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hare

제398화

Author: 유애
목욕을 마친 뒤, 송석석은 화려한 예복으로 갈아입었다.

그리고 분을 얇게 발라 창백한 안색을 가렸다.

황가의 연회이고 종친들이 모두 모이는 자리였기에 지켜야 할 예법도 많았다.

그녀는 거울 앞에서 길게 심호흡하면서 심란한 마음을 달래려고 애썼다.

‘이 슬픔 역시 지나갈 거야. 적응해야 해.’

그녀는 그렇게 속으로 되뇌었다.

거울 속에는 화려한 비녀에 빛나는 목걸이까지 착용한 아름다운 여인이 앉아 있었다.

사부님이 혼수로 준비해 주신 장신구들이었다. 값비싼 동주로 만들어진 장신구들을 상자째 보내오신 분이었다.

귀걸이 역시 같은 계열인 동주 귀걸이로 착용해서 귀티가 풍겼다.

눈가의 미인점은 오늘따라 더 선혈처럼 빨갛게 돋보였다.

그녀는 시선을 내리깔아 분노로 폭발할 것 같은 살기를 감추었다.

사여묵은 그녀의 손을 잡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가자.”

예복을 갖추어 입은 사여묵은 훤칠한 키에 준수한 용모를 남김없이 자랑하고 있었다. 송석석은 그를 향해 억지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예, 어머님을 오래 기다리시게 하면 안 되지요.”

혜태비는 평소에 비해 단촐하게 단장했다. 연한 색상의 옥비녀에 붉은 산호 목걸이를 착영하려다가 돌아간 연왕비가 떠올라 목걸이를 내려놓고 평소에 늘 하고 다니던 옥팔찌도 뺐다.

한녕은 사랑스럽게 단장한 서우와 함께 밖으로 나왔다.

연붉은 치맛자락은 그녀의 사랑스러운 용모에 빛을 더했다. 그녀는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서우의 손을 잡은 채 다가와서 차례로 혜태비와 사여묵, 송석석에게 인사를 올렸다.

처음 만났을 때와는 완전히 다르게 서우의 얼굴에 비친 천진난만한 미소를 보며 송석석은 위안을 삼았다.

“부상이 나은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뛰지 말고 천천히 걸어 다니렴.”

태비가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며칠 함께 지내다 보니 혜태비는 예의 바르고 온순한 서우에게 호감을 느꼈다.

“예, 태비마마.”

서우는 그제야 뛰던 것을 멈추고 공손히 말했다. 사실 이제 뛰는 것 정도는 거뜬했지만 태비마마의 말씀을 거스를 필요는 없었다.

고모가 출가할
Continue to read this book for free
Scan code to download App
Locked Chapter

Related chapters

  • 봄에 전장의 꽃이 피어난다   제399화

    혜태비에게 계속 위로의 말을 듣는 것도 죄송스러운 일이었다.그녀는 서우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괜찮다. 기분이 좀 안 좋은 일이 있었는데 연회에 가면 맛있는 것들도 많이 먹을 수 있다는 생각에 기분이 좋아졌어.”그녀는 일부러 가벼운 우스개로 분위기를 띄웠다.혜태비와 한녕마저 그녀의 거짓말에 속은 듯했다.매년 있는 궁중 연회이지만 그 규모가 상당하니 매번 설레고 기대가 되는 것도 사실이었다.곳곳에 채색등이 걸려 있고 복도에는 유리등으로 대낮처럼 궁궐을 밝혔다.연왕은 일가족들과 함께 태후와 황제 내외를 알현했다. 황태후는 선황의 동생인 연왕이 그리 반갑지 않았다. 그가 첩을 총애하고 정실을 홀대했다는 소문이 이미 경성까지 퍼진 탓이었다.연왕비의 모습이 보이지 않자 다들 그녀가 병세가 깊어 못 온 거라고만 생각했다. 그러면서도 단 신의가 친히 보살피고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만약 연왕과 김 측비에게만 맡겼더라면 아마 진작에 명을 달리했을 것이다.황태후는 넌지시 연왕비의 안부를 물었다.당연한 인사말이고 황태후도 이들이 진실을 말할 거라는 기대는 하지 않았다. 그런데 연왕의 태도가 이상했다. 그는 우물쭈물하며 대답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송석석이 연왕비의 죽음을 까발리기 전이었다면 예전처럼 그냥 병이 깊어 외출이 힘들다는 핑계를 댔겠지만 북명 왕부 사람들이 다 알게 된 이상 거짓말을 할 수가 없었다. 궁중 연회에서 송석석이 갑자기 이 일을 입 밖으로 내지는 않겠지만 이 일이 알려지는 건 시간문제였다.그는 나오지도 않는 눈물을 억지로 쥐어짜며 슬픈 표정으로 말했다.“마마, 경성에 도착하자마자 왕비가 사망했다는 소식을 전달받았사옵니다.”순간 태후가 들고 있던 찻잔을 놓치며 바닥에 떨어졌다.“뭐라?”황제와 황후도 당황한 얼굴로 연왕에게 시선을 보냈다.게다가 왕비가 사망했는데 바로 돌아가지 않고 일가족을 데리고 경성에 머무르는 연왕의 행동도 이상했다. 궁중 연회보다는 당연히 왕비의 장례가 먼저가 되어야 하지 않은가!“그럼 어서 연주로 돌아

  • 봄에 전장의 꽃이 피어난다   제400화

    선황 문제는 의귀비를 총애했기에 그녀의 자식인 장공주도 무척 총애했다. 영비는 장공주를 맡아서 돌보게 되면서 수많은 하사를 받았다.지금은 영태비가 되어 조용히 지내고 있었다. 다른 태비들에 비하면 존재감이 별로 없는 사람이지만 그래도 선황이 세상을 떠나고 같이 순장하거나 절에 보내진 다른 비빈들보다는 나았다.품계로 따지면 윗순위에 속했지만 후궁은 품계만 가지고 살아가는 곳이 아니었다.선황은 연왕에게 영지를 내려 멀리 보내고 영태비는 궁에 남겼다. 그것은 연왕을 견제하기 위함이었다.현재까지 연왕은 무능하고 미색을 좋아하는 별 볼일 없는 친왕이었다.그래서 황제는 은혜를 베풀어 영태비를 연왕부에 보내주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하고는 했었다.하지만 연왕비의 부고 소식을 듣자 그럴 마음이 싹 사라졌다.어차피 궐에는 장공주도 있고 장공주도 영태비의 자식이니 그리 급하게 서두를 건 없었다.연왕은 일가족과 함께 대전을 나와 영태비를 뵈러 장수궁으로 갔다. 마침 장공주도 그곳에 있었다.이미 백발이 된 영태비는 아들을 보자 반가운 마음에 달려 나왔다.그들이 큰절을 올린 뒤, 영태비는 만면에 미소를 지으며 그들에게 안부를 물었다.연왕은 장공주에게 다가가서 인사를 건넸다.“오랜만이구나.”사실 남매라고는 하지만 연왕과 장공주는 같은 해 같은 달에 태어나 날짜도 이틀밖에 차이 나지 않았다.장공주가 말했다.“3년 만인가요, 오라버니?”“그래. 지난번에 왔을 때는 왕비의 친척인 송가 여식의 혼사 때문이었지.”연왕은 송석석을 떠올리자 음침한 표정으로 말했다.송석석 얘기가 나오자 장공주도 불쾌한 표정으로 망토를 여미고는 밖으로 나갔다.연왕은 그녀의 뒤를 따르며 궁금한 얼굴로 물었다.“송가의 여식이 마음에 안 들어?”장공주가 싸늘하게 말했다.“마음에 안 들기만 하겠어요? 죽이고 싶을 정도로 거슬리는 계집이에요.”연왕이 묘한 표정으로 말했다.“그 아이는 송회안의 여식이야.”송회안 얘기가 나오자 장공주의 두 눈이 증오로 가득 물들었다. 가

  • 봄에 전장의 꽃이 피어난다   제401화

    연왕도 몹시 화가 났다."그년이 언제 죽든 상관없다. 만약 죽었다고 해도 한참 후에 알릴 생각이었다. 그런데 송석석이 이 모든 것을 망쳐버려서 태후와 황제께서 이 모든 것을 알게 되었는데 이제 나는 어떻게 진성에서 머리를 쳐들고 다닐 수 있겠냔 말이다!"장공주도 화가 치밀어 올라 이를 갈고 있었지만, 지금 상황에서는 그저 그를 달랠 수밖에 없었다. "당장은 건드리지 말고 참으시지요. 그들이 막 공을 세우고 돌아온 상태라 조정과 민간에서 명망이 높으니 예봉은 피하고 조용하게 군사를 모아야 하옵니다. 그리고 시씨 가문과의 혼사는 서두르세요. 시만자는 남강 전장에 나선 적 있는 자이니, 만약 그녀를 얻는다면 군사를 모으는 일이 한결 쉬워질 것입니다. 게다가 시씨 가문이란 배경에 적염문까지 돕는다면 언젠가 반드시 대성을 거두게 될 겁니다."그러자 연왕이 미간을 찡그리며 고개를 저었다. "시철진은 무성의해 보였다. 시만자는 만인의 사랑을 받는 자인데 그런 그녀를 첩으로 삼아 내 곁에 두겠다는 건 어려워 보인다. 게다가 그 어리석은 여인이 청목암에서 있었던 일도 알고 있을 터이니, 그녀 또한 동의하지 않을 것이다.""시만자를 얻지 못한다면, 시씨 가문의 다른 딸을 얻으세요. 그들도 그 도망간 고모가 남긴 치욕을 씻어내고자 할 것입니다. 무기와 갑옷에 목표를 두세요. 게다가 시씨 가문은 북쪽 초원에 말 사육장도 소유하고 있사옵니다."거사를 치루려면 군과 말은 필수였다."지금은 비록 방탕하게 지내고 있지만 황제의 눈에 띄지 않고 있으니 시씨 가문의 여인을 얻더라도, 재물만을 탐하는 무능한 번왕이라고만 생각하게 만들어야 합니다. 다시 말해 주색재기중 하나도 빠져서는 안 된다는 인상을 심어야 하옵니다. 저는 먼저 사여묵을 의심하도록 만들 것입니다. 그리고 왕씨 가문은 지금 북명군을 장악하고 있으니..."장공주는 잠시 멈칫하다 다시 말을 이었다. "황제께서 왕씨 가문을 중용하려는 의도가 있는 것으로 보아 전북망을 키우려는 것 같으니, 전북망의 부인 쪽으로 손을

  • 봄에 전장의 꽃이 피어난다   제402화

    잠시후 진성에 있는 황족 친척들도 차례대로 궁에 도착했다. 회왕과 회왕비 그리고 장공주들도 부마와 자녀들을 데리고 왔기에 궁은 순식간에 시끌벅적해졌다. 그다음으로는 이미 시집간 장공주, 민지와 미우가 들어섰다. 그들은 모두 황제의 자매로, 민지 공주는 태후의 여식이고 황제의 누나였다. 미우 공주는 제귀태비의 딸로 황제의 여동생이었다.민지 공주는 어사대부의 차남 허낙천에게 시집갔다. 허낙천은 이름 그대로 낙천적인 인물로 예부에서 한직을 맡고 있었다. 허씨 가문은 목 승상 부인의 친정집으로 시와 예를 이어오는 가문이다. 강직하고 고집이 있었던 허창진은 황제와도 맞서 싸울 정도의 대단한 인물이었다. 공주에게는 공주 저택이 있었지만, 매달 초하루와 보름에는 허씨 가문에 가서 안부를 전해야 했다. 이는 며느리로서의 응당한 예의라며 허창진은 공주가 황족의 신분을 내세워 특별 대우를 받으려 하는 것을 쉽게 허락하지 않았다.그러나 민지 공주는 부마와 금실이 좋았고 게다가 태후의 가르침 덕에 조금의 거만함도 없어 허씨 가문의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미우 공주는 병부상서 이덕회의 조카 이유에게 시집갔다. 이유는 한직에 있으려 하지 않았다. 그는 공주를 도와 토지와 가게를 관리하고 있었다. 그는 누구보다 상업에 능한 인물이었다.송석석은 주위를 둘러보며 란이를 찾고 있었지만, 란이는 보이지 않았다.란이는 군주였지만 출가 후에는 시댁에서 설을 보내야 했다. 그 남편이란 작자는 고리타분한 성격의 소유자로 란이가 고생을 많이 했을 것이다. 송석석은 그 사람을 썩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다.그녀가 한창 생각에 잠겨 있던 그때 태후의 목소리가 들렸다."영안군주의 얼굴을 본지도 꽤 된 것 같구나."그러자 회왕비가 웃으며 대답했다.“란이가 곧 기쁜 소식을 전하게 될 것입니다. 지금 한창 태교 중이옵니다.""정말인가? 너무 잘 되었다." 태후는 몹시 기뻐했다."나도 어의를 보내 맥을 짚어보라고 하려던 참이었다. 식을 올리고도 많은 시간이 흘렀는데 아직도 소식이 없길래

  • 봄에 전장의 꽃이 피어난다   제403화

    잔치가 시작되기 전, 여인들은 한곳에 모여 이야기를 나누었고, 황제 또한 숙부와 형제들과 함께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민지 공주가 송석석의 곁에 앉으며 말했다. "네가 사여묵과 혼인할 때 내가 병으로 앓고 있어서 축하 자리에 가지 못하였다. 예물은 보냈지만 이 자리에서 언니가 사과를 해야겠다."누군가를 종래로 업신여기지 않는 그녀였기에 스스로를 장녀라 부르며 사과하는 모습에 송석석은 웃으며 말했다. "어찌 언니께서 사과를 하십니까? 예물을 보내 주신 것만으로 제가 감사해야지요. 이제 몸은 다 나으셨는지요?""아직 기침은 남아 있고 고열로 며칠을 고생했었다. 너와 사여묵이 혼인할 때에는 침대에서 일어나지도 못하였다." 민지 공주가 기침을 하자 시녀가 급히 귤차를 대령했다. 그렇게 몇 모금 마시고 나서야 기침이 잦아들긴 했지만 얼굴은 여전히 붉게 상기되어 있었다."몸 조심하셔야 합니다." 송석석이 걱정스레 말했다."알겠네!" 민지 공주가 고개를 연신 끄떡였다."네가 마음 써 주니 기쁘구나."그때 혼인 잔치에 참석했던 미우 공주가 웃음을 터뜨리며 불쑥 끼어들었다."그날 사여묵이 얼마나 긴장했는지 모를겁니다. 신부가 혹시라도 놀랄까 신방에 아무도 들어오지 못하게 하였지요. 그 모습에 석석이는 모두의 부러움을 한몸에 받았습니다."그러자 민지 공주는 눈을 흘기며 타박했다. "부마가 너에게 잘해 주지 않터냐? 네 눈썹을 그려 주느라 매일 아침 일찍 일어난다는 소문이 이미 진성에 퍼졌단다."그러자 미우 공주가 얼굴이 붉어지며 발끈했다."언니!"송석석이 자랑스러운 웃음을 머금으며 차를 들었다. 이런 화기애애한 분위기가 참으로 좋았기에 불편한 일들은 애써 무시하려 했다. 새해를 맞이하여 궁에서 조금이라도 근심 어린 표정을 보이는 것은 금기였으니 말이다. 다행히도, 그녀는 감정을 억누르는 데에 이미 익숙해져 있었다.여인들은 란이의 남편 량소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 자부심 가득한 탐화랑이 첩을 둘이나 들였는데, 그중 한 명은 인화루의

  • 봄에 전장의 꽃이 피어난다   제404화

    혜태비의 말에 자리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회왕비를 향해 경멸의 눈빛을 보냈다.회왕비는 아무렇지 않은 척하고 있었지만 내심 몹시 억울해하고 있었다. 말없이 송석석을 바라보는 그녀는 송석석이 그녀의 편을 들어주기만을 바랬다. 하지만 송석석은 그저 냉랭한 표정만 지을 뿐이었다. 그녀에게서는 아무런 감정도 읽을 수 없었다.회왕비는 결국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마음속으로는 조용히 분노를 품었다. 친이모임에도 불구하고 도와주지 않는다니 어머니께 미안하지도 않은가?모두들 한참 이야기를 나눈 후에야 장공주가 돌아왔다. 각자가 예를 갖춘 후, 모두 다시 자리에 앉았다.송석석도 두 사람 사이에 어떠한 갈등도 없었던 것처럼 그녀에게 예를 표했다. 장공주는 그녀보다 더 능숙하게 감정을 감췄다. 그녀는 일부러 송석석에게 관심어린 따뜻한 눈빛까지 보냈다.태후가 영태비의 상태를 묻자, 장공주가 답했다. "건강은 조금 나아지셨으나, 오늘 밤은 함께 송년하지 않으시겠다고 하셨습니다. 날씨가 추워서 상태가 더 나빠질까 염려하셨습니다.""그래, 내가 의사를 불러 더 신경 쓰도록 하겠다. 너도 너무 걱정하지 말거라." "감사드리옵니다, 황후마마." 그때쯤 잔치가 시작될 시간이 되어 궁인들이 모두 자리에서 일어나 태후를 모시고 군화전으로 향했다.황제와 황후는 사람들 앞에서는 화목하고 다정한 부부의 모습을 보여주려 노력했다. 비록 모든 이들이 황제가 현재 가장 총애하는 이가 수민임을 알고 있었지만, 오늘 밤만큼은 수민도 황제와 황후의 다정한 모습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하여 황제의 시선이 북명왕 부부를 향한 것도 목격할 수 있었다. 그들과 반면 북명왕 부부는 너무나 다정했다.둘은 함께 앉아 있었는데 궁인이 음식을 가져올 때마다 북명왕이 왕비에게 음식을 덜어주고, 왕비가 싫어하는 음식은 다시 자신의 그릇에 담았다.그들을 바라보는 황제의 눈빛이 매우 복잡해 보였지만 황제는 이내 평정심을 되찾았다.그 광겨을 바라보고 있는 수민은 황제가 한때 송석석을 후궁으로 들이려

  • 봄에 전장의 꽃이 피어난다   제405화

    그의 아들은 군왕으로 봉해져 봉지에서 비교적 평온한 삶을 보내고 있었다. 그가 혼자 진성에 돌와온 것은 외로운 노년을 보내고자 함이 아닌 그도 자식들과 손주들이 곁에서 함께 지내기를 바랄 뿐이였다. 다만, 사람이 늙으면 낙엽이 지듯 고향을 찾게 되는 것이고, 동시에 황제께도 보여주려는 것이다.그가 진성에 머물고 있으니, 그의 자손들이 절대로 이심을 품지 않을 것임을 증명하려 한 것이다.그는 자손들을 믿었다. 하지만 그가 이미 간파한 바와 같이 누군가는 야심을 품고 지방의 번왕이나 군왕들을 끌어들이려 했다.그래서 그가 그렇게 서두른 것이고, 그렇게 돌아오겠다고 한 것이었다.오늘 밤, 사여묵을 부른 것은 이 노인이 할 수 있는 일은 이 정도가 최선이라는 말을 해주고 싶었다. 그것이 술기운으로 경고했다고 해도 좋고 암시라 해도 상관은 없다.그는 마지막으로 사여묵의 어깨를 건드리며 말했다. "네 처자가 참으로 마음에 든다. 조만간 데리고 와서 절을 올리거라."사여묵은 웃으며 대답했다."예, 꼭 그렇게 하겠습니다.""그럼, 나는 이제 가겠다!"휘왕이 자신의 수염을 쓰다듬으며 크게 웃었다. 그의 발걸음은 매우 안정적이어서 누구의 부축임도 필요하지 않았은 듯했다. 그 모습은 절대 취한 걸음걸이가 아니었다.사여묵이 뒤돌아서자, 거기에는 서우의 손을 잡고 다가오는 송석석이 있었다. 그녀에게 다가간 그는 늘 그랬듯이 다정하게 그녀의 손을 잡았다. "춥지 않소?""춥지 않습니다. 술을 몇 잔 마셨더니 몸이 따뜻합니다."송석석이 술을 즐긴다는 것이 아니다. 단지 술을 권할 때만 몇 잔 마셨을 뿐이었다.그러다 그녀가 다시 덧붙였다. "오히려 어머니께서 많이 드셔서 오늘 밤에는 궁에서 태후와 함께 밤을 보내시겠다고 하셨습니다. 한녕도 함께 머물기로 했어요.""그대로 두게." 사여묵은 그녀의 손을 잡고 그녀는 서우의 손을 잡았다. 셋은 그렇게 함께 오순도순 궁을 떠나 왕부로 돌아갔다.한편, 왕부는 오늘 밤도 북적였다.신만자와 몽동이라는 손님이

  • 봄에 전장의 꽃이 피어난다   제406화

    시끌벅적하던 밤이 자정이 지나자 서서히 고요 속에 잠겼다. 모두들 피곤해져 각자 방으로 돌아가 잠자리에 들었다. 서우는 오래전부터 이미 지쳐 있었지만 억지로 버티고 있었다. 몽동이가 그런 그를 안고 방으로 갔다.사여묵도 송석석을 품에 안았다. 따뜻한 이불 속 온기가 그녀의 마음도 따스히 녹여주길 바랐다.송석석이 무언가 말을 할 줄 알았으나 그녀는 아무 말 없었다. 그녀는 그저 그의 품에서 조용히 숨을 고르고 있었다. 사여묵은 그녀가 이미 잠들었는지 아닌지를 알 수 없었다.송석석은 잠들지 못했다. 그녀는 잠을 이룰 수 없었다.그저 움직이고 싶지도, 말하고 싶지도 않았다. 어떤 것들은 꾹 참고 견뎌야 한다며 시간이 지나면서 모든 아픔이 사라지기를 기다리는 것이 그녀의 방식이었다.하지만 전과 다른 것이 있다면 이제는 진심으로 그녀를 아껴주는 사람이 있다는 점이었다.사여묵은 마음이 아팠다. 그는 그녀가 너무 걱정되었다.그녀는 행복하면 항상 그를 향해 환하게 미소를 지었지만 슬플 때에는 그에게 눈물을 보인 적이 없었다. 항상 그렇게 슬픔을 숨기면서 그에게는 이성적이고 차분하며 미소를 유지한다.사여묵은 황제에게 조금은 미웠다. 그는 본래 남강에서 돌아오면 송석석과 천천히 감정을 쌓은 후 정식으로 청혼할 계획이었다. 하지만 황제의 한마디로 그들의 혼사는 불가피한 것이 되고 말았다.’그나마 다행인 것은 그에게 청혼할 마음이 있었음을 알게 되어서 적어도 그가 진심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송석석은 날이 밝아서야 잠이 들었고, 혜태비가 궁에서 돌아오지 않았기에 일찍부터 인사를 올릴 필요는 없었다. 하지만 결국 뜬금없는 폭죽 소리에 잠에서 깨고 말았다. 한참 멍한 상태로 침대에 누워있던 그녀는 결국 자리에서 일어나 옷을 갈아입었다.그러자 보주가 들어와 그녀의 머리를 빗겨주었다. "장군께서는 이른 아침부터 정원에서 손님을 접대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관리라고 하였습니다."“부인들도 왔느냐?” 송석석이 물었다. 왕부의 주모로서, 부인들이 오면 그녀도

Latest chapter

  • 봄에 전장의 꽃이 피어난다   제1591화

    그러자 송석석이 이내 고개를 돌리고 말했다. “왕씨 가문에서는 그녀를 아주 잘 대해줍니다. 조카딸의 혼담에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지금은 시집간 부군이 잘 대해준다 하더군요. 다만 그녀는 자신이 두 번 시집갔음에도 처가에 머무는 것이 조카들에게 미칠 영향이 걱정되어 그러는 모양입니다.”그 말에 전북망이 고개를 끄덕였는데, 순간 번개처럼 날렵하지만 마음씨 따뜻한 최씨 부인이 떠올랐다. 최씨 부인에게는 적자와 서자녀들이 있었고, 아직 혼담이 정해지지 않은 이들도 있었다. 그런 그녀가 혼인 문제로 얼마나 많은 유언비어에 시달렸을지 생각하니, 전북망은 진심으로 안타까웠다. 형수로서의 최씨 부인을 존중하며, 그녀의 처지를 이해하지 못할 바 없었다. 이때 송석석이 그의 생각을 끊었다. “그럼 천천히 생각해 보십시오.”전북망이 주변을 둘러보다가 문득 물었다. “우리 단둘이 여기에 있으면, 섭정왕이 질투하지 않을까요?” 송석석은 예상치 못한 질문에 잠시 당황했으나, 곧 침착하게 답했다. “이 정도 신뢰도 없다면, 제가 어찌 현갑군 지휘사로 오래 근무할 수 있었겠습니까? 우리는 서로 숨김없이 모든 걸 공유합니다. 이번 만남 역시 그분께 이미 알려두었죠.”송석석이 떠나자 전북망도 따라나섰다. 그는 섭정왕이 어딘가에서 이들을 지켜보고 있으리라 의심했지만, 정작 별청 주변에는 아무도 없었다. 앞마당에서야 섭정왕을 발견했는데, 그는 대장군과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송석석을 보자 미소로 맞이하며 불러세우는 섭정왕의 모습에 전북망은 마음이 착잡해졌다. ‘진정한 부부란 저런 것일까.'그러나 성릉관이든 진성이든, 남녀의 단독 만남은 명예에 흠이 될 수 있음도 잘 알았다. 특히 높은 지위에 오른 이들은 더욱 조심해야 했다. ‘내가 무슨 권리로 그들을 걱정하는가.’자조적인 생각이 들었지만, 왕청여의 제안은 여전히 그의 가슴을 두드렸다. 5일의 고민 시간이 주어졌다. 사여묵과 송석석이 진성으로 돌아가기 전까지. 최씨 부인의 이야기를 떠올리면 답은

  • 봄에 전장의 꽃이 피어난다   제1590화

    소 대장군의 팔순 생신 때, 전북망은 송석석과 다시 만났다. 사실 그전에도 송석석이 성릉관으로 갔을 때 몇 번 본 적이 있었다. 그들은 서로 서먹해서 대화를 나누지는 않았지만 전북망은 송석석이 매번 성릉관을 떠날 때마다 몰래 배웅하곤 했다. 전북망은 자신이 당시 어떤 마음으로 그런 건지 알 수 없었다. 그는 늘 송석석에게 미안한 마음을 품고 있었다. 이방과 왕청여에게도 미안하긴 하지만, 그들과는 서로 감정을 소모하고 다투면서 서로에게 상처를 남겼다. 하지만 장군부만 송석석에게 상처를 줬을 뿐, 송석석은 장군부에게 조금의 상처도 주지 않았다. 비록 이혼한 후에는 전북망 어머니의 병세에 대해 상관하지 않았지만 큰형수에게 어떻게 단설환을 얻을 수 있는지 알려주기까지 했다. 소 대장군의 팔순 생신 때는 이미 섭정 왕비가 되어있고 나서였다. 변방의 전사들에겐 양식과 무기가 풍부하고, 봉록까지 올라, 그들에겐 이득이기에 이제는 조정의 정세에 관심을 두지 않아도 되었다. 섭정왕은 한때 장수였기에 병사들이 배불리 먹어야만 국토를 지킬 힘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전북망과 송석석이 다시 만났을 때, 그녀는 섭정왕과 함께 소 대장군에게 생신을 축하해주고 있었다. 그녀를 보는 소 대장군의 눈빛은 여전히 자애롭고 인자했다. 전북망은 사람들을 사이에 두고 멀리서 그 광경을 보며, 그때 그렇게 어리석지 않았다면 지금 송석석과 함께 노장군의 생신을 축하하는 사람이 바로 자신일 것이라는 후회를 했다. 오랜 세월이 흘렀는데도 여전히 같은 생각인 걸 보니, 자신만 제자리에서 멈춰 있는 듯한 기분마저 들었다. 그래서 그는 이번에도 송석석과 대화를 할 수 없을 줄 알았는데, 생일잔치가 끝난 후에 송석석이 뜻밖에도 먼저 그를 찾았다. 그와 송석석 외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는 속으로 생각했다. ‘섭정왕은 이상한 소문이 날까 봐 걱정되지도 않는가?’전북망은 당황하고 불안해 보였고, 송석석을 똑바로 쳐다보지도 못했다.먼저 입을 열지도 못하고 송석석이 말하기만을 기다리

  • 봄에 전장의 꽃이 피어난다   제1589화

    전북망은 성릉관에서 몇 년 동안 두 번이나 발탁되었고, 지금은 장군의 신분으로 수천 명의 병사를 관리하고 있다. 계속 성릉관에 주둔하고 있어 다시 진성으로 돌아간 적이 없었고, 진성의 부름 없이는 제멋대로 돌아갈 수도 없었다. 그는 재혼도 하지 않고 여전히 혼자 살아갔다. 성릉관의 모래바람은 해마다 그의 얼굴에 흔적을 남겨 또래들보다 몇 살이나 더 늙어 보였다. 심지어는 몇 년 동안 불면증에 시달렸기에, 진정제를 먹어야만 잘 수 있었다. 그는 가끔 이런 생각을 했다. ‘만약 내가 그때 이방과 나쁜 짓을 하지 않았더라면… 지금쯤 어떻게 지내고 있었을까? 송석석과 모든 사람이 부러워하는 부부가 되었을까? 아마도 우린 귀여운 자녀도 낳았겠지. 그리고 나는 군대에서 열심히 일하고 석석은 가문의 내무를 책임지며 부모님을 모시고 아이를 돌보고 있었겠지? 설령 내가 승진을 하지 못하고 평생 장군으로만 살아도 그는 날 떠나지 않았겠지.’ 이전의 전북망은 송석석이 하늘을 나는 독수리였는데 자신을 위해 날개를 부러뜨리고 병든 시어머니를 돌보며 군부의 자질구레한 일들을 책임지었다는 사실을 몰랐다. 그리고 그가 알아차렸을 땐 이미 돌이킬 수도 없었다. 전북망에게는 이미 이방이 있었고 이방을 사랑한다고 했으니, 송석석이 이혼하자고 했을 때 그는 심한 말을 하고 후회하지 말라는 말 밖에 할 수 없었다. 송석석 또한 후회할 게 없었다. 이혼을 하면서 전북망을 위해 부러뜨렸던 날개가 다시 자라나 전쟁터로 날아가 쉽게 공을 세웠으니까 말이다. 이방은 송석석이 큰 가문의 아가씨인 데다가 부친과 오라버니가 그를 위해 길을 닦아주었기에 이런 성과를 이룰 수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전북망은 송석석의 성공은 그의 능력 때문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가문이 도움이 되었을지는 모르지만 주된 원인은 아닐 것이다. 만종문에서 송석석의 무공은 거의 최고였는데, 그건 송석석이 그만큼 노력을 했고, 그만큼 땀을 흘렸기에 가능했던 것이었다. 전북망은 송석석을 존경했지만 그는 자신이 송석석을

  • 봄에 전장의 꽃이 피어난다   제1588화

    어머니께 간청해도 소용이 없자 신이는 아버지를 찾아갔다. 하지만 돌아온 건 더 심한 꾸지람이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신이가 이 혼사를 반대하는 것은 양지춘과 접촉한 적이 없기 때문이라고 생각해서, 양지춘에게 그녀를 데리고 나가서 놀며 감정을 쌓으라고 했다. 신이는 가기 싫었지만 어머니가 억지로 그녀를 마차에 태웠고, 심지어는 하녀에게 그녀가 부적절한 말을 하지 않도록 주의하라고 엄명했다. 양지춘의 얼굴은 그나마 멀쩡하게 생겼는데, 처음에는 신이를 조금이나마 존중하는 척하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바로 본성을 드러냈다. 그는 신이의 외모와 품평을 논하며 신이가 외모가 예쁘지 않았더라면 절대로 그를 부인으로 들이지 않겠다고까지 했다. 그의 오만한 태도는 신이를 매우 불편하게 했다. 단지 이것뿐이었다면 아마도 신이가 결혼하지 않겠다는 결정을 내리지는 않았을 것이다. 돌아오는 길에 양지춘은 일부러 신이를 마차에 태워주는 척하며 그녀의 엉덩이를 꼬집었다!그 순간 신이는 온몸의 피가 머리 위로 솟구친 듯한 느낌을 받았다. 그의 경박한 눈빛에 신이는 이내 눈물이 쏟아졌고, 모욕감에 온몸을 떨었지만, 감히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렇게 힘들게 집에 돌왔는데, 하녀와 마부는 그의 동작을 보지 못한 탓에, 오히려 그가 세심하고 자상하다며 그녀의 어머니 앞에서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신이는 억울해서 어머니에게 그 일을 말했지만 어머니는 오히려 그녀가 일부러 꾸민 말이라고 생각해, 그녀를 꾸짖으며 사흘 동안이나 외출을 금지했다. 신이는 그렇게 방에 갇혔고, 매일매일을 눈물로 얼굴을 씻었다. 심지어 그날 선비의 말을 듣고 호수에 뛰어들지 않은 것을 후회하기까지 했다. ‘내가 양지춘에게 시집가는 것이 물에 빠져 죽는 것과 대체 무엇이 다른가?’ 사흘 후, 외출 금지가 해제되자마자 신이는 다시 경산사로 가서 같은 핑계로 하녀를 내보냈다. 이번엔 정말 죽을 각오로 호숫가에 간 것이었는데, 뜻밖에도 그곳에서 다시 그 선비를 만났다.그는 쓸쓸하게 호숫가에 앉아 작은

  • 봄에 전장의 꽃이 피어난다   제1587화

    신이가 깜짝 놀라 고개를 돌리자 한 사람이 멀지 않은 곳에 서 있었고, 나무 그늘에 몸이 가려져 있었다. 그 사람이 입고 있는 옷은 초라해 보였고 눈 밑에는 검푸른 빛을 띠고 있었다. 자세히 보니, 그 사람은 바로 다리 앞에서 그림을 팔던 선비이자, 학정이 말하던 퇴학 해서 기녀를 키우는 학생이었다!“헛소리하지 마십시오.” 신이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짜증을 냈지만, 그가 한 말을 떠올리자 내심 두려웠다. “나는 여기에 물귀신이 있다는 말을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그러니 당신이 거짓말하는 것이겠지요.” 신이는 죽음은 두렵지 않았지만, 귀신은 두려웠고 진흙탕에 영원히 깔려 있는 건 더욱 두려웠다. “거짓말이 아닙니다.” 그가 걸어 나오자 얼굴은 더욱 여위어 보였다. “호숫가의 주변을 보면 바로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왜 이런 아름다운 경치를 보러 오는 사람이 없겠습니까?” “그건 사람들이 이곳으로 예불하기 위해 오는 것이지, 경치를 보러 오는 것은 아니니까요. 절을 하고 바로 돌아가니 당연히 보지 못하겠지요.” 신이는 그렇게 말했지만, 순간 깊이가 보이지 않는 호수에 무언가가 있는 것처럼 느껴져 무의식적으로 한 걸음 물러섰다.그는 여전히 굳게 서서 말했다. “예불하는 사람은 천지와 자연을 경외하기 때문에 이런 좋은 경치가 있다면 반드시 한 번 보러 올 것입니다. 이런 곳은 인재를 배출할 수 있는 좋은 곳일 텐데 아무도 없다는 게 아기씨는 이상하지 않습니까?” 신이는 그것이 사실인지는 몰랐지만, 그는 믿을 수 없는 사람이라고 여겼다. 하지만 감히 그런 무서운 곳에서는 죽을 수 없겠다는 생각이 들어 몸을 돌려 떠나려 했다.그러자 뒤에서 그의 목소리가 은은하게 울려 퍼졌다. “한 번뿐인 인생이니 절대 쉽게 자신의 생명을 포기해서는 안 됩니다. 어떤 사람들은 살고 싶어도 살 지 못하지 않습니까?” 신이는 그의 말이 이상하게 느껴져서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는데, 그의 눈 밑은 이내 붉어졌고 눈물이 고여 반짝이는 것 같

  • 봄에 전장의 꽃이 피어난다   제1586화

    신이의 사촌 여동생과 하녀는 신이를 찾으러 돌아왔다. 신이가 하녀보고 이순에게 삼백문을 주라고 하자 이순은 웃으며 고마움을 표시했다. 원래는 우연한 만남일 뿐이라 다시는 접점이 없을 줄 알았다. 하지만 한 달이 지나 조모님의 생신 때 가문 연회에서 공학정이 데리고 온 제자들 중에 이순이 있었다. 강남의 예의 규율은 진성처럼 엄격하지 않아서 연회에 참석할 때 여인들도 앞마당에 갈 수 있었다. 이순은 신이를 단번에 알아보지 못했다. 신이는 그때 면사포를 쓰고 있었고 두 눈만 드러냈기 때문에 알아보지 못하는 것도 이상할 건 없었다. 이순은 식사를 하지 않고, 신이의 조모에게 생신 축하 그림만 드린 후에 집에 일이 있다며 작별을 고했다. 그가 떠나자마자 학정이 그를 언급하며 안타까운 말투로 말했다. “총명하긴 한데 진취심이 없어서 계속 학교를 그만두겠다는 걸 여기로 데려와 진취성이 있는 사람들을 많이 사귀게 하려고 했는데… 이 정도로 사리분별을 할 줄 모르다니. 정말 실망이군. 학교를 그만두겠다면, 이젠 마음대로 하라고 해야겠어.” 그러자 신이의 부친이 위로했다. “화내실 필요 없습니다. 선생님껜 학생이 많으니 그가 나간다고 해서 큰 문제가 될 건 없지 않습니까?” 하지만 학정은 마치 울화가 쌓인 것처럼 말했다. “그는 내가 가장 아끼는 제자였다네. 그런데 진취성만 없는 것이 아니라 여기저기 동창에게 돈을 빌리질 않나, 게다가 집에 기녀까지 키우고 있다더군.” 신이의 아버지는 그런 사람을 가장 싫어하였다. “그런 사람은 얘기할 가치도 없습니다.” 신이는 그가 어떤 사람이라는 걸 알고 나서 왠지 마음속으로 실망감이 가득했다. 아마도 그날은 그가 그린 그림을 보고, 재능이 있는 사람이라는 것 같다고 생각해 마음이 갔던 것 같았다. 그렇게 몇 달 후, 신이의 혼사도 낙착되었다. 그녀의 약혼자는 회주 지부의 둘째 아들인 양지춘이고, 올해 22살이었다. 22살인데도 결혼하지 않았던 건 첩을 통해 서자를 낳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좋은 가문은 그

  • 봄에 전장의 꽃이 피어난다   제1585화

    그의 이름은 신이었는데 그를 아는 사람들은 모두 그에 대해서 말할 때, 경멸하는 기색을 띠었고, 그의 이야기를 들으면 모르는 사람까지 모두 침을 뱉으며 뻔뻔하다고 할 정도였다. 알다시피 애인과 야반도주하는 것은 사람을 죽이고 불을 지르는 것보다 더 욕먹을 일이니 말이다. 많은 사람들은 그에게 후회하냐고 묻기도 했다. 그녀는 시집간 것을 후회하지 않지만 죄책감을 느끼긴 했다. 왜냐하면 그로 인해 시 씨 가문의 명성이 손상되어 형제자매들과 조카들이 혼사에 어려움이 생겼기 때문이었다. 신이는 시 씨 가문의 아가씨로서, 태어날 때부터 온갖 보살핌을 받아왔다. 먹는 것은 물론 모두 산해진미이고, 입는 것도 모두 능라 비단이었다. 게다가 보모님과 오라버니의 총애까지 한 몸에 받았다. 하지만 그녀에겐 한 가지 결함이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열네 살 때까지 월사가 오지 않은 것이었다. 많은 의사들을 불러 진찰을 받고 밤낮으로 약을 먹었지만 아무런 효과가 없었다. 어머니는 그녀에게 몸이 차서 그러니 몸조리를 하면 나을 수 있다고 위로했다. 하지만 그녀는 이미 몰래 의사가 부모님께 하는 말을 들었다. 의사는 그가 몸이 차서 그런 병이 생긴 것이 아닌, 아이를 키우는 곳이 어린아이와도 같아서 평생 아이를 가질 수 없다고 했다. 그리고 그녀의 몸이 마치 작은 꽃병과 같아서 꽃을 꽂을 수는 있지만 나무를 심고 꽃을 피워 열매를 맺는 건 불가능하다고 비유했다. 그녀는 아이를 낳지 못한다는 건 여자에게 어떤 의미인지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어머니는 그녀를 속일 수 없다는 것을 알고, 나중에 좋은 사람에게 시집가서 부군에게 첩을 들인 후, 첩이 낳은 아이를 친자식처럼 키우라고 조언해주었다.시 씨 가문이라는 후원이 있으면 그녀가 아이를 낳을 수 없어도 아무도 그녀의 지위를 흔들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시 씨 가문의 재물은 그녀가 평생 부귀하게 살기에 충분했다. 신이의 조모도 그녀에게 아이를 낳을 수 없으니 자세를 낮춰야 한다고 했다. 시 씨 가문의 딸이라고

  • 봄에 전장의 꽃이 피어난다   제1584화

    추운 겨울이 되자 눈이 내려 성릉관은 하얗게 뒤덮였다. 세상이 마치 깨끗해진 것처럼 보였다. 이황자는 몇 년 동안 너덜너덜한 승복을 입고 발우를 받쳐 들고는, 가는 길에 동냥을 하다가 절을 보면 이틀 묵으며 부처님께 참회하면서 살았다. 사실 그는 원래 있던 절에서 계속 지낼 수 있었다. 편안하진 않지만 풍찬노숙할 필요도 없고 굶주림과 추위에 시달리지 않아도 되었다. 하지만 그런 안일한 곳에서는 평생 죄를 씻을 수 없다고 생각했고, 계속 길을 걷고 계속 고생해야 마음이 조금이나마 편했다. 그가 성릉관에 도착했을 때 짚신은 이미 찢겨 있었고 발바닥에는 두꺼운 굳은살이 박여 있었다. 이제는 신발을 신지 않고도 자갈이 가득한 길을 걸을 수 있게 되었다. 이런 추운 날씨에는 모든 옷을 껴입어도 추위를 막을 수 없었지만 이미 익숙해진 뒤였다. 그는 눈보라를 맞으며 성릉관에 위치한 감은사로 향했는데, 몇 년 동안 발걸음을 멈춘 적이 없는 탓에 고단함이 뼛속까지 스며들었다. 심지어는 이틀 동안 아무것도 먹지 않아 그는 눈이 가득 쌓인 길에서 의식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그리고 깨어났을 때 그는 따뜻한 두꺼운 이불 속에 누워 있었다. 그가 있는 방에는 숯불이 피워져 있었고, 살짝 열린 창문으로 눈에 눌려 허리가 굽은 나뭇가지가 보였다. 그는 눈동자를 돌려 주위를 둘러보았다. 이렇게 편안하고 따뜻한 느낌은 정말 오랜만이었다. 그의 마음속에 순간 욕심이 생겨 조금만 더 누워있고 싶어졌다. 그런데 바로 그때, 문이 활짝 열렸다. 그가 벌떡 일어나 앉았는데, 갑자기 눈앞이 핑핑 돌더니 다시 힘없이 침대로 쓰러지고 말았다. “움직이지 말고, 가만히 누워 있거라.” 이때 누군가가 부드러운 말투로 말하면서 약그릇을 그의 침대 옆에 놓았다. 그는 말하는 사람의 목소리가 익숙해, 어지러움을 가라앉히고 고개를 돌려보니, 그 사람은 얼굴에 미소를 띠고 있었다. “오랜만이야.” ‘서우 형?!’ 그는 자신이 잘못 보았을까 봐 다시 자세히 보려 했지만, 몸이 너무 어지러운

  • 봄에 전장의 꽃이 피어난다   제1583화

    대황자는 봄 사냥 때 숙청제에게 꾸중을 듣고 돌아간 후 앓아누웠다. 당시 이황자와 서우가 모두가 걱정했는데 덕비는 오히려 기뻐했다. 그는 이번 일을 겪으면서 황제폐하께서는 분명히 대황자를 싫어하게 될 것이라고 했다. 덕비는 이황자를 안고 반드시 부지런해야 하고, 태부와 황숙의 말을 잘 듣고 누구보다 잘 배워 황형을 제압해야 한다고 당부까지 했다. 그로 인해 이황자의 마음은 몹시 복잡했다. 덕비가 줄곧 그에게 태자와 황제가 되는 것이 얼마나 좋은 지 말해주었을 때 비록 그도 마음이 설렜지만 자신과 거리가 먼 얘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심지어 지금 그와 대황형, 서우 형, 그리고 셋째 동생이 사이가 좋아 도저히 대황형을 미워할 수가 없었다. 매일 모순적으로 지내다 보니 오히려 학업이 나빠졌고 승마 연습을 할 때도 여러 번 실수를 했다. 하지만 덕비는 이상하게 그를 탓하지 않았고 며칠 동안 계속 게으르게 하라고 했다. 그렇게 덕비는 이황자를 데리고 복마마를 자주 뵈러 갔고, 복마마 궁전에서 숙청제를 만날 수도 있었다. 덕비는 며칠 동안 그곳을 드나들더니 어느 날 굳은 표정으로 다시는 가지 않겠다고 말했다. 그러고는 차가운 말투로 청이에게 자신의 보살핌이 없으면 아이가 태어날 수 있는지 보겠다고 했다. 황제폐하를 자주 뵈러 갈 수 없어 아쉬웠지만 이황자는 마음을 가다듬고 공부와 승마술에 전념했다. 이황자는 당시 앞날이 어떻게 될지도 몰랐고, 비록 매일 힘들긴했지만 한편으로는 즐거웠기에, 계속 이렇게 지내는 것도 좋을 것 같다고 생각했었다. 그리고 숙청제의 천추세에 승마대회를 개최할 예정이니 세 황자와 서우도 가서 겨뤄 보기로 했다. 원래 그런 대회에서 황자들은 재미있게 참석만하면 되지만, 덕비는 그 경기를 몹시 중시했다. 덕비가 이황자에게 마름쇠를 건넬 때, 그는 하늘이 무너져내리는듯한 기분을 느꼈다. 이황자는 원하지 않았다. 그는 절대로 그렇게 하고 싶지 않았다. 대황형의 목숨을 앗으려 하다니, 이황자는 처음으로 어마마마가 무서워졌다.하

Explore and read good novels for free
Free access to a vast number of good novels on GoodNovel app. Download the books you like and read anywhere & anytime.
Read books for free on the app
SCAN CODE TO READ ON APP
DMCA.com Protection Statu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