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성우가 차우미에게 시선을 돌렸다. 환하게 웃으며 질문하는 하성우는 마치 어젯밤 자기가 직접 보기라도 한 것처럼 물었다.차우미가 순간 멈칫했다. 그녀의 눈에 약간의 당황스러움이 묻어 있었다.소파에서 잔 것과 바닥에서 잔 것은 별반 다를 게 없었다.정확히 말하면 나상준은 바닥이 아니라 소파에서 잤다.차우미의 입이 살짝 벌어졌다. 그녀는 뭐라고 변명을 하고 싶었지만,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하성우는 차우미가 당황한 모습을 바라보며 즐거운 듯 미소를 지었다."정말 그랬나 보네..."그의 시선이 다시 나상준에게 향했다. 꽤 고소해하는 듯한 얼굴이다.말없이 듣고 있던 나상준이 눈을 떴다.나상준은 흔들림 없는 눈빛으로 하성우을 빤히 쳐다보았다.순간, 하성우도 긴장했다.나상준의 끝이 보이지 않는 눈빛에 하성우는 몸이 바짝 긴장되었다. 주먹을 입술에 대고 가볍게 기침한 나상준이 시선을 돌려 창밖을 바라보았다. "오늘 날씨 진짜 좋네. 난 이렇게 비 오는 날이 낭만적이더라."차우미는 뜬금없는 하성우의 말에 반응하지 못했지만, 긴장감은 풀렸다.차우미는 거짓말을 못하는 성격이다. 만약 하성우가 끝까지 캐묻는다면 차우미는 정말 난감했을 것이다.그러나 뜬금없이 낭만 타령을 해대는 하성우를 차우미는 따라갈 수 없었다.그녀는 낭만에 대해 알지 못했다.입술을 살짝 오므린 차우미는 결국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시선을 다시 자료로 돌렸다. 대꾸를 못하면 안 하면 되는 거다, 굳이 자기를 난처하게 만들 필요가 없었다.하성우가 이내 입을 열었다. "형수, 회성에 온 지도 며칠 됐는데 여기 어떤 것 같아?" 시선을 자료로 옮긴 차우미에게 질문하는 하성우다. 차우미는 고개를 살짝 들어 창밖의 자욱한 안개를 바라보았다. 안개 사이로 언뜻 보이는 고층 빌딩은 몽롱한 분위기를 만들었다. "좋아.""좋다고? 어떻게 좋은데? 아주 좋은 거야, 나쁘지 않은 거야, 별로인 거야?"말꼬리를 잡는 하성우에게 차우미가 잠시 고민했다. "음...""너 한가하냐?"
하성우의 해설과 함께 박물관 일정이 끝났다. 점심에 간단히 밥을 먹고 나오자 빗줄기가 잦아들기 시작했다. 하 교수가 비도 잦아졌으니 밖을 돌아다니자고 제안했다.모두 찬성했고 그들은 우산을 들고 걸음을 옮겼다.차우미는 발목이 완전히 낫지 않은 탓에 거동이 불편해 식당에 남아 있기로 했다.마침 식당의 위치가 좋았던 탓에 작은 마을을 전반적으로 둘러볼 수 있었다.비가 많이 잦아들자, 하늘도 맑아졌다. 비록 빗줄기가 가늘게 떨어지고 있었지만, 마을 전체를 뚜렷하게 볼 정도는 되었다.푸른 기왓집들이 들쑥날쑥하게 자리 잡은 마을이다. 수양버들이 가볍게 흩날리고 부스러진 빗방울이 하늘에서 떨어지고 있었다. 한 폭의 아름다운 수채화 같았다.차우미는 붉은 끈을 동여맨 백 년 된 나무를 바라보았다. 떨어지는 빗방울들이 청석판길을 따라 부슬부슬 흘러내렸다.대자연의 아름다움을 말로 형용할 수는 없었다. 그녀는 이루 말할 수 없는 감동을 하였다.모든 생명체가 집결된 것처럼 이곳은 활기찼다.나상준은 박물관 뒤에 서서 휠체어에 손을 올려놓았다. 그의 시선은 줄곧 차우미에게 향했다.차우미도 밖에서 거닐고 있는 무리에 끼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결국, 이 아름다운 정경을 멀리서 눈에 담을 수밖에 없었다."대표님, 여기요."운전기사가 우산을 들고 나타났다."음."나상준이 짧게 대답을 한 뒤, 허리를 굽혀 차우미를 안아 올렸다.당황한 차우미는 고개를 들어 나상준을 빤히 쳐다보았다.평소처럼 담담한 나상준이라 무슨 생각인지 전혀 알 수 없었다.차우미가 다급히 물었다."어디 가려고?"여기서 다른 사람들을 기다리기로 했는데 돌아온 사람들이 그들이 이곳에 없는 것을 알면 놀랄 것이다. "나가서 좀 걷자."차우미가 당황했다.'나가서 걷자고?'차우미는 나상준의 말뜻을 이해하지 못해 의아한 얼굴로 나상준을 쳐다보았다. 하지만 나상준은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은 채 말없이 그녀를 안고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운전기사가 휠체어를 거둔 뒤, 따라 내려갔다.아래
빗줄기가 점점 거세졌다. 나상준의 셔츠를 포함해 밖에 있는 모든 것을 적셨다.나상준이 마침내 걸음을 멈추고 그녀를 내려다보았다.차우미는 고개를 돌렸지만, 전처럼 평온하지 않았다.그녀는 눈살을 찌푸렸다, 나상준의 행동을 달가워하지 않았다.이렇게 비가 오는데도 불구하고 그녀를 밀고 밖으로 나오는 그의 행동이 불편했다.농염한 속눈썹을 움직이며 말하는 차우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단번에 알아차릴 수 있었다.나상준이 감기 들까 봐 걱정하는 게 아니었다. 다만 나상준과 너무 가까이 있는 것이 부담스러울 뿐이다.눈을 치켜들자 시선이 앞쪽으로 떨어졌다. 나상준은 그녀를 밀고 앞으로 나아갔다. 동굴같은 저음이 차우미의 귓가에 들려왔다."괜찮아."차우미가 눈살을 찌푸렸다.나상준은 차우미의 말을 듣지 않았고 차우미도 더는 말하기 싫어 입술을 굳게 다물고 다시 말하지 않았다.비는 오후 내내 내리다가 4시가 되어서야 멎었다. 5시에 하성우는 나상준에게 연락해 식사 장소를 알려주었다.시내로 돌아가서 밥을 먹자면 두 시간이 더 소요되었다. 그들은 이곳에서 저녁까지 먹은 뒤 돌아가기로 했다. 나상준은 차우미를 데리고 하성우가 말한 장소로 향했다. 모두 모이자 함께 저녁을 먹었다.늘 그래 왔던 것처럼.유일하게 다른 점이 있다면, 차우미의 신경이 나상준에게 향한 것이다. 그녀는 식사 내내 나상준을 주의 깊게 여겨보았다.그녀를 휠체어에 앉힌 채 오후 내내 작은 마을에서 한참이나 돌아다녔다. 그의 옷은 충분히 젖어 있었다. 그러나 나상준은 전혀 개의치 않고 그녀를 밀고 앞으로 나아갔다.그녀가 몇 번이나 돌아가자고 제안했지만, 그는 그녀의 말을 듣지 않았다. 차우미도 어쩔 수 없었다. 가능한 최대한 빨리 호텔로 돌아가 나상준에게 휴식할 시간을 주는 수밖에 없었다.하성우는 다른 사람들과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웃음꽃을 피웠다. 하성우도 차우미과 나상준 사이의 미묘한 변화를 눈치챘다. 특히 차우미의 행동이 달라진 것을 단번에 알아차렸다.매번 다른 사
하성우가 둘을 부부로 여기고 있기에 차우미도 굳이 나상준과 거리감을 두지 않았다."아... 그랬구나."하성우가 나상준을 바라보던 시선을 거두며 차우미를 향해 빙그레 웃었다. "형수, 걱정하지 마. 상준이 건강해. 비 좀 맞았다고 아프지 않아."하성우가 대답하기도 전에 하성우가 계속해서 말했다. "여기서 약국 못 봤어. 다른 분들 호텔로 모셔간 뒤에 약국 찾는 게 어때?"하성우가 눈을 깜빡이며 물었다. 그도 매우 난처해하는 눈치였다.차우미가 무의식적으로 앞의 차를 바라보았다. 몇 대의 차가 앞에 있었다.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그녀는 다시 옆에 앉아 있는 그를 바라보았다.나상준은 줄곧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평소와 다름없는 모습으로.차우미가 고민하더니 물었다. "어디 불편한 곳 없어?""몸 안 좋으면 말해."그는 줄곧 마음을 헤아리기 어려운 상대였다. 얼굴에 티를 내지 않아 그의 상태를 알아차리기도 어려웠다.결국 차우미는 안 좋은 곳이 있으면 말하라고 귀띔하는 수밖에 없었다.하성우가 안전벨트를 매고 운전기사가 시동을 걸고 앞차를 따라갔다.하성우는 뒷좌석을 바라보며 입꼬리를 실룩거렸다.'무슨 짓을 했길래... 역시 머리가 좋다니까.'나상준을 걱정하는 차우미의 모습은 평소와 달랐다. 관심 어린 눈빛으로 나상준을 걱정했다. "아직 멀쩡해."순간, 차우미의 눈썹이 팽팽하게 당겨졌다.'아직은 멀쩡하다니? 그럼 나중에는 안 좋아질거라는 거야?'회성까지 돌아가려면 두 시간이 소요되었다. 가는 도중에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정말 난감해진다.시선을 돌려 창밖을 바라보며 휴대폰을 들어 시간을 확인했다. "이따가 불편한 곳이 있으면 말해. 가까운 곳을 찾아서 약부터 사자.""음."두 사람 사이에 지극히 평범한 대화가 오갔지만, 이 대화를 듣고 있는 하성우는 이 상황이 웃겼다.일부러 차우미의 관심을 받으려고 저런 대답을 하는 나상준이 웃겼다.'저 능구렁이 같은 게.'하성우가 앞에 앉아서 애써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차우미의 몸이 굳었다.하성우가 돌발 행동을 할 줄 몰랐던 차우미는 그대로 하성우에게 끌려 나상준의 이마에 손을 올려놓았다.손바닥으로 나상준의 온기가 전해졌다. 비바람처럼 갑자기 그녀의 피부로 전해와, 그녀의 혈관을 타고 몸속 깊숙이 뜨겁게 달궜다.빠르게 뛰는 심장에 차우미가 다급히 손을 뺐다. 기름에 덴 것처럼 다급히 손을 뺀 차우미는 옆으로 살짝 옮겨 앉았다.하성우가 여유롭게 자기 손을 거둬들였다.그는 아주 즐거워 보였다.둘이 스킨십하게 하기 위해 나상준 대신 자기가 나서기로 했다.하성우는 나상준이 만족스러워 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차우미를 잡아먹을 것 같은 눈빛으로 바라보기만 하는 나상준이 안타까워 하성우가 나선 것이다.건치를 드러내며 활짝 웃는 하성우다.하지만 하성우의 얼굴이 이내 굳어버렸다.차우미가 대뜸 나상준과 거리를 두고 앉아버리는 바람에 하성우가 여간 당황한 것이 아니다.'무슨 상황이야?'두 사람은 3년간 부부였다. 그런데 이마 하나를 만졌다고 저렇게 소스라치게 놀라는 차우미의 행동이 하성우는 되려 이상했다.하성우는 시선을 돌려 나상준과 차우미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차우미가 자신의 양손을 맞잡고 꼼작도 하지 않고 굳어버렸다.그녀의 얼굴과 귀가 눈에 띄게 붉어졌다.결혼한 여자가 보일만 한 반응이 아니다. 마치 학창시절 처음으로 남학생과 가벼운 스킨십을 한 여학생의 반응 같았다.하성우의 얼굴이 멍해졌다.'3년간, 도대체 뭘 한 거야?'평소의 하성우라면 분명 마음속 궁금증을 입 밖으로 내뱉었을 것이다.하지만 민감하게 반응하는 차우미 때문에 하성우는 차마 입 밖으로 꺼내지 못했다.두 사람을 쳐다보는 하성우의 머리가 복잡해졌다.세 사람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차안의 분위기가 급격히 고요해졌다.차 문에 기대앉은 차우미의 심장이 쿵쾅거리며 빠르게 뛰었다. 아까보다 훨씬 빠르게 뛰어댔다.그녀는 나상준과 하성우가 자기를 쳐다보고 있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러나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할지 몰랐다.잔뜩 긴
하성우도 덩달아 놀라 입을 크게 벌렸다.하성우의 눈빛이 흥분에 가득 찼다.그는 마치 티비 속 한 장면을 보는 것처럼 흥분된 얼굴로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잔뜩 긴장한 하성우가 숨을 죽이고 아무 소리도 내지 못했다.차우미는 멍해서 황급히 고개를 돌려 나상준을 쳐다보았다. 나상준이 그녀의 가느다란 손을 꼭 쥐었다.차우미의 가슴이 벌렁거렸다. 즉시 손을 빼려 했으나 그녀의 귓가로 나상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기사랑 같이 가."차우미는 둔감한 편에 속했다. 그녀의 반응은 하성우보다 훨씬 느렸다. 그러나 지금의 상황은 그녀가 받아들일 수 있는 범위를 완전히 초과했다. 나상준의 차분한 목소리에 차우미는 혼란스러운 기분에서 점차 빠져나올 수 있었다.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나상준이 뻗었던 손을 뺐다.나상준이 그녀를 놓아주었다.다만 그가 손을 놓는 순간, 손끝이 오므라드는 기분을 느낄 수 있었다.차우미는 가슴이 떨렸지만, 애써 자기가 착각했다며 마음을 진정했다.곧 운전기사가 차우미가 탄 휠체어를 밀고 약국으로 향했다. 하성우는 차우미가 시야에서 사라지고 나서야 고개를 돌려 뒤에 앉은 나상준을 쳐다보았다.나상준은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댄 채, 팔꿈치를 옆 팔걸이에 걸치고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그의 눈꺼풀이 늘어졌다.그가 천천히 눈을 감았다.얼마나 흘렀을까.이 모습을 지켜보던 하성우가 입을 열었다. "복잡해?""..."나상준은 대답이 없었다. 잠든 것처럼 움직이지 않았다.하지만 하성우는 나상준이 심란해하는 것을 눈치챌 수 있었다.그의 표정이 흥미롭게 변했다. 하성우의 입가에 웃음이 짙어졌다."솔직히 말해, 두 사람 아무것도 못 한 거지?"나상준의 눈꺼풀이 미묘하게 흔들렸지만 눈치챌 정도는 아니었다.하지만 하성우는 똑똑히 눈치챌 수 있었다.나상준의 작은 변화를 하성우는 느낄 수 있었다.나상준의 미묘한 변화에 하성우가 픽하고 웃음을 터트렸다.손으로 나상준을 툭툭 치면서 크게 웃었다. "하하하... 3년
하지만 나상준의 눈빛은 끈질기게 하성우를 쫓고 있었다. 마치 하성우를 끝을 알 수 없는 지옥으로 잡아 끄려는 듯 하성우만 쫓았다.하성우는 몸을 움츠리고 무표정한 얼굴로 자기를 주시하는 나상준을 바라보며 입을 꼭 다무는 수밖에 없었다.하지만 하성우는 고요함을 깨뜨리고 다시 깔깔 웃기 시작했다."안 되겠어, 네가 나연이 한테 전화를 하는 것보다 내가 웃음 참는 게 더 힘들어! 진짜 웃겨 죽겠다고! 하하하!"하성우는 차가 터질 듯이 웃기 시작했다. 그의 웃음소리가 차안을 가득 메웠다.나상준은 끝없이 웃어대는 하성우를 신경 쓰지 않고 창밖으로 시선을 돌려 버렸다.어두운 밤, 도시의 등불들이 우후죽순처럼 찬란하게 빛나고 있었다. 한밤의 불꽃처럼 화려하고 밝게 빛났다.나상준의 눈빛이 살짝 흔들렸다.3년 동안, 천 일이 넘는 시간을 낭비했다.차우미는 약국에 가서 감기약을 샀다.사람은 누구나 잔병치레를 하기 마련이다. 미리 약을 먹어 예방하거나, 초기에 약으로 금방 낫을 수 있었다.어쨌든 일찍 나아야 환자도 편하기 때문이다.운전기사가 차우미의 휠체어를 밀고 밖으로 나왔다. 그녀가 돌아왔을 땐, 차 안의 분위기가 확실히 전과 달랐다.차우미도 차에 올라타는 순간 느낄 수 있었다.차 안의 분위기가 한결 가벼워졌다. 그녀는 무의식적으로 하성우를 바라보았다. 하성우는 입이 찢어지게 웃고 있었다.재미난 일을 겪기라도 한 것처럼 유난히 들떠 보였다.차우미가 차에 오르자, 하성우가 물었다. "형수, 무슨 약 산 거야?"차우미가 그에게 약을 건네며 말했다. "해열제랑 알코올."하성우가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약을 꺼내 살펴보더니 나상준을 쳐다보았다."형수가 너 열나고 기침할까 봐 감기약 여러 종류로 사 왔네."나상준은 가볍게 대꾸했다.하성우는 나상준의 반응에 웃음이 터졌다.나상준을 보고 있으면 지루할 틈이 없었다."상준이가 형수 같은 사람 만나서 얼마나 부러운지!""이건 3대의 복이라고!"하성우가 노골적으로 나상준을 비웃었다.
두 사람은 동시에 나상준을 쳐다보았다.두 사람은 갑자기 입을 연 나상준 때문에 놀란 눈치다.특히 하성우는 너무 놀라 뭐라 표현해야 좋을지 몰랐다.'왜 저러는 거야?' 차우미의 걱정을 덜어주기 위해 저러는 것일지도 모른다고 여겼다.차우미가 걱정을 해주는 것을 누리지는 못할망정, 도리어 자기 발로 내차는 꼴이다.뜬금없이 바쁘다고 말하는 나상준이 이해되지 않았다.그러나 하성우의 머릿속에 한 줄기 빛이 스쳐 지났다. 그는 다시 빙그레 웃으며 나상준을 쳐다보았다.무슨 수작인지 몰라도 분명 다른 속셈이 있는 것이다.차우미는 하성우보다 좀 더 느리게 반응했다. 시선을 내리깐 차우미는 평소와 같은 표정을 되찾았다.나상준이 다른 일이 있어 저런다고 여겼다. 원래 일이 많고 바쁜 사람이다. 며칠간 그녀를 돌보느라고 회성 전역을 따라다녔다.응당해야 할 일이 따로 있는데도, 그녀 때문에 시간을 낭비한 것이다.다만...차우미는 나상준의 옷이 마른 것을 발견했다. 하지만 옷이 말랐다고 해서 몸의 한기가 빠져나간 것도 아니다. 돌아가서 따듯한 물에 샤워하면 훨씬 좋을 듯했다.차우미의 입술을 살짝 떨며 말했다. "많이 급해? 지금 바로 가야 하는 거야?"나상준에게 함께 돌아가자고 강요하는 것이 아니었다. 다만 급하지 않으면 씻고 나가는 게 좋을 것 같아 꺼낸 말이다.나상준이 차우미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급한 일이야."하성우가 고개를 숙이고 새어나오는 웃음을 참았다.차우미가 눈치를 챌까 봐 몸을 돌려 혼자 키득키득 웃고 있었다.'급하긴, 개뿔.'차우미의 눈이 실망감으로 가득 찼다.그녀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가서 할 일 해. 나 먼저 호텔로 돌아갈게."단호한 나상준의 태도에 차우미도 할 말이 없었다.너무 늦은 시간이 아니라 길가에 오가는 택시가 많았다. 나상준이 많이 급한 거면, 그녀 혼자 택시를 타고 돌아가면 되었다.차우미가 약을 가방에 챙겨 넣으며 말했다. "나 혼자 택시 타고 갈 수 있으니까 상준 씨 먼저 가."차