말투로 말하면서 약그릇을 그의 침대 옆에 놓았다. 그는 말하는 사람의 목소리가 익숙해, 어지러움을 가라앉히고 고개를 돌려보니, 그 사람은 얼굴에 미소를 띠고 있었다. “오랜만이야.” ‘서우 형?!’ 그는 자신이 잘못 보았을까 봐 다시 자세히 보려 했지만, 몸이 너무 어지러운
대황자는 봄 사냥 때 숙청제에게 꾸중을 듣고 돌아간 후 앓아누웠다. 당시 이황자와 서우가 모두가 걱정했는데 덕비는 오히려 기뻐했다. 그는 이번 일을 겪으면서 황제폐하께서는 분명히 대황자를 싫어하게 될 것이라고 했다. 덕비는 이황자를 안고 반드시 부지런해야 하고, 태부와 황숙의 말을 잘 듣고 누구보다 잘 배워 황형을 제압해야 한다고 당부까지 했다. 그로 인해 이황자의 마음은 몹시 복잡했다. 덕비가 줄곧 그에게 태자와 황제가 되는 것이 얼마나 좋은 지 말해주었을 때 비록 그도 마음이 설렜지만 자신과 거리가 먼 얘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심지어 지금 그와 대황형, 서우 형, 그리고 셋째 동생이 사이가 좋아 도저히 대황형을 미워할 수가 없었다. 매일 모순적으로 지내다 보니 오히려 학업이 나빠졌고 승마 연습을 할 때도 여러 번 실수를 했다. 하지만 덕비는 이상하게 그를 탓하지 않았고 며칠 동안 계속 게으르게 하라고 했다. 그렇게 덕비는 이황자를 데리고 복마마를 자주 뵈러 갔고, 복마마 궁전에서 숙청제를 만날 수도 있었다. 덕비는 며칠 동안 그곳을 드나들더니 어느 날 굳은 표정으로 다시는 가지 않겠다고 말했다. 그러고는 차가운 말투로 청이에게 자신의 보살핌이 없으면 아이가 태어날 수 있는지 보겠다고 했다. 황제폐하를 자주 뵈러 갈 수 없어 아쉬웠지만 이황자는 마음을 가다듬고 공부와 승마술에 전념했다. 이황자는 당시 앞날이 어떻게 될지도 몰랐고, 비록 매일 힘들긴했지만 한편으로는 즐거웠기에, 계속 이렇게 지내는 것도 좋을 것 같다고 생각했었다. 그리고 숙청제의 천추세에 승마대회를 개최할 예정이니 세 황자와 서우도 가서 겨뤄 보기로 했다. 원래 그런 대회에서 황자들은 재미있게 참석만하면 되지만, 덕비는 그 경기를 몹시 중시했다. 덕비가 이황자에게 마름쇠를 건넬 때, 그는 하늘이 무너져내리는듯한 기분을 느꼈다. 이황자는 원하지 않았다. 그는 절대로 그렇게 하고 싶지 않았다. 대황형의 목숨을 앗으려 하다니, 이황자는 처음으로 어마마마가 무서워졌다.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