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방은 당황했다. 이진흥의 질문에 그녀는 가슴 한쪽이 허탈했다.“내 곁에 서 있는 게 서경 병사인 줄 알고 막았어요. 족자일 줄은 몰랐다고요.”이진흥이 화를 냈다. “거짓말하지 마. 적군이 어떻게 네 곁에 있어? 어쩜 핑계를 대도 그런 걸 대냐 말이야?”이방도 짜증을 냈다. “그만 하세요. 우리 모두 적군의 포로가 됐어요. 녹분성 사람들을 학살한 우리를 쉽게 놓아줄 리 없어요. 날 탓할 틈에 차라리 여길 벗어날 방법을 생각해 보는 게 낫겠어요.”이진흥이 대꾸했다. “학살하라는 명은 네가 내렸다. 네가 그 장수 놈이 민가에 숨어 있다고 했잖아. 네가 그놈이 평범한 백성으로 위장했을 거라고. 네가 전부를 죽이라고 했잖아.”이방은 그들의 대화를 밖에서 듣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해 큰 소리로 말했다. “몇 명만 처리하고 장수를 밖으로 끌고 나오라고 했지, 전부 죽이라고 하지 않았어요!”이 말을 들은 포로로 잡힌 병사들이 분노했다. “장군님이 전부 죽이라고 했잖아요! 그들의 귀를 베어 적군의 귀라고 하라고 했잖아요. 공로를 인정받기 위해 백성을 죽인 겁니다.”“장군님 명령 없이 저희가 어찌 감히 마을 사람들 모두 죽였겠습니까?”“그래요. 게다가 서경인들도 저희의 백성을 죽였기에 굳이 따지면 저희가 복수하는 거라고 했잖아요. 서경인은 저희 백성을 죽이지 않았다는 걸 나중에 돌아와서 알았습니다.”“이 장군이 정말 당당했다면 왜 저희에게 비밀로 하라고 했겠습니까? 자기가 어떤 짓을 하고 공을 인정받았는지 모르는 것도 아니잖아요.”“이 상황에서 인정을 안 하는 건 비겁한 행동입니다. 당신은 송 장군과 비교할 수 없는 사람입니다.”이방은 자신을 부정하는 사람들에게 화가 나 얼굴이 파랗게 질렸다. 그녀는 서경인들이 밖에 있다는 걸 인지 못하고 큰 소리로 말했다. “전쟁터가 얼마나 잔인한 곳인데, 전쟁터에서 백성은 언제든지 죽을 수 있다. 그들이 무고하게 죽었다고? 무고한 백성이라고? 그들은 서경인이다. 수십 년간 우리와 국경선을 두고 다툰 이들이
그러나 이방의 바람은 완전히 무너졌다.모닥불이 밖에서 피어올랐고 오두막 문이 거칠게 열렸다. 커다란 그림자가 바닥에 비쳤다. 상대를 압도하는 기운을 내뿜으며 천천히 들어왔다. 모닥불을 등지고 있어서 얼굴을 정확히 보지는 못했지만, 이방은 단번에 상대를 알아봤다.그 사람은 수란키다. 그녀와 평화 협정을 맺은 서경의 원수다.이방은 몸을 부르르 떨며 벽에 등을 바짝 기댔다. 겁먹은 얼굴로 수란키를 쳐다보았다.성릉관에서 협정을 체결할 때, 이 위풍당당한 남자는 사람들을 압도했다. 용맹한 남자는 시종일관 우아한 기운을 내뿜었다. 평화협정은 매우 순조롭고 빠르게 진행되었다.이방이 제안한 몇 개 조약에 수란키는 고민도 하지 않고 승낙했다. 수란키는 단 하나의 조건만 제기했다. 협정을 체결하면 즉시 인질을 풀어달라는 것이다.이방은 제발로 군공을 가져온 수란키를 호락호락하게 여겼다.지금처럼 음울하면서도 살기가 가득 찬 얼굴과 많이 달랐다. 이방은 자신의 앞에 서 있는 수란키가 사신(死神)처럼 느껴졌다. 그의 눈빛만으로 마음속에 두려움이 생겼다.수란키는 가죽 장갑을 벗어 뒤에 있던 병사에게 던졌다. 그리고 자신과 함께 들어온 3황자에게 말했다. “끌고 가서 수단 방법 가리지 말고 복수해. 이들은 잔인하게 네 형님을 괴롭혔다. 협정을 체결하던 날 그들의 얼굴을 전부 기억했다.”3황자가 이를 악물었다. “숙부, 알겠어요. 형님 대신 제가 복수할게요.”3황자의 시선이 이방에게 향했다. “이자는 어찌할까요?”수란키가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이 여인은 내가 직접 처리한다.”3황자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뒤에 있던 병사들에게 말했다. “저들을 끌고 나와. 내 두 눈으로 저들이 살려달라고 비는 걸 봐야겠다.”사람들은 얼굴이 거뭇하게 질렸다. 몸의 힘이 탁 풀려 예전의 위풍당당하던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 그러나 살려달라고 애원을 하지 않았다. 한편, 이방의 몸은 더욱 격렬하게 결렸다. “수... 수란키 장군님, 평화 협정을 체결했잖아요. 양국
오두막 문밖에서 비명이 들려왔다. 이방은 까무러칠 정도로 겁에 질렸다.밖으로 끌려나간 이들이 어떤 형벌을 받는지 이방은 알 것 같았다. 그녀가 포로로 잡아둔 젊은 장수에게 한 짓을... 정확히는 서경 황자에게 한 짓을 돌려받는 중이다.그들은 황자를 거세했다. 산채로 거세를 당한 황자는 지렁이처럼 바닥에서 꿈틀대며 몸부림쳤다.그가 비명을 질렀으면 그들도 더는 괴롭히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황자는 이를 악물고 어떤 비명도 지르지 않았다. 오기가 발동한 병사들이 돌아가며 상처 난 그의 몸에 오줌을 쌌다. 그리고 날카로운 검으로 피부를 여러 차례 그었다. 피와 오줌이 뒤섞인 황자는 바닥에서 고통을 감내했다.지나간 일들을 회상한 그녀는 반성은커녕 오히려 통쾌했다.그러나 황자가 겪었던 걸 곧 자기가 겪어야 한다는 공포감은 사라지지 않았다.수란키가 단검을 꺼내자 이방이 기겁했다. “안 돼, 오지 마!”수란키는 쪼그려 앉아 그녀의 몸을 묶었던 밧줄을 벴다. 겁에 질려 움츠러든 이방을 마주하고 있자니 그는 말로 형용할 수 없는 분노가 들었다.‘황자는 죽음 앞에서 두려움에 벌벌 떠는 짐승보다 못한 사람에게 굴욕을 당했다.’ 밧줄을 푼 수란키는 커다란 손으로 그녀의 머리채를 우악스럽게 잡고 밖으로 끌어냈다.피부로 느껴지는 추위와 두피로 전해지는 고통에 이방은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밖으로 나온 수란키는 그녀의 머리채를 잡고 한 바퀴 돌더니 공터로 던져버렸다.눈으로 뒤덮인 공터에 18명이 누워 있었다. 그들은 실 한오라기도 걸치지 않은 채 발가벗겨 있었다. 붉은 피가 흘러나와 어느새 피 웅덩이를 만들었다. 그들 옆으로 무언가 굴러떨어졌다. 남자는 거세를 당하고 처절하게 비명을 질렀다. 거세당한 이들은 비명을 지르며 꿈틀댔다. 똑같은 상황에서 황자는 한마디 비명도 없이 견뎠다.나중에 무수한 고문을 당한 끝에 비명을 지르긴 했다. 병사들은 그의 비명에 환호했다. 누군가의 자존심을 짓밟는 건 그들에게 매우 짜릿하고 통쾌한 일이었다.몸부림
계속해서 괴롭힘을 당할 줄 알았으나 이방은 다시 오두막에 끌려갔다. 다른 이들도 같이 끌려갔다.오두막 안에 숯불이 타올랐다. 나무 판자 사이로 거센 바람이 들어와 따듯하게 있을 수 없었지만, 약간의 온기는 얻을 수 있었다. 그들은 추위와 고통에서 조금이라도 벗어나기 위해 숯불로 기어갔다. 이방의 바지는 진작에 벗겨졌다. 다리 사이로 전해지는 고통 때문에 다리를 모을 수 없었다. 방 안이 따뜻했지만 피는 여전히 흘러내렸다. 그녀의 몸 아래에 피가 흥건했다.그러나 여기 있는 사람들 전부 고통에 몸부림쳤고 아무도 그녀를 신경 쓰지 않았다. 오두막 안에는 오로지 고통스러운 신음만 끊임없이 울려 퍼졌다.누군가 오두막에 들어왔다. 이방에게 약 한 사발을 건넸다. 그러나 약 사발 안에는 비릿한 오줌 냄새가 낫고 이방은 구역질이 났다.그러나 토하지 않았다. 괜히 오줌만 더 맞게 될까 봐 두려웠다. 수란키의 손에 들어온 이상 살 길은 없다. 그녀는 약 사발에 담긴 게 독약이길 바랐다. 이 상태로 버티는 것보다 차라리 죽는 게 더 좋을 것 같았다.약을 삼키자 3황자가 들어와 그녀를 주먹과 발로 구타했다. 온 몸에 성한 곳이 없었다. 그러나 다행히도 얼굴을 제외하고는 칼로 긁은 상처는 없었다.그녀의 얼굴에 어떤 글자를 새겼는지 알 수 없지만, 어차피 죽을 목숨이었고 얼굴에 새겨진 글자에 연연할 겨를이 없었다.바닥에 눕자 오장육부가 뒤틀리는 기분이 들었다. ‘장군님은 오지 않을 거야, 난 여기서 죽을지도 몰라.’상국의 여장군이 되어서 이런 죽음을 맞이해야 되는 게 억울했다.앞으로 송석석에게 몰릴 영광들을 생각하자 마음이 달갑지 않았다. ‘송석석은 나보다 출신 배경이 좋고 목숨이 나보다 조금 값지겠지.’ ‘나도 그런 출신이었으면 일찍이 공을 세웠을 거야.’송석석은 현갑군을 이끌고 서경군과 사국군을 뒤쫓아 철수하게 했다.전북망은 사람을 이끌고 송석석의 뒤를 바짝 쫓았다. 말 위에 올라탄 송석석의 수려한 뒷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어떻게 저리
송석석과 시만자가 모닥불을 쬐고 있었다. 전북망의 말을 들은 송석석이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무슨 근거로 이 장군이 사국인에게 잡혀갔다는 것입니까?”“그런 뜻은 아니오. 하지만 전투가 시작되자마자 이 장군이 서경 병사들을 뒤쫓았고 여태 돌아오지 않았소.”시만자가 차갑게 말했다. “그럼 도성에 깔린 시신들을 일일이 확인해야겠습니다. 거기에 있을 수도 있잖아요.”“그녀는 죽지 않았소.”전북망의 눈빛이 서늘하게 변했다. “북명군 전우들끼리 어찌 그런 저주를 할 수 있단 말이오?”시만자는 모닥불에 손을 쬐며 가소롭다는 듯 말했다. “전쟁은 끝났습니다. 그러니 전우도 아니지요, 그 여인이랑 같이 묶지 마십시오.”기가 찼던 전북망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전북망은 송석석에게 시선을 돌렸다. “내가 잘못했소, 이방과 무관하오. 만약 다른 장병이 포로로 잡혔어도 구하러 가지 않았을 것이오?”송석석이 되물었다. “만약 다른 장병이 포로로 잡혔다면 장군은 2만 명이나 되는 아군을 위험에 빠뜨리면서 후퇴하고 있는 수십만 명이나 되는 적군 부대를 쫓아갈 것입니까?”전북망은 말문이 막혔다. “그건...”송석석이 답했다. “장군께서 장병의 목숨을 소중히 여기는 건 압니다. 이 장군이 적군에게 포로로 잡혔다는 증거가 설령 있다 하더라도 그녀가 후퇴하고 있는 대부대에 있다는 걸 어떻게 확신하십니까? 그리고 국경선을 벗어나면서 뒤쫓을 수도 없습니다. 다른 장병이 위험에 처할 겁니다.”옆에서 이들의 대화를 조용히 듣고 있던 몽동이가 탐탁지 않다는 듯 말했다. “옳습니다. 게다가 이 일대에 많은 유목민이 살고 있습니다. 그들은 남강에 속하지 않지요. 만약 그들의 영지를 침공하게 되면 또 전쟁이 일어날 겁니다.”그는 유목민에 대해 잘 알지는 못했지만 누군가가 함부로 그들의 영지를 침입하면 큰 사단이 일어난다는 것은 알고 있다.전북망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이 상황이 답답했다. “송 장군은 계속 손 놓고 있을 거요? 포로로 잡힌 사람은 이방 한 사람이
화가 난 전북망은 송석석의 손을 거칠게 잡고 구석으로 성큼성큼 갔다. “포로로 잡힌 걸 알면서도 구하러 못 간다는 것이오? 그녀가 어디에 있는지 알고 있는 것이오?”시만자가 그에게 채찍을 내던졌다. 전북망은 움켜쥔 송석석의 손을 풀어주며 뒤로 한 걸음 물러섰다.시만자가 차갑게 말했다. “할 말이 있으면 일정 거리를 유지해서 하십시오. 가까이 붙지 마세요.” 전북망이 미간을 찌푸리며 시만자를 쳐다봤다. 그러나 시만자는 무공이 뛰어난데다가 그의 수하가 아니어서 관리하기 어려웠다. 애써 화를 억누른 전북망은 송석석에게 물었다. “어디에 있는지 알고 있소?”송석석이 고개를 저었다. “모릅니다. 사막 어딘가에 있을 수도 있고 초원이나 산속에 있을 수도 있습니다. 이 장군이 어디에 있든 우리는 현갑군을 보내 수색할 수 없습니다. 너무 위험한 일입니다.”“그럼 우린 여기서 뭘 기다리는 것이오? 그들이 포로를 돌려보낼 때까지 기다리겠다는 거요?” 전북망이 분노에 차서 소리쳤다.송석석의 눈빛이 어두워졌다. “네, 포로를 돌려보낼 때까지 기다려야지요.”전북망은 어이가 없었다. “미쳤소? 그들이 순순히 이방을 돌려줄 것 같소?”송석석이 싸늘하게 대꾸했다. “물론 쉽지 않겠지요. 세상에 어디 쉬운 일이 있겠습니까, 성릉관 협정도 쉽게 얻은 게 아니잖아요.”전북망이 멍한 얼굴로 물었다. “무슨 소리요?”송석석이 전북망과 시선을 맞췄다. “수란키가 성릉관에서 대군을 이끌고 녹분성에서 철수한 게 이 장군이 북명왕께서 남강 전쟁을 원조한다는 소문을 퍼뜨렸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건가요? 정말 그 말을 믿었다면 장군이 될 자격은 없는 것 같네요. 병사도 못 될 것 같습니다.” 전북망도 물론 의심을 했다.마지막으로 이방에게 물을 때 역시 의심은 하고 있었다. 하지만 지나간 일을 계속 붙잡고 있을 수도 없는 노릇이고, 협정도 체결됐기에 더는 따지지 않기로 했다.전북망의 목소리가 미세하게 떨렸다. “그러니까 수란키가 왜 이런 짓을 벌인 것이오? 알려주시
송석석은 장작의 불길이 서서히 줄어드는 것을 보고 장작 몇 개를 추가했다. 불길이 빠르게 마른 장작을 집어삼켰다. 일렁이는 불꽃이 그녀의 눈동자에 비쳤다. 순간, 송석석은 장군부에서 친정집으로 돌아오던 날, 집안에 널려있는 시체들과 핏자국을 봤던 날이 떠올랐다.가슴이 턱 막혀 제대로 숨 쉬는 것마저 힘들었다.송석석은 누구보다 이방이 죽기를 바랐다. 그러나 이방이 죽는다고 해서 모든 원한이 사라지는 건 아니다.그녀가 이런 생각을 할 정도면, 수란키도 그녀와 다르지 않을 것이다.수란키는 이방을 쉽게 죽이지 않을 거라는 걸 송석석은 알고 있었다. 원수는 송석석더러 여기서 대기하라고 했다. 수란키가 원수에게 소식을 전한 것 같았다.원수는 이리에 자신의 정탐꾼이 있다고 했다. 송석석 시몬에도 정탐꾼이 있을 것 같았다.결국 그들이 여기서 기다리는 건, 원수의 뜻이면서도 수란키의 뜻이기도 했다.밤늦게까지 기다리면서 졸음과 피곤함이 쏟아졌다. 다행인 것은 장작불이 활활 타올라 추위는 피했다.후방에서 병사들에게 식량을 보내왔다. 볶음밥일 뿐이지만 전쟁터에서 배를 채울 수 있다는 것만으로 충분했다. 방 장군이 사람들을 데리고 식량을 조달하러 왔다. 그는 송석석에게 원수의 군령을 전달했다.“계속 기다리시오. 경계가 풀릴 때 즈음 교대로 자면 된다고 했소.”“이렇게 많은 사람이 여기서 대기해야 한다는 거요?” 송석석이 물었다.“원수님은 필요하다고 생각하오. 상대를 쉽게 믿으면 안 된다고 했소.”송석석은 원수가 수란키와 단둘이 어떤 협정을 맺었다는 확신이 들었다. 원수는 모든 것을 알고 있었다.방 장군 역시 원수의 명령이 이해되지 않았지만, 군령이었기에 따르는 수밖에 없었다.식량을 전달한 방 장군은 다시 돌아갔다. 남강은 수복되었지만, 전쟁터의 시신들을 처리하지는 못했다. 희생된 장병의 시신을 수습해야 한다. 앞으로 해야 할 일이 많았다.전쟁의 승리는 그들에게 큰 기쁨을 가져다줬다. 그러나 기쁨은 항상 상실의 슬픔과 고통을 동반했다. 같이
전북망은 멍하니 그녀를 바라보았다.송석석은 현갑군의 부사령관이고 정5품 무장이다. 그녀가 내뱉은 말에는 무게가 실린다.전북망이 데리고 온 병사들의 수는 많지 않았다. 그래서 현갑군이 함께 해주길 바랐다. 막 돌아온 그의 병사들은 피곤함에 찌든 상태다. 하룻밤 쉬었던 현갑군이 함께 한다면 서경군이나 유목민을 만났을 때 이길 수 있을 것 같았다.전북망이 속삭였다. “현갑군과 함께 가고 싶소. 이렇게 부탁하오, 그간 내가 잘못했소. 당신이 내린 벌 기꺼이 받을 테니 제발 도와주시오. 이틀이나 기다렸지만 어떤 소식도 듣지 못했소. 이 장군도 더는 버티지 못할 것이오. 그대가 이 장군을 얼마나 싫어하는지 나도 알지만, 이것 또한 그녀를 찾은 뒤 전부 사죄하겠소.”송석석이 차가운 얼굴로 말했다. “사적인 원한과 상관없습니다. 현갑군은 여기서 움직이지 못합니다.”전북망이 주먹을 움켜쥐었다. “내가 이리 애원을 하고 있는데, 왜 안 된단 말이오? 원하는 게 무엇이오?”옆에서 듣고 있던 시만자가 코웃음을 터뜨렸다.“아주 간절하게 부탁을 하네요? 너무 간절해서 당장 주먹을 날리고 싶은 마음입니다. 현갑군을 데리고 초원에 간다고요? 그러다가 서경군이나 유목민들을 만나면 현갑군을 내세우려고요?”“닥쳐라!” 시만자를 죽이고 싶을 정도로 화가 난 전북망은 고함을 질렀다. “네까짓게 뭔데, 감히 그딴 말을 하는 거지?”턱을 치켜든 시만자가 경멸스러운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웃기지도 않네. 네놈과 말 섞는 게 뭐 그리 대단하다고 신분을 논해? 네가 내 앞에서 방자하게 굴 깜냥은 돼?”“송 장군! 아랫사람 관리 좀 잘하시오! 주제도 모르고 내 앞에서 설치지 않소!”그러나 시만자보다 만두가 더 빨랐다. 주먹을 휘두르고, 두 발을 앞으로 내딛으며 전북망에게 달려들었다.주먹은 곧장 전북망의 머리, 얼굴, 몸을 강타했다.몽동이는 반응 속도가 조금 느려지긴 했지만 두 다리를 돌리며 풍차처럼 날아올랐다. 그렇게 날아와 전북망을 걷어찼다.단체 공격에 전북망
그의 이름은 신이었는데 그를 아는 사람들은 모두 그에 대해서 말할 때, 경멸하는 기색을 띠었고, 그의 이야기를 들으면 모르는 사람까지 모두 침을 뱉으며 뻔뻔하다고 할 정도였다. 알다시피 애인과 야반도주하는 것은 사람을 죽이고 불을 지르는 것보다 더 욕먹을 일이니 말이다. 많은 사람들은 그에게 후회하냐고 묻기도 했다. 그녀는 시집간 것을 후회하지 않지만 죄책감을 느끼긴 했다. 왜냐하면 그로 인해 시 씨 가문의 명성이 손상되어 형제자매들과 조카들이 혼사에 어려움이 생겼기 때문이었다. 신이는 시 씨 가문의 아가씨로서, 태어날 때부터 온갖 보살핌을 받아왔다. 먹는 것은 물론 모두 산해진미이고, 입는 것도 모두 능라 비단이었다. 게다가 보모님과 오라버니의 총애까지 한 몸에 받았다. 하지만 그녀에겐 한 가지 결함이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열네 살 때까지 월사가 오지 않은 것이었다. 많은 의사들을 불러 진찰을 받고 밤낮으로 약을 먹었지만 아무런 효과가 없었다. 어머니는 그녀에게 몸이 차서 그러니 몸조리를 하면 나을 수 있다고 위로했다. 하지만 그녀는 이미 몰래 의사가 부모님께 하는 말을 들었다. 의사는 그가 몸이 차서 그런 병이 생긴 것이 아닌, 아이를 키우는 곳이 어린아이와도 같아서 평생 아이를 가질 수 없다고 했다. 그리고 그녀의 몸이 마치 작은 꽃병과 같아서 꽃을 꽂을 수는 있지만 나무를 심고 꽃을 피워 열매를 맺는 건 불가능하다고 비유했다. 그녀는 아이를 낳지 못한다는 건 여자에게 어떤 의미인지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어머니는 그녀를 속일 수 없다는 것을 알고, 나중에 좋은 사람에게 시집가서 부군에게 첩을 들인 후, 첩이 낳은 아이를 친자식처럼 키우라고 조언해주었다.시 씨 가문이라는 후원이 있으면 그녀가 아이를 낳을 수 없어도 아무도 그녀의 지위를 흔들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시 씨 가문의 재물은 그녀가 평생 부귀하게 살기에 충분했다. 신이의 조모도 그녀에게 아이를 낳을 수 없으니 자세를 낮춰야 한다고 했다. 시 씨 가문의 딸이라고
추운 겨울이 되자 눈이 내려 성릉관은 하얗게 뒤덮였다. 세상이 마치 깨끗해진 것처럼 보였다. 이황자는 몇 년 동안 너덜너덜한 승복을 입고 발우를 받쳐 들고는, 가는 길에 동냥을 하다가 절을 보면 이틀 묵으며 부처님께 참회하면서 살았다. 사실 그는 원래 있던 절에서 계속 지낼 수 있었다. 편안하진 않지만 풍찬노숙할 필요도 없고 굶주림과 추위에 시달리지 않아도 되었다. 하지만 그런 안일한 곳에서는 평생 죄를 씻을 수 없다고 생각했고, 계속 길을 걷고 계속 고생해야 마음이 조금이나마 편했다. 그가 성릉관에 도착했을 때 짚신은 이미 찢겨 있었고 발바닥에는 두꺼운 굳은살이 박여 있었다. 이제는 신발을 신지 않고도 자갈이 가득한 길을 걸을 수 있게 되었다. 이런 추운 날씨에는 모든 옷을 껴입어도 추위를 막을 수 없었지만 이미 익숙해진 뒤였다. 그는 눈보라를 맞으며 성릉관에 위치한 감은사로 향했는데, 몇 년 동안 발걸음을 멈춘 적이 없는 탓에 고단함이 뼛속까지 스며들었다. 심지어는 이틀 동안 아무것도 먹지 않아 그는 눈이 가득 쌓인 길에서 의식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그리고 깨어났을 때 그는 따뜻한 두꺼운 이불 속에 누워 있었다. 그가 있는 방에는 숯불이 피워져 있었고, 살짝 열린 창문으로 눈에 눌려 허리가 굽은 나뭇가지가 보였다. 그는 눈동자를 돌려 주위를 둘러보았다. 이렇게 편안하고 따뜻한 느낌은 정말 오랜만이었다. 그의 마음속에 순간 욕심이 생겨 조금만 더 누워있고 싶어졌다. 그런데 바로 그때, 문이 활짝 열렸다. 그가 벌떡 일어나 앉았는데, 갑자기 눈앞이 핑핑 돌더니 다시 힘없이 침대로 쓰러지고 말았다. “움직이지 말고, 가만히 누워 있거라.” 이때 누군가가 부드러운 말투로 말하면서 약그릇을 그의 침대 옆에 놓았다. 그는 말하는 사람의 목소리가 익숙해, 어지러움을 가라앉히고 고개를 돌려보니, 그 사람은 얼굴에 미소를 띠고 있었다. “오랜만이야.” ‘서우 형?!’ 그는 자신이 잘못 보았을까 봐 다시 자세히 보려 했지만, 몸이 너무 어지러운
대황자는 봄 사냥 때 숙청제에게 꾸중을 듣고 돌아간 후 앓아누웠다. 당시 이황자와 서우가 모두가 걱정했는데 덕비는 오히려 기뻐했다. 그는 이번 일을 겪으면서 황제폐하께서는 분명히 대황자를 싫어하게 될 것이라고 했다. 덕비는 이황자를 안고 반드시 부지런해야 하고, 태부와 황숙의 말을 잘 듣고 누구보다 잘 배워 황형을 제압해야 한다고 당부까지 했다. 그로 인해 이황자의 마음은 몹시 복잡했다. 덕비가 줄곧 그에게 태자와 황제가 되는 것이 얼마나 좋은 지 말해주었을 때 비록 그도 마음이 설렜지만 자신과 거리가 먼 얘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심지어 지금 그와 대황형, 서우 형, 그리고 셋째 동생이 사이가 좋아 도저히 대황형을 미워할 수가 없었다. 매일 모순적으로 지내다 보니 오히려 학업이 나빠졌고 승마 연습을 할 때도 여러 번 실수를 했다. 하지만 덕비는 이상하게 그를 탓하지 않았고 며칠 동안 계속 게으르게 하라고 했다. 그렇게 덕비는 이황자를 데리고 복마마를 자주 뵈러 갔고, 복마마 궁전에서 숙청제를 만날 수도 있었다. 덕비는 며칠 동안 그곳을 드나들더니 어느 날 굳은 표정으로 다시는 가지 않겠다고 말했다. 그러고는 차가운 말투로 청이에게 자신의 보살핌이 없으면 아이가 태어날 수 있는지 보겠다고 했다. 황제폐하를 자주 뵈러 갈 수 없어 아쉬웠지만 이황자는 마음을 가다듬고 공부와 승마술에 전념했다. 이황자는 당시 앞날이 어떻게 될지도 몰랐고, 비록 매일 힘들긴했지만 한편으로는 즐거웠기에, 계속 이렇게 지내는 것도 좋을 것 같다고 생각했었다. 그리고 숙청제의 천추세에 승마대회를 개최할 예정이니 세 황자와 서우도 가서 겨뤄 보기로 했다. 원래 그런 대회에서 황자들은 재미있게 참석만하면 되지만, 덕비는 그 경기를 몹시 중시했다. 덕비가 이황자에게 마름쇠를 건넬 때, 그는 하늘이 무너져내리는듯한 기분을 느꼈다. 이황자는 원하지 않았다. 그는 절대로 그렇게 하고 싶지 않았다. 대황형의 목숨을 앗으려 하다니, 이황자는 처음으로 어마마마가 무서워졌다.하
이황자의 출가하기 전의 이름은 사범이었다. 어렸을 때부터 이황자가 가장 많이 들었던 평가는 총명하고 지혜로우며 세 황자 중에서 가장 뛰어나다는 것이었다.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그는 진짜라고 믿으며, 자신이 자랑스럽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가 이런 말로 인해 자랑스러워할 때마다 덕비는 매번 그를 바닥으로 밀쳤다. 그녀는 늘 연민과 복잡한 감정이 가득한 눈빛으로 그를 보며 말했다. “내 뱃속에서 태어나 평생 그 바보에게 밀리게 생겼구나. 바보 주제에 운은 또 얼마나 좋은 지.” 그는 어릴 때부터 그런 말을 귀에 익힐 정도로 들었다. 하지만 덕비는 사람들 앞에서 말하지 않고 매번 사적으로만 그에게 말했다. 그는 어렸을 때 어마마마가 대황형을 가장 싫어하면서 왜 매번 자애롭고 온화한 눈빛으로 대황형을 보며, 분명 바보라고 해놓고 총명하다고 칭찬하는지 몰랐다. 이해가 안 돼서 몰래 청이에게 물어보았더니 청이는 한숨을 쉬며 그의 머리를 어루만지며 말했다. “이황자 님, 마마께서는 이황자 님을 위해서 계획을 세우고 계신 거예요.” 사실 그때까지만 해도 그는 어머니가 자신을 위해 무엇을 계획하고 있는지 몰랐다. 하지만 그가 말을 들을 때마다 어머니는 기뻐하셨고 그에게 한숨을 쉬거나 애처로운 눈빛을 보이지 않았다. 숙청제가 그를 보러 올 때마다 덕비는 그가 책을 얼마나 좋아하는지 알려주었다. 그러자 숙청제는 그에게 어떤 책을 읽는지, 그리고 어떤 내용을 기억했는지도 물었다.그는 매번 대답을 아주 잘해서 숙청제를 흡족하게 했다. 답은 모두 미리 외운 것이기 때문에 어려울 건 없었다.가끔은 숙청제가 그에게 대황형이 괴롭히거나 장난감을 빼앗지는 않는지 물어보기도 했다.하지만 그런 질문에도 정답이 있었는데, 그는 매번 자기가 동생이니 황형에게 양보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말했다. 이황자가 매번 그렇게 대답할 때마다 숙청제의 눈빛은 몹시 복잡했는데, 이황자는 그 눈빛을 이해할 수 없었고 이해하고 싶지도 않았다. 그는 그저 숙청제가 잠시 침묵한 후에 그의 머리
어릴 때부터 친했던 두 친구는 각자의 분야에서 항상 최선을 다했다. 그렇게 수철이 약을 접하게 되면서 약과 의리는 그가 신약산장을 의지하는 모든 것이 되었다. 산에 내려가 의관을 차리고 사람들을 치료할 수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매번 참기만 했는데 서우가 왔다 간 후 보내온 편지를 본 그는 산에서 내려갈 희망이 생겨 마음이 부풀어 잠이 오지 않았다. 그는 예전에 부상에 시달린 적이 있어서 열심히 통증과 부상을 치료하는 약을 연구했는데, 의술이 전면적인 나머지 뒤처지지도 않았다. 그의 마음속에는 지난 몇 년동안 한 번도 타오르지 않았던 한 줄기의 불이 타오르고 있었다. 신약산장에 도착한 순간부터 그는 자신이 설령 살아갈 수 있다 하더라도 이번 생은 그곳에서 지낼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깨달은 채 살아가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신분과 얼굴을 바꾸고, 배운 것을 가지고 산에서 내려갈 수 있다면, 그는 유용한 사람이 될 수 있고 더 이상 숨지 않고 떳떳하게 살 수 있었다. 그 생각에 그는 며칠 동안 흥분한 상태로 제약 공장에서 먹고 마셨다. 사부님은 그런 그의 모습이 조금 두렵게 느껴져 사공에게 편지를 써 알리려고 했다. 그는 사부에게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환한 미소를 띠었다. 그 웃음에 놀란 사부님은 심지어 무당을 불러 귀신이 씐 건 아닌지 보려고까지 했다. 하지만 서우 형이 성공하지 못할 수도 있으니 그는 사부에게 아무것도 말하지 않았다. 비록 그가 모든 것을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있긴 하지만 나중에 너무 실망하지 않도록 마음의 준비를 항상 해야 했다. 날이 지나고 더위와 추위가 오가더니 벌써 2년이란 세월이 흘렀다.추분, 날씨가 상쾌한 어느 가을, 하늘의 밝은 태양은 사람을 뜨겁게 하지 않았고 하얀 구름들은 동쪽에서 서쪽으로 불어 들어오고 있었다. 서우는 다시 한번 신약산장에 발을 들였는데, 이번엔 그의 서동인 진소설을 데리고 왔다. 진소설은 몽동이를 따라 무술을 익혔다. 그런데 노력한 사람은 역시 보답을 받는다고, 비록
“사정언, 너 말 좀 그만해.” 송석석은 눈살을 찌푸리고 서우에게 매달려 쉴 새 없이 말하는 딸을 혼냈다. 새빨갛게 그을린 작은 얼굴에 닭장처럼 헝클어진 머리카락은 한 눈에 봐도 밖에서 뛰어놀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우가 돌아오자마자 그녀는 쉬지도 않고 사촌 오빠에게 길에서 본 재미있는 일들을 물었다. “어머니.” 사정언은 눈을 크게 떴다. 안 그래도 큰 눈을 더 크게 뜨니 왠지 억울해 보였다. 그녀의 외모는 부모님의 장점만 닮아 있었다. “제가 이렇게 오랫동안 사촌 오라버니를 만나지 못했으니, 당연히 할 말이 많지요. 하루만 못 봐도 3년 못 본 것처럼 길게 느껴진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그게 무슨 말이야? 대체 누가 그런 말을 가르쳐줬어?” 송석석이 눈살을 더욱 찌푸렸다. “왕사백이요. 그가 며칠 전에 매산으로 갔었는데, 돌아오자마자 시 고모를 안고 그렇게 말했었습니다.” 그녀의 말에 시만자는 고개를 숙여 송석석의 눈빛을 피했다. 그녀는 그때 정언이 나무 위에 숨어 있을 줄은 몰랐다. 알았다면 아이 앞에서 껴안고 그런 오글거리는 말을 할 수 없었을 것이었다. 그녀는 이 아이가 말을 따라 하는 능력이 아주 뛰어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하지만 이 나이의 아이들이 왜 어른들의 말을 듣는 것을 좋아하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녀는 이맘때쯤에 최대한 어른들과 멀리 떨어져 있었는데 말이다. 사정언은 대답한 후에도 계속 서우를 잡고 말했다. “오라버니, 혹시 상서에 갔어? 상서에서 시신 업는 것을 봤어? 정말 소국이 말한 것처럼 앞에서 종을 흔드는 도인이 있고, 뒤에 좀비들이 따라가는 거야? 그들은 걸어가 아님 뛰어가? 꼭 밤에만 볼 수 있는 거야? 낮에는 햇볕이 쨍쨍해서 볼 수 없는 거야? 그들은 말할 줄 알아? 뭘 먹어? 그리고 그곳엔 주술을 잘한다고 들었는데 혹시 미인을 본 적이 있어? 그런 미인은 오라버니가 마음에 드는지…….” “그만해!” 송석석도 이내 참지 못하고 호통을 쳤다. “보주, 서주, 어서
송석석은 이번에 외출할 때 황제에게 유람하러 간다고 했다.하지만 그녀는 신약산장에 오래 머물지 않고 7일 만에 떠나 만종문으로 향했다.그녀는 원래 진성으로 돌아가 홍현 고모를 찾고 싶었지만 평무종 고모를 직접 찾아가서 분장술을 가르쳐 달라고 부탁하는 것이 낫겠다고 생각했다.분장술은 어렵지 않지만 능숙하게, 아무도 알아채지 못할 정도로 하려면 한두 달 만에 배울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간단한 분장술은 기존의 얼굴에도 할 수 있었지만 비가 오기만 해도 쉽게 흔적이 드러날 수 있었다.그러니 간단한 분장술만 배워서는 안 되었다.그리고 또 다른 미용술은 가면을 만드는 것인데 일반적인 가면은 일정한 두께가 있어 답답하고 오랫동안 착용하면 얼굴에 상처가 날 수 있다.게다가 가면을 착용할 때는 특수 물약을 묻혀야 했기에, 뜯을 때도 얼굴에 상처가 입을 수 있었다.운익각 사람들은 가면을 착용할 때 오래 착용하지 않았다. 게다가 정탐꾼들은 무공도 괜찮고 경공도 높아 임무를 수행할 때만 가면을 착용해서 물약을 묻힐 필요가 없었다. 왜냐하면 벗겨져도 얼굴에 검은 천으로 복면을 쓰고 있어서 알아볼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그리고 일반인들이 변장해서 탐문할 때 사용하는 것은 변장의 첫 번째 방법이었다.평무종은 서우의 요구를 듣고 말했다.“얼굴에 오래 쓰고 있을 수 있으면서도 원래 피부를 해치지 않고 잘 벗겨지지 않는 가면이라, 그럼 상어가죽으로 만드는 것은 어떠냐.”“상어가죽이 무엇입니까?”서우는 매미의 날개처럼 얇고 물에 젖어도 흔들리지 않는 상어비단은 들어본 적이 있었지만 그건 엄청 귀중한 비단이었다.그러자 평무종이 설명했다.“상어가죽은 분장술에서 쓰이는 가장 좋은 소재이다. 통풍이 잘 되고, 얼굴에 단단히 붙어 쉽게 떨어지지 않아 빗물을 걱정할 필요도 없었다. 심지어 눈으로 보나 만지나 모두 진짜 피부와 다르지 않다. 하지만 상어가죽으로 가면을 만들려면 상어 눈물을 사용해서 실을 짜내고 다시 밑감을 만들어야 해서 매우 번거롭다.”그러자 서우가 물었다.“
그렇게 두 사람은 촛불을 들고 한참동안 이야기를 나누었다. 하지만 조정의 일은 일절 말해주지 않은 탓에, 수철은 지금 나라가 안정적이라는 사실만 알 수 있었다. 그는 이미 대황자가 아니다. 따라서 지금 그가 지켜야 할 것은 자신의 목숨뿐이고, 다른 것은 이미 그와 상관이 없어졌다. 그는 조정에 관한 화제를 꺼내면 모두가 예민해질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어릴 때 그는 왜 자신이 죽어야 하는지 몰랐지만, 나중에 단 사공이 와서 조금씩 분석해 주었고, 그의 사부님도 이해관계에 대해 이야기해준 적이 있었다. 그와 셋째 동생 사이에 가족의 정으로 목숨을 걸고 불안정한 여생을 걸어야 한다면 결코 모두에게 좋은 일은 아니었다. 그래서 그는 받아들기로 한 것이었다. 삶은 계속될 텐데, 매일을 의미 있게 잘 보내야 목숨을 건진 보람이 있기 때문이다. 서우가 그의 다리에 대해 물었다. “내가 오기 전에, 고모가 그러던데 넌 다리를 다쳐서 일어날 수 없다고 했는데 지금은 어떻게 걸을 수 있게 된 거야?” 그러자 수철이 말했다. “부황께서 승하하신 해에 산장에서 몇 사람이 와서 진찰해 보더니 정말 심하게 다쳤다며 이대로 두었다가는 계속 아플 테니 반드시 극단적인 방법으로 치료해야 한다고 하더군.” 그러자 서우는 호기심에 물었다. “어디서 온 신의야? 그럼 그때부터 치료한 거야?” 그 물음에 수철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북당에서 왔는데 그 사람은 그 말만 하고 날 치료해주지 않고 당일에 떠났어. 그러다가 지난달에 와서 약주를 줘서 그걸 마셨는데, 난 하루 종일 혼수상태에 빠졌어. 심지어 깨어나니 다리가 아파 죽을 것 같았지. 그런데 며칠이 지나자 점점 좋아지더니 누군가 부축하면 일어날 수 있게 되었어. 처음에는 잘 일어나지 못했는데 시간이 지나자 점점 똑바로 설 수 있게 되었지. 그리고 지금은 혼자 몇 걸음은 걸을 수 있게 됐어.” 그러자 서우가 놀란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북당신의? 그분께서 아직 살아 계셔?” “아니, 돌아가셨어. 내가 일어나
[번외편]신약산장의 진달래가 온 산천지에 피었다. 다채로운 경치는 사람들로 하여금 황홀하게 만들었다. 특히 신약산장에 가본 적이 없는 사람들마저 그곳에 살고 싶어 할 정도였다. 하지만 예외인 사람이 한 명 있었다. 그는 말을 타고 산 아래에 도착해 말을 잘 배치한 후 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하지만 오직 눈앞의 길만 보았고 찬란한 꽃들은 그의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는 빠르게 걸으며, 가끔 경공을 사용하기도 했다. 신약산장이 비록 높지는 않았지만 은밀하게 숨겨져 있었고 많은 갈림길이 있었다. 하지만 그는 지도를 수도 없이 봐 온 덕분에 신약산장으로 향하는 길을 이미 마음속에 깊이 새기고 있었다. 약관 때 그가 작위를 계승했을 당시, 작은 고모가 많은 선물을 주었는데 그중 가장 큰 선물이 바로 지도였다. 그리고 그에게 온몸의 피가 끓게 하는 소식을 알려주었는데 바로 수철이 아직 살아있다는 사실이었다. 당시, 그는 한숨도 자지 못했고 옛날의 모든 일들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작위를 받은 후 입궁해서 사은하고 선조들에게 제사를 지낸 후 답방 인사를 드려야 했는데, 작은 고모의 말로는 인맥을 굳건히 하기 위함이라고 했다. 그래서 무려 보름이 지난 후에야 비로소 신약산장으로 출발했다. 산 아래에 도착하자 그는 날아가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하지만 막상 산문을 본 순간, 강한 슬픔에 휩싸여 발걸음을 멈추고 그저 멍하니 서 있을 뿐이었다. 작은 고모는 그에게 수철이가 두 다리를 못 쓰게 되었고, 불행 중 다행히 치료 후에 목숨은 건졌지만 약 없이는 살 수 없게 되었다고 했다. 그것은 평생 약을 달고 의자에 앉아 있거나 침대에 누워서 지낼 수밖에 없다는 뜻이었다.그의 기억 속의 수철의 모습은 두 가지로 나뉘었는데, 하나는 제멋대로며 횡포한 모습이었고, 다른 하나는 성실하고 열심히 공부하며 태후마마와 황제폐하를 실망시킬까 봐 무술이든 공부든 최선을 다 했던 모습이었다. 특히 무술은 고모부가 재미있게 가르쳐 준 덕분에 그들은 항상 활기차게 뛰어다닐 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