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란키와 빅토르는 전쟁터에 나가지 않은 채 높은 곳에 서서 지켜보았다.도체에 시체들이 널브러져 있었고 희생당한 병사들의 피로 도시 전체가 붉게 물들었다.이 전쟁의 대다수는 서경 병사들과 사국 병사들이다. 이 전쟁에서 할 수 있는 건 최선을 다해 싸우는 것뿐, 어떤 전술도 소용이 없었다. 빅토르는 조만간 남강을 포기해야 한다는 것을 짐작했다. 시몬에게 패배할 것이다. 서경인들이 도우러 온 것은 상국인을 한 명이라도 더 처단하기 위한 것임을 그는 잘 알고 있다.이방이라는 여장군을 죽이는 것도 포함된다.그들은 상국을 이기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더욱이 사국과 남강의 분할을 바라지 않았다. 이곳에 온 대다수는 분풀이하기 위해서다.빅토르는 화가 났다. 서경인이 오지 않았다면 그들은 일찍이 패배했을 것이다. 이렇게 오래 싸우지도 않았을 것이고 무수한 장병을 잃지 않았을 것이다.빅토르가 수란키에게 싸늘하게 말했다.“분풀이하러 온 거면 도시 전체에 분풀이하는 게 어떻소?”그는 수란키가 상국인을 이토록 증오하는 이유를 알고 있다. 성릉관 전쟁에 관해 들은 적 있다. 그 전쟁에서 서경 녹분성의 어느 마을이 몰살당했다고 했다.수란키가 분노에 차서 말했다. “전쟁은 백성에게 있어서 집이 풍비박산 나고 도처를 떠돌아다녀야 하는 큰 재앙이오. 그게 짐승과 무슨 차이가 있단 말이오? 설령 적국의 백성이라도 백성을 학살하는 건 똑같소.”빅토르는 멀리서 병사들이 핏물에 쓰러지는 걸 지켜보았다. 그는 마음 한구석이 초조했다. 더는 어떤 전술도 내놓을 수 없었다.“이런 말을 할 줄은 몰랐소.” 빅토르는 살을 에는듯한 바람을 맞으며 말을 이었다. “자신의 백성이 죽어나는데, 당신은 상대에게 자비를 베푸는구려.”“진정한 무장은 전쟁을 싫어하오.” 수란키는 하늘에서 휘날리는 눈꽃을 바라보았다. “눈이 오는군. 승패는 이미 결정됐소. 더 많은 병력과 장군을 잃고 싶지 않으면 철수하시오.”빅토르가 물었다. “죽이고자 했던 사람은 죽였소?”수란키의 입가에 잔잔한
사국 병사와 서경 병사들이 대대적으로 후퇴하자 격전을 벌이고 있던 북명군은 어리둥절했다.철수한다는 나팔 소리를 사국의 전술 중 하나로 착각했다. 자신들을 유인하려는 계략인 줄 알았다.하지만 시몬에서 나간다는 사람들을 뒤쫓을 이유가 없었다. 애초의 목적이 그들을 쫓아내는 것이지, 전군을 몰살시키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결국 북명군은 멍하니 갑옷을 버리고 도망치는 적군들을 지켜보았다.‘승리가 이리 쉬운 거란 말인가?’‘모두 순국할 준비를 했거늘, 서경인들이 대대적으로 돕기 위해 왔는데 이리 빨리 패배를 인정한다고?’원수가 직접 전쟁터에 나왔다. 매우 잔혹한 전쟁이 될 거라는 거다. 그리고 확실히 적군은 매우 잔혹하게 죽었다. 거리에 시체가 가득했고 도시 전체에 피비린내가 났다. 눈이 내려 바닥의 핏물을 덮을지언정 피비린내를 감출 수 없었다.하지만 대대적으로 후퇴하자 매우 큰 도시이고 많은 마을이 있다.방 장군은 사령부로 달려갔다. “원수님, 쫓을까요? 백성을 학살하고 마을을 풍비박산하면 어찌합니까?” 사여묵이 말했다.“수란키는 그러지 않겠지만 빅토르는... 송 장군더러 현갑군을 이끌고 끝까지 쫓으라고 하시오.”사여묵은 수란키에 대해 잘 알고 있다. 서경에서 폭력적으로 굴지 않았다. 마을 전체를 위협하는 일은 수란키에게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그러나 남강에서 오랫동안 전쟁을 해왔던 빅토르는 어떤 군공도 세우지 못했다. 백성을 죽여 분풀이할 수 있었다.추격자들이 있으면 빅토르는 백성을 학살하지 않을 것이다.“네!” 방 장군은 송 장군에게 달려가 원수의 군령을 전달했다.송석석이 도화창을 들고 현갑군에게 외쳤다. “현갑군은 지금 즉시 나를 따라 사국인이 도망치는 걸 돕는다!”현갑군이 움직이기 시작하자 다른 병사들도 따라갔다. 이미 살기로 가득 찬 그들은 순순히 사국인들이 시몬에서 도망치게 놔둘 수 없었다. 한편, 전북망은 적군이 후퇴할 때 이방을 찾아다녔다. “이방! 이방!”위풍당당한 발소리에 비해 목소리가 너무 낮았다. 그는 송석석을
이방은 적수를 힘겹게 막아냈다. 그녀의 시야로 점점 많은 병사가 들어왔다.그들은 전쟁터에 가지 않았다. 여기에서 그녀가 오길 기다렸다. 이방은 그제야 전에 자기가 이런 계책으로 성공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그리고 오늘 그녀는 이 계책에 제대로 당했다. 이방과 이진흥은 무공이 좋아 얼마간 버틸 수 있지만, 나머지 병사들은 달랐다. 그들은 피를 흘리며 바닥에 쓰러졌다. 서경인은 일말의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았다. 살벌하고 과감하게 검을 휘둘렀다. 겁에 질린 이방은 도망치려 했지만, 그녀의 뒤를 서경 병사들이 손에 장검을 들고 그녀가 빠져나갈 수 없게 막고 있었다.당황한 이방은 제대로 반응하지 못했다. 두려움 때문에 맥이 풀려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러던 중 검 하나가 그녀의 팔을 스쳐 지났고 이방은 그제야 정신을 차렸다. 그녀는 무의식적으로 팔을 뻗어 앞에 있던 어린 병사를 잡아 몸을 막았다. 어린 병사의 머리와 얼굴에서 피가 줄줄 흘러내렸다.어린 병사는 힘겹게 돌아서서 믿을 수 없다는 눈빛으로 이방을 바라보았다. 그들은 일찍이 성릉관에서 함께 공을 세웠던 전우였다. 이방은 그때 다 같이 난관을 극복하자며 병사들의 기를 북돋았다. 그런 이방이 지금...이방은 잡고 있던 어린 병사를 밀어내고 적수의 검을 밀쳤다. 그리고 몸을 돌려 황급히 도망쳤다.그녀는 경공으로 뒤의 적군을 뛰어넘으려고 시도했지만, 적군이 일제히 날카로운 검을 뽑아든 탓에 두 발은 고스란히 검날에 찍혔다. 결국, 온몸을 부들부들 떨며 바닥에 쓰러졌다. 두 발에서 피가 흘렀지만, 아무도 그녀를 공격하지 않았다. 다만 그녀가 도망칠 수 없게 길을 차단했다.이방은 그제야 상대가 자기를 생포하려고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그녀는 전 장군이 와서 자신을 구하기를 바라는 수밖에 없었다.전북망은 그녀가 쫓아가는 것을 분명 말렸다. 그는 이것이 적군의 계략인 걸 짐작했기에 반드시 자기를 구하러 올 거라고 믿었다.‘버티기만 하면 돼.’서경인에게 맞서기 위해 두 발의 극심한 고
이방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니?’그녀는 자기가 어떤 짓을 했는지 잘 알고 있다.당시 그 젊은 장수가 이끌고 온 100명의 병사는 아주 용맹했다. 그녀의 병사들을 죽이고 도망을 쳤다. 그녀는 그들을 찾아내기 위해 녹분성의 마을 사람들을 학살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민가에 숨어들었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그녀는 젊은 장수를 어떻게든 찾으려 했다. 그에게 죽은 아우들 대신 복수를 해야 했다. 자신의 명성을 높여야 했다. 병사 10명을 죽이는 것보다 젊은 장수를 죽인 공로가 훨씬 컸다. 그렇게 젊은 장수를 체포했지만, 예상외로 그는 오만했다. 그녀가 양국의 협정을 깨고 백성을 학살했다며 비난을 서슴지 않았다.매우 악랄하게 그녀를 욕하고, 어떤 이유를 대도 백성 학살을 용서할 수 없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학살에 참여했던 이들의 대가 여기서 끊길 거라는 저주를 했다.무례하게 굴었던 그에게 처벌을 가했고, 자신들의 대가 끊길 거라고 했기에 그를 남자 구실을 못하게 만들어버렸다. 다른 병사들은 더욱 악랄했다. 젊은 장수의 몸에 오줌을 싸거나 그의 입에 똥을 집어넣어 삼키게 하는 등 참교육을 시키며 다시는 입을 함부로 놀리지 못하게 했다.그러나 어떻게 된 사람이, 그럴수록 더욱 반골 기지를 드러내며 악독한 말을 퍼부었다. 결국 화가 난 그녀는 병사더러 그의 몸에 구멍 몇 개를 뚫으라는 명령을 했다. 그러나 이 사람이 정말 온몸에 반골이 있을 줄은 몰랐다. 하지만 그녀의 부하는 그녀보다 훨씬 악랄했다. 그녀 역시 자업자득이라고 생각했다. 입을 함부로 놀렸으니 죽을 정도의 괴롭힘을 받아야 한다고 여겼다. 그러나 생각지도 못했던 일이 일어났다. 수란키가 직접 전선에서 녹분성으로 달려온 것이다. 수만 명의 병사가 그녀를 포위했다. 수란키는 고문을 당한 젊은 장수를 발견하고 그녀에게 휴전을 요청했다. 국경선(邊線)을 정하고 서경 병사들이 두 번 다시 상국에 들어오지 않겠으니 제발 인질을 풀어달라고 청했다.이방은 그때,
상국의 정탐꾼(探子)들은 아주 오래전부터 있었다. 나중에 그들은 황태자에게 귀속되었다.황태자에게 일이 생긴 뒤, 정탐꾼은 가문의 여인들과 어린아이들을 죽였다. 황태자의 명성에 금이 갔고 정보기관(情報營)을 해쳤다.송회안은 존경할 만한 무장이다. 일가가 남강에서 목숨을 잃었다. 송회안과 장군들과 연관된 모든 이들이 목숨을 잃었다. 심지어 가노들까지 죽임을 당했다. 이토록 참혹하고 인도적이지 않은 일을 한 게 서경인들이다.그래서 이방이 마을 사람들을 학살했을 때, 반발하지 못했고 숨기기로 한 것이다.이방은 학살한 장본인이지만, 서경 정탐꾼들 역시 흉악한 짓을 저지른 것 마찬가지다. 피해를 본 건 송씨 가문이다. 서경 정탐꾼들은 최근 송씨 가문에서 유일한 생존자 송석석에 대해 들었다. 이방이 말했던 여 장군이다. 그들은 이방이 송석석을 밀어내고 전북망의 부인이 된 사실도 알고 있다.이 일은 서경과 무관한 일이지만, 송회안의 가문이 몰살당하고 송석석이 버림을 받은 건 서경인들과 어느 정도 연관이 있었다.3황자가 분노한 부분도 이것 때문이다. 서경인은 소위 말하는 짐승이 아니었다. 양국이 교전하고 싸우는 것은 병사들의 일이다. 송회안의 가족들, 남녀노소 불구하고 전부 몰살한 것은 서경 황실의 영원한 오점이다. 평생 지울 수 없을 것이다.그런 사람들에게 감히 송석석을 체포하라고 하는 이방이 좋게 보일 리 없다. 이방의 발언은 서경인들의 마음에 비수가 되어 꽂혔다. 오래전 송회안 가족 전부를 학살했던 일을 떠오르게 했다.뺨을 맞은 이방은 멍해 있었다. 곧이어 누군가 이방의 머리채를 움켜쥐더니 발로 그녀의 아랫배를 여러 번 걷어찼다. 그리고 다시 한 번 머리채를 움켜쥐어 고개를 들게 한 뒤 그녀의 뺨을 마구잡이로 내리쳤다. 그렇게 피떡이 될 때까지 맞은 이방은 정신을 잃을 것만 같았다.“끌고 가!” 3황자가 명령을 내렸다.선봉 어린아이들은 길을 열고 포로들을 끌고 시몬을 떠났다.시몬의 남쪽에는 사막이고 앞으로 계속 가면 끊임없는 산맥이 나
이방은 당황했다. 이진흥의 질문에 그녀는 가슴 한쪽이 허탈했다.“내 곁에 서 있는 게 서경 병사인 줄 알고 막았어요. 족자일 줄은 몰랐다고요.”이진흥이 화를 냈다. “거짓말하지 마. 적군이 어떻게 네 곁에 있어? 어쩜 핑계를 대도 그런 걸 대냐 말이야?”이방도 짜증을 냈다. “그만 하세요. 우리 모두 적군의 포로가 됐어요. 녹분성 사람들을 학살한 우리를 쉽게 놓아줄 리 없어요. 날 탓할 틈에 차라리 여길 벗어날 방법을 생각해 보는 게 낫겠어요.”이진흥이 대꾸했다. “학살하라는 명은 네가 내렸다. 네가 그 장수 놈이 민가에 숨어 있다고 했잖아. 네가 그놈이 평범한 백성으로 위장했을 거라고. 네가 전부를 죽이라고 했잖아.”이방은 그들의 대화를 밖에서 듣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해 큰 소리로 말했다. “몇 명만 처리하고 장수를 밖으로 끌고 나오라고 했지, 전부 죽이라고 하지 않았어요!”이 말을 들은 포로로 잡힌 병사들이 분노했다. “장군님이 전부 죽이라고 했잖아요! 그들의 귀를 베어 적군의 귀라고 하라고 했잖아요. 공로를 인정받기 위해 백성을 죽인 겁니다.”“장군님 명령 없이 저희가 어찌 감히 마을 사람들 모두 죽였겠습니까?”“그래요. 게다가 서경인들도 저희의 백성을 죽였기에 굳이 따지면 저희가 복수하는 거라고 했잖아요. 서경인은 저희 백성을 죽이지 않았다는 걸 나중에 돌아와서 알았습니다.”“이 장군이 정말 당당했다면 왜 저희에게 비밀로 하라고 했겠습니까? 자기가 어떤 짓을 하고 공을 인정받았는지 모르는 것도 아니잖아요.”“이 상황에서 인정을 안 하는 건 비겁한 행동입니다. 당신은 송 장군과 비교할 수 없는 사람입니다.”이방은 자신을 부정하는 사람들에게 화가 나 얼굴이 파랗게 질렸다. 그녀는 서경인들이 밖에 있다는 걸 인지 못하고 큰 소리로 말했다. “전쟁터가 얼마나 잔인한 곳인데, 전쟁터에서 백성은 언제든지 죽을 수 있다. 그들이 무고하게 죽었다고? 무고한 백성이라고? 그들은 서경인이다. 수십 년간 우리와 국경선을 두고 다툰 이들이
그러나 이방의 바람은 완전히 무너졌다.모닥불이 밖에서 피어올랐고 오두막 문이 거칠게 열렸다. 커다란 그림자가 바닥에 비쳤다. 상대를 압도하는 기운을 내뿜으며 천천히 들어왔다. 모닥불을 등지고 있어서 얼굴을 정확히 보지는 못했지만, 이방은 단번에 상대를 알아봤다.그 사람은 수란키다. 그녀와 평화 협정을 맺은 서경의 원수다.이방은 몸을 부르르 떨며 벽에 등을 바짝 기댔다. 겁먹은 얼굴로 수란키를 쳐다보았다.성릉관에서 협정을 체결할 때, 이 위풍당당한 남자는 사람들을 압도했다. 용맹한 남자는 시종일관 우아한 기운을 내뿜었다. 평화협정은 매우 순조롭고 빠르게 진행되었다.이방이 제안한 몇 개 조약에 수란키는 고민도 하지 않고 승낙했다. 수란키는 단 하나의 조건만 제기했다. 협정을 체결하면 즉시 인질을 풀어달라는 것이다.이방은 제발로 군공을 가져온 수란키를 호락호락하게 여겼다.지금처럼 음울하면서도 살기가 가득 찬 얼굴과 많이 달랐다. 이방은 자신의 앞에 서 있는 수란키가 사신(死神)처럼 느껴졌다. 그의 눈빛만으로 마음속에 두려움이 생겼다.수란키는 가죽 장갑을 벗어 뒤에 있던 병사에게 던졌다. 그리고 자신과 함께 들어온 3황자에게 말했다. “끌고 가서 수단 방법 가리지 말고 복수해. 이들은 잔인하게 네 형님을 괴롭혔다. 협정을 체결하던 날 그들의 얼굴을 전부 기억했다.”3황자가 이를 악물었다. “숙부, 알겠어요. 형님 대신 제가 복수할게요.”3황자의 시선이 이방에게 향했다. “이자는 어찌할까요?”수란키가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이 여인은 내가 직접 처리한다.”3황자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뒤에 있던 병사들에게 말했다. “저들을 끌고 나와. 내 두 눈으로 저들이 살려달라고 비는 걸 봐야겠다.”사람들은 얼굴이 거뭇하게 질렸다. 몸의 힘이 탁 풀려 예전의 위풍당당하던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 그러나 살려달라고 애원을 하지 않았다. 한편, 이방의 몸은 더욱 격렬하게 결렸다. “수... 수란키 장군님, 평화 협정을 체결했잖아요. 양국
오두막 문밖에서 비명이 들려왔다. 이방은 까무러칠 정도로 겁에 질렸다.밖으로 끌려나간 이들이 어떤 형벌을 받는지 이방은 알 것 같았다. 그녀가 포로로 잡아둔 젊은 장수에게 한 짓을... 정확히는 서경 황자에게 한 짓을 돌려받는 중이다.그들은 황자를 거세했다. 산채로 거세를 당한 황자는 지렁이처럼 바닥에서 꿈틀대며 몸부림쳤다.그가 비명을 질렀으면 그들도 더는 괴롭히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황자는 이를 악물고 어떤 비명도 지르지 않았다. 오기가 발동한 병사들이 돌아가며 상처 난 그의 몸에 오줌을 쌌다. 그리고 날카로운 검으로 피부를 여러 차례 그었다. 피와 오줌이 뒤섞인 황자는 바닥에서 고통을 감내했다.지나간 일들을 회상한 그녀는 반성은커녕 오히려 통쾌했다.그러나 황자가 겪었던 걸 곧 자기가 겪어야 한다는 공포감은 사라지지 않았다.수란키가 단검을 꺼내자 이방이 기겁했다. “안 돼, 오지 마!”수란키는 쪼그려 앉아 그녀의 몸을 묶었던 밧줄을 벴다. 겁에 질려 움츠러든 이방을 마주하고 있자니 그는 말로 형용할 수 없는 분노가 들었다.‘황자는 죽음 앞에서 두려움에 벌벌 떠는 짐승보다 못한 사람에게 굴욕을 당했다.’ 밧줄을 푼 수란키는 커다란 손으로 그녀의 머리채를 우악스럽게 잡고 밖으로 끌어냈다.피부로 느껴지는 추위와 두피로 전해지는 고통에 이방은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밖으로 나온 수란키는 그녀의 머리채를 잡고 한 바퀴 돌더니 공터로 던져버렸다.눈으로 뒤덮인 공터에 18명이 누워 있었다. 그들은 실 한오라기도 걸치지 않은 채 발가벗겨 있었다. 붉은 피가 흘러나와 어느새 피 웅덩이를 만들었다. 그들 옆으로 무언가 굴러떨어졌다. 남자는 거세를 당하고 처절하게 비명을 질렀다. 거세당한 이들은 비명을 지르며 꿈틀댔다. 똑같은 상황에서 황자는 한마디 비명도 없이 견뎠다.나중에 무수한 고문을 당한 끝에 비명을 지르긴 했다. 병사들은 그의 비명에 환호했다. 누군가의 자존심을 짓밟는 건 그들에게 매우 짜릿하고 통쾌한 일이었다.몸부림
이튿날 아침, 송석석은 경위부로 돌아갔는데, 회왕비가 그녀의 앞을 막아섰다.이번에 회왕이 진성으로 잡혀왔을 때, 그의 아들은 아직 잡히지 않았기에 목종욱은 여전히 병사들을 이끌고 회왕의 아들을 수색하고 있었다.회왕비는 자신의 아들도 왕표처럼 요참형에 처형당할까 봐 걱정되어 급하게 송석석을 찾아온 것이다.사실 전에 회왕이 진성으로 압송되었을 때에도 회왕비가 란이를 찾아가 송석석에게 도움을 청해보라고 시켰지만 란이는 단호하게 거절했었다. 심지어 송석석 앞에서 단 한번도 언급한 적이 없었기에, 송석석도 석소 사저를 통해 그 사실을 알게 된 것이었다.회왕비가 재빨리 송석석에게 다가가 조급한 표정으로 말했다.“석석아! 이모가 너에게 부탁할 일이 있어. 일단 조용한 데 가서 얘기 좀 할까?”“지금 처리할 일이 많아서 그럴 시간이 없습니다.”송석석이 돌아서서 떠나려고 하자 회왕비는 얼른 두 팔을 활짝 벌려 다시 그녀의 앞을 막았다.“몇 마디만 하면 돼. 네가 네 사촌 오라버니를 좀 살려주면 안 돼? 네 사촌 오라버니는 아무 잘못이 없어. 걔는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어. 전부 걔 아버지 때문에 벌어진 일이야. 제발 네가 좀 구해줘!”송석석은 눈시울이 붉어진 회왕비를 보며 예전에 외할아버지가 진성으로 돌아와 관아에 갇혀 있었을 때 회왕비가 단 한번도 외할아버지를 보러 가지 않았던 일이 떠올랐다.송석석은 이기적이고 냉정하며 나약한 회왕비와 단 한 마디도 섞고 싶지 않았으며 회왕비를 슬쩍 피해 경위부 안으로 들어갔고 경위대에게 회왕비를 쫓아내라고 지시했다.이때 등 뒤에서 회왕비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석석아, 너 어찌 이리 인정머리가 없을 수 있느냐? 네가 어렸을 때 이모가 너에게 얼마나 잘해줬는데 벌써 다 잊은 거야?”송석석이 뒤도 안 돌아보자 회왕비는 더욱더 큰소리로 외쳤다.“송석석, 네 어머니는 나를 제일 사랑하고 아꼈다! 네가 날 이렇게 모른 척하면 분명 네 어머니 상심이 클 것이다!”자신의 어머니가 언급되자, 걸음을 멈춘 송석석은 싸늘하게 굳은
한편, 송석석은 서재에서 편지 한 장을 쓴 뒤, 편지를 염구진에게 주면서 사람을 시켜 남강에 있는 사여묵에게 전달하라고 했다. 송석석은 현재 남강의 상황에 대해서 잘 알고 있었다. 빅토르는 병사들만 끌어 모을 뿐 공격도 하지 않고 물러서지도 않은 채 대치를 하고 있었다. 빅토르가 시간을 끌고 있다는 사실을 모두가 알고 있었다. 남강 전쟁에 참여하겠다고 황제에게 먼저 얘기한 빅토르는 전쟁을 이기지 못하면 군령에 의해 처벌을 받겠다는 서약서까지 썼지만 사청엄이 반역에 성공하지 못했기에 빅토르에게 성을 나눠줄 수 없었고 빅토르도 공을 세울 수 없었다.이대로 섣불리 자신의 나라로 돌아갔다가 자신이 쓴 서약서 때문에 목숨을 잃을 수도 있다는 생각에 빅토르는 초원과 연합하여 자신의 퇴로를 확보하려고 했지만 초원은 그의 제안을 거절했다.초원은 애초부터 전쟁을 싫어했을 뿐만 아니라 중간에 끼어 마음을 졸이면서 어렵게 생존하고 있었기에 반드시 중립을 유지해야 안정적으로 살아갈 수 있다.만약 둘 중 한 나라를 반드시 선택해야 한다면 초원은 반드시 상국을 선택할 것이다.전에 사제가 송석석에게 보낸 서신에 의하면 남강 병사들은 빅토르를 확실하게 공격하여 다시는 전쟁을 일으킬 생각조차 하지 못하게 만들 거라고 했다.송석석이 생각에 잠겨 있었던 그때, 시만자가 문을 두드렸다.“석석아!”“들어와.”송석석의 말에 시만자가 최숙심과 함께 방으로 들어왔다.“최씨께서 너에게 감사 인사를 하고 싶다고 하셔서 모시고 왔어.”최숙심은 한걸음 앞으로 다가가 벌겋게 충혈된 눈으로 허리를 숙여 인사를 했다.“왕비님, 그동안 신경 써주셔서 너무 감사합니다. 제가 이 은혜를 어찌 갚아야 할까요?”송석석은 가볍게 미소를 지으며 농담을 던졌다.“전 여색을 즐기지 않으니 몸으로만 갚지 않으시면 됩니다.”송석석은 분위기가 무거워지는 게 싫어서 농담을 하자, 흠칫하던 최숙심도 이내 웃음을 터트렸다.시만자는 잠깐 앉아있다가 왕경루로 가야 한다고 방을 나섰다. 종문파와 시씨 가문 사람들은
오후 3시 정각, 커다란 판대기가 처형장에 올라왔다. 철로 만들어진 판대기는 매우 단단했으며 상국에서 요참형에 쓰이는 유일한 판대기였기에, 오랫동안 방치되어 먼지가 뽀얗게 쌓여 있었다.문엄 황제 때 요참형이 너무 잔인하다는 평가가 많았기에 죄가 아무리 중한 범인이라고 해도 요참형을 내리지 않았다.하지만 이 형이 현재까지 폐지되지 않은 이유는 단 하나, 반역자에게 겁을 주기 위한 것이다.요참형을 처형할 때 백성들에게 보여주지 않는 게 원칙이지만 국정을 어지럽히고 역적들과 손을 잡고 나라를 배신한 건 역천 대죄이기에 이러한 방식으로 반역의 마음을 품고 있는 사람들에게 겁을 주려고 했다.왕표는 이내 입고 있던 옷이 전부 벗겨졌고 관원 부하 두 명이 왕표를 판대기에 눕혀 어깨를 꾹 누른 뒤 꿈쩍도 못하게 제압했다.공포에 질린 왕표는 순간 정신을 잃은 채 기절했고 망나니가 대도를 치켜 들자 대부분 사람들이 급하게 고개를 돌렸다.구경꾼들과 달리 영군오아과 연왕 등 사람들은 전방을 직시하게 고정되어 있었기에 고개를 돌릴 수 없었고 눈을 꼭 감은 채 온몸을 덜덜 떨었다.연왕은 그 중에서 가장 겁이 많은 사람이었다. 망나니가 대도를 든 순간 눈을 꽉 감은 연왕은 심지어 비명까지 질렀다.하지만 겁을 먹은 사람들과 달리 추몽은 두 눈을 동그랗게 뜬 채 전방만을 직시했다.망나니의 대도가 왕표의 허리를 자른 순간에도 추몽의 표정은 한 치의 변화도 없었다.왕표에 이어 고청우가 처형당할 때에도 그는 눈을 피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주변의 비명소리나 흐느끼는 소리가 전혀 들리지 않는 듯 왕표와 고청우가 발버둥 치다가 완전히 의식을 잃을 때까지 빤히 지켜 보았다.한편, 왕청여는 왕표가 처형되기 전에 노부인을 데리고 이미 처형장을 떠났고, 최숙심은 처형이 끝나고 나서도 여전히 남아 있었다.최숙심은 결국 왕표가 처형당하는 모습을 보지 않았다. 눈을 꼭 감고 있다가 주변에 모여 있던 백성들이 왕표가 죽었다는 말에 그제야 조심스럽게 눈을 떴다.가족들이 시체를 거둬가지 않으면
경위대가 노부인과 최숙심 그리고 왕청여를 처형장 안으로 호송했고 다리에 힘이 쫙 풀린 노부인은 온몸을 덜덜 떨면서 눈물을 줄줄 흘렸다.“이 멍청한 놈아! 넌 우리 집안 조상님들과 네 아버지의 얼굴을 보기 창피하지도 않아? 이제 하늘나라로 가면 어떻게 마주하려고 이런 짓을 저지른 거야!”그러고는 노부인은 엉엉 울면서 왕표의 뺨을 강하게 내리쳤다.한편, 감당할 수 없는 공포에 영혼이 나간 왕표는 어머니를 보자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소리를 질렀다.“어머니, 저를 구해주세요! 제발 저를 구해주세요! 전 이대로 죽고 싶지 않다고요!”“네가 이렇게 큰 죄를 저질렀는데 내가 무슨 수로 너를 구해? 황제 폐하께서 너를 얼마나 중히 여기고 믿어줬는데 네가 어찌 이런 배은망덕한 짓을 저지른단 말이냐!”“어머니, 저 정말 잘못했어요. 제 죄를 다 뉘우쳤어요. 다시는 그러지 않을 거예요! 나라를 위해 목숨 걸고 싸울게요. 제발 이 아들을 살려주세요!”왕표가 오열했지만 노부인은 그저 한숨을 푹 내쉬며 고개를 숙였다. 이때, 곁에 서있던 최숙심이 직접 만든 음식과 술을 꺼내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당신과 나 사이에 부부의 연은 끝났지만 어머님과 아이들은 제가 잘 돌볼게요. 그러니 걱정 말고 떠나세요.”왕표는 담담하게 말을 하는 최숙심을 죽일 듯이 노려보았다.“네가 감히 여기가 어디라고 와! 서방을 배신한 천박한 년! 감히 나에게 부부의 연을 운운해?”“그래요. 저희는 이제 부부가 아닙니다. 그러니 앞으로 각자 갈 길을 가는 게 좋겠지요.”“나쁜 년!”왕표가 잔뜩 분노한 목소리로 외치자, 이를 들은 백성들이 너도나도 최숙심을 불쌍하게 여겼다. 평생 전전긍긍하면서 왕표를 위해 아들과 딸을 낳고 집안일을 처리하면서 시부모에게도 최선을 다했는데 결국 저런 말을 듣다니.뒤로 한 걸음 물러난 최숙심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한편, 고청우는 왕씨 가문의 일에 전혀 관심이 없었으며 모여 있는 백성들을 자세하게 쓱 훑었다. 이제 곧 죽을 텐데 정말 아무도
그렇게 한참 지나고 나서야 눈물을 그친 노부인은 결국 왕표를 구하는 일은 포기했지만, 그의 형이 집행되기 전에 최후의 만찬을 직접 먹일 것이라고 고집을 부리기 시작했다. 노부인의 눈은 퉁퉁 부었고, 목소리도 심하게 갈라져 있었다.“형이 집행되기 전에 범인은 가족들을 마지막으로 한 번 만날 수 있다는 걸 알아. 그러니까 이것만 하게 해줘. 아들이 마지막으로 배불리 먹고 길을 떠날 수 있게 해줘.”노부인은 다시 최숙심을 쳐다보며 말을 이어갔다.“며느리 너도 자식이 있으니 부모의 마음을 이해할 거야. 세상 사람들 눈에 걔가 백 번 죽어 마땅한 나쁜 놈이라고 해도 나에게는 그저 한없이 어린 아이일 뿐이야.”한참동안 침묵하던 최숙심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어머님, 형이 집행되기 전에 마지막으로 만난다는 게 뭘 의미하는지 아시고 말씀하시는 겁니까? 집행장에서 아들이 요참형을 당하는 모습을 정말 직접 보실 수 있으시겠습니까?”노부인은 온몸을 덜덜 떨면서 대답했다.“네가 가서 북명 왕비에게 부탁을 좀 해보거라. 난 감옥에 가서 아들을 만나고 싶다.”노부인의 말에 고청락이 어이없다는 듯이 피식 웃었다.“참 말씀을 쉽게 하시네요. 어머님께서 부탁하면 왕비님께서 무조건 그 부탁을 들어줘야 하시는 겁니까?”“어머님, 전 그런 부탁을 드릴 수 없습니다. 이 일은 왕비께서 결정할 수 있는 일도 아니지 않습니까?”최숙심이 대답하자 노부인은 잠시 고민하다가 입술을 꽉 깨문 채 말했다.“집행장이라도 갈 것이다. 절대 내 아들을 굶겨서 하늘나라로 보낼 수는 없어.”“어머니, 오라버니는 안 굶어요. 형이 집행되기 전에 감옥에서 오라버니에게 맛있는 밥을 준비해줄 거예요. 심지어 술도 준비해준다고 들었어요.”왕청여의 말에도 노부인은 끝까지 고집을 부렸다.“그건 달라!”최숙심이 계속 한숨을 살짝 내쉴 뿐,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자, 곁에서 지켜보던 모종윤이 고청락을 끌고 밖으로 나갔다.그렇게 시간이 흘러 집행 당일 날이 되었고, 하늘은 한없이 맑았다.문엄
궁으로 들어가 황제에게 자초지종을 보고하자, 최숙심의 딱한 사정을 운운하면서 그녀의 선한 마음씨 또한 찬양했다.그녀의 삶도 이토록 엉망진창인데 힘든 사람들에게 죽도 나눠주고 갈 곳 없는 여인들을 소주방에서 지내게 도와준 사실들을 일일이 읊으면서 감탄했다. 솔직히 숙청제에게는 지금 최숙심처럼 백성들을 교화할 수 있는 모범적인 사람이 필요했다. 때문에 바로 어명을 내려 그녀에게 순금 백 냥과 집 한 채까지 하사했다. 그리고 유방 당했던 왕씨 가문 남자들도 남강 전쟁만 끝나면 북명왕과 함께 진성으로 돌아오는 것에 허락했다.그렇게 최숙심은 죽을 고비를 넘어 인생 역전까지 이뤄냈다!한편, 왕표에게는 요참형이 내려졌고 역적과 손잡고 왕표를 선동한 고청우에게도 똑같은 형을 내렸다. 그러자 숙청제는 예전에 고씨 가문 여인들을 살려준 일이 후회되었다. 고청우를 진작 감옥에 가뒀다면 남강에 이렇게 큰 화란이 일어나지도 않았을 것이니 말이다.이후 숙청제는 척귀에게 걱정되니깐 암자에 가끔 가보라고 했는데, 이는 실은 감시하기 위해서였다. 송석석은 척귀를 보자마자 황제가 무슨 걱정을 하고 있는지 바로 알아차리고는, 사람을 보내 고씨 여인들에게 고청우의 형이 집행될 때 고청우와의 옛정 때문에 잘못된 행동을 저지르지 말라고 확실하게 당부했다.한편, 소주방에 있는 노부인은 자신의 아들인 왕표가 결국 체포되었고 요참형을 받는다는 소식에 큰 충격을 받은 채, 죄 없는 왕청여와 최숙심에게 손가락질을 하면서 갖은 욕설을 퍼부으며 화풀이를 했다. 노부인은 두 사람이 어떻게 가족이며, 서방인 왕표를 배신할 수 있는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며, 점점 더 흥분하다가 결국 최숙심과 왕청여의 뺨을 강하게 내리쳤다.그리고는 지금 당장 어떤 방법을 써서라도 왕표를 구해내라고 억지를 부렸다.최숙심은 바닥에 무릎을 꿇은 채 노부인에게 노여움을 풀라고 빌었지만, 노부인은 오히려 점점 언성을 높였다. 그러자 최숙심도 더 이상 참지 못해 벌떡 일어나 주막에서 칼을 가져오더니 바닥에 툭 던졌다
왕표는 중범죄자이기에 바로 대리사로 이송되어야 하지만, 송석석은 그를 일단 경위부로 압송했다. 경위부에서 심문을 마친 후, 어전에 보고를 올리며 최숙심의 공을 황제에게 잘 얘기한다면,왕준과 현이 하루 빨리 진성으로 돌아올 수 있기 때문이다.더군다나 고청우도 아직 경위부에 갇혀 있기에 왕표와 고청우가 만난다면 더욱 많은 일들을 알아낼 수도 있었다.그렇게 고청우와 왕표는 같은 곳에 갇혔으며, 중간에 나무 울타리 하나를 세워 두 사람을 갈라놓았다.고청우와 왕표가 서로 눈이 마주치자, 표정이 순식간에 바뀌었으며 왕표가 먼저 이를 갈면서 마구 소리를 질렀다.“천박한 놈! 결국 네 놈 꼴도 이렇게 되었구나! 드디어 벌을 받은 게야!”그러자 고청우가 실눈을 살짝 뜨며,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비아냥거렸다.“내가 천박한 년이면 왕표 너는 뭔데? 나도 벌을 받았지만 너도 결국 이렇게 갇혀 있잖아! 넌 뭐 다를 것 같아?”“이게 다 네 놈 때문이야!”왕표가 울타리 사이로 손을 뻗어 고청우를 잡으려고 허우적거렸고 뒤로 살짝 물러난 고청우는 오아표의 우스꽝스러운 모습에 코웃음을 쳤다.“버러지 같은 놈!”“네 놈이 감히…! 지금 뭐라고 했느냐! 네 놈이 역적과 손잡고 날 꼬셔서 야반 도주하게 만들지 않았다면 난 지금 남강 원수의 신분으로 잘 살고 있었을 거야! 절대 이런 꼴을 당할 리 없었을 거라고!”왕표가 씩씩거리며 소리를 지르자 고청우가 냉랭한 목소리로 말했다.“내가 널 꼬셨다고? 말도 안 되는 소리하지 마. 넌 결국 죽음이 두려워서 그런 선택을 한 거야. 넌 내가 무엇인가 노리고 접근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잖아. 그런데 내가 아이까지 낳으니 이제 날 곁에 묶어 둘 수 있겠다고 확신한 거지. 이 세상 모든 여자들이 네 본처처럼 아이들을 위해 목숨까지 바칠 수 있는 줄 알아? 가족애라는 건 이 세상에서 가장 우스운 거야. 그딴 걸로 날 묶어 둘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 멍청한 놈! 내가 널 버리고 갈 때 분명하게 얘기했잖아. 넌 무능하고 무술 실력도 보잘것없는데
한편, 송석석은 시만자를 데리고 일반 손님으로 위장한 채 직접 보화사로 향했다. 보화사에 도착한 뒤 절을 올리고 초를 꽂고는 주지 스님을 찾아 신분을 밝힌 뒤, 여람 스님에 관해서 물었다.주지 스님은 바로 지객 스님을 불러왔다. 각지 스님들이 보화사에 찾아와 며칠 묵고 갈 때마다 지객 스님이 그자들을 모셨기 때문에 자세한 상황을 제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보화사는 진성 3대 절 중의 하나일 정도로 꽤 유명했기에, 매년 보화사에 찾아와 경을 들으면서 며칠동안 이곳에 묵고 싶어하는 사람들은 많아도, 실제로 이곳에 머물 수 있는 사람은 몇 없었다. 지객 스님은 여람 스님에 대해 인상이 꽤 깊었다. 수련의 경지가 그리 높지 않았기에 원칙대로라면 이곳에서 지낼 수 없는데 몇 년 전부터 남강에서 죽은 이의 영혼들을 제도했기에 그 자비로운 마음을 높이 평가하고 덕행도 많이 쌓았기에 지객 스님은 의례적으로 여람 스님을 받아준 것이다.“며칠동안 매일 여람 스님께서 밖에 돌아다니셨습니다. 진성 내에 전란이 일어나 사상자가 많았기에 여람 스님은 밤낮을 가리지 않고 죽은 이들의 영혼을 제도하느라 고생이 많았습니다.”지객 스님은 여람 스님을 매우 좋게 평가했다. 송석석은 그런 지객 스님의 말을 조용하게 듣고 있을 뿐, 반박하지는 않았다.그러고는 지객 스님에게 여람 스님을 만나보고 싶다고 얘기하며, 여람 스님을 존경하는 마음에 돈을 기부하며 여람 스님을 위해 따로 절 하나를 지어주고 싶다는 말도 함께 전해달라고 했다.한편, 지객 스님은 송석석과 시만자의 신분을 알지 못했지만, 두 사람이 수수한 옷차림과 달리 기품이 넘쳐 흘렀기에 모 훈작 세가의 부인이나 아가씨일 것이라고 추측해, 알겠다고 고개를 끄덕인 후 바로 왕표에게 말을 전했다.왕표는 자신을 찾아온 자가 있다는 말에 흠칫 놀랐다가 절을 만들어주며 돈까지 기부하겠다는 소식에 바로 표정이 환하게 바뀌었다.평서백이었던 왕표는 가문의 번영을 위해 절에 돈을 기부하는 명문 가문들이 많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그렇게
이내 표정을 숨긴 최숙심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얼른 가십시오. 돈을 구하면 바로 서방님을 찾으러 가겠습니다. 아, 그리고 요즘 진성 순찰이 삼엄하니 여기저기 돌아다니지 마십시오.”왕표는 자신을 걱정하는 최숙심의 말을 듣자, 그녀가 밖에서 아무리 대단한 여인이라고 불려도 결국 자신에게 만큼은 마음이 약해질 수밖에 없다는 뿌듯함에 경계심이 완전히 풀렸다.“최대한 3일 안에 마련해주면 고맙겠소.”그러자 최숙심이 난처한 표정을 지으며 대꾸했다.“그건 안 됩니다. 지금 상황이 어려운데, 어떻게 3일 안에 그 큰돈을 마련할 수 있겠습니까?”“우리 딸 지아가 지금 북명 황실에서 지내고 있지 않소? 그러니 난 부인이 어떻게든 해결할 수 있을 거라고 믿소. 부인의 소식을 기다리겠소. 그리고 내가 부인을 찾아왔다는 말은 아무한테도 하지 마오. 어머니와 왕청여한테도 얘기해서는 안 되오!”말을 마친 왕표는 삿갓을 쓰고는 돌아서서 빠르게 떠났다.표정이 확 어두워진 최숙심은 그를 얼른 따라갔지만 골목 밖에도 순찰하는 경위대가 보이지 않았기에 섣불리 소리를 지를 수도 없었다.왕표는 궁지에 몰린 순간 백성들을 인질로 잡아 어떻게든 진성을 벗어나려고 할 것이고 만에 하나 왕표가 진성을 빠져나가게 되면 그를 찾아내는 건 더 어려워질 것이다.최숙심은 빠른 걸음으로 소주방에 돌아와 석소를 구석으로 불렀다.“석소 아가씨, 얼른 왕비에게 찾아가서 왕표 그자가 보화사에 여람 스님 신분으로 위장하여 숨어있다고 전하시오.”“네, 지금 바로 다녀오겠습니다.”그렇게 석소가 돌아서서 소주방을 떠나려던 그때, 최숙심이 그를 불러 세웠다.“잠깐만요! 왕비님께 너무 대놓고 보화사에 왕표를 잡으러 가지는 말라고 전해주세요. 저에게 거짓말을 한 것일 수도 있으니 일단 몇 사람만 데리고 가서 상황만 파악해보시는 게 좋을 것 같다고 전하세요.”현재 수색이 삼엄해서 왕표는 더 이상 도망갈 곳도 없겠지만 그래도 최대한 조심해야 한다. 이는 최숙심이 공을 세울 수 있는 유일한 기회이고 단번에 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