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국의 정탐꾼(探子)들은 아주 오래전부터 있었다. 나중에 그들은 황태자에게 귀속되었다.황태자에게 일이 생긴 뒤, 정탐꾼은 가문의 여인들과 어린아이들을 죽였다. 황태자의 명성에 금이 갔고 정보기관(情報營)을 해쳤다.송회안은 존경할 만한 무장이다. 일가가 남강에서 목숨을 잃었다. 송회안과 장군들과 연관된 모든 이들이 목숨을 잃었다. 심지어 가노들까지 죽임을 당했다. 이토록 참혹하고 인도적이지 않은 일을 한 게 서경인들이다.그래서 이방이 마을 사람들을 학살했을 때, 반발하지 못했고 숨기기로 한 것이다.이방은 학살한 장본인이지만, 서경 정탐꾼들 역시 흉악한 짓을 저지른 것 마찬가지다. 피해를 본 건 송씨 가문이다. 서경 정탐꾼들은 최근 송씨 가문에서 유일한 생존자 송석석에 대해 들었다. 이방이 말했던 여 장군이다. 그들은 이방이 송석석을 밀어내고 전북망의 부인이 된 사실도 알고 있다.이 일은 서경과 무관한 일이지만, 송회안의 가문이 몰살당하고 송석석이 버림을 받은 건 서경인들과 어느 정도 연관이 있었다.3황자가 분노한 부분도 이것 때문이다. 서경인은 소위 말하는 짐승이 아니었다. 양국이 교전하고 싸우는 것은 병사들의 일이다. 송회안의 가족들, 남녀노소 불구하고 전부 몰살한 것은 서경 황실의 영원한 오점이다. 평생 지울 수 없을 것이다.그런 사람들에게 감히 송석석을 체포하라고 하는 이방이 좋게 보일 리 없다. 이방의 발언은 서경인들의 마음에 비수가 되어 꽂혔다. 오래전 송회안 가족 전부를 학살했던 일을 떠오르게 했다.뺨을 맞은 이방은 멍해 있었다. 곧이어 누군가 이방의 머리채를 움켜쥐더니 발로 그녀의 아랫배를 여러 번 걷어찼다. 그리고 다시 한 번 머리채를 움켜쥐어 고개를 들게 한 뒤 그녀의 뺨을 마구잡이로 내리쳤다. 그렇게 피떡이 될 때까지 맞은 이방은 정신을 잃을 것만 같았다.“끌고 가!” 3황자가 명령을 내렸다.선봉 어린아이들은 길을 열고 포로들을 끌고 시몬을 떠났다.시몬의 남쪽에는 사막이고 앞으로 계속 가면 끊임없는 산맥이 나
이방은 당황했다. 이진흥의 질문에 그녀는 가슴 한쪽이 허탈했다.“내 곁에 서 있는 게 서경 병사인 줄 알고 막았어요. 족자일 줄은 몰랐다고요.”이진흥이 화를 냈다. “거짓말하지 마. 적군이 어떻게 네 곁에 있어? 어쩜 핑계를 대도 그런 걸 대냐 말이야?”이방도 짜증을 냈다. “그만 하세요. 우리 모두 적군의 포로가 됐어요. 녹분성 사람들을 학살한 우리를 쉽게 놓아줄 리 없어요. 날 탓할 틈에 차라리 여길 벗어날 방법을 생각해 보는 게 낫겠어요.”이진흥이 대꾸했다. “학살하라는 명은 네가 내렸다. 네가 그 장수 놈이 민가에 숨어 있다고 했잖아. 네가 그놈이 평범한 백성으로 위장했을 거라고. 네가 전부를 죽이라고 했잖아.”이방은 그들의 대화를 밖에서 듣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해 큰 소리로 말했다. “몇 명만 처리하고 장수를 밖으로 끌고 나오라고 했지, 전부 죽이라고 하지 않았어요!”이 말을 들은 포로로 잡힌 병사들이 분노했다. “장군님이 전부 죽이라고 했잖아요! 그들의 귀를 베어 적군의 귀라고 하라고 했잖아요. 공로를 인정받기 위해 백성을 죽인 겁니다.”“장군님 명령 없이 저희가 어찌 감히 마을 사람들 모두 죽였겠습니까?”“그래요. 게다가 서경인들도 저희의 백성을 죽였기에 굳이 따지면 저희가 복수하는 거라고 했잖아요. 서경인은 저희 백성을 죽이지 않았다는 걸 나중에 돌아와서 알았습니다.”“이 장군이 정말 당당했다면 왜 저희에게 비밀로 하라고 했겠습니까? 자기가 어떤 짓을 하고 공을 인정받았는지 모르는 것도 아니잖아요.”“이 상황에서 인정을 안 하는 건 비겁한 행동입니다. 당신은 송 장군과 비교할 수 없는 사람입니다.”이방은 자신을 부정하는 사람들에게 화가 나 얼굴이 파랗게 질렸다. 그녀는 서경인들이 밖에 있다는 걸 인지 못하고 큰 소리로 말했다. “전쟁터가 얼마나 잔인한 곳인데, 전쟁터에서 백성은 언제든지 죽을 수 있다. 그들이 무고하게 죽었다고? 무고한 백성이라고? 그들은 서경인이다. 수십 년간 우리와 국경선을 두고 다툰 이들이
그러나 이방의 바람은 완전히 무너졌다.모닥불이 밖에서 피어올랐고 오두막 문이 거칠게 열렸다. 커다란 그림자가 바닥에 비쳤다. 상대를 압도하는 기운을 내뿜으며 천천히 들어왔다. 모닥불을 등지고 있어서 얼굴을 정확히 보지는 못했지만, 이방은 단번에 상대를 알아봤다.그 사람은 수란키다. 그녀와 평화 협정을 맺은 서경의 원수다.이방은 몸을 부르르 떨며 벽에 등을 바짝 기댔다. 겁먹은 얼굴로 수란키를 쳐다보았다.성릉관에서 협정을 체결할 때, 이 위풍당당한 남자는 사람들을 압도했다. 용맹한 남자는 시종일관 우아한 기운을 내뿜었다. 평화협정은 매우 순조롭고 빠르게 진행되었다.이방이 제안한 몇 개 조약에 수란키는 고민도 하지 않고 승낙했다. 수란키는 단 하나의 조건만 제기했다. 협정을 체결하면 즉시 인질을 풀어달라는 것이다.이방은 제발로 군공을 가져온 수란키를 호락호락하게 여겼다.지금처럼 음울하면서도 살기가 가득 찬 얼굴과 많이 달랐다. 이방은 자신의 앞에 서 있는 수란키가 사신(死神)처럼 느껴졌다. 그의 눈빛만으로 마음속에 두려움이 생겼다.수란키는 가죽 장갑을 벗어 뒤에 있던 병사에게 던졌다. 그리고 자신과 함께 들어온 3황자에게 말했다. “끌고 가서 수단 방법 가리지 말고 복수해. 이들은 잔인하게 네 형님을 괴롭혔다. 협정을 체결하던 날 그들의 얼굴을 전부 기억했다.”3황자가 이를 악물었다. “숙부, 알겠어요. 형님 대신 제가 복수할게요.”3황자의 시선이 이방에게 향했다. “이자는 어찌할까요?”수란키가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이 여인은 내가 직접 처리한다.”3황자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뒤에 있던 병사들에게 말했다. “저들을 끌고 나와. 내 두 눈으로 저들이 살려달라고 비는 걸 봐야겠다.”사람들은 얼굴이 거뭇하게 질렸다. 몸의 힘이 탁 풀려 예전의 위풍당당하던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 그러나 살려달라고 애원을 하지 않았다. 한편, 이방의 몸은 더욱 격렬하게 결렸다. “수... 수란키 장군님, 평화 협정을 체결했잖아요. 양국
오두막 문밖에서 비명이 들려왔다. 이방은 까무러칠 정도로 겁에 질렸다.밖으로 끌려나간 이들이 어떤 형벌을 받는지 이방은 알 것 같았다. 그녀가 포로로 잡아둔 젊은 장수에게 한 짓을... 정확히는 서경 황자에게 한 짓을 돌려받는 중이다.그들은 황자를 거세했다. 산채로 거세를 당한 황자는 지렁이처럼 바닥에서 꿈틀대며 몸부림쳤다.그가 비명을 질렀으면 그들도 더는 괴롭히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황자는 이를 악물고 어떤 비명도 지르지 않았다. 오기가 발동한 병사들이 돌아가며 상처 난 그의 몸에 오줌을 쌌다. 그리고 날카로운 검으로 피부를 여러 차례 그었다. 피와 오줌이 뒤섞인 황자는 바닥에서 고통을 감내했다.지나간 일들을 회상한 그녀는 반성은커녕 오히려 통쾌했다.그러나 황자가 겪었던 걸 곧 자기가 겪어야 한다는 공포감은 사라지지 않았다.수란키가 단검을 꺼내자 이방이 기겁했다. “안 돼, 오지 마!”수란키는 쪼그려 앉아 그녀의 몸을 묶었던 밧줄을 벴다. 겁에 질려 움츠러든 이방을 마주하고 있자니 그는 말로 형용할 수 없는 분노가 들었다.‘황자는 죽음 앞에서 두려움에 벌벌 떠는 짐승보다 못한 사람에게 굴욕을 당했다.’ 밧줄을 푼 수란키는 커다란 손으로 그녀의 머리채를 우악스럽게 잡고 밖으로 끌어냈다.피부로 느껴지는 추위와 두피로 전해지는 고통에 이방은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밖으로 나온 수란키는 그녀의 머리채를 잡고 한 바퀴 돌더니 공터로 던져버렸다.눈으로 뒤덮인 공터에 18명이 누워 있었다. 그들은 실 한오라기도 걸치지 않은 채 발가벗겨 있었다. 붉은 피가 흘러나와 어느새 피 웅덩이를 만들었다. 그들 옆으로 무언가 굴러떨어졌다. 남자는 거세를 당하고 처절하게 비명을 질렀다. 거세당한 이들은 비명을 지르며 꿈틀댔다. 똑같은 상황에서 황자는 한마디 비명도 없이 견뎠다.나중에 무수한 고문을 당한 끝에 비명을 지르긴 했다. 병사들은 그의 비명에 환호했다. 누군가의 자존심을 짓밟는 건 그들에게 매우 짜릿하고 통쾌한 일이었다.몸부림
계속해서 괴롭힘을 당할 줄 알았으나 이방은 다시 오두막에 끌려갔다. 다른 이들도 같이 끌려갔다.오두막 안에 숯불이 타올랐다. 나무 판자 사이로 거센 바람이 들어와 따듯하게 있을 수 없었지만, 약간의 온기는 얻을 수 있었다. 그들은 추위와 고통에서 조금이라도 벗어나기 위해 숯불로 기어갔다. 이방의 바지는 진작에 벗겨졌다. 다리 사이로 전해지는 고통 때문에 다리를 모을 수 없었다. 방 안이 따뜻했지만 피는 여전히 흘러내렸다. 그녀의 몸 아래에 피가 흥건했다.그러나 여기 있는 사람들 전부 고통에 몸부림쳤고 아무도 그녀를 신경 쓰지 않았다. 오두막 안에는 오로지 고통스러운 신음만 끊임없이 울려 퍼졌다.누군가 오두막에 들어왔다. 이방에게 약 한 사발을 건넸다. 그러나 약 사발 안에는 비릿한 오줌 냄새가 낫고 이방은 구역질이 났다.그러나 토하지 않았다. 괜히 오줌만 더 맞게 될까 봐 두려웠다. 수란키의 손에 들어온 이상 살 길은 없다. 그녀는 약 사발에 담긴 게 독약이길 바랐다. 이 상태로 버티는 것보다 차라리 죽는 게 더 좋을 것 같았다.약을 삼키자 3황자가 들어와 그녀를 주먹과 발로 구타했다. 온 몸에 성한 곳이 없었다. 그러나 다행히도 얼굴을 제외하고는 칼로 긁은 상처는 없었다.그녀의 얼굴에 어떤 글자를 새겼는지 알 수 없지만, 어차피 죽을 목숨이었고 얼굴에 새겨진 글자에 연연할 겨를이 없었다.바닥에 눕자 오장육부가 뒤틀리는 기분이 들었다. ‘장군님은 오지 않을 거야, 난 여기서 죽을지도 몰라.’상국의 여장군이 되어서 이런 죽음을 맞이해야 되는 게 억울했다.앞으로 송석석에게 몰릴 영광들을 생각하자 마음이 달갑지 않았다. ‘송석석은 나보다 출신 배경이 좋고 목숨이 나보다 조금 값지겠지.’ ‘나도 그런 출신이었으면 일찍이 공을 세웠을 거야.’송석석은 현갑군을 이끌고 서경군과 사국군을 뒤쫓아 철수하게 했다.전북망은 사람을 이끌고 송석석의 뒤를 바짝 쫓았다. 말 위에 올라탄 송석석의 수려한 뒷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어떻게 저리
송석석과 시만자가 모닥불을 쬐고 있었다. 전북망의 말을 들은 송석석이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무슨 근거로 이 장군이 사국인에게 잡혀갔다는 것입니까?”“그런 뜻은 아니오. 하지만 전투가 시작되자마자 이 장군이 서경 병사들을 뒤쫓았고 여태 돌아오지 않았소.”시만자가 차갑게 말했다. “그럼 도성에 깔린 시신들을 일일이 확인해야겠습니다. 거기에 있을 수도 있잖아요.”“그녀는 죽지 않았소.”전북망의 눈빛이 서늘하게 변했다. “북명군 전우들끼리 어찌 그런 저주를 할 수 있단 말이오?”시만자는 모닥불에 손을 쬐며 가소롭다는 듯 말했다. “전쟁은 끝났습니다. 그러니 전우도 아니지요, 그 여인이랑 같이 묶지 마십시오.”기가 찼던 전북망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전북망은 송석석에게 시선을 돌렸다. “내가 잘못했소, 이방과 무관하오. 만약 다른 장병이 포로로 잡혔어도 구하러 가지 않았을 것이오?”송석석이 되물었다. “만약 다른 장병이 포로로 잡혔다면 장군은 2만 명이나 되는 아군을 위험에 빠뜨리면서 후퇴하고 있는 수십만 명이나 되는 적군 부대를 쫓아갈 것입니까?”전북망은 말문이 막혔다. “그건...”송석석이 답했다. “장군께서 장병의 목숨을 소중히 여기는 건 압니다. 이 장군이 적군에게 포로로 잡혔다는 증거가 설령 있다 하더라도 그녀가 후퇴하고 있는 대부대에 있다는 걸 어떻게 확신하십니까? 그리고 국경선을 벗어나면서 뒤쫓을 수도 없습니다. 다른 장병이 위험에 처할 겁니다.”옆에서 이들의 대화를 조용히 듣고 있던 몽동이가 탐탁지 않다는 듯 말했다. “옳습니다. 게다가 이 일대에 많은 유목민이 살고 있습니다. 그들은 남강에 속하지 않지요. 만약 그들의 영지를 침공하게 되면 또 전쟁이 일어날 겁니다.”그는 유목민에 대해 잘 알지는 못했지만 누군가가 함부로 그들의 영지를 침입하면 큰 사단이 일어난다는 것은 알고 있다.전북망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이 상황이 답답했다. “송 장군은 계속 손 놓고 있을 거요? 포로로 잡힌 사람은 이방 한 사람이
화가 난 전북망은 송석석의 손을 거칠게 잡고 구석으로 성큼성큼 갔다. “포로로 잡힌 걸 알면서도 구하러 못 간다는 것이오? 그녀가 어디에 있는지 알고 있는 것이오?”시만자가 그에게 채찍을 내던졌다. 전북망은 움켜쥔 송석석의 손을 풀어주며 뒤로 한 걸음 물러섰다.시만자가 차갑게 말했다. “할 말이 있으면 일정 거리를 유지해서 하십시오. 가까이 붙지 마세요.” 전북망이 미간을 찌푸리며 시만자를 쳐다봤다. 그러나 시만자는 무공이 뛰어난데다가 그의 수하가 아니어서 관리하기 어려웠다. 애써 화를 억누른 전북망은 송석석에게 물었다. “어디에 있는지 알고 있소?”송석석이 고개를 저었다. “모릅니다. 사막 어딘가에 있을 수도 있고 초원이나 산속에 있을 수도 있습니다. 이 장군이 어디에 있든 우리는 현갑군을 보내 수색할 수 없습니다. 너무 위험한 일입니다.”“그럼 우린 여기서 뭘 기다리는 것이오? 그들이 포로를 돌려보낼 때까지 기다리겠다는 거요?” 전북망이 분노에 차서 소리쳤다.송석석의 눈빛이 어두워졌다. “네, 포로를 돌려보낼 때까지 기다려야지요.”전북망은 어이가 없었다. “미쳤소? 그들이 순순히 이방을 돌려줄 것 같소?”송석석이 싸늘하게 대꾸했다. “물론 쉽지 않겠지요. 세상에 어디 쉬운 일이 있겠습니까, 성릉관 협정도 쉽게 얻은 게 아니잖아요.”전북망이 멍한 얼굴로 물었다. “무슨 소리요?”송석석이 전북망과 시선을 맞췄다. “수란키가 성릉관에서 대군을 이끌고 녹분성에서 철수한 게 이 장군이 북명왕께서 남강 전쟁을 원조한다는 소문을 퍼뜨렸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건가요? 정말 그 말을 믿었다면 장군이 될 자격은 없는 것 같네요. 병사도 못 될 것 같습니다.” 전북망도 물론 의심을 했다.마지막으로 이방에게 물을 때 역시 의심은 하고 있었다. 하지만 지나간 일을 계속 붙잡고 있을 수도 없는 노릇이고, 협정도 체결됐기에 더는 따지지 않기로 했다.전북망의 목소리가 미세하게 떨렸다. “그러니까 수란키가 왜 이런 짓을 벌인 것이오? 알려주시
송석석은 장작의 불길이 서서히 줄어드는 것을 보고 장작 몇 개를 추가했다. 불길이 빠르게 마른 장작을 집어삼켰다. 일렁이는 불꽃이 그녀의 눈동자에 비쳤다. 순간, 송석석은 장군부에서 친정집으로 돌아오던 날, 집안에 널려있는 시체들과 핏자국을 봤던 날이 떠올랐다.가슴이 턱 막혀 제대로 숨 쉬는 것마저 힘들었다.송석석은 누구보다 이방이 죽기를 바랐다. 그러나 이방이 죽는다고 해서 모든 원한이 사라지는 건 아니다.그녀가 이런 생각을 할 정도면, 수란키도 그녀와 다르지 않을 것이다.수란키는 이방을 쉽게 죽이지 않을 거라는 걸 송석석은 알고 있었다. 원수는 송석석더러 여기서 대기하라고 했다. 수란키가 원수에게 소식을 전한 것 같았다.원수는 이리에 자신의 정탐꾼이 있다고 했다. 송석석 시몬에도 정탐꾼이 있을 것 같았다.결국 그들이 여기서 기다리는 건, 원수의 뜻이면서도 수란키의 뜻이기도 했다.밤늦게까지 기다리면서 졸음과 피곤함이 쏟아졌다. 다행인 것은 장작불이 활활 타올라 추위는 피했다.후방에서 병사들에게 식량을 보내왔다. 볶음밥일 뿐이지만 전쟁터에서 배를 채울 수 있다는 것만으로 충분했다. 방 장군이 사람들을 데리고 식량을 조달하러 왔다. 그는 송석석에게 원수의 군령을 전달했다.“계속 기다리시오. 경계가 풀릴 때 즈음 교대로 자면 된다고 했소.”“이렇게 많은 사람이 여기서 대기해야 한다는 거요?” 송석석이 물었다.“원수님은 필요하다고 생각하오. 상대를 쉽게 믿으면 안 된다고 했소.”송석석은 원수가 수란키와 단둘이 어떤 협정을 맺었다는 확신이 들었다. 원수는 모든 것을 알고 있었다.방 장군 역시 원수의 명령이 이해되지 않았지만, 군령이었기에 따르는 수밖에 없었다.식량을 전달한 방 장군은 다시 돌아갔다. 남강은 수복되었지만, 전쟁터의 시신들을 처리하지는 못했다. 희생된 장병의 시신을 수습해야 한다. 앞으로 해야 할 일이 많았다.전쟁의 승리는 그들에게 큰 기쁨을 가져다줬다. 그러나 기쁨은 항상 상실의 슬픔과 고통을 동반했다. 같이
송석석와 시만자는 궁을 나선 후, 시만자는 공방으로, 송석석는 여학으로 각자 향했다.이미 전에 제자예에게 더는 수작을 부리지 말라고 경고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또다시 문제를 일으킨 것이었다.국태부인은 송석석를 보자마자 그녀가 제자예의 문제를 해결하러 온 것을 알고 말했다.“그 아이는 학문에 뜻이 없는 듯하니, 차라리 퇴학을 권하는 게 어떻소? 스스로 떠난다면 보기 흉하지 않을 것이오. 어쨌든 곧 혼사를 준비해야 할 아가씨지 않소.”국태부인은 제자예의 집안을 신경 쓰는 것이 아니라 진심으로 그녀를 생각하며 말한 것이다. 만약 아군여학에서 쫓겨난다면 그녀의 명성에 큰 타격이 갈 것이 분명했다.국태부인은 여자아이들을 측은히 여기는 마음이 깊었다. 혼사 문제가 잘 해결되지 않으면 평생 후회로 남을 수 있기 때문이다.송석석이 말했다.“국태부인,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우선 그녀가 무슨 일을 저질렀는지부터 알아보고 이야기 해보겠습니다.”국태부인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크게 잘못한 일은 아니오. 그 아이와 벗들이 수업마다 소란을 피우며, 특히 여옥 선생 앞에서 더욱 심했소. 이에 따라 다른 학생들의 불만도 커졌고, 여옥 선생도 꽤 곤란해하고 있소. 선생도 나이가 젊으니, 이런 문제를 처리하는 데 익숙하지 않나 보오.”송석석이 잠시 생각했다. 여옥 선생은 문제를 처리할 방법을 알고 있을 것이다. 다만, 그녀 역시 단순한 학생들의 문제가 아니기에, 여학 자체를 흔들려는 의도가 있을 수도 있다는 것을 느꼈을 것이다. 이런 것은 그녀가 섣불리 나설 수 없는 문제였다.송석석는 먼저 여옥을 찾으려 했지만, 마침 제자예가 그녀의 두 친구와 향회옥과 주창우와 안에 있는 모습을 보았다.놀랍게도, 그들은 사과하러 왔다.제자예가 앞장서서 고개를 숙이고 진심으로 뉘우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철이 없어서 여옥 선생께 폐를 끼쳤습니다. 모두 제 잘못입니다. 선생이 처벌을 내려도 달게 받겠습니다. 앞으로는 절대 다시는 이런 일이 없을 것입니다. 벌을 내려주십시오
황후는 급격히 화가 치밀어 올라 잔을 내던지며 말했다.“정말 눈엣가시구나! 항상 나의 계획을 방해하기만 한다.”그러자 궁녀 란주가 옆에서 말했다.“마마. 북명왕비는 태후의 명으로 여학을 설립하고 아군여학을 도맡은 이후로, 경중의 부인들 사이에서 칭찬받고 있습니다. 지금쯤 경성의 반이 되는 명문가 부인들이 그녀를 존경하고 있으니, 정말 쉽지 않은 상대입니다.”제황후는 순간 지난 동짓날이 떠올랐다. 그날 명부들은 하나같이 송석석을 극찬하였다. 심지어는 북명왕 부부의 금실을 감탄하거나, 그녀의 능력과 역량을 치켜세우며 여인의 모범이라 말했다.‘송석석이 여인의 모범이라면, 나는 황후로서 뭐란 말인가?’이런저런 생각에 그녀의 마음속에는 질투와 분노가 더욱 치밀어 올랐다.“태후께서 한때 이방을 여인의 모범이라 하셨는데, 이제 그 명성을 송석석이 차지하고 있으니, 불쾌하지도 않은 것이냐?”궁녀가 말했다.“마마, 그녀는 지금 돋보이게 하는 데 열을 올리고 있어 한창 주목받고 있습니다. 지금 시기에 그녀를 건드리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하지만 만사가 극에 달하면 화를 입을 테니, 언젠가 그 관심이 화를 불러올 수도 있습니다. 게다가 태후께서 그녀를 지키고 있으니, 그녀와 대립하지 않는 것이 현명합니다.”황후가 차갑게 말했다.“태후께서 그녀를 지키는 이유는, 그저 송석석 어머니와의 사소한 옛정 때문 아니겠느냐? 여학은 태후가 하자고 하신 일이지만, 폐하는 그다지 동의하지 않으셨다. 그저 효도를 위해 마지못해 허락한 것뿐이지. 여학을 도맡아서 대단한 줄 아는 모양인데, 송석석이 글이나 알고 있느냐? 정말 우습지 않은가? 태후는 여학을 중시하신다. 여학이 제대로 운영되지 못해도 태후께서 그녀를 계속 지킬지 두고 보자.”란주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말했다.“제자예 아가씨를 여학에 들여보내 선생들을 곤란하게 했던 일이 태후의 귀에 들어가지 않아서 다행이긴 하지만, 더 심한 일이 벌어진다면 정말 태후를 노하게 할 수 있습니다. 그때는 폐하께서도 마마를 도와주시지 않을
황후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태후마마께서 그 아이의 이름까지 기억하시다니, 참 그 아이의 복입니다. 예. 자예 동생은 올해 갓 성인이 되었고, 열다섯 살이 넘었습니다. 그래서 숙모가 자예의 혼사를 의논하려고 저를 찾아오신 겁니다.”태후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그래, 나도 들었다. 숙모는 광릉후의 셋째 아들을 마음에 들어 하신다지? 나도 특별히 알아보았더니 재능도 있고 인품도 좋아서, 훌륭한 배필이라 할 만하더구나. 게다가 나이도 비슷해서 아주 딱 맞다.”그러자 황후의 얼굴이 순간 굳어졌다. 태후의 날카로운 눈빛에 자신의 속셈이 전부 간파된 듯한 기분이 들어, 어떻게든 수습하기 위해 더듬거리며 말했다.“혼사는… 신중해야 합니다. 우린 그렇다고 쳐도, 제자예의 마음에 들어야 하지 않겠습니까?”태후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네 말이 맞는다. 그래서 내가 직접 혼사를 정하진 않으마. 스스로 마음에 드는 상대를 찾게 하고 정말 마음에 든다면, 나에게 와서 혼사를 정해달라고 요청하게 하거라. 황후의 체면을 봐서라도, 내가 기꺼이 혼사를 내려줄 테니.”황후의 얼굴빛은 더욱 어두워졌다. 이는 분명 태후가 그녀가 혼사를 강요하지 못하도록 못을 박는 말이었다. 대체 누가 고자질을 한 것일까? 어제 금방 사람을 방씨 집안에 보냈고, 오늘 아침 오수인을 궁으로 불렀건만, 말 한마디 나누기도 전에 태후가 그녀를 불러서 경고했다. “딱히 다른 일은 없다. 그저 이번 일로 네 의견을 듣고자 해서 부른 것이니 돌아가 숙모께 전하거라. 네 동생이 스스로 마음에 드는 사람을 찾을 때까지 기다리라고 말이다. 혼사는 부모의 뜻만 따를 수는 없는 법이다.”태후는 황후를 돌려보냈다.황후는 자리에서 일어나 절을 하며 말했다.“예. 친정의 일로 태후마마께 심려를 끼쳐드려 송구드리며, 은혜에 감사드립니다. 저는 이만 물러가겠습니다.”란주는 황후에게 여우 털 외투를 걸쳐주었고 이내 두 사람은 함께 본청을 나섰다.황후가 떠나자마자, 송석석과 시만자가 병풍 뒤에서 모습을 드러냈
연 공공은 어음과 차를 받고도 입을 꾹 닫고 있었다.“마마를 뵈면 다 알게 될 것이네. 고명 부인께서 어찌 예를 어기시겠는가?“집사가 웃으며 답했다.“예. 공공의 말이 일리가 있습니다.“비록 그는 웃는 표정을 짓고 있지만 속으로 욕설을 퍼붓고 있었다. 정말 큰일이 아니라면 어찌 조금도 얘기를 알리지 않을까?송석석은 제자예가 소란을 일으켜서 오늘 여학에 가봐야 했다. 국태부인이 전날 밤 하인을 보내어 그녀에게 정리해 달라고 전했다.그녀가 막 문을 나서자마자 방씨 가문의 가마가 달려오는 모습이 보였다. 가마꾼들이 몹시 서두르는 걸 보니 급한 일이 있는 듯했다. 그녀는 걸음을 재촉하며 물었다.“방씨 가문에서 왔소?”가마 안에서 방 부인이 가림막을 걷으며 다급히 말했다.“왕비, 황후께서 숙모님을 궁으로 부르셨는데, 아마도 방시원과 제씨 가문 아가씨 제자예와의 혼사 때문인 듯합니다. 숙모께서 황후가 직접 명을 내리실까 봐 염려하셔서 도와달라고 하십니다.”송석석은 그 말을 듣고 다소 놀랐다.“제자예라면 아군여학의 그 제자예를 말씀하시는 겁니까?”“예. 어제 혼담을 보내왔지만, 숙모가 거절하셨습니다.”방 부인이 다급히 대답하자 송석석은 곧바로 상황을 이해하고 시만자를 불렀다.“태후께 문안을 드리러 궁에 가야겠다.”그렇게 두 사람은 말을 타고 궁으로 달려갔다.그 시각, 오숭인은 이미 마차에 올라 연 공공과 함께 궁으로 향하고 있었다.송석석와 시만자는 한발 먼저 도착해 태후를 찾아가 문안을 드렸다.태후는 평소 후궁들의 부담을 덜어주고자 매달 첫날과 보름에만 문안받았다. 그저 이른 아침, 숙청제가 문안을 드리고 갔을 뿐이다.송석석의 말을 들은 태후는 냉소하며 말했다.“함부로 혼담을 꺼내다니. 그녀의 속셈을 내가 모를 줄 아느냐? 제씨 가문은 분명 방시원의 병권을 빌려 큰 황자를 지원하려는 속셈이다.“큰 황자가 서우를 깔보고 난 후, 태후는 그에게 몹시 불만이었다. 아직 어리고 곁에서 스승이 가르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버릇없고 거만해 깔보지
사여령은 새로 부임했을 때 아버지에 관한 질문을 받을까 봐 매우 두려웠다. 그러나 며칠이 지나도록 사여묵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고, 물어보는 이조차 없어 점점 긴장이 풀렸다. 그 중 대리사 소경인 진이가 몇 마디 말을 건넸다. 그는 모든 일에 조언을 아끼지 않는 온화한 사람이었다. 사여령은 그에게 매우 감사하며, 모르는 것이 있으면 예의를 차리지 않고 바로 물었다.그는 태어나서 제대로 된 일을 해본 적이 없었기에, 감옥 관리자 일을 잘 수행해내고 싶었다. 그는 배워야 할 것도 많았고 수하의 옥졸들을 잘 관리해야 했으므로 매일 바빴다.사여묵은 진이에게 당분간 사여령에게 너무 많은 것을 묻지 말고 그가 제대로 업무를 처리할 수 있도록 도우라 했다. 사여령이 모르는 부분이 있으면 지원해 주고, 작은 성취를 통해 자신감을 얻은 후 스스로 판단해 선택할 수 있도록 하라는 것이었다.동지가 지나고 나서부터 중매쟁이들이 방씨 가문으로 몰려들기 시작했다.오수인은 방시원에게 부인을 찾아주고 싶어 했다. 자식 문제야 그렇다 쳐도, 그의 곁에서 그를 잘 챙겨줄 사람 한 명정도는 필요했다.오수인은 아들이 생사의 갈림길에서 살아 돌아온 후, 후손에 대한 기대는 크게 없었다. 오수인은 그저 아들이 평온하게 살아가길 바랐고,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왕청여 사건 이후, 그녀는 며느리를 선택할 때 가장 중요한 기준으로 품성을 꼽았다.이전에 혼담이 오갔던 집안은 비록 6품 관원의 딸이었지만, 덕목과 재능이 뛰어난 사람이었다. 하지만 왕청여와 노세진 사건이 터지면서 이 일은 무산되고 말았다.그 후 중매 얘기가 많이 들어오자, 그녀는 먼저 그들의 품성을 알아보고자 했는데, 그러던 중에 뜻밖에도 제씨 가문에서 먼저 혼담을 꺼낸 것이다.제씨 가문의 막내딸인 제자예는 갓 성인이 된 지 반년이 채 안 된 16세도 지나지 않은 나이었다.오수인은 그 얘기를 듣자마자, 품성을 알든 모르든 나이가 너무 어리다고 느꼈다.오수인이 원래 선택했던 아가씨는 모두 18세 이상이었다. 18세가 되도록 혼
노주라는 말 한마디에 사여묵과 송석석은 연회를 마치자마자 급히 북명황실로 향했다. 그들은 의사당에서 지도를 펼쳤다. 노주는 강남에 위치해 있고 당시 이왕의 봉지였다. 이왕은 문엄 황제의 형제였는데 오늘날은 진국장군이 되었다. 진국 장군은 봉호만 있을 뿐 병권은 없었다. 지금의 진국장군은 사청엽이었고 황가의 청짜 돌림이었다. 이제껏 조정의 봉록을 받고 살았지만 지금은 복지가 반 이상 줄었다고 했다. 전에 심사할 때도 그를 의심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노주는 비록 부유한 집안이긴 하지만 연주와 옹현에서 멀어 군대를 노주로 이동시키는 것은 꽤 곤란한 일이었다. 게다가 사청엽이라는 사람이 나쁜 일이란 나쁜 일은 다 하고 다녀 대대로 장악해 온 가업까지 망하기 일보 직전이었다. 예전에 그 사람에 대혼 조사에 따르면 그의 집에는 처가 32명이 있었고 미인 통방도 오 육십 명은 되었다. 그가 데려올 수 있는 미녀라면 사든 아니면 빼앗든 반드시 가져야 했다. 그래서 그는 현지 관아와도 관계가 좋지 않아 관아에서도 늘 골머리를 앓고 있었다. 1년 동안 그가 말썽을 일으키고 민녀를 강탈한 사건만 해도 수백 건이 넘었다. 하필이면 노주가 그의 봉지라 쫓아낼 수도 없고 맞서자니 아무리 그래도 진국장군이니 감히 그러지도 못했다. 그를 탄핵하는 상주서는 많지 않았다. 노주 지부가 3년에 한 번씩 바뀌는데 모두 황실의 체면 때문에 감히 보고도 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황제가 황실이라고 방임하면 나중에 자신의 벼슬길에 영향을 미칠까 봐 모두 참을 수밖에 없었다. 그랬더니 그가 나쁜 짓을 하도록 내버려 둘 수밖에 없었다.이때 염 선생이 말했다. “그에게는 특징이 하나 있는데 바로 횡포하다는 것입니다.” 사여묵은 잠깐 생각하더니 말했다. “한 사람이 가난이 극에 달하면 당연히 돈을 벌 방법을 생각해 내겠지. 하지만 요 몇 년 동안 그가 노주에서 빈둥빈둥 지내면서 친구는 거의 없고 손에 실권이 없으니 돈을 벌 수도 없겠지. 조사해서 그의 개인 마을이나 산이 있는지 알
“여령아, 무릎을 꿇거라.” 영태비가 갑자기 목소리를 높여 사여령에게 말했다. “불효자식아, 어서 왕비에게 용서를 빌거라! 그녀는 너의 사촌 여동생이기도 하고 사촌 형수이기도 하다. 그녀가 너를 용서해야 하늘에 계신 네 어머니의 영혼에게 할 말이 있지 않겠느냐?” 사여령이 무릎을 꿇으려 하자 송석석은 그를 째려보며 말했다. “어디 한 번 감히 무릎을 꿇어보십시오.” 그녀의 차가운 말에 사여령은 굽으려던 무릎이 뻣뻣해졌다. 송석석은 영태비에게 말했다. “태비마마께서 다른 일이 없다면 저는 그만 물러나겠습니다.” 그녀는 말을 마치고 성큼성큼 밖으로 나가자 영태비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왕비, 앞으로 무슨 일이 있어도 우리 손자와 손녀를 보호해 주게.” 송석석은 제 자리에 서더니 고개를 돌려 차가운 말투로 말했다. “태비마마께서 정말 보살님이십니다. 하지만 저희 사촌 이모께서는 태비의 연민을 받아본 적이 없지요. 그러니 그들도 누군가의 연민과 보호가 필요 없을 것입니다.” 태비는 울며 소리쳤다. “왕비님, 아무리 그래도 친척인데 어떻게 상관하지 않을 수 있단 말입니까?” “그들이 나쁜 짓을 하지 않는다면 왜 보호가 필요하겠습니까? 황가의 자손이 거지라도 될 수 있단 말입니까? 태비마마께서 괜한 걱정을 하신 것 같습니다. 만약 태비마마께서 괜한 걱정을 한 것이 아니라면 이런 말을 내가 아니라 손자들에게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송석석은 더 이상 말을 하지 않고 성큼성큼 떠났다. 사여령은 쏜살같이 쫓아나가 그녀를 막았다. “사촌 동생아.” “당신이 내 사촌 이모의 친아들도 아닌데 사촌 동생은 무슨!” 송석석은 줄곧 사여령을 미워했다. 연왕에겐 아들이 세 명 있는데 가장 밉살스러운 것은 그가 아니었지만 첩이 낳은 아들이었다. 그래서 사촌 이모가 그를 키워줬는데 효의가 조금도 없다니. 살아있을 때 효도한 적도 없으면서 죽은 후에야 울고불고하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사촌 동생. 나는 그저 미안하다는 말을 하고 싶을 뿐입니
말을 하고 있을 때, 영태비가 사적으로 사람을 보내 송석석을 초대했다. 송석석은 태후마마의 허락을 받은 후에야 그곳으로 향했다. 영태비는 문엄 황제의 빈이라 아들을 따라 봉지에 가서 복을 누려야 했지만 지금은 궁궐의 외딴곳에 홀로 남아 생활을 했다. 송석석이 고 공공을 따라 영수궁에 발을 들여놓았을 때 설 분위기라고는 조금도 찾아볼 수 없었고, 심지어는 몇 개의 전각이 아닌 하늘과 땅을 사이에 두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겨울이 되자 영태비의 병세가 악화되어 연왕의 아들인 사여령이 진성에 남았는데 오늘 입궁해서 조모의 곁을 지켰다. 송석석이 온 것을 보자 사여령은 일어나 인사를 했다. “왕비님, 오셨습니까?” 송석석은 그를 바라보더니 말했다. “큰 도련님도 계셨군요.” “네, 조모께 문안인사를 드리러 왔습니다.” 사 여령은 송석석 앞에서 감히 그녀의 눈을 쳐다볼 수 없어 고개를 숙였고, 송석석은 아랑곳하지 않고 영태비께 인사를 올렸다. 영태비는 등에 비단 베개 두 개를 받치고 침대에 기대 있었는데 안색이 노란 데다 푸르스름했고, 희끗희끗한 머리는 풀어헤친 채 계속 누워있었던 탓에 헝클어져 있었다. 그녀는 연신 기침을 하더니 송석석에게 말했다. “왕비, 어서 앉게.” 영태비는 말하는 속도가 아주 느리고 힘이 없었다. 궁녀가 의자를 가져와 침대 옆에 놓자 고 공공이 말했다. “왕비님, 앉으십시오. 태비마마께서 몸이 허약해서 말소리가 크지 않으니 가까이 앉으셔야 들을 수 있습니다.” 송석석은 태비마마께 감사를 표하고 자리에 앉아서 말했다. “태비마마께서는 좀 괜찮으십니까?” “아마도 낫지 않을 것이다.” 영태비는 말을 하며 입술에 립밤을 좀 발랐는데 혈색을 더하지 못하고 오히려 더 창백해 보였다. 송석석은 영태비를 위로했다. “잘 치료한다면 금방이라도 괜찮아질 것입니다.” 전 중의 숯불은 아주 따뜻하게 타올라서 송석석은 조금 뜨겁게 느껴졌다. 하지만 이렇게 태우는데도 연기 한 점 보이지 않을 것으로 보아 좋은 숯임을 알 수
혜태비는 궁에 들어오자마자 덕귀태비와 제귀테비를 찾아가 정원을 노닐었다. 혜태비는 홍보석 장신구가 오늘 피부색을 잘 받쳐주어 모두에게 자랑하고 싶었다. 사여묵은 송석석과 함께 태후마마에게 문안을 드리러 태후전에 들어갔는데 많은 명부들 또한 때를 지어 태후에게로 왔다. 마침 방시원의 어머니인 오수인도 태후에게 인사를 드리러 궁으로 들어왔는데, 태후가 이렇게 많은 명부들 앞에서 방시원의 혼사를 물을 줄은 꿈에도 몰랐던 것 같았다. 오수인은 마음속으로 괴로움이 가득했지만, 감히 태후 앞에서 하소연하지는 못했다. “태후마마, 혼인을 조급해서는 안 되는 것 같습니다.” 그러자 태후도 한숨을 쉬며 말했다. “방시원이 고생이 많구나. 이유 없이 이런 일에 연루되고, 너희 집안은 더할 나위 없이 인자한데 하필이면 그 사람들 때문에 발칵 뒤집히다니.” 오수인은 그제야 태후께서 왜 갑자기 그 말을 물으셨는지 알았다. 알고 보니 방시원과 방 씨 가문을 위해서였다. 그녀는 감격에 겨워 눈물을 글썽이며 말했다. “아무래도 복이 천박한 것 같습니다.” 그러자 태후가 말했다. “말도 안 되는 소리하지 말거라. 그는 우리 상국의 훌륭한 장군이자 황은을 받들고 있는데 복이 천박하다니? 그의 운명은 분명 찾아올 것이다.” “예, 태후마마께서 좀 더 신경을 써주십시오.” 사건이 일어난 후 사람들은 다소 조롱스러운 눈빛으로 그녀를 보았었는데, 지금 현장에 있던 명부들의 오수인을 보는 눈빛은 순식간에 달라져 있었다.하지만 태후께서 말씀을 하시니 상황이 달라졌다. 태후는 방시원을 상국의 훌륭한 장군이라고 평가했다. 여태껏 조정의 일에 참견하지 않았지만 이번만큼은 방시원을 위해서 나선 것이었다. 자리에 있는 사람들 모두 총명한 사람이기에, 태후의 이 뜻을 알아듣지 못할 리 없었다.그러니 앞으로 아무도 감히 방 씨 가문을 무시하지도, 함부로 입에 담지도 못할 것이다.태후마마께서는 방시원의 얘기를 길게 하지 않고 다른 가문의 일도 물어보았다. 그리고 제대부인이 보이지 않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