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은 시몬성 안에서 시작됐고 백성은 전쟁이 시작되자마자 문을 걸어 잠그고 숨죽였다.사국의 병사들이 여기 침입했을 때, 수많은 백성이 노예가 되었다. 아녀자들은 겁박과 모욕을 피할 수 없었다. 백성은 성이 뚫리는 게 얼마나 대규모적인 전쟁인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지만, 또 마음속 한편으론 북명군이 사국인들을 몰아내기를 바랐다.싸움이 한창 진행될 무렵, 이방은 대군을 데리고 성내로 진격해 앞으로 나아갔다. 이 전쟁터에 있는 여인이 그녀 혼자만은 아니었다. 하지만 유일하게 여성 전투복을 입고 있었다. 이것은 병부가 특별히 그녀를 위해 만든 것이다.그녀의 투구(盔甲)에는 빨간 두건이 있었다. 남자 병장들 못지않다는 상징이기도 했다.혼란스러운 전쟁 속에서 그녀는 유난히 눈에 띄었다.수란키도 그녀를 발견했다. 서경의 많은 병사도 그녀를 발견했다.그녀에게 맞서는 책략은 이미 시작되었다. 병사들이 싸우다가 도망을 치면 승부욕이 강한 이방은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다. 당장 쫓아가 그들을 죽이려 할 것이다. 이게 그들의 책략이다.전북망은 이방을 발견하고 큰 소리로 외쳤다. “이 장군, 쫓지 마시오!” 전북망은 이상 낌새를 알아차렸다. 양군은 시몬 시내에서 싸웠다. 도시 전체가 전쟁터로 변했다. 승패는 결정되지 않았고 적군은 후퇴한다는 나팔을 불지 않았다. 결국 앞으로 나아가며 싸울 수밖에 없다. 이 상황에서 도망갈 수 없었다. 그러나 상대는 후퇴했다. 이유는 하나뿐이다. 적을 유인하기 위해서다. 그리고 자세히 보면 그들은 서경 출신의 병사들이다. 전북망은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서경인들이 이방에게 적대심을 품고 있는 것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성릉관 협정 때문이라고 어림짐작했다. 입으론 이방을 믿는다고 했지만, 마음속으론 이방을 의심했다.“이 장군, 돌아오시오!” 전북망은 소리를 지르며 그녀를 쫓아가려 했으나 적군들 사이에 얽혀 앞으로 나아갈 수 없었다. 그래서 적군을 물리치기 위해 싸움을 하면서 이방에게 눈을 떼지 않았다.이방도 전
수란키와 빅토르는 전쟁터에 나가지 않은 채 높은 곳에 서서 지켜보았다.도체에 시체들이 널브러져 있었고 희생당한 병사들의 피로 도시 전체가 붉게 물들었다.이 전쟁의 대다수는 서경 병사들과 사국 병사들이다. 이 전쟁에서 할 수 있는 건 최선을 다해 싸우는 것뿐, 어떤 전술도 소용이 없었다. 빅토르는 조만간 남강을 포기해야 한다는 것을 짐작했다. 시몬에게 패배할 것이다. 서경인들이 도우러 온 것은 상국인을 한 명이라도 더 처단하기 위한 것임을 그는 잘 알고 있다.이방이라는 여장군을 죽이는 것도 포함된다.그들은 상국을 이기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더욱이 사국과 남강의 분할을 바라지 않았다. 이곳에 온 대다수는 분풀이하기 위해서다.빅토르는 화가 났다. 서경인이 오지 않았다면 그들은 일찍이 패배했을 것이다. 이렇게 오래 싸우지도 않았을 것이고 무수한 장병을 잃지 않았을 것이다.빅토르가 수란키에게 싸늘하게 말했다.“분풀이하러 온 거면 도시 전체에 분풀이하는 게 어떻소?”그는 수란키가 상국인을 이토록 증오하는 이유를 알고 있다. 성릉관 전쟁에 관해 들은 적 있다. 그 전쟁에서 서경 녹분성의 어느 마을이 몰살당했다고 했다.수란키가 분노에 차서 말했다. “전쟁은 백성에게 있어서 집이 풍비박산 나고 도처를 떠돌아다녀야 하는 큰 재앙이오. 그게 짐승과 무슨 차이가 있단 말이오? 설령 적국의 백성이라도 백성을 학살하는 건 똑같소.”빅토르는 멀리서 병사들이 핏물에 쓰러지는 걸 지켜보았다. 그는 마음 한구석이 초조했다. 더는 어떤 전술도 내놓을 수 없었다.“이런 말을 할 줄은 몰랐소.” 빅토르는 살을 에는듯한 바람을 맞으며 말을 이었다. “자신의 백성이 죽어나는데, 당신은 상대에게 자비를 베푸는구려.”“진정한 무장은 전쟁을 싫어하오.” 수란키는 하늘에서 휘날리는 눈꽃을 바라보았다. “눈이 오는군. 승패는 이미 결정됐소. 더 많은 병력과 장군을 잃고 싶지 않으면 철수하시오.”빅토르가 물었다. “죽이고자 했던 사람은 죽였소?”수란키의 입가에 잔잔한
사국 병사와 서경 병사들이 대대적으로 후퇴하자 격전을 벌이고 있던 북명군은 어리둥절했다.철수한다는 나팔 소리를 사국의 전술 중 하나로 착각했다. 자신들을 유인하려는 계략인 줄 알았다.하지만 시몬에서 나간다는 사람들을 뒤쫓을 이유가 없었다. 애초의 목적이 그들을 쫓아내는 것이지, 전군을 몰살시키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결국 북명군은 멍하니 갑옷을 버리고 도망치는 적군들을 지켜보았다.‘승리가 이리 쉬운 거란 말인가?’‘모두 순국할 준비를 했거늘, 서경인들이 대대적으로 돕기 위해 왔는데 이리 빨리 패배를 인정한다고?’원수가 직접 전쟁터에 나왔다. 매우 잔혹한 전쟁이 될 거라는 거다. 그리고 확실히 적군은 매우 잔혹하게 죽었다. 거리에 시체가 가득했고 도시 전체에 피비린내가 났다. 눈이 내려 바닥의 핏물을 덮을지언정 피비린내를 감출 수 없었다.하지만 대대적으로 후퇴하자 매우 큰 도시이고 많은 마을이 있다.방 장군은 사령부로 달려갔다. “원수님, 쫓을까요? 백성을 학살하고 마을을 풍비박산하면 어찌합니까?” 사여묵이 말했다.“수란키는 그러지 않겠지만 빅토르는... 송 장군더러 현갑군을 이끌고 끝까지 쫓으라고 하시오.”사여묵은 수란키에 대해 잘 알고 있다. 서경에서 폭력적으로 굴지 않았다. 마을 전체를 위협하는 일은 수란키에게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그러나 남강에서 오랫동안 전쟁을 해왔던 빅토르는 어떤 군공도 세우지 못했다. 백성을 죽여 분풀이할 수 있었다.추격자들이 있으면 빅토르는 백성을 학살하지 않을 것이다.“네!” 방 장군은 송 장군에게 달려가 원수의 군령을 전달했다.송석석이 도화창을 들고 현갑군에게 외쳤다. “현갑군은 지금 즉시 나를 따라 사국인이 도망치는 걸 돕는다!”현갑군이 움직이기 시작하자 다른 병사들도 따라갔다. 이미 살기로 가득 찬 그들은 순순히 사국인들이 시몬에서 도망치게 놔둘 수 없었다. 한편, 전북망은 적군이 후퇴할 때 이방을 찾아다녔다. “이방! 이방!”위풍당당한 발소리에 비해 목소리가 너무 낮았다. 그는 송석석을
이방은 적수를 힘겹게 막아냈다. 그녀의 시야로 점점 많은 병사가 들어왔다.그들은 전쟁터에 가지 않았다. 여기에서 그녀가 오길 기다렸다. 이방은 그제야 전에 자기가 이런 계책으로 성공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그리고 오늘 그녀는 이 계책에 제대로 당했다. 이방과 이진흥은 무공이 좋아 얼마간 버틸 수 있지만, 나머지 병사들은 달랐다. 그들은 피를 흘리며 바닥에 쓰러졌다. 서경인은 일말의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았다. 살벌하고 과감하게 검을 휘둘렀다. 겁에 질린 이방은 도망치려 했지만, 그녀의 뒤를 서경 병사들이 손에 장검을 들고 그녀가 빠져나갈 수 없게 막고 있었다.당황한 이방은 제대로 반응하지 못했다. 두려움 때문에 맥이 풀려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러던 중 검 하나가 그녀의 팔을 스쳐 지났고 이방은 그제야 정신을 차렸다. 그녀는 무의식적으로 팔을 뻗어 앞에 있던 어린 병사를 잡아 몸을 막았다. 어린 병사의 머리와 얼굴에서 피가 줄줄 흘러내렸다.어린 병사는 힘겹게 돌아서서 믿을 수 없다는 눈빛으로 이방을 바라보았다. 그들은 일찍이 성릉관에서 함께 공을 세웠던 전우였다. 이방은 그때 다 같이 난관을 극복하자며 병사들의 기를 북돋았다. 그런 이방이 지금...이방은 잡고 있던 어린 병사를 밀어내고 적수의 검을 밀쳤다. 그리고 몸을 돌려 황급히 도망쳤다.그녀는 경공으로 뒤의 적군을 뛰어넘으려고 시도했지만, 적군이 일제히 날카로운 검을 뽑아든 탓에 두 발은 고스란히 검날에 찍혔다. 결국, 온몸을 부들부들 떨며 바닥에 쓰러졌다. 두 발에서 피가 흘렀지만, 아무도 그녀를 공격하지 않았다. 다만 그녀가 도망칠 수 없게 길을 차단했다.이방은 그제야 상대가 자기를 생포하려고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그녀는 전 장군이 와서 자신을 구하기를 바라는 수밖에 없었다.전북망은 그녀가 쫓아가는 것을 분명 말렸다. 그는 이것이 적군의 계략인 걸 짐작했기에 반드시 자기를 구하러 올 거라고 믿었다.‘버티기만 하면 돼.’서경인에게 맞서기 위해 두 발의 극심한 고
이방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니?’그녀는 자기가 어떤 짓을 했는지 잘 알고 있다.당시 그 젊은 장수가 이끌고 온 100명의 병사는 아주 용맹했다. 그녀의 병사들을 죽이고 도망을 쳤다. 그녀는 그들을 찾아내기 위해 녹분성의 마을 사람들을 학살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민가에 숨어들었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그녀는 젊은 장수를 어떻게든 찾으려 했다. 그에게 죽은 아우들 대신 복수를 해야 했다. 자신의 명성을 높여야 했다. 병사 10명을 죽이는 것보다 젊은 장수를 죽인 공로가 훨씬 컸다. 그렇게 젊은 장수를 체포했지만, 예상외로 그는 오만했다. 그녀가 양국의 협정을 깨고 백성을 학살했다며 비난을 서슴지 않았다.매우 악랄하게 그녀를 욕하고, 어떤 이유를 대도 백성 학살을 용서할 수 없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학살에 참여했던 이들의 대가 여기서 끊길 거라는 저주를 했다.무례하게 굴었던 그에게 처벌을 가했고, 자신들의 대가 끊길 거라고 했기에 그를 남자 구실을 못하게 만들어버렸다. 다른 병사들은 더욱 악랄했다. 젊은 장수의 몸에 오줌을 싸거나 그의 입에 똥을 집어넣어 삼키게 하는 등 참교육을 시키며 다시는 입을 함부로 놀리지 못하게 했다.그러나 어떻게 된 사람이, 그럴수록 더욱 반골 기지를 드러내며 악독한 말을 퍼부었다. 결국 화가 난 그녀는 병사더러 그의 몸에 구멍 몇 개를 뚫으라는 명령을 했다. 그러나 이 사람이 정말 온몸에 반골이 있을 줄은 몰랐다. 하지만 그녀의 부하는 그녀보다 훨씬 악랄했다. 그녀 역시 자업자득이라고 생각했다. 입을 함부로 놀렸으니 죽을 정도의 괴롭힘을 받아야 한다고 여겼다. 그러나 생각지도 못했던 일이 일어났다. 수란키가 직접 전선에서 녹분성으로 달려온 것이다. 수만 명의 병사가 그녀를 포위했다. 수란키는 고문을 당한 젊은 장수를 발견하고 그녀에게 휴전을 요청했다. 국경선(邊線)을 정하고 서경 병사들이 두 번 다시 상국에 들어오지 않겠으니 제발 인질을 풀어달라고 청했다.이방은 그때,
상국의 정탐꾼(探子)들은 아주 오래전부터 있었다. 나중에 그들은 황태자에게 귀속되었다.황태자에게 일이 생긴 뒤, 정탐꾼은 가문의 여인들과 어린아이들을 죽였다. 황태자의 명성에 금이 갔고 정보기관(情報營)을 해쳤다.송회안은 존경할 만한 무장이다. 일가가 남강에서 목숨을 잃었다. 송회안과 장군들과 연관된 모든 이들이 목숨을 잃었다. 심지어 가노들까지 죽임을 당했다. 이토록 참혹하고 인도적이지 않은 일을 한 게 서경인들이다.그래서 이방이 마을 사람들을 학살했을 때, 반발하지 못했고 숨기기로 한 것이다.이방은 학살한 장본인이지만, 서경 정탐꾼들 역시 흉악한 짓을 저지른 것 마찬가지다. 피해를 본 건 송씨 가문이다. 서경 정탐꾼들은 최근 송씨 가문에서 유일한 생존자 송석석에 대해 들었다. 이방이 말했던 여 장군이다. 그들은 이방이 송석석을 밀어내고 전북망의 부인이 된 사실도 알고 있다.이 일은 서경과 무관한 일이지만, 송회안의 가문이 몰살당하고 송석석이 버림을 받은 건 서경인들과 어느 정도 연관이 있었다.3황자가 분노한 부분도 이것 때문이다. 서경인은 소위 말하는 짐승이 아니었다. 양국이 교전하고 싸우는 것은 병사들의 일이다. 송회안의 가족들, 남녀노소 불구하고 전부 몰살한 것은 서경 황실의 영원한 오점이다. 평생 지울 수 없을 것이다.그런 사람들에게 감히 송석석을 체포하라고 하는 이방이 좋게 보일 리 없다. 이방의 발언은 서경인들의 마음에 비수가 되어 꽂혔다. 오래전 송회안 가족 전부를 학살했던 일을 떠오르게 했다.뺨을 맞은 이방은 멍해 있었다. 곧이어 누군가 이방의 머리채를 움켜쥐더니 발로 그녀의 아랫배를 여러 번 걷어찼다. 그리고 다시 한 번 머리채를 움켜쥐어 고개를 들게 한 뒤 그녀의 뺨을 마구잡이로 내리쳤다. 그렇게 피떡이 될 때까지 맞은 이방은 정신을 잃을 것만 같았다.“끌고 가!” 3황자가 명령을 내렸다.선봉 어린아이들은 길을 열고 포로들을 끌고 시몬을 떠났다.시몬의 남쪽에는 사막이고 앞으로 계속 가면 끊임없는 산맥이 나
이방은 당황했다. 이진흥의 질문에 그녀는 가슴 한쪽이 허탈했다.“내 곁에 서 있는 게 서경 병사인 줄 알고 막았어요. 족자일 줄은 몰랐다고요.”이진흥이 화를 냈다. “거짓말하지 마. 적군이 어떻게 네 곁에 있어? 어쩜 핑계를 대도 그런 걸 대냐 말이야?”이방도 짜증을 냈다. “그만 하세요. 우리 모두 적군의 포로가 됐어요. 녹분성 사람들을 학살한 우리를 쉽게 놓아줄 리 없어요. 날 탓할 틈에 차라리 여길 벗어날 방법을 생각해 보는 게 낫겠어요.”이진흥이 대꾸했다. “학살하라는 명은 네가 내렸다. 네가 그 장수 놈이 민가에 숨어 있다고 했잖아. 네가 그놈이 평범한 백성으로 위장했을 거라고. 네가 전부를 죽이라고 했잖아.”이방은 그들의 대화를 밖에서 듣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해 큰 소리로 말했다. “몇 명만 처리하고 장수를 밖으로 끌고 나오라고 했지, 전부 죽이라고 하지 않았어요!”이 말을 들은 포로로 잡힌 병사들이 분노했다. “장군님이 전부 죽이라고 했잖아요! 그들의 귀를 베어 적군의 귀라고 하라고 했잖아요. 공로를 인정받기 위해 백성을 죽인 겁니다.”“장군님 명령 없이 저희가 어찌 감히 마을 사람들 모두 죽였겠습니까?”“그래요. 게다가 서경인들도 저희의 백성을 죽였기에 굳이 따지면 저희가 복수하는 거라고 했잖아요. 서경인은 저희 백성을 죽이지 않았다는 걸 나중에 돌아와서 알았습니다.”“이 장군이 정말 당당했다면 왜 저희에게 비밀로 하라고 했겠습니까? 자기가 어떤 짓을 하고 공을 인정받았는지 모르는 것도 아니잖아요.”“이 상황에서 인정을 안 하는 건 비겁한 행동입니다. 당신은 송 장군과 비교할 수 없는 사람입니다.”이방은 자신을 부정하는 사람들에게 화가 나 얼굴이 파랗게 질렸다. 그녀는 서경인들이 밖에 있다는 걸 인지 못하고 큰 소리로 말했다. “전쟁터가 얼마나 잔인한 곳인데, 전쟁터에서 백성은 언제든지 죽을 수 있다. 그들이 무고하게 죽었다고? 무고한 백성이라고? 그들은 서경인이다. 수십 년간 우리와 국경선을 두고 다툰 이들이
그러나 이방의 바람은 완전히 무너졌다.모닥불이 밖에서 피어올랐고 오두막 문이 거칠게 열렸다. 커다란 그림자가 바닥에 비쳤다. 상대를 압도하는 기운을 내뿜으며 천천히 들어왔다. 모닥불을 등지고 있어서 얼굴을 정확히 보지는 못했지만, 이방은 단번에 상대를 알아봤다.그 사람은 수란키다. 그녀와 평화 협정을 맺은 서경의 원수다.이방은 몸을 부르르 떨며 벽에 등을 바짝 기댔다. 겁먹은 얼굴로 수란키를 쳐다보았다.성릉관에서 협정을 체결할 때, 이 위풍당당한 남자는 사람들을 압도했다. 용맹한 남자는 시종일관 우아한 기운을 내뿜었다. 평화협정은 매우 순조롭고 빠르게 진행되었다.이방이 제안한 몇 개 조약에 수란키는 고민도 하지 않고 승낙했다. 수란키는 단 하나의 조건만 제기했다. 협정을 체결하면 즉시 인질을 풀어달라는 것이다.이방은 제발로 군공을 가져온 수란키를 호락호락하게 여겼다.지금처럼 음울하면서도 살기가 가득 찬 얼굴과 많이 달랐다. 이방은 자신의 앞에 서 있는 수란키가 사신(死神)처럼 느껴졌다. 그의 눈빛만으로 마음속에 두려움이 생겼다.수란키는 가죽 장갑을 벗어 뒤에 있던 병사에게 던졌다. 그리고 자신과 함께 들어온 3황자에게 말했다. “끌고 가서 수단 방법 가리지 말고 복수해. 이들은 잔인하게 네 형님을 괴롭혔다. 협정을 체결하던 날 그들의 얼굴을 전부 기억했다.”3황자가 이를 악물었다. “숙부, 알겠어요. 형님 대신 제가 복수할게요.”3황자의 시선이 이방에게 향했다. “이자는 어찌할까요?”수란키가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이 여인은 내가 직접 처리한다.”3황자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뒤에 있던 병사들에게 말했다. “저들을 끌고 나와. 내 두 눈으로 저들이 살려달라고 비는 걸 봐야겠다.”사람들은 얼굴이 거뭇하게 질렸다. 몸의 힘이 탁 풀려 예전의 위풍당당하던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 그러나 살려달라고 애원을 하지 않았다. 한편, 이방의 몸은 더욱 격렬하게 결렸다. “수... 수란키 장군님, 평화 협정을 체결했잖아요. 양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