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방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니?’그녀는 자기가 어떤 짓을 했는지 잘 알고 있다.당시 그 젊은 장수가 이끌고 온 100명의 병사는 아주 용맹했다. 그녀의 병사들을 죽이고 도망을 쳤다. 그녀는 그들을 찾아내기 위해 녹분성의 마을 사람들을 학살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민가에 숨어들었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그녀는 젊은 장수를 어떻게든 찾으려 했다. 그에게 죽은 아우들 대신 복수를 해야 했다. 자신의 명성을 높여야 했다. 병사 10명을 죽이는 것보다 젊은 장수를 죽인 공로가 훨씬 컸다. 그렇게 젊은 장수를 체포했지만, 예상외로 그는 오만했다. 그녀가 양국의 협정을 깨고 백성을 학살했다며 비난을 서슴지 않았다.매우 악랄하게 그녀를 욕하고, 어떤 이유를 대도 백성 학살을 용서할 수 없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학살에 참여했던 이들의 대가 여기서 끊길 거라는 저주를 했다.무례하게 굴었던 그에게 처벌을 가했고, 자신들의 대가 끊길 거라고 했기에 그를 남자 구실을 못하게 만들어버렸다. 다른 병사들은 더욱 악랄했다. 젊은 장수의 몸에 오줌을 싸거나 그의 입에 똥을 집어넣어 삼키게 하는 등 참교육을 시키며 다시는 입을 함부로 놀리지 못하게 했다.그러나 어떻게 된 사람이, 그럴수록 더욱 반골 기지를 드러내며 악독한 말을 퍼부었다. 결국 화가 난 그녀는 병사더러 그의 몸에 구멍 몇 개를 뚫으라는 명령을 했다. 그러나 이 사람이 정말 온몸에 반골이 있을 줄은 몰랐다. 하지만 그녀의 부하는 그녀보다 훨씬 악랄했다. 그녀 역시 자업자득이라고 생각했다. 입을 함부로 놀렸으니 죽을 정도의 괴롭힘을 받아야 한다고 여겼다. 그러나 생각지도 못했던 일이 일어났다. 수란키가 직접 전선에서 녹분성으로 달려온 것이다. 수만 명의 병사가 그녀를 포위했다. 수란키는 고문을 당한 젊은 장수를 발견하고 그녀에게 휴전을 요청했다. 국경선(邊線)을 정하고 서경 병사들이 두 번 다시 상국에 들어오지 않겠으니 제발 인질을 풀어달라고 청했다.이방은 그때,
상국의 정탐꾼(探子)들은 아주 오래전부터 있었다. 나중에 그들은 황태자에게 귀속되었다.황태자에게 일이 생긴 뒤, 정탐꾼은 가문의 여인들과 어린아이들을 죽였다. 황태자의 명성에 금이 갔고 정보기관(情報營)을 해쳤다.송회안은 존경할 만한 무장이다. 일가가 남강에서 목숨을 잃었다. 송회안과 장군들과 연관된 모든 이들이 목숨을 잃었다. 심지어 가노들까지 죽임을 당했다. 이토록 참혹하고 인도적이지 않은 일을 한 게 서경인들이다.그래서 이방이 마을 사람들을 학살했을 때, 반발하지 못했고 숨기기로 한 것이다.이방은 학살한 장본인이지만, 서경 정탐꾼들 역시 흉악한 짓을 저지른 것 마찬가지다. 피해를 본 건 송씨 가문이다. 서경 정탐꾼들은 최근 송씨 가문에서 유일한 생존자 송석석에 대해 들었다. 이방이 말했던 여 장군이다. 그들은 이방이 송석석을 밀어내고 전북망의 부인이 된 사실도 알고 있다.이 일은 서경과 무관한 일이지만, 송회안의 가문이 몰살당하고 송석석이 버림을 받은 건 서경인들과 어느 정도 연관이 있었다.3황자가 분노한 부분도 이것 때문이다. 서경인은 소위 말하는 짐승이 아니었다. 양국이 교전하고 싸우는 것은 병사들의 일이다. 송회안의 가족들, 남녀노소 불구하고 전부 몰살한 것은 서경 황실의 영원한 오점이다. 평생 지울 수 없을 것이다.그런 사람들에게 감히 송석석을 체포하라고 하는 이방이 좋게 보일 리 없다. 이방의 발언은 서경인들의 마음에 비수가 되어 꽂혔다. 오래전 송회안 가족 전부를 학살했던 일을 떠오르게 했다.뺨을 맞은 이방은 멍해 있었다. 곧이어 누군가 이방의 머리채를 움켜쥐더니 발로 그녀의 아랫배를 여러 번 걷어찼다. 그리고 다시 한 번 머리채를 움켜쥐어 고개를 들게 한 뒤 그녀의 뺨을 마구잡이로 내리쳤다. 그렇게 피떡이 될 때까지 맞은 이방은 정신을 잃을 것만 같았다.“끌고 가!” 3황자가 명령을 내렸다.선봉 어린아이들은 길을 열고 포로들을 끌고 시몬을 떠났다.시몬의 남쪽에는 사막이고 앞으로 계속 가면 끊임없는 산맥이 나
이방은 당황했다. 이진흥의 질문에 그녀는 가슴 한쪽이 허탈했다.“내 곁에 서 있는 게 서경 병사인 줄 알고 막았어요. 족자일 줄은 몰랐다고요.”이진흥이 화를 냈다. “거짓말하지 마. 적군이 어떻게 네 곁에 있어? 어쩜 핑계를 대도 그런 걸 대냐 말이야?”이방도 짜증을 냈다. “그만 하세요. 우리 모두 적군의 포로가 됐어요. 녹분성 사람들을 학살한 우리를 쉽게 놓아줄 리 없어요. 날 탓할 틈에 차라리 여길 벗어날 방법을 생각해 보는 게 낫겠어요.”이진흥이 대꾸했다. “학살하라는 명은 네가 내렸다. 네가 그 장수 놈이 민가에 숨어 있다고 했잖아. 네가 그놈이 평범한 백성으로 위장했을 거라고. 네가 전부를 죽이라고 했잖아.”이방은 그들의 대화를 밖에서 듣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해 큰 소리로 말했다. “몇 명만 처리하고 장수를 밖으로 끌고 나오라고 했지, 전부 죽이라고 하지 않았어요!”이 말을 들은 포로로 잡힌 병사들이 분노했다. “장군님이 전부 죽이라고 했잖아요! 그들의 귀를 베어 적군의 귀라고 하라고 했잖아요. 공로를 인정받기 위해 백성을 죽인 겁니다.”“장군님 명령 없이 저희가 어찌 감히 마을 사람들 모두 죽였겠습니까?”“그래요. 게다가 서경인들도 저희의 백성을 죽였기에 굳이 따지면 저희가 복수하는 거라고 했잖아요. 서경인은 저희 백성을 죽이지 않았다는 걸 나중에 돌아와서 알았습니다.”“이 장군이 정말 당당했다면 왜 저희에게 비밀로 하라고 했겠습니까? 자기가 어떤 짓을 하고 공을 인정받았는지 모르는 것도 아니잖아요.”“이 상황에서 인정을 안 하는 건 비겁한 행동입니다. 당신은 송 장군과 비교할 수 없는 사람입니다.”이방은 자신을 부정하는 사람들에게 화가 나 얼굴이 파랗게 질렸다. 그녀는 서경인들이 밖에 있다는 걸 인지 못하고 큰 소리로 말했다. “전쟁터가 얼마나 잔인한 곳인데, 전쟁터에서 백성은 언제든지 죽을 수 있다. 그들이 무고하게 죽었다고? 무고한 백성이라고? 그들은 서경인이다. 수십 년간 우리와 국경선을 두고 다툰 이들이
그러나 이방의 바람은 완전히 무너졌다.모닥불이 밖에서 피어올랐고 오두막 문이 거칠게 열렸다. 커다란 그림자가 바닥에 비쳤다. 상대를 압도하는 기운을 내뿜으며 천천히 들어왔다. 모닥불을 등지고 있어서 얼굴을 정확히 보지는 못했지만, 이방은 단번에 상대를 알아봤다.그 사람은 수란키다. 그녀와 평화 협정을 맺은 서경의 원수다.이방은 몸을 부르르 떨며 벽에 등을 바짝 기댔다. 겁먹은 얼굴로 수란키를 쳐다보았다.성릉관에서 협정을 체결할 때, 이 위풍당당한 남자는 사람들을 압도했다. 용맹한 남자는 시종일관 우아한 기운을 내뿜었다. 평화협정은 매우 순조롭고 빠르게 진행되었다.이방이 제안한 몇 개 조약에 수란키는 고민도 하지 않고 승낙했다. 수란키는 단 하나의 조건만 제기했다. 협정을 체결하면 즉시 인질을 풀어달라는 것이다.이방은 제발로 군공을 가져온 수란키를 호락호락하게 여겼다.지금처럼 음울하면서도 살기가 가득 찬 얼굴과 많이 달랐다. 이방은 자신의 앞에 서 있는 수란키가 사신(死神)처럼 느껴졌다. 그의 눈빛만으로 마음속에 두려움이 생겼다.수란키는 가죽 장갑을 벗어 뒤에 있던 병사에게 던졌다. 그리고 자신과 함께 들어온 3황자에게 말했다. “끌고 가서 수단 방법 가리지 말고 복수해. 이들은 잔인하게 네 형님을 괴롭혔다. 협정을 체결하던 날 그들의 얼굴을 전부 기억했다.”3황자가 이를 악물었다. “숙부, 알겠어요. 형님 대신 제가 복수할게요.”3황자의 시선이 이방에게 향했다. “이자는 어찌할까요?”수란키가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이 여인은 내가 직접 처리한다.”3황자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뒤에 있던 병사들에게 말했다. “저들을 끌고 나와. 내 두 눈으로 저들이 살려달라고 비는 걸 봐야겠다.”사람들은 얼굴이 거뭇하게 질렸다. 몸의 힘이 탁 풀려 예전의 위풍당당하던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 그러나 살려달라고 애원을 하지 않았다. 한편, 이방의 몸은 더욱 격렬하게 결렸다. “수... 수란키 장군님, 평화 협정을 체결했잖아요. 양국
오두막 문밖에서 비명이 들려왔다. 이방은 까무러칠 정도로 겁에 질렸다.밖으로 끌려나간 이들이 어떤 형벌을 받는지 이방은 알 것 같았다. 그녀가 포로로 잡아둔 젊은 장수에게 한 짓을... 정확히는 서경 황자에게 한 짓을 돌려받는 중이다.그들은 황자를 거세했다. 산채로 거세를 당한 황자는 지렁이처럼 바닥에서 꿈틀대며 몸부림쳤다.그가 비명을 질렀으면 그들도 더는 괴롭히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황자는 이를 악물고 어떤 비명도 지르지 않았다. 오기가 발동한 병사들이 돌아가며 상처 난 그의 몸에 오줌을 쌌다. 그리고 날카로운 검으로 피부를 여러 차례 그었다. 피와 오줌이 뒤섞인 황자는 바닥에서 고통을 감내했다.지나간 일들을 회상한 그녀는 반성은커녕 오히려 통쾌했다.그러나 황자가 겪었던 걸 곧 자기가 겪어야 한다는 공포감은 사라지지 않았다.수란키가 단검을 꺼내자 이방이 기겁했다. “안 돼, 오지 마!”수란키는 쪼그려 앉아 그녀의 몸을 묶었던 밧줄을 벴다. 겁에 질려 움츠러든 이방을 마주하고 있자니 그는 말로 형용할 수 없는 분노가 들었다.‘황자는 죽음 앞에서 두려움에 벌벌 떠는 짐승보다 못한 사람에게 굴욕을 당했다.’ 밧줄을 푼 수란키는 커다란 손으로 그녀의 머리채를 우악스럽게 잡고 밖으로 끌어냈다.피부로 느껴지는 추위와 두피로 전해지는 고통에 이방은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밖으로 나온 수란키는 그녀의 머리채를 잡고 한 바퀴 돌더니 공터로 던져버렸다.눈으로 뒤덮인 공터에 18명이 누워 있었다. 그들은 실 한오라기도 걸치지 않은 채 발가벗겨 있었다. 붉은 피가 흘러나와 어느새 피 웅덩이를 만들었다. 그들 옆으로 무언가 굴러떨어졌다. 남자는 거세를 당하고 처절하게 비명을 질렀다. 거세당한 이들은 비명을 지르며 꿈틀댔다. 똑같은 상황에서 황자는 한마디 비명도 없이 견뎠다.나중에 무수한 고문을 당한 끝에 비명을 지르긴 했다. 병사들은 그의 비명에 환호했다. 누군가의 자존심을 짓밟는 건 그들에게 매우 짜릿하고 통쾌한 일이었다.몸부림
계속해서 괴롭힘을 당할 줄 알았으나 이방은 다시 오두막에 끌려갔다. 다른 이들도 같이 끌려갔다.오두막 안에 숯불이 타올랐다. 나무 판자 사이로 거센 바람이 들어와 따듯하게 있을 수 없었지만, 약간의 온기는 얻을 수 있었다. 그들은 추위와 고통에서 조금이라도 벗어나기 위해 숯불로 기어갔다. 이방의 바지는 진작에 벗겨졌다. 다리 사이로 전해지는 고통 때문에 다리를 모을 수 없었다. 방 안이 따뜻했지만 피는 여전히 흘러내렸다. 그녀의 몸 아래에 피가 흥건했다.그러나 여기 있는 사람들 전부 고통에 몸부림쳤고 아무도 그녀를 신경 쓰지 않았다. 오두막 안에는 오로지 고통스러운 신음만 끊임없이 울려 퍼졌다.누군가 오두막에 들어왔다. 이방에게 약 한 사발을 건넸다. 그러나 약 사발 안에는 비릿한 오줌 냄새가 낫고 이방은 구역질이 났다.그러나 토하지 않았다. 괜히 오줌만 더 맞게 될까 봐 두려웠다. 수란키의 손에 들어온 이상 살 길은 없다. 그녀는 약 사발에 담긴 게 독약이길 바랐다. 이 상태로 버티는 것보다 차라리 죽는 게 더 좋을 것 같았다.약을 삼키자 3황자가 들어와 그녀를 주먹과 발로 구타했다. 온 몸에 성한 곳이 없었다. 그러나 다행히도 얼굴을 제외하고는 칼로 긁은 상처는 없었다.그녀의 얼굴에 어떤 글자를 새겼는지 알 수 없지만, 어차피 죽을 목숨이었고 얼굴에 새겨진 글자에 연연할 겨를이 없었다.바닥에 눕자 오장육부가 뒤틀리는 기분이 들었다. ‘장군님은 오지 않을 거야, 난 여기서 죽을지도 몰라.’상국의 여장군이 되어서 이런 죽음을 맞이해야 되는 게 억울했다.앞으로 송석석에게 몰릴 영광들을 생각하자 마음이 달갑지 않았다. ‘송석석은 나보다 출신 배경이 좋고 목숨이 나보다 조금 값지겠지.’ ‘나도 그런 출신이었으면 일찍이 공을 세웠을 거야.’송석석은 현갑군을 이끌고 서경군과 사국군을 뒤쫓아 철수하게 했다.전북망은 사람을 이끌고 송석석의 뒤를 바짝 쫓았다. 말 위에 올라탄 송석석의 수려한 뒷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어떻게 저리
송석석과 시만자가 모닥불을 쬐고 있었다. 전북망의 말을 들은 송석석이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무슨 근거로 이 장군이 사국인에게 잡혀갔다는 것입니까?”“그런 뜻은 아니오. 하지만 전투가 시작되자마자 이 장군이 서경 병사들을 뒤쫓았고 여태 돌아오지 않았소.”시만자가 차갑게 말했다. “그럼 도성에 깔린 시신들을 일일이 확인해야겠습니다. 거기에 있을 수도 있잖아요.”“그녀는 죽지 않았소.”전북망의 눈빛이 서늘하게 변했다. “북명군 전우들끼리 어찌 그런 저주를 할 수 있단 말이오?”시만자는 모닥불에 손을 쬐며 가소롭다는 듯 말했다. “전쟁은 끝났습니다. 그러니 전우도 아니지요, 그 여인이랑 같이 묶지 마십시오.”기가 찼던 전북망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전북망은 송석석에게 시선을 돌렸다. “내가 잘못했소, 이방과 무관하오. 만약 다른 장병이 포로로 잡혔어도 구하러 가지 않았을 것이오?”송석석이 되물었다. “만약 다른 장병이 포로로 잡혔다면 장군은 2만 명이나 되는 아군을 위험에 빠뜨리면서 후퇴하고 있는 수십만 명이나 되는 적군 부대를 쫓아갈 것입니까?”전북망은 말문이 막혔다. “그건...”송석석이 답했다. “장군께서 장병의 목숨을 소중히 여기는 건 압니다. 이 장군이 적군에게 포로로 잡혔다는 증거가 설령 있다 하더라도 그녀가 후퇴하고 있는 대부대에 있다는 걸 어떻게 확신하십니까? 그리고 국경선을 벗어나면서 뒤쫓을 수도 없습니다. 다른 장병이 위험에 처할 겁니다.”옆에서 이들의 대화를 조용히 듣고 있던 몽동이가 탐탁지 않다는 듯 말했다. “옳습니다. 게다가 이 일대에 많은 유목민이 살고 있습니다. 그들은 남강에 속하지 않지요. 만약 그들의 영지를 침공하게 되면 또 전쟁이 일어날 겁니다.”그는 유목민에 대해 잘 알지는 못했지만 누군가가 함부로 그들의 영지를 침입하면 큰 사단이 일어난다는 것은 알고 있다.전북망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이 상황이 답답했다. “송 장군은 계속 손 놓고 있을 거요? 포로로 잡힌 사람은 이방 한 사람이
화가 난 전북망은 송석석의 손을 거칠게 잡고 구석으로 성큼성큼 갔다. “포로로 잡힌 걸 알면서도 구하러 못 간다는 것이오? 그녀가 어디에 있는지 알고 있는 것이오?”시만자가 그에게 채찍을 내던졌다. 전북망은 움켜쥔 송석석의 손을 풀어주며 뒤로 한 걸음 물러섰다.시만자가 차갑게 말했다. “할 말이 있으면 일정 거리를 유지해서 하십시오. 가까이 붙지 마세요.” 전북망이 미간을 찌푸리며 시만자를 쳐다봤다. 그러나 시만자는 무공이 뛰어난데다가 그의 수하가 아니어서 관리하기 어려웠다. 애써 화를 억누른 전북망은 송석석에게 물었다. “어디에 있는지 알고 있소?”송석석이 고개를 저었다. “모릅니다. 사막 어딘가에 있을 수도 있고 초원이나 산속에 있을 수도 있습니다. 이 장군이 어디에 있든 우리는 현갑군을 보내 수색할 수 없습니다. 너무 위험한 일입니다.”“그럼 우린 여기서 뭘 기다리는 것이오? 그들이 포로를 돌려보낼 때까지 기다리겠다는 거요?” 전북망이 분노에 차서 소리쳤다.송석석의 눈빛이 어두워졌다. “네, 포로를 돌려보낼 때까지 기다려야지요.”전북망은 어이가 없었다. “미쳤소? 그들이 순순히 이방을 돌려줄 것 같소?”송석석이 싸늘하게 대꾸했다. “물론 쉽지 않겠지요. 세상에 어디 쉬운 일이 있겠습니까, 성릉관 협정도 쉽게 얻은 게 아니잖아요.”전북망이 멍한 얼굴로 물었다. “무슨 소리요?”송석석이 전북망과 시선을 맞췄다. “수란키가 성릉관에서 대군을 이끌고 녹분성에서 철수한 게 이 장군이 북명왕께서 남강 전쟁을 원조한다는 소문을 퍼뜨렸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건가요? 정말 그 말을 믿었다면 장군이 될 자격은 없는 것 같네요. 병사도 못 될 것 같습니다.” 전북망도 물론 의심을 했다.마지막으로 이방에게 물을 때 역시 의심은 하고 있었다. 하지만 지나간 일을 계속 붙잡고 있을 수도 없는 노릇이고, 협정도 체결됐기에 더는 따지지 않기로 했다.전북망의 목소리가 미세하게 떨렸다. “그러니까 수란키가 왜 이런 짓을 벌인 것이오? 알려주시
사실 이런 자리에서는 모두 입맛이 그다지 좋지 않기 마련인지라, 많은 음식들이 한 입 먹고 나면 다시 치워지곤 한다.하지만 북당의 사람들은 정말 음식을 존중하는 모습을 보였다. 어떤 요리가 나와도 모두 다 먹어버렸으며, 가득 채운 술잔도 순식간에 비웠다. 그들을 시중드는 궁인들도 꽤 힘들었을 것이었다.시만자는 그들이 춘만루에서 먹었던 그 한 끼를 떠올렸다. 그때도 남은 음식이 하나도 없이 모든 것이 비워졌었다.그녀는 송석석에게 무언가 말을 건네고 싶었다. 하지만 식사 소리 외에는 아무 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기에 말을 꺼내기 어려웠다.그러나 그들은 눈짓만으로도 서로가 하고자 하는 말의 의미를 알아차렸다.시만자는 북당 사람들이 이곳에 등장한 것이 협상과 관련이 있을 거라고 했고, 송석석도 그렇게 생각했다.하지만 그녀는 그들이 중재자로 온 것인지, 아니면 서경을 돕기 위해 온 것인지 확실하게 알 수 없었다. 만약 중재자라면 협상 또한 오래 걸리지 않고 조약을 체결할 수 있을 테니 더 좋을 것이었다.하지만 만약 서경을 돕기 위해 온 것이라면 협상은 공방전이 될 것이 분명했다. 북당이 그들의 방패가 된다면 상국이 협상에서 어려움을 겪을 것이 틀림 없으니 말이다.이덕회와 홍려사경 등 상국의 사절단들은 상황을 어느 정도 눈치챈 듯 했다. 그래서 그들은 처음의 그 기쁨을 잃은 대신 마음속으로 여러 가지를 고민하는 모습이었다. 눈앞의 음식도 별로 먹고 싶지 않은 듯했지만, 모두가 식사를 하고 있었기에 그들도 어쩔 수 없이 천천히 먹었다.이 궁중 연회는 그들이 참석했던 연회 중 가장 이상한 연회였을 것이다. 마치 폭풍이 다가오는 듯한 무서운 고요함이 느껴졌다.궁중에서 준비한 요리는 총 32가지였다. 그러나 각 요리의 양은 매우 적었으며, 궁인들은 음식을 하나씩 들고 들어와서는 다시 하나씩 치워갔다.누군가 술잔을 들고 싶어했지만, 역시 원신제와 마찬가지로 한 번 쓱 훑어본 후, 술잔을 비우고 다시 내려놓고는 식사를 계속했다.마침내 32가지 요리가 모두 올라갔
다음날, 궁중 연회는 신시에 시작되었고, 여전히 수란키가 직접 그들을 맞아 궁으로 안내해주었다.예상했던 대로 즉위식은 이미 끝난 상태였고, 이번 연회의 주요 목적은 국경선의 협상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궁에 들어간 후에도 다른 나라의 사절단을 보지 못했다.궁 안은 황실의 측근과 문무 백관들로 가득했다. 하지만 그들은 상국의 사절단에게 적대적인 태도를 보이지 않았고, 친근한 분위기도 없었다.이런 자리에서는 역관의 도움이 필요했기에 대화의 주제가 그리 넓지 않아, 서로 간단한 인사 정도만 나눌 뿐이었다.다른 나라의 사절단이 없을 거라 생각했지만, 입석할 때 원신제가 상국의 사절단에게 말했다."오늘 북당에서 귀빈들이 오십니다. 곧 도착할 것인데, 여러분이 그들과 바로 친해질 것이라 믿습니다."이덕회는 즉시 흥분하며 말했다. "북당의 귀빈이라 하셨습니까? 어떤 분이 오시는지요?"그가 흥분하는 것은 당연했다. 왕이장이 가져온 임양운의 육안총과 포차는 모두 북당에서 개량된 것이었고, 임양운 선생이 북당에서 배운 적이 있었다고 들었기 때문이다.상국의 병부상서로서 그는 정말 더 많은 것을 배우고 싶었다.북당은 상국이 항상 배우고자 했던 본보기였다. 그들의 첨단 무기와 치국책은 상국보다 훨씬 진보적이었다.물론 국가의 상황이 다르기에 모든 것을 배울 수는 없을 테지만, 대화를 깊이 나누면 분명히 얻을 것이 있을 것이었다.원신제는 그들이 기뻐하는 모습을 보고 웃으며 말했다. "도착하면 알게 될 것입니다."연회는 지루하고 피곤했지만, 북당의 귀빈이 온다면 그 이야기는 달라진다.모두가 기대하고 있을 때, 한 외침이 들렸다.“북당 안풍친왕과 왕비께서 도착하셨습니다!"이덕회는 놀라서 입을 막고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의 눈에는 기쁨이 넘치고 있었다.송석석도 사부로부터 안풍친왕의 호를 들어본 적이 있었다. 사부는 그를 매우 존경한다고 했다. 생각치도 못하게 오늘 그를 만날 수 있으니 그녀도 말할 수 없이 기뻤다.반면, 만두와 몽동이 그들은 비교적 담담했
원신제는 계속해서 말을 이어갔다.“씁쓸한 게 한 가지 더 있네. 지금까지 짐은 장공주의 신분으로 여인에게도 과거 시험을 볼 자격이 있어야 한다고 높이 외쳤지. 하지만 황제가 된 지금, 어쩔 수 없이 각 세력들의 이익을 고려해줘야 하고 그자들이 짐에 대한 적대심과 경계를 약화시킬 수밖에 없다네. 짐은 이제 고려한 일이 더 많아졌어. 가끔은 속에 천불이 나서 반대파 세력들의 가슴에 칼을 꽂고 싶기도 하네.”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송석석이 대꾸했다.“사실 한 나라의 황제나 대신들은 남녀를 막론하고 결국 최종 목적은 같지 않겠습니까? 폐하께서도 그렇듯 다들 나라의 안정과 백성들의 평안을 바라고 있는 겁니다. 나라에 영원히 전란이 일어나지 않고 창성해야 폐하께서 원하시는 개혁을 진행하셨을 때 반대의 목소리가 잦아드는 것입니다. 그러니 폐하, 현재 가장 중요한 건 폐하의 자리부터 굳건히 지키시는 겁니다.”대놓고 얘기하지는 않았지만 원신제는 송석석의 말뜻을 확실하게 알아들었다. 현재까지 나라가 혼란에 빠져 있고 각 세력들의 제지도 심하기에 이 국면을 해결하는 것도 충분히 힘든 일이다.황제의 자리도 흔들리고 있는 지금, 원신제가 개혁까지 고집하려는 건 더욱 위험한 일이었기에, 미래가 불안정할 수밖에 없었다.시만자 또한 송석석의 말에 동의하는 바였다.“사실 한 가지 일을 처리하는 데에 방법이 한 가지밖에 없는 건 아닙니다. 강경하게 상대방과 맞서 싸우는 것도 방법이지만 이는 가장 현명하지 못한 하책입니다. 한 사람의 성격도 바꾸기 쉽지 않은데 천 년이나 넘게 지속된 규정을 바꾸는 건 더더욱 어려운 일입니다. 폐하께서 관념의 씨앗을 심으시면 언젠가 누군가가 폐하께서 남긴 발자국을 따라 한 걸음씩 나아갈 것입니다.”잠시 머뭇거리던 시만자는 이내 다시 조심스럽게 말을 이어갔다.“저와 석석도 매산에서 무술을 공부할 때 그랬습니다. 다들 저희를 비웃고 하찮게 여겼지만 저희는 결국 실력으로 그자들을 한 명씩 쓰러트렸습니다. 구호만 외친다고 해서 되는 게 아닙니다. 실력이
서경의 황궁은 금빛으로 반짝였으며 기세가 어마어마했다. 어둠이 깃든 고요한 밤에는 기 장엄함이 더욱 돋보였다.첫 번째 궁문을 들어서고 나서도 마차는 궁 안을 자유롭게 누빌 수 있었다.궁 안 곳곳에는 커다란 나무들 위에는 등불이 잔뜩 걸려 있어 대낮처럼 밝았으며, 누군가가 몰래 나무 위에 숨어있는다고 해도 너무 밝아서 바로 들킬 정도였다.수란키는 앞장서서 걷다가 한 궁전 밖에 도착했는데, 궁녀 두 명이 다가와 수란키와 서경 언어로 몇 마디 나누다가 고개를 돌려 송석석과 시만자에게 환하게 웃으며 허리를 숙여 인사를 올렸다.수란키가 먼저 입을 열었다. “송 대감님, 만자 낭자, 폐하께서 두 분에게 궁전으로 모시라고 하셨습니다.”두 궁녀가 앞에서 길을 안내했고 송석석과 시만자는 이내 궁전 안으로 들어갔다.휘황찬란한 궁전 내부에는 커다란 조각 기둥이 양측에 세워져 있었으며 그 모습은 압박감이 넘쳤다.원신제는 용상에 앉아 환한 미소로 두 사람을 반겼지만 얼굴에는 피로함이 가득해 보였다.송석석과 시만자는 이내 인사를 올렸고 원신제는 그들에게 편하게 앉으라고 했다.그리고는 송석석을 쳐다보며 말을 걸었다.“짐은 송 대감이 사절단과 함께 이곳으로 온다고 하여 며칠 전부터 계속 기대하고 있었는데 이렇게 보니 너무 반갑네.”송석석은 웃으면서도 진지하게 대답했다.“폐하께서 황위에 오르셨다는 소식을 듣고 소인도 너무 기뻤습니다. 원하는 바를 이루신 걸 감축드립니다.”송석석은 원신제를 힐끔 쳐다보았다. 원신제에게서 냉옥 장공주의 모습이 보였고 예전과 크게 변한 건 없었으며 여전히 피로해 보이고 여전히 진중하고 엄숙했다.냉옥 장공주에게 있어서 황제의 역할이든 실권을 손에 쥔 장공주 역할이든 똑같이 신경 쓸 일이 많을 것이다.“원하는 바를 이루느라 많이 힘들었네. 하지만 다행히도 이제 일처리는 훨씬 쉬워졌네.”원신제가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조금 뒤, 궁녀들이 서경 특색이 돋보이는 다과들을 내왔다. 송석석과 시만자는 조금 전에 저녁 식사를 했기에 배가 고프지
서경 수도에 도착했을 땐 8월 13일이었기에, 송석석 일행이 떠난 지 한 달은 족히 넘은 상황이었다. 점심이 되자, 햇빛이 따스하게 비추어졌다.진왕은 마차 안에 몸을 웅크려 누운 채 입성에 진입했다. 하지만 마지막 자객들은 머릿수도 많고 기세도 등등해, 서경 지대에 들어서고 나서도 송석석 일행은 총 일곱 번이나 습격을 당했다. 현갑군은 대부분 부상을 당했고 시만자마저 어깨가 칼에 찔렸지만 다행히 신경까지 다치지는 않았다.진왕이 이렇게까지 크게 논란 건, 자객에게 습격을 당할 당시, 그는 변소 안에 있었다.일을 마치고 변소를 나선 순간, 갑자기 나타난 자객이 검으로 진왕의 가슴을 베었고 그 검을 진왕의 가슴에 꽂으려던 순간, 송석석이 제때에 나타나 손에 들고 있던 검을 한 발 빠르게 자객의 가슴에 꽂았다.하지만, 이내 자객의 머리채를 뒤로 확 잡아당긴 덕분에 진왕은 무사할 수 있었다.그는 가슴팍이 조금 베인 게 전부였지만 큰 중상을 입은 것 마냥 밤새 괴로운 신음소리를 내고 나서야 겨우 진정이 되었다. 수도에 도착하자 수란키가 관원들을 데리고 성문 앞에 서서 진왕을 반겼다. 수란키는 이제 서경의 승상이 되었다.한눈에 송석석을 알아본 수란키는 환하게 웃으며 인사를 했다.“송 장군님, 오랜만에 뵙겠습니다. 여전히 기품이 넘치시네요.”송석석은 말에서 내려 고개를 살짝 숙인 채 인사를 하며 상대방을 힐끗 살폈다. 솔직히 조금 전에 수란키를 알아보지 못했다.전보다 훨씬 늙어 보였고 백발인 데다가 수염도 허옇게 변해 버렸다. 하지만 눈빛은 여전히 카리스마가 넘쳤고 남강 전장에서 봤을 때보다 되레 활기가 넘쳐 보이기까지 했다.남강 전장에서 봤던 수란키는 온몸에서 분노가 들끓고 있었다. 위엄이 넘치고 엄숙한 그는 삶의 의지가 전혀 느껴지지 않았으며 그저 복수를 위해 어쩔 수 없이 살아가는 그런 느낌이었다.“승상께서 이렇게 직접 마중까지 나오시고. 너무 민폐를 끼치는 게 아닌가 걱정이 되네요.”송석석이 웃으면서 말하자 수란키가 호탕하게 웃었다.“너
한편, 크게 놀란 진왕은 태의를 불러 심신을 안정할 수 있는 약을 처방받았다.송석석이 찾아갔을 때, 진왕의 몰골은 말이 아니었다. 창백한 얼굴에는 핏기가 전혀 보이지 않았으며 덜덜 떨리는 입술로 송석석에게 자객은 어떻게 됐냐고 물었다.송석석이 진왕에게 자객이 도망쳤다고 얘기하고 나서야 그는 조금 안정을 찾은 듯했다.사실 진왕을 보필하는 사람들이 자객이 도망쳤다고 진작 얘기했지만 진왕은 믿지 않았다. 이제 송석석에게서 듣고 나니 그제야 안심이 된 것이다.송석석은 진왕에게 몸조리 잘 하라고 당부한 뒤 방을 나섰다.이와 동시에, 이덕회는 나머지 사람들을 안심시키고 있었다. 병부 상서인 이덕회는 지금까지 산전 수전 공중전까지 전부 겪어 보기도 했고 또한 왕비와 현갑군을 믿었기에 전혀 겁을 먹지 않았다.한편, 매산 출신 몇 명은 한데 모여 전에 성릉관에서 만났던 검은 복장 차림의 무리들을 의심하고 있었다.어쩌면 그자들이 바로 자객일지도 모른다는 의심 말이다.이 의심을 가장 먼저 제기한 건 바로 시만자였다. 그는 그 무리들이 갑자기 사라진 게 너무 수상했고 비밀 경로를 통해 계획적으로 도망친 거라고 확신했다.더군다나 조금 전 자객들도 전부 검은색 옷차림이었기에, 비록 머릿수가 조금 차이 나긴 했지만 그리 이상하지도 않다. 일부 사람들은 숨어서 지켜보고 있었을 수도 있으니까.“성릉관에서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출동했던 건 아마 우리한테 손을 쓰려고 그랬을 가능성이 커. 하지만 나중에 생각해보니까 성릉관에서 우리를 죽이면 쉽게 도망칠 수 없을 것 같아서 일단 포기한 거야.”시만자는 분석할수록 자신의 의심이 일리가 있다고 생각해서 고개를 돌려 송석석에게 물었다.“내 말이 맞는 것 같지 않아?”송석석이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그자들은 아니야. 정확히 얘기하자면 조금 전 자객들은 그자들보다 무술 실력이 확연히 떨어져. 그자들은 성릉관에서도 자유롭게 나타났다가 사라졌어. 그렇게 보면 네 의심이 성립되지 않다는 거지. 그자들은 성릉관에
이날 아침, 송석석 일행은 서경으로 출발했다.송석석은 딱히 아쉬운 마음이 들지는 않았다. 나중에 돌아올 때 성릉관을 또 지나야 했기에, 이후에도 외조부 가족들을 만날 수 있기 때문이었다.성릉관을 떠나자마자, 평탄한 길이 사라졌다. 여기저기가 다 울퉁불퉁했고 일부러 인위적으로 파괴한 곳도 있었기에 마차가 지나가기엔 무리가 있었다.하지만 진왕은 절대 다시 말을 타려고 하지 않았다. 며칠동안 안정을 취했지만 다리 안쪽의 쓸림 상태가 아직 심했기에 걸을 땐 괜찮아도 말에 타면 아파서 견딜 수가 없었다.때문에 성릉관에서 공을 세우고 육아당까지 설립한 진왕은 까탈스럽게 마차를 고집했고 마차가 도무지 지나갈 수 없는 곳은 현갑군이 말에서 내려 마차를 밀면서 힘겹게 전진했다.하지만 불행 중 다행인 건, 현재 양국으로 통하는 길이 개방되었기에 그 길을 따라 갈 수 있다는 것이다. 만약 산길밖에 없었다면 고귀한 진왕의 엉덩이가 엄청나게 고생했을 것이다.그렇게 겨우 서경 지대에 진입하여 루벌로 향하자, 서경의 관원과 병사들이 그들을 맞이하며 가는 길까지 호송해주었다.송석석 일행들 중에서 통역관을 제외하고는 서경에 와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똑 같은 변경 도시라고 해도, 루벌은 성릉관보다 훨씬 낙후했다. 여기저기에는 망가지고 훼손된 집채가 많았으며 행색이 누추한 거지나 근심이 많아 보이는 백성들도 많았다.송석석은 이 광경에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두 나라가 전쟁을 치른 건 사실이지만 이곳까지 침투되지는 않았는데 말이다. 전에 전북망과 이방이 이곳 마을을 공격했다고 해도 공격당한 그 마을만 피해를 받아야지 루벌 전체가 이렇게 엉망진창이 된 것은 말이 안 되었다.루벌의 한 역관에 도착하고 나서야 송석석은 호송하고 있던 관원한테서 그 이유를 듣게 되었다. 수란석이 성릉관에서 전쟁을 일으켰을 때, 후방 공급이 부족한 탓에 병사들이 루벌로 돌아와 약탈을 진행한 것이었다.수란석 당시의 상황이 빅토르와 거의 비슷하다고 했다. 그때 당시 전쟁을 바라는 사람들이 많지 않
소 팔야는 곧바로 송석석이 말한대로 지시를 내렸고 이 지시를 실행에 옮긴 사람은 바로 전북망이었다. 그는 서둘러 부하들을 데리고 여기저기 수색하기 시작했다.송석석이 성릉관에 왔다는 사실은 전북망도 익히 알고 있었지만, 그녀를 맞이하던 그날, 그는 멀리 서서 지켜볼 뿐, 가까이 다가가지는 않았다.하지만 거리가 너무 먼 탓에 전북망은 송석석을 정확히 보지도 못했고 그저 그림자만 볼 수 있었다.전북망은 자신이 지금 참 쓸모없는 짓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느껴지기도 했다. 송석석은 이제 자신과 전혀 상관이 없는 사람이고 진성의 일과 관련된 사람은 이제 멀리해야했기 때문이다. 한편, 시절단은 성릉관에서 잠시 쉬는 사이에도 담판의 기교에 대해 상의했으며 상황 모의도 여러 번 해보았다.이번 담판이 저번에 비교하면 상대적으로 어렵지는 않았지만 절대적으로 쉬운 건 아니었다. 이는 여제가 계속 마음에 두고 있던 일이기에 쉽게 타협하려고 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소씨 가문에서도 상대방이 몰래 사람을 보내 사절단의 책략을 몰래 엿듣는 것은 아닌지 걱정됐다. 사절단의 책략을 알게 된다면 상대방은 그에 맞는 대책을 미리 준비할 것이고 그렇게 되면 상국은 열세에 처하게 된다.때문에 소 팔야는 전북망에게 반드시 철저하게 관리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몰래 침입한 사람이 있으면 무조건 찾아내야 하고 이와 동시에 사절단 곁에서 시중을 드는 하인들 사이에도 첩자가 있을 수 있으니 확실하게 조사해야 한다고 했다.이틀 동안 수색했지만 전북망은 수확이 없었다. 그리고 수부를 샅샅이 수색했지만 위장술을 쓰거나 몰래 정보를 외부에 빼돌리는 사람도 없었다.전북망이 유일하게 알아낸 정보는 검은 복장을 입은 사람들이 춘만루에서 밥을 한 번 먹은 적이 있다는 사실이었다. 이들이 춘만루를 떠난 뒤, 이들을 목격했다는 가게 주인도 있었지만 어디에 묵었고 어디로 갔는지는 아는 사람이 한 명도 없었다.서른 명 정도 되는 사람들이 심지어 전부 검은 복장을 차려 입었는데 이렇게 쥐도 새도 모르게
춘만루는 오늘 손님들로 꽉 차 있었다. 가게가 그리 크지 않기도 했고, 다른 손님들도 있었을 뿐만 아니라, 조금 전 낭자가 데리고 오겠다고 했던 검은 복장을 입은 남자들까지 가게 안 나머지 자리를 전부 차지했다.송석석과 시만자 그리고 남자까지 앉을 자리가 없었기에 가게 주인은 급하게 작은 탁자 하나를 펴서 가게 앞에 자리를 마련했다.그렇게 세 사람은 일행들과 떨어져서 식사를 하게 되었다.이때, 남자가 미안한 목소리로 송석석에게 조심스럽게 말했다.“저자들은 전부 제 일행입니다. 저와 똑같이 이틀 전부터 아무것도 먹지 못했거든요. 혹시 불편하시다면 저자들에게 가게 앞에서 기다리라고 하겠습니다. 나중에 저자들에게 호빵이나 하나씩 나눠줘도 충분합니다.”멈칫하던 시만자는 이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그럴 필요 없어요. 편하게 드시고 싶은 거 시키시면 됩니다.”남자가 환하게 웃으며 대꾸했다.“낭자는 정말 얼굴도 예쁘시고 마음도 선하시군요. 그럼 저희 편하게 시키겠습니다.”“그… 그래요.”고개를 끄덕이던 시만자는 가게 안에 앉아있던 사람들을 힐끗 쳐다보았다. 이자들의 옷차림은 꽤 눈에 띄었으며 옷소매에 수놓은 글씨들이 보이기도 했다.하지만 옷이 구겨지고 먼지도 많이 묻었기에 수놓은 글씨를 정확하게 확인할 수 없었다.그렇게 한참동안 쳐다본 시만자는 그제야 이자들의 옷에 수놓은 글씨들이 각자 다르다는 것을 발견했다. 그 중에서 흑영위나 전광위 등 글씨들이 보이기도 했다.이자들은 예의가 없거나 우악스럽지는 않았다. 각자 자리를 찾은 뒤 자신들에게 밥을 사준 시만자와 송석석에게 일제히 고개를 숙여 감사인사를 했다.거의 대부분 사람들이 머리가 하얬지만 얼굴은 불그스름한 게 나이가 그렇게 많아 보이지는 않았다.그 중에서 생김새가 매우 추악한 사람들도 몇 명 있었으며 쳐다보기만 해도 소름이 끼칠 정도였다.송석석과 시만자 그리고 몽동이는 서로를 힐끔 쳐다보다가 왠지 이 식사자리가 자신들의 마음에서 우러러 나온 게 아니라는 기분이 들었다.송석석은 식사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