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왕도 몹시 화가 났다."그년이 언제 죽든 상관없다. 만약 죽었다고 해도 한참 후에 알릴 생각이었다. 그런데 송석석이 이 모든 것을 망쳐버려서 태후와 황제께서 이 모든 것을 알게 되었는데 이제 나는 어떻게 진성에서 머리를 쳐들고 다닐 수 있겠냔 말이다!"장공주도 화가 치밀어 올라 이를 갈고 있었지만, 지금 상황에서는 그저 그를 달랠 수밖에 없었다. "당장은 건드리지 말고 참으시지요. 그들이 막 공을 세우고 돌아온 상태라 조정과 민간에서 명망이 높으니 예봉은 피하고 조용하게 군사를 모아야 하옵니다. 그리고 시씨 가문과의 혼사는 서두르세요. 시만자는 남강 전장에 나선 적 있는 자이니, 만약 그녀를 얻는다면 군사를 모으는 일이 한결 쉬워질 것입니다. 게다가 시씨 가문이란 배경에 적염문까지 돕는다면 언젠가 반드시 대성을 거두게 될 겁니다."그러자 연왕이 미간을 찡그리며 고개를 저었다. "시철진은 무성의해 보였다. 시만자는 만인의 사랑을 받는 자인데 그런 그녀를 첩으로 삼아 내 곁에 두겠다는 건 어려워 보인다. 게다가 그 어리석은 여인이 청목암에서 있었던 일도 알고 있을 터이니, 그녀 또한 동의하지 않을 것이다.""시만자를 얻지 못한다면, 시씨 가문의 다른 딸을 얻으세요. 그들도 그 도망간 고모가 남긴 치욕을 씻어내고자 할 것입니다. 무기와 갑옷에 목표를 두세요. 게다가 시씨 가문은 북쪽 초원에 말 사육장도 소유하고 있사옵니다."거사를 치루려면 군과 말은 필수였다."지금은 비록 방탕하게 지내고 있지만 황제의 눈에 띄지 않고 있으니 시씨 가문의 여인을 얻더라도, 재물만을 탐하는 무능한 번왕이라고만 생각하게 만들어야 합니다. 다시 말해 주색재기중 하나도 빠져서는 안 된다는 인상을 심어야 하옵니다. 저는 먼저 사여묵을 의심하도록 만들 것입니다. 그리고 왕씨 가문은 지금 북명군을 장악하고 있으니..."장공주는 잠시 멈칫하다 다시 말을 이었다. "황제께서 왕씨 가문을 중용하려는 의도가 있는 것으로 보아 전북망을 키우려는 것 같으니, 전북망의 부인 쪽으로 손을
잠시후 진성에 있는 황족 친척들도 차례대로 궁에 도착했다. 회왕과 회왕비 그리고 장공주들도 부마와 자녀들을 데리고 왔기에 궁은 순식간에 시끌벅적해졌다. 그다음으로는 이미 시집간 장공주, 민지와 미우가 들어섰다. 그들은 모두 황제의 자매로, 민지 공주는 태후의 여식이고 황제의 누나였다. 미우 공주는 제귀태비의 딸로 황제의 여동생이었다.민지 공주는 어사대부의 차남 허낙천에게 시집갔다. 허낙천은 이름 그대로 낙천적인 인물로 예부에서 한직을 맡고 있었다. 허씨 가문은 목 승상 부인의 친정집으로 시와 예를 이어오는 가문이다. 강직하고 고집이 있었던 허창진은 황제와도 맞서 싸울 정도의 대단한 인물이었다. 공주에게는 공주 저택이 있었지만, 매달 초하루와 보름에는 허씨 가문에 가서 안부를 전해야 했다. 이는 며느리로서의 응당한 예의라며 허창진은 공주가 황족의 신분을 내세워 특별 대우를 받으려 하는 것을 쉽게 허락하지 않았다.그러나 민지 공주는 부마와 금실이 좋았고 게다가 태후의 가르침 덕에 조금의 거만함도 없어 허씨 가문의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미우 공주는 병부상서 이덕회의 조카 이유에게 시집갔다. 이유는 한직에 있으려 하지 않았다. 그는 공주를 도와 토지와 가게를 관리하고 있었다. 그는 누구보다 상업에 능한 인물이었다.송석석은 주위를 둘러보며 란이를 찾고 있었지만, 란이는 보이지 않았다.란이는 군주였지만 출가 후에는 시댁에서 설을 보내야 했다. 그 남편이란 작자는 고리타분한 성격의 소유자로 란이가 고생을 많이 했을 것이다. 송석석은 그 사람을 썩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다.그녀가 한창 생각에 잠겨 있던 그때 태후의 목소리가 들렸다."영안군주의 얼굴을 본지도 꽤 된 것 같구나."그러자 회왕비가 웃으며 대답했다.“란이가 곧 기쁜 소식을 전하게 될 것입니다. 지금 한창 태교 중이옵니다.""정말인가? 너무 잘 되었다." 태후는 몹시 기뻐했다."나도 어의를 보내 맥을 짚어보라고 하려던 참이었다. 식을 올리고도 많은 시간이 흘렀는데 아직도 소식이 없길래
잔치가 시작되기 전, 여인들은 한곳에 모여 이야기를 나누었고, 황제 또한 숙부와 형제들과 함께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민지 공주가 송석석의 곁에 앉으며 말했다. "네가 사여묵과 혼인할 때 내가 병으로 앓고 있어서 축하 자리에 가지 못하였다. 예물은 보냈지만 이 자리에서 언니가 사과를 해야겠다."누군가를 종래로 업신여기지 않는 그녀였기에 스스로를 장녀라 부르며 사과하는 모습에 송석석은 웃으며 말했다. "어찌 언니께서 사과를 하십니까? 예물을 보내 주신 것만으로 제가 감사해야지요. 이제 몸은 다 나으셨는지요?""아직 기침은 남아 있고 고열로 며칠을 고생했었다. 너와 사여묵이 혼인할 때에는 침대에서 일어나지도 못하였다." 민지 공주가 기침을 하자 시녀가 급히 귤차를 대령했다. 그렇게 몇 모금 마시고 나서야 기침이 잦아들긴 했지만 얼굴은 여전히 붉게 상기되어 있었다."몸 조심하셔야 합니다." 송석석이 걱정스레 말했다."알겠네!" 민지 공주가 고개를 연신 끄떡였다."네가 마음 써 주니 기쁘구나."그때 혼인 잔치에 참석했던 미우 공주가 웃음을 터뜨리며 불쑥 끼어들었다."그날 사여묵이 얼마나 긴장했는지 모를겁니다. 신부가 혹시라도 놀랄까 신방에 아무도 들어오지 못하게 하였지요. 그 모습에 석석이는 모두의 부러움을 한몸에 받았습니다."그러자 민지 공주는 눈을 흘기며 타박했다. "부마가 너에게 잘해 주지 않터냐? 네 눈썹을 그려 주느라 매일 아침 일찍 일어난다는 소문이 이미 진성에 퍼졌단다."그러자 미우 공주가 얼굴이 붉어지며 발끈했다."언니!"송석석이 자랑스러운 웃음을 머금으며 차를 들었다. 이런 화기애애한 분위기가 참으로 좋았기에 불편한 일들은 애써 무시하려 했다. 새해를 맞이하여 궁에서 조금이라도 근심 어린 표정을 보이는 것은 금기였으니 말이다. 다행히도, 그녀는 감정을 억누르는 데에 이미 익숙해져 있었다.여인들은 란이의 남편 량소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 자부심 가득한 탐화랑이 첩을 둘이나 들였는데, 그중 한 명은 인화루의
혜태비의 말에 자리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회왕비를 향해 경멸의 눈빛을 보냈다.회왕비는 아무렇지 않은 척하고 있었지만 내심 몹시 억울해하고 있었다. 말없이 송석석을 바라보는 그녀는 송석석이 그녀의 편을 들어주기만을 바랬다. 하지만 송석석은 그저 냉랭한 표정만 지을 뿐이었다. 그녀에게서는 아무런 감정도 읽을 수 없었다.회왕비는 결국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마음속으로는 조용히 분노를 품었다. 친이모임에도 불구하고 도와주지 않는다니 어머니께 미안하지도 않은가?모두들 한참 이야기를 나눈 후에야 장공주가 돌아왔다. 각자가 예를 갖춘 후, 모두 다시 자리에 앉았다.송석석도 두 사람 사이에 어떠한 갈등도 없었던 것처럼 그녀에게 예를 표했다. 장공주는 그녀보다 더 능숙하게 감정을 감췄다. 그녀는 일부러 송석석에게 관심어린 따뜻한 눈빛까지 보냈다.태후가 영태비의 상태를 묻자, 장공주가 답했다. "건강은 조금 나아지셨으나, 오늘 밤은 함께 송년하지 않으시겠다고 하셨습니다. 날씨가 추워서 상태가 더 나빠질까 염려하셨습니다.""그래, 내가 의사를 불러 더 신경 쓰도록 하겠다. 너도 너무 걱정하지 말거라." "감사드리옵니다, 황후마마." 그때쯤 잔치가 시작될 시간이 되어 궁인들이 모두 자리에서 일어나 태후를 모시고 군화전으로 향했다.황제와 황후는 사람들 앞에서는 화목하고 다정한 부부의 모습을 보여주려 노력했다. 비록 모든 이들이 황제가 현재 가장 총애하는 이가 수민임을 알고 있었지만, 오늘 밤만큼은 수민도 황제와 황후의 다정한 모습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하여 황제의 시선이 북명왕 부부를 향한 것도 목격할 수 있었다. 그들과 반면 북명왕 부부는 너무나 다정했다.둘은 함께 앉아 있었는데 궁인이 음식을 가져올 때마다 북명왕이 왕비에게 음식을 덜어주고, 왕비가 싫어하는 음식은 다시 자신의 그릇에 담았다.그들을 바라보는 황제의 눈빛이 매우 복잡해 보였지만 황제는 이내 평정심을 되찾았다.그 광겨을 바라보고 있는 수민은 황제가 한때 송석석을 후궁으로 들이려
그의 아들은 군왕으로 봉해져 봉지에서 비교적 평온한 삶을 보내고 있었다. 그가 혼자 진성에 돌와온 것은 외로운 노년을 보내고자 함이 아닌 그도 자식들과 손주들이 곁에서 함께 지내기를 바랄 뿐이였다. 다만, 사람이 늙으면 낙엽이 지듯 고향을 찾게 되는 것이고, 동시에 황제께도 보여주려는 것이다.그가 진성에 머물고 있으니, 그의 자손들이 절대로 이심을 품지 않을 것임을 증명하려 한 것이다.그는 자손들을 믿었다. 하지만 그가 이미 간파한 바와 같이 누군가는 야심을 품고 지방의 번왕이나 군왕들을 끌어들이려 했다.그래서 그가 그렇게 서두른 것이고, 그렇게 돌아오겠다고 한 것이었다.오늘 밤, 사여묵을 부른 것은 이 노인이 할 수 있는 일은 이 정도가 최선이라는 말을 해주고 싶었다. 그것이 술기운으로 경고했다고 해도 좋고 암시라 해도 상관은 없다.그는 마지막으로 사여묵의 어깨를 건드리며 말했다. "네 처자가 참으로 마음에 든다. 조만간 데리고 와서 절을 올리거라."사여묵은 웃으며 대답했다."예, 꼭 그렇게 하겠습니다.""그럼, 나는 이제 가겠다!"휘왕이 자신의 수염을 쓰다듬으며 크게 웃었다. 그의 발걸음은 매우 안정적이어서 누구의 부축임도 필요하지 않았은 듯했다. 그 모습은 절대 취한 걸음걸이가 아니었다.사여묵이 뒤돌아서자, 거기에는 서우의 손을 잡고 다가오는 송석석이 있었다. 그녀에게 다가간 그는 늘 그랬듯이 다정하게 그녀의 손을 잡았다. "춥지 않소?""춥지 않습니다. 술을 몇 잔 마셨더니 몸이 따뜻합니다."송석석이 술을 즐긴다는 것이 아니다. 단지 술을 권할 때만 몇 잔 마셨을 뿐이었다.그러다 그녀가 다시 덧붙였다. "오히려 어머니께서 많이 드셔서 오늘 밤에는 궁에서 태후와 함께 밤을 보내시겠다고 하셨습니다. 한녕도 함께 머물기로 했어요.""그대로 두게." 사여묵은 그녀의 손을 잡고 그녀는 서우의 손을 잡았다. 셋은 그렇게 함께 오순도순 궁을 떠나 왕부로 돌아갔다.한편, 왕부는 오늘 밤도 북적였다.신만자와 몽동이라는 손님이
시끌벅적하던 밤이 자정이 지나자 서서히 고요 속에 잠겼다. 모두들 피곤해져 각자 방으로 돌아가 잠자리에 들었다. 서우는 오래전부터 이미 지쳐 있었지만 억지로 버티고 있었다. 몽동이가 그런 그를 안고 방으로 갔다.사여묵도 송석석을 품에 안았다. 따뜻한 이불 속 온기가 그녀의 마음도 따스히 녹여주길 바랐다.송석석이 무언가 말을 할 줄 알았으나 그녀는 아무 말 없었다. 그녀는 그저 그의 품에서 조용히 숨을 고르고 있었다. 사여묵은 그녀가 이미 잠들었는지 아닌지를 알 수 없었다.송석석은 잠들지 못했다. 그녀는 잠을 이룰 수 없었다.그저 움직이고 싶지도, 말하고 싶지도 않았다. 어떤 것들은 꾹 참고 견뎌야 한다며 시간이 지나면서 모든 아픔이 사라지기를 기다리는 것이 그녀의 방식이었다.하지만 전과 다른 것이 있다면 이제는 진심으로 그녀를 아껴주는 사람이 있다는 점이었다.사여묵은 마음이 아팠다. 그는 그녀가 너무 걱정되었다.그녀는 행복하면 항상 그를 향해 환하게 미소를 지었지만 슬플 때에는 그에게 눈물을 보인 적이 없었다. 항상 그렇게 슬픔을 숨기면서 그에게는 이성적이고 차분하며 미소를 유지한다.사여묵은 황제에게 조금은 미웠다. 그는 본래 남강에서 돌아오면 송석석과 천천히 감정을 쌓은 후 정식으로 청혼할 계획이었다. 하지만 황제의 한마디로 그들의 혼사는 불가피한 것이 되고 말았다.’그나마 다행인 것은 그에게 청혼할 마음이 있었음을 알게 되어서 적어도 그가 진심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송석석은 날이 밝아서야 잠이 들었고, 혜태비가 궁에서 돌아오지 않았기에 일찍부터 인사를 올릴 필요는 없었다. 하지만 결국 뜬금없는 폭죽 소리에 잠에서 깨고 말았다. 한참 멍한 상태로 침대에 누워있던 그녀는 결국 자리에서 일어나 옷을 갈아입었다.그러자 보주가 들어와 그녀의 머리를 빗겨주었다. "장군께서는 이른 아침부터 정원에서 손님을 접대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관리라고 하였습니다."“부인들도 왔느냐?” 송석석이 물었다. 왕부의 주모로서, 부인들이 오면 그녀도
잠시 생각에 잠기던 송석석이 대답했다. “보통 여자들이 이런 생각을 했다면 이해할 수는 있어. 하지만 너희 시씨 가문은 다르잖아. 명색의 명문가에 백 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가문이고 고모 때문에 혼삿길에 걸림돌이 생기긴 했지만 이미 아무나 범접할 수 없는 가문인데 뭘 더 높게 오르려 하는 거야? 기준을 낮춰 남편이 권력을 가진 가문에서 살면 오히려 더 편안하지 않아?”“그래서 내가 어리석다고 하는 거야.” 시만자가 송석석에게 동주 귀걸이를 걸어주며 말했다. “연왕이 시씨 가문을 노리고 있는 건 그리 단순한 일이 아니라고 생각해. 오늘 아침 일찍 이미 진성을 떠났고 너의 고모의 장례도 어떻게 처리할지 모르겠어.”“사람들을 붙인 거야?” 송석석이 물었다.“맞아, 감시하고 있어.” 시만자가 송석석의 얼굴을 만지작거렸다.“좀 웃어봐. 요 며칠 동안 네가 웃는 걸 본 적이 없어. 만약 나에게도 자손들이 있다면 난 그들이 매일 웃기를 바랄 것이야.”송석석은 신만자의 손을 살짝 쳐냈다.“남편도 없으면서 무슨 자손을 바라긴 바래?”“세 발 달린 개구리는 찾기 어렵다지만 두 발 달린 남자는 쉽지 않겠어?” 시만자는 입으로는 그렇게 말하면서 한편으론 무기력한 표정을 지었다. 그녀는 결혼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송석석은 시집을 잘 가긴 했지만, 왕실의 자질구레한 일들로 편하지만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신만자에게 어울릴만한 남자는 없었다. 새해 첫날은 초대하고 초대받으면서 그렇게 순조롭게 지나갔다. 그렇게 다가온 정월 대보름에는 더욱 많은 축제와 행사들이 있었고 사여묵은 조금 늦은 시간에 불꽃놀이를 보러 가자고 했다. 하지만 오후가 되자 우박이 내리기 시작했다. 큰 우박에는 재해가 뒤따른다.사여묵은 대리시경이긴 했지만 동시에 경위 지휘사였기에 눈코 뜰 새 없이 바삐 돌아쳤다. 그러면서도 사람들을 보내 송석석의 안전까지 살폈다.날씨는 너무 추워서 뼛속까지 에이는 듯한 느낌이었다. 뒤뜰에 있던 매화나무들은 우박에 쓰러졌다. 그것은 혜태비가 이식해 놓은
이미 너무 지쳤던 노인순은 왕부에서 차린 따뜻한 차와 죽을 두 그릇이나 비운 후, 한 그릇 더 줄 수 없는지 물었다. 그 말에 송석석은 만 냥의 은표와 따뜻한 죽을 탁자 위에 내려놓았다. 전강후부 노부인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고개를 들어 송석석을 바라보던 그녀의 눈은 어느새 촉촉해졌고 손과 입술이 떨리기 시작했다. 이틀 동안 돈을 모았지만 겨우 칠백 냥이었다.노인순이 감동에 겨워 말을 잃고 있을 때, 옆에 있던 혜태비가 말했다. “여봐라, 은표를 담을 상자를 가져오거라. 그리고 이 부인께 그 중 2만 냥을 드리거라.”며느리가 하는 일이니 그녀가 당연히 지지하는 것이다. 게다가 기부금이 두 배였기에 노인순은 너무 감격한 나머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눈물을 흘릴 뻔했다.“흥분하지 마시고 앉으세요.” 송석석은 노부인이 흥분한 나머지 혈압이 높아질까 걱정되었다. 그러면 일을 그르치게 된다.노인선의 손주 며느리들도 감정이 북받쳐 그만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그중 한 명이 끝내 참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사실 오늘 장군부에 갔었습니다. 본래 기부를 요구할 생각도 없었습니다. 그들도 연이어 결혼식을 올리느라 어려운 상황이라는 걸 잘 알았기 때문이지요. 단지 할머니께서 그 당시에 너무 지치고 목이 말라서 죽 한 그릇을 요청했을 뿐입니다. 그런데 문을 열자마자 이 부인이 나와 나이도 많으신데 거지꼴로 구걸하신다며 모욕적인 말들을 늘어놓았습니다. 할머니께서는 한 푼이라도 자신의 주머니에 넣은 적이 없는데 말입니다. 할머니는 자신이 모은 돈 대부분을 기부했는데 말이지요.”“그 입 당장 다물지 못할까!” 노인순이 단호하게 소리쳤다. 외출을 자주 하지 않았던 그녀지만 장군부와 북명왕비의 옛이야기에 대해 알고 있었기에 지금 그런 이야기를 꺼내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고 생각했던 것이다.할머니의 호통에 당황한 그녀는 곧바로 사과하며 말했다. “죄송합니다, 절대 의도한 건 아닙니다. 단지 태비와 왕비께서 두말없이 이렇게 많은 은표를 기부해 주신 것에 감사한 마음
문 앞의 이야기꾼들을 쫓아내고 나니 또 다른 골칫거리가 생겼다.이번에는 중매쟁이들이 번갈아가며 안여옥을 위한 것이랍시고 혼담을 들고 찾아온 것이다.그들이 말하는 혼처들은 안여옥의 부모의 얼굴을 울긋불긋하게 만들 정도로 황당한 인물들이었다. 평소에는 청혼은커녕 길에서 마주치더라도 침을 뱉고 지나갔을 법한 이들이었다.집안 배경이 나빠서가 아니라, 그들의 품행이 바르지 못했기 때문이다. 어떤 이는 통방과의 사이에서 이미 서장자와 서장녀를 둔 사람이었고, 어떤 이는 매일 도박장에 들러 두 눈이 빨개지도록 돈을 탕진하면서도 자리를 떠나지 않는 자였다. 또 어떤 이는 기루의 단골 손님이거나, 바깥에 첩을 둔 사람이었다.이들은 평소라면 감히 청혼하러 올 생각도 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하나같이 은혜라도 베풀듯 거만하게 굴며 안여옥이 자신들과 혼인하지 않으면 다른 길은 없을 것처럼 굴었다.안태부는 평생 이렇게 큰 화를 내본 적이 없었다. 그는 빗자루를 집어 들고 사람들을 쫓아냈지만, 결국 또 새로운 구설수만 만들어졌다.이 일에 대한 세간의 반응은 단 한 마디로 요약되었다.‘웃음거리.’"마치 그녀가 아직 선택할 여유가 있는 것처럼 굴지만, 누군가 그녀를 아내로 맞아주겠다고 나선 것만으로도 조상님 덕분이지.""그 더러운 남자에게 안겨 순결도 잃은 주제에 여전히 체면 따위를 챙기겠다고?""평생 시집가지 못할 팔자지. 누가 그녀를 데려가겠어? 빨리 머리 깎고 여승이나 되라지. 여자들 얼굴에 먹칠하지 말고."남자도, 여자도 가리지 않고 이런 말들을 쏟아내기 바빴다. 본인들이 당하는 일이 아니기에, 모두혀끝으로 상대를 아프게 하며 즐거워했다.이 모든 상황 속에서 가장 즐거워한 사람은 바로 제자예였다. 그녀는 원래부터 안여옥을 몹시 싫어했다. 황후가 그녀에게 안여옥을 괴롭히고 골칫거리를 만들라고 했을 때, 그녀는 이미 안여옥을 자신의 적으로 삼았다.그래서 이번에 안여옥에게 일이 터졌다는 소식을 들은 그녀는 친구 주창우를 찾아가 함께 안여옥 이야기를 하
연말이 다가오자 백성들은 설 맞이 장을 보느라 바빴다. 각 집안은 일손이 부족할 정도로 분주했다.하지만 분주한 만큼 사람들 사이의 교류도 늘어나게 되면서 온갖 소문이 무성하게 퍼졌다. 태후가 안여옥을 칭찬하며 내린 하사도 효과가 크지 않았고, 오히려 태후가 직접 칭찬한 것이 안여옥이 단순히 모욕만 당한 것이 아닐 거라는 의혹으로 이어졌다.심지어 이 의혹은 점점 사실로 되는 것 같았다. 마치 누군가 의도적으로 이 방향으로 여론을 몰아가는 듯했다. 북명황실이 나서서 공정한 말을 하거나, 당시 현장에 있던 이들이 나와 안여옥이 학생들을 보호하다가 그 인간에게 잠시 몸이 닿은 것뿐이라고 해명했지만, 백성들은 그런 말을 듣고 싶어 하지 않았다.백성들은 신을 만들어내기를 좋아했고, 신을 무너뜨리는 일에는 더욱 열광했다.과거 안여옥의 규수로서의 명성, 아름다운 외모와 뛰어난 재능, 훌륭한 집안 출신을 부러워했던 사람들이 이제는 그만큼 배로 그녀에게 악의를 퍼부었다.그녀의 과거까지 들춰내며 사실 그녀는 고고하고 자만하여 사람을 깔보고 학문이 부족한 동료들과는 어울리지 않았다고 말하거나, 장공주의 연회에서 사슴을 말이라 지칭하며 분명 그 그림이 심청화 선생의 작품이 아님에도 우긴 적이 있다는 이야기까지 나돌았다. 그 당시 안태부가 그녀를 사랑하는 마음에 할 수 없이 사슴을 말이라 칭했고 또 그것이 심청화 선생의 작품이라 주장했지만, 사실 현장에 있던 이들은 모두 비웃었다는 것이다. "심청화의 인장도 아니었는데, 그때 현장에 있던 사람들 중 누가 비웃지 않았겠어? 다만 체면을 봐서 들추지 않았을 뿐이지.”또한 그녀의 시와 그림이 명백히 표절이며, 이는 안태부가 그녀의 명성을 높여 북명왕과의 혼인을 성사시키기 위해 꾸민 일이라는 말도 있었다. 그러나 그 희망은 물거품이 되었고, 북명왕은 차라리 재혼한 여성을 선택할지언정 그녀를 선택하지 않았다는 소문이 돌았다.그녀는 이에 만족하지 못하고 차선책으로 방시원에게 시집가기를 꿈꿨으나, 방시원은 어리석지 않아 그녀의 속셈을
송석석이 궁에서 돌아온지 얼마되지 않아, 시만자가 급히 들어와 그녀를 한쪽으로 데려갔다.“여학 사건 말이야, 황제와 황후의 짓인 것 같아.” 시만자의 표정은 심각했고 눈에는 은근한 분노가 서려 있었다.송석석은 뜻밖의 소리에 깜짝 놀라며 물었다.“황제와 황후? 누가 그런 말을 했어?”“장기문이. 그가 황제가 황후에게 멋대로 굴었다고 꾸짖는 소리를 들었대. 황후는 변명하며 황제도 여학을 좋아하지 않으니 네가 진성의 권력 있는 명부들을 끌어들이지 못하도록 자신이 황제의 걱정을 덜어드린 거라고 했다는 거야.”송석석은 이 말을 듣자마자 온 몸이 얼어붙는 것 같았다.“냉정을 잃으면 안 돼. 이 일을 장기문에게서 들었다는 걸 들키면 그의 앞날이 망가질 거야.” 시만자가 말했다.송석석은 망연자실한 얼굴로 자리에 앉았다. 그녀도 과감한 추측을 해본 적이 없던 건 아니었다. 하지만 황제를 의심할 생각은 전혀 하지 않았다. 비록 황후에 대해서는 의심한 적이 있었지만 말이다.그리고 황후는 지금쯤 대황자를 위해 계략을 꾸미고 있어야 했다. 이럴 때 이렇게 세가를 적으로 돌려서 무슨 이익을 본단 말인가? 비록 이번 일이 매우 은밀하게 이루어지고 있지만, 애초에 이런 일을 계획했다면 그 결과도 충분히 예측했어야 하지 않았을까? 만약 그 작업반장이 죽지 않았다면? 혹은 그 작업반장이 다른 사람들에게 그 사실을 말해버렸다면?장기문이 한 말을 잠시 생각해보니, 황제 역시 여학의 존재를 탐탁지 않게 여기는 것 같았다. 그는 황후가 여학을 공격하려 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황후를 꾸짖은 이유는 여학을 공격한 행위가 아니라 그 방식 때문이었다.즉, 그가 화를 낸 건 수단 때문이지 황후의 행동 자체는 아니었던 것이다.송석석은 순간 자신의 마음이 차갑게 식어가는 것을 느꼈다. 황제의 생각을 도무지 받아들일 수 없었다. 지금도 사여묵을 부려 명절에 그를 노주로 보내면서, 그는 황제임에도 정작 그녀가 서원의 훈장이 되어 세가의 명부들과 교류하는 것을 경계하고 있었다.더욱 받
태후는 평소 정사에 크게 관여하지 않았으나 오직 이 여학만은 특별히 신경 쓰고 있었다. 심지어 그녀가 직접 명을 내려 세운 것이니 말이다.“혹시 여학에 다니는 학생들의 집안 내부에서 벌어지는 다툼일 수도 있지 않을까?”송석석이 묻자 염선생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다면 범위가 너무 넓어지겠지요. 하지만 가능성이 없지는 않습니다.”많은 집안이 겉으로 보기엔 본처와 첩의 사이가 화목한 것처럼 보이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겉모습일 뿐이었다. 첩은 아무리 귀한 첩이라도 본처 앞에서는 감히 건방진 모습을 보이지 못한다. 단, 한 가지 예외가 있다면 주군이 첩을 편애해 본처의 지위가 흔들릴 때이다. 이럴 때면 본처와 첩 사이의 갈등이 극에 달하고, 온갖 더러운 수단이 동원되기도 한다.본처와 첩이 각각 딸을 두었는데, 본처의 딸은 아군여학에 들어가고 첩의 딸은 들어가지 못하는 상황이 발생하기도 한다. 이는 아군여학에 정원이 제한되어 있기 때문이다.그러므로 첩이 본처의 딸의 명예를 망가뜨리기 위해 다른 이들까지 엮어서 함께 수치를 당하게 만드는 일도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이는 인식의 한계가 상황 판단을 흐리게 하고, 심지어는 자신이 하는 일을 완벽히 감춰졌다고 믿게 만들기 때문이다. 하지만 실제로도 꽤 은밀히 움직이기도 했다. 그러니 입막음으로 살인까지 한 것이 아니겠는가.만약 이러한 상황일 경우엔 조사해야 할 범위가 너무나 넓어진다.송석석이 벌떡 일어서며 말했다.“우선 경조부에게 그 작업반장을 조사하게 해야겠다. 그가 평소 어떤 사람들과 어울렸는지, 누구의 일을 봐준 적이 있는지 전부 다 알아보게 말이야. 그때 가서 상황을 좀 더 지켜보도록 하지. 그리고 여론도 안여옥을 도와줘야 하니, 내가 옷을 갈아입고 입궁해 태후께 이 일을 아뢰고 오겠다.”그녀는 쓴웃음을 지으며 말을 덧붙였다.“죄를 씻기 위해 찾아뵙는 셈이지.”유선생은 고개를 끄덕였다.“알겠습니다.”송석석이 입궁해 죄를 청하겠다고 하자, 혜 태비가 나서며 함께 가겠다고 말했다.“내가 함께 가
그녀는 돌아오는 길에 백성들이 이미 삼삼오오 모여 오늘 아군여학에서 일어난 일에 대해 수군거리는 소리를 들었다.여학과 공방은 원래 세간의 이목을 끌고 있었다. 그런데 이제 이런 큰일이 터졌으니 떠들썩 하지 않을 수 없었다.더군다나 이 일은 태부의 손녀의 명예와 관련된 것이었다. 그 귀하디귀한 여인이 한 상스럽고 천한 자에게 농락당했으니, 앞으로 어느 집안의 자제가 감히 그녀를 아내로 맞이하려 하겠는가? 많은 사람들이 그녀가 어리석다고 말했다. 고귀한 집안의 규수로서 조용히 살면 될 것을 굳이 여부자가 되겠다고 나서더니, 이제 평생을 망쳐버렸다고 말이다.송석석은 일부러 말을 천천히 몰며 백성들 입에서 안여옥이 학생을 보호했다는 칭찬의 말을 듣고 싶었으나, 안타깝게도 그런 말은 한마디도 들을 수 없었다.그녀는 마음이 몹시 아프기 시작했다. 현갑군 지휘사를 맡게 된 이후로 그녀는 여러 어려움을 겪었다. 암살을 당할 뻔한 적도 있었으며 모든 일을 늘 완벽하게 해낼 수 있던 것도 아니었다. 공방 역시 수많은 난관에 부딪혔지만, 그 모든 일에도 그녀는 무너지지 않았다. 뭐든 서두르지 않고 최선을 다하면 언젠가 나아질 것이라 믿었기 때문이다.그러나 이번 일은 그녀의 정신을 송두리째 무너뜨려 버렸다. 이건 일어나서는 안 될 일이었기에 그녀는 자신이 한없이 원망스러워 스스로 자책했다. ‘조금만 더 잘 대비했더라면...... 어쩌다 이렇게 경계심을 놓아버린 걸까? 사여묵이 진성을 떠난 이후 이별의 슬픔에 잠겨 마음이 흐트러져서 경계를 소홀히 했던 걸까?’그녀는 개인적인 감정에 휘둘려 발생할 수 있는 위기를 예측하지 못했다. 아니, 어쩌면 예측했음에도 예방하지 않았던 것일지도 모른다.황실로 돌아온 그녀는 홀로 의사당에 앉아 그렇게 한참을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염선생이 급히 돌아왔다. 그 역시 이 일을 듣고 경조부에 가서 알아보았다. 왕비가 이렇게 빨리 돌아오지 않을 거라 생각했는데, 막상 황실에 도착하니 왕비가 의사당에 쓸쓸히 앉아 있는 모습을 보았다.염
범인들은 겁에 질려 덜덜 떨고 있었으며 특히 안여옥을 침범하려고 했던 진한은 통곡하면서 부러진 다리로 무릎을 꿇은 채 송석석과 공 대인에게 애원했다.“소인이 잘못했습니다. 소인이 죽을 죄를 지었습니다. 다시는 돈 때문에 이런 짓을 저지르지 않겠습니다. 제발 한 번만 너그럽게 용서해 주십시오. 집에 아픈 아버지도 있고 셋째를 임신한 아내도 있습니다. 제가 이렇게 끌려가면 제 가족들은 어떡합니까?”진한은 절망스러운 목소리로 울부짖었지만 공 대인은 차갑게 명령할 뿐이었다.“끌고 가!”아무리 힘들고 괴로운 사연이 있는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그건 절대 범죄를 저지르는 이유가 될 수 없었다.그렇게 잔뜩 모여 있던 사람들이 뿔뿔이 흩어지고 여학은 다시 쥐 죽은 듯이 조용해졌으며 한데 둘러앉은 사람들은 아무도 먼저 말을 꺼내지 않았다.홍현은 말없이 난로를 피웠고 서원 안은 순식간에 따뜻해졌다. 서원안에는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국태 부인과 정씨 부인 그리고 무씨 아가씨와 안여옥, 송석석에 이어 홍현까지 말이다. 한편, 송석석은 이내 죄책감에서 벗어나 정신을 번쩍 차렸으며 계속 미안해하고 있기만 해서 해결될 일은 아니다. 너무 많은 명문 가문과 관직자의 딸이 연루되어 있기에 반드시 확실하게 처리하여 하루 빨리 그 결과를 보여줘야 한다.유일하게 피해를 입은 안여옥도 떠나지 않고 함께 방법을 고민했다.사실 송석석은 조금 전에 사람들에게 일단 집으로 돌아가라고 했고 자신은 염 선생에게 찾아가 앞으로 어떻게 해야 상해를 최소한으로 낮출 수 있는지 상의해보려고 했지만 다들 끝까지 서원에 남아 있겠다고 했다.안여옥의 마음도 위로해야 할 뿐더러 어떻게든 힘을 보태서 곧 외부에 터진 소문을 막고 싶었다.이 일이 안여옥에게 얼마나 큰 상처를 입힐지 다들 잘 알고 있었으며 내일만 되면 안여옥에게 악언과 유언비어들이 폭우처럼 쏟아질 것이다.안여옥이 피해자라는 사실은 아무도 신경 쓰지 않을 것이었다. 그저 그녀가 남자에게 몹쓸 짓을 당할 뻔했고 순정을 잃었다는 말만 떠돌
송석석은 속으로 너무 미안한 기분이 들었다. 며칠 동안 남풍관 일로 밤에도 외출해야 했기에 아군 서원에 신경을 많이 쓰지 못했기 때문이다. 심청화는 전에도 계속 여학을 주의 깊게 지켜봐야 한다고 당부했는데 송석석이 여학에 사람 몇 명만 더 보냈어도 이런 사고가 일어나지는 않았을 것이다.경조부의 공 대인이 직접 현장에 출동한 걸 보면 경조부에서는 이 일을 매우 중시한다는 뜻이다.총 여섯 명의 범인은 전부 밧줄에 묶여 있었고, 뺨 몇 대를 때리자 안여옥을 침범하려고 했던 남자를 제외하고는 다들 정신을 번쩍 차리고 사실대로 순순히 자백했다.범인 여섯 명은 부둣가에서 막노동을 하는 사람들이었고 매일 무거운 물건을 나르면서 돈을 벌었지만 한 달 내내 쉬지 않고 일을 해도 푼돈밖에 받지 못했다.어젯밤, 부둣가 주인장이 작은 술자리를 마련했고 아홉 명이서 둘러 앉아 술을 마셨으며 그러던 중, 누군가가 그들에게 맡길 일이 있다고 하면서 일이 순조롭게 진행되면 인당 50냥을 줄 수 있다고 했다.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아군 여학에 쳐들어가 난동을 부리는 것이며 딱히 할 것도 없이 그저 여학생들에게 겁만 주고 뒷문으로 빠져나가면 된다고 했다.매일 부둣가에서 일하고 있는 남자들도 마냥 순진하지는 않았기에 이렇게 쉬운 일을 하고 많은 돈을 준다는 게 이상하게 느껴졌다. 하지만 50냥이란 그들이 하루도 쉬지 않고 2년을 넘게 무거운 물건을 날라야 벌 수 있는 돈인데 여학에 쳐들어가는 것만으로 그 큰돈을 준다고 하니 마음이 흔들리지 않을 수가 없었다.그들 중에서 두 명은 거절했고 부둣가 주인도 당연히 거절했으며 나머지 여섯 명은 잠시 고민하다가 이내 동의했다.그렇게 하룻밤이 흘렀고 여학으로 쳐들어오기 전에 부둣가 주인은 그들에게 술 한 잔씩 먹였으며 절대 긴장하지 말라고 그들을 다독였다.그들 중에는 진한이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평소에도 겁이 제일 많았기에 불안한 마음에 술을 벌컥벌컥 들이켰다.아버지가 병상에 누워있고, 아내는 셋째를 임신한 상태라 진한은 돈이 매
송석석은 차분하게 질서를 잘 정돈한 뒤, 학생들과 부모님들을 저택으로 돌려보냈고 비밀을 지켜달라는 얘기도 하지 않았다. 어차피 이 일은 언젠가 소문이 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그러고는 홍현에게 청작과 경조부의 사람을 불러오라고 했다.이 범인은 약을 먹은 게 확실하기에 반드시 매달아서 심문해야 하며 청작을 통해 무슨 약을 먹었는지 확실하게 알아내야 한다.한편, 도망친 범인들도 오진에게 전부 잡혀왔고 그들은 묶여 있는 중년 남성보다 정신이 훨씬 멀쩡해 보였지만 송석석과 홍현을 쳐다보는 눈빛은 여전히 야릇하고 이글거렸다.송석석은 안여옥을 살포시 안아주었고, 이제서야 평정심을 되찾은 안여옥이 되레 송석석을 위로했다.“괜찮아요. 저 괜찮습니다.”“왜 그런 말을 했어요? 선생님은 지금 자신을 망가트린 거라고요. 이를 어찌하면 좋을까요?”국태 부인이 안쓰러운 표정으로 한숨을 푹 내쉬며 말했다.얼굴이 창백한 안여옥은 가까스로 미소를 지으며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국태 부인께서 제 걱정을 이리 하시니 그저 고마울 따름입니다. 하지만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전 애초부터 혼인할 생각이 없었고 저에게 있어서 명성은 그저 무거운 짐이었습니다. 이제 그 짐을 벗어 던졌으니 차라리 잘 된 일이지요.”“그렇지만 모든 화를 혼자서 떠안겠다고 하시니… 사람들이 선생님을 어찌 얘기하고 다닐지 걱정됩니다. 선생님 조부께도 어떻게 말씀을 드려야 할지…”국태 부인은 안씨 어르신과 오랜 인연을 이어왔다. 이번에 안여옥을 여학 선생으로 데리고 올 때에도 안여옥을 잘 보살피겠다고 했는데 이런 일이 벌어질 줄은 몰랐다.안 그래도 몸이 허약하신 안씨 어르신이 이 얘기를 들으면 충격에 쓰러질 수도 있을 것이다. 한편, 다들 안여옥을 위로하기 바빴고 안여옥은 많은 사람들에게 걱정을 끼쳤다는 생각에 얼른 웃으면서 말했다.“전 정말 괜찮습니다. 그리 큰일도 아니지 않습니까? 사람이 살면서 더한 일도 경험하게 될 텐데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닙니다.”안여옥은 연신 괜찮다고 했지만 사람
이때, 송석석이 서원 안으로 들어왔다. 그녀는 조금 전 밖에 있을 때부터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알고 있었다.송석석이 나타나자 부인들은 우르르 몰려가 송석석에게 이제 어떻게 해야 하냐고 닥달했다. 감히 대놓고 따져 묻지는 못했지만 송석석에게 합리적인 설명을 내놓으라는 뜻으로 말하고 있었다.송석석은 겉으로 태연한 표정을 짓고 있었지만 속으로는 분통이 터졌다. 여학 마지막 날에 이런 일이 벌어지다니.오늘 서원 대문이 열려 있었던 이유는 학생들과 데리러 온 가문 사람들이 한꺼번에 우르르 몰려나올 때 다치지 않게 하기 위한 것인데 범인들이 이 틈을 노리고 학교 안으로 들이닥칠 줄은 몰랐다.이 일은 분명 여학을 겨냥해서 벌인 일이었다.“이 일은 제가 확실하게 처리하겠습니다.”송석석의 말에 부모들이 너도나도 한 마디씩 보탰다.“왕비님, 이 일을 어떻게 처리하실 겁니까?”“그러게요. 이렇게 많은 사람이 모였고 쳐다보는 눈이 이렇게 많은데 이 많은 입들을 다 단속할 수 있습니까? 소문이 이상하게 퍼지면 없는 사실도 있는 일처럼 만들어질 수 있습니다.”“여학에 호위병을 좀 많이 세워둬야 하는 거 아닙니까?”한편, 안여옥은 송석석이 궁지로 몰리자 얼른 눈물을 닦은 뒤, 벌떡 일어나 큰소리로 말했다.“여러분, 걱정하시 마십시오. 한 명도 다친 학생이 없습니다. 저 범인은 그저 저를 잠깐 껴안았을 뿐이지 다른 학생을 해치지 못했습니다.”안여옥의 말에 현장은 쥐 죽은 듯이 조용했고 다들 안여옥이 이 일을 이렇게 대놓고 얘기할 줄은 몰랐다.범인이 안여옥을 껴안은 게 사실이라고 해도 이를 숨겨야 하는데 어떻게 이렇게 많은 사람들 앞에서 대놓고 얘기한단 말인가?그러다가 소문이라도 나면 안여옥은 평생 사람들의 손가락질을 받으면서 살게 될 수도 있다.이때, 정신을 번쩍 차린 국태 부인이 다급하게 부인했다.“선생님은 범인에게 당하지 않았습니다. 함부로 그런 얘기하지 마세요. 범인은 선생님에게 손을 댈 기회가 없었습니다.”하지만 안여옥은 국태 부인의 말을 따르지 않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